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대중은 이 말을 이 전 대통령의 육성이 아닌 한 성우를 통해 더 많이 들었다. 1964년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 등에서 이 전 대통령 역을 맡은 성우 구민(92)이다. 아직도 구민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아저씨, 나 추워요.” 1964년 개봉된 영화 의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다. 이 대사의 목소리 주인공은 배우 엄앵란이 아니다. 성우 고은정(80)의 목소리다. 1950~1970년대는 화면을 먼저 촬영하고 그 화면에 따라 대사, 음악을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이때 화면 연기는 배우가, 대사 연기는 성우가 담당했다. 1960년대 최고의 여자 스타, 문희 남정임 엄앵란 김지미의 대사 연기는 모두 고은정이 도맡았다.
무명 신인이던 최진실을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1989년 삼성전자 CF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하는 최진실에 대중은 환호했다. 그런데 이 광고 목소리 연기를 한 사람은 최진실이 아닌 성우 권희덕이었다. 권희덕(60)은 유지인 임예진 등 1970~1990년대 스타들이 모델로 나선 CF의 목소리 연기를 한 유명 성우다.
라디오 시대이자 후시녹음 영화 시대였던 1950~1970년대 최고의 대중문화 스타는 성우였다. ‘얼굴 없는 배우’라 불리던 성우들은 ‘영화와 방송의 꽃’으로 평가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국 성우의 역사는 라디오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으로 라디오 시대가 열렸다. 일본어로 방송하던 경성방송국에서 1933년부터 한국어 방송을 시작하며 등 라디오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제작해 청취자의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성우의 어머니’로 불리 우는 복혜숙 등 성우들이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해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1954년 기독교방송, 1959년 문화방송,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동양방송이 잇따라 개국하면서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를 열었다. 서울중앙방송국이 1953년 성우를 최초로 채용하면서 성우라는 직종이 하나의 전문직으로 자리 잡았다.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수를 놓겠소’로 시작되는 주제가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1956년 10월~1957년 4월 방송)을 비롯해 등 라디오 드라마들이 쏟아졌다. 1960년대 각 방송사들이 한 해 평균 150여 편의 라디오 드라마를 내보냈을 정도다. 청취자들은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펼쳐지는 다양한 라디오 연속극에 빠져들었고 성우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대중 스타로 우뚝 섰다.
1963년 동아방송 공채 1기로 성우가 된 박웅(76)은 “30여 명 뽑는 성우 시험에 3500여 명이 몰렸다. 1960년대 성우의 인기는 엄청났다. 성우의 수입이 탤런트 등 다른 연예인의 수입을 압도했다”고 말했다.
또한, 1950~1970년대 동시녹음이 아닌 후시녹음으로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에 성우들의 활약은 영화배우 못지않았다.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영화가 성우들의 대사 연기로 완성됐다. 의 신성일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대사 연기는 성우 이창환이 한 것이다.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 연기는 고은정이, 트위스트 김이 연기한 건달 역의 목소리 연기는 오승룡(81)이 각각 했다.
고은정은 “1950~1970년대 한국영화는 동시녹음 기술이 없어 배우들이 연기한 뒤 성우들이 화면을 보고 대사를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이었다. 이 당시 신성일 씨가 연기하는 모든 영화의 배역은 성우 이창환 씨가 맡아 대사 연기를 한 것처럼 특정 배우와 특정 성우 관계가 형성됐다. 나는 문희 엄앵란 김지미 남정임 안인숙 등 여자 주연 목소리 연기를 전담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끔 패러디되는 영화 의 안인숙이 맡은 여자 주인공, 경아의 “꼭 안아주세요”라는 대사 연기는 바로 고은정이 한 것이다.
성우들은 라디오 연속극과 영화뿐만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맹활약했다.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방송된 MBC 시사고발 라디오 프로그램 은 서민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줬는데 이 프로그램을 이끈 주역이 성우 오승룡이다.
오승룡은 “은 서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대신해 준 프로그램으로 청취자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플 수도 없었고 휴가도 갈 수 없었다. 방송사고 없이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청취자의 열띤 반응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50~1970년대 최고의 수입과 인기를 누리며 성우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성우는 구민 고은정 장민호 신원균 정은숙 김소원 윤미림 이혜경 남성우 심영식 주상현 오승룡 오정한 천선녀 이춘사 김영옥 사미자 김용림 나문희 전원주 등이었다.
청취자들은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목소리만 듣고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상상하는 경향이 많았다. 라디오 연속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하거나 멋진 혹은 예쁜 목소리를 가진 성우들에게 팬레터가 쏟아졌고 심지어 연인이 돼 달라며 방송사를 찾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미자는 “청취자들은 목소리만으로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파악했다. 목소리가 예쁘면 외모도 성격도 예쁠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소리와 다른 외모를 가진 일부 성우들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가는 청취자들도 적지 않았다”며 웃었다.
1980년대 들어 TV 수상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라디오는 대중의 사랑을 잃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영화가 동시녹음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성우들의 인기가 급락하며 존재감도 급감했다.
1980년대 이후 성우들은 명맥을 유지하던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하면서 TV에서 방송하는 외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더빙,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병행했다. 이 시기 김기현, 송도순, 박일, 배한성, 양지운 등이 외화 더빙이나 라디오 연속극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기 성우로 눈길을 끌었다.
