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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싫어!
-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09-0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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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오래 내 곁에 있어줘요”
- 김성예 여사, 참 오랜만이에요. 이런 편지는 언제 썼던가? 결혼을 하고 나서 이듬해던가, 그 이듬해던가 내가 학교 선생으로서 강습이라는 걸 받기 위해 잠시 고향 집에 당신을 남겨놓고 대전이나 공주에 머물러 있을 때 몇 차례 짧은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한 심정인 채로 컴퓨터 앞에 앉아 망설여봅니다. 생각해보면 엎어지고 잦혀지면서 가늘고도 길게 이어온 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한 것이 1973년 가을이니까 45년, 반세기 가까운 세월입니다. 우리는 중매로 만났고 별다른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혼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고 그 이후의 생활도 줄곧 힘이 들었지요. 무엇보다도 아이들 문제와 가난과 질병 때문에 그랬지요. 우리에겐 아이가 쉽게 생겨주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임신이 잘못되어 두 차례나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당신은 평생을 병약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지요. 그 뒤 겨우 아이 둘을 얻었으나 아이 키우는 일,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에 또 당신은 힘겨워했지요. 그다음은 가난한 집안 살림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원래 우리 집안은 형제가 여섯이나 되고 논 여섯 마지기뿐인 빈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은근히 우리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하는 형편이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 부부싸움을 했다 하면 시댁 문제와 돈 문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아예 봉급날이 가까워지면 우리 둘은 돈 문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지요. 이미 쓸 돈이 바닥난 형편에 누군가 남들한테 돈을 빌려서 써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 당시 초등학교 교사의 봉급 수준은 매우 열악했고 오늘날 있는 상여금 제도나 성과급 같은 것도 없어 더욱 힘겨운 형편이었지요. 더구나 자주 앓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우리로서는 의료보험 같은 혜택도 없어 매양 휘청거려야만 했지요. 그동안 살면서 당신은 여섯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나 또한 네 차례나 대수술을 받은 사람이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열 번 깨진 항아리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지요. 참 그것만 생각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 고비들을 넘겼는지 아득한 일들이에요. 그다음으로 우리가 함께 살면서 힘들었던 이유는 모두가 나한테 있는 것 같습니다. 본디 고집이 세고 변덕이 심하고 까칠한 성격을 가진 게 바로 나란 사람이었지요. 게다가 자기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니 함께 살아주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나 같은 사람과 그렇게 오랜 세월 견디며 살아줘서 참으로 감사해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빚을 진 사람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나를 키워주신 외할머니와 어른이 되어서 만난 당신일 거예요. 그 두 사람이 나를 오늘의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할 거예요. 직업이 초등학교 선생이었지만 나의 삶의 목표는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보다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교직은 직업이고 시인은 본업이라는 괴변을 하면서 살았지요. 이렇게 까다롭고 뒤틀리는 인간과 살았으니 아마도 당신의 괴로움은 배가되었을 줄 압니다.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바로 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인 데다가 대학도 나오지 않아 서울에 연줄도 없고요, 그렇다고 잡지나 문학 단체와의 유대도 없을 뿐더러 이념적인 배경도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야말로 그것은 자갈밭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꿈꾸는 일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아직도 한 사람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고 100권도 넘는 책을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주 사람도 아니면서 공주에 풀꽃문학관을 세우고 또 풀꽃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져주면서 함께 살아준 결과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인생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나보다 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당신입니다. 정말로 당신과 같은 아내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들 말하지만 정말 나는 팔불출이 되어도 좋은 사람입니다. 비록 당신은 내가 하는 문학과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끝까지 이해하고 참고 견디려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1박 2일로 문학강연을 떠날 때면 동행해주는 당신의 배려가 더없이 고맙습니다. 일주일마다 하는 공주문화원에서의 시창작 강의에서도 빠지지 않고 내 강의를 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끔 나한테 부족한 점, 잘못한 점을 지적해주는 당신이지요. 이것만 봐도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은 오직 당신 덕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정말로 당신의 존재를 빼내고 나의 인생은 이제 불가능한 인생입니다. 오로지 나의 인생은 당신에게 업힌 인생이고 당신에게 신세지는 인생이지요. 그야말로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며 후견인이며 동행인이고 마지막 보루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아내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나에게 행운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이 당신에게는 악운이라는 것이 참으로 미안스럽고 송구한 일이지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당신에게 의존도가 높아갑니다. 이제는 한순간도 당신이 없는 나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집 안에서 글을 쓰다가도 가끔은 당신을 찾곤 하지요. 여보, 지금 어디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나 여기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집 안 어디에선가 대답을 해주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계속 쓰지요. 참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걱정입니다. 당신에게 가는 의존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요. 나의 소망은 이러한 삶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도 아니고 다만 날마다 날마다 이어지는 평안이고 무사안일이에요. 이 무사안일이 우리의 행복이고 삶의 목표이자 보람입니다. 여보, 앞으로도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셔요. 나도 가능한 대로 이 자리에 이대로 있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오래 고맙고 미안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당신에게 드리는 인사. 여보, 잘 잤어요? 그 인사가 내일도 또 내일도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나태주(羅泰柱) 시인 시 ‘대숲 아래서’로 등단했다.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했으며, 2010년부터 공주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로 ‘풀꽃’이 있으며 10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 2018-05-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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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소통’
- 베트남 커피 진하게 한잔 내려서 거실 소파에 앉아 일간지를 펼쳐든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새벽녘 잠결에 ’받들어 버린‘ 마나님의 분부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명을 좇아 먼저 베란다 구석에 있던 큼지막한 빨래 통을 옮겨온다. 아내가 덮고 자는 흰 이불을 그 안에 담는다. 세재를 세 가지나 섞어 골고루 뿌려준다. 충분히 적실만큼 물을 쏟아 붓는다. 그리곤 자근자근 밟는데 철퍼덕 철퍼덕 거품과 더불어 주말 오전 한바탕 소동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결혼이후 처음이지 싶다. 온몸 여기저기 축축해진 땀방울에 이만하면 되었을까 하는 순간, 귀신같이 보내온 아내의 메시지엔 베란다 세탁기 돌리는 방법이 마저 적혀있다. 헹굼, 탈수 등 순서에 따라 꾹 꾹 버튼을 눌러 세팅을 따라하는데 제대로 된 건지 미심쩍다. 외출한 사람한테 전화를 하자니 그것도 뭣하다. 오래된 세탁기라 그런지 필자로선 참 복잡하기만하다. 씨름 끝에 이윽고 좔 좔 좔 쏟아지는 급수를 확인하곤 겨우 한숨을 돌려 본다. 그 사이 식어버린 잔속엔 아직도 반 넘게 남아 있는 커피.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그래~ 이왕이면 묵혀둔 숙제도 해버리자, 새해특집으로 칭찬도 함 받고.” 그것은 바로 현관 센스 등 교체 미션! 가끔씩 깜빡거리던 센스등은 요즘 들어 부쩍 그 상태가 심각해졌다. 아예 잘 켜지지도 않아 제법 성가셨는데도 차일피일 해왔던 것이다. 새삼 올려다보니 제법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게 현관 센스 등. “어디 잘 함 해보셔” 하는 표정도 역력하니. 우선 스페어 전구를 찾고(실은 한 참 만에 겨우) 의자도 가져온다. 손 장갑도 껴보는데 드라이버도 기본으로 있어야지 싶다. 소매를 걷고 몸을 위로 올려 허공으로 두 팔을 뻗어본다. 손끝으로 대충 만지작거리니 원형커버는 어렵지 않게 분리할 수 있었다. “뭐 이정도면 어렵지 않네, 이젠 전구만 교체하면 되겠지.” 아뿔싸 그만 쑤셔오기 시작하는 양 어깨와 팔. 까치발을 딛고 커버 안쪽의 백열전구를 겨우 돌려서 빼내는데 급기야 부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천장이 높은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정작 문제도 다른 데 있었다. 스페어 전구로 갈아 끼웠는데도 깜빡거림은 마찬가지다. 슬슬 열리기 시작한다. 이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한 자락. 동생은 바로 전기기술자! ‘득템’이라도 한 듯 바로 콜을 외쳐본다. 그런데 동생은 무릎을 다쳤다며 지금 병원에 입원중이라고. “여기까지 인가? 그만 스톱? 아니다 해도 밝았는데 마나님한테 새로운 면모도 보여 주어야지” 원격으로라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동생의 말을 믿고 한 걸음에 마트로 달려간다. 