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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노인의학, 노인문학을 넘어 의료 인문학에 닿다-은퇴한 文人 의사 유형준
- 시니어에게 꼭 필요한 노년의 삶, 성공 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노인의학의 대가로 알려진 유형준(柳亨俊·65) 교수를 만났다. 유 교수는 2018년 한림대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현재 CM병원 내과 과장으로 있다. 1994년 한림대 법인기구에서 근무할 때 만나 5년 동안 함께 지내, 필자와는 구면이다.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준 선배다. 병원을 그만두고 20여 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소식은 전하며 지냈다. 올해 의학과 문학 접경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와 관련한 일을 진행하면서 다시 만났다. 지인이라 편한 점도 있었지만 다소 부담도 되었다. 유 교수는 30여 년 노인당뇨병 회장, 대한노인병학회장, 한림노인병연구회장 등을 역임한 노인의학의 대가다. 그에게 노인의학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노인의학이란 어떤 것인가요? “1909년 이그나츠 레오 내셔(Ignatz Leo Nascher, 1863∼1944)가 처음으로 노인의학이란 용어를 제창하였습니다. 그는 소아를 다루는 의학 분야를 `소아과학(pediatrics)이라 부르듯이 늙음과 그에 따른 질병들이 청장년기의 그것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노인을 다루는 의학 분야를 따로 정해 가리키는 용어 `노인의학(geriatrics)을 만들었죠. 새로운 용어를 제시하면서 내셔는 두 가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하나는 ‘아동기가 생리적으로 다른 시기인 것처럼 노년기도 삶의 다른 시기라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노인의학은 의학의 특별한 전문 분야’라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견해를 증명하고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는 당뇨병을 전공했는데 이 병이 성인병이면서 노인병이어서 자연스럽게 노인의학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멋있게 노년을 보내는 방법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성공적인 노년의 삶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각자의 노년은 모두 멋있지요. 게으른 노년이든 부지런한 노년이든 그렇게 늙어가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한 예를 든다면 일과 섬김으로 늙어가며 영원을 마련해가는 노년입니다. 늙음은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하나는 `‘얼마나 망가졌는가?’로 결과의 결손을 들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 있는 부분이 꽤 남아 있지 않은가?’라고 물으며 쓸 만한 기능의 유용성을 추스르는 것입니다. 성공한 늙음은 노쇠의 최소화입니다.” 유형준 교수는 나이가 들어 세월이 쌓여가면서 근육량이 줄어 기력이 떨어지고, 수정체가 혼탁해져 시력이 흐려지고, 몸의 균형 유지 능력이 둔해져 잘 넘어져 부러지고, 기억과 사고의 속도가 처지는 등의 현상을 `정상노화에 따른 변화라고 설명했다. “그리스 작가 소포클레스가 말했듯 늙어가는 사람만큼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강한 면뿐만 아니라 약한 면까지도 사랑합니다. 못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아요. 노화를 막을 순 없습니다. 단지 덜하거나 늦출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화를 조절할 수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노화는 무조건 막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봐야 해요. 삶의 길이보다 삶의 질을 더 값지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생산적 신념을 지니고 있는 걸 드물지 않게 봅니다.” 늙음에 의한 심신의 퇴화는 자연적인 것이므로 늙음을 막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잔여를 수정해 추스르는 노력이 있을 때 성공적인 노년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아름다운 늙음은 어떤 것일까요? “‘아름답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늙음’은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안팎으로 모두 품고 있어요.” 향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늙음에 대항하여 젊음을 유지하려는 항노화(抗老化)와 다르게 늙음을 받아들여 슬기롭게 즐기는 자세가 향노화(向老化)입니다. 1999년 자원봉사를 하던 일본 여성 다카하시 마스미(高矯眞澄)의 생각에서 비롯된 개념이며 활동이죠. 늙음 속에서 늙음을 새로운 눈으로 열심히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늙음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순응은 체념이 아닙니다.” 의료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요? “사람의 무늬(인문)를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의학 역시 인간의 무늬에서 시작하고 완결되는 분야입니다. 인문학은 사람의 무늬를, 의학은 병의 흔적을 그리는 것이므로 연관성이 깊습니다. 의료 인문학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최근 의학과 문학의 접경 연구 세미나를 개최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의학과 문학은 둘 다 인간의 고통과 생명의 의미를 깊이 헤아려 병을 치유하는 데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학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관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 깊이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의학과 문학이 과학과 예술로 구분되어 각각의 영토에 제각기 놓여 있죠. 의학과 문학의 접경 연구는 ‘의학 속으로 문학이 왜, 어떻게 들어와 어떤 형편으로 지내고 있는가?’라는 의학 속 문학의 재주(在住)에 관한 질문에 명징한 답을 구해 효험을 더 풍요롭게 하려는 목적에서 시작했습니다.” 시니어에게 문학의 가치는 뭘까요? “문학은 삶의 무늬를 그리는 것이죠. 노인도 독특한 무늬를 지녔습니다. 늙어서도 독서가 필요합니다. 젊어서 하는 독서는 문틈 사이로 달을 엿보듯 하고, 마흔 살 안팎의 독서는 뜰에 나서 달을 바라보듯이 하라고 권유합니다. 독서는 인간의 무늬, 인문을 살피는 일입니다.” 의사신문에 ‘늙음 오디세이아’를 연재하고 계시는데 어떤 의도로 쓰시는 건가요? “늙음의 얼굴과 속마음을 독자들과 함께 얘기해보고 싶어 쓰고 있습니다. 연재된 내용은 `‘늙음의 의미’, `‘늙음의 무늬’, `‘성공 노화’, `‘노년 독서’, `‘노년의 꿈’, `‘노인의학’, ‘노전 정리’ 등입니다. 