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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 산책] 난정서(蘭亭序)
- 봄철에 생각나는 유명한 문장은 아무래도 고금 제일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가 아닐까 한다. 중국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인 동진(東晉)시대 영화(永和) 9년(AD 353년) 음력 3월 3일, 당시 최고의 실세 가문인 낭야(琅?) 왕씨(王氏) 가문을 이끌던 우장군(右將軍) 왕희지는, 왕씨 가문과 쌍벽을 이루던 진군(陳郡) 사씨(謝氏)의 우두머리 격인 사안(謝安)및 기타 사족(士族) 등 명사 41인을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절강성 소흥) 난정(蘭亭)에 불러 대규모 연회를 연다. 당시 모임의 형식은 중국의 오래된 전통인 3월 3일에 물가에서 몸을 씻으며 한 해의 재앙을 털어버리는 계사(?事) 형식을 빌린 것이었으나 사실상은 위락적 요소가 강했고 귀족문벌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올해 4월 21일 경에 해당한다. 모임에서는 참가자들이 시를 한 수 이상씩 짓게 되어 있었다. 흐르는 시냇가에 차례대로 줄지어 앉아 술잔을 띄워 보내고 그 잔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 3말을 마시는 연회를 열었다. 이것이 대대손손 이어지는 소위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의 시초이다. 이 ‘유상곡수’가 신라로 전해져 경주의 포석정(鮑石亭)으로 남아 있다. 일본에 전해진 것이 가고시마(鹿兒島)현 센간엔(仙巖園) 내의 곡수(曲水)이다. 당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였던 왕희지 사안 손작(孫綽)등 26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를 짓지 못해 벌주를 마셨다. 이날 지은 시들을 모아 철(綴)을 하고, 그 서문(序文)을 왕희지가 썼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사람들이 오늘날 가격을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일컫는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 이다. 당(唐)대 하연지(何延之)가 기술한 를 보면 당시 왕희지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須筆:쥐 수염으로 만든 붓)로 28행 324자를 써, 를 완성하였다. 술이 깬 후 수십 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도 “신(神)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였다 한다. 이후, 이 작품은 당(唐)대에 절대 권력자였던 당 태종(太宗)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왕희지의 글씨 중에서도 특히나 이 를 좋아하여 애지중지하다가 운명(殞命)할 때 를 자신과 함께 순장(殉葬)할 것을 명했다. 는 소릉(昭陵)에 묻혀버렸고, 이때부터 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는 진본이 아니라, 진본을 보고 유명 서예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임서(臨書)한 여러 판본들, 그리고 진본 위에 기름종이를 바른 후 매우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듯 본을 뜬 모본(摹本)들이다. 수없이 많은 판본 중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북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풍승소(馮承素)의 모본으로, 당 중종(中宗)의 ‘신룡(神龍)’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어 신룡본(神龍本)으로도 불린다. 어찌되었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서예작품이 기실 원본이 없다는 사실이 또한 흥미롭다. 유명한 서예작품으로도 알려진 이 글은 문장 자체로도 매우 빼어난 명문이다. 매년 늦봄이면 생각나는 이 글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 2015-05-0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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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못잊어, 한국문학의 별들'
- 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945년 8월 15일, 한 사상가의 표현대로 ‘도적처럼’ 찾아온 해방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과 맞닥뜨리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준 이날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박탈당했던 모국어의 근원적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는 일제 강점기에는 간행되지 못했던 이육사, 윤동주, 심훈 등의 유고시집이 간행되었고, 여러 종의 사화집도 잇달아 출간됨으로써 역동적인 문학 출판 시대를 열게 된다. 해방 직후 출간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청록집』과 서정주의 『귀촉도』는 우리 나라의 정상 시편으로 손색이 없는 위상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청록집』은 자연을 근대시의 주요한 시적 대상으로 아름답게 재현해내면서 우리 말의 가락과 이미지를 높은 예술적 형상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이 시대의 가장 화려한 사화집으로 등극되었다. 더불어 김영랑, 김광균, 유치환, 김광섭, 김현승, 신석정, 김상옥, 이호우 등이 우리 서정시의 미적 경지를 우뚝하게 올리는 가편들을 쏟아냈다. 소설 쪽에서는 해방 전후의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염상섭, 이태준, 채만식, 김동리, 계용묵, 허준, 황순원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당대적 상황 인식으로서의 소설은 8·15가 외세에 의한 불완전한 해방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을 낳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사적 출발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증언하였다. 그 불충분한 해방이 분단과 전쟁을 곧 야기한 것은 우리가 두루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다 1950년대 벽두에 터진 6·25전쟁은 우리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바꾸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물리적 충격을 주었던 이 전쟁은 이후 우리 문학의 가장 강력한 존재 근거이자 동시에 한계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가난, 반공과 서구 추수라는 공통된 체험을 통해 이 시기의 문학적 주체들은 문학적 아비를 상실한 채 폐허 속을 거닐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 시의 주류 미학은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특별히 서정주는 독자적인 상상력과 탁월한 시적 의장(意匠)으로 한국 시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공동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9)을 펴낸 ‘신시론’ 동인들은 모더니즘 시운동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이 시기의 소설은 전쟁을 직접 겪은 작가들의 경험적 증언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작품 세계는 방향 상실과 불안 의식 등에서부터 생활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한 심리적,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게 되는데 김동리, 김성한, 이범선, 오유권 등이 그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 의식의 치유 과정을 그린 손창섭, 서기원, 반전 이념을 담아낸 박영준, 황순원, 선우휘, 오상원 등도 기억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장용학, 이호철, 임옥인, 박경리, 강신재, 박연희, 오영수 등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작가들이 절대 가난과 싸우면서 소중한 기록을 남긴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흐름에 불을 지피다 1960년대에 일어난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경험과 가치를 인식시키는, 호환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시문학은 대개 세 가지의 흐름을 형성한다. 하나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저류로서 김수영과 신동엽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을 통해 우리 시는 4·19혁명이 가져다준 이념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 민족주의의 상보적 형상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다음 하나는 인간 내면과 형식 탐구의 흐름으로서 김춘수가 대표적이다. 김춘수의 시는 관념의 배제를 노리면서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천착하는 일관성을 보였다. 마지막 하나는 전봉건, 김종삼, 천상병처럼 전 시대로부터 창작을 꾸준히 이어온 시인들에 의해 구축된 현대적 감각의 세계였다. 김남조, 박재삼, 박용래, 김관식 같은 서정의 흐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설 쪽의 대표적 사례는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이 작품은 남과 북의 이념적 대립과 주인공 이명준의 자살로 상징되는 절망,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하였다. 