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은 역사다. 현재의 명함을 갖기까지, 많은 명함이 내 호주머니를 떠나갔다. 여기 누구보다 깊이 있는 명함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때 절도로 소년원도 갔다왔다. 지금 하는 일은 노무사.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 인생, 롤러코스터다. 소년원에서 나와 ‘여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역전’으로 바꾼 사나이. 노무사라는 명함을 가진 구건서의 ‘He Story’다.
글 양용비 기자 dragonfl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부드러운 인상이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매너가 넘쳤고, 사람에게 풍기는 미소에서는 푸근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악수를 할 때 내미는 손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두껍고 다부졌다. ‘반전이 있는 사람이구나!’ 솥뚜껑만한 큰 손을 보고 기자는 직감했다.
40년 전 소년원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소년. 그 소년의 2015년 명함에는 노무법인 더 휴먼의 회장이자 공인 노무사라는 직함이 자랑스럽게 새겨 있다. 무일푼 인생에 처절함과 절박함이 더해지자 노력이라는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 동아줄을 붙잡고 오로지 성공이라는 한 곳만 보며 올라왔다. 공부의 절대 시간이 부족한 것은 그에게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의 명함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그를 만난 곳은 신사동의 한 갤러리. 사진전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제는 사진에 관심을 가져보고 싶어 친구가 회장을 맡은 동아리가 연 사진전에서 당번을 하는 날이었다. 노무사 구건서.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기자에게 내민 하얀 명함 속에서 깊게 팬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 고생이 많았다.
◇ 첫 번째 명함, 건달과 택시 기사
“세상에 대한 분노뿐이었어요. 중학생 때 지나가던 아줌마 가방을 훔쳐 소년원에 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사는 집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가’ 하면서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었죠.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모르고 남 탓, 환경 탓하기 바빴던 거죠.”
그렇게 꼬박 1년을 소년원에서 지냈다. 복역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밑천이 들지 않고, 육신을 쓰는 일뿐. 가방끈은 턱없이 짧았고, 어떤 일을 펼치기엔 땡전 한 푼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노동, 노점상, 포장마차, 엿장수나 고물장수 같은 것이었다. 일을 어느 한곳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연, 지연, 혈연이 전무한 상태에서 세상은 그에게 투쟁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자신에 대해 “그때는 건달이었죠. 뭐”라고 표현하며 웃어넘기지만 말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구씨가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유명자(60) 씨의 역할이 컸다. 1981년부터 약 9년간 택시 기사를 하면서 노무사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디로 튈지 몰랐던 구 씨를 끝까지 믿어 준 아내 덕분이었다.
“이런 나를 믿어주는 아내와 아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누라랑 자식새끼는 굶기지 말아야겠다’고 말이죠.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운전수로 세상을 마치는 것을 너무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 두 번째 명함,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노무사 구건서
“택시 기사를 하던 중 존 네이스비츠의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보니 블루칼라는 멸종하고, 화이트칼라 같은 지식 노동자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노무사에 도전해 보기로. 인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었죠.”
24시간 격일제 운전.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운전수로 평생 살기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더 이상은 몸으로 때우며 살기는 싫었다.
소년원 시절에도 놓지 않았던 독서와 택시 회사 노조활동을 하며 틈틈이 배워 둔 노동법. 이것을 바탕으로 노무사에 대한 도전의 칼을 갈았다. 독서광이었던 그에게 공부는 오히려 체질이었다. 하지만 택시 운전을 하면서 공부의 절대 시간을 확보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구 씨는 자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자동차 핸들에 법전이나 노무사 관련 책을 오려 붙여 달달 외웠다. 차량 정체 시간이나 신호 대기 시간이 그의 공부 시간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손님을 태우면 노무사 관련 테이프를 틀어 눈이 아닌 귀로 공부를 했다. “아, 칙칙하게 이런 거 틀지 말고 음악 좀 틀어주세요.” 손님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만했다.
그만의 택시 독서실(?)은 그렇게 꼬박 3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명문대 졸업생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노무사 시험을 전국 4등이라는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루살이처럼 살던 구 씨의 노무사 합격은 ‘인생 여전’이 아닌 ‘인생 역전’의 시작이었다. 구 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본 문구가 있습니다. ‘하루는 8만 6400초다. 이것을 돈으로 바꿔라’라는 것이었죠. 저에게 깊은 영감을 준 이 문구를 전 이렇게 바꿨습니다. ‘조물주가 매일 8만 6400초를 무통장으로 입금해준다고 생각하자. 대신 12시가 되면 못 쓴 것에 대한 값은 다시 빼간다’라고요. 저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값지게 쓰고 이것이 쌓이니 재산이 되더군요.”
◇ 세 번째 명함,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이제 나이 60을 기점으로 제3의 인생을 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첫 번째 인생이 나를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면, 두 번째 인생은 노무사로 활동하면서 사회와 소통하는 과정이었죠. 이제 세 번째 인생은 남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것을 사회에 보태고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 내비게이터십과 인생학교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명함은 이제 새로움이 더해지고 있다. 그가 쓴 책 의 표지에 쓰여 있는 ‘Keep Looking, Don’t Settle!(안주하지 말고, 계속 찾아라)’이라는 말에 걸맞게 명함도 미래를 지향한다. 그의 명함 오른쪽 상단에 쓰여 있는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등의 직책은 구 씨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명함 중앙에 ‘공인노무사’이라는 이름이 크고 위엄 있게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직책들을 소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구 씨다. 이제는 노무사에 대한 것은 많이 내려놓은 듯했다.
