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버들 북 꾀꼬리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리움미술관
‘버들 북 꾀꼬리’는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탐구하는 강서경 작가의 최대 규모 미술관 개인전이다. ‘정井’, ‘모라’, ‘자리’ 등 기존 연작부터 발전된 다양한 작업인 ‘그랜드마더타워’, ‘좁은 초원’, ‘둥근 유랑’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산’, ‘귀’, ‘아워스’, ‘바닥’ 등 한층 다변화된 형식의 신작까지 작품은 총 130여 점에 이른다. 전시 제목이자 신작 영상의 제목인 ‘버들 북 꾀꼬리’는 전통 가곡 ‘이수대엽’(二數大葉)의 가사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시각·촉각·청각 등의 다양한 감각과 시·공간적 차원의 경험을 아우르는 작업 특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각기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고 더불어 관계 맺는 ‘진정한 풍경’을 늘 고민해왔다.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미술관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헤쳐 모인 각각의 작품은 서로 연결되고 상호작용하는 연대의 서사를 펼친다. 강서경 작가는 이를 통해 나, 너, 우리가 불균형과 갈등을 끊임없이 조율하며 온전한 서로를 이뤄가는 장(場)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
일정 12월 2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3·1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우리 서화 연구에 힘쓴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 서거 70주년을 기념해 ‘근대 문예인’으로서 그를 집중 조명했다. 오세창은 부친 오경석에 이어 오래된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씨 금석문(金石文)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또한 옛 글씨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상형고문(象形古文)과 전서(篆書) 작품을 제작했다. 상형고문을 쓴 ‘어魚·거車·주舟’는 그림이 연상되는 작품으로, 옛 글씨의 문자성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고대 문자의 그림문자적 특성을 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세창의 손길이 남아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이루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Stage
◇드라큘라
일정 12월 6일 ~ 2024년 3월 3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데이비드 스완
출연 김준수, 전동석, 신성록, 임혜영, 정선아, 아이비, 손준호, 박은석 등
뮤지컬 ‘드라큘라’가 10주년을 맞아 역대급 캐스팅과 함께 다섯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브램 스토커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드라큘라’는 400년 넘는 시간 동안 한 여인만을 사랑한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를 애절하게 그린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다. 국내에서는 서울에서만 네 번의 시즌을 거치며 40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했다. 이번에는 ‘드라큘라’의 대표 아이콘으로 통하는 ‘레드 헤어’ 김준수, 매력적인 외모와 목소리의 전동석, 지난 시즌 합류한 신성록이 드라큘라 역을 맡아 연기한다. 임혜영은 미나로 맞는 네 번째 시즌이고, 정선아는 초연 이후 10년 만에 미나로 돌아온다. 아이비는 미나로 처음 합류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일정 12월 19일 ~ 2024년 2월 18일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출 오경택
출연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 김리안
연기 경력을 합치면 무려 220여 년에 달하는 원로 배우 신구·박근형·박정자·김학철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 작품으로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라는 두 방랑자가 실체 없는 인물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내용을 그린 희비극이다. 에스트라공(고고) 역을 맡은 신구는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연극이다. 이제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모르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못 하겠다 싶어 과욕을 부렸다”라고 밝히며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행복을 찾아서
일정 12월 5일 ~ 2024년 2월 18일
장소 대학로 TOM 2관
연출 오인하
출연 김선호, 이동하, 안우연, 김슬기, 김나영 등
연극 ‘행복을 찾아서’는 2019년 초연된 연극 ‘Memory In Dream’(메모리 인 드림)을 한국 배경과 한국 이름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남자 주인공 ‘김우진’은 사진작가를 꿈꾸며 매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인물이다. 김선호와 이동하, 안우연이 연기한다. 여자 주인공 ‘이은수’ 역에는 김슬기, 김나영이 캐스팅됐다. 은수는 미술관 도슨트이자 큐레이터다. 낯선 서울에서 따뜻한 남자 우진을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차에서 내려 북적이는 부산역 역사를 빠져나온다. 역 광장을 가득 채운 건 가을 햇살이다. 그것은 체로 거른 듯 맑아 상큼하다. 발길에 절로 탄력이 붙는다. 부산역 맞은편 초량동 골목엔 ‘이바구길’이 있다. 부산 동구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옛날 동네다.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동네의 근현대 문화와 풍속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이바구길 초입엔 ‘구 백제병원’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근대건조물’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서양식 건물이다. 그런데 외관이 범상치 않아 도드라진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지은 건물이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멀쩡한 외모를 유지한 게 아닌가. 100년 풍상에 시달린 건축이라면 보통 낡은 기미를 풍기게 마련이다. 시들고 삭은 기색으로 시간의 횡포를 웅변하거나 고색창연한 운치를 돋우기 십상이다. 그러나 애초 워낙에 잘 지은 덕분일까, 이 4층짜리 적벽돌집 외형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당대의 첨단 건축 기법을 통해 등장한 건물인 걸 직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부는? 아쉽게도 원형을 많이 잃었다. 1972년에 발생한 화재로 많은 것이 잿더미로 스러졌다. 외부와 달리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한 탓에 피해가 컸다. 이후의 보수 작업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건물주는 원형을 복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벽면과 바닥의 형태는 물론 천장을 도배한 그을음까지 그대로 놔두었다. 기본이 원체 튼실해 뼈대까지 손볼 필요는 없었다. 이를테면 벽체 거죽이 얼마나 단단한지 콘크리트못 하나 박아 넣을 수 없었다니 말 다했다. 현재 이 빈티지한 건물 1층엔 카페가 있다. 묵은 세월이 새겨 넣은 신비감까지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재생 공간만이 가질 수 있는 투박함과 묵직함에 예술적 디테일, 나아가 건물 역사의 스케일까지 가세해 민감한 이들의 오감을 자극한다. 2층엔 창비출판사가 차린 복합문화공간 ‘창비 부산’이 있다.
저 옛날의 백제병원은 외과의사 최용해가 지은 대형 사립병원이었다. 그런데 건물의 용도 변화 여정이 다채로워 흥미롭다. 개업 5년이 지난 1932년, 최용해는 기묘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일본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그러면서 건물은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갔다. 이후 ‘봉래각’이라는 이름의 청요릿집이 들어섰다. 중일전쟁이 터지면서는 일본군 장교 숙소로 쓰였다. 해방 직후엔 부산 치안사령부 건물로, 1950년엔 중국 임시대사관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엔 개인에게 불하되면서 예식장으로 바뀌었다. 이후의 양상은 생략하더라도 어지러울 지경으로 변동이 잦았던 걸 알 만하다. 말하자면 ‘구 백제병원’은 부산의 사회사와 풍속사가 압축파일처럼 내장된 건물이다. 따라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모든 게 변한다는 걸, 흘러가고 지나간다는 걸, 세상에서 나그네 아닌 게 없다는 걸 일깨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승도 추락도, 기쁨도 슬픔도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이련만, 고정불변의 것으로 바라보는 착시와 오해를 교정하라 묵시하는 곳일 수도 있다.
아슬아슬한 ‘168계단’이 품은 사연
이바구길을 따라 이제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을 움켜쥐고 빼곡히 들어앉은 집들이 보인다. 간혹 새집도 섞여 있지만, 주로 자그맣고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간신히 숨을 쉬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곳은 삶의 변방이었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천신만고한 생활이 펼쳐졌던 곳이다. 의지가지없던 피란민들은 이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피란민뿐이랴. 부두 노동자, 자갈치시장 일꾼, 공장 근로자, 영세상인 등 중심부에서 소외된 서민들이 초량동에서 비지땀을 쏟으며 간절한 삶을 꾸렸다. 이바구길은 이렇게 유적처럼 남은 과거사의 명암과 요철을 이바구하는 길이다. 동네에 고인 문화적 요소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가시적으로 재구성한 문화재생 테마길이다.
볼거리는 충분히 많다. 발목 잡힌 듯 딱 멈추게 되는 건 ‘168계단’ 앞에서다. 좁고 길고 가파르기 짝이 없다. 허공에 펼친 사다리처럼 아슬아슬한 계단이다. 산동네 사람들은 이 험악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면제받지 못한 채 생활을 도모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아래 있었던 우물물을 퍼 나른 루트였으며, 노동의 피로를 한잔 술로 달래고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발길에 닳고 닳은 계단길이었다. 희망을 품고 고역을 감수했던 주민들의 일상이 계단에 비쳐 먹먹하다.
‘168계단’ 옆에는 ‘김민부 전망대’가 있다. 부산에서 출생해 31세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 김민부를 기리는 공간이다. 그의 시는 빼어났으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거의 잊힌 시인이 됐다.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자로 알려진 게 고작이다. 일찍이 김민부 시의 천재성을 증언한 논자들이 다수였지만 정작 그는 궁핍에 시달렸다. 시는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높이 날았으나 종단엔 실존의 비애로 무너졌다. ‘김민부 전망대’에 오르거든 그의 이름을 가슴으로 한번 호명해볼 일이다. 참으로 반가운 건 부산에서 ‘김민부 문학제’가 연례행사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속세란 더러 경박하지만 야박한 것만도 아니다. ‘168계단’을 거쳐 언덕 중턱에 이르면 ‘유치환의 우체통’을 만날 수 있다. 부산 동구에서 살다 타계한 유치환 시인을 추모하며 만들었다. 마음에 둔 이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과거나 미래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여도 좋겠다.
발길은 이제 ‘문화공감 수정’에 닿는다. 일제가 조선 침탈의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엔 일본식 가옥이 여럿 있다. ‘문화공감 수정’은 개중 번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전통 목조주택이다. 창호 문양 같은 세부 장식의 다양성,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급변하는 실내 공간 구성이 특징적이다. 한옥과 달리 복도 공간을 정교하면서 활달하게 구사한 대목 역시 일식의 전형이다. 이모저모 본때 있게 지은 집이다. 관리 상태도 최상이다. 전국에 적산가옥(敵産家屋, 자기 나라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 소유의 집)이 남아 있지만 이곳처럼 잘 보존된 집이 드물다고 한다.
