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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 야생화] 한 해 야생화 탐사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좀딱취!
- 11월 만추(晩秋)의 계절입니다.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던 단풍도 땅에 떨어져 찬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깡마른 나뭇잎일 뿐입니다. 갈수록 스산함만 더해가는 늦가을 숲 속이지만, 그러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진주처럼 빛나는 영롱한 작은 꽃이 있습니다. 바로 좀딱취입니다. 꽃 찾아 전국을 떠도는 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좀딱취를 보았으니 이제 한 해 꽃농사도 끝이구나….” 그렇습니다. 이른 봄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으로 시작된 꽃 탐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좀딱취입니다. 물론 개쑥부쟁이와 산국·감국 등 이미 9,10월에 피기 시작한, 이른바 들국화들이 늦게는 눈 내리는 초겨울까지 뒷동산을 지키겠지만, 제주도를 제외한 내륙에서 10월 이후 새로 피는 가을꽃으론 아마 좀딱취가 유일할 것입니다. 키가 작고 못난 사람을 좀팽이라고 비하하듯, ‘좀’자가 인간 세상에선 낮은 대우를 받지만, 자연계에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란 말처럼 키도 작고 크기도 작지만 늦가을에 피는 좀딱취는 세상을 호령하고도 남을 만큼 의연하고 당찬 모습입니다. 곰취 등 ‘취’자 식물과 마찬가지로 국화과인데, 꽃의 생김새는 단풍취와 비슷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맞습니다. 국화과 중에서도 단풍취·가야단풍취와 함께 국내에 자생하는 단풍취속 3종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름철에 피는 단풍취와 꽃 모양이 많이 닮았지만, 전초나 꽃의 크기는 키다리와 난쟁이만큼 차이가 납니다. 때문에 ‘딱취’란 식물의 존재를 알 수 없으니, 오히려 ‘좀단풍취’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국내의 경우 제주도 및 남부 지방에 자생한다고 하는데, 안면도 어름이 북방 한계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주도를 비롯해, 서남해안의 섬과 내륙의 그늘진 곳에서 주로 자생한다. 사진은 충남 태안 안면도 자연휴양림 뒤 숲에서 담았다. 태안군 안면읍 중장리 안면도해물탕 주변에 주차하고 숲으로 100m 정도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1년 전인 2014년 10월 중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중국인들이 ‘천하제일명산’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의 황산(黃山)을 오르내리면서 좀딱취를 줄기차게 만난 것. 안면도 숲의 그늘진 곳에서 보았던 좀딱취가 해발 1864m의 황산 등산로 주변에서 연이어 꽃을 피웠는데, 가을 황산의 대표 야생화라 일컬어도 될 만큼 개체수도 풍부했다. 황산의 경우 위도로 북위 30도가 제주도보다 3도나 낮지만 해발 1800m가 넘는 고산으로 식생이 대략 제주도와 흡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 2015-11-05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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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의 사회사] 시계라는 물건의 영향력과 가치
- 시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시계는 자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는 자연의 순행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를 물리적으로 표시하는 시계라는 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글 장세훈(張世訓)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학계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해시계를 시계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영국의 전설적인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지 또한 실제 용도는 해시계였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날씨가 흐리거나 야간에도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클렙시드라라는 물시계를 발명했고, 1434년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완성한 자격루 또한 물시계의 작동 원리를 응용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도 모래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래시계와 기름의 연소량을 시간 계측에 활용한 램프시계도 중세시대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의 역사는 이토록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의 기계식 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7세기 중반부터다. 물리학 및 관측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기계식 시계의 이론적 토대인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16세기 말에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태생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이를 최초로 시계에 적용해 시계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가 1675년 개발한 진자시계는 후대의 과학자들과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손을 거치며 점차 다양한 종류의 시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탁상시계와 휴대가 간편한 회중시계가 유럽의 귀족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는 시계가 인류의 생활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만 하더라도 휴대용 시계는 일반 서민들은 쉽게 볼 수조차 없는 사치품이었다. 유명 시계 제작자들은 주로 왕가나 귀족들을 위해서만 소량씩 주문제작방식으로 시계를 제작했고, 긴 체인을 연결해 양복 포켓 안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회중시계는 특권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귀금속 케이스로 제작한 시계들이 각광을 받았다. 한편 회중시계는 기술적으로도 당대 시계제작자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크기가 큰 추시계류와 달리 회중시계는 부품들의 사이즈부터 매우 작고 더욱 정밀한 가공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론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 절삭할 수 있는 기계들이 앙트완 르쿨트르 등 몇몇 선구적인 인물들에 의해 19세기 초반에 개발되었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시계 제작자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18세기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계 제작자이자 시계 역사상 어쩌면 가장 영향력 있는 발명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최초의 셀프와인딩(로터의 회전에 의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형태의) 시계였던 퍼페추엘(1780년)을 비롯해, 훗날 브레게의 상징이 된 정교한 패턴의 기요셰 다이얼(1786년)과 파랗게 열처리를 한 브레게 핸즈(1783년), 충격 흡수장치인 파라슈트(1790년), 브레게 헤어스프링으로 불리는 탄성과 내부식성이 탁월한 밸런스 스프링(1795년), 그리고 지지대 역할을 하는 케이지 안에 끊임없이 밸런스 휠을 회전시켜 중력을 상쇄하는 혁신적인 설계의 투르비용(1801년)에 이르기까지 현대 기계식 시계 제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중요한 발명들이 브레게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브레게는 회중시계 시대를 앞당긴 인물이면서 훗날 손목시계의 등장까지 예견한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시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시화된다. 바로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의 세대교체가 그것이다. 최초의 손목시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4년 루이 까르띠에가 친구인 조종사 산토스 뒤몽을 위해 제작한 까르띠에의 ‘산토스’를 최초의 현대적인 손목시계로 꼽는다. 케이스 모서리를 둥글린 사각에 가까운 케이스, 두툼한 러그, 착용감을 고려한 아담한 사이즈는 산토스를 당시의 어떠한 시계와도 차별화시켰다. 까르띠에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프랑스의 전투 장갑차에서 착안한 아이코닉한 사각시계 ‘탱크’를 1917년 탄생시켜 일찍이 손목시계 제조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IWC, 론진, 호이어(태그호이어의 전신) 등 여러 제조사들이 손목시계 제조에 발 빠르게 합류했다. 특히 롤렉스는 세계 최초의 방수 케이스인 오이스터(1926년)를 비롯해,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퍼페추얼(1931년), 자정 무렵 날짜창이 자동으로 변경되는 시계 데이트저스트(1945년), 최초의 다이버 시계 서브마리너(1953년) 등 몇몇 선구적인 발명으로 손목시계 시대를 앞당긴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시계로 인기를 모으면서 대중적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됐다. 