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다.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외출하는 날은 하루가 당당하다. 그러나 자신만의 개성과 멋을 외면하고 유행만 따라 치장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가 될 수도 있다.
◇미용 법을 배우다.*
물론 미용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대학 시절부터 튄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유행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소박하게 연출을 해도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필자는 옷을 절대로 아무렇게나 입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색상과 자신에게 어울리는 조화로움을 그 우선으로 한다. 길거리나 혹은 백화점에 나가 눈에 띄는 옷이 있으면 그때마다 가급적 저렴한 것으로 구입을 한다. 단지 때와 장소에 따라 코디만 잘하면 멋지게 연출이 된다.
어쩌면 타고난 피부를 갖고 있는 것도 필자에게는 큰 행운이다. 예전에는 피부 좋은 여자로 불리기도 했다. 덕분에 우연히 미용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거금을 들여 전 미용법을 배우기도 했다. 수년 동안 피부미용 학원도 경영을 했다. 주위의 추천으로 시작된 모험이기도 했다. 더구나 틈새시장을 이용해 피부 보건학을 다시 공부했고, 피부미용 전임교수까지 지내왔다.
요즈음은 남자들도 화장을 하는 시대이다. 화장을 하면 모습이 훨씬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얼굴에 변화를 주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을 꾸미기 위한 첫 단계인 피부 관리와 화장법은 개성에 따라 자신을 과감하게 표출해주고 멋지게 만들어 준다.
◇액세서리의 이용
필자는 젊어서부터 머리에 숱이 없어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러나 색깔과 디자인을 자신에 맞게 보는 감각이 있었기에 멋지게 활용하는 액세서리의 이용을 최대한 좋아했다. 여러 가지 스카프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맞추거나 귀걸이 목걸이 등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화려하게 연출하기를 좋아한다.
필자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멋진 모자들이다. 계절에 맞는 모자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필자에게 모자가 잘 어울린다며 멋을 부리기 위해 일부러 쓴 줄로 알기도 한다. 모자의 첫 번째 장점은 머리를 만지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는 것이다.
필자는 머리가 숱이 적고 가늘어 모양을 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머리에 에센스를 바르고 대강 하나로 묶어놓고, 모자를 하나 집어 푹 쓰면 그야말로 딴 사람이 된다. 때로는 멋진 모델이 된듯한 착각도 일으켜 기분이 좋아진다. 젊은 시절에는 그 모습에 반해 뭇 남자들에게 시선을 받은 적도 더러 있었다. 남자들은 대체로 멋지고 화려해 보이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구두와 핸드백으로 마무리를*
발은 신체의 건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외출을 하면서 발이 불편하면 쉽사리 피곤해져 만사가 귀찮아진다. 구두는 제값을 주고 가급적 좋은 것으로 택한다. 필자는 색깔과 옷에 따라 신중하게 구두를 연출한다. 예전 같으면 색색으로 수많은 구두가 있었지만 지금은 몇 개의 색깔 계열로 나뉘어 있다. 어느 정도 옷과 어울리는 것으로 디자인과 색을 고려해 선택을 하면 그럴듯한 패션이 완성된다.
핸드백 또한 신경을 써서 구입을 한다. 모든 패션의 완성은 구두와 백이라는 말이 있다. 옷은 그야말로 3년이 수명이라면 구두와 백은 아주 오랫동안 소장이 가능하다. 외국에서는 대를 물리기도한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질 좋은 것으로 소장을 한다. 물론 손톱과 발톱. 네일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다. 다만, 업소에서의 가격이 만만치 않아, 홈쇼핑에서 구입을 해, 집에서 직접 자신이 손질을 한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고 먼,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 일은 부지런해야만 가능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필자도 머리가 희끗희끗하며 몸 무거운 시니어가 되었다. 높다란 뾰족구두보다는 건강을 생각해야 하는 납작 구두가 타이틀에 어울린다. 이제는 화려하기 보다는 중후하고 우아하다는 인사가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간이 되었다. 가장 멋진 것은 내면, 마음속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필자 사진 작품이 전시된다. 머니투데이 방송과 (사)은퇴연금협회가 주관하고 서울시와 서울50플러스재단이 후원하는 'The senior 2016'와 함께 열리는 '시니어만남전'에 초대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이라는 주제로 필자의 사진 작품 10점이 행사장에 전시된다. 수채화 풍의 사진 10점을 가로 세로 크기 13 x 10, 10 x 10 인치 정도의 사진을 넣어 MDF액자로 만들었다. 이 행사는 2016년 7월 25일 오후 1시 30분부터 4시까지 서울시청 8층 대형 다목적 홀에서 진행되며 사진, 그림, 시니어용품, 재활용품 전시 등의 관람은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리고 강연이 끝나는 시각부터 할 수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The senior 2016”은 선진국의 시니어 생활의 흐름을 알아보고 시니어 친화산업의 선진화 내용과 서울시 시니어 정책 및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50+세대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개최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축사와 최남수 머니투데이방송 사장의 인시말로 행사를 시작하게 된다. 경희대학교 정기택 교수의 “50+세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니어 친화산업의 선진화” 발제와 제품 분야와 서비스 분야의 선진 사례발표도 있습니다. 사례발표로는 50플러스코리안의 건강한 삶을 위한 고령친화제품, 서비스 분야에선 성균관 대학교 손정현 교수의에 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울러 서울 50+재단 홍선 실장의 “서울시 시니어 정책 및 제도” 등의 발제로 2시간 동안 열린다.