여러 제품들 중 고른 것은 15W용으로 가격은 17500원인데 아예 전구도 필요 없는 제품. “뭐라고” 잠시 놀라기까지 한다. ‘생활의 발견’이랄까? 포장지를 뜯고 매뉴얼을 훑어보는데 설명은 비교적 간단하다. 다시 걸상위로 올라가 천정에서 나온 한 가닥 전기선의 피복을 벗기는데 혹여나 감전 때문에 마음을 졸인 탓이리라. 손가락은 마구마구 떨려오고 높이 때문에 전선 연결부위 등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몸체를 천정에 고정 하려는데 드라이버 끝에 매달린 나사못이 끝내 구멍을 못 찾고 바닥으로 떨어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오 마이 갓. 사단은 실은 지금부터다. 꼬인 전선 가닥을 풀려는데 갑자기 지지직거리며 불꽃 아닌 불꽃이 번쩍 거린다. 분명 스위치는 내렸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더욱 더 떨리는 손끝으로 전기선 가닥을 만져보는데 왠지 전류가 통하는 듯 느낌이 영 별로다. 그냥 동네 철물점 아저씨나 부를 걸 괜히 뭔 짓인지? 직접 했다며 시침 뚝 떼면 그만일 테고 출장비 몇 만 원이 대수인가? 이러다 괜히 불상사라도 생기면? 별 생각이 다 든다. 바로 그 순간이다. 현관문이 열리며 이윽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 지나치다 건네는 눈인사가 전부였던 아래층 아주머니다. 뒤이어 그 아래층 아저씨도 계단을 쿵쿵 거리며 올라온다. TV보는데 갑자기 맛이 갔다며 인터넷도 안 된다고. “전 특별히 따로 손댄 게 없는데요?” 일단 시치미부터 떼고 본다만 켕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까 그 ‘지지직’ 스파크가 필시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다. 이웃의 재발견이랄까! "저희 집도 마침 센스 등에 문제가 있어 전기아저씨 부를 참이었는데 이참에 한 번에 해결 하시죠", "전 테스트기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려보시죠" 평소 주차 때문에 한 번씩 교대로 콜을 주고받던 2층 아저씨, 테스트기로 한 번 더 문제점을 체크해 주신다. 천군만마를 만난 기분이다. 방학한 아이들 잘 있냐며 오히려 안부까지 물어 오시는 3층 아주머니, 이제 보니 무지 말씀을 잘 건네신다. 잠시 후엔 장을 많이 봤다며 아이들 간식까지 내민다. 두 분 다 성도 안내고 참 신기한 일이로다. 2층 아저씨랑 합동 점검에 들어간 끝에 원인제공은 당연히 필자의 서투른 작업과정 에서 스파크가 생긴 탓이었다. 그 때문에 건물 1층 현관 입구에 있는 메인 차단기가 내려간 것이었다. 처음엔 생각이 거기까진 미치지 않아 각자 집안의 스위치만 온오프를 반복하고 있었던 거였다. 원인을 찾아내고 나니 그 뒤론 저절로 풀린다. 옆에서 보조를 해주니 없던 힘도 생기고 진척도 빠르다. 센스 등 몸체를 양쪽으로 두 개의 나사못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드디어 스위를 ON 해본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박. 너무 환하다. 마치 대낮같다. “진작 할 걸” 일을 하다 보니 새롭게 배운 꿀팁 하나. 센스 등 한 귀퉁이엔 옵션모드가 있더라는 사실. 낮에도 켜지게 하는 모드와 밤에만 켜지게 하는 모드가 그것이다. 벌건 대낮에 굳이 센스 등이 켜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두운 실내를 제외하곤 말이다. 의기양양해진 필자, 2층 3층의 센스 등도 들여다보곤 모드를 조정해주는 오지랖을 발휘한다. 흠흠. 우연찮게 시작된 두 이웃과의 대화는 센스 등에서 출발해 겨울철 실내 단열문제, 옥상 방수 및 누수문제로 이어지며 서로의 집도 왕래하면서 제법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십여 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 있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소동은 일으켰지만 결국 필자의 손으로 현관 센스 등도 무사히 교체했고 덕분에 이웃과의 ‘소통’도 ‘연결’도 복원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말 큰일 했다는 생각이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현관 센스 등을 확인해 볼 일이다. 정말이다.
- 2018-02-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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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8-01-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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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맨을 만드는 여자, 바네사 리
- 영화산업의 메카,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 재봉틀 하나로 ‘할리우드’를 정복한 한국 아줌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바네사 리(48·한국명 이미경). 그녀의 할리우드 정복기는 어떤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공식 타이틀은 ‘패브리케이터(Fabricator)’. 특수효과 및 미술, 의상, 분장 등을 총칭하는 ‘FX’ 분야에 속해 있는 전문직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디자이너의 상상 속에 있던 배우의 의상을 현실에서 재현해내는 일이다. , , , 등 슈퍼히어로의 멋진 의상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할리우드 최고 몸값의 패브리케이터 바네사 리를 LA 아트 디스트릭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할리우드 No. 1 패브리케이터 “패브리케이터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생소할 거예요. 번역을 하면 특수의상 제작자 정도가 제일 맞겠네요. 의상뿐 아니라 원하는 모양의 몸집을 만들기도 하는데 팻 슈트(Fat Suit)라고 불러요. 뚱뚱한 몸이나 괴물, 외계인을 만들 때 사용합니다. 개봉을 앞둔 영화 에서 배우 게리 올드만이 윈스턴 처칠 역을 맡았는데 배우의 몸보다 두 배 가까이나 큰 슈트를 제작해야 했어요. 폼 라텍스와 마이크로비즈라는 소재로 처음 시도했는데 정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어요. 게리 선생님도 마치 최고의 예술품 같다며 인정해주셨죠.” 바네사 리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탑’ 패브리케이터다. 이는 지난 13년 동안 쌓아온 그녀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작업한 영화만 100여 편, 제목만 들어도 반가운 , , , , , , , , , , 등이 그녀의 손길을 탔다. 할리우드의 FX 분야는 철저한 ‘그들만의 세상’이다. 제작사에서 FX 부분을 총괄할 숍(Shop)이나 아티스트에게 작업을 의뢰하면, 다시 그들이 의상, 분장, 헤어, 미술팀을 꾸리는데 보통 인력을 공개 채용하는 법이 없다.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인맥으로만 구성된다는 것이다. 언뜻 공정하지 않고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한 번은 모를까 실력이 없으면 그다음엔 이 바닥에 발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철저하게 실력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진정한 프로의 세계죠. 나는 이 바닥의 이런 속성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요. 생각해보세요. 서른이 훌쩍 넘은 동양 여자가, 영어도 잘 못하고, 더군다나 핸디캡까지 있는 내가 무엇으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어요? 일 잘하는 거 빼고 미인도 아니고 날씬하지도 않아요(웃음).” 상처받은 명랑소녀 그녀는 두 살 무렵, 백신 접종 부작용으로 소아마비를 앓았다. 두 다리가 굳어진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어머니는 매일같이 침을 맞히러 다녔고 찜질을 해주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3년 만에 오른쪽 다리는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끝내 왼쪽 다리에는 장애가 남게 됐다. 하지만 이씨는 명랑소녀였다.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쾌활한 성격에 친구도 많았다. 학창 시절 내내 오락부장을 도맡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 가족은 정말 빈털터리가 됐어요. 아빠 치료비로 다 쓰고 쌀을 살 돈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집이 망하니까 친구들이 다 떠나버리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마음을 다 주지 말아야 하는구나. 현실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거죠.” 미대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형편상 포기해야 했다. 대신 택한 것이 메이크업 학원.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영화를 좋아한 이씨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 사회는 장애를 가진 그녀에게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학원을 수료하고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메이크업을 해주는 직원으로 취직이 됐어요. 일을 잘하고있는데 일주일 만에 사무실에서 호출이 오더군요. 다리가 왜 그러냐고 묻기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그렇다고 하니까 봉투 하나 내밀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한마디로 짤린 거죠.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요. 이후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됐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권리 딸이 상처받는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과감히 미국 이민을 선택했다. 1993년, 이씨는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한국을 떠나왔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생계 때문에 공인회계사 사무실에 취직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뭔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패턴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기술을 가르쳐주고 취직도 시켜준다고 하길래 그 길로 등록을 했죠.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패턴을 배웠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신명나게 하는지, 이씨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실력도 남달라 패턴을 배운 지 6개월 만에 취직이 됐다. 이후 7년간 그녀는 자바(LA 의류산업 중심지)에서 일하면서 고액 연봉을 받는, 소위 잘나가는 패턴사로 자리 잡게 된다. “자바에서 일하는 동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딸아이도 낳고 점점 생활이 안정되어갔어요. 그런데 어느 해 딸이 아파서 잠시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때 조그만 신문광고를 보게 됐어요. 할리우드의 한 숍에서 특수의상 패턴사를 구한다는 광고였는데 그게 제 마음을 흔들어놓은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이씨는 다시 자바로 돌아가지 않았고, 시급 12달러를 받으며 밑바닥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이씨의 선택을 두고 주위에서는 걱정과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때 힘을 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자신이 투잡, 쓰리잡이라도 뛸 테니 원하는 것을 하라며 용기를 줬다. “살다 보면 운명적인 선택의 순간이 오는 거 같아요. 나중에 알았는데 할리우드 쪽에서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광고가 나왔고 내가 그걸 본 거예요. 나는 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물론 한동안은 돈이없어 정말 고생을 했죠. 딸아이에게 정부에서 나오는 공짜 분유를 먹여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가족은 행복했어요. 