그런가 하면 분단과 외세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남정현의 『분지』는 이 시기 최대 문제작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분단 문제는 박경리, 이호철 등의 작품에서 심화된 형상을 얻는다. 특유의 감각적 문체로 도시적 삶의 위선을 그린 김승옥의 서사는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1960년대 문단을 강타하였다. 그만큼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다양화가 비로소 이루어진 때라고 할 수 있다. 민중적 서정시와 노동현실 소설화 1970년대의 문학적 감각과 상상력은 ‘유신’이라는 정치 체제와 전태일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그 형식과 내용이 시작되었다. 이 두 가지 축은 당시의 작가나 시인들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문학적 관심의 본격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시에서는 민중적 서정시가 경제 발전의 불균형과 그에 따른 민중의 피해 과정을 가장 본격적으로 그려냈는데 신경림, 고은, 김지하, 조태일, 정희성, 문병란 등의 시가 주목되었다. 그런가 하면 황동규, 정현종, 마종기, 김광규, 김명인 등이 보여준 음역은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주는 소외와 내적 파탄을 증언, 가시화함으로써 한국 시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주었다. 이 시기의 소설은 현실적 삶에 초점을 맞추는 양상이 본격화하였다. 그 대표적 형태가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근대화에 대한 비판이었고 이문구가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노동 현실의 소설화는 황석영, 윤흥길, 조세희 등이 주도하였다. 또 이 시기에 비로소 씌어지는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 권력을 비판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분단 문제를 다룬 윤흥길의 『장마』 등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소설이 호응을 얻었다는 점인데, 이는 4·19로 비롯된 역사의식의 성장과 급격한 시대 변동에 따른 역사적 단절감의 회복 욕구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또한 1970년대는 대중소설이 폭넓게 출현하였다. 한수산, 최인호, 조선작, 조해일, 박범신 등이 그 구체적 목록이다.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사회적 상상력이 깊어진 시기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창작과비평’ 그리고 ‘문학과지성’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안에 구비된 강한 기억과 저항의 힘은,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정치적 상상력의 만개를 가져왔다. 시 부문의 대표적 흐름은 노동시라고 불린 일군의 경향으로서 박노해와 백무산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또한 김남주는 줄기찬 저항성으로 한 시대의 가장 뜨거운 전사 시인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일정한 대타적 영역을 형성한 해체시는 기존의 시문법에 대해 강렬한 도전을 보냈으며, 정치적 전위가 아니라 미학적 전위로 나섰다. 특히 황지우는 언어 실험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탁월성으로 문학적 성가를 누렸다. 이어 박남철, 김영승, 장정일 등이 더욱 급진적인 실험적 해체시를 양산했다. 또한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개인사의 굴곡을 통한 사회 반영 혹은 인간의 존재 탐구에 매진해온 시인들로는 이성복, 최승자, 최승호, 기형도 등이 있었다. 소설 쪽에서는 1980년대를 휩쓴 진보의 열기에서 비켜선 자리에서 문학을 했던 작가들도 있는데 그 대표 격이 이문열이다. 소설 기법의 새로움을 추구한 작가군으로는 이인성, 최수철이 있다. 그리고 기법 실험의 극점을 보여준 서정인의 『달궁』, 역사소설의 기법으로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등도 소재 확대를 가져온 예에 속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었다. 문순태, 임철우, 윤정모, 최윤 등은 그러한 유에 속하였다. 해방 직후의 삶을 통해 역사적 비극의 원천을 형상화한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와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쓴 소설이나 언어 자체를 탐색하는 소설들도 다수 나왔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등이 그 실례일 것이다. 이 시기는 매체와 작가군이 폭증한 시대로서 대중이라는 개념이 본격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작가들의 대활약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적 감각에 뿌리를 둔 시쓰기 방식이 크게 대두하였다. 그 주자로 우리는 유안진, 천양희, 신달자, 노향림, 김승희, 최문자, 김혜순, 황인숙, 허수경, 정끝별, 나희덕, 박라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생태적 상상력의 시편들이 쏟아진 것도 괄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시영, 이하석, 고형렬, 고진하 등의 시나 『녹색평론』 같은 근대적 기획에 대해 의혹과 도전을 보내는 패러다임이 이에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러한 지향은 ‘정신주의’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일군의 시적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조정권, 최동호 등이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시적 발언은 김정환, 도종환, 박영근, 최두석, 이재무, 안도현 등에 의해 이어졌다. 이른바 ‘몸’의 시학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경향은 정진규, 김기택, 채호기, 박주택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는 주체, 권력, 이성, 중심의 언어에서 타자, 탈권력, 감성, 주변의 언어가 목소리를 얻어가고 있는 것을 실증하였다. 소설 부문에서는 여성성의 잠재적이고 대안적인 가능성을 문학적 감수성과 결합시켜 풍요로운 형상화가 이루어졌다. 공지영, 오정희, 신경숙, 은희경, 이혜경, 김향숙, 공선옥 등이 주도한 이러한 패러다임은 관용과 너그러움, 희생, 포용성으로 그 정서적 지향을 움직여갔으며, 어떤 것도 절대 구심이 될 수 없다는 융통성 있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지나간 시대의 오래된 기억들을 독자 앞에 되불러주었으며, 구효서, 정찬, 성석제, 김영하, 김연수, 한강, 전성태 등도 자기 몫을 충분히 하며 새로운 언어들을 갈무리하였다. 이러한 복합적 흐름을 20세기에 형성했던 우리 문학은 21세기에 들어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그 외연과 실질을 확장하고 심화해가고 있다. 시에서는 이른바 ‘미래파’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적 경향이 중요한 비평적 대상이 되었고, 소설 쪽에서도 다양한 작가군이 들어와 새로운 창작 지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해방 후 70년 동안 우리 문학이 일구어온 역사는, 이렇게 가파른 역사와 삶을 비추어온 별자리처럼 한편으로는 선연하고 한편으로는 흐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여기 거명된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득하지 않은가?
- 2015-04-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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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7년생 질곡의 편린 한 조각
- 간신히 연락이 닿아 원고를 청탁했더니 “나는 컴퓨터도 안 하고 육필로 쓰잖여. 글씨도 못 알아볼 건데 그냥 됐시유. 내가 보니께 나랑 안 맞는 것 같유. 그 책하고는. 난 부족한 사람인디. 글 못 쓰니께 다른 선상 알아봐유. 난 하루도 술 없이는 못 사는구먼그려.” 구수한 충청도 말씨에 그대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사양하던 작가 김성동은 고색창연한 200자 원고지(金聖東이라고 인쇄돼 있다)를 노끈으로 묶은 글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문학은 삶과 우주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지”라는 그의 육성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아카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막걸리 받아 큰 슬픔을 안고 사는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총소리였다. 총소리는 잇달아서 들려왔다. 사타구니에 꼬랑지를 말아들인 삽살개가 마룻장 밑으로 숨어들었고, 삼키면서 길게 끄는 동네 개들 울음소리만이 높이 떠서 흩어지고 있었다. 불에 덴 것처럼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아낙이 속적삼을 헤쳐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렸다. 등꼬부리 노파가 두 팔로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를 끌어안았고 공포에 질린 눈길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던 식구들 눈길이 사방으로 돌려졌다. *해설피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1950년 첫 때. 