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요양원은 몇 시에 약 먹여 재우냐는 질문에 경악”
- 플로렌스 너싱홈은 2014년 설립됐다. 2008년부터 운영되던 요양원을 이예선 원장이 인수하면서 지금의 플로렌스 너싱홈이 됐다. 단층 건물을 2015년 증축해 규모가 커졌다. 명칭을 너싱홈(Nursing Home)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예선(李禮先·57) 원장이 간호사이기 때문이다. 이예선 원장은 한양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노인 및 치매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김혜연 부원장은 중앙대학교 간호학과를 나와 노인전문 간호사 자격도 취득했다. 이 원장과는 모녀 사이다. 너싱홈은 미국을 중심으로 보편화한 노인보호시설의 형태로 간호사가 중심이 돼 재택간호를 한다는 개념이다. 국내에도 이러한 너싱홈은 전국에 200여 곳이 운영 중이다. 이 원장은 대학원 시절 보건복지부의 준 연구 용역에 참여해 전국의 치매 관련 시설 실태 조사에 나선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플로렌스 너싱홈을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이 원장은 말한다. “좋은 시설, 큰 시설을 많이 다니다 보니, 어떤 것이 장점이고, 어떻게 운영하면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됐죠. 그러다 플로렌스 너싱홈의 전신이었던 요양원 원장님에게 상담 요청이 와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다 아예 제가 인수하게 됐어요.” 그렇다고 학술활동을 멈춘 것은 아니다. 현재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요양시설 근무자나 관계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치매전문교육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 “시아버지를 치매로 잃었는데요, 마지막에 여러 사정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아버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평생을 피부과 전문의로 당당히 사셨는데, 그 눈빛에 평소와 완전히 다른 애절함이 담겨 있었어요. 그때의 경험이 요양원을 운영해보자는 각오를 갖도록 한 것 같아요.” 이론적 지식이나 설립 전 경험은 고스란히 플로렌스 너싱홈에 녹아들었다. 산책 가능한 정원을 확보하고, 어르신의 안전을 위해 배회로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것들이다. 충분한 환기가 어려울 때 공기청정기로 대신하는 현실적인 타협도 이론을 통해 정립됐다. 요양원을 운영하다 가장 속상할 때는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에 부딪혔을 때라고 이 원장은 말한다. “어느 어르신 가족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여기는 몇 시에 약(수면제) 먹여 재우냐고 말이죠. 또 재울 때 묶느냐고 무심히 말하던 가족도 있어요. 요양원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수면관리를 위해 낮에 활동량을 높이고 라이트 테라피 같은 비약물 요법도 활용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폐렴 위험이 있어 콧줄(비위관)을 통해 영양공급을 해야 할 때 한 손 정도 구속할 때가 있는데 이때도 가족들 동의가 있어야 해요.” 요양원을 운영하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냐고 물으니 “늘 마지막인 듯 대해드린다”고 말한다. “어르신의 영면을 접하는 일이 무뎌지지 않아요. 계속 마음 한쪽이 아려옵니다. 그래서 직원들과 늘 다짐해요. 할 수 있을 때 하자, 늘 마지막인 듯 최선을 다하자고 말이죠.”
- 2018-08-24 15:35
-
- 태양광 발전은 우리 삶에 항상 유익한가?
- 15년 전 둘째 동생의 추천으로 부여에 있는 작은 과수원을 동생과 함께 소유해 오고 있다. 농사일을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동생이 주로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함께 내려가 쉬고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만 하고 오는 농장인 셈이다. 그래도 우리는 가을에 밤과 감을 수확하고 좋은 대추는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재미로 농장을 가꾸어 왔다. 그러던 어느날,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농장 인근에 태양광 설치라는 현수막이 붙고 노후를 위해 2억을 투자하면 20년간 매월 일정 금액을 주겠다는 분양 광고가 나면서 마을이 소란스러워졌다. 과수원 인근 가파른 산의 녹지를 개발하여 태양광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주민들이 모여서 태양광 설치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진정서를 정부 각 기관에 내고 허가 반대 운동을 펼쳤다. 가정주부로 평범하게 살던 제수씨가 문서처리에 어두운 시골 주민들의 요청으로 전면에 나서 반대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평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자주 상담을 해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제수씨는 나에게 제반 문제에 대해 물어봤고 나도 간접적으로 이 운동에 개입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태양광 발전소 설치를 위한 작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정책적 대응방안으로 장려되고 있다. 태양광 발전은 태양광을 직접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기술이다. 즉 햇빛을 받으면 광전효과에 의해 전기를 발생하는 태양전지를 이용한 발전방식을 말한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 2010년 30ha였던 산지 내 태양광 사업 면적이 2017년 9월 기준으로 681ha까지 늘어났으며, 문재인 정부의 재생에너지 강화정책으로 인해 앞으로 그 추세는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태양광 사업이 멀쩡한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태양광을 설치함으로써 자연을 훼손시킨다는 점이다. 즉, 친환경 사업이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다. 이와 관련 거창군과 같은 지자체는 태양광 반대 견해에서 주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가 하면 일부 행정기관은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 정책에 호응하여 복지부동의 자세로 환경이나 안전을 뒷전으로 하여 추진하고 있는 사례가 있어 걱정스럽다. 최근 정부도 태양광 사업의 부작용을 이해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기 단계에서 문제점을 보완하여 실시하려고 하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수씨와 주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부여군청과 면사무소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허가를 보류시킬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제수씨의 환경 훼손 반대 운동을 보면서 민주주의는 앙가주망의 정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싸게 시골의 산지를 매입하여 일부 몰지각한 소수의 공무원과 이해관계자에게 이익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종용하여 국가의 자연경관을 훼손시키는 사례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것 같아 환경 훼손으로 인한 국가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다.
