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되면서 만물은 기지개를 펴고, 새싹은 꼼지락꼼지락 땅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싹이란 씨앗 속의 생명이 씨앗 껍질과 땅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씨앗은 싹이 나오기 전 오랫동안, 자신이 세상에 나갈 때를 기다리기 위해 안테나를 켜두고 있다. 씨앗 껍질은 외부 지원 없이 내부의 유전자와 에너지를 장시간 보호해야 하므로 매우 단단하다.
이스라엘에서는 2000년 전 대추야자 씨앗을 발굴해서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국, 일본에서도 2000년 전 연꽃의 씨앗을 발굴해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다. 씨앗의 껍질이 2000년의 세월을 버티게 해 준 것이다. 이렇게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싹은 강하게 뚫는 힘, 수류탄과 같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체기는 뚫고, 독소는 씻어낸다
자연은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 하던 노력을 인체 내에서도 그대로 재현한다. 싹의 뚫는 힘은 인체 내에서는 체한 것을 뚫어서 소화가 잘 되도록 도와준다. 가슴이 답답하고 막힌 것, 젖가슴이 막혀서 부은 것, 옆구리나 아랫배가 뭉친 것, 음식에 체한 것을 뚫어주는 것이다. 혈관이 막힌 것과 종양도 뚫어 주는 효과가 있다. 보리길금(맥아), 조길금, 벼길금, 새싹나물, 콩나물, 숙주나물 등이 대표적이다. 길금이란 땅 속에 묻지 않고 싹을 낸 것을 말하는데, 길금은 모두 성질이 따뜻하고 소화가 안 된 것을 삭히는 효능이 있다.
이시진 선생은 에서 이런 효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리길금, 벼길금, 조길금은 모두 쌀, 면, 과일 등의 체기를 풀어준다. 다만 체기가 있는 경우에는 소화를 시키지만, 체기가 없는데 오래 먹으면 도리어 사람의 원기를 소모시킨다. 만약 오래 복용할 경우에는 백출 등과 같이 쓰면 해가 없다.’ 식후에 보리길금으로 만든 단술을 마시는 것도 소화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발아 식물의 힘
1993년 독일의 막스 플랑크(Max Planck) 식품연구소의 발표로 전 세계가 발아 곡식에 주목하게 되었다. 곡물이 싹을 틔우면 원래 씨앗과는 다른 영양소들을 머금게 된다. 발아현미는 비타민·아미노산·효소·SOD(superoxide dismutase) 등 몸에 유용한 성분들이 증가하는데, 이런 영양소들은 자연치유력을 높이고 성인병을 예방하며 몸의 독소를 씻어내는 작용을 한다.
컴퓨터를 처음 샀을 때는 속도가 빠르지만, 이것저것 다운받다 보면 속도가 느려진다. 사람의 몸 역시 마찬가지다. 먹은 것을 다 소화하지 못해 남은 찌꺼기나, 소화할 수 없는 강력한 이물질은 독으로 변해 질병을 일으킨다. 곡물의 싹은 막힌 것을 뚫고 독소를 씻어내어 내 몸을 리셋(reset)해준다.
모든 봄나물은 싹이다
새싹만 싹이 아니다. 겨울의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모든 봄나물은 새싹의 기운을 갖고 있다. 냉이, 취나물, 쑥, 씀바귀, 민들레, 두릅, 괭이밥, 돌나물 등에는 기운을 끌어올리고 식욕을 돋우어 주며, 소화시키는 효능이 있어 춘곤증 퇴치에 아주 좋다.
봄기운을 받아 위로 자라 올라오는 새싹은 성장 속도가 빠르다. 칡 순은 하루에 50cm 이상 자라기도 하는데, 사람이 복용하면 성장 호르몬 분비를 촉진한다. 빨리 자라는 기운이 사람의 몸속에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칡 순과 보리 싹은 특히 성장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성장을 도와준다.
또한 싹은 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습성 때문에, 머리까지 기운을 끌어올려준다. 그래서 춘곤증 퇴치에 싹, 봄나물이 좋은 것이다. 보리길금, 벼길금, 조길금은 물론 콩나물, 새싹나물, 칡 순도 좋다. 기운이 올라가면 식욕도 좋아진다. 특히 싹의 쌉싸름한 맛, 새콤한 맛은 몸을 가볍게 하고 식욕을 돋우어 준다.
아래에 소개하는 앤 위그모어(Ann Wigmore) 박사와 하기와라 요시히데(萩原義秀) 박사는 새싹 요법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분들이다.
썩어가던 다리를 소생시킨 밀 새싹
리투아니아 출신의 자연요법 전문가 앤 위그모어 박사는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정제식품과 가공식품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차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부터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수술을 거부하고 자연요법을 시작했다. 햇볕을 쬐면서 식물의 푸른 잎을 먹는 것이 그의 방법이었다. 그러다 겨울이 되어 채소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실내에서 새싹을 길러 먹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여러 풀을 하나씩 냄새 맡더니 밀 순을 골라 씹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본 위그모어는 밀 새싹을 먹기 시작했고, 다리의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 위그모어의 밀 새싹 요법은 당뇨병, 고혈압, 비만, 위염, 위궤양, 췌장 및 간의 질환, 천식 녹내장, 습진, 피부질환, 변비, 치질, 대장염, 관절염, 빈혈, 구취, 여성질환 등 많은 질환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일본의 하기와라 요시히데 박사는 10년에 걸쳐 300종 이상의 채소와 곡류 새싹을 분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보리 새싹에는 칼륨이 우유보다 55배 이상, 시금치보다 18배 이상 들어 있고, 칼슘은 우유의 11배가 넘으며, 철분 또한 시금치보다 5배 더 많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보리 새싹은 성장 촉진, 면역 강화, 항산화작용에 효과가 있으며 발암 억제, 소화성 궤양과 피부질환 치료에도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2020년 올림픽을 앞둔 도쿄( 東京)는 현재 변신 중이다. 여기저기 재개발이 추진중이며, 올림픽에 맞춰 새 경기장 건설과 거리 조성도 한창이다. 지금도 속속 새로운 명소가 등장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도쿄역 왼쪽에 새로 지은 JP타워는 도쿄중앙우체국과 각종 점포, 레스토랑 등이 가득 들어선 공공시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융합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우편주식회사와 도쿄대학 종합연구박물관이 협력해 201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학술종합뮤지엄 인터미디어테크이다. 지상 2층과 3층을 연결해 2996m²의 널찍한 전시 공간과 강의 시설 등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학협동의 롤모델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쿄대학이 1877년 개교한 이래 수집해온 각종 학술 표본과 연구 자료 등 ‘학술문화재’로 불리는 귀중한 자료들이 상설 전시중이다. 특별 전시와 기획 행사에서는 최첨단 과학의 성과와 각종 표현 미디어의 독특한 창조물도 선보이고 있다. 일본은 물론 지구촌 구석구석 다양한 장르의 학문 분야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색다른 융합도 맛볼 수 있다.
