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이 디지털 카메라나 DSLR 못지않게 발달하고 있다. 특히 카메라의 핵심인 렌즈에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많은 투자를 하며 트리플(3개), 쿼드(4개), 펜타(5개) 렌즈까지 출시되고 있다. 일반 카메라보다 휴대가 편리하고, 작동도 어렵지 않을 뿐더러 다양한 앱과 기술까지 접목 가능한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제2직업으로 ‘스마트폰 사진작가’를 꿈꾸고 있다면 김유석 사진작가의 조언에 귀기울여보자.
도움말 김유석 사진작가·결정적순간 대표·페이스북 사진에 관하여 총괄운영자
“스마트폰으로도 사진작가에 도전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유석 사진작가는 “이미 그 벽이 허물어진 지는 오래다”라고 일축했다. 그의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스마트폰의 장점이 무수히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카메라의 단점은 무엇일까? 김 작가는 “렌즈가 너무 작고 조리개가 없다는 게 전문가로서 느끼는 최대 단점”이라며 “조리개가 없어 좁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하기 때문에 빛이 풍부하지 않거나 어두운 곳에서 촬영했을 때는 결과물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물론 다양한 앱을 사용하면 개선 효과를 볼 수 있지만, 화질이 저하되거나 파일 크기가 작아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배터리 소모가 크고 셔터 음이 크게 나는 것도 불편한 점이다. 이에 무음촬영 앱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자칫 초상권 및 사생활 침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구형 스마트폰으로도 작품사진 문제없다
김 작가는 현재 촬영용으로 ‘아이폰6S+’를 사용 중이다. 2015년에 출시된 제품이지만 성능이 우수해 제법 쓸 만하다고. 최근에 나온 ‘아이폰XS’에는 앞서 언급한 조리개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촬영 후 조리개 심도를 조절하는 기능이 추가됐다. 촬영 전 조절이 되는 건 아니지만 후반 작업으로라도 조리개 조절이 되는, 제대로 된 스마트폰이 나온 것은 스마트폰 촬영가들에겐 최고의 희소식이라고. 결국 웬만한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면 촬영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사진작가’가 되려면 뭘 준비해야 할까? 김 작가는 “특별한 과정이나 코스는 필요 없고, 노력과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은 소셜미디어가 최고의 배움터이자 선생님이다. 유튜브를 비롯해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500px 등에 올라오는 다양한 사진 관련 자료와 영상을 익히고, 일상의 매 순간을 사진에 접목하려 노력한다면 누구나 훌륭한 사진작가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하면서 “가끔 사진작가는 큰 카메라를 사용해야 한다는 오해를 하고 계신 분들을 만난다. 큰 카메라를 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스마트폰으로도 당당하게 세상을 담고 소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유석 작가의 스마트폰 사진 촬영 노하우
① 기술적 방법
아주 단순하다. 촬영 전 렌즈를 꼭 확인하라고 강조하고 싶다. 먼지와 지문이 묻어 있으면 사진이 흐리거나 탁하게 나온다. 렌즈를 항상 깨끗이 유지하는 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잘 찍는 첫 번째 방법이다. 렌즈에 스크래치가 생기지 않도록 면봉이나 안경 닦는 융 등을 이용해 살살 닦아주면 된다.
② 애플리케이션 활용
인물사진은 ‘SNOW’와 ‘B612’, 풍경사진은 ‘Analog’ 시리즈와 ‘PICA’, 음식사진은 ‘Foodie’ 앱이 유명하다. ‘Pixlr’, ‘snapseed’, ‘Quickshot’도 추천한다. 그러나 오히려 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노하우라고 생각한다. 좋은 원본을 찍고 그다음에 앱을 이용해 원하는 사진으로 만들면 좋다. 처음부터 앱에 의존하면 당장은 보기 좋지만 추후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 불편을 겪을 수 있다. 가급적 스마트폰에 내장된 기본 카메라를 사용하길 권한다.
③ 기타 장비 구입
스마트폰 촬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스마트폰 삼각대’, ‘OTG케이블’ 등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장비 구입 시에는, 업그레이드가 된 지 오래된 앱 관련 제품은 펌웨어가 맞지 않아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자신의 스마트폰에 적용이 되는 제품인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스마트폰 촬영 시 겪는 시니어 3대 애로사항
① 손떨림: 짐벌(gimbal, 수평유지 장치)을 사용하면 바로 해결된다. 단, 비용이 부담스럽고, 장치도 무거워 체력이 약할 경우 사용이 어려울 수도 있다.
② 노안: 일반적인 카메라 파인더엔 시력 조절기가 달려 있으나 스마트폰엔 없다. 줌인 기능을 이용해 확대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줌인으로 촬영하면 사진이 흔들리는 단점이 있다. 요즘엔 자동초점, 자동노출 기능이 뛰어나니 어느 정도 구도만 맞는다면, 스마트폰을 믿고 바로 촬영하는 게 좋다.
③ 체력: 스마트폰은 가볍다. 하지만 오래 들고 있으면 힘이 들 수 있다. 장시간 촬영을 하게 된다면 삼각대를 활용하자.
새해맞이 일출 사진, 잘 찍으려면?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일출과 일몰을 촬영하기에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꼭 바다가 아니더라도 도심 또는 산에 해가 떠오르거나 지는 아름다운 순간을 스마트폰에 담아보면 좋겠다. 이미 촬영해본 이들은 공감하겠지만 찍다 보면 일출과 일몰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따라서 충분히 연습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카메라 모드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면 자동으로 초점과 노출이 맞춰진다. 본인 마음에 드는 구도와 노출을 잡고 슈팅하면 된다. 때론 커다란 태양을 담고 싶을 것이다. 줌 기능을 활용했는데 흔들리거나 심한 노이즈가 발생하면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담기 어렵다. 이럴 땐 태양만 찍으려 하지 말고 태양 반대편 하늘로 시선을 돌려보자. 조금 전 보고 있던 노을빛 하늘이 아닌 아주 파란 하늘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4월 4일 MBN의 토크 프로인 황금알에 '고수'로 출연했다. 주제가 '인생에 정년은 없다'였다. '밑줄 쫙 긋고'란 말로 유명한 국어강사 서한샘 씨를 포함해 유명인사 총 아홉명 '고수'들이 녹화에 참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였다. 저녁 4시 반부터 녹화를 시작해서 밤 9시 반에 끝났다. 저녁까지 굶으며 녹화했는데 어찌나 재밌는지 몰랐다. 녹화 내내 즐거웠고 기운이 펄펄 났다.
'하루를 살아도 재미있게’
이 말은 오랫동안 추구해온 내 삶의 모토이다. 자식들을 다 키웠으니 이젠 내 시간이니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하며 즐기며 살면 된다. 그래서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교사 시절부터 퇴근 후 인근 대학교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인 왈츠를 수강했고, 주말에는 상경하여 압구정동에서 놀았다. 그리하여 MBN에서 고수로 출연했던 당시 내 콘셉트는 압구정 날라리였다. 금요일에는 2번 출구로 나가서 클래식 음악감상실 무지크 바움에 가서 오페라 감상을 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압구정역 4번 출구에 있는 탱고 동호회 '땅게리아'에 가서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웠다. 운동 차원에서 왈츠와 탱고를 춘 것이다. 음악에 맞춰서 한 시간 춤을 추다 보면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이 되고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니 마음 또한 힐링됐다. 다른 시니어에게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싶다.
시니어 미디어 일인자를 꿈꾼다
퇴직 후 제일 불행한 사람은 집에 우두커니 있는 사람이다. 일본의 통계에 의하면 첫 번째 행복한 사람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고, 두 번째 행복한 사람이 취미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세 번째로 행복하다고 했다. 전반생인 퇴직 전의 삶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기간이 후반생인 퇴직 후의 삶이다. 요즘 트렌드인 일인 미디어의 주역을 꿈꾸며 올해는 한국방송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하고 있다. 시니어도 하고 싶은 일을 차례차례 다 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다 보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 모르는 것을 아는 기쁨이 크니 그 과정을 그냥 즐기면 된다. 공부하고 글쓰기를 하며 책을 읽는 것이 지금 나의 일상이다.
시니어 생활 이렇게 하자
즐기자 삶은 즐기는 것이다. 부부가 같이 왈츠와 탱고를 추자. 서로 교감하며 춤추는 동안 기분은 좋아지고 충분한 운동이 된다. 더불어 심드렁하던 부부간의 애정도 높아진다.
