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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나이 들수록 배우자는 ‘둘’이 필요해
-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아니,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니? 나이 든 부부에게 불 지를 일이 있나? 필자가 강의를 하다가 불쑥 “나이 들수록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대다수 청중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면 “아하, 그렇구나!”라고 하면서 무릎을 친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배우자 둘 중 하나는 남편 또는 아내를 뜻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뭔가를 배우자는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는 가장 좋은 친구 다 아는 유머 한 토막. 나름 오순도순 살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이 여고 동기모임을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여고 친구들을 만나는 부인에게 남편이 멋진 옷도 한 벌 사고 머리도 예쁘게 하고 가라는 등 신경을 썼다. “그래, 다녀오든지~”하면서 시큰둥한 통상의 남편에 비하면 엄청 배려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모임에 다녀온 아내의 표정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남편이 “식당이 마음에 안 들더냐, 몇 명 안 왔더냐, 마음에 안 드는 친구가 있더냐”라고 물었더니 다 아니란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나만 남편이 살아 있잖아~”라고 대답하더란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어서 마음대로 나다니는데 그 부인만 아직도 남편에 매여서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머는 어디까지나 유머일 뿐이다. 영화 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요즘 TV에서 늘어나고 있는 장수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팔순, 구순의 노부부가 아이들처럼, 신혼부부처럼 아웅다웅하면서 재미있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둘이 한날한시에 먼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죽을 때까지 이마와 등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대화 상대, 밥을 함께 먹을 상대, 나들이를 함께 할 상대, 그 상대로 배우자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에서도 배우자는 필수 요건이다. 5F는 돈(Finance), 할 일(Field), 재미(Fun), 건강(Fitness), 친구(Friends)이다. 사실 젊어서는 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직장이나 사회 친구들을 주로 만나며 바쁘답시고 다닌다. 하지만 은퇴하고 나면 하나씩 둘씩 다 떨어져 나가고 남는 친구는 한 손도 다 못 채우기 십상이다. 그러다 마지막까지 함께 할 친구는 결국 가족, 즉 배우자와 자녀, 손자녀들이다. 가족을 뜻하는 영어 ‘FAMILY’가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알파벳인 것도 우연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배우자가 가장 좋은 친구라면 다른 것 다 제치고 성공한 인생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특히 부모와 조부모가 정겹고 애틋한 부부애를 보여준다면 자녀와 손자녀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나의 제1 배우자와 친구처럼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이다. 소일거리를 찾아라 두 번째 배우자 또한 첫 번째 배우자에 못지않게 중요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기대수명이 이미 82세를 넘어서고 있고 지금의 40~50대는 적어도 90세를 넘어까지 살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의 우리 부모님들과는 달리 우리는 은퇴한 후 ‘뭔가 할 일(Field)’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래 살면 오래 일을 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남성을 기준으로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는 53~54세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부터 정년이 60세로 의무화된다고는 하지만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설사 60세에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30~40년을 살아갈 계획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20~30년 이상을 열심히 일하다가 은퇴했으니 실업자는 아니지만 뭔가 할 일이 없다면 실업자 아닌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것이다. 죽치고 앉아서 TV나 보는 게 돈 안쓰고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활기차고 의미있는 소일거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소일거리는 말 그대로 ‘소소한 할 일거리’로 꼭 상당한 소득을 얻거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내가 의미를 찾으면 그게 곧 좋은 소일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추천하는 것이 ‘뭔가를 배우자’이다. 나이를 들어 배운다는 것은 학창시절에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배우는 일이라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만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의 적절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하지 않는가. 배우고, 익히고… 새출발을 취미활동도 배워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댄스와 악기 등과 같이 서로 맞대야 가능한 배움은 처음부터 친구들을 사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요즘엔 온라인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옮겨가는 모임도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으로만 주고받던 정보와 모임이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댈 경우 사람 사는 즐거움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 6만 곳이 넘는 노인 여가복지시설과 노인대학 등이 늘어나면서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가까운 곳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고 있다. 오죽하면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좀 더 체계적인 배움을 원한다면 방송통신대학이나 사이버대학에 정식으로 등록할 수도 있다. 2013년 상반기 기준으로 대학 학점인정과정에 등록한 60세 이상 학생 수가 2만3000여명에 달하고 있다. 특히 방송통신대학에만 60세 이상 학생이 3000명을 넘고 있다. 1972년 방송통신대학 개교 이후 240만 명의 입학생 중 최고령자는 2013년 2학기 일문과 3학년에 편입한 정한택씨로 당시 92세였다. 방송통신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은 35만원 안팎으로 큰 부담이 없는데다 도서관 등 시설이 좋아 이를 이용하는 어르신 학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분은 중국어과와 일본어과를 찍고 프랑스어과에 다니고 있다. 졸업기념으로 부부가 중국과 일본 여행을 했으니 프랑스어과를 졸업하면 유럽 여행을 할 계획이란다. 학점을 따고 졸업을 하는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기념으로 해외여행까지 한다니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를 완벽하게 갖춘 멋진 인생이 아닌가.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가수 서유석의 노래 ‘너는 늙어 봤냐 나는 젊어봤다’의 가사로 끝을 맺자.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뭐라 해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 말도 배우고 중국 말도 배우고 아랍 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 볼 거야. 너~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출발이다.”