남편과 함께 지금도 이야기해요. ‘우리 그때 진짜 재미있고 행복했지’라고요.” 슈퍼맨을 만드는 여자 지나고 보니 한국에서의 상처도 자바에서의 7년도, 버릴 것 없는 시간들이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빈틈없는 실력으로 무장된 바네사 리는 할리우드에서 깐깐하기로 이름난 넘버원 아티스트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특수분장계의 대부 릭베이커, FX 디자이너 패트릭 타투포우로스, 특수효과의 거장 스티브왕, 완벽주의 의상감독 콜린 앳우드…. 할리우드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은 모두 바네사 리의 스승이자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동료이며 친구다. 창의력은 기본, 사고의 유연성과 순발력은 패브리케이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보이는 모든 것이 의상 재료가 될수 있고 부품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을 볼 때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다. 특수한 원단은 통달하고 있어야 하고, 각종 신소재에 대한 세미나가 있으면 찾아다니며 공부해야 한다. 슈퍼히어로의 전투 의상을 하도 많이 만들어 전쟁이나 무기에 대해 박사가 됐다. 우주선과 우주복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나사(NASA)에서도 일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해졌다. 실제로 에서 그녀가 만든 우주복을 보고 나사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고. 의상을 맡았을 때, 팔꿈치 장식을 위해 해체한 스키 부츠가 스무 개가 넘고, 샤키 오닐이 입을 라이트 의상에 사용할 특수 라이트테이프를 찾기 위해 전 세계 전기 회사의 신제품들을 뒤졌다. 늘 화학약품을 다루다 보니 스태프와 배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 방면으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일은 정말 좋아서 미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스포트라이트는 없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일하고 고작 엔딩크레디트에 수백 명의 스태프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릴 뿐이죠.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도 있냐고 묻는데 ‘패브리케이터’ 카테고리는 없어요. 특수효과 부문에 속해 있으니까요. 돈이요? 물론 적지 않게 받죠. 메이저 제작사가 아니면 의뢰를 못하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할리우드 제작 환경 안에서 보면 그렇게 대우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에요. 돈을 벌려면 배우가 되는 게 낫죠(웃음).”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비하인드스토리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숨은 즐거움 중 하나이지만 그야말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들의 사생활 보장은 스태프들의 프로페셔널 정신이기도하다. 유명 배우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럴 때는 좀 난감하다고. 이씨는 여간해서는 배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로서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폼’ 빠지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그래도 좋은 이야기야 어떻겠냐며 하나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친절한 바네사 리. “게리 올드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게리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내가 만든 팻 슈트(Fat Suit)에 완전히 감동을 받아 먼저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배우와 찍은 유일한 사진이에요(웃음). 딸아이가 연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하자 조언을 해주고 싶으니 꼭 촬영장에 데려오라고 할 정도로 자상한 분이에요. 또 배우 매튜 매커트니에게 직접 소개를 해주어서 그가 주연을 맡는 영화 에 참여하게 됐어요.” 숙취 때문에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에서도 남다른 미모를 뽐내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막내 스태프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건네던 안소니 홉킨스는 영화 에서 만났는데 무거운 슈트를 입고도 불평 한 번 하지 않던 영국 신사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녀가 애써 만든 전자회로 슈트가 아쉽게도 통편집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못하자 직접 텐트로 찾아와 아쉬움을 표했다고. 보디슈트를 만들려면 배우들의 정확한 수치가 필요하다면서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는 유쾌한 그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조니 뎁의 보디슈트를 언젠가는 꼭 만들고 말겠다는 사심(?)도 드러낸다. 꿈의 공장 ‘슈퍼슈트팩토리’ 올해는 바네사 리에게 조금 특별한 해였다. 할리우드에서 일한 지 13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스튜디오를 갖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슈퍼슈트팩토리(Super Suit Factory)’. 이제 회사의 대표로서 제작사와 FX 숍을 상대하게 되었다. 영화사와 직접 계약을 하기도 한다. 개인으로 활동할 때보다 입지가 훨씬 굳어진 셈이다. 물론 몸값도 뛰었다. 또 하나 강동원 주연의 한국 영화 을 맡게 된 것도 그렇다. 한국 영화가 특수의상에 큰돈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데 특별히 은 주인공의 전투복을 위해 할리우드 최고 제작자를 찾았고 이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은 아마도 나에게 특별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워낙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이라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점도 큰 의미가 있어요. 한국은 나에게 아픈 기억도 주었지만 솔직히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었던 부분이 있거든요. 한국인의 근성과 기술은 미국인들이 못 따라와요. 언젠가 나의 경력과 노하우가 한국 영화계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의 팬들에게도 깜짝 선물이 될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한국 배우와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이 늘어나는 만큼, 그녀의 역할도 주목된다. 실제로 이씨는 10년지기이기도 한 할리우드 특수분장 및 헤어 전문가 다이아나 최씨와 함께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언제 그 그림이 완성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거지요. 지금은 다이아나도 저도 너무 일이 많아서 스튜디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오늘을 후회 없이 살다 보면 어느덧 내가 바라던 내 일이 되어 있더라고요. 너무 영화 같은 소리만 한다고요? 글쎄요… 뭐 여긴 할리우드니까요!(웃음)”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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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격전지를 찾아서] 조선수군의 수도 통영 한산도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통영 한산도는 이순신이 창건한 조선수군의 수도였다. 조선 개국 이래 버려져 있던 섬이 ‘이순신 수국(水國)’의 서울이 되어 국방과 경제·산업의 심장이 되었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지낸 3년 8개월 동안 국가 경제의 중심지였고, 피란민을 구제한 사실상의 수도이기도 했다. 싸우면 이기는 막강 조선수군의 병권을 쥐고 독자적인 행정 사법제도에, 과거(무과)까지 시행해 민중의 신망이 높아진 이순신은 차차 왕의 의심을 사기에 이른다. ‘한산수국’이 강대해지자 위협을 느낀 선조는 끝내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그 사이 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이 첫 전투에서 궤멸당해 한산도는 다시 이름처럼 한산한 섬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수영을 차린 것은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3년 7월 16일의 일이다. 왜적이 들끓는 경상도 수역에 자주 지원 출동을 나가게 되자, 여수에서 힘들게 노 저어 가 싸우고, 되돌아가기가 버거웠다. 7월 8일 한산대첩 때 이 섬의 가치를 눈여겨보았던 이순신은 조정에 이진(移陣)을 품신(稟申), 허락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진을 옮겼다. 이진의 필요성은 왕래의 불편함만이 아니었다. 남의 관할에서 싸우는 객장(客將)의 위치가 불편했을 것이다. 전투의 주장(主將)은 번번이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즉시 여수를 떠나 걸망포(통영), 칠천량(거제), 세포(거제), 역포(고성) 등을 돌며 잠시 머물 진지를 찾았다. 그러나 배를 감추고 기동이 편리한 포구를 찾지 못해 한산해전 때 봐두었던 섬으로 옮겨갔다. 한산도 두을포(豆乙浦), 지금의 두억리다. 한산도는 바다에서 보면 밋밋한 섬이다. 그러나 가서 보면 배를 숨기기 알맞은 포구를 감추고 있다. 섬 한가운데 제법 높은 산(망산·293m)이 있어 남해바다를 감제하기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견내량(見乃梁) 바다가 가까워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물길 견내량은 전라도 해로의 길목이다. 이순신의 편지글에는 한산도를 선택한 까닭이 드러나 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진 다음날 지평 벼슬에 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답서에 그는 이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으로 그때까지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완만한 경사지 너른 풀밭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한산하던 섬이 삽시간에 번잡한 군사 도시가 되었다. 이진 1개월 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가 전쟁 수행의 장애 요인이라고 판단한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이 이순신의 직첩을 높여 원균을 휘하에 두도록 배려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때까지 없던 직급이었다. “그대 휘하의 장수로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대가 군법대로 시행하라”는 선조의 교지에 그 뜻이 숨어 있다. 이때까지는 싸우면 이기는 이순신이 미뻤던 모양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이다. 육군은 존재감이 미미했고, 오직 수군만이 왜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70여 개 고을이 통제사 관할 아래 들어왔으니 가히 ‘수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교서지 한 장만 내려왔을 뿐이다. 조정은 지원은커녕 일선 장수들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올려 보낸다는 이순신의 장계가 여럿 전해온다. 1592년 9월 18일 행재소에서 소용되는 종이를 넉넉히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우선 장지 10권을 보낸다”는 장계를 시작으로, 9월 25일 의연곡(義捐穀, 기부한 곡식)을 모아 한 배로 보낸다는 장계도 있다. 