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볼 슈퍼스타, 윤경신

기사입력 2018-06-26 08:43 기사수정 2018-06-26 08:43

[스포츠 스타]

1995년, 핸드볼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최초로 동양인 선수가 등장했다. 13년 뒤 그는 독일인들이 핸드볼의 신이라 칭송하는 영웅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과 동고동락한 윤경신(46) 감독을 만났다.

▲두산베어스 핸드볼팀 윤경신 감독(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두산베어스 핸드볼팀 윤경신 감독(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의 오전 훈련이 한창인 의정부종합운동장, 그곳에서 윤경신 감독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m가 넘는 키 덕분에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옆에 서니 마치 개미가 된 기분이랄까. 앉으면 괜찮을까 싶어 서둘러 카페를 찾았다. 웬걸… 앉아서도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아버지 181cm, 어머니 170cm, 누나 174cm, 남동생이 194cm이니까 가족이 다 크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저희 가족을 보면 흠칫 놀라곤 해요.”

그는 203cm로 가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중학교 때부터 키가 빠르게 크기 시작했는데 2학년 땐 3주 만에 11cm가 자라 거인병을 의심했을 정도라고.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90cm만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큰 키의 장점이요? 별로 없어요. 공기가 맑나?(웃음) 오히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불편하고 맞는 옷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하죠. 그래서 어릴 땐 큰 키가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핸드볼 선수인 그에게 큰 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장점이었다. 2m 3cm 장신이 꽂아 내리는 시속 120km의 속사포를 막아낼 사람은 없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득점왕,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며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핸드볼 정상에 오르다

우리나라 3대 스포츠가 축구, 야구, 농구라면 유럽에선 핸드볼이 그중 하나다. 특히 독일의 핸드볼 분데스리가는 전 세계 핸드볼 리그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1부 리그 18구단, 2부 리그 20구단 등 남녀 1, 2부를 통틀어 60여 개가 넘는 팀과 시합할 때마다 경기장을 꽉 채우는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그 인기를 증명해준다. 1995년, 핸드볼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인 분데스리가에 윤경신이 진출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성적이 좋다, 전통 있는 팀이다 해서 들어갔죠. 근데 가서 보니까 성적이 밑바닥이더라고요. 그 당시 16구단 중에서 13~14위를 다투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들어간 굼머스바흐 핸드볼팀은 1부 리그에 겨우 발을 걸치고 있던 최하위 팀 중 하나였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뻔했던 굼머스바흐를 살려낸 주인공이 바로 윤경신. 그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파워풀한 공격을 앞세워 굼머스바흐를 3위의 막강 팀으로 만들었다. 유럽 선수들 가운데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한국에서 핸드볼을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무기였어요. 탄탄한 기본기와 경기 기술을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죠. 유럽 선수들보다 뒤처지는 웨이트 부분은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보완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몸싸움에서 항상 밀려 나가떨어지곤 했거든요. 동료들이 오죽했으면 절 북한 괴뢰군이라고 불렀겠어요.(웃음)”

그는 첫 시즌이던 1996-1997시즌부터 2001-2002시즌까지 연속 여섯 시즌 득점왕, 다시 2003-2004시즌과 2006-2007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역대 분데스리가 최다 골을 기록했다. 그중 2000-2001시즌엔 324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유일한 300골 이상의 기록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2002-2003시즌 득점왕을 놓친 이유가 유럽 선수들이 동양인에게 계속 득점왕을 내주는 게 자존심 상해서 한 선수에게 7m 드로우를 몰아줘 득점왕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독일에 갔을 땐 텃세성 파울이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 마늘 냄새가 난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 고정관념을 깨주기 위해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마늘이 들어간 불고기랑 잡채를 해주셨거든요. 애들이 밥을 다 먹으면 제 역할은 술 게임을 알려주는 거였어요. 독일엔 술 게임 문화가 없다 보니 ‘369’나 ‘007빵’ 같은 걸 가르쳐주면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술 게임을 하면서 서로 친해졌던 것 같아요.”

▲두산베어스 핸드볼팀 윤경신 감독(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두산베어스 핸드볼팀 윤경신 감독(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제2의 고향, 독일과의 작별

2006년 윤경신은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는 굼머스바흐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굼머스바흐의 구단주가 바뀌면서 그의 연봉을 삭감하는 등 부당한 대우가 많았다는 것.

“이적할 땐 배신감을 느껴서 번호도 7번에서 77번으로 바꿨어요. 그 당시엔 21번 아래 번호 선수가 주축을 이뤘는데 제가 높은 숫자로 바꾼 이후엔 다들 저를 따라 하더라고요. 나 때문에 유행한 게 맞나…?(웃음)”

2008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서 가진 마지막 경기에서 공교롭게도 함부르크와 굼머스바흐 두 팀이 맞붙었다. 걱정과는 달리 굼머스마흐 팬들도 그의 마지막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함부르크가 두 골 차로 이겼어요. 굼머스바흐를 상대로 제가 여덟 골인가 넣었죠. 유럽 사람들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이 사태를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굼머스바흐 팬들이 마지막이라고 예우를 많이 해준 것 같아요. 끝날 때 박수도 쳐주고 북도 쳐주고. 특히 대형 유니폼을 만들어서 작별인사해주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독일에서 윤경신의 인기는 ‘한국은 몰라도 윤경신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아직도 ‘핸드볼의 신’, ‘득점기계’, ‘구기종목의 전설’이라는 연관검색어들이 뜬다. 문득 그도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는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는 거 좋아해요.(웃음) 사실 안 좋은 기사가 있으면 어떡하나 더 걱정하는 편이죠.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기수로 섰는데 하필 태극기가 바람에 뒤집힌 순간에 찍힌 사진이 뉴스로 나갔더라고요. 아휴… 욕 엄청나게 먹었죠. 그래도 종종 제 이름 검색해보고 새로운 기사 나오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핸드볼 선수에서 감독으로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은 지금까지 2014년을 제외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강팀이다. 윤경신 감독은 지난 2013년, 두산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임 첫해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줬다.

“처음엔 두산이 날 감독으로? 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승승장구하는 팀인데 과연 내가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컸죠. 한편으론 ‘스타플레이어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인 2014년 지금은 해체한 웰컴론 코로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 없는 두산에게 준우승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첫해에 우승하니까 나태해진 거죠. ‘아 이제 됐어, 이렇게 하면 2년 차에도 우승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만했던 게 결국 패배로 이어졌어요. 그래도 한 번 넘어져봤기 때문에 3년 차, 4년 차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경신 감독은 우승의 비결로 선수들과의 소통을 꼽았다. 비시즌에는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술도 마시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핸드볼과 함께한 지 어언 30여 년.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아직도 핸드볼이 좋을까.

“중간중간 농구해라, 배구해라 유혹이 많았었는데 핸드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 제 자신을 칭찬해요. 핸드볼을 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명성과 명예를 얻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을 했지만, 정말이지 매 순간 행복했어요.”

다가오는 11월에 국내 핸드볼의 최강자를 가리는 핸드볼코리아리그가 열린다. 경기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윤경신, 그의 다섯 번째 우승 도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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