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음식인문학자로 알려진 주영하(周永河·5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관장에겐 ‘언젠가 한반도 음식 역사를 집필하리라’는 포부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최근 그는 저서 ‘조선의 미식가들’을 통해 신작로처럼 펼쳐질 조선시대 음식의 역사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를 놓았다. 여기에 조선의 미식가 15인이 글로 남긴 음식 경험은 훌륭한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단순히 에피소드 나열식의 연대기가 아닌 인물에게서 발견한 시대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음식 문화를 짚어 가보려 한다.
프랑스 법률가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개인의 음식 경험과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같은 맥락으로 주영하 관장은 역사적 인물이 글로 남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은 물론, 나아가 조선시대 식생활의 실체를 엿보고자 했다. 음식은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부패해버려 유물처럼 실재(實在)를 보고 연구하긴 어렵다. 때문에 주 관장은 조선시대 요리책뿐만 아니라 시집, 문집, 일기, 여행기, 편지를 비롯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역사 기록까지 두루 살피며 자료를 모았다.
“맛에 대한 취향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한 사람의 음식 경험에는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황과 역사가 담겨 있죠. 그 점에 주목해서 2011년부터 음식에 관한 글을 저자별로 나눠 정리했어요. 처음에 다루려던 인물은 100명이 넘었죠. 그중 맛의 표현을 가장 절묘하고 풍부하게 남긴 이들을 기준으로 계층, 성별, 직업 등을 고려해 인물을 가려냈습니다.”
그렇게 선정한 허균, 영조, 이덕무 등 15명을 일컬어 책의 제목인 ‘조선의 미식가들’로 명명했지만, 그는 현대인들이 떠올리는 미식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더니 “제목만 보고 속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요즘은 ‘미식가’ 하면 음식 맛이 좋은지 나쁜지 등을 잘 품평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조선시대엔 그런 말이나 의미를 지닌 표현은 없었어요. 대신 ‘맛을 안다’는 의미의 ‘지미(知味)’ 또는 ‘지미자(知味者)’가 있었죠. 어쨌든 요즘 말로 제목을 달았지만, 아마 ‘미식가’라는 말에 현혹돼 재미있는 내용이라 여기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솔직히 내용이 꽤 어렵습니다. 대중서보단 학술서에 가깝죠. 단순히 맛이나 요리 정보를 주기보다는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그 음식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주는 책이었으면 해요.”
실체 없는 전통 한식의 프레임
주 관장은 단편적인 주제로 그때그때 단행본을 내기보다는, 학자로서 기획한 큰 맥락 속에서 체계적인 작업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몇 해 전 출간한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은 ‘조선의 미식가들’ 시리즈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한반도의 음식 역사’를 집필하겠다던 그의 계획대로라면 먼 과거부터 순차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법도 한데, 먼저 출간된 두 책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의 음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현재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라 답했다.
“음식들의 기원이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연대순으로 나열한다고 의미가 있을까요? 그보다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먹어왔는가’라는 물음을 갖고 접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역사학이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를 거울로 삼는 학문입니다. 음식이라는 분야도 다르지 않아요. 생물학적인 음식에는 물질이 담겨 있지만, 문화적인 음식에는 생각이 담겨 있죠. 오늘날 한국인의 식사 방식이나 음식 문화의 문제들이 어떤 배경과 과정을 통해 형성됐는지, 현시점에 서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안목과 이해를 통해 미래 100년 먹거리에 대한 해답까지 찾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오늘날 한국 음식 문화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주 관장은 지나친 음식 민족주의와 한식 전통주의를 지적했다.
“한식이 건강에 좋다, 우리 음식이 최고다, 그런 인식이 강하죠. 한식 세계화 등을 펼치며 마치 우리 음식만 우월한 것처럼 이야기하고요. 또 한국인이라도 김치 안 먹고 싫어할 수 있는데, 그러면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가죠. 음식 민족주의가 만든 부정적인 결과입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시각이죠. 한식에 대한 전통주의도 너무 강해요. 우리가 먹는 한식의 뿌리는 조선시대가 아닌, 거의 20세기 이후 상업화된 음식에서 온 것들입니다. 흔히 고급 한식당에서 비싸게 먹는 요리들을 전통 한식이라 착각하는 거죠. 그렇게 전통이라 여기는 어떤 프레임이 존재할 뿐 사실 그 실체는 없을지도 몰라요. 오히려 그런 틀을 벗어나려는 이들의 노력도 받아줘야 하는데, 앞서 말한 이유들로 여전히 쉽지가 않습니다.”
괴로움 없이 소통하는 식탁
주 관장은 가족 식사가 사라져가는 현실에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예로부터 한 지붕 아래 밥을 지어 먹는 가족을 ‘식구(食口)’라 불렀고, 흔히 ‘한솥밥을 먹는다’고 표현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혼밥’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더니 가족 외식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조선시대엔 식재료가 열악하고, 남녀 겸상이 어려웠다지만 요즘엔 맛집이 즐비하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많이 탈피했음에도 식탁 위의 소통은 힘들기만 하다. 주 관장은 자신 역시 실천이 어렵다고 토로하며, 이는 사회의 여건상 개인의 노력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 진단했다.
“저마다 삶에 여유가 없어요. 돈 벌어야지, 남들 가는 여행도 가야지, 자기계발도 해야지, 스마트폰도 봐야지, 일상을 사는 데 해야 할 일과 조건이 과거에 비해 많아지고 복잡해졌잖아요. 이것저것 할 시간도 부족한데, 소통한답시고 가족끼리 때맞춰 밥 먹자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또 매일 모여 밥 먹는다고 다 화목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는 가족끼리 편안한 약속을 만들면 어떨까 해요. 가령 1년에 한 번은 온 식구가 근사하게 정장 차려입고 고급 레스토랑을 가는 거죠. 그때만큼은 즐거운 마음으로, 휴대폰도 딱 꺼두고요. 그렇게 식탁 위가 괴롭지 않아야, 음식을 통한 진정한 소통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무슨 일을 하건, 그 분야의 최고가 돼라! 자주 듣는 얘기다. ‘최고’에겐 갈채가 쏟아진다. 다들 ‘최고’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을 파는 결탁마저 불사한다. 삶의 눈먼 과속은 대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총구에서 발사된 열정의 탄환. 이 위험한 물질은 과녁을 맞히고도 좌절한다. ‘최고’가 되고서도 감옥에 끌려가는 사람조차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자전거 세계여행가 차백성은 권장한다. “꿈을 좇아 최고가 돼라!”고. 그가 말하는 최고란 뭘까. 자전거 여행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자전거로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점점 늘고 있다. 주로 청년층이 즐긴다. 차백성도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68세.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애늙은이도 있지 않던가. 가슴에 시퍼런 청년이 살아 있으면 청년이다. 정열과 패기로, 차백성은 청년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로다. ‘전업 자전거 세계여행가’로 통한다. 직업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거다. 그의 여행엔 협찬이 붙는단다. 여행서 집필과 강의도 어언 직업화됐다.
자전거로 지구를 누비는 사람이라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주앉고 보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이다. 맑은 표정으로 보자면 학자풍이다. 여기저기 관절이 결릴 시절이지만 몸짓이 곧고 민첩하다. 육체에도 정신에도 강골이 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의 황혼에 무슨 수로 청년의 새아침을 열었겠나. 그는 바야흐로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즘 최상의 행복을 느끼며 산다. 골든 에이지!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나에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 가지 일과가 있다. 운동, 독서, 글쓰기가 그렇다. 이 셋은 새로운 여행에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자 일상을 맘껏 즐기는 방식이다.”
나이 들며 사람들은 흔히 습관에 안주한다. 나이 타령이나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처럼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늙었다고 자조할수록 퇴보한다. 늙음 안에는 경륜이나 지혜 등 좋은 가치들이 들어 있지 않던가. 역사를 보더라도 60세 이후에 위업을 남긴 사람이 많지 않던가. 나는 늙음이라는 걸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산다. 이 나이에도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그 경쟁력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자동차 여행은 어떤가? 굳이 자전거만을 수단으로 고수하는 이유는?”
“어릴 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자전거 여행에 동경심을 품었다. 그때 꿈이 생긴 것이지. 나, 어른이 되면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할래! 그랬던 소년기의 꿈을 뒤늦게 이룬 셈이다. 김찬삼 선생이야말로 내 인생의 위대한 멘토다.”
김찬삼(1926~2003)은 ‘여행의 신’으로 불렸다. 비(非)문명, 오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여행 원칙을 끝까지 관철한 인물이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이른 작고도 어린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염세주의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선친은 우주처럼 큰 존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어린 내게 인생은 유한하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좀 조숙하지 않았을까. 이미 발아한 여행에의 꿈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한층 영글었던 것이다. 내게 꿈이라는 게 없었다면 평생을 방황으로 허비하고 말았겠지.”
날마다 100km씩 달렸다
삶이 부끄러운 건, 꿈을 잃었을 때다. 꿈의 관리에 능란하지 못한 채, 꿈을 배반하고 엉뚱한 행로를 헤맸다는 자각이 찾아들 때다. 차백성에게도 그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더란다. 200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진부함에 소스라쳤던 것 같다. 살아온 날들 전체에 회의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어라,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나여! 이건 나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자가 심문을 했던 모양이다. 대우건설 임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매장된 꿈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전거 세계여행의 시동이 걸렸다. 첫 여행은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 태평양을 끼고 이어지는 ‘하이웨이 원’을 달렸다. 하루 평균 100km씩, 한 달에 걸쳐 완주했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는 감개무량했지. 나도 드디어 자전거 여행가 대열에 올라섰다는 만족감이 컸다. 오래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는 쾌감은 더 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체력을 다져 떠났겠지? 하루 100km를 날마다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준비기간이 있었다. 미국 종주를 하기 이전에도 자전거를 자주 탔다. 나는 매번 엄청난 준비를 하고 떠난다. ‘고생한 그대여, 다 놓고 훌쩍 떠나라!’ 그런 식의 구호를 불신한다. 준비가 충실하지 않은 여행엔 폐단이 많아서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불가피한 경우엔 모텔에 투숙했지만, 거의 캠핑을 했다. 자전거엔 7개쯤의 가방을 매단다.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꽤 무거워진다. 30kg 이상 된다. 나의 모든 해외여행이 그런 식이다.”
