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로 건설경기 침체가 지속되지만 증권가에선 건설업종 투자에 대해 여전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올해 건설사들이 비교적 선방한 실적을 거둔 것을 고려하면 주가 하락 폭이 과도하다는 것. 오히려 낮아진 기대치를 활용하면 충분히 투자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건설주는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도입 영향과 부진한 해외 수주 등으로 지난 7월 초부터 가라앉았다. 하지만 한국 설계조달시공(EPC)기업의 해외 수주 파이프라인이 올해 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집중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부한 입찰 파이프라인은 수주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통상 해외 수주는 통상 하반기에 집중되는 ‘상저하고’의 흐름일 보이지만 내년에는 ‘상고하저’의 흐름이 나타날 전망이다. 장문준 KB증권 연구원은 “내년 상반기까지 집중된 해외 수주 파이프라인뿐만 아니라 수주 확정 여부가 이연된 프로젝트도 여럿 존재한다”며 내년 해외 수주 측면에서 현대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고 제시했다.
◇기대되는 내년 해외 수주 ‘청신호’
현대건설은 내년 별도기준 7조8000억 원의 해외수주를 달성하면서 수주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건설은 강점을 지닌 업스트림(상류부) 분야의 입찰이 활발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미 다수의 프로젝트 입찰을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제한경쟁이 일반화된 이라크 시장 입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상황이다. 아울러 내년 상반기 중 카타르 North Field LNG PKG 1&2(회사분 80억 달러) 입찰이 마무리되는 만큼 내년에도 양호한 수주성과가 점쳐진다.
올해 다소 주춤했던 삼성엔지니어링의 해외 수주도 내년에 6조8000억 원으로 늘어 다시 수주잔고 성장을 이끌 전망이다.
삼성엔지니어링은 말레이시아 Methanol(10억 달러), 미국 PTTGC ECC(12억 달러), 멕시코 PEMEX 정유(35억 달러), 우즈벡 비료공장(8억 달러) 등 EPC 선행작업을 이미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다수 존재한다. 또 이집트 EPPC Portsaid PDH/PP(8억 달러), 이집트 Sidpec PDH/PP(15억 달러), 이라크 Zubair DGS(5억 달러) 등이 입찰을 이미 완료한 상태인 만큼 내년에는 큰 폭의 수주 증가가 예상된다.
특히 당분간 삼성엔지니어링의 차별적인 주가 퍼포먼스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KTB투자증권에 따르면 12월 현재 중동 내 입찰안건은 현재삼성엔지니어링, 현대건설, GS건설, 대우건설, 대림산업 순으로 많다.
김선미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비중동지역까지 고려하면 입찰규모는 더 확대되겠지만 업체별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이를 기반으로 내년 해외 수주 가이던스가 올해 실적 대비 높을 것으로 기대되는 곳은 삼성엔지니어링이 유일하다”고 분석했다.
한편 KB증권은 현대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을 업종 내 ‘최선호주’로 추천하고 각각 5만9000원, 2만3000원의 목표주가를 제시했다. KTB투자증권도 투자의견 ‘매수’와 각각 6만2000원, 2만4000원의 목표주가를 내놨다. 현대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 주가는 지난 16일 각각 4만3150원, 1만9500원으로 장을 마쳤다.
국내외적인 불황 요인들이 겹쳐 수많은 기업이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아이디어 제품으로 독자적인 시장을 지키고 있는 회사가 있다. 특허를 획득한 이온생성기가 만들어지는 수전류 시스템을 세계 40개국에 수출하는 아리랑이온이 그곳이다. ㈜아리랑이온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신자 대표는 감사 경영의 대표주자로, 감사의 실천을 통해 인생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 놀라운 경험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감사의 힘을 믿고 감사 전도사가 된 사연, 그리고 삶을 바꿔준 드라마틱한 CEO 성장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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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위 셀럽들에게 제대로 된 ‘물건’이라며 입소문이 난 제품이 있다. 바로 아리랑이온의 샤워기가 그것이다. 물 본연의 특성을 이용해 연구 개발된 이온화 장치를 통해 오직 물만으로 에너지 활성수를 만들어내는 아리랑이온의 특수한 샤워기는 강력한 세척 효과와 의료보건, 미용소염 등의 영역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세계 각국에서 특허와 ISO와 KC마크 인증 등을 이미 취득한 아리랑이온의 실력은 현재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아리랑이온의 핵심기술을 만든 사람은 바로 발명가 허성열 대표. 그리고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는 그의 아내 김신자 대표다. 사실상 시니어 부부가 합동으로 이끌어가는 아리랑이온은 1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기는커녕 그때 부부는 수십 년째 이어진 심각한 삶의 위기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가정은 내팽개치고 연구만 한 남편
“남편이 9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글을 못 읽었다고 해요. 그런데 팽이나 연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대요. 그래서 시아버지께서 공고에 입학시켰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남편에게 이온화가 뭐냐고 물었다고 해요. 책을 읽어서 내용을 알고 있던 남편이 이온화에 대해 설명하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대요. 그 이후로 남편은 평생 음이온을 생활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왔답니다. 늘 스승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해요.”
말하자면 17세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허성열 대표는 끊임없이 이온화에 대한 연구를 했다. 특허를 내는 게 그의 유일한 일이었다. 문제는 가정은 내팽개치고 오직 연구만 했던 것. 발명 특허에만 매달린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지킨 이는 음악 교사였던 아내 김신자 대표.
“남편은 실험을 한다며 매달 1000만 원 이상씩 썼죠.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월급을 타도 빚쟁이들이 가져갔어요. 빚쟁이들이 교무실에 와서 제 돈을 다 가져가는 바람에 성당에 가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쌀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어요. 집은 경매에 들어가 저녁 10시가 되면 찾아와 집 언제 비워줄 거냐며 독촉했죠. 정말 비참한 생활이었어요.”
비참의 끝을 만나다
집이 평화로울 리 없었다. 남편의 성격도 문제였다. 그야말로 불같은 성격이었던 남편은 그녀에게 걸핏하면 폭언을 쏟아내고 물건들을 부수기 일쑤였다. 부부간의 정이라곤 기대할 수 없었다.