부대 행사로 시니어만남전이 곁들여지는데 후반생에 자아실현을 통하여 인생이막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는 시니어 사진작가 포토스토리텔러 변용도의 사진전, 갤럭시 화가 정병길의 디지털 그림전, 50플러스코리안의 시니어 관련용품과 렛츠의 업싸이클링(재활용) 용품이 전시된다. 현장에서 구매할 수도 있다. 이 행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당일 오후 1시부터 입장할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2호선 시청역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수채화 같은 사진을 선정하였다.
제주도에는 가끔 갔지만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못보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기어코 이번에는 백록담을 보고 오기로 하고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 듯,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아가는 세상에 늘 퍽퍽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군 시절의 동기인 3부부가 의기 투합하여 꽃향기가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제주도로 떠났다. 2박3일 중, 한라산 등반은 두 번 쨋날로 정했다.
상판악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한라산 등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속으로 빠졌들었는데…. 또드락 뚝딱! 또드락 뚝딱… 고요한 아침공기를 깨고 거실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눈을 번쩍 떠보니 창문너머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낙들의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걸쭉한 전복죽으로 영양을 보충하였는데, 각자가 한라산 등반을 대비하여 두세 그릇씩을 뚝딱 비워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은 태산이면서도 웬 먹을거리를 그리도 많이 준비하였는지?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회와 양념장류, 각종 나물류, 그리고 금세 지은 밥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에 물까지 챙겨 넣고 보니 배낭무게만 해도 어깨가 묵직하기 그지없었는데, 설상가상 무거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랴! 한창 젊은 시절에는 웬만한 고지는 단숨에 뛰어오르던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오르기 위해서 성판악코스를 택했는데 성판악코스는 편도 9.6km 이며 보통 걷는 시간만 4.5시간을 잡아 왕복 19.2km로 총 9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코스였다. 다행히 코스자체가 완만하다고 하여 한결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라산 등반길, 다행히도 비가 그친 산길에는 시원한 나무그늘과 신선함이 묻어났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게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울퉁불퉁 돌계단으로 이어져 걷기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일행 중, 최 박사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전 날부터 걱정을 했다. 한라산 등반을 하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집근처 야트막한 산을 연습 삼아 오르곤 했다는데 딱 2시간만 걸으면 무릎에 신호가 와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등반이 시작되자 제일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둘기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가끔은 까마귀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환영을 해주었는데, 일행과 뒤질세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낙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제주도 특유의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데 삼나무 숲을 지나니, 해발 1,140m에 위치한 속밭대피소가 나왔다. 세 부부가 조금씩 떨어져 오르고 있었으니 숨도 고를 겸 선두에서 오르던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1차 휴식!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재충전을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속박대피소에서 1차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중간 중간을 이어주는 데크… 그래도 싱그러운 숲내음과 선들 한 바람, 그리고 환영이라도 하 듯 울어주는 산새소리를 동무삼아 꾸역꾸역 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진달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반신반의 하면서 혹, 멋진 진달래꽃밭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이미 져버린 진달래꽃을 정말 볼 수 있을까?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능선에서 보았던 붉고 화려한 꽃잎을 상상하면서 오르다 보니 드디어 진달래 밭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달래 밭 대피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2차 휴식을 취했다.
데크에 다리를 쭉뻗고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최박사의 모습은 마치 몇날며칠 전투를 하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곤궁한 병사의 그 모습이라면 과장일까?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기운을 내서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선 길에서 저 멀리 옅은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스라이 구름에 닿은 길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이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60대의 시니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면 짙푸른 녹음이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 밑,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령(壽齡)을 짐작할 수 없는 주목(朱木)이 등산로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중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폐목(廢木)이 되어 고고하게 바람을 견디어 내는 주목도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가파른 등산로는 테크로 계속 이어졌고 물밀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 지척에 보인다.
아! 한라산 백록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미리 백록담에 도착한 필자는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곤한 몸을 이끌고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동료들을 일일이 환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증 샷을 위해 백록담 표지석 아래로 길게 줄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황급히 배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필자 일행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인증 샷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백록담을 보러 조금 위로 올라섰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천둥치듯 불어대는 가운데 백록담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역시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그 높이가 백두산 다음가는 산중의 산인가보다.
