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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사람] <백년을 살아보니> 저자 97세 김형석 교수, “두 친구가 가고 없는 세상, 텅 빈 것 같다”
- 드물디드문 ‘90대 철학 교수’이자 글로써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요즘 활발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통해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 100세를 바라보며 만든 책 (덴스토리 펴냄)를 출간한 김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겪은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펼쳐놨다. 결코 흔치 않은 100년 동안의 시간을 경험한 노교수의 삶과 지혜를 살펴보자. 한 시절 젊은이들은 1960년대 등과 같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김 교수의 수필을 읽던 청년들이 어느덧 50, 60대가 됐지만 지금도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다.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가에서 가장 ‘묵직한’ 저자다. 90살을 넘어 100살에 가까워진 김 교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그 이름을 다시금 각인시키더니 와 의 두 저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름으로써 스스로 현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런 그가 그동안 강연했던 내용을 묶어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야기가 담긴 책 를 내놨다. 90대에 다시 맞이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즐거움 “를 작년에 내놨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놨던 와 를 개정하여 다시 출간했죠. 는 워낙 오래된 책이라 처음에는 출간이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 할아버지가 그 책을 꺼내 주면서 꼭 내라고 했다는 거예요.” 김 교수는 사람들이 예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감싸니 예수가 어떤 화두를 가진 사람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찾아보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만든 책이 바로 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책이기도 했다. “과거에 책이 나왔을 때는 호응이 없었는데, 지금 읽히기 시작하니 교회 안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호응이 있고 반응이 좋아요. 젊었을 때 써서 지금보다 문장도 좋고. 내가 봐도 훌륭해(웃음).” 김 교수는 백 살이 가까운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친필로 글을 쓴다. 타자기는 안 쓰고 스마트폰도 안 쓴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조금 무리했다고 말했다. “이라는 계간지에 1년에 200자 원고지 400장을 쓰는 게 있어요. 그런데 3개월 후에 쓰는 걸 반복하는 것보다는 원고를 미리 써놓는 게 좋겠다 싶어 한꺼번에 쓴 거죠. 그게 좀 무리가 됐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 써요(웃음). 할 때 하자 싶어서 한 일인데, 그렇게 무리했던 게 나은 거 같아요.” 가족이 떠나니 집이 비고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비었다 “우리 어머니가 10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을 담담한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분은 더 오래 사는 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직계 중에 먼저 돌아가신 사람이 없는데 자신이 그보다 늦게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먼저 갈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가면 되고, 네 처가 가게 되면 집이 빌 텐데 집이 비면 어떡하지?’라고 말씀하시데요. 어머니가 가시고 아내도 가고 그러니 정말 집이 빈 거예요. 외국 여행하고 돌아올 때 오고 싶지 않고 공항에 내려도 ‘빈 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있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어머니와 아내가 집이었어요.” 를 보면 김 교수의 절친한 친구인 김태길 교수와 안병욱 교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 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김태길 교수는 2009년, 안병욱 교수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집 식구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거 같은데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떠나고 5년쯤 지나고 나니 친구들이 가기 시작하는데 둘이 비슷한 때 가더라고. 세상이 비는 거 같았어요. 남들은 잘 몰라요, 나는 그걸 왜 느끼느냐 하면 친구다운 친구를 가졌기 때문이었죠. 독일의 괴테가 임종할 때 의식이 흐려져서 환상 비슷한 걸 보게 되는데 바람에 종이가 날아가는 걸 보더니 저거 쉴러의 편지인데 날아가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해요,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가 세상을 떠나자 한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고 하고.” 그는 자신도 ‘이젠 인생 마감을 어떻게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한다’며 “죽음을 생각하지만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뭔가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한 거죠. 내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내가 있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산 사람도 있었고, 내가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저한텐 남는 것이지요.” 행복은 인격에서부터 시작 나이 들어서 행복을 맛본다는 건 쉽지 않다. 김 교수는 나이 들어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철학자 가운데 가장 원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거든요. 그가 윤리학을 가장 처음 쓴 사람인데 윤리학에서 하는 말이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그리고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말이에요. 내 인격이 행복을 만들어서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행복을 내게 주고 행복이란 그렇게 나눠서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을 만드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죠. 윤리학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결론을 내놓은 셈이에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이 들면서 행복도 커지는 거죠. 나이 들면서 행복해지는 게 인생인 겁니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그 인격이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인격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본다고 설명했다. “인격이란 나에게 있어서 성실하게 사는 것, 그리고 이웃에 대해선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실과 사랑이에요. 성실한 사람은 항상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성실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있고, 성실보다 더 귀한 인격은 자신에게 있어선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짐으로써 철학자가 된다 김 교수의 친구 안병욱 교수는 가장 성실하게 산 사람을 공자로 봤다고 한다. 공자는 성실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석가나 예수는 공자가 한계로 느낀 걸 종교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는 성실에 경건이 더해진 철학을 만들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성실만 갖고 있으면 종교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면 달그림자가 안 뜹니다. 그런데 조용해지면 달그림자, 별 그림자를 볼 수 있죠. 경건하다는 건 이성이 작용을 멈췄을 때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호수가 조용해졌을 때 별 그림자가 뜨는 것 같은 상태죠. 그때 종교가 오게 됩니다.” 김 교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보면 좋을 거예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제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나 보고 4년 동안 대학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현상을 잘 알죠. 인상은 남아 있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 알지만 이상하죠? 난 대학 다닐 때 강의 들었던 것, 읽었던 책을 다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문제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강의 듣는 것, 책을 읽는 것 다 문제의식이 그릇이 되어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러니 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졸업하면 평범해집니다. 반면 일류 대학이 아니더라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철학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김 교수의 아우라는 긍정적이다. 불안한 요인이 섞여 있지 않다. 아흔을 넘어 백세로 가는 이에게 그러한 긍정의 힘은 놀랍고 희귀한 사례다. 그에게도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게 있을까? “93세 때 밤에 자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을 정리하면 뭐가 될까?’ 싶었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잤어요. 메모는 세 문장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철학자로서의 나는 진리를 추구했고 사회적으로는 겨레들이 좀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우리 시대는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를 겪어야 했으니. 못해서 아쉽겠다는 건 그 두 가지를 위해서 좀 더 일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가끔씩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이 ‘젊었을 때 낭만이 있었느냐, 연애는 했느냐, 연애 결혼했느냐 중매 결혼했느냐 같은 걸 묻는데 속으론 ‘그건 왜 물어봐. 관심 밖이야’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마음 써줬는데 고마운 사람이다.’ “를 쓰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거 같아서 홀가분해요. 아쉽냐고요? 그런 건 생각 안 나요. 이 책 한 권만 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쓸 거니까.” 지혜가 묻어나오는 그의 저서에는 ‘성실’을 표현해내는 인격이 반짝인다. 그래서 김 교수의 책은 그리울 수밖에 없다. >> 김형석 교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기를 거쳤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성장했으며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은 후배로, 인촌 김성수 선생은 멘토로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20년간 투병 한 아내를 떠나보낸 후 연희동 주택에서 10여 년째 홀로 살고 있다. 4녀 2남의 자녀들에게도 “나를 위해 마음 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며 고독을 견디기 위해 글을 썼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삶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 2016-08-3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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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온가족과 유럽 미술관을 순례한 미술평론가 이주헌