- 2016-05-0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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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인상학]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1000원권 지폐가 된 사연
-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08@naver.com 1975년 8월 발행된 1000원권의 인물은 조선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의 대가로 영남학파를 형성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다. 영남학파는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유파로, 조선 중기에 영남좌도에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思辯的)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성군을 바라는 지어 올려 또한 이황은 살아 있을 때부터 유종(儒宗 :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으로 불렸다. 그동안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주자학(朱子學)을 단순하게 받아들여 실천하는 데 불과했으나, 이황은 사상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주희(朱熹)에 버금가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황은 이로 인하여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고, 영남학파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황은 시와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벼슬보다는 학문 탐구를 더 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정치 성향은 전반적으로 왕권을 중시하고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군주의 자리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으로 온갖 욕심을 부리고 조금이라도 직무에 태만하고 소홀히 한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온다. 그것은 곧 백성에게 화(禍)가 미칠 것이라는 마음에 이황은 선조를 위해 를 지어 올렸다. 자신이 보필하지 못하더라도 학문을 열심히 하고 늘 경계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어 성군이 될 것을 주청(奏請)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병풍으로 만들어져 지금도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진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관리) 1000원권 지폐가 처음으로 나온 해인 1975년은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2월12일)가 실시된 해였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에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는 물론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명목 아래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성된 비상 국무회의는 즉각 헌법개정안을 제출, 의결하였으며 이를 국민투표에 부쳤던 것이다. 아이러니라 할 수 있지만 퇴계 이황이 성군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던 선조 시대, 사림들의 극심한 대립으로부터 당파가 생겨났다. 동인 서인으로 나누어진 동기는 이조전랑(정5품), 좌랑(정6품)의 벼슬자리가 원인이 되었는데 그때 서울 동쪽에 살면 동인, 서쪽에 살면 서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황이 지폐의 인물이 된 이유는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이라서라는 말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성군을 바라는 이황의 마음을 간절하게 담아 임금을 교육하고자 하는 의지력과, 매화를 사랑하는 섬세함, 손주를 아끼는 인간적인 마음 등이 부러웠을 것이다. 사람의 향기와 굳은 절개를 두루 갖춘 그의 모습을 닮은 협조자를 휘하에 두고 싶은 간절함을 담았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약해 보이는 초상화 실제와 다른 듯 이황의 초상은 세종대왕이나 율곡의 모습에 비해 몹시 여위고 말라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이 많았고, 성품이 깔끔했다는 고증을 반영하여 1974년 이유태 화백이 그린 상상화로 당시에 논란이 많았다. 2007년에 발행된 1000원권에서도 인물 초상은 이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앞뒷면에 초상을 동시 반영해 파격적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1000원권의 이황 초상을 접할 때마다 과연 이분이 그 많은 저서를 남겼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신 인물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큰 인물의 초상을 그릴 때는 많은 고증을 통해 그의 성품을 먼저 파악하여야 한다. 진성(眞城)이씨 대종회에서 발간한 제20호, 2005년판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선생은 평소 “털 하나라도 틀리면 나의 진면목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하신 바 있으며, 진영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로는 잡기19칙 제1에 ‘선생, 안각풍광(顔角豊廣) 송재기애지(松齋奇愛之) 상호왈(常呼曰), 광상(廣?),이불명언(而不名焉)’ (이안도(李安道) 선생 , 퇴계선생언행록에서)이다. 해석하자면 “선생은 이마가 모가 나고 풍성하여 송재께서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평상시에 부르기를 廣?(넓은 이마)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내용이 전하는 바도 있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의지력으로 퇴계는 300여년을 성리학의 대가로 인정받으며 우리 시대를 이끌어 가는 큰 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에서도 성리학을 완성 한 큰 인물로 존경 받고있다. 유럽에서도 퇴계 연구가 왕성한 것을 보면 초상화 속 인물보다는 턱이 넓고 단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우리는 퇴계 이황이 완성한 성리학을 예(禮)의 근본으로 삼아 바르고 밝고 어질게 살아가려고 한다. 인상학자의 작은 바람이지만 우리의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제대로 고증, 복원해 훌륭한 인물을 정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 2016-04-2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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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혜걸 비온뒤 칼럼] C형 간염, 당신도 위험할 수 있다
-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동네의원에서 수액 주사를 맞았던 환자들에게 C형 간염이 집단 발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숫자만 67명입니다. 주사기를 돌려쓴 것이 결정적 원인입니다. 원장과 원장부인도 감염됐고, 원장은 거동이 불편한 뇌병변장애인이란 소식도 들려옵니다. 면허갱신 등 의사 재교육 필요성이 대두되고 미필적 고의에 대한 형사처벌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장에 대한 정신감정도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혹은 인격장애 수준의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비상식적인 의료행위를 수년 동안 버젓이 자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이 다수의 선량한 동네의원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당한 환자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입니다. 알다시피 C형 간염은 죽을 수 있는 병입니다. 치료제가 있다 하나 완치가 쉽지 않고 만성 간염과 간 병변, 간암으로 악화합니다. 불행한 소식은 갈수록 환자가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C형 간염 신규환자가 2002년 1927명에서 2010년 5630명으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B형 간염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2012년을 기점으로 C형 간염이 앞지르고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지역적 편차입니다. 2015년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 기모란 교수팀이 건강보험공단 유병률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적으로 광역단체로는 부산, 기초단체로는 전남 진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전국 평균보다 부산은 2배, 진도는 5배나 높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해마다 수천 명씩 누군가 몹시 황당하고 억울한 과정을 통해 C형 간염에 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고리는 단연 혈액입니다. C형 간염은 술잔이나 키스, 가벼운 성생활 등 일상적 접촉으론 거의 옮기지 않습니다. 타액이나 정액보다 혈액을 통해 주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로든 다른 사람의 혈액이 나의 혈액과 섞이는 상황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것은 에이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지 사례별로 알아봅니다. 주사기 주사기는 그냥 한 번 찔리기만 해도 걸릴 수 있습니다. 감염자를 찌른 주사기에 의료인이 사고로 찔린 경우 대략 1~3%에서 감염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의 양입니다. 