종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이미 스위스 시계업계가 주류로 군림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위스 시계 산업은 전례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고 시계는 더 이상 사회 고위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도 향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세이코를 필두로 한 쿼츠시계의 광풍에 밀려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90년대 초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식 시계와 달리 수정자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쿼츠시계는 적은 제조비용으로 훨씬 더 많은 시계를 생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특유의 정확함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쿼츠시계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기계식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기계식은 쿼츠와 사이좋게 시장을 양분할 만큼 다시 예전의 선호도를 되찾는다. 각종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의 주축이 된 요즘 수백 년 방식 그대로 제작되는 기계식 시계가 다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어찌 보면 난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쿼츠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시계만의 예스러운 감성과 장인정신, 그리고 예술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시계란 무엇인가? 명품 시계에도 트렌드가 존재하는가? 좋은 시계의 기준이란 어찌 보면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이다.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그리 훌륭하지 않은 시계일지라도 한 개인의 관점에선 충분히 최고의 시계로 비칠 수 있다. 또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시계라면 가격대를 떠나서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갖게 마련이다. 특정 시계에 ‘명품’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주저 없이 명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계들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고가라서,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을 해서,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브랜드라서 꼭 명품이 아니라, 정제된 디자인과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클래식한 다이얼, 우수한 설계의 무브먼트와 같은 요소들이 명품 시계를 규정하게 한다. 세상 돌아가는 순리가 그렇듯 명품 시계 시장에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라는 게 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이즈가 크고 대담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신생 브랜드였던 위블로, 벨앤로스 등이 이러한 트렌드에 힘입어 시계 업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빅사이즈 시계를 브랜드의 개성처럼 강조해온 IWC, 파네라이 같은 제조사들도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명품 시계 업계의 트렌드는 과거로의 회귀로 규정지을 수 있다. 빅사이즈 트렌드에 대한 반발로 시계 사이즈를 다시 줄이기 시작한 제조사들이 늘어났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스포티한 디자인 대신 단순하면서 고전적인 디자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십 년 전의 헤리티지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하는 것도 업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블랙, 화이트 다이얼 일색인 고급 시계 업계에 최근 들어서는 블루, 그레이, 브라운, 옐로 등 다양한 컬러가 도입되고 있으며, 단순히 색만 입히는 차원이 아니라 기요셰, 그랑푸 에나멜링, 핸드 페인팅 등 다양한 전통 다이얼 제작 기법까지 적용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예거 르쿨트르, 율리스 나르당, 샤넬 같은 제조사들은 자체적으로 양성한 전문 에나멜러와 인그레이빙 장인, 주얼리 세팅 장인들을 활용해 다이얼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메티에 다르(Metiers d'Art)’ 시계들로 고급 시계 제조의 또 다른 예술적인 경향을 선도하고 있다. 시계와 사회성 시계를 순수하게 취미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고급 시계 소비자들 중에는 해당 시계에 담긴 진정한 가치나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해당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아우라와 이름값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고급 시계가 사회 통념상 일반 소비재가 아닌 사치재로 통하기 때문에, 종종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에서는 부정부패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한 이들이 가진 재산을 은닉하기 위해 혹은 불법 로비를 위해 고급 시계를 구입하고 선물했다는 식의 가십성 기사도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계가 어찌 수천, 수억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일 수 있는지에 관해 묻기에 앞서 우리는 해당 시계가 지닌 본연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 칼럼니스트로서 스위스 주요 시계 브랜드들의 시계가 제작되는 매뉴팩처(공장)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매뉴팩처 투어를 거치는 동안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시계가 비싸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고급 시계에 지불하는 금액 속에는 해당 브랜드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제조 노하우가 담겨 있는 데다, 기계식 시계의 경우 수백 개의 작은 부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되어 조립되고 나아가 각각의 부품들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듬고 장식을 하기 때문에 주변의 흔한 대량생산형 저가 시계들과는 확연히 다른 프로세스로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오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시계제작자를 가리켜 ‘마스터(장인)’라고 칭하는 것도 고급 시계 제조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계는 분명 재화만 있다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지만, 때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시계들도 있다.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들 중에는 시계를 단지 판매 목적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기술력과 추구하는 가치를 최대치로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실험적인 시계를 제작하는 곳도 있다. 까르띠에가 2009년에 선보인 유니크 피스 ‘아이디 원(ID One)’과 2012년에 발표한 ‘아이디 투(ID Two)’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시계 제조 방식에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완벽에 가까운 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까르띠에처럼 시계 제조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예가 있는가 하면, 바쉐론 콘스탄틴이나 반클리프 아펠처럼 최상의 예술적인 시계를 완성하기 위해 전통 공예 장인이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달간에 걸친 수작업으로 완성한 유니크 피스들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시계애호가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 MB&F, 그뤼벨 포시, 로랑 페리에 등의 독립 시계브랜드들과 필립 듀포, 카리 보틸라이넨과 같은 존경받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의 시계도 매우 한정된 수량만 제작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계로 손꼽힌다. 이러한 귀한 시계들은 차후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 시계 경매에 출품돼 애초의 금액대를 훨씬 상회하는 경매가에 낙찰돼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흔히 볼 수 없어 희소하고 기술력과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도전한 마스터피스급 작품들은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이다. 고급 기계식 시계가 세계 주요 경매에 단골손님이 된 것도 하나의 완성도 높은 시계는 예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귀한 시계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부(富)도 따라야겠지만, 단지 부유해서만은 가질 수 없는 탁월한 감식안과 시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열정, 그리고 좋은 시계를 가치에 맞게 즐길 수 있는 애티튜드(자세)를 지닌 자야말로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타임포럼 주 필진으로서 시계 각 분야의 뉴스 및 심층 리뷰와 칼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바젤월드, SIHH, 워치스 앤 원더스 등 주요 시계 박람회를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시계 전문지 스페셜을 번역 보완 출간한 를 감수 및 추가 저술했으며, 주요 시계 제조사와 대표작을 선별한 e-북 를 저술했다. >> 타임포럼 소개 2006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시계에 관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10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직접 시계 구입 후기와 착용 소감, 다양한 질문과 답변 등을 주고받음으로써 시계에 관한 국내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방대한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timeforum.co.kr