- 2018-08-06 08:44
-
- 내 몸을 잘 가꾸는 방법, 필라테스
- 최근 건강한 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근력 강화와 함께 체형 교정에도 도움이 되는 필라테스가 주목받고 있다. 새로운 몸 관리 트렌드로 자리 잡은 필라테스를 박애란(68), 이두백(69) 두 동년기자가 체험해봤다. 촬영 협조 리얼라인 필라테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 독일의 요제프 필라테스(Joseph Pilates)에 의해 고안된 운동법인 필라테스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서 다친 환자들의 재활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흔히 젊은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에게 열려 있는 종목이다. 필라테스는 주로 골반과 척추를 지지하는 근육인 코어근육을 강화하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몸매를 가꾸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특히 활동량과 근육량이 감소하는 시니어에겐 큰 충격을 주는 운동이 아니면서 충분한 유산소 운동이 되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김선미 리얼라인 필라테스 대표는 “체형에 따라 운동의 목표는 다르지만 보통 유연성과 근력 강화, 밸런스 증진, 통증 케어 등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박애란 동년기자 젊은 여성들이 필라테스를 하는 모습을 보고 ‘몸매가 어쩜 저렇게 예쁠까! 기회가 된다면 나도 꼭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나이가 있어 조금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강사의 이해하기 쉬운 설명 덕분에 어렵지 않게 따라할 수 있었다. 이두백 동년기자 남성들에겐 조금 낯선 운동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웬걸, 꽤 많은 남성 회원들이 필라테스 스튜디오에 있었다. 옛날에는 몸매 관리하는 남자는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역시 시대가 많이 변한 것 같다. 몸매 관리하는 남자라니… 멋있다! 필라테스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기구 필라테스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독특한 모양의 기구들이 눈에 띈다. 언뜻 보면 운동 장비보다는 중세시대 고문 장치처럼 보이지만 이것들 모두 다양한 운동 동작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다. 대표적으로 스프링의 저항을 이용해 코어를 강화하는 ‘리포머(reformer)’, 유연성 향상과 코어와 척추 주변 근육 강화에 도움이 되는 ‘캐딜락(cadillac)’ 등이 있다. 이러한 전문기구가 없는 집에선 비교적 저렴한 폼롤러, 짐볼, 보수 등의 소도구를 사용하거나 의자, 수건 등을 이용해 운동할 수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 침대와 뜀틀같이 생긴 기구, 스프링이 달린 것 등 난생처음 보는 기구들이 신기했다. 마치 놀이터에 온 듯한 기분이랄까! 운동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구들을 이용해 허리와 어깨 근육 이완 운동을 진행했다. 기구의 힘을 빌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었다. 이두백 동년기자 몇 가지 기구를 사용해 양팔과 다리, 몸을 전후좌우로 밀거나 당기는 운동을 반복적으로 진행했다.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운동이 되었다. 20분 정도 지속하다 보니 숨이 차올랐고 40분째엔 내의를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땀이 났다. 보기에는 별거 아니네 싶었지만 실제로 해보니 간단한 운동이 아니었다. 비싼 수업료가 부담스럽다면 필라테스를 시작하기 전 많은 사람이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비용 문제다. 수업료는 지역, 수업 인원, 프로그램 등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만큼 전문 강사진과 검증된 프로그램 등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최소 3~4곳에서 상담을 받아본 후에 결정할 것을 추천한다. 과거엔 고가의 운동인 필라테스를 접하기 어려웠지만 최근 들어 저렴한 스튜디오를 비롯해 몇몇 주민센터에서도 필라테스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필라테스가 처음이라면 비싼 개인 수업보다 그룹 수업이 이상적일 수 있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필라테스’ 또는 ‘홈 필라테스’ 등으로 검색하면 집에서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교육 영상을 무료로 찾아볼 수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 필라테스는 비싸다는 생각에 등록을 항상 미뤄왔다. 이번 기회로 일대일 수업을 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체형 문제, 체형을 교정할 수 있는 운동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맨몸으로 하는 몇 가지 운동 동작을 알아두면 집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쯤은 필라테스에 투자해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두백 동년기자 전신거울을 보며 운동한다는 게 처음에는 매우 어색했지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통해 내가 동작을 잘 따라 하고 있는지, 어느 부위가 약해서 밸런스가 무너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이라면 가능한 한 몸에 딱 맞는 옷을 추천한다. 너무 헐렁한 옷을 입을 경우 몸의 굴곡을 잘 볼 수 없어 제대로 된 운동이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18-07-27 10:57
-
- 귀농·귀촌이 아니라 ‘이도(離都)’
-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2018-07-27 10:57
-
- 꼭 알아야 할 위로의 언어
- 두 해 전 일이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큰 사고를 당해 입원을 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며 병원을 두 차례 옮기기까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을 방문해 친구의 심적, 영적 회복을 도왔다. 상태가 많이 좋아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자 사람들이 문병을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내가 올 때가 가장 편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문병 와서 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너무 진지하게 몸 상태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충고를 하는 친구, 보험 얘기를 하는 사람 등 각자 환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지만, 환자는 이런 말들보다는 육체적 고통에 대한 위로가 무엇보다 필요한 상태다. 게다가 문병객들이 올 때마다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몸 상태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을 해야 하는 일도 힘들다. 환자의 재활 스케줄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아무 때나 방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문병을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간혹 자기 시간에 맞춰 방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리 바빠도 환자 상태와 스케줄을 고려해 방문하는 것이 예의다. 더구나 예후가 좋지 않은 병으로 인해 입원해 있는 환자를 만나러 갈 때는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도 위로 환자를 만났을 때 어떤 말도 위로가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낫다.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라고 말하지 말고 필요해 보이는 게 있으면 그냥 도움을 주는 것이 좋다. 환자 혹은 환자 가족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뭐가 필요한지 알게 된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를 위해 하루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서 대신 환자를 돌봐준다면 보호자가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할 수 있고, 몇 시간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환자에게 어린 자녀들이 있다면 돌봐주고 음식을 해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캐시 피터슨(Cathy Peterson)은 말기암 진단을 받은 남편을 돌보는 과정과 남편의 죽음 이후 몇 해간의 삶을 기록한 책 ‘애도 수업’에서 바른 돌봄과 위로에 대한 값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남편이 말기암 진단을 받은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자 사람들이 보인 첫 반응은 회피였다고 한다. 