공부하자 우리나라는 교육인프라가 너무 잘돼있다. 지자체의 프로그램도 우수한 콘텐츠가 많다. 한국방송대 강의 또한 훌륭하니 방송대에 편입해서 질좋은 강의를 들어보자.
하고 싶은 일을 이루자 글쓰기, 독서, 사진작가 등 그동안 하고 싶어도 전반생에서는 여건상 못했던 일들을 차근차근 시작해보자.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냥 그 과정을 즐긴다는 마음가짐이면 된다.
문화를 즐기자 오페라 감상, 음악회, 그림 전시회 등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생활을 골고루 누려보자. 진동하는 예술의 향기를 외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를 몇단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이 예술의 향기이다.
여행여건이 되면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삶과 색다른 풍광, 이색적인 문화를 체험해보자.
감사하자나는 내 마음의 주인이다. 더 갖고 싶은 욕망은 나를 불행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마음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비우고 덜어내며 하루하루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자.
김형석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학습하고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라고.
후반생의 삶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될 수 있으면 나누며 살자.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렇게도 살고 싶은 내일이다' 하루하루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흥미, 재미, 의미를 추구하며 살도록 하자.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됐다. 그 주인공은 코미디언 이홍렬. 대한민국 대표 코미디언 중 한 명인 그는 유튜브에 자신의 채널인 이홍렬TV를 직접 만들어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평생 입으로 살아온 노장 이홍렬(64)은 커피를 마시면서부터 인터뷰, 메이크업, 그리고 표지 촬영을 할 때까지 시종일관 떠들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올드보이 이홍렬에게 입이 살아 있는 그날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들어봤다.
방송가에서 쌓은 그의 업적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나이나 경력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소위 ‘올드보이’인 그는 새로운 무대로 가장 젊은 매체를 선택했고 이 도전은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어느새 구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하는 ‘이홍렬TV’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이홍렬을 만나자마자 물 만난 탈출구 유튜브 얘기부터 꺼냈다.
“이제 SNS를 거부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세상이 됐어요. 부부도 마주앉은 상태에서 사진을 보내고 공유하기도 하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제가 기계에 능해서라기보다는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거예요. 너무 즐겁고 재밌어요.”
이제 이홍렬TV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과거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던 코미디언 이홍렬은 자신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걸 SNS 시대에 맞춘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디지털을 잘 받아들여서 쓰면 삶의 윤활유가 된다며 디지털 예찬론을 폈다.
“예를 들어 부자지간, 모자지간, 모녀지간, 부녀지간이 싸웠다고 해봐요. 예전 같으면 아침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둘이 화해하려면 다시 보게 되는 시간까지 일단 기다려야 했죠. 그때까지 두 사람 다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문자로 ‘아빠가 미안했다’고 하면서 이모티콘을 사용해보세요. 딸도 같이 답해줄 거예요. 디지털을 잘 받아들이면 이렇게 금방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사실 SNS는 젊은 세대의 주된 소통 수단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내가 사기엔 아까운데 남에게 선물 주기엔 좋은 게 이모티콘이에요. 그래서 이모티콘은 조금 친해지려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쏴요. 상대가 그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덕분에 전 이모티콘 부자예요’ 하는 말도 듣고.”
이홍렬은 시니어 세대가 디지털을 받아들이면 가질 수 있는 장점으로 디지털만 아는 주니어들에게 디지털로 접근해 아날로그 감성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제기차기를 모르고 물수제비도 몰라요. 그걸 알려주면 너무 신나합니다. 디지털로 공유하고 아날로그적 공감으로 이끌어내면 더 큰 울림이 있거든요.”
‘고양이가 일인칭이 된다면?’
현재 이홍렬TV는 반려묘인 러시안 블루 고양이 풀벌이와의 추억과 강화에서의 일상을 다룬 두 개의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3년에 처음 계정을 만들어두고 그냥 놔뒀어요. 그런데 2년 전에 우리 고양이를 보는데, 털이 하얗게 쌓인 거예요. 털이 왜 저렇게 쌓였지? 하고 생각해보니 얘가 열다섯 살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쟤가 만약 일인칭이 된다면 할 얘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평소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게 취미였던 터라 그동안 얘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찍었어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갖고 제주도에 가서 2박 3일 동안 유튜브에 올릴 에피소드 40편을 정리했어요.”
이홍렬은 툭하면 동영상을 찍는다. 재미있어서다. 그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온 30년 동안의 모습을 담은 아날로그 사진과 VHS를 모두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들은 이홍렬TV의 자원이 되고 있다.
“유튜브가 올 시대를 준비했느냐? 아니에요. 다만 이것들이 다 짐이었거든. 보관이 힘들었어요. 사실 기록물을 정리하면 보물이고, 정리 안 하면 쓰레기죠. 그래서 다 정리한 거죠.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에 두 아들 기록, 사진, 동영상을 다 넣었어요.”
재미와 감동을 풀어주자
고양이 풀벌이는 올해 4월에 눈물이 나고 붓고 해서 진단을 하니 구강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여든네 살의 나이.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턱을 잘라내는 것, 두 번째는 방사선 치료, 세 번째는 가족이 호스피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홍렬은 세 번째를 선택했다. 고양이가 아프면 마취주사를 놔주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마시게끔 도와줬다. 얼른 안락사를 시키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리고 마침내 갈 때가 되었고, 풀벌이는 그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록한 풀벌이와의 추억들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다.
“풀벌이를 키운 것과 아이들 키운 것을 맞물려서 보여주는 형식이에요. 저 말고 다른 누가 편집을 못해요. 찾는 걸 저밖에 모르니. 죽을 지경이죠. 5분짜리 동영상 만들려면 대여섯 시간이 걸려요. 심하게 본 건 백 번도 봤고.”
이홍렬TV의 목표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감동이라도 보여주자, 안 찾아오면 어떠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무도 안 봐도 괜찮다, 풀벌이와의 추억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얘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유튜브는 독하거든. 타이틀 독한 거 쓰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솔직히 그런 걸 쓰라면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말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걸 하자. 늘 그럴 순 없어도, 재미가 없다 해도 메시지는 갖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입담 좋은 노장 개그맨이 유튜버로
유튜브가 독하다는 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수많은 자극적인 제목과 캡처 사진이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려고 그야말로 ‘난리를 치는’ 느낌이다. 실제 상당수의 인기 채널을 보면 먹방이라며 산더미 같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든지, 시시때때로 괴성을 지른다든지, 자극적인 춤과 억측과 욕설들을 쏟아내는 등 종종 기괴하고 무의미한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날것’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날것’을 찾는 것은 유튜브뿐만이 아니다. 요즘 공중파 방송들도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연예인의 가족을 구경하는 관찰형 예능이 그 증거다.
“요즘은 방송국에서 관찰 예능 기안을 올리지 않으면 통과가 안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걸 하면 당사자들은 힘들어져요. 집에 설치한 카메라 50대는 언젠가는 떠나게 되거든요. 그런 예능을 하게 되면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짚어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출연자들은 집 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재밌게 하려면 여자는 잔소리하게 만들고 남자는 무식해 보여야 하니까요. 그게 페이크(Fake) 다큐거든요. 진실 반 거짓 반으로 된.”
그래서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튜브에는 가족에게 허락받은 자료만 올린다. 요즘 올리는 자료는 아이들은 열 살까지, 아내는 옛날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정도다.
얼마 안 남은 시간, 사랑하자
이홍렬에게 디지털은 가족을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스물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란 존재를 알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20여 년밖에 같이 못 지낸 거예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할 날도 그렇게 주구장창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나이로 보면 앞으로 15년만 살아도 여든 살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다.
“내일이라도 제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다 나와요. 정말 사랑 많이 베풀어야 하고 집사람에게 잘해야 하죠. 누굴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예요.”
디지털로 남게 된 어머니 목소리
이홍렬은 군대 있을 때 받은 어머니의 편지 다섯 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철자법도 안 맞고 글자도 삐뚤빼뚤 썼다. 그러나 그 편지에선 소리가 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를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카세트테이프로 대화를 녹음했어요. 어머니는 대화 중에 ‘꿋꿋하게 살아야 해. 내가 너희들에게 빚 남긴 건 없으니까’라고 말해요. 지금은 그걸 CD로 구워서 내 동생 하나, 누나 하나, 나 하나 갖고 있어요.”