- 2015-11-05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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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하나의 성칼럼] 남성의 갱년기도 치료해야
- 완연한 가을이다. 사실, 이젠 곧 겨울이라고 봐야 할 테지만. 더운 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바람과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면서 보통은 ‘아, 천고마비의 계절이구나. 가을이 되었으니 책 좀 읽어 볼까’ 하는데, 비뇨기과에선 가을을 맞는 기분이 좀 더 다르다. 환절기에 감기에 걸려 복용한 항히스타민제 부작용으로 갑자기 소변을 못 봐 응급실로 오시는 전립선 비대 어르신들도 늘어날 테고, 날이 추워지니 소변을 더 자주 봐서 곤란하다는 환자들도 많아질 테다. 각설하고, 인생을 사계절로 놓고 보았을 때, 5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가을로 접어들어 서서히 겨울을 향해 가는 시기 아닐까. 인생의 가을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인간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징 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반대의 예로 여성이 이 시기에 들어서면 갱년기에 접어들어 점차 떨어지는 여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신체 여기저기 갖은 변화가 생긴다. 피부의 탄력도 떨어지고, 우울하고, 기억력도 감퇴되고, 잠도 잘 못 자기도 한다. 더욱이 갑자기 확 덥고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 홍조, 열감뿐만 아니라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까지 한다. 여자 입장에선 이런 변화들이 당황스러울 뿐 아니라 귀찮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 시기의 사모님들은 여러 면에서 살기가 버겁다. 그럼 남자는 어떠한가? 남자 역시 갱년기가 있다. 여성의 갱년기는 난소에서 여성호르몬의 생성이 줄어들면서 생기지만, 남성은 고환에서 남성호르몬의 생성이 감소하면서 생긴다. 남성의 몸에서 남성호르몬의 분비는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사춘기에 최고조에 달했다가 30대부터는 감퇴가 시작되어 40대 후반~50대에 갱년기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남성이 이 시기에 갱년기 증상을 겪는 것은 아니다. 평상시의 생활습관, 기초적인 신체 상태, 유전적 소인, 스트레스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대응 상태 등등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이 남성 갱년기를 빨리 오게 하기도 하고, 더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아무 변화 없이 지내게 하기도 한다. 그럼 남자는 여자들처럼 달마다 생리를 하는 것도 없는데, 남성 호르몬이 감퇴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병원에서 호르몬 수치를 검사해서 정상 범위보다 낮아져 있다면 당연히 진단할 수 있겠지만, 평상시의 증상으로도 충분히 대략적인 진단은 할 수 있다. 남성갱년기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간단한 설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10개의 문항 중 세 개 이상 해당된다면 남성갱년기를 의심해야 하는데, 특징적으로 다른 문항과는 상관없이 ‘성적 흥미가 감소했다’ 또는 ‘발기의 강도가 떨어졌다’ 이 두 가지 문항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남성갱년기라고 본다. 남성의 성적인 능력이 바로 남성호르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열 개의 증상 외에도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불면증이 생기고, 특별한 이유 없이 감정의 기복이 생기는 것, 또는 우울한 심리 상태 등도 남성 갱년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여자는 나이가 들면 점점 남성스러워지고 남자는 나이가 들면 점점 여성스러워져서 소심하고 잘 삐치는 남편이 괄괄하고 목소리 큰 부인을 모시고 산다는 얘기들이 나오나 보다. 그럼, 과연 남성갱년기는 치료를 해야 하는 걸까? 대답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치료해야 한다. 남성 호르몬이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신체적인 변화가 단순히 발기부전, 성욕 감퇴 같은 비뇨기과적인 문제뿐 아니라 뇌기능, 인지기능, 운동능력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부족한 남성 호르몬은 남성의 골다공증 발생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호르몬 보충 치료는 전립선암, 전립선 비대증의 위험도는 더 높아질 수 있고, 혈전 생성 같은 혈관계 질환의 위험도 높아질 수 있으므로 사전에 면밀한 혈액 검사, 전립선 검사 등을 통해 위험도를 확인한 후 안전한 범위 안에서 진행하며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야 한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남성 발기부전 환자들은 발기능력의 회복에만 관심을 가질 뿐 남성호르몬이 낮아진 것에는 무관심한데, 사실 남성호르몬이 정상보다 떨어져 있는 경우 비아그라 같은 먹는 발기유발제는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상적으로는 남성호르몬 보충치료도 하면서 발기부전치료제를 같이 복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요즘에는 먹는 약, 바르는 약, 붙이는 약, 주사 등 다양한 남성호르몬 제제가 나와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남성 갱년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알고 치료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인생의 계절에서 더욱 멋진 가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윤하나 이대목동병원 비뇨기과 교수 대한성학회 상임이사, 대한여성 성의학 연구회 학술이사, 대한요실금배뇨장애학회 교육이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 와 공동저서 등이 있다.
- 2015-11-05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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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 그 순간] 러일전쟁의 앞과 뒤 “일본에는 외무성도 없느냐?”
- 러일전쟁이라면 국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이 먼저 떠올라 우리에게는 결코 유쾌한 사건이 아니다. 전쟁의 쟁점도 한반도라고 믿고 싶겠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러-일 양국이 다툰 것은 만주라고 평가해 왔다. 지난 20~30년 전부터 ‘한반도’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지난 호에서 청일전쟁을 ‘일본과 이홍장 간의 전쟁’이라고 평한 바 있는데 러일전쟁도 비슷하다. 양국의 임전태세를 ‘일본은 사활을 걸고 싸우며 러시아는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 싸운다.’고 비유했다. 일본은 이 전쟁에 국가의 운명이 걸렸다는 각오 아래 정부와 국민이 단결하여 총력전 태세로 임하지만 러시아는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가 있는 ‘중앙’ 러시아에서 1만km나 떨어진 ‘극동’지역의 국경 밖에서 뭔지 아리송한 목표를 위해 싸운 것이다. (물론 패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정치에 불똥이 튄다.) 일본도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완벽한 승리를 얻지 못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전선은 러시아 영토 밖에 있었다. 전쟁 초기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대한 포격과 종전 무렵 일본군이 사할린에 진주한 것이 ‘러시아 영토’에 가한 유일한 타격(?)이었다. 종전 때의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전선은 독일영토 밖에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독일은 4년 여의 전쟁에서 모든 자원이 고갈되어 기진맥진한 끝에 항복한 데 비해 러시아는 아직 힘이 싱싱하게 남은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당연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 종전이 이루어졌을까? 국제정치적으로 미국은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적 문호개방을 거부한 데 반발하여 일본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당연히 일본을 지원했다고 믿고 있다.(한국에서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독일의 팽창에 대항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영국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어 이해관계가 약한 ‘극동’에서 러시아와 분쟁을 조장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을 빨리 끝내 러시아가 유럽에 관심을 집중하기를 희망했다. 전쟁 중 영국의 지원을 기대했던 일본사회에서는 전쟁 후 “영국이 동맹국이라면서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면서 반영 감정이 고조되기도 했다. 