1943년에 지어진 이 집은 해방 뒤 한국 사람에게 불하된 뒤 ‘정란각’이라는 고급 요정으로 쓰였다. 2007년에 이르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적산가옥을 쳐다보기조차 싫어했다.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로 인식해 철거나 개조를 능사로 삼았다. 그러나 적산가옥을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그럼 일본 정부가 반색하지 않을까? 침략의 증거물이 사라지니까.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가 겹으로 엉겨 있는 ‘문화공감 수정’은 캄캄했던 전 시대를 돌아보게 한다. 이곳 내부는 기능성과 미학으로 빼어나다. 온통 유리창을 낸 전면으로 들이치는 정원 풍경도 수려하다. 한때 이곳은 카페 공간으로 소비되었다. ‘인스타 핫플’로 유명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상징성이 흐려졌는데, 2021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역사 전시공간으로 전환했다. 옳은 결정이다.
정정숙 부산동구문화원 원장대행
“부산 동구는 부산 문화의 본산지다”
‘부산 동구를 알면 부산 전체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 지역사와 문화 측면에서 동구에 유형・무형의 많은 자산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동구엔 인적・물적 유입은 물론 문화 교류의 통로인 부산역과 부산항이 있다. 정정숙 문화원장대행은 이와 같은 정황을 근거로 ‘동구가 부산의 뿌리 역할을 했다’고 본다.
“동구는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래 명실상부한 부산의 관문으로 기능했다. 부산역 역시 문화자산을 축적하는 문물의 유입 경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러한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동구의 문화가 성장했으며, 여기에서 나온 에너지는 부산 전역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확산됐다. 동구의 문화는 한마디로 부산 문화의 본산이자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부산이라는 지명 자체가 동구에 있는 증산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동구의 문화 파워를 대표하는 공간을 꼽는다면?
“동구의 히스토리를 고스란히 담은 문화재생 테마 골목길인 ‘이바구길’이다. 이 길은 부산시가 2011년부터 추진한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탄생했는데, 매우 재미있고 매력적인 곳이다. 꼬불꼬불 연달아 이어지는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만날 수 있는 풍경과 명소마다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길을 걸으며 과거를 만나고, 그러다 문득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이바구길 인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 연계해 답사하면 한층 즐겁다.”
31세에 요절한 천재 시인 김민부를 기리는 ‘김민부 문학제’가 부산에서 운영되고 있어 반가웠다. 문학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시피 한 이름이라서.
“김민부 시인은 우리 동구의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혼을 기리기 위해 이바구길에 ‘김민부 전망대’를 조성했지만 미흡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공간 확장이나 시인을 재조명하는 문학 행사 활성화 대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부산동구문화원이 추진하는 역점 사업을 소개해달라.
“우리는 25개의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구민들의 호응도가 매우 높다. 특히 ‘노래교실’이 인기다. 무려 5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해 노래를 즐긴다. 옛 추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이 역시 반응이 좋다.”
예술 프로젝트 ‘꿈의 오케스트라 부산’을 운영하는 목적과 성과도 궁금하다.
“‘꿈의 오케스트라’는 문체부가 주관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국가 사업으로 전국 여러 곳에서 펼쳐진다.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동구문화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불우 청소년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의 한국형 모델이다. 음악의 힘으로 사회에 희망을 부여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 단원은 오디션을 통해 뽑은 초2부터 고2까지 60명, 음악감독 1명, 강사 9명으로 구성돼 있다. 성과는 매우 크다. 정기 연주회와 작은 연주회를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아이들이 음악을 즐기며 밝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라 다행스럽다. 이 아이들 중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나올 수도 있을 테고.”
5월 11일(목)부터 15일(월)까지 5일간 개최되는 2023 서울국제노인영화제(집행위원장 희유) 개막이 공식 선포됐다. 올해로 15회를 맞이하는 서울국제노인영화제의 이번 주제는 ‘일상의 회복,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개막식은 지난 11일 오후 3시 충무로 대한극장 3관에서 개최됐다. 창작 음악 그룹 '모던가곡'의 축하공연,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최기찬 의원의 축사로 포문이 열렸다. 이어 이수연 서울시 복지기획관, 박노숙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협회장,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을 비롯한 다양한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 보인스님은 개막식에 참석해 "일상의 회복, 과거와 현자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영화제가 지금, 여기를 잘 살아내는 용기와 위로를 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국제노인영화제 홍보대사로 위촉된 배우 기주봉과 지주연의 환영 인사도 더해졌다.
다음 순서로는 영화제 공식 트레일러 영상 ‘The Flim is Rolling with Digital’을 감상하고 영화제의 지향점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트레일러는 이상인 감독의 작품으로, 젊은 세대의 배우와 경험이 풍부한 배우들 간의 소통을 비추면서 영화를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트레일러와 더불어 전체 상영작을 살펴볼 수 있는 하이라이트 영상(EPK)이 상영됐다. 개막작인 질리스 맥키넌 감독의 '라스트 버스'를 시작으로,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고전 영화를 비롯한 국내외의 다양한 상영작 소개가 이어졌다.
이후 이번 영화제의 출품된 총 474편(국내 작품 320편, 해외 작품 154편)의 작품 중 본선 진출작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됐다. ‘그래도 사랑해’의 김명희 감독, ‘까치의 육아일기’의 차경미 감독, ‘연인’의 허건 감독, ‘사라지는 것들’의 김창수 감독을 포함해 국내 출품작 중 본선에 진출한 노인 감독의 작품 1편, 청년 감독의 작품 15편이 서울시장상을 받았다.
2023 서울국제노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희유스님은 “수많은 관객과 함께 여러 감독의 노력과 열정이 담긴 작품들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세대를 불문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축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희유스님의 발언을 끝으로 공식 개막이 선포됐다.
11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15일까지 5일간 2023 서울국제노인영화제가 5일간 열린다. 충무로 대한극장 및 영화제 전용 온라인 플랫폼 ‘온피프엔’을 통해 장편 작품 14편, 단편 작품 57편으로 구성된 총 71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국내외 단편 경쟁 부문의 11개 섹션을 포함해, 국내외 장편 초청, 기주봉 배우전, 배리어프리(barrier-free) 명예의 전당까지 다양한 작품이 상영될 예정이다. 영화는 무료로 상영되며, 상영 후에는 영화로 소통하는 관객과의 대화(GV)가 이어진다.
‘원조 팝페라 월드스타’이자 국민 애창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의 원곡 가수로 알려진 세계적 팝페라 테너 임형주가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라는 타이틀로 이달 12일(수) 저녁 7시 30분에 열리는 이번 콘서트에는 뉴저지 신포니에타 음악감독 출신의 마에스트로 이태영의 지휘와 코리안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함께 할 예정이다.
이번 음악회는 서울특별시 산하 25개 자치구에 거주 중인 코로나19 관련 의료진, 자원봉사자, 구급대원, 관계공무원 등의 ‘국민 영웅’들에게 티켓 기부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천주교서울대교구와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총괄후원을 통해 진행되는 이번 기부는 이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자 마련되었으며, 공연 관람을 원하는 신청자에 한해 티켓을 제공할 예정이다.
임형주의 소속사 ㈜디지엔콤은 공연의 제목을 ‘평화콘서트’로 정한 점에 대해 “완벽히 종식되지 않은 코로나19 대감염 사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가 혼란스러운 요즘”이라며 “오랜기간 대한적십자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 UN,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약한 바 있는 임형주가 수많은 이들에게 ‘힐링’을 선사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했다”고 밝혔다. 이달 말 발매될 자신의 팝페라 정규 8집 ‘Lost In Memory’(잃어버린 추억 속으로)와 동명의 타이틀을 부제로 붙임으로서 새 앨범의 발매를 기념하는 의미도 함께 살렸다는 후문이다.
임형주는 이번 공연에서 이태영 마에스트로의 지휘와 50인조의 ‘코리안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완벽한 호흡을 자랑할 예정이다. 1960~1980년대 한국음악계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패티김, 펄 시스터즈(배인숙), 트윈폴리오(윤형주, 송창식) 등과 같은 국민 가수들의 대표 대중가요들을 선보인다. 이와 더불어 ‘선구자’, ‘비목’ 등 정규 8집의 수록곡들은 물론 임형주를 위해 작곡된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꽃 한 송이’까지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클래식, 팝, 재즈, 뮤지컬 등 장르를 총 망라한 팝페라의 세계로 관객들을 안내할 것으로 알려져 뜨거운 호응이 예상된다.
이번 공연에는 이탈리아의 ‘2022 산레모 국제 신인 가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팝페라가수이자 테너 박종수(HUNKTENOR)와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배출한 예능인 겸 작곡가 유재환(UL)이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한다. 더불어 해당 콘서트 티켓 판매 수익금의 일부는 세계평화를 위한 기금으로 지정 기부 될 예정으로 밝혀져, 관객들에게 여러모로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음악회로 기억될 것으로 기대된다.
총괄후원을 담당한 천주교서울대교구 산하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천주교서울대교구 산하의 비영리 NGO 단체로서 해외 원조 및 국내 각종 불우이웃 지원사업, 장기기증, 자살예방 등 생명 존중을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유경촌 주교는 “코로나 시기에 사회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한 긴급 모금과 지원을 진행해왔다”라며 “이번 기회로 마음을 위로하는 ‘천상의 목소리’의 소유자 임형주와 함께 코로나 극복을 위해 애쓰고 있는 분들을 초대하는 ‘평화콘서트’를 총괄후원하고, 서울시청과 협의해 공연 티켓 기부를 진행하여 감사와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현재 해당 공연의 티켓은 인터파크, 예스24, 예술의전당 공식 홈페이지에서 절찬 예매 중에 있다.