배한성은 “라디오 전성시대가 가고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면서 성우의 존재감은 축소됐지만 정확한 발음과 뛰어난 목소리 연기 등으로 외화 더빙과 내레이션 부분에선 성우들의 역할은 커졌다”고 말했다. 또한, 권희덕을 비롯한 일부 성우들은 각종 CF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 권희덕은 “목소리 출연 CF는 3000여 편에 달하고 더빙한 외화 작품은 1000여 편에 이른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의 강희선, 의 이규화와 서혜정, 의 최덕희를 비롯해 김영선, 김승준, 정미숙, 구자형, 김서영 등이 외화와 애니메이션 더빙 등을 통해 인기 성우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성우로 활동하다 라디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영화와 텔레비전 연기자로 전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7월 끝난 tvN 드라마 에 주연으로 나선 것을 비롯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나문희, 드라마와 영화에서 개성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변희봉을 비롯해 정혜선, 김영옥, 남일우, 한인수, 김용림, 사미자, 전원주 등이 성우 출신 연기자들이다. 이들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1년 MBC라디오 공채 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한 나문희는 “성우로 일할 때 외화 더빙을 많이 했는데 이것이 연기자로 전업하면서 큰 도움이 됐어요. 외국 여배우의 캐릭터가 제각각이잖아요. 다양한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캐릭터를 분석할 기회를 얻었지요. 이것이 드라마와 영화 연기할 때 큰 힘이 됐지요”라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 한석규 역시 성우 출신 연기자다. 한석규를 드라마 에 처음 발탁해 연기자로 데뷔시킨 장수봉 전 MBC PD는 “한석규를 비롯한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대사 연기가 뛰어나다. 오랫동안 발성 훈련을 받아 감정의 결을 살리는 대사 연기를 잘한다”고 말했다.
방송사가 성우 공채 제도를 폐지한 2000년대 들어서도 성우들은 게임과 외화, 애니메이션 더빙과 CF, 라디오 연속극의 목소리 연기,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등에서 활약하며 여전히 대중화의 주역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7월 16일 SBS 는 졸피뎀 부작용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 이후 수면제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고, 무조건적인 공포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상황. 콘텐츠 제휴사인 비온뒤(aftertherain.kr)를 통해 아주대병원 홍창형 교수의 특별기고를 받았다. -편집자 주-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졸피뎀’이 자살충동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 방송된 이후 외래에서 수면제를 복용하는 환자들의 문의가 많아졌습니다. “제가 먹는 약은 안전한가요? 혹시 자살 충동을 유발하나요?”, “세상에 안전한 약은 없습니다. 이 약은 이런 저런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작용이 생기면 즉시 보고해 주세요. 그렇지만 정해진 용법대로 복용하시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고, 아직까지 일반적인 상황에서 졸피뎀이 자살 충동을 유발한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고혈압·당뇨병 약을 비롯해서 어떤 약이든 안전한 약은 없습니다. 원래 수면제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안 먹을 수만 있으면 안 먹는 게 좋습니다. 수면제는 깨어 있는 사람을 강제로 잠재우는 약이니 부작용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수면제들은 약을 먹어도 쉽게 잠이 들지 않고, 잠을 깨도 오전 내내 몽롱한 상태로 지내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2007년 FDA에서 승인된 졸피뎀은 기존 수면제보다 수면유도 효과가 빨라서 먹자마자 20분 만에 잠이 들고, 반감기가 2~3시간으로 짧아 아침에 일어날 때 멍한 느낌이 적어서 불면증 치료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환자는 약을 먹고 나서 가수면 상태로 빠져 의식이 없는 상태로 걸어 다니거나 음식을 먹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밤중에 있었던 일을 아침에 기억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면장애를 진료하지 않는 의사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처방해야 하고, 처방할 때도 반드시 부작용에 대해 잘 설명하고, 약물 부작용에 대해서도 계속 모니터링을 해야 합니다.
의학논문 검색엔진을 이용하여 살펴보면 지난 10년간 졸피뎀과 자살과의 연관성을 발표한 논문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최근 이슈가 된 논문은 2016년 3월 대만 의사가 발표한 환자-대조군 연구(case-control study)로 2002년부터 20011년까지 10년 동안 자살로 사망한 사람 2206명과 일반인 99만 6650명을 비교한 연구입니다. 저자들이 주장한 내용의 결론은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아도 졸피뎀을 복용한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살 또는 자살시도가 2배 더 많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1일 상용량의 9배 미만은 1.9배, 9~17배는 2.1배, 18배 이상은 2.8배 자살 및 자살시도의 위험이 높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논문은 1일 상용량의 2배, 3배로 나눠서 분석하지 않았을까요? 졸피뎀은 하루에 1알씩만 복용하는 약입니다. 졸피뎀을 하루에 2알 먹는 경우도 극히 드문 일이라서 외래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데 매일같이 9알, 18알씩 먹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고 또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물론 졸피뎀이 자살충동과 관련이 있다는 의학적 증거가 명확해지면 반드시 경고문구가 주의사항에 포함되어야 하고 의사 및 환자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보다 많은 근거가 필요해 보입니다.
졸피뎀은 아플 때 먹는 진통제와 비슷합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진통제는 통증을 사라지게 합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통증이 지속됩니다. 불면증도 원인에 따른 치료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불면증이 3주 이상 지속된다면 원인을 잘 찾고 해결해줄 수 있는 전문 진료과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만일 우울증이 원인이 되어서 생긴 불면이라면 상담치료를 받거나 중독과 내성이 생기지 않는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잔다면 통증치료가 더 우선되어야 합니다.
