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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는 주고받음이다 PART 7] "제 소원이요? 이제 이뤘는걸요"
- 나의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 아픈 아이들의소원이 이뤄질 수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부를 하면 그것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바로 ‘기부의 마법’이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은 이처럼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찾아 그에 맞는 재능기부자를 연결하는 곳이다. 재단의 도움을 받아 소원을 이룬 아이들의 따뜻한 사연을 모아 봤다. 도움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www.wish.or.kr ◇돌고래를 좋아하는 혜서의 소원은… “저는 커서 돌고래 사육사가 될 거예요.” 유달리 동물을 좋아하는 여덟살 강혜서양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껏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한다. 또래보다 어휘력이 풍부하고 자기표현이 확실한 아이다. 혜서의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 입학 후부터였다. 병원에서는 뇌종양의 일종인 ‘수모세포종’이라고 했다. 100만 명 중에 5명 정도에게 생기는 병인데 원인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작년에만 서른 한 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고 올해부터는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동물을 직접 보러 가보고 싶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다. TV에서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혜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혜서는 특히 돌고래를 좋아했다. 돌고래를 보면 기분이 밝아졌다. 조련사의 말을 알아듣고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돌고래를 돌보는 사람은 매일 돌고래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혜서에게는 돌고래 사육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이뤄 주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에 혜서의 소원이 전해졌다.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비영리단체와 기부 참여자들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인터넷기업 ‘11번가’가 후원을 약속했고 약 1만1000명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주도에 위치한 한 아쿠아리움에서 혜서를 돕겠다고 나섰다. 소속 사육사가 재능기부에 나섰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실내는 웅성거렸다. 다소 낯가림을 하는 혜서는 굳어 있었다. 하지만 돌고래 ‘세나’를 만나자 이내 긴장감이 사라졌다. “돌고래도 충치가 생기나요?”, “돌고래도 감기가 걸려요?” 아프지 않길 바라는 혜서의 아이다운 질문이었다. 혜서는 직접 돌고래를 지휘했다. 많은 이들의 바람이 돌고래 세나에게도 전해진 것일까. 세나를 매일 돌보던 사육사는 평소보다 더 활발한 세나의 모습이 놀랍다고 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돌고래를 만난 혜서가 까르르 웃었다. 혜서의 웃음소리가 공연장 곳곳을 채웠다. 많은 이들의 따뜻한 ‘관심’이 모여 동물을 좋아하던 한 아이의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퍼레이드 지난 9월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진행된 퍼레이드는 아주 특별했다. “예쁜 공주가 돼서 멋진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다”던 여섯살 김연우양의 소원이 이뤄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연우가 세살이었던 2012년, 연우의 아랫배에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병원에서 ‘난소종양’ 진단을 받았다. 활발하지만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6번의 항암치료를 거치며 참 많이도 울었다. 만화 속에 나오는 공주처럼 항상 예쁘고, 항상 행복하게 웃고 싶었다. 삼성전자 부품사업부(DS)가 후원하는 대학 봉사팀 ‘위시 엔젤(Wish Angel)’이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연우를 만났다. 연우는 금발에 분홍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나눠 주는 착한 공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삼성전자 임직원과 에버랜드가 연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섰다. 연우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겨 주기 위해 황영철 사진작가가 재능기부에 나서기로 했다. “공주님, 이제 백성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왕자님과 함께 퍼레이드에 오르실 시간입니다.” 원하던 대로 공주가 된 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추자 연우는 차에서 내려 가방 속에 담아 온 과자와 사탕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연우가 자라는 동안 큰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모아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낸 어머니 박윤서(가명)씨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박씨는 “이 정도까지 우리 아이의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공주가 되고 싶다던 소원을 이뤘으니 이제 앞으로 연우가 커서 무엇을 하든지 다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드론으로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요 김규현(15)군은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처럼 활발한 소년이었다. 2013년 1월, 스키캠프에서 다리가 부러져 병원을 다닐 때까지도 뼈가 붙기만 하면 다시 두 발로 뛸 거라고 생각했다. 치료 3개월째가 되던 때였다. 갑자기 고열이 생기고 염증수치가 높아졌다. 황급히 찾아간 큰 병원에서 뼈에 악성 종양(골육종)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뒤로 세 번의 큰 수술과 여섯 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전처럼 걷거나 뛸 수 없었지만 규현이는 장애진단을 원치 않았다. 규현이는 차분한 성격에 말수가 적은 성격이지만 ‘레고’ 이야기가 나오면 눈망울을 빛냈다. 자유롭게 날고 싶은 규현이의 방에는 레고로 만든 비행기가 많았다. 규현이는 ‘드론(무인비행기)을 갖고 싶다고 했다. “다리를 다쳐서 산에도 못 올라가고 움직이는 게 불편하니까 저 대신 드론을 높이 띄워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보고 싶어요.” 9월 어느 날, 한 식당에서 규현이를 위한 깜짝 이벤트가 열렸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간 규현이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저거 새야?”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낯선 물체는 규현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한 드론이었다. 규현이의 사연을 들은 한 드론교육 전문가가 재능기부로 조종법을 알려 주기 위해 경기도에서 청주까지 달려왔다. 드론 조종기를 손에 쥔 규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원이요? 이제 이뤘는데요.” 규현이는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드론을 조종하는 동안 자신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기부자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 10가지 기부 문화는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다. 빌 게이츠는 사회로부터 얻은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기부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부자들은 의미있는 일, 관계하는 일, 확실한 목적에 쓰여지는 일에 기부를 원한다. 기부자들의 동기부터 따져보자. 1. 기부의 종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기부에는 먼저 기부자가 특별한 용도를 지정하지 않는 ‘순수 기부’가 있습니다. 반면 기부자가 특정한 사업을 후원할 목적으로 지정해서 기부하는 ‘조건부 기부’도 있고요. 또 개발사업 등을 진행할 때 시행자들이 국가나 지자체에 제공하는 ‘채납형 기부’,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예술작품을 제공하는 ‘기증형 기부’도 있습니다. 2. 우리나라 기부 현황이 궁금해요 아름다운재단 ‘기빙코리아’의 기부금 집계를 보면 2011년 한국인의 연평균 기부금액은 21만9000원으로 직전 조사년도인 2009년의 18만2000원에 비해 20% 이상 늘었습니다. 기업의 경우 상장기업(1700개사)의 한 해 평균 기부금은 8억3700만원, 비상장기업(1만5651개사)의 평균 기부금은 4500만원 수준입니다. 3. 개인들은 어떤 동기에서 기부를 하나요 아름다운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기부 동기로 ‘동정심’이 62.1%로 가장 높게 나타나 ‘불쌍하다’는 감정이 여전히 기부 동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감’의 비중이 2009년 54.8%에서 59.4%로 상승하여 기부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나라에서 기부액이 많은 기업은 어디인가요 기업의 기부금(2012년 재무제표 기준) 지출 1위는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2353억4900만원을 기부했습니다. 2위는 현대중공업(1329억2700만원), 3위는 삼성중공업(1115억2430만원) 등입니다. 이밖에 케이티, SK텔레콤,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디스플레이, CJ제일제당, 한국전력공사 순으로 10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5. 정부에도 기부할 수 있나요 우리 법률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모금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개인과 기업에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어 이들 기관이 모금활동을 한다면 암묵적인 강요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기부금에 대한 세제혜택은 어느 정도입니까 먼저 기부하고자 하는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기부금대상 민간단체와 지정기부금단체로 지정된 곳에 개인이 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000만원 이하인 경우 소득금액의 30% 이내에서 15%의 세액공제, 3000만원이 넘는 기부금에 대해서는 30%의 세액공제를 합니다. 법정기부금 단체의 경우 기부자의 소득금액 100% 한도에서 15%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7. 기부금 영수증만 있으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나요 영수증을 발급한 기관이 ‘지정기부단체’나 ‘기부금대상민간단체’로 등록돼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단체를 세제적격단체라고 부릅니다. 당국에 기부금품 모집등록을 한 단체라고 해도 세제적격단체 선정을 받으려면 별개의 자격과 등록이 필요합니다. 모집단체가 세제적격단체가 아니라면 기부금과 후원금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이 없습니다. 8. 현물기부의 경우 기부금액을 어떻게 산정하나요 기부금 단체에서도 현물의 기부금품 가액의 기준을 얼마로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현물의 기부금은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는 정당한 매매가격’으로 계산합니다. 아울러 세월호 참사 당시의 진도군과 안산시, 태안기름유출사고 등에서의 태안군처럼 법률상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은 그 곳에서의 자원봉사도 기부금으로 산정될 수 있습니다. 9. 기부금을 받은 단체가 돈을 손에 쥐고 있지는 않나요 기부금은 2년 내에 반드시 사용하도록 법률에 명시돼 있습니다. 만약 정해진 기한 내에 기부금을 사용하지 않으면 모금단체는 기부금을 기부자에게 반환해야 합니다. 등록관청에서도 기부금품을 어떻게 모금하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10. 기부금을 받은 단체의 활동을 상세하게 확인하고 싶어요 원칙적으로 기부금을 받은 모든 단체는 기부자에게 기부한 내용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보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기부자를 일일이 접촉할 수 없어 대부분 ‘연차보고서’를 공개·제공합니다. 또한 모금기관은 모금액의 사용결과 ‘나눔포털’과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통해 기부금 모집결과 및 사용결과를 게시 공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자료제공 서울시 기부 길라잡이
