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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 치매 어머니와 사는 남자
- 우리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치매 판정을 받는다면? 아무리 효자라도 악몽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7년 동안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산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치매로 말미암아 가족 모두를 변화시킨 어머니도 있다.그 사연은 무엇일까? “아빠는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책 읽고 일하면 중간에 허리도 좀 펴고, 스트레칭도 좀 하지 지금 죽으려고 작심한 거야?” 일주일에 20권의 책을 읽고, 수도 없이 많은 원고를 쓰며 책상 앞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한 소장에게 그의 딸이 언성을 높인다. 딸에게 30분 정도 호되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귀엽다는 듯이 아이를 쳐다본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저럴까?’ 방에서 소란이 일자 다른 방에 있던 한 소장의 어머니 박외조씨가 지팡이를 짚고 그 광경을 지켜본다. 치매로 인해 이성을 잃을뻔했지만 손녀에게 역정을 내지도 않고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30분 정도가 지나 소란이 잠잠해지자, 슬그머니 한 소장의 옆으로 다가온 어머니가 한마디 한다. “네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사실 일과 어머니를 한꺼번에 돌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모시기로 결심한 초기에는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 그가 집에 없는 시간에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했다. 처음 2년은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교감을 잘하는 아주머니가 많은 도움을 줬지만, 그녀가 관두고 난 뒤에는 모두 못 버티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한 소장은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라고. 그러고는 결심했다. 단둘이 지내보기로 말이다. 그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몇 개월 지내며 어머니가 파악되면, 어머니 성격에 맞는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를 모시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7년동안 어머니를 모시며 새로운 깨달음과 영향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몰랐던, 아니 알면서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지나쳤을 수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한 소장 자신의 인생에 더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찌개를 끓이는 남자 한 소장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홀로 된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동생들은 아우성이었다. 퇴행성관절염 수술을 위해 병원에서 한 달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을 보낸 어머니는 온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안부 전화를 얼마 전에 받아 놓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매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무턱대고 병원 신세를 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 소장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책임지기로 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한 소장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어머니를 위해 찌개를 끓인다. 아침에 끓인 찌개가 남아 있어도 저녁에는 새로운 메뉴를 요리한다는 것이 그만의 철칙.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에게 유일한 낙은 자는 것과 먹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을 해결해드리는 일인데, 그것을 잘할 수 없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한 소장은 요리를 하면서 어머니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소한 어머니의 음식 취향조차 말이다. 이러한 고민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도움이라고 해봐야 치매 어머니에게 해 드릴 만한 음식 레시피를 공유해주는 것 정도였지만, 요리에 서툴렀던 한 소장에게는 천금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번은 블로그 이웃이 추천해 준 레시피로 치아가 좋지 않아 고생을 하는 어머니께 갈치찜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기껏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두어 젓가락을 들고는 이내 내려놓았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지만 어머니에게는 표현을 할 수 없는 노릇. 예전에 어머니를 모셨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어머니가 갈치를 못 드신다는 것을요. 어머니가 천막 공장에서 일하셨을 때 한여름에 상한 갈치를 드시고는 크게 고생한 적이 있으셔서 그 이후로는 못 드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소한 것조차 몰랐던 것이죠.” ◇침묵의 어머니 “어머니는 저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걸 싫어하시고, 하루 종일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말이에요. 한번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후 내내 잠만 잤다는 걸 알아채서 어머니에게 왜 말 안 했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내 걱정 할까 봐.’” 올해 83세인 어머니는 늘 그랬다.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고,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해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6남매를 키웠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연민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환갑이 지나서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으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칠순이 지날 때까지 일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한 소장은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음식을 해드리는 것 빼고는 어머니가 나를 보호하는 건지, 내가 어머니를 모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어머니는 침묵으로 올바른 인간관계를 알려주신 스승님입니다. 치매로 정신이 없으시다가도 제가 잠을 자면 열이 많은 것을 알고, 창문을 살짝 열어주시고 가시곤 하죠. 이 나이가 돼서야 그 사소한 것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치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결혼을 한 뒤에 일에 빠져 있었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여자도 사람도 말이죠.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 사랑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한씨에게 전기밥솥과 세탁기를 조작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일터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고도,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에 또 다시 일을 하는 아들에게 부담을 주는 느낌이었을 게다. 그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어머니의 그 말과 행동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얘기한다. 어린 시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배려했던 모습들 말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행하는 모성애는 치매에서 회복되는 모습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자 한 소장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때는 배려라는 감정을 잊고 살았다. 아내와의 결별도 그때 즈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는 배려와 공감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각을 해보니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뽀뽀하고, 안아드렸어요. 어머니도 처음에는 어색해하시다가 지금은 익숙해지셨나 봅니다.” ◇치매로 뭉친 가족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요? 우리 가족들의 우애예요.” 처음에는 침대 하나만 있으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불철주야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현실과의 싸움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소장은 그런 어려움을 동생들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6남매의 장남으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느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어머니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일기처럼 써놓곤 했죠.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담은 책을 내니 동생들이 많이 반성하더라고요.” 한 소장의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고, 6월에는 는 책이 나오자 남매들에게 변화의 미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남들도 책을 보고 나서 눈물을 쏟아낸다는데, 누구보다 한씨의 사정을 잘 아는 동생들이 장남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동생들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뵙는 횟수가 이전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무엇보다 형제간에 좋지 않았던 감정과 오해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 더 큰 소득이었다. “책 팔아서 받는 인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진 것이 더 감사하죠. 이게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남기시려는 선물이 아닌가 싶어요.” 한 소장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동생들이 그럽니다.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요. 그래요. 어머니!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연애하면서 잘 삽시다. (웃음)”