“외롭고 슬펐죠. 남편의 마음속에는 다섯 살 아이가 있었던 거예요. 시아버지가 학대하면서 공부를 잘할 줄 알고 남편을 구박하고 때렸다고 해요. 결혼하고 나니 내가 그 아버지로 보였던 거예요. 너무 괴로웠지만 이혼을 하자니 주변 사람들이 쑤군거리면서 만족해할까봐 싫었어요. 그리고 내가 선택해서 결혼한 남편이기도 했고.”
2005년 그녀는 교직자로 정년퇴직을 했다. 40여 년간 일한 대가로 받은 퇴직금 덕분에 큰 빚은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적 상황은 안 좋았다. 그런 데다 이제 일도 안 하게 됐으니 남편과 집 안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함께 있으면 더 싸울 것 같아 남편에게 “특허들 중 한 가지를 내놔봐라, 내가 구슬을 꿰어보겠다”고 했다. 그 말이 씨가 되었다.
도약의 계기가 된 기적의 200만 원
“이제는 돈을 구할 수도 없고 아파트는 경매에 들어가 쫓겨날 위기에 있었고 빚 이자에 먹고살기도 힘들었는데, 마지막으로 200만 원만 있으면 20번째로 낸 특허 제품을 몇 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더군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매달렸던 건 성경 말씀이었어요. 그리고 긍정에 관한 책을 읽고 실천하는 막연한 날들뿐이었어요.”
그런데 하늘이 마치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교통사고가 나서 합의금으로 200만 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 돈으로 이온샤워기를 열 개 만들어 강남 일대에 사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제품을 권했다.
“그러다 잠실에 사는 건설 회사 회장의 아내가 이온샤워기를 써본 뒤 가족들의 아토피, 무좀, 속쓰림이 없어지고 화장실 냄새도 안 나는 걸 확인했다며 이온샤워기를 사줬어요. 그래서 회사를 차리고 저희 제품들을 납품하게 됐지요.”
그녀 인생의 전환점, 아리랑이온이라는 회사가 탄생하게 된 잊을 수 없는 2009년의 일이었다.
‘감사’ 덕분에 회사가 회생하다
김 대표가 남편의 강한 성격에 당하고만 산 것은 아니다. 그를 이기기 위해 마음 공부, 심리학 공부, 기 공부, 오행 공부를 2000년부터 시작했다. 그녀의 취미이자 위안이 독서가 된 계기이기도 했다.
“걱정, 근심, 좌절, 미움, 원망이 가득한 내 몸은 망가져 갔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니 용기는 나지 않고 무서웠어요. 그 용기로 마음을 바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는 결심을 했고 그때부터 책을 엄청나게 읽기 시작했죠. 나에게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지켜주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생명의 은인처럼 나를 살린 책들은 김상운의 ‘와칭’, 이재영의 ‘모든 것은 마음입니다’, 루이스 헤이의 ‘치유’, 로렌스 크레인의 ‘러브 유어 셀프’였어요. 지금도 시간만 나면 도서관 책방에 가서 쭈그려 앉아 읽고, 좋은 말은 적어 집 안과 회사 구석구석에 붙여놓고 되새깁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책 다섯 권은 읽고 있어요.”
그녀의 버팀목이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감사’였다. 사실 감사는 그녀를 버티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꾼 커다란 주문과도 같았다. 그녀는 2012년 우연히 CEO 포럼에서 감사 경영에 관한 손욱 농심 회장의 강연을 듣게 됐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던 그때, 회사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3개월간 매출이 안 좋을 때였어요. 그때 손욱 회장님 강연을 듣고 쓰레기통에서부터 화장실까지 ‘감사 미소’ 스티커를 붙였죠. 힘들다가도 그걸 보면 웃음이 나왔어요. 그러던 차에 바로 뉴욕에서 1000개, LA에서 1000개의 주문이 들어온 거예요. 덕분에 회사가 회생할 수 있었죠. 그 후로 저는 남이 믿든 안 믿든 확신을 가지고 ‘감사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사랑 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기적같이 다시 일어난 뒤 ‘감사’는 그녀의 신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만들었다.
“심리학 공부를 하니 모두가 ‘내가 변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했어요. 또 하루에 다섯 가지 감사할 일을 찾기로 했어요. ‘시래깃국이 맛있어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웃어줘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고함을 안 쳐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그릇을 던졌는데 하나만 깨져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를 찾고, 남편 생일에 감사한 내용을 모아 ‘100가지 감사 카드’를 만들어서 줬죠. 그러기를 네 번 했어요. 그랬더니 변하더군요. 이젠 신혼처럼 살고 있어요.”
남편은 이제 그녀에게 “당신 음식 솜씨가 좋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김치찌개를 끓여주면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일이 어딨냐”면서 감동한다고 한다.
“49년을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상대에게 감사를 하니 변화가 왔어요. 기적이에요.”
감사 습관은 ‘333법칙’으로
감사가 만들어낸 놀라운 변화들을 목격한 그녀는 감사 경영을 회사에도 적용했다.
“감사 경영은 가장 멋진 기업 경영입니다. 사원들도 감사로, 고객들에게도 감사로, 가족에게도 감사로, 화장실 청소하는 분들에게도 감사로, 거리 청소를 하는 분들에게도 감사로, 끼어드는 앞차에게도 감사로 대해야 해요.”
그녀는 어느 책에서 배운 감사 습관 형성 방법을 소개했다. ‘333법칙’이 그것이다.
“결심이 사흘을 넘기기 어렵기에
3일은 습관을 길들이는 첫 번째 관문을 뜻합니다. 3주는 습관이 형성되는 최소한의 시간을 뜻해요. 하나의 세계가 깨지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의미하죠. 3개월은 100일을 뜻하는데,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데 100일의 시간이 걸렸듯 본능의 탈을 벗고 온전히 다시 태어나는 시간을 뜻합니다. 이렇듯 확신과 신념과 의지가 중요해요. 의지가 강한 저도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이제 김 대표는 매일 새벽 4시부터 성경 구절로 감사편지를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에너지가 충만해지고 그 충만한 에너지 덕분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풀어지고 이뤄진다는 게 그녀의 믿음이다.
진짜 어르신의 조건
어렸을 적, 6·25전쟁이 막 끝난 뒤의 일이다. 김 대표는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당사주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얘가 여자인데도 장관감이다. 대단한 딸이니 잘 가르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장관이 되기 위해서였을까. 그 말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평생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가치를 놓지 않고 살았다. 이제 CEO로서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입장이 된 그녀는 백세시대의 삶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을 세워두고 있다. 그녀는 백세시대 노년의 삶에서 중요하게 갖춰야 할 것들로 건강, 봉사, 독서, 취미, 경영을 꼽았다.