- 20여 년 전, 미술평론가 이주헌(李周憲·55)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 미술관을 순례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은 그동안 14만 부가 넘게 팔리며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았고, 이를 발판으로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당시 기저귀조차 떼지 못한 한 살, 세 살배기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났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3년 언론사 기자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무렵,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대중에게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관련 학위를 더 쌓아 대학교수가 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는 ‘책’이 그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하려면 기반이 되고 신뢰하게 할 만한 계기가 필요했죠. 때마침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졌는데, 국내에는 서양 미술관을 소개한 책이 단 한권도 없더라고요. 그 전에 일본 서점에 갔더니 그런 책이 10~20권 정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대중에게도 그런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해외에 가면 유명한 미술관을 안 들를 수 없는데, 그러면 아무런 정보 없이 가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알고 가는 것이 좋거든요. 그런 면에서 해외 미술관 관련 책을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으리라 믿었죠.”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혼자 가거나 미술 관련 전문가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온 가족이 함께, 그것도 한 살, 세 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손이 많이 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생고생(?)을 자처한 이유가 궁금했다. “여행 가는 사람들을 위해 미술관에 대한 책을 쓰더라도 막상 독자가 미술을 어렵고 낯설게 느낀다면 책에 손이 덜 가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음악에 비할 수 없이 낮았죠. 무엇보다 미술을 쉽게 접하도록 해야 했고, 그러려면 책을 부드럽게 꾸며야 했어요. 젊은 아빠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배낭여행을 가면 당연히 좌충우돌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누구나 예상하고 재미를 느낄 만한 에피소드들을 넣어 준다면 쉽게 책을 다 읽어낼 수 있고, 다 읽고 나면 미술을 어렵지 않게 느낄 것 같았죠. 물론, 바삐 살며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요.” ‘미술’, 공부하지 말고, 친구처럼 다가가라 그가 일종의 모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대중이 미술에 친근하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그는 두 가지를 조언한다. 첫째, 미술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느끼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느낌이에요. 대부분이 오해하는 게, 예술적 지식이 없으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고 공부부터 시작하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아는 만큼 꼭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들이 어른보다 지식이 모자란다고 해서 덜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요. 길가에 핀 꽃을 보고도 어른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 꽃을 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아 꼼짝을 못할 수 있어요. 아주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감상이거든요. 감상이란, 느낌을 얻는 거예요. 내가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지각해서 내 마음에서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 경험을 하는 거죠.” 그는 미술 감상은 지식을 넓히기 위한 행위가 아닌 느낌을 얻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지식을 넓히려면 지금 당장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책에 밑줄 긋고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이라는 것. “어떤 사람을 아는 것과 친구가 되는 것이 다르듯, 미술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그는 줄곧 미술을 ‘친구’에 비유했다. 미술을 친구 사귀듯 하라는 것이 그의 두 번째 조언이다.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미술 작품도 다 알 필요 없어요. 아무리 인기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끌리지 않으면 사귀지 않잖아요. 피카소나 고흐의 작품처럼 유명하다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먼저 내가 어떤 그림에 끌리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죠. 풍경화든, 추상화든, 인물화든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 위주로 즐기고 보면 돼요. 그러면서 내가 공부를 안 해도 점점 아는 것들이 생겨요. 그러다 관련된 글을 읽거나 책을 보면 확 이해되고 더 깊이 알게 되죠. 유사한 작가나 작품도 찾게 되고요. 깊어지면 넓어지는 건 순간이거든요. 미술은 그렇게 다가가고 공부하는 거예요.” 그는 책을 보고 하는 미술 공부는 관념의 연장선이지만, 그림을 느끼고 감상하는 것은 관계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중·장년에게 미술 감상은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좋아하는 작품을 발견하는 건, 친구가 생기는 거예요. 나이 들수록 나를 든든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친구잖아요. 대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힘들고 슬플 때 음악을 듣죠.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예술의 기본적인 기능이 있다고 하면 그건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전환되는 것처럼 좋아하는 그림을 보면 힘이 나고 위로받을 수 있어요. 좋아하는 그림 전시가 열리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가서 보고, 해외여행을 할 때도 멀리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찾아가 보면 반갑고 즐거워지죠. 저도 힘들 때 마티스나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보면서 용기를 얻곤 해요.” 20년 후, 여섯 가족이 함께한 유럽 미술관 여행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미술은 그야말로 ‘절친’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그 못지않게 미술을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든 이들이 있으니, 바로 그의 아들들이다. 20년 전 함께 여행을 다녀온 두 형제와, 그 이후 태어난 셋째까지 세 아들은 모두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책이 나오고 20년 후, 세 아들과 아내, 그리고 막둥이 딸을 데리고 다시 유럽 미술관 순례 길에 올랐다. 늘어난 식구만큼이나 이전과는 사뭇 다른 여행이었다. “가자마자 달라진 걸 느꼈죠. 예전에는 제가 짐을 가장 많이 들었거든요. 젖병, 기저귀, 유모차까지 보통 짐이 아닌 데다가, 아이들 자체도 짐이나 다름없었죠. 근데 이번에 가보니 애들이 크고 힘도 세져서 제 짐도 들고 다니고 알아서들 잘 다니니 아주 편했어요.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고 저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전에 갔을 때는 밤 문화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는데, 이번엔 유명한 펍(pub)이나 바(bar)에 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즐기니까 진짜 여행 온 기분이 들었어요. 여러모로 아이들이 나와 아내를 케어해 주니까 도움이 많이 됐고, 여행의 질 자체가 달라졌죠.”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그처럼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생각해 볼 것이다. 경험자로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부탁했다. “가족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와 ‘프로그램’이에요. 어디를 가서 뭘 즐길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지낼 수 없다면 의미 없는 여행이 되고 말죠. 가족끼리 가는데 무슨 프로그램을 짜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녀들이 크고 나면 각자 취향에 따라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다를 거거든요. 사전에 가족끼리 합의하고 배려해서 프로그램을 짜면 수월한데, 막상 가서 정하려고 하면 밥 한 끼 먹는 거로도 트러블이 생길 수 있어요. 현장에 가서 이러자 저러자 하지 말고, 미리 양보하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배려해 플랜을 짜면 기분 좋게 여행을 즐길 수 있죠.” 미술관을 테마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면 유명한 명소보다는 작고 한적한 곳을 찾아갈 것을 추천했다. “루브르처럼 유명한 곳을 가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보면 미술관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어요. 관광객이 몰려 복잡하고, 입장하는 데만 시간도 한참 걸리기 때문에 정신없이 관람하고 지치기 일쑤죠.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미술관을 가족과 산책하는 기분으로 간다면 더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최근 자동차 테러가 있긴 했지만, 제가 가장 추천하는 곳은 프랑스 니스예요. 니스에 가면 마티스나 샤갈미술관도 있고 인근에도 좋은 미술관이 많아요. 주변 풍경이나 밤바다도 참 아름답죠. 반대로 조금 복잡하더라도 비엔날레 기간엔 베네치아에 가면 시끌벅적하지만 워낙 보고 즐길 거리가 많아지는 시기니까 한 번쯤 가보면 좋아요.” 그는 유럽 어느 지역을 가도 가 볼 만한 미술관 몇 곳은 있기 때문에 미술관을 테마로 계획을 짜면 여유롭고 감성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 추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을 권하는 데는 ‘편안함’에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여행을 가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데 그런 염려 없이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언제 또 온 가족이 여행을 갈지, 그리고 10년 후에도 책의 개정판이 나올지를 물었다. “글쎄요. 10년 뒤에도 개정판이 나온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 보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꾸며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그 자체로도 무척 고마운 일이고요. 가족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해야겠죠. 근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까 각자 바빠요. 친구들과 여행도 가야 하고 자기 계획이 있으니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자연스럽게 또 떠나게 되지 않을까요?”