- 2015-11-05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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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손인숙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 실로 그려 나가는 실그림 인생
-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
- 2015-10-0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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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 “달자야, 네는 꼭 될 끼다”
- ‘일생 단 한 번/ 내게 주신 편지 한 장/ 삐뚤빼뚤한 글씨로/ 삐뚤빼뚤 살지 말라고/ 삐뚤빼뚤한 못으로/ 내 가슴을 박으셨다/ 이미 삐뚤빼뚤한 길로/ 들어선/ 이 딸의/ 삐뚤빼뚤한 인생을/ 어머니/ 제 죽음으로나 지울 수 있을까요.’ 신달자의 시 다. 신달자 시인의 어머니 故 김복련씨가 남긴 삐뚤빼뚤한 글씨 세 문장에는 그녀가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이 담겨 있다. 시인 신달자가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던 날. 아버지에게서 하얀 봉투를 건네받는다. “네 애미가 널 위해 쓴 편지다.” 편지의 내용을 본 신씨는 여고시절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전학을 위해 고향 거창에서 부산으로 떠나던 그날 어머니가 그녀에게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버스에 탄 신씨에게 직접 만든 반찬을 건네주며 어머니 김복련씨는 이렇게 말했다. 딸 달자를 위한 이야기였지만 무엇인가 김씨 인생의 한(恨)이 서려 있는 듯했다. “첫째, 죽을 때까지 공부해서 꼭 박사 같은 거 돼라. 둘째, 내가 살다 보니 돈이 많이 필요하더라. 돈도 많이 벌거라. 셋째, 이 두 가지를 이루면 네가 여자로서 꼭 행복하길 바란다.” ‘ㄱ’자도 몰랐던 어머니는 그 편지를 위해 4년을 공들였다. 받침도 틀리고, 삐뚤빼뚤한 글씨에 몇 번을 침으로 지웠는지 종이는 이미 해질 대로 해진 상태였다. 편지는 내용이나 그 상태로 보나 눈물겨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로 말하면 불행했던 사람이에요. 남편에게 구박을 당했거나, 부유하게 살지 못해 불행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죠. 똑똑한 여자이고 싶었는데 자신의 신념대로 살지 못하신 겁니다.” ◇ 딸들에게 꿈을 담다 “어머니는 딸 여섯에 아들 둘을 두셨어요. 그토록 사랑하던 첫째 아들을 6·25 때 잃고 어머니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순종만 하고 살았던 어머니가 제 2의 전성기를 모색하셨던 것이죠. 하지만 뾰족하게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딸들에게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자신과는 달리 딸들을 사회에서 인정받는 당당한 여성으로 만들려고 하신 것이죠.” 한반도의 전운이 잠잠해지고 평화가 찾아올 무렵, 김씨는 고등학생인 셋째 딸부터 고향 거창을 떠나 더 큰 도시인 마산으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첫째와 둘째 딸은 이미 시집을 간 상태). 험난한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서 여자라도 더 큰 곳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뜻과 본인의 한이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이 소식이 집안 어른들에게까지 전해지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른들이 집까지 찾아와 그 어린 여자 아이들을 타지로 내몰았다며 어머니를 내쫓는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거기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드려 맞을수록 강해지는 칼처럼 그녀의 뜻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렇게 셋째와 넷째 언니가 마산여고를 졸업했어요. 하지만 셋째언니는 대학 진학을 못하고 결혼을 했고, 넷째 언니는 몸이 아파 몇 년을 몸져눕는 바람에 어머니의 꿈을 이루지 못하셨죠.” 두 딸의 진학이 어려워지자 김씨는 아쉬움과 좌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는 없었다. 기필코 딸들을 사회의 주역으로 만들겠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고스란히 다섯째 달자에게 돌아왔다. 마산은 터가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이유에서 여고생 신씨는 부산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 후 신씨는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입학하고 경남 백일장에서 1등을 하는 등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한다. 어머니 김씨의 꿈은 달자를 통해 그렇게 이뤄지는 듯했다. “당시에는 대학교를 졸업해도 여자가 취업하기란 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무급으로 숙대 국문과 조교를 하게 됐죠. 과장 선생님이 용돈 하라고 주신 돈으로는 생활이 안 된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어머니는 하루에 한 끼만 먹더라도 학교에 꼭 붙어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만큼 교육에 꿈이 있으셨던 것이죠.” ◇ “달자야, 네는 꼭 될 끼다” “나가 죽어! 너 지금 그렇게 잘나가는데 왜 결혼을 하려고 하니?” 스물여섯의 앞길이 창창한 달자가 결혼을 하겠다는 소식은 김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어머니의 완강한 결혼 반대에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26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 신씨. 그러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학가의 길을 포기하고 주부로서 가정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 것은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느낌이었을 게다. 결국 결혼 초기 제대로 먹지도 웃지도 못하고 결혼 우울증에 시달린 신씨. 문학가라는 꿈이 사라지니 그녀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가족을 통해서 어머니가 제 소식을 들으시곤 전화를 하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해준 한마디가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달자야, 네는 꼭 될 끼다’라고 말씀하시면 저는 성질을 내곤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틀 뒤에 또 전화가 와서 한마디 더 하십니다. ‘그래도 네는 꼭 된다앙카나.’” 설상가상으로 1977년 남편이 쓰러지고, 시어머니까지 함께 쓰러지니 줄초상을 치를 판이었다. 두 환자를 돌보며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달자의 모습에서 어머니 김씨는 절망을 느꼈다. 이전까지만 해도 딸 달자가 어떻게든 일어설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그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남편이 쓰러진 다음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가장 불행했을 때 돌아가신 것이죠. 자식이 무엇을 이뤄내길 그토록 바라셨는데 그것을 못 보고 돌아가셔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운명을 달리한 김씨는 신씨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성공한 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불행의 연속이었지만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기로 결심했다. 빈털터리가 돼 등록금도 빌리고, 굴욕도 참아가며 공부에 매진한 결과, 1992년 신씨는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박사’라는 이름을 얻는다. ◇ 50세, 행복해지다 “박사가 되자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도 됐어요. 어머니의 소원 중 2가지를 이룬 셈이죠. 그런데 행복한 여자가 됐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약간 의문이 들더라고요.” 신씨는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과연 어머니가 말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세상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이란 단어를 새롭게 정의했다. “‘행복이란 결국 내 현실을 껴안았을 때 오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정의했어요. 그때가 50세였는데 어머니가 1959년에 말한 그것을 모두 이뤘을 때가 된 것이죠.” 신씨는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박사가 되고 할 때마다 어머니의 빈소를 찾았다. 그리고는 몇 십만원의 돈을 그 옆에 묻고 이야기한다. “엄마, 이거 내가 번 돈이야.”
