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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만큼은 나도 스파이더맨! 스포츠클라이밍
- 555m 높이의 롯데월드타워 등반에 성공한 ‘암벽 여제’ 김자인 선수의 영향으로 몇 년 새 스포츠 클라이밍이 친근한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아찔한 높이의 인공 암벽을 맨손으로 정복하는 스포츠클라이밍 ‘볼더링’ 종목에 정원일(62) 동년기자와 동갑내기 친구 이상민(62) 씨가 함께 도전해봤다. 촬영 협조 V10클라이밍(서울 동대문구 장한로2길 63, 2층) 실내에서 즐기는 스포츠클라이밍 골프, 테니스, 야구 등 옛날에는 야외에서만 즐길 수 있었던 스포츠를 이제는 날씨나 외부 조건 등에 영향받지 않고 실내에서도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산악 등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클라이밍도 예외는 아니다. 실내 또는 실외에 인공 암벽을 설치해 이용하는 스포츠클라이밍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최근 떠오르는 스포츠로 주목받고 있다. 15m 이상 높이의 인공 암벽을 줄을 사용해 오르는 리드 클라이밍, 목표 지점까지 빠르게 올라가야 하는 스피드 클라이밍과는 다르게 볼더링은 특별한 등반 기구 없이 맨손으로 4~5m 높이의 인공 암벽을 올라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볼더링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장치가 잘 갖춰진 실내 클라이밍장이라면 누구나 쉽게 입문할 수 있다. 정원일 동년기자 ‘클라이밍’ 하면 남자들이 터프하게 절벽을 올라가는 이미지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실내 클라이밍장에 와보니 젊은이도 많고 여성도 많아 놀랐다. 무엇보다 암벽 등반을 실내에서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상민 씨 실내 스포츠가 이용금액이 비싸기 때문에 쉽게 도전할 생각을 못했는데 실내 클라이밍은 일일 이용요금이 2만 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었다. 새로운 운동을 찾는 시니어라면 실내 클라이밍에 도전해봐도 좋을 것 같다. 암벽 오르기 전 준비운동은 필수 대부분의 사람이 운동하기 전 준비운동을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는 시니어가 무리할 경우 근육이 손상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할 수 있다. 따라서 운동 시작 전에는 항상 몸을 풀어주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손과 발로 벽에 부착된 홀드를 이용해 올라가는 근력운동이기 때문에 시작 전 충분한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송율나 V10클라이밍 강사는 “스포츠클라이밍은 전신운동인 동시에 많은 근력이 필요하다”며 “특히 볼더링은 뛰어내리는 동작이 많기 때문에 무릎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조언한다.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스포츠 테이프를 사용해도 좋다. 스포츠 테이프는 굳은살을 방지하고 손가락을 보호해준다. 정원일 동년기자 누구나 한 번쯤은 운동 후 근육통으로 고생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실내 클라이밍장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점은 ‘아, 이거 제대로 몸 안 풀면 다음 날 고생하겠구나’였다. 그냥 덥석 올라갔다가는 다음 날 근육통으로 고생할 수도 있으니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는 시니어는 반드시 준비운동을 할 것을 권한다. 이상민 씨 스트레칭은 거의 몇십 년 만인 것 같다.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해진 몸을 보며 새삼스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시니어가 클라이밍을 시작하기 전 가장 많이 하는 걱정이 바로 안전과 관련한 문제다. 볼더링을 체험해본 결과 떨어져도 푹신한 매트가 아래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에 잡힐 듯 말듯, 발에 닿을 듯 말듯 클라이밍장을 방문할 땐 운동복과 양말만 준비하면 된다. 암벽에 오를 때 신는 암벽화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로 제작되었으며 클라이밍장에서 빌릴 수 있다. 또 손에는 송진 가루를 묻히기도 하는데 초보자에게 필수는 아니다. 볼더링은 벽에 붙어 있는 다양한 홀드 중 같은 색깔의 홀드만을 사용해야 하는 종목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무수히 많다는 점이 매력이다. 일일 강습을 신청하면 강사가 홀드 잡는 방법부터 발 옮기는 위치까지 알려주기 때문에 처음 볼더링을 배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올라가기 전에는 쉽게 보이지만 막상 시작하면 미로처럼 보이는 클라이밍. 방심하는 순간 ‘뚝’ 떨어진다. 초급자 코스에서 충분히 요령과 체력을 기른 후 다음 난이도로 넘어갈 것을 추천한다. 정원일 동년기자 분명 밖에서 볼 땐 쉬워 보였는데 이게 참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을 땐 배가 나온 몸뚱어리를 원망하다가 배시시 웃음이 났다. 실제 절벽이었으면 목숨이 여러 개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지막 지점까지 도달했을 땐 엄청난 성취감이 들었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걸 거다. 이상민 씨 암벽화를 고를 땐 평소보다 10mm 정도 작은 치수의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마치 전족을 신은 것처럼 발가락이 굽어졌는데 이는 암벽을 오를 때 발가락에 충분한 힘이 실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발가락이 조금 불편하다는 점만 빼면 일반 신발보다 미끄럽지 않고 착착 감기는 느낌이 들어 암벽 등반에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2018-09-0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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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두 발로 이뤄낸 영광의 순간
- 올림픽 폐막식을 앞두고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질주도 끝이 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마라톤 금메달의 주인공, 황영조(黃永祚·49)를 만났다. 가난해서 달려야 했던 소년 42.195km를 2시간 15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100m 달리기를 422번, 그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번 18초의 기록으로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다. 상상만 해도 숨이 차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런 힘든 종목인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뛰고 싶어서 뛴 게 아니라 뛸 수밖에 없었다고 운을 뗐다. “돈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예요.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가서 뛰면 그만이죠. 저에게 마라톤은 가난했던 시절 유일하게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었던 운동이었어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월사금도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다.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해 항상 야단을 맞았던 미술시간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돈이 없어 못 사온 건데 그게 무슨 죄가 된다고 벌을 서야 하는가. “교통비도 없었기 때문에 제 두 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어요. 학교에 가려면 초등학생 땐 왕복 6km를 걸어야 했고, 중학생 땐 어머니가 어렵게 사주신 중고 자전거를 타고 24km를 달려야 했죠. 운동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운동이었던 거죠.” 매일 가파른 언덕과 비탈길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력이 좋아졌고 중학생 때 이를 눈여겨본 운동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처음 그가 선택한 종목은 육상이 아닌 사이클이었다. 하지만 장비가 워낙 비쌌고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라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엔 무리였다. “옛날엔 돈 없으면 고등학교도 못 갔어요. 