조선 나이로 네 살이었으니, 이 누리에 벌레몸을 받아 태어난 지 꼭 2년 8개월 되던 때였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중생에게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은 네 살 적부터인데, 총소리이다.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이 총소리라는 것이 얄망궂다. 꼭 무슨 팔자소관인 것만 같아 눈앞이 부우옇게 흐려오니, 운명인가. 전정(前定)된 명운(命運) 말이다. 저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 같은 것. 그것으로부터 이 중생 살매는 비롯되었으니까. 아직 이빨도 다 솟지 않은 네 살짜리 어린 것 넋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그 총소리 말이다. 아버지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 총소리를 듣던 때가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중생은 영 입을 열지 않는 것이어서 벙어리인 줄 알고 큰 걱정들을 하시는 판이었는데, 느닷없이 입을 열더라는 것이다. 마당에 깐 멍석에 둘러앉아 식구들이 막 저녁상을 받는데, 멍석 가장자리를 기어 다니던 아이가 한밭[대전]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세 차례나 부르짖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는 미 군정과 그 사냥개들이 쳐놓은 덫에 치여 절망적 ‘피고회의’나 하던 리관술(李觀述)·송언필(宋彦弼) 선생 같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이며 인민 계관시인 유진오(兪鎭五)선생, 그리고 10월항쟁·여순항쟁·4·3항쟁을 비롯한 지리산·태백산·일월산 같은 재산인민유격대 *싸울아비들과 함께 총하지혼(銃下之魂)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정(而丁)선생[朴憲永]의 비선(秘線)으로 대전·충남 지역 조직장인 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끌려가셨던 것은 당신 나이 서른두 살 때인 1948년 늦가을이었다. 리승만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운 뒤였다. 평양행과 지리산 입성을 놓고 손톱여물을 썰던 끝에 얼굴도 못 본 자식놈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들렀던 고향집에서 당신을 맞이한 것은 벌써 몇 달째 그물을 치고 있던 서청(서북청년단) 출신 서울시경 특별경찰대였던 것이다. 뒷동산으로 피란 갔던 그때 이야기를 썼던 것이 『그해 여름』이라는 단편소설이다. 군사깡패들한테 잡지를 폐간당하고 나서 무크지로 박아냈던 에 실렸던 것이니, 꼭 30년 전이다. 그 소설이 어떤 유명한 친왜작가 이름을 딴 문학상에 후보작으로 올랐으나 심사위원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하니, ‘반미소설’이라는 것이었다. 조치원·대전 방어선이 무너지며 금강방어선으로 뒷걸음질하던 북미합중국 병대가 보령·청양 경계인 화성장터에서 양키병정·토인병정 구경나온 아녀자 여남은 명을 죽였던 참이야기를 바탕삼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딴 이야기인데- 요즈음 이른바 문학상이라는 것이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등단해서 십년만 되면 적어도 서너 개씩 문학상을 목에 걸고 흰목 잦히는 작가들이다. 작가를 장삿속으로 써먹으려는 속셈을 보고 어떤 문학상을 거부했던 것이 1983년이었다. 물론 소설 됨됨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이른바 등단 40년임에도 무슨 창작기금과 절집동네에서 주는 무슨 상 말고는 하나도 받아보지 못한 중생이므로, 더구나 눈에 밟히는 『그해 여름』이다.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른 다음부터 떠오르는 것은 배고픔이다. 할아버지는 손님이 오면 꼭 아비 없는 손자를 사랑방 명색으로 불러 “이 으른께 절허구 뵙거라.” 그리고 식구들은 쫄쫄 굶는데도 꼭 진지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들여놓는 손님 진짓상을 보며 이 중생은 눈을 꼭 감았다. 주칠이 벗기어져 희뜩희뜩한 개다리소반에는 보리가 조금 섞이고 검정콩이 박힌 옥 같은 쌀밥과 췻국 한 대접, 그리고 김치와 호박무침에 간장과 고추장 보시기가 놓여 있었다. 재게 오르내리는 수저를 바라보던 이 중생은 미주알을 눌러 막고 있던 두 발꿈치에 힘을 주어야만 하였으니, 거시침이 흐르면서 그만 힘도 내음도 없는 물방귀가 비어져 나왔던 것이다. 서른 날에 아홉 끼밖에 못 먹는 *애옥살이일망정 손이 오면 꼭 진지대접을 하고 먼 길 온 과객한테는 *사슬돈푼이나마 노잣닢까지 쥐어주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집은 가난도 비단가난이었다. 나의 소설은 어머니를 위로해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살그미 눈을 떠보니 밥주발은 반 넘어 주욱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목예반에 숭늉대접을 받쳐든 어머니가 들어오셨고, 아흐. 저이가 숙냉이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남겨진 밥은 내 차지가 되는 겨. 그만 상을 내가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떨어지기만을 목젖이 녹아들게 기다리고 있는데, 얼라? 숭늉 한 모금을 마시고 난 그 늙은 과객사람은 숭늉을 밥그릇에 부어버리는 것이었고, 으아앙! 꼴깍 소리가 나게 생침만 삼키고 있던 이 중생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던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으니, 업(業)이었던가. 배고픔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었고, 외로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 때문이었지만 백지에 먹물이 찍힌 것이라면 콩나물을 싸온 신문지 쪼가리까지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백자 원고지로 쉰 장쯤 될 소설을 써보았던 것은 온전히 끔찍한 고문후유증의 우울증으로 괴로워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슬프구먼그려. 겁나게 슬프다니께.” “온 삭신 사대육신 팔만사천마디가 죄 자귀루 죅여놓은 조긧대갈 같다”고 네 방구석을 맴돌면서도 자식이 지었다는 소설을 낭독으로 들으며 엷은 살푸슴(미소)을 보여주시던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데, 주인공이 서울로 가는 장면에서 그 소설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을 그려볼 재주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말하는바 리얼리즘이 뭐고 모더니즘이 뭔지 알 리 없는 때였으나, 그렇게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이 아니고는 땅띔도 못 하는 것은 그때부터 이미 비롯된 것이었다.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은 상상 곧 *수꿈 꾸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의 변증법을 알았다고나 할까. 그때에 어머니한테 들었던 말이다. “얘기든 노래든 그저 모름지기 슬퍼야 혀. 그게 진짠 겨.” 칠순 다 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림 망팔(望八)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다. 이 많이 모자라는 하늘 밑에 벌레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말이기도 하니, 운명인가. 할아버지 손에 잡혀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날 열두 살짜리 그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시 갇혀 있었다는 경찰서 구경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던 끝에 이사 간 집으로 갔는데, 철 이른 가죽잠바를 걸치고 완강한 어깨에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할아버지를 잡고 일장 훈시를 하던 것이었다. 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다가 누가 찾아오는지 한 달에 한 번씩 대전경찰서 대공과에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송판쪼가리로 해 단 대문명색 앞까지 배웅 나간 어린아이를 훑어보며 사내는 말하였다. “붉은 씨앗이로군.”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잡고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안녕히 가셔유우우.”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축댓돌 밑 아랫집에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황덕불빛을 뚫고 무당 사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허어이이. 리로 리런나. 로리런나. 라리런나. 로런나. 리런나. 어허어이이. 두 발 가진 즘생에 살생부정이로구나. 총 맞은 원혼이요 칼 맞은 원혼이요. 몽둥이 맞은 원혼이요. 포탄 맞은 원혼이요. 신실히 적적히 물리쳐 줍소사. 시위들 하소사. 원통히 죽고 서럽게 죽은 중음신들아. 어서 속히 이승으로 나가서 만인적선하고 돌아오너라.” 다음은 4월 17일 뼈잿골에서 읽을 님들을 기리는 글이다. 뼈잿골의 제망혼문(祭亡魂文) 조선공산당 창건 90주년인 단제개천(檀帝開天) 환기(桓紀) 9285년 4월 17일을 맞아 불초(不肖) 김 아무개와 그 동무(同務)들은 삼가 쓴술 한 잔과 몇 점 보잘 것 없는 제물(祭物)로 눈물의 골짜기에 누워 계신 님들 혼령(魂靈) 앞에 엎드려 슬피 고하나이다. 아, 님들이시어. 님들 떠나신 지 어즈버 65년이 되었으나 못난 뒷자손들은 여태도 그 체백(體魄)조차 건져드리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야말로 비단할아버지에 거적자손이올습니다. 아, 님들은 아주 돌아가시렵니까. 저희들은 상기도 님들이 돌아가셨다고 믿어지지 않으니, 아마도 슬픔이 지나쳐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 어찌 차마 말을 다하겠나이까. 아, 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은 떨리고 손끝은 흔들려서 차마 붓을 놀릴 수 없어 1950년 7월 27일치 기사를 읽어보겠나이다. (......) 