현재 50회가 넘어 책으로 내볼까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전(老前) 정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짧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늙기 전에 어수선하거나 쓸데없는 것들을 미리 없애 가지런히 바로잡기를 하는 게 노전 정리입니다. 죽기 전에 하는 건 생전 정리이고요. `‘노전 정리’는 일본 작가 사카오카 요코(坂岡 洋子)가 만든 용어입니다. 기력과 체력이 있는 현역 시절에 신변과 생활 방식을 검토해 경쾌한 삶을 준비하는 게 노전 정리의 목적이고, 사후에 남겨진 가족들이 유품 및 재산 등으로 옥신각신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생전 정리의 목적입니다.” 유 교수는 수필가와 시인(필명 유담)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자녀 중 한 명은 의학의 길을 걷는 게 좋겠다는 부모의 바람이 있었고 스스로도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어 의학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한학자, 큰형과 작은형은 문학인이라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글 쓰는 걸 좋아해 어릴 때부터 기록하는 일을 습관화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문예반에 들어가 교지를 편집했고, 의예과에 진학한 뒤에도 문예지 `‘이바돔’을 창간하는 등 문학활동을 계속 했다. 그는 글쓰기가 환자들과 소통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정년퇴임 후 만든 버킷리스트가 있다. 첫째, 의료를 문학으로 전개하는 연구를 한다. 둘째, 기독교 입장에서 늙음에 관한 책을 쓴다. 셋째, 기타 연주를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기타 연주는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 그는 노인의학이 아직 초보 단계라서 계속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또 정진하는 데 영성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6년 전 폐암 수술을 받은 후부터는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는 저녁 약속을 일절 잡지 않고 교회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 2018-11-1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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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충북 보은군 산골 폐교에 사는 원덕식·노정옥씨 부부
-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12-1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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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한 자식이 주는 십일조
- “가형, 정말 고마워!” “원장님, 왜요?” “지난번 얘기해준 십일조 때문에….”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보죠?” “음, 덕분에 아이들한테 매달 용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 집안 분위기도 달라졌어!”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보는 선배는 자식들한테 늘 불만이 있었다. 아들이 셋인데 국립병원장 출신이라 체면도 있고 해서 결혼할 때마다 강남에 집을 사주거나 전셋집을 얻어주느라 허리가 휘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인은 칠순이 접어든 나이에 허리도 안 좋고 거동도 불편한데도 동네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결혼한 자식들이 그 정도 해줬으면 당연히 용돈은 물론 명절 때나 보너스를 탈 때 선물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란다. ‘아들은 사춘기 지나면 남남, 군대 가면 손님, 결혼하면 사돈집 아들, 손주를 낳으면 해외 동포’라고 했던가. 마음 한구석이 섭섭했는지 가끔 자식교육 잘못시킨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지난봄, 필자 집에서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는 ‘십일조 제도’를 지나가는 말로 소개했더니 바로 가족회의를 열어 자식들한테 공개적으로 얘기했단다. 그리고 그다음 달부터 십일조까지는 아니지만 세 아들이 각각 매월 20만원씩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아이들과 협의해서 십일조 제도를 시작했다. 매월 받는 월급의 십 분의 일을 그동안 키워준 엄마한테 용돈으로 주라고 한 것이다. 은연중의 압력이라고나 할까 약간의 강제성을 띤 제안이었지만 아들과 딸은 입사 첫 달부터 이를 실천했다. 보너스를 탈 때도 예외 없이 용돈이 왔다. 다만 결혼한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정액으로 감면해주었다. 이러한 십일조 제도는 우리 가족에게 생각보다 큰 변화와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줬다. 첫째, 자식들과 더 가까워졌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은 부모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이상을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되돌려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받은 돈으로 맛있는 찬거리나 고기를 사다 냉장고에 넣어놓고 문자를 보내보시라. 냉장고 털이범들이 차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온다. 둘째, 가족과의 대화가 많아졌다. 이번에는 무엇을 사줄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고 필요한 게 뭔지 자식들에게 묻다 보면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신뢰가 생긴다. 셋째,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관계가 달라졌다. 어느 집이든 고부간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를 알게 되고 그만큼 배려하는 마음도 생겨 작은 오해 정도는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간다. 행복이란 나비와 같아서 좇으면 도망간다. 자식들한테 바라는 것들을 내려놓으면 불만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십일조 학습 효과 덕분인지 결혼 후 아들은 장모한테, 딸은 시어머니한테 매달 용돈을 드리고 있다. 옛말에 ‘사돈집과 뒷간은 멀리 두라’ 했는데 우리 집안은 사돈집과 한집안 같은 분위기라서 자주 식사도 하고 망년회도 함께한다. 또 서로 역할 분담을 해 네 명의 손자도 보살펴준다. 어느덧 큰 외손녀와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행복은 부모 자식이 서로에게 한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는 덕분이 아닌가 싶다.