그는 대학교에서 이벤트 연출학과 겸임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너무나 반응이 좋았다. 그의 과제가 없었으면 어머니와의 추억이 없었을 뻔했다며 정말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게 다큐멘터리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강의를 할 때면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하라고 조언한다. 마침 디지털이 그것을 도울 수 있다. 다들 카메라는 의식해도 핸드폰은 의식하지 않으니, 살짝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어머니와 대화를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쉬워요”
“유튜브가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 딱 맞아요. 아이디어 발산할 데가 없었거든요.”
사실 이홍렬 나이가 되면 방송에서의 자리가 달라진다. 골든아워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으레 ‘요새 왜 안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 말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예인이라면 백 퍼센트 듣게 되는 말’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 든 연예인은 ‘송해 선생님도 아직 저렇게 하시는데 왜 안 보이느냐’라는 말도 듣는다.
“그렇게 묻는 분들은 제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죠. 좋아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겐 가슴 아픈 말이에요. 처음에는 견뎌요, 뭘 좀 해요, 어쩌구저쩌구하죠.(웃음)”
사실 그의 요즘 스케줄을 보면 놀랄 정도로 바쁘다. CJ헬로TV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강의와 공연, 기부 행사까지 빼곡하게 잡혀 있다. 한 달 평균 10회 정도 강의를 한다.
“나눔이란 것이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멈추는 게 어려워져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1998년부터 홍보대사를 해왔는데 20년째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 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이곳에서 활동한 제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게 해놓고 가고 싶은 꿈.(웃음)”
2005년부터 나눔 콘서트 ‘이홍렬의 락락(樂樂) 페스티벌’은 올해로 14회. 2007년부터는 기부 강의 프로그램 ‘이홍렬의 펀펀 도네이션’을 펼치고 있다. 특히 강의는 이홍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현재 128회, 모두 기부 강의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인 그는 2012년 부산 해운대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는 국토종단을 통해 모은 모금액으로 자전거를 마련해 남수단공화국에 전달했다. 자전거를 받은 남수단공화국의 한 아이가 “자전거를 줄 정도면 키가 클 줄 알았어요. 당신은 키가 작지만 마음이 크군요.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이홍렬을 에티오피아로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제가 강의를 하니까 후배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와요.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을 후원해주면 답례 없이 주례를 봐주겠노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혼한 부부가 28쌍이나 된다. 이홍렬은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6307명을 파병했는데 그중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목표가 또 추가됐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121쌍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536명의 후원자를 발굴하는 거예요.”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어느새 9300명에 달했다. ‘열심히 하면 뒤에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그의 지론을 뒷받침해주는 숫자다.
“이제 만 명 넘으면 감사인사를 올려야지. 유튜버 선배들이 2년은 되어야 뭐 하나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구력을 쌓다 보면 댓글에 감동하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힘들어도 그렇게 가자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점점 거칠어지는 인터넷 방송 조류를 역행하는 ‘따뜻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이홍렬이어서 가능한 이 실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독하고 무시무시한 것만이 아닌, 따뜻한 희망이 서려 있다는 걸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희소하고 과감한 도전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가 디지털로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의 따뜻한 세계가 독한 세상의 대안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해본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글로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 예전 어르신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씀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글을 쓴다는 것은 전문 작가 외에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편리한 글쓰기를 할 수 있다. 특히 독수리 타법에 난시와 노안까지 겹쳐 눈이 나쁜 시니어에게는 스마트폰이 구세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글을 쓰는 데 어떻게 유용하다는 걸까? 나이 들수록 눈은 침침해지고 타이핑 속도도 점점 떨어진다. 기억력도 자꾸 흐릿해진다. 또 메모를 해놓지 않으면 중요한 일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런 이유들로 시니어가 글쓰기에 도전했다가 포기하거나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나이에 관계없이 최신 스마트폰을 많이 쓴다. 아들딸들이 사줘서 100만 원이 넘는 비싼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니어도 꽤 있다. 그러나 그 비싼 스마트폰으로 전화통화나 카카오톡 정도만 하고 있다. 100만 원짜리를 겨우 3만 원짜리 전화기로 쓰고 있는 셈이다.
스마트폰으로 자료 수집, 타이핑 걱정도 끝!
몇 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으로 글을 쓴다면 별난 사람 취급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납득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의 기술적 도약은 크게 음성 인식 기술, 이미지 인식 기술, 그리고 문자를 읽어주는 기술 등 3가지를 토대로 이뤄져왔다. 더불어 클라우드 기술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할 때 스마트폰으로 즉시 일할 수 있는 스마트워킹 환경을 가능하게 해줬다.
책을 출판하려면 글을 써야 하고 글을 쓰려면 여러 가지 자료 수집을 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자료를 스마트폰이 대신 찾아준다. 필요한 자료를 찾아 달라 지시하면 바로 검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자료만 복사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글을 쓸 때 시니어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자판을 치는 일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에 음성 인식 기능이 있어 손쉽게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 또 녹음을 했을 때 일일이 딕테이션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 녹음과 동시에 바로 문서로 작성되는 애플리케이션이 생긴 덕분이다. 내 경우 이러한 기술을 활용했더니 글쓰기 관련 작업들이 3분의 1 정도로 단축되었다. 이제 번역이나 교정 등 책 출판 과정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작업을 다양한 무료 앱을 통해 대체할 수 있게 됐다. 기회비용절감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글쓰기 노하우
① 말로 해서 글쓰기 : 구글 문서 & 토크프리
이제는 말로도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구글 문서’를 이용하면 음성을 문자로 변환해주는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 사용 중인 메일(gmail) 계정으로 구글 문서를 연 뒤,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말을 하면 자동으로 음성이 문자로 변환된다. 간혹 잘못 인식되는 내용도 있어 교정 작업이 필요하지만, 글자를 하나하나 타이핑해서 글을 쓸 때보다 편리하고 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 작성한 구글 문서를 복사해 ‘토크프리’ 앱으로 옮겨 읽어주는 내용을 들어보며 수정할 부분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② 사진으로 글감 정리 : 오피스렌즈 & MS 원드라이브
‘오피스렌즈’는 신문, 잡지, 도서 등 각종 인쇄물이나 문자로 된 간판, 현수막 등 설치물을 사진으로 찍어 그 안의 내용을 문자화하는 앱이다. 즉, 이미지 속 문자를 인식하는 기술인데, 전환된 텍스트를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등으로 변환해 활용할 수 있어 유용하다. 문자 변환을 원하는 이미지를 찍으면 저장 버튼이 나온다. 글을 쓸 때는 대부분 MS워드를 활용하기 때문에 워드와 원드라이브를 선택해 저장하는 것이 좋다. 사진을 원드라이브에도 저장해놓으면 실수로 워드 파일이 삭제되어도 다시 찾아 문서화할 수 있다.
③ 번역, 교정까지 무료로 : 구글번역기 & 미러링
책 쓰기 자료로 외국어 번역물이 필요할 경우는 ‘구글번역기’를 이용하면 된다. 긴 문장의 번역에도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유 기능이 있어 ‘토크프리’ 앱 등으로도 전송이 가능하다. 오피스렌즈처럼 사진을 찍어 문자화한 뒤, 이를 다시 원하는 언어로 번역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리한 원고는 책으로 나오기 전 최종 교정 작업을 거쳐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작성한 문서를 확인하려면 화면이 작아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때 TV나 PC 모니터로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는 ‘미러링(mirroring)’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스마트 TV는 스마트 뷰(smart view) 기능을 사용하고, 일반 TV는 기기 뒷면 HDMI 단자에 연결하면 된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시니어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만 돌이켜봐도 책을 쓸 수 있는 자료가 무궁무진하다. 피터 드러커는 생전에 40여 권의 저서를 세상에 남겼는데 명저 대부분을 일흔이 넘어서 썼다. 책과 글쓰기는 해고도 없는 평생 직업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시니어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꿈으로만 품고 있던 책 쓰기.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 스마트폰으로 도전장을 내밀어보시라.
독수리타법에 난시와 노안으로 눈이 나빴던 나에게 구세주와 같았다. 스마트폰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예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책 집필 기간을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살려 ‘핸드폰 하나로 책과 글쓰기 도전’이라는 책을 냈고, 관련 강좌를 통해 널리 전파 중이다.
