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사랑하는 남자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자 두 사람.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와 마이크로소프트를 탄생시킨 빌 게이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 두 부호(富豪)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하는 습관이 바로 설거지라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를 거르지 않습니다. 일과 삶,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균형 있게 운영하는 것을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은 나아가 직장과 가정의 조화, ‘워라하’(Work-Life Harmony)를 추구합니다. 가정에서 에너지와 사랑을 충전해 다음 날 일터로 나가는 두 남자.
해외에 두 남자가 있다면 국내에도 못지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남편이라면 ‘공공의 적’ 역대 1위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최수종 씨를 떠올립니다. 옆집 정 여사가 집안일에 과부하가 걸린 어느 날 숨도 못 쉬게 몰아치며 설거지까지 겨우 마친 순간, 하필이면 텔레비전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아니 어떻게 앉아서 밥을 차려달라 할 수가 있어? 난 단 한 번도 아내가 밥할 때 앉아 있어 본 적이 없어. 옆에 꼭 붙어서 뭐가 필요한지 챙기고 심부름하고 무거운 것도 들고 그래야지.”
그 순간 소파에 편안히 기대 휴대전화로 유튜브에 몰입해 있는 남편이 눈에 띕니다. 울컥 눈물이 속에서 차오릅니다. 분노를 넘어 슬픔입니다. 이거 정 여사만 느끼는 심정일까요?
엄마가 뿔났다!
마음 미장공 세 번째로 나눌 주제는 ‘살림’입니다. 살림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를까요. 엄마, 아내, 주부. 그렇습니다. 집안일을 도맡은 사람. 밥, 빨래, 청소, 육아, 공과금 납부, 저축, 분리수거, 제사, 경조사 챙기기 등 눈에 보이는 일과 보이지 않는 일이 산더미입니다. 해도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금방 티가 나는 그 일이 살림입니다.
2008년 방영되어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엄마가 뿔났다’(KBS-2TV).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주인공을 맡은 김혜자 씨는 그해 방송사와 백상 연기대상을 수상합니다. 엄마이자 며느리이자 아내인 주인공은 62세 되던 날, 당당히 1년 휴가를 선언하고 원룸을 얻어 집안 탈출에 성공합니다. 남편부터 세 자식, 며느리까지 모두가 반대하던 휴가를 단 한 사람 시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감행합니다. ‘엄마 파업’으로 획득한 자유와 나만의 시간을 누리기도 잠깐, 임신한 며느리는 하혈하고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복귀합니다. 66부작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하지만 다음 생에는 나도 내 이름 석 자로 불리면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금쪽같은 내 새끼와 82년생 김지영
그 뒤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강산이 적어도 한 차례는 바뀌었고, 세상은 빛의 속도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정은요? 책과 영화로 엄청난 공감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82년생 김지영’은 오히려 동서양 할 것 없이 나라 밖에서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요즘 ‘금쪽같은 내 새끼’(채널A)에는 집안일에 질식해 숨구멍 하나 찾지 못한 채 사회와 단절되어 정신적·육체적·정서적 고통을 안고 사는 엄마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201호도 그렇고 504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림의 힘
살림의 가치를 살려야 합니다. 살림하다 아프고, 마음 상하고, 병드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살림은 살리는 일이니까요.
살림은 OO이다!
빈 곳에 알맞은 답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침대가 가구가 아닌 과학이란 광고 문구처럼, 살림은 과학입니다. ‘밥은 하늘이다’, ‘밥심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밥을 지을 때 모든 과학이 다 동원됩니다. 물, 불, 가스, 전기 같은 에너지의 원리도 알아야 하며, 칼, 솥, 팬 등 각종 재질의 도구와 전자제품에 대한 이해와 능숙함도 필요합니다. 제철 식재료를 알아야 신선하고 영양 있는 것들로 값싸게 구입해 맛있게 조리할 수 있습니다. 김장김치만 해도 발효 기간과 온도가 맛과 선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요. 된장이나 간장 만들기는 어떻고요. 과학의 정수가 모여 있는 게 김치와 장맛입니다.
1단계를 통과하셨다면 이번엔 다섯 글자에 도전해볼까요?
살림은 OOOOO이다.
제가 준비한 답은 ‘정성 끝판왕’입니다. 정성이란 귀찮은 게 귀찮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아이 똥 기저귀를 가는 일, 산지에서 갓 올라온 생선과 채소를 사러 전통시장에 가는 일, 퀴퀴한 고린내 나는 양말을 빠는 일이 힘은 들어도 귀찮지 않습니다. 내 식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귀한 일입니다. ‘귀찮다’는 ‘귀(貴)하지 아니하다’는 말입니다. 귀찮지 않다는 그래서 매우 소중하고 귀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온 식구가 재택근무에 비대면 수업으로 삼시세끼 집밥 시대가 열렸습니다. 돌아서면 밥하는 ‘돌밥돌밥돌밥’으로 살림하는 일이 새삼스레 의미가 생긴 세상이니 참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 속입니다.
살림은 OOOO테스트다.