- 2015-12-3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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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는 주고받음이다 PART6] 김종욱 (사)CEO지식나눔 공동대표의 생활에 밴 기부 실천
- ‘재능기부’는 돈이 아닌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에 내놓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다. 김종욱(金鍾郁·70) CEO지식나눔 공동대표는 그러한 기부의 힘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기부가 그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굳게 자리 잡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삶을 가꾸는 재능기부의 힘이란 무엇인지 들어보자. 슬쩍 지나간 그의 노트에 적힌 글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다 애 아니면 개다.’ 주변에서 그를 가리켜 ‘유머와 재치가 많은 어른’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촌철살인으로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경이로움에 대한 매혹, 어린아이와 같은 탐구심, 삶에 대한 환희만 있으면 늙지 않는다’는 새뮈얼 울먼의 시구를 평생 실천해 왔다고 말하는 김종욱 CEO지식나눔 공동대표가 그 사람이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한일은행 외국부를 시작으로 도쿄, 런던,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며 한빛은행 부행장,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 우리투자증권 회장을 거친 대표적인 금융전문가다. 2007년에 은퇴한 후 한미글로벌 기업에 경영 자문을 하고 있는 그는 기부의 기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CEO지식나눔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수하자는 의도로 모였습니다. 모임을 열자 한국장학재단에서 멘토링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가족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후대에 계속 전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어서 CEO지식나눔을 열었다는 김 대표는 나이 든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건전한 젊은이로 거듭날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기부라는 것이다. 돈이 아닌 삶을 전달하여 더 좋은 삶을 살게끔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거부감이 있는 국내의 기부 문화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처럼 들려왔다. 기부는 저축처럼 미리 떼어놓고 해야 하는 것 “제가 처음 은행에 들어갔을 때, 선배가 ‘너희들은 저축을 해야 한다. 저축할 돈을 미리 떼어놓으면 저축이 된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부를 해보니까 기부라는 것도 저축처럼 먼저 떼어놓고 해야 기부가 되지, 남는 걸로 기부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기부는 미리 떼어놓고 하는 것. 그것은 기부란 생활 속에 배어 있어야 가능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할 세 가지’라고 전제하며 기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설명했다. “첫째, 누구나 살다 보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아프지만 참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운동이 되고 큰 아픔을 분산시켜 줘요. 저는 아침마다 108배를 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나눠서 체감합니다. 둘째, 살다 보면 크게 피 흘릴 일이 생겨요. 수술을 해서 피를 흘리거나 단순히 피를 흘리거나, 어떻든 피를 흘릴 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흘린 피는 못 쓰니 다 버려야 해요. 그런데 일종의 기부인 헌혈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 보세요. 신이 그걸 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구나. 내가 더 피 안 흘리게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 가족의 피 흘림도 신이 막아준다고 봐요. 셋째, 살다 보면 큰돈을 쓸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조그맣게 각 사회단체에 자동이체로 한 달에 만 원, 삼만 원 정도 소액으로 보내면 신이 보면서 ‘돈 좀 썼네. 억울하게 돈 쓸 일 막아줘야지’ 하면서 막아줄 거예요. 증명은 못하겠어(웃음). 하지만 제 믿음입니다.” 기부는 조금씩 피를 흘리는 일과 같다 기부란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기부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기부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기부를 하면 언젠가는 도움을 받는다는 김 대표의 신념은 그저 무턱대고 생긴 긍정적인 생각일 뿐일까? 아니다. 김 대표의 삶이 그러한 자신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온 고마움을 기억하는 힘이야말로 김 대표가 가진 기부 신념의 기반이기도 했다. “회사는 날 해외에 보내줬으니까 그게 너무 고마워서,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부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1980년대에 영국에 가서 본 기부의 생활화가 무척 부러웠어요. 우리나라는 기부라고 하면 반짝하고 어떤 기간에만 할 뿐인데, 영국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죠. 거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기부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씩 기부를 위해 쓰는 걸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사실 기부라고 표현할 것도 없이, 나누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지혜의 자산 사회에 환원 김 대표는 손주에게도 나눔의 교육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지체부자유자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손주에게 돈을 줘서 그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고 한다. 받기만 하면 쓸 줄 모르기에, 주는 걸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주는 걸 안 가르치면 어른이 돼서도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원리예요. 그래서 기부가 세상을 사는 원리의 기본일 수가 있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줘서 뿌듯한 마음을 알게끔 해야 합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자식들에게는 사랑하는 연습, 베푸는 연습, 소통하는 연습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기부를 세상을 사는 원리라고 말하는 김 대표의 사고의 기반에는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연함은 심지어 물리법칙으로서의 중력에 대한 고마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중인데 만유인력의 법칙, 그러니까 중력을 고마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모든 것의 기본이 이 중력에서부터 비롯되거든요.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다들 붕 떠서 지내야 하죠. 중력만 봐도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당연시해요.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기적을 믿는 사람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는 사람이다. 나는 매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매 순간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자신이 노력한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마음. 김 대표의 강점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저는 전생도 있다고 믿어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50미터 앞에서 뛸 수 있는 사람과 50미터 뒤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나뉘거든요.” 김 대표는 그래서 면접을 볼 때,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나빴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나빴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았다고 생각해야 나중에 더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후배들을 가르치고자 했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무조건 달콤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 그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조심해야지. 가끔씩 저에게도 뭔가 당첨됐다는 전화가 와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그거 당신이 다 가지세요’, 그러지(웃음).” ‘냉정한 긍정주의자’로서의 김 대표가 꿈꾸는 CEO지식나눔의 미래는 모양이 차차 갖춰지고 있다. 우선 새터민 교육이 있으며, 오너의 2세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비즈니스 컨설팅은 계속 추진 중이며 최근에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재능기부는 특히 자존감이 저절로 높아진다 김 대표에게 은퇴 후의 멋진 삶에 대해 물어봤다. 생활화된 기부가 주는 저축된 힘 외에 그의 은퇴 후에 활력을 주는 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가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이는 74살이었다’라고 말한 게 있어요. 저는 ‘가장 행복한 나이’보다 조금 모자란 나이죠. 그런데 이제는 의무가 없고 손자는 귀여워만 하면 되니, 저도 행복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가끔씩 내게 젊어지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데, ‘지금 행복한데 왜 젊어져?’라고 대답하죠. 행복의 첫째는 자유예요. 를 쓴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다.’ 과거에는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어려웠던 일이지만, 나이가 든 이제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게 있는 법이에요.” 은퇴하면 많은 게 사라진다. 그 대신 얻는 것은 자유다. 나이가 만들어낸 자유와 생활 속의 기부로 축적된 힘을 김 대표는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처럼, 이렇게 늙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에도 당당한 자유가 배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 훈장 받는 일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기본적으로 안 돼요. 19살을 넘어 성인이 되면 100살과 똑같은 성인입니다. 