한편, 임형주는 지난 2021년 5월 개신교 신자에서 천주교 신자로 개종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부터 현재까지 cpbc 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종합음악프로그램 ‘임형주의 너에게 주는 노래’의 메인 DJ 로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2~4시에 팬들을 만나고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오는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2주간 ‘창경궁 야연’을 진행한다. 온라인 선착순 예매는 16일 오후 3시부터 시작한다.
지난해 처음 선보인 창경궁 야연은 ‘효심’을 주제로 역사‧문화적 가치를 반영해 부모에 대한 공경과 가족 간 소통 도모를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부모님 중 1인이 체험자로 직접 공연에 출연하고, 가족들이 관람객이 되어 함께 즐기는 방식을 새로 도입해 참여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조선시대 궁중잔치 중에 가장 작은 규모인 야연(夜讌)은 왕세자가 아버지인 국왕을 위해 직접 준비하고 주관하는 특별한 잔치였다. 19세기 순조 때에 효명세자가 처음 만들었으며, 주빈인 왕에 대한 드높은 공경의 뜻이 담긴 연향(宴饗, 잔치를 베풀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다. 포구락(대궐 안의 잔치 때 벌이던 춤 중 하나) 및 가곡 공연으로 국왕에 대한 왕세자의 공경과 효심을 보여준다.
창경궁 야연 체험자는 국왕으로부터 야연에 초대받은 고위 문‧무관, 정경부인이 되어 조선시대 전통 복식을 착용하고 행사의 주빈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전문 사진사가 찍어주는 체험자의 독사진과 가족사진을 액자와 함께 자택으로 배송 받을 수 있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통명전에 앉아 부모님과 함께 따뜻한 차 한 잔과 궁중 병과를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메뉴는 2인분 기준의 구선왕도고 죽, 구선왕도고, 곶감단지, 잣박산, 약식, 개성주악, 개성약과, 사과정과, 유자화채로 구성됐다.
창경궁 야연 입장권은 9월 16일 오후 3시부터 인터파크 티켓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으로 판매할 예정이다. 1인당 2매까지 예매할 수 있으며, 참여 비용은 체험자 1인과 가족 관람객 최대 4인(총 5인)을 포함해 1매당 10만 원이다.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일정 중 휴궁일인 9월 26일과 우천 시를 제외하고 전일 운영된다.
행사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한국문화재단 홈페이지를 참고하거나 전화(02-3210-4802)로 문의하면 된다.
노래를 잘하는 이들이 그룹을 이루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합창단이 있다. 하지만 구성원이 여성 성악가, 그것도 소프라노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레이디스타즈는 특별하다. 성악계의 스타들이 모여 창단한 그룹이기 때문이다.
소프라노는 이탈리아어로 ‘높은’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에서 온 단어다. 말 그대로 성악에서 높은 음역을 담당하는 여성 성악가를 말한다. 단지 높은 영역의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흔히 프리마돈나라고 말하는 오페라의 주인공은 소프라노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오페라가 이것을 전제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렇게 모인 여섯 명은 무대에서 프리마돈나로 스포트라이트를 당연히 독차지했던 인물들이다. 모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주인공들이다 보니, 어떤 면에선 어느 정치인이나 기업인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머니들이 만든 성악의 길
리더인 김경희도 “소프라노들이 그룹을 이루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남성 성악 그룹은 조금씩 생기는 편인데, 그에 비해 여성 그룹은 거의 없어요. 그것도 여섯 명이나 모인 경우는 거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저희는 대부분 독일이나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에서 수학한 해외파로만 구성되었으니 더욱 신기한 일이죠.(웃음)”
레이디스타즈는 한국예술문화재단이 중심이 돼 지난 3월 창단했다. 6월 17일에는 첫 번째 창단콘서트도 가졌다. 남성 테너 10명이 모인 ‘더 텐테너스’ 역시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탄생했다. 일종의 남매 그룹인 셈이다.
콧대 높은 소프라노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모습은 예상과 다르다. 부르는 노래도 오페라 아리아뿐만 아니라 팝페라, 팝송, 가곡 등 다양하다. 여러 장르를 소화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지난 창단콘서트 때는 ‘넬라 판타지아’나 ‘섬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곡들도 선보였다.
연습 과정은 어땠을까? 빛나던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보니 일종의 기싸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합이 잘 맞아 자매처럼 지낸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의 결속력의 배경에는 다양한 이력과 유사한 성장 과정도 한몫했다. 같은 소프라노지만 김정현은 메조소프라노 출신으로 다른 역할 분담이 가능하고, 정지민은 뮤지컬을 전공한 이력의 소유자다. 현재는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성악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유사하다. 그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김경희는 트로트 가수 출신의 어머니 영향을 받아 음악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닮아 끼가 있을 거라며 민요를 가르치기도 하셨죠. 그러다 중학교 때 성악을 해보았는데 적성에 맞아 시작하게 됐어요. 성악을 만나면서 성격도 바뀌고, 제게 물려받은 것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죠.”
김정현도 비슷한 경우다. 피아니스트 출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많아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오래 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때 성악을 만나면서 진짜 맞는 것을 찾게 됐죠. 악기를 연주할 땐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기분이었다면, 노래는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으니까요.”
김정현은 대학 졸업 후 국내에서 알아주는 오디션에 합격해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길에 올랐다. 솔리스트를 위해 합창을 하던 어느 날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 남 뒤에서 합창만 할 것 같아서 용기를 냈다”고 설명했다.
막내인 강수연은 본인이 원했다가 어머니의 후원을 받은 케이스다. “내성적이었는데도 초등학교 때 교회 성가대에서 솔로를 뽑는다길래 바로 손을 들었죠. 너무 하고 싶었어요. 무대를 보신 선생님이 성악을 권해주셔서 발을 내딛게 됐어요. 변성기를 겪으면서 포기하려 했는데, 어머니 생일에 선물 대신 참가를 강요하셨던 오디션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성악을 다시 시작하게 됐죠.”
이은진의 출발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맞는 것을 찾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고. 체육부터 컴퓨터까지 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에 남은 것이 합창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성악을 한다니까 반대하셨어요. 집안에 성악을 접해본 사람이 없으니 덜컥 겁이 나셨던 거죠. 그러다 나중에 음악 선생님도 될 수 있다며 허락해주신 것 같아요.(웃음).”
코로나가 만든 고난
하지만 이들이 가족의 응원을 등에 업고 탄탄대로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리더 김경희와 함께 수험 생활을 하기도 했던 ‘단짝’ 정지민은 “오랜 솔로 생활을 마치고 합류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빠른 비트의 음악에 끌려 대학원에서 뮤지컬을 전공했죠. 하지만 뮤지컬계 나름의 구조가 있기 때문에 주역을 맡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솔로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고 행사도 다녔는데, 쉽지 않았어요. 혼자 성악곡도 하고, 뮤지컬곡도 하고, 공연 외적인 부분도 모두 처리해야 했으니까요. 방송국에서 로고송 가수 생활도 했고요. 앨범도 하나 발매했어요. 처음에 합류 제안을 받았을 땐 성악을 공부하긴 했지만 벗어난 곳에서 오래 활동한 터라 좀 망설여지기도 했는데요, 그룹 내에 친구도 있고, 함께하는 활동이 재미있고 기대돼요.”
이은진은 유학 과정에서 방황을 겪었다. 독일에서 계속된 입시 실패에 당황해하던 때 마스터 클래스에서 만난 선생님의 추천으로 프랑스로 나라를 옮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입국신고서에 국적이 북한으로 되었을 정도였는데도 무작정 떠났죠. 이후 죽어라 연습하면서 30대 가까이 되어서야 노래하는 방법을 알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야 ‘목소리 개발이 안 됐다’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문부희는 성악을 접하는 과정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음악 시간만 되면 문부희의 독무대가 열렸고, 선생님들은 당연하다는 듯 성악을 추천했다. 학년이 바뀌고 학교가 달라져도 선생님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악을 전공했다. 학비 걱정에 시립대를 선택해야 했지만 고난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남편을 만나 약혼을 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어요. 예상과 다르게 유학 기간이 길어지던 와중에 첫째를 낳았죠. 학업과 객원 합창단 생활, 육아를 병행한 셈인데 쉽지 않았어요. 밤 11시에나 주변 친구들이 봐주던 아이에게 돌아온 날도 많았고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서로 돕고 살던 시절이죠.”
이어 졸업 직전에 둘째가 생겼고, 한국으로 돌아와 셋째를 낳았다. 큰애는 벌써 아홉 살이다.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해볼까 생각하던 시점에 코로나가 터져버렸어요. 일이 자연스럽게 정리되면서, 이참에 아이를 하나 더 갖자고 마음먹었죠. 신기하게 막내 돌이 가까워지니까 다시 노래할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레이디스타즈를 만났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어서 지금은 너무 행복해요.”
강수연 역시 코로나 여파를 겪었다. 유학 이후 자리 잡았던 미국에서 팜비치 오페라단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던 와중에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다.
“코로나 초기 뉴욕에서 동양인은 지하철도 제대로 탈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인종차별이 심해지면서 매니지먼트 회사에서도 잠시 한국에 가 있으라는 조언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작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소극장 오페라 축제에 참가했다가 리더를 알게 돼 레이디스타즈에 참여하게 됐어요.”
함께라서 더 설레
평생 클래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활동한 이들이기에 다른 분야의 음악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을까 궁금했다. 김경희는 “시대가 변했다”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멤버 모두 오페라나 클래식 무대에서 개인적인 활동도 많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그룹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다른 장르의 음악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저도 유학 시절에는 클래식이 아닌 다른 무대는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무지했어요. 하지만 많은 무대에 서면서 관객들 입장을 생각하게 되고, 형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그래서 많은 관객들과 공감할 수 있는 그룹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이은진은 레이디스타즈 활동이 모두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은 새로운 곳과 통하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기분이에요. 문을 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이후에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제게 달려 있으니까요. 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많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긴장보다는 설렘이 더 커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갈 수 있으니까요.”