- 2016-08-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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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20) 코넬리의 하소연
-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다 비슷했다. 미국인들에게도 희로애락이 함께 공존했다. 겉으로 봐서는 냉정하며 대화가 차단될 것만 같은 코가 높은 사람들에게도 눈물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서로가 소통이 되지 않을 뿐, 어느 정도 사이가 통하면 깊숙한 대화가 오고 가기 시작한다. 더구나 미국인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하루의 일과를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강아지의 생활사까지도 털어놓는다. 어느 날인가, 젊은 백인 한 사람이 새 손님으로 가게를 찾아왔다. 키가 훌쩍 크고 코가 높다란 전형적인 미국인, 라스트 네임(성)이 코넬리라는 사람이었다. 훠스트네임(자기이름)은 데이비드라는 이름으로 필자의 남편(데이비드)과 이름이 같았다. 첫 만남 이후부터 그는 어찌나 상냥하고 친절한지 필자 부부를 만날 때마다 얼굴에 하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코넬리는 자기의 직업이 돌 수입업자라고 진지하게 소개를 했다. 그전에는 음악을 아주 즐기는 뮤지션이었다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다양하게 늘어놓았다. 한 6개월 이상을 단골로 열심히 필자의 세탁소를 드나들었다. 어느 날, 그가 불쑥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얼굴이 까맣고 키는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그녀가 자기 와이프라며 극진한 소개를 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은 되어 보였다. 와이프라는 까무잡잡한 여자는 누가 봐도 귀엽고, 이목구비가 아주 아름답게 생겨 남자들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쁘게 생겼다. 미국인들은 때로는 자그마하고 예쁜 동양인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다가 어떻게 만났느냐고 문득 물어보았다. 그녀는 브라질 여성이었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편인, 코넬리가 돌 사업으로 브라질을 갔다가, 그곳에서 만나서 그녀를 미국까지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척 사이가 좋은 신혼부부가 깨가 좌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필자 부부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랑 행위가 절절 넘쳐흘렀다. 일 년쯤이 지나, 하루는 코넬리가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 채로 힘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필자 남편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와이프가 이혼을 원하는데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다. 더구나 오랜만에 겨우 임신을 했는데 막무가내라며, 뜻이 안 맞아 부부싸움을 왕창했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 부부는 무어라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참고 기다리라는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파랗고 맑은 그의 눈에 진심 어린 눈물이 고여 왔다. 필자의 남편이 두 손을 잡고 안심을 시키며 함께 걱정을 해주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 그가 심각한 얼굴로 또 찾아왔다. 결국 와이프가 집을 나갔다고 울먹거리며 깊은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필자 부부는 직접 브라질로 가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저 넋두리를 들어주는 것도 큰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단지 받아주고 몇 마디 해 준 것 밖에는 없었다. 그 후로 한 달쯤이나 지나 코넬리는 그녀를 브라질에서 직접 데리고 돌아왔다. 어느새 피부가 더 새까매진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져있었다. 코넬리의 얼굴에서도 다시 환한 모습이 보여왔다. 배가 남산만 한 그녀는 배를 까뒤집어 보이며 자랑을 서슴지 않았다. 아기가 들어있는 바가지 모양의 둥그런 배 위에 사인을 하라고도 했다. 그들의 묘한 문화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미국 남녀의 관계였지만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들도 필자 부부를 다시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반가움에 서로 허그를 하며 함박 웃음꽃을 피웠다. 코넬리는 아기를 낳기 전에 필자 부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노라고 했다. 쾌히 승낙을 하며 필자 부부는 선물로 코리안 바비큐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미국 사람들은 코리안 바비큐를 무척 좋아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만남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며 서로 헤어졌다. 얼굴이 까맣고 자그마한 그녀는 배가 불쑥 나왔지만 엉덩이를 씰룩대고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나갔다. 촐랑대는 어리고 까만 남미 임산부의 모습이었지만 두 부부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고 흐뭇했다. 결국 코넬리 눈물의 하소연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람이 때로는 하소연을 국경 넘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약이 되는 것만 같았다.
- 2016-08-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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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을 부탁해 PART2] 노화로 인한 수면질환 피해갈 수 없나
- 얼마 전 MBC TV의 에서 독특한 장면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MC 전현무가 본인의 수면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전깃줄을 주렁주렁 달고 수면실에 들어가 잠을 청하거나, 방독면처럼 생긴 장비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놀라움을 표시했다. 검사 방법도 독특했고, 질환 이름도 생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방송을 통해 소개된 수면질환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만큼 잠과 연관된 질환은 다양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질환은 ‘노화’와 관련이 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흔히 수면질환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불면을 생각한다. 잠자는 데 문제가 있다면 불면증과 수면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잠을 못 자는 것이 바로 수면질환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잠으로 인한 질환은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분야도 넓다. 수면과 관련해서 환자들이 가장 많이 병원을 찾는 질환은 불면증이 아니라 앞서 전현무가 앓았던 수면 무호흡증이다. 코골이가 심각해지면서 잠자는 동안 일시적으로 호흡이 중단되는 증상이다. 주변에서 자다가 코 고는 소리가 멈추면서 “컥컥” 소리를 내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면 수면 무호흡 환자를 만난 것이다. 이 수면 무호흡증은 보통 자는 도중 무호흡증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에 따라 그 심한 정도를 나눈다. 1시간에 5회 이하로 무호흡증상이 나타난다면 정상이지만, 15회까지는 경증, 30회까지는 중등도로 구분한다. 30회가 넘어가면 심각한 중증이라고 진단된다. 이를 의료인들은 RDI(수면호흡장애지수)라고 부른다. 제대로 검사하려면 뇌파와 호흡, 안구의 움직임 등을 살피는 수면다원검사가 필수다. 대학병원이나 전문클리닉이 환자가 밤새 잠자며 검사받을 수 있는 수면검사실을 운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면 무호흡 산소공급에 문제 일으켜 수면 무호흡이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가장 큰 문제는 수면 중 뇌가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수면이 중단될 때마다 사망을 막기 위해 뇌가 잠에서 깨면서 호흡을 강요하기 때문에 건강의 필수요소라 꼽히는 렘수면, 즉 질 높은 수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현무의 치료를 담당했던 지앤지수면클리닉의 이비인후과 전문의 현도진 원장은 수면 무호흡의 원인 중 하나로 노화를 지목했다. “대부분의 환자가 수면 무호흡을 코골이와 연관해서 코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질환은 목과 기도가 문제예요. 입천장과 혀 뒤의 인두 부위가 잘 때 좁아지면서 호흡을 방해하기 때문인데, 나이가 많아질수록 점막이나 근육의 탄력이 떨어지면서 호흡할 때 음압이 걸리면 기도가 쪼그라들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죠. 뜻밖에도 여성분들이 많이 문제가 돼요. 중년 여성이 갱년기를 맞으면서 탄력을 잃는 현상이 급작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발병 소지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것이죠. 이에 반해 남성은 완만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수면 무호흡증이 나타나면 증상은 다양하다. 깊이 잠들 수 없으므로 낮에 졸리기 시작하고, 머리가 무겁고 심한 경우 두통도 동반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산소 부족이다. 산소가 부족해지면 뇌가 교감신경을 자극해서 심장박동을 높이도록 명령을 내린다. 피가 많이 돌도록 해 산소를 확보하려는 반응이다. 이 과정에서 혈압이 높아지면서 뇌졸중 발병의 원인이 된다. 또 심장에 무리를 줘 심근경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수면 무호흡의 치료는 보통 수술과 양압기의 사용 두 가지가 있다. 현 원장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치료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과거에 잘못된 이론이 알려지면서 흔히 코골이 수술이라고 불리는 목젖 제거 수술이 남용됐어요. 