특히 렉처 시어터로 불리는 ‘아카데미아(ACADEMIA)’의 공간에서는 귀중한 영상 및 음성 자료가 학예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정기적으로 소개돼 많은 마니아층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월 26일 오후 6시부터 1시간 가량 열린 그래모폰(Gramophone) 기획 26회차 행사는 재즈의 집대성으로 알토편이 진행됐다. 아카데미아에는 1925~1928년에 만들어진 빅토롤라(Victrola)사의 명품, 캐나다제 크레덴자(Credenza) VV8-30 과 일본의 악기 설계자 히라바야시 이사무(平林勇, 1904~1938)가 1931~1932년경 제작한 독자적인 음성 증폭 시스템이 달린 축음기 등 2대의 축음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빅토로라의 크레덴자로 1942년 데카(Decca)사에서 출시된 앨범 ‘알토 섹소로지(Alto Saxology)’에 수록된 지미 도시(Jimmy Dorsey)와 1939년 5월 26일 녹음한 ‘로망스(Romance)’를 비롯해서 도시 형제의 ‘테일스핀(Tailspin)’, 알 쿠퍼(Al Cooper)의 ‘(When I GrowToo Old to Dream’ 등 주옥 같은 재즈 명곡 10곡이 축음기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음을 되살려냈다.
도쿄의 야경과 추억을…
깔끔한 디지털 사운드가 아닌 인간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음역대에서 재현되는 축음기의 아날로그 사운드는 LP판의 굴곡과 함께 숨결처럼 떨리는 잡음 속에서 마치 이야기를 걸듯 귓속으로 다가왔다. 이날 주제인 알토에 걸맞은 색소폰이 이끄는 재즈 리듬이 70여 명의 참가자들로 가득 찬 아카데미아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때로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속 우울한 대도시의 그늘을 묵직하게 그려내기도 했으며, 경쾌한 스윙풍의 재즈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창밖의 도쿄역 야경과 함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수놓기에 충분한 시간 여행이었으며, 축음기가 지닌 소박한 휴머니즘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사였다. 귀에 거슬리는 LP판의 잡음이 아니라 기억을 긁어 잠자던 감각을 일깨우는 느낌이라고 할까, 따뜻한 인정미마저 느껴지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현역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 요시다 쇼타로 씨(62세)는 “대학 시절 재즈에 빠져 친구들과 밴드도 꾸려 연주 활동도 했지만, 직장 생활에 쫓겨 재즈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재즈의 집대성 시리즈 행사로 모처럼 재즈의 매력에 젖을 수 있어 자주 이곳을 찾는다”며 “여기 설치된 축음기와 소장된 희귀 음반은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훨씬 넘을 텐데, 공짜로 매달 좋아하는 재즈와 해후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밝혔다.
인터미디어테크 전시 공간과 아카데미아의 기획 행사는 모두 입장 무료이다. 일본 도쿄를 출장 혹은 여행으로 찾는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 JP타워를 방문해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봄직하다.
봄바람 따라 왁자지껄 피어나던 바람꽃들이 어느 순간 기세가 꺾여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4월의 깊은 계곡, 높은 산기슭에선 꽃 걱정 말라는 듯 순백의 탐스러운 꽃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서 방긋방긋 눈인사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산기슭과 계곡에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계곡의 푸른 이끼 곳곳에 달덩이처럼 환한 야생화가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고 봄날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그렇습니다. 높고 푸른 산속에 눈 녹은 맑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콸콸 흘러내리고, 그 곁에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이 무더기로 피어 ‘산꽃 들꽃’, 우리의 야생화를 찾아 나선 벗들을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종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처음 발견해 모데미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 성이 들어간 이유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란 동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모데미’라는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20cm 안팎의 줄기 끝에 흰색의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첫 발견지인 전북 남원의 ‘운봉금매화’란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영어 이름은 한국 특산식물답게 한글명인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계적으로는 한국만의 고유종, 한국의 특산식물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남으로 제주도 한라산부터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까지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부분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 지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함에도 불구하고 설중화(雪中花)의 주인공이 되곤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Where is it?
첫 발견지라는 학술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전북 남원 운봉의 지리산 자락에서는 정작 모데미풀을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대신 한라산, 설악산, 태백산, 점봉산, 오대산, 광덕산 등 전국적으로 폭넓게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개체 수가 많기로는 소백산과 덕유산이 꼽힌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최고로 꼽는 모데미풀 자생지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 자연휴양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과 무성한 초록색 이끼, 바위 사이사이에 하얗게 핀 모데미풀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명소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1966년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교양학부 도서관의 세미나 룸에서 송년다과회가 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 매월 책 한 권을 정해 읽고 토론회를 열어온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마지막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그 모임을 지도해온 철학과 S 교수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S 교수가 말을 마치더니, 학생들에게 새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다. 여러 명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이, 2학년에 올라가면 전공 공부를 하면서 교양도서도 열심히 읽겠다고 말했다. 기대한 반응이었는지, S 교수는 줄곧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J 차례가 되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남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많은 학생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에 여학생이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J는 언행을 절제하는 모범생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그렇게 당돌함을 보이기도 했다.
차례가 오자 나는 J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빤히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나는 ‘남학생’을 ‘여학생’으로 바꾼 것 말고는 J의 말에 한 자도 보태지도, 덜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J도, S 교수도 웃었다.
내가 J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학기 초 독서토론회 이후였다. 지정도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두 연인의 순수성을 예찬했다.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 희곡의 주제이자, 대학 새내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몇 학생이 두 연인의 무모함이나 맹목성을 지적했다. 어떤 학생은 우연한 사건이 중첩되고 있다며 작품의 플롯을 비판했다. 그러나 누구도 분위기를 뒤엎지는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를 보며 S 교수가 말했다.
“김 군. 작품을 읽었을 텐데, 독후감을 말해보게.”
기다리던 바였다. 1학기 말의 토론회에서 S 교수로부터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교수가 나에게 반드시 발언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저는 이 희곡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도 사회적 상황을 덮어두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보면, 스토리가 전개되는 16세기 후반에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시작됩니다.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새 세력이 대두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구세력은 뒤로 밀립니다.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뒤흔든 엄청난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구세력 지배층인 귀족 자녀들이 사랑에 탐닉해 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회변화의 변곡점에서 볼 수 있는 말기적 현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역사성이나 사회성이 배제된 그런 사랑을 지고지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나는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제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제 곁에 줄리엣 같은 여인이 있었다면, 물론 저 역시 앞뒤 살피지 않고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었다. 누구보다도 S 교수의 웃음소리가 컸다. 토론회가 끝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J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나요?”
