2026.08.03

은퇴 후에도 일하고 싶다면 ‘나’를 다시 읽어야 한다

입력 2026-08-03 06:00

일은 생계인 동시에 나의 정체성

▲이미지=생성형 AI 제작
▲이미지=생성형 AI 제작

은퇴 후 일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강점을 다시 읽고, 오늘의 노동시장에 맞게 연결해 두 번째 삶을 설계하는 과정이다.


은퇴를 앞뒀거나 회사를 나온 뒤 많은 사람의 고민은 비슷하다.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정년은 끝났지만 기대수명은 길어졌고, 의료비와 생활비 부담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매일 출근하던 일상이 사라진 뒤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다시 일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생계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사회와 연결되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먹는 것과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막상 새로운 일을 찾으려 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력서만으로 해결되는 시대도 아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것도 부담이 된다.

신수림 한국폴리텍대학 직업능력운영부 교수는 이러한 중장년을 “자신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던 세대”라고 칭했다. 가족을 부양하고 조직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느라 정작 자신의 강점과 가능성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교육을 결심한 교육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도 “이 나이에 다시 취업할 수 있을까요?”라고. 그는 이 질문에는 취업 가능성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앞으로 남은 10년, 20년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한 고민이 함께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재교육은 기술 하나를 더 배우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현재의 노동시장과 다시 연결하는 과정입니다.”


일은 생계인 동시에 나의 정체성

▲이미지=생성형 AI 제작
▲이미지=생성형 AI 제작

흔히 은퇴 후 일자리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경제적인 이유를 떠올린다. 국민연금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고,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소득이 필요한 기간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 교수가 현장에서 만난 중장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집에만 있으니 하루가 너무 길다’, ‘내가 사회에서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 할 수 있는데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이 말 속에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시 사회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은퇴 후 일자리를 “생계이면서 동시에 정체성”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정체성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매일 규칙적으로 나갈 곳이 있고, 맡은 역할이 있으며,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은퇴 후 일은 과거의 직함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다시 구성해가는 과정에 가깝다.


‘좋아하는 일’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

신 교수는 “지금의 중장년은 개인의 흥미나 적성보다 가족 부양과 조직의 필요, 사회적 기대를 우선하며 살아왔다”며 “자신을 모른다기보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하지만, “그동안 어떤 일을 오래 했는지”, “주변에서 어떤 일을 잘한다고 들었는지” 묻는 순간 의외로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간다.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돌아보고 정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신 교수는 교육생들에게도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조언보다 세 가지 질문을 먼저 던진다. 오래 해도 덜 지치는 일은 무엇인지, 주변 사람들이 자주 부탁했던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일을 직업으로 연결하려면 어떤 기술이 더 필요한지다. 그는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일,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다를 수 있다”며 “막연한 흥미보다 지속 가능성과 시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탐색을 위해 그가 권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력서 대신 ‘경험 목록표’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직장명이나 직급이 아니라 실제로 해낸 일, 다뤄본 도구, 해결했던 문제, 사람들과 협업한 방식, 반복해도 크게 힘들지 않았던 업무를 하나씩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다 보면 흩어져 있던 경력이 하나의 역량으로 연결되고, 새로운 직업으로 이어질 단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경력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는 일