3단계는 좀 더 어렵습니다. 맞히셨다면 대박! 진정한 살림꾼, 프로 ‘살림 장인’으로 인정합니다. 최근 들어 세대 가릴 것 없이 유행하는 성격 유형 검사 MBTI라고 답하셨다면 정답에 거의 근접한 셈입니다. ‘성질머리’가 제가 원하는 답입니다. 살림을 해보면 자기 본성, 성품이 성질머리로 뾰족 튀어나오는 순간이 정말 많습니다. 배운 적이 있든 없든 계급장 떼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이 살림입니다. 예전에 살던 본가에서 해오던 습성을 새 식구, 새 풍습과 문화에 맞춰가는 과정에서 지지고 볶다가 툭툭 성질 하나가 머리를 들이밀기 마련입니다. 모난 마음, 욱하는 성질을 누르고 둥글리는 것이 살림입니다. 못된 생각, 원망하는 마음으로 칼질을 하면 꼭 손을 베거나 다칩니다. 피를 보고서야 아차 합니다. 식구들 먹일 음식, 살리려는 음식을 만들면서 독한 마음, 살기(殺氣)를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먹은 밥은 희한하게 체합니다. 귀신같이 어찌 알았을까요.
엄마라는 경력 왜 스펙 안될까?
그만큼 귀하고 소중한 살림을 우리는 오랫동안 어떻게 치부해왔을까요. ‘부엌데기’, ‘솥뚜껑 운전수’, ‘아줌마가 밥이나 하지’ 이런 말로 비하하고 업신여기지 않았나요? 남자들뿐만 아니라 살림의 주된 당사자인 여자들조차도 하찮거나 허드렛일로 여기고, 잡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습니다. 그 일을 잡일이니 막일이니 허드렛일이라고 대하는 그 마음이 하찮고 사소할 뿐이고, 그 태도가 값쌀 뿐입니다. 모두가 소중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살림은 신성하고 고귀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물건과 주변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허드렛일로 대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위축시키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고 맙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부, 살림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습니다.
“집에서 놀면서….”
‘놀면서’라고도 안 하죠. ‘처놀면서’라고 하죠.
“집에서 처놀면서, 잠이나 처자면서 도대체 하는 일이 뭐야?”
안 그래도 무보수 노동, 사적 영역에만 묶여 있는 삶에서 느끼는 소외와 단절로 살림하는 사람은 충분히 불안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하와 경멸과 조롱이 섞인 표현을 스스럼없이 한다면 댁의 아내는, 엄마는, 며느리는 위축되고 분노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몇 년 전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제약회사 자양강장제 광고도 있었잖아요.
(태어나서 가장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고 있는데)
“왜 엄마라는 경력은 스펙 한 줄 안 될까?”
이렇게 자조적으로 한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화나게도 하고 울렸던 부분입니다. 주부의 일, 살림살이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환산한 것도 한때 유행으로 그치고, 2022년 현재까지도 이력서, 자기소개서 한 줄도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남에게 맡길 때는 이 모든 살림살이 단계마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출산, 육아, 가사 노동, 가정 경영과 관리, 부모님이나 아픈 가족을 부양하고 돌보는 일이 아예 경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외의 영역에서 경력을 개발하라고 밖으로 내몰기만 하는 게 어불성설(語不成說)이고, 선후(先後)가 바뀐 이야기입니다.
먹을 때
밥 먹을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제아무리
난 척하려 해도
뻐기려 해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먹을 수 없기에
내 앞에서
정수리 보여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합니다.
-, 19쪽
오늘 아침 봄동으로 된장국을 끓였습니다. 멸치다시 육수와 쌀뜨물에 친정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된장과 생애 처음 담근 보리고추장으로 국물을 내서 상에 올렸는데 다들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국그릇에 고개를 박고 맛나게 먹는 남편과 두 아들의 정수리를 보고 저도 정수리를 보여줍니다. 누구나 밥 먹을 때 어떤 자리에서든 정수리를 보여주잖아요. 특히 한국 음식은 국물이 많기 때문에. 같은 동양 문화권이라도 중국이나 일본 음식처럼 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여서 먹습니다. 그런 것처럼 먹는 일, 살리는 일이 신성하고 고귀한 한편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바로 살림의 힘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요. 맛난 음식 드시고, 서로 정수리 보여주면서 낮추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황혼 부부의 갈등을 유발하는 집안일. 집안일도 페어플레이가 필요한데, 효율적인 가사 분담을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를 실천해보자.
1. 집안일의 기준을 낮춘다
식사 준비, 빨래, 환기 등 실내 생활을 편하게 하는 모든 활동이 가사노동이다. 집안일이 처음이라면 당장 눈에 거슬리는 것부터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자.
2. 자녀와 집안일을 나눈다
집안일은 모두의 몫이다. 같이 사는 자녀에게도 일정 부분 분담한다. 그들이 직장 및 학교로 바쁘다면 분리수거, 장보기 등과 같이 비정기적인 일을 시키자.
3. 가사분담표를 만든다
①, ②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이 모여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이를 표로 만든 다음 벽에 붙여둔다. 주기마다 결과를 점검하고, 벌칙을 만들어 강제성을 부여한다.
부부관계 자가진단 테스트
- 배우자가 내 의견을 존중해준다.
- 배우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 배우자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준다.
- 남편(아내)으로서 입장을 배려받는다.
- 우리는 정서적인 친밀감이 느껴진다.
- 부부 성관계나 스킨십에 만족한다.
- 가사에 관한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진다.
- 우리는 자기 성장과 자아실현을 서로 도와준다.
- 우리는 싸우지 않고 대화를 오래 할 수 있다.
- 우리는 가족으로서 공동 책임감을 느낀다.
