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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와 힐링 칼럼] 피톤치드의 상쾌함에 흠뻑 취한 '청태산'
- 서경덕의 전국 유명 휴양림을 찾아서 강원도는 혼자 떠나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원주를 지나 본격적으로 강원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울창한 산림은 인간의 손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듯 우뚝 솟은 모습에 항상 든든함을 느낀다. 얼마 전 강원지방에 폭설이 내린 덕에 이곳은 마치 하얀 종이에 묵으로 선을 이리저리 그어 놓은 듯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산봉우리 곳곳에 걸려 있는 구름은 그 산수화를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아깝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흠뻑 취해 있을 때는 그 누군가와의 대화로 그 기분을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을 다녀도 횡성으로 향하는 내내 강원도의 멋진 자연환경을 바라보는 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둔내IC에서 나와 둔내면소재지 방면으로 이동 후 강원도 평창으로 연결되는 옛 영동고속도로인 19번 군도를 이용하면 청태산자연휴양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청태산자연휴양림에서 이번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청태산자연휴양림이 위치하는 둔내는 조선 역사지리지 ‘여지도서’에 따르면 둔전에서 수확되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는 곳이라 하여 둔창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됐고 둔창이 있는 곳이라 하여 둔창내로 불리다가 지금의 둔내로 바뀌었다고 한다. 청태산(1200m) 북쪽 자락에 위치하는 청태산자연휴양림은 잣나무 숲 가운데 위치해 사시사철 푸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은 관동지방으로 향하다가 지금의 청태산휴양림 자리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청태산의 산세가 아름답고 큰 바위가 있어 놀랄 만하다고 하여 청태산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횡성 수령에게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입구에서 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겨울왕국’의 모습으로 또 한 번의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 몸보다 굵은 잣나무와 전나무는 휴양림 입구에서 웅장함과 풍성함을 더해준다. 잣나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피톤치드 향을 맡으면서 매표소로 올라간다. 매표소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잔디광장으로 연결되는 진입로, 왼쪽은 숙박시설로 연결되는 진입로다. 먼저 왼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또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약 1.2km 떨어진 곳의 제2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숲속의집과 제1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이어진다. 4~9인실의 숲속의 집은 잣나무 숲 아래에서 저마다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굵직한 잣나무 숲 아래에서는 피톤치드를 연신 뿜어내듯 상쾌한 기분에 그동안의 스트레스는 온데간데없어진다. 4인실에서 8인실로 구성되어 있는 산림문화휴양관은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복도를 이용해 방으로 들어가는 특이한 구조다. 방에 들어가면 잔디광장으로 창이 있어 멋진 휴양림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다. 재계단은 사람이 올라갈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 ‘아~ 내가 정말 숲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청태산자연휴양림은 역시 잣나무 숲 아래 놓인 데크로드가 힐링의 최고봉이다. 제1산림문화휴양관 뒤편에서 야영장으로 이어지는 건강숲길까지 데크로드가 설치돼 있다. 평일임에도 등산객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고, 태어나서 숲이라는 곳에 처음 오는 어린 친구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 2014-04-08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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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 “산야초 장아찌와 건나물로 불안한 미래 잡았어요”
- 제2의 인생 멋지게 꾸며가는 전남 순천의 ‘월암공주’ 이인자씨 50대 중반의 나이에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불확실한 미래가 귀농귀촌을 결정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면서 새로운 인생을 배워갔다. 농사와는 담을 쌓고 살려던 생각이 바뀌면서 귀농귀촌인들에게 희망의 꿈을 전하고 싶어졌다. ◇지긋지긋해 떠나려던 농촌으로 돌아오다 = 충청도 공주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시골 생활이 지긋지긋해 언제든 시골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로 상경해 직장생활을 했다. 농사와 관련된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던 계획은 성공했지만, 지금 내 직업은 농업인으로 바뀌었다. 아직 내 인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가늠이 잘 안 된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2008년까지 귀농귀촌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저 평범한 주부로 살면서 남편의 큰 배려로 뒤늦게 대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순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전원생활대학 과정을 한다며 같이 다니기를 권유했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한두 명씩 귀농귀촌에 관심을 갖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나도 순천시 전원생활대학 과정을 접수하고 말았다.그것도 혼자가 아닌 남편까지 동행하고 말이다. 우리 부부는 전원생활대학 과정을 무사히 이수했다. 최종적으로 귀촌을 결심한 동기는 자영업을 하는 오십대 중반인 남편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앞으로 아이 둘을 출가시키고 더 나이가 들면 언젠가는 사업을 접어야 할 시점이 올 텐데, 그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늘 고민이었다. 남편도 흔쾌히 허락해 어렵게 터 넓은 시골집을 구입했다. 손수 인부들과 집수리를 시작하면서 나의 귀촌생활은 시작됐다.한편으로 아이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은 “우리가 결혼해 나가고, 아빠 엄마가 더 나이 들어 시골에서 아프면 병원이 멀어 어쩌려고 하시냐”며 걱정했지만 지금은 제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줄 시골 외가집이 생겼다며 좋아 한다. 처음에는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많았다. 포클레인이나 큰 차가 다니면 길이 망가지니 자제하라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됐다. 길을 만들 때 자신의 땅을 기부해 만든 길이니 자기의 길이라는 논리로 밀어부칠 때는 마음이 상해 잠시나마 귀촌생활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당 작업 과정에서 앞집 경운기 주차 공간을 만들어주고, 새로 지은 저온창고의 한쪽을 같이 사용하는 등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자 이웃은 그 누구보다 내게 큰 힘을 주는 든든한 지원자가 됐다. 지금도 마을 분들을 만나면 언제나 반갑게 인사한다. 대부분 어른들이 반겨주신다. 그러다가도 내가 뒤돌아서면 등 뒤에서 “이런 시골에 뭐 해먹을게 있다고 왔을꼬. 쯧쯧…” 하시며 흉을 보기도 한다. 이제 뒤통수 가려운 그런 말은 못들은 척 지나쳐 버리는 것이 일상이 됐다. 우리 집은 마을 한가운데여서 수시로 마을 어르신들이 들리시는데, 그럴 때마다 간식을 준비해드렸다. 그러다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단감, 고구마, 무, 야콘 등을 가져다주시며 젊은 사람과 함께 살게 되어 너무 좋다고들 말씀하신다. 나 또한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마을 회관 어르신들까지 챙기는 습관이 생겨 이제는 제법 ‘큰 손’이 되어버렸다. 옆집 아주머니는 “집이를 뭐라 불러야 하는지 알려 줘봐” 하신다. “저는 충청도 공주가 친정이고, 공주 이씨이고, 현재도 앞으로도 공부를 해야 할 주부이기 때문에 공주라 불러주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아 그래, 공주 맞다. 이제부터 공주댁으로 부를 테니 그리 아셔” 하며 웃으신다. ◇산야초 장아찌와 건나물로 짭짤한 수익 = 수리한 집은 제조시설로 용도 변경해 준공하고, 아주 많은 고민 끝에 외서면 월암리에 ‘월암마실’이란 이름을 붙여 사업자등록까지 했다. 마을에서 땅을 임대하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집을 소개 해준 분께서 고맙게도 밭 700평을 무상으로 임대해주셨다. 2012년 봄, 처음으로 임대한 밭에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재배할 수 있는 호박, 가지, 토란을 심어 건 나물을 만드는 것으로 나의 농촌 생활이 시작됐다. 