신하가 왕에게 종이와 쌀을 모아 보낸 것이다. 1594년 6월 26일자에는 “단오절 진상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장병을 먹이고 입히고, 전함과 무기 화약 등 각종 군수품을 조달할 책임은 당연히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명한 둔전(屯田)책이다. 그에게는 전라좌수사 때 영남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구휼할 방책으로 돌산도 둔전을 시행한 경험이 있다. 통제사가 되자 군량 해결책으로 둔전 개간을 청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전라좌수사 시절 “전라좌우도 소속 1만7000명 군사를 먹이는 데 적어도 하루 100석, 한 달에 3400석이 필요하다”고 한 장계를 근거로 추산하면, 3도 수군의 하루 군량이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많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연안 지역과 빈 섬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경작자들에게서 세곡을 받아들이자는 방안을 낸 것이다. 공도정책에는 어긋나지만 당장 뾰족한 방도가 없는 조정으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둔전에서 식량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개간 기간과 수확이 나오기까지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칡을 캐고 고기잡이를 했다. 칡은 대용양식, 물고기는 부식이 되었다. 남는 고기는 내다 팔아 곡식으로 바꾸었다. 여러 병영에서 필요한 갖가지 경비를 조달할 방책으로는 소금을 구워 팔았다. 그 시절 소금은 ‘백금’이라 불릴 만큼 값진 식품이었다.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조류와 조개류를 채취해 경비에 보탰다. 200여 년 공도정책 덕분에 남해 연안 지역과 섬들마다 황금어장이었다. 에는 쇳물을 부어 철부(鐵釜, 다리가 없는 솥)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소금 굽는 쇠솥을 주조했다는 말이다. 남해안의 소금 제조는 바닷물을 오래 끓여서 만드는 전오(煎熬) 제염법이 주류였다. 그만큼 많은 쇠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간이 끝난 농지에서 쌀과 잡곡이 나오기 시작한 뒤로 사정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200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총포와 화약, 창과 칼, 활과 살 등 무기와 장비를 확충하기에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것들은 관련 산업을 일으켜 해결했다. 특히 조선업 진흥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을마다 솜씨 좋은 목수들이 한산도와 각 지역 수군병영으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좋은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목재들이 실려 오고, 대장간마다 쇠 소리와 풀무질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여 산에서 선재용 나무를 끌어왔다.” 이런 일기가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선(戰船) 건조사업의 규모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이 날로 늘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배들이 바다에 가득 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1594년 5월 10일자 일기에는 수많은 전선이 건조된 것을 뿌듯이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 조총까지 제조되었다. 임진년(1592년) 4월 부산포에서 우리 병사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총을 만들어냈다. 왜적에게서 노획한 총을 본떠 만든 것이다. 1593년 9월 14일자 일기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법을 몰랐다. 오랜 연구 끝에 이제야 만들어냈다. 왜의 총보다 성능이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사격을 해보더니 다들 잘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이제는 그 묘법을 알았으니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리도록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뒤의 일기에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을 만들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쓰고 선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도(還刀) 대검(帶劍)을 선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물 공업의 발달상을 알 만하다. 임진왜란 직후 300년 동안 조선수군의 수도였던 통영에 전통 공업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통영에는 옛날부터 12공방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다. 나전칠기, 갓, 놋쇠, 부채, 신발, 목가구, 질그릇, 은세공 등등 격조 있는 집기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용품 제조업 발달에 한산도 시대의 몫이 컸다. 이 정도로 ‘수국’이라 할 수는 없다. 끈질긴 상소 끝에 한산도에서 독자적인 무과(과거)시험을 실시한 것이 한산도를 ‘한산수국’ 수도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시험 출제와 관리를 군대 책임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비상시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593년 12월 이순신은 전주에 내려와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떠맡은 세자 광해군에게 당돌한 장계를 올린다. 수군만의 무과를 자신의 주관으로, 그것도 전주가 아닌 한산도에서 시행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12월 27일 전주부에 과거 시험장을 열도록 명령하셨다고 하니, 진중의 모든 군사들이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물길이 멀고 왜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라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정예용사들을 한꺼번에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시어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시옵고….” 수하들을 이끌고 전주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분조의 지시를 따를 수 없으니 시험장을 한산도로 해달라는 요구였다. 분조에서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명분을 외면할 수 없어 이순신의 건의는 채택되었다. 날짜는 4개월 늦춘 1593년 4월이었고, 합격자 100명도 거의 진중의 장병이었다. 시험과목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기사(騎射)는 편전(片箭)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요구가 100% 수용된 셈이다. 한산도의 번영과 영광은 그때까지였다. 이순신이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가고 몇 달 뒤 한산도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첫 출전 부산포 해전에서 대패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자신의 함대 12척을 이끌고 돌아와 병영을 불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유성룡의 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원균은 자기 수하의 배만 이끌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자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산도에 도착한 그는 무기와 양곡,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대피했다.” 뒤따라 한산도에 들이닥친 왜적은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분을 풀어보려는 듯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분탕질을 했다. 한산도에 진을 치고 전라좌수영까지 점령해 남해를 자기네 안마당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한산도에서는 제승당 포구에 자리 잡은 요트 선착장이 세월의 힘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격전의 현장에 생겨난 레저시설이라니! 오전 10시 통영 여객선 터미널을 떠난 페리 연락선에는 금요일 오후의 여가를 역사의 현장에서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만선이었다. 긴 물거품을 끌고 달리는 페리 갑판 위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비명처럼 높았다. 30여 분의 항해 끝에 다다른 제승당 포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배가 들어온 쪽을 돌아보니 사방이 뭍으로 둘러싸였다. 고동산 돌출부와 한산대첩비 돌출부가 길게 뻗어 나와 내해를 방파제처럼 에워싸고, 그 너머로 미륵도와 통영 반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멀리서 접근해오는 호화 요트 두 척이 제승당 포구에 들어와 접안하는 것을 보고야 그곳이 관광요트 선착장이라는 걸 알았다. 420년 사이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충무공에게 고하려 함일까! 현장에 가서 본 수루(戍樓)의 위치는 참으로 절묘했다. ‘섬 안의 반도’라 해야 할 내해의 곶이었다. 그 위에서 바라보면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제승당 뒤편 망산 꼭대기에서는 견내량을 감제하고, 좌우 물길과 뭍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그런 지리(地利)를 가진 곳이 또 없다. 이곳에서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었다는 달밤이 저절로 상상됐다. 수루 뒤편 중앙에 잡은 제승당(制勝堂)은 본래 이름이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이 수하 막료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장졸들의 의견도 듣던 곳으로, 집무실 겸 주거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 원균은 첩을 들이고 울을 둘러 수하들의 출입을 막았다. 배설이 불태워 폐허가 되었던 자리에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건물을 복구해 제승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통제영 시설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곳이 활터 한산정(閑山亭)이다. 바다를 끼고 145m 건너편 산비탈에 과녁 셋이 있다. 밀물과 썰물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 적응을 위해 일부러 바다 낀 곳을 골랐다는데, 아마도 국내에 이런 활터는 없으리라 했다. 매일같이 활쏘기를 연마하던 이곳에서 “수하들과 내기를 해 진 편에서 떡과 술을 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1594년의 과거시험 활쏘기 시험장으로도 이용된 역사의 현장이다. 원균의 패전 이후 통제영은 통영으로 옮겨갔다. 통영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이다.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시절 두룡포(오늘의 통영)로 통제영을 옮기고 이듬해 건물을 지었다. 두 차례 증개축을 통해 앞면 9칸, 옆면 6칸의 목조 건물이 되었다. 여수 진남관과 함께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객사 건물로도 유명하다. 뭐니 뭐니 해도 통영을 대표하는 것은 그 땅의 지명이다. 300년 동안 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유래에서 비롯된 이름이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박정희 정권 시대 충무공 시호에서 유래된 ‘충무’로 불리기도 했지만, 옛 지명을 선호하는 여론 때문에 다시 통영이 되었다.