바로 밑 양지바른 테크에 배낭을 풀고 가져간 음식들을 꺼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인 삼합이 갈증 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고생담을 비롯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남자들은 모두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좀 나누어먹이자고 의견을 모으니 마님들께서는 먹던 음식을 어떻게 권하느냐고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언어구사가 무난한 최용호박사가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누고는 그를 우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해 온 우리들의 캡틴 海松 김금섭 대장의 사위가 미국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아이들도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 살고 있기에 혹여 마음이 더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그 외국인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스페인 청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주니 먹기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 녀석, 막걸리는 물론 돼지고기 수육을 된장에 꾹 찍어 잘도 먹어댔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던 마이클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데크에 벌렁 나가 자빠졌는데, 어찌하랴! 모두가 달려들어 털이 북슬북슬한 그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마구 주물러 주었더니 괜찮아 졌다고 하였다. 입식문화에 익숙한 그가 데크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음식을 먹다보니 쥐가 난 모양새다. 어쨌거나 밥과 반찬은 물론이고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여간 고마워하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하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인 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려이지만 참 잘한 일인 듯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우리가 낮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작은 관심과 배려의 차원에서 나눔은 역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스페인 청년을 보내고 나니 내려올 일이 꿈만같았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육십 고개를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가속을 붙일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라산 등반. 그 하산 길에서는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아침 여덟시에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동료들이 성판악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므로 써 장장 10시간 30분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언제 또다시 이 곳을 찾을까마는 명산중의 명산 제주도 한라산을 당당하게 정복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샘솟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멋진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젊은 시절은 돌아올 수 없으나 늘 긍정적인 사고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필자는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제주 가족여행이었다.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 보니 국내 안 가본 곳들을 가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필자의 학창 시절에는 제주는 수학여행지나 신혼여행 중심지이기도 했다. 환상의 꿈으로 가득했던 천혜의 보물섬이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건강과 힐링이 대세인 요즈음에 제주 이주 열풍은 폭발적이다. 힐링의 성지로 떠오른 제주로 남은 시니어 인생을 보내려 하는 분위기도 급기야 찬반을 묻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제주는 공기가 청정하고 투명한 바다로 둘러싸여 자연환경이 단연 우리나라 최고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상 세계인의 관광지 명소가 되어 이제 명실공히 국제적인 유산이 되었다. 제주는 올레길, 둘레길 등 미음완보를 실행할 수 있는 천혜의 도보여행 코스를 지니고 있다. 미음완보(微吟緩步),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천천히 보고 겪고 생각하며 걷는 것이다. 제주의 도보 여행은 복잡한 삶의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 휴식과 치유를 체험함으로써 제주의 매력을 보다 더 상승시켜 준다.
현재 다른 지역에서도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제주는 이미 즐거움과 치유의 걷는 도시로 확고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골목길인 올레길은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넓이로 제주인의 삶의 방식이 녹아 있고, 사람이 주체가 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도로 개설과 확장으로 자동차가 통행의 주체가 되고, 사람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이제 몇 년 사이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으로 제주공항은 온종일 북새통이다. 약 200㎞의 일주 해안선은 이미 숙박업체들의 난장판이 되었고, 중국 고객을 상대로 한 부동산 개발로 하루가 바쁘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 서서히 전통적인 제주도 흔적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외국의 낯선 붐 타운을 연상시킨다. 부동산 투자에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 아니고는 외지인이든 토박이든 온통 혼란스럽고 불편하기만 하다.
조용하고 아름답기만 했던 섬의 분위기가 전혀 동떨어진 이상과열 현상에 날개를 치고 있다. 전통적 삶에 안주해오던 제주도 토박이 주민들도 이러한 현상이 사회 경제적 압박 요인으로 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제주로 이주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일 까. 나름대로 저마다의 사연은 있겠지만 결코 진정한 삶의 해답은 아닐 것이다. 답답한 도시를 떠나고 싶고, 여행을 하다 보니 라는 다양한 이유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부럽기에 앞서 안타까움마저 들기도 한다.
더구나 이주 이유 중 가장 많은 선호도가 연예인처럼 세컨 하우스를 짓고 올레 길 주변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 이러한 꿈 같은 이유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책 없이 제주 이주를 꿈꾸게 하고 있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도 포화상태고 낭패를 본 이주자들 그들을 일컬어 “눈먼 외지인”이라고 까지 하며 그들 또한 엄청 많다고 한다. 이웃들이 너나 없이 간다고 해서 무작정 특별한 목적과 철저한 계획 없이 따라 하는 행위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그 첫 번째 반대이유가 된다.