大田市에서도 7月 三,四일 경부터 련 五일간 尾軍의 지휘아래 人民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大田刑務所에는 濟州道麗水順天太白山事件 등의 우수한 祖國 아들딸들이 收監되어 있었다. 이들을 비롯한 七천여명의 人民들을 野獸들은 뒤로 결박하여 명태같이 트럭에 눞혀놓고 최고 一日 八十臺까지 동원하여 대덕군 사(산)내면 랑울(월)리로 운반하여 가소린을 퍼붓고 불질러 방공호로 몰아넣어 참살하였다. (......) (*인용된 신문기사는 맞춤법, 띄어쓰기, 종지부 없는 것, 한자 노출 등 그때대로임) 아, 서럽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무들과 힘을 모아 님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이오니, 너무 걱정을 마옵소서. 이 중생이 사바에 있는 만큼 님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아, 인생이 상수(上壽)를 누리는 이는 백년을 살 수 있다지만 그 나머지는 흔히 팔구십세를 넘지 못하는데 이 중생 나이 망팔이 다 되었으니, 인간에 있을 세월이 또 얼마나 되오리까. 아, *고루살이 세상을 위하여 짓는 밥이 채 뜸도 들지 않았는데 한 세상은 살같이 가고, 천지(天地)도 그 끝이 있다는데 산천은 말이 없습니다. 가마귀는 끊어진 솔언덕에 울고 묵은 풀은 우거졌는데, 쓸쓸한 산자락에 엎드려 한소리 통곡을 하니, *푸나무도 함께 슬퍼합니다. 와서 흠향(歆饗)하소서. *해설피: 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진 꼴, *싸울아비: 전사(戰士) *애옥살이: 가난한 살림살이 *사슬돈푼: 싸거나 꿰지 않은 흩어진 엽전, 얼마 안 되는 작은 돈 *살그미: ‘살그머니’의 준말로 그루박을 때 쓰던 말. 살그니, 살그래 *수꿈: 낮에 깨어서 꾸는 꿈이라는 죄수들의 은어로 상상을 이르는 말 *고루살이: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겨레가 추구했던 ‘평등세상’. ‘공동체’는 기독교 세상에서 나온 서구 개념임. *푸나무: 초목(草木) 김성동(金聖東) 소설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1976년 승려생활. 1975년부터 창작생활. 창작집 『彼岸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만다라』 『길』 『국수(國手)』 『꿈』, 산문집 『염불처럼 서러워서』 『외로워야 한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등.
- 2015-04-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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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5월 높은 산 깊은 계곡을 화사하게 물들이다 '애기송이풀'
- ‘계절의 여왕’ 5월입니다. 3월 물이 오르기 시작한 봄이 4월을 거치면서 농익을 대로 농익어가자 어느덧 사람들의 발길이 물가를 향합니다. 지구온난화의 여파인지 갈수록 봄은 실종되고 여름이 일찍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온이 솟구친다 해도 벌써부터 물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연한 홍자색 꽃이 천변에 한 무더기 피어나 옷깃을 잡습니다. 송이풀, 흰송이풀(사진), 한라송이풀(사진), 구름송이풀, 만주송이풀, 큰송이풀 등 10여 종의 송이풀속 식물 가운데 유독 ‘애기’란 접두어가 붙은 애기송이풀. 그 연유를 쫓다 보면 애기송이풀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애기가래에서 애기황새풀에 이르기까지 각종 식물도감에 나오는, 40여 종의 ‘애기’ 식물들이 대개 그러하듯 전초나 꽃의 크기가 작거나 여린 데서 연유할 것이란 선입견과 달리 애기송이풀은 결코 잎이나 꽃이 다른 송이풀에 비해 작지 않습니다. 쑥갓처럼 생긴 잎은 길이가 20~30cm에 이를 정도로 넓고, 5월 초순 피는 홍자색 꽃도 지름이 4~5cm에 이를 만큼 대형입니다. 게다가 꽃도 많게는 십여 송이가 뭉쳐서 피기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들어올 만큼 화려하고 화사합니다. 다만 뚜렷한 줄기가 없이 키가 크지 못하고 잎이 땅바닥으로 퍼지기 때문에 다른 송이풀에 비해 왜소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 또한 클로즈업한 꽃 사진에서 알 수 있듯 막 태어난 병아리나 어린 새가 부리가 달린 고개를 내밀며 세상을 살피는 듯한 윗입술, 어린 새 생명이 날갯짓을 하는 듯한 아랫입술의 모습은 애기송이풀 꽃이 가진 특유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기송이풀. 세계적으로 경기 연천과 가평, 강원 횡성, 충북 제천, 경북 경주, 경남 거제 등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입니다. 연천에서 거제도까지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하지만, 전체 자생지가 10개에도 못 미치는 데다 자생지 개발과 남획 등으로 훼손 가능성이 높아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보호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개성의 천마산에서 처음 발견돼 당시엔 ‘천마송이풀’로 불렸던 데서 알 수 있듯 북한에도 자생합니다. Where is it? 멸종위기종 희귀식물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애기송이풀의 자생지는 대개 사람들의 거주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경기 연천과 가평, 충북 제천의 경우 반경 100~200m 내에 인가가 있고 도로도 지나간다. 특히 경기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절골계곡과 충북 제천시 백운면 덕동계곡의 애기송이풀 자생지의 경우 홍수 등으로 계곡물이 넘치면 바로 휩쓸려 갈 수 있는 저지대인 데다 인근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행락지까지 있어 각별한 보호 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남북으로 200km쯤 떨어진 덕동계곡과 절골계곡을 2년 전 5월 5일 하루에 둘러봤는데 양쪽 모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 2015-04-28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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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산책] 봄을 노래한 한시(漢詩)
- 바야흐로 봄이다. 봄을 나타내는 한자인 ‘춘(春)’은 원래 풀초(?)에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둔(屯)에다가 마지막으로 날일(日)을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새봄을 맞아 그 감흥을 노래한 한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유명한 글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사문학으로 조선 초 정극인(丁克仁)이 에서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夕陽)리예 퓌여 잇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細雨) 중에 프르도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역대 우리나라 한시 중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의 에서는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비 갠 강둑엔 풀빛이 푸르고, 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래가 울리네’라고 노래하였다. 이 유명한 시는 1962년 이수복이란 시인에 의해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란 구절의 란 시로 재탄생된다. 중국에서는 도연명(陶淵明)이 에서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 물은 연못에 가득하고’란 유명한 구절을 남겼고, 당(唐)나라 때 맹호연(孟浩然)은 에서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지난 밤 세찬 비바람 소리에, 얼마나 많은 꽃잎이 떨어졌을까!’란 명구를 남겼다. 이백(李白)은 에서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복사꽃 흩날려, 흐르는 물에 고요히 떠내려가니, 또 다른 별천지, 인간세상이 아니로세’라고 봄날의 정경을 노래하였다. 두보(杜甫)는 에서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나니, 봄이 되니 만물을 움트게 하네.’라고 봄비를 노래하였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는 봄비를 ‘춘우세부적(春雨細不滴)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 봄비가 가늘어서 방울지지 않지만, 밤중이라 그런지 가는 소리가 나누나’라고 이란 시에서 노래하였다. 봄의 야경(夜景)을 노래한 글로는 이백의 란 천고의 명문(名文)이 있으며, 고려조 왕석(王錫)의 ‘춘강양안백화심(春江兩岸百花深) 호월비공설만림(晧月飛空雪滿林) 봄 강 양쪽 언덕에 온갖 꽃이 짙게 피니, 허공에 뜬 밝은 달에 숲이 온통 희도다’란 란 시가 있다. 이처럼 수도 없이 많은 시들 중, 어느 시 구절이 가장 유명하다 꼽을 수 있을까? 아마도 중국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사령운(謝靈運)의 중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 원류변명금(園柳變鳴禽) 연못 가에 봄풀이 돋아나니, 동산의 버들에는 새 소리도 바뀌었네’란 구절이 아닐까 한다. 사령운 자신이 말하길, ‘일찍 영가(永嘉)가 서당(西堂)에서 시를 생각하다가 온종일 못 지었는데, 문득 세상을 떠난 종제(從弟)인 혜련을 꿈에 보고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구를 얻었다. 그것은 신공(神功)이지, 내 말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더욱 유명해진 이 구절은 금(金)나라 원호문(元好問)이 ‘지당춘초사가춘(池塘春草謝家春) 만고천추오자신(萬古千秋五字新)’이라 극찬한 이래, 가장 유명한 봄의 구절이 되어 대대로 회자되어 오고 있다. 주자(朱子)의 중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이 바로 이것이다.