- 2015-10-06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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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의 요리PART2] 요리는 놀이다
- 미술 작품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고, 아름다운 재즈 선율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흐르는 이곳이 ‘남자만을 위한 요리교실’?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인 행복남 요리 교실의 모습. 쿠킹앤 행복남 요리교실은 복잡한 레시피에 지친 남자들을 위해 쉬운 요리 방법에 특유의 센스를 더한 수업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요리를 통해 삶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맛과 멋을 아는 남자들의 요리교실을 살펴보았다. 밤섬과 한강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쿠킹앤의 행복남 요리교실은 남성들만을 위한 특화된 요리교실로 유명하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직원, 대학교수, 금융기관 은퇴자 등 사회 고위층 남성들이 주 수강생이다. 한희원 행복남 요리교실 대표는 SK, 도래이첨단소재, 신한은행, 롯데 등 기업들과 함께 ‘쿠킹&팀워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요리에 소외된 사람들을 중시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조직을, 그리고 요리 교육에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여자와 아동을 빼면 청소년과 남자가 남더군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은 힘들 것 같았습니다.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을 하자고 결정하게 됐습니다. 요리를 배우려고 찾아봤는데 자격증 위주로 된 곳만 많다는 하소연도 그 결정에 한 몫 했죠.” 여자의 요리는 직관적, 남자의 요리는 매뉴얼적 한희원 대표가 작금의 남자 셰프 붐보다 앞서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을 만들기로 한 것은 블루오션을 찾기 위한 모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어느새 3년 차. “주 연령대는 40대 후반부터 50대 이후가 많습니다. 그 정도 나이대가 되어야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게 가능해져요. 교육은 1조를 2인에서 4인의 구성으로 만들어 진행합니다. 너무 인원이 많아지면 교육의 의미가 없거든요. 그리고 남자분들은 손이 많이 가요(웃음).” 한 대표는 여자들은 요리를 직관적으로 많이 하는 편이라고 평가했다. 여자인 만큼 요리에 관해서는 살아오면서 봐온 것이 많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의외로 여자들 중에서는 레시피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은 레시피의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그대로 하려고 한단다. 또한 요리에 대해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요리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남자의 비법 “저희는 남자들이 요리를 배워서 집에서 계속 요리를 하게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자가 요리로 가족이나 지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일수록 가정에서는 헛돌게 되기 마련이다. 아버지들이 겪어야 하는 주말의 집안 풍경을 떠올려 보자. 아이들은 모두 스마트폰만 보고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고된 노동의 나날을 마치고 얻게 된 쉬는 날, 아버지가 가정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집에 있어도 자신은 없는 존재 같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가족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요리다. 그래서 한 대표는 ‘요리를 한 가지라도 하셔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상식 계열보다는 스페셜한 이벤트성 요리를 가르칩니다. 만들어서 내놨을 때 가족들이 ‘우와, 이걸 아빠가 했어’ 하는 그런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요리 말이죠. 남자는 리액션이 있어야 의욕이 생기거든요(웃음).” 한 대표는 일상식으로서의 밑반찬은 만들기가 의외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의 요리가 나와야 할 텐데 그 맛이 안 날 수도 있고, 그러면 좌절하게 되고 요리에 관한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관심이 생기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요리를 통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 한 대표는 남자 요리교실이 단순히 요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저희들은 요리하는 사람이지만 요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리를 갖고 무얼 하느냐가 중요하죠.” 한 대표의 기억에 남는 수강생 중 70대 CEO가 있다. 부인이 몸이 안 좋아진 상황이었고, 개인적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못한 이였다. 그는 70대라는 나이가 되니 부담 없이 갈 데도 없어진 상황에서 소개를 받고 요리교실에 들어오게 됐다. 그의 집에는 주말이면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방문한다. 그런데 며느리가 음식을 안 해서, 결혼 후에 단 한 번도 며느리의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요리교실을 다니게 된 후, 하루는 주말에 그가 요리를 해서 아들 부부에게 내놓았다. 의외의 상황에 며느리가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맛있기까지 했다. 며느리는 ‘제가 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졌고 그 다음 주에는 아들의 결혼 이후 처음으로 며느리가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감식안 있어야 남자요리가 콘텐츠의 대세가 된 현재를 한 대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는 요리에 대해 쉽게 접근하자는 관점은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리를 할 때는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거나 만드는 음식에 뭐가 들어가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좋은 것이 뭔지, 나쁜 것이 뭔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 트렌드는 너무 간결하고 빠르게 만든다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그 부분이 취약해지고 있어요. 모르면 속게 되어 있어요. 요새는 먹거리로 장난을 많이 치니까요.” 한 대표는 요리교실의 미래를 소통이라는 키워드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밥상에 소통을 더하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한다. 한국인이면 밥은 삼시세끼를 먹게 된다. 한 대표 생각에는 하루에 세 번이라는 그 좋은 소통의 기회를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뺏어먹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먹느라 소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밥 좀 처먹지 마세요(웃음).’ 함께 먹는 사람을 생각해야죠. 아무 말도 없이 밥만 먹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그런 사람을 보면 밥맛 떨어진다고 하죠. 배려하지 않는 식사이기 때문이에요. 그게 비즈니스 자리라면, 거래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 직장인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못 먹어서 밥을 먹는 게 아니잖아요? 맛집을 찾아가면 뭐해요? 거기 가도 그렇게 먹을 텐데. 뭘 먹었는지 누구와 먹었는지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요리로, 식사로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한 대표는 식사가 곧 소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좀 더 주어진 것을 즐기고 소통을 즐기라는 게 그녀의 조언이었다. “왜 공기밥은 맛없을까요? 꾹꾹 눌러 담아서 그래요. 그래서 저희는 밥 푸는 법도 가르쳐요. 주걱으로 던지듯이 퍼담는 건 안 되죠. 아래 위를 잘 섞어서 공기가 잘 들어가도록 토실토실하게, 밥알을 살리듯이 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 옛날에 어머니가 이렇게 담았지. 복 들어가라고’라며 새삼 깨달으시더군요.” 남자들에게 ‘요리’가 단순히 음식을 만들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한 행동을 넘어 가족 간의 사이를 좁혀주는 ‘소통’이며 70 평생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주방을 기웃거리게 만드는 ‘관심’이고 서툴지만 정성 가득한 한 상을 아내에게 바치는 ‘희생’이 될 수 있다는 걸 한 대표는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상대를 위해 만드는 즐거운 놀이로서 요리에 접근해보자. 삶의 변화와 기쁨이 보장된, 그것만큼 즐거운 놀이가 어디 있을까?
- 2015-10-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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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파란만장했다
- 언론인 출신 시인 유자효의 시에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추석’, ‘가족’ 등의 일상 시에 젖어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고난의 시대에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유육출 씨와 어머니 김순금 씨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의 아버지 유육출 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부위독급래” 대학교 4학년생 유자효에게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신속하게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내용.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리던 찰나,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든다. “모사망급래” 전보를 본 유자효의 가슴이 미어진다. 또 그 미어지는 가슴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더 무겁게 했다. 46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어머니 김순금 씨. 그 나이에 돌아가신 것조차 오래 버텼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숨어서 울 뿐이었다. 유자효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일가친척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1층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가 2층에서 홀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친척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버지도 중태에 빠졌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 둔 채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겁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뇌혈관이 터졌던 아버지는 조금만 늦었더라도 사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유자효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이미 어머니의 변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담대한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아버지의 성공신화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2위를 했어요. 건축업을 시작으로 청과물 회사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담대하고 남자다운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문의 7대손이었던 아버지는 10대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7세 때 경남 삼천포로 이거한 후 곤궁했던 삶에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후 유육출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거기에서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일을 배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그렇게 건설업으로 승승장구를 할 때 찾아온 광복은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도 그는 또 다른 기회로 삼아 청과물 회사를 차렸다. 경남 지역에서 오는 모든 청과물은 그 회사를 거쳐 부산 일대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됐다. 그렇게 청년 사업가 유육출은 어느새 부산의 소득세 납부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유육출은 그때 분명 미래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화마(火魔)가 일으킨 ‘재기’의 광기(狂氣)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사업장이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영주동에서 발화한 불은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를 휩쓸었고, 결국 중구 일대가 모두 폐허가 됐죠. 당시 보험 제도라는 게 없었던 터라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납품했던 화주들에게 보상했어요. 아버지 사업에 첫 제동이 걸린 순간이자, ‘재기’를 위한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이었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유자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광산업, 경마장, 극장, 간척사업 등 재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브레이크는 없었다. 재기의 발판을 찾던 유육출이 경남 지역의 고령토 광산의 채굴권을 사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폭력배들의 기습과 협박에 결국 채굴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 고령토 광산의 소유는 결국 지역 연고가 있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혼란의 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손을 댄 것은 경마장 사업.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경주마가 아닌 조랑말로 운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자랑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구매한 영사기가 말썽이었다. 음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필름은 끊기기 일쑤. 첫 날부터 분노한 관객들의 환불 요구 소동에 휩싸이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덕도 간척사업이다. 분명 이 사업은 유육출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말이다. 그가 계획한 가덕도 간척 사업은 당시 국토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장면 정권의 국책과 맞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그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에 가덕도 간척사업은 그저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여겨졌고, 이것에 눈을 돌리는 정부인사는 전무했다. 그도 이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공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Go’할 것이냐 ‘Stop’을 할 것이냐는 기로에서 그는 과감히 ‘Go’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가덕도에 투자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간척지는 메워지지 못했고, 재산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게 빚더미에 앉게 됐죠. 소송이 빗발치고, 어머니는 빚쟁이들 앞에서 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재기를 꿈꾸었어요. 이후에도 부산 산업전시회 개최를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니까요.” ◇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아버지 시인 유자효가 결혼을 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를 두고 결혼을 하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재혼. 마침 응암동 시장에서 교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있어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하늘을 찔렀고, 불화가 가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자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분과 헤어져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았다. 일어나거라. 네가 먼저 죽겠구나.” 다음 날 어찌된 영문이지 유자효의 새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그렇게 사납던 사람이 조용하게 떠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버지도 얼마나 헤어지기 괴로웠겠어요. 그런데 몸과 정신이 부실했던 상황에서도 그렇게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젊은 저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강인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했죠. 종교가 없는 제가 살아가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저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죠.” 유자효는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을 배려해 돌아가셨다고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기 좋은 1990년 맑은 가을에 하늘로 떠났으니 말이다.