- 2017-09-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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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주 언론인 "살 때까지 살 것인가, 죽을 때까지 살 것인가"
- 백세시대, ‘얼마만큼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치를 두는 이가 많아졌다. 언론인 최철주(崔喆周·7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장수시대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삶이 더욱 오만하고 지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웰빙’을 위한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그의 생각을 에 담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웰다잉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된다. ‘죽음’과 관련한 법인 만큼 제정 단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시행을 수개월 앞둔 현재, 나라 안팎의 혼란과 희석되며 이에 대한 관심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동안 글과 강연을 통해 ‘웰다잉’을 알렸던 최철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작년에 김영란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웰다잉법’도 우리가 필요해서 여론을 모아 만든 건데, 막상 시행하려 하니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아니, 잊어버린 거죠. 우린 그렇게 죽음을 기피하고 도망가려 해요. 김영란법도 처음 시행됐을 때는 논란과 혼란이 많았죠. 이제 내년이면 웰다잉법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이 법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됐어요.” 웰다잉법은 ‘존엄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안락사로 오해하거나 죽음[死]이라는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다. 그는 괜한 시비를 막기 위해 되도록 ‘웰다잉법’이라 말하지만, 이번 책의 제목에는 ‘죽음’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그 앞에는 ‘존엄한’이라는 수식어가 묵직하게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존엄’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이 ‘존엄’이라 생각해요. 광화문 사거리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어요. 차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거죠. 여성을 성희롱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여성의 존엄을, 학교나 군대에서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건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 모든 부분에 존엄은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게 헌법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존엄이 없느냐.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해야겠다. 그게 웰다잉법의 목적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죽음을 논하라 웰다잉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서류에 따라 자신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생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쉬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연명의료는 더는 의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말기 단계에 이뤄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약물 투여 등을 말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치료할 것은 다 하고, 어느 때가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야 하는데 환자나 가족들이 그걸 인정 못하는 거죠. 그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굉장히 고달파 해요. 평소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막연히 본능적으로 연명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연명의료 과정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팔다리가 묶여 발악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더욱 애석한 점은 말기 환자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자녀나 주변인의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부모님이 사전연면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식으로서 쉽지 않다”며 “부모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평소 부모와 자식이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괘씸하게 여기죠. 그러니 집안의 어른이 먼저 대화의 단초를 열어야 해요. 또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문서화해두고 보관 장소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해져 다툼이 나고, 한 사람의 죽음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그럼 그게 자식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되고요.” 그는 식탁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통이 어렵다는 요즘 가족, 그들이 죽음을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죽음이 등장하잖아요. 가령 ‘얘, 그 주인공 보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게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나중에 그렇게 하기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장례식장을 다녀오거나 주변에 연명의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례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보기도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두 가지가 뭘까요? 생명과 돈이죠. 평생 벌어놓은 돈 자기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라가 또는 자식이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유서는 많이들 써두죠. 그럼 내 생명은요? 내가 결정해두지 않으면 의사나 가족이 연명의료하겠죠.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남에게 맡기나요? 죽음도 돈처럼 자기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죽음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근하게 설명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그다.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아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를 계기로 웰다잉 공부를 하고 책도 쓰게 됐어요. 내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웰다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난 그게 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아픔을 드러내게 되죠.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죽음을 공부하게 됐지만,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인생의 롤 모델을 정하듯, 죽음에도 롤 모델 찾기를 권했다. “좋은 죽음은 우리 삶에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처럼 최후의 순간에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죠.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씨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자신이 시한부라고 밝히며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죠. 존엄하게 삶을 끝내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겠다고 느끼면,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난 이렇게 죽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알뜰하게 살게 돼요.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 웰다잉을 생각하면 삶은 자연히 웰빙이 됩니다.”