작년 봄부터는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두릅, 가시오가피, 죽순, 엄나무순 등 봄나물을 이용해 산야초 장아찌를 열심히 만들어 나만의 제품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제품을 보관할 저온창고가 없어 고민하던 중 ‘우수창업농 지원사업’으로 저온창고와 조그마한 작업장을 건축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저온창고가 없어 애써 만든 건 나물이 습기로 인해 망가지기도 하고 이웃집 저온창고 신세를 지면서 한해를 보냈는데 올해는 여러 가지 건나물, 장아찌 등을 저온창고에 맘껏 저장할 수 있어 얼마나 마음 편한지 모른다. 산지에서는 잘 거들떠보지도 않던 하품 농산물을 건조해 시장에 판매하면서 농가소득으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는 내 귀촌 생활을 눈여겨보시던 이웃 한분은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같이 하시자고 하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 50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변한 것이 있다면, 뭔가를 배운다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스스로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꽃차 3급’ 과정과 자격증을 취득해 귀촌생활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꽃들로 꽃차도 만들고, 다른 방법을 응용해 야생차를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고 고객들에게 전하기도 한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자투리 시간에 천연비누 제조법을 배워 단호박, 자소엽, 당귀 등 농산물을 이용해 천연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농가에서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많고 조금만 신경 쓰면 여러 가지 천연비누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직은 서툴지만 나의 귀촌생활은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블로그, SNS를 통해 제품 판매경로도 조금씩 뚫었다.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한 것은 이 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나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박한 시골 살이 이야기와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을 나만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아동요리 공부를 이번 가을학기에 등록해 일주일에 한번씩 열심히 배우고 있다. 다른 교육생들은 봄 학기에 수강을 시작했고 나만 초보학생이지만 뒤처지지 않으려고 요리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귀농생활에서 나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시골생활을 한다면 발전이 아닌 그대로 정체될 것 같다. 남편은 가끔 “공부는 언제까지 해야 끝나느냐” 묻기도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동안까지 공부는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열정이 없었다면 난 그저 남편만 바라보는 평범한 주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어떤 분들은 “시골 생활을 결심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지만 그 누군가가 아닌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다른 귀농귀촌인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곤 한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 나이가 더 들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마을 어른들과 함께라서 더 행복한 귀촌생활 = 초보 농사꾼이다 보니 마을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저 소꿉놀이 정도로 보이는지 텃밭의 작물을 보면서 그때그때 조언을 해 주신다. 혼자 힘들어 하는 일은 직접 농기계로 말끔히 해 주기도 한다. 만약 마을 분들이 아직도 나를 ‘뜨내기’로 생각한다면 이런 도움을 주셨을까? 이런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마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에는 적극 동참하고 있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홍보는 물론 판매에도 열심이다. 마을 주민이 되었다며 텃밭에 밑 걸음까지 챙겨주는 고마운 이장님도 계시고, 밤늦도록 멸치젓을 담아 주는 어르신도 계신다. 고추장, 된장 간 봐 주신다고 두 팔 걷어 부치고 도와주시는 어르신과 보리 엿기름 기르는 것 알려 주시면서 딸처럼, 며느리처럼 하나하나 챙겨주시는 마을 분들이 너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순천시 외서면은 주암호 상류 지역이다. 이런 특성에 맞는 작물을 이용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지대가 높기 때문에 배추, 무를 생산하는 농가가 많고 나 또한 무를 재배하기에 무를 이용한 맛있는 무장아찌와 한과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됐다. 농촌에서 젊은이는 찾아보기 힘들고 노인들뿐이라는 이야기는 생소한 게 아니다. 게다가 절반 정도는 독거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농촌 실정을 늘 걱정하며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중, 무장아찌와 한과를 생각해 낸 것이다. 집집마다 무를 재배하고 있고, 한과 역시 농한기인 겨울에 만드는데 작업 환경이 좋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건축한 작업장에서 좀 더 위생적이고 편리한 환경에서 한과를 만들어 판매해 보기로 했다. 큰 노동력이 아닌 단순 활동을 통해 노인들의 무료함을 해소하고, 노인 소득의 기쁨과 동시에 마을의 발전을 위한 일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마을 어른들과 함께 이런 일들을 하면서 마을사업으로 이끌어 가고픈 마음이다. 이런 작은 노력으로 마을 분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꼭 욕심내고 싶은 일이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장아찌 요리를 담는 나만의 책을 만들고 싶다. 올 추석에 장아찌를 선물로 받으셨던 분들께 서 짜지 않고 맛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줘 커다란 용기를 얻었다. 언젠가는 꼭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순천 시내 ·귀농 전 직업: 주부 ·귀농 결심동기: 미래에 대한 준비 ·귀농 선택작목: 건나물류(고사리, 취나물, 죽순, 호박, 가지), 장아찌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순천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교육 ·귀농연도: 2011년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연간 수익: 2012년 1000만원
- 2014-03-3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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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로 시작한 공예… 이젠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유산"
- 17일, 대전에서 홍성으로 내려가는 길에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약 1시간 20분 정도 차를 몰고 가다 보니 도로변에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댕댕이장 보유자'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홍성군 광천읍 신진리 246-2번지. 바로 댕댕이장 보유자인 백길자(66)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글쎄… 열 세 살 때부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오니까 이렇게 문화재도 되고 그런거지 뭐, 특별한 재주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백씨의 얼굴에는 수줍은 웃음이 떠나지 않는, 시골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꾸밈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잠들어 있는 손자가 깰지도 모른다며 기자를 작은 작업실로 데리고 가는 모습도 영락없이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이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데 1948년에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어요. 당시 집에는 이모, 사촌 등 16명인가 18명이 들락날락하는 대식구여서 항상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죠. 그래도 가난하지만 화목했어요. 전 위로 오빠가 셋이라 맏딸 노릇을 했는데 낮에는 밭 매고 밤에는 모시 삼아 짜고 철마다 바느질해서 옷 만들고 했죠." 백씨가 댕댕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북창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였다. 당시 그가 살던 마을 뒷산에는 댕댕이풀이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당시 마을어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댕댕이덩굴을 채취해 생활용구를 만들어 자급자족했던 것이다. 손재주가 좋았던 백씨의 아버지도 취미 삼아 댕댕이덩굴과 인동덩굴로 바구니를 만들었는데 백씨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짜다 남겨둔 댕댕이바구니를 엮어 올라가며 곧잘 따라 하곤 했다. 그후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를 도와 댕댕이덩굴과 인동덩굴을 끊어서 삶고 눈을 따서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당시 식구들이 열 명이 넘으니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죠. 40원짜리 플라스틱 바구니조차 사서 쓸 엄두가 나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뒷산에 널려 있는 댕댕이덩굴을 잘라다가 바구니를 만들었죠. 