마주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 진단을 받은 환자만이 질병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오해다. 말기암 환자들도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평범한 어느 날의 안부를 묻듯 “몸은 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면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질병, 사별을 겪은 사람에게 말을 건넬 때는 당황스럽고 불편할 수 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상황을 피하는 사람도 있다. 장례식장에 갔을 때 우리는 유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는 조문을 간다는 것 자체가 큰 위로다. 그러므로 애써 억지로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손만 잡아줘도 된다. 때로는 뻔한 위로의 말보다 그게 더 위안이 된다. 배려 없는 응원 되레 상처되기도 간혹 유족에게 건네는 형식적인 말들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힘내세요”라는 말은 그럴듯한 위로처럼 들리지만 큰 의미는 없는 말이다. “좋은 곳에 갔을 거야”라는 말도 그렇다. 유족 입장에서 어디가 더 좋은 곳일지를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이만하면 됐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도 위험하다. 사별한 사람은 충분한 애도를 했다고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의 가족에게 “이제 떠날 때가 된 거야”라고 말하면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이렇듯 격려와 위로를 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도 상대에게는 아픈 데를 후벼파는 말이 되기도 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이런저런 치료 방법들을 시도해봤는지, 자신이 추천한 의사에게 가봤는지 등을 물어보는 것은 마치 가족이 부주의해서 고인의 죽음을 불러온 듯한 인상을 주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질문이다. 심지어 고인이 생전에 소유했던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묻는 사람도 있는데, 부디 가족들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자.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른다면 솔직한 심정을 말하는 것이 좋다. “뭐라 위로드릴 말이 없습니다.” 어떠한 감동적인 말이나 문장보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함부로 교훈을 늘어놓거나 종교적인 언어로 유가족을 위로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곁에서 손잡아주는 것이 더 낫다. 한 해에 두 아이를 각각 백혈병과 뇌종양으로 잃은 부모가 있었다. 두 아이가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을 때 하루는 목사가 찾아와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시험 외에는 주시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아이의 부모는 큰 상처를 입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종교적인 언어, 성경 구절 등을 부적절하게 인용해서 하는 위로는 가족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실과 슬픔의 치유’의 저자 미셸과 앤더슨(Kenneth Mitchell and Herbert Anderson)은 이러한 위로를 ‘미성숙한 위로’라고 말한다. 말보다 마음을 전해야 사별자는 마음껏 슬픔을 표현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별자가 편하게 생각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줘야 한다. 그리고 ‘말’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애도의 과정에서는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끌어주려는 시도보다는 그냥 곁에서 묵묵히 함께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어떤 위로보다 낫다. 사별자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면 잘 들어주고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라는 표현 정도가 좋다. 남아 있는 가족에게 가장 좋은 위로는 고인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고 추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가족은 고인의 삶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거나 고인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애도 초기뿐 아니라 시간이 한참 지난 후라도, 고인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고인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등을 말해주는 것이 좋다. 특히 고인의 자녀에게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다.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게 되고 건강하게 추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위로의 말에는 이처럼 존중, 존엄, 긍휼이라는 참된 가치가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내게 꼭 필요한 위로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이 어떠해야 할지 가늠이 될 것이다. 사별자는 마음껏 슬픔을 표현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별자가 편하게 생각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줘야 한다. 그리고 ‘말’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윤득형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도미, Chicago Theological Seminary과 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목회심리학과 영성상담학을 전공했다. 현재 각당복지재단에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 회장, 의향서 본부장, 애도심리상담센터 센터장 등을 맡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숭실사이버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슬픔학개론’이 있고, ‘애도수업’, ‘우리는 왜 죽어야 하나요’ 등을 번역했다.
- 2018-07-23 08:55
-
- 14전 15기로 사법고시 넘은 오세범 변호사
- 때로 선거나 시험은 도전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얼마 전 제7회 지방선거에서 아홉 번의 출마 만에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이 그랬다. 범인들은 함부로 흉내 내기 힘든, 지치지 않는 도전은 과정만으로도 가치를 갖는다. 숫자의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제 5년 차 변호사가 된 한 사내가 있다. 경력만 보면 막 커리어를 쌓아가는 푸릇한 젊음이 연상되지만, 이미 초로의 몸이 됐다. 대신 그의 가슴에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얻은 흉터와 사법고시 14전 15기라는 숫자가 훈장처럼 달려 있다. 오세범(吳世範·63) 변호사의 이야기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선 맹수처럼 그를 둘러싼 카메라와 마이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4년을 꼬박 도운 세월호 가족의 가슴을 후벼판 사건의 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인을 제공한 방송사의 요청에 의한 조사였다. 결과도 대중을 쉽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방송인의 사회적 책임감 부족이 낳은 참사입니다.” 오세범 변호사는 얼마 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MBC의 ‘전지적 참견 시점’ 세월호 보도영상 사용 논란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MBC로부터 긴급 진상조사위원회 참여를 부탁받았고, 조사에 참여후 위원회와 함께 언론에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이해하는 만큼 누구보다 철저하게 조사하려고 애썼죠. 제작 과정을 모두 확인했는데 사회적 공감대와 상식 부족이 만들어낸 사건이에요. 편집 과정에서 다른 문제에 제작진의 관심이 쏠려 제대로 점검이 안 된 문제도 있었죠. 외부에선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건으로 너무 힘들어하면서도 조사 결과를 이해해주셨죠.” 