“요즘을 어른이 없는 세상이라고들 하죠. 제가 생각하는 어르신이란 부지런해서 자기관리를 잘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과 미소로 잘 들어주는 사람이에요. 따뜻하고 어질고, 알아도 모른 체하며 잘못을 이해해주고 포근히 감싸는, 결 고운 노인이라면 참다운 어르신이라고 생각해요.”
관찰자로 진정한 자신 찾기
황혼이혼·졸혼이 화제가 되는 사회 현실은 시니어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상황을 이미 겪고 마침내 극복한 그녀가 할 말이 있을 듯했다.
“모멸감이 들 때 꾹꾹 억누르면 그 감정은 거세게 부글부글 끓어올라 몸과 마음의 병이 됩니다. 그러니까 억누르지 말고 관찰자로 가만히 바라봐야 해요. 남편 때문에 괴롭고 모욕감을 느끼면 남편에 대한 분노, 절망, 억울함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거든요. 괴로운 감정을 멈추고 싶을 때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도 안 됩니다. 몸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일어나는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감정도 생각도 내 몸의 반응도 가만히 바라보세요. 억누르면 더 거세게 화가 나니까 있는 그대로 가만히 바라봐요. 그러면 저절로 사라지는 기적이 옵니다.”
사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아내에게 막말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응어리진 감정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말도 생각도 감정도 남편의 것이 아니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남편을 미워할 근거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정한 나는 마음의 어떤 움직임이나 감정도 생각도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바라보는 관찰자예요. 그러면 영은 무한한 마음이 되고 응어리를 풀어놓으면 텅 빈 마음이 됩니다. 그 텅 빈 마음 안에 무한한 평화, 자비, 사랑, 연민, 근원의 감정이 차오르면 해탈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가만히 주시하는 바람 자체가 되도록 멀리 관찰자로서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500억 원 모아 세상 변화시키고파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고 그러면 가족 모두도 사랑으로 채워진다”는 믿음은 계속 확고해지고 있다는 김 대표.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나의 생이 다할 때까지 행복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믿거나 말거나 확고한 사랑과 감사의 실천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 사회에 기여하는 멋진 회사를 만들고 싶어요.”
이제 그녀의 꿈은 500억 원을 모으는 것이라고 한다. 그 구체적이고 큰 숫자에 담긴 사연은 무엇일까.
“예술의전당 같은 성격의 작은 예술센터를 어려운 동네 열 곳에 짓기 위해서예요. 5층짜리 건물을 지어 동네 사람들이 가까운 예술센터를 찾아가 전시회, 음악회, 오페라, 독서토론, 인문학 강의 등을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그걸 경험한 사람들은 풍부한 감성으로 지성적이고 따뜻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정의 태양이 될 거예요.”
“모든 삶의 답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꾸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너무 어렵다”는 모순적인 그녀의 말에는 자신이 치른 일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큼은 확실하다며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333법칙으로 죽을힘을 다해 실천하면 부자 되기 쉬워요. 어렵다지만 실천하면 태양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소중합니다’라고, ‘감사 미소’와 함께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요?”
후배들에게 넓은 길을 터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인생 전반부의 정열을 바쳤던 첫 직장과 후회 없는 이별이었다. 인생 전반전을 마치고 시니어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던 찰나.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역전의 용사는 다시금 회사로부터 부름을 받고야 말았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다른 곳으로의 항해 대신 회귀를 선택한 최찬식(59) 씨를 만났다.
“정년 3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했습니다. 조건도 상당히 괜찮았어요. 그땐 기분 좋았죠. 얽매이는 생활 안 해도 되니까요. 인문학 강의도 듣고 요가와 요리도 배우고 알차게 살았습니다. 바빴죠.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지엠 부평공장 옆 카페에서 만난 최찬식(59) 씨는 지난 5월 마침표를 찍었던 옛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명예퇴직하고 또다시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1986년,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그룹에 입사한 최찬식 씨는 대구에 있던 대우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을 시작해 1990년 말 대우국민차 공장이 있던 창원으로 사간전보를 갔다. 1996년 4월 부평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해외 자동차 공장 건설사업 분야에서 일했다.
“인도, 이란, 이집트, 베트남, 태국 등 세계 각 나라에 자동차 공장을 많이 지었어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를 다 만들어야 했어요. 그 차들을 생산할 수 있는 있는 설비를 현지에 가서 설치해야 했어요. 1998년까지는 참 좋았죠.”
1990년대 후반 대우자동차의 인기는 꽤 높았다. 부동의 1위였던 현대자동차의 아성을 대우차가 흔들었다. 이렇듯 대우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지으며 사업의 규모를 키웠다. 이쯤 되면 나오는 얘기가 바로 IMF 금융경제위기. 해외 사업을 통 크게 벌였던 대우그룹은 계열사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우그룹의 몰락 중에서 자동차 사업의 인수 합병은 국가적 충격이었다.
“그때 인생이 조금 힘들었어요. 월급이 3개월 정도 안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엠(General Motors) 사가 대우자동차를 흡수하면서부터 월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엠 공장에 자동차 설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어요. 해외 현지에 나가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자동차 양산할 때까지 관리했습니다.”
자동차 양산 시점이 되면 철수하고 또 다른 나라로 향했다. 2010년까지 해외 지사에서 일한 이후 팀의 수장으로서 한국에서 해외 사업을 지원했다.
“물론 중요한 시점에는 공장을 짓고 있는 현지로 날아갔죠. 외국은 20~30군데 다녀온 것 같아요. 작년 3월 부장까지 달고 회사생활을 마쳤어요. 끝낼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인으로 1년 살기
회사를 관두고 한 달 남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좀 쉬었는지 몸이 근질거려 작년 5월부터 듣고 싶었던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휴식을 하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데 생각지도 않게 수료증이 쌓였다.
“5월부터 바삐 지냈습니다. 수료증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닌데 연속으로 듣는 것도 있지만 두세 번만 들어도 수료증을 주는 데가 있다 보니 스무 개나 되더라고요. 중국어 공부도 하고, 재테크 관련 수업도 들었습니다.”
한국지엠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잠깐 사회적기업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지혜의 밭’이라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한 달 정도 기획과 관리를 도맡아 일했다. 설립한 지 1~2년 된 기업이었고 공연 예술 쪽 일을 하는 사업체였다.