그런데 웃긴 건 제대로 배우지 못해 결혼 전까지 바구니의 바닥부터 몸통까지는 짤 수 있었는데 마무리를 익히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시집 간 뒤 친정에 와 아버지에게 마무리 하는 방법을 배운 후 그때부터 혼자 댕댕이덩굴로 바구니를 만들기 시작했죠." 백씨는 1973년 당시로는 조금 늦은 27살의 나이에 홍성군 우체국에서 집배원을 하던 김성환씨와 선을 봐 결혼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두번 만나고 결혼을 했는데 처음 만난 날 약혼을 하고 두번 만난 날 결혼을 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말이 안 되지. 두번 만나서 결혼을 하다니 말이야. 그래도 남편이 둘째였기 때문에 시집살이 하지 않고 단둘이 사니까 오붓하니 좋더라고(웃음). 결혼 후 이곳 광천으로 왔는데 광천에도 지천에 댕댕이덩굴이 자라고 있어서 심심풀이로 바구니를 짜기 시작했죠. 댕댕이덩굴로 바구니를 만들려 해도 농사일 하다 보면 1년에 한, 두 개 만들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니까 질리지가 않더라고." 백씨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댕댕이장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것은 당시 홍성의 한 동네에 살던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호 지승제조장 최영준 보유자에게 지승공예를 배우면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백씨가 지승을 배우고 있을 때 최씨가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오면 항상 댕댕이장에 대해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최영준 선생님이 나를 많이 챙겨줬죠. 항상 댕댕이장을 어떻게든 문화재로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짚이나 풀로 만든 공예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조영준 선생님이 조사자이던 김삼대자씨에서 나를 소개해줬는데 그 결과 댕댕이 덩굴을 소재로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제주도와 충청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졌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당시의 조사를 토대로 댕댕이덩굴을 사용해 공예품을 제작하는 기술은 육지에서는 백씨가 유일한데, 이것은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정동벌립을 만드는 기술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씨가 바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시 조사자이던 김삼대자씨는 1998년 처음 백씨의 작품을 보고 옛날 전통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될 수 없다는 통보를 내렸던 것이다. "그때는 무형문화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쓸 물건 만들려고 나이롱 끈을 넣고 했는데 그걸 보더니 이건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오직 댕댕이덩굴로만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후 2000년에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다시 심사를 받을 때 그 김삼대자씨가 조사위원으로 또 온 거예요. 그러면서 2년 동안 내가 작업한 것 들을 보더니 감탄을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돌아갈 때 내가 꼭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니 결국 그 해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될 수 있었죠." 백씨는 지금도 그녀의 아버지가 만든 채반을 유품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의 채반을 보며 그것처럼 멋진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자리에 앉아 댕댕이덩굴을 간추린 다음 채반이나 소쿠리, 시루밀과 같은 전통적인 생활용품 뿐 아니라 화병이나 삼합상자나 오합상자 같이 댕댕이로 만들지 않았던 다양한 작품까지 만들어보며 전통문화 보존에 힘쓰고 있다. "52년 동안 댕댕이를 손에 놓지 않고 살아왔는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남편이 이수자가 됐을 뿐 댕댕이장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예요. 요즘 같은 시대에 댕댕이공예품보다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니까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댕댕이공예품에는 돈으로 값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취미라도 좋으니 댕댕이장을 배우러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 언제든지 기쁘게 반기며 함께 앉아 댕댕이덩굴을 엮을 수 있죠. 그런 날들이 앞으로 많았으면 좋겠네요(웃음)." 글·사진=최신웅 기자 홍성 댕댕이장이란 2000년 9월 20일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홍성 댕댕이장은 댕댕이 덩굴의 줄기를 이용해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능이다.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댕댕이 덩굴을 이용한 수저집·바구니·채반 등 생활기물을 만들었으나, 현재는 기능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전국을 대상으로 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짚·풀공예 조사에서 댕댕이덩굴을 소재로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전국에서 제주와 홍성뿐이었다. 홍성에 거주하는 기능보유자 백길자씨는 댕댕이장 뿐만 아니라, 싸리·보리짚·밀대 등 풀공예 전반에 걸쳐 솜씨가 뛰어난 재주꾼으로 알려져 있다. 도움말=충남도청 ▶댕댕이 덩굴 댕댕이 덩굴은 한자로 용린(龍鱗)·상춘등(常春藤)·목방기(木防己) 등으로 불리며 경남지방에서는 장데미 또는 장드레미, 제주지방에서는 정당·정등·정동 등으로 불린다. 그 줄기는 내구성이 강하고 탄력성이 매우 좋으며 축축한 상태에서는 잘 구부러지는 특징이 있다. 줄기 직경이 2㎜ 미만이기 때문에 공예품을 만들면 그 짜임새가 섬세하고 고운 질감을 준다. 길이가 3m에 달한다. 잎은 어긋나며 3~5개의 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줄기와 뿌리를 잘라서 햇볕에 말린 목방기(木防己)는 방기 대신 한약재로 해열·이뇨·신경통에 쓰고 있다. 항우도 댕댕이덩굴에 넘어진다"는 옛말은 작고 보잘것없다고 해서 깔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대전일보 최신웅 기자
- 2014-03-2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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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70대 할머니, 소설 태백산맥 전권 21개월 만에 필사
- 70대 할머니가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전 10권을 불과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필사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안정자(79·창원시 성산구) 씨는 2012년 4월 24일에 태백산맥 필사를 시작했다. 당시 안 씨가 참여한 경남 창원시 성산노인복지관 문예창작반의 교사가 ‘필사를 하면 글이 는다. 특히 태백산맥을 필사하면 좋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안 씨는 그 자리에서 손을 번쩍 들고서 “2년 안에 전 권 필사를 마치겠다”고 약속했다. 2000년대 초 금강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을 각각 108번씩 1년 반 만에 사경(寫經)한 적이 있어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안 씨의 필사 작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평일에는 길게는 3시간, 토·일요일에는 하루 6시간까지도 필사를 했다. 안 씨는 “필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태백산맥이라는 책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필사를 결심한 뒤에는 중요한 일이 됐다”며 “혼을 다 담아서 작업했다”고밝혔다. 안 씨는 결국 애초 계획보다 3개월여 앞당긴 지난 1월 24일 태백산맥 전 권 필사를 마무리했다. 태백산맥 1, 2권은 대학 노트 4권에 나눠 옮겼고 나머지는 모두 200자 원고지에필사했다. 원고지를 세로로 쌓으면 1m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현재 태백산맥 전 권 필사를 마친 사람은 안 씨를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6명. 이들의 필사 완성 기간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5년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 씨가 이들 가운데 최고령자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빨리 작업을 마친 셈이다. 안 씨는 “노인복지관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놀자고 해도 ‘태백산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집으로 올 정도로 필사가 정말 재미있었다”며 “필사를 끝내니 시원하기도, 서운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필사본은 현재 전남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문학관으로 옮겨졌다. 곧 공개 전시될 예정이다. 교사의 꿈을 안고 서울대 사범대학에 진학했지만 1954년 결혼과 함께 대학을 중퇴한 안 씨는 “뭔가를 쓰는 데 관심이 많아서 필사를 하거나 시를 쓰는 등 손에서 펜을 뗄 수가 없다”며 “젊은 사람들에게도 태백산맥 필사를 추천하고 싶다”고 밝혔다. 안 씨는 오는 30일 태백산맥문학관에서 조정래 작가로부터 직접 감사패를 받는다.