- 2017-05-2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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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 는 '아들러 심리학'으로 열풍을 일으킨 일본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쓴 책이다. 그는 20대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병했고 50대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꽤 오래 간병했다. 본인도 50세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한때 아버지의 간병을 받았다. 이 책은 아버지의 간병 기록이다. 간병은 힘든 일이다. 간병인은 꽤 많은 보수를 받지만 워낙 일이 힘들다 보니 간병인을 구하기 힘들다고 한다. 남을 간병하는 일은 그나마 형식적으로 할 일만 하면 된다. 그러나 가족일 경우 특별한 감정이 더해져 더 힘들 수 있다. 저자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면을 벗고 인간으로 마주하라”고 썼다. 오래 간병하다 보면 환자와의 지나간 과거는 물론이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도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여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는 것 같다. 간병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늘 잠만 잤다. “늘 잠만 주무시니 옆에 간병할 사람이 필요 없겠네요?” 했더니 ”네가 있어 편안히 잠을 잘 잔다“는 말에 찡했다. 치매 환자가 전혀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소통이 될 때를 생각하고 환자를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책의 교훈이다. 어제 얘기할 때는 멀쩡히 다 알아들었는데 하루 지나 전혀 다른 소리를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화내지 말라는 것이다. 화를 내면 본인의 심박 박동만 올라가고 좋을 게 없다는 말이다. 치매 환자는 금방 밥 먹은 것을 잊고 또 밥을 달라고 하거나 안 주면 굶긴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이런 현상은 치매로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가 부르면 음식물에 대한 욕구가 저절로 떨어지는 ‘만복 중추기능’이 약화되어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간병이 힘들다고 화를 내거나 한숨을 쉴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심리적으로 볼 때 간병인은 환자에게 “내가 이렇게 힘이 든다.”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는 심정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봐야 환자는 모를 것이니 소용없는 일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힘들면 도와달라고 하면 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치매는 시간의 경과를 잊어버리는 병이다. 간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환자가 불쌍해 보이지만, 시간을 초월해 현재와 지금만 중요하게 여기는 치매 환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며 저자는 이 책의 끝을 맺었다. 필자의 집안에는 치매 환자가 없다. 가족력으로는 그렇지만, 앞으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행히 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방법을 찾아낸다면 몰라도 나이 들면 서서히 다가와 피할 수 없는 질환인 것 같다.
- 2017-05-0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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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 잘 키우면 노후가 행복해져요”
- 교육 좀 안다는 사람에게 전혜성(全惠星·88)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24년간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4남 2녀를 모두 명문대에 입학시킴으로써 자녀교육의 전설적인 대가로 일찌감치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화제가 됐던 그녀의 자식들은 지금 교수 또는 미국 정부 차관보로 지내는 등 사회의 최고 엘리트로서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교육에 있어 현역 활동을 하고 있고 그 와중에 한국을 찾은 전혜성 박사에게서 특별한 교육철학과 인생의 보람에 대해 들어봤다. 무려 24년 동안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낸 전혜성 박사는 그녀 자신의 커리어도 커리어이지만 무엇보다도 자녀교육의 대가로 유명하다. 큰딸 고경신씨는 중앙대 화학과 교수였으며, 장남 경주씨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건후생부 장관을 지냈다. 2남 동주씨는 매사추세츠 주립대 의대 교수이며, 3남 홍주씨는 미국 연방정부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를 지냈다. 차녀인 경은씨도 예일대 법대 교수이며 4남인 정주씨는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일일이 경력을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미국 이민자 가정이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들을 키운 그녀의 자녀교육 철학은 수많은 부모들에게 귀중한 영감이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그녀는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이자 세계적인 사회학자로서 ‘교육의 대모’로 불리며 그녀의 자녀교육법은 오바마 정부의 교육부에 의해 아시아계 미국인 가정교육의 성공사례로 연구됐다. 골든 에이지, 전혜성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 전 박사는 주미대사관 공사를 역임한 남편 고광림 박사(1989년 작고)와 함께 동암문화연구소(ERI)를 설립,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문화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1972년), (1982년), (1996년), (2006년), (2010년), (2012년)가 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계속 만들어진 책들은 그녀가 자신을 꾸준하게 단련하는 학자임을 우회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녀의 공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녀가 입주한 실버타운은 미국에서 최고급에 속하는 곳으로 총장급을 비롯한 교수 사회의 지식인층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선 사회에서 은퇴했지만 인생에서는 은퇴하지 않은 시니어들이 살아가고 있다. “실버타운에 입주했을 때 미국 사회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짐도 풀기 전에 한 할머니가 저에게 한국 문화에 관해 강의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자기가 어시스턴트를 해주겠다고. 