결국, 이 수술은 재발이 가장 심한 수술로 낙인찍혔죠. 실제로 병이 재발해 저를 찾는 목젖 없는 환자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목젖이 아니에요. 또 무조건 수술로 혹은 양압기로 해결하려는 풍토도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환자에 따라, 생활 환경에 따라 적합한 치료방법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지불안증후군 환자도 늘어 최근 수면장애 중 새롭게 주목받는 질환 중 하나는 하지불안증후군이다. 잘 때 다리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다리가 저리거나 움직이려는 현상이 일어나는 증상이다. 사실 이 증상은 꽤 많은 환자를 고통받게 했는데, 외과적 질환으로 오해 받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불안증후군이 문제가 되는 것은 환자의 수면을 방해해 깊은 잠에 들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 학계에서는 하지불안증후군의 원인을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부족으로 보고 있다. 도파민 부족은 철분 결핍이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고용량 철분제를 투약하면서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외에도 극히 드물지만, 기면증(嗜眠症)도 수면질환에 속한다. 느닷없이 잠에 빠지는 것은 심한 기면증에 속하고,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심한 졸음을 느낀다면 기면증 초기증세로 볼 수 있다. 심하면 가위눌림이나 잠꼬대, 발작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와 함께 수면 중 이상행동이 많아지는 것도 수면질환의 하나다. 예를 들어 잠꼬대를 심하게 한다든가 몸을 뒤척이고, 심한 경우 몽유병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몽유병은 수면 중 ‘수면 간질’의 가능성도 있다. 꿈이 많아지거나 반복적으로 안 좋은 꿈을 꾼다면 우울증 증상의 하나일 수 있으므로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 시니어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수면질환을 꼽자면 역시 불면증이라 할 수 있다. 불면증의 원인은 너무나 다양하다. 최근 불면의 새로운 원인으로 등장한 것은 스마트폰이다. 밤에 불을 끄고 스마트폰을 보면 뇌가 활성화돼 쉽게 잠들 수 없게 만든다. 특히 동영상은 뇌를 가장 활성화하는 콘텐츠로 꼽힌다. 그래서 전문의들은 잠자기 전 스마트폰으로 영화나 방송 등을 시청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행동으로 꼽는다. 대표적 수면질환 불면증 스트레스는 불면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가족관계나 일, 사회활동 등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계속 교감신경을 자극해 쉽게 잠들지 못하게 만든다. 걱정거리가 많을 때 불면에 시달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불면증의 해결책으로 일반적으로 수면제 처방이 이뤄지지만 수면제의 약효가 듣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만약 수면제를 먹어도 계속해서 잠을 제대로 청하기 어렵다면 대학병원이나 전문 수면클리닉에서 전문적인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불면증 역시 노화와 관계가 있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분당바른세상병원의 박성준 원장은 노화와 함께 다양한 통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노화와 함께 여러 관절질환으로 인한 통증이 불면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오십견으로 불리는 동결건이 대표적 증상이죠. 뒤척일 때마다 어깨 통증으로 잠을 깨게 합니다. 때문에 불면으로 다른 합병증까지 발생하기 전에 통증을 유발하는 관절질환을 빨리 치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면자세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목 아래에 받치는 베개는 높이가 10cm를 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옆으로 누워 자는 자세도 척추 건강에 나쁘지 않은데 이때는 적당한 높이의 베개를 받쳐 목이 꺾이지 않도록 하고 무릎과 무릎 사이에 베개를 하나 더 끼워 골반 높이와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불면을 이기기 위해서는 잠드는 시간과 기상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저녁에도 비교적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망가진 신체 리듬을 회복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전문의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햇볕이다. 햇볕을 충분히 쬐는 것만으로도 뇌의 송과선에서 숙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를 자극한다. 이렇게 낮에 햇볕을 쬐며 1시간만 걷는 습관을 지녀도 2~3주 후 뚜렷한 불면증 개선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깨 다시 잠들지 못하는 시니어들에게 효과적이다. 수면은 7~8시간이 적당 그렇다면 잠자는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2014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유근영 교수팀이 발표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가장 권장할 만한 수면시간은 7시간에서 8시간이다. 조사에 따르면 수면시간이 5시간 이하일 때는 사망률이 21% 증가했고, 9시간 이상일 때에는 사망률이 36%나 증가했다. 너무 많이 자는 것도 건강을 해치는 셈이다. 잠을 부르는 음식, 잠을 쫓는 음식도 따로 있다. 강남 자생한방병원의 유한길 원장은 음식에 따라 숙면을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우유, 치즈, 상추, 쑥갓, 양파, 둥굴레, 두충 등 몇몇 음식들은 잠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호두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서태후가 애용했다 할 만큼 불면증에 효과가 있어요. 반대로 수박처럼 수분이 많은 음식, 자극적인 음식은 잠을 내쫓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과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식하면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위장이 활발하게 운동을 하게 돼, 당연히 잠을 이루기가 힘듭니다. 술도 마찬가지죠. 한두 잔의 와인은 좋지만, 그 이상은 오히려 잠을 못 이루게 합니다. 그렇다고 술에 곯아떨어져 자 버릇하면 알코올 중독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 2016-08-2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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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인상학] 빛나는 이마는 행운을 가져다준다
- 삶의 길은 누가 만들어 줄까 하는 의심이 들던 젊은 시절엔 스스로가 개척하여야 한다는 강한 의지 하나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나이가 들고 삶의 연륜이란 것이 묻어 있는 지금은 거울 속의 나와 마주하면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시간들을 점검하게 된다. 날마다 보는 내 얼굴이지만 그 얼굴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얼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잘 만드는 것이 보여주는 얼굴이다. 언젠가 TV 공익광고로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나요’가 방영된 적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지만 자신을 보는 시각은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에 정작 중요한 일은 실패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눈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 흔히들 ‘다 속여도 눈은 정직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나 영리하기에 훈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게 관리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대의 눈을 보면서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은 스스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기가 한 행동은 스스로 잘 알 수가 있다. 지금의 행동이 얼굴을 만드는 것이기에 자신의 행동을 헤아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먼저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해보자. 세상의 중심은 나[我]란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공정한 마음으로 상대를 살펴보는 것이다. 상대를 볼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이 이마일 것이다. 이마는 우리 얼굴의 가장 위에 위치하며 하늘과 소통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기운을 가장 먼저 받기에 운(運)이 들어오는 첫 번째 통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운이 들어오면 이마는 밝고 환하게 빛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이마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이마의 주름이다. 세 줄이 뚜렷한 주름은 좋은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필자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유인즉슨, 주름은 편안한 상태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주름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마음고생이다. 