- 2017-10-3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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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도 화투놀이처럼 재미있으면
- 경로당에 모여 있는 할머니들이 100원짜리 동전을 걸고 화투놀이를 하며 시간 보내기를 한다. 몰입하여 즐기며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무언가 재미가 있고 지기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이 있어 적은 금액이지만 내기여서 더 집중한다. 어느 경우로 보든지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고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생각이 필요해서 좋은 면이 있다. 뇌에 자극을 준다. 인간의 뇌는 자극을 받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든 뇌에 자극을 주는 행동이 필요하며 치매 예방이 되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여 첫 직장으로 손해보험사에 입사하여 중견 사원으로 일할 즈음엔 직원들이 일과 후 휴식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식사와 함께 화투놀이 “고스톱”을 즐겼다. 대체로 적은 금액을 걸고 내기를 했다. 화투판이 시작되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직장 상사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스톱 하듯 직원들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묘안이 없을까?” 직장 일이 고스톱처럼 재미있게 할 수 있게 되면 그 회사는 날로 성장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발명가 에디슨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놀이처럼 재미있게 함으로써 크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명예를 얻었으며 그가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의 삶을 확 바꾸어주었다. 에디슨이 남긴 이 말이 웅변한다. “I never did a day’s work in my life. It was all fun.” “나는 평생 단 하루도 일하지 않았다. 모두 재미있는 놀이었다.” 평생 일을 하지 않았으나 대 발명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일을 재미있는 놀이처럼 하였기에 지치지 않았고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다. 은퇴 후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재미있는 일거리를 찾으면 시간이 짧기만 할 테다. 100세 장수 시대에서 100세 현역 시대가 오고 있다. 80세에 은퇴하여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게 되면 한가한 시간은 무척 길다. 일반적으로 계산하는 하루 여가 시간을 11시간으로 하였을 때 무려 160,000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까? 우리가 이를 닦는 가장 적절한 시간이 3분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3분을 쓰지 못한다. 재미있는 노래 한 곡을 듣는데도 3분 내외다. 같은 3분이어도 노래를 듣는 3분은 짧게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칫솔질 3분처럼 하는 일이 재미없고 무료(無聊)하게 160,000시간을 보내려면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다. 재미있는 일거리를 찾으면 시간이 짧기만 할 테고 시간이 빨리 지나감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재미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에게나 유소년 시절에 즐겨했던 놀이가 있지 싶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관심을 가져왔거나 지켜본 일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꾸준히 스크랩해 온 분야도 있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고 또는, 이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긴 일도 있다. 다만, 생업에 밀려 삶의 뒷전으로 미뤄두었을 뿐이다. 이런 내용을 종이 위에 정리해 보자. 각 분야별로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재능이 될만한 경험을 찾아 곁들여 본다. 필자는 사진을 취미로 선택하면서 초등학교 시절에 교내 사생대회에서 수상을 한 상장을 발견하고 사진을 잘할 수 있는 재능 요소로 삼았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자기최면 역할을 하게 했다. 누구나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분야를 찾고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경험적 사건을 끄집어내어 장수 시대에 대비하는 일거리로 발전시켜 보자. 근래에 들어서 젊은이들은 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 나선다. 회사에 입사하였어도 아니다 싶으면 이직을 하여 적성에 맞는 업종이나 회사를 찾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재미있게 함으로써 보람과 능률도 올리려는 현상이다.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현상이다. 에디슨의 얘기처럼 정말 재미나는 일에 매달린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는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는 남을 위하여 살아온 반평생이다. 노후는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한 시간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재미있는 일을 찾는 것이 액티브한 시니어가 되는 지름길이다.