바람도 많고 비도 많은 제주는 섬이라는 특성이 있다. 제주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 지역마다 생활방식이나 환경차이가 크다고 한다. 사투리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고 주민들의 성향도 각각 다르다고 했다. 더구나 바람과 습기의 영향으로 거주의 쾌적함은 많이 떨어 진다고 한다. 잘 지어진 멋들어진 이층집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속안으로 들여다 보면 부딪쳐 겪어야 할 많은 삶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 한국은 주거이동으로 지역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치를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꼭 이주를 해야만 하는가? 왜 제주도 이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제주의 이주자들은 보다 나은 인생을 즐기며, 자연 속에 단순하고 느린 삶의 근사함으로 과연 무엇을 얻을 것 인가. 때가 되면 연어라는 물고기도 고향으로 돌아가 알을 낳듯이, 사람들의 삶은 더 편리하고 화려했지만 어디에서도 인간은 진정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쉽게 내 고향을 등지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제주도 시골 아줌마들도 90년대 강남 식 재테크에 몰려든 강남 아줌마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가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시장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확실하다. 지역 정치 지도자들의 눈에 부동산가격 상승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지역발전은 부동산 붐을 유발할 수밖에 없고 주민들에게는 지역의 가치 상승효과를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크게 본다면 우리나라 제주도의 가치는 이 섬의 고유성과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박이는 물론, 제주로의 꿈을 갖는 외지인과 외국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이제 내려 놓아야 할 시니어의 삶들이 미래의 불확실성과 맞물려 돌아가고 순진했던 해녀들이 무분별한 투기에 관심을 쏟는다면 아름답던 섬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마지막 제주 이주 반대이유이다.
제주 남쪽바닷가에 사는 멋쟁이 한 사람은 말한다. 그는 제주이주가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왔던 모든 이력서를 버리고 과감하게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러나 제주도에서 사는 것을 부디 2박3일 단순여행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걷고 마시고 느끼고 얼마든지 우리나라 청정지역, 미음완보로 갈 곳은 여기저기 많이 널려있다.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밥만 해 먹는 여자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폐업 하고나서 꼭, 10년! 집에서 밥만 해먹고 사회활동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밥만 해 먹으면서 가정 살림만 한다고 하면 누구든지 한심하게 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회활동을 해야만 훌륭하고 대단하게 여겨 주는 것이 요즘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집에만 있다. 그렇다고 살림살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빛이 나게 하며 살아가는 주부도 아니고, 요리솜씨가 뛰어나 특별하게 내세울 나만의 ‘필살기 메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살림도 대충하고, 청소도 대충하면서도, 남들처럼 취미하나도 계발하지 못하고 무취미로 살아가는 ‘게으른 은둔자’다.
게으른 은둔자
사람들은 동호회다, 친목계다, 동창회다 해서, 갖가지 모임을 만들어 가며 사람들을 사귀고, 만난다. 그러나 필자는 집에만 있어도 세상 편하고 좋다. 밖에 나가는 일은 꼭 필요 할 때만 나간다. 병원갈 때, 은행이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을 때, 가끔 언니들이나 지인을 만날 때, 교회에 갈 때, 그리고 대부분 반찬거리 사러 대형마트에 갈 때뿐이다. 집에 화수분이라도 하나 있어서 반찬거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외출 할일도 없을 터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화수분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주 1회 정도, 반찬거리 사러 할 수 없이,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형마트엘 간다. 사람 많은 곳에서 휘둘리다가 오면, 너무 피곤해 초주검이 되곤 한다.
집에만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필자에게 묻는 말은 하나같이 ‘심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하루 24시간이 항상 모자란다. 재미있는 영화보기, 다양한 프로의 TV시청,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책들을 읽기에 하루는 너무나 짧다. 그러니 살림을 대충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책이 더 좋고, 영화나 TV가 더 재미있다. 이렇게 은둔자가 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답답해하는데, 이런 은둔을 반기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필자에게 마음 놓고 밥을 시켜 먹으려는 사람, 바로 남편이다.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하루는, 오전에 야쿠르트 영업사원이 우리 집의 벨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가니 깜짝 놀란다. 벨을 눌렀기에 나간 것뿐인데 왜 필자를 보고 놀라는 것인지 물어 보았다. “이 시간에 집에 계시네요?” 마치 신기한 뭔가를 보듯 한다.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내가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야쿠르트 판매사원이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은 이 시간엔 집집마다 주부들이 나가고 집에 없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 나가든지, 취미활동을 하러 나가든지, 다들 나가고 없는데, 그런데 집에 계신 분도 있네요” 그녀는 집에 있는 필자가 마냥 신기한가보다. 마치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듯이 그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이상한가?’ 하긴 요즘은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혼자서만 한없이 늘어져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하긴 했으니까,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 까지는 아니라도, 당당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에 필자는 은근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든다.
경제활동을 꿈꾸며
며칠을 두고 은둔생활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가 더 많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어서 털고 일어나 경제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인들은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증을 묵혀 두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다시 개설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부동산 중개업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많이 걸어 다녀야 하고, 누군가 에게는 전 재산일 수도 있는, 고객의 큰 재산이 오가는 일을 해야 하므로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직업이지, 시니어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절대 아니다. 또, 멀지 않아 대기업과 외국기업들이 부동산 법인을 만들어서 부동산 중개업시장에 진입하는 날이 다가 올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부동산중개업의 경기가 좋지 않을 때이고 보니, 더더욱 사무소 개업은 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인터넷에 들어가 ‘서울시일자리플러스센터’에 구직 신청을 했다.