변호사 오세범 그리고 세월호 변호사 오세범을 이야기할 때 세월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운명처럼 인연을 맺었다”고 표현했다. 그에게 세월호와 관련한 경험은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계속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몸속에 박혀 있는 그것이 사회에서 진주 같은 존재로 변화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변호사 일을 시작한 것이 2014년 2월이에요. 2011년 11월 사법고시 합격 후에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정식 변호사로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두 달도 안 돼 일이 일어났어요. 아이들이 죽어가는 과정이 온 국민이 보는 TV로 생중계됐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바로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오 변호사는 그 길로 변호사를 대변하는 두 단체, 대한변호사협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모두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법률지원 창구가 일원화되면서 만들어진 대한변협의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및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법률상담지원단 중앙지원팀장까지 맡았다. “아시는 것처럼 부당한 여러 원인 때문에 유가족은 스스로 조직을 갖춰야 했어요. 그래서 상주 역할부터 당직까지 반별로 움직였는데, 이에 맞춰 변호사들도 반별로 담당이 정해졌죠. 전 2학년 1반을 맡아 특히 1반 가족들과 친분이 두터워졌어요. 반별 스케줄에 맞춰 저도 정기적으로 안산으로 달려갔죠. 뿐만 아니라 세월호 유족들과도 두루 친해졌어요. 4년을 함께 지냈으니까요.” 2학년 1반에서는 세월호 인양과 함께 뒤늦게 가족에게 돌아온 조은화 양을 비롯해 학생 18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오 변호사는 의지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는 부당한 압력을 막는 법적 우산이 되고자 집회 참석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부가 세월호 특조위의 활동을 강제로 종료시키려 했던 2016년엔 다른 민변의 변호사들과 함께 릴레이 단식에도 나섰다. 옥사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 애초에 그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청년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 그는 학자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많은 학우들이 외치던 독재정권 타도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4학년이 됐을 때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들이 사라졌더라고요. 상당수가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거죠. 독재 말 상황에서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도피임을 깨달았어요. 그제야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마음먹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유신타도와 헌법 개정을 외친 대가는 적지 않았다. 징역 2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적잖은 형량과 옥살이는 그를 기죽게 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4월 19일이었어요. 구치소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했어요. 누구인지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고함이 전해지는 걸 막을 순 없었죠. 목소리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저도 외치기 시작했어요. 유신헌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민주주의 회복을 말이죠. 결국 긴급조치 9호 위반의 혐의로 형량을 2년 더 받았어요.” 다행히 형량 4년을 모두 채울 필요는 없었다. 2년 4개월 만인 1979년, 그는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하지만 자유의 몸으로 보내는 시간은 짧았다. 이번엔 ‘YMCA 위장결혼식’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집회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절, 사전신고 없이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결혼식으로 위장해 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10·26 사태가 일어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민주화 인사들 사이에서 저는 갓 출소한 막내여서 유인물을 만들고 나르는 잡일만 맡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에요. 결국 1년 6개월 형을 받고 1년 만에 다시 형 집행정지를 받았어요. 중간에 잠깐 쉬고 총 3년하고 넉 달을 옥살이한 셈이죠.” 평범하게 끝나지 않은 평범한 삶 그 과정에서 그가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사는 것. 학생운동과 연행, 조사 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세상물정 몰라 그런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진짜 세상물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갓 출소한 27세 청년은 학교에서도 제적당해 먹고살 길도 막막했다. 남들처럼 자격증도 따고 취직도 하기로 맘먹었다. 다행히 공부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렇게 고압가스와 열관리 자격증을 따고 제약회사 보일러실 담당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그 시기 사회는 또 다른 거대한 흐름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노동운동이었다. 큰 파도는 그렇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죠. 하루에도 수십 개씩 노조가 만들어졌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도 노조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노조 총무부장을 맡게 됐죠. 노조활동을 반대하던 사 측에서는 제가 이력서에 서울대학교 중퇴 사실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고, 결국 해고됐어요. 복직소송에선 졌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김칠준 변호사를 만나게 됐어요. 법조인으로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김칠준 변호사와의 인연은 의뢰인과 인권변호사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원에 자리 잡은 김칠준 변호사 사무소에 상담실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다산인권센터와 법무법인 다산이 시작된 곳이다. “노조와 관련한 5~6건의 소송 당사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송사와 관련한 경험이 생기더라고요. 그 경험이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당시엔 노동 상담에 관심 있는 변호사가 그리 많지는 않아 관련 사건을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인근에 있던 삼성전자나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같은 큰 기업의 노동자들이 대상이었죠.” 1993년, 그는 장명국 발행인과의 인연으로 내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한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자주관리경영을 원칙으로 창간한 언론사다. 그는 이사 겸 업무 기획실장으로 신문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4년간 일했다. “말이 기획실장이지 잡다한 사무를 도맡아 하는 총무 같은 역할이었죠.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신문사라는 곳이 내 생활이 없는 곳이잖아요. 밤낮없이 마감에 시달리는 기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꽤 고생이었나봐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앞에 앉아 있던 여고생이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지금 그랬으면 그런가보다 했을 텐데,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제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진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지,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보람 있는 직업 중에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도울 수 있는 변호사가 제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법고시 도전을 결심했어요.” 