그러니 나이로 누르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돈을 벌었다고 거만하게 행동한다든지 행동이 바뀌는 일부 사람들은 꼴불견이에요. 좋은 사람하고 함께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돈을 쓰는 자유보다 기부하는 자유를 가져보세요.” 김 대표는 CEO 멘토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나누고, 취업과 창업 지도를 통해 사회진출의 장애를 슬기롭게 넘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작은 일을 왜 ‘기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몹시 미안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돈이 아닌 다른 자원(resource)도 자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이 아닌 서로의 전문성을 모두 돈과 똑같은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CEO지식나눔에 대하여… 2010년 30명으로 출범한 (사)CEO지식나눔의 회원은 전·현직 국내 기업 임원 및 대표급 인사들이 강연을 통해 지식나눔 활동을 전개한다. 2015년 현재 75명으로 지난 5년간 대학생과 사회인 멘티를 1500여 명 지도했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630여 회 CEO 특강을 통해 연인원 6만여 명을 교육했다. 아울러 회원들이 강의 등 활동으로 모아진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대학생과 유학생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보조기구 구입에 기부했다. 회원들은 500만 원의 입회비를 내고 CEO지식나눔 모임에 가입해 모든 활동을 무상으로 하고 있다. 각종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 전액은 법인 운영금으로 사용하며, 남으면 사회복지재단 등에 다시 기부한다. LG화학 사장을 역임한 노기호 상임대표를 필두로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민경조 前 코오롱그룹 부회장, 김수근 차병원그룹 고문, 김기용 前 카길한국대표 회장, 강정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금융전문대학원 원장, 박문화 前 LG전자 사장, 박종식 前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 이방주 ㈜JR투자운용 회장, 허남석 포스코ICT 상임고문 등이 나눔 활동에 참여한다. 이 외에도 박주철 前 SK글로벌 사장, 신원기 前 르노삼성자동차 부사장, 윤봉태 GS칼텍스 상임고문, 이명우 동원산업 대표이사 사장, 최동수 한화그룹 고문, 최길선 현대중공업 총괄 회장 등이 주요 회원이다. 김종욱 대표는 은퇴 후 재능 기부를 하게 된 궁극적 이유에 대하여 “작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태인 기자
- 2015-12-3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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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움직임을 기록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스마트 밴드’
- 건강팔찌가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음이온이나 원적외선이 나와 건강에 도움을 주는 팔찌다. 그러나 요즘은 그 건강팔찌보다 더 건강에 도움이 되는 팔찌가 있다. 바로 스마트밴드다. 스마트밴드는 손목에 팔찌를 차고 건강을 체크하는 기계다. 손목에 차고 다니면 그것이 우리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스마트폰은 항상 손에 있는 것 같지만 가끔은 가방에 넣어 두거나 잠깐 놓고 어디 다녀올 수도 있는데 손목에 있는 팔찌는 매순간 손목에 있으면서 움직임 하나하나를 기록한다. ◇ 재미있는 경쟁은 내 몸을 춤추게 한다 스마트밴드의 기능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만보기처럼 걸음 수를 측정하는 기능이 있다. 예전에는 운동하면 ‘무조건 열심히 하자’라고 생각했다면 요즘에는 ‘조금이라도 꾸준히 하자’로 바뀌고 있다. 조금씩이지만 자주 하는 게 더 중요한데 스마트밴드는 오늘 하루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어제보다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알려준다. 눈에 보이는 기록은 운동에서 훌륭한 자극제 역할을 한다. ‘하루 만보 걷기’라는 목표를 세우고, 스마트밴드에 만보가 되었을 때 알람이 울리도록 맞춰 놓자. 알람이 울리지 않을 때는 더 많이 걸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지만, 알람이 울리면 생각보다 큰 뿌듯함이 생긴다. 보통 어제의 나와 경쟁하며 스마트밴드를 사용하지만 익숙해지면 만보를 걷는 기대치가 떨어지기도 한다. 운동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친구끼리 같은 스마트밴드를 사용해서 하루 얼마를 걸었는지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스마트밴드에서 친구를 등록해 놓으면 상대방이얼마나 걸었는지 내 스마트밴드에 표시가 된다. 같은 스마트밴드로 친구의 걷는 숫자를 표시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혼자 운동할 때는 지루하고 귀찮으면 포기도 했었다. 그러나 친구와 스마트밴드를 연결해 놓으니 친구가 걷는 걸음 수가 수치로 나와 경쟁심이 생기더라. 귀찮아서 취소했던 아침운동 대신에 저녁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운동에 경쟁의 요소를 넣으니 더 열심히 운동할 수 있도록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 스마트밴드로 손목 위의 전쟁이 시작됐다 스마트팔찌는 다른 말로 웨어러블(Wearable) 기기라고 한다. 웨어러블 기기는 옷이나 시계, 안경처럼 자유롭게 몸에 착용하고 다닐 수 있는 기기를 말한다. 말 그대로 들고 다니는 기계가 아닌 몸에 착용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과 더불어 IT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분야이다. 그래서 전자제품 회사에서 손 안의 전쟁이 끝나고 손목에 차는 전쟁이 시작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만큼 스마트팔찌의 제품도 다양해졌다. 저렴한 것부터 고가의 제품까지 가격대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스마트팔찌와 스마트시계가 있는데 이름만 알고 있어도 아는 척할 수 있다. ‘핏빗’이라는 팔찌도 있고, 샤오미가 만든 ‘미밴드’라는 팔찌도 있다. 애플에서 만든 ‘애플워치’도 건강을 체크해 준다. 기능과 모양이 달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보통 이런 기계가 나오면 비싸다는 인식이 있다. 아무래도 비싸면 아무리 좋은 것도 사용하지 않게 되는데 위의 제품 중에는 몇십만 원짜리 제품도 있고 2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제품도 있다. 이제는 스마트하게 운동하고 건강도 체크하자. ◇ 도구의 목적은 습관화 스마트밴드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 전화가 오면 진동이 느껴지고 깊은 잠을 잤는지 체크까지 된다. 걸음 수뿐만 아니라 계단을 몇 계단 올랐는지까지 표시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능이 있어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의지를 불태워 도구의 힘을 빌리지만, 결국 움직임이 습관처럼 몸에 배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멋진 스마트밴드를 손목에 차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쌀쌀해진 겨울에 움직임을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다. >>>글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전략명함 코디네이터)
- 2015-12-2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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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nior Fashion] 패션 신 스틸러 ; SOCKS
- 신발과 바지의 사이. 그곳은 은밀하게 자신을 보여주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당신은 여기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그 자체로 빛나기 힘들다. 소위 ‘나쁜 놈’이라 불리는 악역이나 톡톡한 감초 역할의 조연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패션도 마찬가지다. 말끔한 클래식 슈트나 반짝거리는 윙 팁 슈즈가 패션에서 주인공이라면, 양말은 그것에 빛을 더하는 명품 조연이다. 하지만 이제 양말을 단순히 조연이라고 표현한다면 살짝 섭섭하다. 이너웨어와 아우터의 경계에서 교묘하게 줄타기하고 있는 양말은 그 사람의 색깔을 보여주는 척도다. 어떤 컬러와 패턴을 바지나 액세서리와 매치할 것인가에 따라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컬러와 패턴을 모임의 성격이나 분위기에 맞게 매치할 수 있다면, 당신을 보는 타인의 눈빛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양말이 바지와 구두 사이에 드러나는 그 찰나의 순간, 당신은 은밀히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했다. 마치 영화의 ‘신 스틸러(Scene Stealer)’처럼. ◇ 센스 있게 신는 법 양말은 패션의 완성이다. 물론 스타일상 여름에는 양말을 신지 않거나, 페이크 삭스를 신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필수 아이템이다. 슈트를 입을 때는 종아리까지 길게 오는 양말을 신어 바짓단이 올라가더라도 피부가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일 터. 이와 같이 양말을 센스 있게 신으려면 어떤 요소를 고려해야 할까? 레그 웨어 브랜드 ‘보타(VOTTA)’의 김민재 대표는 “패션의 마침표인 양말을 선택할 때 컬러와 패턴도 중요하지만 착용감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체의 축소판이자 제 2의 심장이라 불리는 발이기 때문이다. 원래 양말은 신발에 컬러를 매치하는 것이 정석이다. 출근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한다면 회색이나 남색, 검정색 등의 양말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어떠한 신발과 매치하더라도 무난하게 코디가 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멋이나 패션에 재치를 가미하고 싶으면 녹색이나 노란색 또는 파란색 등의 단색 계열 양말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컬러를 매치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이럴 때는 넥타이나 벨트와 컬러를 맞춰 코디하는 것도 센스 있게 보일 수 있는 팁이다. ◇ 29가지 매력 ‘보타(VOTTA)’ ‘그냥 신는’ 이너웨어의 개념에서 점차 패션 아이템으로 인식되고 있는 양말. 그래서 요즘 양말은 더욱 디자인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트렌드에 발맞추다 보면 자칫 양말의 본질인 편안한 착용감이 도외시되기도 한다. 레그 웨어 전문 브랜드 ‘보타’는 이런 점에 착안하여 양말의 본질에 중점을 두었다. 오랜 시간 걸어 땀이 많이 나도 흡수가 잘 되도록 이집트 코튼을 사용해 양말을 만들었다. 거기에 착 달라붙는 착용감을 위해 수십 번의 샘플링 작업을 거쳤다. 신발 속에서 돌아가거나 벗겨지는 양말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함이다. 앞쪽의 봉제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한 땀 한 땀 직접 해 편안함을 살렸다. 길이도 종아리 중간 부분에서 감기도록 길게 디자인해 신은 듯 안 신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본질에 충실했다고 해서 디자인이나 컬러를 등한시하지도 않았다. 특히, 29가지의 솔리드 컬러 삭스는 때로는 중후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코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양말을 마치 하나의 도화지라 생각해 멋진 색만 엄선하여 칠했다. 29가지의 컬러 중 당신은 어떤 색깔이 되고 싶은가. 또 어떤 색깔로 제 2의 인생을 만들고 싶은가. 보타는 거기에 대한 대답을 줄 것이다. 양말로 말미암아. “Discover Your Color! Choose Your Own Style.” >>>도움말 김민재 보타(VOTTA) 대표 문의 02-6080-5032 / www.votta.co.kr
- 2015-12-18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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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비틀스가 살려낸 영국 리버풀, 올드 팝 광팬들 줄 이어