취업교육을 받다
하루는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취업교육을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취업교육을 받으러 가보니까, 여러 가지 교육이 다양하게 있어서 그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들꽃 가드닝 교육, 동년배 상담가 교육, 도슨트 교육, 취업설계아카데미 교육등 그 외에도 다수의 교육을 더 받았다. 교육을 받고나서 그걸로 취업을 해보려고, 내게 맞을 것 같은 교육만 골라서 받았다. 그러다보니, 1년이 어느새 꿈결같이 흘러갔다.
취업을 못해 크게 실망
교육을 받고나면, 처음에 내가 그 교육을 선택 했을 때와는 결과가 달랐다. 필자가 직업으로 가지기에는 힘들고, 자신도 없고, 취업할 분야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실망도 많이 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교육 받을 때, 강사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이 재미있어야 싫증 내지 않고 오랫동안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잘 할 수 있을지 꼭 취미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나는 맞는 취미를 못 찾아서 지금까지도 취미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업도 어려운가보다. 취업을 포기할까? 아니면 진로를 바꿔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진로를 ‘상담’ 쪽으로 바꾸어 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적성 진로검사를 받다
센터에는 그만 다니려고 상담분야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였는데, 센터 강사님이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받아 볼 것을 적극 권유 하셨다. 뿌리칠 수가 없어서 이번 교육만 한 번 더 받아보고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았다.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은 직업상담 분야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서 ‘진로검사’도 받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상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어서 결과가 상담관련분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술적, 진취적, 탐구적’ 뭐 이런 단어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상담분야로 전환 하려던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갑자기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졌다. 지금 까지는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온 사람인데, 예술이 왜 별안간 튀어 나오느냐 말이다. 상실감에 허탈해하는 이 모습을 본 담당 복지사가 ‘본인이 좋아하는 교육만 받지 말고, 관심 없는 분야도 골고루 받아 보면, 의외로, 관심 없던 분야에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도 있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복지사의 조언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을 골고루 다 받아 보기로 결심 했다.
방송인 교육을 받으며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마치고 났을 때, 마침 ‘방송인교육’의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복지사의 조언대로 평소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방송인교육’을 신청했다. 방송인 교육은 시니어 연기자, 모델, 리포터와 같은 방송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직 교육이다. 연기엔 관심 없지만,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방송기사작성과 리포터교육은 글쓰기가 있어서 받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리포터교육을 받으면서, 자기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을 때와 리포터 기사작성을 했을 때 두 번 모두 강사에게 칭찬을 들었다. 고칠 것이 하나도 없고, 지금 바로 현장에 가서 리포터를 해도 되겠다고 했다. 큰 박수도 두 번이나 받았다. 도슨트 교육과 시니어 기자교육을 받을 때도 같은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 번 강사들에게 칭찬을 듣고 보니, 교육생들 사이엔 필자가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났다.
시니어 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기자가 되다
시니어기자교육이 끝날 무렵에, 마침 경제신문 ‘이투데이’에서 만들고 있는 시니어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시니어기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 모집광고를 보고, 필자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여기서부터 시니어의 새 삶을 시작해야지!” 필자는 그 길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시니어기자 지원서를 냈다. 운이 좋게도 합격되어서, ‘기자’가 되는 어릴 적 꿈은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기자인 ‘동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로 삶을 꽃 피우리라!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보니, 소문 난대로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글쓰기를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또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문예반은 아니지만, 방과 후에 집에서 원고지를 묶어놓고, 혼자서 취미로 틈틈이 시를 썼다. 그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뽑혀서 대학교 백일장에 나가 장려상도 탔다. 상을 타고 보니, 시인이 되어서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건 언니들이 보던 여성월간지를 보고서 부터였다. 시인인데,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러 다니는 걸 읽어본 후로는 필자도 ‘시인이면서, 기자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했다. 그 티끌만한 작은 경험을 움켜지고,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시인이 되지 못하면 어떤가! 글쓰기를 하는 순간들이 행복한 날들이 될 것이고, 필자의 남은 삶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것이다. 이 화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25%로 인하했다. 부진한 경제성장률과 취약업종 구조조정에 따른 경기 둔화를 우려해 선제로 금리 인하 카드를 빼 들었다고 언론에서 발표했다. 금리를 인하하면 뭉칫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몰리면서 경기가 되살아나고, 돈들이 공장을 돌리고 데 사용되며, 가계는 소비를 늘려 돈이 제대로 돌아 ‘돈맥 경화’가 해소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덧붙였다. 필자도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금리 인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1220조에 달하는 가계부채 확대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고도 한다. 금리가 낮아지면 또다시 집주인들은 월세로 전환하거나 전세금을 올린다. 집 없는 서민은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거나 외곽지역으로 내몰려야 한다, 금리는 낮아졌으나 전세금을 올리면 대출을 그만큼 더 받아야 하므로 나가는 이자는 같아진다.