알고 보니 헌법 교수였어요.” 그녀가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니 첫 강의에 34명이 등록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일은 34명 중 70%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거나 지인 또는 자녀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버타운 사람들은 그날 아침 를 읽지 않으면 저녁을 먹으러 나가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 책 한 챕터는 쓸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갸륵한 라이프 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한국 문화 강의를 요청했던 헌법 교수는 겨울에 나가서 깡통을 집어와요. 그걸 팔아서 번 돈을 기증하기 위해서죠. 항상 남루한 옷만 입고 다니는 그녀가 한번은 화려한 옷을 입었길래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니 중고장터에서 산 옷이라고 하더군요. 가족의 백그라운드가 하버드대 교수들로 이뤄진 집안의 딸이 청빈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거죠.” 휘트니 센터라고 불리는 이 실버타운에는 동아리가 19개가 있다. 음식에서부터 강의 커뮤니티 등등. 전 박사는 계속 배우고 누릴 수 있는 삶이 만족스러워 마치 “천당에 온 것 같다”며 실버타운 생활은 기대 이상이라 했다. “그런데 서울에 왔을 때 실버타운을 가보니 제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과는 너무나도 운영 시스템이 달랐어요. 한국은 사우나와 골프장이 몇 개씩 있지만 호사만 시키는 거지, 사회에 기여를 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은 없더군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나이 들었다고 하루하루를 그저 흘려보내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며 미국에는 이처럼 독립적으로 시니어들이 자랑스럽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고 했다. 열정적이되 지치지 않게 평생을 공부하는 사람답게, 전 박사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16세 때부터 마음먹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해방 후에 감옥에서 우국지사들이 나와서 정치를 했는데, 정책적인 아이디어가 너무 없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싶었죠. 그걸 위해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자인 고황경 박사가 여러 가지 활동을 했지만, 결혼을 안 하니 주변에서 인정을 안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에서 인정받으려면 혼인하고 아이를 낳은 후 박사 학위를 가져야겠구나 하고 결심하게 됐어요.” 이화여대 영문과 2학년을 마치고 미국 유학에 나섰고, 22세가 되던 해에 결혼한 그녀는 고광림 박사와 하버드대에서 최초로 한국학 과정을 신설했다. 사회 참여적 인물로서 그녀의 의지는 그만큼 확고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되고 예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전 박사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유교사상이 너무 강한 집안이었어요. 고단했고 할 일도 많았고…. 집을 나가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녔죠. 그런데 내가 선택한 것이니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극복했어요. 더구나 내가 명색이 비교문화 사회구조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싶었고(웃음).” 부모는 행동과 실천으로 아이를 설득해야 고통스러웠던 결혼생활 끝에, 전 박사는 ‘이런 도전을 주신 것은 하느님이 필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바깥의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스트레스가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아들을 잘 키워서 며느리들은 편하게 해주자 싶었죠(웃음).”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도 일어났다. “아이들은 서양식으로 자랐으니까, 아버지에게 여기가 미국인데 왜 한국식으로 사시냐고 따지는 일도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난 항상 중간 역할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 남편이 없을 때 자식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 내가 남편 역할을 하기도 했죠.” 전 박사는 본의 아니게 남편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자녀교육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밸런스였다. “부모 중 한 사람만이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려면 닦달하고, 쉬게 하고, 사랑도 하고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부 두 사람이 공동 목적이 서면 역할 교환이 잘되더군요.” 대를 이어가는 자녀교육 철학 전 박사는 부모의 역할 모델이 가장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간단히 말하면 “공부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녀는 말이나 기계적인 지식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지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다. “말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말로 하면 23%가 전달되고,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면 100% 전달됩니다.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 거지요. 자녀교육의 핵심은 부모가 열심히, 성실하게, 그리고 봉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가정 내에서 의사소통이 계속 이뤄질 수 있도록 아침식사를 늘 같이하며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꾸준히 귀 기울였어요. 요즘에는 아이들이 우리가 모르는 걸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 하나하나를 한 명의 성인으로 보고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가족 공동의 목적을 세워 그걸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방법이 좋겠죠.” 