감염자의 혈액이 많이 들어갈수록 확률이 증가합니다. 단순히 바늘에 찔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처럼 수액을 통해 역류한 피가 섞여 들어갈 경우 확률이 수십 배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번 경우는 예외지만 주사기는 대부분 병원 밖에서의 사용이 문제입니다. 마약 등 약물 중독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부산에서 C형 간염 환자가 많은 것도 국제 항구란 지역의 특성상 마약 사용자 비율이 높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사기는 일회용을 써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B형 간염 환자가 국민병이라 불릴 정도로 창궐했던 이유도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전염병 단체 접종을 하던 과정에서 지금처럼 일회용이 아닌 주사기로 수백 명을 찔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침과 문신 침을 맞거나 피어싱 혹은 문신을 새길 때 반드시 바늘 등 시술 도구가 제대로 소독된 것이지 확인해야 합니다. 까다롭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환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부분 일회용을 쓰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른 사람을 찔렀던 도구를 나에게 찌르려 하는 경우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전남 진도에서 C형 간염이 전국 평균 5배나 많았다는 사실은 이들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허술하게 침과 문신 시술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문신의 경우 도구만 소독해선 안 됩니다. 바르는 문신용 염색약에 바이러스가 묻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바늘이나 침 등 도구를 일회용이나 소독된 것으로 사용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염색약도 일회용으로 조금씩 덜어서 사용하는 게 옳습니다. 이 부분은 보건당국이 좀 더 철저하게 감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면도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대부분 안전합니다. 그런데 간혹 실수로 피부에 생채기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가 아주 위험합니다. 피부에 스며든 혈액이 면도날에 묻게 되는데 만일 이를 제대로 소독하지 않고 다음 손님에게 면도하다 또 생채기가 나면 감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달아 실수로 생채기를 낸다는 게 확률적으로 드물지만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 경우든 이발소의 면도기도 다른 손님에게 사용하기 전 철저하게 소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접촉 일상적 성접촉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는 배우자 중 한 명이 C형 간염이라도 다른 배우자가 콘돔을 써야 한다고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접촉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얌전한 성접촉은 괜찮습니다. 에이즈와 달리 정액이나 질액으로 옮길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그리고 다소 격렬한 성접촉 시 성기 점막의 상처를 통해 혈액이 묻어나올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실제 캐나다 보건성의 조사결과 20년 이상 부부생활을 할 경우 2.5%의 확률로 배우자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가능하면 콘돔을 착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섹스 파트너가 많다거나 항문성교 등 비전형적 성행위를 즐기는 경우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이 경우 콘돔 착용은 필수입니다. 특히 여성이 생리 중인 경우 성접촉은 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안전합니다. 칫솔과 손톱깎이 감염자가 사용하는 칫솔과 손톱깎이를 같이 사용하면 안됩니다. 특히 잇몸 질환으로 구강 출혈이 있는 경우라면 칫솔로 인한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손톱깎이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톱을 깎는 과정에서 생긴 피부의 상처를 통해 소량의 혈액이 묻어날 수 있습니다. C형 간염의 잠복기는 6주에서 9주로 보고 있습니다. 대개 C형 간염은 초기 증상이 없어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에게 피로와 입맛 떨어짐, 구역과 구토, 근육통과 미열,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피부와 눈이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 생긴다면 바로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C형 간염 진단이 내려지면 나에게 6주에서 9주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따져보기 바랍니다. 증세가 늦게 나타나 진단이 뒤늦게 내려질 수도 있으므로 수개월 전까지 기억을 더듬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주사기가 되었건 침이나 문신이 되었건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게 다른 사람의 혈액이 섞여 들어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절한 배상 등 개인적 억울함을 풀 수 있고 무자격이든 비양심이든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C형 간염을 확산시키는 주범들을 색출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016-04-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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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산책]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도망시(悼亡詩)
- 유교의 영향을 받아 온 중국에서는 사대부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는 것을 지난호에서 도연명의 ‘한정부’를 예로 설명 드렸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경우, 그 슬픔을 표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아내 를 잃은 애절함을 노래하는 시를 ‘도망시(悼亡詩)’라 부른다. 중국 최 초의 ‘도망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미남으로 꼽히는 서진(西晉)시대 대문장가인 반악(潘岳)이다. 그는 미남에다가 좋은 가문 출신에, 당대 최고의 문장까지 갖춰서, 재모쌍전(才貌雙全)으로 불리었는데, 권문세가였던 서진(西晉)의 외척 양씨(楊氏)집안과 혼인을 하였다. 금실도 좋았지만 하늘이 시 기해서인지 그만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니, 그 애절 한 슬픔을 노래한 시가 바로 ‘도망시’ 3수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 힌다. 그 이후로는 아내를 잃은 슬픔은 이를 본떠서 ‘도망’, 벗을 잃은 슬픔 은 ‘도붕(悼朋)’등으로 불리게 되는데, 지면관계상 반악의 도망시를 소개하는 대신, 도망시라면 빼 놓을 수 없는 다른 글을 하나 대신 소 개하기로 하자. 바로 우리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명필인 추사(秋史) 의 도망시이다.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 즉 '귀양 중에 아내의 상 을 당하여'란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기막힌 얘기 가 숨겨져 있다. 추사는 제주도에 귀양간 지 3년째 되는 해(57세) 섣달 14일, 30여 년 을 동고동락해 오던 부인 이씨(李氏)가, 그 전달인 동짓달 13일에 별 세했다는 부음을 접한다. 금실이 좋았던 추사는 귀양 중에도 자주 부인에게 편지를 썼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부인이 죽은 지 7일 이후에 보냈고, 그 전 편지는 부인이 죽던 날 보 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몇 천리 밖에서, 사랑하던 부인이 중병으로 신고(辛苦) 끝에 숨을 거둔 것도 모르고 편지를 썼다는 것을 생각하 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추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절절한 심정을 표현한 시를 지었다. 那將月老訟冥司(나장월노송명사) 어찌하면 저승의 월하(月下)노인에 게 빌어서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다음 세상에는 서로가 바꿔 태어나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천리 밖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게 하 리오. 한편, 벗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도붕시(悼朋詩)’로는 조선 중기의 문인 이었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선생이 친구인 석주(石洲) 권필(權?)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가 가장 애절하다. 不恨吾生晩(불한오생만) 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只恨吾有眼(지한오유안) 다만 내게 눈이 있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네 無復見斯人(무부견사인) 다시는 (이 눈으로) 이 친구 보지 못하리니 危途涕空?(위도체공산) 험한 인생길, 부질없는 눈물만 흐를 뿐이네. 不恨吾生晩(불한오생만) 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只恨吾有耳(지한오유이) 다만 내게 귀가 있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네 萬山風雨時(만산풍우시) 온 산에 비바람 몰아칠 때 聞着詩翁死(문착시옹사) 그 친구 죽었다는 소리 내 귀에 들리니까.