※ 2개 문항 이상 ‘아니오’ 답변을 한 경우 부부관계 점검 요망
출처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디지털 실버, 액티브 시니어라는 말이 자주 귀에 들려오는 요즘이다.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시니어들의 삶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내가 청파 윤도균 님을 만난 건 순수문학 수필작가회에서다. 팔순을 코앞에 둔 나이에 아직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인천 N방송 시민기자로도 활동한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그 열정은 디지털 실버, 액티브 시니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인생 선배로서 닮고 싶은 분. 요즘은 주 3회 근처 초등학교에 나가 돌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단다. 천성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에게 시니어의 삶이란 뭘까.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은퇴 전에는 어떤 일을 하였는지?
처음에는 종로 세운상가에서 전자제품 판매사업을 했다. 그런데 일할 때 양심을 속일 때가 있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판매사업 일에 회의가 들던 차에 아이들 교육과 관련된 일이 연결되어 학원 사업으로 전환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마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교육과 관련된 일이 싫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학원 사업을 하며 20여 년간 독서실 운영도 했다. 하루에 100여 명 이상의 학생들을 통솔하며 아침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근무를 했다. 그 일도 판매 사업 못지않게 힘들었다. 하지만 해맑은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학생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조언도 해주고 예뻐하니까 아이들도 나를 따랐다.
교육 사업은 7년 전에 접었다. 시대의 큰 흐름이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정성들여 운영해오던 사업을 접을 때는 마음에 다소 서운한 감도 있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퇴 결정 과정은 어떠했는지?
20여 년간 일궈온 사업을 접을 때의 감정은 누구나 다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물론 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초조함도 있었고 욕심 같아서는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업자는 전망 흐름을 보고 빨리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마음을 내려놨고 한편으로는 편했다. 제2의 인생, 은퇴 후의 꿈을 설계하며 접었다.
이모작 인생은 계획한 대로 잘 이루어졌는지?
하던 일(직업)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처음엔 헛헛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내가 만약 어느 날 갑자기 퇴직했을 때’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마음속에 써두고 적응 훈련을 했다. 대안도 미리 생각해놔서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사업할 때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 ‘내 건강’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았다. 퇴직과 함께 잡념을 없애기 위해 먼저 운동(등산, 헬스)을 시작했다. 사실, 직장에서의 퇴직이 아니라 내 일을 하다가 일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반 은퇴자들보다 나는 나이가 많았다. 어느새 70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건강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평소 내 성격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있으나 마나 한 인간’으로 취급되는 걸 가장 싫어한다. 취미로 시작한 운동이지만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 땀 흘려 운동했다. 그러자 사업할 때와 비교해 건강이 몰라보게 향상됐다. 스스로 느낄 정도였고 마치 회춘하는 것 같았다. 자랑이 아니다. 몸이 달라지는 걸 실질적으로 체험했다. 건강하니까 매사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도 긍정적이고 의욕적이었다.
은퇴 전과 후의 생활은 어떤 차이가 있나?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은퇴 후의 생활이 많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퇴직 후 줄어든 수입으로 인해 생활이 척박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한도 끝도 없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 행복의 척도가 달라진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세월 따라 사람이든 자연이든 영원하지 못할 것이기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달으려고 했다. 작은 욕심조차 내려놓으면 편했다. 그렇게 즐거운 나의 ‘인생 이모작’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퇴직 전에는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꿈, 소망’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도 돈 생각으로 이어지면 애써 잊으며 살게 되더라. 그런데 이제 은퇴자가 되니 청년 시절 꿈꿔왔던 글쓰기, 사진, 컴퓨터, 운동, 여행, 친목모임, 봉사활동, 취재, 기타 등을 마음껏 하고 배울 수 있어 좋다.
우연한 기회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선발되어 13년에 걸쳐 약 300여 편의 기사도 썼다. 인천 N방송 시민기자로 영상뉴스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통해 수필작가로 정식 등단도 했다. 꾸준히 작품활동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지금의 삶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내 나이 일흔일곱이다.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그래도 십몇 년째 계속해온 새벽운동은 빼먹지 않는다. 아침 5시에 어김없이 일어나 동네 단골 헬스장으로 향한다.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한 시간에 걸친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으로 2시간을 보내고 나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렇게 하루를 열고 집으로 돌아와 개인 블로그 ‘청파의 사람 사는 이야기’에 새 글을 쓰고 댓글도 읽고 답장을 쓴다(그는 블로그 운영을 17년째 하고 있다. 요즘도 하루에 800~1000여 명이 다녀간다. 블로그 활동은 손자인 도영이를 돌보면서 시작했는데, 도영이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은퇴를 앞둔 시니어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지?
조언이랄 것은 못 되고, 은퇴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마음가짐을 바로 잡아야 한다. 사람마다 환경, 조건이 다르지만 인생 이모작 시대를 새로 개척해 살아야 하는 은퇴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첫째 : 자신의 현실에 맞는 소박한 은퇴 설계를 하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은퇴 설계에 포함하라.
둘째 : 가족과 시간을 많이 가져라. 지금까지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가족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가사분담 등).
셋째 : 꾸준히 운동하고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하라(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은퇴는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으로만 간직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여운이 남았다. 아울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떠올랐다.
그는 칠순 때, 북한산 인수봉 암벽등반을 하고 그 후 2년에 한 번씩 암벽등반을 꾸준히 하고 있다. 팔순에는 북한 암벽등반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니어에게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녀의 독립 이후부터 시니어의 주거환경에는 변화가 생긴다. 아이들과 살던 집에서 부부 둘이 지내기도 하지만, 사별이나 졸혼 등으로 혼자 살거나, 자녀 세대와 함께 대가족을 이루기도 한다. 노후에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할 주거공간, 어떻게 계획하는 것이 좋을까?