성악에서 진성으로 가장 높은 음역을 소화하는 남성을 테너라고 부른다. 일반인들은 흉내 내기 힘든 높은 음을 내기 때문에 관객들은 테너의 노래에 열광한다. 오페라에서 테너가 여성인 소프라노와 함께 남녀 주인공을 독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이런 테너 10명이 모인다면? 그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그룹이 있다. 바로 한국예술문화재단이 기획한 그룹 ‘더 텐테너스’다.
그룹 더 텐테너스는 한국의 젊은 테너 10명으로 이뤄진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이다. 10명 모두 개인 연주자(성악가)로 각자 활동하면서도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공연이 있을 땐 뭉쳐서 화음을 이뤄낸다.
개개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성악 애호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음악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리더인 이재필과 세컨드 백승화를 중심으로 강전욱, 김재민, 원유대, 유정우, 이경호, 이사야, 조찬욱, 최용석 등이 힘을 모았다. 더 텐테너스 멤버는 모두 외국의 음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해외파’로, 이들 중 상당수는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각종 공연의 단골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함께 모여 있다고 이들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다.
조연은 없는 주인공들만의 무대
늘 주인공을 차지하며 음악계에서 인정받은 테너는 자존심이 세고 다루기 힘든 상대로 취급받는다. 어디서든 주목받는 존재라는 뜻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3대 테너라고 기억하지만 대부분의 대중이 3대 바리톤인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토머스 햄슨, 브린 터펠에 대해서는 생소해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런 테너 10명이 어떻게 모이게 된 것일까?
리더 이재필은 “사실 이런 경험은 음악을 오래 한 저희도 낯선 일입니다. 오페라 주인공을 뽑는 오디션 같은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죠”라며 웃는다.
이재필 “텐테너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룹은 하나가 아닙니다. 몇몇 국가에서 같은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룹들이 있어요. 국내에선 저희가 처음이죠. 목적도 비슷합니다. 가곡이나 팝송 등을 클래식화해서 아름다운 노래를 하기 위해 모였죠. 저희도 지난해 6월 결성돼 활동 중입니다. 테너라고 모두 같은 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음역대를 통해 앙상블을 이룰 수 있고, 테너만의 강점인 청량한 고음을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죠. 한 곡을 10명이 나눠 부르다 보니 쉬지 않고 최대치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사실 보수적인 성악계에서 성악가 10명이 모여 클래식이나 아리아가 아닌 다른 장르의 노래를 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용기가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이경호 “성악 팬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관객들의 요구가 늘었죠. 저희 입장에서도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양보이기도 하고요. 가요나 팝송이라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저희의 색깔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반감도 줄어드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관객과의 만남 ‘감동’
이들은 지난해 11월 오랜만에 관객들과 마주했다. 팝페라 페스티벌 ‘비상’이 그것이다. 이들에겐 지난 2년 가까이 코로나19로 인해 멈춰졌던 공연의 첫 재개였던 셈이다.
유정우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공연에 참여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죠.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봉쇄가 훨씬 심해 무대는커녕 집 안에만 갇혀 있었거든요. 더 텐테너스를 통해 큰 무대에서 함께 공연할 수 있었던 것 자체로도 정말 좋았고, 관객 덕분에 오히려 제가 힘을 받은 기분이었죠.”
원유대 “공연 덕분에 저희가 끈끈해질 수 있는 계기도 됐죠. 연습을 통해 더욱 가까워져, 개인적으로는 우리 팀의 우정으로 더욱 뜨거워진 무대였다고 생각해요.”
오랜 기간 멈춰 있었던 이들에게 무대를 통해 만나는 관객은 최고의 회복제라는 것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며 입을 모은다.
김재민 “많은 에너지를 받아요. 호응을 잘 해주시면 힘이 나죠. 늘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지만, 그래도 기복이 있을 때가 있잖아요. 공연 전에는 피곤한 기분이 들어도 관객의 반응이 뜨거우면 어느 때보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착각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이사야 “무대에 섰는데 아무도 환호해주지 않으면 민망하잖아요.(웃음) 최고의 환호를 끌어내기 위해서 늘 연구하고 노력하게 되죠. 우리에게 관객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만드는 자극제예요.”
자존심 강한 테너 10명의 조합에서 불협화음은 없었을까? 이들에게도 첫 경험이었을 ‘그룹 활동’은 어떤 의미였을까?
최용석 “몇몇은 해외에서 유학 중에 이미 알던 사이예요. 동문도 있고요. 좁은 음악계 안에서 추천을 통해서도 영입이 이뤄지다 보니, 서로의 어색함을 쉽게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승화 “공식적인 활동을 한 지 1년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도 늘 즐겁습니다. 물론 모두 자존심 강한 예술가들이지만, 10명이 모여 하모니를 만들어가기 위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지내고 있죠. 궁극적인 목적은 즐겁게 음악을 하는 것이니까요.”
공연 소외 지역이라면 어디든
강전욱 “사실 다른 장소에서 만났으면 라이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죠. 이렇게 테너들이 모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걱정도 많았는데, 다행히 사이좋게 긍정적 방향으로 향하고 있어요. 같은 테너라는 경쟁심이 건전한 긴장감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관찰자의 입장에선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대단한 테너 10명의 조합이니 당연히 무대의 규모나 개런티 등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좁아진 공연 환경에서 이들의 활동이 걱정됐다. 그러나 리더 이재필은 “어떤 무대라도 설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재필 “상대적으로 문화생활을 하기 어려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할 계획입니다. 성악과 대중음악의 차이점 중 하나는 마이크를 쓰지 않고 육성의 울림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심리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해요. 공연 관람 경험이 많지 않은 분들이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소외 지역을 찾아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지금 이들은 2월 18일 공연 때문에 분주하다. 한국예술문화재단의 하다아트홀에서 신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전당 같은 대형 무대는 아니지만 이들의 각오는 진지하다.
백승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가르쳐줬어요. 지금 연주자들 입장에선 크든 작든 관객이 있는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공연이라는 것은 결국 관객이 있어야 어우러지는 예술 분야니까요. 이제 무대의 크기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그의 깍두기라는 표현에 내심 놀랐다. 국내 최초의 팝페라 가수. 3500회 넘게 무대에 섰고, 미국과 영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유학파 출신이다. 자존심 높은 성악가가 후배들의 공연에 ‘깍두기’를 자처하다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강마루(59)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와 관객을 만나고, 노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1등! 강마루.”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까까머리 중학생은 어리둥절했다. 그간 그의 노래 실력을 칭찬해준 것은 학교 음악 성적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성가경연대회에서 1등이라니. 그것도 충남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회에서 말이다. 강마루 교수는 “성악의 길에 발을 내디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내가 재능이 있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죠. 물론 학교 음악 수업 시간에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 정도 아이는 한 반에 하나씩 있잖아요. 당시만 해도 지역이나 교회마다 ‘가곡의 밤’이나 ‘성가의 밤’ 같은 행사가 많아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할 수 있었죠. 훌륭한 노래를 들으며 자란 것이 자양분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까까머리 중학생 성악가를 꿈꾸다
그날로 중학생 강마루의 미래는 성악가가 되었다. 음대 진학을 목표로 한 수험생 생활은 한양대 입학으로 결실을 맺었다. 장학금 덕분에 등록금 걱정도 없었다. 이후 그는 미국행을 선택한다. 성악가로 활약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고 강 교수는 이야기했다.
“당시 성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해외 경험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죠. 그리고 성악은 결국 서양 음악이니까, 그들은 어떻게 노래하는지, 발성은 어떤 식인지 현장에서 듣고 배우고 싶었어요. 물론 세계적인 무대에 서고 싶다는 야망도 있었고요. 한편으론 운이 좋게도 수업료를 면제받아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죠.”
미국 최고의 음악대학으로 꼽히는 메네스 음대(Mannes School of Music)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살인적인 뉴욕의 물가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다양한 경험을 강요했다. 강 교수는 “안 해본 것이 없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택시 운전 같은 알바는 기본이고, 불러주는 무대에는 무조건 올랐다. 무대의 수준이나 어떤 관객이 오는지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양한 무대에 올랐어요. 크고 작은 공연뿐만 아니라 한인 교회 성가대 지휘도 하고, 레슨도 하러 다녔죠. 생활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무조건 해야 했거든요. 덕분에 미국에서 공부는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어요. 이후 영국 런던 테임스밸리 대학원에서의 수학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죠.”
인생을 바꾼 노래 ‘슬픈 전쟁’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의 유학 시절을 “마치 아이를 품은 산모와 같았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기대에 찼던, 현실은 괴롭지만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디에서나 차별을 겪어야 했어요. 한편으론 당연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죠. 실력으로 보여주고 이겨내면서 한국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해낼 수밖에 없었어요.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것을 이겨내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이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유학을 다녀와 한국에서 만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와 경원대와 협성대 강단에 서며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을 막 시작한 무렵, 그는 예기치 못했던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계기가 된 노래, ‘슬픈 전쟁’과의 만남이다. 1996년 가요계에선 낯설었던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만남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에선 “발라드의 미래를 제시했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사실 노래를 부른 최진경 씨와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 앨범 준비하던 제작자와 인연이 있었는데, 고음이 가능한 바리톤을 찾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선뜻 나섰는데, 지금 생각하면 제게는 숙명 같은 일이었어요.”
이 노래는 그에게 ‘국내 최초의 팝페라 가수’라는 칭호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안겨줬다. 물론 보수적인 성악계에선 그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그의 생각은 크로스오버나 팝페라에 대한 도전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대중이 쉽게 접하기 어렵잖아요. 일단 기본적인 공부가 되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분야니까요. 그러다 보니 소수만 즐길 수 있는 관상용 도자기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았어요. 그에 반해 제 음악은 그 안에 김치도 담고 찌개도 담는 생활용 그릇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랐죠. 좀 부딪히고 상처가 나더라도 모든 사람이 쉽게 쓸 수 있는 그릇이요.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문제되지 않았어요.”