일본군이 주요 전투에서 연승하자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제2의 러시아’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양국이 만주에서 ‘균형 잡힌 적대관계’를 이루는 상태에서 이 거대한 시장이 서양 열강에게 개방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후의 역사는 일본이 만주의 지배자가 되어 서양 열강의 권익을 몰아내지만. 기이하게도 종전을 서두른 쪽이 연전연승한 일본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일본 군부가 있었다. 군부가 항상 과격한 정책을 선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러일전쟁이다. 일제 군부라면 우리는 끝을 모르는 욕망으로 대륙 팽창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패배한 쇼와(昭和)군부를 연상할 것이다. 메이지(明治) 군부는 그렇지 않았다. 메이지 군부도 러시아와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 일본은 인적·물적 자원이 러시아보다 빨리 고갈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실제로 만주의 첫 주요 전투인 1904년 10월 사하(沙河, 사카)에서부터 일본군은 보급품 부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하는 심양에서 여순 방향으로 흐르며 요양(遼陽) 북쪽에 있는 강이다. 다음해 3월 만주의 운명을 가르는 요양전투에서 일본은 승리하지만 인적·물적 자원이 한계에 도달한다. 일본군은 탄약 부족으로 패주하는 러시아군을 섬멸하지 못함으로써 러시아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승리하면서도 손실이 러시아를 능가했다. 1905년 정월 초하룻날 러시아군의 항복으로 일본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여순 전투에서 러시아 사상자는 2만8200명인 데 비해 일본은 5만7789명이었다. 메이지 천황조차 “이긴 것은 좋지만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서야...”라며 탄식했다. 반면 러시아는 새로이 건설한 시베리아와 만주의 철도를 통해 보급품을 수송함으로써 요양전투 패배한 후에도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계속된다고 해도 러시아가 일본을 패퇴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일본 군부는 전선의 상황이 일본에게 유리할 때 종전 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이를 ‘전략과 정략의 일치’라고 불렀다.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 원수는 1904년 7월경 만주전선으로 떠나기 전 친구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해군상에게 “만주 전투는 내가 알아서 하겠지만 언제 끝내야 할지는 (동경에 있는) 자네가 결정하게.”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만주군 수뇌부는 전투에서의 승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신중히 고려하여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국정부에 평화회담을 시작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촉한다. 다음 해 3월 28일 오야마의 참모총장인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는 만주전역을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동경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주 임무는 정부에 평화회담 개최를 독촉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경 역에 마중 나온 부참모장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에게 소리쳤다. “나가오카, 바보짓 그만해라. 총을 쏘았으면 멈출 줄 알아야지. 그것도 몰라?” 그 다음, 외무성을 향해 또 한 번 고함친다. “일본에는 외무성도 없느냐?” 원래 평화협상은 전투와는 달리 단시간에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1905년 3월부터 테오도르 루즈벨트(Ted Roosevelt) 미국 대통령과 접촉하여 이해 9월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면서 승리의 열매를 챙긴다. 그중에는 한국을 삼키기 전 단계인 보호권도 포함된다. 군부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때 국운이 융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11-04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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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민의 웰빙골프] 나이가 드라이빙 거리에 미치는 영향
- 골프 핸디캡은 드라이빙 거리로 결정된다. 드라이빙 거리는 주말골퍼들의 스코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드라이빙 거리의 감소는 임팩트하는 순간의 클럽헤드 스피드와 무관하지 않다. 플라이트스코프는 레이더 원리를 기반으로 공의 속도와 비행방향, 클럽헤드의 속도와 임팩트 순간의 효율성을 측정하는 런칭 모니터(launching monitor)를 제작하는 회사다. 이 회사가 측정 발표한 핸디캡 14 정도인 주말골퍼들의 연령대별 평균 클럽헤드의 스피드와 드라이빙 거리 결과를 보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클럽헤드의 스피드가 느려지고 거리도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럽헤드 스피드에 따른 날아가는 공의 거리는 시속 1마일 당 2.57야드로 측정되는데, 40대와 60대의 클럽헤드 스피드 차이는 드라이빙 거리의 차이와 직접적 상관관계가 있다. 즉 40대와 60대의 거리 차이인 15야드는 클럽헤드 스피드의 차이인 시속 6.6마일과 거의 같다(표1 참조). 골퍼의 핸디캡과 클럽헤드의 스피드가 1대 1의 상관관계라는 측정 결과도 있다. 클럽헤드 스피드가 시속 1마일(1mph) 증가할 때마다 스코어는 하나씩 줄어들어 그만큼 핸디캡도 낮아진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훈련이 요구되는 골프 경기의 특성상 어릴 때 골프를 시작한 대부분의 투어 프로들조차 40대에 접어들면 드라이빙 거리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드라이빙 거리가 상금 획득액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거리가 줄어드는 데 따른 심리적 갈등은 매우 크다. 미국 PGA투어와 European투어, 그리고 Web.com투어와 시니어들의 Champions투어에서 활약하는 약 440명의 골퍼를 대상으로 측정한 연령대별 드라이빙 거리와 클럽헤드 스피드의 결과(표2)를 보자. 40대 이후에 겪기 시작하는 체력 저하는 투어프로든 주말골퍼든 마찬가지이다. 근력과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20~40대에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지만 50대 이후부터는 몸의 균형감각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체형도 변화하면서 드라이빙 거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50세 이후에 정규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통계라 할 수 있다. 드라이빙 거리가 약 30야드씩 차이가 난다면 상대적으로 버디를 기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지기 때문에 스코어를 줄여나가기는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말골퍼들의 골프 이력을 살펴보면 골프를 처음 접한 시기는 대부분 40대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골프가 성행하는 나라에서는 거의 같다. 40대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향한 열정이 가장 높은 때이며 안정된 생활에서 삶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신체적으로는 이미 절정기를 넘어선 때이며 20대에 비해 운동능력이 크게 저하되는 시기다. 임팩트하는 순간 공에 가해지는 파워에는 근력도 영향을 미치지만 유연성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근 파워를 발현하는 능력은 개인차가 크지 않아 거의 비슷한데, 유연성은 개인차가 크고 날아가는 공의 거리는 클럽헤드의 스피드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클럽헤드의 스피드는 스윙 아크의 폭과 길이로 결정된다. 스윙 아크의 폭과 길이를 완만하게 해주는 유연한 백스윙과, 중력(gravity)을 거스르지 않는 다운스윙은 클럽헤드 스피드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백스윙을 하면서 축적한 에너지(potential energy)를 다운스윙하면서 물리적 에너지(kinetic energy)로 변환시키는 작용이다. 이때 엉덩이, 척추, 어깨의 회전 각도와 운동하는 순서(timing)는 좋은 스윙의 핵심 구성 요소다. 골프 스윙은 발가락 끝에서부터 그립을 쥔 손가락 끝 사이에 있는 거의 모든 관절이 끊어지지 않고 사슬처럼 연결돼야 한다(chain reaction). 백스윙을 할 때는 마치 회오리바람이 비껴 올라가듯이 관절이 연결돼야 하고 다운스윙에서 임팩트하는 순간까지는 반대로 지면을 향해 회오리바람이 비껴 내려가듯 관절이 연결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관절의 연결 순서가 깨지면 당연히 근육이 긴장하게 돼 근육 피로가 증가되며 클럽헤드 스피드가 느려지게 된다. 반복될 경우 각 관절에 엄청난 부담이 되어 부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각 관절의 가동 범위를 높여주는 유연성은 클럽헤드 스피드를 높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표 3과 4에서 보듯이 척추, 엉덩이의 회전각과 어깨의 유연성은 클럽헤드 스피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클럽헤드 스피드를 높이려면 척추와 엉덩이의 회전각을 높이고 백스윙을 크게 할 수 있도록 어깨 관절의 가동 범위를 높이는 스트레칭과 적절한 피트니스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유연성이 많이 떨어진 시니어 골퍼들로서는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떨어진 유연성을 대체하는 스윙방법을 익히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어 소개한다. >>글 박영민 전 고려대 교수 국내 골프칼럼니스트 1세대. 고렫대와 한국체육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방송해설은 물론 일간지, 스포츠지 등에 많은 칼럼을 연재했다. '골프의 이론과 실제', '골프'(체육고등학교 교재)등 저서도 다수.