사실 전 박사의 삶의 저변에도 부모님의 존재가 두텁게 드리워져 있다. “어머니는 과거부터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아무리 똑똑해도 덕망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사실 제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약속한 걸 성취하려고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녀 자신도 부모님의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녀교육의 철학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부모가 삶의 목적을 먼저 세워라 미국 최고 대학의 교수이자 여섯 남매의 어머니, 그리고 엄격한 유교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야 했던 전 박사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삶에서 ‘일과 가족’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말하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가족을 한데 묶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좋은 아내, 현명한 엄마라면 사회에 대해 그만큼 알아야 하며 일과 가족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쉽지 않은 모든 것들을 겪어내면서 어떻게 자신에 대한 힐링을 했는지 물어봤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한 일인데 그 일이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이 돼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에게 다시 찾아오는 일이 있어요.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오죠. 그게 제 자부심을 높여줍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 후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그녀가 말하는 가치 있는 삶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삶의 목적이 뚜렷하고, 자식들과 대화할 수 있는 부모가 되면 아이들이 잘된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식의 삶의 모범이 되면 자연스레 아이들은 따라온다는 것이다. 성공보다는 성취에 목적을 두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이 정립되면 부모와 아이들 인생 모두는 성공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자식을 잘 키우면 노후가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다. 장수가 악몽이 되는 노후파산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다양한 사회 지표는 우리 사회에 노후파산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누구나 아름답고 행복한 노년을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행복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녀 교육이든 노후 문제이든 일생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삶을 설계해야 한다는 전 박사의 조언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서울에 왔을 때 실버타운을 가보니 제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과는 너무나도 운영 시스템이 달랐어요. 한국은 사우나와 골프장이 몇 개씩 있지만 호사만 시키는 거지, 사회에 기여를 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은 없더군요 신라호텔 룸에서 만난 백발의 전혜성 박사는 다리만 빼고 다 건강하다고 말한다. 한국과 비교해서 실버타운 생활을 얘기하던 중에 그녀는 “오래 사는 것보다 보람 있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며 “자녀 교육 못지않게 부모의 노후 대비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 2017-04-2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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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소망, 공짜ㆍ정답ㆍ비밀 바라지 말자
- 감나무에 남겨진 까치밥을 그리면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이다. 세상에 존재하기 어려운 공짜ㆍ정답ㆍ비밀의 함정에 빠져 올해를 보냈다. 새해에는 모두에게 희망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랐다. 세상에 공짜 있는가 사람은 ‘주고받는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거래에는 대가가 따른다. 검찰조사에 이어 국회청문회, 특검에 이르기까지 ‘공짜’논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받아먹은 사람이야 그전부터 공짜라고 우겼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주는 측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부하였다.”고 국민 앞에서 주장하고 있다. 세밑의 정겨운 풍경이 ‘자선’행사다. 냄비 속에 일을 남기지 않고 기부하고, 동사무소에 얼굴도 보이지 않고 어렵게 모은 돈뭉치를 놓고 가는 훈훈한 이야기도 세상에 많다. 하지만 독대를 하고 특정인이 주도하는 재단에 수십ㆍ 수백억을 몰아주면서 순수한 기부를 주장하는 것은 처벌을 피하려는 변명에 불과하다. 자기 부모님에게 용돈 드리면서도 몇 번씩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남에게 받는 ‘공짜’가 결국에 ‘독’으로 돌아온다. “칼자루 잡은 갑인 줄 알았으나 상황이 달라지자 자신이 칼날 위에 선 을로 전락하여 찰거머리 같은 상대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이렇게 터지고 오히려 가슴이 후련하다.”는 법정에서의 고백이 언론을 장식하였다. 상대는 공짜의 대가를 몇 배 더 챙겼다는 이야기다. 정답을 말하지 못한 이유 사회에서 은퇴한 시니어는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이 항상 정답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생활이 나름 성공한 자신의 삶의 결과라고 생각할수록 더 완고해진다. 시니어가 친구들 심지어 자식들과도 의견충돌이 많아진 이유다. “나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자기주장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기 일쑤다. 세상은 날마다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어제의 정답도 오늘 여러 모습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정답은 완벽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자기만의 ‘정답’을 고수하지 않아야 한다. 가족과 소통하고 친구와 의견을 나누면서 살아야 즐겁다. "정답을 바라지마라."는 말이 정답인 세상이다. 비밀의 함정 두 사람만의 비밀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한다. 오랜 습관에 젖어 종이 몇 장 없애고 PC기록만 지우면 '비밀'이 다 지워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자ㆍ통신기술이 발달하여 통화ㆍ영상ㆍ사진은 사실상 영원히 기록이 남고 아무리 지워도 복원할 수 있는 세상이다. 골목에 설치한 CCTV는 사실상 모든 행동을 잡아내고 있다. 영원토록 잘못을 숨겨둘 곳은 없다. 바르게 사는 것만이 모두에게 최선이다.