하룻밤만으로도 온몸이 쑤시는 게 캠핑일 수 있다. 말 못할 불편이 많았겠다. 캠핑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점 때문이다. 하나는 캠핑장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한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경비 세이브! 불편? 별안간 설사 날 때가 가장 난감하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더라고.”
칼을 두 자루나 들고 덤비는 강도도 만나게 되는 게 자유여행이다. 사고는 겪지 않았나?
“내겐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미리 면밀히 예방하는 것이지. 유럽 여행의 경우엔 집시들을 특히 조심한다. 순식간에 자전거를 훔쳐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닌다. 캠핑할 때도 자전거를 분해해 텐트 안에서 끌어안고 잔다. 미국에선 송아지만 한 개가 공격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용케 모면했다. 미국 개들이 다들 훈련됐다는 게 퍼뜩 생각나 외쳤다. 싯 다운!(sit down) 그러자 대번에 주저앉던걸. 하하핫. 여행엔 기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사고는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다. 일테면, 길을 잃을 경우,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길이란 결국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그러나 차백성에게 길을 잃는 식의 얼간이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고율 제로! 노련한 여행자의 기록이 혁혁하다.
자전거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근사한 물건에 속한다. 자동차가 지구덩이를 까맣게 뒤덮은 이 시대까지 사멸하지 않은 그 생명력이라니. 이른바 적정기술의 산물이다. 이 주목할 만한 철 구조물에 인간의 숨결과 피를 부여하는 게 차백성이다. 페달을 밟는 그의 거친 숨결에 자전거도 격동하겠지. 그의 몸통에 흐르는 피가 핸들을 거쳐 바퀴까지 설레어 번질 테지. 사물과 인간의 동체대비, 그 사랑과 안심이 여행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
그런데, 고독하지 않을까? 그는 늘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페달만 밟는 날도 많다는 게 아닌가.
‘나 홀로 여행’을 수칙으로 삼은 사람에게선 독특한 취향 이상의 자기폐칩이랄까, 뭔가 집요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외바퀴 자전거처럼 고독하지 않을까? 고행을 자행하나?
“고독. 사실 그게 가장 힘겹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고독과의 동행이지 아니한가? 당신 역시 곁에 와이프가 있더라도 외로울 게 아닌가? 고독이란 사귈 만한 벗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은 고독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인생과 편차 없이 닮은 것 같다.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전망대, 그게 자전거 세계여행이지. 그러고 보면 이건 구도 내지는 탐구여행이겠네.”
차백성은 책벌레에 가깝다. 여행 중에도 자주 책을 읽는다지. 그게 고독을 녹여 친구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인 모양이다. 여권처럼 항상 들고 다니는 책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부러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 카잔차키스의 묘를 참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비명(碑銘)으로, 차백성의 가슴에도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것 같다.
자전거는 느리다. 느려서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 모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 풍경이 잽싼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흘러간다. 풍경은 물론 삶의 풍속까지.
세계 각국을 섭렵하는 중에 본 최고의 비경은 어디였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였다. 만년설 빙하가 흘러내려 형성된 협곡이다. 숨이 멎는 듯한 경이를 느꼈다. 그런데 비경보다 감동적인 건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의 비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미움이 쌓이는 게 인간사이지만, 늘 그리운 건 사람이다. 봄날의 여행처럼 따뜻한 존재.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인가 없는 오지의 어둠 속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정 비범한 인간애로 나를 도왔다. 눈물겨워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다음에 너도 남을 도우면 되지 않니?’ 그 한마디는, 이후 내 삶의 푯대가 되었지.”
부인에게 헌신적일 거 같다. 그런데 어쩌자고 20년째 ‘홀로 여행’만 하지?
“아내에겐 동의를 미리 구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 존중하기. 이는 현명한 부부애이지 않을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잃은 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그건 일종의 방황이었다. 비관적으로 산 세월이었지. 쉰 살에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예했던 꿈을 실현했다. 그러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더군.”
별 꿈 없는 보편적 인생도 얼마든지 어엿할 수 있다. 꿈으로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지 않을까?
“꿈이 없는 건 강아지나 시체일 뿐이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다 꿈이 있다.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겠지. 꿈을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라는 얘기다. 도전했다면 최고가 되어야겠지.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겠지. 꿈이라는 산소통이 빠져나간 삶은 자아를 질식시킨다는 얘기일 테고.
“자전거 여행의 꿈을 이루자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다. 한결 농밀한 삶이 가능해졌지. 그게 왜냐면, 가령 한자리에서 90년을 산 사람의 삶과 90년을 여행하며 산 사람의 그것은, 질적으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비단 여행만이 아니라 뭐든 꿈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다.”
차백성은 자전거 세계여행만을 꿈으로 삼진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뿌리 깊은 것이었단다. 굴레를 벗어나고픈 그의 유목적 개성이 문예 욕망으로 번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세 권의 여행기를 낸 작가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셋 모두 인문학적 내공과 글맛으로 버무려진 가작이다.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딘다. 그보다 더 그를 달구는 건 물론 여행 충동이지만.
지리산 근처 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에 첩첩하다. 그렇지만 궁벽할 게 없다. 좌청룡 우백호로 어우러진 전면의 산세가 빼어나서다. 우람하면서도 부드럽다. 운무 한자락 눈썹처럼 걸려 그윽하다. 한유창(60) 씨가 이곳으로 귀촌한 건 산야초 때문이다. 지리산 권역에 자생하는 야생초에, 그는 깊은 신뢰를 품고 산다. 한때 그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말기 암 환자였으니까. 단 한 번 주어진 목숨. 그는 그 희귀하고도 소중한 걸 야생초로 살려냈다.
“이봐! 그대는 도적이야! 절이 들어설 자리를 훔친 게 아닌가!”
집터를 둘러본 해인사 노스님의 얘기가 그랬더란다. 명당을 선점했다는 뜻이다. 정작 한유창 씨는 굳이 명당을 찾은 바가 없었다. 풍수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정붙이면 그게 좋은 자리려니, 그뿐이었다. 그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사들인 집터였다. 집이야 어떻든,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야에 사는 자체로 귀촌의 목적을 이룬 걸로 친다. 지리산의 입김을 마시고 자라는 산야초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 남원시 인월면에 둥지를 튼 건 2015년. 그 이전엔 함양 산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지리산 천왕봉 곁 산중턱에서였다. 산야에 삶을 두기로 작정하며 과욕은 이미 눌러놓았을 테지. 그래 그 첫 산중살림도 두루두루 원만했단다. 딱 하나, 겨울철 눈 내려 미끄러운 비탈길이 문제였다. 그래 이곳으로 옮겼다.
귀촌 이전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뜻한 길로, 혹은 뜻밖의 길로 좌충우돌, 서울이라는 생존의 들판을 격렬하게 뛰었던 모양이다. 암 진단을 받은 건 마흔다섯 살 때였다지. 설마 중증이랴, 대수롭지 않은 복통이라 여기고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란 예상보다 더 잔인한 것. 예고 없이 방문한 불행의 전령이 사람을 폭풍 속으로 내던진다.
“왜 이제야 왔냐, 이미 늦었다, 의사의 말이 그랬어요. 절망적인 진단이었죠.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남은 생존기간은 3개월 정도라며. 실감나지 않았어요. 마치 남의 일처럼. 병원을 나온 뒤에야 혼란이 엄습하더라고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죠.”
죽음이 돌연 현관을 노크할 걸 예감이나 했겠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라는 이주 통고. 그 황당한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고독이 극한에 달했겠지.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엔 생존본능이 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해볼 건 다 해보는 게 본성이다. 그는 자연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구조하기로 했다.
“약초로 살길을 찾기로 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죽을 작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풀만 뜯어먹었더니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었지만, 절박한 상황에 몰리자 기대를 갖게 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마련이죠. 제 주변에도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을 산골에 들어가 고친 사람들이 있어요. 야생초 섭취 외에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안정도 효과적이었던 같아요.”
“한 줄기 희망, 거기에서 나오는 안간힘. 그마저 상실하면 이젠 죽음이겠죠. 산야초로 고칠 수도 있겠다는, 아니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겠다는 신념을 품었어요.”
결국 산야초가 그를 살렸다. 약초 요법을 극진히 실천한 지 7개월 만에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병원 판정을 받은 게 아닌가. 의사가 두 손 든 말기 암을 기어이 물리쳤으니 놀랍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기적적 이변이 일어나기도 해서다.
몸소 거듭한 산야초 실험
뭐든 하나에 간절히 전념하면 통달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한다. 암이라는 사나운 놈을 밀쳐내느라 온갖 약초를 다루는 사이 그의 안목과 요령에 힘이 붙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명 약초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조차 약리 작용을 합니다. 제가 실로 많은 무명초에게 신세를 졌어요. 자연스레 산야초의 고귀함에 외경을 갖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이로울 약초를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도래했다!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암을 완치한 그는 또 하나의 허준이 되겠다는 양 남모를 야심을 품고 약재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산야초의 치유력에 관한 확신. 그간의 공부와 체험을 살리면 충분히 독보적인 약재를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 양자가 그를 추동했던 것 같다. 처음엔 고혈압, 당뇨, 탈모증 등에 탁월한 약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아토피를 정복할 산야초 발굴에 전념했다.