- 2015-10-2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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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변호사의 상속 가이드] 상속과 재산분할청구권
- 사례>> A씨와 B씨는 1981년 4월 25일 혼인신고를 마치고 함께 살다가 2007년 12월 18일 협의이혼 신고를 마쳤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그러나 A씨에게는 다른 자녀 C씨와 D씨가 있었다. 1962년 4월 30일 혼인한 뒤 사망한 전처 E씨의 소생이다. A씨는 B씨와 협의이혼한 이듬해인 2008년 7월 9일 사망했다. C씨와 D씨는 각 2분의 1 비율로 아버지의 재산을 공동상속하였다. B씨는 A씨와 협의이혼할 당시 재산분할에 대한 청구를 하지 아니하였다. 위 사례와 같이 이혼 후 A씨가 사망한 경우 B씨는 C씨와 D씨를 상대로 재산분할 청구를 할 수 있을까. 만일 부부 중 한쪽이 다른 한쪽을 상대로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를 해 소송이 계속 중인 상태에서 원고가 사망한 경우 이혼소송은 종료된다. 재산분할 청구 역시 이혼소송 종료와 동시에 종료된다(대법원 94므246). 이와 달리 위 사례는 이미 이혼을 한 사람이 종전 배우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망인의 상속인을 상대로 재산분할 청구를 한 경우다. 이 경우 상속인들이 재산분할 청구에 응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상속인인 C씨와 D씨는 B씨가 A씨와 협의이혼한 후 2년의 제척기간이 지나지 아니한 상태에서 A씨가 사망하자 자신들을 상대로 재산분할을 청구한 데 대해 이혼 당시 재산분할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고 A씨가 생존할 때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을 구한 적도 없으므로 재산분할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B씨는 A씨에 대한 재산분할 청구권이 C씨와 D씨에게 상속되었을 것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이혼을 이유로 하는 재산분할 청구가 반드시 상대방이 생존할 때에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폈다. 두 가지가 쟁점인 위 사례에 대해 서울가정법원은 법령의 합목적적 해석을 통하여 ①이혼으로 인한 재산분할에 따른 일방의 권리는 당사자들에게는 법에서 정한 바에 따라 이혼 후 2년 내에 이를 행사할 정당한 권리가 있고, ②재산분할 청구의 그 부양적 성격은 실제로 당사자들은 재산분할을 통하여 얻은 재산을 기반으로 생활하여 나가야 하는데, 상대방이 사망하였다는 극히 우연한 사정으로 이러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③만약 위와 같은 사정으로 재산분할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사망한 자의 상속인들은 그 결과로 재산분할을 해주어야 할 의무를 면함으로써 이득을 얻게 되는데, ④법령의 합목적적인 해석의 면에서도, 위와 같은 사정으로 분할대상이 되어야 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사망자의 상속인들에게 귀속시키는 것보다는 위 ‘일방’을 한정하여 해석하지 아니함으로써 원래의 권리자인 상대방 일방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훨씬 더 옳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런 근거를 들어 ‘재산분할청구권은 이혼 후 2년이라는 기간 내라면 상대방 또는 그의 상속인들을 상대로 청구할 수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즉 이혼한 배우자의 일방이 사망한 종전 배우자의 상속인을 상대로 재산분할청구를 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위 사례에서 C씨와 D씨는 B씨의 재산분할 청구가 A씨와의 이혼 후 2년 이내에 이루어진 경우라면 재산분할 청구에 응하여야 한다.
- 2015-10-2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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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샹송을 알게 해주었던 아버지
- 1960년대 당시 유행하던 음악 중에는 미국 팝송같이 많지는 않았지만 샹송이나 칸초네, 그리고 라틴음악도 있었다. 필자가 샹송을 처음 접한 것은 1962년 9월쯤이었나, 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 이사로 근무하시던 선친과 명동 국립극장(현 예술극장)에서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공연을 본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그녀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혼’, ‘미라보 다리’ 등을 불렀다. 특히 ‘포르투갈의 빨래하는 여인’이라는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래가 상당히 감미로웠다는 느낌 외에 샹송에 대한 별다른 매력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샹송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6·25 전에 집에 있던 유성기 판 중 일본 여가수가 일본말로 불렀던 노래가 사실은 다미아라는 샹송가수가 부른 ‘그렇게 남의 속도 모르고(Tu Ne Sais Pas Aimer)’라는 샹송이었던 것이다. 다미아는 ‘우울한 일요일(Sombre Dimanche)’로도 유명한데, 10여 년 전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이 노래는 본래 헝가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노래 때문에 자살자가 많아 헝가리에서는 금지한 것을 다미아가 프랑스어로 부른 것이다. 그 후 미국의 재즈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영어로도 불러,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노래를 듣고 도쿄에서만 20만 명 이상이 자살했다고 한다. 1963년, 해외에 다녀오신 선친이 LP를 몇 장 사오셨다. 당시는 외화가 무척 귀할 때라 한번에 10장 이상은 반입이 불가능했고, 그것도 시중에 판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표지에 일일이 서명을 하도록 했었다. 그 대부분은 클래식이었으나 그중 한 장이 Holiday in France라는 판이었다. 이 판에 있는 파리의 하늘밑, 고엽, 파리의 아가씨, 아이 러브 파리, 파리의 다리 밑, 매혹의 왈츠, 바다 등은 나중에는 자주 듣다보니 많이 익숙해졌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하고 황홀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샹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당시 국내에는 샹송 판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이것이 샹송이다’라는 판을 구했고, 거기서 앞에 소개한 이베트 지로, 질베르 베코 등의 노래와 특히 이브 몽땅의 고엽(Les Feuilles Mortes/Autumn Leaves)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판은 고교 동창인 박명도 군이 특히 좋아해서 그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거의 이 판을 들었다. 그리고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이진섭씨가 쓴 샹송을 주제로 한 라디오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통해서 당대 최고의 샹송가수 에디뜨 피아프의 일생, 비참했던 어린 시절과 6년 연하의 이브 몽땅을 발굴해서 일류가수, 배우로 성장시켰으나 시몬 시뇨레에게 빼앗긴 사연, 그녀의 노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과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대의상은 물론,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스카프와 스타킹조차 살 수 없었고 세탁도 자주 할 형편이 못 되어 목이 긴 검정 스웨터와 검정 바지를 입고,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했던 줄리엣 그레꼬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가수로 크게 성공하자 그녀의 의상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는 이야기와 그녀의 노래, 고엽과 빨간 풍차(Moulin Rouge)도 이 드라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샹송과 친해지면서 파리를 여행할 때면 어떻게 하든 틈을 내어 몽마르뜨르 언덕에 올라가 거리 화가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집사람이 기념품가게를 구경 다니는 동안 그 옆에 있는 카페에서 옛 샹송들을 들으며 생맥주를 몇 잔 마신다. 그 후 날이 어둑해지면 언덕 아래에 있는 물랭 루즈에 입장하여 아직도 복도에 걸려 있는 로트렉의 포스터들을 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식전(食前) 연주를 들으며 기분이 나면 춤도 몇 곡 춘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프렌치 캉캉으로 끝나는 유명한 물랭 루즈쇼를 보면서 저녁을 먹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절차가 되었다. 일제 때 선친은 제1고보, 이진섭씨는 제2고보로 학교는 달랐으나 같은 학년으로서 고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댁에서 5년간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해, 친형제 이상 친했다고 한다. 그리고 옆방에는 얼마간인지 모르지만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하숙을 했다고 한다. 이진섭씨는 작가이자 기자, 아나운서, PD를 겸직하셨고 샹송에도 정통하셨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가 이진섭씨의 번역으로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였다. 그분은 술에 취해서 명동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면 순경을 향해 소변을 보셨다고 한다. 순경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한 힘없는 문화인의 상징적인 항거였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술을 드셨고 필자도 혜화동인가에 있던 그분 댁에 심부름을 자주 가서 친아저씨처럼 지냈다. 선친은 워낙 예술과 친구, 그리고 술을 좋아해 환도 후 명동에서 조그만 무역상을 할 때 돈이 좀 생기면 집보다는 친구들 뒷바라지가 우선이었다. 당시 어울리던 분들로는 이진섭씨 외에 박용구씨, 박인환씨, 송지영씨, 심연섭씨, 이봉구씨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 가운데 올해 101세인 박용구씨 외에는 이미 모두 고인이 되셨다. 1956년 3월, 선친은 당신의 중학교 후배가 되어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는 장남이 자랑스러워 명동에 있던 은성주점에 필자를 데리고 가셔서 친구들에게 마냥 자랑을 하셨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던 박인환씨가 냅킨에 시를 쓰셨고 그 옆에 계시던 이진섭씨가 역시 냅킨에 작곡을 하셨는데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그 자리에 나애심씨가 있어 노래를 불렀다고 하지만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박인희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 2015-10-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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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더하기]한국·중국·일본의 영웅 비교
