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식 행사에서 반복적으로 불리지 않아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애국가 다음으로 재생되는 노래가 있다. 바로 ‘아름다운 나라’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신문희는 ‘제2의 애국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 노래의 아름다운 나라는 대한민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신문희에게 ‘아름다운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곳이 곧 아름다운 나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마음이 무대 위의 노래를 넘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해왔다.
한 곡을 끝까지 붙들겠다는 선택

가수 신문희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 ‘아름다운 나라’는 처음부터 환영받은 곡은 아니었다. 그가 이 곡을 타이틀로 들고 나왔을 때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북한 노래 같다’, ‘공익광고용 노래 같다’, ‘왜 이런 곡을 타이틀로 했느냐’는 말이 이어졌어요. 국제행사에서는 주최 측이 찾아와‘아무도 모르는 노래고 낯선 분위기의 노래니 노래를 바꿔달라’고 무례한 요구를 한 적도 있어요. 세상에 이런 노래 하나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밀어붙였습니다.”
대중의 반응을 계산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랑 노래를 불렀다면, 숱하게 쏟아지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면 더 빨리 대중에게 알려졌을 테지만 그는 오로지 노래로만 무대에 섰다.
그는 “‘아름다운 나라’를 부르겠다는 선택은 단순히 한 곡을 고른 일이 아니라, 가수로서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정하는 결정에 가까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 노래는 억지로 알린 곡”이라고 덤덤하게 표현했다. 방송국의 요청도, 대중의 취향도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끝까지 고집한 노래였다는 얘기다. 그 결과 가수 신문희가 대중에게 각인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늘 노래를 시작한 뒤에야 반응을 얻는 가수였어요. 여느 가수들처럼 등장만으로 환호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죠. 어느 순간부터 소개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관객들이 휴대폰을 들기 시작했고, ‘원곡자가 온다’는 말에 객석의 공기가 바뀌는 걸 느꼈어요.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네요, 너무 오래.”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는 자랑도, 후회도 없었다. 다만 견뎌온 시간이 담겨 있었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노래

신문희는 이 노래를 만들 때부터 분명한 원칙을 세웠다. 처음 작사가가 제시한 제목은 ‘행복한 나라’. 이를 ‘아름다운 나라’로 바꾸고, 가사 어디에도 특정 국가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를 넣지 말아달라고 요청해 노래의 방향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대한민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 노래가 어느 나라에서든 불릴 수 있기를 바랐어요. 이 노래는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그곳이 아름다운 나라라는 메세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죠.”
신문희에게 ‘아름다운 나라’는 처음부터 국가를 찬미하는 노래가 아니라 희망을 마주하는 태도였다. 삶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곧 ‘아름다운 나라’라는 믿음이다.
이 정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분명해졌다. 특히 ‘아름다운 나라’가 중학교 1학년과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이후, 그의 태도는 오히려 더 엄격해졌다.
“그전까지는 내 노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배우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내 것만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정치적 맥락이 닿을 수 있는 무대에는 서지 않기로 다짐했다. 선거철마다 수많은 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했고, 어느 진영의 행사에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국가 공식 행사에는 섰다. 이 역시 본인이 세운 기준 ‘아이들이 이 노래를 배울 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감정으로 기억하게 하지 않겠다’를 지키는 일이다.
국가 행사에서 자주 부르면서도 그는 ‘애국가의 대체’로 설명하지 않는다. 신문희에게 ‘아름다운 나라’는 선언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국악과 성악, 돌아온 길이 만든 노래