심신(心身)이 함께 힘든 상황을 겪었기에 의지력이 강해지고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매진하는 경향이 있어 원하는 일을 성취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주름이라는 설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삶에는 힘든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기에 원하는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그 힘든 상황을 감내하는 힘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이마 주름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면 심기를 바로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연습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마를 보면서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많이 들어 본 이야기는 아닐 것이지만 우리의 얼굴은 각자의 역할이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이마는 넓고 작은 동산처럼 둥그런 모양이면 좋은 이마라 할 수 있다. 넓은 이마는 사업 운이나 가정 운 모두 좋다고 할 수 있다. 성격도 포괄적이라 다방면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대인관계도 좋아 많은 사람들과 넓은 관계망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이마가 넓은 사람은 특별히 작은 흉터라도 생기지 않도록 잘 관리하여야 한다. 자신의 운이 늘 좋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작은 장애물이 도리어 큰 재앙처럼 보여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마가 좁다는 것은 자신의 활동 영역이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가서 활동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이나 잘하는 부분에 집중하여 자신의 분야에서 커다란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 요즘의 시대 상황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개발하여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정받을 수 있고 남보다 훨씬 뛰어나 보이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그러면 행운이 오는 이마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먼저 이마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이 모두 앞이마를 덮고 있다. 불황기에는 여성의 치마 길이가 짧아진다고 한다. 옷이 한 시대의 생활상을 대표하는 문화라고 한다면 얼굴은 우리의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마를 가리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면 경제가 어두워진다고 강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마는 하늘의 기운을 받는 부분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으면 밝은 기운을 받을 수 없어 습하고 어둡게 된다. 밝은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지만 그것을 차단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수험생이나 입사 시험을 앞둔 자녀를 둔 부모님에게 늘 당부하는 사항이 앞머리를 내리지 말고 이마를 잘 드러내서 상대에게 밝은 기운을 전달해 주라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면서 즐겁기보다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기쁨과 보람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 이마를 가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머리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우리나라는 유난히 머리가 없는 것을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세계적인 스타 율 브리너는 모두가 멋진 배우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요즘은 자신의 대머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트렌드로 만들어 성공한 경우가 많다. 천기(天氣)를 더 많이 받아서 곧장 내려 보내기에 운의 흐름에서 좋은 기운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마에 난 작은 뾰루지나 상처는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다. 어린아이일 때 주로 상처가 많이 생기는데, 부모의 무관심으로 상처를 방치하면 그 아이가 자라면서 운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마가 좁고 작으면 생각이 치밀하고 집중적이며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이런 상대에게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면 불행해진다.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영역을 인정해 주고 하고 싶은 연구나 공부에 매진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작은 별이기에 스스로 빛을 내면서 살아가야 한다. 먼 곳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별은 모두가 다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주변에 밝고 빛나는 별들이 많으면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고 행복해진다. 행운은 스스로 만들어 가기도 하지만 주변의 관심과 사랑이 보태지면 무한대로 소유할 수 있다. 지금 내 이마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점검해 보자.
- 2016-08-2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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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마음
-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다. 이런저런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마음을 괴롭힌다. 어쩌면 그것들이 삶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나이를 먹고 세월을 품어보니 더 이상 못 견딜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약’이라는 명언도 있는가 보다. 한해 두 해 살다 보니, 어른들의 옛 말씀들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지나고 나서야 경험을 해보니 이제야 터득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나약해지기 때문인가 보다. 젊은 날의 고집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고 어느덧 세상의 이치를 실감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속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복잡 미묘하다. 적어도 필자의 젊은 날에는 아주 심했다. 더구나 주변의 모든 것들이 거의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숨을 쉬고 뒤돌아보니, ‘왜 그때는 그렇게도 몰랐을까?’ 라고 자신에게 반문한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연연해서 상처받고 아파하며 밤을 꼬박 지새운 날도 있었다. 그 상처가 너무 깊어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로 방황한 때도 있다. 사람이 살면서 조금은 아픈 과정 속에서 성숙되고, 또 그것을 감당해내며 넉넉해진다는 것을 그때는 차마 몰랐었다. 그렇게 곧 죽을 것만 같던 엄청난 일들도 시간이 지난 지금에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사람들과 뒤섞여 수없이 관계를 맺고,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던 고통의 시간들도 잠시 멈추어 한발 돌아보면, 굳이 화해하지 못할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인간이고 사람 냄새이다. 사람이 태어나 쉽게 죽고 살기도 하는데, 죽음에 비하면 무언들 못하랴 싶기도 하다. 사실상 ‘용서’란 단어는 엄숙히 말하면 자기와의 싸움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어느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화’라는 용광로의 불길 속에 자기를 던져놓으므로 해서 용서를 못하는 것만 같다. 아무리 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꺼지기 마련이다. 결국 시간 속에 자신만이 재가되어 힘없이 벗어나오게 되고, 한때 시뻘겋게 타올랐던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적어도 본인의 양심은 그 사실을 안다. 치솟았던 ‘화’라는 것들도 언젠가는 열기가 식어 가슴에 흩어지고 만다. 남는 것은 후회의 마음뿐이다. 오히려 스스로가 자신의 화를 감당치 못해, 용서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결론의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어찌 화를 내지도 말고 살라는 말인가? 얼마든지 ‘화’라는 것은 자유롭게 끓어 날 수도 있고, 특별히 마음이 여린 사람은 깊은 아픔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루빨리 그 불길에서 벗어 나는 일, 그 길이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반성하고 그리고 남에게도 넉넉한 마음을 베푸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다. 단순하게 마음만 먹으면 아주 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까짓 것 마음먹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놈의 여유로운 마음먹기가 무척 힘이 드는 것뿐이다. 결국 자아 성숙이 덜 익은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모든 것들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위대한 사실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식과의 관계도 남편 또는 이웃들의 친분도, 그 모든 것들도 다, 자신으로부터 온다. 모든것들은 그저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으로부터 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쉽게 가라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신만은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힘겨운 이 세상을 살면서 애써서라도 주변을 향한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필자도 마음에 잔잔하게 용서의 꽃을 피워 평화로움을 만들어 내고 싶다. 그 꽃은 특별한 권리가 아닌 평범한 사랑의 꽃으로, 사람 냄새 훈훈하게 피어나는 예쁜 꽃이었으면 어떨까 싶다. 또 돌아보고 후회하는 사람의 꽃이라면, 이왕이면 가슴 따뜻한 ‘용서의 꽃’으로 피어나면 좋겠다.