- 어느 민족에게나 영웅은 있다. 다만 양상은 제각각이다. 국민성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영웅들을 규정하고 파악한다. 때로는 어떤 민족에게 영웅인 인물이 다른 민족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떤 영웅을 어떻게 떠받드는지 살펴보면 국민성의 일단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우리에게 영웅은 어떤 의미인가?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21세기 들어 요즘처럼 한중일의 관계가 긴박하고 날카롭기는 처음이다. 더불어 세 나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영웅들을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중국 영웅들 먼 옛날부터 중국의 영웅들에게는 도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의 영웅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패하고 참수된 이래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신격화된 것은 대표적인 예.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강이자긍(剛而自矜)의 단점으로 패망했으니 이수(理數)의 상례”라 기록된 장수가 민담과 설화 차원에서는 신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관우의 사당이 무묘(武廟)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 일컬으며 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받들듯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자국의 무를 대표하는 인물로 숭앙한다. 여타 영웅들에게서도 도교(또는 도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토착신앙)의 영향은 거의 빠짐없이 드러난다. 의 모사 장량이 신선에게 태공망의 병법서를 전수받는 과정이 그렇고, 에서 제갈량이 남동풍을 불러오거나 자신의 수명을 늘릴 때의 묘사 역시 그렇다. 그 바탕에는, 인간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에서 손오공이 요괴들을 물리치며 천축국으로 향하는 여정에도 도불습합(道佛習合)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를 비롯한 민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문학의 커다란 줄기인 무협소설에도 이런 경향은 짙게 나타난다. 세계적 거장 이안 감독이 영화화한 왕두루의 소설 에서 주인공 리무바이는 최고수의 경지에 이른 뒤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용은 거친 물길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서 그들의 죽음은 또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로 묘사된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에서 두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리무바이는 강호를 떠나려는 순간 최고의 무공에 도달한다. 최고의 무공은 다스리지 않고 조화하며 삼라만상의 기운과 조응하는 자기 내면의 기를 끌어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리무바이도 용의 질주하는 욕망, 젊음의 활기를 은근히 부러워한다. 그것도 세상이치다. 어느 쪽도 결핍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결핍을 인정하는 것. 영화 마지막에는 그 결핍을 초월하는 용의 해결방식이 나온다.” 서극 감독의 이나 정소동 감독의 은 더하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빠짐없이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2000년에 리메이크된 ‘촉산전’에서 아미파의 본산인 아미산(촉산)은 숫제 구름 속에 둥둥 떠 있다. 이수민의 으로 대표되는 이런 무협소설 속에서 중국의 무술 고수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비현실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이런 경향이 단지 고대 영웅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덩샤오핑에 의해 ‘문화대혁명은 내란’이라 규정되었음에도 모든 중국 인민폐(人民幣: 런민비)에 초상이 그려진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이 영웅을 신격화하는 가장 가까운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영웅들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인간세상을 번민의 각축장으로 해석하고 끊임없이 도탄을 초월하려 애쓴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중국인들은 그들 영웅이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믿으려 한다.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그런 영웅들이 활개쳐온 세상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제국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 중국(中國)이라 여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일본의 영웅들 중국과 달리, 일본 영웅들의 머리 위에 신의 면류관이 얹히게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천황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 天照大神) 이후 신격화의 자격은 오직 왕족에게만 부여된다. 물론 수백, 수천의 잡다한 신들이 신사(神社)에 모셔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 믿음이라 부르기 힘든 것은, 일본 토속신앙인 신도(神道)를 본격적 종교로 인정하기 힘든 까닭과 궤를 같이한다. 지방의 신사에 모셔진 신격화의 대상들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다. 정순분이 쓴 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일본 신화는 천상신(天上神: 天津神)과 지상신(地上神: 地津神) 간의 투쟁이 중심축을 이루는 점이 특징으로, 지상신은 천상신에게 지배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일본의 첫 통일 정권인 야마토 조정의 지배층인 황족이나 귀족이 믿었던 신이 천상신이 되고, 평정된 지역의 사람들이 믿었던 신이 지상신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정치적 패권을 잡은 야마토 조정의 신화가 문자로 서술되어 남고, 그 밖의 토속적·자연적 신화는 점차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토속적 신화가 절멸된 결과,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는 영웅들은 새롭게 구성돼 현실과 맞닿아 있게 됐다. 일본의 대표적 설화인 모모타로(桃太郞)가 현대에 이르러 묘사되는 방식은, 일본 사회가 어떻게 영웅을 소비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모모타로는 복숭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 속 영웅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전해진다. 교활하게도 일본의 군국주의는 이 모모타로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고무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영국과 미국을 귀축(鬼畜)으로 규정하고 군인들에게 ‘모모타로가 되어 귀신들을 물리치자’고 부추긴 것이다( 같은 충신들의 이야기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종전 이후 모모타로는 방송에서 탐관오리를 벌하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모모타로는 40분쯤 악당들의 악행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일본 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귀신 가면을 쓰고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 하고 나타난다. 그러고는 단칼에 악당들을 베어버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귀신을 물리치는 비현실적 영웅이 정의의 사도라는 현실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모모타로에게서도 발견되는 ‘떠돌이 정서’ 역시 일본 영웅을 특징짓는 중요한 축.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가 두 자루 검으로 고수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일본을 평정한 이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무용담을 펼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일본 대중예술의 단골소재가 됐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졌을 만큼 히트한 제니가타 헤이지(?形平次) 시리즈(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동전 던지기가 특기이며 오라로 포박하는 데도 능하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히트한 만화 ‘아기를 동반한 무사’, 주인공이 막부의 특명을 받고 전국을 떠돌며 사건을 해결하는 ‘다비가라스의 사건수첩’(미소라 히바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아키라가 주연했다) 등은 대표적 예라 할 만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나타났다가 귀신같은 솜씨로 사건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본 영웅들의 전형적 여정이 ‘헐크’나 ‘도망자’ 같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은 꽤 흥미롭다. 