은퇴하고 은행 이자로 생활해오던 나이 많은 시니어들의 한숨 소리가 깊어진다. 필자의 경우 퇴직금을 고스란히 은행에 정기예금을 해 뒀다. 수익형 부동산을 사서 운영해보라거나 펀드나 주식에 투자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나이 들어 재산을 불리기보다 지키는 것이 최고라는 어느 전문가의 말을 따랐다. 마음 편히 적게 벌고 적게 쓰겠다는 생각에 은행만 고집했다. 그러나 은행 금리가 계속 곤두박질하더니 이제는 처음 받던 이자에 비하면 반 토막이 되었다. 1억 원을 넣어도 월 20만 원이 못 된다. 그나마 이제 이 금액도 ‘아! 옛날이여’가 되었고 더 줄어들게 생겼다.
지금은 저축의 시대가 아니고 투자의 시대라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날고 긴다는 투자 전문가들도 뾰족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베테랑이 운영하는 증권회사 펀드도 수익을 못 내는 종목이 수두룩하다, 잘 나가는 기업들도 이익금을 현금보유로 쌓아놓고만 있지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 기업이 쌓아놓은 돈을 쓰도록 세금을 물리겠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투자가 두렵고 겁나는 시대다.
이런 판에 경험 없는 노인들이 투자할 곳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사람의 심리가 수명이 길어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면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소비를 늘리고 저축을 줄이기 어렵다. 금리 인하정책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지 의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줄어드는 이자 수입만큼 소비를 줄이려고 한다. 가진 목돈을 헐어서 쓰기보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통을 감수한다.
이익을 못 내는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 전망이 어둡고 망해야 할 기업을 우물쭈물 이자를 낮춰 계속 살려서 끌고 가면 지금 호미로 막을 일을 나중 가래로 막아야 한다. 오래되어 열매를 제대로 못 맺는 과일나무는 베어내고 새로운 묘목을 심어야 한다. 과거 전성기 때의 과일 수확만 생각하면 바보다.
노인들이 돈을 움켜만 있지 말고 쓸 수 있도록 노후복지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 월 300만 원을 훌쩍 넘는 고급 요양원보다 더욱 저렴한 공공 요양원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금리 인하로 불안해하는 노인들이 돈을 쓰도록 믿음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줘야 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의 주된 원인이 가난이다. 독거노인의 45%가 극 빈곤층이다. 노인이 한번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자력으로 올라가기 어렵다. 극빈층으로 떨어지기 전에 막아 줘야 하는데 안전판이 너무 미약하다.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야 도와주는 지금의 사회안전망은 비효율적이다. 금리 인하가 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검토라도 해보길 희망한다.
미래연구소 통계조사 결과에 의하면 행복한 노후생활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시니어들이 첫 번째로 건강을 꼽았다. 두 번째로는 남자는 부인을 꼽았지만 여자는 돈을 선택했다. 두 번째에서 남녀 사이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부동의 1위인 건강은 모두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건강은 돈이지만 돈은 건강이 아니다. 젊었을 때는 건강을 담보로 몸을 혹사하면서 돈을 번다. 나이 들어 그렇게 번 돈으로 건강을 다시 사려고 병원을 순례하고 몸에 좋다는 이것저것을 먹어보나 원래대로 몸의 건강을 되돌리지도 못한다. 즉 돈으로 100% 완벽한 건강을 살 수는 없다. 수학의 등식이 건강에는 통하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의하면 고령화 사회로 노인의 인구가 증가하면 할수록 고령자가 사용하는 의료비가 늘어난다고 한다, 노인들이 사는 집에 가면 이곳저곳에 약 봉투가 가득하다, 약국을 나서는 노인들의 손에는 시장바구니 든 것처럼 두툼한 약 봉투를 들려 있다. 그렇게 많이 먹은 약으로 반짝하고 건강이 회복되면 좋으련만 실제는 약의 효과를 의심할 만큼 차도가 별로 없다. 한번 나빠진 건강은 회복이 어렵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젊은이들보다 회복이 더디거나 약의 효과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돈으로 건강을 사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건강하면 각종 의료비가 절감되므로 결국 건강은 돈이다. 의료보험 제도가 선진국인 미국보다 앞선다는 한국도 65세 이상 고령자가 중증 질환에 걸리면 모아둔 전 재산 날아가는 건 예사다. 자기 재산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친척의 돈까지 끌어다 쓰다가 끝이 좋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병원비로 돈만 들어가는 부모를 좋아할 리가 없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하늘에서 돈 보따리가 떨어질 리가 없는 것처럼 건강도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을 지키는 세 가지 요체는 편안한 마음과 적절한 운동에다 섭생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요즘은 건강정보도 넘쳐 나는 세상이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하지 못 하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다. 평소 맑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건강할 때는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몸이 늙어가는 퇴직 무렵이면 제일 먼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이 건강이다.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가계부를 쓰고 저축한다면 돈이 불어나는 것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건강은 잘 모른다. 건강에 무관심하다가 덜컥 몸에 고장이 생겼을 때 그때 가서 후회한다. 예전부터 흔히 듣는 말로 ‘그렇게 고생해서 이제 밥술이나 먹으려니 큰 병이 왔다’는 말이 있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돈을 지키기 위해 세무사, 보험설계사, 자산운용전문가에게 도움을 받듯이 자기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건강 관련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시니어라면 가까운 보건소 건강센터를 강력히 추천한다. 보건소는 이제 예방주사나 놓아주고 거리 방역이나 하는 곳이 아니다. 의사는 물론이고 간호사, 영양사, 운동처방사들이 개인별 맞춤 처방을 통해 건강증진에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대사증후군도 측정해주고 비만도 검사와 체성분 분석, 신체균형발달도 최신 장비로 검사해준다. 나아가 운동능력 테스트를 통해 신체 부위별 근력, 지구력, 순발력을 알아본 뒤 적절한 운동 종목도 알려준다.