- 2016-04-2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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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라벤더 향기 진동하는 달마티아의 섬 ‘흐바르’
- 크로아티아 흐바르(Hvar)는 유명 여행전문잡지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섬’으로 자주 손꼽힐 이유가 충분하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자주 찾았던 곳이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과 일반인의 여행 시각이 뭐가 다를까? 그저 살아생전 찾아가봐야 할 섬이 흐바르다. 이 섬의 아름다움은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해 낼 수 없다. 진한 라벤더 향기 머금은 스타리 그라드의 골목길 스플리트에서 배를 타고 2시간 거리. 여객선은 200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Stari Grad) 섬으로 다가선다. 한눈에도 볼 수 있는 작은 섬이 눈 앞으로 스르르 다가선다. 선착장에 멈춘 거대한 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하선한 관광객과 다시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가려는 인파로 복잡한 선착장 주변에 라벤더 향기를 가득 담은 난전 두어 개가 펼쳐져 있다. 라벤더의 강한 향기가 코 끝을 ‘훅’ 자극한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 파는 곳으로 다가간다. 햇살 좋은 섬에서 자란 과일 주스는 맛이 참 좋다. 피자 한쪽을 사서 미처 먹지 못한 ‘아점’도 먹는다. 그러는 사이 북적대던 사람들은 섬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돌아갈 배편을 미리 구입하고 천천히 섬 안으로 발을 옮긴다. 해안 길(riva)을 피해 일부러 민가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선다. 해묵은 느낌이 가득한 골목길엔 치즈 빛 담 벽과 반질반질한 돌이 이어진다. 골목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좁은 골목길에서 앙증맞은 숍, 여행사, 호스텔 등의 간판들을 만난다. 강한 향내를 풍기며 유혹하는 라벤더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게는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금발 생머리의 날씬한 판매원을 닮은 듯 예쁘고 현혹적이다. 라벤더 오일, 건제품들은 예뻐서 꼭 사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흐바르에 라벤더 가게가 많은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섬은 ‘라벤더 섬’으로 불릴 만큼 라벤더 재배가 성행한다. 5월이면 온 섬은 라벤더 꽃과 향이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수녀가 만드는 알로에 레이스와 하니발 루치치 동상 골목길에서 11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을 만난다. 그저 유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수도원이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이 수도원은 ‘알로에 레이스(Aloe Lacemaking Skill)’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로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고 건물에는 레이스 그림을 새긴 팻말이 있다. 유럽 마을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스 공예지만 흐바르는 색다르다. 크로아티아에는 3가지 서로 다른 레이스 공예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파그(Pag) 마을에서 전하는 ‘니들포인트 레이스 공예(Needle Point Lacemaking Skill)’, 크로아티아 북부의 레포글라바(Lepoglava)에 전하는 ‘보빈 레이스 공예(Bobbin Lacemaking Skill)’, 그리고 달마티아(Dalamatia) 연안의 흐바르 섬에서 전승되는 ‘알로에 레이스 공예(Aloe Lacemaking Skill)’다. ‘알로에 레이스’는 흐바르에 거주하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수녀들만 만든다. 생 알로에 잎의 심에서 나오는 얇은 흰색 실을 이용해 보드지 뒤에서 망이나 다른 패턴을 짠다. 이렇게 완성된 레이스 작품은 흐바르 지방을 상징한다. 이 수도원 앞에는 르네상스기의 위대한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Hanibal Lucic)의 동상이 있다. 15~16세기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1485~1553)는 ‘로비냐’ 라는 서사시를 썼다. 멀지 않은 곳에 르네상스의 시인 페타르 헤크토로비치(Petar Hektorovi?, 1487~1572)의 요새와 트브르달리(Tvrdalj) 성의 안내 팻말이 붙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그는 어부의 노래를 수집했고, 기행담 등을 친구와 서신으로 대화를 즐겼다. 그가 기록한 해상 및 동물원 용어들은 크로아티아어 표준 언어에 통합되었다. 요새와 성은 직접 설계했는데 현재는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스타리 그라드 랜드마크 스테판 광장엔 그리스 흔적이 골목을 비껴나면 흐바르 타운의 중심지인 넓은 스테판 광장이 얼굴을 내민다. ‘U’자 모양의 항구가 있는 이 광장에는 성 스테판(St. Stephen's) 대성당이 있고 1612년에 지어진 유럽 최초의 시민극장 등 유적지가 몰려 있다. 한눈에 봐도 스타리 그라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에선 어김없이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성업 중이다. 이 광장은 흐바르에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아드리아 해안 달마티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스타리 그라드에 처음 사람이 정착한 때는 그리스 시대다. 그리스가 아드리아해까지 영역을 확장한 시기는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의 독재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재위 BC 405~BC 367)때부터다. 그는 384년, 일리리아인의 도움으로 비스(Vis) 섬을 정복해 첫 번째 식민지를 세웠다. 10년 뒤, 디오니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에게해의 파로스 섬 거주민들이 섬을 정복해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남은 요새, 고대 석담, 건물 골조, 돌로 만든 작은 대피소 등이 그리스 시대의 흔적들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토지 구획 체계인 ‘코라(chora)’는 24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BC 4세기 중반, 시라쿠사 제국이 몰락했고 BC 5~BC 6세기 경 일리리아인의 독립 공국이 되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요새를 재사용하고, 여기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번성했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왕이 되어 통치하면서 권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 의해 식민지화한다. 그때 파리아(Pharia, Faria)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통치 기간에는 자치도시(municipium)의 지위를 획득했다. 몇몇 로마식 무덤이 만들어지고, 물탱크가 축조되기도 했다. 파리아는 그리스 시대보다는 좀 더 작은 경계로 다시 요새화했다. 이후 12세기에는 기독교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었고, 13세기 중반부터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당해 1797년까지 정치적인 통제를 당했다. 베네치아 왕국 시대(14~16세기) 때 교통, 군사상 요지로서 번영했다. 15세기부터 교역 중심지 항구로서의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당시의 지역명은 캄포 산 스테파니(Campo San Stephani)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말,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만드는 필록세라(phylloxera) 병이 돌면서 이 섬의 경제는 흔들거렸다. 많은 농부들이 농지를 포기했고 20세기에는 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도를 경작하던 남부 마을들은 부분적으로 사라지고, 토지와 도로 대장 체계도 관리 부족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에는 새로운 위협에 맞닥뜨렸다. 집단농장과 농업의 기계화가 그 원인. 그래도 지금은 다시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조금씩 떠난 농부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흐바르 요새는 천국의 자리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의 백미는 흐바르 요새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다. 스페인 요새, 베네치아 요새(Spanjola Fortica, Spanol Fortress)라고 불린다. 스테판 광장에서 북쪽의 산 언덕으로 오르면 된다. 오르는 길목의 모습은 타운과 엇비슷한 골목이다. 돌길을 따라 이어진 주변 화단에는 알로에와 사보텐 선인장이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10여분 걸음 끝에 만나는 요새는 중세 때, 오스만 투르크 족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새 안 박물관에는 부서진 유적들이 있지만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대신 앞이 환하게 트인 성벽에서 바라보는 발밑 풍경에 넋이 빠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치를 누군들 반하지 않겠는가? 흐바르 타운과 쪽빛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조망하면서 위치를 가늠해 본다. 흐바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브라치(Bra?)섬과, 비스(Vis) 해협을 사이에 두고 비스와, 코르출라(Kor?ul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르출라와, 네레트바(Neretva)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펠제샤츠(Pelje?ac)섬과 마주 보고 있다. 풍광만으로 흐바르 사랑이 가슴 속 깊숙히 채워지는 곳. 더 이상 말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를 때 무겁던 발걸음은 몇십 배 가벼워져 하산한다. 