“가지고 놀다니?”
“학생들 뒤통수를 쳐놓고, 마무리로 앞이마까지 쳤잖아요?”
J는 고개를 돌려 상긋 웃고는 버스에 올랐다. 바로 그 미소가 화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찰나에 J는 말 위에서 등을 돌리고 화살을 쏜 고구려 궁사였다.
1967년 1월 1일 자정이 되자 나는 5분 동안 나와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종교가 없는 내가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철필에 검은 잉크를 찍었다. 편지를 다 쓴 뒤에 날짜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땐 0시 5분이 훨씬 지난 뒤일 것이었다. 나는 편지지 맨 위에 ‘1968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J에게 보낼 편지였다. 마을 앞에도 우체통이 있지만,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십리를 걸어 우체국으로 가서 편지를 부쳤다.
드디어 1월 4일이 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도 없는데 울안에 서 있는 동백나무에서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뚝 떨어졌다. 이건 길조일까, 흉조일까? 나는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집배원이 우편물을 가져왔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J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그 편지지 맨 위에도 ‘1967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J의 편지를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그야말로 천하가 내 손 안에 있었다.
편지 내용에, 보고 싶다든가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상대를 마음에 담고 있음을 서로 확인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 후 2월 20일까지 5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받고 그 답을 쓰는 식이 아니었다. 답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편지를 썼다. 나도 그도 몇 번인가는 하루에 두 통을 써서 부치기도 했다. 평생 쓸 편지의 반쯤을 50여 일 동안에 쓴 셈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안개처럼 말없이 다가와 나를 휘감는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사랑이라면 나의 J에 대한 사랑은 안개보다 짙었다. 사랑이란 내 곁에 그가 없어도 그를 내 마음에 담는 것일까? 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 마음에서 사랑은 흘러넘쳤다.
그래서 나는 편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쓸까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끼고 싶었다. 그래. 그 말은 직접 만나서 할 거야. 그것도 여러 번 만난 뒤에 해야 해. 나는 그런 절제가 사랑의 품격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2월 20일에 상경할 예정이라며 21일에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J는 하루 뒤에 보자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숫자를 맞추어 2월 22일 오후 두시에 둘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장소도 J가 정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근사한 곳을 찾으려고 여러 군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가 결론을 내린 곳이 바로 신설동 로터리의 어느 다방이었다.
둘이 만나 나눌 이야깃거리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J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삶의 지표 셋을 밝혔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게 그것이었다.
J는 처음에는 가난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라고 했다. J가 강조한 것은 전문성이었다. 언젠가 나라가 전문인을 요구할 것이고, 그 준비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서른 통쯤 주고받은 무렵부터, J도 가난의 의미를 재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기 강조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둘이 만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접점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터였다.
21일 상경한 나는 절친인 P의 집으로 갔다. P는 나에게 깜짝 놀랄 사실을 털어놓았다. 겨울방학 동안에 다른 사람이 아닌 J에게 집요하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편지도 보내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골목길에서 기다리다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J가 끄덕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P가 말했다.
“나는 부모 없이 자랐어. 피난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잃었어. 내 꿈은 출세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야. 난 여자를 찾았어. J야. 내가 걔하고 결혼한다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 그렇지 못하면 난 살 이유가 없어.”
사랑에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P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결연했다.
그날 저녁 나는 P의 집을 나와 제기천 천변의 어느 판잣집 주막에 들어가 혼자서 막걸리를 마셨다. 주막을 나온 나는 무심결에 J의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는 기억에 생생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섰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식 2층 저택이 골목 양 쪽에 죽 늘어서 있었다. J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부티가 났다.
문득 희곡 이 생각났다. J는 줄리엣이지만, 안타깝게도 로미오와 나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었다. 오래전부터 심하게 해소를 앓는 아버지와 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더욱 불행한 것은, 독서토론회에서 내가 한 말,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내 말이 J의 집 앞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도 친구려니와, 이런 부잣집 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2월 22일 오후 두 시에 J와 만나기로 한 다방에 가지 않았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것이 젊은 시절의 내 삶의 지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삶의 지표를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내 뜻과는 무관하게 아직 가난하게 살고는 있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내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서울의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J는 빈민운동을 하는 가난한 목사와 결혼해 평생을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미 손자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어 있을 J가 그리울 때가 있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北風吹雪打簾波 북풍이 눈보라를 몰아 발을 치는데
永夜無眠正若何 긴 밤에 잠 못 드는 그 마음 어떠할까.
塚上他年人不到 내 죽으면 무덤을 찾는 사람 없으리니
可憐今世一枝花 가여워라 이 세상의 한 가지 꽃이여.
조선조 평양기생 소홍(小紅)이 지은 것으로 전해 오는 한시(漢詩)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새긴 김상유(1926~2002)의 판화 한 장이 가슴을 울린다.
한겨울 밤, 눈보라가 닥쳐와 사립문은 절로 벌어지고, 뜰 앞 버드나무, 단풍나무 위에도 눈이 얼어붙었다. 초당 뒤편 소나무 잎은 어느새 얼음 별송이로 반짝이고, 아득한 산자락은 눈이 내려 마치 이승의 피안(彼岸) 넘어 고적(孤寂)한 저승의 정경이다. 방 안으로 단아한 기녀(妓女) 소홍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 긴 긴 밤을 어이하리.
판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김상유는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고보 재학 중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월남하여 연세대에 입학, 철학을 전공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도에 하차, 인천의 중학교에서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무렵 미국과 일본의 미술책을 탐독하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특히 판화에 매료되어 동판화(銅版畵) 연구에 매진했는데, 동판에 밑그림을 새기고 그걸 찍어낼 프레스기가 없어 국수틀을 개조해 사용했다고 한다. 1963년 그의 ‘동판화전’이 우리나라 동판화의 시금석이 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국제 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한 동판화 작품 ‘NO EXIT’가 대상을 차지하며 판화가의 길로 정진하였다. 세 장의 판화 연작 형태로, 사방이 깜깜한 먹빛 가운데 사각의 좁은 공간에 사람이 혼자 누워있다. 두 번째 사람의 형체는 조금 부스러지더니 세 번째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사라진다. 1970년대 혼돈사회의 암울함을 형상화한 작가의 절규였다고 생각한다.