“제 입장에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공장에만 있던 사람이었고 대표는 예술만 아는 분이었죠. 회사를 이끌어가는 기본이 안 되어 있었어요. 제가 한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팁을 조금만 줘도 무척 감사해하더라고요.”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면서 안타까운 현실을 느꼈다고. 대표와 최찬식 씨가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하고 열정을 쏟아 부어도 끝이 없었다. 회사에 3~4명만 있어도 상황은 좀 나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이게 뭐지? 지금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업의 수익 모델이 좋아서 성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주말에도 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측면에서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퇴역 베테랑에게 날아온 SOS
사회적기업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때 한국지엠에서 연락이 왔다. 공장건설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해 달라는 전 직장 상사의 부름이었다. 함께 일할 조직은 이미 구성돼 있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이렇게 또다시 회사에 들어와도 될까 싶더군요. 회사 측에서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기존 기업에 대한 의리가 있잖아요. 다시 회사로 돌아갔더니 먼저 온 사람 몇몇이 있었어요.”
한국지엠 입장에서 봤을 때 인재를 육성해야 하는 시간과 물리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신규채용보다는 기존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 쉬는 사람 혹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게 이득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직장 상사는 제가 퇴직하는 것을 말렸습니다. 저는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일을 잘했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진 것 같습니다. 회사를 나가기 전에 관계가 좋았고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니까 저를 불렀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있었다면 부르지 않았겠죠. 회사가 시대의 풍파 속에 쓸리고 깎이기는 했지만 32년을 한결같이 다닌 오랜 일터였습니다.”
스스로도 인복은 타고 났다고 생각한단다. 어딘가로 움직일 때마다 항상 은인을 만났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팀워크가 좋았고 헤어질 때도 인상 찌푸리는 일은 없었다.
아빠는 워커홀릭! 좀 쉬셔요
“명예퇴직을 결심했을 때 조건이 좋았긴 했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30년 이상 하니 쉬고 싶었습니다. 또 들어올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내의 불만도 제가 너무 쉬지 않고 일하는 거예요. 그래요. 워커홀릭(일 중독자)이 맞는 거 같아요.(웃음)”
최찬식 씨가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에 대해 제일 반대하는 사람은 딸이다.
“쉬려고 나왔는데 왜 계속 일을 하느냐고 그러더군요. 사회적기업에 다닐 때도 출근시간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족히 걸렸어요. 딸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현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언젠가는 사회적기업에서 제대로 일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제가 직장생활에서 했던 경험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도와주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쉬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너무 달려만 온 것 같다고.
“이런 얘기하면 우리 딸이 뭐라고 하냐면 ‘아빠는 못 쉬어, 두세 달 쉬면 또 뭔가를 할걸!’ 하고 말합니다.”
야심차게 은퇴했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제2인생을 시작한 최찬식 씨. 시니어 전문가로서 다시 돌아간 새(?) 직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멋진 삶을 찾아가기를 기원한다.
고용노동부가 주최하고 노사발전재단이 주관한 ‘2019 신중년 인생 3모작 박람회’가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박람회에는 건설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120개 업체가 참여했다. 그중 65개 기업은 현장채용을 위해 면접을 진행했고, 55개 기업은 구인공고를 냈다. 특히 노사발전재단은 신중년 인생설계를 위해 18명의 전문상담사가 경력 진단 및 이력서·자기소개서 작성, 면접 관련 개인별 맞춤상담을 실시해 시니어 구직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또 5060세대의 재취업 정보뿐만 아니라 귀농·귀촌, 창업 지원에 관한 정보도 나눌 수 있는 부스도 마련됐다.
2017년 편의점을 운영하다 폐업했다는 권모(58) 씨는 “소상공인진흥공단 희망리턴패키지 부스에서 상담 후 그동안 몰랐던 지원과 재기교육 프로그램을 알게 돼 도움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박람회장을 찾은 이모(55) 씨는 “경력 단절된 중년 여성에게 맞는 질 좋은 일자리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양한 민간 기업들이 참여하는 이러한 행사를 통해 보다 많은 중장년이 질 좋은 일자리를 찾길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은 피로사회다. 근로시간 세계 최장, 수면시간 세계 최단. 연간 과로사 300명. 오죽하면 정부에서 근로시간 줄이라고 법으로 명할까.
지난 반세기 산업사회 건설을 위해 우리에겐 밤낮이 없었다. 덕분에 세계가 놀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제 우린 정상에 올라왔다. 그만하면 됐다. 하지만 아직 더 올라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숨이 차다. 발아래 들꽃 한 송이 즐길 여유가 없다. 더, 더. 소위 ‘MORE 심리’가 작동하는 이상 우린 잠시 쉴 줄도 모른다. 가속페달만 밟을 줄 알지 브레이크가 있는 줄 모른다. ‘더, 더, 더’ 하는 욕심이 채워지면 기분이 좋다.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즉각 불평, 불만이다.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다. 지금도 주변엔 소위 일 중독자로 불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피곤하다”, “졸리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 막상 쉴 줄은 모른다. 쉴 생각도 잘 안 하고 잘 쉴 줄도 모른다.
도시인의 피로는 몸이 아니라 뇌에서 온다. 물론 등산이라도 하고 온 날이나 테니스를 열 게임 정도 하면 몸이 피로하다. 이때는 쉬거나 한숨 푹 자면 거뜬하다. 하지만 뇌의 피로는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 않는다. 뇌는 몸무게의 2%밖에 안 되지만 에너지는 20%나 소비하는 대식한이다. 연중무휴 24시간 일한다. 우리가 주의집중해서 일할 때는 물론이고 일하지 않거나 자는 동안에도 활동한다. ‘쉬는 동안에 활동하는 뇌’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뇌 에너지의 60~80%가 소비된다. 이것이 뇌 피로의 주범이다. 이 회로는 상당히 광범위한 부위에 산재하며, 쓸데없는 잡념을 하는 게 주기능이다. 우리가 잠시 일을 멈추고 멍한 상태가 될 때 혹은 일하는 중간중간 잡념이 불쑥 떠오르게 해 일을 방해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뇌는 자는 동안에도 긴장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잠을 깬다. 24시간 비상감시체제 하에 있다. 교감신경의 과잉 흥분이다. 활동 시 교감신경과 휴식 시 부교감신경의 활성비율은 대체로 60대 40 정도이지만 비상감시체제에선 80대 20이 될 수도 있다. 이게 뇌 피로를 부르는 가장 큰 원인이다. 이런 상태를 스트레스라고 부른다. 따라서 스트레스 요인을 정확히 파악, 과학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 다음은 뇌를 피로하게 만드는 원흉들이다.