안정된 삶 뒤로 하고 책상 앞으로 변호사가 되는 일은 평범한 결심과는 결이 다르다. 요즘 몸이 좀 불었으니 아침마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가장인 남편이 고시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쉽게 허락할 아내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응원해줬다. 서울대학교 시절 농활에서 만난 1년 후배인 아내는 당분간 생계는 자기가 책임지겠노라고 했다. 오랫동안 그를 봐온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는 “사법고시를 통과하는 데 평균 5년 정도 걸리니, 나도 그 정도면 될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들 대학 입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끝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97년에 도전한 지 3년만인 2000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번번이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면 쉽게 포기했을 거예요. 2차 시험 결과가 매년 12월에 발표되는데 바로 석 달 후에 다시 1차 시험이 진행되거든요. 2차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공부한 것이 아까워 다시 1차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다시 2차 시험에 도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더라고요.” 그렇게 7년이 지나자 고비가 다가왔다. 경제적으로도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법무법인 다산에 들어가서 민사 사무장을 하면서 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더라고요. 처음엔 붙어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는데, 붙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나중엔 법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도 취업이 보장되는 의대와 육사에 합격해서 부담을 덜게 되면서 다시 일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도전했죠.” 그리고 2011년 겨울, 드디어 사법고시 53회 시험에서 그는 최고령으로 합격증을 받는다. 첫 도전을 한 지 15년 만이었다. 2차 시험만 8번을 봤다. 매스컴도 주목했고,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제가 제일 좋아했어요.(웃음)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이미 아이들은 취업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저만큼 좋아하지는 않더라고요. 이틀을 잠을 못 잤어요. 하루는 믿어지지 않아서, 하루는 너무 좋아서요.” ‘안전한 삶’ 위한 법조인 되고파 변호사가 된 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가 많은 인터뷰를 통해 말했던 ‘국민과 더불어 함께 웃을 수 있는 봉사하는 법조인’이 되었을까. “제가 꿈꿨던 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생명안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죠. 사고에 무관심하고 사람이 죽어도 위자료 주고 끝내는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대한변협 생명존중재난안전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집단재난 현장지원 변호사 매뉴얼도 만들었어요. 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변호사도 우왕좌왕하기 쉬우니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고양터미널 화재나 오룡호 침몰같은 재난 사건에서 얻은 경험을 결과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민변의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공간 이상으로 생활 단위,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운영을 투명화하고 마을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주민, 특히 시니어 세대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50플러스재단을 통해 공동주택 입주자 대표가 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관련 민·형사 사례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어요. 남들에게 잘하라고 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저도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자회의 감사를 맡았어요. 입주자 커뮤니티의 활약에 따라 입주자들의 삶과 안전까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중년의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실패했을 때 지고 견뎌야 할 짐도 무겁다. 자칫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주위 평가를 의식하며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말이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도전하기 전에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요. 그런 주관적 열망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음에는 그에 대한 객관적 판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말이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저의 경우는 아내였죠. 그리고 도전 가능한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것까지 점검하면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게 돼요. 막연히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렇게 점검후 실천해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마음속에 어떤 열망이 뜨겁게 자리 잡고 있는지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 2018-07-09 13:25
-
- [카드뉴스] 사춘기 손주에게 이런 질문은 그만!
- 전보다 말수도 적어지고 물음에도 까칠하게 반응하는 사춘기 손주. 혹시 그동안 무심코 던진 질문들이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사춘기 손주와 대화 시 피해야할 질문들에 대해 강금주 청소년 상담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봤다. 인격을 공격하는 질문 (예) 넌 그런 것도 모르니?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 현장에 없는 제3자의 흠이 드러나는 질문 (예) 네 친구 OO는 애가 좀 음침하지 않니? 조부모의 유식함이 드러나고 아이의 무지가 드러나는 질문 (예) 요즘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가장 큰 이슈가 뭔지 아니?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질문 (예) OO는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다는데, 넌 뭐로 그 점수를 받을 거야? 아이를 의심하는 질문 (예) 학원 보내주면 열심히 하긴 할 거니? #손주대화법 #사춘기대화법 #조부모화법
- 2018-07-09 11:41
-
- 손주가 갑자기 욕을 한다면?
- 귀여운 손주가 앵두 같은 입술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처음 불렀을 때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훌쩍 커버린 사춘기 손주의 입에서 비속어가 흘러나온다면? 어떤 말로 다그쳐야 할지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잘대던 어린 시절과 다르게 과묵해진 손주와의 대화는 더욱 난관이다. 한창 예민하게 성장통을 겪는 손주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끼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까칠한 질풍노도 손주를 상대하는 말하기 비법, 강금주 청소년 상담 전문가에게 물어봤다. 도움말 강금주 청소년 상담 전문가·‘십대들의 쪽지’ 발행인 Q 사춘기 아이 중 조부모와의 대화 갈등으로 상담을 하는 경우도 있나요? 주로 어떤 문제이고, 어떤 해결책을 주시나요? A 요즘은 조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부모랑 살든 부모랑 살든 10대들이 겪는 갈등은 비슷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할 불평을 조부모에게 하면서, 자신이 부모와 살았다면 훨씬 더 이해받았을 거라 여기게 됩니다. 막연히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부모는 이해해줄 문제를 조부모는 잘 모른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조부모이기 때문에 아이를 수용하는 범위가 부모보다 더 깊고 넓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을 아이들에게 강조해 말해주지요. “부모보다 너를 더 사랑하고 이해해주려 노력한다”라고요. 