- 2014-03-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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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 ‘어느 60대 신인가수 이야기’ - ‘슈퍼스타K’ 김대성 스테파노(60)
-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 머리가 늘어가네.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커다란 공연장이 기타 하나와 담담한 목소리에 숙연해졌다. 두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관객,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심사위원. 지난 해 M.net ‘슈퍼스타K 시즌5’(이하 슈스케5)의 한 참가자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른 주인공은 김대성 스테파노(60)다. 슈스케5 출연 당시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는 당찬 포부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비록 ‘톱 10’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감동의 무대는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이제는 오디션에 참가자가 아닌 아티스트로서 말이다. 기타 하나로 관객들을 사로잡던 방송에서의 모습은 여전했다. 한 회사의 행사장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기타와 목소리 하나로 관객들을 홀렸다. 사실 슈스케5 오디션 당시만 해도 이렇게 까지 화제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패기로 가득한 젊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음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전했다. 그의 모습이 전파를 탄 후 많은 이들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슈스케5가 끝난 이후 약 두어달 정도 우울증에 시달렸다. 음악이 있어도 외롭고 쓸쓸한 시기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현실에서의 무기력함이 그 원인이었다. “아마 남성 갱년기와 같이 왔던 것 같아요. ‘노래를 얼만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음악이다. 이제는 우울증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는 그다. “생각을 가다듬었어요. 돈에 연연하지 말기로. ‘모든 이들에게 힘을 주는 싱어송 라이터가 되자’라고 생각하고 활동을 시작하자 점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몸이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끊임없는 공부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한다. 슈스케5를 통해 부족하다고 느꼈던 발성과 기타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이다. # 음악에 미쳤던 젊은 날 트로트 가수 출신의 어머니. 스테파노의 어머니도 그가 아티스트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스테파노가 중학생 시절 그의 어머니는 기타 강사를 데려와 기타를 가르칠 정도로 그가 음악가가 되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정말 그렇게 음악을 가르치는 어머니들이 흔치 않았는데 어머니도 정말 대단하시죠. 지금은 그런 어머니가 정말 감사합니다.” 중학교는 기타와 함께 고등학교는 밴드에서 그리고 심지어 군대는 군악대에서 음악을 했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음악에 미쳤던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고 표현했다. 그가 입이 닳도록 말하며 하고 싶어 하는 ‘힘이 되는 음악, 힐링이 되는 음악’은 젊은 시절 길거리 버스킹(길거리공연)을 하면서 느낀 보람 때문이었다. 1984년부터 1999년까지 15년 동안 종로와 영등포 등지를 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했다. 공연을 통해 백혈병 어린이 돕기, 농아인 보청기 달아주기 운동을 하는 등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음악을 지향해왔다. 그는 음악의 매력을 치유라고 얘기한다.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과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음악의 매력이죠. 저도 아침에 일어나서 노래 연습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니까요. 듣는 사람도 똑같겠죠. 그래서 힐링이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 김광석의 선물 김대성 스테파노가 슈스케5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한 젊은 가수 때문이었다. 그가 도전의 불씨에 부채질을 한 가수는 바로 ‘슈퍼스타K 시즌 4’의 우승자 로이킴(22)이다. 포크 음악으로 음악프로그램을 석권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 구석에서 남아있던 젊은 날이 꿈이 꿈틀거렸다고 한다. 막상 오디션 신청을 하고 오디션 장소에 다가서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스펙 좋은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백발이 성성한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내 그런 불안함은 사라졌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입을 떼자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 사이에 나이 많은 사람은 저 뿐이더라고요. 그냥 돌아가려던 찰나에 제 차례가 와서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1차 통과하고 2차와 3차에서 피디와 작가들 그리고 관객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나만의 스토리가 통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심사위원 이하늘과 관객들을 울렸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사실 오디션 과정에서 비중을 크게 둔 노래는 아니었다. 2차 오디션이 끝나고 3차 무대 오디션 직전, 3차에서 부를 노래를 선정하기 위해 피디들과 작가들 앞에 섰다. 총 다섯 곡의 노래를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이 때 피디와 작가들이 숨죽인 때가 있었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를 때였다. 스테파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외에 5곡 정도를 준비했어요. 그 곡들 중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는데 피디와 작가들이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그 때 ‘3차 오디션에서 이 곡을 불러야겠구나’라고 결심했습니다.” 당시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곡이 이제는 그의 이야기를 만들어 준 대표곡이 됐다. 이제는 아침 노래 연습을 할 때 이 노래를 부르며 회상에 잠긴다는 그. 어찌 보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김광석이 그에게 주는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 예순, 그 전성기의 시작점에서 젊은 시절 딥퍼플(Deep Purple)과 레드제플린(Led Zeppelin)과 같은 헤비메탈 락에 빠져있었던 스테파노. 그를 포크의 세계로 빠지게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 (사별한 아내와의 이야기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남녀로맨스’ 카테고리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딥퍼플과 레드제플린에 미쳤었던 청년은 밥 말리, 레오나르드 코헨, 로이킴에 빠져있는 중년으로 변했다. 자유로운 현재의 삶이 지난 30년간의 회사 생활보다 훨씬 좋다는 그다. 아침이면 노래연습을 하고, 기타를 들고 작곡을 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영락없는 아티스트다. 한 달에 1곡정도 온라인에 선보일 예정이라는 스테파노는 지금부터 전성기가 시작됐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음악에서 나이 개념을 없애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덧붙이면서. 예순의 나이에 가수에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도전을 통해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용기를 낸 도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퇴직한 후 용기를 냈어요. 음악에 다시 도전하기로. 그리고 꿈을 높게 잡았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주눅 들지 말자. 그리고 도전하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삶의 새로운 원동력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부터가 제 전성기입니다. 음악이 하고 싶은데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운 친구들을 위한 센터를 짓는다는 제 목표가 이뤄질 때 까지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 2014-03-2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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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불변의 사랑’ 노랗게 노랗게 꽃피웠네…