1 휴식 없이 장시간 하는 일
2 같은 일을 반복할 때
3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
4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할 때
5 시간에 쫓길 때
6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를 때
7 하는 일을 의무로 생각할 때
8 수면 부족
9 작업 환경이 열악할 때
10 일점집중(一點集中)할 때
이런 상황에 자주 처하면 뇌가 피로해진다. 문제는 몸이 피로한 것으로 오해해 흡연, 커피, 드링크류 혹은 피로해소제를 복용해 해결하려는 데 있다. 당장은 기분이 좋아져 마치 피로가 가신 것처럼 착각한다. 실제로는 피로가 오히려 쌓인다. 전문가들은 이를 은폐된 피로(Masked Fatigue)라고 표현한다. 이런 상태는 위험하다. 시판되는 소위 피로해소제가 몸에 작용하는 건지 뇌에 작용하는 건지도 분명하지 않다. 카페인 성분 때문에 잠시 집중이 잘되는 것이지 피로가 가시는 것은 아니다.
뇌 피로를 느끼는 부위는 시상하부다. 생명의 중추가 모여 있는 곳이다. 무리를 하면 시상하부의 항상성 균형이 깨져 피로를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은 즉각 변연계(동물 뇌)로 전달, 쉬자는 신호를 뇌의 최고 사령부인 전전두엽으로 보낸다. 이때 적절히 휴식을 취하면 피로는 풀린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일에 집중한 나머지, 가령 연애 중이어서 그 신호를 듣지 못하거나, 인지했어도 전두엽에서 ‘내일 시험인데 자면 안 되지’ 하고 휴식을 연기하라는 신호를 보내면 피로가 풀릴 리 없다.
피로가 쌓이면 뇌에는 단계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피곤하다. 그러다 지치면 차츰 자율신경 부조증, 내분비 대사, 면역계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종 단계에선 암, 고혈압, 당뇨병 등 생활습관병이 발병한다. 뇌가 피로할 때는 휴식법이 따로 있다. 뇌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DMN에 휴식을 줘야 뇌 피로가 풀린다. 효과적인 방법은 마음챙김 명상(Mindful Meditation)이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과거나 아직 닥치지도 않는 미래에 지레 겁먹지 말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면 된다. 무슨 생각이 떠올라도 그대로 둔다. 마치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듯 생각이 흘러가게 놔둔다. 특정 생각을 하려고 하지도 말고 자세를 반듯이 하고 천천히 부드럽게 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미국의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이 방법을 권하고 있다. 이제 동양의 신비가 아닌 증명된 과학으로서 명상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미국 대기업을 위시해서 명상 붐이 일어났다.
뇌가 피로하면 뇌 속에선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먼저 뇌 온도가 올라간다. 일하다 말고 세수를 하거나 머리를 감으면 기분이 상쾌해지는데, 이는 뇌 온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열이 나면 예민한 신경회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신경전달 물질을 과용한 나머지 고갈상태가 되면 뇌 기능이 저하된다. 또 전술한 바와 같이 시상하부의 주요 생명기능들이 난조에 빠진다. 오감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뇌 피로 해소에는 숙면이 좋다. 특히 오후 10시~오전 2시 사이의 잠이 중요하다. 잠이 부족하다 싶으면 점심식사 후 15분 정도 낮잠을 잔다. 뇌 피로 해소에 아주 효과적이다. 싫은 것을 억지로 해서 뇌 피로가 온다면 뇌가 좋아하는 것을 해보자. 피로 해소에 좋은 몇 가지 뇌과학적 방법을 추천하면 다음과 같다.
1 여행 같은 새로운 시도를 하라.
2 가벼운 모험, 스릴을 즐겨라.
3 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
4 뇌는 시간제한을 좋아한다. 가벼운
압박감은 신경회로를 효율적으로 만든다.
5 지적 자극과 쾌감을 얻도록 하라.
6 가끔 몰입 상태를 경험하라.
7 가벼운 운동을 하라.
8 감성에 젖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라.
9 자연 속에서 오감을 자극하라.
10 좋은 사람과 만나라.
이외에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단 ‘건설적인 일’ 이어야 한다. DMN이 처음 발견될 당시엔 뇌 활동의 훼방꾼, 에너지 낭비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지만 최근엔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창의적인 일을 기획하거나 문제점을 해결할 때 제대로 진행이 안 되면 뇌의 잠재의식인 큰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숙성시간을 갖고 다른 생각들과 조합을 이루고 융합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기막힌 아이디어가 불쑥 튀어나온다. 창조 발상의 순간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대체로 정신이 멍할 때 떠오른다. 술 한잔한 뒤 흥얼거리며 가는 귀가길, 잠이 들락 말락 하거나 잠이 덜 깬 상태, 즉 자아의 감시가 약해질 때 기막힌 발상이 떠오른다. 바로 이 순간이 뇌의 DMN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뇌 휴식을 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창조적 발상은 DMN 활동에 달려 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는 일 중독자들에겐 이런 축복이 오지 않는다. 바쁜 시간에 무슨 명상과 휴식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뇌 휴식시간이 필요하다. 대기업에서 명상, 낮잠을 권유하는 이유는 아욕을 없앰으로써 동료 간의 시기, 질투, 라이벌 의식을 없애고 상부상조, 협동하는 진정한 동료의식을 함양하기 위함이다.
과학적인 뇌 휴식이 한국의 미래를 좌우한다면 과언일까?
1997년 촉발된 IMF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다니던 회사도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해 1999년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봉급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월급쟁이로서 충격이 켰다. 아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아내와 상의한 끝에 집 주변에서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보습학원을 열기로 했다. 나는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학원 운영을 아내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찾아봤다. 내게 적합한 일은 무엇일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기업들이 강점(strength),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 요인을 토대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기법인 SWOT 분석을 통해 제2인생을 설계해보기로 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건설업체에서 10년, 무역회사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해외 관련 부서 일을 했던 나는 영어 회화력이 그나마 내가 가진 ‘강점’이라 생각했다. 또 학원을 창업하면서 여유 자금을 사용해버려 더 이상의 투자 자금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내 능력만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일이 영어 통번역이었다.