다시 선착장을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물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쪽빛 바다에는 물놀이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생선 굽는 냄새에 코끝을 킁킁대며 굴 전문 식당, 와인숍을 한가하게 기웃거리다가 만난 프란체스코(Franciscan) 수도원. 15세기에 코르출라 출신의 유명 석공 가문이 건설했다고 한다. 바다를 정원 삼은 작은 수도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포인트를 주고 있다. 수도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는데, 특히 마테오 이그놀리의 ‘최후의 만찬’ 등이 눈여겨 볼 그림들이다. 겨우 하루였지만 흐바르의 눈 시리게 아름다운 풍광과 코끝을 파고드는 라벤더 향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 선연하게 박혀 있다. TRAVEL TIP! 항공편 크로아티아로 바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일단 유럽의 주요 도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루블라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의 국제선을 이용해 자그레브 공항으로 갈 수 있다. 근교 도시에서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필자는 슬로베니아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배편 스플리트에서 페리를 이용하면 된다. 페리는 스플리트 항구, 타운 버스 터미널 맞은편에서 일반 페리가 매일 3회 출발한다. 쾌속선은 1시간 5분 정도 소요되지만 보편적으로 2시간 정도 예상하면 된다. 단 시기에 따라서 페리 스케줄이 다를 수 있다. 정확한 스케줄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날씨에 따라 출발이 결정되므로 여유있게 여행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여행시기 라벤더가 피어나는 5월과 6월 가장 아름답고 한가롭다. 여름 피서철에는 사람이 많아져서 배편, 숙박 이용하기가 불편해진다. 와인 크로아티아의 2대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남쪽은 적포도주, 스타리 그라드와 젤사 사이 중앙 평원은 백포도주 산지다. 먹거리 해물 스파게티와 신선한 새우요리, 그릴에 구운 생선구이 등 바닷가라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 바닷가 옆이나 스테판 광장 쪽에 식당이 많으며 아시안 음식점도 있다. 또 골목 속에 박혀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나 선술집(konoer)들도 많다. 특산물 흐바르는 라벤더의 섬이다. 난전은 물론 골목에 가게들이 있다. 화폐 쿠나(HRK) 전압 220V, 50Hz(공통) 크로아티아 추천 여행 코스 수도 자그레브를 시작해서 플리트비체-시베니크-자다르-트로기르-스플리트-흐바르-두브로브니크 순으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여행 유의점 크로아티아는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위란다.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짐 값은 당연히 받고 택시기사의 바가지 상흔도 아주 흔하다. 국내 여행사 상품이 여러 군데 나와 있으니 패키지를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4-1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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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한국 농구 ‘슈터의 전설’ 신동파
-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쓴이는 초등학교 시절,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스포츠 기자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정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시골 중에 서도 시골인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경기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 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는 해마다 단골로 듣는 대회였다. 그 무렵 일본의 릿쿄대학교와 야하다제철, 미국의 빅토리농구단 등이 한국에 와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특정 대학교는 연전연승이었다. 일본팀들을 물리칠 때 시골 아이의 가슴은 벅차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동파(申東坡)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고 10여년 뒤 특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봄에 열린 농구 OB전에서 신동파가 뛰는 경기를 라디오 중계가 아닌, 실제 경기로 보게 된다. 일본팀은 물론 국내 실업팀들을 손쉽게 물리친, 특정 대학교는 연세대이며 당시 멤버는 김영일 방열 김인건 하의건 신동파 등이었다. 1990년대 중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이 2세대 ‘독수리 오형제’라면 이들은 1세대 ‘독수리 오형제’라고 할 수 있고 중심 인물이 신동파였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데뷔하기 전까지 아시아 남자 농구의 절대 강자는 필리핀이었다. 1951년 제1회 뉴델리 대회부터 1962년 자카르타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서 4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0년 마닐라에서 제1회 대회를 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1973년 마닐라 대회까지 7차례 대회에서 4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이 사이 아시안게임에서는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1969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반 아시아 지역 스포츠 단체인 AGF(아시아경기연맹)가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밀려나 이제는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필리핀이었기에 196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홈 코트의 한국을 83-80으로 꺾는 등 9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절대 강자 필리핀이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86-95로 지고, 일본에도 77-78로 져 3위에 그친 건 필리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이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최근 아시아 남자 농구 판도에서 그나마 명함을 내밀고 있는 1950~60년대 강자는 필리핀뿐이다. 필리핀은 2013년 마닐라 대회와 2015년 중국 창사(長沙) 대회에서 잇따라 준우승했다. 한국은 두 대회에서 3위와 6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2002년 부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 우승, 2010년 광저우(廣州) 대회 준우승 등 아시안게임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경우 중국은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하고 201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위 필리핀은 6월에 열리는 세계 예선에 참가한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필리핀이 농구에서 아시아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필리핀이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진 건 충격을 넘어 ‘사건’이었다. 1969년 11월 29일 밤 TV 앞에 모여 있던 필리핀 농구 팬들은 던지는 대로 쏙쏙 들어가는 한국의 한 슈터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일부 매체에는 한국-필리핀의 이 경기가 결승전으로 소개돼 있는데 이 대회는 9개 나라가 돌려 붙기를 했기 때문에 결승전이 없고 대회 마지막 날 7승의 한국과 6승1패의 필리핀이 맞붙은 경기여서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장년 팬들은 아마도 이날 신동파의 슛이 100%의 성공률을 보인 것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개인 득점 50점, 한국이 기록한 95점의 절반 이상이 신동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신동파는 슛 거리가 꽤 길었기 때문에 그때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그의 득점은 70점대 이상이었을 것이고 한국의 팀 득점은 세 자릿수였을 수 있다. 이 경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돼 신동파는 1970년대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필리핀에서는 어떤 일이 잘되면 ‘sindongpa’, 잘 안되면 ‘no sindongpa’란 말이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동파의 신들린 듯한 슛을 막기 위해 악착같이 수비하던 필리핀 선수 3명이 5반칙으로 물러났다. 경기 막판에는 포워드인 신동파를 센터가 수비하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골 밑에 있어야 할 센터가 외곽으로 나오니 한국의 공격은 그만큼 수월해질 수밖에. 1960년대 초반 장충체육관을 지을 때 기술 지원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한국은 이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했지만 필리핀에서는 TV로 생중계됐다. 대회가 끝난 뒤 필리핀에서는 한국-필리핀 경기가 수십 번이나 재방송됐고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가 됐다. 신동파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 가게들이 줄을 지어 생겼다는, 조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1970년대 필리핀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신동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7관왕 마크 스피츠와 프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 등에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신동파의 소속 팀인 기업은행은 1970년부터 그가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필리핀 초청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8차례의 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0점이 넘게 넣었고 최고 54점까지 기록했다. 