- 2015-04-23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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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한 은퇴] 행복의 조건: 3S와 5F
-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one to love), 무엇인가 할 일(Something to do), 뭔가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for)’ 영어권의 현인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꼽는 3가지(3S)이다. 여기서 필자의 의문은 “과연 우리가 이 3S만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3S가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려면 그보다 더 기본적으로 필요한 2가지가 있다. 바로 ‘돈’과 ‘건강’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고 반문할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것이니까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닐까. 그래서 ‘3S + 2(돈과 건강) = 5F’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 ‘F’로 시작하는 영어단어, 즉 ‘Finance, Friend, Field, Fun, Fitness’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F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다. 해서 Finance. 우리가 열심히 살면서 돈을 버는 것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한편 나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느 정도 돈의 여유가 있어야 나름 설계도 하고 그에 따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건강하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지만 건강할 때 돈을 벌어놓아야 건강도 지킬 수 있고, 또 건강에 탈이 나도 고칠 수 있다. 두 번째 F는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one to love), 즉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놀 친구(Friend)를 의미한다. 친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친구는 배우자를 포함한 내 가족이다. 평소에 배우자와 자녀는 물론 부모·형제 등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지금은 바쁘니까 이 담에 하지 뭐 하다보면 살가운 정은 다 떨어지고 난 다음일 수도 있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처럼 부인과 딸을 곁에 두고 사랑한다면서 눈을 감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 외에도 이 그룹, 저 그룹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등산이나 사진 찍기, 여행, 식도락 등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세 번째 F는 뭔가 할 수 있는(Something to do) Field를 말한다. 이때 필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직장이 될 수도 있고 여가로 사진이나 글쓰기, 춤 배우기, 문화예술 관람, 요리, 여행 등과 같은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다. 자원봉사와 기부활동도 평소나 은퇴 후에나 좋은 필드이다. 꼭 돈만이 아니더라도 내 체력과 재능과 시간 등을 얼마든지 기부하면서 자존감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미리 준비해놓으면 귀농귀촌 또한 훌륭한 필드가 될 수 있다. 요즘 뜨는 필드가 또 하나 있다. 방송통신대 또는 학점은행제 대학 등에 다니면서 그간 못 다했거나 하고 싶었던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도 사귈 수 있다. 필자가 아는 분은 80이 넘은 나이에 방송통신대 일문과, 중문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불문과에 다니고 있다. 일본어 찍고 중국어 거쳐 불어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그에게서 청년의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 학점은행제 대학 등록자 중 60세 이상의 수를 보면 2008년만 해도 4500여명이던 것이 2013년 현재 2만 3000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결국 소득을 얻기 위한 일자리뿐 아니라 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소일거리가 곧 좋은 필드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 F는 재미를 의미하는 Fun이다. 지난 번 기고에서 말한 것처럼 즐겁고 재미있어야 인생이다. 뭔가 바라는 것, 기대하는 것(Something to hope for)이 없는 인생보다 더 지겹고 재미없는 삶도 없을 것이다. 영국계 글로벌 은행 HSBC가 몇 년 전 22개국 2만여명의 사람들에게 ‘은퇴’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다수 선진국 사람들은 ‘자유, 만족, 행복’이라고 대답한 반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첫 번째로 꼽았다. ‘외로움, 지루함, 두려움’이 그 뒤를 이었다. 돈과 할 일이 어느 정도 있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들과 함께 나만의 재미, 그 무엇을 찾아 떠나봄직 하지 않은가.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아들과 딸 부부들이 여행갈 수 있도록 어린 손자와 손녀들을 봐 주고 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부인 영자와 손잡고 여행을 떠날 사람은 바로 덕수란 말이다. 다섯 번째는 앞선 4가지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강(Fitness)이다. 필자의 영어가 짧아서인지 건강하면 Health만 떠오르는 바람에 ‘4F 1H’하려다가 다행히 Fitness가 생각나서 5F로 완성할 수 있었다. 군말이 필요 없다. 건강이 없다면 돈과 친구, 일거리, 재미도 다 나의 것이 아니다. 얼마 전 한 TV의 장수 관련 프로그램에서 104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73세 따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무남독녀인 이 따님이 자녀들을 다 출가시킨 후 노모를 모시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어느 날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니 치매 기운이 약간 있는 어머니가 마당에 나와 계셨다. “쌀쌀한데 왜 나와 계시냐?”고 했더니 그냥 기분이 좋다면서 노래를 한 자락 하시는 거라. “술 잘 먹고 돈 잘 쓰니 금수강산이더니, 술 못 먹고 돈 못 쓰니 적막강산이로세.” 정선아리랑의 한 자락이었다. 술 잘 먹고 돈 잘 쓴다는 것은 5F, 즉 돈과 할 일, 친구, 재미, 건강의 5박자가 잘 갖춰져 있는 금수강산이다. 반대로 술 못 먹고 돈 못 쓴다는 것은 5박자 중 대다수가 잘 갖춰져 있지 못하니까 적막강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F가 얼추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하면 내가 바로 공자도 부러워할 5자(놀자, 쓰자, 주자, 웃자, 걷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F가 5자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5F 중 Finance는 은퇴설계 중에서도 재무적 설계에 해당하고, 나머지 4F는 비재무적 설계라고 말한다. 재무적 설계를 넘어 비재무적 설계도 잘 생각하고 준비해 놓아야 행복한 노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말은 쉬워도 갖추기는 어려운 게 5F이다. 로또 당첨과는 달리 조금씩 조금씩 오랫동안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5F를 하나씩 따져보면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채워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누가 말했나.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5-04-1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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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삶꾼 무애의 이야기
- 고건 전 총리께서 명지대 총장을 맡고 계시던 1996년 5월 어느 날 총장실에서 당시 공과대학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다음 날 12시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가보니 Y사범 등 바둑계 인사 몇 분과 처음 보는 정부 고위관료 몇 분 등이 모여 대학에 바둑학과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나온 분들은 바둑계 인사 외에도 거의 다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이어서 이야기는 대개 긍정적으로 흘러갔지만 특별한 결론 없이 끝났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대학에서 나온 사람은 총장과 필자뿐 아닌가? 그래서 총장께 “앞으로 어떻게 해야죠?”라고 여쭈었더니 “임 학장이 알아서 해”라는 한 말씀뿐이었다. 필자는 바둑을 무척 좋아했고 기력도 아마 5단 정도로서 학교 내에서는 최상위권이었지만 과연 바둑학과를 만드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날 모임 이후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물어 보았으나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전 세계에 보급을 시작하여 명실상부한 종주국으로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이 된 태권도 생각이 났다. 사실 바둑은 중국에서는 이미 두뇌스포츠로 체육부에서 관리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스포츠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언젠가는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도록 해야겠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바둑은 일본을 완전히 제압했고 중국은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해 우리가 최강국이었으므로 앞으로 유능한 바둑지도자를 많이 양성하여 전 세계에 파견함으로써 바둑도 우리나라가 종주국이 될 수 있도록 하려면 바둑학과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기획실장과 협의하여 대학 정원조정 신청 때 바둑학과 신설을 요청하고 여러 가지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그러나 막상 교육부에서 온 공문에는 무슨 과 몇 명이 아니라 정원 증원 야간 40명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이것을 논의하던 교무위원회에서는 바둑학과는 어차피 예체능대학이 있는 용인캠퍼스에 두어야 하는데 야간으로 하면 누가 지원이나 하겠느냐며 물 건너간 분위기였다. 그런데 정원조정 신청에는 경기지도학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라면 야간도 관계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예체능대학장에게 바둑학과가 설립되면 어차피 예체능대학 소속일 수밖에 없으니 야간정원 40명을 전부 예체능대학에서 가져가고 주간정원 20명만 양보해서 바둑학과를 설립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대부분의 교무위원들은 적극 찬동했으나 예체능대학장은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교무위원회에서 예체능대학장이 동의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가 설립될 수 있었다. 