먼저 번역 관련 책을 읽으며 실력을 쌓았다. 얼마 후 여러 번역 회사와 접촉을 해, 한 업체와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계약을 했다. 3년 정도 기술 관련 문서를 번역하면서 경험이 늘어나자 더 높은 목표가 생겼다. 기왕이면 단순 문서가 아닌 한 권의 책을 번역하고 싶어졌다. 출판 번역은 뛰어난 전문성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책 표지에 번역자의 이름도 들어가서 도전 욕구를 자극했다.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여러 번역 회사가 눈에 띄었고, 그중 한 번역 회사에서 수습생을 모집했다. 전화를 해보니, 교육을 받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바로 책 번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즉시 지원했다.
그때가 2004년, 54세의 나이였다. 아내가 학원 일을 도맡아 했으므로 수습 번역가로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기회’라 생각했다. ‘위협’ 요인은 경쟁자로서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이었다. 동료들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면 번역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 노하우를 담은 책들을 찾아 읽으며 더 열심히 공부했다. 동료들과는 매주 두 차례 만났다. 각자 동일한 내용을 번역해와 서로 비교하면서 토론을 했고 최종적으로 활동 중인 번역가로부터 모범 답안을 받았다. 다들 빨리 일하고 싶어 했지만 강사나 사장으로부터 먼저 능력을 인정받아야 기회가 주어졌다.
훌륭한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첫째,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 둘째, 완벽한 우리말 구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말 구사 능력은 외국어 실력보다 더 중요했다. 결과물이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셋째, 번역하고자 하는 분야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전문 분야의 책은 그 분야와 관련한 독자들이 읽는다. 번역가가 전문성이 없다면 그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할 방법이 없다. 넷째, 검색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외국 서적들이 국내에 소개될 때 새로운 용어나 정보들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 등 다양한 소스를 통한 정보검색 방법을 익혀야 한다. 다섯째, 체력이 강해야 한다. 장시간 의자에 앉아 번역을 하다 보면 허리디스크로 고생할 수도 있으므로 항상 건강을 챙겨야 한다.
내가 처음 번역한 책은 2005년 조선일보사에서 출판된 ‘마이크로소프트 재창조’다. 그 후로는 주식 관련 책을 주로 번역했다. 주식투자로 부자가 된 워런 버핏에 관한 책을 포함해 2012년까지 총 13권을 번역하면서 전문번역사의 길을 걸었다. 경제·경영서를 번역하게 된 것은 사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이유였다. 덕분(?)에 주식 관련 공부를 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지금은 무역회사에서 일하던 경험을 되살려 한국무역협회 소속 통번역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 분명 자신만의 ‘강점’과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로 뛰어들면 실패할 확률도 많고, 성공하더라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전문번역가가 되기까지의 기록이 비록 나의 단편적인 경험에 불과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제2인생 설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년퇴직을 1년 남긴 시점에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희망퇴직 공고. 평생을 현대자동차의 성장을 기쁨으로 알고 일해온 홍노희(洪魯憙·59) 씨는 고민에 휩싸였다. 정년을 채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떠나주는 것이 사랑하는 회사를 돕는 길일까. 37년을 상용차 제조 현장에서 품질관리를 담당해온 그의 고뇌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결같았던 이른 새벽 출근길 떠오른 확신은 결심으로 변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2018년 2월의 일이다. 그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1981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아이콘 청계고가 위를 포니가 신나게 달리던 시절. 당시 현대자동차는 북미 수출의 꿈을 안고 포니2의 개발을 준비 중이었다. 홍노희 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갓 입사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시절의 현대자동차를 이렇게 회고했다.
“포니가 인기를 얻으면서 공장은 활기로 넘쳤죠. 저는 특장차 조립 일을 했는데, 건설 붐을 타고 수요가 폭발했던 레미콘 같은 차량을 담당했죠. 컨베이어벨트에서 맡은 부분만 조립하는 소형차와 달리 대형 상용차들은 몇 명이 달라붙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품을 조립해 완성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내가 만든 차’라는 자부심이 컸고, 소소한 부분까지 공을 들였죠.”
32년간 품질관리 매달려
그런 노력이 회사의 눈에 들었는지, 품질관리라는 개념이 생산현장에 도입되면서 담당자로 발탁된다. 입사 5년 차에 시작한 품질관리 업무는 그렇게 32년간 평생 직업이 됐다. 회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실력을 발휘해 2004년과 2006년에는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우수분임조 은상을, 2010년에는 금상을 받았다.
“사실 품질관리라는 분야는 시어머니 같은 역할입니다. 협력업체에서 부품이 제대로 만들어져 왔는지, 그 부품들을 제대로 조립했는지 확인하는 일이니까요. 모든 수치를 암기하고 있어야 했죠. 검사할 때마다 자료를 찾아볼 순 없으니까요. 또 간혹 조립 담당자와 갈등도 있습니다. 조립자들은 할당된 생산량을 맞춰야 하는데, 품질관리자가 시간을 잡아먹는다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스펙에 미달하는 것을 용인할 순 없었죠.”
퇴직 후 예상과 다른 현실에 당황
그의 퇴직 스토리를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족의 반응이었다. 만류는 없었을까?
“아내도 이제 쉴 때가 됐다며 응원해줬어요. 몇 년만 잘 버티면 연금도 나오니까 일찍 노년의 삶을 준비할 기회가 될 거라고 하더군요. 오히려 회사 후배들이 말렸지만 저는 퇴직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덜컥 퇴직하고 나서 당황했다. 그는 “생각과는 달랐다”고 고백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었다.
“텃밭에서 과실수를 관리하고 닭 모이를 챙기는 것이 평생 생산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일다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돈 걱정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끊기니 심리적 압박도 있었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재취업.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관련 교육도 받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작성 도움도 받았다.
그런 와중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퇴직 소식을 들은 한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품질관리를 맡아 개선해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을 해온 것. 그리고 국내 주요 자동차 기업의 우수 협력사로 꼽히는 중견기업 평안정공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자동차 산업에 도움될 수 있어 보람
“긴 공백기 없이 일을 계속할 수 있어서, 특히 제가 그동안 해왔던 품질관리 일을 할 수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또 고향 같은 전 직장에도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더 즐겁습니다.”