- 필자의 ‘버킷리스트 여행지’ 중의 한 곳은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리버풀엔 ‘비틀스’가 있기 때문이다. 통기타로 번안 곡들을 들으며 젊은 시대를 보낸 사람들. 소위 말하는 ‘팝송 세대’들은 여전히 올드 팝을 들으면서 스멀스멀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감성에 젖곤 한다. 젊을 적 추억은 팝송 음률에 남아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명치끝을 아프게 꼭꼭 찌른다. 비틀스 노래를 들으며 ‘지역 맥주’를 마시던 ‘캐번 바’를 내 어찌 잊으리오. ◇ 매튜 골목에서 만나는 비틀스 첫 무대 캐번 클럽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Manchester), 리버풀(liverpool)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축구선수들이 이 도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리버풀은 맨체스터를 거쳐 가게 된다. 리버풀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주변의 대로변 옆으로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열 지어 있다.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을 비롯해 엠파이어 극장, 아트 갤러리, 도서관 등. 특히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 홀의 규모(51m 길이, 22m 넓이)가 커서 눈길을 잡아끈다. 1838년에 초석을 마련해 1854년에야 완공된 최초의 네오클래식 건물은 법정과 콘서트홀이라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물 정면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앨버트 공의 동상과 참전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활황을 기억케 한다. 실내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1871년)과 12개의 동상이 있다. 현재는 각종 전시회, 연회, 축제 등의 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무엇보다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곳은 ‘비틀스(The Beatles)’에 대한 흔적이다. 도심 곳곳에서 비틀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애비 로드와 스트로베리 필드 등 그들 노래에 영감을 준 장소들, ‘비틀스 스토리(www.beatlesstory.com)’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들. 그중에서 여행자들이 ‘비틀스 일번지’로 찾는 곳은 매튜거리(Mathew street)다. 매튜 골목에는 5~6개의 퍼브와 클럽이 뒤섞여 있다. 숨은 그림 찾듯이 비틀스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찾아내면서 걷다 보면 골목 끝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논 동상을 만난다. 비틀스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는 캐번 1클럽(The Cavern Club) 앞이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이 만들어 낸 비틀스.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980),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 등. 비틀스는 이곳에서 근 2년간(1961년~63년) 292회 공연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첫 번째 클럽이 클래식하다면, 동굴 형태로 된 제 2클럽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왁자하다. ◇ 매일 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비틀스 음악 먼저 비틀스가 첫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1클럽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온통 비틀스의 흔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실내에는 작은 무대가 있고 한쪽에는 바 카운터와 초라한 의자들이 놓여 있다. 유행 지난 촌스러움, 칙칙함, 퀴퀴함이 함께 아우러진다. 대낮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가볍게 잔술을 마신다. 신 맛과 정제되지 않은 맛을 내는 지역 생맥주는 마실수록 묘하게 매력적이다. 해가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통기타를 두드리는 무명 가수의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퇴색한 컨트리 가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의 주인공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를 닮은 듯한 무명 가수가 이미 귀에 익숙한 팝송을 부른다. ‘렛 잇 비(Let It Be)’, ‘러브 미 두(Love Me Do)’, ‘이매진(Imagine)’ 등등. 가수는 힘겨운지 간간이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노래를 불러 젖힌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무대에 나가 음률에 맞춰 막춤을 춘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매튜거리의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진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를 남긴 비틀스 멤버 네 사람의 삶을 일일이 조명할 수는 없다. 단 놀라운 것은 이들은 악보를 볼 수 없는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수한 히트곡을 만들어 낸 신화 같은 존재. 그들을 더 이해하려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를 찾으면 된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캐번클럽, 스타클럽 등의 명소들을 재현해 놓았다. 또 비틀스가 출연했던 뮤직 비디오 등의 영상자료를 비디오로 볼 수 있다. 비틀스의 오리지널 무대 의상과 존 레논이 연주했던 피아노,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세기의 뮤지션 비틀스는 리버풀을 늘 빛내고 있다. ‘리버풀의 비틀스’가 아니라, ‘비틀스의 리버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 곳곳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영화 를 보면 좋다. 13명의 배우들이 영화 스토리에 걸맞게 비틀스 음악을 잘 매치해 놓았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전 애인으로도 알려진 짐 스터게스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또 ‘비긴즈-노 웨어 보이(Begins-Nowhere boy, 2009)’에서는 존 레논의 삶을 조명해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비틀스, 오노 요코 등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올해 5월, 73세의 노장 폴 매카트니는 내한공연을 했다. 비록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설은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판타스틱’을 외쳐댔다. 라는 다큐영화를 보면 2년 전의 폴 매카트니가 출연해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틀스라는 그룹은 오래전에 흩어졌지만 단 한 명의 뮤지션이 남아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리버풀 클럽에서 만취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클럽 앞에는 술 취한 사람들을 정리, 통제하는 지킴이들이 있다. 그들은 ‘필자처럼 좋은 사람(?)’만 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 해양 무역도시의 옛 잔상들, 노예 거래 리버풀은 바닷가가 있는 항구 도시다. 오래전부터 해양 무역 도시였고 20세기 초, ‘대영 제국 제2의 도시’로 불렸다. 그러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심히 파괴되었다. 특히 리버풀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 내 다른 어떤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받았으나 전쟁 이후 재건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항구 주변은 휘황한 현대적인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이 건물에는 머시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국제 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등의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 노예박물관이 관심을 끈다.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오래전, 이 항구에는 가나, 자메이카 인 등 무수한 노예들의 거래가 이뤄졌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국제노예박물관을 둘러보면, 죄의식조차 없던 그 시절의 영국민들의 잔인함이 떠올려진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관련된 많은 영화, 다큐들이 있지만 최신작이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면 그때의 잔인성과 몰인간적인 영국 귀족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라는 현재 유명 배우의 출연 계기가 독특하다. ‘컴버배치’라는 성씨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서 노예를 부렸던 조상의 흔적이었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에이브러햄 컴버배치(1726~1785년)가 그의 조상이다. 베네딕트의 어머니인 여배우 완다 벤담은 노예제 보상 피소를 우려해 본명으로 배우활동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속죄하는 의미를 담아 이 영화에 적극 출연했다. 에서는 선량한 백인 윌리엄 포드로 분했다. 또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과 무관치 않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스햄튼(1912년 4월 10일)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항해하다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대형 여객선. 대서양 횡단여행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이 배의 공식항구는 리버풀이었고, 승무원과 승객의 상당수도 리버풀 사람들이었다. 타이타닉호의 탄생과 침몰 및 각종 배의 모형을 전시한 곳이 해양박물관이다. 해질 무렵, 리버풀 대성당(Liverpool Cathedral)을 향한다. 영국 국교회의 성당으로는 세계 최대의 크기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탑 위로 올라가 바라본 리버풀 도심은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건물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리버풀을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을 알기에 그날 바라본 낙조는 유난히 쓸쓸했다. ◇ Travel Tip - 현지 교통 정보 런던에서 지방 이동은 특급기차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익스프레스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는 예약하지 않으면 버스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싸다. 영국 대표 음식들 영국의 아침 식사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양이나 메뉴가 풍성하다. 영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샌드위치와 피시 앤드 칩스를 들 수 있다. 카드놀이를 좋아했던 샌드위치 백작이 카드놀이를 하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냈다는 샌드위치는 영국인의 일반적인 점심 메뉴다. 시차 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까지는 서머타임으로 8시간 느리다. 전압 다른 유럽권역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꼭 어댑터가 필요하다. 표준전압은 230/240V, 50㎐. 플러그는 발이 3개 달린 BF 타입. 화폐 단위 파운드를 이용한다. 연계 도시 여행 시작을 런던에서 했다면 리버풀을 거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glasgow) ~ 에든버러(Edinburgh)로 가면 된다. 글래스고는 공업도시이고 에든버러는 옛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도(古都)다. 특히 에든버러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주 멋진 도시다. 추천 스코틀랜드 산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 : 스카치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 그중 오직 맥아의 과정을 거친 보리 한 가지로 만들어지며 동일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위스키(Single Malt Whisky)가 최고다. 현지인에게 추천 받은 브랜드로는 Glenfiddich, Jura, Talisker가 있다. 특히 탈리스커는 한국인 술 마니아에게 큰 인기다. 맥주는 이니스 앤 건스(innis & gunns)가 맛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11-3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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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 라이프] 평균 나이 75세, 마음은 청춘악단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의 행복 메들리