물론 가치관 차이나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게임,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도 아이들에게 설명해줍니다. -어느 대학에 갈지, 공부는 잘하는지 학업에 대한 주제 -다니는 학교나 선생님을 나쁘게 표현하는 말 -가족 구성원 또는 아이 친구들에 대한 험담 -형제 또는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는 말 -과거에 잘못한 일을 다시 꾸중하는 말 -아이의 미래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표현하는 말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아이의 실수나 잘못을 비웃는 말 그랬구나ㆍ대단하다!ㆍ잘했어!ㆍ역시 너다워ㆍ너니까 잘하는 거야ㆍ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다ㆍ너 참 대단하구나ㆍ괜찮아ㆍ어쩜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니? Q 손주와 단둘이 있을 때 대화 소재를 찾지 못해 정적만이 흐를 때도 있죠. 이런 상황에서 조부모가 먼저 꺼내면 좋을 화두는 무엇일까요? A 아이들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내 관심사를 상대가 판단하지 않고 물어주고 들어주면 말이 통하고 자신을 인정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쉬운 화두는 10대라면 연예인(아이돌 가수)인데, 이에 대해 묻기만 해도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쏟아놓습니다. 물론 아이가 말한 그 연예인에 대해 조부모는 전혀 모를 수 있지만 그냥 들어주면서 그 사람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면 한 시간 이상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중간 중간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그 사람이 좋니?”라고 묻거나 “특히 좋아하는 노랜 뭐가 있니? 지금 들려줄래?”라고 말하면 자기가 판단 당하지 않고 온전히 수용되고 있다고 생각해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해진다. Q 손주가 갑자기 욕, 비속어 등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을 했을 때, 조부모는 아이에게 어떤 언어로 잘못된 행동을 알려줘야 할까요? A 아이를 다그치기 위해 똑같이 욕이나 비속어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이 바로 인격의 수준이다. 그 마음을 다른 말로 표현해봐라. 욕을 한다고 해서 네가 더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더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한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너 자신이기 때문에 스스로 설득이 되는 말을 해야 한다. 네가 상대에게 욕을 하면 그 사람은 네가 욕을 하든 안 하든 그대로이지만 욕을 한 너는 그 수준의 사람이 되고 만다”라는 식으로 알려줘야 합니다. “네가 한 말이 듣기에 거슬리는데 다른 말로 네 생각을 표현해봐라” 하며 아이들이 다른 말을 생각할 기회를 주면 좋습니다. Q 손주가 부모(조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에 대해 험담을 할 때, 조부모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A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경우는 드물겠지요. 특히 자기를 조부모와 살게 한 부모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가 부모에 대해 불평했을 때 부모 편을 드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조부모도 부모랑 똑같다 여겨 마음을 닫겠지요. 아이의 불평은 그대로 들어주고 “다만 너희 부모도 애쓰고 있고 힘들다”라고 말해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도 네 나이 때는 그랬다” 등 부모가 손주 나이였을 때 했던 실수나 생각을 들려주면 아이가 ‘우리 부모도 나 같았구나’ 하면서 이해하게 될 겁니다. Q 사춘기 손주가 부모에게 혼날 때 조부모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A 부모가 아이를 혼내는 상황에서 조부모가 나서면 대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이는 끼어드는 제3자에게 더 큰 반항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꾸중을 듣는 손자가 안쓰럽더라도 그 순간에는 그대로 두는 편이 낫습니다. 나중에 아이에게 따로 말할 기회를 만들면 좋겠지요. 손주의 기분이 좀 풀렸을 때 “엄마가 혼낼 때 좀 억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니? 그래도 네가 엄마의 꾸중을 묵묵히 듣는 것을 보면서 참 대견하다 생각했다”면서 위로해줄 수는 있지만 절대 부모가 잘못한 거라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됩니다. 대신 “너한테 기대가 커서 그렇게 혼낸 것”이라 말해주세요. 반대로 손주를 혼내야 하는 상황인데도 가만히 있거나 감싸면 대신 훈육하고 싶겠지만, 어디까지나 자녀교육은 부모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2018-07-05 14:09
-
- 시니어 韓流 패션, 中國을 通하다!
- 경제 성장이 절실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불 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렸더니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한 마리로 불렸다. 고도성장을 과시하듯 연이어 열린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전쟁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낸 듯 우리나라가 함박웃음 짓던 그때. 우리를 동경하던 대륙의 청년이 있었다. 한국의 발전상이 그저 궁금했을 뿐 저 먼 미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눈 맑은 청년. 훗날 그는 한류 문화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한류를 파는 중국인, 중국 온라인 패션 기업 한두이서(韓都衣舍) 두정국(杜廷國) 부회장을 만났다. 한류 때문에 하루가 바쁜 사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이 빡빡합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직접 상담하다가 돌아갑니다.” 한국에 오면 주로 뭐하냐는 질문에 재미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중국 패션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온라인 기업 한두이서그룹주식유한공사(이하 한두이서) 공동 창업자이자 부회장의 서울 일정이 야박할 정도로 쉴 틈이 없다. “그저 일만 하다 간다”는 넋두리가 여운처럼 슬며시 깔린다. 알고 보면 사정이 딱하지도 않다. 한국에 오기 위해 이용하는 중국 칭다오 류팅 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한 시간 거리. 중국 내 출장보다 가까워 당일 출입국이 가능할 정도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두정국 부회장에게 대한민국 서울은 나쁘지 않은 업무 장소다. “한국 분들이랑 짧게 몇 마디 정도 대화하면 제가 한국 사람인 줄 알더라고요. 얘기가 깊어지면요? 그때는 중국놈으로 알아챕니다!(웃음)” 중국 사람을 낮춰 부르는 표현도 넉살 좋게 쓰는 것을 보면 한국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두정국 부회장은 한국 기업과 한두이서 사이 소통 창구 기능을 톡톡히 하며 한국을 자주 찾고 있다. 최근 한국 콘텐츠 회사와의 만남은 물론 중국 진출을 희망하는 패션 업체와의 선약으로 한국 방문이 부쩍 잦아졌다. 시니어 패션도 한류다 한두이서(韓都衣舍)는 ‘한국 옷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2006년 온라인 전문회사로 창립해 2년 뒤인 2008년 본격적인 한류 패션 전문 쇼핑몰로 새 단장했다. 중국 온라인 패션 업계 1위 자리를 꿰찰 만큼 성장가도를 달리는 중.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현지 스튜디오에서 한국인 모델을 기용해 촬영한 이미지로 한두이서 홈페이지(handu.com)를 채우고 있다. 온라인 사이트에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델이 죄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친근함이 묻어난다. 한두이서가 특히 한국에서 이름을 알린 이유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한류 스타 전지현, 지창욱, 박신혜 등을 피팅 모델로 발탁했다는 점. 배우 전지현은 지금도 한두이서를 대표하는 모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출에서도 한두이서의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룹 내 자체 브랜드 16개 중 하나인 ‘H스타일’은 이용 회원만 1700만 명, 연간 매출은 우리 돈으로 3500억 원이 넘는다. 한두이서 홈페이지에는 매일 한류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유아, 어린이, 시니어 브랜드에 이르는 제품들이 각각 100개 이상 업데이트된다. 