도움말 서지은 영남대학교 가족주거학과 교수, 니콜라스 욘슨 이케아 코리아 커머셜 매니저,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사진 제공 이케아 코리아
◇ 1인 ‘편리와 안전’ vs 다세대 ‘융합과 프라이버시’
[1인 가구] 1인 가구의 경우 인테리어는 자기 마음껏 꾸미면 되지만, 그 전에 따져봐야 할 것은 편리성과 안전성이다. 한적한 외곽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는데, 사실상 편리하고 안전한 곳은 도심이다. 대형 병원이나 각종 편의시설이 가까워 위기 대응이 빠르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생겨나는 노인 대상 아파트의 경우 도심에 짓는 사례가 많아졌다. 또, 다양한 편의 시스템이 접목된 고가의 소형 아파트나 오피스텔, 원룸 등도 주목받는데, 그 활용도가 관건이다. 실제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많아도 사용법을 몰라 무용지물로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Tip+ 편리하고 안전한 ‘스마트홈 기기’ 활용하기
혼자 살다 보면 만일의 사고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 없다. 긴급 상황 시 ‘원 터치’(one touch)로 가족 또는 지인에게 긴급 메시지를 전송해주는 SOS 버튼이나 사람의 움직임을 파악해 사이렌이 울리는 동작감지센서 등 스마트홈 기기를 적극 활용해보면 어떨까? 대표적으로는 LG U+ ‘스마트홈 패키지’, SK 브로드밴드 ‘지키미 SOS 버튼’, KT ‘기가 IoT홈’ 등이 있고, 월 1만~2만 원대로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괜찮다면 스마트 홈CCTV 등을 설치해 가족과 공유하며 안전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다세대 가구] 다세대 가구는 하드웨어적(건축물의 구조나 구성 등) 측면과 소프트웨어적(거주자 사이의 규칙 등) 측면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가족끼리 충분히 논의해 교집합을 찾고 이를 우선순위로 주거지를 찾는다. 이때 개인 공간보다는 공용 공간(거실, 주방, 욕실) 중심으로 보는 것이 좋다. 가령 주방을 자주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방 위치를 정하거나, 여분의 주방이 필요한지 등을 고려한다. 아울러 서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한 공용 공간 사용 규칙을 만들고 공과금 문제와 가사 역할 분담에 대해서도 미리 상의한다.
Tip+ 다세대 가구 욕실 딸린 안방, 누가 쓰는 게 좋을까?
다세대의 경우 종종 안방 욕실을 누가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의견 차이를 보이곤 한다. 거동이 불편하지 않다면, 가급적 부모 세대와 손주들이 함께 공용 욕실을, 자녀 세대가 안방 욕실을 사용하길 권한다. 활동량이 적은 시니어가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면, 공용 공간 이용이 줄어 자칫 집 안에서 소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아이와 노인은 안전성 측면에서 안전하게 설계된 욕실을 함께 이용하는 게 좋다. 이때 미끄럼 방지 타일이나 손잡이 등을 설치하면 도움이 된다.
◇ 자녀 출가 후 주인 없는 방 vs 모두가 함께 쓰는 공유 공간
[1인 가구] 자녀가 독립하며 쓰임새를 잃어버린 방은 자칫 주거생활의 활력을 떨어뜨리거나 허전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집의 규모를 줄여 원룸이나 스튜디오형 오피스텔을 찾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주거 형태이기에 생활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딱히 이사 계획이 없다면, 남은 방을 취미를 살리거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해줄 공간으로 꾸며보는 것도 방법이다.
Tip+ 나만의 홈 컬렉션(갤러리)
남는 공간을 갤러리처럼 활용하면 다채로운 주거공간이 된다. 컬렉션을 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색상별로 아이템을 모으거나, 공간을 한 종류의 장식품으로만 진열하는 것이다. 비슷한 소품은 개별 진열보다 모아놨을 때 더 큰 미적 효과를 발휘한다. 투명한 선반이나 유리도어 수납장 등을 사용하면, 물건을 한층 더 돋보이게 연출할 수 있다.
Tip+ 홈 트레이닝 피트니스 룸
요즘처럼 바이러스나 미세먼지 등으로 바깥 활동을 자제하면 기초대사량과 근육량이 줄어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여유 공간에 홈 피트니스룸을 만들면 어떨까? 자칫 운동기구들로 바닥이 어질러지거나 공간이 좁아질 수 있는데, 이때 벽면 선반을 설치하면 효율적이다. 선반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스피커 등을 올려놓고 헬스 동영상을 보며 동작을 따라 할 수 있다. 브래킷 사이 거리를 좁게 설치해 요가매트를 수납하거나, 후크를 달아 훌라후프, 밴드 등을 걸어도 좋다.