- 2016-08-2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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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 할머니 이야기
- 우리 이웃에는 일흔이 지난 할머니 한 분이 아들과 함께 산다. 주변에 밭을 가지고 있다. 김장배추며 무, 파, 고추, 들깨, 상추, 시금치 등을 가꾸어 먹고 이웃에 나눠준다. 요즘엔 들깨가 초등학생 키만치 자랐고 김장할 무씨를 파종하여 꽤 긴 이랑에 싹이 터서 귀엽기조차 하다. 이른 아침 산책길을 나서면 밭에서 아침 먹거리를 위해 파를 뽑거나 오이를 따기도 하고 밭을 둘러본다. 아침 인사에 기뻐하며 화답을 빼놓지 않는다. “늙은이에게 늘 인사를 건네주는 것만으로 고맙다.” 밝게 웃는다. 내 사진 속의 등장인물이 될 때도 있다. 간혹 밭에서 딴 가지며 오이를 건네주기도 한다. 일궈 놓은 상추밭에 상추를 따서 먹으라 성화다. 무가 익어갈 무렵이면 먹음직스러운 녀석을 뽑아 준다. 집을 비웠을 때는 나눠줄 채소를 담은 검정 봉지를 현관문에 매달아 두고 간다. 안사람도 맛있는 것을 사서 건네준다. 주고받는 세상인심이다. “이웃사촌”인 셈이다. 농촌으로 외지에서 농촌으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면 먼저 정착해 사는 마을 사람들과의 친화 문제가 뉴스거리로 자주 등장한다. 예전의 여유롭고 넉넉한 시골 인심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환경이 달라짐에 따른 시대의 변화이지 싶다. 그러나 자기 하기 나름이다. 남남이지만, 사촌과 같은 가까운 관계가 이웃이다. 떨어져 사는 자식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그렇게 가까운 이웃을 이르는 말이 “이웃사촌”이다. 다급한 일을 상의할 사람도 이웃이다. 이처럼 삶에 있어서 중요한 관계망의 하나가 이웃임엔 틀림없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미우나 고우나 이웃은 있기 마련이다. 요즘은 층간 소음 문제로 원수지간이 된 경우가 없지 않아도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인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의 소중함을 느낀다. 근대산업화가 진행하면서 할 일이 많아지고 대체로 시간에 쪼들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과 아내가 함께 직장을 다녀야 가정경제가 유지된다. 1983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해외보험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휴일을 이용하여 영국을 방문하여 교포 집에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때 안주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영국에서는 일손이 있으면 누구든 일을 해야 먹고 산다. 남편 혼자 일해 먹고 살 수 있는 한국 부인들이 부럽다.” 20여 년이 지난 우리나라도 그런 상황이 됐다. 그렇기에 휴일은 그야말로 직장인의 황금 휴식시간이다. 맞벌이하여야 하는 시대이고 자기 일을 찾아 함으로써 보람을 갖는 시대를 산다. 그 시간을 쪼개어 부모를 방문하기는 마음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이웃은 중요한 관계망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와 아파트 문화가 확산하면서 이웃이 멀어지는 듯도 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지내기 예사였고 함께 쓰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그저 그랬다. 서양의 외국인처럼 낯선 사람을 만나도 어깨를 들썩이며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동경하기도 했다. 근래에 이르러 이웃은 더 중요하게 주목받는다. 홀몸노인을 비롯하여 홀로 사는 사람과 세대가 늘어나는 현실에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다. 특히 나이 들어 외로움을 더 타는 시니어에 꼭 필요한 인간관계다. “이웃사촌”으로 내가 먼저 나서야 한다. “늙은이에게 정답게 인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 점심 사시겠다.”고 나서는 우리 이웃 할머니처럼 말이다.
- 2016-08-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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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유주택에서 살기
- 50대 이상이 되어 자식들도 분가하여 빈 둥지가 되면 새로운 집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큰 아파트나 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3대 욕구는 의식주인데 이중 집은 인간의 행복의 질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노인들의 가장 큰 바람이 자기가 사는 집에서 가족과 같이 생활하다가 죽는 것이라고 한다. 집에는 각종 추억이 깃들여 있고 자기만의 생활이 보장되며 인간관계가 이어지는 곳이다. 거동이 불편해져 가족이 돌보는 것이 힘들어지면 노인들은 대부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보내진다. 이 경우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못하고 인간다운 대접을 못 받기 때문에 삶의 질이 현격히 저하된다. 통계에 의하면 최근 1인 가구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일본에는 고독사 사람들이 많고 우리나라도 그러한 사례가 종종 매스컴에 보도된다. 공유주택에서 살기(shared house holding)는 새로운 주거형태이다. 주거비용을 줄이고 더불어 사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아직은 초창기이지만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람들, 성리산 마을, 구름정원, 소행주 , 어쩌다 집, 푸른 마을 협동조합 등 주위에 공유주택의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약해지는 가족의 기능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흔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는 외국의 공동체 생활을 다룬 책이다. 캐런, 진, 루이스 3친구가 같이 공동생활한 실제 체험담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기에 필요한 생활규칙, 표준계약서 등도 다루고 있다. 타인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지인이 더함플러스 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50+세대를 위한 주거전환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서울 50플러스재단 등에서 개설하는 강의를 들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2016-08-2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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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우물 안 개구리 세상 구경한지 50년 되던 해까지의 얘기
- 나는 수원이란 작은 동네 서둔동에서 살았다. 초등 1학년부터 결혼할 때 까지 이사 한 번 안 하고 컸다. 서둔동에는 서울 농과대학과 진흥청이라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오랫동안 수원의 교육열이나 교육관계의 문제라면 모두 통계로는 전국 1위권이었단다. 수원에서 자라는 동안 연습림이라는 하늘이 안 보이게 빼곡하게 들어선 소나무 밭을 놀이터로 뛰어다니며 그 왼쪽으로 달려가면서 산속에서 나는 따먹는 앵두, 보리수, 오디, 산딸기... 건 다 우리들 것이었고 버섯이라든지 나물들은 우리의 밥상 반찬이었고 화가 나도 서러워도 산 속을 돌아다니며 목청껏 노랠 불러가며 풀었다. 학교 자연시간에 배우면 뭐든지 다 실험할 수 잇는 선이었다. 예를 들어 개미에 대해 배운 날, 나는 쇠로 된 긴 꼬챙이 하나를 들고 산으로 가서 개미 집 구멍에 그걸 깊이 끼워서 위로 세차게 올려 보면서 개미들이 만든 집 구조를 열심히 공부했다. 내 공부를 위해 놀란 개미들이 번데기를 입에 물고 질서정연하게 도망가는 걸 어리석음에 공부하는 거라고 불쌍히도 안 여겼으니... 언딘가로 이어지는 행렬은 대답했고 작은 구멍은 작은 집이었고 큰 구멍은 으리으리한 대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개미’ 란 책을 읽으면서 혼자 많이 슬퍼했었다. 하나 밖에 모르는 단순한 애였었다. 그러한 나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 축산학과 교수가 아버지로 형제는 5이었고 딸이 넷인 딸부자 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화산 목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출산 주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임신한 내내 입덧이 심해 고생은 했지만, 낳을 때는 별로 큰 아픔도 없이 세상 구경을 나온 나는 무럭무럭 잘도 자라줬다고 한다. 날짜도 안 잊어버린다며 7월 13일에 사과가 먹고 싶다하니 아버지가 그 당시 근무하던 사리원 중학교 학생들이 익지도 않은 풋 사과를 어디서 구했는지 가져왔더라나? 아마도 아무리 찾아도 사과를 구할 수 없으니 학생들에게 말한 듯하다며, 어머니가 먼 하늘가를 가끔 바라본다. 