>> 홍창형(洪彰亨)
아주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노화과학협동과정 박사 노화과학 전공
중앙자살예방센터 센터장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열풍(熱風)’이라는 단어로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대한민국 강원도 속초까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지구촌 광풍(狂風)이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이용자가 함께하는 문화현상이자 사회적 신드롬이다. 닌텐도 주가가 1주일 사이 93%나 폭등하는 등 천문학적 이윤과 부가가치를 창출한 경제적 사건이다.
구글의 스타트업 기업으로 시작해 독립한 나이앤틱이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와 손잡고 7월 6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선보인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모바일 게임 포켓몬 고(Pokemon Go)다. 포켓몬 고는 서비스 국가를 속속 확대하며 지구촌 열기를 고조하는 동시에 증강현실의 실체와 잠재력을 수많은 사람 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포켓몬 고는 출시되자마자 하루만에 앱 스토어 매출 1위를 차지했고 포켓몬이 출현하는 장소나 거리, 지역은 사람들이 몰려 교통이 마비됐다. 포켓몬 고가 서비스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도 포켓몬이 출현하는 강원 속초 일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속초시 등 일부 지자체는 관광객 유치 홍보전에 포켓몬 고를 활용하는가 하면 여행사들은 관련 상품을 내놓는 발 빠른 마케팅을 전개했다.
포켓몬 고는 이용자의 현실 공간 위치에 따라 모바일 기기상에 출현하는 가상의 포켓몬을 포획하고 대결하고 거래도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포켓몬 고 앱에 로그인한 후 성별, 피부색, 머리 모양 등을 선택해 자신의 아바타를 만든다. 아바타가 생성되면 이용자가 위치한 주변 지역의 지도가 나타나고 포켓몬 체육관 등이 지도에 표시된다. 이용자가 공간과 지역을 이동할 때 아바타 역시 게임의 지도를 따라 움직인다. 이용자는 세계 각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포켓몬을 찾아 포획한다.
이용자가 포켓몬을 발견할 경우, 증강현실(AR) 모드에서 실재(實在)처럼 보이는 배경과 함께 포켓몬을 보게 된다. 이용자는 포켓볼을 던져 포켓몬을 포획한다. 이 게임의 궁극적 목적은 포켓몬을 포획하고 진화시켜 포켓몬 도감을 완성하는 것이다.
포켓몬 고는 증강현실과 위치기반정보(GPS), 그리고 지도를 활용한 게임이다. 게임 이용자의 위치를 파악해 주변에 몬스터를 뿌리기도 하는데, 능력이 많은 몬스터는 특정 위치에 서식하므로 그걸 잡기 위해 이용자가 이동한다.
한국에는 포켓몬 고가 공식적으로 서비스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강원 속초와 양양 일부 지역에서 포켓몬 고가 구동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 포켓몬 잡기에 나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포켓몬 고는 구글 지도를 이용하는데, 한국 지도가 구글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한국 법으로 금지돼 있으므로 포켓몬 고의 한국 서비스는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포켓몬 고는 한국에 출시되지 않고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지만, 게임 개발사가 구분해놓은 독특한 영역 구분 때문에 강원 속초 일대에서 게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몬스터만 잡을 수 있고 이용자를 상징하는 아바타 주변의 실재 공간이 나타나지 않는다.
포켓몬 고는 증강현실을 이용해 실제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현장감과 실재감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실재 공간을 찾아다니며 게임을 하므로 이용자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기업과 사람들이 포켓몬 고 광풍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증강현실(AR)에 눈을 돌린다. 증강현실은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과 함께 가장 각광받는 새로운 정보기술로 세계 각국과 기업들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증강현실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혼동한다. 증강현실은 실재와 허구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혼합하는 반면 가상현실은 100% 허구 세계를 구축하는 점이 차이다. 가상현실은 이용자와 배경·환경 모두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데 반해, 증강현실은 현실의 이미지나 배경에 가상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 주기에 ‘혼합현실(Mixed Reality, MR)’이라고도 한다. 증강현실은 실재세계와 가상세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LG경제연구원 서기만 수석연구위원은 “증강현실은 기본적으로 현실 정보에 약간의 가상 정보를 덧입힌 형태를 말한다. 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보조 정보를 현실 정보 위에 추가로 표시하기 위해 이용된다”고 설명한다.
게임의 경우, 게임의 주체가 가상이냐 실체냐에 따라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구분된다. 가상현실 게임은 이용자를 대신하는 가상 캐릭터가 가상공간에서 가상의 적과 대결을 펼치지만, 증강현실 게임은 ‘포켓몬 고’처럼 현실 속의 내가 미국 뉴욕이나 강원 속초라는 현실 공간에서 가상의 적(포켓몬)과 대결을 벌인다.