필리핀 관중은 자국 선수의 파울로 신동파가 쓰러지면 필리핀 벤치를 향해 종이 뭉치와 부채 등을 던졌다. 필리핀에서 신동파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신동파가 PBA(필리핀농구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관전하러 가면 하프타임에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의 전설이 왔다”라고 소개하고 1만 여 관중은 기립 박수를 친다고 한다. 신동파는 이후 한국 남자 농구 역사에 새로운 일들을 계속 남기게 된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해 13개국 가운데 11위를 기록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다. 한국보다 키가 훨씬 큰 캐나다를 조별 리그에서 97-88로 잡았고 순위 결정전에서는 호주를 92-79로 꺾는 등 대회 전체 성적이 4승4패였다. 준우승국인 브라질과 조별 리그에서 겨뤄 77-82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회 부문별 기록을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득점자 순위다. 신동파는 8경기에서 평균 32.6점을 넣어 파나마의 데이비스 페랄타(20.0점),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리 지데크(19.3점)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슈팅 성공률이 80.4%였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던지는 대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해 12월 방콕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신동파를 앞세워 조별 리그에서 필리핀을 77-75로 다시 한 번 잡았다.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졌으나 전 대회 우승국인 이스라엘을 81-67로 제치고 축구와 함께 동반 금메달을 획득하는 ‘역사’를 완성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과 1승1패를 기록한 필리핀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에 64-75로 지는 등 2승3패로 부진해 5위에 그쳤다. 신동파는 김영기로부터 시작해 이충희 문경은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남자 농구 슈터 계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수리 5형제’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뒤 한반도에서 체육활동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인기가 많은 축구의 대회 개최를 통제하려 하기도 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1940년대 초반에는 조선체육회를 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통합해 스포츠 주권마저 빼앗았다. 또 하나 일제는 조선인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최대한 억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경우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은 워낙 선발전 성적이 좋아 뽑지 않을 수 없었지만 축구의 경우 경성축구단이 1935년 6월 열린 베를린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전을 겸한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 벌어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쯤 되는 대회) 축구 종목 일반부에서도 정상에 올랐지만 정작 올림픽 대표팀에는 한반도에서 김용식 선생, 단 한 명만 뽑았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기본인데도 이런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김용식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의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의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도 김용식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농구는 좀 달랐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을 선발했다. 농구 엔트리 12명 중 4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학교(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연장 접전 끝에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40년 1월 대회에서 도쿄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종목은 마라톤과 축구만이 아니었다. 농구도 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4-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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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색도 언어입니다
-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학교 뒷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진달래와 산수유가 몽우리를 터트렸습니다. 주위 동산뿐 아니라 무겁고 건조한 시멘트 건물마저도 환하게 밝혀줍니다. 무게 없는 분홍색이 땅 위를 떠다니며 곳곳에 봄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물론 자세히 보면 뿌리에 연이은 가지가 있고 다시 더 가는 가지에 꽃이 피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멀리 떨어져 보면 색만 보입니다. 이것을 사진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사진은 다른 시각예술처럼 사람의 손으로 이미지를 일일이 그려나가지 않고, 카메라라는 어둠상자에 빛으로 상을 맺히게 하고 그것을 화학적이나 전자적 방법으로 정착시켜 서로 나누는 예술입니다. 그 빛을 인정하고 나눌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진의 좋은 점을 많이 알게 됩니다. 우리 맨눈에 잘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는 것을 사진기에 담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과정을 통해 미묘하게 숨어 있는 빛과 다양한 색의 변화를 나름 이해하게 됩니다. 빛의 반응에 따라 사진 속 이야기와 색의 변화는 얼마든지 바뀌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는 그중 조리개 값의 변형으로 색의 공중부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만물의 겉모양만 보게 됩니다. 물론 사물을 뚫고 적절한 두께를 선택해 볼 수 있는 엑스레이(x-ray) 같은 사진기구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색이기도 하고 질감인 그 겉모양만으로 사물의 진위와 그 속을 유추해 냅니다. 질감과 색은 엄밀히 구분하면 일종의 포장입니다. 아주 섬세하고 얇은 겉껍질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수채화를 많이 그린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색은 사물에 입혀진 얇고 아름다운 포장이다, 그것은 가장 감각적인 피부이다. 그것은 섬세하고 완벽하기까지 하다. 사물들은 색채 가운데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그림만 그린 폴 세잔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색은 인간의 두뇌와 우주가 만나는 구체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빛은 모든 색을 만나고 전달해 줄 수 있는 대단한 그 무엇임이 20세기 21세기를 거치며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과학이 이젠 빛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빛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빛을 응용하는 많은 첨단 결과물들을 하루가 다르게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정작 빛의 본질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색도 그렇습니다. 우선 빛이 물질인지 아닌지 그 경계를 정하기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내가 만난 많은 빛은 그 색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보고자 하는 빛이 무슨 색인지 그려보면 알게 됩니다. 빛은 자신의 색을 보여 달라는 세상에게 조건을 붙입니다. 너그러운 사랑의 시선으로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늘에도 색은 존재합니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런 빛을 경험한 사람은 그늘 어느 곳에서든 색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사진을 하며, 수많은 곳에서 그늘을 보았고, 담았지만, 나의 사진 어디에도 늘 빛이 그늘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빛의 색은 작은 불꽃이 되어 이곳저곳에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긴 겨울을 지나며 피어나는 봄꽃들이 그렇습니다. 빛은 에너지 레벨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바뀌는 감정이 없는 물리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진 작업에서의 빛에 따른 색의 변화는 문법이 있는 감정의 교감에 논리가 함께한다는 것을 감지하기도 합니다. 봄의 들판과 겨우내 빛은 얼마나 오랜 시간 색들을 기다렸을까요? 많은 기다림으로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진달래의 원형을 보기 위해 나뭇가지도, 꽃잎의 디테일도 조리개를 열어 지웠습니다. 더구나 초점을 의도적으로 뒤에 있는 흰 꽃에 맞췄습니다. 드디어 무게도 부피도 없는 핑크빛이 디테일 없이 하늘에 떴습니다. 색도 언어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는 따짐보다 제가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연한 분홍색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축복된 봄입니다.