일본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이 모모타로 또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면 미국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은 ‘OK 목장의 결투’의 와이어트 어프라 할 만한데, 양쪽 모두 허무한 정서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쿨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서민들 속에 파묻혀 있어 영웅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툭하면 아무데나 ‘신(神)’을 갖다 붙이는 일본 사람들의 속성은 이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영웅들의 실상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영웅은 영웅이되 영웅이 아니며, 일본의 신은 신이되 신이 아니다. 우리들의 독특한 영웅들 우리 영웅들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하지만 알고 보면 숫제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영웅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떠들썩한 양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영웅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딘가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먼저 (역사 속 위인들을 제외하면) 우리 영웅들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임꺽정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 중기 때 양주의 백정 출신인 그가 일당들과 함께 구월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며 3년 가깝게 관군들을 농락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 그러나 그가 관곡을 털어 백성들에 나눠준 의적인지, 살육을 일삼은 포악한 도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곤궁한 시대가 그를 도둑 또는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록을 들여다보자.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장길산도 다르지 않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이갑송을 비롯한 장길산 무리들은 절대적 의리로 똘똘 뭉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알 길 없다. 조선 숙종 때 광대 출신인 장길산이 뛰어난 기지와 탁월한 용맹으로 도적들의 수괴가 됐고, 이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나아가 역적모의까지 감행했다는 것만 사실로 확인될 뿐이다. 정체가 모호한 의적을 논하다 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조선 후기 때 실학자 이익은 에서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홍길동까지 포함시켜 ‘조선 3대 도둑’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 홍길동은 실존 인물일까, 아닐까.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 시절에 관군에 붙잡혔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기록은 부실하지만, 서자 신분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습격했다는 등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이 쓴 의 주인공은 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게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의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 제의까지 받으며 나중에는 아예 도술로써 괴물까지 퇴치한다. 그리고 활빈당 무리들을 이끌고 율도국(栗島國)으로 건너가 그곳 왕을 굴복시키고 이상향을 일군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이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질 만큼 도교의 영향이 짙은 것이다. 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사회상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쓰였지만,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로 민초들이 떠받든 영웅들의 면모와 거리가 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시대 최대의 혁명이라 할 만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들은 실체(?)가 분명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수많은 실존 인물들은 민초의 주장을 대변한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역사적 영웅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영웅들은 누구 못지않게 영웅적이었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에 이어 일제 강점기와 독재라는 슬픈 역사를 거치며 한때 낭만적 목적만으로는 영웅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해석이 뒤따라야 했고 그 해석을 심의하는 주위의 눈길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대중매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웅의 세계는 한계가 뚜렷했다. 시간을 몹시 거슬러 올라가 건국 신화를 건드리거나 고작해야 암행어사 같은 비현실적 영웅들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영웅 없는 시대에 살아야 했다. 충무공의 무용담을 재조명한 ‘명량해전’에 이어 올해는 이라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소개됐다. 그와 같은 문화 현상이 각별히 기쁜 이유는 달리 없다. 영웅 없던 나라에 바야흐로 영웅들의 시대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10-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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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한 은퇴] 은행(隱幸)주머니를 만들자
- 요즘 결혼하는 세대들은 맞벌이가 많지만 지금의 40~50대만 해도 외벌이가 대부분이었다. 직장을 다니던 신부들도 결혼 후에는 가사와 출산, 육아 등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게 당시의 세태였다. 30여 년 전만 해도 외벌이 남편들은 월급봉투에 가득 현금을 담아 아내에게 갖다주는 뿌듯함과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봉투째로 넘기는 남편도 있었지만 일정 금액을 떼고 주거나 생활비만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월급이 송두리째 통장으로 들어가고 그 통장을 아내들이 관리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가계의 경제권을 아내들이 쥐고 크고 작은 지출은 물론 아이들과 남편에게 용돈을 하사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남편들은 회사에 다닐 때도, 은퇴한 후에도 아내로부터 얼마간의 용돈을 타서 쓰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얼마 전, 한 TV드라마에서 한 달 용돈 30만 원을 타서 쓰는 은퇴한 아버지(남편)의 초라한 인생을 본 적이 있다. 20~30년 이상 평생을 열심히 일한 당신이 기껏 하루에 만 원을 타서 쓰는 ‘만 원 인생’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오래전부터 주변의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부부가 서로 눈감아주는 딴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게 좋다고 조언하고 있다. 우리 중 상당수는 가족, 특히 배우자 몰래 가지고 있는 돈이 있다. 통상 ‘비상금’ 또는 ‘비밀자금’이라고 부르는 돈으로 나만이 알고 있는, 나만의 씀씀이를 위한 부분이다. 이 돈이 나 자신은 물론 배우자와 자녀를 포함한 친인척과 주변 사람들에게 주는 효용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물론 사용하기 나름이기는 하다. 배우자에게 철저하게 비밀로 하면서 순수하게 자신만의 즐거움을 추구한다거나 과도한 술자리 또는 외도(?) 등 비정상적 용도로 사용한다면 그건 없느니만 못한 돈이다. 그러나 이 비상금을 가족 여행 시의 소소한 현금지출이나 배우자와 자녀, 부모 등 가까운 가족을 상대로 사용해보라. 내가 쓰는 돈의 ‘한계효용(限界效用, marginal utility)’을 극대화할 수 있다. 굳이 한계효용과 같은 어려운 용어를 쓰는 이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녀의 용돈은 어머니가 주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라면 매주 오천 원 또는 매월 2만 원을 주는 식이다. 아내로부터 매월 일정 금액의 용돈을 받아서 써야 하는 입장인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따로 용돈을 줄 형편이 못되기 십상이다. “뭐, 얘들도 제 용돈을 받아서 쓰니까 내가 따로 줄 필요는 없지”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아이들의 성적이 크게 올랐거나 태권도 승단심사를 통과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래, 우리 아들(딸), 정말 잘했구나!”하면서 한 번 안아 주고 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지갑에서 오천 원 또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주는 게 좋을까? 이때 또한 아이가 아빠로부터 받은 오천 원의 효용과 어머니로부터 매주 받는 오천 원의 효용이 같을까? 어머니로부터 받는 용돈은 이미 당연한 권리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가욋돈이 아버지로부터 날아온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같은 오천 원이 같은 오천 원이 아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오천 원이 주는 추가적 효용, 즉 한계효용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욋돈 오천 원의 효용과 감사의 정도가 어쩌면 한 달 용돈 2만 원보다 더 클 수도 있다. 