물론 회사의 규모도 문화도 다른 조직에서의 적응이 쉬울 리는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부품을 갖고 조립만 하다가, 직접 쇠를 깎고 다듬는 과정을 관리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상용차 후륜의 구동부(rear axle housing assembly)를 만들고 조립해 납품하는 일을 합니다. 100분의 1mm만 틀어져도 조립이 되지 않거나, 윤활유가 새어 나오기 때문에 높은 정밀도를 요구해요. 매일 생산되는 약 1000대분의 부품에 문제가 없게 하려면 품질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출근 초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불량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그는 “몽롱했다”고 표현했다. 사람 손에서 나는 오류는 확인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공정에서 다시 점검하는 ‘키퍼(keeper) 제도’를 도입하는 등 품질관리 과정을 보강하고, 경영진을 설득해 장비도 새로 들였다. 2억 원이 넘는 투자는 곧 품질로 나타났다. 입사 초기보다 10분의 1 이하로 불량이 줄었다.
“새로운 회사에서 제가 노력한 만큼의 성과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 너무 즐겁습니다. 저를 믿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경영진을 만나게 된 것 역시 제겐 행운이죠. 평생의 보람이라 생각하는 이 일을 회사에 보탬이 되는 한 계속하고 싶습니다.”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
작년 7월 손웅익 동년기자와 함께 동행 취재를 했다. 공장지대에서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성수동 거리를 걸어 다니며 공간을 소개하는 지면이었다. 그날은 손웅익 동년기자가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나눴다. 40년 건축 전문가로, 전문 경영인으로 살다 은퇴한 지 1년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또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경희궁이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그곳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들어준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중·고등학교였으며, 해방 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의 옛 교정이 있던 자리다. 무시험고교입학제, 소위 ‘뺑뺑이 세대’로 불리며 명문 서울고에 입학한 58년 개띠 손웅익 동년기자가 고교 시절을 보낸 장소.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교정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가 대운동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희궁 뒤에도 작은 운동장이 더 있었어요. 나무들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인생 방향을 설정해준 운명의 장소로 꼽은 옛 서울고등학교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한 일도 많았다. 입학시험 관문 없이 명문고 대열에 무임승차한 자격미달 74년 고교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시험 쳐서 들어왔는데 저희는 아니잖아요. 선배들과 선생님들의 벽이 너무 높았어요.”
총동창회에 안 나오겠다는 졸업생도 많았다. 선배들 사이에서는 아예 74년 입학생을 후배로 인정하지 말자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고 한 10년 정도 됐을 때 총동문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었어요. ”
동문들 앞에 선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58년 개띠생을 후배 취급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름을 만들어 1회 졸업생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곳에 계신 선배님들 자식 중에 뺑뺑이로 서울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우리한테 대하듯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잠잠해지더라고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날 동문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 동문회지에 글로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후배 간 관계가 재정립됐고 지금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제가 공부했을 때가 제 인생 줄기의 큰 시작점인 것 같아서 이곳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경우는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학교 다닐 때 어린 마음에 반발심도 있었어요. 감성도 풍부할 때라 고목 주위에서 그림도 많이 그렸고요. 나중에 보니까 학교의 전통이나 정신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곳의 추억이 벌써 40년 전인데 지금까지 맥락을 꿰뚫고 있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 그 자리로 오고 싶었습니다.”
마침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도 옛 서울고가 내려다보이는 피어선 빌딩에 있었다. 은퇴하고 나서도 학교 주위는 친숙하기에 자주 찾는다. 시청역에서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을 걸어 커피 한 잔, 차 한 잔 하며 여유를 즐긴다. 경희궁 한 바퀴 돌고. 서울역사박물관도 구경하고 말이다.
척박한 서울살이를 이기다
경주에서 태어난 손웅익 동년기자는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성수동 카페거리 동행 취재 때 중랑천변 판자촌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비가 오면 집이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횃불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1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통장을 의무적으로 만들어서 적금을 붓도록 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냈다가 교우들 앞에서 선생님한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내 대학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한테 자주 민폐를 끼치면서 살았어요. 그야말로 빈대생활이었죠.(웃음)”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손웅익 동년기자는 미술대학 대신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택했다.
“미술 대신 선택한 건축이 저랑 잘 맞았어요. 건축은 조형물이고 예술품이지요. 미술을 선택하지 못했던 한을 건축에서 충분히 풀 수 있었으니까 제가 40년 가까이 건축을 했겠죠.”
건축과 졸업 후 돈을 잘 벌 수 있는 건설회사 대신 건축설계 사무실에 들어갔다. 건설회사의 3분의 1 수준인 월급을 받고 설계 사무실에 앉아 도면을 그렸다. 현장에서 공사하는 것보다 도면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였다.
“그때 건설회사로 간 친구들이 월급을 삼십만 원쯤 받을 때였어요. 설계 사무실은 십만 원이었고요. 그래도 나는 어쨌든 간에 도면이 좋았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요. 나중에 건축사가 돼 설계 사무실을 차려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설계 사무실을 연 이후 일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건설 열기 덕분에 설계사 또한 바빠졌다.
“결혼하고 1년 뒤에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서른한 살에 설계 사무실을 차렸어요. 정말 그때는 일도 많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죠. 미국에도 가고 이탈리아, 스위스 종주여행도 하고요. 당시 유럽 왕복 티켓 가격이 비쌌거든요. 1990년대 초반에는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건설 열기가 또 어마어마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사무실 규모도 커지고 집도 사고 정말 내 세상이었어요. 말도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30대 초반에 경제적으로 인생 역전했던 거죠.”
신나게 이야기가 흐를 때쯤 속도가 딱 끊기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이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 IMF 금융위기 얘기가 이어진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았어요. 내보내봐야 직원들이 갈 데도 없잖아요. 집 담보 잡히고 그냥 모든 걸 다 쏟아 붓고요. 이곳저곳에서 돈 빌려서 회사 사무실에 다 쓸어 넣었어요. 그 빚 갚는 데만 10년 걸렸어요. 경제적으로 제로인 상태에서 퇴직을 했습니다.”
10년을 준비한 은퇴, 퇴직 1년 차
작년 5월,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손웅익 동년기자. 부사장이라기에 넉넉해서 그만두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전 상황에 대해 듣고 나니 왜 그만뒀는지가 궁금했다. 회사에서 제안도 있었고 좀 더 은퇴를 늦출 수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계획대로 은퇴 날짜를 잡았다.