판화의 기법에는 목판화, 석판화, 동판화, 실크스크린 등이 있는데 나무에 새기거나 스크린에 밀어내는 것과 달리 동판화는 동판 위 밑그림을 따라 흔적을 내고 염산으로 부식시켜야 하는 위험하고 까다로운 공정이 있다.
김상유도 시력이 낮아져서 1970년대 중반부터 목판화로 화업을 바꾸게 되는데 이 작품 ‘소홍절구(小紅絶句)’는 그즈음 동판에 새긴 것 중 걸작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동판에 그라운드(산에 안 녹는 용제)를 입히고 송곳 같은 도구로 밑그림을 그린 후 염산 등으로 판을 부식, 선을 살려 잉크를 발라 찍어내는 에칭(etching) 기법이지만, 목판에 새긴 듯 칼 맛이 엿보여서 더욱 매력적이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낸다는 복제성 때문에 수집가들에게 외면당했고 작품 값도 대개는 한 점에 비싸봐야 50만원을 넘지 못해 판화가들은 겸업을 하지 않고는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김상유도 1980년대 이후로 목판화와 함께 유화를 그리게 되는데 그 세계가 가히 탈속(脫俗)의 경지에 이르니 수집가들에게는 호재가 되었다.
그의 회화 속에는 어쩌면 자화상 같은 한복차림의 선비(혹은 도인)가 가부좌 자세로 정자에 홀로 앉아 물을 바라보거나 바람을 쐬며 한아(閒雅)의 정취에 젖어 있다. 티끌세상을 벗어나려는 작가의 고독한 몸부림일 것이다. 2002년 이 작가가 운명하기 직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상유 1960~1999 전작전’은 한 고독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의 헌정이었다.
동판화 작가하면 바로 떠오르는 또 한 분이 황규백(1932~ )이다. 이 작가는 동판화 중에도 아주 정치(精緻)한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판화를 찍어낸다. 이탈리아어 mezza tinta(중간 색조)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기법은 동판 표면에 수많은 구멍을 뚫고 판화를 찍으면 구멍 속에 있던 잉크가 나와 번지면서 색면을 이루어 부드러운 명암을 잘 나타낸다.
에칭처럼 판을 부식시키지 않으나, 일일이 구멍을 뚫고 메우고 하는 작업이 길 뿐 아니라 다색일 경우 밑그림의 구도나 색상에 맞추려면 작은 동판일지라도 온종일 세심한 사전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1954~1967년 ‘신조형’, ‘신상회’ 그룹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1968년 프랑스로 건너가 ‘SW 헤이터의 아틀리에 17’이라는 판화제작소에서 판화 공부를 했다. 1970년에는 뉴욕으로 옮겨서 1990년까지 메조틴트 판화를 집중적으로 찍었다. 2000년에는 영구 귀국하여 판화뿐 아니라 회화작업도 하여 유화작품만의 전시로도 큰 호평을 받았다. 그의 판화는 대부분 20cm x 30cm 이내의 작은 화면이지만, 오랜 명상과 사색으로 짜인 구도의 조밀함, 깊고 우아한 색상이 감탄을 자아낸다. 잔디밭 위에 놓인 손수건이나 팽이, 실패, 부러진 성냥개비, 조약돌 하나, 날아가는 기러기의 물빛 날개 등 어쩌면 오랜 외국생활 동안 고향이 연상되는 하잘것없는 소품들 모두가 밀도 높은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판화 ‘Rose’는 몇 해 전 경매회사에서 시행한 5월의 경매에서 120만원에 낙찰 받은 작품이다. 판화는 50만원 전후에 낙찰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 작품은 경쟁자가 하도 많아서 그렇게 올라갔다.
잔잔한 잔디 위로 푸르른 달빛 가득 내린 들판에, 여섯 그루의 향나무 같은 침엽수가 늘어섰다. 하늘 위로 부푼 상현달이 안개를 뿜으며 떠 있다. 바로 그 아래 잔디 위로 여느 풀꽃 하나 없이, 다만 장미 줄기 하나가 달 가까이 치솟아 올연하다. 잎 그물도 선명하고 빨간 꽃 한 송이는 달에 빛바래 핑크의 요염을 뽐내고 있다. 달과 장미의 사랑의 밀어가 시작되었다. 잔디와 잇닿은 풀밭과 숲의 경계가 달그림자와 안개에 몽롱하게 묻히고, 하늘빛마저 옅은 구름 사이 푸릇한 휘장을 신비롭게 드리워 야릇한 여름밤은 무르익고 있다. 수묵화의 물감이 종이에 스미어 번지듯 동판의 수많은 미세구멍에서 흘러나온 물감이 침엽수 가지와 그 떨기를 흔들리게 하고 있다.
서양화에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이 있는데, 이 말은 이탈리아어 스푸마레(sfumare, 연기처럼 사라진다)에서 유래되었다. 회화에서 사물의 경계가 희미하게 그려지고, 그 희미함이 선명함을 만들어 내는데, 황규백 판화에서 그 환상적 기법을 보게 된다.
달이 이울고 새벽이 오면 오롯이 이슬 머금고, 그러나 다시 밤을 기다릴 장미의 설렘이 꽃이 지는 그 순간까지 이어질 여운을 즐길 수 있으니.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고구려의 최전성기는 광개토왕(재위 392~413)과 장수왕(재위 413~491) 시대이다. 아버지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크게 평가된다. 그러나 아들 장수왕은 78년 동안 고구려를 다스리면서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군주로만 잘 알려져 있다.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비문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주었지만 장수왕의 업적은 에 사실 위주로 짧게 나열되어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한국사에서 중국의 여러 왕조들을 상대로 지금은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조공을 제일 많이 보낸 왕이다.
그러나 장수왕은 분열된 북중국을 중심으로 위-연-유연-송-제-고구려를 둘러싸고 전개된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공을 외교수단으로 최대한 이용하면서 국가이익을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외교군주(diplomat king)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주요한 사건들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보자. 589년 수(隋)가 통일하기 이전 남북조 시대 중국은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혼란이 극심했다. 그 중심 국가는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北魏)이다. 조조의 위와 구분하여 북위라 부른다. 430년대 중반 북위가 요서와 하북 일대에 근거한 북연(北燕)을 공격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장수왕이 먼저 435년 위에 조공사절을 보내 사태를 탐색한다. 위도 사신을 보내 답례한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위-연 전쟁에 ‘참여하지 말 것’, 즉 중립적 자세를 견지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연왕 풍홍(馮弘)도 위와의 전쟁에서 사태가 불리해지면 고구려에 의탁했다가 후일을 도모할 것을 생각하고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망명 수락을 요청한다.