특히 ‘H스타일’ 못지않게 시니어 패션 브랜드의 활약도 눈부시다. “4, 5년 전에 꽃중년 여성을 겨냥한 한류 스타일의 브랜드 디큐나(Dequanna)를 런칭했습니다. 젊은 중국 여성 패션이 한국과 큰 차이가 안 나는 반면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중년 패션은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그것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탤런트 윤해영 씨가 ‘디큐나’ 홍보모델로 활약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큐나의 실제 구매자는 누구일까? 바로 H스타일에서 옷을 사 입는 시니어의 자녀들이다. “스스로 옷을 사 입는 시니어도 있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구매합니다. 우리 메인 브랜드인 ‘H스타일’ 회원만 1700만 명이고 한두이서몰 전체 회원이 4000만 명입니다. ‘H스타일’에 들어왔다가 ‘디큐나’가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입는 옷에도 눈이 가는 것이죠.” 현재 중국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시니어 패션 브랜드 중에서 ‘디큐나’가 1위라고 두정국 부회장은 말했다. 1위가 아니면 배우 윤해영을 어떻게 쓰겠냐며 시원하게 웃는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류를 알아보다 두정국 부회장이 배우 윤해영을 설명하면서 MBC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에 나왔던 배우라고 소개해서 적잖이 놀랐다. 1990년대 후반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이지만 한류 드라마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 그렇다면 한류 전문가 느낌이 물씬 나는 두정국 부회장은 언제부터 한국을, 한류를 직감한 것일까? “한국을 알게 된 건 한류 열풍이 불기 아주 오래전 전부터죠.” 이웃 나라 한국의 성장이 궁금했던 두정국 부회장은 한국을 알고 싶은 마음에 1993년 산둥대학교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과에 진학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어학과가 신설됐으니 한국어를 배운 첫 번째 세대다. 한류 전문가로서의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뭔가 멀리 봐서 전공을 결정한 거라기보다는 한국의 빠른 성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국어를 배운 것이 운명이었던 것이죠. 마침 우리 회사 조영광(趙迎光) 회장님도 같은 학과, 같은 반 출신입니다. 유학덕(劉學德) 한국지사장은 기숙사 룸메이트였고요.” 한국어를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많이 알게 됐다. “1980~90년대, 중국에서는 홍콩류나 일본류가 있었습니다. 오래가지 못했어요. 인기가 좀 생기나 싶었는데 사라졌어요. 그런데 한국어를 전공한 저와 회장님은 한국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 문화는 다른 나라의 유행과 달리 침투력이 강했습니다. 1990년대 말 한국 정부도 국가 정책으로 문화 관련 사업에 투자를 많이 했고요. 유행이 오래갈 것으로 판단했고 사업 콘텐츠로 삼기로 했습니다.” 한류 패션을 지탱하는 것은 한류 문화라고 두정국 부회장은 목소리에 힘을 줘 강조하면서, 한류 패션은 한류 문화, 드라마, 연극, 영화 등으로 시작해 패션으로 뻗어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 스타에 대한 친근함도 중국 스타와 비교되는 점이었다고. “중국 일반인에게 연예인이란 거리감이 있고 숭배해야 하는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한류 문화로 알게 된 한국 연예인은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뭐든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대상이었어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노래도 잘하고, 잘 노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 욕구가 있는 만큼 한류 패션도 생명력이 있다고 판단했죠. 결국 우리의 판단이 맞았음이 증명되고 있잖아요. 2003년쯤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한류의 인기는 여전합니다.” 한류 스타일로 패션 사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 그 노력의 결과로 중국에서 제일가는 온라인 패션 브랜드로 한두이서는 성장했다. 현재는 한류 패션을 넘어서 뷰티와 생활용품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투명 경영이 지속가능한 회사를 만든다 두정국 부회장에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마음 관리에 꽤 엄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5년 전부터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있다. 누구를 만나든 도를 닦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행동하고 사고한다. 두정국 부회장은 본인의 생각이 회사 비전과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두이서의 비전은 사원들과 외부 파트너가 꿈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회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만의 생각이 아니고 임원진과 함께 많은 토론을 거친 부분입니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꿈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회사 문화는 협동으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궁극적으로 직원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만들면 회사는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직원들이 부자가 되면 회사는 더 큰 부자가 되는 거잖아요. 직원이 다 실패하면 회사도 물론 무너지고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사주 일가의 갑질과 관련한 이야기가 새어나와 두정국 부회장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경쟁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항상 남을 이기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부작용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오래 사업을 하고 싶다면 투명 경영을 해야 합니다. 저희는 대내외적인 투명 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모두가 좀 솔직해야죠.” 한두이서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지양한다. 대신 작은 조직체를 많이 만들어서 개별적으로 일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든다. 실적이 좋은 팀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이때 원인을 파악해 팀원을 다른 조직으로 분산 배치하거나 개인 실력 차에 따라 조직에 기여하게 한다. “이것도 자연의 법칙입니다. 순환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이죠. 우리는 온라인 시장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두이서는 회사 내 조직이나 관련 외부 업체가 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줍니다. 물류, IT, 생산, 홍보 등 다양한 시스템을 지원합니다. 사내 자체 브랜드이든 파트너 업체이든 모두 한두이서의 시스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회사 연혁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빠르게 업무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온라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이런 조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요. 온라인에서는 이런 식으로 조직을 이끌어가야 발전 흐름을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한두이서의 장기적인 목적 중 하나가 빅데이터 자료를 기반으로 한두이서 내부 조직을 포함해 함께 일하는 업체가 더욱 편하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는 일이라고 했다. 성장 중이거나 온라인 창업을 준비하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교육도 제공하고 온라인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빅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이미 갖췄기 때문에 한두이서가 중국 내 규모가 가장 큰 온라인 브랜드 그룹이 됐다고 두정국 부회장은 설명했다. 인터뷰 당일에도 중국 진출을 희망하는 업체와 협약식이 있었다. “우수한 한국 패션 브랜드의 중국 진출을 돕는 것도 우리 일입니다. 오늘은 임블리(부건FNC)와 업무 협약을 맺었습니다. 나라마다 온라인 시장의 규칙이 다릅니다. 무턱대고 진출하면 실패율이 높습니다. 임블리가 한국에서는 잘나가는 회사일지 몰라도 중국 시장에서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거예요.” 끝으로 한류를 파는 두정국 부회장에게 한류의 수명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냐고 물었다. 뉴웨이브란 이름으로 왔다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타이완류, 일본류, 홍콩류는 늘 있었다. “제가 50년은 더 이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 겁니다. 한류의 유통기한을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일본류나 홍콩류보다는 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류 문화 기반이 이미 잘 닦여 있으니까요. 한류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한류 패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계속 만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일할 것 같습니다.(웃음)”