증강현실은 가상현실보다 현실감과 실재감이 높다. 또한, 공간 증강현실(SAR· Spatial AR)의 경우에는 이용자가 특별한 장치를 손에 들거나 착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어린이나 나이가 든 사람들도 증강현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증강현실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활용한 지도와 위치 검색은 물론이고 내비게이션, 청소기 등 가전제품부터 게임, 스포츠 중계, 일기예보를 비롯한 방송, 영화 등 문화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디지캐피탈’이 최근 발표한 ‘AR· VR 리포트’에서 2020년 가상현실 시장 규모는 300억달러(약 34조원), 증강현실 시장 규모는 1200억달러(약 137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까지는 가상현실 시장 규모가 증강현실 시장보다 크지만, 2017년 이후부터는 증강현실이 성장을 주도하며 역전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증강현실이 현실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 간단하게 제작할 수 있고,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으므로 시장성과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퀄컴, 알리바바, 워너브라더스 등 세계적인 기업과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기업들이 앞다퉈 증강현실 기술과 콘텐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LG전자는 청소기에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제품을 내놓았는가 하면 SK텔레콤은 증강현실 솔루션 ‘T-AR’를 출시했다. 한빛소프트는 증강현실 모바일 게임 ‘오디션’을 개발했다.
새로운 기술은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고 특정한 문화적 제도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증강현실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창출하면서 사람들의 인식과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증강현실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이 초래한 문화와 현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다. 또한, 젊은 세대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이해의 폭도 좁아진다.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조차 거세게 일고 있는 포켓몬 고 광풍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지구촌에 거세게 일고 있는 포켓몬 고 신드롬은 단순한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선다. 포켓몬 고 신드롬에선 증강현실이라는 신기술이 초래한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새로운 기술에 관해 관심이 없고 이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포켓몬 고를 외면하는 대신 눈길 한번 주자. 그 눈길은 바로 증강현실을 비롯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몰고 오고 있는 새로운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 세대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올 여름의 혹서(酷暑)는 유별났다. 하지만 ‘욕서수절란(溽暑隨節闌)’이라고 했던가. 찌는 듯한 무더위도 결국은 계절을 따라 끝나갈 수밖에 없고, 가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흔히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부른다. 가을을 독서와 연관시킨 유명한 글로는 당나라 때의 문인이자 정치가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인인 한유(韓愈)가 아들 ‘부(符)’에게 지어준 일종의 권학문(勸學文)인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이 있다.
당시 고위관료였던 한유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의 남쪽[城南]에 별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한유는 성남의 별장에 가서 공부하기를 다음과 같이 권한다.
‘때는 가을이라 장마도 그치고 서늘한 기운이 교외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니, 등불과 점점 가까워질 시간 아니더냐? 책을 펼칠 만한 때로구나.’
時秋積雨霽 新凉入郊墟 燈火秒可親 簡編可卷舒
바로 등화가친(燈火可親)이란 사자성어를 탄생시킨 유명한 구절이다. 대학자인 한유의 시각으로 볼 때는 공부에 관한 한 아들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한유는 문장의 마지막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恩]과 자식을 엄히 길러야 하는 당위성[義]이 내 마음속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니, 내 공부하기를 주저하는 너에게 이 시를 지어 보내노라.’
恩義有相奪 作詩勸躊躇
한유는 대유학자답게 ‘증광현문(增廣賢文)’이란 글에서 그의 또 유명한 권학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
‘책의 산에는 길이 하나 있으니 근면함으로 지름길을 삼고, 학문의 바다는 끝이 없으니 고생으로 배를 삼아 노 저어 나가야 한다.’
書山有路勤爲徑 學海無涯苦作舟
학해무변(學海無邊) 또는 학해무애(學海無涯)란 성어가 탄생한 바로 그 구절이다. 이러한 권학문 중에는 ‘소년이로학난성 (少年易老學難成)’이란 주자(朱子)의 권학문이 또한 유명하지만 당나라 때 대시인인 백거이(白居易)도 ‘白樂天勸學文(백낙천권학문)’이란 다음의 시를 남겼다.
有田不耕倉廩虛 밭이 있어도 갈지 않으면 곳간이 비고,
有書不敎子孫愚 책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네.
倉廩虛兮歲月乏
곳간이 비면 살기가 궁핍해지나
子孫愚兮禮義疎
자손이 어리석으면 예의가 소홀해진다네.
또한 송나라 때 개혁으로 유명한 왕안석(王安石)은 다음의 권학시를 남겼다.
貧者因書富가난한 자는 책으로 부유해지고
富者因書貴 부유한 자는 책으로 귀해지며
愚者得書賢어리석은 자는 책을 얻어 어질게 되고
賢者因書利어진 자는 책으로 이롭게 되네.
只見讀書榮단지 책을 읽어 영화 누림은 보았어도,
不見讀書墜책을 읽어 추락함은 보지 못했네.
賣金賣買讀 금을 팔아 책을 사서 읽으라.
讀書賣金易 책을 읽어 금 사기는 쉽다네.
마지막으로 권학문으로는 빼놓을 수 없는 송나라 3대 황제 진종(眞宗)의 권학시(勸學詩)를 아래에 소개한다.
富家不用買良田부자가 되고 싶다고 좋은 밭을 사지 말라
書中自有千鍾粟글 가운데 많은 녹이 들어 있으니
安居不用架高堂 편히 살고 싶다고 높은 집을 짓지 말라
書中自有黃金屋글 가운데 황금 집이 들어 있으니
위의 시에 나오는 ‘서중자유천종속(書中自有千鍾粟)’은 1930년대 이희승 선생의 유명한 수필, ‘淸秋數題(청추수제)’에서 ‘서중자유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으로 소개되었다.