위는 다음해 고구려의 중립을 재차 강요하면서 연의 수도 화룡성(和龍城, 오늘날 朝陽, 요하의 서쪽)에 도달한다. 그런데 장수왕은 위의 중립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 두 강대국이 생사를 건 전투에 몰입하고 있는 중간에 과감히 뛰어든 것이다. 고구려군 수만은 위와 거의 동시에 연의 수도에 접근한다. 화룡성 안에서는 친고구려파와 친북위파 간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자기편을 먼저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친북위파가 먼저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영입하려 했으나 북위군은 의심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돌입한 고구려군은 성을 장악해 전리품을 획득하고 연왕과 다수의 주민을 이끌고 동으로 회군한다. 회군할 때 고구려 군세에 위압된 북위군은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은 무모하게 성 안으로 돌진한 것이 아니라 근왕파이자 친고구려 인사들을 통해 성 안 사정을 파악하고 선수를 친 것이다.
고구려의 간섭을 두 번이나 경고한 북위로서는 연을 멸망시켰지만 연왕은 도망가고 고구려의 반항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꼴이 되었다. 이에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연왕을 ‘압송’하려 하지만, 고구려는 ‘마땅히 연왕과 함께 위의 교화를 받겠다’는 표문을 바치면서 위의 요청을 피해버린다.
장수왕의 외교는 이제 망명객 연왕 풍홍의 처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연왕은 화룡성 함락 1년 10개월이 지나서야 요동 고구려 영내에 도달하는데, 장수왕은 그에게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야숙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들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고 위로한다. 이것은 북연의 황제로 칭하며 고구려를 업신여겼던 연왕을 이제는 고구려왕의 외신(外臣) ‘군’으로 강등시켜 야유한 것이다.
창피하고도 노여워진 풍흥은 ‘황제의 위세를 내세워’ 장수왕을 꾸짖고 허세를 부린다. 정사와 상벌을 자기 나라에서 하듯이 행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을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면서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데려가는 등 압박을 가한다. 풍홍이 ‘이를 원망하여’ 남쪽 송(宋)에 망명하려 하자 송은 438년 7000 병사를 보내면서 고구려가 이들의 ‘호송을 돕도록’ 지시했다. 장수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군대를 보내 풍홍을 죽여 버린다.
466년 북위와 고구려 간에는 양국관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북위는 황제 현조(顯祖)에게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서 황제의 비빈으로 고구려왕의 딸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외교적 탐색을 가동한 것이다. 북위는 과거 연과 혼인을 한 뒤 얼마 안 돼 연을 쳤는데, 사신들이 오가면서 연나라 지세와 형편을 조사했다고 한다. 고구려에 대해 동일한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수와 당의 고구려 침공 직전에도 중국은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세를 정탐한다.)
고구려는 장수왕의 딸이 출가했다고 하면서 아우의 딸을 대신할 것을 청하는데 위는 이를 허락한다. 이어 아우의 딸도 죽었다고 둘러댄다. 위 역시 고구려의 의도를 파악한 듯, 엄중히 질책하고 다른 종실의 여자를 보낼 것을 요구하고 고구려는 겉으로 이에 순응하지만 위의 현조가 죽어 이 사건은 흐지부지해진다.
장수왕 시대 고구려의 위상은 절정에 달했다. 484년 고구려는 북위에 사절을 보내는데, 위에서는 고구려가 ‘강성하다(我方强)’하여 여러 나라 사신들의 숙소를 배정할 때 제(齊) 다음으로 큰 관저를 주어 최상급으로 대우한다. 중국 는 이어 위가 여러 사신들을 영접할 때 남제와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했다고 북위에게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고 적고 있다. “우리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가 있을 뿐이오. 다른 외방의 오랑캐는 우리 기마가 일으키는 먼지조차 볼 수 없소. 하물며 동이의 조그마한 맥국(貊國, 고구려)은 우리 조정을 신하로서 섬기고 있는데, 오늘 감히 우리와 나란히 서게 할 수 있소?”
장수왕이 죽었을 때 위의 효문제(孝文帝)는 예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김춘추의 사망 당시 당 고종이 행한 의식과 같은 것으로 상존했던 위와의 관계를 장수왕이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의 여러 왕조나 백제를 상대로 한 장수왕의 외교는 현장에서 정세의 변화를 읽으면서 직접 지휘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40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19세기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나 그 후 유럽의 국제관계를 운용하면서 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동맹관계를 수시로 변환시킨 능력과 흡사하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지난 오십여년 동안 골프를 배우고, 스윙 원리를 연구하고, 또 가르쳐 온 경험에서 깨달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골프의 샷은 모두 창조적이라는 점이다. 그 많은 샷을 연습했어도 골프 샷은 반복할 수 없고 실행되지도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지금 샷을 하는 이 순간과 플레이하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샷은 자신에게 오직 이번 한 번의 기회뿐이다” 라는 말은 골퍼라면 누구나 쉽게 들어 왔고 다른 골퍼에게도 해주었던 말이다. 하지만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샷 하기 전, 항상 이미지를 새겨라
최선의 샷을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샷을 창조해야 하는데 클럽을 쥔 손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샷을 반복할 수 있거나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샷을 실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실제로 이를 달성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항상 같은 샷의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할수록 샷의 결과는 좋아지지 않고 골프 수준도 낮아진다. 아무리 연습 스윙을 잘하더라도 실제 샷을 구사했을 때 연습 스윙처럼 좋은 스윙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복하려고, 자동화되도록 스윙 연습을 하기보다는 항상 샷을 할 때마다 상황에 맞는 샷을 구상하고 실행할 때 마음과 몸이 일체화되어 활성화되는 능력이 더해져 골프 수준을 높일 수 있게 된다.
샷을 준비하고 창조적인 샷을 구사하려 의도해, 특히 오른쪽 두뇌가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골프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아무런 생각없이 샷을 하게 되면 오히려 골프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준비된 골퍼라면 샷을 하기 전에 항상 이미지를 마음에 새기고 샷을 실행해야 한다. 반대로 샷에 대한 이미지가 없다면 실행할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연 창조적인 샷을 어떻게 구사할 수 있나?
창조적인 골프 샷은 골퍼가 샷을 하기 전에 또는 샷을 하는 도중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만들 수 있다. 샷을 결정하기 전, 스스로에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원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단순히 페어웨이 중앙이나, 그린, 아니면 홀에 공을 넣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거리, 방향, 위치까지도 세세하게 떠올려야 한다. 특히 공 뒤에 서서 일정하게 호흡하며 표적을 보면서 자신이 의도하는 목표를 구체화할 때 창조적인 샷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어서 표적에 대한 몸과 클럽의 겨냥을 시작한다. 이때 운동 수행에 대한 각성(arousal) 수준과 강도는 반드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 샷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호흡이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샷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샷을 마칠 때까지 수준이 같아야만 한다.