전대미문의 발견이었다. 대작이 전시장에 걸려도, 이번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예술품이라고 소리 높여 말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전문가 집단이 수군거렸다. 흔하디흔한 골동품이라며, 귀신 붙은 그림이라며 내다버리고 없애버린 민화. 곱게 단장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사람들은 바로 무장해제돼 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 깐깐한 개인의 취향에 몰입하며 수많은 민화와 미술품을 수집해온 김세종(金世鍾·62) 평창아트 대표를 만나봤다. 기나긴 세월, 호랑이 눈으로 발견한 가치가 담긴 예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예술계에 한 방 날리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기자(?)가 내 책에 대해 썼다는 거예요. 난생처음 책이라는 걸 썼는데 사람들이 알아줄지 몰랐어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책이 거의 다 나가 또 인쇄한다더군요. 글은 제가 다 썼어요. 이 내용을 쓸 사람이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거든요.”
김세종 대표의 등장을 1990년대 돌풍을 일으켰던 서태지와 견주어도 될까? 새바람처럼 천지개벽 같은 울림이 깊게 파고들었다. 7월 간행된 김세종 대표의 저서 ‘컬렉션의 맛’은 나오자마자 빠르게 각종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특히 김세종 대표가 ‘잘 알지 못하는 기자’라고 언급한 이는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출신인 정재숙 신임 문화재청장이었다. 문화계 통(通)으로 불리던 정재숙 청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보석 같은 예술을 발견했다는 뜻과도 같다. 김세종 대표가 실제로 민화 소장품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런 현상이 최근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7월 18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판타지아 조선’ 전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만도 50명 가까이 됐다. 그간 이름 높기로 유명한 예술가 전시회에 고작 열댓 명 기자가 와서 자리를 해도 성공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자회견장에 의자를 계속 내놓아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한 통신사 기자가 “현대화랑과 민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의도 아니냐”며 김세종 대표에게 물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은 김세종 대표의 민화에 대한 강한 집념을 알고 난 뒤 꾸준하게 지원하고 있는 숨은 조력자다. 예술의전당 전시 일주일 전 현대화랑에서는 ‘조선시대 꽃그림_민화, 현대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민화 전시전을 열어 김세종 대표 행보를 알리고 응원했다.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인자로 회자되는 박명자 회장이 합세했다니 기자의 얄궂은 질문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17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민화를 독립운동하듯 찾아 모아온 김세종 대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이 안 됐냐는 말이었죠. 정신 차리고 제대로 똑바로 보자. 외국 사람들은 조형으로 회화로 민화를 바라봐요. 우리는 맨날 귀신으로만 보려 한단 말이에요. 중국 책 찾아서 무슨 뜻이라고 해석하고요. 우리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을 몰라요. 민화는 순수 회화이고 예술이다. 세계 최고다. 기자들이 자꾸 말하라고 해서 평소에 말 잘 안 하는데 마이크 잡고 한 시간 이십 분은 떠든 것 같아요.(웃음)”
다음 날 이례적으로 ‘판타지아 조선’ 전시와 관련해 정성들여 쓴 기사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밤새워 기사를 썼다고 김세종 대표에게 전화했다. 책이 나오고 전시가 진행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는 김세종 대표는 물론이고 민화와 관련한 다양한 글과 사진이 쏟아졌다. 전시장을 다녀간 관람객들도 각종 SNS에 사진을 올렸다. 젊은 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나누었다. 김세종 대표는 그저 하루하루가 신기할 뿐이라고. 좋은 민화 작품을 찾아다니고 수집하는 사람에게 문화계가 큰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판타지아 조선’은 8월 말 예술의전당에서 전시 일정을 마무리하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10월 말까지 전시를 이어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안 그래도 예술의전당 전시 일정이 좀 짧게 느껴져 서운했는데 기회가 좋았죠. 9월, 10월 전국 여섯 곳에서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열렸습니다. 외국 작가들이 한국으로 많이 들어올 텐데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의 것을 세계에도 알릴 수 있으니 시기도 좋잖아요. 서울 전시 끝나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으로 넘어가서 순회 전시도 합니다. 민화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얻어지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김세종 대표가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 중 고수임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책이 나오고 문턱 높은 전시관 세 곳에 소장 작품을 걸 수 없다. 예리하고 넓은 식견으로 예술품을 바라보고 의미를 찾아가며 미술품을 대한 것만도 40년 세월이다.
“중학교 때 충남 보령에서 서울로 혼자 와 하숙을 했는데 춥고 가난해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문학평론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과 펄 벅 소설에 심취하다가 철학에 빠졌어요. 그러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미아리 산동네에서 하숙을 하면서도 인사동 서예학원에 찾아가 청소를 대신 해주며 무료로 붓글씨를 배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어린 김세종 대표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 힘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다. 그때 해방구가 바로 박물관이었고 미술관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양질의 그림과 다양한 작품을 꼼꼼히 보며 감각을 익혀갔다. 각 박물관을 천 번 이상은 갔다. 수년을 발품 팔아가며 예술품을 감상했더니 눈썰미가 생겨났다.
“서예를 배울 때였는데 학원에서 천재 화가로 불리는 소산(小山) 박대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나한테 들어와서 그림 공부해라’ 그러셔서 한 2년여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학교 들어갈 생각도 못했지. 돈도 없었어요.(웃음)”
군대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그림 그리는 재주는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막노동도 해보고 살아보려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나게 된 충무로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디자인이었다. 미적 감각도 있었고 서예도 배웠으니 승산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광고계에 뛰어들어 당시 아파트 지면 광고에서 방송 광고까지 손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광고기획을 했다. 업계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업체 대표들을 만나고 다녔던 시기가 20대 후반이었다. 쾌속 질주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취미에 눈뜨기 시작했다.
“정적인 걸 좋아해서 20대 중반부터 난초와 수석을 수집했어요. 오랜 시간 모았는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 문화였어요. 가만 보고 있자니 화분도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았고요. 몇 년 뒤 한두 개만 남기고 다 남들 나눠줬습니다.”
취미생활을 접은 뒤 그는 무턱대고 미술품 수집에 뛰어들었다. 사기를 당해 집 두 채 값을 날려 먹은 적도 있다고. 때마침 광고기획사 사무실 옆에 한국 고미술 상인 1세대이자 큰손 김재숭 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그때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미술품에 관한 공부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일본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책을 접하면서 수집에 대한 이해도 넓혀갔다.
“미적인 눈은 야나기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국립박물관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면서 오랜 세월 시각적 관점이 생겼고요. 소산 선생께 그림 수업을 듣고 서예도 배웠습니다. 서른 살 이후부터 김재숭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운 것이죠. 이후에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김환기 화백 작품 등을 수집했습니다.”
서른여섯에 잘하던 광고기획 일을 그만두고 IMF 때까지 미술관으로 가서 작품만 감상하며 살았다. 벌어놓은 돈은 잘도 없어지고 사라졌다. 마음치유를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공기 좋고 시원한 곳에 아지트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종로구 평창동에 들렀다가 지금의 갤러리 공간을 발견했다. 17년 전 작게 화랑 문을 열어 민화와 옹기 등을 모으고 미술과 관련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공력을 쌓았다.
“민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화랑을 열기 3년 전부터였어요. 민화가 너무너무 좋은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진 거야? 어렸을 때부터 수천 번 넘게 미술관, 박물관을 다녔는데 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민화는 내가 찾아서 수집해야겠다’ 마음먹고 갤러리를 하게 된 거죠. 나이 먹고 생일잔치하듯 소박하게 한번 해보자. 그렇게 미술품 수집을 하게 됐습니다.”
갤러리에는 종종 예술계 대가들이 찾아와 김세종 대표와 얘기를 나눈다.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에 앉아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현대화랑은 물론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사들이 김세종 대표가 추구하는 소위 ‘민화운동’의 지지자이고 후원자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김세종 대표의 진정성이 구심점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화도 그렇고, 지금 우리는 번지수 잘못 잡고 방황하고 있어요. 조형성, 아름다움, 예술성을 머리에 새기고 우리의 미를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품격높은 예술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요.”