근데 강릉에 위치한 명륜고등학교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졸업도 시켜줄 테니 육상부에 들어오라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거죠. 돈 안 들이고 졸업하면 효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바로 종목을 바꿨죠. 처음엔 1500m, 5000m 중장거리 선수로 데뷔했는데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을 가볍게 제쳤어요. 제가 뛰고 있는 구간엔 같이 안 있으려고 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죠.(웃음)” 1991년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한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얼떨결에 그의 마라톤 데뷔전이 된 셈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에 열린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마라톤 금메달, 1992년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선 한국 선수 최초로 마의 2시간 10분 벽을 깨고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 기세를 몰아 1992년엔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최연소 선수로 참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금메달은 신이 정해주는 메달”이라고 말한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잖아요. 마라톤도 아무리 열심히 뛴다 해도 경기가 끝날 때까진 결과를 알 수 없는 종목이죠. 그래서 저는 대회에 나갈 때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죽을힘을 다해 뛰자고 마음먹었어요.” 혜성같이 나타난 마라톤 영웅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현재까지 올림픽 사상 가장 어려웠던 난코스로 꼽힌다. 코스를 살펴보면 우선 항구도시 마타로에서 출발해 25km 지점부터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지나 그라시아 거리, 카탈루냐 광장을 통과한다. 그러다 38km 부근에 도착하면 그 유명한 ‘몬주익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213m의 몬주익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는 물론 넓게 펼쳐진 지중해를 볼 수 있다. 26년 전 이 아름다운 무대에서 치열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마라톤 최악의 조건이 덥고, 습하고, 경사가 많은 코스인데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가 기가 막히게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추고 있더라고요. 기온은 30℃를 웃돌았고 바다를 낀 도시답게 엄청나게 습했어요. 이런 날씨에 몬주익 언덕을 뛰어 올라가야 했으니 사전 답사 때 보고 아이고야! 했죠.” 바르셀로나 시내는 선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오후 6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에 맞춰 선수들이 뛰기 시작했다. “출발선을 떠나는 순간 주사위는 던져진 거예요. 죽이 될 수도 밥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솔직히 속으론 ‘어느 세월에 다 가냐’ 하는데 한편으론 더 이상 힘든 훈련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해지기도 해요. 이때부턴 정말 미친 척 뛰기만 하는 거예요. 머릿속도 다 비워야 해요. 이런저런 생각하면 뛸 수가 없거든요.” 30km를 지나자 선두권 그룹에서 뒤처지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황영조와 속도를 잘 맞춰오던 김완기 선수도 페이스를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황영조가 앞으로 치고 나간다 싶으면 모리시타가 뒤를 바짝 쫓았고, 모리시타가 앞서나간다 싶으면 황영조가 냉큼 따라잡았다. 그렇게 서로를 떨어뜨리고 잡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이라는 게 그냥 뛰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전략싸움이거든요. 속도 조절을 잘하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상대가 방심할 때 그 힘을 폭발시켜서 나가야지 거리를 벌릴 수 있어요. 결승지점을 2km 남겨뒀을 때 모리시타가 속도를 줄이더라고요. 아마 스타디움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었나봐요. 이때다 싶었죠. 이때 간격을 더 벌려두지 않으면 금방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어요. 모리시타가 아차 싶었을 거예요.” 메인 스타디움에 황영조가 모습을 보이자 스타디움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의 옆에 모리시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영조가 마지막 코너를 돌더니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결승선을 향해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원래 옆에 사람이 있으면 숨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마지막 코너를 도는데 뭔가 나만 뛰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 거죠. 아, 내가 금메달이구나 싶었죠. 결승선을 밟는 순간 이제 안 뛰어도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웃음)” 우연의 일치인지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8월 9일은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날짜와 같았다. 56년 만이었다. 황영조는 스타디움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기정 선수를 찾아가 금메달을 그의 목에 걸어줬다. 당시 외신도 이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손기정 선생님이 식민지 시절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올라선 역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큰 아픔이잖아요. 근데 외국인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죠. 선생님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행복했어요.” 선수에서 감독의 길로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딴 마라톤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후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 감독을 맡으며 그의 뒤를 이을 선수를 양성하고 있다. “요즘 친구들을 보면 간절함이 없어 보여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금방 포기해버리니깐 제자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죠. 훈련할 때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해요. 그 힘든 순간만 견디고 넘기면 정말로 더 큰 무대를 바라볼 수 있거든요.” 유독 뜨거웠던 8월의 태양을 피해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은 강원도 대관령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나마 더위가 식은 오후 6시에 훈련을 시작했지만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선수들의 유니폼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들을 따라가며 “포기하지 마! 바짝 붙어야 해!” 힘껏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간혹가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둥 심장이 요동칠 때 희열을 느낀다는 둥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죽어라 뛰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예요. 마라톤이 재미있는 운동은 아니에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늘 요구되는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죠. 이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에서 앞으로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말고도 언급할 수 있는 선수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게 제가 ‘마라토너’로서 가지는 바람입니다.”