-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피어난 노란 산수유 꽃이 지리산 자락에서 그 고운 자태를 드러내며 봄 소식을 전하고 있다. 봄의 전령사인 산수유 꽃과 함께 약동하는 새봄의 정취를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있다. 매년 3월 봄 전남에서 열리는 구례 산수유꽃축제다. 매년 산수유 꽃이 필 무렵에는 지리산자락에서 고로쇠 수액 채취도 한창이어서 국ㆍ내외 관광객들이 많이 다녀가곤 한다. 이 축제에서는 산수유 꽃으로 만든 차와 술, 음식 등을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과 체험 행사, 불꽃놀이 등이 펼쳐져 축제를 찾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또 지리산 온천 관광지를 비롯해 주변 유명한 관광 명소에서 휴식을 즐길 수도 있다. 주말을 맞아 가족과 함께 구례 산수유꽃축제로 떠나 봄의 향기를 만끽해 보자. ◇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제15회 구례 산수유꽃축제 전국 산수유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산수유 고장 구례에서 제15회 구례 산수유꽃축제가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오는 22일부터 30일까지 산동면 지리산온천관광지 일원에서 펼쳐진다. ‘영원불변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산수유는 이른 봄에 노란색의 예쁜 꽃망울을 터트리는 다년생 나무로 얼음이 채 녹기 전인 2월 하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초까지 핀다. 우수한 구례 산수유와 청정 구례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른 봄에 개최되는 구례산수유꽃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산수유사랑공원과 산수유문화관을 개장한 지난해의 경우 축제기간을 포함한 산수유 꽃 개화기간에 3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축제장을 방문하는 등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대표 봄꽃 축제로 자리 매김했다. 올해는 산수유꽃축제 상설무대, 산수유 꽃담길, 산수유 수석공원을 새롭게 조성해 더욱 강화된 콘텐츠로 지역민과 관광객의 발길을 머무르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축제 첫날인 22일 오전 10시 전남의 중요 농업유산 제1호로 지정된 산동면 계척마을 시목지에서 열리는 풍년기원제를 시작으로 축제의 성대한 막이 오른다. 주요 축제 프로그램은 지난해에 창극으로 선보인 ‘산수유 내사랑’을 재구성한 마당극을 비롯, 지리산온천수를 이용한 ‘산수유족욕체험’, ‘산수유음식체험’ 등으로 관광객에게 해학적 웃음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할 예정이다. 특히, 지리산권 관광 활성화를 위해 지리산권관광개발조합과 지리산권 7개 시ㆍ군이 추진하는 ‘2014 지리산권 방문의 해’를 맞아 아이돌 K-POP 스타가 참여하는 특별 이벤트를 마련해 관광객들의 흥미를 유발할 계획이며 이 밖에도 ‘산수유 꽃담길 하트랠리’와 ‘전국 어린이ㆍ학생 사생대회’, ‘산수유막걸리체험’ 등 다채로운 체험행사도 마련됐다. 박민순 축제추진위원장은 “국내 최대의 산수유고장에서 산수유 꽃담길을 거닐며, 이른 봄 농촌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도록 알차고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했다”며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친구들과 함께 구례에 오셔서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가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축제와 관련 자세한 사항은 구례산수유꽃축제 홈페이지(http://www.sansuyu.go.kr) 또는 구례군축제추진위원회(061-780-2727)로 문의하면 된다. ◇ 주변 관광지 ▲노고단 운해- 해발 1,507m의 높이로 솟아있는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더불어 지리산 3대 주봉중의 하나로 수많은 봉우리들 중에서도 영봉(靈峰)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특히, 노고단 아래 펼쳐지는 ‘구름 바다’의 절경은 가히 지리산을 지리산답게 만드는 제1경이라 불러도 손색없다. 남쪽으로부터 구름과 안개가 파도처럼 밀려와 노고단을 감싸 안을 때 지리산은 홀연히 아름다운 구름바다의 장관을 이룬다. ▲반야봉낙조- 반야봉낙조 해발 1732m로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은 노고단에서 임걸령으로 뻗어나가는 높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동북방 5.5㎞ 지점 지리산권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산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반야봉에 오르는 기쁨은 낙조(落照)의 장관에서 찾는다. 한낮의 창창하던 햇빛이 그 화려했던 순간들을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깊은 산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인간의 모든 번뇌와 마음, 그리고 악의 감정도 사그러들게 하며 세속에 찌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곳이다. ▲수락폭포- 산동면 소재지인 원촌마을에서 4㎞ 떨어진 수기리에 위치한 수락폭포는 하늘에서 은가루가 쏟아지는 듯한 아름다운 풍치를 자랑한다. 높이 15m의 폭포로 여름철이면 많은 부녀자들이 낙수를 맞으며 더위를 식히는데 신경통, 근육통, 산후통에 효험이 있다 하여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또한, 이 곳은 동편제 판소리의 대가인 국창 송만갑 선생께서 득음하기 위해 수련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섬진강 벗꽃길- 이른 봄 산수유 꽃이 시들어지는 무렵 우리나라 제일의 청정하천인 섬진강변과 어울리는 하얀 벚꽃이 만발한다. 이 때쯤 이 곳에서는 섬진강변 벚꽃축제가 열린다. 이 곳 벚꽃 길은 지난 92년부터 조성돼 곡성에서 하동까지 연결되는 국도 17호선과 19호선을 따라 온통 하얀 벚꽃이 강변을 따라 만발해 있어 봄의 향기를 느끼면서 멋진 드라이브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최적의 마라톤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천년고찰 화엄사-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했으며,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사찰 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해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돼 있다. 예로부터 지리산을 불교문화의 요람이라고 했으며, 그 중심에 화엄사가 있고 천은사와 연곡사가 있다. 노고단, 화엄계곡을 비롯한 뛰어난 자연경관과 불교문화가 어우러져 천년의 고요함이 배어 있는 곳이다. 경기일보 박준상기자 parkjs@kyeonggi.com 자료제공=구례군축제추진위원회
- 2014-03-2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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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 “눈높이를 낮추면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어요”
- “인생이 열 배는 더 재밌어진 것 같아요.” 이춘계 씨는 지금 택시기사다. 하지만 그의 지난 경력은 삼성전관(현 삼성SDI)에서 부장, 삼성SDS에서는 금융개발팀 팀장, 그리고 삼성에서의 마지막 경력을 삼성SDS의 협력사인 화이넥스의 CEO로 현역을 마친 소위 삼성맨, 그것도 아주 뼈가 굵은 삼성맨이었다. 자신이 택시기사임을 밝히는 그의 목소리는 밝고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자신이 하는 일이 재밌다고 말했다. 1953년 생, 서울대 출신 삼성맨, 올해로 예순 두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꾸준하게 쌓아 올린 탄탄한 경력을 가진 이 남자가 택시기사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이춘계 씨는 30년에 걸친 삼성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2009년 1월 1일부터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시간에 쫓기던 생활만 겪다가 한가롭게 시간을 낚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게 되니 너무도 좋았다. 그러나 유유자적도 한 두 달이 지나 3개월이 되니 지루함으로 변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수도 하루 이틀이지…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자” “저는 사범대 물리교육과를 나왔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는 바람에 한 번도 교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교사를 해보자, 싶어서 공부를 했죠. 