이번 달부터 새롭게 진행하는 ‘이봉규의 心冶데이트’는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공인들을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며 편하게 만나 은밀한 속내를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꾸밈없고 날카로운 ‘돌직구’를 던져 차마 예상치 못했던 야들야들한 답변을 끌어내는 사심이 묻어나는 ‘술술토크’를 열었습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윤영미(57) 아나운서와는 방송을 같이 한 적도 여러 번 있고 방송국 대기실에서 자주 마주치고 대화도 많이 나눴기에 편한 상대임에도 가 마련한 ‘이봉규의 심야데이트’의 인터뷰를 위한 만남은 설랬다. 그녀는 1962년생으로 여자로서 밝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당당하다. 오죽하면 ‘여자 김구라’로 불린다고 스스로 털어 놓는다. 요즘 아무리 김구라가 인기가 좋다고는 하지만 ‘여자 김구라’로 불리고 싶을까? 일반적인 여성 방송인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변태거나 ‘또라이’는 절대 아니고 지나치게 발랄하고 순수하고 다소 엉뚱스러운 여인이다.
윤영미 아나운서와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닭갈비집에서 만났다. 그녀는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춘천에서 1년간 기숙사 생활(성심여자대학교 국문과)을 했고 춘천 MBC에서 다년간 공채 아나운서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닭갈비를 좋아할 것으로 믿고 필자가 그리로 정했다. “닭갈비집으로 인터뷰 장소를 잡는 이봉규의 센스에 깜짝 놀랐다”고 말하면서 “역시 이봉규는 한량!”이라고 평가한다.
한량인 내가 타이밍을 놓칠 리가 없다. 바로 분위기를 업~ 시키려 둘은 막걸리 잔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그녀의 주량은 상당히 센 편이다. 맥주는 싱거워서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서 소맥을 즐긴다고 허풍쟁이 남자들처럼 주량 자랑이다. 술 먹다가 취해서 화장실 갔다가 자리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매거나 필름이 끊긴 적도 여러 번 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대학 시절 명동의 유명한 나이트클럽인 ‘마이하우스’를 휩쓸었단다. 낮 2시부터 디스코텍을 다닐 정도로 세칭 ‘날라리’였다고 허풍을 떤다. “맥주는 5000cc까지는 아무 반응도 없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필자는 맥주를 따로 더 시켰다.
그녀가 막걸리보다는 맥주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혹시 막걸리를 먹어서 매우 취하면 인터뷰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도 살짝 작용했기에 필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그녀에게는 맥주를 권했다. 술병이 한 병 두 병 비워 지고 취기가 서서히 올랐기에 과감한 질문을 던졌다.
“가끔 바람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까?”라는 돌발 질문에 “멋진 뇌색남(뇌가 섹시한 남자)을 보면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는 못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정신적인 바람을 피우고는 싶지만 몸을 섞는 육체적 바람은 찜찜하다는 것인가? 알쏭달쏭하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이혼 생각도 여러 번 했었지만 막상 이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고 한다. “막상 이혼을 하고 나면 다른 남자와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다시 말해 대안이 없어서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취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아서 그렇지 결혼 20년차 이상 대부분의 중년 여성들은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하고 몇십 년이 지났고 아이들도 다 컸고 갱년기에 심리적인 흔들림도 생기기 마련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남에게는 남편밖에 모르는 현모양처로 이혼 생각은 전혀 해 본 적도 없다고 내숭을 떠는 여성들이 속으로는 곪아 터질 대로 터져서 남모르게 골프코치나 수영코치하고 바람피우거나 산악회에 가입해서 헌팅을 위해 이산저산 떠돌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번쯤 일탈은 설렐 것 같아요, 삶의 동기 부여도 될 것 같기도 하구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볼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함을 느끼는 그녀의 표정은 실제로는 제대로 일탈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일탈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아쉬움을 그녀는 시인 문정희의 어록으로 대신한다. “죽으면 썩을 몸을 칭칭 감고 다녔다.” 이 말을 듣고 금방 이해가 갔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그녀는 문정희 시인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문정희의 ‘남편’이라는 시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을 낭독한다.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 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구절이 그녀의 마음과 똑같아서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일탈을 꿈꾸다가도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먼 남자인 남편의 존재 때문에 삭이고 사는 것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 배운다.
35세에 만난 남편 황능준씨는 지난 20년의 결혼생활 동안 사업 실패, 전업주부 생활, 목회자로의 전향 등 때문에 아내 윤영미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한 방송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과거 남의 말만 듣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며 본의 아니게 아내를 ‘생계형 방송인’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남편하고 살면서 속도 하도 많이 썩어서 지긋지긋할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또 다른 방송에서는 “저는 속아서 결혼한 것 같다. 울분이 항상 쌓여 있어서 돌덩이(가슴에)가 있는 기분이다”라고 토로하면서 “결혼 전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호강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3년 정도 살았다. 당시 얼마 되지 않던 내 아나운서 월급으로만 먹고 살았다”고 하니 요즘의 그녀가 얼마나 씩씩해 보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웬수’ 같은 남편이지만 시인 문정희의 ‘남편’에 나오는 구절처럼 여기고 새기면서 살고 있을 것 같다. 놀랍게도 그녀의 첫 섹스 파트너는 35세 때 지금의 ‘웬수’ 같은 남편이었다. 그러니 그럴 법도 하다.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2차로 장소를 옮기자는 필자의 제안에 그녀는 흔쾌히 따라 나섰다. 바로 옆에 필자가 자주 가는 라이브 바 ‘그루브’에선 스스럼없이 대화가 더 깊숙하게 진행되었다.