필자의 경우 스스로 운동도 많이 하고 건강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병원 정기검진을 받아보니 지방간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깜짝 놀라 보건소에 가서 상담을 받으면서 나이에 비해 과식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이 먹고 많이 운동하는 것이 나이 들면 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운동량을 늘리기보다 섭생을 줄여야 했다.
건강의 최대 적인 스트레스를 줄이는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서는 남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니어라면 이루지 못하는 꿈도 있다는 것을 알고 포기할 때는 포기해야 한다. 인문학 강좌를 들으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게 좋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이유도 없다.
점프를 한다고? 그것도 자전거로? 얼핏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장면이 연상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얘기다. 자전거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서울 외곽으로 나간 후, 역에서 내려 라이딩을 하며 자연을 즐기거나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는 문화를 동호인들 사이에선 ‘점프’라고 부른다. 이 점프를 즐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동호인들 사이에서 점프 문화가 확산된 것은 관련 인프라의 발달이 계기가 됐다.
첫 번째는 자전거 전용도로의 확충이다. 서울만 놓고 보면 경인 아라뱃길을 따라 조성된 아라 자전거길에서, 여주를 지나 충주까지 연결된 남한강 자전거길까지 동서남북으로 자전거를 탈 만한 곳이 늘었다.
두 번째는 자전거에 인색했던 기존 대중교통의 변화다. 최근에는 자전거와 연계해 이동하는 승객들을 위해 정확한 규칙이 정해지고, 자전거를 위한 공간까지 마련되면서 승객과 불필요한 마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 지하철의 경우 1~8호선은 평일에는 자전거 반입은 금지하지만, 주말에는 가능하다. 대신 외곽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경원선, 경춘선, 중앙선은 평일에도 자전거와 함께 탑승할 수 있다. 단, 출퇴근시간대인 오전 7시~10시, 오후 5시~8시는 출입이 제한되어 이 시간은 피해야 하고, 맨 앞 혹은 맨 뒤 칸에 승차해야 한다. 용산에서 춘천을 잇는 ITX-청춘열차는 자전거 전용 탑승 칸이 마련되어 있어 늘 탈 수 있지만, 주말에는 좌석을 예매해야 한다. 신분당선과 9호선은 자전거 탑승이 아직 금지되어 있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 규칙을 피해 탑승하는 방법은 접이식 자전거, 즉 미니벨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미니벨로는 접어서 휴대한다면 평일에도 지하철 이용이 가능하다.
자전거 없으면 대여도 쉬워
만약 자전거가 없다면? 대여소를 통한 점프도 방법이다. 동호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은 남한강 길의 중심 팔당역이다. 역 주변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많으므로 양평 방향으로 나 있는 남한강 자전거길을 손쉽게 달릴 수 있다.
동호인들에게 최근 점프가 사랑받는 이유는 자전거로는 접근이 어려운 먼 곳까지 가서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한강이나 자전거 도로 주변에 자리 잡은 ‘맛집’이나 관광지 탐방과 같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예 자전거 동호인들을 위한 ‘바이크 카페’가 곳곳에 생겨 자전거의 주차를 돕거나 할인 등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전거 선택은 다양한 요소 고려해야
나만의 자전거를 장만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자신의 체력과 경제력, 이용목적, 주변 지인이나 활동하려는 동호회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조언한다. 자전거 매장 ‘싸이클러스’의 신동환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자전거를 선택할 때 현명한 길은 다양한 자전거를 직접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내게 맞는 자전거를 찾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동호회나 전문가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누구와 즐길 것인가가 중요한데, 함께 타는 분들과 비슷한 유형의 자전거를 선택해야 뒤처지지 않는 등 곤란을 겪지 않습니다.”