“고생한 것이 있으니 지금 명함이 더 빛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되죠. 명함도 마찬가지로 매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뀌지 않는 명함은 정체하는 인생과 다름없기 때문이죠. 직책이 있든 없든 말이에요. 직책이 있든 없든 미래는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 명함 오른쪽 상단, 그의 새로운 역할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구 씨가 횡성군에 인생학교를 차리고, 자리를 잡을 예정이라서 횡성군에 직접 요청했다. 횡성 발전에 기여를 하면서 상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횡성에 기업 유치를 하고 귀농·귀촌인을 유치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횡성의 신선봉이라는 곳 앞에 세워지는 인생학교. 아직 학교는 없다. 하지만 곧 생길 학교에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 교장이라고 기재했다. 이곳은 아이를 키우는 30~40대 부모들이 자유롭게 놀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구 씨가 여기서 하는 역할은 마을의 어른이자 할아버지로서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자신의 강점과 단점을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인생 설계도를 그려주는 일이다. 사실 시니어들은 은퇴 이후 미래 설계도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인생 설계도를 제대로 그려보는 것도 중요하다.
피플스그룹(現) 부이사장
HR의 노동조합 형태인 피플스그룹이다.
한숙기(韓淑基·52) 한스코칭 대표는 주로 기업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리더십 코칭을 하는 코칭 전문가다. 임원이라고 하면 흔히 중년층, 그리고 그들을 위한 리더십이라면 사실상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인생 설계와 병행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한 대표는 그 분야에서 가장 가까이에 선 전문가로서의 경험을 꾸준히 쌓아왔다. 그러한 경험을 반증하는 것처럼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 이들을 위한 한 대표의 목소리에는 간결하고 핵심을 찌르는 조언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의 재발견과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을 독려하는 방법들을 확인해 보자.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한명섭 객원기자
“리더들이 조직 성과에서 맡고 있는 중요성은 막대하죠. 그런데 비즈니스의 복잡성은 계속 심화되고 있어요. 그래서 그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리더십이란 그때그때 달라야 합니다. 그걸 알기 위해선 리더십의 주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해요.”
한숙기 한스코칭 대표는 소위 ‘리더십이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하는식의 고정된 리더십이란 허상이라고 비판한다. 그 대신 리더십을 발휘하는 주체인 자신에 대한 이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객체, 즉 자신이 데리고 있는 조직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게 우리 사회 리더들의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리더들이 사람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럼 점을 돕는 게 리더십 코칭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강점을 인정하고 활용하라
“코칭을 받는 분들은 대개 이 사회에서 성공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공한 분들조차도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굉장히 많이 고민합니다. 예를 들어 생산본부장으로 있던 분이 기획조정실로 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리를 옮기면서 요구되는 역량이 다르다 보니 우울증에 빠지게 됐어요. 막상 회사에서는 이분을 중역으로 모신 거거든요. 즉 그분이 가진 것을 잘 쓰라고 배치한 거였죠. 이 사례를 보면서 ‘우리의 비극은 강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한 대표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키우는 것보다 자신의 약점을 강조하려는 사회적 패러다임이 만드는 비극을 비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안은 계속 증폭되기 때문이다.
한 대표는 자신의 가치를 찾는 가장 쉬운 단계로서 존경하는 인물의 이름을 써 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존경하는 인물을 쓰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를 써야 할지를 몰라 낯설어 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조직에 헌신하다 보니 나를 보는 시각을 잃어버렸다는 걸.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인생 후반전은 불가능합니다. 인생 후반전은 자신이 어떻게 ‘효과적 개인’이 되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해답은 자신의 일상 곳곳에 담겨 있다
한 대표는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는 답은 자신의 일상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에게 ‘내가 왜~’로 시작되는 물음들을 던져 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왜 거기를 자꾸 갈까, 내가 왜 저 사람을 만나면 힘들어 하는가, 내가 왜 그 사이트를 자주 들어가게 되는가’ 등등의, 자신이 자주 하는 것들, 자주 느끼는 것들에 대한 질문들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을 지금까지는 흘려 왔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선 안 된다.
“흔히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하지?’라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러지 말고 자신을 수용해야 합니다. 온전한 자신에 대해 수용하면서 자신에 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야 해요.”
이것은 1963년생인 한 대표의 경험 그 자체이기도 했다. 한 대표 또한 40대가 될 때까지 많은 일을 했고, 그 일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경험이 있었다. 정작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의 일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코칭을 만나면서부터 이 일은 자신의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내는 건 행운을 얻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행운은 ‘이게 아니다 싶다’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고민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 마련이다. 한 대표가 발견한 보람 또한 20여 년 동안 계속적으로 목마름의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것
중년의 초조함이란 게 있다. 소위 ‘떠밀려가는’ 느낌이란 것이다. 그런 느낌을 증명하듯, 흔히들 말하는 ‘돈은 있으나 쓸 줄을 모른다’는 말은 결국 자신이 불안하다는 증거 아닌가. 한 대표는 그러한 사고 자체를 바꾸라고 주문했다.
“20대, 30대, 40대 등등, 세대마다 삶의 가치와 모습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세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왜 옛날 모습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나요? 그럼으로써 더욱 괴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옛날에는 지금의 자신과는 달랐을 테니까요.”
한 대표는 나이를 먹어서 좋은 이유로 무엇보다 ‘과거에는 중요했던 것들이 이제는 안 중요해진 것’을 꼽았다.
“젊었을 적에는 기를 쓰고 좇았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참 다행이에요. 자유로워진 느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겸손해 하지 않아도 된다
한 대표는 성공의 기준에 대하여, 수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결국 자신이 자신대로의 모습대로 사는 것을 성공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소위 그것을 ‘잘났건 못났건’으로 구분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잘났고 못났고’에 시달려요. 하지만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진면목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이가 드는 건 꺼져가는 불이 아니에요. 청년기의 고생을 지나 이제 자신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예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처럼 우리는 누구나 가지 않았던 길을 하나씩 마음에 담고 있어요. 그 길을 가지 않은 건, 여건이 안돼서라기보다는 여건을 만들 용기가 없었던 거였겠죠. 이제는 좋은 의미에서의 이기적인 삶을 사셔야 해요.”