또 다른 느낌의 에너지였다. 붓이 물 안에서 살랑, 찰랑. 물 묻은 붓이 물감을 만나면 생각에 잠긴다. 종이에 색 스밀 곳을 물색한다. 한 번, 두 번 종이 위에 붓이 오가면 색과 색이 만나고 교차한다. 파고, 풀고. 수백, 수천 번 고민의 흔적에 마침표를 찍으면 삶의 향기 드리운 수채화 한 점이 생명을 얻는다. 수채화 그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김재열 교수의 제자 모임 ‘수연회’를 찾아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각자의 시선으로 색감 물들이는 이들에게는 잔잔한 어울림과 따뜻함이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는 모임 ‘수연회’
“2004년쯤 수채화교실의 인터넷 카페를 만들려고 보니 대표할 이름이 없는 거예요. 마침 그때 KBS2 드라마 ‘겨울연가’ 인기가 일본에서 대단했어요. 일본에 있는 친구가 드라마 촬영 장소를 그려서 책을 만들자고 해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채화연가’라고 이름을 지었고 지금의 수연회가 됐습니다. ‘수채화를 사랑하는 모임’. 자연스럽게 예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지난 9월 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에서 열린 ‘2018 한·일 수연회 아카데미전’에서 밝은 얼굴의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홍익대학교에서 건축미술을 전공하고 1980년대 이름을 날렸던 주식회사 보루네오가구 임원으로 정년퇴임한 김재열 교수. 현재 홍익대학교 문화예술 평생교육원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교육 현장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솜씨를 세상에 알리고 보여주기 위해 매년 이렇게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년 전 업무차 만났던 일본인 친구 우에노 히로시(上野 博) 첼시아트아카데미 대표는 평생을 함께하는 그림 친구로 꾸준히 교류 중이다. 전시장 안에는 김재열 교수와 제자 45명, 우에노 대표와 제자 18명의 연합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한·일 양국 두 스승과 제자들의 교류 전시회는 올해로 7회째로 수채화 총 64점이 전시됐다. 내년에는 일본에서 한·일 연합 전시를 할 예정이다. ‘나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치러진 이번 전시회에서는 양국 제자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달리던 도시인, 느린 삶에 눈뜨다
수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직업군도 나이도 다양하다. 30대부터 80대까지 전·현직 교사, 퇴직 공직자, 주부, 작가, 제빵 경영인 등이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모였다.
“선긋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림을 잘 모르던 사람도 함께 그리다 보면 실력이 늘어요. 퇴직한 분들도 오십니다. 그림 한 번 그려본 적 없는 분도 있고요. 다들 용기내서 들어오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수채화 속에서 이들은 낭만을 즐기는 것일까?
“수채화가 다시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하더라도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끝내지 않아요. 느리게 여행하고 대상을 천천히 봅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겨오면 더 좋잖아요. 그게 바로 ‘어반스케치(urban sketch)’, 즉 스케치 활동을 하며 도시기행을 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생을 담는 작업이기에 시니어들에게 더 없이 다 필요하다고 김재열 교수는 말했다.
“시니어가 ‘고희연’ 같은 잔치 대신 전시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작년에 파킨슨병으로 더는 그림을 못 그리는 회원 한 분이 금혼식과 함께 전시회를 했어요. 도록을 만들면서 옛 사진도 넣어 만들었더니 좋아하더군요. 특히 전시회 도록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장담 못해요. 언제 아플지 모르잖아요. 그림과 기록은 남잖아요. 잔치 대신 전시회! 이런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화실에서 만난 수연회 사람들
김재열 교수의 화실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5명의 제자들이 모여 그림을 그린다. 전시회에서 그림 관람을 하고 방문한 화실에는 수연회원 4명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인상적인 바게트 그림을 출품한 제과점 사장 조화익 씨,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박진주 씨, 극작가 진윤영 씨, 13년째 김재열 교수를 사사하고 있다는 주부 이경자 씨가 넓은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올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째라는 조화익 씨는 서울 인사동과 안국동 근처에서 20년 넘게 제과점을 하면서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분들이 그림을 그려주면 받기도 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조금씩 키워왔다. 마음속에 떨어져 있던 겨자씨가 어느새 자라 나무가 된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과제빵 기술자로 일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올해 제가 일흔여덟 살인데 지금이 내 인생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기인 것 같아요.”
박진주(37) 씨는 홈스쿨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필라테스 사업을 하고 있다.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으로 2017 인천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한 박진주씨는 마무리가 있어서 수채화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유화는 계속 덧칠할 수 있어서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어요. 끝이 없죠. 그런데 수채화는 끝이 있어요. 상쾌하고 맑아서 좋아요. 색감도 좋고요.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을 1년 8개월 동안 그렸어요. 그림을 그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냥 덮고 가고 그랬는데 결국 해낸 거죠. 동기부여가 됐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냐 했는데 정말 열심히 그림을 팠어요. 수채화를 파고 푼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저는 풀지는 못하고 파기만 합니다. 교수님은 물로 물감 농도 조절해서 풀면서 그리시는데 저는 아직 멀었죠.”
이경자 씨는 20년 동안 그림을 그렸고 지금까지 상도 많이 받았다. 5년 정도 소묘를 하다가 수채화를 배우기 위해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이창포를 그리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는 마침 화실에 쌓아두었던 그림을 정리하다가 그림 한 점을 꺼내 보여줬다
“10년 넘게 묵혀놓았던 그림이에요. 2007년도 세계평화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건데 제목은 ‘역주’입니다. 그때는 역동적인 그림만 그렸어요.”
꽃그림만 그릴 줄 알았는데 다양한 모델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본다는 이경자 씨.
“SNS에 가수 손담비가 동묘구제시장에서 옷을 사 입고 포즈를 취한 걸 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드로잉하면 되겠다 싶어서 팔로잉하고 사진 캡처도 했습니다.”
진윤영 씨는 수채화를 그린 지 2년 됐다. 가끔 호랑이나 사자 그림을 그려 SNS에 올렸는데 사납거나 용맹스러워 보이지 않아 그림도 주인을 닮는구나 생각했다고. 그는 지인이 그려 달라던 강아지 두 마리 그림을 보여줬다. 맹수가 아니라 그런지 둥글둥글 귀여운 강아지 모습을 꽤 잘 그렸다.
“교수님이 제 연극작품을 좋아해서 때마다 많은 분을 모시고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그림에 관심이 있다 했더니 화실로 당장 오라고 하셨어요. 처음부터 무조건 그렸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습니다.”
mini interview
운명 같은 그림, 제자들과 나눕니다 수연회 지도교수 김재열
재능에 칭찬을 더한 삶을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교실 뒤에 붙은 게 계기였죠.”
형이랑 같이 그려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우수작에 뽑혔다. 그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김 교수는 입소문이 날 정도로 미술 영재로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화부장을 줄곧 맡았다고 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 김재열 교수는 산업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공고라 대학 진학이 멀어지나 싶었는데 때마침 미술반이 생겼다. 고교시절에도 경북 도내에 미술과 관련한 상은 다 휩쓸었다. 그림이 좋았지만 예술을 하면 어렵게 살게 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
“그때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가 있다며 한 선배가 얘기해줬어요. 그림에 디자인도 배울 수 있다면서요.”
홍대에서 열렸던 미술 실기대회 입선 경력도 있고 그림에 자신 있었던 김 교수는 무리없이 미대 명문인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건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ROTC 장교로 군에 있을 때도요. 사단 내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대회에서 1등을 해서 휴가도 나가고 진급도 빨랐죠. 군 제대 후에 보루네오가구에 입사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규모 가구공장이 인천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때 평생의 그림 친구인 우에노 씨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평생 친구를 알아보다
“우에노 선생이 우리 가구공장에 견학을 왔어요. 1986년, 32년 전에요. 우에노 씨는 공장장이면서 디자이너였습니다. 저는 회사의 디자인개발 소장이었고요. 그때 제가 불고기 쌈밥을 좋아해서 식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의 쌈 먹는 방법을 설명해줬습니다. 만났던 첫날 언젠가 함께 미술 전시를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6년 만에 그 약속을 서로 지켰죠.”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우에노 씨는 51세에 회사를 관두고 다음해 영국 첼시로 유학을 떠났다.
“우에노 씨가 영국에서 유학할 때 저도 그를 만나기 위해 영국에 갔습니다. 그때 같이 도시를 다니면서 스케치도 하고 말이죠. 1년 3개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에노 씨는 책도 내고 수채화를 가르치는 미술 아카데미를 개원했습니다. 저는 아직 회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저도 정년퇴임하고 나서 그림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실도 만들고 본격적으로 교류하고 말이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멘토입니다.”