- 2018-08-2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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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구에서 수비는 졸렬한 행동일까?
- 당구에도 수비가 있다. 당구는 자기가 칠 공을 치는 공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을 맞힐 확률이 적다면 수비도 염두에 두고 공격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비는 졸렬한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정당한 공격만이 보기 좋다는 것이다. 수비까지 염두에 두고 치는 행위는 지나치게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승부가 걸린 모든 스포츠는 공격과 수비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 맞다. 권투 선수가 권투 시합할 때 한 대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쓰러지는 턱을 내놓고 하지 않는다. 가장 약한 부위인 턱은 양 주먹으로 가리고, 되도록 안 맞으려 하는 것이 수비이다. 도망가는 것만 수비가 아니다. 4구 경기에서 수비는 빨간 두 공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 상대방이 쉽게 점수를 올리기 때문이다. 공격 포인트 하나를 무리하게 시도하려다가 놓치면 상대방에게 몇 개를 한꺼번에 주게 된다. 그 게임은 이기기 어렵다. 그런 경우가 누적되면 바로 승패가 결정 나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공격은 아예 안 하고 눈에 보이게 상대방 공 앞에 자기 공을 갖다 놓는 행위는 졸렬한 행동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공격 끝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공이 상대방에게도 어려운 공 배치가 된다면 정상적인 수비로 봐야 한다. 3구 경기는 반대로 수구 반대편에 공이 모이면 치기 어렵다. 그나마 모여 있으면 빈 쿠션 치기로 시스템에 따라 난구를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한쪽에 몰려 있으면 비교적 공략하기 어려운 난구가 되는 것이다. 상대방 공이 테이블에 붙어 있어서 공격 기회가 와도 제 실력을 구사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그 공은 먼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 공이 다른 공에 가려 있어 3 쿠션을 구사하기 어려울 때도 일단 공격 방식을 택할 때 그 형태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그 정도는 인위적으로 공격 방식이나 힘 조절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 것이 수비이다. 고스톱도 초보자는 자기 패만 본다고 한다. 고수는 남의 패까지 짐작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야 전체 판을 보고 공격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축구 경기에서도 공격에만 치중하다 보면 수비가 허술해서 상대방의 역습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다. 수비수까지 공격에 나서면 공격력은 강해지지만, 공격이 실패로 끝나면 상대편이 역습해 들어오면 수비수가 없어 그대로 당하는 것이다. 지난 러시아 월드컵 때 독일과의 경기에서 독일 골키퍼가 공격에 가담한 사이에 그 공을 빼앗아 손흥민 선수가 쐐기 골을 넣은 것도 독일 팀 수비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구는 오락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이기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승패가 오가야 재미있다. 그러나 고수가 이기는 확률이 높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고수는 그만큼 시간과 돈을 많이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게임비 내기가 당연했지만, 시니어들은 별다른 수입도 없고 같이 즐겼으므로 승패와 관계없이 게임비 및 식대는 공평하게 나눠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돈이 결부되어 있으면 감정이 동원되고 의를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18-08-2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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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케스트라와 단체 경기의 닮은 점
- 결론부터 얘기하면 오케스트라와 스포츠의 단체경기는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완성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는 하모니가 중요하다. 좋은 하모니를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개인기도 중요하지만 각자 실력의 힘 조절이 필요하다. 단원들이 함께 모여 계속 연습하고 맞춰보는 것은 이 연습을 하기 위함이다. 단체경기는 한 위치에 배치된 선수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다른 선수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감독과 코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팀 동료 간의 조화가 중요하다. 남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은 확대해 보면 오케스트라와 단체경기뿐만 아니라 인생이나 사회생활 전면에서도 필요하다. 미국 동부의 8개의 사립대학으로 구성된 스포츠 연맹을 ‘아이비리그’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이 벌이는 미식축구게임을 일컫는 명칭이기도 하다. 1600년경부터 존재했던 전통 사립대학들은 이 경기를 통해서 우열을 가리기도 했고 즐기기도 했지만, 전통과 경기 실력을 뽐내면서 팀 경기의 중요성을 확인해 갔다. 신입생 선발기준에는 팀 경기 활동 여부가 포함된다. 이를 기준으로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보기 때문이다. ‘책상 공부 실력의 점수가 아무리 높다 해도 협업하는 기능이 모자란 사람이 사회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채점하는 것은 협업과 소통이 사회공헌의 중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지구촌 뜨겁게 했던 2018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축구 강팀 독일을 이겼다고 많은 국민이 환호했다. 시합에서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지만, 경기장을 누빈 선수들이 팀워크를 위해 흘렸던 땀이나 노력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 2018-08-0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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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돌고 돌아 소설가 되다, 한보영 MBC 전 복싱 해설위원
-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 2018-07-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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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볼 슈퍼스타, 윤경신