너무 일찍 가버린 낭군님이라도 생각하는지...‘뭐가 그리 바빠 정년도 못 채우고 갔는지...’ 하며 요즘엔 입버릇이 되었는지 더욱 더 자주 중얼거리곤 한다. 하얀 칼라를 반듯하게 다려 입고 귀밑 2센티미터의 머리로 자르고 다녀야 하는 중학생이 되자 제일 큰 사건은 우리 집 우편함에 연애편지가 다발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집배원 아저씨는 노끈으로 묶은 편지 다발을 뒤흔들면서 내 동생들과 일하는 언니를 기쁨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소리 지르게 했다. 밤에 그걸 읽어대며 쿡쿡 거리고 신나할 생각으로 달뜨게 하는 편지다발이었다. 정작 읽어야 할 본인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래서 벌을 받는 기분이 가끔 들기도 한다. 내게 중, 고등학생 시절은 길에 다니는 남자들은 나를 그냥 보내면 섭섭했던 듯...했다. 그 당시 내가 친구들에게 즐겨 하는 말은 ‘내가 자기들 말에 홈빡 속아 넘어 갈 듯 순진하게 보이나봐. 병신같이 쉽게 생긴 거지 뭐~~’ 대학에 갈 목적이 서 있던 나는 공부에만 전력투구했다. 정직하게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일엔 눈도 안 돌렸다. 제일 바보라는 모범생으로 6년을 보냈다. 시시콜콜 재미있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저 배우고 공부하면서 먹으면서 지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었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 세상에 나와 오만가지 구경에 빠지기 시작한 거였다. 만나는 것, 보는 것들이 다 생소했고 흥미유발에 호기심 난동이었다. 배울 것, 사람 만날 일, 영화와 연극 볼 일, 친구들과 수다를 즐길 일, 숙제할 일, 모르는 곳 찾아다니기...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지면서 즐기다 보니 내가 보기에 언제나 오동통했었는데 몰라보게 아주 급 날씬해져버렸다. 더군다나 버스 안에서의 투쟁은 나에게 큰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콩나물시루 버스타기가 다이어트의 주요인이었지만 집에서부터 40여 분을 넓은 대로를 내 맘대로 걸어 다니며 학교를 다녔던 여고 시절 12년간의 여유로움과 조용함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렸다. 홍릉과 신촌을 오가는 1번 버스는 S대와 Y대 학생들과 우리들을 가득가득 실어 나르기 바빴다. 완전 짐짝 같았다. 그 속에서의 가지가지 에피소드는 정말로 끝이 없는 얘기 거리다. 그런데 5월부터 데모를 해대는 바람에 휴교령이 내려져 수원 집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동생들 뒷바라지로 서울로 가고 그 대신 수원 살림을 내가 도맡게 되어버렸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아버지 시중드는 것과 처음으로 두 여동생 도시락 준비와 청소 집안 일 그리고 세끼 밥 해 주는 일이 내겐 버거웠고 힘들었다. 어느 면으로 편했던지 가을이 되면서도 어머니는 내 생활을 되돌려 주지 않아 나는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서울로 통학을 하게 되어 버렸다. 처음 하는 통학생 생활에 어리바리 적응도 어려워 힘 드는 판에, 남학생들은 새로움을 맞아 즐기는 속에 나는 밀려들어 쳐 박히게 되었다. 봄(입학시즌)에는 없었는데 가을바람 부는 계절에 새로운 여학생이 나타났다는 뉴스는 첫 칸부터 입으로, 입으로 소문이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가기 시작~통근열차기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E 여대 배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우리의 S대, Y대, E대 생으로 구성된 코라스(지금은 판코라고 함)라는 클럽의 힘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지낼 수가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클럽 남학생들의 관심어린 보호를 받으며 늦게 타도 자리는 언제나 맡아져 있었다. 그 덕으로 심심한 적도 없이, 내가 일학년이니 모두가 선배님들이라 든든했다. 집에서도 여자들이 많은 나는 남자들의 세계를 처음 새색시 방을 몰래 숨어서 훔쳐보듯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는 환경에 접했다. 여러 가지 성격의 남자들을 한꺼번에 대해 가면서 생소한 경험들을 했다. 남동생은 한참 아래였고 딱 아버지라는 남자 한 사람이 있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왔던 나에게는 무엇이든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고, 말도 같은 문장과 단어들이지만 나랑은 완전 다른 반응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이해하기 쉽다가도 어느 순간 완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보여 ‘으응?’ 하는 날들이 많았다. 점점 약아져 가는 나를 얼핏 발견하고는 웃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어떤 일이든지 면전에서는 아무 것도 트집을 잡는 다거나 이상한 발언을 못하는 성격이라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이해해줘서 모든 것들은 다 편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대학 생활은 평탄했고 놀라운 재미는 없었지만 학교에서 교내 활동도 해 가면서 잘 보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선생님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실력을 닦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 오는 9월 정도에 이력서를 넣었다는 소리와 함께 은행으로 발령이 나 버렸다. 초등 담임 교수님께서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왜 은행으로 가는 거냐며 호통을 쳐서 무서웠다. 그때 내가 좀 더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따져보는 똑똑 이였으면 그 교수님 심중의 깊은 뜻을 헤아려 좀 더 신중하게 상담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도 아직 우물 안 개구리였으니 뭘 알았을까? 기껏해야 교수님 말씀을 부모님께 전달하는 정도였으니... 그렇게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으면서도 자기의 갈 길을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걸어가는 멍청이였으니. 그야말로 쉽게 말해서 철이라곤 없는, 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밥통이었던 나였음이었다. 자기주장이 약했고 남이 살아 주는 듯 강 건너 불 보듯 언제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을 못 벗어난 덜 떨어진 상태로 그때 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다. 그래도 이상하게 계속 꿈을 꾸면서 이뤄지리란 것을 확신해 가며 살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다. 고모에게 여러 가지 작문을 지어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배워서 외우면서 언제 일본어를 할 수 있을까를 당연한 일처럼 기다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결혼해서 나의 보물 1호와 2호가 태어났다.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남편이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갈래 길로 갈팡질팡 이었다. 가자니 4학년이었던 위의 아들이 5,6년 있다가 오면 교육적인 문제로 학교생활 적응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이란 나라는 어려서부터 ‘왜놈, 아니면 일본 놈..’이라면서 36년간의 설음으로 뭉친 원한 맺힌 선생님들과 부모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아주 안 좋은 경험담들을 귀에 딱지 앉을 듯 교육 받으며 살아왔었던 지라 겁도 났었다. 한국을 업신여겨 아이들 마음에 상처라도 입게 한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서려왔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남편의 우격다짐은 담임선생님과 나는 안중에 없었다. 나의 소원이었던 일본어는 외국인에게 일어를 가르칠 수 있는 일어 교사자격증을 따는 정도의 실력을 쌓게 되었지만, 한국에 왔을 때, 아이들의 학교 문제는 심각했다. 내 꿈은 저절로 이뤄졌지만, 나의 보물 1,2호는 쪽발이라는 수모까지 받아야 할 고생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오히려 대우를 받아가며 한국인이라는 위상을 빛내며 멋진 형제로 뛰어난 아이들로 칭송 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상에 모국에 와서 더군다나 강남 8학군이라는 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기가 막혔다.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무식한 선생님들이 쪽발이라면서 구박을 일삼았다나?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선배들이 심심하면 교육시킨다며 데리고 가서 때렸다고... 