- 2018-06-14 10:45
-
- 출소자에게 새로운 삶을 이어주는 브릿지 역할
- 법무부 2017년 통계자료를 보면 일반 교도소에서 출소한 6만 2624명 중 3년 이내에 24.7%가 재복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법무부 교정본부 통계에 따르면 출소 후 창업, 취업에 성공한 출소자 1670명의 재범률은 일반 출소자와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이는 대부분 출소자들이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생계 문제를 꼽는 만큼 출소자의 취업이 재범을 방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 맞춰 일반 비영리법인 사회적기업에서 출소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일반기업으로는 최초로 법무부 인가를 받은 한울배터리 사회적협동조합 이명원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출소자들에게 취업은 사회와 출소자를 잇는 가장 효과적인 가교(架橋) 역할이 되고 있다. 이 업체는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취약계층 채용에 중점을 두고 사회 공익을 실천하는 비영리법인 사회적협동조합이며 예비 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이명원 대표는 “전문기술 습득을 위한 직업훈련이 출소자 취업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재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배터리를 판매하거나 출장 교체 서비스 및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을 고용해 기술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며 “갱생보호대상자 및 사회 취약계층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교정본부의 구인·구직 만남의 행사에 참여하고, 직업 훈련을 통한 창업을 지원하고, 매출 수익금을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사회 진출과 복귀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명원 대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에 부도를 막기 위해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빚을 갚지 못해 결국 1년 형을 선고받는다. 가족을 생각하며 그 절실함에 절망을 딛고 교육을 통하여 기술을 습득하였고,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 유통 분야 10여 년, 배터리 분야 9년 등 20여 년에 걸친 사업 경험을 토대로 서울시에서 3000만 원을 지원받고 무담보대출은행에서 1000만 원을 빌려 그 당시 받은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업자 20여 명을 모아 힘을 합쳤다. 이로 인해 배터리업체를 열어 전국 30여 곳에 지점을 내면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명원 대표는 “나 자신이 전과자였기에 재소자 내면에 엄습하는 현실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재소자들의 성공적인 사회 복귀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재범률을 낮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갱생보호대상자들은 출소 후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다시 방황하며 결국 재범을 하게 되는 상황이 무척 안타까웠고, 당장 먹고살 걱정 때문에, 사회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수감생활이 더 마음이 편하다는 재소자들의 말에 충격을 받아 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자립을 위한 다양한 지원으로 재범을 줄여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취약계층과 출소자들의 주요사업 특징과 그중 배터리사업을 대표사업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 출소자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창출, 창업지원, 기술교육 등은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것이 중요하기에 그 일환으로 자동차정비 기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운영 리스크가 적고, 기술습득이 용이한 차량 및 배터리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주요 사업 분야는 차량용 배터리, 산업용 배터리, 정류기반 배터리, UPS 배터리 설치 및 유지보수로, 조합원 모두가 다년간의 차량 및 배터리 분야의 사업 노하우를 지닌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차량에 관한 모든 상담과 업무가 가능하다. 한울배터리 서울 본점을 비롯해 전국 30여 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조합원 모두 개인사업자를 갖고 있어 분류상 사업자 협동조합인 것이 특징이다.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에 환원되고, 갱생보호대상자 및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 다각화와 고용 인원 증대에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배터리사업을 위주로 하는 시스템분야에서 2017년에 법무부 고용 실적 1위를 기록했다. 또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법무부, 교정본부,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연대하여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쳐오고 있으며, 교정본부와 법무보호복지공단과의 유기적인 연대로 많은 공공단체들이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법무부 사회적협동조합의 인가를 최초로 받은 취지와 공로를 인정받아 ‘2016 대한민국 인물대상(사회공헌부문)’ ‘2018 이노베이션 기업 &브랜드대상’ ‘2018 대한민국 미래를 여는 인물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명원 대표는 “회사 운영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시 하는 것은 업무 시 직원들의 안전”이라며 “안전한 작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회적 적응 능력 배양과 더불어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나 개인적인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고민하고 들어주며 소통의 시간을 갖는 직장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전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향후 출소자들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다. 올해부터 사업 영역을 확장해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하여 편안한 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정비소 개설, 여성 출소자를 위한 크리닝사업부 신설 등을 계획하고 있고, 조합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해 출소자들의 경제 자립 프로세스 마련을 위한 방안도 꾸준히 마련할 계획이다. 향후 갱생보호대상자들에게 문턱이 높은 일자리, 기업 외면의 본질적 문제점을 분석·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술교육을 병행·고용을 확대함으로써 일자리 창출에서 나아가 창업을 위한 단계적인 서비스를 펼쳐나간다는 방침이다. 경사이신(敬事而信)의 마음으로 ‘함께 나눔, 함께 행복, 함께 발전’을 위한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노력하는 이명원 대표는 “갱생보호대상자의 창업교육과 기술교육, 각 구치소 및 교도소 교정본부 산하기관의 구인·구직 만남의 날 행사에 지속적으로 적극 노력할 예정”이라 밝혔다.
- 2018-06-07 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