그런데 교장을 하는 친구에게 ‘내가 기간제 교사로 과학 선생을 할 수 없겠느냐’ 물어봤더니 이 친구가 단칼에 자르는 거예요. 친구는 ‘너가 하는 얘기는 알겠고 인정한다, 그러나 요즘 학교 풍토가 기간제 교사들도 다 젊은 교사들만 뽑는다. 학교의 소비자는 학생이잖느냐. 이 학생들이 나이 든 교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일 없이 집에서 지내던 이 씨. 그러던 어느 날 2009년 5월 1일 오후 9시 KBS뉴스에 시선을 확 끄는 뉴스가 등장했다. 외국인관광택시(International Taxi) 발대식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택시기사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이 년 500만 명에 달하고 그 중 130만 명이 택시를 이용하는데 가장 불편사항이 언어 소통 문제라고 한다. 영어 또는 일어 소통이 가능한 운전자를 선발하여 외국인관광택시를 운행하게 함으로써 언어소통을 원활히 하고 부당요금 과속난폭운전을 근절하여 외국인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제고한다는 취지였다. 택시기사로의 첫걸음, 녹록치 않았다 이 씨는 삼성에서 근무할 때 일본NEC와 교류가 많아 일본어는 어느 정도 가능했기에 딱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외국인관광택시 운전 자격 취득 절차를 물어 보았다. 3개월 이상 영업용 택시 운전 경력이 있어야 하고 서울시에서 위탁한 회사에서 실시하는 영어 또는 일어 구술 시험과 인성 면접에 합격하면 된다고 했다. 2009년 7월 1일, 이 씨는 드디어 6개월간의 백수 생활을 마감하고 택시기사로서의 인생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인사가 잘 안 나왔다. 그래서 매일 운행 시작하기 전 10번쯤 큰 목소리로 구령 조정을 했다. 이 씨는 택시기사가 수입에 비해 근무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걸 인정했다. ‘항상 사고위험을 안고 근무한다(Dangerous). 매주 주야간 교대 근무로 밤과 낮이 바뀌는 생활에 신체가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Difficult). 가끔 술 취한 손님이 주정부리거나 토하거나 하면 대책이 없다(Dirty)’는 점에서 택시기사는 3D 업종이었다. “서울 250여 개 택시회사에서 운영하는 차량대수가 23,000대 정도 됩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택시기사 부족으로 5~10%는 가동을 못하고 있습니다. 근무여건이 이렇게 열악한데 누가 하려고 할까요? 신규로 택시운전자가 100명이 취업을 하면 한 달 이내에 50명이 퇴직하고 3개월까지 다시 25명이 퇴직합니다. 택시기사로 입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택시운전을 계속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지난해 개인택시로 전환하면서 5년째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추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기로 한 결과다. “‘가만히 놀고 있으면 100만 원이 거저 생기나? 150만 원도 황송하다.’ 이 정도로 낮춰야 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저희 집사람도 같은 생각입니다.” “150만 원도 황송하다” 이 씨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된 3D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 즐겁다(Delightful). 택시기사는 상사나 부하 직원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없다. 혼자서 일하기 때문이다. 고객을 만들고 유지시키는데 힘들 일이 없다. 수주 매출 수금이 대부분 한 시간 이내 이루어진다. 보험설계사 같은 경우 한 사람의 고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이 만나야 하고 공을 들여야 하는지 비교해 보라. 만나는 것 차체를 부담스러워하고 다른 약속 있다고 핑계 대는 일이 다반사 아닌가. 두 번째 역동적(Dynamic)이다. 대부분 회사 생활이 사무실내 몇 평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택시기사가 일하는 공간은 서울시 전체 면적 625평방킬로미터이다. 한 밤중에 예술작품과도 같은 찬란한 한강 다리 조명을 바라보며 달리는 올림픽대로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라는 게 이 씨의 설명이었다. 세 번째 자기개발(Developable)이다. 택시에서는 일하면서 외국어 공부가 가능하다. 새벽에 중국어 카세트를 들으며 홍대 앞 삼거리포차에 가면 밤새 술 마시고 집에 가는 대학생이나 젊은 직장인이 탄다. 머리가 허연 택시기사가 중국어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자기는 밤새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노인이 택시로 일을 하며 중국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이제부터 각오를 새로이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일도 있었다. 즐길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얻은 수많은 즐거움들 “월 소득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면 택시기사도 할 만 합니다. 단순 노동이라 골치 아플 일이 없습니다. 건설 노동자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일도 아닙니다. 손님이 내릴 때마다 택시요금 계산을 하니 치매 예방도 됩니다. 여러 곳을 다니며 길을 많이 알게 됩니다. 여러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인생을 배우게 되는 건 덤입니다. 회사택시를 무사고 3년 이상 하게 되면 개인택시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되죠. 개인택시는 이틀을 일하고 하루를 쉽니다.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거죠. 정년도 없습니다. 건강이 허용한다면 80세까지도 할 수 있어요. 나이가 들어도 일이 있는 게 좋은 겁니다.” 요즘 댄스스포츠를 부인과 함께 복지센타에서 배우고 있다는 그는 아내가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 자부했다. “부부는 공동의 취미생활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같이 댄스스포츠를 다니며 취미를 즐기니까, 스킨십과 대화가 잦아지고 눈을 마주치니까 자연스레 서로 더 의지하게 되데요. 부부 금슬 비결은 같이 삶을 즐기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 씨는 선뜻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시니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을 전했다. “100세 시대의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60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은퇴 후 무위도식한다고 하면 너무 시간이 많이 남습니다. 뭔가를 해야 하죠. 그래서 후회하지 않도록 즐기는 일을 하는 게 좋아요. 제가 삼성에 있을 때 일을 좋아는 했지만 즐긴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지금 택시기사 일은 즐기고 있어요.” ‘知者不如好者(지자불여호자) 好者不如樂者(호자불여락자) 아무리 많이 아는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고 아무리 좋아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즐기는 자를 따를 수 없다’라는 논어 옹야편 구절을 직접 써 주면서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야말로 노후를 즐기는 지혜라고 그는 강조했다. 택시기사 이춘계 씨가 20년이 지나면 82세가 된다. 그때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그땐 댄스스포츠를 전파하러 다녀야죠. 또 한편으로는 어릴 적 꿈인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겠죠. 아마도 기업이나 사람들에게 제 인생을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 강사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매력적이지 않나요. 이게 자유로운 인생 3막 아닐까요?”(웃음)
- 2014-03-1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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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각색하는 허세문화…지금, 행복하시나요