그러자 총장께서 학사학위 이상의 프로기사 중에서 교수요원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필자는 바둑학과 설립 추진과정에서 당시 한국기원 사무국장을 맡고 계셨던 정동식 사범을 여러 번 만났다. 정 사범은 학사학위 소지자이고 수학교사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1975년부터 동아일보 관전기를 맡아 20여 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필해 왔으며 수년간을 한국기원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바둑계 전반에 걸쳐 폭 넓은 기반을 가지고 있어 필자는 정 사범이야말로 바둑학과 교수요원으로 적임자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정 사범에게 교수로 올 것을 제안했으나 정 사범은 교수자리가 탐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기원 사무국장도 매우 중요한 자리라면서 발령권자가 자기를 내보내지 않는데 먼저 떠날 수는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기전(棋戰) 성적도 비교적 양호하고 학사학위도 있으며 이론에도 매우 밝아 교수라는 별명을 가진 정수현 8단(당시)을 추천하였다. 한국기원에 교수요원을 추천해 주도록 공문을 보냈으나 막상 회신에는 정 8단은 빠진 채 다른 학사 프로기사인 S 사범과 H 사범을 추천해왔다. 그래서 정 국장에게 문의해 보니 정 8단에게 연락을 했지만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의 이력서를 총장께 보여 드렸으나 영 마음에 안 드셨는지 “임 학장, 더 나은 사람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정수현 8단이 적임자로 생각되나 본인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또다시 필자보고 알아서 해 보라셨다. 그래서 정 8단을 만나, 교수란 하고 싶다고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몇 년씩 고생해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교수가 되지 못해 줄 서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서, 기전만 해도 그렇지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성적을 좀 내고 있는 것은 알지만 아직도 이창호 9단이 굳건히 버티고 있고 이세돌 초단(당시) 같은 소년강자도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 벽을 얼마나 넘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현실적인 문제도 지적했다.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가 생겼고 당신은 프로기사 중에서 교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니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당신은 기전에서 성적을 내기보다는 바둑학과를 잘 키우는 것이 당신을 위해서도 바둑계를 위해서도 더욱 큰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느냐고 집요하게 설득을 했다. 그리고 이 제안을 수락한다 해도 대학도 당신의 자질을 검증하기 위해서 적어도 한두 학기는 겸임교수로 발령을 내고 조율해볼 시간을 가져야 할 터이니 그동안 충분히 겪어보고 생각을 해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 8단은 시간을 좀 달라고 하더니 해 보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이렇게 해서 교수라는 별명을 가졌던 정수현 9단(1997년 승단)이 진짜 교수가 되어 학과장을 맡게 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가 순조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 2015-04-1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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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투어] 아주아주 매혹적인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 “춥고 예쁜 여자가 많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간다고 했을때 지인들이 던진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비슷했다. 어떤 이는 “유튜브를 보니 러시아 남자들이 총 들고 설치더라”며 치안을 조심하라고도 했다. 예쁜 여자가 많은 것은 맞는 말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 12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온은 영하 1도 정도. 당시 서울이 영하 7도~영하10도 사이였으니 서울보다 오히려 덜 춥다. 치안에 대해서도 몸 사릴 정도는 아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10년 정도 이곳에 머물면서 외국인이 치안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10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만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의 총평은 ‘아주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 206년간 러시아의 수도였던 도시 1701년 표트르 대제는 유럽 순방을 끝내자마자 핀란드 만과 네바 강이 만나는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암스테르담은 작은 섬과 섬 사이를 다리로 연결하고 열악한 환경을 거꾸로 이용해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한 도시였다.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암스테르담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유럽에서 오랫동안 러시아에 대적했던 스웨덴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척박한 오지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왕족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네바 강에 떠 있는 42개의 섬에 도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새로운 도시건설은 성공적이었다. 1712년에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다. 1918년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기기 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위대한 문학가와 예술가를 탄생시킨 문화의 도시로 성장했다. 흔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창이라고도 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고전주의·바로크·모던 등 온갖 양식의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 자체가 박물관과 같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300년의 역사 그대로, 넵스키 대로와 겨울궁전 공항 도착 후 20분 정도를 달리면 넵스키 대로다. 황제의 거처였던 에르미타주 겨울궁전을 시작으로 40년의 공사 기간에 10만명이 죽어간 도시의 랜드마크 성 이삭 성당,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자리에 세워진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반원형의 회랑에 늘어선 카잔성당까지 대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놀라운 것은 가이드의 설명대로라면 넵스키 대로의 꽤 큰 건물들은 대부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48년에 문을 연 백화점 파사쉬, 1873년에 영업을 시작한 유럽 호텔, 엘리세예프스키 형제의 고급 상점, 카페, 고급 레스토랑들과 과자점, 수많은 고서점과 골동품점, 한때 50여 개에 다다랐던 은행들, 극장, 도서관과 궁전, 대학 등이 이곳에 있다. 1915년에 세워진 건물이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의 넵스키 대로는 제정 러시아 시절 모습 그대로다. 여름이면 넵스키 대로에선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관광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연일 확성기를 들고 광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일부 관광객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기도 한다는 곳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제정러시아 황궁이며 황제의 평소 집무실이 되었던 ‘겨울궁전’(冬宮)을 포함해 4개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그 자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현재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이곳은 38점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렘브란트 컬렉션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예술작품 270만점이 5개의 건물에 보관돼 있다. 수 세기에 걸쳐 러시아 왕가에서 수집한 그림과 조각, 보석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바티칸, 루브르, 대영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이 가득하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보관된 작품을 다 감상하자는 욕심은 금물이다.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겨울궁전은 건물의 둘레만도 2km나 되고, 실내는 1050개에 달하는 방과 120개나 되는 계단, 그리고 1100개에 이르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 그림 중에는 배경이 어두운 초상화가 많다. 오늘날의 사진이 사실적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다. 나폴레옹과 맞서 승리를 거둔 국가적 자부심이 묻어나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 종교적 색채가 짙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은 꼭 여행지로 와야 할 사람은 종교인이다. 특히, 크리스천이 이 도시에 오면 미술품, 혹은 건축물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을 듯하다. 피의 사원에 있는 4개의 모자이크를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형’, ‘십자가를 벗는 예수’, ‘성림강하’ 등 예수부활의 성경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상트 이사크 성당도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1818년 공사를 시작한 지 40년 만에 완성된 상트 이사크 성당은 112종의 돌로 지어졌고 1만 4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올릴 수 있다. 이 성당에서 반드시 가 보아야 할 장소는 전망대다. 전망대에 서면 황금으로 도금된 돔과 거대한 조각을 볼 수 있다. 거대한 돔은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데, 자그마치 3만 3000kg의 금이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경도 감상할 수 있다. 이사크 성당 전망대 오르기에 지친 몸이 쉴 곳은 오페라 극장이 제격이다. 저녁시간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새로운 주인공이 ‘지젤’로 데뷔했다. 마린스키 극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제일의 발레, 오페라 극장으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젤’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유명 연예인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다. 평일 저녁도 만원 관객이다. 관객들은 발레리나의 우아한 몸짓에 탄성과 박수가 연이어 나온다. 조그만 몸짓, 숨소리도 함께하는 공연문화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배우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겨울, 하루 해 뜨는 시간이 6시간일 정도로 해를 볼 시간이 거의 없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거의 무표정하지만 공연을 볼 때만큼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기 위해서는 최소 9시간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한다. 러시아 화폐인 루블 가치가 떨어져 한국 돈 1만원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입맛에 맞는 식당을 찾기가 힘들어 음식이 예민한 사람은 장아찌나 고추장 챙기기는 필수다. 여행 동행자들은 비슷한 말을 했다. 긴 비행시간과 음식문제만 아니라면 꼭 다시 오고 싶은 도시라고.