한 대표는 가지 않은 길을 만드는 포인트로 ‘습관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할 줄 아는 것, 아는 것을 쓸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보세요. 예를 들어 선생님을 했던 분이라면 가르치는 일을 할 줄 아는 거잖아요? 그걸 쓸 수 있는 인생의 구조를, 그리고 습관을 만들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겸손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청년들의 구직 열기 못지않게 중장년들의 구직 열기 또한 대단하다. 그 열정이 높다한들 남다른 전략과 정보가 없다면 재취업에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재취업에 뛰어든 장모씨는 “다른 사람 이력서나 면접만 봐봤지 내 이력서, 자기소개서 써보기는 오랜만이라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당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알게 됐고, 맞춤형 구직전략을 세운 뒤 각종 교육과 면접 비디오 코칭 등을 통해 재취업에 대한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장씨의 경우처럼 퇴직자가 홀로 취업준비를 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때문에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 등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각종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고용노동부에서 주관하는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는 노사발전재단을 비롯해 무역협회, 전경련, 중소기업중앙회, 대한은퇴자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전국 28개소에 자리 잡고 있다. 만 40세 이상 중장년 퇴직(예정)자는 재취업 및 창업, 생애설계 지원, 취업알선, 사회 참여 기회제공 등 다양한 전직지원서비스를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 장년취업인턴제 지원사업
장년취업인턴제 지원사업은 노사발전재단,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등 노동부에서 지정한 전국 72개 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만 50세 이상 장년 미취업자를 대상으로 기업 인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현장적응력을 높이고, 정규직으로의 취업가능성을 높이는데 주력한다. 인턴십을 시작한 구직자들은 1일 8시간, 일주일에 40시간씩 전일제로 근무하게 된다. 고용노동부의 사업계획 수립 및 공고 후 선정된 기관에 사업운영을 위탁하고, 운영기관은 기업·인턴 모집, 알선 등 사업을 시행한다. 각 기관은 해당 지역에 있는 업체를 인턴 신청자에게 알선해 준다. 기관별로 보유하고 있는 사업장 풀이나 세부 교육 프로그램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알맞은 기관을 선택하는 것이 도움된다.
이외 기본 지침과 프로그램은 모두 동일하다.장년취업인턴제를 통해 생산직 인턴근무를 시작한 윤모(남, 53세)씨는 “인턴근무를 신청하면 결과에 따라 취업까지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신청 후엔 중소기업중앙회를 통해 회사 한 곳을 소개 받았다”며 “인턴직으로 4개월 일하기로 결정했는데 복지지원도 잘 돼있고 회사의 분위기도 좋아 정규직으로 채용되기를 기대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 맞춤형 전직지원 서비스
전직을 원하는 만 40세 이상 중장년 퇴직(예정)근로자에게 전문취업과 창업지원서비스를 제공한다. 회원가입 및 서비스 신청 후 이력서를 등록해 승인이 이뤄지고 나면 개인별 컨설턴트를 배정받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전직지원자에게 배정된 전문 취업 컨설턴트는 개인의 적성과 역량에 맞는 구직전략을 모색하고 각종 취업·창업 정보 제공을 비롯해 교육과 상담 등을 통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맞춤형 서비스를 시행한다. 구인기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적합한 기업에 구직자를 알선하고 이력서·자기소개서 작성과 온라인 지원전략, 서치펌활용전략, 면접비디오코칭, 연봉협상 등에 대한 강의도 함께 진행한다.
서비스기간 동안에는 개인PC, 프린터, 팩스 등 사무기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이력서 증명사진도 무료로 찍을 수 있다.노사발전에서 운영하는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통해 전직에 성공한 권모(남, 58세)씨는 구직 당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에 출퇴근 하다시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머무르며 한 달을 생활했다. 권씨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구인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집중도 덜되고 가족들 눈치도 보였다. 센터에 나오면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 자기만의 작은 사무실에서 차도 마시고 컨설턴트를 찾아 상담도 수시로 받아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센터에서 실시하는 무료교육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 재도약 취업지원 프로그램
중장년층이 성공적인 재취업과 제2의 인생설계를 지원하기 위해 퇴직 후 변화관리, 자기탐색, 재취업 역량 강화교육 및 채용정보 등을 제공하는 집단 활동 프로그램이다. 각 지역 기관별로 재취업 의사가 있는 만 40세 이상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재도약 프로그램에 참여자는 담당 취업컨설턴트를 통한 1:1맞춤 취업지원서비스와 구인활동을 위한 개인 PC공간, 이력서 증명사진 무료촬영 서비스, 프로그램 참여수당을 받을 수 있다.