이후 결과물로 나온 게 ‘야초(野草)’다. ‘야초’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열광한다. 치유 효과가 명백해서다.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환자마저 있다. 너무도 슬픈 질환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약이 없다. 그 와중에 ‘야초’가 위력을 과시하며 등장한 것. 이 기발한 약재는 단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자그마치 7년을 진력해 얻은 성과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의 거처는 서울이었으나 산야초를 찾아 7년간 전국 오지 산야를 누볐던 거다.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피부질환의 고통은 일단 가려움증에서 옵니다. 가려움증을 잡아줄 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죠. 피부병에 좋다고 이미 알려진 산야초부터 갖가지 잡초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효험을 테스트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테면, 제가 모기 소굴에 들어가 온몸을 모기에 뜯긴 뒤 채집한 산야초 즙을 발라보는 겁니다. 어느 풀이 가장 탁월한가,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연속 실험을 해 드디어 한 가지 약초를 정립하게 되는 거죠. 그다음으로는 피부 염증을 해결할 풀을, 또 그다음엔 피부 재생에 뛰어난 풀을 찾았고요. 7년간의 이런 과정을 거쳐 다섯 가지 산야초를 최종 정선했어요. 그 다섯을 조합한 게 ‘야초’예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수두룩해요. 당신의 ‘야초’도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처음엔 코웃음들을 쳤어요. 이미 속아본 환자가 많으니까. 그러나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무료로 ‘야초’를 공급받은 중증 환자들이 완치에 이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환자와 만나기 위해 현재 두 곳의 한의원 한의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 사례들은 투명하게 공개되고요.”
‘야초’를 개발하기까지 7년여 동안 그는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단다. 생업이 없는 채로 미치광이처럼 야생초에 빠져 살았던 것. 이 우직하거나 용맹한 사내의 삶은 이제 완연히 변했다. ‘야초’의 성공이 물심양면의 안정을 가져온 거다. 산야를 연구실 삼아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다. 그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에 응분의 관심도 쇄도했다. 국내 유수의 모 제약사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았으며, 유럽이나 중국의 신약 기업들도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는 거대 자본과 제휴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악어 같은 자본력에 먹히기 십상이니까. 현재 강진군과 손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아토피 환자들을 유치할 세계적 수준의 아토피 치료 센터를 건립할 목적으로.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
한유창 씨의 집은 해발 470m 산기슭에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해발고도다. 모기가 없으며 열대야도 비켜간다. 그가 귀촌한 건 양질의 ‘야초’ 재료를 조달하고, 실험도 계속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요양 차원의 귀촌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이 웃자랐다는 게 아닌가. 정적인 성향의 아내 역시 산골을 동경했다지. 마침내 부부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기반을 잡은 셈이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상은 야무지지만 알고 보면 순진남인가? 그는 맹지를 속아 사는 식의 땅 사기를 세 번이나 당했다.
“군청에 가서 서류 몇 장 확인하면 속을 일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이 집의 터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묵혀둔 논을 산 건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토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엄청난 양의 흙을 사다 퍼붓고 성형 작업을 했지요. 땅값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웃음)”
너른 마당엔 뽐낸 게 없다.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를 좀 심었을 뿐이다. 뒤뜰엔 연못을 파 잉어를 넣었다. 그러나 멋부린 태없이 농수용 웅덩이처럼 수수하다. 자연스레 뭐든 내버려두는 게 구미에 맞아서겠지. 그래도 집짓기엔 공을 들였다.
“단순하나 견고한 구조, 그게 좋아 노출 콘크리트 집을 지었습니다. 회색 외벽이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울릴 거라 봤고요. 설계부터 제 취향을 반영했지요. 계획한 건축 형태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도 직영했어요.”
“산중의 외딴집이에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았어요?”
“산야초와 동행하는 사람이니 산속에 살아야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외딴집의 장점이 많지요. 우선 원주민과의 갈등 소지가 적다는 게 이점입니다.”
“대부분의 귀촌인들이 원주민과의 관계 문제를 최대 이슈로 꼽죠.”
“불화를 야기하면 배겨날 수 없으니까요. 외딴집에 살 경우엔 주민 접촉 기회가 적어 홀가분한 편입니다. 물론 적당한 교류마저 회피할 일은 아니에요. 시골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쉽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정들 수도 있어요. 어쩌다 농사일을 잠깐만 거들어줘도 진심으로 고마워들 해요. 그 역시 귀촌생활의 재미로 삼아야죠.”
“자연을 벗삼아 재미와 평온을 맛보고 싶다는 것. 이는 귀촌인들이 공통으로 밝히는 귀촌 동기예요. 자연과의 만남을, 무심히 방치했던 자아를 돌볼 기회로 삼는 거죠.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찾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변화를 꾀하기 어렵죠.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늘 변화 없는 잿빛이고요. 그에 비해 귀촌생활은 신선합니다. 사계절 따라 확연하게 변모하는 자연이 긍정적 자극을 주니까요. 어딜 가거나 어딜 보거나 항상 변화하는 풍경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죠. 그러면서 너그러워지고요.”
그는 성경 전체 필사를 세 번이나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기구(祈求)를 담은 필사였겠지. 나긋하고 싹싹한 언사. 곧잘 번지는 미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서려 있다. 서울에 살 땐 달랐다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때로 통제가 어려웠다. 술 체질이 아니라 들입다 마셔 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울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여과 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암으로 고난을 경험한 데다 귀촌까지 한 뒤엔 변화가 왔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에도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는 아홉 마리의 개를 기른다. 두 마리는 데려온 유기견이다. 개가 많아 즐거움이 많지만 불편도 많다. 일테면 부부 여행조차 엄두내기 힘들다. 아내는 그게 억울하다. 제발 더 이상은 늘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자주 호소하는 것 같다. 아내의 환심을 사려면 오나가나 진돗개처럼 충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양보할 생각이 거의 없다. 개 역시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다.
“원래 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요즘은 애착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암 투병으로 생사 갈림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느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기분을. 제 경우엔 피부질환자들의 처절한 고통마저 일상으로 접하며 살지요. 연민의 감정이 커질 수밖에요. 과거엔 모든 걸 ‘나’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이젠 남을 중심에 둡니다.”
그의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에 있다. 머잖아 유기견들을 위한 대규모 치유 시설도 만들 계획이고.
◇ 한유창 씨가 주는 귀촌 Tip ◇
•맘에 드는 땅이라도, 자금력이 넘치더라도, 시세를 너무 상회하는 매물 구입을 자제하자. 두고두고 욕먹을 수 있어서다. 마을 땅값을 올려놓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농부가 농지를 매입하고 싶어도 비싸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지을 대지 크기는 300평 미만이 적당하다. 그 이상 되면 관리가 어렵다. 특히 풀이 문제다. 비 온 뒤에는 밀림처럼 풀밭이 우거진다.
•이왕 시골에 사는 김에 산야초에 관심을 가지라. 이름난 약초만을 찾을 거 없다. 그저 흔한 들풀들의 약성도 탁월하니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망가진 몸을 고치기 위해 귀농했다. 죽을 길에서 벗어나 살길을 찾기 위해 산골에 들어왔다. 그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결과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시들어가던 그의 구슬픈 신체가 완연히 회생했으니. 산골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아름답고 기묘한 지구별과 이미 작별했을 거란다. 현명한 귀농이었다는 거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도사’라 부른다. 이 사람, 정경교(62) 씨의 삶에는 색다른 게 있다. 누가 뭐래도 제멋대로 산다.
경교 씨는 오랫동안 대양을 누볐다. 바다에서 무슨 신기한 일이 일어나나 골똘히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외항선 항해사. 이게 그의 직업이었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마냥 돌고 도는 일이라는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배를 타고 지구를 36바퀴쯤 돌았다는 게 아닌가. 오만가지 경험을 했을 거다. 생사를 넘나들기를 밥 먹듯이 거듭했단다. 긴 항해 뒤 잠시 정박한 낯선 항구의 주점에서 이마에 총을 들이대는 건달들을 깡으로 해치우기도 했다. 그는 무술에 능란하다. 그러나 몸에 찾아온 병증은 무술로 때려눕힐 수 없다. 정 씨는 자신의 몸이 내지르는 화급한 비명을 듣고 배에서 내렸다.
“어느 날, 술 마시다 혼절했어요. 이러다가 바다 위에서 객사하겠구나, 두려운 생각이 엄습하더라고요. 온몸의 에너지가 모조리 고갈된 상태였던 겁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 됐다는 거. 외항선원 생활이라는 게 원래 건강을 망치기 쉽습니다. 밤낮이 따로 없는 고된 업무, 늘 부족한 잠, 무절제한 음주, 극도의 스트레스 등등이 겹치다 보면 한계 상황에 이르게 마련이거든요.”
“시골에서 살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거죠?”
“귀농을 해서 오가피 농사를 짓자! 그런 결심을 했어요. 여기엔 이유가 있어요. 제가 배를 타면서도 건강 복구를 위해 이 약 저 약, 몸에 좋다는 걸 다양하게 먹었는데요, 오가피 효력이 가장 좋았어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자연환경 살아 있고, 그런 깨끗한 산촌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손수 오가피 농사를 지어 장복한다면 건강해지겠거니, 건강한 심신으로 나의 영원한 관심사이자 길동무인 무예 수련에 전념한다면 인생 자체가 달라지겠거니, 그런 확신과 구상이 있었던 겁니다.”
“계획대로 잘 흘러갔어요? 시련을 피할 수 없는 게 귀농인데. 심지어 고행길인데.”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뭘 하든 미쳐야 도달할 수 있다는 거! 제겐 스스로 선택한 일엔 완전히 미치는 버릇이 있어요. 귀농하자마자 모아뒀던 자금으로 집을 짓고 밭 200평을 사 오미자 농사를 시작했어요. 새벽마다 반드시 두어 시간 무술 수련을 했고요. 처자를 건사하기 위해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외항선 항해사가 배에서 내린 까닭
정 씨가 사는 마을은 진안군 덕태산 백운계곡 아래에 있다. 사시사철 등산객이 바글거리는 길목이다. 해서, 식당은 용케도 성황이었다지. 그러나 접었다. 돈벌이는 될망정 식당일에 발목 잡히기 싫어서였다. 때마침 이웃 마을에 빈집 매물이 나와 그걸 사들였다. 집이라 할 것도 없는 폐가였다. 풀덤불에 묻혀 쓰러져가는 방앗간이었으니까.
“건강이 빠른 속도로 좋아지자 본격적으로 무예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그러기엔 방앗간 자리가 적격이라 본 겁니다. 골격만 남기고 거의 다 털어낸 뒤 다락방이 있는 2층집으로 싹 개축을 했어요. 폐자재나 피죽을 구해 직접 지었어요. 엉성한 집이지만 무려 3년간 혼자 뚝딱거려 완성했지요.”