- 이 글은 서울보증보험 사보(SGI서울보증 2014년 3-4월호)에 기고한 유종현 SNS칼럼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SNS에 허세 가득한 사진을 올리는 10년차 골드백수 차백수(31세). 늦은 아침 일어나 양푼에 밥을 비벼 먹고 유명 커피숍의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마시면서도 자신의 SNS에는 이렇게 올린다.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 브런치 후 마시는 콜롬비아 원두 핸드드립 커피…"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소주를 마시던 중 다시금 휴대폰을 꺼내든 차백수는,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으로 사진을 찍는다. 곧이어 사진과 함께 SNS에 "양주가 지겨울 때면 난 가끔 소주를 마신다. 안주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은은한 달빛 한 스푼이면 충분해"라는 글을 남겼다. 허세에 찌든 차백수는 비루한 현실을 숨긴 채 자기 자신을 포장하기에 바쁘다. 공원에서 셀카를 찍고는 “그 무엇도 날 구속할 수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는 비스트”라고 덧붙여 SNS에 전송했다. Beast는 영어 철자를 몰라 한글로 고쳐 썼다. 하지만 네버(Never)를 ‘네이버(Naver)’라 올려 끝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배우 김민종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시트콤식 옴니버스 예능 드라마 《백수의 품격》속 장면들이다. 김민종의 허세 가득한 코믹 연기를 보며 마냥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SNS에는 온갖 ‘있는 척’을 다하고 '좋아요'를 받고 싶어 하는 모습과 심리가 어디 차백수뿐이랴. 스마트폰 보급이 늘어나면서 SNS 이용 기회가 많아졌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SNS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장점 때문에 현대인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SNS를 통해 폭넓게,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비록 좋은, 혹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아닐지라도…) 그런데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를 하다보면 ‘이게 정말 내 본모습인가?’하고 놀랄 때가 있다. “착한 나, 정의로운 나, 풍요로운 나,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나, 똑똑한 나…”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그럴듯한 모습, 보여주고 싶은 모습의 ‘나’로 가득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SNS 이용자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싸하게 보이려는 과시욕과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데 SNS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SNS에서는 '내가 누구인가'보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더 집착한다. 결과적으로 SNS는 '진솔한 삶'이 아니라 '가공된 삶'을 보여주는 허세의 공간인 셈이다. SNS에서는 많은 사람, 특히 내 실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허세를 부리거나 가식적인 표현을 쓰기 쉽다. 허세란 무언가? 없으면서 있는 체하고, 텅 비었으면서도 가득 찬 체하며, 좁은 소견을 가졌으면서도 넓은 견문을 지닌 양…말하자면 실속 없이 과장되게 부풀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SNS에선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을 하고 싶어지는 충동도 생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욕을 퍼붓고, 분노하고, 린치를 가하고… 심지어 괴담을 유포하기도 하는데, 누군가 ‘좋아요’나 ‘리트윗’으로 그걸 받아주면 신나서 꽃을 달고 다닌다. 이것 역시 허세의 연장선에 있다. 물론, 어느 정도 허세를 부리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긴 하다. 자기PR시대에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손해라는 인식마저 퍼져있다. 더 나아가 허세가 밉지 않고 심지어 매력으로까지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허세가 지나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 상황이 지속되면 믿을 수 없게 되고 질려버리게 된다. '허세의 바다' SNS에 빠져있다 보면 페친(페이스북 친구)이나 트친(트위터 친구)들이 자신보다 더 풍요롭게, 재미있게, 멋지게, 다양한 경험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또 그렇지 못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비관적, 열등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질 수도 있다. SNS에서 쏟아지는 타인의 멋진 삶과 글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자. 그러다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허세와 자아도취 경쟁에 말려들게 된다. 그거 대부분 ‘화장발’이고 허상이다. 선동꾼이나 허세꾼, 뻥쟁이, 혹은 나와 비슷한 보통사람들이 만든 SNS 허상에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 잘 조절해야 한다. 때때로 SNS에서 한발 물러서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SNS가 허세경쟁에 불을 지핀 측면이 있지만 허세는 어쩌면 인간 본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일본 역사영화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인간의 이중성과 이기심을 다룬 자신의 영화 ‘나생문(羅生門, 일본식 발음은 라쇼몽)'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潤色)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나생문(라쇼몽)은 그러한 인간, 즉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악이다.” 허세는 이기심의 산물인 셈이다. 유달리 남의 눈을 의식하는 한국인의 허세는 남다른 측면이 있다. 명품 옷과 가방, 고가 패딩, 고가 위스키, 고급 자동차 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구매 패턴은 나를 위한 ‘가치소비’를 넘어 허세로 이어진다. 명품 매장은 언제나 붐비고, 가격이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오히려 판매가 급증한다. 비싸면 비쌀수록 더 잘 팔리고 없어서 못 판다. 물론, 부자들이 지갑을 여는 것은 적극 환영할 일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부자가 자기 분수에 맞게 소비한다면 명품이 뭐가 문제인가. 다만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허세를 부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지나친 허세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어떤 이는 허세로 인해 감당 못할 빚을 지고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혼수와 예물 등 과도한 결혼 비용이 사회문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로 인해 마침내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른 부부 이야기도 드물지 않다. 어떤 기사를 보니, 강남의 한 의사는 보증금 6억 원에 1000만 원짜리 월세를 내며 100평 규모의 고급 주상복합에 살고 있다. 속내는 월세 내기도 벅차지만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불가피했다”는 게 그의 변명이다. 허세도 이런 허세가 없다. 우리는 어쩌면 과잉적인 ‘허세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그 속에서 행복감을 맛본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허세를 행복의 도구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허세는 오히려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때가 많다.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허세.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닌 남이니 결국, 남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고 더 애를 쓴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만족하기란 그리 힘 드는 일이 아니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는 허영심 때문에 자기 앞에 있는 진짜 행복을 놓치는 수가 있다." 17세기 프랑스 작가 '라 로슈푸코'가 남긴 말이다. 허세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자.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출발점이다. http://consline.co.kr/4984
- 2014-03-1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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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병호의 독서산책]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