- 2015-09-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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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5년生, 어느 시인의 못 다한 공부이야기
-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장래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나 담임선생님도 같이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장래 목표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 생활기록부란을 쓰시는 선생님은 편했을 것이다. 위칸 하나만 쓰면 나머지는 점 두 개로 같다는 표시를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담임선생님은 중학교 진학 문제로 보호자를 모셔오라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선생님은 내 앞에서 어머니에게 강권을 했다. “형철이는 옆에 있는 남중, 상고를 졸업하면 틀림없이 은행원이 될 테니 6년만 어머니가 고생하시면 됩니다”라고. 그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중학교 진학을 결정했고, 나는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은행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나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군산남중과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내 장래 목표를 완성했다. 1973년에 중소기업은행 행원이 되어 세종로 지점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지점에 발령받아 일하던 그해 11월 지점장이 정년 퇴직을 했다. 송별식을 위해 지점장석과 차장석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모조지를 깐 뒤 중국음식을 주문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나는 막내였으므로 섭섭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하라는 말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였다. 송별식이 끝나고 소격동의 하숙집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 길을 걸었다. 오동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쓸쓸했고 뭔가 자꾸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하고 떠나는 송별회인데 탕수육이니 잡채니 몇 개 음식을 시켜놓고 몇 마디 한 뒤 그만 인사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초라하고 궁색하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30 여 년 후의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날 일기장을 펼치고 1973년부터 2000년까지 연도별로 적고 그 옆에 내 나이를 적었다. 동시에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를 적고 동생들의 나이를 죽 적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리로 승진하는 해와 차장이 될 수 있는 나이에 선을 그어보았다.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면서 내가 차지할 집안 전체의 역할도 가늠해보았다. 2000년도쯤 되면 슬슬 배나오고 영락없는 한 명의 가장이 되어 살겠고 얼마 후에는 낮에 보았던 퇴임식이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아하, 그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쓸쓸해져 밖으로 나와 달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게 그리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은 그 다음 해에는 반드시 야간대학에 가서 열심히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3때 영어공부를 많이 했는데, 좋고 아름다운 말이 많았고 그런 책들을 제대로 전체적으로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주 늦었고 빠져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설령 학교에 간다 해도 낮에 일하던 피로가 몰려와 강의 시간은 잠자기 좋은 시간이 되는 때가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더구나 여학생이 꽤 많았기에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은행원식 언어에 익숙한 내게 “얘, 건넙시다가 뭐니. 건너자고 말하면 되지”라며 길 가운데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며 꼰대풍의 나를 젊게 교정해준 또래의 여자애가 있었으니…. 실컷 졸다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깨고 보면 수업이 다 끝나 은행의 합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 쯤에는 더없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은 재미없어도 야간대학의 수업 분위기가 좋아 행복했던 1학기 중간고사 즈음 우연히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를 쓴 것이 가작에 선정되어 채플 시간에 상패까지 받았으니 나는 정녕 신세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나를 뽑아주신 양명문 시인이 나를 불러 “강군은 시적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보게” 해주신 말은 나를 들뜨게 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에 나가는 동안 수상 한 번 못해본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과 예비역 형에게서 “네가 시 쓴다고 하던데 써놓은 것 있으면 한번 보자”는 말을 듣고 며칠간 고심참담하며 몇 편의 시를 선뵈게 되었다. 나름 밤을 새우며 노트에 써간 시를 그 형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노트 매수를 살피듯 넘겨보고 나서 나에게 “야, 너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도 안 했느냐”고 묻는 통에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형은 신춘문예 평론부문 최종심에서 떨어진 이력을 가진 문학의 고수였다. 그의 눈에 내 시는 초보의 수준도 못됐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날 이래 나는 그 형의 제자가 되었다. 그에게서 현대문학이란 잡지도 알게 되었고 문학은 많은 공부를 통해서 숙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엔 그 형을 따라 다방에도 갔고 산에 올라 해 질 녘까지 이런 저런 문학얘기를 들으면서 훌륭한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져가게 되었다. 삼립빵 몇 개와 우유를 마시며 다닌 길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면서 내게 제대로 문학을 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렇게 야간대학에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주간대학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 다시 직장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처럼 시골의 부모님께 일정한 돈을 보내주어야 하고 동생들의 학비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꿈같은 일을 이행하는 대신 서점에서 철학책을 사서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책을 사서 읽곤 하였다. 그런 내게 2학기 수업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웠던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명관 교수를 철학개론 시간에 만난 것이다. 첫 시간에 영어도 아닌 희랍어로 철학이란 말을 쓰셨고 학문이란 메타 호도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며 수업시간에 본인이 쓴 ‘철학개론’이란 책으로 공부할 테니 미리 읽어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날 저녁부터 철학개론을 읽기 시작했고 3일만에 다 읽었다. 다 이해는 못했지만 너무나 뿌듯했으며 이제 그토록 바라던 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철학개론 시간에 듣는 이야기는 내 눈의 허물을 벗겨주는 것 같았다. 철학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 공부는 내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되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감히 생각도 못한 주간대학으로의 편입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철학 교수님을 뵙고 조언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주소를 들고 찾아뵌 교수님은 날 알아보실 일이 없었기에 내 상황을 설명하고 교수님께 배울 길이 없겠느냐고 여쭈었다. 지금 다니는 은행이 좋은 곳인데 뭐하러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하면서 한 시간 가량 만류하시던 교수님이 내가 공부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말에 기특하다고 여기셨는지 편입하면 좋은 선생님들이 있으니 그리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미리 공부할 책을 몇 권 소개해주셨고 시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철학공부를 한 뒤 주간대학 편입시험을 치렀다. 당시 내 계획은 편입시험에 합격하면 휴학한 뒤 군대에 가고 가 있는 동안 나오는 돈으로 집에 보태면 집에 대한 어느 정도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제대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면 그때 남은 도리도 하고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렵게 숭실대 철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낸 뒤 며칠 있다가 휴학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확인한 것은 편입생은 바로 휴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복학할 때는 다시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난감해졌다. 