목표에 공이 떨어지지 않아도 실망 마라
어드레스를 준비하는 과정이 일관되어야 창조적인 스윙과 샷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창조적일수록 향상된 골프 수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심리적 준비 과정은 또한 마음속으로 표적을 보는 것과 날아가는 공이 표적에 떨어지는 것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포함한다. 마음속으로 표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창조적인 스윙을 하기 전에 반드시 그려내야 하는 이미지이고, 이러한 과정은 골퍼에게 자신감을 높여주며 강력한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날아간 공이 표적에 떨어지는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의미는 샷을 하는 과정에서 공을 컨트롤하려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자신이 설계한 창조적 스윙과 샷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느낌에 따라서, 임팩트하는 순간 손으로 전달되는 타구감으로 스윙과 샷을 조작하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공이 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기보다는 다음 기회에 창조적인 스윙과 샷을 구사하려는 노력을 하기 때문에 골프가 우리에게 더욱 흥미를 불러온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모든 샷이 어디로 날아가는지를 알고 있다면 아마 골프가 재미 없어질지도 모른다.
창조적인 샷을 위한 준비과정을 다시 요약하면 규칙적으로 호흡하기, 표적과 날아가는 공이 표적에 떨어지는 이미지 그리기, 표적을 보며 방향 설정하기, 풀 스윙으로 거리에 적합한 연습 스윙하기, 표적에 대한 클럽과 자세 겨냥 점검 재점검하기, 그립 다시 쥐기, 올바른 스탠스 취하기, 심리적 압박감 느끼기, 항상 같은 순서로 준비하기 등이 일관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골프 샷의 구성요인은 클럽 움직임의 시작과 끝, 두 가지를 꼽는다. 골프 기술의 습득 방법과 실행을 운동학습이론서인 (Proctor & Dutta, 1995)에서 제시한 일반적인 운동 기술 습득 과정에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복잡한 동작이 요구되는 과제를 수행하려면 더 큰 프로그래밍 시간이 요구된다. 골프 스윙 동작 자체가 복잡하고 정교하므로 이를 정확하게 수행하려면 공 뒤에서 표적을 보며 준비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운동 프로그램은 항상 공 뒤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2. 움직임은 단순히 인체의 각 관절의 협응이 아니라 공간과의 협응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움직임은 마음, 뇌와 신체가 의도할 때 시작되며 각 관절의 운동 범위와 근육의 수축과 이완 비틀림은 이에 수반될 뿐이다.
클럽을 스윙할 때 동원되는 각 관절들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움직이는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에 유연하게 연결된다. 흔히 타이밍으로 표현되는 말이다.
클럽 핸들의 움직임을 주목해보면 공간에서 바람직한 경로를 따라 이동할 때 공을 향한 또한 표적을 향한 효율적인 클럽헤드의 경로와 스윙 플랜을 구사할 수 있다. 만약 균형을 취하고 있으며 표적을 향한 피니시 자세를 한다면 스윙에 동원된 각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운동한 것으로 보면 된다.
3. 움직임의 오류는 물리적으로 파워를 만들려고 하기 전에 찾아낼 수 있다. 운동 수행중이라도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자기교정(self-correction)이 가능하다.
스윙하는 중에 몸의 균형을 잃거나 임팩트하는 순간 클럽페이스 스윗 스팟에 공이 맞지 않아 스윙을 다하지 않거나 그립 쥔 손을 풀었어도 날아가는 공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4. 야구 배팅을 보면 스윙을 시작하기 전 초기 동작에서 다양한 동작을 볼 수 있다. 배트의 각도, 스윙을 시작하는 위치, 핸들의 위치가 선수마다 달라도 임팩트 순간은 거의 같다. 골프 스윙도 마찬가지다. 골퍼마다 다양한 스윙 방법과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임팩트 순간은 같다. 하지만 골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요인은 시작이다. 클럽을 공 뒤에서 표적 반대 방향으로 가져갈 때 처음 10cm를 중요한 구간으로 강조한다. 만약 이 구간이 바르지 않았다고 느껴지면 스윙하는 중에 스스로 교정하게 된다.
5. 골프 클럽을 쥔 두 손이 스윙을 시작할 때 같이 움직이지 않고 따로 움직여도 스윙을 마쳤을 때 즉, 피니시했을 때에는 두 손이 함께 움직인 것을 볼 수 있다.
>>글 박영민 전 고려대 교수
국내 골프칼럼니스트 1세대. 고렫대와 한국체육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방송해설은 물론 일간지, 스포츠지 등에 많은 칼럼을 연재했다. '골프의 이론과 실제', '골프'(체육고등학교 교재)등 저서도 다수.
와인을 거품의 유무로 분리하면 거품이 생기지 않는 ‘안정 와인’(still wine)과 거품이 생기는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이 있다. 이산화탄소가 함유되어 잔에 따를 때 거품이 이는 와인을 통틀어서 스파클링 와인 혹은 발포성 와인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샹파뉴’도 스파클링 와인의 일종이다. 그러나 거품이 난다고 해서 모두 샹파뉴는 아니다.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스파클링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프랑스의 알사스를 비롯한 일곱개 지역에서 소위 크레망(cremant)이라는 수준급의 스파클링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사용되는 포도 품종에는 차이가 있지만, 방식도 거의 샹파뉴 방식으로 주조된다. 한때는 크레망의 레이블에 ‘샹파뉴 방식으로 주조’라는 문구가 들어가기도 했지만, 샹파뉴 지역 생산자들의 항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밖에도 스페인의 대표적인 스파클링 와인인 카바(cava)가 있고, 미국·이탈리아·호주 등에서도 여러 종류의 스파클링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그러니 거품만 난다고 샹파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물론 맛과 향, 즉 질에서도 분명 차이가 있다. 샹파뉴의 섬세하고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꽃과 과일 향은 물론이고 거품의 질(잘고 가늘며 기포가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이 좋은 거품이다)에서도 큰 차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샹파뉴가 발효할 때 형성되는 이산화탄소를 병 안에 가두어서 거품을 만드는데, 호주나 미국에서 생산되는 많은 스파클링 와인은 이산화탄소를 주입해서 만들어진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쯤 떨어진 지역을 샹파뉴(La Champagne)라 부른다. 보르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보르도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샹파뉴는 이 지역의 수도인 랭스(Reims)를 중심으로 에뻬르네(Epernay)와 에(Ay)라는 도시 주변에서 재배된 샤르도네, 피노 누와, 피노 머뉘에, 이 3가지 세빠주와 이 지역의 전통적인 주조방식인 샹파뉴 방식(methode champenoise)으로 주조하고 숙성하여 병입한 스파클링 와인에만 붙일 수 있는 등록된 상표 이름이다. 한때 이브 생로랑(YSL)이 샹파뉴란 이름의 향수를 시판했다가, 샹파뉴 제조업자들이 제기한 소송에 패해, 결국 YSL(이브 생로랑의 이니셜)로 이름을 바꾼 유명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상파뉴의 상표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일 등에 흔히 마시는 플라스틱 마개로 된 소위 우리식 ‘샴페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샹파뉴가 아니며 질적인 면에서 아주 형편없는, 그냥 스파클링 와인에 불과하다. 참고로 샹파뉴는 프랑스어이고, 샴페인은 영어식 표기다.