올해 제2기 재도약 취업지원 교육 프로그램 동아리 회장을 맡았던 왕모(여, 60세)씨는 과거 고용센터에서 적극적인 취업지원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던 터라 숱하게 날라 오던 중장년 일자리 센터의 교육프로그램이나 취업설명회 메시지를 불신해 삭제하기 바빴다. 왕씨는 “재도약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동아리 회원들의 모습과 교육을 통해 인식의 전환과 취업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며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재우 한국코치협회 회장, 사회적 코칭의 깃발을 들다
시니어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직업으로서의 기회 중 가장 용이한 것이 바로 ‘교육’이다. 시니어가 수십 년 간 쌓은 지식과 경험은 그대로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후대로 이어져서 간직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들이며 그러한 능력이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게 바로 교육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코칭은 다양한 경험으로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은퇴시니어들이 방황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 제공할 수 있는 선물과도 같다. 김재우 한국코치협회 회장은 이를 위해 코칭의 의미와 사회적 코칭의 현재에 대한 역할로써 코칭의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재우 한국코치협회 회장은 삼성물산 시절, 중동에서 1억 불 수주에 성공한 '101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그 이후 37세 최연소 임원, 45세에 삼성항공 부사장을 역임했고 IMF 외환위기 때는 벽산그룹을 1년만에 회생시키는 경영혁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주그룹 부회장,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등 김재우기업혁신연구소 소장과 함께 2010년부터는 사단법인 한국코치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코치협회는 기업 인사.교육 담당인 ‘코치’들의 연합체로, 코칭문화를 올바르게 정착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코칭 교육과 전문 코치 인증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코치는 질문을 통해 삶을 일깨운다
“코치는 마부다.”
김 회장은 코치를 간단하게 ‘마부’라고 정의했다. 마부는 손님과 얘기를 해서 손님이 원하는 곳으로 모시는 게 일이다. 김 회장은 코치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숨어있는 굉장한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질문을 통해 이뤄진다.
“김영순 기자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김 회장은 마치 치고 나오는 것처럼 질문했다.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보며 김 회장은 지금 상황이야말로 자신이 코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대답을 못합니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인 요기 베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어요. 어찌 보면 초등학생 애들도 알 수 있는 말입니다. ‘당신이 어디로 갈 줄 모르면 아무데도 갈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OECD 32개국 가운데 한국이 행복지수가 꼴찌에 가깝다는 기사가 나오는 거야.”
김 회장은 해외를 나갈 때마다 한국에 대한 얘기를 예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정작 한국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물이 대야에 담겨 있는데 여긴 50도, 여긴 100도인 거죠. 50도와 100도가 섞이면 75도가 되어야 하는데, 밑에는 냉물인 거야.”
김 회장은 불균형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질문이라고 했다.
“‘당신을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람들은 다 갖고 있어요. 거기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됩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했다.
“사람들은 늘 눈앞에 시선을 빼앗기기 쉬운데 골목길로 가기 쉬운 우리인생을 큰 길로 가게 해주는 좋은 도구가 코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치를 ‘꿈 이룸 도우미’라고 표현합니다.”
코칭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질문 하나로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코칭 사업을 통해 생산적 일자리 만들 것
코치는 파트너십을 통해 코칭받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더 명확하게 알게 되고 필요한 행동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데 도움을 준다. 코칭 과정을 통해서 코칭받는 사람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알고, 앞으로 미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각하고 이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0시간 교육을 받고 소정의 실습을 하면 초기 단계의 코치가 될 수 있다. 그 단계는 KAC(Korea Associate Coach)라 하여 코치의 입문 단계다. 그 다음 단계는 KPC(Korea Professional Coach)라 하여 전문적인 코치 단계다. 김 회장은 코치 세계로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KAC 단계에 속한 학생들을 보면 우선 젊은 직장인과 50대 중반의 은퇴자들이 많다고 밝혔다.
“30대 코치 희망자들은 셀프코칭을 주로 해요.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거지. 그 나이가 되면 한창 가다가 길을 잃게 되요. 길을 잃어버리면 질문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
김 회장은 벽산을 이끌었던 IMF 시절 54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젊은이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베이비붐 세대라는 건 젊은이들이라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었다.
“65세 이상이라 해도 사회학자들이 ‘현재의 나이에 0.7을 곱한 게 실제 활동 나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실제 활동 나이는 50세 안쪽이에요.”
실제 활동 나이가 50대인 시니어들에게 한 달에 백만 원, 이백만 원이라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 국가의 복지 예산도 줄이고 시니어 개인적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게 김 회장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런 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한국코치협회는 이미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한 터였다.
“사회적 코칭이라고 해서 우리 협회가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 부처에 노크를 했어요. 복지 예산이 금년에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9.8% 정도 되는데 2014년부터는 40%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코칭은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복지’라는 측면에서 설득을 했죠. 이 사회적 코칭의 자격은 KPC 단계로 설정할 계획입니다.”
김 회장은 가장 절박한 것은 베이비붐 세대에게 갈 길을 찾아주는 것이며 두 번째는 복지 예산을 통해 생산적인 시니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목표란 반드시 하는 게 목표”
코칭이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코칭을 좀 더 확장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회에서 코칭이 필요한 곳은 어디일지가 궁금했다. 그에 관한 한 가지 예로 김 회장은 학교를 들었다.
“기업의 코칭은 코치 회사들에서 제공되고 있어요. 그래서 기업 외의 사회를 봤을 때, 우선 학교가 있죠. 그래서 그에 맞춘 교원 코칭 연구회가 있어요. 요즘은 교육이 바뀌어서 주입식 교육을 원치 않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사들은 정년이 있잖아요? 정년을 채우지 못한 교사는 계속해서 현장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전형적인 주입식인 아웃사이드-인 방식의 교육을 구사해요. 이 사람들에게 아이들로부터 자발적인 교육이 이뤄지는 인사이드-아웃 방식의 교육을 할 수 있게끔 돕는 것이 바로 교원 코칭 연구회의 목적입니다.”
김 회장은 코칭이 곧 힐링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김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피터 드러커인 것은 그런 의지의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었다.
“피터 드러커는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다 죽었어요. 저도 숨 거두는 그날까지 코치로서 살고 싶습니다.”
그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것(want)과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need)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숙고할 일이다.
‘목표란 반드시 하는 게 목표’라는 김 회장의 신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그 미래를 주목해 본다.