- 1995년, 핸드볼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최초로 동양인 선수가 등장했다. 13년 뒤 그는 독일인들이 핸드볼의 신이라 칭송하는 영웅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과 동고동락한 윤경신(46) 감독을 만났다.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의 오전 훈련이 한창인 의정부종합운동장, 그곳에서 윤경신 감독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m가 넘는 키 덕분에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옆에 서니 마치 개미가 된 기분이랄까. 앉으면 괜찮을까 싶어 서둘러 카페를 찾았다. 웬걸… 앉아서도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아버지 181cm, 어머니 170cm, 누나 174cm, 남동생이 194cm이니까 가족이 다 크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저희 가족을 보면 흠칫 놀라곤 해요.” 그는 203cm로 가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중학교 때부터 키가 빠르게 크기 시작했는데 2학년 땐 3주 만에 11cm가 자라 거인병을 의심했을 정도라고.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90cm만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큰 키의 장점이요? 별로 없어요. 공기가 맑나?(웃음) 오히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불편하고 맞는 옷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하죠. 그래서 어릴 땐 큰 키가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핸드볼 선수인 그에게 큰 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장점이었다. 2m 3cm 장신이 꽂아 내리는 시속 120km의 속사포를 막아낼 사람은 없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득점왕,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며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핸드볼 정상에 오르다 우리나라 3대 스포츠가 축구, 야구, 농구라면 유럽에선 핸드볼이 그중 하나다. 특히 독일의 핸드볼 분데스리가는 전 세계 핸드볼 리그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1부 리그 18구단, 2부 리그 20구단 등 남녀 1, 2부를 통틀어 60여 개가 넘는 팀과 시합할 때마다 경기장을 꽉 채우는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그 인기를 증명해준다. 1995년, 핸드볼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인 분데스리가에 윤경신이 진출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성적이 좋다, 전통 있는 팀이다 해서 들어갔죠. 근데 가서 보니까 성적이 밑바닥이더라고요. 그 당시 16구단 중에서 13~14위를 다투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들어간 굼머스바흐 핸드볼팀은 1부 리그에 겨우 발을 걸치고 있던 최하위 팀 중 하나였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뻔했던 굼머스바흐를 살려낸 주인공이 바로 윤경신. 그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파워풀한 공격을 앞세워 굼머스바흐를 3위의 막강 팀으로 만들었다. 유럽 선수들 가운데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한국에서 핸드볼을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무기였어요. 탄탄한 기본기와 경기 기술을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죠. 유럽 선수들보다 뒤처지는 웨이트 부분은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보완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몸싸움에서 항상 밀려 나가떨어지곤 했거든요. 동료들이 오죽했으면 절 북한 괴뢰군이라고 불렀겠어요.(웃음)” 그는 첫 시즌이던 1996-1997시즌부터 2001-2002시즌까지 연속 여섯 시즌 득점왕, 다시 2003-2004시즌과 2006-2007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역대 분데스리가 최다 골을 기록했다. 그중 2000-2001시즌엔 324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유일한 300골 이상의 기록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2002-2003시즌 득점왕을 놓친 이유가 유럽 선수들이 동양인에게 계속 득점왕을 내주는 게 자존심 상해서 한 선수에게 7m 드로우를 몰아줘 득점왕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독일에 갔을 땐 텃세성 파울이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 마늘 냄새가 난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 고정관념을 깨주기 위해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마늘이 들어간 불고기랑 잡채를 해주셨거든요. 애들이 밥을 다 먹으면 제 역할은 술 게임을 알려주는 거였어요. 독일엔 술 게임 문화가 없다 보니 ‘369’나 ‘007빵’ 같은 걸 가르쳐주면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술 게임을 하면서 서로 친해졌던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독일과의 작별 2006년 윤경신은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는 굼머스바흐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굼머스바흐의 구단주가 바뀌면서 그의 연봉을 삭감하는 등 부당한 대우가 많았다는 것. “이적할 땐 배신감을 느껴서 번호도 7번에서 77번으로 바꿨어요. 그 당시엔 21번 아래 번호 선수가 주축을 이뤘는데 제가 높은 숫자로 바꾼 이후엔 다들 저를 따라 하더라고요. 나 때문에 유행한 게 맞나…?(웃음)” 2008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서 가진 마지막 경기에서 공교롭게도 함부르크와 굼머스바흐 두 팀이 맞붙었다. 걱정과는 달리 굼머스마흐 팬들도 그의 마지막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함부르크가 두 골 차로 이겼어요. 굼머스바흐를 상대로 제가 여덟 골인가 넣었죠. 유럽 사람들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이 사태를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굼머스바흐 팬들이 마지막이라고 예우를 많이 해준 것 같아요. 끝날 때 박수도 쳐주고 북도 쳐주고. 특히 대형 유니폼을 만들어서 작별인사해주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독일에서 윤경신의 인기는 ‘한국은 몰라도 윤경신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아직도 ‘핸드볼의 신’, ‘득점기계’, ‘구기종목의 전설’이라는 연관검색어들이 뜬다. 문득 그도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는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는 거 좋아해요.(웃음) 사실 안 좋은 기사가 있으면 어떡하나 더 걱정하는 편이죠.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기수로 섰는데 하필 태극기가 바람에 뒤집힌 순간에 찍힌 사진이 뉴스로 나갔더라고요. 아휴… 욕 엄청나게 먹었죠. 그래도 종종 제 이름 검색해보고 새로운 기사 나오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핸드볼 선수에서 감독으로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은 지금까지 2014년을 제외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강팀이다. 윤경신 감독은 지난 2013년, 두산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임 첫해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줬다. “처음엔 두산이 날 감독으로? 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승승장구하는 팀인데 과연 내가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컸죠. 한편으론 ‘스타플레이어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인 2014년 지금은 해체한 웰컴론 코로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 없는 두산에게 준우승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첫해에 우승하니까 나태해진 거죠. ‘아 이제 됐어, 이렇게 하면 2년 차에도 우승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만했던 게 결국 패배로 이어졌어요. 그래도 한 번 넘어져봤기 때문에 3년 차, 4년 차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경신 감독은 우승의 비결로 선수들과의 소통을 꼽았다. 비시즌에는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술도 마시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핸드볼과 함께한 지 어언 30여 년.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아직도 핸드볼이 좋을까. “중간중간 농구해라, 배구해라 유혹이 많았었는데 핸드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 제 자신을 칭찬해요. 핸드볼을 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명성과 명예를 얻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을 했지만, 정말이지 매 순간 행복했어요.” 다가오는 11월에 국내 핸드볼의 최강자를 가리는 핸드볼코리아리그가 열린다. 경기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윤경신, 그의 다섯 번째 우승 도전을 응원한다.