실패작 된 최고의 명작
그러나 화려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만 받을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후학 양성을 위해 의욕을 갖고 나섰던 대학 설립은 결국 경제적 부담만 안겨줬다. 이후 의욕을 갖고 진행한 1집 활동은 매니저의 횡령으로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져버렸다.
“1집 ‘산책’을 준비할 때 너무 행복했어요. 1년간 공들여 준비하고, 제작에만 세 달이 걸렸죠. 세션으로 기타의 함춘호, 드럼에 신석철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참여했죠. 곡도 너무 좋았는데, 많이 아쉬워요.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잊혔으니까요. 그래도 너무나 좋은 곡이라 언젠가는 ‘역주행’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어요.”
그리고 9년 만에 발매한 2집은 의외의 선택으로 화제를 모았다. 트로트 가수 태진아의 곡 ‘동반자’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성악계 일부에서 ‘딴따라’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던 그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태진아 씨가 흔쾌히 곡 사용을 허락해줘서 타이틀곡으로 부를 수 있었죠. 그저 신나는 전통가요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가사를 음미해보면 무척이나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노랫말을 갖고 있어요. 원곡의 ‘출신성분’ 같은 것은 제게 중요치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삶과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동반자’는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어서 제게 수많은 무대를 선사해준 고마운 곡이에요. 주변에서 “왜 태진아냐”며 폄하하는 분도 많았지만, 그분의 창법이 갖는 매력이 있고, 둘이 함께 선 무대가 많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의 화합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달려오던 그의 무대는 잠시 멈춰야 했다. 많은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의 등장은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잠시 멈춘 사이 그동안 저의 활동을 되돌아보았죠. 음악인으로 살아오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음악이 나를 정화시키고 힐링을 주어야 하는데, 삶의 수단으로만 남용한 것은 아닌지 반성했어요.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면서 정작 제 자신은 위로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분은 저랑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 11월 30일은 그에게 소중한 경험을 전해준 날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모처럼 관객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경제TV의 팝페라 페스티벌 무대였다. 그가 설립한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조직한 성악 그룹 ‘더 텐테너스 그룹’과 함께 공연할 수 있었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30~40대 테너 10명으로 이루어진 이 그룹을 조직하기 위해 그는 3년간 공을 들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그룹은 해외에선 활동이 활발하지만 국내에선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11월 공연에선 관객들이 박수는 가능했지만 환호성은 지르지 못했어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방역수칙 때문이죠. 무대에 서는 입장에선 김 빠진 사이다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관객과 함께하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누구나 열망하고 바라는 소망을 잊고 있었던 거죠.”
더 텐테너스 그룹에 대해서는 “성악계의 BTS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음악대학 강사 이상의 자리에서 활약할 수 있는 해외파 출신 테너들로 구성된 성악 그룹으로, 갈수록 설 무대가 좁아지는 후배들을 위해 강 교수가 기획한 작품이다. 후배 위해 깍두기 되고파 강 교수는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꾀하고 있다. 대중이 성악이라는 어려운 장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마스터스 성악 최고위과정’은 벌써 21기가 되었을 정도로 전통을 자랑하고 있고, ‘노블레스 최고위과정’이나 ‘와인인문학 최고위과정’도 인기를 얻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음악이 꿈이었지만 이루지 못한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의 염원을 담아 한 분씩 가르치다 보니 정규 과정이 되었어요. 처음엔 예상치 못했던 일이죠. 사회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모니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람을 느껴요.”
그가 최근에 설립한 공연장 ‘하다 아트홀’도 같은 맥락이다. 2020년 10월부터 준비한 장소가 지난해 11월 결실을 맺었다. 하다 아트홀은 후배들에게 공연할 장소를 제공하고, 한국예술문화재단의 교육 장소로도 활용하기 위해 만든 공연장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만나 사회적 관계를 만들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놀이터’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이 있잖아요. 인간의 본질이 유희라는 점에 기초하는 인간관인데, 저 역시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먹고 놀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길 희망해요. 모두가 ‘놀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노는 사람은 찾기 어렵잖아요. 술밖에 모르는 우리 현대인에게 인문학에 기반한 다양한 ‘노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해요.”
하다 아트홀이라 이름 지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박정희 씨다. 노래를 하고 공부를 하는 다양한 행위의 산실이 되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라고. 마케팅 전문가로 활약하다 은퇴한 박정희 씨는 현재 수만 명의 팔로어를 자랑하는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강 교수는 “저희 공식 유튜브 채널보다 팔로어가 많아 샘이 날 정도”라면서도, “아내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서 유튜브 채널 운영 등 여러 활동에 대한 다양한 조언에 늘 귀 기울이며 산다”며 웃었다. 가수 강마루로서의 계획은 어떨까? 그는 불쑥 깍두기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팝페라 가수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많이 만드는 것이 꿈이에요. 이제 저도 신체적인 상황이 젊을 때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져요. 앞으로는 제 무대에 대한 욕심만 챙기며 후배들과 경쟁하기보다는, 후배들이 성장하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팝페라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되고, 가수와 관객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길 기대하고 있어요. 전 그저 ‘깍두기’로 그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무대에 서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생활을 마지막 그날까지 유지하고 싶어요. 그게 제 희망입니다.”
오전 9시와 오후 7시. 만화가의 안부 인사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는다. ‘봉선이’는 매일 다른 사진을 배경으로 아침저녁마다 인사를 건네온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150명에게 5년째 꾸준히 보냈다고 하니 내심 기대하는 마음마저 든다. 내일은 어떤 안부 인사를 받게 될까. 좋아하는 만화책 시리즈의 다음 편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팬의 마음이 바로 이런 걸까.
만화가의 상징인 빵모자와 검정색 긴 코트 차림. 만화박물관 로비에서 마주친 권영섭 한국원로만화가협회 회장은 ‘만화가 할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 자체였다. 호쾌하게 주먹 악수를 건넨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는 대신 만화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로 향했다.
기획전시 ‘만화, #시대를 담다’가 진행 중인 1층 전시관에는 시대의 얼굴로 자리 잡은 만화가들의 이름과 대표작이 짝 맞춰 걸려 있었다. 한국전쟁 후 삶의 애환이 담긴 캐릭터 봉선이가 붉은 섬에 갇히고, 이를 구하러 가는 방울이 아빠의 여정과 봉선이를 둘러싼 사건사고를 다룬 작품. 만나뵙기 전부터 받았던 안부 그림 속 봉선이가 전시 액자 속 흑백 만화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캐릭터를 채색하는 스타일이나 말풍선 속 대사는 달라졌지만 1960년의 봉선이와 2021년의 봉선이, 둘의 그림체만큼은 한결같았다.
성실함을 타고난 그림 이야기꾼
60년이 훌쩍 넘는 꾸준함의 원천은 역시 만화에 대한 오랜 애정이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만화를 처음 접했다. 친구들이 만화책을 한두 권 들고 다니는 것을 눈여겨본 그는 집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주고 친구들의 만화책을 빌려 읽었다. 감으로 빌린 만화책을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그 만화책이 교회에서 빌려준 것임을 알았다. 이에 교회를 다니며 교회의 만화책을 모두 읽은 그는 만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학생 권영섭은 만화의 근간인 이야기와 그림, 두 가지 모두 곧잘 했고 좋아했다. 신문 보기를 즐겼고 혼자 남아 그림을 연습했다. 수업을 마친 뒤 쉬는 시간마다 교실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어렵잖게 이야기를 덧붙일 때면 친구들과 선생님께 ‘만화가 해보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책과 신문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지역신문 ‘대구매일’에서 주최한 만화 작품 공모전에 덜컥 입선하면서 만화가의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가 자란 영주 시골 동네에서는 학생 신분으로 큰 신문사 만화 공모전에 당선돼 원고료를 탔다는 사실이 크나큰 자랑이었다고 한다.
꿈이 확고했던 그는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 동아일보 편집국 문화부장을 만났다. 신문에 연재 만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조르기 위함이었다. 원하던 대로 바로 만화를 그리지는 못했지만, 인쇄 조수로 일하면서 만난 김경언 만화가로부터 만화에 대해 배울 기회를 얻었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1959년 연합일보 아동만화 공모전에 당선된 그는 과학만화 ‘우리들의 척척박사’로 연재를 시작했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연재는 3년간 이어졌다.
“만화에 나온 그대로 시험이 출제돼 도움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내가 진짜 과학박사인 줄 알고 박사님, 박사님 하며 과학에 관해 묻는 편지도 받고요.”
아이들을 위하여
그를 당대 인기 만화가 반열에 올린 작품은 ‘오손이와 도손이’다. 고아로 자란 형제가 헤어졌다가 검사와 도둑이 되어 만나는 내용의 만화는 당시 아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60년대 만화계 3대 출판사 중 하나였던 부엉이문고가 소년만화에 두각을 드러내는 그를 알아보고 새 작품을 의뢰해왔다.
생각해둔 작품은 있었지만 제목과 주인공 이름을 정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는 교회에서 알게 된 김천애 전 숙명여대 음악대학장이 전국을 다니며 불렀던 가곡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듣고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당시 준비하던 작품의 제목은 ‘울 밑에 선 봉선이’, 주인공의 이름은 봉선화에서 본떠 봉선이가 됐다.
봉선이 만화의 이야기는 집안 형님을 보며 구상해냈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장교가 될 만큼 성공했지만 질 나쁜 친구들의 꾐에 넘어가 사업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불행해진다는 기구한 사연을 닮았다. “형에게 직접 충고하기가 어려워서 만화에 경고의 의미를 담았는데, 나중에 만화책을 받아본 형님이 자신에게서 착안된 인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에 불같이 화내시더군요.”