그녀의 첫 키스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 같이 초등학교 때 홍천 계곡에서 환상처럼 이루어졌다고 한다. 상대는 당시 홍천초등학교 전교회장. 40여 년이 훌쩍 지나갔어도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멍하다고 말한다. “첫 키스 상대인 그때 그 사람이 그립습니까?”라고 묻자 “지나간 사랑은 기억일 뿐”이고 “여자는 한 남자를 두 번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윤영미 어록이 쏟아진다. 풋고추 같은 사랑이었고 가슴 아픈 첫 사랑은 따로 있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그녀의 대학 시절 강원대학교 건축과에 다니던 테리우스 같은 꽃미남을 ‘꼬시기’ 위해 그녀는 적극적으로 행동했었다. 성심여대에 다니던 윤영미는 강원대 앞 카페에서 우연히 본 테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강원대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했다. 혹시나 도서관에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교회 친구가 테리우스와 강원대 같은 과(건축학)의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친구에게 부탁해서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영화 의 ‘윤영미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그와 사귀게 되었는데 으레 첫사랑이 그렇듯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스토리는 마치 영화와도 같았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중년이 된 나이에 그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딱 봐도 행색이 안 좋아 보일 정도로 예전의 꽃미남 테리우스는 온데간데없어서 슬펐다고 한다. 아련히 애틋했던 첫사랑은 그렇게 완전히 그녀의 맘속에서 비로소 지워지고 말았다.
그 후 웬수 같은 남편은 그녀에게는 중년의 테리우스같이 멋져 보였을 것 같다. 실제 그녀의 남편 황능준씨는 훈남의 외모를 자랑한다. 그녀는 남편의 첫인상이 ‘푸른 초장’ 같았다고 회고한다. 속을 전혀 썩일 것 같지 않고 순수한 남자일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살아 보니 속도 많이 썩었고 산전수전 겪다 보니 지금은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런대로 봐 줄 만하다고 은근 자랑이다.
그녀는 “남편이란 존재는 처음에는 연인이고 그 다음은 웬수처럼 느껴지다가 세월이 가면서 친구가 되어간다.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는 아마 인생의 간호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고 정의한다. 남편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인터뷰를 시작할 때와 인터뷰가 끝나 갈 무렵과는 사뭇 다르다. 솔직하고 쿨~한 윤영미의 복잡한 마음일까? 아니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느끼는 것이 남편이란 존재일까?
한량인 이봉규는 아직 더 여인들의 심리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윤영미는 멋들어지게 노래를 뽑았다. “삶의 후회는 없고,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금방 포기한다”는 그녀의 가치관이 노래에 묻어 나온다.
불가리아는 우리나라와 먼 나라가 아닌 듯하다.
불가리아 요구르트를 먹으면 장수한다는 TV 광고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에 가면 ‘장수’할까? 세계에서 가장 작은 마을 멜니크에서 조용한 휴식과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이고 온천욕을 즐긴다면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약간 큰 불가리아(면적 11만 879㎢)는 억압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014년부터 동로마 제국에게, 1393년부터 약 480여 년간은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908년 9월, 러시아의 도움으로 터키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1989년 구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40여 년간 소련의 영향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로 살아야 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야 민주 정부를 세우고 나라 이름도 불가리아 공화국(The Republic of Bulgaria)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수도 소피아(Sophia)에서 여행을 시작해 서남쪽으로 약 80㎞ 정도 내려가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을 찾았다. 릴라 산맥 속에 꼭꼭 숨어 있는 유서 깊은 수도원도 좋았지만 정작 필자가 매료된 곳은 멜니크(Melnik)다. 릴라 수도원에서 남쪽 그리스 쪽으로 약 100km(소피아에서 186km) 정도 가면 멜니크 배드랜드(Melnik Badlands)가 있다. 피린(Prin) 산맥의 해발 약 440m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은 불가리아어로 ‘흰색 점토, 분필’을 뜻하는 ‘멜(mel)’에 모래 산이 합해져 만들어진 지명이다. 불가리아에 현존하는 전통형태의 마을 중 가장 작고 마을 가옥 전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러시아 작가인 유리 트리포노프(Yury Trifonov, 1925~19
전문가의 설명이 없어도 예사롭지 않은 건축물과 마을 뒤쪽의 독특한 모래 산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기에 와인 상점, 와인 박물관, 와인 밭이 흩어져 있는 것만으로 ‘와인 산지’임을 한눈에 알게 한다. 멜니크는 트라키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페르시안 1세(Persian I, 836~852) 때 크게 번성했고 이후 왕국의 남서부를 통치하던 알렉시우스 슬라브(Alexius Slav)에 의해 이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센(Asen) 왕조(1185~1396) 때부터 독립적인 봉건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 경제와 문화가 발달해 학교와 교회가 많이 생겨났다. 이후 오스만 정복으로 쇠퇴하다가 17~18세기에는 담배와 와인 생산지로 알려지면서 번성한다. 특히 멜니크 와인은 경제권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이 지역의 와인은 향기가 아주 진해 일찍이 13세기부터 베니스의 부호들 식탁에만 올랐다고 한다. 주로 영국과 오스트리아, 해외로 수출되었는데 영국 처칠 총리가 좋아했다고 한다. 멜니크 종 포도는 프랑스가 원산지이나 불가리아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온 우량 품종으로 와인 색은 진하고 맛은 무거우나 단맛이 난다.