- 서울 신답사거리 명문예식장이 있던 자리에서는 매주 수요일이면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합주가 흘러나온다. 힘 있고 웅장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청년악단이 아닐까 싶고, 짜임새 있는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CD를 틀어놓은 듯 흐트러짐이 없다. 내공이 느껴지는 이 연주의 주인공은 바로 평균나이 75세의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다. 그들에게 있어 음악은 없으면 안 되는 공기와 같고, 손때 묻은 악기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평생친구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우리는 여러 곳에서 나름의 세월을 보내다가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래도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며 왔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각자가 가진 소리는 다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친구가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어서 멋진 하모니가 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모두 행복을 세는 아름다운 신중년의 삶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김주면(金周冕·83) 단장이 9월 20일 열린 공연 ‘신중년의 길을 함께 가는 길벗들의 하모니’에서 단원들을 소개한 말이다. 그가 ‘행복을 세는’이라고 표현한 것은 ‘살아온 햇수를 세지 말고, 친구를 세어가며 살아가라’는 글을 의미 있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년 전 아내와 사별했지만, 50여 명의 단원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행복을 세어가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이 세상을 다하는 그날까지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김주면 단장을 만나 악단의 요모조모에 대해 물어봤다. 시니어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게 된 배경은? 1980년대, 당시 명문예식장 대표 겸 성동문화원장이었던 신동호 회장님이 악단 창단을 준비하고 계셨죠. 1989년에 ‘무궁화 시니어 윈드 오케스트라’가 탄생했어요. 처음에는 저와 함께 공군군악대에 있었던 강도희씨가 지휘를 맡았어요. 창단하고 2년 정도 뒤에 제가 현직에서 퇴임하고 악단에 들어갔는데 그땐 유포니움이라는 악기를 연주했죠. 그러다 신 회장의 권유로 단장을 맡게 돼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벌써 25년쯤 됐겠네요. 단원들의 특징 행사마다 참여하는 인원이 다르긴 하지만 50여 명의 단원이 주기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대부분은 학창시절 기악을 전공하고 육·해·공·해병군악대를 거쳐 경찰악대에서 평생 연주를 하다 퇴임하신 분들이에요. 그렇지 않은 분들도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이곳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죠. 나이는 제가 83세로 제일 많고, 드럼을 치는 김하용 단원도 저와 동갑이에요. 평균 나이는 75세 정도죠. 가장 젊은 친구는 지금 총무 겸 무궁화악단 홍보팀장을 맡은 허면회 단원인데 56세예요. 제 아들이랑 동갑이죠. 단원으로 활동한 지는 5년 정도 됐고, 경찰대학소속 국립경찰교향악단 출신인데 확실히 젊은 친구라 악단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덕분에 서울시 재능나눔봉사단으로 활동도 했고, 표창장까지 받게 됐죠.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려면? 대개 시니어 오케스트라라고 하면 은퇴하고 취미로 악기를 배운 아마추어로 아는데 우린 평생 음악을 해온 사람들이죠. 저 역시 악기를 처음 손에 든 지가 70년이 넘어가고, 다른 분들도 수십 년간 악기를 다뤄온 프로예요. 그렇기 때문에 뒤늦게 악기를 배운 초보자들은 단원이 될 수 없는 게 현실이죠. 그런 것을 회칙 등으로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소개로 왔다가도 단원들의 수준 높은 연주를 듣고는 발길을 돌리곤 하니까요. 오케스트라 구성 적게는 40여 명에서 많게는 60여 명까지 합주해요. 클라리넷, 피콜로, 플롯, 혼, 유포니움, 알토색소폰, 테너색소폰, 바리톤색소폰, 튜바, 트롬본, 트럼펫, 베이스기타, 드럼, 아코디언 등 10여 가지 악기가 훌륭한 화음을 이루죠. 클라리넷, 색소폰, 트롬본, 트럼펫 연주자가 과반수를 차지해요. 오케스트라 내에 경음악(스윙밴드)악단, 선교악단, 캄보악단, 탱고악단, 현악5중주악단, 노래자랑운영팀 등 다양한 소규모 악단도 편성돼 있어요. 주요 활동 1년에 40~50회가량 의미 있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요. 각종 연주회를 비롯해 정부나 각 시·구청 의식 행사, 캠페인 행사, 종교 연주 행사 등 다양하죠. 2012년에는 여수엑스포 초청연주회에, 2013년에는 순천 관악제 초청연주회에 나가는 등 먼 지방까지 연주를 가기도 하고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소속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행사에 나갈 때 의미가 있죠. 10월 23일과 30일에도 나주 학생독립기념일 공연에 나갔어요. 행사를 제외하고는 매주 수요일마다 명문예식장 자리에 있는 연습실에 모여 연습도 하고 친목도 다지고 있습니다. 즐거운 점과 힘든 점 무엇보다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훌륭한 단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행복하죠. 우리는 공연을 할 때 잘 다려진 제복을 갖춰 입거든요. 그렇게 입고 무대에 서면 관객이 우릴 보고 멋있다고 환호를 해주는데 그땐 정말 제 나이를 잊을 정도로 즐거워요. 각자의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도 황홀하고, 그 연주를 듣고 박수 치며 감격하는 분들을 볼 때 보람을 느끼죠. 힘든 것은 단원들이 나이도 있고 하다 보니 건강상의 이유나 다른 사정으로 인해서 참여하지 못할 때예요. 함께할 수 없다는 게 아쉽고, 단장으로서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구성원이 빠지게 되니 합주에 지장이 생겨 곤란하기도 하죠. 돈을 받아가며 하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강요하긴 힘들잖아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해주는 단원들을 볼 때 참 뿌듯한 마음이 들죠.
- 2015-11-2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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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백발이 아름답다
- 아들 결혼식날. 사람들의 덕담이 결혼식장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 - 신부 예쁘다. 신랑 잘 생겼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아들 결혼식장에서만이 아니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고, 신랑 아버지라는 이유로 건배사를 하게 되었다. 많은 손님들 앞에 잔을 들고 나서니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하객들의 웅성거림이 멈추고 잔을 든 채 모든 눈들이 내 입을 주시한다. 그런데 내 귀에 맴도는 말은 신랑 신부 아름답다는 인사말들이고, 정말 내 곁에는 아름답게 성장(盛裝)한 신랑 신부가 서 있다. 내 입이 열렸다. “오늘 여러분의 축하를 받으며, 여기 이렇게 멋진 신랑과 신부가 새 세상으로 첫발을 디딥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세대도 아름답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이 저희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들이 우리 나이가 되어 즉 우리의 손자를 출가시킬 때까지, 앞으로 한 세대를 잘 살아내야 우리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떨결에 터진 이 말 때문에, 물론 아내에게 몇 마디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뭐! 틀린 말도 아니구먼, 우리 부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부러워한다고 믿는 편이다. 좋아한다는 것과 부러워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내가 청년을 좋아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곧 지금의 내 삶을 후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살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 해도, 난 지금보다 더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난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남은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나의 늙음을 부러워하도록 살려고 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젊은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근사하게 늙은 분들이 분야마다 여기저기 눈에 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어지럽고 청년들이 비틀거린다 하더라도 그래도 앞날이 밝은 것은 여러 분야에서 드러나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멋진 백발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늙은이 없이 멋진 젊음이 생겨나기 어렵다. 요즘 단풍이 한창이다. 여기 몽골도 그렇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수종은 덜 다양하지만, 그래서 더 정갈한 맛도 있다. 바람이 불면, 산 전체가 환하다. 잎의 앞뒤로 구별되는 한껏 채도가 높은 노랑 일색이다. 바람이 세지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다 이내 우수수 떨어질 때면, 보는 눈이 황홀하고 마음까지 몽롱해진다. 겨울을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피는 봄의 꽃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면, 단풍은 의젓하고, 숭고하다. 추위에 억눌려 참았던 분을 한껏 터트리는 힘의 방향이 봄의 기운이라면, 단풍은 여름 내 넉넉히 받은 자연에 감사하여 스스로 절제하는 모양이다. 나무마다 겨우 내 생명을 부지하느라 목마르고 배고파 땅이 녹자마자 뿌리로부터 공급받은 양분을 가지를 통해 서로 다투듯 빨아들였다. 그러고도 잎이 통통해지도록 양분을 저장까지 해 두기 바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영양 공급이 예전 같지 않다. 벌도 나비도 뜸해졌다. 욕심도 심심해져, 하나 둘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내 곁의 나같은 다른 잎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하루 이틀 한 주일 열흘을 지켜보니 그들이 아름답다. 내게 쌓아 두었던 양분을 주고 싶을 만큼 그들이 예쁘다. 그들에게 양보하고 절제한 만큼 몸도 맘도 가벼워졌다. 그렇게 자꾸 얇아졌을 어느 때. 만산홍엽(滿山紅葉)! 모두 아름답다. 나도 다른 잎처럼 아름다운지 몰랐다. 온 세상이 아름답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란 성경 잠언이다. 젊은 날의 푸르름을 다하고 곱게 물든 단풍은 아름답다. 푸르름을 다한 단풍이 아름답듯 나의 백발도 그처럼 아름답기를 바란다.