가족 내의 실랑이는 있었으나 만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권영섭은 여세를 몰아 ‘봉선이 시리즈’를 이어서 발표했다. 시리즈 중에서 ‘울 밑에 선 봉선이’ 이후 발표한 ‘봉선이하고 바둑이’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 1960년대 당시 남자아이들은 만화 ‘산호의 라이파이’, 여자아이들 사이에선 ‘봉선이하고 바둑이’ 만화를 보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신문 만화를 연재했는데, 봉선이 만화가 인기가 많으니 다음 이야기를 내달라고 독자들이 성화였어요. 출판사 사장이 한 달에 책 두 권을 그리면 집을 사주겠다고 부추겼지만 불가능했죠.”
당시 서울의 일반 가정집은 밤 12시면 전깃불이 나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촛불을 켜놓고 새벽 4시까지 작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하루에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작업을 했다. 모두가 잠들었어야 마땅한 새벽을 노려 침입하려던 도둑을 깜짝 놀라게 한 뒤 내쫓은 경험은 그에게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게다가 최초의 순정만화라 당시 여성 독자들로부터 하루에 팬레터를 스무 통씩 받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는 진지한 고민을 적어 보낸 편지에는 일일이 답장을 써주었다. 만화 작업에 편지 답장까지 쓰니 이틀에 한 번은 밤을 새워야만 했다. 바빠도 그만두지 못한 이유는 보람 때문이었다. 한 번은 안 좋은 선택을 하려던 독자가 봉선이 만화 시리즈를 읽고 위로를 받았으며 용기를 갖게 됐다는 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 소녀 시절 만화로 접한 봉선이 덕분에 용기를 얻고 새 삶을 살게 됐다며 감사 인사를 하러 오는 이들이 아직도 종종 있단다.
먹고살 만큼은 돼야 하지 않겠나
1960년대 만화 대본소는 2만여 개가 넘었는데, 이곳에서 얻은 만화책은 한 번 읽고마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는 질이 좋지 않은 선화지를 사용해 출판 만화책 자체의 질도 떨어졌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만화가를 하겠다고 몰려들어 만화의 수준에 악영향만 미쳤다.
만화책은 사회의 악으로 규정당해 질타를 받았다. 여성단체 등 여러 단체가 모여 어린이날만 되면 남산에서 만화책 태우기 운동을 할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군부 정권은 만화자율심의위원회를 세우지 않으면 만화를 전부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해왔다. 하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 1968년 창립한 한국아동만화가협회다.
그는 이때부터 부회장 세 번, 회장 세 번을 역임하며 협회라는 큰 단체를 운영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외에도 어린이전도협회 부회장을 지냈던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원로만화가협회를 만들고 12년째 회장을 맡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원로만화가협회는 만 60세 이상 작품 경력이 20년 넘는 원로 만화가들로 이뤄진 비영리 법인이다. 경로사상과 이웃사랑, 국민화합과 상생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거나 만화 자서전을 의뢰받아 제작하는 등 재능기부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원로만화가협회 일을 하는 데는 다른 목적이 하나 더 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데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적어도 손자들이나 그 자손들이 ‘할아버지 나 뭐 먹고 싶어요. 저 장난감 갖고 싶어요’ 할 때 당당히 사줄 수 있는, 그런 체면 유지하는 정도로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는 한국원로만화가협회를 이끌며 원로 만화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누구보다 힘쓰고 있다. 한국 만화 발전에 힘쓴 협회 회원들이 손주 앞에서 당당하길 바란다.
그래서 한국원로만화가협회의 신년 목표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 ‘NFT’ 사업의 성공이다. 희소성을 갖는 디지털 자산인 NFT는 블록체인 기술로 생성되어 교환과 복제가 불가능하다. 그는 원로 만화가들의 그림과 기술을 NFT에 접목해 원로 만화가들에게 고정적인 수입처를 만들어주려 한다. 그는 NFT 관련 스타트업 직원들과 만나 계약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39년생 아니라 39세 현역 만화가
스스로 ‘39년생’이 아닌 39세라 말하고 다닌다. 그만큼 바쁘게 살고, 미래를 계획한다. 우선 100권짜리 성경만화 전집을 내는 것이 목표. 현재는 40권가량만 완성하고 출판사의 사정으로 더 이상 작업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어린이 성경 주석 전집 완성’이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많으며 누구보다 어린이를 중시한다. 어른에게는 지금 현재의 가치뿐이지만 어린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동 정서에 맞는 만화가 없어 순정만화를 그렸듯, 그는 3년 동안 수원시 어린이집을 돌며 유아를 대상으로 만화교실을 열었다. 자기 얼굴을 그리게 하고, 가족이나 사물을 그리게 하면서 창의력을 개발하는 30여 분의 수업에 집중한다. 다음에 또 와달라며 붙잡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고 한다.
“어린이는 박사가 될 수도 있고 과학자가 될 수도 있죠. 심지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봉사는 언제든 기꺼이 하고 있습니다.”
그의 봉사는 어린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원로만화가협회는 그를 필두로 노인들을 위한 만화교실을 열기도 했다. 여러 경로당을 돌며 일주일에 세 번, 두 시간 수업 동안 과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표현하게 하고, 책자도 제작하게 도왔다. 그는 이외에도 교육부나 문화관광부 측 인사에게 제안해 여러 재능기부 만화교실을 열고자 계획하고 있다.
매일 밖에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나가는 그는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지하철 타고 오가는 시간에는 휴대폰을 꺼내 아침저녁으로 보낼 안부 그림을 그린다. 이 역시 5년째 빼먹지 않고 해오는 일. 적지 않은 나이에 현역 만화가로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그의 원동력은 지치지 않는 도전정신이었다.
5060세대에게 던지는 조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막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더라도 문제는 없다. 그가 운영하는 실버만화교실에서 솜씨 좋은 이들은 만화가로 데뷔하기도 했다. 꼭 만화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숨겨진 장점이 있거든요. 그걸 죽이지 말고, 나를 보면서 희망을 갖고 도전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건강만 하면 노인이라고 못 할 게 뭐 있겠어요?”
2004년 2월 28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유는 40년간 몸담아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쫓겨나다시피 잃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교육계에 퍼진 정년 단축이 내게 먼저 닥친 것이다. 그렇다고 난 미리 준비한 계획은 전연 없었다. 만 61살 일손을 놓기에는 빠른 나이다. 당장 내일부터 할일이 없다. 가진 기능이나 특기도 없고 남과 같이 기운이 세거나 막노동을 할 정도의 힘도 없다. 또 바둑이나 장기, 화투 등 오락도 취미도 없고 내놀만한 운동기능도 전연 없다. 오직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샛님같은 아주 여린 봄꽃같은 난 모든 일에 쓸모가 없었다.
퇴직 후 생활은 기상하여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에 도착해 값싼 점심과 목욕이 전부며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약장사 구경만 종일토록 관람하며 흘러간 유행가에 젖어 마실 줄 모르는 막걸리 한 두잔에 취하거나 해져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길 몇달째 참다참다 폭발한 아내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살바에는 다 죽자고” 짜증을 낸다. 이러길 수차례 어느날 울분과 흥분을 참지 못한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난 가슴이 답답하여 길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신고로 119가 몇분만에 도착하여 난 분당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평생 처음타본 응급 앰뷸런스에 계속 말을 시키는 간호원 구급대원의 봉사에 처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수분 후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기본 검사와 링겔 등 응급처치를 받고 병실 구석 후미진 코너 침대에 눕혀졌다. 사방을 살펴보니 별별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 목숨을 거둘 것 같은 나이든 할머니, 뼈만 앙상하여 마치 해골같은 머리가 흰 할아버지, 한쪽 발이 없는 중년의 남자, 울다지쳐 버린 갖난애, 거기다가 지독한 소독약 냄새.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없었다. 아비규환 속 분위기에 젖기도 전에 난 담당 간호원에게 이제 멀쩡하니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반기는 기색을 하며 뒤늦게 찾아온 아내가 퇴원 수속을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와 시원한 내방에 누워 명상에 잠겼다. 병원에서 본 환자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 61세,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는 너무 젊은 나이임을 실감했다. 뭔가 해봐야하고 한번 죽이되든 밥이되든 시도해 보고 후회해도 늦지않을 것 같아, 난 큰 결심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벼룩시장’, ‘교차로’ 등 길가에 비치된 정보지를 봤다. 내게 맞는 일감은 없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친구와 만나 울분을 풀 셈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친구와 어울려 동물원을 걷는데 눈에 뜨인 광고판에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동물해설사’ 양성기사가 확 눈에 들어왔다. 난 친구에게 컨디션이 안좋아 먼저 간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와 동물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나는 동물해설사이자 한 마리의 영리한 원숭이
“여보셔요. 거기 서울동물원 기획과죠. 동물해설사를 뽑는다는데, 나이 제한은 없나요?”
“어떤 서류를 갖추어야 하나요?”
난 급한 마음에 여러 가지 궁금한 문제를 애원하다시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다양한 서류를 갖추어 인터넷 접수를 했다. 다행히 서류전형엔 합격했다. 그뒤는 몇 주간 강습이었다. 강의 내용은 수많은 동물과 멸종위기의 동물 종보전, 자연생태계 복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을 막고 인간과 공존하는 법 등 다양한 전문적인 교육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과 면접 실연을 통해 실제 동물 앞에서 뭇관중이 보는 가운데 동물해설을 하며 최종선발을 거쳐 43명을 뽑는데 난 당당히 합격했다. 난 기뻐 날뛰면서 방안을 빙돌며 괴성을 질렀다. 아내가 놀라 날 쳐다보았다. 마치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이렇게 환희의 순간을 만끽한채 동물원의 출근은 계속되었다. 동물원의 일과는 날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했다. 이유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그날 체험학습을 올 아동 수 대로 당근, 배추잎(케일), 사료 등을 손질하는 것인데 당근은 하나하나 씻어 크기가 알맞게 자른 뒤 바구니에 준비하며 물기를 닦는 것이다. 그리고 코스별로 해설을 하며 체험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최고의 광대처럼 재미있고 교육적인 산 교육이어야 인기가 있어 환영받는다. 즉 해설 방법 및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셔요. 저는 동물해설사 xxx입니다. 제 별명은 영리한 원숭이구요. 오늘은 여러분을 남미 페루에서 많이 사는 기니피그 먹이주기, 다음엔 말, 나귀 다른 점 관찰, 다음에 사막에 사는 미어캣은 무엇을 즐겨먹나요? 여러분이 만약 이 침에 쏘인다면 생명이 위험하지만 이 동물은 즐겨먹는 전갈을 맛있게 먹지요. 다음엔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먹이주기, 꼭 장갑을 끼고 먹이를 줘야해요 하며, 케일잎과 배추잎을 잡는 법을 알려주고 다음엔 원숭이, 그리고 염소, 양 등의 특징을 설명하고 먹이를 주면 돼요. 먹이를 던지거나 동물을 귀찮게 하면 안돼요.”