사실보다는 신화에 가까운 일화지만, 샹파뉴는 17세기 랭스 부근 오빌리에(Hautvillier)란 조그만 마을의 수도사이자 와인 주조자였던 돔 페리뇽(Dom Perignon)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딴 돔 페리뇽이 최상급 샹파뉴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샹파뉴는 누가 뭐래도 기쁨과 축제의 상징이다. 탄생과 승리는 물론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샹파뉴다. 옛날에는 ‘왕들의 와인’이었다가, 지금은 ‘와인의 왕’이 되어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누리고 있다. 약 300헥타르의 면적에서 연간 3억 병 정도 생산되는 샹파뉴 한 병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포도의 양은 약 1.2kg이며, 원자재인 포도 값도 다른 지역이 보통 kg당 1유로를 조금 넘는 데 비해 샹파뉴에서는 7유로 정도로 고가다. 역시 제대로 된 축제나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값을 치러야 하나 보다.
전 세계에서 매 초마다 10병의 샹파뉴가 터진다고 한다. 잔 안에서 쉼 없이 솟아오르는 잘고 섬세한 거품은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귀를 간지럽게 하는 그 소리는 모래사장 위로 파도가 스치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축제의 술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 샹파뉴는 204개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2007년 생산량은 3억3870만 병이나 된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45억유로(6조8000억원 정도)이며, 그중 반이 수출에서 이루어진다. 마시는 사람들의 기쁨과 축하의 자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상품이기도 하지만, 샹파뉴 지역과 프랑스의 경제를 위해서도 크게 기여하는 효자 제품임에 틀림없다.
샹파뉴는 빈티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샹파뉴 지역은 프랑스 와인 산지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기후가 한랭한 편이라 같은 해 생산한 포도로만 주조하기가 어려워, 여러 해 여러 떼루아에서 생산된 와인을 블랜딩하여 주조하기에 빈티지가 없는 것이 주를 이룬다. 기후 조건이 특별히 양호한 해에만 주조가 가능한 빈티지 샹파뉴는 10년에 평균 두 번 꼴로 나온다.
그리고 샹파뉴는 화이트와 로제가 있으며, 당도에 따라 잔여당분 0g인 부뤼트 나튀르(Brut nature)에서 잔여당분 50g 이상인 두(doux)까지 있다. 빈티지 없는 샹파뉴는 8도, 빈티지 있는 것은 10도, 그리고 오래된 빈티지 샹파뉴는 12도 정도에서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또 한 가지, 샹파뉴를 딸 때는 병목을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하면 안 된다. 자칫 사람에게로 코르크가 튀어나가고 원치 않는 샹파뉴 세례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한 사전조치다. 묶인 쇠줄을 풀어 그대로 코르크 위에 씌워 놓은 채, 병을 약간 기울인 상태에서 코르크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병을 돌린다. 즉 (오른손잡이일 경우) 왼손으로 코르크를 단단히 쥐고, 오른손으로 병을 돌린다는 얘기다. 그리고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천천히 코르크를 뽑아(약간의 연습이 필요하지만) 가스가 ‘피식’ 하고 새어나가게 한 후, 가능하면 소리가 거의 없이 여는 것이 샹파뉴를 따는 최고의 예의이고 멋이다. 샹파뉴 병을 열심히 흔들어 승리자의 머리 위로 거품을 마구 뿜어내는 행위는 특별한 세리머니일 뿐이다.
샹파뉴가 축제와 유혹의 술인 만큼 많은 일화가 전해온다. 대단한 샹파뉴의 애호가로 목욕도 샹파뉴로 했다는 루이 15세(Louis XV)의 애첩 퐁파두르(Madame de Pompardour) 부인은 “아무리 마셔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지 않는 유일한 술”이라 극찬했다. 그녀의 샹파뉴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인지, 처음으로 만든 샹파뉴 잔은 그녀의 젖가슴에서 주물을 뜬 것이란 소문이 돌 정도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가슴은 그리 풍만하지 않았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카사노바나 돈 주앙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도 샹파뉴가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넘치는 개인적 매력을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유럽 귀족 여성들의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고, 작업을 거는 데 샹파뉴보다 더 적절한 수단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 장 홍 (張洪)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A는 1977년 교육공무원으로 임용됐다. B는 1993년 A와 결혼해 약 15년간 혼인생활을 하면서 가사를 전담하였다. A는 2006년에 퇴직하면서 퇴직연금을 받기 시작해 지금은 매월 212만8600원을 받고 있다. B는 A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A가 받고 있는 퇴직연금도 재산분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A가 사망하기 전날까지 A가 받는 공무원 연금액 중 일정 비율을 자신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B의 주장은 인정될까?
위 사례의 쟁점은 ①공무원 퇴직연금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 ②공무원 퇴직연금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된다면 다른 일반재산과 다르게 재산분할의 비율을 정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재판상 이혼을 전제로 한 재산분할에서 분할 대상이 되는 재산과 그 액수는 이혼소송의 사실심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하여 정한다.
만일 그 당시 직장에 근무하는 부부 일방의 퇴직과 퇴직금이 확정된 바 없으면 장래의 퇴직금을 분할 대상이 되는 재산으로 삼을 수 없음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 뒤 부부 일방이 퇴직하여 퇴직금을 받았고, 재산분할청구권의 행사기간(이혼한 날부터 2년)이 경과하지 아니하였으면 수령한 퇴직금 중 혼인한 때로부터 사실심 변론종결일까지 제공한 근로의 대가에 해당하는 퇴직금 부분은 분할 대상이 된다.
이와 달리 부부 중 일방이 이혼 당시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경우 퇴직일과 수령할 퇴직금이 확정되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장차 퇴직금을 받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장래의 퇴직금을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재산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장래 퇴직금을 받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정은 재산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하는 데 필요한 기타 사정으로 참작될 뿐이다.