- 2018-06-2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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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투포환의 기록을 새로 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 1970년대, 육상 투척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투포환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6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다 그에게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현재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만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시작한 투포환 남들보다 큰 키와 순발력,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격을 갖춘 백옥자는 중학생 때부터 농구와 배구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구기 종목도 꾸준히 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농구와 배구에서 손을 떼고 투포환을 시작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투포환이 뭔지도 몰랐어요. 어린 마음에 올림픽에는 나가고 싶은데 팀 운동보단 개인 운동을 해서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도전한 거죠. 때마침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투포환을 해보라며 권유하더라고요.” 그렇게 중학생 소녀의 손에 4kg의 둥근 쇳덩이가 쥐어졌다.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 해도 괴팍해 보이는 종목이라니… 집에서도 ‘이상한 운동’ 하지 말라며 반대했다. “처음엔 도시락도 안 싸줬어요. 그래서 용돈으로 자장면, 우동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죠. 또 훈련하느라 늦는 날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력 질주했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운동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고요.” 몰래 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중학교 3학년, 신인발굴대회에서 신인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신기록이었다. 언론은 그를 육상 유망주로 소개하며 보도하기 바빴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부모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지만, 육상연맹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선수촌행이었다. “집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이 곧 제 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경기가 잡히면 전화로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지금 싱가포르 가’ 하면서 당일 통보했죠.” 아시안게임 2연패, 전성기를 맞이하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백옥자의 전성기였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땐 14m 57cm를 던져 금메달을 땄다. 이뿐만 아니라 재미 삼아 출전했던 투원반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았어요. 검은 지프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매번 경신되는 기록과 메달 행진에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땐 ‘연애 중이라 성적이 안 좋다’, ‘백옥자의 시대는 지났다’ 등 그에게 쏠린 기대만큼 억측성 보도도 함께 쏟아졌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백옥자는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신우염을 앓고 있었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출전을 알리면서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대거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언론도 백옥자의 2연패냐, 처음 출전한 중국의 메달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다들 180cm가 넘었어요. 거기에 체격까지 엄청나니까 거인 같았죠.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더 무서운 소문까지 돌았어요. 북한도 그 당시 처음 출전했는데 잘하는 남한 선수들을 납치해가니 조심하라고요.(웃음)” ‘삐빅’ 하는 호각소리에 백옥자가 있는 힘껏 포환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m 28cm.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자신의 별명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 기자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예요.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오더니 ‘마녀’라고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녀는 좀 그렇지 않나… 했더니 자기 나라에선 마녀가 무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있는 존재라고 괜찮다는 거예요.(웃음) 에라 모르겠다, 그래라 한 거죠. 그렇게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했어요.”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라리 여신이니 미녀니 하는 것보단 마녀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 기자 덕분에 지금까지 불리는 멋있는 호칭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죠.” 2연패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만찬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결혼은 한국 남자와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말고 꼭 한국에 살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 스타는 거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한국 투척 종목의 일인자이던 백옥자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던 선수촌 아시안게임 2연패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한 연습벌레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쉬지 않았다. 