“어디서든 다시 보기 어려울 재미있는 집이에요. ‘영웅문’이라 쓴 간판도 걸어두셨네?”
“소림사의 무예 영웅들을 기리며 지은 당호입니다. 하하핫! 이전에 살았던 식당집도 홍콩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무사의 집을 본떠 지었어요. 무림 고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경. 어려서부터 제겐 그런 게 있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태권도, 합기도, 검도 등 다양한 무예를 섭렵했죠. 선원생활을 할 때도 틈틈이 중국의 전통무예를 부지런히 배우고 익혔습니다. 귀농 이후에는 드디어 본격 수련에 접어들었고요.”
“무술과 함께하는 삶의 꿈을 귀농으로 비로소 이룬 사람. 그게 정 선생이라는?”
“그렇죠. 비록 아직은 부족하지만 점점 심화되는 무술 수련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제가 무협지를 끼고 살았어요. 흰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도인을 꿈꾸었어요. 동심으로 자라난 몽상이었지만 무예와 함께하는 지금의 생활은 제게 너무도 이상적입니다. 인생을 제법 깊게 바라보는 안목과 에너지도 생겼어요. 삶에는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한 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신비하고 더 고귀한 경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결국 무술 공부가 제게 신세계를 열어준 셈이죠.”
무술과 함께하는 귀농인의 삶
정 씨의 산방 ‘영웅문’은 무협영화 세트장을 닮았다. 오잉! 대번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집 안팎에 온갖 무술 도구와 특이한 장식물과 총천연색 휘장들이 어지러이 혼재해 있어서다. 내 취향대로 이왕이면 재미있게, 이왕이면 익살스럽게 살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집이다. 인생이 어차피 쇼라면, 비극보다는 희극 쪽으로 생활을 몰아가겠다는 지향이 엿보인다.
이 집이 완성된 건 2008년. 이후 10여 년간 그는 농사와 무술 수련, 오직 이 둘을 전공 삼아 정진했다. 몰입하면 성취하는 법. 무술의 진도가 질주처럼 빨라지고, 부실했던 몸은 근육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 옹골찬 몸으로 날고 솟으며 고도의 무술 품새를 수련해왔다. 시들어가던 건강을 복구하고, 단련된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일이 쉬울 리 있겠는가. 그는 어쩌면 독종이다. 들입다 공부만 파는 ‘범생이’를 닮았다. 또 어쩌면 수행자다. 그가 무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건 정신의 산정(山頂)인 것 같다. 이미 ‘신세계’라 일컬을 만한 한 경지를 슬쩍 봤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제가 한때 크리스천이었습니다만 영성이랄까, 영혼의 비밀이랄까, 그런 본질적인 차원을 실감으로 경험한 일이 좀 있었어요. 삶으로만 완료되지 않는 또 다른 세계, 그런 게 있다고 믿게 된 거죠. 그렇기에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됐고요. 무술 수련은 결국 도(道)를 찾는 공부이자 활인(活人)의 길입니다. 나 하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욕심에서 벗어나, 남들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공부이기도 하고요.”
정 씨에겐 따르는 제자들이 있다. ‘영웅문’ 마당에서 자주 함께 수련을 한다. 지역 문화행사에 초대받아 무술 시연도 한다. 방송 출연도 잦았단다. 때로는 ‘오가피 명인’으로, 때로는 ‘산골에 사는 괴짜 도사’ 명색으로. 한 TV 방송에서는 괴력을 과시했다. 한겨울 계곡 암벽에 꽝꽝하게 뒤엉긴 얼음장을 이야압! 하는 외마디 기합 하나로 산산이 부서뜨린 것. 생생한 현장 영상이라 무슨 속임수를 썼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범상치 않은 내공, 정 씨는 그 이색적인 기운이 자신의 내부에 축적되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놀란다. “어라, 이게 뭐지? 나 왜 이러지?” 그렇게 말이다. 아울러, 좋은 에너지를 얻었으니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자는 결론에 닿았다고 한다. 희한한 재주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임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태평농법’이 가능한 오가피 농사
무술이 정 씨의 정신적 동행이라면 오가피 농사는 단 하나뿐인 생계 수단이다. 유행가만 유행을 타지 않는다. 농작물도 유행을 탄다. 흥행에 롱런하는 작물은 없다. 오가피도 그중 하나. 이미 오래전부터 과잉 생산돼 흔히들 파내고 다른 작물로 전환했다. 실정이 그렇건만, 그는 그걸 왜 신주단지 모시듯 붙잡고 살지?
“일찍이 외항선을 탈 때부터 ‘필’이 꽂혀 귀농의 한 계기가 된 게 오가피입니다. 실제 농사를 지어 장복을 하면서부터는 더 신통방통했어요. 제 체질에 잘 맞는 탓일까,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약초는 없다고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에요. ‘본초강목’엔 오가피가 금은보화보다 낫다고 기록됐더라고요.”
“제아무리 유망한 약초라 해도 농부가 생산을 해서 소득을 올리기까진 힘든 과정의 연속이지 않겠어요? 농사 초보자에겐 더욱 가시밭길이었을 테고.”
“영농 교육도 받았어요. 이웃 농부들에게도 배웠고요. 근데 오가피 농사가 원래 타 작물에 비해 수월합니다. 병충해에 워낙 강해 농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이른바 ‘태평농법’이 가능한 작물이라는 거. 풀만 어느 정도 잡아주면 알아서 잘 성장합니다.”
“재배 규모는? 수익성은?”
“현재 2만 평 정도로 규모가 늘었어요. 산지를 사 농장으로 개간하길 거듭했어요. 다른 약초들도 재배하지만 주된 작물은 단연 오가피예요. 오가피 열매를 수확해 진액을 만들어 판매하는데 가공공장도 운영하고 있어요. 소득은 미흡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앞날의 전망은 긍정적이라는 거. 단기간에 떼돈을 벌어 생기는 폐단을 고려한다면, 한동안 좀 궁한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보고요.”
상처도 삶의 또 다른 이름
2만 평짜리 약초농장. 200평으로 시작한 농사가 크게 불었구나. 관에서 주관하는 영농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장기 저리 영농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면 도시에서보다 빨리 일어설 수도 있다는 게 정 씨의 판단이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빚. 뭔가에 적당히 쫓기는 게 없는 인생엔 스릴과 탄력이 없다. 그러나 굶주린 멧돼지처럼 꽁무니를 사납게 들이받는 부채에 허구한 날을 허덕일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마침내 벌렁 나자빠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자빠지자고 참여한 게 인생은 아니겠고 말이다.
“모든 재능을 쏟아 농사를 지어야죠. 당장의 수익구조가 열악하더라도 집요한 공을 들여 미래의 희망이 보인다면 절반은 이미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그러자면 나만의 독창적인 농산물 생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저는 내심 최고의 오가피 생산 농민이라 자부합니다. 가령, 진액을 만들더라도 보통은 대여섯 시간을 달이지만 저는 이틀을 달여 진정한 농축액을 만들어요. 약효가 극대화되는 고품질 가공품을 생산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단골이 붙게 마련이에요.”
“도시에서 유능하게 잘 살았다는 사람이 귀농을 해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더군요. 주변 귀농 농가들의 형편은 어때요?”
“농사란 몸을 최대치로 쓰는 직업이에요. 쉽지 않다는 거. 열심히 일했으나 건강부터 무너지는 경우가 있어요. 가장 불행한 케이스죠. 반면, 농사를 통해 심신이 함께 건강해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과욕을 버리고, 농사일도 일종의 정신수련이라 여기는 게 상책이라 봅니다.”
“정신수련은 고상한 가치를 지니지만 정작 실천을 결여한 채 거룩한 폼만 잡다 끝나기 십상이죠. 어차피 담금질의 연속인 인생 자체가 이미 두말할 것 없는 수련일 테고요. 새삼 정신수련이 왜 필요하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인생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무예에 정진해요. 농사일에도 전념하지만 무예 다음이에요. 무예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라 믿으니까. 생활에 수련이라는 정신활동이 가세할 경우엔 삶의 질이 달라져요. ‘빛의 세계’라 할 만한 영성까지 갈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게 내면에 얼룩진 상처를 줄이는 최상의 처방이겠죠.”
상처. 애초에 삶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상처를 피할 길이 없다. 상처란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무기징역처럼 지겨운 상처를 정 씨는 무술 수련으로 쓱싹 해치우는 것 같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단다. 아내와의 이혼에서 얻은 번뇌가 그것.
“여자들에게 귀농생활은 너무도 힘들 수 있어요. 한평생 동고동락하자 했으나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아내가 떠난 뒤 제가 방황을 했다면 상처가 더 커졌겠죠. 그러나 보란 듯이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부끄러울 게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놈의 상처라는 건 영 사라지질 않아요. 끙.”
이혼도 참신한 해방일 수 있는 걸 왜 그러시나? 난 그리 생각하지만, 그는 먹먹한 표정으로 포옥 한숨을 몰아쉰다.
◇ 정경교 씨가 주는 귀농 Tip ◇
•초기의 과도한 투자는 금물이다. 5년쯤 농사 경험을 쌓아 안목이 트일 때 본격 투자를 해도 늦지 않다.
•집부터 먼저 잘 지으려 노력하지 마라. 처음엔 세를 얻어 살거나 극히 간소한 건축을 하자.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의 취향과 마을 실정에 어울리는 집이 어떤 형태일까를 저절로 깨닫게 되니까.
•독립적인 사생활이 보장되는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 농촌 공동체의 관습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투철히 인식하자. 잘난 척하거나 매사 앞에 나서다가는 소외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인생을 2모작도 아닌 5모작까지 치르고 지금은 6모작을 준비 중이라는 사람, ‘N잡러’ 장필규 행복 제1연구소 소장은 1955년생으로 정확히 베이비붐 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100% 베이비부머다. 그는 요즘 프리워커로서 고용노동부 내공강사, 노사발전재단 전문강사, 경기도 6차산업 현장 코칭 컨설턴트, 인천농촌융복합 현장코칭 전문위원 등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년이라는 단어가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는 셈. 장차 6모작을 넘어 9모작까지 완성하는 게 꿈이라는 그가 말하는 인생 후반기의 삶과 잡(job)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제 인생의 4모작은 50플러스재단 컨설턴트였고, 5모작은 N잡러로 활동하는 지금이죠. 이제 6모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시니어에게 일은 새로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여행하듯이 즐거움을 찾는 거지요.”