메트라이프생명은 2008년부터 서울대학교와 공동 운영중인 ‘메트라이프ㆍ서울대 은퇴설계과정’을 통해 3000명이 넘는 전문가를 배출했다고 25일 밝혔다.
이 과정은 은퇴 관련 학문적 연구와 보험회사의 실제 사례가 접목된 금융업계 최초 산학(産學) 협력 프로그램으로서, 메트라이프생명이 서울대와 함께 해외 및 국내 은퇴 관련 연구결과와 전문 교육과정을 심도있게 분석하고, 교재개발에서부터 강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공동 진행하고 있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대한 이해와 이에 대비할 전문가 양성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금융업계는 물론 학계, 정부기관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메트라이프생명 재무설계사(FSR; Financial Services Representative)와 임직원 등을 대상으로 서울대 노년ㆍ은퇴설계지원센터가 주관한 교육결과, 2008년 3월 첫 개강 후 지난 6년간 20차수에 이르기까지 총 3300여명의 수료자가 배출되었으며, 수료자들은 은퇴 및 노화에 따른 재무, 건강, 가족관계, 사회적 변화 등 은퇴 전반에 걸쳐 체득한 폭넓은 전문지식과 다양한 역량을 사회 각지에 전파하고 있다.
이 과정 수료자 중 성적 상위자를 별도로 교육하는 심화과정인 ‘은퇴설계 코칭 전문가과정’ 의 경우 지난 한해 100명의 수료자를 배출하고, 올해부터 2년차 과정에 들어간다.
메트라이프생명 김종운 사장은 "서울대와 함께 금융업계 최초 산학협력 프로그램인 이 은퇴전문가 양성과정의 경쟁력과 차별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실천과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며, "많은 노력 끝에 교육을 마친 3300명의 수료자들이 본 과정에서 습득한 은퇴에 대한 전반적 지식과 역량을 바탕으로 고객 삶의 질적 향상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직장생활 20년, 마흔 여섯 나이에 퇴직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 시기. 정은상(61세) 씨는 혼자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배우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걸 이용해 홍보하는 법을 알려주던 것이 계기가 돼 새 직업을 찾게 됐다.
주 타깃층은 주로 예비 퇴직자나 퇴직자였는데, 상당수 직장인들이 은퇴하면 당장 뭘 해야 할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은퇴 이후 삶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됐단다. 이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던 정 씨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멘토링’을 제공했다.
“크게 호응하고 고마워하는 중장년층의 메시지를 받고서 이 사람들을 돕는 데서 오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 열기가 오래도록 가시지 않더라고요. 내가 SNS를 이용한 홍보 노하우를 코칭(coaching)하고 그 덕분에 은퇴자들이 집중하고 기뻐하는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준 SNS
평소 SNS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사용, 동영상 및 홈페이지 제작 등 SNS와 관련된 각종 강좌는 죄다 찾아다니며 듣고 배우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줬다. 2년쯤 지나자 그는 스마트폰과 SNS를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전문가’가 됐다.
“제 지식과 경험을 주변인, 특히 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퇴직한 이들에게 일대일 코칭하던 일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1인 기업이자 1인 창직의 개념으로 독특한 학교를 구상했죠.”
그는 2011년, SNS를 통해 다양한 홍보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맥아더스쿨’을 세웠다. 콘셉트는 ‘5060세대를 위한 소셜 비즈 코치 멘토링 프로젝트’. 학교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나이가 70세였어요. 그에 비하면 50~60대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죠.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은 더더욱 그렇고요. 이 땅의 모든 5060세대가 용기를 갖고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미로 학교명을 지었습니다.”
맥아더스쿨을 설립하는 데 별다른 비용은 들지 않았다. 오랜 기간 축적된 그의 SNS 지식과 코칭 기술이 기반이 됐다.
◆시니어 소셜 비즈 코치 양성
정 씨는 맥아더스쿨을 통해 중견 및 중소기업, 소상공인, 1인 기업, 시니어 창업, 학원, 갤러리, 음식점, 제과점 등 다양한 분야의 5060세대 시니어 소셜 홍보 전문 코치를 길러내고 있다.
신청자를 받아 지역별로 3~7명 단위의 반을 편성, 주 1회 이상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코칭 대상에게 일대일 멘토링을 진행한다. 코칭 프로그램은 이론보다는 철저한 실습 위주로 진행된다.
“멘토가 멘티와 함께 현장을 다니며 어떻게 잠재 고객을 만나 대화하는지, 어떻게 비즈니스 모델을 준비하고 설득해 고객의 요구사항을 효율적으로 반영하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식이에요.”
교육 기간은 6개월이며 초기 3개월은 필수과정에 해당된다. 이 기간에 멘티의 출석률이 80% 이상이면 과정 수료증을 주고, 비즈니스 코칭 실적이 10회 이상 되면 소셜비즈코치 자격증을 부여하고 있다.
처음엔 무료로 할까도 생각했지만 공짜 교육이 배움의 열정과 가치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교육비를 받기로 했다. 다만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돈이 아까워 거르지 않고 수업을 받으러 올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비용을 책정했단다.
정 씨는 “제2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시니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맥아더스쿨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라고 강조했다. 중·장년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갈수록 사업이 확장되면서 개인 코칭뿐 아니라 기업 및 단체와 연계해 프로젝트별 마케팅을 대행하는 일도 하고 있다고.
일대일 코칭이 일주일 평균 3~5회. 이 외에도 비즈니스 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다는 정 씨. 피곤할 법도 한데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이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어 보였다. “만약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개그맨으로 시작해서 행복재테크를 강의하는 스타 강사이자 방송인, 여러 기업의 총괄 마케팅 이사이면서 강연 전문회사 권영찬닷컴의 대표, 웨딩컨설팅 회사인 알앤디클럽의 공동대표이자 연세대학교 상담코칭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 아직까지 KBS 공채로 데뷔한 처음 직업 개그맨으로 불리고 있지만 권영찬을 수식하는 단어는 수없이 많다.