그가 연습했던 자리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백옥자 자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투포환이라는 게 포환을 턱 아래에 대고 던져야 하거든요.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 때마다 턱을 쓸고 갔죠. 그럼 턱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인터뷰 도중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엄청 크기도 했지만, 오른손과 왼손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손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전 누가 손 보여 달라 그러면 왼쪽 손을 보여줘요. 오른손은 못생겼으니깐.(웃음)” 그의 오른손엔 당시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지, 중지, 약지는 4kg 포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말 못할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체벌을 받아 엉덩이엔 피멍이 들었고 뺨도 맞아가며 연습했다. “지금은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해야겠다’, ‘신고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더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죠.” 힘들 땐 몰래 선수촌을 탈출하기도 했다. 들어오는 길엔 후배를 위해 쭈쭈바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외출하려면 도장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못 받았을 땐 경비 아저씨한테 살짝 윙크 한번 날리는 거죠. 그럼 아저씨가 이해해주시고 슬쩍 내보내주셨어요.(웃음) 지금은 선수촌 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니 우유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우유 하나 더 먹으려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100번은 해야 얻을 수 있었어요.” 선수촌의 규율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점심시간이 달랐고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되는 날에는 풍기문란이라는 명목하에 퇴촌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감시가 빡빡한 일상생활에서도 그의 유일한 해방구가 있었으니, 바로 국제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국제대회를 나가면 경기장 주변에 항상 클럽이 있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할 것도 없고 혼자 심심하니까 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했죠. 같이 대회 나간 선배들이 ‘백옥자 어디 있냐’ 하면서 찾으면 후배들이 ‘시끄러운 곳 가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곤 했대요.” 인생 3막은 지금부터 20대 중반 건국대학교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 씨와 결혼한 그는 은퇴 이후 남편을 따라 교직생활을 했다. 더불어 여자 농구선수인 딸 김계령 씨를 돌보느라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근데 이제는 더 바빠졌단다. 얼마 전 부천대학교에서 은퇴한 그는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선출돼 새로운 출발을 했다. “옛날 아시안게임 때 만났던 선수들도 이제는 임원이 돼서 한국을 방문하는데 감회가 색다르더라고요. 저도 더 늙기 전에 연맹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돕고 그래야지요. 또 새로운 육상 인재를 발굴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나라 육상도 어서 부흥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 2018-05-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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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 속의 이색 체험, 양궁카페
-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엔 홍대에 위치한 커플이 함께 데이트하기 좋은 양궁카페를 소개하고 있다. 그중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양궁카페 ‘애로우팩토리’는 한국 스포츠의 강세 종목인 양궁을 직접 해 볼 수 있는 이색 카페다.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10개의 사선으로 꾸며져 있고 카페처럼 앉아서 음료와 스낵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도 놓여있다. 실내로 들어서자 약간은 어둠침침한 조명 아래 파란 인조잔디와 표적지가 눈에 띈다. 한눈에 실내 양궁장임을 알 수가 있다. 검은색의 벽면에는 각종 양궁 장비 세트가 가지런히 걸려있다. 비록 10m의 미니 양궁장이기는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넉넉하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트를 하듯 양궁을 할 수 있는 이곳은 양궁선수 출신 대표와 직원이 상주하며 활 쏘는 방법을 알려준다. 양궁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도 손쉽게 체험을 할 수 있다. 양궁을 체험하려면 고가의 장비를 구매해야 하고 양궁장까지 멀리 이동해야 하지만 이곳은 시내 한복판인 도심에서도 양궁을 즐길 수 있어 좋다. 또 실내이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양궁을 체험할 수 있다. 카페 이용 가격은 화살 30발에 1만 원, 1시간 지유 이용에 1만5000원이다. 온종일 양궁을 하고 싶다면 평일 기준 3만5000원을 지불하면 된다. ‘애로우팩토리’는 연중무휴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동우 사장은 “시작과 끝나는 시간은 사장 마음대로”라며 웃으며 말한다. 사장님이 먼저 안전이 중요함을 인식시킨 후, 직원이 직접 안전장비를 꼼꼼하게 채워준다. 그리고 활을 넣는 화살집은 허리에 채우고 손가락에는 가죽으로 된 보호대를 착용한다. 활의 무게는 생각한 만큼 꽤 무거웠다. 그냥 드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목표물을 겨냥하기 위해 계속 들고 버텨야 할 때는 팔에 경련이 일어나는 듯 떨렸다. 화살을 먼저 다 쐈다고 해서 표적지에 박혀있는 화살을 가지러 갈 수는 없다. 5개 사로가 모두 끝나고 활을 제자리에 안전하게 놓아둔 후 동시에 사선으로 걸어 나가 화살을 회수해야 한다. 약간의 연습 후 본격적으로 대결을 펼쳤다. 12발 사격의 경험을 생각하니 자신감이 붙었다. 한 발 한 발, 혼신의 노력을 하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이게 웬일인가? 처음 사격할 때보다 훨씬 더 명중률이 높지 않았다. 과도하게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상단과 하단을 오가며 들쑥날쑥 맞는 화살. 약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잘 쏘겠다는 욕심이 화를 부른 결과가 된 셈이다. 잘 쏘겠다는 조바심이 스스로 사격을 망치고 말았다. 역시 심리적으로 흔들리면 화살은 미세한 영향을 받아 오히려 명중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사실을 새삼 깨다는 순간이었다. 양궁선수 출신인 이동우 사장은 “그냥 놀고 싶어서 양궁카페를 차렸다”고 웃으면서 말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지만, 차츰 찾는 사람이 늘어 전국 도심지에 7개의 지점이 생겨났다고 한다. 6월 중에는 서울 영등포지점이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양궁카페는 색다르고 재미도 있어 도심 속 이색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단순한 양궁체험이 아닌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시니어 기자로서 이런 이색 체험은 처음이었다. 사실 이런 체험장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찾았던 ‘애로우팩토리’는 깜짝 문화충격을 안겨 주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색 실내양궁카페 ‘애로우팩토리’, 멋진 놀이문화로 거듭나기를 기원하면서 체험을 마쳤다.