더욱이 당시 은행에는 제대 후 이직이 잦자 군대있는 동안 받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퇴직도 안 되는 특별규정이 있었다. 궁리 끝에 어려워도 은행을 그만 두고 그냥 학교에 다닌 뒤에 곧바로 취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자고 생각했다. 겨우 생활이 안정되어가는 판국에 욕심 많은 장남이 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면서 제대로 대학을 안 나오면 출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기꺼이 동의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을지 모르겠다며 밤새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버지 허락을 얻었다며 네 생각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이튿날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3년 만이었다. 동생들 학비도 대야 하고 집안도 살려야 할 장남이 그리 욕심 많은 짓을 했어도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말로 넘어가신 어머니! 아 우리들의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보려 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시를 열심히 써서 대학의 문학상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아버지에게 시계도 사드렸다. 퇴직금으로 2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니 앞이 막막하여 1년 다닌 뒤 해군에 입대했다. 출동을 나가거나 정박기간에도 나는 열심히 시를 썼고. 제대 무렵에는 쓴 시가 제법 되었다. 1980년 복학 전에 쓴 시를 조태일 시인에게 드렸을 때 그 자리에서 읽은 후 창작과비평에 투고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지녀왔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투고했으나 가을호나 그 다음에 보자는 말을 듣고 좀 더 노력하고 있을 즈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투고했던 잡지는 1980년 7월경에 폐간되면서 시인이 되는 일은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오히려 내 시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녕 공부하지 않은 역사나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투옥되고 존경하던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민중들의 죽음을 듣고 알게 되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참된 민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 더욱 더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 것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하면,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의 그 느낌과 열망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는 것, 강제로 분단된 조국이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반쪽짜리 문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역사와 민족 혹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내 시가 그런 큰 주제를 제대로 용해시켜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많은 책들을 읽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후 1985년에 민중시란 제목의 무크지에 시를 발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 그동안 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 등 네 권의 시집과 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등 두 권의 평론집을 냈다. 그동안 문인단체의 사무차장,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이사장의 직책을 맡아 내나름 열심히 일했다. 어려서 해본 3년 동안의 은행업무와 대학 졸업 후 일했던 신용금고(현 저축은행) 3년의 실무경험이 유용했다. 또한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현기영 원장을 모시고 2년 6개월 동안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1996년에 숭의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막연하게 은행원이 되어야 앞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인생이 많은 곡절을 거쳐 전혀 다른 분야의 인생을 사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변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겉모양은 달라도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보다 좋고 바른 삶이 보이면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여 성심을 다한다는 것, 그런 것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아래 어디쯤에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의 잔잔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2007년 내 어린 시절 꿈을 꺾지 않으시고 존중해주셨던 어머니가 치매를 얻으셨다. 그동안 못한 도리를 하려고 2010년부터 고향 군산으로 이주했다. 역설적인 사실은 어머니와 살면서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생생한 인생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2014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또 안다.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계셔서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되었고. 또한 미숙한 시를 숙성시켜 당대 사람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훌륭하게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을 준절하게 깨우쳐주고 계시다는 것을.
- 2015-09-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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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여배우 이용녀, 유기견 엄마 이용녀
- 많은 강아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여배우가 있었다. 예쁜 옷을 입어 봤자 이내 강아지들 때문에 더러워진다. 제 돈을 주고 옷을 사본 지 10년이 넘는다는 여배우. 50여 마리의 강아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여배우. 여배우 이용녀(李龍女·60)의 삶은 특별하다. 경기 하남시 초일동. 이용녀의 집 근처에 들어서자 주위와는 다른 아우라를 뿜는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굳이 스마트폰 지도를 뒤지지 않아도 동네에 울려 퍼지는 강아지 소리가 ‘배우 이용녀와 아이들’이 있는 공간임을 짐작케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50여 마리의 환영견파(?)가 기자를 격하게 맞이한다. 환영을 하는 것인지 경계를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는 힘들었지만, 그 북적거림이 왠지 모르게 좋은 기운을 내뿜었다. 어떤 녀석은 앞다리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적극적으로 환영하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그녀를 해할까 끊임없이 냄새로 기자를 탐색한다. 쉽게 집 안으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장난을 거는 통에 좀처럼 진입하기 힘든 ‘용녀씨네’였다. 이들은 사람에게 한 번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있는 유기견이다. ‘친절한 용녀씨네’라는 팻말을 걸고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은 배우 이용녀.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가녀린 여배우가 바로 50여 마리 유기견의 ‘어머니’다. ◇ 유기견을 위한 삶의 시작 “10년 전쯤이었어요. 길가에서 시추 한 마리가 눈이 터져서 낑낑대고 있는 거예요. 동네 꼬마들이 던진 돌에 맞은 거죠.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알고,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 주었어요.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런 녀석들이 수두룩하다고요.” 이용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집 앞마당에서 닭, 토끼, 강아지 등의 동물과 몸을 부비며 살아 왔던 터라 유기한다는 것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동물은 동시대를 함께 사는 같은 생명일 뿐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라”는 수의사의 한마디는 이용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저 귀여운 것으로만 생각했던 강아지였지만, 그 귀여움 속에 감쳐진 이면에 참혹한 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유기견의 실상이 참혹하더군요. 번식장에서 새끼만 낳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육되는 녀석이 많다는 것이 충격이었죠. 유기견 보호센터에서 1주일만 있으면 안락사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꾸 이놈들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때부터였다. 자신보다 유기견을 위한 공간이 더 커지기 시작한것이. 금호동에서 왕십리를 거쳐 하남시 풍산동에서 지금의 초일동까지 이사를 하면서 가장 크게 고려했던 입지 조건 역시 ‘강아지들이 자유롭게 뛰놀며 살 수 있나’였다. 그녀의 생활을 위한 공간이라곤 잠을 청할 수 있는 침실과 드레스 룸뿐. 