- 2017-10-2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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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밭길에서, 다시 꽃길에 서다
- 여기에 잘 웃는 부부가 있다. 남편의 인상은 얼핏 과묵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빙그레 슬며시 웃는 얼굴이다. 아내의 얼굴은 통째로 웃음 그릇이다. 웃음도 보시(布施)라지? 부부가 앉는 자리마다 환하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귀농을 통해 얼굴에 정착한 경관이라는 게 아닌가. 엎치락뒤치락, 파란과 요행이 교차하는 게 인생이라는 미스터리 극이다. 조물주는 낮잠을 주무시다 깨어 심심하면 인간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 이랬다저랬다, 줬다 뺐었다, 횡포가 심하다. 그러나 인간은 뜻밖에도 견고한 작품이다. 벼락을 일곱 번이나 맞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지 않은가. 지금 내 앞에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곽성진(75)·이옥희(71)씨 부부 역시 일종의 날벼락을 맞은 바 있다. 그러나 끄떡없다. 쌩쌩하다. 도시라는 정글을 벗어나 참신한 시골생활을 누리고 있다. 산봉우리들이 덩실덩실 강강술래를 하는 소백산 자락, 옴팡진 산촌에 산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곽씨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결혼을 했으며, 사업으로 오랫동안 승승장구했다. 선박부품업체를 경영했었다.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사장이었다. 그러나 인간사가 흔히 그렇듯, 그가 구가했던 꽃길은 어느 사이 가시밭길로 바뀌었다. 졸지에 파산하면서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이었다지. 곽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완전한 추락이었어요. 그렇다고 주저앉아 굶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리어카를 장만해 포장마차를 차렸어요. 부끄럽습디다. 아내가 용기를 주더군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고…. 아내는 안주를 만들고 저는 손님들 시중을 들었어요. 다행히 장사가 잘됐어요. 잘나가던 시절에 일식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가락을 살려 일식집 스타일의 안주와 술을 내놓았는데, 그게 적중했어요. 단기간 내에 소문이 좋게 났죠. 제법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그 자금으로 통닭가게를 인수해 운영했고, 그 역시 매우 번창했어요. 이후 아내는 일식집을 개업했고, 저는 건축업에 나섰어요. 그런데 이 건축업에서 다시 철저하게 무너졌어요. 두 번째 도산을 경험했던 겁니다.” 온탕과 냉탕을 거듭 넘나들었구나. 그 와중에 세월이라는 도적은 곽씨에게서 젊음을 앗아갔다. 쓸쓸하고 스산한 황혼의 동구에서, 그는 황급히 다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초원을 뒤덮은 풀처럼 수북한 걱정과 불안이 주야간에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이때 그의 등을 툭툭 치며, 임이시여, 걱정 마소서, 까짓것 다시 시작하면 그만 아니겠소, 라는 투로 당차게 재기를 독려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 이옥희씨였다. 시골로 가자고, 농사를 짓자고, 소박한 낙원을 일구자고, 아내는 그리 주동했다. 곽씨는 선선히 응했다. 강인한 기질과 낙천적 근성을 겸비한 아내의 민첩한 상황 판단력을 믿어서였다. 부부는 즉시 귀농을 결행했다. 그게 10여 년 전의 일. 결과는 성공적. 비결은 근면 혹은 부부애. 옛일을 회고하는 곽씨의 언사는 수굿해 온순한 성정이 묻어난다. 군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强小農) “여기 예천군 은풍면 산촌은 원래 아내의 고향입니다. 아내에겐 유난한 향수가 있었어요. 늘그막엔 고향에 돌아가 살자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사업 파산이 결국 아내의 숙원을 이루게 한 셈이니 사람의 일이라는 게 참 묘하죠. 물론 부담이 없지는 않았어요.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가, 게다가 모든 걸 잃은 빈손으로, 과연 시골 정착이 가능할지 불안했어요.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거처를 마련하는 일, 농지를 구하는 일, 뭐 하나 만만한 게 없었겠죠?” “아내의 친지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자립이 가능했어요. 특히 처남이 집과 배 과수원을 빌려주고 농사를 도와줘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었죠.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사기술을 부지런히 배우기도 했고. 주 작목은 배였어요. 생과 상태로 출하하기도 했지만, 배즙 가공이 그보다 세 배쯤 소득이 높다는 걸 알고 배즙 생산에 집중했죠. 요즘은 칡즙, 양파즙, 가시오가피즙, 헛개나무즙도 생산합니다.” “판로 확보는 어떤 방식으로 했죠?”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의 책에서 힌트를 얻은 게 주효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이 평균 250명 정도와 인맥을 형성한다고 봤습디다. 여기서 그의 성공철학인 1대 250 법칙이 만들어집니다. 한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그와 연결된 250명에게 호감을 사는 것과 같다는 논리죠. 공감이 됐어요. 그래서 제 주변의 친척, 친지, 친구 등 지인들과의 유대 형성에 공을 들였어요. 그게 판매망이 되었어요. 현재 제 핸드폰엔 2300명쯤의 고객명단이 입력돼 있습니다.” 곽씨는 이른바 6차 농업을 구현하고 있다. 1차 농업은 생산을, 2차는 가공을, 3차는 체험이나 관광 농업을 말한다. 이 셋을 통합한 게 6차 농업이다. 그의 농장 ‘소백산 웰빙농원’은 예천 군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소농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이는 거저 얻어진 성취가 아니다. 지진을 겪은 사람은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지진이 우리의 발밑을 서성거리는 걸 안다. 심혈을 기울이고서야 재앙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곽씨 내외는 온몸을 써 농사에 매달렸다. 내외가 농장에 쏟은 비지땀이 몇 드럼에 달할지는 뒷산 신령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다. 땀뿐이랴. 부단한 열정, 상황을 물고 늘어지는 집요한 정신, 패잔병처럼 여기는 눈총을 감수하는 뱃심까지 가세했을 테지. 예순이 넘은 빈털터리 늦깎이로 농사에 입문, 마침내 기세를 돋운다는 건 아마도 거의 이변이다. 곽씨는 은연중에, 노년의 귀농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소득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농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비유하자면, 작은 옹달샘 하나를 팠는데 거기에서 사시사철 샘물이 찰랑거린다 할까? 이 옹달샘은 계속 퍼 써도 마르질 않아요. 계속 샘물이 솟구치니까.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어요. 큰 분의 뜻이리라. 제가 천주교인입니다.” “머리 좋고, 의식 있고, 신념 강한 젊은 사람들조차 고전하는 게 귀농생활이라고들 해요. 정착 과정에서 가장 힘든 건 어떤 점이었나요?” “초기엔 괜히 왔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어요. 농사에 문외한이었다는 것, 그게 가장 난처했어요.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그러나 일단은 생계 문제가 워낙 다급해서 잡념을 거두고 일에만 몰두했죠. 실로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만만한 게 하나 없었지만 다 헤쳐 나왔어요. 사실,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겁날 건 없었어요. 왜냐면, 형편이 더 나빠질 수는 없었으니까(웃음).” 자연과 교제하며 산촌을 노니는 부부 사람의 난제는 대체로 시간이 해결해준다. 슬픔도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된다. 그러나 생계의 문제는 질이 다르다. 굴러떨어진 밑바닥 자체를 디딤돌로 삼아 기어이 뛰어올라야만 한다. 귀농은 그에게 비상 발령이었으며, 결과는 승전이었다. 도시에 버텨 재기를 꾀하기란 어려웠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그에게 도시와 시골의 장단점을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온갖 상품 시장과 문화가 구비된 도시의 편리성에 비하자면 시골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죠. 가령,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선 수십 리 먼 길을 달려 나가야만 하니까. 그러나 시골에선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명백한 장점이 있죠. 반면에 도시는 주로 인간끼리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고 말이죠. 경쟁과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골에 비해, 물적 조건이 중시되는 도시에선 정서적 안정을 취하기 어렵다는 점이 중대한 단점이라 봐요. 경제상의 기회가 많다는 건 도시의 최대 장점이겠고.” “시골의 자연이 좋다지만,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적막 속에 사는 일은 때로 고역이지 않을까요?” “단골 고객이라든가 도시의 지인들이 스스로 찾아와 식사와 대화를 즐기고 돌아갑니다. 그리운 벗들을 불러들여 회포를 푸는 일도 낙이에요. 고즈넉한 산촌에 살지만, 나름의 사교가 적절히 이뤄지는 것이죠. 갑갑증을 느끼진 못하고 살아요.”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에 잡음은 없었나요?” “이곳이 아내의 고향이라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에 용이했어요. 아내가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죠. 농토에 질긴 애착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원주민들에겐 특유의 자기 기준이라는 게 있습니다. 존중해야 할 대목이라 봐요. 과거의 시골 정서라는 게 붕괴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죠. 그러나 음식을 이웃과 나누길 즐기는 풍습은 여전합니다. 몸에 밴 나눔의 문화랄까. 이런 면은 꾸준히 지속되고 전승되면 좋겠어요. 그런데 남모를 고독을 느끼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호남 태생인 제가 영남에서 산 세월이 55년인데 아직도 호남사람이라며 은근히 무시한다는 거! 선거철엔 아예 입을 봉하고 살아요. 무시무시한 분위기라서(웃음).” 산등성이를 올라 사과 농장으로 들어선다. 사나운 8월의 폭염이 사과나무 잎사귀에 쏟아진다. 나무 아래론 푸른 그늘이 짙어 땀을 씻을 만하다. 재기를 목표로 삼아 귀농, 어언 70대 복판에 접어든 부부는 여전히 일벌레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 하면 무슨 재미? 여흥과 일락(逸樂)이 없다면 반쯤은 허사다. 부부는 자연과 교제하는 일로 산촌을 노닌다. 아침 햇살에 새벽안개가 어떻게 해산하는지를, 밤이면 별들이 모여 무슨 잔치를 벌이는지를 유심히 관람하겠지. 감관이 열리고, 촉수가 파랗게 서겠지. 그것으로 어쩌면 범람처럼 덮쳐오는 노년기의 우수를 능히 해치울 수도 있으렷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럭바위, 사계 내내 짙푸른 솔숲에 번번이 눈이 가고 마음이 움직여요. 나 같은 노년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귀농으로 얻은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에요. 그럼에도 이즈음엔 다 부질없다는 허무감이 듭니다. 애초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는 만족감 뒤에 찾아오는 허탈과 허무. 무엇으로 그걸 극복할지, 요즘 자주 생각에 사로잡혀요. 제가 말이죠, 사후 묘비명을 정해두기도 했어요. ‘여기 아내를 몹시 사랑하다가 떠난 사람이 묻혀 있다.’ 이게 제법 근사해 보였어요. 그러나 그마저 부질없다 느껴지는, 이 허무감의 정체는 무엇일꼬.” 인생의 황혼에 귀농이라는 새벽길을 훤하게 열어젖힌 사람의 눈가에 그늘이 서린다. 허무의 심연을 무슨 수로 건너나. 그는 화두 하나를 집어든 셈이다. 파란하늘에 뜬 흰구름 몇 조각, 당싯당싯 산을 넘는다.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8-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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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전남 구례 시골로 귀촌한 김창승·김태영씨 부부