- 2015-11-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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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만사]영화배우 문숙 “안티에이징 그 자체가 스트레스죠”
- 문숙(文淑·61)이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를 향한 놀라움은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젊은 세대들로부터 먼저 왔다. 그녀의 모습에는 분명 세월을 증명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나이가 예순에 달했다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단순히 ‘동안’이라고 표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종의 생명력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출연하며 무려 38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인간’ 문숙이 밝히는 남다른 젊음의 비결과 삶의 철학.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우리는 문숙을 흔히 ‘배우’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배우 문숙’이라는 명칭에 손사래를 친다. “영화배우요? 40년 동안 안 했는데, 갑자기 영화배우 노릇을 하려니까 힘들어 죽겠어요(웃음). 하긴 내가 한 게 배우밖에 없으니까 한국에 오면 배우라고 하는데, 배우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웃음) 갑자기 ‘선배님’, 이러면 내가 뭐 어색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웃음).” 인터뷰 내내 문숙과 같은 자유인을 만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든 훌훌 털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거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름 붙일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지금 이 순간을 체험으로 사는 것밖에 없기에 잡을 만하고 걸릴 만한 게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 중의 강박은 바로 아름다움일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혹은 더 아름답게 되기 위하여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마인드 컨트롤을 매일 하며 살고 있다. 이에 관하여 문숙은 철저하게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라고 조언했다. “사람들이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데 문제가 있어요. 그걸 확 놔버리면, 그만큼 나이에 맞게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괜히 그 에너지를 젊어지려고 애쓰는 데 쓴다는 거죠. 그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늙어 보이면 어때요. 주름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주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주름은 내가 제일 많을 걸? 대한민국 여자들 중에서.(웃음) 나이가 들면 지혜가 생기는데, 시간이 나에게 마련해준 것에 대해 반항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노송이 젊은 소나무에 비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는 눈이 없는 거죠.” 그녀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은 문숙 본인이 가진 아름다움과도 일치한다. 혹시 그렇게 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아직 일반적인 삶의 입장에 서서 물어봤다. “오히려 노력을 덜해야 할지 않을까요? 난 한국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피부에 쏟는 노력을 다른 데로 돌리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걸요. 그건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고 있다는 거죠.” 문숙은 해외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으며, 그만큼 아름답게 보였다고 말했다. 그 생명력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에 비해 스스로에 대해 자신 없어 하는 게 안쓰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원래 우아해요. 왜냐하면 우주의 기운이 우아하고, 우리는 그 기운의 소산물이기 때문이에요. 스스로를 우아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 건, 디스커넥트(단절)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과 분리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의 본질을 찾아서 접속시켜야 해요. 그러면 우아해질 수밖에 없어요. 꽃도 새도 우아한데 하물며 인간이야, 우아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돼요.” 목적 없는 생활의 기쁨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아픔과 익숙한 사이가 된다. 오랜 기간 수행한 요가 수련자로서 문숙은 아픔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요가는 자신과 함께 하는 수행이며 그동안 쌓여 있던 침체된 기운들을 정리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아프면 행운이에요. 왜 아픈지 그 원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까. 그래서 아픈 건 운이 좋은 거죠. 요가를 하면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어서 아픔 속으로 들어가게 해 줘요. 그 전에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모든 게 밖을 향했어요. 목적의식, 욕구 등등. 그러다보니 제 몸은 혼자 살아남아야 했죠.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다른 데로 가 있으니까 몸이 혼자 움직여야 하니 아프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프면, 내가 아픔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아요.” 자신에게서 어긋난 것을 고치고 나다움을 찾는 것. 문숙의 철학은 그렇게 간명하면서도 강직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성공을 위해 설정해야 하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목적’이란 진정한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목적을 갖고 사시잖아요? 그런데 목적을 갖고 살면 꼭 사고가 생겨요. 이루면 ‘이게 아니야, 허전해’ 하는 생각이 들어 또 찾게 되고. 그래서 저는 목적 자체를 버리고 체험 그 자체로만 살아요. 그렇다 보니 기대가 없기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죠. 그때그때 살기 때문에 현재에 더 충실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커질 수 있어요. 오히려 순조롭게 살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은 ‘편안하다’는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으면 괴로워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지 상황은 변하지 않아요.”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는데 왜 기대를 해요?” 문숙은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지금 다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 자체에 대해서, 체험자로선 적극적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이진 않다는 그녀의 말을 충족시키는 확신이었다. 그토록 확신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부러웠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졌다. “불행도 우리가 만들어낸 거예요. 불행과 행복은 중요한 게 아녜요. 그건 그 사람들 자신이 만들어낸 거죠. 컵에 물이 반 컵 차 있을 때, 그걸 반 컵밖에 없다고 보느냐 반 컵이나 있다고 좋아하느냐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행복에 너무 집중하면 불행도 커져요. 그래서 쉬이 행복하다고 떠드는 사람은 그만큼 그림자가 큰 거죠.” 행복도 애쓰면 불행이 된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자연 그대로의 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때,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직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 삶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기대를 하느냐고 반문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지금은 애써서 하는 일이 없어요. 그리고 애써서 하면 잘 안 돼요. 자신이 잘될 일은 애쓰지 않아야 나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반면 자신이 잘하는 일은 오히려 에너지가 생겨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확연해져요.”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해져요 문숙은 이시형 박사의 힐리언스 선마을에서 요가와 요리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라는 책도 낸 자연식 전문가로서의 그녀만큼 지금까지 접한 그녀와 어울리는 일도 없을 듯했다. “안 먹고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남의 생명을 섭취하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시금치가 나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났겠어요? 그러니 먹어야 할 게 있고 안 먹어야 할 게 있는 거죠. 이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고 저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죠. 자연식이라고 좋다고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하면 그게 또 스트레스가 돼요. 내가 진짜 필요한 게 뭔가가 중요해요. 우리는 오관(五官)의 노예가 되어 있잖아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더 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 기도하는 마음이 자연히 생겨요. 그리고 몸이 먼저 알게 돼요.” 문숙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를 물어봤다. 그녀답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와 지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애해야지, 남자 보면 두근거리지, 아이 낳아야지, 아이 먹여줘야지…. 복잡했어요. 인류 종족을 위한 역할을 하느라고 나도 모르게 아주 힘들었어요(웃음). 이젠 나만 행복하면 돼요. 내가 우울하면, 내 옆에서 우울해할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내가 행복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어요. 누군가를 행복하게끔 해주는 게 아니라. 이젠 그게 가능하잖아요?” 그녀는 그동안 남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걸 남을 위해 살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이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복잡한 삶이 내 몸을 떠난 거예요. 그때 기억나시죠? 모든 게 아름다웠잖아요. 모든 게 가능했고.” “난 지금 덤으로 사는 거예요.” 살아있으니 하루하루가 괜찮다고 말하는 문숙의 맑은 눈은 흡사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삶의 막바지에 도달했음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사람의 눈이 저토록 맑고 생명력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역설적인 느낌이었다. “60살 넘었잖아. 난 덤으로 사는 거예요. 오행에서 육십이면 다 산 거니까.” ‘다 살았으니 덤으로 살고 있는 중’이라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에너지를 보면 던질 수밖에 없는 다소 짓궂은, 아직도 이만희 감독의 얼굴이 기억나냐는 질문이었다. “이만희 감독님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해요. 60평생 그 분 처럼 멋진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웃음).” SHE IS… 영화배우 문숙씨는 고교 재학 중 연기자로 데뷔해, 스무 살에 영화 ‘삼포 가는 길’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대종상 신인상을 받은 그는 23세 연상인 고 이만희 감독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결혼 1년 만에 병으로 숨졌고, 그는 미국으로 갔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고, 병원에서는 치료할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으로 묵언명상 수련을 떠났다.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산속에서 매일 열네 시간씩 요가와 명상 수련을 했다. 수행을 하며 건강을 되찾은 그는 음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연치유식 요리연구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2015년 자연식 치유가로 검정색 고무신, 탐스러운 은회색 머리카락, 짙고 바른 눈썹, 자연 색깔의 쇼울을 걸치고 우리 곁으로 왔다.”