위 사례에서 대법원은 두 가지 쟁점에 대하여 모두 판단하였다. 먼저 이혼소송의 사실심 변론종결 당시에 부부 중 일방이 공무원 퇴직연금을 실제로 받고 있는 경우 이미 발생한 퇴직연금 수급권이 재산분할에 포함된다고 하고, 연금 수급권자인 배우자가 매월 받는 퇴직연금액 중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상대방 배우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재산분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두 번째로 공무원 퇴직연금 수급권에 대하여 정기금 방식으로 재산 분할을 할 경우 공무원 퇴직연금 수급권과 다른 일반재산을 구분하여 개별적으로 분할 비율을 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전체 재직기간 중 실질적 혼인기간이 차지하는 비율, 당사자의 직업 및 업무내용, 가사 내지 육아 부담의 분배 등 상대방 배우자가 실제로 협력 내지 기여한 정도 기타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의 위와 같은 판단에 의하면, B는 A가 받는 퇴직연금에 대하여 재산 분할을 청구할 수 있으며, 정기적으로 특정 금액을 지급 받을 수 있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작가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위해서 달려갈 수도 없는 곳임을 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처절하게 바쳐서 작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구름의 바다 위로 동이 튼다. 나는 지금 2002년 11월, 나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하러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 있다. 매일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매일 해가 새롭게 뜬다. 지금 구름의 바다 위에 무지개 빛깔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름바다는 내가 작년에 많이 썼던 King′s Blue이다.”
추상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홍정희(1945~ ) 화가가 2002년 12월호 에 쓴 글의 일부이다. 한 가정의 주부로, 같은 미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의 어머니로 오십 여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화혼(畵魂)의 세계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학창 시절의 작품을 모두 불사른 그 결연함이 그만의 세계를 열어왔다.
‘특정 사조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채 50년 간 꾸준히 색채 탐구와 부단한 모색과 실험, 자신만의 색면(色面) 회화의 세계를 구축,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평론가들은 예찬한다. 1996년 현대화랑에서 펼친 전람회는 1000호(5.3mx2.9m) 크기의 초대작을 비롯해 100호(1.6mx1.3m) 40여 점으로 화랑을 가득 채운 장쾌한 눈부심에 숙연할 따름이었다. ‘아(我)’ 주제에서 ‘탈아(脫我)’ ‘passion’ ‘nano’로 이어져 온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깊은 사유(思惟)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아래 그림은 ‘탈아(脫我)’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인사동 어느 모퉁이 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추상화 작품들로 벽면을 장식하던 첫날에 떼어 온 것이다. 화랑 주인은 구상(具象)의 다른 그림을 권했지만 황토 빛깔의 ‘아(我)’ 타이틀의 이 작가 그림과 나란히 걸고 싶어서 선택했다. 전시장에서 작가와 담소를 하던 중에 얼핏 시선이 간 그의 손은 영락없는 험한 노동자의 것이기에, 빤빤한 내 손이 부끄러워 뒤로 감춘 적이 있었다. 치열한 생산에 기여한 그 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추상화는 어떤 정형이 없기에 눈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갈등과 혼란을 일으킨다. 점, 선의 연결부터 색상의 다양함이 도대체 이성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화면을 흩뿌리는 무작위의 물감과 불규칙적인 붓질이 보는 이의 의식에 강하게 저항한다. 이런 작품들과 친해지려면 긴 시간의 눈 맞춤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화면의 구도와 색상의 대비와 어울림이 나름대로 거슬리지 않고 보는 이의 의식을 출렁인다. 마음의 분화구로 사유가 흘러넘쳐 용암처럼 흐른다. 내가 나를 벗어나면 나는 없다. 다만 그 길 위에는 그 무엇이 남는 걸까. 간단치 않은 화두이다.
미술사는 현대 추상화가 1910년대 러시아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네덜란드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규상(1918~1967) 화가들이 처음 시도한 이래, 현재 많은 예술인들이 그 주제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요즈음 세계 유수한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우리나라 원로 화가들의 모노크롬(단색 추상화)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
김태호(1948~ ) 화가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탄탄한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그리드(grid, 모눈형의 사각)의 입체를 벌집을 짓듯 쌓아 올린 아크릭 물감의 여러 색상과 선들이 오묘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캔버스에 격자의 선을 긋고 물감을 바르고 마르면 칼로 물감을 깎아내어 그리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또 깎아내고 하기를 스무 번쯤 반복한 후에야 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그 물리적 노고와 끈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100호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3개월이 걸리는 이 작업을 작가는 왜 반복하는 것일까? 비록 색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 힘든 작업에서 작가는 어떤 성취감을 느낀단 말인가? 작품 ‘내재율(內在律) 200801’은 화랑에서 전시회 첫날 작가가 직접 작품 설명도 하는 자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구입한 것이고 아내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작가는 “타이틀이 왜 내재율이냐?”는 질의에 “광부가 채광해서 귀금속을 발견하듯 표면의 물질을 깎아내 찬란한 재료를 얻음으로써 마음의 진동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서로 다른 색이 날줄과 씨줄로 천을 짜듯 하나하나의 그리드를 만들고 그들이 화폭 가득히 펼쳐진다. 바둑판 모양의 요철(凹凸) 공간이 수직과 수평의 입체감을 형성한다. 물감이 두께를 더하면서 그리드가 혹은 무너지고 혹은 일그러져 자연스레 화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층층이 다른 색들도 나타나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방에서 생명을 뿜어내는 우주를 본다”는 작가의 변(辨)이 이해된다.
한때는 이들 두 작가의 그림을 오디오 룸에 걸고 진종일 음악을 듣다가 목침을 베고 낮잠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탈아의 화두는 풀리지 않을 뿐이고, 잠재된 의식의 흐름을 운율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양(斜陽) 무렵, 서해안 작은 언덕에 올라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순간의 풍경과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 화가가 되고 싶던 열망이 그림 수집으로 대리만족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치 한 수레를 사봐야 진품 한두 점을 만날 수 있다”거나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비로소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트인다”는 격언이 통용되고 있다. 섭치란 ‘여러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못하고 너절한 것’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뛰어난 감식안으로 객관적으로도 가치 높은 미술품을 구입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미술품의 가치 평가는 주관적이므로 언필칭 경제의 잣대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여러 기법으로 표출하는 비의(秘儀)를 풀어가는 여정만으로도 예술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서녘으로 스러지는 한 줌 햇살이 깊은 고요에 침잠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새 빛이 잉태되지 않던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