‘N잡러’ 장필규 씨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일하고 있다. 현재 그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지방자치단체의 컨설턴트와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9모작을 최종 목표를 두고 6모작을 준비하기 위해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다.
“환갑을 넘어 케어를 받아야 할 사람이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고 집사람이 잔소리를 하네요.(웃음) 그런데 저와 같은 나이대에도 취약 계층이 있을 거예요. 제 연배의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예전에 거창에서 일할 때 요양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나도 머지않아 그분들과 같은 입장이 될 텐데 이야기 들어주고 도와주니 즐겁더라고요.”
퇴직 없는 삶 위한 평생현역 꿈꿨으나…
그의 이름에는 베풀 장(張), 도울 필(弼)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줄 때 베풀고 도와주라는 의미로 새긴 게 아닐까. 현재 그의 모습은 이미 숙명처럼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건국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81년 두산그룹 계열사인 배합사료 회사 두산곡산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이 펼쳐지던 시기였고 그의 삶 또한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그도 사회적 환경에 따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그에게 던져진 자리는 두산종합식품 식품사업 부문의 김치공장 관리부장. 고민을 했지만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김치공장으로 간 그는 관리부장, 공장장을 거치며 10여 년간 김치 제조의 일선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사 주인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두산이 식품사업 부문 전체가 대상에 매각될 때 그는 6년 후배가 상사로 승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는 대상 소속으로 2년 정도를 더 지내다 2008년 4월에 퇴직한다.
끊임없는 도전, N잡러로 거듭나다
54세의 나이, 인생 1막이었던 대기업 직장인으로서의 27년은 끝이 났다. 삶에 대한 허무감과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치주염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아야 했던 그는 수술 후 재취업을 도와주는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찾아가는 것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이력서 작성법, 면접 스킬 등을 교육받은 그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농업 최고경영자 경영대학원 과정에 합격한 뒤 몇 번의 테스트까지 통과하며 마침내 울진농수산물유통농업회사법인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토록 고생하며 올라간 자리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결국 대표 자리를 그만둔 그는 마침 일본 회사와 울진군의 합작 회사인 울진로하스코리아에서 대표 제안을 해와 CEO로서 3년을 지냈다.
“인생 2막의 과정은 지방에서 CEO로 일을 하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면서 재무 문제도 해결되고 가족관계는 물론 건강도 좋아졌죠.”
울진로하스코리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2012년 말부터 일자리희망센터를 찾고 취업박람회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농촌진흥청에서 마케팅 전문위원으로 인생 3막을 펼쳤다. 이곳에서 5년간 근무하며 농가 500곳을 대상으로 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이어 서울시 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고용노동부 등지에서 강사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4막의 장을 펼쳤고 진정한 N잡러가 되었다.
수입 적더라도 즐거움 주는 천직 찾아야
“이제 베이비부머들은 잡(job)이 아니라 워크(work)를 해야 해요. 워크는 천직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천직을 찾아야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시니어 구직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묻자 제2인생에서는 일이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일이 놀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다. 수입은 적더라도 길게 오래할 수 있는 천직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그가 N잡러로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의 직업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적어도 세 개 내지 다섯 개는 가지고 있어야 과거 연봉의 절반 정도가 되죠. 특히 시니어는 공부를 위한 비용이나 손주들 용돈, 네트워크 유지비 등 지출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가 또 강조하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 관계의 유연성이다.
“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제 주위를 보면 어떤 사람과는 케미가 맞지 않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그건 취향이기에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순 없죠. 다만 기왕이면 유연성을 갖고 적을 만들지 말아야 평화롭고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 유연함으로 세상 대하기
그런데 삶의 부침들을 겪으면서도 마음의 유연성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걸까?
“어느 접점에 있든 열린 마음을 실천하는 겁니다. 역지사지라고 하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많아져요.”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 그는 도전적이라기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해온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결과도 그의 열린 마음 덕분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박사학위를 가진 시니어도 일에 대한 욕망이 뜨거워요. 그런데 한국인은 디테일에 약해요. 그래서 매뉴얼이 있어도 막상 긴박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써먹지 못합니다. 습관화가 안 된 게 문제입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계속 반복하고 고치고 훈련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구직을 하려면 ‘어떻게’에 관한 디테일한 액션 플랜을 짜서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테스트에 통과하며 자신의 자리를 잡은 그이기에 신뢰가 갔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천직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는 그도 구직자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구직자들을 상담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삶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양쪽을 다 경험해본 그에게 두 입장에 대해 물어봤다.
“구직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들은 고객 니즈에 맞게 세분화, 효율화되고 향상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시도가 진행되다가도 중간중간 끊기더라고요. 그게 아쉽죠. 그리고 구직자들의 입장을 보면, 그래도 구직을 위해 오는 사람들은 열정이 있는 거예요. 흔히 퇴직하면 ‘또 직장생활을 해야 해?’, ‘날 찾아주는 데는 없어’ 하며 의욕이 없는 경우가 많죠. 목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퇴직하는 순간 놔버리는 거예요. 물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무책임한 거죠. 그런 심리를 어떻게 끌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그는 은퇴자 혹은 퇴직자들이 자기진단을 해보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적합한지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자신을 파악하고 일을 찾다 보면 현실의 갭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걸 인내하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인 중에 20년 동안 독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말하길 ‘결론은 나를 찾게 되더라’ 하더군요. 나를 찾는 노력을 하고 준비하면 일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 주위의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욕심의 분모 줄이면 행복이 찾아온다
자신이 이 사회에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때 더욱 의욕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 그는 100세 김형석 교수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은 것’이라고 한 말을 다시 전한다.
“사람은 일이 있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어요. ‘60~65세가 자신의 황금기였다’는 김형석 교수님 말에 공감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N잡러 장필규 소장은 자신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소욕지족(少欲知足)에 비유했다. 행복해지려면 욕심의 분모를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의 분모를 자꾸 키우면 내려놓기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100분의 60과 60분의 60을 비교해보세요. 후자는 60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죠. 이렇듯 분모를 줄이면 60분의 60이 1이 되듯 가벼워집니다.
‘1’과 ‘일’처럼 디테일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 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결국 ‘1’과 ‘일’처럼 은퇴 후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있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죠.”
노후에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 많고 적음을 떠나 돈과 건강, 관계, 여가 등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강조하는 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고 여행하듯 사는 게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담대하고,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심리학자들은 “행복하고 싶으면 친구와 여행을 가 맛있는 것을 먹으라”고 말한다.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오죽하면 ‘친구를 알고자 하면 사흘만 같이 여행해보라’는 말이 있을까. 여행 중엔 본성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일정에 지치고, 취향과 지향이 부딪치다 보면 날카로워지기도 한다. 특히나 해외 자유여행은 사전에 준비할 일도, 멤버 간 선택할 일도, 조정할 일도 많다. 요컨대 ‘갈등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다. 꼼꼼한 룰을 사전에 세워놓으면 좋다.
역할분담
각자의 특성대로 맡아서 하기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역할분담이다. 한 친구가 도맡아 하면 피로가 쌓이고 결국 “내가 혼자 애쓰는데 너희들은 뭘 했느냐” 하는 불평이 생기고 균열이 발생한다. 단 공정한 역할분담은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각자 똑같은 분량으로 일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장기, 재능별로 역할을 맡는 것이 좋다. 여행 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일정 기획, 예약, 회계 총무역할이다. 각자 자신 있는 분야를 맡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우리는 크게 건강(비상의약품, 음식), 회계 총무, 기획·예약, 기록담당 등으로 역할을 나눴다.
항공권 및 숙박호텔 예약
품 들인 만큼 싸게 살 수 있다
행복한 여행을 하려면 치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품 들이는 만큼 가성비는 높아진다. 여행준비의 핵심은 항공권과 숙박호텔 예약이다. 여기서 여행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린 비용보다 비행시간을 최소화해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기로 했기 때문에 직행 항공권만을 집중 검색했다. 품을 들이는 거에 따라 200만 원짜리 항공권을 절반에 살 수도 있다. 항공권을 싸게 샀을 때의 뿌듯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항공권은 일찍 예약한다고 반드시 싼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추이를 살피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예약’하는 게 필수다. 요컨대 항공권 비용 절약의 왕도는 결국 손품이다. 아울러 적당한 시기에 표를 사는 결단도 필요하다.
호텔 예약을 할 땐 비용과 교통편의를 함께 감안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로테르담과 벨기에의 브뤼셀, 호텔 3곳. 열흘 치 짐이 든 가방을 들고 이동하는 게 부담이었다. 대중교통 이동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역에서 가까운 호텔을 찾는 데 중점을 뒀다. 해당 도시 호텔들을 하도 많이 검색해 여행을 떠나기 전쯤에는 그 도시 시가지를 머릿속에 훤히 그릴 정도였다. 호텔 등급은 여행 전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점점 더 고급형으로 높이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끝이 좋아야 다 좋다. 뭐든 좀 불편한 데서 좋은 곳으로 업그레이드돼야 만족도가 높아지고 여독을 풀기에도 좋다. 전체 동선은 함께 가고 싶은 나라를 결정한 후, 여행지 안내서를 중심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여행사의 패키지 프로그램 일정표를 참고하고, 멤버들이 가고 싶은 곳을 반영해 최종 정리했다.