최근에는 상담전문가로도 변신했다. ‘행복재테크 연구소’를 설립해 연예인들의 자살방지와 행복에 대해 전문상담에 나선 것. 연예인으로는 최초로 학교폭력 전문 상담사와 학교폭력 예방 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한번에 살고 있는 듯한 그에게도 다른 인생을 살고픈 마음이 있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을까.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지금도 변화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지금부터 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면서 어려운 이들의 멘토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상담과 꿈을 전해주는 코치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사업과 방송, 강연을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네요.”
그는 어린 시절 목사를 꿈꿨다. 3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목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외가 쪽에도 목사가 된 사람이 많았다. 지금도 ‘밥퍼 주는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다일공동체 목사를 멘토로 삼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목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소망은 계속 간직하고 있다. 시각장애우 개안수술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도 이런 소망과 맥이 닿는다.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던 배경에는 아픔의 시간들이 있었다. 권영찬은 지난 2005년 성폭행 혐의로 한 여성으로부터 고소당해 37일간 구치소 생활을 했다. 1심에서는 2년6개월의 실형도 선고 받았다. 고등법원에서 고소 여성의 거짓말이 탄로가 나 무죄를 받긴 했지만 대법원까지 간 2년여 간의 법정공방은 그에게 ‘잃어버린 시간’이 됐다.
2007년 다시 방송에 복귀했지만 프로그램 촬영 중 세트가 무너져 내려 왼쪽 뒤꿈치가 으스러지고 3, 4번 척주가 부러져서 6개월간 병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꾸준한 수익을 안겨주던 주식 쪽에서는 친한 선배가 권유한 기업인수합병에 투자했다가 그 기업이 상장폐지되는 바람에 30억원을 날렸다. 전 재산을 잃으면서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이 담보로 은행에 잡히자 대출 연장을 위해 아내와 서류상으로 이혼을 하기도 했다.
“구치소 수감으로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면서 건강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모든 돈을 날려 본 다음에야 천원의 소중함의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최고가 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내일 이순간은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게 됐습니다.”
아픔을 딛고 이제 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과거에 방송을 많이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좀 더 방송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은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왔었지요. 하지만, 젊음 그대로를 즐긴 것도 있고, 외롭다는 미명 하에 술자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시간이 오늘의 상담가나 강연가나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네요.”
주식시장에서도 재기에 성공했다. 2012년 주식 수익률 110%를 기록해 화제가 된 권영찬은 주식에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 성공했더라도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게 주식이라는 생각이다.
“주식은 생물입니다. 엄동설한의 추위와도 같습니다. 언제 눈이 올지 언제 맹추위가 다가올지는 모르고 가늠을 할뿐입니다. 주식의 투자 실패는 큰 경험이고 좋은 자산입니다. 그런데 실패를 하고도 똑 같은 패턴을 사용한다면 ‘내 돈 가져가세요’ 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나쁜 투자 습관을 좋은 투자습관으로 바꾸면 그래도 성공할 확률에 좀 더 다가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을 고비를 3번이나 넘겼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경험을 하면서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는 시선을 갖추게 됐다는 권영찬. 행복재테크 강사인 그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소통의 방법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나의 말 하는 것만 신경을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내 말을 잘하려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상대가 말을 잘하게 하려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려의 마음을 가지면 좋습니다. 상대를 위한 배려는 상대를 향한 소통의 손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선물을 받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선물을 줘 보십시오. 그러면 상대가 나의 눈을 바라보고 사인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2011년 초, 건설회사 임원을 끝으로 30여 년 간의 직장생활을 갈무리하고 시작한 제2의 인생. 협상의 ‘파워’에 매력을 느껴 건설회사 임원에서 협상전문가로 변신, 이참에 아예 협상전략연구소까지 차린 남자가 있다.
예순 넷의 나이에 분쟁 해결과 협상 전문가, 협상 관련 강사로 활약 중인 1인 기업가 최점수(64) 씨다. 탄탄한 경험과 지식, 기술로 협상의 무대를 휘어잡는 그의 힘은 현업에서 쌓은 풍부한 노하우가 바탕이 됐다.
◆10년간 쌓은 분쟁해결 경험이 ‘협상가’ 꿈 자양분
10년 전쯤이다. 최 씨가 협상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건설현장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많이 발생하는데 부도, 지분 다툼, 영업 등과 관련해 이익 다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임원이었던 그가 맡은 첫 ‘사건’은 산재사고가 난 유족과의 협상이었다. 안전사고로 직원이 죽었기 때문에 그 어느 협상보다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유족들로부터 욕도 많이 얻어먹었죠. 회사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보상밖에 없는데 사내 규정상 정한 금액과 업계 관례를 고려해 적절한 수준으로 보상금액을 책정하는 게 어렵거든요.”
그는 우선 회사에서 정한 수준보다 낮은 금액을 유족에게 제시했다. 다각도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철저히 준비해 제게 유리한 쪽으로 대화를 끌어갔다. 처음엔 이게 기술(스킬, skill)인지 몰랐는데,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고 대응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런 것들이 다 협상의 스킬이더란다.
그가 협상에 빠져든 건 그때부터였다. “처음 상대방을 대할 때는 약간의 두려움도 있긴 해요. 그러나 일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재미가 있고 결과가 좋으면 보람이 상당하더라고요. 제 성향과도 잘 맞았고요.”