▲이미지=생성형 AI 제작
▲이미지=생성형 AI 제작

많은 중장년이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극단을 오간다. 과거의 직무만 고집하거나, 반대로 그동안 쌓아온 경력을 모두 내려놓고 처음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신 교수는 두 방법 모두 현실적인 해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경력을 직무명이 아니라 기능으로 분해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제조업에서 오래 일했다면 단순히 ‘제조업 출신’이 아니라 생산관리, 품질관리, 설비 이해, 안전관리, 협력 업체와의 소통, 현장 개선 경험 등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직무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쌓은 역량은 다른 산업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실제로 통신·철도·배터리 관련 기업에서 30년간 연구개발과 품질관리를 담당했던 한 교육생은 폴리텍대학 중장년특화과정에서 전기 내선공사를 배운 뒤 전기 안전관리 분야로 재취업했다. 연구개발 경력을 그대로 이어간 것이 아니라 설비에 대한 이해와 품질관리 경험을 새로운 기술과 연결한 결과였다. 군무원으로 오랫동안 시설관리를 맡았던 또 다른 교육생 역시 에너지관리기능장 자격을 취득한 뒤 지방자치단체 시설관리 부서에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신 교수는 “과거의 강점을 기반으로, 현재의 흥미를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하며 “경력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더해 확장할 때, 은퇴 후 두 번째 일도 훨씬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어려운 것은 도전이 아니라 ‘첫걸음’

나이 들수록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두렵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신 교수는 이 두려움이 실제 능력보다 인식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중장년 교육생들은 학습 속도가 젊은 세대와 다를 수는 있지만 몰입도와 책임감, 현장 이해도는 매우 높아요. 두려움은 ‘내가 못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배워본 지 오래돼서 낯선 경우가 많죠.”

가장 큰 변화는 ‘해보는 경험’에서 나온다. 처음에는 ‘내가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던 교육생도 실습을 통해 손에 익고, 작은 결과물을 만들고, 동료에게 도움을 주는 경험을 하면서 자기 인식이 달라진다. 실제로 폴리텍대학 한 캠퍼스의 중장년과정에서 함께 공부한 교육생 15명이 나란히 산업안전산업기사 필기시험에 합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동료와 함께 준비하면서 완주한 이 경험을 계기로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무엇을 더 익히면 되겠다’는 관점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자기 탐색에 성공한 사람과 오랫동안 방황하는 사람의 결정적 차이를 “생각에 머무르느냐, 검증까지 가느냐”로 설명했다.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뒤 중장년과정에 입학한 62세 교육생이 있었습니다. 재학 중 전기기사·공조냉동기계기사·소방설비기사·승강기기능사까지 여러 자격을 차례로 취득했고, 아파트 시설담당과 전기공사 현장대리인, 전문 공무업체를 거치며 경험을 쌓아 지금은 국제학교 시설관리자로 일하고 있어요. 한 번에 정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자격 하나하나 현장 하나하나를 확인해가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새로운 일을 찾는 사람은 완벽한 확신이 있어서 첫발을 내딛는 것이 아니다. 작은 도전을 반복하며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간다.

신수림 교수는 “은퇴는 일을 끝내는 시간이 아니라, 내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는 시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지금, 은퇴 이후의 삶은 또 하나의 긴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붙잡는 것도, 무작정 새로운 길을 좇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은 삶의 자산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다시 연결하는 일이다.

도움말 신수림 한국폴리텍대학교 직업능력운영부 교수

서울대 농산업교육과 교육학(진로 및 직업교육)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NCDA 국제직업상담사 GCDF(Global Career Development Facilitator). 현재 한국폴리텍대학 서울강서캠퍼스 상담심리 교양교수이자 한국진로교육학회 학생현장진로연구위원장이다. 누군가의 (직업적) 성공을 이끌어내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여기며 진로 개발 및 직업교육 분야에 몸담아오고 있다.

이미지=AI 생성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최신 뉴스

  • [윤나래의 세대읽기] 저가 쇼핑에 지친 Z세대, 품질·AS를 따진다
    [윤나래의 세대읽기] 저가 쇼핑에 지친 Z세대, 품질·AS를 따진다
  • [요즘말 사전] 혹시 나도 ‘막나귀’?
    [요즘말 사전] 혹시 나도 ‘막나귀’?
  • 영어로 생각을 나누고, 영국의 예술을 듣는다
    영어로 생각을 나누고, 영국의 예술을 듣는다
  • 다시, 일하러 갑니다
    다시, 일하러 갑니다
  • [Trend&Bravo] 거절 못 하는 시니어가 끊어야 할 행동 5
    [Trend&Bravo] 거절 못 하는 시니어가 끊어야 할 행동 5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브라보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