- 2016-04-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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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동 변호사의 이혼과 법률] 재산분할 청구권 포기했다고 무조건 재산을 못 받는 건 아니다
- 재중동포 여성 A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한국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인 B를 만나 2001년 혼인했다. 하지만 이들은 12년이 지난 2013년 10월 협의이혼을 했다. A는 협의이혼 한 달 전에 ‘협의이혼하고 위자료를 포기하며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다. 이에 따라 남편 B가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 뒤 A는 B를 상대로 “내 아들을 B가 폭행해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위협을 당해 각서를 써 줄 수밖에 없었다”며 재산분할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B는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협의한 것 역시 재산분할에 관한 협의에 해당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A의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B를 상대로 한 A의 재산분할 청구는 인용될까. 재산분할 제도는 민법 제839조의 2에 규정된 것으로, 혼인생활 중 부부 쌍방의 협력으로 이룩한 실질적인 공동재산을 청산·분배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이혼으로 인한 재산분할 청구권은 이혼이 성립한 때에 발생한다. 이혼 전에는 구체적으로 권리가 발생했다고 할 수 없다.(대법원 2000. 2. 11. 선고 99므2049, 2056 참조) 따라서 재산분할 청구권이 구체적으로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작성하는 경우 이는 ‘재산분할의 포기 약정’이 아니라 ‘재산분할 청구권의 사전 포기’에 해당하여 무효다. 단, 이혼이 임박한 시점에 재산분할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과정에서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작성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효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례에서 대법원은 “두 사람이 협력해 형성한 재산액이나 쌍방의 기여도, 분할방법 등에 관해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고 볼 자료가 없고, A에게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며 “A가 비록 협의이혼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하는 서면을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성질상 허용되지 않는 재산분할 청구권의 사전 포기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다. 위 사례에서 A가 B에게 ‘협의이혼하고 위자료를 포기하며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하여 주었으나, 재산분할을 포기하는 내용은 재산분할 청구권의 사전 포기에 해당하여 무효이므로, A는 B를 상대로 재산분할 청구가 가능하다. 재산분할 청구권의 포기가 항상 무효가 아님을 주의하여야 한다. 즉 이혼이 임박한 시점에서 재산분할에 대한 진지한 논의 끝에 작성된 재산분할 포기 의사표시는 유효하다. 재산분할 청구권의 포기 각서가 유효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즉, 이혼이 임박한 시점에 진지하게 논의된 과정에서 작성되어야 하고 그 내용이 합리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 2016-04-1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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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누구나 온라인 공간에서 작가가 되는 세상
-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전략명함 코디네이터)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다. 요즘은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예전보다 글을 쓸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하는 사람들은 자기 소개서를 쓰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사업계획서도 쓰고 그리고 일반사람들도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 글로 쓰곤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글쓰기 능력이 중요해졌다. 시니어 역시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자신의 성장 과정과 삶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쓰기도 하고 취미나 관심사를 블로그에 글로 쓰기도 한다. 왕년에 누구나 한 번쯤은 문학소녀, 문학소년 이런 소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기도 쓰고, 시도 쓰고, 뭔가 쓰는 행동이 익숙한 시절이 있었지만 사는 데 급급한 세월이 많다 보니 이젠 글을 쓸 엄두도 안 난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많다. 지금은 글을 쓰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세상이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글을 쓸지 말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어디에 쓰지? 어떻게 쓰지?를 고민할 때다. 새로운 글쓰기 공간 ‘글쓰기 플랫폼’ 무언가에 글을 쓰려면 우선 어디에 글을 쓸지 정해야 한다. 요즘은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이 많아졌다. 기본적으로 개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많이 올리는데 블로그는 글쓰기 공간이긴 하지만 이것 저것 정보들을 쌓아 놓는 창고 개념이 더 강하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기 위해 찾아오기란 쉽지 않다. 최근에 글쓰기만 전문적으로 하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다. 이곳을 ‘글쓰기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전문적인 글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자유롭게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곳이다. 아무래도 온라인 공간에 글쓰기를 처음 해보시는 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면 낯간지러워하시는 분들도 있고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수도 있는데, 글을 쓰는 ‘글쓰기 플랫폼’에 들어가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곳은 전문적인 글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평범한 글을 쓰는 사람이 더 많다. 살아가는 일상을 부담없이 써 내려간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자연생활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 스마트폰으로 일상을 담는 사람,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적는 사람들처럼 말 그대로 일상을 담아간다. 이곳에 들어가 보면 “아! 나도 글을 쓸 수 있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글쓰는 공간 ‘네이버 포스트’· ‘카카오 브런치’ 글을 쓸 수 있는 글쓰기 플랫폼은 크게 두 곳이다. 네이버가 운영하는 ‘네이버포스트’와 카카오가 운영하는 ‘브런치’라는 사이트다. 포털사이트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줄 수 있어서 책을 낸 전문 작가들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두 곳 모두 온라인 공간에 글을 남기는데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지만 스마트폰에서도 글을 쓸 수 있다. 텍스트만 있는 것보다 사진과 영상이 함께 있으면 더 보기 좋은데 스마트폰으로 글을 작성하게 되면 스마트폰으로 찍었던 사진과 영상을 쉽게 올릴 수 있다. 사진과 영상을 컴퓨터로 옮기는 번거로움을 없앨 수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모두 쓰기가 가능하므로 글쓰기 팁을 전해드리자면 컴퓨터로 글을 쓴 다음에 스마트폰으로 직접 사진만 올리면 깔끔하고 예쁜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음성으로 글을 쓰는 ‘구글드라이브’ 어디에 쓸지를 알아봤다면 어떻게 쓰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글을 쓰려고 하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키보드 자판에 익숙하지 않아서 타자가 느려요”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럴 때는 자판으로 치는 것보다 음성으로 입력하는 것이 더 도움 된다. 말로 술술 풀어 놓고 나중에 편집만 하면 좀 더 쉽게 글쓰기가 된다. 음성을 글로 바꿔주는 서비스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편한 도구가 구글이 만든 ‘구글드라이브’이다. ‘구글드라이브’는 한글, 엑셀, 파워포인트를 만들어주는 곳인데 이곳에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 빈 문서를 열고 ‘음성입력’을 누르면 내 말소리가 글로 변한다. 간혹 오타가 있지만 나중에 수정하면 된다. 말로 글을 쓰면 생각이 술술 풀리기도 한다. 글쓰기는 나의 역사의 기록이라고 한다. 사소하지만 하나씩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데 이런 도구를 활용하면 좋겠다.