[다세대 가구] 함께 쓰는 공유 공간으로 ‘거실’을 꼽을 수 있지만, 대부분 텔레비전을 볼 때만 모여 앉아 있을 뿐 특별한 활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함께 살면서 교류가 부족하면 집 안 분위기가 무겁고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최근에는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고 대신 책장을 두어 북카페처럼 공간을 꾸미는 등 가족 간 융합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인테리어를 시도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Tip+ 가족 전용 홈 시네마
탁 트인 공간이 있다면 가족을 위한 전용 극장으로 꾸며볼 수 있다. 가정용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실내 한쪽 벽면이나, 옥상·마당에 행거와 흰 천 등을 이용해 스크린을 만들어본다. 편안한 의자와 분위기 있는 조명, 텍스타일까지 준비한다면 더욱 아늑한 공간이 된다. 영화관처럼 상영시간표를 만들거나 팝콘 등을 즐기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Tip+ 휴대기기 충전 스테이션
식구가 많으면 각자의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노트북 등 휴대기기 충전기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간혹 제품에 맞는 충전기를 찾지 못해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방마다 수납공간을 들쑤시다 보면 쓰임새가 모호한 전선이나 어댑터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집 안은 어수선해지고 이름 모를 물건은 쌓여간다. 거실이나 공유 공간 한 편에 각종 충전기기를 모아놓으면 이러한 불편을 줄일 수 있다. 때때로 가족이 모여 쓸모없는 충전기나 전선 등을 정리하는 시간도 마련한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낯설지만 그 의미만큼은 뚜렷하게 느껴지는 ‘독박 육아’라는 표현을 들었다. 출연자들은 ‘대한민국의 아기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 중의 하나라고 입을 모았다.
독박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서 모든 것을 뒤집어 쓰거나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박육아란 단어에는 억울함과 외로움이 담겨있을 터이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육아방법을 알게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엄마의 길로 들어선 초보엄마들이 그 역할을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전에 비해서는 요즘 젊은 아빠들이 육아나 가사노동을 많이 분담한다. 그렇더라도 젊은 엄마들이 겪어야 하는 육체적인 피로, 갑작스런 고립, 박탈감 등은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가정주부에게 많은 책임과 희생을 요구하는 우리의 오래된 관행은 여전한데 거기에 맞벌이까지 해야 하니 젊은 아내들에게 육아는 극한 직업일 수밖에 없다.
워킹 맘들 사이에서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면 금수저, 시어머니가 봐주면 은수저, 어린이집에 맡기면 흙수저라는 얘기가 유행어처럼 돈 적이 있다고 한다.
어느 누구라도 최소한 독박을 썼다는 억울함을 느껴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행히 사회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해결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부모 다음으로 가장 바람직한 양육자 1순위는 조부모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요즘 문화센터나 지역 구청 강좌에서도 손주 양육에 관한 프로그램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예비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들은 미리 미리 할머니의 소양을 길러두는 게 좋겠다.
노후준비가 시니어들의 화두로 떠 오른 지가 제법 되었다. “내 노후는 어떻게 되겠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칠까”하고 큰소리는 치지만 길어지는 수명을 생각하면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보고 싶었던 참에 국민연금공단의 ‘노후 준비 자가진단’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2시간짜리 프로그램이었다. 이 과정에서 개인별로 작성한 체크리스트를 갖고 7명씩 소그룹을 만들어 심층적인 문제 진단을 했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재산이나 친구 관계와 건강문제를 모두 다 공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심층적인 개인별 진단을 위한 희망자를 받기에 신청을 했다.
보름정도 지나서 국민연금공단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면담이 가능한 시간과 장소를 서로 타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집 가까운 공단지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자신을 ‘노후준비서비스팀 노후준비 전문상담사’라고 소개한다. 먼저 내가 가진 재산을 모두 말하도록 했다. 부동산을 위시하여 저금, 보험, 보유주식은 물로 직장수입까지 다 말했다.
술, 담배, 운동 등 나의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툭 털어놨다. 종교활동이나 사교모임 등 여가를 보내는 분야도 터치한다. 부부간 가사분담이나 형제간 우애도 물어보고 노년기 친구들 관계도 궁금해했다. 정확한 내 자산상태를 알기 위해 동의를 해주면 관계기관을 통해 자료를 추출할 수 있다고 해서 이 부분도 동의를 해 주었다.
내 처지로는 재무 분야가 제일 궁금했다. 검토결과 ‘실손보험’이 없는 것이 취약점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중대 질병 시 치료비와 입원비를 받을 수 있는 보험에 가입해 있는 점이 그나마 다행으로 나타났다. 노후 수입은 국민연금이 있고 다음으로 은행과 보험회사의 개인연금보험이 있다. 증여는 절세차원에서 자녀들에게 기간을 두고 사전에 조금씩 나누어 주라는 조언도 들었다.
이번 크게 도움받은 점은 연금수급예정에 대해 세금 문제였다. 연금도 수령 금액이 높아지면 세금을 내야 하므로 수령 기간 5년을 10년으로 장기수급을 하도록 권유받았다. 깜박 놓치고 있는 부분이었다. 또 하나는 국민연금을 더 받기 위해 받을 시기를 연기했는데 만약 내가 죽고 아내가 연금을 받을 때는 가산된 연금이 아닌 기본연금으로만 산정된다는 제도다. 남자가 일찍 죽을지 안다면 연금을 받는 시기를 늦추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점이다.
수익형 부동산의 구매는 임대수익성을 따져봐야 하는데 소득세, 재산세, 건강보험료 등 공과금과 관리비용, 공실률 등을 고려한 실질수익을 고려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임대부동산 관리는 시설관리와 임차인 관리까지도 신경 써야 하니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들었다.
일일이 말하지 못할 정도로 상세한 진단을 받았다. 두시간 이상의 설명을 들으며 이렇게 세밀한 진단을 해 주리라고는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감동했다.