- 2016-12-2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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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키워주는 대가 정확히 받아라
-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결혼 후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게 되면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힘겹게 이어나가게 된다. 특히 육아 문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 하다. 우리 세대 역시 일을 병행하려면 육아는 누군가가 대신해야 주어야만 했고 그 대역은 대부분 조부모였다. 세대가 바뀌었어도 어려운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맡기던 사람이 맡아주는 사람으로 역할만 바뀌었을 뿐 이다, 필자의 친구들도 손자를 봐주느라 꼼짝 못하는 친구들이 한두 명 씩 늘어나고 있다. 황혼 육아가 현실로 닥치기 전 대부분의 친구들은 ‘난 절대로 손자 봐주지 않을 거야.’ 라고 선언했었다. ‘이제야 겨우 온전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아무리 울고불고 사정해도 절대사절이야’ 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 친구를 매정하다 나무라는 친구도 없었다. 그러나 황혼육아가 현실이 되었을 때 평소 소신대로 자식의 어려움을 단호히 외면 한 친구는 한 명도 없다. 육아를 대신해주기로 결정하고 가장 껄끄러운 사항이 대가를 받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받아야 한다. 이다. 자식의 경제상황을 고려하여 합리적인 선에서 금액을 정하고 정확하게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 힘든 육아를 맡겨 놓고 아무런 보상도 안 할 자식은 없다. 그러나 모호하게 대충 생각해서 용돈 주듯 한다면 서로 말 못하는 사이 켜켜이 섭섭함이 쌓여 갈 수도 있다. 모든 오해와 섭섭함은 주는 사람 마음과 받는 사람 마음이 서로 다른데서 생겨난다. 자칫 주는 사람은 줄 거 다 주고 눈치 보며 할 말 못한 거 같고, 받은 사람 받은 건 별로 없고 골병만 들었다는 피해의식에 빠질 수 있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아이를 봐주기로 한 이상 보육 전문가 못지않은 보육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사랑으로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준 프로 보육 자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부모가 육아를 대신하는 집은 육아방식에도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육아 지식으로 무장한 아이부모와 다양한 경험을 장착한 조부모의 주장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과학적이고 정확한 매뉴얼에 따르고 싶어 하는 아이 엄마 와 ‘니들도 다 그렇게 키웠고 아무 문제없었다’ 는 할머니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황혼육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보육 관련 서적과 여러 기관에서 실시하는 조부모 손자 보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보육의 전문성을 키운다면 이런 갈등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 자식 사이에 냉정한 계산이 걸린다면 그 돈의 일부를 자식과 손자를 위한 기금으로 적립해도 좋을 것이다. 그 매정한 정리가 훗날 자식과 손자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절묘하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금이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정확한 대가 정의를 통해 아이의 맡기는 사람도 맡은 사람도 서로 당당하게 자신의 교육철학 및 보육방침을 소통하고 거기에 손자 사랑 더하기를 한다면 그 안에서 아이가 사랑받고 따뜻하게 자라서 삼대가 모두 윈. 윈. 윈 할 수 있는 최상의 육아 시스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2016-12-0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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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하교 전학] (15) 오후 4시는 간식시간
- 아이들이 놀다가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딱 정해져 있다. 오후 4시가 되면 대강 배꼽 시간에 맞춰진, 아빠를 뺀 가족이 모이는 시간이다. 엄마의 정성으로 준비하고 있는 집으로 가서 간식을 먹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인 것이다. 처음에 왜 4시가 되기 무섭게 그렇게 재미있게 놀다가도 얼른 장난감이나 게임기들을 수선스럽게 정리하고 ‘오쟈마시마시다~(안녕히 계십시오+잘 놀았습니다.+감사합니다가 다 합쳐진 인사말)’를 외치고 황급하게 나가는지 의문이었다. 왜 모두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가는 거지? 이상한데 뭘까? 하는 정도로 갸우뚱하며 지냈다. 일본생활에 적응해 가는 도중에 엄마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수긍이 가면서, 아이들을 귀찮게도 하지 않으면서 즐거운 생각 속에 귀갓길을 신나게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무엇을 해 놓았을까? 먹는 즐거움을 연상시켜가며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는 정말 괜찮은 방법으로 역시 얄미운 족속들이라며 감탄을 했다. 가족이 이해와 사랑으로 잘 지속되어야 하는 데는 가족단란이 매우 중요하다 했다. 퇴근을 해서 집으로 온 아빠가 샤워를 하고나면 대략 8시 정도가 된단다. 아이들의 발육 상! 또 가족단란을 지키기 위해 다 모이는 저녁식사가 너무 늦어지니 그 전에 간식시간을 만들어서 아이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취지로 정해진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늦게 까지 집에 안 들어오는 일이 없어져 일거양득이 되었단다. 하루에 단 몇 시간이라도 가족이 오붓하게 앉아 서로가 보낸 시간들을 얘기를 나눠가며 의견교환을 한단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혹시 문제가 생길 때는 서로가 도와가며 해결하는 방법도 교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월급이 가까워 오면 각자 그 달에 꼭 필요한 구입품이나 돈의 액수도 부모에게 얘기하고 왜 필요한지 또는 왜 거절하는지 부모 자식 간의 소통도 된단다. 아버지의 월급은 어디 까지나 가족 공동 간에 소용되거나 필요한 것들을 위해 쓰여 지는 가족 서로의 모두의 돈이란다. 오로지 본인에게 필요한 돈은 각자 알바를 해서 벌어서 쓰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것을 실천하는 예로 한 엄마가 골프를 배우고 싶다고 본인이 알바를 해서 그 돈을 버는데 혀를 찼었다. 저녁 식사시간은 가족회의, 소통과 단란 유지를 위해 중요한 시간이라 했다. 그 동네에 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국회사 부사장 부인이 20년을 밍크코트를 사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려도 아직도 자긴 못 입고 있는데 한국 엄마들은 하나도 아니고 둘씩도 가지고 있는 걸 안다면서 어떤 요령이 있는 거냐며 가르쳐 달라고 해서 속으론 놀라고 겉으론 “나도 아직 한 개도 없어요~‘ 얼버무리며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외국 엄마들은 월급을 소중하게 전 가족을 위해 요긴하게! 잘 꾸려 가는지 전 가족이 체크하는 시간이 있음에 가슴 뜨끔했었다. 가족 사랑을 이뤄가며 치우치지 않게 가정경제를 잘 이끌어 가는 묘안들이 있음에 머리 숙여졌다. 거기엔 벌어오는 남편의 입김이 아주 셌다.