- 사는 일에서 무슨 대박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따금 이런 행복을 맛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은 자신의 분야에서 꾸준히 나아가는 일이다. 이런 꾸준함이 시대와 맞물려 드물게 대박이라 부를 만한 행운이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도 조금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런 가능성에 문을 열어둬야 하지만 우리들 생활의 기초는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나아가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메이슨 커리의 ‘리추얼’은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이라는 부제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주된 소재는 예술가들의 습관이지만 우리 역시 삶과 직업의 현장에서 예술가와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고 자신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나아가게 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난 400년 동안 가장 뛰어난 창조자 161명의 습관목록에는 평범하지만 그 속에 엄청난 힘의 원천이 들어 있다. 저자는 그들의 습관이 지닌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일상의 습관은 하나의 선택 혹은 일련의 선택이다. 습관은 제한된 자원, 예컨대 시간은 물론이고 의지력과 자제력, 낙천적 마음까지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정교하게 조정된 메커니즘일 수 있다.” 200여권의 과학소설과 서적을 저술한 아이작 아시모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과자점을 운용하는 아버지가 평생 동안 새벽 1시에 문을 닫고 아침 6시 문을 열었던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나는 평생 동안 어린 시절처럼 살았다. 지금도 5시에 일어나고, 가능하면 일찍 일을 시작한다. 또 내가 견딜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일한다. 매일 그렇게 한다. 휴일에도 예외가 없다.” 다작으로 유명한 아시모프는 자신의 몸에 이런 시간표가 깊이 새겨져 있다고 고백한다. 노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한다. “나의 행복은 장시간 노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장시간 노동을 달갑게 받아들이며 평생의 원칙으로 삼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미국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로 걸출한 업적을 남긴 트와일라 타프는 습관에 관한 한 대단한 인물이다. 자신의 습관을 체계화한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만의 특별한 의식을 시작하곤 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뉴욕 맨해튼의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연습장으로 가서 2시간 동안 연습에 전념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습관은 택시를 잡아타고 연습장으로 가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라 말한다. “내가 치르는 의식은 바로 택시다.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 내 의식은 끝난다.” 그녀는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그 시간이 되면 그 일을 해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것에 대해 그녀는 “내가 새벽 5시 30분에 택시를 잡아타는 것은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친절하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아침에 택시 타기가 멋진 습관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녀에게 삶은 “반복적 일과들로 가득찬 무기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견실한 몇 가지의 습관은 정신적 에너지를 몸에 밴 반복 행위에 쏟도록 도와주고 감상의 폭정이 끼어들 틈을 차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 2014-03-0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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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5060대 소셜 홍보 전문 코치 길러내며 또 다른 40년 꿈 꿔요”
- 직장생활 20년, 마흔 여섯 나이에 퇴직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 시기. 정은상(61세) 씨는 혼자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배우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걸 이용해 홍보하는 법을 알려주던 것이 계기가 돼 새 직업을 찾게 됐다. 주 타깃층은 주로 예비 퇴직자나 퇴직자였는데, 상당수 직장인들이 은퇴하면 당장 뭘 해야 할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은퇴 이후 삶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됐단다. 이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던 정 씨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멘토링’을 제공했다. “크게 호응하고 고마워하는 중장년층의 메시지를 받고서 이 사람들을 돕는 데서 오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 열기가 오래도록 가시지 않더라고요. 내가 SNS를 이용한 홍보 노하우를 코칭(coaching)하고 그 덕분에 은퇴자들이 집중하고 기뻐하는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준 SNS 평소 SNS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사용, 동영상 및 홈페이지 제작 등 SNS와 관련된 각종 강좌는 죄다 찾아다니며 듣고 배우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줬다. 2년쯤 지나자 그는 스마트폰과 SNS를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전문가’가 됐다. “제 지식과 경험을 주변인, 특히 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퇴직한 이들에게 일대일 코칭하던 일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1인 기업이자 1인 창직의 개념으로 독특한 학교를 구상했죠.” 그는 2011년, SNS를 통해 다양한 홍보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맥아더스쿨’을 세웠다. 콘셉트는 ‘5060세대를 위한 소셜 비즈 코치 멘토링 프로젝트’. 학교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나이가 70세였어요. 그에 비하면 50~60대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죠.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은 더더욱 그렇고요. 이 땅의 모든 5060세대가 용기를 갖고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미로 학교명을 지었습니다.” 맥아더스쿨을 설립하는 데 별다른 비용은 들지 않았다. 오랜 기간 축적된 그의 SNS 지식과 코칭 기술이 기반이 됐다. ◆시니어 소셜 비즈 코치 양성 정 씨는 맥아더스쿨을 통해 중견 및 중소기업, 소상공인, 1인 기업, 시니어 창업, 학원, 갤러리, 음식점, 제과점 등 다양한 분야의 5060세대 시니어 소셜 홍보 전문 코치를 길러내고 있다. 신청자를 받아 지역별로 3~7명 단위의 반을 편성, 주 1회 이상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코칭 대상에게 일대일 멘토링을 진행한다. 코칭 프로그램은 이론보다는 철저한 실습 위주로 진행된다. “멘토가 멘티와 함께 현장을 다니며 어떻게 잠재 고객을 만나 대화하는지, 어떻게 비즈니스 모델을 준비하고 설득해 고객의 요구사항을 효율적으로 반영하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식이에요.” 교육 기간은 6개월이며 초기 3개월은 필수과정에 해당된다. 이 기간에 멘티의 출석률이 80% 이상이면 과정 수료증을 주고, 비즈니스 코칭 실적이 10회 이상 되면 소셜비즈코치 자격증을 부여하고 있다. 처음엔 무료로 할까도 생각했지만 공짜 교육이 배움의 열정과 가치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교육비를 받기로 했다. 다만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돈이 아까워 거르지 않고 수업을 받으러 올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비용을 책정했단다. 정 씨는 “제2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시니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맥아더스쿨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라고 강조했다. 중·장년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갈수록 사업이 확장되면서 개인 코칭뿐 아니라 기업 및 단체와 연계해 프로젝트별 마케팅을 대행하는 일도 하고 있다고. 일대일 코칭이 일주일 평균 3~5회. 이 외에도 비즈니스 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다는 정 씨. 피곤할 법도 한데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이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어 보였다. “만약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 2014-03-07 0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