산재사고로 인한 보상 협상, 기업간 콘소시엄 분쟁, 하도자 관련 분쟁, M&A 협상, 조사 관련 대처법, 구매 협상, 연봉 협상, 해고자 협상 등 최 씨는 재직 중 200건 이상의 각종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했다. M&A와 관련해 서원벨리골프클럽 인수, 한국도로공사 정보통신공단인수위와 같은 굵직한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다.
◆협상 콘텐츠의 비즈니스 상품화
최 씨는 10년간 해왔던 분쟁 해결, 이게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확신했다. 퇴직 후 본격적인 창업 준비에 돌입, ‘마이구루’라는 지식유통 업체에서 ‘지식창업’ 분야 교육프로그램을 한 달간 공부했다.
이곳에서 자신이 가진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아웃풋으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파워포인트도 마스터했다. 그리고는 2011년 5월, 6개월여 동안 창업 컨설팅과 홍보마케팅을 지원하는 서울시 장년창업센터에 입주했다.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받고 마케팅과 경영학 전문가에게 코칭을 받으면서 구체적으로 판매할 상품을 확정지었다. 그는 상품의 경쟁력을 확신했다. 협상은 일상에서 누구나 접하게 되며 비즈니스상에서는 숱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기업에서 인사, 영업, 구매, 분쟁, 산재보상, 인수합병 등 협상할 대상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개입하는 단계에 이르면 소송비용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여러모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요. 분쟁이 생겼을 때 변호사가 아닌, 회사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역할이 사내에 존재해야 합니다. 기업 담당자에게 분쟁 해결과 협상에 대한 기술을 교육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승부할 상품이었습니다.”
그 해 9월에 자료 수집과 독서, 파워포인트 및 스토리텔링 작성 등의 준비를 거쳐 10월에는 콘텐츠 개발을 최종 완료, 곧바로 한국협상전략연구소를 오픈했다. 지식창업이라 별다른 창업 자금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콘텐츠를 구성할 정보를 얻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공부에 투자했다.
한국협상전략연구소는 기업에 종사하는 해당 실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분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교육시키는, 일종의 양성기관의 역할을 한다. 주요 대상은 기업의 법무·총무·영업·기획 담당자들이다. 수익 모델은 강연 수익이 주가 된다. 갈등과 문제가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가 조정하는 코칭도 병행한다.
협상의 정의, 원칙에 의한 협상, 협상 경험 나누기, 협상 태도 테스트, 협상 실습 등의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협상전문가 양성 교육프로그램은 5시간 분량으로 구성된다. 최 씨의 강의를 들은 이들은 한결같이 입심도 좋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니 귀에 쏙쏙 들러붙는다는 반응이다.
최 씨는 “우선 일 자체를 즐길 수 있어 훨씬 행복하다”고 말했다. 생활비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건설회사를 다니면서 운 좋게 재건축 등에 대한 정보가 밝아 노후를 위한 재테크는 물론 연금 준비까지 다 마쳐놨단다.
그는 앞으로 기업에 협상 및 분쟁전문가가 상주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자문기구 조직을 구상 중이다. “국내는 협상전문가들이 많이 부족한 편이에요. 협상전략을 교육하는 기관도 대표적인 곳 1~2군데 정도이고요. 전문가를 키워 협상 분야를 하나의 직업군으로 만드는 초석을 다지고 싶습니다.”
춤을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 영화 ‘쉘 위 댄스’는 강신영(63) 씨의 두 번째 인생과 닮아 있는 듯하다. 지긋한 나이에 단단히 춤바람이 났으며, 그 춤이 남녀가 함께 추는 댄스스포츠라니… 게다가 순수한 열정으로 뒤늦게 춤을 배워 멋진 댄서로서의 꿈까지 이뤘으니 말이다.
“흥겹죠? 원래 인간은 ‘호모 루덴스’라고 하잖아요. 본능적으로 유희를 즐기는 동물이란 의미지요.”
건설자, 스포츠장갑 회사 공장장, 스포츠 브랜드 사장으로 이어지는 25년간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마흔 여덟 나이에 시작한 제2의 인생. 강 씨는 댄스스포츠 지도자이자 댄스칼럼니스트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타고난 춤 달인 기질에 꿈틀거리는 열정
강씨가 춤을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시절이다. 영화를 상영하는 동네 ‘용산극장’에 가끔 쇼단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댄스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트위스트 김’ 쇼를 하는 날이면 온 동네가 들썩였다. 학생 신분이라 입장 불가였던 그는 쇼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추는 춤을 흉내내며 따라하곤 했다. 그의 다져진 춤 실력은 경주 수학여행에서 위용을 뽐냈다.
“트위스트 음악이 나오자마자 총알같이 나가 춤을 췄더니 모두들 경탄하며 환호하던 걸요. 내성적이고 조용한 학생이던 저는 그 일을 계기로 확실히 ‘튀는 아이’가 됐습니다. 또 친구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녔지요.”
‘젊음의 행진’이라는 인기 쇼 프로 무대까지 나가 춤을 췄을 정도였으니 그는 학교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 ‘춤의 지존’으로 통했다.
“춤에 대한 열정은 이때부터 늘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른이 된 그는 좋아하는 춤을 계속 출 수 없었다. 학생 때는 춤을 추면 마치 불량학생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하고 성인이 배우는 사교댄스도 퇴폐문화로 보던 그 시절, 결혼을 약속한 애인의 심한 반대로 춤추기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그를 춤의 세계로 이끈 것은 독일에서 건설 해외지사 주재원으로 일할 때 본 로렐라이 마을축제의 춤이었다. 강씨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선율에 맞춰 밟는 스텝에 깊이 매료됐다.
“그들의 춤은 우리와 달리 매우 밝아 보였어요. 퇴폐적인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어울려 즐겁게 같이 출 수 있는 춤도 있구나.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춤은 댄스스포츠의 한 종목인 ‘자이브’였다. 저걸 꼭 배워야겠다고 그는 굳게 결심했다. 하지만 당장은 어려웠다. 서른 세 살의 젊은 청년에겐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다.