노후 여가활동을 하기 좋은 우리 동네 기관을 알아주고 금융소비자 정보포털사이트도 안내를 해주었다. 막연한 조언을 듣기보다는 이미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라면 족집게과외처럼 콕 집어 알려주는 전문가와 1대1 상담을 받아보고 하루라도 빨리 궤도수정을 하면 좋겠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영화와 공간: 홍콩’이라는 주제로 홍콩 영화 수작들을 상영했다. 상영작 중 두 편이 허안화 작품이었다.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허안화(쉬안화, 許鞍華)의 작품들은, 일상을 통해 인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여백과 깊이를 안겨준다.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서민의 삶을 그려내는 감독 중 허안화만큼 진실한 감독도 드물다. 허안화 작품 세 편을 차례로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여인 사십(女人, 四十)
주연: 소방방, 교굉
1999년에 국내에서 개봉된 허안화 감독의 (1997) 리뷰에서, 국내의 한 영화 평론가는 “세계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여성 감독 중의 일인”이라고 언급했다. 허안화의 작품은 수준 차가 심하고, 은 비슷한 주제의 걸작 멜로 (1996)을 이미 봐버린 우리의 눈높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범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주부 중심으로 그린 , 매염방의 연기로 길이 기억될 (2002)을 보면, 과대평가된 감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허안화 감독의 섬세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관객들의 가슴을 찡하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 이런 면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는구나.”
“대사 한마디 않고 저런 감정을 표현해 내다니.”
여성 감독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장면들이 많이 발견된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은 허안화의 이 같은 매력들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치매 노인을 둔 가정의 어려움, 부모와 자식, 자식을 거두며 직장생활까지 해야 하는 중산층 중년 여성의 애환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뒤안길, 그 허무까지 보여준 깊이 있는 작품이 이라면, 은 고령화 사회, 중년을 맞은 직장 여성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디테일하게 다룬 영화다.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거머쥔 의 수상 내역이 백 마디 칭찬보다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작품․감독․연기․ 촬영 등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필자는 특히 각본을 칭찬하고 싶다. 자상한 시어머니와 생활력 강한 큰며느리, 엄격한 시아버지와 그에게 쩔쩔매는 가족들, 시아버지 모시는 일에 나 몰라라 하는 동서와 시누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소시민 남편, 여자 친구에게 채였다고 찔찔대는 아들. 마흔 살 생일을 맞은 며느리, 아내, 어머니에게 돌아오는 짐을 묘사하기 위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과 대사, 세세한 삶의 장면들에 감독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이처럼 디테일한 묘사는 직접 체험 또는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사실 소재는 너무 진부하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라서 이렇게 평범한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게 옳은 것일까 생각하게 할 정도다. 차라리 TV 드라마가 소화해내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느 가정에서나 겪을 수 있는 진부한 삶의 조각들을 가지고 어떤 색과 모양을 빚어내고 통찰력을 이끌어내는가는 대본을 쓰는 사람이나 감독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맏며느리를 도덕군자 같은 여인으로 묘사하길 즐기는 전근대적이며, 비현실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이 에는 없다.
자상한 시어머니에게는 마음을 열고, 못살게 구는 시아버지에게는 마지못해 공경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착하긴 하지만 가사 분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이나 아들에게는 투정도 부린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40대 가정주부가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잘 돌보는 것은 단지 맏며느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 인간애, 연민 등에서 우러나는 보다 근본적인 행동임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허안화 영화의 힘이다.
허안화의 다른 영화들을 평가절하한다 해도 과 두 편은 홍콩 영화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40회 생일을 맞은 손 여사(소방방 蕭芳芳)에게 철없는 아들은 마른 거위를 사다 주고, 남편(나가영 羅家英)은 부모님도 오시니 재료를 아끼지 말고 요리하라고 주문한다. 큰며느리인 손 여사를 마땅찮게 여겨온 시아버지(교굉 喬宏)는 식구들이 식탁에 앉기도 전에 혼자 맛난 음식을 다 골라먹은 후 아내를 재촉해 휭 가버린다.
어느 날 시아버지는 “마누라가 일어나 밥할 생각도 안한다”며 큰며느리를 찾아온다. 큰며느리는 자상했던 시어머니의 죽음으로 망연자실해한다.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시아버지는 아들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그토록 미워했던 큰며느리만은 알아보고 의지한다.
화장지를 만들어 파는 중소기업의 업무부 주임인 손 여사는 가사노동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주변머리 없는 남편, 철없는 대학생 아들과 함께 어린아이처럼 변한 덩치 큰 시아버지를 모시느라 고군분투한다.
시장에서 생선을 사며 실랑이를 하는 첫 장면에서 손 여사의 생활력과 성격을 알아챌 수 있다. “아직도 고르지 못했느냐?”고 다그치는 생선 장수. 살아 있는 생선이라 더 비싸게 받는 거라는 말에 몰래 생선을 때려죽인 후 죽은 생선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깍쟁이 주부. 다음에 먹을 요량으로 생선 가운데 토막을 냉장고에 보관해두려는 아내를 보고 남편은 전부 다 요리하라며 잔소리를 한다. 시어머니는 새우 요리를 해와 주방에서 큰며느리에게 먹이고, 선물도 잊지 않고 건네준다. 유별난 성격의 아들과 살며 직장생활에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는 큰며느리가 기특해서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시아버지는 식탁에 떡 버티고 앉아 배가 고프다며 젓가락을 두드리고, 슬리퍼는 여자가 신겨줘야 한다며 위엄을 부린다.