“제가 은퇴 준비만 10년 했습니다. 자격증도 따고, 책도 내고, ‘이 정도면 부딪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강의하고 글 쓰고, 건축 일을 평생 했으니까 또 건축과 관련해서 자문도 몇 개월 했고요.”
은퇴를 위해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심리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등 자격증도 땄다.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1년 여 게재했고, 동년기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우송정보대학교 리모델링 건축과 겸임교수로 임용돼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참 체질적으로 나랑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합니다.(웃음) 작년 5월에 수필작가로 등단했어요. 이외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림. 정말 그림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어서 삽화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고 그게 글하고 또 연결되잖아요.”
은퇴하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시간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출근시간은 늘 아침 7시에 맞춰져 있었다. 고교 시절에도, 설계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큰 조직에서 중역을 맡아 일할 때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 출근해서 데이터 정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고요. 퇴근도 항상 늦었어요. 문제는 내가 정말 쉬고 싶어도 강제로 출근해야 되잖아.”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자리를 내주어 출퇴근할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출근하다가 멈춰 설 수도 있고 어디론가 다른 길로 빠져서 내빼도 괜찮다. 사진 찍고, 산책하고,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도 많이 본다고 했다.
“좋잖아요. 생각도 하고. 하여튼 뭐 여러 가지로. 과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봐요. 글이나 그림 소재도 생각하고요. 그리고 길가다 사진도 찍어야죠. 바삐 가야 하는 사람들과 걸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 혼자 걷습니다.”
베이비부머가 주거문화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손웅익 동년기자가 1년 동안 유유자적 한가롭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업과 시니어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의견을 나누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 중이다. 문 닫은 식당과 빈 공간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베이비부머는 위로는 늙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아래로는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국민연금에 기대기도 어렵고 퇴직연금을 들어놓은 사람도 흔치 않고요. 재산을 분배하네 마네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줄이고 씀씀이도 줄여야 하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 그러니까 집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주거 공간의 평수를 줄이고 입주자가 함께 쓰는 공간을 늘려 조금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주거로 전환하자는 운동을 현재 손웅익 동년기자가 펴나가고 있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나면 덩그러니 부부만 남아 있으니 적당한 규모의 집에서 살고 남는 돈은 현금화해서 노후자금으로 돌리자는 의미다.
“내 공간은 최소화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활동도 하고 수익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시니어 카페라든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고. 이런 공동 주택이 마을화가 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러 혹은 빵을 맛보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10년 넘게 연구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로 혼란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을 골똘히 해보면 나쁘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다. 투자와 돈을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 집의 개념을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 혁신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액티브한 시너지를 기대한다
회사에 있으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심한지 그가 매진하는 일들이 많기도 하다. 삽화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에도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면 꼼꼼하게 글씨를 쓰기도 한다.
“그림을 하다 보니까. 어떤 곳에서 책을 내는데 삽화를 그려 달라는 제의도 있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SNS 활동도 열심히 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누려보겠다는 마음밖에 없다.
“아무 준비도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기대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이가 없다잖아요.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고 크고 작은 기업에서 일도 해보고 했는데 그때마다 제것도 아니고요. 그냥 열심히 살다 보니까 여기에 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핵심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관계요.”
시니어 세대로 접어들면서 좋은 점은 관계 정리에 의연해졌다는 것이다. 정리도 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도 만들 수 있다.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모이니 친해지기도 쉽고 다양한 경험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도 든다.
“굉장히 희망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요. 동년기자단도 멋진 시니어가 모인 모임이잖아요. 앞으로 동년기자 활동도 잘해야 할 텐데요.(웃음)”
경희궁 처마 아래서 손을 내밀어 비와 마주하던 손웅익 동년기자 모습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들었던 세상과 맞서던 추억 속 고교생 시절 자신과 만나 듯 손 위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인간은 과연 합리적인 존재인가? 주변을 둘러보면 일견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듯싶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면 당연히 담배를 끊어야 하지만, 흡연인구는 여전하다. 도박은 인생을 망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도박장을 기웃거리다 패가망신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누구와 비교랄 것 없이, 당장 나부터서도 살을 빼야겠다는 맹세를 번번이 까먹지 않던가.
사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면 세상이 이토록 시끄럽지 않을 터이다. 매일 터지는 각종 사건·사고, 청년실업이 몰고 온 세대 갈등, 미투운동이 촉발한 젠더 갈등, 온 나라가 동원된 촛불과 태극기 부대의 갈등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남녀노소간 사회적 갈등으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자영업자들이 죽어 나간다는데 눈도 끔쩍 않고 최저임금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태도는 도대체 인간의 합리성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이 합리성이라는 브랜드로 무장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르네상스와 칸트,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이 시작되면서 종교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고유한 정신으로 채택한 것이 합리성이다. 그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건설된 인간 문명은 바로 이 합리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성 덕에 오늘날 과학 문명의 발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에도 지금의 문명과 인간사회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불합리성의 증거가 더 많아 보인다. 애초에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라고 전제한 것이 잘못된 출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은 행동경제학을 연구한 미국 시카고대학의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 교수에게 돌아갔다.
그에 따르면 행동경제학이란 인간의 경제활동이 비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경제정책을 짜거나 기업 활동에 이런 점을 전제해야 한다는 충고다. 인간을 바라볼 때 합리적 존재라고 전제하면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원래 비합리적인 존재라고 전제하면 이해된다. 그러니까 틀린 줄 알면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야말로 비합리적인 행동의 원흉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는 근대의 시작과 함께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새롭게 설계된 것이 아니다. 원시 시대 이전의 파충류 시절부터 만들어진 뇌가 진화에 따라 계속 덧붙여진 모습으로 층층이 쌓여 있는 까닭에 매우 복잡하고 비합리적인 사고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합리성을 담보하는 부분은 가장 최근에 형성된 대뇌피질 덕이란다.
예전 터키를 여행했을 때 이스탄불 구도심의 미로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 도시는 도시 형성 초기부터 신도시까지 그대로 겹겹이 쌓여 형성되었다. 이스탄불이 수많은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뇌가 이와 비슷하다면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오히려 존경받을 일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인간답다는 말은 합리성을 초월했다는 뜻을 지닌다. 합리적인 태도는 오히려 매정하다고 느낀다. 온 나라가 수많은 갈등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그 역시 불합리한 진화의 결과이니 누구를 탓하기 어렵다. 결국 마음을 열고 상대를 포용하는 길밖에 없다. 매번 결심하면서도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