- 2016-04-1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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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살것인가 PART3] 닮은 듯 다른 전원생활의 매력
-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집값은 터무니없이 오르고 그나마 있던 매력을 잃은 지도 오래다. 그런 틈새를 노려 생겨난 것이 바로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말로만 듣던 ‘전원마을’에 ‘도심형’이 붙어 멀리 가지 않아도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다. 말로만 하면 뭐하겠는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직접 가봤다. 도심형 전원마을에 막연한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 살짝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도심형 전원마을 두 곳을 소개한다. 단독주택, 꼭 넒어야 한다는 편견을 없애라 하우개마을 하우개 마을은 파주 황룡산 앞에 세워진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하우개 마을은 작은 땅에 효율적인 집을 짓기 위해 집집마다 지하에 차 2대가 들어갈 주차공간을 확보했다. 차고 위에 정원을 조성하고 2층과 다락방을 올려 이용 공간을 넓혔다. 다락방 천창으로 바라다보이는 하늘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까지 준다. 4년 전만 해도 전원주택은 330m²(100평) 이상 큰 평수대로 지어져왔다. 지금은 젊은 30~40대나 은퇴를 앞둔 50~60대가 살 수 있는 99.2~132m²(30~40평) 형대의 전원주택이 건설되고 있다. 집값이 안 오를 바에는 넓고 편한 집에서 살아보겠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다. 남의현(南議鉉·61)씨와 김경주(金庚珠·60)씨는 하우개 마을 첫 입주자로 2014년 9월 문패를 달았다. 점심시간 조금 넘어 방문했을 때는 바깥주인인 남의현씨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작년 말 공기업을 정년퇴직하고 장애인 봉사를 하며 은퇴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우선 공기가 좋다는 게 마을의 최고 매력입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마다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남씨는 마을에서 최고 연장자고 오랫동안 산 사람이지만 동생 격인 주민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중이다. 현재 남씨 부부를 제외하고 3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게 살고 있다. 다른 주민들 입주가 시작되고 친해지다 보니까 매일 만나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요즘에는 날씨가 추워서 자주 못 만나는데 날씨 좋을 때는 정말 거의 매일 만났던 것 같아요.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면 정말 좋습니다. 맛이 달라요.” 부인 김경주씨는 홀트일산복지타운 원장이다. 사무실이 근처라 주위 아파트를 찾아보다 하우개마을을 알게 됐다. “그때는 벌건 흙밖에 없었어요. 간이 크다고 하겠지만 조감도만 보고 집을 계약했어요. 누가 여기 들어오나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부부였습니다.” 입주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도우미를 자청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결정을 못하고 그럴 때 우리 집을 보여줬어요. 아마 여기 입주민은 우리집 한 번쯤 왔을 겁니다.” 집은 지상 2층에 다락까지 공간이 꽤 되는데 연료비나 전기료 부담이 없다. “도시가스비가 제일 많이 나왔던 게 14만원이었어요. 전기료도 두 식구밖에 안 되니까 얼마 안 나와요. 아파트에선 관리비를 30만원씩 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창뿐만 아니라 집 구석구석에 쓴 히노키 나무가 마음에 듭니다. 나무집은 습기가 차면 나무가 팽창해서 습기 들어오는 걸 막고 더울 때는 마르면서 통풍이 된다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퇴근해서 집에 올 때면 나무 냄새 등자연의 향을 맡을 수 있어서 좋다. 새소리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다. 전원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시와도 가깝고 또 공기까지 좋아서 도심형 전원주택으로 오기를 잘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대지에서 최대한의 공간을 활용한다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파주 운정 신도시를 지나다 보면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도시농부 타운하우스(이하 도시농부) 1, 2차 단지다. 오솔길처럼 낸 길을 따라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곳곳에 도시농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텃밭도 보였다. 현재 5단지까지 분양 완료 됐는데 가격은 3억원 대로 알려져 있다. 도시농부의 특이점은 빌라형이면서 독채로 사용하는 것이다. 도시 대부분이 평면을 넓혀 단층(1층)을 높이 쌓아서 집을 지었다면 도시농부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집을 잘라 구분했다. 박닥은 좁은데 천장이 높고 2층에 다락방까지 있다. 지금까지 봐온 도시 주택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됐다. 6년 전 지어진 도시농부 1, 2차 단지의 경우, 설계를 담당한 도시농부 최용덕(崔龍德·57) 대표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노린 듯 층마다 텃밭이 있다. 면적은 좁지만 그안에 층을 만들어 공간 활용을 했다. 그런데 최 대표는 그런 실험이 사실상 실패라고 말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위해 준실내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그렇게 보완해 설계한 것이 최근 지어진 도시농부 미니멀하우스다. 이 집도 역시 세로로 집을 구분한 독채 빌라형이다. 1,2차 단지에 비해 옆으로도 꽤 넓고, 높다. 여러 군데 창이 있어 내부가 도시 집에 비해 상당히 밝은 것도 이 집의 장점이다. 조인관(趙寅官·71)씨는 딸의 권유로 당산동에서 파주 도시농부로 이사 왔다. 최근 간 이식수술을 한 부인이 공기 맑은 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가격에 비해 집안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조씨의 집은 1층 응접실과 주방, 2층 부부의 방, 3층을 손님들이 묵고 갈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3층 공간을 조금 나눠 드레스룸을 만들었다. 드레스룸 안, 높은 천장 위를 가로로 분리해 창고로 만들었다. 2층은 통째로 부부의 방으로 꾸몄다. “부부 단 둘이 살기 때문에 공간을 쪼개서 방을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대신 계단 옆에 뭐든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계단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보니까 적응돼 괜찮습니다.” 인테리어는 조씨가 직접 했다. 조씨가 집안 내부를 인테리어에 직접 개입한 것은 ‘마이너스 옵션제’로 분양 받았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옵션제란 익스테리어(건물외관, 창호, 전기, 보일러, 정원)는 회사측이, 내부공사는 입주자가 하는 방식.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시행하고 있고 도시농부와 하우개마을도 마이너스 옵션제를 시행하고 있다. 조씨는 집 앞 마당 가꾸는 것이 취미다. 봄을 맞아 마당 주위에 꽃도 심었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시골 생활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 2016-04-12 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