이 노래가 지금의 형태로 완성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곧장 성악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가장 빠른 길로 가지 못했다고 해서 가장 늦게 도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듯, 그의 목소리에는 지름길 대신 돌아온 시간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음악 교사의 권유로 국가무형유산 가곡의 예능보유자였던 고(故) 홍원기 선생을 만나 ‘여창가곡’을 배우며 국악계에 발을 들였다. 홍원기 선생은 신문희를 수제자로 삼아 긴 호흡과 소리를 끌고 가는 법을 가르쳤다. 스승의 지도 아래 악보를 읽고, 숨을 아끼며, 소리를 밀어내는 대신 품는 법을 배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음악 교사는 그에게 성악을 권유하며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오페라 티켓을 선물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처음 접한 오페라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하지만 당시의 신문희에게 마냥 축복은 아니었다.
“오페라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일어나 박수 치는데, 저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화려한 무대와 음악에 완전히 압도된거죠. 그때 ‘나는 음악을 하겠다’고 확신했어요. 하지만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했죠. 제 자랑 같지만 공부를 꽤 잘했거든요. 공부 잘하던 딸이 ‘음악’을 하겠다고 나서니 반대가 거셀 수밖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 마음도 이해되지만 당시엔 많이 서러웠답니다.”
음악을 하겠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마주했고, 그 과정에서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학교에 가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학교 선생님들이 직접 나서 아버지를 설득했고, 결국 아버지는 허락과 동시에 ‘대신 교수가 되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회상했다.
쉽게 허락된 길이 아니었기에 그는 더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생계를 위해 레슨을 병행했다. 공부와 연습은 밤까지 이어졌고, 돌아보면 버틴 시간에 가까웠다. 이때 신문희는 크로스오버 음악을 만났다.
“처음엔 너무 낯설었어요. 클래식 전공자로서 정통에서 벗어난 음악이라고 느꼈거든요. 하지만 유럽에서 크로스오버 음악이 하나의 장으로 소비되는 걸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나눈 경계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연하다는 걸 느꼈죠.”
자신이 걸어온 길이 이미 ‘경계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악에서 익힌 호흡, 성악에서 다진 발성, 그리고 견뎌온 시간까지. 크로스오버는 새로운 선택이 아니라 이미 준비돼 있는 길에 가까웠다.
그는 훗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듯, 우크라이나 오덴사국립음악대학교 최연소 교수, 최초의 동양인 교수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음악을 선택한 대가를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낸 셈이다.
국악과 성악 사이를 돌아온 그 시간은 결국 ‘아름다운 나라’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로 만들었다. 여창가곡에서 익힌 긴 호흡과 소리의 결, 성악의 발성과 구조가 이 한 곡에 다 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돌아와서 남들보다 늦은 건 아닐까?’라는 고민을 많이 하시잖아요. ‘돌고 돌아온 시간이라도 그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시간을 거치지 않았으면 지금의 이 노래는, 신문희는 없지 않을까요?”
그는 돌아왔을지언정 그 길은 헛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그 모든 시간이 쌓여 지금의 목소리가 됐기 때문이다.
노래가 삶이 되고, 삶이 다시 노래가 될 때

무대 위의 신문희는 누구보다 단단해 보이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과 함께 산다. 천식이라는 기저질환,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가사가 통째로 사라진 경험 이후 생긴 무대 공포증. 그래서 그의 관리는 ‘비법’이 아니라 ‘생활’이다.
“관리는 대단한 걸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맞게 사는 거죠.”
최근 발표한 신곡 ‘썸데이(언젠가는)’ 역시 같은 결이다. 화려한 홍보나 체계적인 지원도 없지만, 이 노래가 ‘아름다운 나라’처럼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제가 정말 힘들 때 쓴 노래예요. 숨쉬기조차 힘들 때요. 이 노래를 듣고 ‘가사가 본인 이야기 같다’며 인스타그램 DM을 엄청 보내요. 누구나 숨쉬기 힘들 때가 있는데 요즘은 3포 세대, 4포 세대라는 말처럼 포기를 먼저 배운 20~30대의 메시지가 특히 많아요. 위로가 된다고 하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너무 짠해서 마음이 아파요.”
팬들과의 관계도 조심스럽다. 댓글에 자주 답하지도, 다정한 말을 건네지도 않지만, 그는 팬들의 메시지를 다 보고 기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20대에 그를 처음 응원했던 팬들이 이제 40대가 됐지만, 그는 그들을 여전히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때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 이라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팬을 이야기하면서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그가 20여 년 동안 꾸준히 노래를 하는 이유가 뭘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어서, 그리고 이걸로 누군가가 잠깐이라도 덜 힘들어진다면, 그것이 내가 노래 부르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신문희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서서,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곁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나라’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언젠가’ 다가올 희망을 기다리며 삶을 이어가는 모습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