데이터 이용
여행 목적, 멤버 구성에 따라 수단을 찾는다
해외여행에서 데이터 사용은 필수다. 헤어졌을 때 멤버 간 비상연락망은 물론, 길을 찾을 때, 유적지 관련 정보를 찾아볼 때 필요하다. 해외에서 데이터 사용 수단으로는 유심, 휴대용 와이파이 공유기, 해외로밍 등이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으므로 비교 후 결정하는 것이 좋다. 유심은 전화번호가 바뀌기 때문에 국내에서 오는 문자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게 불편하다. 휴대용 와이파이 공유기는 일행이 인터넷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불편한 점은 공유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 수시로 별도 충전해야 하는 것도 단점이다. 또 멤버가 같이 사용하려면 일정 범위 내에서 붙어 다녀야 한다. 로밍은 편의성 면에서 가장 좋지만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짐 싸기
여행은 채우러 가는 게 아니라 비우고 오는 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 새 옷, 새 신발을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반대였다. 옷도, 양말도, 신발도 헌것으로 가져간다. 여행 중에 옷장 속에 놔두고 오기도 하고 매번 빨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새 옷과 새 신발이면 낭패다. 여행을 하다가 가방을 비워야 하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여행은 바리바리 채우러 가는 게 아니라 비우러 가는 것이다. 당연히 여행 짐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여행지 정보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을 할 때도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국과 관련한 영화, 소설 등을 읽고 가면 이해가 빨라 흥미롭다. 영화를 다운받아서 비행 중에 보면 지루함도 덜 수 있다. 네덜란드와 관련한 영화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튤립 피버’가 있고 책으로는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 편’,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산책’, ‘플랑드르 미술여행’, ‘네덜란드에 묻다, 행복의 조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등이 있다.
지출 비용
항목별로 미리 짜놓은 예산에 따라 쓴다
비행기표, 숙박비(별 4개 수준의 호텔 숙박비 기준), 입장권, 교통비, 투어비 등은 예약이 필요해서 미리 비용 파악을 할 수 있다. 굵직굵직한 일정들은 되도록 예약을 했다. 유명한 곳은 2개월 전 예약이 필수이고, 현장 판매가 안 되는 곳이 많으므로 확인이 꼭 필요하다.
현지에서 써야 하는 비용도 미리 예산을 세워 분류했다(여행지에서 현찰이 모자라 송금을 부탁하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식비는 끼니당 100유로씩 예상했다. 유럽 식당에선 1인 1식이 필수라 하지만 수프, 샐러드, 메인 요리 3개를 시켜도 무방하다. 또 호텔에서 팁을 줘야 할 때를 대비해 1달러짜리 지폐를 별도로 준비했다(동전을 싫어한다 해서). 교통비, 입장료도 미리 책정했다. 이외에 예비비를 편성해놓으면 여행 중 발생할 수 있는 돌발변수에 대처할 수 있어 좋다. 여행에선 크든 작든 사고가 발생한다. 여행 도중 우리는 일정이 변경되어 예약한 버스표와 기차표를 취소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아뿔싸, 버스나 기차는 하루 전에 취소해도 환불이 불가하고 현지에서 1년 내에 사용할 수 있는 티켓으로만 바꿔줄 수 있다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총액 28만 원 정도여서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때 예비비가 유용하게 쓰였다.
여행 중 비용 지불은 카드와 현찰 모두 가능하지만, 편의와 안전을 위해 적절히 배분해 다니기로 했다. 현찰로 지불할 때는 즉시 기록했다. 매일 저녁 영수증을 펴놓고 돈 계산하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현찰은 멤버들에게 N분의 1로 분배, 각자 가지고 다녔다. 혹시 모를 도난이나 분실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또 카드의 경우, 여행공금카드(체크카드)를 국내에서 미리 만들어갔다. 여행 후 가계부 앱을 돌려 지출비를 카테고리별로 점검해보니 ‘교통비 36%≻투어와 기타 31%≻숙박비 16%≻식비 13%’의 순이었다(그림 참조). 이런 기록 시도는 처음 해봤는데 다음 여행 계획 때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프로그램은 종합구성으로
해외 자유여행은 현지 가이드, 현지 관광상품, 프리 워킹투어 등으로 종합구성하면 좋다. 렌트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짐까지 계산해 동선 계획에 넣어야 한다. 체크아웃을 하고서도 호텔에 짐을 맡길 수 있는지, 역에 라커가 있는지 등도 확인한다. 교외 관광지는 이동수단의 불편이 많기 때문에 현지 관광버스투어, 현지 가이드를 활용하고, 목적지가 편한 곳일 때는 구글 앱 도움을 받아 이동하면 된다. 도심의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할 때는 워킹투어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역사문화유적지는 현지 한국어 가이드를 섭외하는 것이 좋다.
역사문화유적지
같은 곳을 봤어도 스토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추억이 달라진다. 미리 공부를 해가도 문외한의 눈으로는 한계가 있고 차이도 구별하기 힘들다. 우리는 역사문화유적지를 갈 때는 현지 한국인 가이드를 섭외해 설명을 들었다. 영어로 설명하는 가이드도 있지만 복잡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다행히 20여 년 이상 그곳에서 산 분이 가이드를 해줘 역사, 문화, 시사, 그리고 현지의 생활문화까지 들려줘 매우 유익했다. 현지 한국인 가이드 섭외는 ‘자전거여행’, ‘마이리얼트립’ 등을 이용하면 된다.
교외 유명 자연관광지
교외 유명 자연관광지는 현지 교통 사정에 어두운 외지인이 찾아가려면 힘들다. 관광버스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편하다. 역 터미널, 공항 터미널에 티켓센터가 있고, 국내에서 예매도 가능하다. 단 주의할 것은 버스 출발 장소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우리도 출발지와 티켓 발매처가 헷갈려 엉뚱한 곳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뒤늦게 혼비백산해 버스 출발 5분 전에 모임장소에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심은 워킹투어 프로그램 이용
대부분의 도시에는 워킹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걸어서 두세 시간가량 도심을 돌며 주요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한국인과 외국인 가이드 모두 가능하고 유료와 무료가 있으니 일정에 맞춰 예약하면 된다. 우린 암스테르담에서 무료 워킹투어 프로그램(영어)을 신청했다. 무료는 실력 차가 나는 경우가 많다. 효율성을 따진다면 유료 워킹투어를 이용하는 게 낫다.
한곳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면 구글앱 사용
한곳에서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면 일행끼리 움직이면 된다. 길치 4인방인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갈 때 구글 앱과 지도를 보거나, 현지인에게 물었다. 구글 앱이 잘돼 있어 길 안내를 상세하게 받을 수 있다. 트램(노면열차)을 타도 내려야 할 정거장, 경로까지 꼼꼼하게 안내해줘 편리하다.
귀촌을 위해 집을 샀으나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 남의 토지 위에 들어앉은 건물만 샀으니까. 건물 값은 900만 원. 토지 사용료는 연세(年貰)로 치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이었다지. ‘까짓것, 고쳐 쓰면 그만이지!’ 그런 작심으로 덤벼들었다. 뭐든 뚝딱뚝딱 고치고 바꾸고 꾸미는 재주가 있는 그는, 단지 두 달여 만에 쓸 만한 집을 만들어냈다. 민병덕(64) 씨의 귀촌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조촐하고도 옹골차게.
집 밖으로 물처럼 찰랑찰랑 흐르는 게 있다. 음악이다. 처마 밑에 매단 스피커에서 출발한 선율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 ‘사랑의 산들바람은’이다. 환영사인가? 방문객을 위해 미리 준비한? 알고 보니 그것만은 아니다. 늘 음악을 튼다는 게 아닌가. 음악이 없는 인생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그게 민병덕 씨의 생각이다. 잠자는 시간 외엔 항상 음악을 듣는단다. 그 좋은 음악을 혼자 즐기기엔 아까워 옥외 스피커까지 장착했다. 담장 밖 길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도 귀를 씻을 수 있도록.
마음껏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이건 민 씨의 귀촌 이유이기도 하다. 대문 바깥으로까지 종일 음악이 흘러나가도 무사할 수 있는 게 시골이니 말이다. 도시에선 다르다. 남의 피곤한 귀를 괴롭히는 소음 유발자로, 악취미의 소유자로 탕탕 규탄받을 가능성이 많다.
음악은 그의 밥줄이기도 하다. 음악을 짓거나 노래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빈티지 오디오를 수리하는 기술자다. 진공관식 오디오 수리에 관한 한 마지막으로 남은 전문가를 자처한다. 최상의 선율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 진공관식 전축으로 고품격 음질을 갈구하는 마니아들이, 고장 난 장비 때문에 실의에 젖어 끙끙대던 이들이 그의 시골집을 찾아온다.
어려서부터 팝송에 폭 빠졌다지. 1970년대 중반, 수원에 있었던 ‘역마차 다방’을 기억하는 독자가 계시려나? 당시 이 음악다방 디제이의 인기는 하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방의 천장 정도는 무난히 찌를 지경이었다. 다방이 미어터지게 처녀들이 몰려와 디제이가 선곡해 들려주는 팝송에 넋을 놓은 채 청춘의 참을 수 없는 우수와 뜨거운 갈증을 다독였다. 이 디제이는 입대 뒤 100통이 넘는 감미로운 팬레터를 받았다. 그건 재수 없는 고참병들에게 괜스레 쥐어터지고 으깨어지는 게 다반사인 군대에서의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민병덕 씨가 바로 그 ‘역마차 다방’ 디제이였다.
음악에 관한 취향과 애호, 경험이 결국은 인생의 길이 되고 방향이 됐다. 죽 한 길을 살아온 건 아니다. 이런 사업, 저런 영업, 전전한 바가 많으며 굴곡도 심했다지. 세상은 아름다워 뒤에 두고 떠나기엔 섭섭하다. 아울러, 아름답기는커녕 세상은 때로 정나미 떨어지는 난장판이다. 민 씨의 삶에도 곡절이 많았단다. 믿었던 이들에게 당하거나 뜯기거나 찢겨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게 또한 그의 귀촌 동기다. 하이고, 지겨워라, 나 이제 조용한 시골에서 살래!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난생처음인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뭐든 쓱싹 잘 고쳐주는 남자
“시골에서라고 이상적인 생활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낯선 농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거의 없었고요. 제가 원래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거든요. 이웃들에게 잘하면, 마을 어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그런 자신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거나 딱히 준비한 것 없이 귀촌했지요.”
“완전한 내 집이라 할 수 없는, 이른바 ‘지상권 주택’을 사서 오셨어요? 굳이 그래야 했을 이유라도?”
“그야 뭐, 돈이 없었으니까. 하하하!”
“그간 뭘 하셨기에? 모으기보다 쓰기에 주력하셨나?”