두 형제는 딱 하루 학교 갔다 와서, ‘엄마 완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야. 어떻게 자기 나라가 더 어렵고 힘든 거지? 이해가 안 돼’ 라며 귀국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거역하고, 한국으로 온 것을 내내 후회하는 두 녀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 고집을 피워서라도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을 하는 후회막급한 날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물 안 개구리가 멋모르고 밖으로 나와 당해 가며 사는 세상은 험악하고 어지러웠다. 어느 것도 상식을 벗어났고, 공중도덕이 없는 세상은 우리 식구를 어느 늪 속에 내동댕이쳐버린 거 같았다. 계속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당하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 갔다. 명랑 발랄 했던 우리들의 웃음을, 언제나 즐거웠던 대화를 잃어갔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아주 놀랍게도 똘똘 뭉치는 가족애를 만들어 갔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서로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아껴가며 일본에서 배워서 익혀 온 좋은 것들을 잃지 않으려 달팽이처럼 속으로 감춰가며 간직해가며 살아냈다. 우리가 겪어낸 것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이란 글을 거실에 걸어 놓고 새겨가면서 서로를 아끼고 굳은 의지로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늦으막하게 나마 익혀 가며 깨달아가며 말이다. 서로를 보살펴 주고, 서로의 안쓰러운 눈물 닦아줘 가며 그렇게 아프게 살아가며 덕을 쌓아오고 있었는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의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우릴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 일은 우릴 마구 두들겨 팼다. 깡패가 이유를 묻나 불문곡직하고 두들겨 패면 맞아야 하는 그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어둠 속 낭떠러지로 밀어 넣어졌다. 우리는 그 나락으로 계속 떨어져 갔다. 나의 1호 보물이 슬어져 갔다. 겨우 남은 2호 보물과 나의 울부짖음 그리고 법이란 것에의 올바름에 억울하기만 한 원통함과 원망, 용서, 거짓말. 진실, 미움, 그리움, 보고픔, 사랑, 하늘, 별, 내 아들.... 내 아들... 나의 인생 50년이 마감되던 날이었다. 1995년 11월 20일 새벽이 나를 개벽시켰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넋 놓고 있기를 거부했다. 세상 밖의 어지러움 속으로 스며들며 이겨내려 발버둥을 친다. 앞으로 다가오는 날들은 조금 더 똑똑하게 살아봐야지...번데기 밖으로 나온 나비처럼 날아 봐야지... 나비야 네가 허공으로 새 삶을 위해 날아오를 때, 나도 나의 새 삶을 위해 네다리 폴짝 거리며 연못으로 뛰어 들 꺼야...
- 2016-08-1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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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PART5]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⓵강현아, 어디든 같이 가자
- 나이가 들면서 친구 사이도 연인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학창 시절부터 만난 오래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났어도 그 누구 못지않게 마음 잘 통하는 친구도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좋은 내 친구, 어쩌다 만났는데 단짝이 된 친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365일, 일만 생각하며 앞만 보고 살았던 금융맨이 퇴직 후 친구들의 여행을 돕는 여행 전문가가 됐다. 일명 ‘동창생 여행 전문가’가 된 정강현(丁康鉉 ·69) 회장. 퇴직 후 서울사대부고 동문 카페에 18회 졸업생들의 여행 모임 ‘여유회’를 만들어 친구들과 여행을 다닌 지도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어디든지 간다는 정 회장. 그가 추진하는 여행에는 항상 20명 이상은 참석한다. 이 놀라운 출석률은 정 회장의 탄탄한 여행 준비 덕분이다. 1만원 정도의 적은 회비로 친구들에게 이야기가 있고 맛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고. 답사는 기본이고 역사가 있는 여행지를 선정하면 꼼꼼하게 공부하고 챙겨서 여행 해설가로도 변신한다. 지난 7월 7일에는 작년 메르스 때문에 일정을 잡았다 가지 못했던 양수리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다녀왔다. 이날 비소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사람인지 동창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친구입니까? 성기정 강현씨는 두말할 것도 없이 멋쟁이예요. 봉사에 앞장서는 사람, 가장 멋진 일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강현씨 덕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니까 멋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온 세미원도 예전에 와봤지만 새롭게 단장한 이후 오늘이 처음입니다. 서오능 이런 곳에 갈 때는 역사 공부를 해 와서 친구들한테 설명해 주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하고 다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송남영 동창들이 만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30~40대에는 못 만났어요. 각자 바쁘다보니 그랬습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동문회가 활성화되고. 향수를 찾아간다고나 할까요? 동창회에 간다고 하면 그때 친구들이 좋아요. 강현이가 여유회를 시작하면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서울성곽 길, 전주한옥마을 등 뭐 말할 것도 없죠. 그리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정말 늙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들 너무 애들 같아요. 귀엽다니까요. 50년 전으로 가버리니까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라 마음이 소년, 소녀가 되는 거죠. 목소리도 깔지 않고 서로 앞에서 폼 잡을 일 없고 너무 편합니다. 유경옥 생긴 건 기본이고 멋지고 근사하고 박학다식하고 멋있는 친구예요. 같은 학교를 졸업해서 동창으로 있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진짜 전문성도 갖추고 정서적인 거,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 그리고 따뜻함을 갖췄어요. 헌신적으로 모임을 위해서 리드를 잘 하세요. 계획적으로 그야말로 여유 있고 즐겁게요. 오늘 보신 것처럼 우리 상태를 보아 가면서 여행 계획을 짜는데 정말 존경스러워요. 김혜자 정강현은 리더십 강하고, 봉사도 잘하고, 정말 사실이 그래요. 이 나이에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좋지도 않은 길을 가면서 설명도 해주고 말입니다. 보통 노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니까 하는 거죠. 강현이는 여행을 할 때 꼭 그곳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오는데 대충 알아서 말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자기 말로 표현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여행 가이드 이상으로 저희에게 알려주죠. 한번은 부부동반으로 몽골의 갈매기섬이라는 곳에 갔었어요. 여기는 사람이 혼자 가면 갈매기들이 공격해요. 그런 곳을 혼자 뚫고 갔다 돌아 나올 때 배가 고장이 났는데 기지국이 많이 없어 연락이 안 되는 일도 있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고도 다음에 또 보면 그런 오지 같은 데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이 친구 아니면 저희가 또 어떻게 그런 곳에 가보겠어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감격해서 잘 따라 다니는 거예요. 서울사대부고 동창 대표 잉꼬 부부 장재숙·하지환 부부 저 친구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이 나이에 앞장서서 희생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이렇게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강현이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거든요. 희생정신이 있는 겁니다. 이 많은 친구들을 위해 사전 답사하고, 열차 시간까지 챙기는 거 보면 너무 감사하지요. 서울사대부고 동문 중에서도 우리 18회 동창들이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요?
- 2016-08-18 0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