초반의 몇 장면만으로도 가족의 성격, 큰며느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이후로도 계속 나온다. 손 여사 남편이 동생 부부를 만나 시아버지 모시는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동생 부부와 조카들은 스테이크를 시켜먹고 손 여사 남편은 볶음밥을 시킨다. 먹성 좋은 조카들이 볶음밥도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자 두 조카에게 기꺼이 밥을 나누어주는 손 여사 남편. 잘사는 동생은 회사 일이 바쁘다며 밥값을 형님에게 떠넘기고 일어난다. 가정부를 두고 사는 동서는 두 말썽꾸러기 아들 뒷바라지와 강아지 돌보기, 영화 관람, 파티 때문에 시아버지를 모실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운전면허시험장 감독관인 손 여사 남편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말단 공무원이다. 직장 동료들과 술집에 둘러앉아 자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지인 이야기, 부모와 장모 모시는 어려움을 토로하며 노래 한 곡조를 뽑으면 젊은 손님들은 "도대체 몇 년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냐"고 야유를 퍼붓는다. 손 여사 남편은 자기 세대의 처지와 시대 변화를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받아들인다.
반대머리에다 안경을 쓴, 마르고 작은 체구의 손 여사 남편은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당당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일흔 살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한다. 손 여사는 “아버님은 저렇게 체격이 좋은데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냐”고 나무라며 파스를 발라준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중년 부부의 아름다운 한때를 정감 있게 표현한 장면이다.
손 여사 남편은 가끔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 한다. 아내가 너무 힘들다고 투정을 하자 “내게 시집 온 게 최대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맞받아친다. 그러나 “그건 다 옛날이야기”라는 아내에게 더 이상 한마디도 못하는 남편. 그는 아버지의 치매로 인한 소동이 그치질 않자 “차라리 내가 치매에 걸려 모든 걸 잊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소심하고 착한 이 시대의 중년 가장, 남편, 아버지를 대표한다.
손 여사는 남편에 비해 사회적 욕구와 책임감이 강하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돌보라고 하자 “회사 다니는 게 나의 유일한 낙”이라며 거절한다. 수십 년간 회사의 모든 업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신속하게 처리해온 손 여사는, 젊고 예쁜 여직원이 들어와 전산화를 구축하는 바람에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나 컴퓨터 고장으로 회사 업무가 마비되었을 때 수많은 거래처와 주문량을 완벽하게 처리해온 솜씨를 발휘해 다시 사장의 신임을 얻는다. 바이어의 식성까지 기억해두었다가 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예약해 회사 경비를 줄일 만큼 애정과 완벽성을 갖춘 프로 직업인이다.
손 여사는 택시 기사가 요구대로 운전하지 않자, 교통불편처리센터에 전화를 걸어 고발하려 한다. 작은 불의도 참아 넘기지 않는 손 여사의 시민 의식. 물건 값을 깎는 깍쟁이이긴 하지만 그 선은 어디까지나 자잘한 생활의 눈속임을 넘지 않는 정도다.
손 여사는 재치 있고 영민한 여성이다. 공군 장교였던 시아버지가 전쟁 시절을 떠올리며 낙하산 타기, 포로 족치기와 같은 전쟁놀이를 할 때 그녀는 시아버지와 똑같은 전쟁놀이로 시아버지를 안전하게 돌본다. 남편이나 아들은 전혀 생각해내지 못한 지혜다.
할아버지의 치매로 인한 부모님의 고생을 바라보는 대학생 아들의 심정, 즉 젊은이들의 시선도 감독은 지나치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요? 오래 살지 마세요. 모두 힘들잖아요”라는 아들의 말에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들의 통찰은 여자 친구가 연락을 하지 않는다며 징징대는 사랑 투정에 묻힌다. 대학생 아들에게 늙음은 아직 눈앞의 일이 아닌 것이다.
반면 손 여사 부부에게 노년은 머잖아 닥칠 일이다. “당신이 추하게 오래 살면 내가 먼저 죽어버릴 거야”라고 남편이 말하자, 손 여사는 “당신이 추해지면 내가 죽여줄게요”라고 말한다. 노년의 두려움은 손 여사의 이모 부부를 통해서도 반복된다.
양로원에서 이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이모부는 이모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질만 부린다. 이모는 위암에 걸려 먼저 죽게 되자 남편과 이별을 고하며 이렇게 타이른다. “당신이 날 데려가야 하는데. 이제는 성질부리시면 안돼요. 저 세상에서 만나면 나는 당신 부인 노릇 안 해요. 다시 부부가 되어야 한다면 그때는 당신이 부인 노릇 해요.” 이 짧은 장면은 우리 어머니 세대의 긴 인고의 세월을 대신 보여준다.
가혹하게 따지고 들면,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그려진 손 여사와 이모는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우선으로 내세우는 손 여사의 동서와 시누이가 현대 여성에겐 더 와 닿는다. 그러나 신뢰와 연민이 결여된 이기주의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옳지 않다. 손 여사와 시어머니의 관계처럼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살펴줌으로써 그리운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그리고 바람직한 모습 아닐까.
시시콜콜 장면을 설명하듯 이야기해봤다. 볼 마음이 없어진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설명만으로는 감독의 영상을 따라잡지 못한다. 옮기지 못한 장면이 더 많다. 특히 이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그래도 살 만한 세상’임은 직접 영상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인 ‘Summer Snow’처럼, 무더운 여름날에 내리는 눈꽃을 맞아보는 기쁨을 만끽하길 바란다.