“제가 잘나갈 땐 상가 건물도 소유했어요. 근데 어쩌다 보니 다 날아가더라고. 제 능력 부족 탓에 사업을 망친 경우엔 그러려니 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금전적 손실을 당했을 땐 괴롭더라고요. 아무튼 지상권 건물은 제 처지에 적격이었어요. 3000만 원 정도 들여 집을 싹 고쳤지요. 아 참, 제가 이 집에 매력을 느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목련나무가 맘에 들었다는 거. 야, 이 집에 살면 봄철에 백목련을 실컷 즐길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들떴으니까.”
“꽃을 좋아하는 남자?”
“꽃이 세상을 환하게 하니까. 꽃나무 안에 사계의 순환이 있고요. 식물들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포기하기란 어렵죠. 좁은 마당이지만 갖가지 화초와 나무들을 가꾸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라일락, 쥐똥나무, 배나무, 능소화, 장미, 머루, 다래, 패랭이, 달맞이꽃, 튤립….”
꽃에서 꽃피기까지의 상처와 고통을 보는 사람이 있다. 꽃에서 기어이 피어날 삶의 축복과 환희를 보는 사람이 있다. 민 씨의 성향은 후자 쪽이다. 낙관과 순응을 속에 담고 사노라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 그의 귀촌은 긍정적인 예견과 함께 단행되었다. 남들 보기엔 허술한 귀촌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실은 적극적인 청사진을 내장한 상태로 시골에 등장했다. 그가 집을 보수한 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한 일은 꽃 가꾸기였다. 마을 안길에 꽃길 만들기!
“이사하기 전, 마을을 몇 번 드나들며 퍼떡 꽃길 조성을 생각했어요. 보시다시피 나지막한 산들이 에워싼 이 마을 풍광은 썩 아늑합니다. 그러나 입구에 공장도 있고 꽤나 어수선한 분위기더라고. 아하, 꽃길을 가꾸면 마을 인상이 훤해지겠구나, 누군들 꽃을 싫어하랴! 그런 생각으로 집 앞 도로변부터 꽃을 심기 시작했어요. 버려진 보도블록을 잔뜩 실어다 화단을 만들어 꽃씨를 뿌렸어요. 뿌리면 피어나는 법. 크게 힘들이지 않고 모두가 좋아하는 꽃길을 얻은 셈이죠. 덤으로 원주민들에게 호감을 샀어요.”
원주민에게 호감 사기. 이는 귀농귀촌의 튼실한 뿌리를 내리는 데 가장 필요한 영양성분이다. 도시나 시골이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명암과 요철은 하등 다를 게 없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주로 점잖은 사람들이 모여 오순도순 사는 곳이 시골일 거라 여기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골 사람들이 요상하게도 더 사납고 더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는 도시 사람들이 더 사납고 더 이기적이라고 도매금으로 싸잡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관념이다. 이런 인간, 저런 인간이 골고루 분포해 먹이를 사냥하는 게 인간사회라는 수렵장이지 않던가. ‘이기적 유전자’를 씨앗처럼 몸에 달고 태어난 인간들의 공동체 어디건 가혹한 생존 조건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한결 공정한 관점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 이 안엔 우렁찬 진실이 서려 있다. ‘닥치고, 너부터 잘하세요!’라는 말과 동의어일 이 시쳇말엔 존중과 자존과 이타(利他)를 설하는 경책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민병덕 씨는 세상에서 배운 지혜의 모든 걸 귀촌생활에 쏟아 부은 것 같다. ‘내가 먼저 진심을 다해 베풀면 무슨 사단이 나랴, 알것제? 나여! 나부터 잘해보더라고!’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이며 귀촌생활에 발동을 걸었던 모양이다. 이사 직전 그는 동네 이장을 찾아갔더란다. 자못 쓸모 있는 사람 하나가 마을에 새로 출현하게 됐음을 예고하기 위해서였다지.
“마을발전기금이라는 거. 요즘은 귀촌귀농인들에게 그런 희한한 것까지 요구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주눅들 게 뭐란 말인가. 이장에게 말했어요. ‘난 내가 가진 재주를 유익하게 나누겠다, 내가 전자 기술자다, 뭐든 다 고칠 수 있다. 이제부터 마을 분들의 고장 난 가전제품은 내가 다 무료로 고쳐드리겠다!’ 돌아온 응답은 훈훈한 환영사였어요.”
“당신이 가진 재능을 아낌없이 이웃들에게 베풀라! 이건 귀촌귀농의 성공 필살기죠.”
“혼자 돌아앉아 고독과 고립을 벗 삼아 살 게 아니라면 어울려야죠. 그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만은 아녜요. 주민들에게만 좋은 일도 아니고요.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하는 현명한 처신이니까.”
“뭐든 쓱싹 잘 고쳐주는 남자. 결국 그렇게 소문난 거예요?”
“고장 난 경운기를 고칠 수 있는 용접기까지 미리 장만하고 주민들을 기다렸어요. 주로 할머님들이 가전제품 수리를 부탁해오더라고요. 전기밥통, 믹서, 선풍기, TV 등 뭐든 다 수리해드렸죠.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저 건너 이웃마을에서도 저를 불렀어요. 그러면 재까닥 달려갑니다. ‘아유 고마워라, 수리비는 얼마요?’ 처음엔 그리 묻는 분들이 많았고.”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갚는 게 시골 사람들이죠.”
“그게 시골 특유의 정서죠. 외지인에게 배타적이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선 돌변하기도 하지만, 선의라는 건 통하는 법이라서 준 만큼 받게 되는 게 농촌이에요.”
“주로 무엇을 받으시지? 우호적인 마음, 친밀감, 신뢰, 그런 거?”
“한마디로 따뜻한 인정이죠. 뭐든 농작물이나 음식을 수시로들 가져와요. 제가 집에 없을 땐 대문 앞에 놓고 가는데, 자주 고양이들이 음식을 먼저 먹어치웁니다. 그래 대문간에 아예 전용 보관함을 설치했어요.(웃음)”
해마다 마당에서 펼치는 꽃 축제
민 씨는 아마도 잘나가던 시절의 잉여물일 외제차와 외제 바이크를 타고 다닌다. 물개처럼 늘씬한 사냥개 두 마리도 기른다. 인근의 강변 활터에 나가 활쏘기도 즐긴다. 이런 그의 동향에 마을 사람들은 이물감이나 위화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이 나라이지만, 편견과 간섭이 가랑비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게 세사이지 않던가. 어라, 수상한 한량 하나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네! 눈총이 쏟아지고 괜히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었을 거다. 일테면, 귀촌자가 개를 끌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거북이를 끌고 돌아다니는 일만큼이나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게 농촌이니 말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민 씨는 응분의 노력을 다해 융화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손수건에서 비둘기를 뽑아 날리는 재주만이 마술은 아니다. 인간관계의 지반을 촉촉이 적시어 생활의 여건을 증진하는 일, 없었던 우정을 돋우어 삶의 재미를 촉진하는 일도 마술처럼 유쾌하다. 마을 속으로, 이웃 속으로 빗물처럼 스며들어 귀촌의 재미와 안락을 누리는 민 씨의 행장엔 한 번뿐인 아까운 생을 스스로 부양할 줄 아는 자의 현명과 전략이 서려 있다.
10년. 그가 귀촌 이후 흘려보낸 세월이 그렇다. 그 10년간 흘린 진땀이 숱할 테지.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놀이’에 있다 하니 솔깃해진다. 사람은 일벌레가 아니니 나이 든 자라면 놀이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까? 자주 그런 생각합니다. 답은 간단해요. 내 처지에 맞는 즐거운 놀이, 민폐가 없는 취미, 내가 진정 좋아하는 특기를 찾아 몰입하면 된다는 것.”
“일은 뒷전이어도 좋은 거예요?”
“아하, 일단 일은 최선을 다해야죠. 이곳이 시골이지만, 문제가 생긴 오디오를 들고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많습니다. 기술이 녹슬지 않는 한 외진 산골짝에 살더라도 밥 굶을 일은 절대 없지요. 아아, 가고 싶다, 깊고 고요한 산골로.”
“외롭지 않을까? 산중생활이라는 거.”
“점점 자연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외로움이란 도시의 군중 속에서 더 커지는 게 아닌가? 제게는 많은 지인이 있어요. 어딜 가든 찾아오는 정든 벗들 말이죠. 저는 그들을 초대해 축제를 해요. 귀촌 1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두 차례 잔치를 벌여왔어요. 백목련 축제와 장미 축제죠. 저의 집 마당에 목련이 필 때, 장미가 만개할 때, 그 좋은 꽃철에 맞춰서.”
그는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을 자처한다. 대접할 요리 구상까지 해놓은 뒤 정성껏 만든 축제 초대장을 보낸다지. 꽃 속에서 신나게 놀아보자고. 초대받을 자격에 미달하는 인사들은 사절이다. 일테면, 부부 동반이 아닌 경우가 그렇다. 정작 민 씨는 ‘돌싱’이지만.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까? 자주 그런 생각합니다. 답은 간단해요. 내 처지에 맞는 즐거운 놀이, 민폐가 없는 취미, 내가 진정 좋아하는 특기를 찾아 몰입하면 된다는 것
◇민병덕 씨가 말하는 귀촌 Tip◇
•굳이 집 마련에 큰돈 쓸 일 아니다. 자금이 부족하다고 낙심할 것도 없다. ‘지상권 건물’을 매입하면 된다. 공들여 수소문할 경우, 의외로 쉽게 찾을 수도 있는 게 지상권 건물이다.
•귀촌 장소를 신중히 물색해야 한다. 과연 내가 정붙이고 살 수 있는 마을인지 사전에 자주 드나들어 판단하자. 이장을 미리 만나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도 필수.