머리를 흔들며 재롱을 떨고 나이 많은 노인답지 않게 귀여운 표정, 손짓으로 윙크를 날리며 분위기를 잡고 해설이 끝나면 지도일지를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운 뒤 일과를 반성하고 정리한 뒤 귀가하는 것인데 이 생활이 어찌나 즐거운지 나의 즐거운 변신은 대만족이며 거기다가 듬직한 해설사 월급을 받는다. 도랑치고 가재 잡고 하듯이 건강챙기고 시간보내고 급료 받는 나이든 늙은이로는 최대한 대우며, 피복, 모자, 소지품, 간행물 등 다양한 혜택을 받아 최고의 나날을 보낸다. 정말 교직에 버금가는 변신이다. 나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변신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실패의 나날에서 난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모형항공(글라이더, 고무동력 입상 및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동물원 해설이 없는 쉬는 날의 무료함을 달래고 내 취미생활 건강을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난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 블랙이글 축하비행과 공군참모총장배 스페이스 첼린져 모형항공기 대회를 참관했다. 아주 멋진 행사며 이 늙은 나이에도 나도 참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내 자신도 할 것 같아서 서울과학사를 찾아가 모형항공기 셋트를 구입했다. 설명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만들었다. 밤을 새우면서 거의 완벽하게 조립하여 인근학교 운동장에서 시험 비행을 해봤다. 처음 만든 모형비행기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날고 체공 시간은 1분대였다. 몇 번을 날려봐도 아주 잘 날라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몇 번을 연습했다.
그리고 예선대회 즉 경기, 인천 예선대회가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에서 있었는데 그 대회에 참가했다. 내 차례가 되어 공군 보조원이 50m 후방에서 글라이더를 날려 주는데 왠지 몹시 서툴러서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번을 뒤돌아 보면서 뛰는데 글라이더가 영 상승을 하지 않고 왼쪽으로 “휙” 곤두박질하며 앞날개가 활주로 바닥에 부딪쳐 두동강이로 갈라져 1차 비행은 0점이었다. 난 당황해서 날개 조각을 회수하고 2차 비행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데 남은 한 대 글라이더도 날개가 튼튼하지 못해 날개 중앙에 금이 가있었다. 급히 강력 접착제를 바르고 순서를 기다렸다.
두 번째 마지막 시합에서는 옛학교 과학주임이 와서 보조역할로 글라이더를 뒤에서 잡아주어 사수, 조수, 보조가 맞아 멋지게 바람을 가르며 높은 창공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앞날개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망가진 채 공중에서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에 꼴아 박았다. 더 이상 기회도 없고 글라이더도 없어 퍽 아쉬웠지만 난 대강 비행기 잔해를 끈으로 묶어 보루지 박스에 쳐넣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허사였고 그 공역과 재료비 등이 너무 아까워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한 나는 집에 돌아와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실패의 원인분석
◎ 모형 항공기가 튼튼하지 못해 쉽게 부서졌다.
→ 다른 참가자들은 낚싯대 카본으로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 재료 문제
◎ 견인자(사수)와 보조자(조수)의 싸인이 전연 안 맞음
→ 혼자만의 힘으로는 글라이더를 띄울 수 없음. 보조자 대동해야 함. : 보조자 양성
◎ 바람의 강약에 맞는 견인 연구
→ 견인 기술 부족. 연습이 필요함.
또 실패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또 재료 및 여러 가지 계측장비 등을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또 기록이 좋은 모형항공기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어 살펴봤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한국 최고의 장인에게 사사 받았다. 그러니까 한국 모형항공의 대부 격인 경복궁 옆 동학과학 심xx 사장의 50년 이상의 노하우를 하나씩 익혀가며 모형항공기 킷트 공장제품을 이용하지 않고 수제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즉 앞날개, 동체 수평, 수직꼬리날개 종이는 외제를 사서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해에 대한 준비를 하나씩 진행했다. 제작 기술도 늘고 요령이 생겨 견인방법도 바람의 세기를 큰 연을 만들어 날리면서 익혔고 이탈 및 체공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는 나의 각오는 연습으로 더욱 자신을 얻어갔다.
실패 후 1년이 지나 난 또 제 10 전투비행단 활주로에 시합을 위해 섰다. 조수는 우리집 차남이다. 평소에 같이 호흡하며 연습을 한 터라 손발이 “착착” 맞았다. 내 차례가 되어 계측하는 심사위원 대위의 신호가 떨어졌다. 난 무수히 연습을 한 터라 자신있게 센바람을 줄의 길이와 느슷함과 당김의 조화를 섞어 요리조리 걷다 뛰다하며 글라이더를 마치 살아있는 황새처럼 어루고 달래며 하늘 높이 띄우며, 그러니까 상승기류를 찾아 마치 강태공의 잉어낚시인양 뛰면서 글라이더 상태를 보며 살펴시 이탈시켰다. 많은 참가자와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무한대∞”를 연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일반부에서 3분(1차), 2차 3분 도합 6분으로 1위, 금상을 받았다.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 상을 받는다고 축하박수가 유난히 컸다. 이렇게 예선은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고 회심의 미소를 먹음은 채 기쁜 마음으로 본선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는 9월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난 마음을 다시 잡고 제작 및 견인을 더욱 열심히 했다. 글라이더는 완전히 터득했다.
새파란 멍이 온 몸에 퍼져 기력이 쇠약해도 고무동력기는 내려야 했다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본선, 공군참모총장대회, 고무동력기 이야기. 더 강하게 변신한 나의 모습
글라이더는 전국을 제패하고 몇 년간 노력 끝에 제 1인자로 자리메김 다. 이제는 고무동력부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역에는 값비싼 외국제품 및 부속으로 무장한 전국의 과학사의 문하생들이 주름잡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거기다가 최신장비, 풍향풍속 계측기, 강력한 드릴로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을 사용하는 그들을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끈기와 변신의 귀재인 나는 하나씩 착착 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외제 고무동력기의 설계도를 수소문 끝에 구입하여 하나하나씩 내 기술로 개조했다. 고무동력기 동체, 외제는 값비싼 두랄루민·티타늄 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이점을 가벼운 플라스틱을 말아 가늘게 쪼갠 대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트러스 공법으로 동체를 만들었는데 단단함은 물론 가볍기가 기본동체의 1/3 무게도 안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또 프로펠라의 크기가 기성품은 작기에 대추나무로 세밀하게 깎았고 고무줄은 미제를 구입했다. 또 프로펠라를 돌려 고무줄을 감는데 조수가 꼭 있어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기위해 혼자서도 고무줄을 감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다. 즉 강력드릴에 강철고리를 부착시킨 뒤 프로펠라 걸이를 세워있는 기둥이나 나무에 감고 프로펠라를 회전시켜 감는 방법인데 어른이 잡아주는 힘보다 서너배 많이 감고 아주 편했다. 이렇게 만전을 기한 나의 변신 기술은 공군참모총장배 본선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가슴쓰린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본선대회 1차 시기에서 연병장의 축구 꼴대에 고무줄 감기와 드릴을 이용해 두서너배 많이 감은 고무동력기를 날렸는데 연병장 주위 아주 높은 반절쯤 죽어가는 소나무에 걸려 프로펠라는 허공을 향해 “빙빙”돌면서 ‘퍼덕’ 거렸다. 급히 달려가 행사 보조위원에게 내려 줄 것을 이야기했다. 보조요원은 철제 사다리를 펴서 준비한 장대로 내리려고 애썼지만 고무동력기에 닿지 않고 위험하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난 보조원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다리를 올라 소나무에 다람쥐처럼 올라가 장대에 갈쿠리를 달아서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고무줄이 가지에 감겨 풀리지 않아 한참만에 겨우 비행기를 내려서 떨어트리고 사다리가 걸쳐진 나무둥지를 디디는 순간 사다리가 넘어가 함께 떨어져 풀숲에 내동댕이쳐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회수한 비행기를 손보고 날개를 바로잡고 고무줄을 바꿔 꿰어 다시 드릴로 감아 마지막 2차시기에 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차시기 비행 체공 기록은 만점 3분 무한대였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1등인데 다른 조의 기록이 궁금해서 각조의 기록을 조마다 쫓아 다니며 살펴봤다. 만점은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전체 시합이 끝나고 시상식만 남았는데 난 기록이 좋아 늦게까지 대기했다. 몇 시간 뒤 시상식이 열렸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는 마지막이었다. “일반부 고무동력 금상, xxx” 내 이름이 호명됐다. 별이 4개이신 공군참모총장님이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시며 빙그레 웃으시며 “노익장을 과시하니 보기 좋습니다”하시며 부상과 상장을 주셨다. 그리고 기념촬영. 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을 제패한 벅찬 변신이었다.
영광뒤에 따른 무서운 변화에 난 몇 달을 고생하며 치료에 온 정신을 쏟았다
-고무동력기를 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아픈 이야기 (낙상사고 후유증에 헤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엉덩이와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치뼈 그 다음엔 허리, 다음엔 목 등 차가 흔들릴 때마다 통증은 더 심했다. 난 천안 휴게소에서 내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팬티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살펴봤다. 멍 비슷하게 푸르슴한 색이 하체에 내려앉았다.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차를 타고 귀가했다. 금메달을 딴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에 약간의 통증은 견딜만했다.