IMF 외환위기로 1999년 어려운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기까지 청춘을 불사르며 정말 열심히 달려왔더니 어느 덧 마흔 여덟. 그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고만 있었던 춤에 대한 열정, 로렐라이 언덕에서의 다짐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때였다.
◆독일서 본 ‘자이브’에 매료돼 댄스스포츠 입문
“그 즈음 우리나라에서도 ‘부부 볼룸댄스’라는 이름으로 문화센터에서 댄스 스포츠의 붐이 일기 시작했어요. 춤에 대한 인식이 워낙 안 좋던 때라서 ‘부부’를 내세웠던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아내를 설득해 댄스스포츠 중에서도 자이브를 함께 배웠죠. 자이브는 재즈음악에 맞춰 추는 격렬한 춤이에요.”
이후 댄스에 더 열정적으로 빠져 들게 된 강 씨. 문화회관이든 댄스장이든 배우고 연습할 수 있는 곳만 있으면 일주일 내내 틀어박혀 춤만 췄다. 춤을 추는 무리 가운데 남자는 그가 거의 유일했다. 청일점이라도 쑥스러워하거나 쭈뼛쭈뼛해하지 않았다. 언제나 용기백배 당당한 댄서의 모습이었다.
댄스스포츠 외에도 살사, 재즈댄스, 방송 댄스 등으로 장르를 확대했다. 댄스 동호회에도 나가고 경기 대회에 나가 챔피언의 영광도 안았다. 커플댄스로 댄스스포츠 10종목, 사교춤인 블루스 지터벅, 사교 라틴 살사, 메렝게, 바차타, 스윙, 맘보, 아르헨티나 탱고, 포크댄스까지. 자유자재로 출 수 있는 달인 경지에 올랐더니 가르침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번엔 ‘지도자’에 도전했다. 2003년 경기대 사회교육원에서 댄스스포츠 코칭 아카데미 1급 자격증을 1년 만에 땄다. 강 씨는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인 영국 유학도 계획했다. 2004년 여름,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 받은 돈으로 쉰 두 살에 영국 댄스스쿨 ‘셈리(Semley) 스튜디오’에서 두 달간 과정을 이수, 국제댄스스포츠지도자(IDTA) 자격증을 땄다.
“웬만한 실력자들도 3번 정도는 떨어지는 게 보통이라는데 나는 최우수 성적을 기록했다”는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과 자부심이 묻어난다. 항상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써왔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했단다.
귀국 후 그는 곧바로 ‘댄스앤조이’라는 댄스동호회를 만들고 댄스지도자 및 댄스칼럼니스트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댄스스포츠 전문 잡지의 기자로 일하며 댄스스포츠 관련 책도 4권이나 냈다.
“댄스 칼럼을 쓰면서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댄스스포츠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아 주고 옳지 않은 부분은 밝혀내 정설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 중에서도 댄스스포츠가 건강에 여러 가지로 좋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설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유산소 운동이라서 운동 효과가 크고 친목을 도모해 우울증 개선에도 좋다고 했다. 좋아하는 춤을 마음껏 추니 행복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저절로 젊어진다는 게 강 씨의 얘기다.
그는 춤 전도사를 자처한다. 댄스스포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보급을 위해서다. 요즘은 사교춤과 구분해 댄스스포츠를 건전한 체육행위로 보는 경향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단다. 그는 “앞으로 내게 남은 8만 시간을 오롯이 건전하고 아름다운 춤을 나누는 일에 쓰겠다”고 말했다.
2012년 10월 정년퇴직한 정경욱(가명·59)씨는 지난해 3월 대학가에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개업했다. 정씨는 확실한 준비 없이 영업사원의 설명만 듣고 퇴직금에 대출까지 받아 개업했지만 여러 난관에 봉착했다. 수요 예측을 못 한 탓에 식재료비가 매출의 50%를 넘겼고 주방장이 갑자기 결근하는 등 인력관리도 큰 문제였다.
결정적인 패착은 입지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9~11월까지 70만~100만원 선을 오르내리던 하루 매출이 겨울방학이 되자 30만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정씨는 요즘 폐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의 은퇴가 이어지면서 시니어 창업이 줄을 잇고 있다. 창업전문가들은 “명확한 비전 없는 사업 개시는 필패”라며 충분한 준비와 분석을 강조했다.
서울시 창업지원과의 정현석 팀장은 “무엇보다 꼼꼼하고도 철저한 준비가 가장 중요하다”며 “특히 예비 창업자들은 사전 단계에서부터 사업 진출 분야에 대한 연구와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팀장은 “창업 관련 지원 프로그램은 많은데, 정책 초기라 이용률이 적은 부분이 안타깝다”며 다양한 시니어 창업 관련 지원을 충분히 이용할 것을 주문했다.
실제로 서울산업통상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창업교육수강자 22기, 23기 814명 중 50대 이상이 126명으로 15.4%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창업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각 기관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는 시 일자리플러스센터와 연계해 시니어창업 희망자에게 교육에서부터 창업코칭, 창업지원금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 통상산업진흥원은 서울거주 40세 이상 창업 희망자에게 △사무공간 제공 △소그룹 코칭 △현장실습 △1대1 컨설팅 △졸업기업 현장컨설팅의 서비스를 지원한다.
이 기관은 또 교육 부문을 기초, 전문, 실습교육으로 세분화해 창업구상에서 준비, 실전 창업에 이르기까지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신용보증재단은 창업교육 이수 및 사업성 컨설팅을 받은 자에 한해 창업자금, 사업장 임차자금을 각각 최대 5000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