- 2015-11-0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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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6년生, 내겐 과분했던 내 인생
- 1946년 양력으로 11월 3일에 태어났다. 경주 외곽에 있는 나원, 외갓집에서였다. 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호르몬 작용의 산물이라 했고, 엄마는 운명이라고 했다. 1947년에 서울로 갔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서 다시 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검은색 토탄 가루를 뿌려가며 밥을 짓던 것과 고무줄 장사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글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전쟁이 났다. 양친이 이혼한 뒤였고 엄마는 나를 이끌고 피난행 열차를 탔다. 엄마는 아버지가 거짓말쟁이에 술고래여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쟁 기간에 통역관을 지냈다던 것도 믿지 않았는데 성장한 뒤에 만난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보여준 아버지의 사진, 미군과 찍은 것들을 보고 그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 피난 열차가 오산에서 쉴 때 엄마가 나를 개울로 데려가 몸을 씻겨주었다. 그때 기차가 폭발했다. 오지리 폭격기가 위치 오착으로 폭격했다는 것은 엄마의 얘기와 기록에서 확인했다. 엄마와 나는 몇 날 며칠 걸어서 경주, 외가로 갔는데 걸으면서 잤던 기억, 자느라 엄마를 놓쳐 울고불고했던 일, 원두막에서 참외를 훔쳐 먹던 일들이 지금도 흐린 필름처럼 떠오른다.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그날로 떠났다. 내가 잠든 사이였다. 나는 밤새껏 울었고 외삼촌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업고 달래주었다. 큰외삼촌은 나보다 14세, 막내 삼촌은 10세가 많았다. 그들은 나의 어버이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공부를 잘하고 시를 쓰던 막내 삼촌은 공일이면 새를 보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사상계’ 애독자였는데 그가 모은 책들을 나에게 전수했으나 이사가 잦았던 나는 수년 전 그 책들을 정리하고 말았다. 나는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전쟁이 난 다음 해,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나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두 번 낙제를 했다. 입학 당시 내 동기로 14세 소녀도 있었다. 최초로 본 활동사진은 아홉 살 때 동사(洞社) 마당에서 본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들던 장면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던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57년, 부산 동래온천으로 이사를 했다. 우장춘 박사가 돌아가셨을 때 원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운구를 하고 온천장을 한 바퀴 돌았고 그때 행렬을 따라다녔던 것은 그분이 훌륭한 육종학자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관을 멘 오빠들이 잘 생기고 멋있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사회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댁은 동래였고 나는 종점인 온천장이라 가끔 같은 전차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반 아이들과 어울려 선생님 집엘 갔는데 딸이 넷이었다. 나는 대뜸 “기생을 맞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학생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살던 온천장엔 권번이 있었고 세 살던 집 다른 방에도 기생들이 살아 첩이나 씨받이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아들을 낳아 대접받는 기생들이 생각나서 그렇게 지껄인 것인데 선생님은 내 저능한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고 조용히 나무라셨다. 나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시험기간 동안 생물시험지 뒷장에는 또 만화 라이파이 여주인공 제비를 그려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생물 선생님은 나의 정신 감정을 주장했고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못생긴 데다 공부도 못하는 나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두둔하고 또 챙기셨을까? 중3 때, 5·16 군사 정변이 터졌다. 중2 때 담임,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교직원노동조합)원으로 잡혀가셨다. 잡혀가신 선생님들이 부산에서만도 수백 명이라 했고 그분들이 갇혀 있는 곳은 서면에 있는 태화극장 뒤였다.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여서 점심시간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철조망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았다고 학교로 돌아온 뒤 다른 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도에 그분 아드님을 만났다. 교노조 사건 뒤에 태어났다던 잘생긴 아들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내 얘기를 하셔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찌 아들에게까지 내 얘길 하셨고 또 만나보라고 하셨을까. 중학교 때 내가 했던 실언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에 와서는 김동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곁엔 우수하고 잘난 제자들이 많았다. 학생 스타들이 여럿이었고 한 해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된 천재도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열등생이었고 그럼에도 나는 재학생 작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장편을 써서 김동리 선생님에게 가져가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선생님 제자로선 수준 미달이란 것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책은 내고 싶고 출판사에서는 선생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데요.” 며칠 후 추천사 원고를 주시면서 “앞으론 단편을 많이 쓰면서 문장을 치밀하게 직조하는 공부를 해라”고 하셨다. 이때부터는 문예지로의 진입이 내 열렬한 소망이 되었고 한분순 선배가 문을 열어주어 간신히 꿈을 이룰 수 있었다.(한 선배,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대학 졸업 후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내 독서량은 대부분 교정을 보면서 채운 것들이다. 세계명작들, 종교와 사상에 대한 책들도 그때 읽었고 전에 본 것들을 수차례나 다시 본 것들도 많았다. 1971년 범우사에서 일할 때였다. 범우사는 ‘다리’라는 시사잡지사에 속한 출판사였고 간행은 주로 번역물로 하이데거, 융, 러셀, 칸트, 토인비, 문예물 등이었으며 더러는 시대진단 비평지도 출간했다. 이때 ‘상황’이라는 시사지 교정을 보았는데 내 무지로 몇 개의 오자를 내고 말았다. 그때 그 책을 주관하던 임헌영씨가 “오자가 하나도 없으면 읽을 때 지루하잖아요. 괜찮아요”하고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임헌영 선생은 지금도 내겐 자상한 선배님이다. 주어진 인생 뚜벅뚜벅 걷다 1972년 10월 17일, 경향신문사에 있던 임헌영씨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광화문으로 탱크가 들어오고 있다”, “쿠데타인 것 같으니 어서 피하라”고 말했다. 마침 주변에 김상현 의원 차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차로 몰려가서 유신선포에 대한 방송을 들었다. 윤형두 사장은 도피를 하면서 내게 중요 원고들을 옮길 것을 지시했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출간을 앞둔 원고와 서류 등을 챙긴 뒤 뒷길로 해서 귀가했다. 그 이후로는 살벌한 시기였다. 출판물은 전부 사전 검열을 했고 검열 장소는 시청이었다. 내가 가져간 교정본들은 거의 반 이상이 빨간 줄이 그어졌고 그게 귀찮아 나는 동서문화사로 직장을 옮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학동창 오정희가 이상문학상을 받던 날이었다. 그녀의 축하연은 다음 날 식당에서 열었는데 그때 모인 동창들은 그 충격 때문에 제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1980년, 제 5공화국이 들어섰다. 출판사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5, 6년 가까이 해오던 리라이팅(극본을 소설로 쓰는 일)도, 외주로 나오던 교정일도 다 끊겨 버렸다. 5월 말경이었다. 광주에서 여성회를 하던 홍희담(깃발을 쓴 소설가)씨가 올라와 광주항쟁 수배자 두 사람을 숨겨주면 매달 생활비를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돈도 받고 좋은 일도 하고, 그건 횡재였다. 더 행운이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실학과 사회, 역사는 물론 리얼리즘 공부도 했다. 1982년, 남영동 정보원으로부터 은닉에 대한 조사를 받긴 했지만 그건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2초쯤 지나간 소나기에 불과했다. 1982년 정신대 이름으로 징집된 위안부 이야기를 썼다. 남태평양 현지 상황까지 사실적으로 쓴 소설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고 이 또한 수배자들이 일러준 책 ‘정신대 실록’을 읽은 덕이다. 굳이 이 사실을 밝히는 까닭은 피해국 중에서도 위안부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나는 여러 나라에 초청되기도 했고, 1992년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있었던 ‘일제 만행사에 대한 규탄대회 겸 심포지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내가 발표한 내용은 미얀마 위안소와 직접 취재를 했던 필리핀 상황에 대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종국 선생님을 소개했다. 그분은 정신대로 징집된 위안부 기록을 찾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해서 관보 2만 장을 복사했고 신문 기사들을 필사했다. 정신대로 간 여성 20만 명 중에서 반 이상이 성노예로 배치된 실태는 그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그분인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추모박수를 보냈다. 4박 5일의 심포지엄이 끝난 후 모나시 대학에 초청을 받았고 일본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씨와는 시드니 대학에서 합동 강연도 했다. 오늘도 나는 빌고 있다. 할머님들의 상처가 봉합이라도 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1997년, 딸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때 나도 따라갔다. 성장한 아이와 함께 지낸 타국생활, 그 3년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행복의 결과는 가산이 모두 탕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그 또한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인 것을.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정신연령조차 낮았던 내가 참으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멋진 선후배를 얻었으며 대중소설가로 출발해서 본격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삼촌이 다른 책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 날 사랑하고 보호해주었던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로 잡혀갔다는 것, 범우사에서 일하면서 유신을 맞았던 일, 광주항쟁 수배자들을 숨겨주었던 것 등이다. 이데올로기나 사회비평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주어진 삶이 그랬다는 것, 그 덕에 여러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내 삶의 색채가 어떠했든 분명한 것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