-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자청한 귀촌이라는 점에서는 유쾌한 도발이거나 즐거운 실험이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주야간에 얻어 누릴 것이 많은, 자못 성대한 사업이 바로 귀촌이라는 논평도 널리 돌아다니는 게 사실이지 않던가. 서울에서 이름 난 회사의 간부로 근무했던 김창승(58)씨. 그는 오래도록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끌어왔더란다. 퇴근 뒤 주점에 들러 한잔 마시는 일이나, 휴일에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여흥으로 알고 살았다. 뭐 하나에 빠지면 수면 밑바닥까지 함빡 빠져드는 버릇, 그게 특유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라지. 본인이 선택한 일을 숭상하는 사람임을 알 만하다. 그런데 아마도 김창승씨가 가장 애호하는 건 아내 김태영(57)씨라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내는 귀촌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섰으며, 그는 즉각 응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충성!’을 속으로 외치며 대번에 아내의 뜻을 따랐던 것 같다. 이를 부부애의 한 절경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부러워할 정경이렷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일쑤 당나귀처럼 어깃장을 부려 서쪽으로 냅다 뛰기도 하는 게 남편이라는 종족이니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귀촌을 결행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위를 새삼스럽게 신중히 점검한 김창승씨는, 귀촌이라는 종목이 사실상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매우 신속하게 일을 서둘렀다. 그는 곧장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4년 1월 엄동 철에 부부는 마침내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시골로 귀촌했다. “아내의 고향이 구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싶다는 게 아내의 소망이었어요. 이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텃밭농사를 통해 순수한 먹거리를 거두어 먹고,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거죠.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으로 부푼 것 같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저에게도 신선한 전환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어요. 어느덧 귀촌 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아내는 물론 저 역시 크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김창승씨 내외가 깃들어 사는 집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자라고, 온갖 작물들이 자라는 텃밭도 솔숲처럼 싱그럽다. 낡고 빛바랜 태로 세월의 풍상을 웅변하는 고가(古家)가 자아내는 푸근한 정감. 길차게 자란 채 집을 빙 에두른 대나무들이 뿜는 청신한 기운. 남도의 전형적 농가의 구색이며, 수더분해서 다분히 이상적인 조경이며, 꾸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미학의 공간이다. 아니, 이토록 고리타분한 집에서 살려고 시골을 내려왔소? 하고 딴죽을 걸 사람이 드물지 않겠지만, 인간이란 저마다 다양한 취향을 관철하며 즐기며 살아가게 돼 있는 동물. 김씨 내외는 이 옛집이 취향과 구미에 맞아 오직 만족스럽다는 거다. 집 뒤 저편으로는 지리산이 거인의 눈을 껌벅이고 있으며, 집의 전면으로는 수려한 섬진강이 요요히 남실거린다. 명당에 들어앉은 집이라 간주한 내외는 이 집을 아예 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당분간 그냥 빌려 쓴다. 먹거리 정도는 자급하기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해결할 문제는 단연 거처나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골의 집값, 땅값은 늘 생각보다 비싸며, 매물 자체가 드물며, 뭘 모른 채 엄벙덤벙 순진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를 가진 이들의 농간에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귀촌 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나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시골에 빈집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절대 팔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도시에 나가 사는 자제들이 언젠가는 들어와 살거나 별장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들이니까요. 그렇다면 현지의 사정도 파악할 겸 잠정적으로 세 들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딱히 임대할 만한 집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저희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서야 이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지요.” “집 지을 땅이나 농토를 구입하려고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습디다. 뜸들이다 늙어버리는 것이죠. 이상적인 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과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땅을 덜컥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이나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을 속아서 사는 케이스죠. 계절마다 땅 사정이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야 해요. 여름엔 바람골이라 시원하겠다 싶어 사들였다가 겨울이 돼서야 유난한 얼음골이라는 걸 알고 낙심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땅이나 집의 거래 때 마을의 내부 가격과 부동산 업체에 내놓는 가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선생 내외는 혹한기 1월에 여길 들어왔어요. 춥고 외롭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고가의 보일러를 손보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곤 그냥 살았어요. 당시엔 TV도 없었어요. 온천지에 깜깜한 밤이 내리면 7시부터 잠을 잤죠. 그렇게 긴긴 겨울을 좀 스산하게 지냈으나, 어느덧 봄이 왔고요, 그 첫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어 여름이, 가을이 오가고, 절기에 맞춰 농사가 시작되거나 마무리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꿈꾸듯이 지낸 날들이었어요.” “일은? 농사는? 그저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지냈나요?” “아내가 교직에 있고, 나름 물적 여력도 좀 있고 해서 황급히 돈벌이에 나서진 않아도 되는 여건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에 시골에 살게 됐으니 부부의 먹거리 정도는 자급을 하자, 뭐든 소소하게나마 농사도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농토 400평을 샀습니다. 거기에 주로 콩을 심어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귀촌과 귀농을 겸한 방식으로 살아온 셈이죠.” 도시라고 왜 매력 요소가 없을까마는, 한결 안전한 삶이 시골에서라고 거저 주어질 리가 있을까마는, 인구와 차량과 소음이 거품처럼 바글거리는 도회의 생활이란 시골에 비해 피로와 고독을 가중시키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쓸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곳, 타산이 없는 동행을 만나기 어려운 장소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과 긴장이 덜한 시골에서 권태를 피해 생기를 유지하고 행복을 구가한다는 게 용이한 일만도 아니다. 적막하거나 적적한 시골살이에 무기력하게 코 꿰게 된다면 그 역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김창승씨는 가급적 일을 만들어 거기에 온전히 투신하는 게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즈음의 그는 거의 일벌레다.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 “콩농사와 벼농사, 그리고 양봉도 합니다. 벌통 20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왜 양봉이냐? 지리산 지구인 이곳엔 산야초가 타지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아요. 벌들이 꿀을 물어올 꽃들이 지천이라는 얘기죠. 과수농사도 좀 합니다. 아내는 저보고 일을 벌이지 마라, 좀 편하게 살자, 그렇게 투정처럼 말하지만 일이 즐거우니 어떡하나요? 물론 농사로 아직 수입을 올리진 못하고 있어요.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거.” “구례군 귀농귀촌협회장이기도 하죠? 귀농귀촌인들의 실태에 훤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문제에 가장 큰 애환을 느끼죠?”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농사로 돈을 만지기란 실로 어려워요. 더구나 막연히 뭔가 잘되겠지 하고 무작정 들어온 경우는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시골에 내려와 살고자 한다면 미리 도시에서 한 가지쯤 기능을 익혀두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목공, 배관, 전기기술, 중장비 또는 숲 해설사라거나, 유용하게 써먹을 기능 분야가 많으니까.” “마을 주민들과 흐뭇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이 필요할까요? 융화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 묻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흠. 전통 농경사회의 특성이랄까, 시골 주민들은 ‘외지 것들’ 또는 ‘도회지 놈들’에게 일단 경계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개나 끌고 다니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하고, 육하원칙을 내세워 따지고 비판하는 부류들을 좋아할 리가 없죠. 제가 온몸으로 느낀 거지만,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요. 주민들 속으로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녜요. 경로당에 수박 한 덩이 들고 가서 노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마을 사람 하나와 싸움을 하면, 그건 결국 마을 전체에 싸움을 거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해요. 존중하라! 그리 말하고 싶어요. 우리네 어버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 아니겠어요?” 자아도취엔 리스크가 많지만 겸허한 실천으로는 길이 열린다. 시골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를 낮추면 뜻밖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우호적인 눈길, 미더운 관심, 끈끈한 유대감이 시골살이를 안정적인 쪽으로 데려다준다. 그렇다면 귀촌이란 수신(修身)이구나! 교만하거나 우매한 나를 독사의 눈으로 냉철하게 돌아봐 교정하는 교실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세우되 이웃을 품는 일, 끔찍한 아귀다툼의 세태에서 한발 떼어 자연과 인간에게 순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일, 이는 음풍농월만큼이나 발랄한 자아실현의 길이지 않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변하는 자연 풍경들이 정신과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 같아요. 이건 도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운이죠.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별과 숲을 바라보면 때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처럼….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가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체의식과 생기를 깨달아요. 예전엔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섬처럼 저를 느끼곤 했으나, 이젠 온전한 기쁨을 느껴요. 뭔가 한층 높고 고결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그걸로 만족스러운 겁니다.” 삶의 일상에 자연이 붙어 있을 경우, 행복의 빈도는 더 잦아진다. 강바람에 들이 일어서고 눕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나뭇가지 하나를 집 삼아 밤을 나는 박새를 바라보는 일, 별이 모이는 걸 바라보는 일, 이 모든 소소한 풍경들에서 내 심장의 볼륨이 높아지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골살이란 어쩌면 낙원으로의 입문이다. 낙원의 한 치 곁엔 늘 연옥이 있는 법이지만.