- 2018-05-2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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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도 사랑도 모두 잡은 스포츠 부부
- 이들을 회사원으로 따지자면… 사내 커플…? 동료에서 애인으로, 애인에서 부부로! 같은 일을 하기에 더욱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 함께 땀 흘리며 사랑을 키워온 스포츠 선수 부부를 알아봤다. 원정식 ♥ 윤진희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53kg급에서 값진 은메달의 성적을 거둔 윤진희(33) 선수. 시상대에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가 8년 만에 복귀해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기에는 그의 남편의 권유와 응원이 한몫했다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다 무릎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겪은 원정식(29) 선수는 두 딸을 낳아 기르고 있는 윤진희 선수에게 “우리 같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최정상까지 올라가 보지 않을래?”라며 다시 바벨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 남편은 부상을 이겨내야 했고 부인은 오랜 공백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낮엔 서로 코치 역할을 해주고 밤엔 격려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같은 종목을 하는 부부로서 가지는 장단점은 무엇일까? 윤진희 선수는 “서로 힘든 점을 이해할 수 있고 조언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다. 반면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운동할 땐 어쩔 수 없이 제일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줘야 해 안 좋다”고 말했다. 안재형 ♥ 자오즈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탁구 남자 단체전 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남자 복식에서 동메달을 따며 이름을 떨쳤던 안재형(54)과 중국의 탁구선수 자오즈민(56)의 결혼 소식은 1989년 큰 화제로 떠올랐다. 특히 그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한국과 중국 간의 국제결혼이란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둘의 첫 만남은 1984년 파키스탄에서 열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뤄졌다. 서로를 알게 된 후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비밀연애를 이어나갔다는데! 중간에 둘 사이를 폭로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몇 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지만 1989년 스웨덴 스톡홀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혼인신고를 마침으로써 법적 부부가 됐다. 아들 안병훈 씨는 현재 PGA투어(미국프로골프), 유러피언투어에서 골프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김동문 ♥ 라경민 적에서 동반자가 된 커플도 있다. 바로 한국 배드민턴을 대표하는 최강 혼합복식조 김동문(44)-라경민(43) 선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만난 박주봉-라경민 조와 김동문-길영아 조. 당시 사람들은 박주봉-라경민 선수의 우승을 점쳤지만 김동문-길영아 조가 역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후에 박주봉 선수는 “김동문 선수가 아내 될 사람한테 엄청 공격을 퍼붓더라”며 그날의 경기를 회상했다.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박주봉, 길영아 선수가 은퇴하면서 김동문, 라경민 선수는 자연스럽게 혼합복식 파트너가 되었고 14개 대회 연속 우승, 국제대회 7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김동문 선수는 “같은 팀이 되어 운동을 하다 보니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서로 의지하다 애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2003년에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당시 김동문의 절친이자 룸메이트였던 하태권 선수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비밀리에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화 중 하나로 김중수 대표팀 감독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두 사람이 진짜 연인관계가 되면 조직력이 더 좋아질까 싶어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줬지만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남녀관계는 인력으로 안 되는 것 같다”며 포기했다고 한다. 현재 김동문 선수는 원광대학교 교수로, 라경민 선수는 배드민턴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 중이다. 공병민 ♥ 이신혜 선수촌에서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촬영을? 이 특별한 웨딩 사진의 주인공은 레슬링 국가대표 부부 공병민(27)-이신혜(26) 선수다. 부산체육고등학교 레슬링부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고교 시절부터 연애를 시작해 2014년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일명 ‘쫄쫄이’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신혜 선수는 “처음에는 너무 과격해 보일까봐 걱정했지만 레슬링 부부로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마침 남편도 같은 생각이라 진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결혼 전에는 서로를 응원하면 ‘자기 운동은 열심히 하지 않고 연애만 한다’는 안 좋은 시선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누구보다 남편을 열심히 응원한다는 그녀다. 국가대표 선수인 두 부부에게 선수촌은 그야말로 신혼집과도 같은 곳. 이신혜 선수가 꼽은 태릉선수촌 베스트 데이트 장소는 바로 크로스컨트리 연습장! 산악코스와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어 연습시간이 아닐 땐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저녁의 크로스컨트리 연습장은 데이트하기에 아주 딱이라고.