- 2015-04-16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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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그 순간] 운요호(雲揚號)사건이 전쟁으로 번졌다면?
-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주변국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개항 이후 구한말 시대가 대표적이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기뻐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시기에 일본과 러시아는 3번의 협정으로 한반도 문제를 입맛대로 요리했다. 이 시대를 러시아-일본에 의한 ‘공동관리(condominium)’시대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해 있을 때 명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을 배제한 채 휴전은 물론 조선을 분할하는 문제까지 논의했다. 6·25전쟁 휴전협정도 우리의 입장은 무시된 채 체결된 것이다. 이렇게 잘 알려진 사건들과 달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약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게 느껴지는 사건도 많다. 개항의 직접적 계기가 된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한 사례이다.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기 위해 1875년 9월 억지로 만든 것이다. 군함 운요호가 주로 서양 열강의 상품을 만주로 수출하는 항구인 요동반도 북쪽의 우장(牛莊)에서 황해를 측량하며 남하하다가 강화해협으로 들어온 것이다. 인천과 맞닿은 강화해협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연결되는 길목으로, 조선의 국방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요지 중 하나이다.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이 개항기 프랑스와 미국 함대, 운요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도 침략군의 서울 진입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도 부근은 섬이 많고 수로가 한강과 임진강으로 나뉘는 등 복잡하게 엉켜 있어 뱃길을 잃기 일쑤였다. 황석영의 소설 에 나오듯 과거엔 경강(京江) 수적(해적)들이 활개 치던 곳이다. 이 뱃길이 외부에 노출되고, 특히 외국 군함이 탐사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당연히 강화포대는 조선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진입한 운요호에 대해 발포했다. 근대적 장비로 무장한 일본 ‘군함’은 이에 응사하여 포대를 파괴하고 영종도를 점령, 관아 민가를 불사르고 포 수십 개를 노획, 9월 28일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 일본 측은 2명의 경상자만 낸 반면 조선군 사망자는 35명, 포로 16명을 기록했다. 조선은 이 사건을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선박’이 강화해협에 침투하여 일으킨 소요 정도로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 프랑스는 선교사와 기독교 박해로, 미국은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이미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인 바 있다. 더욱이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비등하여 그 압력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열강은 단순히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개항을 강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위상이었다. 조선이 열강과 수교조약을 맺어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면 국제정치적으로 무주공산(無主空山, no man’s land)으로 남아 먼저 점령하는 국가의 소유가 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영국과 러시아 간의 갈등/경쟁이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국제정치를 지배하던 주요한 축이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1852~1856)과 농노해방(1861) 후 팽창/남진을 시작하는데, 그 대상이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이거나 상업적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이에 해당한다. 영국은 중국이 상업적 이해를 방해할 정도로 강력해지는 것을 원치 않지만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장사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소위 ‘not strong but stable’이다. 얼마나 교활한 정책인가? 러시아가 한반도에 진출하면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북경-천진을 위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황해를 통해 올라오는 영국 등 해상세력도 저지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영국은 조선을 개항시켜 열강과 수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선이 국가로 ‘승인’되면 한 강대국이 다른 열강의 동의 없이 점령/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영국 문서는 영국이 중국에게 조선의 개항을 ‘백 번’ 이상 요청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과의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러시아의 개입을 유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남진은 일본에도 안보위협이 된다. 그런데 일본의 추론에 의하면, 전쟁이 시작되면 초기에 일본군이 승리해 서울을 점령할 것이며 조선정부와 국왕은 내지로 피신할 것이며, 중국은 조선을 지원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 이것은 임진왜란의 재판(再版)이며 일본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전쟁의 장기화를 의미한다. 일본의 전략은 중국의 개입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동경 주재 영국 공사는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보조를 취하는 방안에 양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듣고 경악한다. 러시아가 개입하면 그 대가로 최소한 영흥만을 요구할 것이며 부산까지 진출할 가능성이 있다. 15년 전인 1860년 영국-프랑스와 중국의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러시아는 연해주와 북위 42도 선인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남진하지 않았던가! 러시아는 운요호 사건 전 해에 극동함대 소속 전함 한 척을 영흥만에 보내 겨울을 나게 한 바 있다. 영흥만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곳이다. 반면 부산은 영국의 상업적 이권이 집결된 상해나 양자강까지 2일간의 항해거리이며 동해까지는 12시간 거리여서 중국, 일본, 황해의 해상로를 지배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이었다. 영국으로서는 한-일간의 분쟁에 러시아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먼 ‘극동’에서 군사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동해에 파견된 함대에 ‘조선영해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대기하며 제 3국(러시아)의 관여 여부를 관찰토록 하고, 북경의 공사관에는 운요호사건의 경과를 추적할 것을 지시한다. 다음해 1876년 1월 조-일 강화도조약이 평화적으로 체결되자 ‘다행히 전쟁으로까지 발전되지 않은 데 만족’을 표시하며 사건을 종결짓는다. 전쟁으로 비화되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과 중국, 일본이 싸운 임진왜란의 재판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 열강이 상륙하여 전쟁이 한반도에만 한정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를 점령하거나, 러-만주 접경지역에 파병하거나, 함경도를 점령할 수도 있다. 기회만 보이면 팽창을 서슴지 않는 러시아의 행태로 보아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면 영국은? 10년 후인 1885년 거문도 사건 때와 같이 대한해협을 봉쇄하여 러시아 함대의 남진을 저지하고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요동반도까지 진출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과 일본이 임진왜란 때와 같이 평양을 두고 대결한다면 영국은 화해를 주선할 것이다. 양측 모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데 잠재적인 동맹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의 운명은? 아마도 이들 열강 간에 흥정 대상으로 전락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이상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04-16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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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베스트셀러 70년 '민족과 역사를 거쳐 글로벌한 개인시대로'