과거 동호인들 사이에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산악용 MTB가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전거 전용도로의 확충으로 흙 밟을 일이 없어지자, 사이클로 불리는 로드바이크의 보급이 늘고 있다. 여기에 보관이나 대중교통 탑승이 간편한 접이식 미니벨로들도 다양한 옵션을 갖추면서 장거리 여행도 가능해져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자전거 가격은 무게가 좌지우지
자전거 가격은 프레임에서 결정된다. 자전거 프레임은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는데, 가장 저렴한 철에서부터 알루미늄, 카본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티타늄이나 나무, 플라스틱 재질의 제품도 나온다. 흔히 ‘신문 자전거’로 불리는 저가형 자전거는 13kg 이상이 대부분이고, 100만원 전후의 알루미늄 제품은 10kg 내외, 150만원 이상의 카본 제품은 8kg 내외다. 1000만원대 티타늄 제품은 5kg대 제품도 있다.
자전거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몸에 맞는’ 제품을 찾는 것이라고 다혼숍 현기호 대표는 설명한다.
“타이어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구성하는 프레임에도 체형에 따라 S, M, L 혹은 47, 49, 52 등으로 사이즈가 나뉩니다. 본인 체형에 맞는 자전거를 찾아 핸들의 위치, 안장의 높이와 각도 등을 내 몸에 맞게 정확히 맞추는 피팅 과정을 거쳐야 부상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체력이 부족한 시니어들은 승차가 편하고 운전이 쉬운 미니벨로로 먼저 감을 익히는 것도 좋습니다.”
필자는 해외여행이 자유화하기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치열하게 먹고 사는 것만도 버거워 여행은 오직 꿈으로 고이고이 접어 품고, 여유 생기면, 시간 나면 하면서 미루고 또 미루며 살아왔다. 이제 막상 약간의 여유가 생기고 고이 접어 두었던 여행의 꿈을 펼치려 하니 두렵고 훌쩍 떠난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시니어들이 단체 패키지 여행상품을 이용하여 잘 짜인 일정대로 가이드를 따라다니거나, 가족 중 젊은이에게 여행의 처음과 끝 모든 걸 다 맡기고 편하게 따라만 다니기만 하는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어도 못하고, 길눈까지 어둡고, 겁 많고 소심한 성격까지 혼자 여행하기엔 최악의 조건인 필자는 손안에 세상 스마트폰 안에 여행 관련 앱 들을 다운 받아 따로 모으며 배짱 좋게 10일간의 발칸 지역 자유여행을 결행하였다.
제일 먼저 여러 블로그와 배낭여행 카페 등에서 여행에 정보를 구하여 그 내용을 폰에 바로바로 저장하고, 일정이 정해진 대로 항공권 가격 비교 앱을 통하여 원하는 날짜의 항공권을 예약하는 거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그 다음 숙소 예약하기. 나는 여행할 때 고급스런 호텔에 묵기 보다는 레지던스 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며 다른 여행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나라 시장이나 마트에서 구입한 재료로 음식도 해서 때론 나눠 먹기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 TV 광고에도 많이 나오는 호텔 부킹 앱을 이용해 이런 취향을 조건에 다 넣어서 레지던스 위주로 예약을 해 두었다.
이 탁월한 선택으로 발칸지역의 시골 가정집 같은 레지던스에 묵으며 친절한 주인이 직접 구운 쿠키와 케이크도 얻어먹고 와인도 함께 마시며 따뜻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아침 저녁으로는 유럽의 시골 마을의 뜰과 마을을 산책하면서 늘 꿈꿔왔던 내 스타일을 제대로 취향 저격한 여행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모든 여행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카톡으로 걱정하는 가족에게 안부도 전하고, 사진과 화상 통화로 여행을 생중계 하며 다녔고 저녁에 숙소에서 하루 일정을 마치고는 그날의 여행 이야기를 정리하여 SNS 올림으로서 친구들과 여행의 느낌을 공유하고 여행 기록도 남기며 하루하루를 마감하였다.
자유여행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언어, 영어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도 번역 앱을 잘 이용하면 외국인 친구와 유창하게 영어로 소통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고 급하면 번역된 내용의 핸드폰을 상대에게 보여 주면 상대도 이 스마트한 소통방법에 즐겁게 응대해 준다.
외국에서 한국말로 길 안내를 받는 것을 상상해 보라. 구글의 지도 앱을 다운 받아서 여행 떠나기 전 미리 주요 도시 볼거리 장소와 예약된 숙소를 즐겨 찾기로 지정해 두고, 네비게이션 기능을 작동시키면 오른쪽으로 가시오, 왼쪽으로 가시오. 하는 지시를 한국말로 받으면서 길을 찾을 때의 기분이란 신기하기도 하고 신통하기도 하면서 이 편해진 여행 환경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스마트폰 하나에 유용한 앱 들만 잘 다운 받아서 활용해도 특별히 문제없이 가이드의 도움 없이도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나만의 자유로운 해외여행도 거뜬히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자~ 내 손안에 가이드를 믿고 첫 발의 두려움을 버리고 스마트하게 자유롭게 한 발 내딛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