이 마을은 발칸전쟁(1912~1913) 이후, 불가리아령이 되면서 기존에 살던 그리스인은 추방되었다. 일부 상점과 주택들이 그들에 의해 약탈되었지만 복원, 재건되었고 현재의 전통 가옥들은 숍, 숙소로 이용하고 있다. 또 근처에는 루피테(Rupite)와 대학도시로 유명한 ‘블라고에브그라드(Blagoevgrad, 애칭 ‘블라고’)’, ‘산단스키(Sandansik)’가 있다. 산단스키는 온천 휴양도시다. 그 외에도 수도인 소피아, 중세기 도시인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플로브디프(Plovdiv), 소조폴(Sozopol) 등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필자와 친한 지인이 30여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했다. 마음씨 좋은 부인이 그간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했다면서 좋은 차 한 대 사서 여행을 다니자는 말을 꺼냈다. 기왕이면 우리도 BMW 한 대 사 가지고 신나게 다녀 보자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 녀석 왈, “아니, 아버지가 BMW 사서 뭐 하시게요? 그냥 작은 국산차 하나 사서 다니면 안 돼요?” “아니, 뭐라고라?~~~” 지인은 그때 생각만 하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참 내,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요즘 자녀를 결혼시킨 부모들이 처음 겪는 갈등은 자녀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차종이라고 한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줘야지 하면서 주택 구입이나 전세 자금은 물론 결혼 비용까지도 보태줬다. 당장에 가진 돈이 없어서 무리해서 대출까지 받은 부모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혼부부가 대뜸 외제차를 사겠다는 것이다. 결혼 전에 타고 다니던 차를 계속 타도 될 것 같은데 차부터 근사(?)하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비싼 외제차냐고 물을라치면 연비 등을 생각하면 국산차보다 비싸지 않다면서 비교표를 들이민단다.
결론 ① 저네들은 외제차 타면서 부모에게는 무슨 외제차 타령이냐고 들이대는 요즘의 젊은 것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면 내 일로 다가올 수 있다.
결론 ② 아~~~! 결국은 자식도 내 품을 떠나고 나면 남이구나. 남은 것은 내 아내, 내 남편, 우리 둘밖에 없구나. 이제 둘이서 오순도순 사는 게 인생 최고의 목표구나. 그럼 뭘 해야지?
결론 ③ 자식놈들이 뭐라 하든,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내 살 길 내가 찾아야겠다. 그래, 차제에 BMW나 2대 마련하자. 아니 BMW를 1대도 아니고 2대씩이나?
첫 번째 BMW는 눈치 챘겠지만 바로 ‘버스, 지하철, 걷기(Bus, Metro, Walk)’이다. 사람은 직립인간이 된 이후 걸어 다녀야 뇌가 살아 있다는 신호를 받는다고 한다. 먼 곳으로 여러 날 여행을 가거나 생필품을 많이 살 때는 차를 이용해야겠지만 웬만하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걸어 다니는 게 건강에도 좋다. 근교의 산이나 유적지는 물론 연극 또는 영화 등을 보러 다닐 때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니면 그 재미도 쏠쏠하다. 가다가 아무데서나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구경도 하면서 다닐 수 있다. 특히 지하철에다 기차를 포함시키면 전국구가 되어 방방곡곡을 유람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도시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려면 사전에 고민을 꽤 많이 해야 한다. 버스 번호가 세 자리를 넘어 네 자리까지 있어서 예전처럼 행선지가 머릿속에 선뜻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번 갈아타려면 스마트폰의 대중교통 앱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경우 출구를 제대로 찾아 나오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거나 길을 건너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나름 요령과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생각도 하고 나름 전략을 짜게 만들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까지도 가져다 줄 것이다.
두 번째 BMW는 뭘까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필자가 만든 신조어이기 때문인데 별 거 아니다. 다름 아니라 ‘맥주, 막걸리, 와인(Beer, Makgeolli, Wine)’이다. 술을 안 마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술을 좀 하는 사람은 적절한 음주만큼 인생을 즐겁게 하는 윤활유도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냥 술이면 술이지 왜 하필 BMW냐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위스키나 고량주, 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 도수가 낮은 맥주와 막걸리, 와인과 같은 양조주에다 칵테일까지 곁들이면 정말 다양하게 마실 수 있는 게 술이다. 그중에 BMW를 고른 이유는 나이 들수록 주량도 줄어들므로 도수가 약한 술을 조금씩 즐기면서 마시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와인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점심에도 저녁에도 와인을 마신다. 하지만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으면서도 즐겁게들 식사를 한다. 술을 술술 마시면서 인생을 술술 풀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BMW, 즉 맥주와 막걸리, 와인을 조금씩 맛보기로 한다면 마시는 순서는? 필자가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도 와인도 다 마셔 봐야겠다면서 무엇부터 먼저 마셔야 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맥주부터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 알파벳 순(B → W)인 데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시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셔야 순하게 취한다는 주당(酒黨)들의 주도(酒道)는 어디나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BMW를 마시는 순서도 영어 알파벳 순서로 보나 도수 순서로 보나 B → M → W가 된다. 도수 또한 맥주가 4~5도, 막걸리가 6도, 와인이 11~14도 아닌가. 지하철을 오르내리기 싫다면서 버스타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에 맞춰 다니기에는 지하철이 최고라면서 지하철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버스건 지하철이건 편한 대로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BMW 중에서도 맥주나 막걸리, 와인 어느 한 가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것저것 다양하게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맥주와 막걸리, 와인도 메이커에 따라 조금씩 향과 맛이 다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긴다면, 또 가끔씩 순서를 바꿔 마시면 그보다 좋은 재미가 있으랴.