- 광복 이후 출판시장은 1950년의 6·25,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1972년의 10월 유신,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9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1997년의 IMF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많이 읽히는 책의 유형이 달라진다. 광복 이전이 암흑기였다면 광복 이후 6·25가 터지지 직전까지는 민족문화 재건기로 볼 수 있다. 이후 1950년대는 전후 허무주의, 1960년대는 이데올로기, 1970년대는 산업화, 1980년대는 역사성, 1990년대는 대중출판, 2000년대는 글로벌 출판, 2010년대는 디지로그 출판 시대로 정리할 수 있다. 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사진 ◇ 광복~1949년 민족문화 재건 “아버지가 들고 온 『조선역사』란 책에 빨려들어 밤새도록 읽고 모자라 수업시간에까지 읽다가 들켰다. 그 바람에 전교생 앞에서 10여분이나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대군을 무찌르는 대목을 소리 높여 읽는 수모를 겪었다. 그 바람에 학생들은 그 책이 동이 나도록 모두 구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 보고 겪은 6·25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담은 『역사 앞에서』(창비)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추천사에 나오는 글이다. 신 시인은 한 칼럼에서 『조선역사』가 “한글을 깨치고서 처음 읽은 책”이라고 말했는데 이 책이 광복 이후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해방 공간 시기에는 우리 역사와 글, 문학을 펴내고자 하는 욕구와 읽고자 하는 욕구가 넘쳤다. 이런 욕구 때문에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1947), 『조선어표준말모음』(조선어학회, 1946) 등의 사전과 학술교과서가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해방 전후』(이태준), 『내가 넘은 삼팔선』(후지와라 데이, 1949),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크리미센코, 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1948), 『목넘이 마을의 개』(황순원), 『렌의 애가』(모윤숙), 『청록집』(조지훈 외) 등이 있다. ◇ 1950년대 전후 허무주의 195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정비석의 『자유부인』이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의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을 때에 대학교수 부인의 파탄적 행동을 그린 소설이 1년 만에 10만 부가 팔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이 소설이 “문화의 파괴자로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군”(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이라는 공격이 나왔고, 작가는 열띤 논쟁을 벌여야 했다. 『우리말 큰사전』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가운에 젊은 세대에게 유머감각을 크게 심어준 『얄개전』(조흔파)이 등장했다.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에는 『슬픔은 강물처럼』(최희숙), 『마음의 샘터』(최요안), 『청춘극장』(김래성),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조병화) 등이 있다. ◇ 1960년대 이데올로기 196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최인훈의 『광장』이다. 소설 속 철학도 이명준은 북에 올라가 북한의 정치체제에 가담해보지만 남의 ‘밀실’과 북의 ‘광장’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다 제3국행을 택한 끝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4·19의 성과를 5·16세력에게 빼앗긴 경험을 지닌 지식인에게 깊은 허무감을 안겼다. 이 시기의 베스트셀러에는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박계형), 『저 하늘에도 슬픔이』(이윤복), 『석녀』(정연희), 『조선총독부』(유주현), 『거대한 뿌리』(김수영), 『금강』(신동엽) , 『빙점』(미우라 아야코) 등이 있다. ◇ 1970년대 산업화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한 1970년대는 『별들의 고향』(최인호),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겨울 여자』(조해일) 등의 이른바 ‘호스티스 소설’들이 한 흐름을 이뤘다. 산업사회로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여성의 상품화 현상을 ‘호스티스’라는 사회적 존재에 초점을 맞춰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고도성장의 이면에 숨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늘은 또 있었다. 부랑노동자의 삶을 그린 황석영의 『객지』와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이 시대의 주목할 베스트셀러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박완서),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 『데미안』(헤르만 헤세) 등이 있다. ◇ 1980년대 역사성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이자 불의 시대였다. 대학과 신문사에서 쫓겨난 지식인들이 출판계에 유입되어 변혁이론의 창출과 보급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성과로 강만길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관련 서적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는 대하소설의 시대이자 시의 시대이기도 했다.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등은 모두 대중에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만든 ‘역사교과서’였다. 1980년대 내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이념시나 민중시가 거대한 트렌드였지만 정작 불로 뜨거워진 대중의 몸을 식혀준 것은 쉽게 읽히는 서정시였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해인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시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이밖에 이 시기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마광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바스콘셀로스), 『숲속의 방』(강석경), 『인간시장』(김홍신) 등이 있다. ◇ 1990년대 대중출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직후 시작된 1990년대가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은 ‘개인’이었다. 1990년대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세계는 넓고 (내가) 할 일은 많다』(김우중)에서부터 1990년대 말의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까지 책 제목에 ‘나’는 넘쳤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컴퓨터 길라잡이』(임채성 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호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등 개인의 성공 욕망을 자극하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가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의 출판시장을 휩쓴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의 역사인물소설 트로이카들도 사실상 자기계발서 역할을 했다.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던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일본은 없다』(전여옥),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등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물 위를 걷는 여자(신달자)』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양귀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등 사랑(결혼)과 일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퇴마록』(이우혁), 『드래곤 라자』(이영도),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석용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등이 있다. ◇ 2000년대 글로벌 출판의 시대 2000년대는 절대 고독의 개인이 발견되는 여정이었다. 고학력 사회가 되었지만 고학력자일수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는 바람에 성공욕구만 넘쳐났다. 덕분에 베스트셀러의 산실은 자기계발서였다.『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 줘잉),『화』(틱낫한),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배려』(한상복),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켄 플래차드 외),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시크릿』(론다 번) 『이기는 습관』(전옥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대중은‘성공’을 버리고 ‘행복’으로 말을 바꿔 탔다. 2000년대의 베스트셀러로는‘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과 같은 블록버스터 소설, MBC 방영도서,‘Why’를 비롯한 스토리만화 등이 있다. 이 밖에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국화꽃 향기』(김하인), 『가시고기』(조창인) 등과 같은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를 다룬 소설들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도 있다. ◇ 2010년대 디지로그 출판의 시대 1998년의 국지적인 IMF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차원이 달랐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광풍 앞에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적인 사람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셀프힐링’의 책들만이 인기를 끌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등 멘토가 던져주는 ‘위로와 공감’의 어록집,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등 사회적 어젠다를 담은 책, 대안의 삶, 성찰, 관계나 소통 등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해를 품은 달』(정은궐), 『미생』(윤태호) 등의 미디어셀러와 『서울 시』(하상욱)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다. 이 시대에 인기를 끄는 것은 위로와 공감의 어록, 관계와 소통을 다룬 책들이다. 이제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한기호(韓淇皓)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학 학사, 2000년 제41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기획부문 출판상, 학교도서관 저널 대표이사.
- 2015-04-03 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