•원주민들과 인간적 신의를 쌓아야 한다. 불신을 사 외톨이 신세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강물에 패이고 풍파를 이겨내며 살아온 세월. 아팠던 일은 아프지 않게 마음 속에 저장한다. 잊고 싶은 순간은… 담담하게 그 자리에 내려놓는다. 과거는 낭만으로 포장돼 기억되기 마련. 그게 나이 듦의 특권일 수도 있다. 평양식 맛집으로 소문 자자한 봉화전 주인장 김봉화(金鳳華) 씨를 만났다. 고운 얼굴 수줍은 미소가 기억하는 옛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해봤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에 내려 멀지 않은 거리에 봉화전이 있다. 강남이라고 해서 멋들어진 건물 자태 운운하면 곤란하다. 건물만 똑 떼어 어느 시골 마을 장터에 갖다 놔도 어색함이 없을 만큼 정감 가는 분위기를 뽐내는 곳이 봉화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온 사진작가를 앞에 두고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봉화 씨. 주제는 전쟁이었다.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6·25전쟁 때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과 드라마보다 더 무거운 옛일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열심히 들려줬다. 직장인들이 시끌벅적 점심을 먹고 돌아간 후, 피곤할 만도 할 텐데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이제 좀 끝내는가 싶더니 음식 솜씨에 대한 수다가 이어진다.
“저희 집안이 경주 김 씨 왕손 집안입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왔어도 음식은 고급스럽게 먹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잡아두고 요리를 가르친 건 아닌데 결혼하고 나서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 가져다 먹고 또 나이가 들다 보니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요리나 하면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정말 우연하게 봉화전을 열었습니다.”
평양식 온반과 어복쟁반, 특히 부침 전이 맛있기로 소문난 봉화전.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봉화전이 ‘경북 봉화 지역의 전’을 말하나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김봉화(봉화)가 전하는 이야기[傳]’란 의미다. 광고기획사 다니던 큰아들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고민해서 만들었다.
“한 학생이 그러더래. ‘봉화전’ 어떠냐고요. 처음에는 싫다고 했어.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나는 싫었거든요. 어쨌든 봉화전이 식당 이름이 된 거예요.”
평양 양반댁 요리의 정갈함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췄기에 그녀 스스로도 전통이라는 말로 봉화전의 요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요즘 스타일이에요. 옛날 잔칫집에서는 고기를 꼬치에 크게 꼽고 전을 부쳐냈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음식은 그저 먹기 좋게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북식 배추김치는 여기처럼 배추 전체에 양념을 치대지 않아요. 이파리 속에다 단정하게 넣어요. 그 상태로 자르면 정말 꽃 같아요. 예쁠 뿐만 아니라 아삭아삭하고 맛있어요. 그런데 싱겁죠. 평안도 사람 입맛에는 맞겠지만 여기 사람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초창기에는 전 부칠 때 전통식대로 돼지기름도 써봤지만 제가 직접 기른 돼지도 아니고 못 믿죠. 지금은 콩기름에 부쳐요. 최대한 평양 맛을 고수하되 요즘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을 많이 고려합니다.”
요즘은 봄철이라 두릅전을 계절 음식으로 내놓는데 인기가 좋아서 금방 동날 정도란다. 그녀는 매일 시장에 가고, 전과 함께 먹을 반찬도 그날그날 바꾼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아야 하잖아요. 촌 음식 그대로 해주면 안 먹어. 내가 여기에 오면 이것저것 신경 쓰고 고민하게 돼요. 젊은 사람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고맙죠. 잘해주고 싶고 과일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요. 이 나이에 돈만 벌겠다고 나와 있는 건 아니에요.”
어느 날 찾아온 인생 일탈 ‘봉화전’
봉화전을 열기 전까지는 가족들 뒷바라지하며 사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어머니였다. 생업 전선(?)에 뛰어든 것은 막내아들 때문이었다며 또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이 자리가 원래는 곰장어 집 자리였대요. 2011년에 막내아들이 ‘엄마 나 조그마한 가게 두 개 계약해놨는데 한번 봐주실래요?’ 그러는 거야. 여기 와서 보니까 엉터리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아들한테는 표시 안 했어요. 그런 얘기하면 실망하잖아요. 이미 돈도 다 줬더라고요. 여기서 식당했던 사람마다 망했다는 얘기도 들렸어요. 일단 다른 가게는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했지만 포기했어요. 이것만 남겼죠. 아무 경험도 없는데 자신감이 있었겠어요?”
자리만 봐주고 발을 빼도 되나 싶었는데 아들이 다시 부탁을 해왔다.
“아들이 ‘엄마, 3일만 봐주세요. 여기 일하시는 분들한테 요리하는 방법 좀 가르쳐주셔요’ 그러는 거야. 내가 속으로 3일 가르쳐서 되면 뭐든지 잘되게?(웃음) 그랬어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들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투자했는데 잘못되면 큰일이었다. 약속한 3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사할 준비도 제대로 못했는데 손님들이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거예요. 잠깐 동안 80만 원어치 팔았어. 막 음식을 해 달라는데 어쩌겠어.”
정작 일을 벌인 아들은 개업 한 달 만에 사업하겠다며 중국으로 가버렸다. 첫날부터 대박식당으로 소문이 나더니 문 연 지 얼마 안 돼 방송사에서 촬영까지 해갔다. 맛집 프로그램으로 정평이 난 ‘수요미식회’(tvN)에 소개되면서 대한민국 맛집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어느 날 가수 이현우가 왔다는 거야. 누군가 하고 봤더니 여기서 먹고 가곤 했대요. 그 사람이 ‘수요미식회’에 소개한 거예요. MC인 신동엽 씨랑 전현무 씨도 와서 우리 음식 먹어보더니 정말 맛있다는 거야. ‘우리 아들 망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집을 떠나면 안 되겠구나’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요리하다
봉화전을 열 때 아들이 그녀에게 알려 달라는 요리는 단 한 가지였다.
“내가 집에서 노상 해주던 음식이었어요. 그게 가장 맛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제가 요리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젊었을 때는 남편을 위해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을 다녔어요. 남편이 방산사업을 했는데 외국 바이어들을 저희 집에 자주 데리고 왔습니다. 호텔에 가봤자 별 볼일 없잖아요. 그때마다 남편 생각해서 정성을 다해 우리나라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사업도 잘 풀렸습니다. 방부제 들어가지 않은 빵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어서 오븐을 사서 빵도 구웠습니다. 제빵사 자격 이런 건 없었는데 정말 잘 만들었어요. 몇 년 전 오랜만에 아들 친구를 만났는데 제가 만든 빵을 기억하더라고요.”
좋은 집안에 태어나 피란 통에도 좋은 것 먹고 곱게 자란 그녀였지만 과감한 면이 있었다. 좋은 선 자리 마다하고 연애결혼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제가 잘사는 집안으로 시집가기를 바랐어요. 서너 군데서 선도 들어왔고요. 그때는 스무 살만 넘어도 빨리 시집가라는 분위기였잖아요. 근데 제가 꿈에서 어떤 키 큰 남자를 봤는데 누군가가 ‘저 사람이 네 신랑감’이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 꿈을 꾸고 나서 한 일주일 됐나? 키 큰 공군사병이 저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리고 3년 동안 저를 쫓아다녔어요. 제 남편이요.”
열두대문집 손자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내세울 것 없었던 남편을 어느 날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내심 걱정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는 “사람 괜찮구나”였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큰 회사의 커리어우먼이었던 김봉화 씨는 남자 친구이던 남편이 군 제대를 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데이트 비용에 용돈까지 줘가며 연애에 푹 빠져 살았다. 결혼식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엄앵란, 신성일 부부가 생각날 정도.
“결혼식은 워커힐에서 했어요. 앙드레 김 웨딩드레스를 입었어요.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짧은 드레스였습니다. 훗날 남편에게 들었는데 돈 엄청 썼더라고요. 다 늙어가지고 얘기하더군요.”
사실 그녀는 돈에 대해 신경 쓰고 살아온 적이 없었다. 남편도 가족들이 부족한 것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려 늘 최선을 다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남편은 살아 계신가요?”
기자의 질문에 김봉화 씨는 순간 멈칫했다. 왼쪽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다 포물선을 그리며 손을 내렸다. 눈가가 촉촉해지기에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에 가 있어요.(웃음) LA에 몸 관리하느라고요, 늙어빠져가지고서는. 거기 사촌들이 다 있어요. 나는 어딜 가도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여자는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 친정에서도 못 자봤고요.”
어디든 함께 다녔던 남편은 환갑을 넘기고 몇 년 뒤 지병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LA는 남편 살아생전 함께 다녀온 마지막 여행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상상하며 사는 것이 그녀가 선택한 속 편한 방법이리라.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준 존재가 봉화전이다. 홀로 남아 방황하는 그녀를 위해 아들딸들도 발 벗고 나선다. 매일 추억을 다듬고 고향 음식과 벗하며 하루하루 예쁜 모습 유지하며 살아가길 자식들은 바란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나? 죽고 싶지 않아요.(웃음) 시장에 갔을때 새로 나온 봄나물 보면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어요. 매일 여기에 나와서 메뉴 개발하고요.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제 인생이 아까워서 될 수 있으면 오래 살아야겠어요. 젊은 마음으로 살면서 아들딸하고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연세를 물으니 “아직 백 살 되려면 한참은 남았다”며 한사코 나이 공개를 하지 않는 그녀. 과거를 추억하기보다 이제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마음 변하지 않기를 응원한다.
봉화전이 자랑하는 메뉴
깻잎전, 육전, 돼지고기전, 고추전
봉화전 인기 메뉴. 깻잎전과 고추전에는 소고기가 들어간다. 비결은 두껍지 않게 부치는 것. 평안도식 돼기고기전도 인기가 좋다. 삶은 돼기고기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사용한다. 원래 평안도 잔칫상에는 더 크게 꼬치에 꽂아서 내놓던 요리다.
평양식 온반
이북에서 잔칫날 먹는 대표 음식으로 원래는 꿩고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구하기 쉽지 않아 소고기를 쓴다. 육수는 삶은 양지머리와 꼬리뼈를 우려서 낸다. 삶은 소고기를 손으로 찢은 후 소금, 참기름, 파, 마늘, 깨소금, 후춧가루로 간을 한다. 대접에 밥을 퍼 담고 그 위에 소고기와 알맞은 크기로 부쳐낸 녹두전, 지단을 순서대로 올린다. 여기에 맑게 끓인 뜨끈한 온반육수를 부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