드로잉북과 함께 떠나는 여행
취재를 마칠 즈음 꼭 보여줄 게 있다면서 노트를 꺼내 들고 방에서 나왔다.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과 비행기 티켓, 글귀 등이 담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드로잉북이었다.
“기내에서 와인을 자주 사 마시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먹고 자고 관광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느낌은 담았으면 합니다.”
그는 기내 사무장이 준 감사편지도 잊지 않고 드로잉북에 붙여놓았다. 더 보고 싶어 방으로 따라 들어가니 크고 작은 드로잉북이 한가득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다.
“즐거우니까 싫어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붓 들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작년 7월 손웅익 동년기자와 함께 동행 취재를 했다. 공장지대에서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성수동 거리를 걸어 다니며 공간을 소개하는 지면이었다. 그날은 손웅익 동년기자가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나눴다. 40년 건축 전문가로, 전문 경영인으로 살다 은퇴한 지 1년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또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경희궁이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그곳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들어준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중·고등학교였으며, 해방 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의 옛 교정이 있던 자리다. 무시험고교입학제, 소위 ‘뺑뺑이 세대’로 불리며 명문 서울고에 입학한 58년 개띠 손웅익 동년기자가 고교 시절을 보낸 장소.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교정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가 대운동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희궁 뒤에도 작은 운동장이 더 있었어요. 나무들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인생 방향을 설정해준 운명의 장소로 꼽은 옛 서울고등학교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한 일도 많았다. 입학시험 관문 없이 명문고 대열에 무임승차한 자격미달 74년 고교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시험 쳐서 들어왔는데 저희는 아니잖아요. 선배들과 선생님들의 벽이 너무 높았어요.”
총동창회에 안 나오겠다는 졸업생도 많았다. 선배들 사이에서는 아예 74년 입학생을 후배로 인정하지 말자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고 한 10년 정도 됐을 때 총동문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었어요. ”
동문들 앞에 선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58년 개띠생을 후배 취급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름을 만들어 1회 졸업생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곳에 계신 선배님들 자식 중에 뺑뺑이로 서울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우리한테 대하듯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잠잠해지더라고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날 동문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 동문회지에 글로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후배 간 관계가 재정립됐고 지금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제가 공부했을 때가 제 인생 줄기의 큰 시작점인 것 같아서 이곳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경우는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학교 다닐 때 어린 마음에 반발심도 있었어요. 감성도 풍부할 때라 고목 주위에서 그림도 많이 그렸고요. 나중에 보니까 학교의 전통이나 정신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곳의 추억이 벌써 40년 전인데 지금까지 맥락을 꿰뚫고 있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 그 자리로 오고 싶었습니다.”
마침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도 옛 서울고가 내려다보이는 피어선 빌딩에 있었다. 은퇴하고 나서도 학교 주위는 친숙하기에 자주 찾는다. 시청역에서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을 걸어 커피 한 잔, 차 한 잔 하며 여유를 즐긴다. 경희궁 한 바퀴 돌고. 서울역사박물관도 구경하고 말이다.
척박한 서울살이를 이기다
경주에서 태어난 손웅익 동년기자는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성수동 카페거리 동행 취재 때 중랑천변 판자촌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비가 오면 집이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횃불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1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통장을 의무적으로 만들어서 적금을 붓도록 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냈다가 교우들 앞에서 선생님한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내 대학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한테 자주 민폐를 끼치면서 살았어요. 그야말로 빈대생활이었죠.(웃음)”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손웅익 동년기자는 미술대학 대신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택했다.
“미술 대신 선택한 건축이 저랑 잘 맞았어요. 건축은 조형물이고 예술품이지요. 미술을 선택하지 못했던 한을 건축에서 충분히 풀 수 있었으니까 제가 40년 가까이 건축을 했겠죠.”
건축과 졸업 후 돈을 잘 벌 수 있는 건설회사 대신 건축설계 사무실에 들어갔다. 건설회사의 3분의 1 수준인 월급을 받고 설계 사무실에 앉아 도면을 그렸다. 현장에서 공사하는 것보다 도면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였다.
“그때 건설회사로 간 친구들이 월급을 삼십만 원쯤 받을 때였어요. 설계 사무실은 십만 원이었고요. 그래도 나는 어쨌든 간에 도면이 좋았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요. 나중에 건축사가 돼 설계 사무실을 차려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설계 사무실을 연 이후 일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건설 열기 덕분에 설계사 또한 바빠졌다.
“결혼하고 1년 뒤에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서른한 살에 설계 사무실을 차렸어요. 정말 그때는 일도 많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죠. 미국에도 가고 이탈리아, 스위스 종주여행도 하고요. 당시 유럽 왕복 티켓 가격이 비쌌거든요. 1990년대 초반에는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건설 열기가 또 어마어마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사무실 규모도 커지고 집도 사고 정말 내 세상이었어요. 말도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30대 초반에 경제적으로 인생 역전했던 거죠.”
신나게 이야기가 흐를 때쯤 속도가 딱 끊기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이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 IMF 금융위기 얘기가 이어진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았어요. 내보내봐야 직원들이 갈 데도 없잖아요. 집 담보 잡히고 그냥 모든 걸 다 쏟아 붓고요. 이곳저곳에서 돈 빌려서 회사 사무실에 다 쓸어 넣었어요. 그 빚 갚는 데만 10년 걸렸어요. 경제적으로 제로인 상태에서 퇴직을 했습니다.”
10년을 준비한 은퇴, 퇴직 1년 차
작년 5월,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손웅익 동년기자. 부사장이라기에 넉넉해서 그만두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전 상황에 대해 듣고 나니 왜 그만뒀는지가 궁금했다. 회사에서 제안도 있었고 좀 더 은퇴를 늦출 수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계획대로 은퇴 날짜를 잡았다.
“제가 은퇴 준비만 10년 했습니다. 자격증도 따고, 책도 내고, ‘이 정도면 부딪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강의하고 글 쓰고, 건축 일을 평생 했으니까 또 건축과 관련해서 자문도 몇 개월 했고요.”
은퇴를 위해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심리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등 자격증도 땄다.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1년 여 게재했고, 동년기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우송정보대학교 리모델링 건축과 겸임교수로 임용돼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참 체질적으로 나랑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합니다.(웃음) 작년 5월에 수필작가로 등단했어요. 이외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림. 정말 그림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어서 삽화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고 그게 글하고 또 연결되잖아요.”
은퇴하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시간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출근시간은 늘 아침 7시에 맞춰져 있었다. 고교 시절에도, 설계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큰 조직에서 중역을 맡아 일할 때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 출근해서 데이터 정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고요. 퇴근도 항상 늦었어요. 문제는 내가 정말 쉬고 싶어도 강제로 출근해야 되잖아.”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자리를 내주어 출퇴근할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출근하다가 멈춰 설 수도 있고 어디론가 다른 길로 빠져서 내빼도 괜찮다. 사진 찍고, 산책하고,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도 많이 본다고 했다.
“좋잖아요. 생각도 하고. 하여튼 뭐 여러 가지로. 과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봐요. 글이나 그림 소재도 생각하고요. 그리고 길가다 사진도 찍어야죠. 바삐 가야 하는 사람들과 걸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 혼자 걷습니다.”
베이비부머가 주거문화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손웅익 동년기자가 1년 동안 유유자적 한가롭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업과 시니어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의견을 나누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 중이다. 문 닫은 식당과 빈 공간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베이비부머는 위로는 늙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아래로는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국민연금에 기대기도 어렵고 퇴직연금을 들어놓은 사람도 흔치 않고요. 재산을 분배하네 마네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줄이고 씀씀이도 줄여야 하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 그러니까 집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주거 공간의 평수를 줄이고 입주자가 함께 쓰는 공간을 늘려 조금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주거로 전환하자는 운동을 현재 손웅익 동년기자가 펴나가고 있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나면 덩그러니 부부만 남아 있으니 적당한 규모의 집에서 살고 남는 돈은 현금화해서 노후자금으로 돌리자는 의미다.
“내 공간은 최소화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활동도 하고 수익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시니어 카페라든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고. 이런 공동 주택이 마을화가 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러 혹은 빵을 맛보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10년 넘게 연구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로 혼란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을 골똘히 해보면 나쁘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다. 투자와 돈을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 집의 개념을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 혁신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액티브한 시너지를 기대한다
회사에 있으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심한지 그가 매진하는 일들이 많기도 하다. 삽화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에도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면 꼼꼼하게 글씨를 쓰기도 한다.