그 외에 큰 거실과 마당은 모두 녀석들 차지다. 120마리였던 유기견들도 이제 절반이 줄어 50여 마리뿐이지만 시끌벅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자도 그곳에서 유기견들과 몸을 부비다보니, 그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과 꼬리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펼치는 애교는 유기견에 대한 연민과 호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용녀도 그때 같은 마음이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군인 아버지 덕분에 마당있는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요. 동물을 좋아하셔서 늘 마당에 닭, 토끼, 강아지들과 함께 살았죠. 그래서 동물과 친근한 건 사실이지만, 제가 동물을 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생활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 시대를 사는 똑같은 생물로서의 미안함 때문이죠. 동물과 사람은 상하관계가 아니랍니다. 인간에게 버려진 동물에게 너무 미안해 몇 마리라도 좋은 사람에게 보내주기 위해 유기견을 보호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개고기, 알고 드시는 건가요? 유독 그녀의 자동차가 눈에 띄었다. 여배우의 차라고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가 정신없어 보일 정도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귀여운 캐릭터의 강아지가 ‘나는 먹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있다. 작은 행동이지만 그렇게 그녀는 개고기를 먹지 말라는 소신을 생활 속에서 내비치고 있었다. “개고기가 정말 사람에게 좋은 것일까요? 물론 고기는 단백질이 많아서 사람의 기력을 회복하는 데 좋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고기에 쓰이는 개들이 몸에 좋을지는 의문입니다. 그 개들은 고기가 필요할 때 바로 죽여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항생제를 투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높은 온도가 돼도 없어지지 않아 개고기를 먹을 때 결국 항생제도 같이 먹게 되는 것이죠.” 이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분명 “왜 개고기만 가지고 그러느냐”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기견 보호소나 개고기를 위한 사육장을 다니며 확신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 온 개들은 정신적으로 피폐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그대로 먹는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이런 점을 이야기하면서도, 먹겠다는 사람에게 윽박지르거나 비난하지는 않는다. 고기가 사람의 기력을 회복해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저는 먹는 것은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기도 알고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건강한 환경에서 사육된 고기를 먹어야, 사람의 몸과 마음도 건강해지지 않겠어요?” ◇ 영화 와 영화배우 이용녀 극중에서 캐릭터가 쎈 역할을 많이 탓인지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오해가 많다. ‘기가 셀 것이다’, ‘차가울 것이다’ 등의 이미지적 측면의 오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그녀가 작품의 ‘신 스틸러’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연극으로 다져진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색깔이 뚜렷한 배우라는 뜻이니 말이다. 사실 그녀는 연극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다. 연극계에 들어서자마자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등 큰 무대에 선 자신을 “참 운 좋은 배우”였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연극계에서의 폭 넓은 활약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영화에 대한 제의도 여러 차례 고사했다. 영화를 할 준비도 안 돼 있었고, 하고 싶다는 열정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녀가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를 본 이후였다. “‘이런 영화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본 영화였어요. 정말 충격적이었죠. 처절한 외로움 속에 살다가 벗어난 주인공들의 동질감과 소소한 행복을 배우들이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더라고요.” 이 영화를 본 후 불현듯 영화를 하고 싶다는 열정이 피어올랐다.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그녀도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오디션에 뛰어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였다. 영화 로 세계적 반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본 오디션에서 합격한 그녀는 명품 조연으로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빛내고 있다. 이제 60세의 여배우는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유기견 어머니라는 삶을 위해 배우 이용녀로서의 삶은 어느 정도 양보가 필요했다. 작품 선택과 역할 선택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유기견 어머니와 동시에 배우 이용녀이고 싶다. “지금은 들어오는 작품이나 역할을 가릴 상황이 아니에요. 이 친구들과 함께 살려면 어떤 작품이라도 해야죠.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죠. 관객들에게 인생에 대해 편안하게 보여 줄 수 있고,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내면 연기를 통해 인물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네요.” △ ‘친절한 용녀씨네’ 강아지를 입양하고 싶다면 “이용녀 선생님에게서 2년 전 마르티즈를 입양 받았어요. 정말 까다롭게 입양을 해주시더라고요. 또 한 번 주인에게서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그런 것이겠죠.” 인터뷰 날 방문했던 손님이 기자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그녀는 분양을 해 줄 때에도 선택의 우선순위를 ‘책임을 끝까지 질 수 있느냐’하는 것에 둔다. 그래서 입양을 할 사람의 인적사항을 확실하게 따진다. 또한 이전에 강아지를 키운 경험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본 후, 한 달 간 입양할 사람에게 키우도록 한다. 이후 자격 여부를 엄격히 따져 분양을 한다. 입양을 하고 싶다면? Daum카페 ‘이웃들 시즌2 (이용녀와 함께 웃는 멍이와 냥이들)’을 검색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녀가 직접 운영하는 카페다.
- 2015-08-11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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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면, 어찌 네 가지 맛만 나랴!
- 세월이 흐르면 입맛이 바뀐다. 달거나 짭조름하면 대충 맛있어하고 시거나 쓰면 덮어놓고 싫어하다가,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구미가 좀 더 풍부해지고 복잡해진다. 맥주나 커피처럼 쓴 물이 시원하거나 향기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맵고 쓰기만 하던 양파 같은 채소가 전에 없이 달콤해지기도 한다. 혀로만 맛을 느끼다가 점점 더 머리와 가슴으로 즐기게 되는 것이다. 글 김유준 본지 프리랜서 기자 그처럼 너그러워지고서야 비로소 맛있는 음식의 대표선수로, 나는 냉면을 꼽는다. 달고 시고 짜고 쓴, 사람이 느끼는 네 가지 맛에만 반응하는 원초적 입맛이라면 메밀 면 맛을 어떻게 느낄까. 쫄깃한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툭툭 끊기는 면에서 여물지 않은 입맛으로 특유의 향기를 잡아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육수도 마찬가지. 요즘 사람들 하는 말로 ‘초딩 입맛’이라면 심심하고 밍밍한 것이 맹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냉면 육수의 참맛을 느끼려면 속에서 다소곳한 감칠맛을 지긋이 발견해낼 끈기가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메밀은 면을 만드는 데 그다지 적합한 재료가 아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메밀은 잘 뭉쳐지지 않아 반죽을 만들기 어렵거니와 어렵사리 만들어 면을 뽑는다 해도 쫄깃하지 않다. 둘째, 메밀은 금속에 약하다. 셋째, 메밀은 열에도 약하다. 음식의 대표 선수, 원초적 입맛 자, 여기 메밀이 있다고 치자. 그 가루로 반죽을 쳐서 국수를 만들었더니 향기도 좋고 맛도 좋고 다 좋다. 다만 질기지가 않다. 씹기도 전에 툭툭 끊기기 일쑤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은 메밀의 이런 단점 때문에 전분을 섞어 면을 만든다. 메밀이라는 곡식만으로는 반죽 만들기가 힘든 탓에 전분의 힘을 빌려와 가락을 만든다. 이 때문에 그 비율을 놓고 미식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어떤 순수주의자는 오로지 메밀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일본 쪽에서 ‘주와리(10할)’라고 부르는 면이 바로 순수 메밀 면이다. 요즘에는 기술이 좋아져서 메밀만으로도 찰기가 제법 살아 있는 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의견도 만만찮다. 메밀 9, 밀가루 1의 비율이 가장 알맞다는 학설도 있고 8:2가 정답이라는 주장도 있다. 메밀 10에 밀가루 2라는 다소 난해한 비율이 최고라는 일본 장인도 있다. 어느 유명한 춘천 막국수 집은 메밀 6, 밀가루 4 정도는 돼야 쫄깃쫄깃하다고 고집한다. 어떤 게 정답인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 메밀국수는 질기지 않다. 메밀에 글루텐 성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물 속 메밀 가락 몇 가닥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고 치자. 그때 면발들이 끊어지지 않고 찌이익 딸려 올라온다면, 고개를 뒤로 확 젖히면서 세차게 씹었는데도 끝내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금 당신이 메밀향기 대신 사(詐)자 향기를 풍기는 면발계의 ‘타짜’를 상대하고 있다는 증거다. 맛있는 것을 맛보겠다는 소박한 식도락의 꿈이 몇 젓가락 지나지 않아 거덜 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물론 함흥식 냉면은 쫄깃쫄깃함을 넘어 질기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함흥식 냉면의 면은 메밀 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밀 대신 감자전분으로 면을 만들고, 때문에 함흥 지방에서는 냉면이라 부르지 않고 ‘농마국수’ 또는 그냥 ‘국수’라고 부른다(농마는 녹말의 그쪽 말이다). 