하루가 지났다. 통증은 온몸에 퍼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온몸을 살핀 뒤, 멍을 보고 주사와 처방전을 간호원에게 시키며 한달 가량 쉬면, 멍이 가실거니 걱정 말라며 진료를 마쳤다. 약국에서 복용약을 받아서 복용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온몸에 번진 시퍼런 멍, 거기다가 성기며 고환까지 자주빛 멍이 소변을 볼 때마다 공포가 더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난 아내 몰래 한방병원을 방문했다. 한의사가 내 온몸을 보는 순간 혀를 차며 “빨리 왔어야지요. 이지경이 될 때까지 참고 있어요. 피가 굳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하며 날 나무랬다. 그리고 온몸에 수없이 많은 침과 뜸을 뜨고 1시간 쯤 후엔 부항을 뜬다며 엉덩이 부분을 내리고 부항을 수십차례 색이 진한 부분마다 검붉은 피를 뽑았다. 참 신기하고 시원했다. 이러길 하루 건너 두달 치료 끝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 처음으로 한의학에 경이를 표했다.
멍이 가시자 마자 나의 변신은 계속되었다. 각종 모형항공대회와 더 나아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여 대표자격을 땄다. 그러니까 모형항공의 귀재로 변신한 나는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는 경기도 과학연구원 위촉 강사로 뽑혀 모형항공 지도를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드론이 대세라 막이 내렸지만 퍽 아쉽다. 그렇지만 난 드론에 도전하기엔 너무 손놀림이 늦어 포기했다.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다져지는 나의 글쓰기 실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다
-백일장에 도전한 나의 이야기
나는 모형항공기 기능 섭렵을 끝내고 또 다른 변신을 꾀하던 어느 날 문득 백일장대회 현수막을 지나가던 길에서 눈여겨봤다. 또 변신의 기회를 잡으려고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먼저 서울 ‘교보문고’를 방문해서 백일장 입상문집을 사서 탐독했다. 그리고 입상작품의 특징과 글의 짜임, 쓰는 요령을 습득 뒤 나도 백일장대회에 참가했다. 내 딴에는 정성껏 바른 글씨와 내용을 그럴싸하게 써서 제출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상자 발표가 있는데 내 이름은 없고 정성을 쏟은 보람도 없이 낙방이었다. 영문을 몰랐다. 떨어진 이유를.
돌아오는 전철에서 난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반문해봤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그 뒤 계속 백일장대회에서 낙방을 연거푸 서너차례한 뒤 난 그 어떤 1% 부족한 내 자신을 찾았다. 그러니까 난 겉만 번지르한 실속 없고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감동이 없는 허황된 글을 쓴 것이다.
내 결점을 찾은 뒤 백일장 대회를 기다린 어느 날 대전 동구에서 ‘우암송시열’ 백일장이 있었다. KTX를 타고 원거리 대회를 참가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문사가 참여한 전통 있는 대회라 난 기가 팍 죽었다. 축하공연이 끝나고 글제가 발표됐다. 주제는 ‘어머니’였다. 난 어머니와 같이 산 50년을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내 어머니는 70여리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쌀을 머리에 이고 자취하는 전주의 언덕빼기 집까지 부식을 마련하여 난 배고픔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그리고 내가 교사로 발령을 받아 전등불도 안 들어오는 산간 벽지 오지 학교에 부임했을 때 삼시세끼를 따뜻한 밥을 해주시며 허름한 관사에서 동고동락하시며 내 뒷배를 후원하셨는데 끝내는 영화를 못 누리신 채 돌아가셨는데 눈물겨운 사연을 하나하나씩 깨알같은 글씨로 써냈다.
그뒤 서너 시간 뒤에 입상자 명단이 벽에 붙고 호명이 되었다. “수필부 금상, xxx 나오셔요” 처음으로 받은 상 그것도 장원이었다. 돌아오는 KTX열차가 왜 그리 느린지 난 처음으로 느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은 서울 한강 ‘구상백일장’, 고양 ‘어르신 백일장’, 수원 ‘정조대왕승모백일장’, 평택 ‘사랑사랑백일장’ 등 무수한 영광을 안은 채 난 제 2의 변신을 계속했다. 늙은 나이에 그 기쁨은 날 흥분케 했고 생에 대한 그 어떤 자신이 생기는 나날이었다. 난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변신을 꾀하고 싶어 도전을 계속했다.
젊은이와 경쟁에서 스피드를 요하는 시합은 무리인가
-KBS1 ‘우리말 겨루기’에서 변신은 요원한 길인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TV의 ‘우리말 겨루기’는 날 들뜨게 한다. 그러니까 방영되는 월요일에는 모든 약속과 내 생활은 비상이다. 몇 년째 노트와 동영상을 캠코더를 찍어보고 여기에 수반되는 문제집, 국어사전, 속담, 사자성어, 크로스워드 책. 필요한 서적은 모두 구입해서 보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모두 구입하여 보고 준비는 매일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달인을 향한 내 꿈은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다. 석두일까? 자책도 해봤다. 치매증상이 있나? 치매 검사도 했지만 치매는 아니었다.
‘우리말 겨루기’ 예심이 인터넷에 뜨면 내 마음은 왠지 급해진다. 그러니까 예심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KBS홀에서 수많은 경쟁자와 한판 겨루기를 한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지필고사 20문제를 크로스워드, 십자말 칸을 인쇄한 용지와 대형 스크린을 비추면서 두 번 읽어주고 단 20분만에 답안지를 회수하여 30분쯤 채점이 완료되면 참가자의 10% 정도 합격자를 불러 2차 면접 및 실기 그리고 방송에 하자가 없고 유모어, 또는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재미있고 재치있는 참가자를 선별하는 테스트 과정이다. 난 예심에는 언제나 수월하게 통과하며 본방에 출연까지는 항상 무난하게 뽑힌다.
그 이유는 다 까닭이 있다. 40년간 교직에서 다져진 말솜씨, 동물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익힌 유모어, 평소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가곡 레파토리가 있다. 예전 유럽 현지 이탈리아에서 외국 여행객 이탈리아 가곡 부르기에서 상을 탄 저력이 있기에 말이다. 예심을 합격한 나는 마지막 단계 면접에서 뜻밖에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는 면접심사위원의 청에 망설이다 정색을 하며 무대에서 그 당시 뜨는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열창했다. 면접대기자와 심사위원 전원이 앵콜을 연호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더 열정적으로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들 “늙은이가 웬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지”하며 혀를 찼다.
며칠 후 인터넷에 합격자의 이름이 떴다. xxx 상위에 랭크된 내 이름 석자. 본방송 출연을 연락받고 밤새워 깨알같은 국어사전 글자를 돋보기도 쓰지않고 보던 어느 날 더 이상 눈이 침침하고 흐려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했다. 보름 후엔 글씨가 똑똑하게 보였다. 그런 어느 날 ‘우리말 겨루기’ 녹화가 있으니 10시까지 KBS 녹화장이 있는 본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담당 PD에게 받고 새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달려갔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것이다. 이윽고 출연자 전원이 당도하여 분장실에서 마치 장가가는 새신랑마냥 아주 정성이 담긴 분장을 받았다. 기분이 황홀했다.
한 시간 뒤 녹화방송으로 ‘우리말 겨루기’가 엄지인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첫 단계부터 중간까지는 최상위 점수로 정상이었다. 우승이 눈앞에 보이며 젊은이들도 별것 아니구나 하며 자신이 생겼다. 마악 누름단추 벨을 누르며 우승을 확정짓고 싶은 감정이 앞섰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기다리면 결승단계에 진출하는데 감점이 시작됐다. 오답이 연속된 나의 경거망동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났다. 멋진 변신, 변태는 지나친 욕심과 만용 때문에 끝났다.
하지만 한 번 출연한 사람은 2년을 기다리기에 매미는 땅속에서 수년을 기다리는데 난 다시 변신의 칼을 간다. 2년간 그리고 화려한 날개를 펴며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그날의 변신을 꿈꾸며 오늘도 내 길을 간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며, 이 길을 기꺼이 간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이제 내 나이 80.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가며 끝없는 변신을 꾀하며 더 행복한 나날을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무한한 변신. 이제 무엇을 찾아 또 화려한 변신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변신은 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 만병통치약인가 보다. 나의 변신은 오늘도 계속된다.
•수상소감 - 우수상 미니자서전 은정남
“죽는 순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도전하고파”
응모하신 사람 중에서 나이가 좀 많습니다. 팔순이니까요. 그래서 저의 하찮은 글을 건져 올려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용기를 주신 선생님들과 캐나다에 이민을 간 아들한테 축하 인사 받았는데 정말 뿌듯합니다.
큰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제 세상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쓰고 또 갈고 닦아야겠죠. 죽는 순간까지 숨이 멎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해보고 싶어 공모전에 출품하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인들이 많잖아요. 노인들은 지하철 공짜로 타며 놀러 다니고 또는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걸 탈피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봤는데 이번에 글을 한 번 써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 신석정 시인이 저희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좀 잘 쓰려고 나름대로 좋은 책 많이 읽고 또 문학 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항상 친구들이나 동호회 회원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했어요. 그러면 그분들이 모니터링해 주면 수정하며 첨삭하면서 배웠습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장원은 떼놓은 당상일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 가지고 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동물해설사, 모형항공기, 우리말 나들이 도전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나 사건을 소재로 삼아서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어 행복합니다. 일감이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번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준비한 주최 측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쓸 만한 어른들과 아까운 시니어들이 많거든요. 사실 어르신들은 좋은 자원과 자산을 갖고 있고 재능과 경험이 다양한데 쓸모없이 이렇게 소멸해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번 공모전이 뜻 깊은 일을 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시니어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믿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