“그림을 하다 보니까. 어떤 곳에서 책을 내는데 삽화를 그려 달라는 제의도 있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SNS 활동도 열심히 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누려보겠다는 마음밖에 없다.
“아무 준비도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기대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이가 없다잖아요.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고 크고 작은 기업에서 일도 해보고 했는데 그때마다 제것도 아니고요. 그냥 열심히 살다 보니까 여기에 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핵심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관계요.”
시니어 세대로 접어들면서 좋은 점은 관계 정리에 의연해졌다는 것이다. 정리도 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도 만들 수 있다.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모이니 친해지기도 쉽고 다양한 경험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도 든다.
“굉장히 희망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요. 동년기자단도 멋진 시니어가 모인 모임이잖아요. 앞으로 동년기자 활동도 잘해야 할 텐데요.(웃음)”
경희궁 처마 아래서 손을 내밀어 비와 마주하던 손웅익 동년기자 모습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들었던 세상과 맞서던 추억 속 고교생 시절 자신과 만나 듯 손 위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1990년대 후반 IMF를 악으로 깡으로 견뎌야 했던 부모 세대에게 묻는다면 ‘평범했노라’ 회상하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넥타이를 매던 손놀림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어느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살아야만 했던 수많은 아버지 중 변용도 동년기자도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용도폐기’ 인생을 딛고 잇따른 ‘용도변경’ 요구에도 능숙 능란 살아온 인생. 세월 역경을 딛고 여유로운 귀촌생활에 도시생활 잘 섞어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푸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땅콩집에 산다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변용도 동년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사촌 부부와 마음이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대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 두 가구가 같이 사는 이른바 ‘땅콩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텃밭을 일궈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채소를 따먹고 집 주위 논밭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는 우렁이 알과 관련한 기사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온라인에 게재하며 귀촌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참새에게 모이도 가끔 준다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리는 귀촌생활이라니. 마침
8월호 커버스토리가 귀농·귀촌 이야기라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햇빛 잘 드는 텃밭에서는 상추, 오이, 가지, 파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집 안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내 이흥열 씨가 집에서 딴 부추로 만들었다며 부추전을 부쳐 내오신다.
“논에 가면 우렁이도 있고 오리도 봅니다. 가을이면 밤도 많이 떨어져요. 사실 이곳에는 안사람 때문에 왔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대신 아내가 제 매니저 역할을 종종 해줍니다. 지방 강의가 있을 때 운전을 해주기도 하고 주변 역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마중도 나오고 말이죠.”
‘좌절할 시간에 뭐든 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들이며 밭이며 마음 참 편안하게 해주는 곳에 사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하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닐까? 현재 변용도 동년기자의 직업은 전문강사다. 여가 설계와 생애 재설계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 등을 또래 시니어에게 가르친다.
“정년퇴임 후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취미생활이라든지 봉사활동, 학습 이런 것들에 관해 강연합니다.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요. 다행히 강의를 듣는 분들이 잘 호응해주셔서 강의시간이 즐겁습니다.”
뿐만 아니다. SBS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리포터로 시니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시니어 자격으로 노크할 수 있는 매체란 매체는 두루 섭렵했다. 글을 좋아하다 보니 저서도 출간했고 육십 넘어서부터는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연기에 관심이 생겨 연극무대에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미투 운동을 ‘춘향전’에 접목한 창극 ‘어화둥둥 아.우.성’에서 변사또 역으로 출연합니다. 50플러스영등포센터에 있는 연극 소모임 작품인데 저는 회원은 아니고 이름이 특이해서 뽑혔대요. 이래봬도 제가 고등학교 때와 군 시절에 연극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7월 30일 공연이고 10월에도 서울시청에서 공연한다는군요.”
말 그대로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살고 있는 이가 바로 변용도 동년기자다. 하지만 은퇴는 그의 생각보다 빨랐다.
“마흔일곱 살에 회사 그만뒀거든요. 쌍용화재 영남권 본부장이었는데 IMF 앞두고 하루아침에 해임됐습니다.”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보험 상품을 최초로 개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낚시보험, 골프보험 등 특색 있는 보험에서부터 가정종합보험, 해양시추보험 등을 개발했다. 텃새 심한 제주도권 본부장으로 지낼 때 만났던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변용도 동년기자가 제주에 떴다 하면 만나기를 청한다.
“회사에서 나오고 나서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청학동 산골에서 나고 자라다 대학교를 다녀야해서 서울로 왔고 졸업한 뒤로 회사에만 있었으니 제가 뭘 어떻게 했겠어요. 회사 나와서 처음으로 한 사업이 만화방이었습니다. 화정 L마트 옆에서 한 3년 했어요. 요즘 만화방이 유행이던데, 예전에 집에서 만화 보던 식대로 드러누워서 만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잘됐어요. 처제에게 인수하고 부대찌개 집을 한 1년 했습니다. 술도 팔다 보니 늦게 끝났습니다. 안사람 고생이 심했죠.”
힘에 부쳐 부대찌개 가게를 팔았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간 곳이 당시 호황을 누리던 생활정보지 회사 건물. 보직은 조경관리사였다.
“고양, 일산 이쪽에서 생활정보지가 상당히 잘됐습니다. 그 회사 건물에서 조경관리사를 뽑더라고요. 말이 좋아 조경관리사지 쓰레기도 치우고 허드렛일 다 했죠. 그때 월급이 40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가끔 강의할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던 양반이 대비전 마당쇠 했다’ 그래요.”
나무 좀 가꾸다 쓰레기 치우고, 단풍 치우고, 잔디도 깎았다.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도 기회라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한창 정육식당 바람이 불 때였어요. 생활정보지 회사가 500평 정도 잔디밭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다 정육식당 하면 딱 좋겠다 생각하고 회사에 건의를 했더니 그럼 저더러 점장을 하라더군요. 마당 쓸다가 대형 식당 점장이 된 거죠. 처음엔 젊은 사람 시키라면서 못하겠다고 고사했는데 그동안 제 얘기를 들었는지 믿고 맡기더라고요.”
마음에 안 차도 열심히 덤벼들었더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IMF 때는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도 해봤다. 정치인의 주례가 잠시 금지됐던 시절에는 예식장 전속 주례사도 했다.
“여하튼 돈 되는 일이라면 다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잘했든 못했든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쨌든 기회가 되면 그냥 한번 도전해보자고요. 규모가 작건 소소하건 해보면 뭐든 얻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를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안 해본 일이 거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제대로 인정받을 때까지 파고드는 근성은 타고난 것 같다. 가족을 위해 살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두 친구가 비슷한 시기에 죽었어요. 건강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한 명은 산에 갔다가, 한 명은 차를 몰고 가다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간 거야. 술도 안 먹고 건강관리도 잘했어요. 다른 친구는 100억대 자산가였고요.”
죽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날 허망하게 갈 수도 있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 권유로 ‘촌놈의 세상보기’라는 문패를 달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마침 있어 글 쓸 때마다 사진과 같이 올렸어요. 좀 더 잘 찍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두 친구가 죽고 난 뒤에 사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죠.”
점점 사진에 취미가 붙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하게 됐다. 일산동구청에서 하는 무료 사진교실이 있다기에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사진도 배웠다.
“때마침 첫째 아들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하겠다며 사두었던 카메라가 있었어요. 아이가 그 사업을 접으면서 카메라를 저에게 줬습니다.”
2010년 7월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공모전에 당선됐다. 스물여덟 번 도전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시니어 기자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고 블로그에서도 덤덤하게 인생 표현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방송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케이블TV 출연 뒤 KBS ‘아침마당’에 은퇴준비 전문강사 중 사진 분야 강사로 출연하며 인생에 큰 계기를 맞이했다. 진짜 다른 사람들 삶에 귀감이 되는 전문강사가 된 것이다.
“육십이 돼서 사진을 배우기 전까지는 먹고살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겼어요. 요즘은 아침이 되면 사진기를 들고 나갑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사진 찍어주는 봉사도 하고요.”
물론 변용도 동년기자의 사진 실력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도 빛을 발한다. 온라인에 게재하는 기사에 적절한 사진은 기본이고 다른 동년기자 취재에도 사진기자로 참여한다.