자, 또 메밀이 있다고 치자. 그 가루로 반죽을 쳐서 국수를 만들었더니 다 좋다. 다만 한 가지, 금속에 약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금속을 멀리하면 된다. 때문에 메밀 면을 가위로 썰어대는 짓 따위는 삼가야 한다. 심하게 예민한 어느 전문가는 냉면을 먹을 때는 나무젓가락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좀 지나친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메밀 면에 금속을 너무 들이밀면 메밀 특유의 향기가 다 날아가 버린다. 자, 마지막으로 여기 메밀이 있다고 치자. 그 메밀가루로 반죽을 쳐서 국수로 만들었더니 향기도 좋고 맛도 좋고 다 좋다. 다만 한 가지, 열에 약하다. 를 쓴 이상처럼 훌륭한 문인들이 폐병을 기본으로 앓은 것처럼, 이 섬세한 면발은 조금만 뜨거워져도 그만 원기를 잃고 풀어지고 만다. 씹기도 전에 목구멍을 타고 후루룩 넘어갈 만큼 매가리가 없다. 이 유약한 샌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뜨거운 게 싫다면 찬 걸 뒤집어써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찬물에 집어넣고 강하게 키웠다. ‘뜨거운 게 싫다면 찬 걸 뒤집어써라.’ 이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었다. 그 결과, 냉면과 막국수가 생겨났다. 일본 사람들은 장국이나 소스에 찍어 먹는 쪽을 선택했다. ‘뜨거운 게 싫다면 안 주면 되지.’ 이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그 결과, 소바라는 면 요리가 탄생했다. 소바라는 일본어 단어는 자체로 메밀을 뜻하지만 메밀로 만든 면 요리를 뜻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냉면을 먹어본 것은 대학생이 되고 처음 맞은 여름방학 때였다. 피난 시절부터 밀면이 대세로 자리 잡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탓이다. 그때까지 내게 냉면은 그저 차갑고 심심한 국물에 특징 없는 면을 말아놓은 한심한 음식에 지나지 않았다. 생애 두 번째의 서울 나들이에서 어머니는 그 맛없는 음식을 먹자고 고집을 부리셨다. ‘하고 많은 음식들을 젖혀두고 하필…’ 싶었지만, 어르신께서 잡숫고 싶으시다니 어쩔 도리 없었다. 그렇게 먹게 된 냉면 맛에 참 많이 놀랐다. 아랫니 윗니 가릴 것 없이 갖다 대기만 해도 툭툭 끊기더니 고소한 향기까지 풍겨난다. 육수는 또 어떤가. 시원함과 진함이라는 이율배반의 두 요소가 잘도 어우러져 숫제 완벽하다. 면 음식의 궁극, 그때 장충동에서 맛본 냉면은 더할 나위 없는 면 중의 면이었다. 허겁지겁 젓가락질 끝에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쳐다봤다. 빙그레 웃으시는 표정이 꼭 ‘어떻노? 맛있제?’ 하시는 것 같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니도 인자 냉면 맛 알 때가 됐다’ 하셨는지도 모른다. 무더위가 찾아오고 있다. 입맛이 떨어질 때마다 근처 단골 냉면집을 찾는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당신께서 맛을 가르쳐준 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그럭저럭 잘 피하고 있다고, 살아 계셨으면 전화라도 드렸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쉽다. >>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08-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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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읽는 동화 ] 아가씨의 다락방
- #어느 시골 마을에 가난한 아가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부지런한 아가씨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꽃밭을 돌보고 작은 텃밭도 일구었습니다. 새들과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 바느질 솜씨가 빼어났기에, 마을 사람들의 낡은 옷도 고쳐 주고 새 옷도 만들어주며 살았습니다.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늘 평화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저녁이면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해가 다 저물도록 마을을 산책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왕자는 아가씨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사랑에 빠져버린 왕자는 몇 날 며칠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아가씨에게 정중하게 청혼을 했고,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궁궐 안에는 온갖 최신 시설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고, 먹을 것은 언제나 풍성했으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과 장신구로 매일 아름답게 치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늘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고 향긋한 꽃내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고, 힘든 일도 하지 않았으며, 화가 나거나 골치 아픈 일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요로운 가운데, 왕자와 아가씨는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매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예쁘고 건강한 아이들도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긴 세월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사랑은 맹세처럼 굳기만 했습니다. 아침이면 나란히 깨어나 하루 종일 행복한 시간을 함께했고, 해가 지면 총총한 별이 보이는 침실에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달콤하게 잠들곤 했습니다. 아가씨는 이런 생활을 당연히 행복하다고 믿었습니다. 화려한 궁궐에서 멋진 왕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으니, 행복한 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끔씩 어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움이 생겨나는 것이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행복을 수상쩍게 여기도록 만들기는 했습니다. 아가씨의 그리움은 궁궐 바깥에 있었고, 가난했던 시간에 있었으며, 초라하지만 자유롭던 자기 자신의 모습에 있었습니다. 허름한 부엌의 퀘퀘한 향이 그리웠고, 누더기 옷을 꿰매던 녹슨 바늘과 낡은 실이 그리웠습니다. 노을이 번지던 고향의 저녁 산책길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그리웠습니다. 바람이 새어들며 덜컹거리던 작은 창도 그리웠습니다. 그 작은 창으로 보이던 별빛과 지금 궁궐의 화려한 창으로 보이는 별빛은 어쩌면 이리도 다를까 생각했습니다. 슬픔 많던 자신의 가여운 모습마저도 그리워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기도 싫었으며, 돌아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만 실컷 그리워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가씨는 하녀들조차 쓰지 않는 성 꼭대기의 낡은 다락방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다락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고향이 그리우면 실컷 울기도 했습니다. 다락방에 있는 동안 아가씨는 왕자비가 아니었습니다. 하녀들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먼지도 많고 바닥은 삐걱거리고 초라했지만 아가씨는 그 낡은 공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롭고 반갑고 편안했습니다. 낡은 다락방은 아가씨가 자신의 영혼에게 주는 조건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왕자는 가끔씩 다락방으로 사라지는 아가씨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가씨가 슬프거나 지쳐 보이면 곧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따뜻한 차를 가져오게 해 아가씨를 푹 쉬게 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며 아가씨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혼자 다락방에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를 다락방에 혼자 있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아가씨가 다락방에 있는 동안 왕자는 허전하고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다락방의 아가씨는 너무나 초라하고 낯설어서 싫었습니다. 왕자비가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아가씨는 다락방에 있고 싶을 때마다 눈물을 훌쩍거렸습니다. 아가씨를 사랑하는 왕자는 궁리 끝에 아가씨를 위해 다락방을 수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꾼들을 시켜서 다락방을 넓히고 최고급 카펫도 깔고 화려한 조명을 달았습니다. 왕자와 함께 앉을 커다란 가죽 소파와 각종 장식품들도 들여놓았습니다. 아가씨가 다락방에 오면 언제라도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하녀들도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아가씨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락방에 있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내가 늘 함께 있어 줄게요.” 그러나 다락방이 공사를 다 끝내고 화려한 모습으로 문을 열던 날, 아가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다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궁궐에서 멋진 왕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으니, 행복한 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끔씩 어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움이 생겨나는 것이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행복을 수상쩍게 여기도록 만들기는 했습니다.