- 2017-07-1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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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큐’ 뒤에 끝내 못 부쳤던 말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낯선 길에서 아주 사소한 친절을 베풀어준 한 사람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김인숙 소설가께서 이 지면을 통해 해주셨습니다. 김인숙 소설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더군요. 다리를 건너든, 강을 건너든, 열다섯 살 소녀도 아니고 이미 오십이 훨씬 넘은 처지에 기르던 것이 세상을 뜬 얘기로부터 이 편지를 시작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나이를 들먹이는 건, 이 나이쯤 해서는 기르던 것만 세상을 뜨는 게 아니라 사랑했던, 사랑하는 많은 사람 역시 내 곁을 수시로 떠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 선배들, 심지어는 후배들까지. 그러니, 이런 나이에 기껏, ‘기르던 것’과의 작별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민망하기도 한 것입니다. 먼저,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꼬박꼬박 기르던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에 무시하고 하찮아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눈물로 이별했던 사람들과 ‘기르던 것’과는 구분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별은 같지만, 사랑도 같지만, 그래도 다른 건 다른 것이고, 달라야 할 것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그 아이, 기르던 것과의 작별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작별의 슬픔과 살고 죽는 것의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해서 뭐하겠습니까. 누구나 짐작할 만큼 슬펐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로 족합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잊히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세상을 뜨기 직전, 먹을 걸 거부하더군요. 죽을 걸 알고 있으니 조용히 굶어죽겠다는 겁니다. 그걸 가만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강제급식이란 걸 시작했습니다. 거부하는 아이를 꽁꽁 싸매 꼼짝도 못하게 하고 주사기로 묽은 죽과 약을 억지로 투여하는 겁니다. 아이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버티고,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울며, 제발 먹어 먹어, 나를 위해서라도 먹어줘, 그랬습니다. 그때, 그 한숨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고양이가 한숨을 쉬더군요.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더라고요. 이제 그만해. 사람의 말로 말할 수 있었다면 아이의 말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이런 울적한 이야기 끝에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시겠지만요.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 누군가가 아주 낯선 사람이기를 바라곤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에는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지 않았고,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둘만이 통하는 말이 다른 말들을 가로막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내 짐을 얹어주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편지를 쓰더라도,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쓸 거고, 나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을 하려고 들 텐데, 그러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내 마음을 이미 다 알아차리고 더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편지 같은 거, 절대로 안 쓸 거라 생각했고, 그래도 꼭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누군가에게 그저 다정한 안부 한마디쯤 문득 건네고 싶어진다면, 그 누군가가 완전히 낯선 사람이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래서, 당신. 나는 당신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떤 우연이 당신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당신도 나도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게 틀림없습니다. 물론 나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한테는 너무나 무의미해서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모를 게 뻔합니다. 기껏해야 당신은 말하겠지요. 아, 내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런 일을 했습니다. 몇 해 전이었고, 나는 그때 싱가포르 공항에 막 내린 참이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에서 몇 달을 체류하다가 비자를 연기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그 섬을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라고 해서 하루 일정으로 싱가포르에 갔던 겁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의 체류시간이란 게 고작 몇 시간밖에는 안 되었습니다. 여유 있게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돌아오려면, 싱가포르 시내를 구경할 시간도 안 되었지요. 싱가포르에서 하루나 이틀 자고 돌아오는 일정을 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겠으나 지금은 잊어버렸습니다. 아무튼 고작 두어 시간, 그래도 공항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서 내가 짰던 여행 계획이란 게 버스를 타고 시내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거였습니다. 공항에서 출발해 공항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한 시간 반쯤, 버스 안에서 시내를 구경할 수 있겠네요. 당신은 공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내가 타려고 하는 버스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버스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도 싱가포르 돈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므로 환전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복잡한 생각은 당신에게서 버스 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된 후에야 들었습니다. 버스 한 번 타자고 먼 환전소를 찾아가 돈을, 그것도 코인으로 환전해야 할 상황입니다. 난처한 내 표정을 눈치 챈 당신이 내게 먼저 묻습니다. 차비가 필요합니까? 이런 민망한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당신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게 내밀어줍니다. 그러고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땡큐 뒤에 쏘 머치 하기도 전에 당신은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나는 당신이 준 동전을 손에 꽉 쥐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백원짜리 동전을 손에 꽉 쥐고 문방구나 만화방으로 달려갈 때처럼, 손바닥에 땀이 고입니다. 이쯤 되어서는, 당신은 아마 내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답니까? 내가 이런 편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맞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당신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떤 한국 여자의 시간과 수고를 아껴주기 위해 동전 몇 개를 주었다는 이유로 지금 이 편지를 받고 계십니다. 게다가, 내 마음의 이야기까지 들어주어야 할 판입니다. 당신이 바란 일은 결코 아니었겠지요. 당신은 그저, 먼 곳에서 온, 혼자인 여행객이 당신의 나라, 당신의 도시를 잠깐이라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다 돌아가기를 바랐을 뿐일 텐데요. 그 사소한 친절은 그러나 사소하게 흘러가지 않고 오래 따듯한 마음으로 남습니다. 생의 어떤 고비마다 문득문득 가파른 길에 서 있다고 여길 때마다, 그래서 누군가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러나 누구의 짐도 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오래전에 받았던 당신의 친절을 떠올립니다. 고작 동전 몇 개, 버스 한 번 탈 돈,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베풀어진 친절, 그런 게 정말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준 동전 덕분에 싱가포르 시내를 구경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한 자리에 앉아 한가롭게 시내 한 바퀴를 돕니다. 그날의 햇살, 그날의 적당히 기분 좋던 나른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던 길, 나는 내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수 있을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날 그 시간의 내 마음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많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주 낯선 사람의 아주 사소한 친절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친절을 동전처럼 손에 꼭 쥐고, 땀을 흘려가며, 잊지 말아야지, 잊지 말아야지, 하고 싶은 겁니다. 적당한 거리의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그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친절이 내 마음을 녹이는 순간 말입니다. 슬픔이 동전처럼 손안에서 땀으로 흘러내려, 그게 위로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런 것 말입니다. 그 낯선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내게 ‘이제 그만해’라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사랑하면, 그런 말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서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주머니에 아주 많은 동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몰려드는 많은 여행객들에게 그 동전이 하나씩 하나씩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괜찮다는 마음,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위로, 당신은 의도치 않았을지 모르나, 그 마음을 담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와서, 땡큐 뒤에 끝내 못 부쳤던 말, 쏘 머치를 붙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2017-06-26 1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