“2017년 1월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에 장영희 동년기자가 취재했을 때 제가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물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 3층은 개인 사진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최근 ‘한 달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써낸 자서전에서 자신을 청학빛그림학교 교장으로 소개한 바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죠. 영상도 배우고 싶고, 책도 3년에 한 권은 내고 싶어요. 무엇보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말이죠. 사진이 빛그림이잖아요.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이기도 하고요. 제 사진 전시회 제목도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였습니다. 저희 집 3층도 좋은 전시 공간이니 야외전시도 할 수 있겠죠. 두세 명은 이곳에서 충분히 합숙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침에 주변을 돌변서 산책도 하고요.”
훗날 때가 되면 아내 이흥열 씨와 함께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집의 규모를 땅콩하우스로 줄인 것도 훗날 여행을 하면서 살 계획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도 찍지만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도 하니 찾아가는 사진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사람하고도 오랫동안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강아지 때문에 못 가요. 아직은 챙겨줘야 하니까.”
집 안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이불 깔고 사는 반려견 헨리 때문에 아직은 계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함께 산 지 19년, 앞도 잘 못 보고 귀가 나빠져 잘 듣지도 못해 재롱도 부리지 않지만 가족이기에 늘 마음이 쓰인다.
‘용도변경’ 그리고 ‘다쓰가’
인터뷰를 마치고 변용도 동년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용어인 ‘용도변경’과 ‘다쓰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첫째 사자성어가 용도변경입니다. 후반생을 바쁘고 즐겁게 살자고 만든 말입니다. 60세에 제 삶을 용도변경했습니다. 사진이 그 출발점이었고요. 취미에 머물지 않고 영역을 확대해 강사로 방송인으로 사진강사로 저술로 활동하고 있죠. 현재 사진작가로 나름의 브랜드도 만들었고요. 포토스토리텔러, 제가 만든 세계 유일한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다쓰가’는 ‘다 쓰고 가자!’를 세 글자로 줄인 말입니다. 은혜를 되갚고 경험과 지혜, 재물을 다 쓰고 가는 것을 후반생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뭔가 물어보려 연락했던 오늘도, 여전히 바삐 살고 있는 변용도 동년기자. 그렇게 부지런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떠나 걷고 있다. 너무도 이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스민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찌는 듯한 한여름 더위, 잠시 땀을 식히며 읽기 좋은 신간을 소개한다.
본과 폰, 두 사람의 생활 (본, 폰 저ㆍ미래의창)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75만 명을 돌파하며 전 세계 네티즌의 워너비로 떠오른 한 60대 부부가 있다. 바로 본(bon)과 폰(pon)이다. 일본의 평범한 부부였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딸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한 장으로 화제가 됐다. 백발의 머리로 커플룩을 입고 데이트를 즐기는 노부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남편 본과 활발하고 다혈질인 아내 폰. 상반된 성격 탓에 종종 싸우기도 했지만, 남편이 은퇴한 뒤에야 비로소 둘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갖게 됐다는 두 사람이다. 결혼한 지 어언 37년 차, 함께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소중하다는 이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콩달콩한 일상을 공유한다. 네티즌이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들의 감각적인 커플 패션. 똑같은 디자인이 아닌, 비슷한 무늬와 소재의 옷을 적절하게 매치해 같은 듯 다른 시밀러룩을 선보인다. 책에는 평소 부부가 자주 착용하는 커플룩 아이템과 스타일링 비법, 쇼핑 노하우 등을 보기 쉽게 정리했다. 아울러 그동안 두 사람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람들에게 받아왔던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실었다. 커플룩에 도전해보고 싶은 시니어에게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지금이 내 인생의 골든 타임(이덕주 저ㆍ초록비책공방)
장수시대를 맞이해 이전의 노인 세대와는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가진 ‘신노년 세대’의 문화를 이야기한다. 나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도전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사례를 담았다. 아울러 은퇴 후의 시간을 ‘인생의 골든타임’으로 만드는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김석중 저ㆍ지택코리아)
유품 정리를 배우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간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는 유품의 의미와 한·일 노년의 삶. 유품 정리뿐만 아니라 고독사 문제를 비롯한 사회 현상, 문화생활 등에 대해 한국 베이비붐 세대와 일본 단카이 세대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프랑수아 아르마네 저ㆍ문학수첩)
‘당신이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가져갈 책 세 권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전 세계 유명 소설가, 시인, 극작가 등 196명이 내놓은 답변을 모았다. 개성 넘치는 작가들의 문체처럼 다양한 도서들과 더불어 책을 선정한 이유, 그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까지 엿볼 수 있다.
칵테일 도감(칵테일 15번지 외 공저ㆍ한뼘책방)
도쿄 긴자의 유명 바텐더들이 엄선한 228가지 칵테일 레시피를 담았다. 마티니, 모히토 등 역사가 깊고 잘 알려진 칵테일은 물론, 레인보우, 사케티니 등 독특하고 실험적인 칵테일도 소개한다. 생생한 사진과 아이콘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기 쉽게 구성했다.
도보여행은 조금 특별해야 한다. 많은 곳을 바쁘게 보는 것보다는 좀 더 느리고 여유로운 여행, 사람이 무조건 많은 관광지보다는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행, 단순히 사진만 찍고 돌아서기보다는 그 지역의 풍경과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시니어 전문 테마여행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링켄리브와 함께 준비했다. 천천히 길 위를 걸으며 문화와 예술,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일곱 색깔의 여행지, 시니어가 걷기 좋은 길이다.
스톡홀름 감라스탄 옛길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의 감라스탄 지역은 약 800년 전에 조성된 거리로 중세의 건축물과 왕실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느린 걸음으로 천년 세월을 견딘 돌길을 걷고 있으면 북유럽 고유의 정경이 그림 같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이라는 명성답게 감라스탄 주변으로 헬게안스홀멘 등 작은 섬들이 물 위에 떠 있다.
3대 피오르 트레킹
수만 년 동안 빙하가 조각한 장엄한 협곡을 ‘피오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특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오르가 많기로 유명한데, 이 중 대표적인 3대 피오르(시에라볼텐, 프레이케스톨렌, 트롤퉁가)를 등산하는 트레킹 코스는 살면서 꼭 한 번 걸어볼 만한 길이다. 걸음마다 진귀한 꽃이 꼬리를 물고, 등반 끝에는 마치 지구가 아닌 것 같은 피오르가 황홀하게 펼쳐진다.
코펜하겐 아트 스트리트
감라스탄이 북유럽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길이라면 코펜하겐 도심의 예술 거리는 북유럽 감각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감성과 소박하지만 값진 행복을 의미하는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는 바쁘게 살아온 한국의 시니어에게 삶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코펜하겐의 디자인센터, 세계적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의 공방, 가구 갤러리를 걷다 보면 북유럽 문화 예술 및 라이프스타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토스카나 사이프러스의 정경
프로방스가 예술가들이 흠모했던 곳이라면 전 세계 문인과 작가들이 찬사를 보낸 지역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다. 태양의 땅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따뜻한 햇살이 막힘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른 길 양옆으로 길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잘 익은 와인과 한없이 넓은 와이너리, 풍성한 올리브나무가 천국을 상상하게 한다.
남부 절경의 해안마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들어선 작은 마을들(소렌토, 아말피, 포시타노)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절경을 선물한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아찔한 절벽과 가슴 탁 트이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절벽 위에 아기자기하게 지은 마을들을 반나절씩 걷고 나면 카프리 해의 맑은 바람이 다정하게 땀을 식혀준다.
프로방스 작은 예술마을 길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파리를 떠올리지만 사실 수많은 예술가와 명사가 사랑하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지역은 따로 있다. 프랑스의 찬란하고 눈부신 남쪽 땅 프로방스. 고흐부터 피카소, 샤갈, 마티스, 세잔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감을 얻고 말년에 정착했던 곳이다. 아를, 액상프로방스, 생폴드방스, 그라스 등 작고 동화 같은 마을을 걷고 있으면 따뜻한 남프랑스의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삶의 영감은 더욱 풍성해진다.
기적의 알펜루트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알펜루트는 봄가을에 각기 다른 정경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오죽하면 기적의 알펜루트라 불릴까. 봄에는 자그마치 높이 22m의 설벽이 30km에 걸쳐 펼쳐지고, 가을에는 온갖 단풍이 세상을 가득 물들인다. 잠시이지만 이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은 알펜루트를 잊지 못해 다시 방문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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