한 달 용돈 50만 원 안팎의 대학생 자녀가 가외로 받은 5만 원짜리 한 장이 가지는 효과 역시 같은 한계효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로부터 특별상을 타기 위해 자녀들이 뭔가 스스로 잘해야겠다는 의욕과 동력을 불러일으키는 일석이조를 기대할 수도 있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를 다루는 방법 또한 따로 주머니를 차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대학을 다니는 손자손녀에게 요즘 연애 잘하고 있냐면서 5만 원짜리 한두 장을 손에 쥐어줘 보라. 온 가족이 할아버지 댁에 간다고 하면 손자손녀들이 선선히 따라 나설 뿐 아니라 설사 주말 MT가 있더라도 잠시 빠져나와서라도 올 것이다. 하루에 만 원을 용돈으로 타서 쓰는 할아버지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다. 반대로 할아버지가 주머니는 열지도 않으면서 공부 잘하고 있냐고 스트레스만 준다면 할아버지 댁에 가기가 영 싫을 것이다. 대놓고 가기 싫다고 하기는 그러니까 없던 MT가 생기는 등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게 인지상정이다. 필자는 이처럼 유용한 비상금 주머니를 ‘은행주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은행주머니’ 하니까 우리가 예금을 하는 은행(銀行)을 떠올리겠지만 그게 아니라 ‘은퇴(隱退) 후 행복(幸福)을 만들어주는 주머니’라는 뜻이다. 은행(隱幸)주머니를 부부가 서로 적당하게 차고 있으면 평소의 삶은 물론 특히 은퇴 후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쓰는 돈의 한계효용을 극대화함으로써 ‘숨을 은(隱), 행복할 행(幸)’이라는 말 그대로 숨어 있는 소소한 행복 또한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유리알 지갑’이라는 월급쟁이가 무슨 수로 딴 주머니를 찰 수 있으며 또 어느 정도가 적당하냐고 물을 것이다. 그건 하기 나름이다. 교수나 전문직이 아닌 일반 직장인의 경우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별상여금, 명절 차례비와 같은 눈먼 돈이 나올 수도 있고 한 달 용돈을 조금씩 줄여서 모을 수도 있다. 일주일에 커피 한 잔, 담배 한 갑, 술자리 한 번만 줄여도 10년, 20년 쌓이면 적잖은 돈이다. 아내가 일정액을 남편에게 따로 챙겨주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은퇴할 때 ‘나만의 은행주머니가 있는 게 좋을까’, ‘얼마나 있는 게 좋을까’,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나름 답이 나올 것이다. 한 가지 필요악은 은행주머니를 차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모른 척 눈감아주는 센스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남편이 딴 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애먼 짓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요즘 같이 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래 살아야 하는 시대에 남편들도 나름 제 살길을 찾고 있다는 점을 아내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은행주머니가 가져올 미래의 엄청난 효용을 위해 현재를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은행주머니 만들기를 시작하자. 하루 만 원 인생이 아니라 은행(隱幸)주머니를 차고 있는 우리의 즐거운 미래를 위하여. 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 2015-10-1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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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혁재의 약 되는 이야기]전염병을 치료하는 약초요법
- 사극이나 역사소설에 종종 나오는 역병(疫病, plague)은 어떤 병일까? 어떤 소설에는 조선시대 한 산골마을에 역병이 돌아 삼분의 일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얘기도 나오고, 다른 소설에서는 호환마마를 ‘역병’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병을 마을에서 몰아내기 위해 병자의 시신을 불태우고, 굿을 하기도 하였다. 황석영의 장편대하소설 에도 이 역병은 ‘괴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장길산이 아직 뜻을 온전히 펼치기 전에 금강산 암자에서 운부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련을 하던 때, 고성포 꽃재말에서 이 역병이 출몰하여 마을을 뒤덮는다. 무능한 관아와 무지한 백성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역병의 공포가 번져갈 무렵, 장길산과 뜻있는 몇몇 젊은이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팔을 걷어붙인다. 당시 역병에 걸려 죽은 시신의 모습을 표현한 대목을 보면, ‘온 얼굴에 반점이 돋아나 있었고 열에 떴던 안색은 옹기처럼 탔는데 백태가 잔뜩 낀 입이 흉측하게 벌려져 있었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혈관염증을 일으켜 온몸에 발진을 가져오는 발진티푸스가 유행한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발진티푸스는 비위생적이고 먹을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염병이므로 전쟁이나 기아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당시가 보릿고개였음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는 많지만 묘책이 뚜렷하지 않던 차에 찾은 사람이 의술을 아는 양반의 후예인 ‘설유징’이라는 사람이었다. 도움을 청하러 간 길산과 동료에게 설유징은 소주와 백반(白礬, 광물성 한약, 살균작용이 있다)을 섞어서 그들 먼저 소독할 것을 권한 뒤에 치료약으로 쓰던 승마, 백작약, 갈근, 감초, 생강, 계지, 백반 등을 챙긴다. 이 약재들은 한의학에서도 염병(전염병의 준말)에 많이 쓰이는 약재들이다. 그 외에도 소독을 위해서 살균작용이 있는 석회를 가지고 간다. 현장에 도착한 설유징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먼저 위 약재들을 조합한 발한하열탕(發汗下熱湯)을 달여 먹이고, 끓여서 소독한 물로 몸을 씻겼으며, 백반을 소주에 섞어서 입과 목구멍을 닦아내게 하였다. 결국 괴질은 마을에서 점차 물러나게 된다. 역병과 천연두 그렇다면, 장길산에 나오는 괴질을 뜻하는 역병과 천연두인 두창을 지칭하는 역병은 분명 다른 질병인 것이 확실한데, 왜 역병이라는 표현을 같이 사용하는가? 답을 찾기 위해서 역병의 뜻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식백과를 뒤져보면, ‘세균, 원충, 스피로헤타, 리케차, 바이러스 등으로 일어나는 질환 중 급성의 경과를 거치며 전신적인 증세를 나타내고 집단발생(유행)하는 전염병’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체(病原體)라고 알고 있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 외에도 그 중간 위치에 있는 모든 미생물로부터 발생하는 전염병을 말하는 것인데, 병의 진전 속도가 빠르고 전신에 걸쳐 생명을 위협하는 증상을 일으키며, 음식물이나 사람의 침, 먹는 물 등을 통해 주변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는 것들을 다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한과 발열, 근육통, 구토 등으로 시작되는 전염병의 일반적인 특징을 가진 유행병들을 통칭해서 ‘역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장길산에서 유행했으리라고 짐작되는 발진티푸스는 ‘리케차’라고 불리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중간 크기쯤에 해당하는 세균에 의해서 발생한다. 또 다른 역병 중의 하나였던 천연두는 ‘폭스바이러스’라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발생한다. 역시 영양분 공급이 불충분한 곳에서 유행하기 쉬우나, 분명히 보균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코르테스 군대가 이 천연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원정대로 보내진 코르테스가 황금의 제국이라고 알려진 아즈텍 제국에 아예 눌러앉으려 하자, 당시 스페인에서 토벌군을 보냈는데, 그중에 천연두 환자가 있었던 것이다. 토벌군에게도 승리하고, 제국 전체에 확산된 천연두 때문에 아즈텍이 무너지면서 그 거대한 제국도 코르테스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스페인에서는 천연두가 풍토병이 되면서 침략자들에게는 희생자를 발생시키지 않았지만, 아즈텍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신이 휘두르는 커다란 재앙이었던 것이다.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구급약 한의학을 민족의학으로 전승시켜왔던 우리 조상들은 이 역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수인성 질병이 유행하기 직전인 단옷날에 쑥떡을 해먹는 풍습이 있었다. 한약명으로 ‘애엽(艾葉)’이라고 불리는 쑥에는 비타민A로 전환되는 베타카로틴이라는 물질이 많은데, 감염성 질환에 저항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비타민A가 충분한 것이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쑥에는 살균효과와 함께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운 여름밤에 말린 쑥을 태워서 모기를 쫓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금이 머물던 궁중에서는 ‘제호탕’이라는 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제호탕은 매실껍질로 된 오매육이라는 한약과 사인, 백단향, 초과 등의 한약재를 곱게 빻아서 꿀에 재워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것인데, 일종의 발효식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설사로 시작되는 식중독을 다스리기 위해서 ‘옥추단’이라는 처방약도 구급약처럼 사용되었다. 옥추단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구급약으로도 유명했는데 오배자, 산자고, 속수자, 사향, 주사(수은 화합물) 등의 한약으로 만들어졌다. 또, 앵두를 화채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앵두화채는 갈증을 해소하고 더위를 이기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더운 여름에 체력이 떨어져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 최혁재 약사, 경희의료원 약제본부 예제팀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 2015-10-19 1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