- 2018-05-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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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맞춰서 이리저리 흔들어보세요! 라인댄스연합동아리
- 신나는 올드팝과 함께 즐거운 춤사위가 봄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도 모르게 흔들어댈 수밖에 없는 마력(魔力)에 빠지는 순간! 길가를 지나는 사람도, 서서 구경하는 사람도 손끝, 발끝, 엉덩이, 어깨, 허리를 도무지 주체하지 못한다. 힘찬 함성과 웃음소리의 발원? 바로 라인댄스! 라인댄스! 날씨가 흐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서울지하철 3호선 매봉역에서 내려 양재천까지 걷는데 하늘색이 신경 쓰였다. 꽃눈이 소복하게 쌓였던 4월 어느 날, 양재천 벚꽃길에서 시니어를 주축으로 한 댄스 연합팀이 라인댄스 공연을 한다기에 찾아갔다. 한국댄스스포츠협회 라인댄스분과 이미경 이사를 중심으로 모인 연합팀으로 강남시니어플라자, 의왕국민체육센터와 라인댄스 지도자 동아리 등이 한데 어울렸다. 이미경 이사는 라인댄스를 알리는 것과 함께 춤을 추고 배우는 제자들과 시니어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다양한 무대를 찾아 공연 기회를 잡는다고. 라인댄스란 말 그대로 사람들이 줄을 맞춰 같은 방향을 향해 추는 춤이다.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보시라.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배우 김수로의 꼭짓점 댄스가 기억나는가? 여러 명이 줄을 서서 사방을 돌아가며 추는 군무가 라인댄스라고 생각하면 쉽다. 춤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동작을 함께하는 춤이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이날은 20여 명의 라인댄서들이 모여 올드팝은 물론 트로트 가락에 몸을 맡기면서 멋진 무대를 선사했다. 젊음이 넘치는 춤사위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아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박수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웨스턴부츠에 카우보이 조끼를 입고 등장한 강남시니어플라자의 시니어 댄서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50대 70대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세련된 율동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함께 만드는 기분 좋은 에너지 라인댄스는 오래전부터 미국의 카우보이들이 즐기던 춤의 한 방식이다. 율동만 같으면 되기 때문에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게 큰 장점이라고 이미경 이사는 말한다. “카우보이들이 술집에서 한잔 먹고 다 같이 포크댄스처럼 췄던 게 라인댄스의 시작이에요. 지금은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라인댄스로 엮을 수 있어요. 스포츠댄스, 모던댄스, 삼바, 맘보, 힙합, 펑키, 재즈 모든 음악이 라인댄스로 가능해요.” 시니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이 소화해낼 수 있을 만큼만 안무를 짜서 보급하기 때문이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제대로 만든 춤을 추니 성취감에 협동심은 배가된다. 좋은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지는 이유가 따로 있겠는가. 춤을 추는 댄서들의 얼굴이 웃음꽃으로 만발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춤을 춥시다! 이미경 이사는 라인댄스를 한국에 들여온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수로의 꼭짓점 댄스가 인기가 있었지만 월드컵 특수에 맞물려 이벤트로 끝났다. 우연이었을까. 2002년 이후 미국에서 라인댄스를 추는 이들이 늘더니 몇 년 지나지 않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야 말았다. 미국 전역으로 라인댄스가 퍼져나가던 시절, 마침 이미경 이사도 라인댄스를 접할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사람이 춤이라니. 하지만 라인댄스는 달랐다. 지금의 삶이 춤과 함께하는 인생으로 바뀐 걸 보면 말이다. “집안 분위기도 그랬고 저는 정서적으로 춤과 무관한 삶을 살았어요.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정말 우연한 기회에 라인댄스를 알게 됐어요. 그때가 2005년 무렵이었는데 미국에서 라인댄스 붐이 일었어요. 그때 제가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열심히 배우고 알아가다 보니 미국 YMCA에서 강의도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2008년도에 한국에 왔는데 라인댄스를 아는 사람들이 정말 없더라고요. 남녀노소에게 이 좋은 춤을 알리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요즘 시니어 사이에서는 라인댄스가 제대로 인기예요. 문화센터 대기자도 많고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라인댄스를 배우고 건강해지셨으면 좋겠어요.” 화려한 의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남녀 구분은 더더군다나 없다.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의 정서와 공감대를 맞춰 춤을 춘다면 라인댄스 아래에서 우리 모두 나이를 잊은 그대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mini interview 힘든 일을 잊게 해줘요! 방인순(69) 학교 졸업한 뒤 가정생활밖에 안 했어요. 어려서는 한국무용을 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내 나이에 맞는 운동이 뭐 없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과격한 건 할 수가 없잖아요. 문화센터에 기웃거리다 라인댄스가 저랑 굉장히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건 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들 할 수 있는 그런 춤이더라고요. 한 시간, 두 시간을 해도 관절에 무리가 없어요. 우리 나이에 가장 적합한 운동인 거 같아요. 음악 한 곡 분량이 보통 3분 내지 4분이잖아요. 간결한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데 전혀 힘들지 않아요. 아직 라인댄스를 모르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당연히 친구들에게도 많이 전파를 했어요. 줄을 만들어서 같이 신나게 추면 돼요. 최근에 집에 힘든 일이 좀 있어서 쉬다 나왔는데 진짜 활력소더라고요. 춤을 추다 보면 힘든 일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라인댄스 매력에 푸욱~ 박난규(67) 은퇴하고 나서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올드팝을 배우고 있었는데 같은 반 회원이 라인댄스가 좋다고 해서 하게 됐어요. 운동도 되고 아주 좋은 거 같아요. 배운 지 2년 반 정도 됐는데 아직 병아리 수준입니다. 8~9년 되신 분들도 있거든요. 사실 저는 학교 다닐 때 탁구선수였어요. 춤은 춰본 적이 없어 걱정했는데 선생님도 친절하시고 올드팝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3개월 배우고 난 뒤에 두 번째 등록을 했는데 선생님이 강남시니어플라자 개관공연을 한다고 공연팀을 만들자 해서 참여했어요. 라인댄스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좋은 춤 같아요. 삶의 활력이 된다고나 할까요? 저는 라인댄스가 여자와 남자가 붙잡고 추는 춤이 아니어서 좋은 거 같아요. 제가 사실 땀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 같이 맞대고 추는 춤은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제게는 라인댄스가 딱 취향에 맞고 좋은 거 같습니다. 아주 깨끗해요.
- 2018-05-04 0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