- 2016-09-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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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젊은이들
- 바야흐로 신세대의 세계다. 어느덧 물질문명은 흘러넘치고, 모든 것들은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 변화의 물결이 새롭다 못해, 구세대의 차오르는 가슴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삭혀야만 한다. 새로운 세계는 늘 모든 것들이 위대하게 창출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라가 점점 부강 되어 가는 모습일수 있다. 그러나 그 기본이 튼튼하게 다져져 있지 않은 한나라의 교육성은 장래의 위기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할 때가 있다. 더구나 인성교육의 기본은 그 나라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일부러라도 지하철을 타고 외출을 한다. 그 이유는 이리저리 바꿔 타야 할 때마다 걷는 운동이 몸에 긍정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비되는 시간만큼 운동으로 채워지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다만 사람으로 눌려 터지는 출퇴근 때만은 피하고 싶다. 그 시간은 어찌나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차는지 숨이 막혀 죽을 뻔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 이른 오후였다.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 바람에 실내의 공기가 아주 쾌적하다. 전철 안에는 사람들도 많지가 않아 분위기는 매우 상큼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나마 귀에는 이어폰을 장착하고도 책을 보는 사람들이 다소 있었고, 간 혹은 신문을 펼쳐 든 이들도 있어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더러는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 차라리 코를 골지 않는 것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놈의 스마트 폰이 안겨다 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단절이다. 앉으나 서나 심지어 걸을 때에도 유별난 행동들은 위험천만이다. 이 시대의 물질문명이 가져다준 만행 일수 있다. 필자도 가방 속에서 핸드폰소리가 울려온다. 가만히 가방을 뒤적거려 폰을 꺼낸다. 글씨가 너무 작으니 눈이 잘 안 보인다. 잠시를 못 보겠고, 보려고 안간힘을 쓰니 눈이 피로해지고 점점 아파진다. 그리 중요한 일들이 아니니 소리를 진동으로 바꿔놓고, 다시 접어 가방 속으로 밀어 넣는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나중에 봐도 큰일 거리가 아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쪽 구석에서 아주 젊은 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다. 필자도 모르게 눈이 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점점 더 가깝게 끌어안고 깊게 포옹을 하기 시작한다. 필자는 민망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잠시 후 다시 필자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더 강도가 심하다. 두 젊은 남녀는 사람들 앞에서 보라는 듯이, 아니 자랑스러운 듯이 당당하게 입을 맞추고 있다. 이번에는 온몸을 애무하며 진하게 얼굴을 맞대고 타오르고 있다. 이게 훤한 대낮에 웬일인가 싶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봐줄 수가 없어 얼굴을 돌렸다. 오히려 필자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제부터 한국이 이렇게 변하게 됐나 싶었다. 필자가 살고 있던 선진국 미국에서도 그렇게 난하지는 않다. 물론 그들도 포옹이나 허그로 사랑을 가볍게 표현하기는 하지만 때때로 그것들은 오히려 아름답기도 하다. 그들은 진한 사랑의 행동들을 아무 곳에서나 분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격 없는 행동으로 그렇게 유치하지는 않다. 이제 막, 조금 살게 된 것 같은 나라에서, 젊은이들의 무질서한 행동들이 마냥 불쾌하게 자극해왔다. 필자는 두말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삭히며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과연 그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이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인생을 더 많이 살아온 선배들, 또는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서게 된다. 괜스레 젊은이들에게 말 한번 잘못하면 순간에 봉변을 당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되어가는 세상, 아니 엄청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물질의 문명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든 것들이 무섭도록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의 무작정 세 대라지만, 한 번씩은 돌아보며 잠시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필자의 자식들도 요즈음의 젊은이들이다. 이제는 어느덧 필자의 품에서 벗어나 그들 개체의 인격을 기대할 뿐이다. 모든 젊은이들은 부모의 책임 속에서 길들여져 있다. 그들이 바깥 둥지로 나가기 전에 단단한 사고로 무장된 젊은이들로 거듭나기를 부모는 더욱 노력해야 할 것만 같다. ‘세상에 젊은이들은 거듭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하루를 돌아본다.
- 2016-08-23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