- 2015-10-1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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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나는 ‘현대판 화전민’, 지금은 내 인생 마지막 도전”
- 김창렬(金昌烈·66) 한국자생식물원장은 식물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유명인이다. 토종 야생식물을 재배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업화했고 토종식물만을 소재로 식물원을 설립해 강원도 평창군의 명소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물원이 3년째 문을 닫고 있다. 김 원장은 갑자기 전국일주 마라톤을 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 봤다.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참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식물원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국립공원 입구 산자락에 위치한 한국자생식물원이다. 1999년 6월 국내 1호 사립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와 들풀 약 수천 종이 테마, 계절별로 심겨 있다. 약 5만 평에 달하는 식물원 산책로에서 갖가지 한국 자생식물을 관람하다 보면 우리 식물에 대한 열정이 도처에 묻어난다. 이곳을 만든 김창렬 원장이 일궈온 삶도 식물원처럼 독특한 구석이 있다. 독재에 맞섰던 정치학도 청년은 문득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풀 농사를 지었다. 달리기도 시작했다. 화재로 식물원을 휴관해야 했던 2010년에는 마라톤으로 전국을 일주하기도 했다. 가을이 내리는 평창에서 그를 만나 그의 삶에 대해 들었다. 66세 김 원장의 ‘인생 마라톤’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뜨거웠던 운동권 청년, 옥살이 후 농사를 택하다 한때는 그도 누구 못지않게 가슴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 197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그는 소위 ‘운동권’이었다. 어수선한 시국 속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당해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를 몇 군데 두드려봤지만 꼬리표가 늘 발목을 잡았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풀 농사를 짓겠다”며 강원도행을 결심했다. 그는 충청도 출신이지만 고향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떠밀리거나 도망치듯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결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할아버지도 농부였고 아버지도 농부였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자식은 농사꾼이 되지 않길 바라셨다. 내가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사회에 나왔다면 전혀 다른 길을 갔겠지. 하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결국 농사꾼이 되기로 했고, 이왕 농사를 한다면 배추, 무 같은 평범한 작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농사를 그분들과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김 원장의 고민은 ‘돈 되는’ 농사였다. 마침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 분위기로 국토공원화 사업이 한창이던 때였다. 외래종 일색의 원예종 보급에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외국 꽃을 들여와서 꾸며 두면 뭐하나. 한국에 오면 한국의 모습을 보러 오는 것 아니냐. 차제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꽃과 나무 중에서 예쁘고 관광가치가 있는 식물을 대량으로 재배해보면 돈으로 좀 바꿔볼 수 있겠다 싶더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결심을 밀어붙였다. 설악산 에델바이스로 시작한 소중한 추억 에델바이스(솜다리)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김 원장에게 에델바이스는 특별히 더 소중한 추억이다. 1980년대 설악산에 가면 관광기념품으로 설악산에서 채취한 에델바이스를 액자에 넣어 팔았다. 마침 영화와 대중가요 등에 에델바이스가 소재로 쓰이면서 많은 사랑을 받던 때였다. 장사하는 이들은 설악산의 에델바이스를 캐서 팔고, 당국은 멸종위기종 식물의 훼손을 막으려 하는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김 원장은 “에델바이스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산에서 캐오지 말고 대량으로 재배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면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설악산 상인들에게 수요조사를 해봤더니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가져오면 다 사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델바이스 씨앗을 채취하느라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연 20여만 개를 생산해 한 송이에 120원씩 팔았다. 이후 백리향, 구절초 등 다른 야생화까지 재배품종을 넓혔고 현재의 식물원도 일구게 됐다. 꽃말처럼 김 원장에게도 에델바이스가 ‘소중한 추억’이 된 셈이다. “가장 뿌듯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돈하고 풀하고 바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풀 농사도 하나의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증명한 것이니까. 거창하게 말하면 고부가가치 농업분야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리고 전국적으로 자생식물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게 했다는 것. 한 분야를 먼저 갔다는 것. 이런 부분에서 지난 삶에 보람을 느낀다.” 불타버린 식물원, 문득 떠난 마라톤 전국일주 식물원이 화마를 입었던 2010년 한글날은 김 원장에게 떠올리기 싫은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식물원 전시장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다. 목조로 만든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했다. 바로 화재신고를 했지만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겨울을 앞두고 있어 공사도 어려웠다. 식물원을 복원하고 보수하려면 긴 시간 문을 닫아야 했다. 망연자실하며 멍해진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것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전국일주 마라톤이었다. 머릿속에 뭔가 새로운 생각을 채워 넣으려면 일단 머릿속을 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 마라톤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강원도에 터를 잡은 후 매일 오대산을 달리며 생각을 정리해 왔다. 식물원 운영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와 용기가 떠오를 것 같았다”고 말했다. 42.195km 풀코스를 정식으로 완주한 경험도 어느덧 100회를 넘긴 때였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됐다. 강원도를 향하던 날처럼 뒤돌아 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 장장 75일간 무려 1500km를 뛰었다. 식물원에서 출발해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중부와 임진각을 거쳐 다시 영동지역의 출발점까지 매일 평균 20km 이상을 달렸다. 한겨울의 추위, 눈보라와 싸우는 고단한 길이었다. 점점 피로가 누적됐다. 왜 뛰는 걸까. 그는 “오직 그만두지 않기 위해 뛰었다.” 당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새 도전, ‘식물원+숙박시설’ 복합 휴양시설 구상 마라톤 애호가들에게는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라는 지명이 꽤 유명하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 구간의 결승점 전 10km지점에 있는 언덕코스를 일컫는 말이다. 현재 김 원장의 인생도 바로 이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생식물원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휴관에 들어간 상태다. 김 원장은 “최근 몇 년간이 강원도를 처음 찾았던 때보다 어렵다”라고 했다. 자생식물원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원’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뒤부터다. 식물원이 가족들의 가벼운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자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여기저기서 많은 예산을 투입해 대형 식물원을 만들었다. 자생식물원의 관람객도 눈에 띄게 줄었다. 김 원장은 “인구에 비해 식물원이 너무 많아졌다. 몇 곳 없던 식물원이 지금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다. 적자운영을 하느니 새로운 변화를 구상해보자는 생각으로 식물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아직 뾰족한 답은 얻지 못했다. “전국일주 마라톤을 하면 뭔가 멋진 구상이 틀림없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라”. 김 원장이 머쓱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깊은 고심이 묻어났다. 최근 그는 식물원 부지 일부에 숙박시설을 조성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기자가 식물원을 찾았던 날에도 그는 숙박용 건물에 쓰일 외장재를 까다롭게 선별하고 있었다. 요즘 취미가 있는지 물었다. 김 원장는 “오로지 식물원”이라고 답했다. “초창기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물원을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대 정치학도처럼 빛나는 눈빛은 어느덧 고희(古稀)를 앞둔 그가 또 하나의 ‘에델바이스’를 찾길 기대하게 만들었다. HE IS… 1949년생으로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짧지 않은 기간 옥살이를 한 후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한국 고유 자생식물 재배를 시작했다. 국내 1호 사립식물원인 한국자생식물원을 만들었으며 사단법인 한국자생식물협회 회장, 계간 발행인, 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5-10-12 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