- 2015-08-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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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되기]아내의 헌신과 의료진의 노력이 빚어낸 사랑
-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rapport)라고 말한다.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내 신정아(申貞娥·44) 씨의 간을 이식받아 새 삶을 얻은 이경훈(李敬薰·48) 씨와 그를 살린 분당서울대병원 한호성(韓虎聲·56), 최영록(崔榮綠·40) 교수가 그들만의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감사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서, 그리고 여기 좋은 교수님들과 함께해서 전 복 받았죠. 제가 새 삶을 얻은 것은 모두의 사랑 덕분입니다.” 이경훈씨에게서는 남다른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씨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따뜻했고, 부부를 바라보는 교수들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내의 간을 이식받은 남편, 이 부부의 새로운 삶에 동행하는 의료진은 한가족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느 날 찾아온 통증, 그리고… 이경훈씨는 2011년 11월 신정아씨와 화촉을 올렸다. 마흔 넘어 결혼했지만, 그렇기에 남들보다 즐겁고 소중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씨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든 다 해주고 싶은 남편이었다. 결혼 후에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과로가 쌓이다보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혼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위가 쓰린 날이 많아졌다. 동네 병원에서 위궤양을 판정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선선하게 가을바람이 불던 일요일로 기억됩니다. 말로 못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어요. 결국 119를 불렀고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위궤양은 약 처방을 받으며 조금씩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평소 앓던 B형 간염 증세가 악화되면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생겼더라고요. 그때부터 응급실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병원을 오가는 동안 그는 점점 지쳐갔다. 지난해 7월에는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가야 했다. 그 이후, 다니는 병원을 포천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정밀검사결과는 간암이었다. 다행히 색전술은 받았으나 간기능 저하로 인해 간이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대학병원에서는 간이식 수술을 할 만한 의료진이 없었다. “처음에는 위궤양 판정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간암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간이식을 받아야 한다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서 간이식을 받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만 해도 아내의 간을 받을지는 몰랐었죠.” 이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간이식 명의로 알려진 한호성 교수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한 교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생각하고 2014년 가을 한 교수를 처음 만난다. 지난 3월 드디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내의 사랑과 의료진의 헌신에 힘입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현재 이씨는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통상 간이식 환자들은 면역억제제를 장기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부작용 등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극복하고 있다. 의료진의 말을 잠시 빌리면,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관리가 되고 있어 약도 줄이고 있고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검사결과도 없다. 아마도 아내와 의료진에게 받은 사랑 덕택이 아닐까? 다만,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는 과정동안 직장을 잃게 돼 경제적인 부분이 어려운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제를 뛰어넘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이면서도, 가장으로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다. 엄마에게 신장, 남편에게 간을 준 여자 신정아씨는 가족을 위해 두 번 장기 기증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신장을, 남편에게는 간을 떼어준 특별한 사람이다. 신씨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고혈압과 갑상선 질환을 앓다가 유행성출혈열의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부전이 생겨 신장이식 수술이 필요하게 됐다. 신씨는 어머니를 위해 신장을 기증키로 했다. 이식 수술 후 어머니와 신씨 모두 건강하게 지냈다. 이씨와 결혼도 하고 행복이 무르익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께 신장을 떼어준 지 8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간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남들과 다른 건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간을 떼어주는 일, 그걸로 고민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신장이식을 했기 때문에 간이식도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결국 적합판정을 받게 됐고,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주는 일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신씨는 남편도, 의료진도 만류했지만 간을 떼어주고 싶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시 깨 볶는 소리가 들리는 가정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현재 신씨는 퇴원 후 건강관리를 받으며 음식 조절과 가벼운 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두 번이나 장기기증을 했지만, 남편의 사랑에 기운을 내고 있다. 그녀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두 번의 장기 이식 수술을 경험하며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어요. 장기이식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니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는 겁니다.” 참 따뜻하고 믿음직한 의료진 부부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참 따뜻한 선생님들이에요. 친절하다는 부분이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진짜로 생각을 해주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이 선생님들은 ‘환자를 진심으로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우린 많은 병원을 다녀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웃음)” 특히 이씨는 수술 전후 상황이 아주 편했다고 회상한다. “자상하게 대해주시고 잘 될 거라고, 아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긴장되고 떨리기도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수술 후에도 그냥 숙면한 것처럼 일어났죠. 중환자실에 있어도 되는 건지 미안할 정도였다니까요. 수술도 수술이지만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두려움도 사라졌죠.” 전문의 3명의 긴박한 협동작전 2015년 3월, 부부의 간이식 수술은 분당서울대병원 암센터 간이식팀 한호성 교수(암·뇌신경진료부원장)와 조재영, 최영록 교수가 맡았다. 이들 3명은 팀을 이뤄 수술을 진행했다. 보다 신속하고 정교하게 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증자 수술팀, 수혜자 수술팀으로 나눠 각각 진행하고 다시 협력하는 방식이다. 10시간이나 걸린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최영록 교수에게 당시 가장 고민했던 부분과 남은 과제가 뭔지 물어봤다. “이식 수술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증자의 안전입니다. 이미 신씨는 어머니께 신장이식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죠. 부부는 우리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수월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부부 모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흔치 않은 상황인 만큼 특별한 수술이었어요. 앞으로도 부부가 더욱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남은 과제입니다.” 의사는 항상 환자 중심으로 산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던 6월 20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는 잠정 의심환자에 대한 간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사실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했던 환자였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집도한 한호성 교수는 이른바 ‘노력하는 명의’로 통하고 있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한 교수의 삶은 환자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가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듣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항상 책보다 환자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로서 살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에 제시된 것처럼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옳다’라는 판단 대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환자의 안녕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의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에게 좋은 환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본인의 의사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외과의로서 말씀드리자면, 작은 수술이나 큰 수술이나 합병증을 조심하셔야 되는데요. 합병증으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만큼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합니다. 의사와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관리가 더 수월해집니다.”
- 2015-08-07 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