요즘 다양한 국내 여행 패키지가 나와 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라도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출발 장소까지만 가면 그 다음엔 다 알아서 데리고 다닌다. 2박 3일이면 두어 번 정도는 자유 시간을 주면서 식사도 알아서 해결하도록 한다. 이때 그 지역의 막걸리 등 토속주를 맛볼 수 있다. BMW 2대를 가지면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이유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술잔 수를 세며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 ~~~ 차갑고 매서운 바람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할 것인가? ~~~”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송강 정철 선생의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일부분이다. 아무리 약한 술이라고도 해도 한없이 마실 수야 없지만 ‘적중이지(適中而止)’, 즉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아는 주당이라면 그 아니 즐거울소냐. 에헤야디야,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삶의 길은 누가 만들어 줄까 하는 의심이 들던 젊은 시절엔 스스로가 개척하여야 한다는 강한 의지 하나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나이가 들고 삶의 연륜이란 것이 묻어 있는 지금은 거울 속의 나와 마주하면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시간들을 점검하게 된다.
날마다 보는 내 얼굴이지만 그 얼굴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얼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잘 만드는 것이 보여주는 얼굴이다. 언젠가 TV 공익광고로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나요’가 방영된 적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지만 자신을 보는 시각은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에 정작 중요한 일은 실패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눈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 흔히들 ‘다 속여도 눈은 정직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나 영리하기에 훈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게 관리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대의 눈을 보면서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은 스스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기가 한 행동은 스스로 잘 알 수가 있다. 지금의 행동이 얼굴을 만드는 것이기에 자신의 행동을 헤아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먼저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해보자. 세상의 중심은 나[我]란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공정한 마음으로 상대를 살펴보는 것이다.
상대를 볼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이 이마일 것이다. 이마는 우리 얼굴의 가장 위에 위치하며 하늘과 소통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기운을 가장 먼저 받기에 운(運)이 들어오는 첫 번째 통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운이 들어오면 이마는 밝고 환하게 빛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이마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이마의 주름이다. 세 줄이 뚜렷한 주름은 좋은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필자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유인즉슨, 주름은 편안한 상태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주름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마음고생이다. 심신(心身)이 함께 힘든 상황을 겪었기에 의지력이 강해지고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매진하는 경향이 있어 원하는 일을 성취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주름이라는 설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삶에는 힘든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기에 원하는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그 힘든 상황을 감내하는 힘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이마 주름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면 심기를 바로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연습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마를 보면서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많이 들어 본 이야기는 아닐 것이지만 우리의 얼굴은 각자의 역할이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이마는 넓고 작은 동산처럼 둥그런 모양이면 좋은 이마라 할 수 있다. 넓은 이마는 사업 운이나 가정 운 모두 좋다고 할 수 있다. 성격도 포괄적이라 다방면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대인관계도 좋아 많은 사람들과 넓은 관계망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이마가 넓은 사람은 특별히 작은 흉터라도 생기지 않도록 잘 관리하여야 한다. 자신의 운이 늘 좋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작은 장애물이 도리어 큰 재앙처럼 보여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마가 좁다는 것은 자신의 활동 영역이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가서 활동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이나 잘하는 부분에 집중하여 자신의 분야에서 커다란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 요즘의 시대 상황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개발하여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정받을 수 있고 남보다 훨씬 뛰어나 보이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그러면 행운이 오는 이마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먼저 이마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이 모두 앞이마를 덮고 있다. 불황기에는 여성의 치마 길이가 짧아진다고 한다. 옷이 한 시대의 생활상을 대표하는 문화라고 한다면 얼굴은 우리의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마를 가리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면 경제가 어두워진다고 강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마는 하늘의 기운을 받는 부분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으면 밝은 기운을 받을 수 없어 습하고 어둡게 된다. 밝은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지만 그것을 차단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수험생이나 입사 시험을 앞둔 자녀를 둔 부모님에게 늘 당부하는 사항이 앞머리를 내리지 말고 이마를 잘 드러내서 상대에게 밝은 기운을 전달해 주라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면서 즐겁기보다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기쁨과 보람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 이마를 가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머리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우리나라는 유난히 머리가 없는 것을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세계적인 스타 율 브리너는 모두가 멋진 배우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요즘은 자신의 대머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트렌드로 만들어 성공한 경우가 많다. 천기(天氣)를 더 많이 받아서 곧장 내려 보내기에 운의 흐름에서 좋은 기운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마에 난 작은 뾰루지나 상처는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다. 어린아이일 때 주로 상처가 많이 생기는데, 부모의 무관심으로 상처를 방치하면 그 아이가 자라면서 운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마가 좁고 작으면 생각이 치밀하고 집중적이며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이런 상대에게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면 불행해진다.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영역을 인정해 주고 하고 싶은 연구나 공부에 매진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작은 별이기에 스스로 빛을 내면서 살아가야 한다. 먼 곳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별은 모두가 다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주변에 밝고 빛나는 별들이 많으면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고 행복해진다.
행운은 스스로 만들어 가기도 하지만 주변의 관심과 사랑이 보태지면 무한대로 소유할 수 있다. 지금 내 이마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점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