어느덧 3년 전 일이다. 그해에 작은 딸이 마침내 취업을 했는데 그동안 애쓴 엄마에게 보답을 한다며 함께 홍콩 여행을 가자고 했다. 필자도 내심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직장에 얽매어 있던 터라 오붓하게 모녀간의 여행을 즐기라며 응원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는 자신만만하게 "괜찮아, 염려 말고 잘 다녀와"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이 여행을 떠난 날 당장 저녁밥과 국 끓일 일이 걱정이었다. 세탁기와 난방기 작동법, 화초에 물주기 등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필자가 가사 무능력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딸내미와 오붓한 여행을 즐기고 있을 아내에게 국제전화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전화를 걸고 말았다. 식사 문제는 어찌어찌 적당히 해결했지만 세탁은 1주일을 버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어 겨우 사용법을 알아낸 필자는 겨우 세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 덕분에 지금까지 얼마나 편안한 일상을 보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매 끼니 정갈한 식탁을 차려내는 아내의 수고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직장생활을 하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여기면서 아주 가끔씩 아내를 도와준 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하며 살아온 필자였다.
아내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웠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새삼 아내에게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대견하다는 생각에 고마움이 새록새록 가슴을 적셔왔다. 그날 이후 필자는 권위주의적 태도와 남녀의 역할분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내려놓고 새로운 부부의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아내가 홍콩에 가 있던 1주일 동안 필자는 밥 짓기, 세탁기와 청소기 돌리기, 빨래 정돈 등을 제대로 실습하며 배웠다. 당시 딸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의 강평까지 들으며 필자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 백세시대에 부부의 가사협동 없는 행복한 가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필자는 전에는 하지 않았던 집안일들을 자연스럽게 한다. 1주일간 아내가 집을 떠나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설날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필자에게는 오랜 인고의 시간과 이를 극복한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아내는 8남매를 둔 처가의 셋째 딸로 고생 모르고 살다가 장남인 필자에게 시집온 이후 맏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내느라 힘들게 살았다.
요즘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보고 있으면 보물처럼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달덩이같이 아름다운 나이에 월세 방에 사는 필자에게 시집을 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두 시동생과 시누이 모두 넷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우리 집안을 화목하게 꾸려왔다.
결혼하고 10년 정도는 설날이나 추석날을 위한 음식 준비는 장남의 아내로서 당연히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동서가 서울서 뒤늦게 내려와도 반갑게 맞으며 잘 지내왔다. 하지만 아내는 철인이 아니었다. 한창때는 젊음으로 버텨냈으나 명절 증후군이 해가 거듭될수록 심해져 허리에서부터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설날이 되면 다른 가족들도 하루 전에 도착해 함께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으나 서울서 필자가 사는 울산까지 오다 보면 차가 밀려 명절날 새벽에 도착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하루 전에 와도 별도로 식솔들의 음식까지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두 동생네 식구들이 가고 나면 이번에는 시집간 두 여동생의 식솔들을 맞이하느라 또 분주했다. 반갑기는 했지만 힘이 든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련한 남편은 그제야 아내의 고단함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집온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가사를 꾸려온 아내였다. 이 정도 세월이면 기계에도 문제가 생기는데 아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내의 건강 문제를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형제가 돌아가면서 차례와 제사를 모시자고 아우들에게 제안하면 어떨까 하고 아내와 상의했더니 동서들이 먼저 그런 제의를 해오면 모를까 절대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말라고 펄쩍 뛰었다. 난감했다. 유산 한 푼 물려받지 못한 장남도 장남이고 장손의 아내이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려운 숙제는 뒤늦게나마 아우와 두 제수씨의 배려로 해결되었다. 정년퇴직 후 필자가 서울에 직장을 잡아 임시 살림을 오피스텔에서 꾸리면서부터다. 좁은 곳에서 혼자 음식 준비할 여건이 안 되어 두 동서들과 분담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관습이란 정말 무서운 것 같다. 그 간단한 일을 해결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인고의 세월 속에서 온갖 난관을 극복한 아내를 보니 향기로운 한 송이 국화꽃 같다. 아내가 너무 고맙고 필자 곁에 오늘도 있어줘서 행복하다.
필자는 은퇴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5F(Finance, Field, Fun, Friend, Fitness), 5자(놀자, 쓰자, 주자, 웃자, 걷자), 연타남(연금 타는 남자)과 연타녀(연금 타는 여자) 등이다. 그중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것 중 하나가 LED다. LED는 원래 ‘발광다이오드(Light Emitting Diode)’라고 불리는 반도체 소자를 말한다. LED를 사용하는 LED TV와 LED 전구는 매우 밝을 뿐 아니라 수명이 길면서도 유지비용은 적게 든다고 한다. 이에 필자가 저금리·고령화시대의 어둠을 밝혀줄 뿐 아니라 수명이 길면서도 비용과 노력은 적게 들어가는 3가지 은퇴 설계 전략을 기왕이면 ‘L·E·D’로 시작하는 영어 단어에 맞춰본 것이다.
먼저 ‘L’은 ‘롱 워크(Long work·오래 일하기)’로부터 가져왔다. 고령화시대인 만큼 어떻게 해서든 오래 일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면 그에 따라 근로기간도 늘어나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퇴가 빨라지면서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가 평균 53~54세에 불과하다. 2016년부터 정년 60세 의무화가 시작되었지만 은퇴 연령이 크게 늘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자녀들에게만 ‘스펙’을 키우라고 요구할 게 아니다. 중·장년들도 현역으로 있을 때 스스로 자기계발을 통해 인생 이모작, 삼모작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E’는 남보다 빨리 시작하자는 ‘얼리 스타트(Early start·빠른 준비)’를 의미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처럼 가능한 한 일찍 돈을 벌기 시작하고 돈을 버는 순간부터 은퇴 설계를 염두에 둬야 한다. 일찍 시작하고 늦게까지 소득을 올리는 맞불작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제 직장을 잡았으니 좀 즐기고 놀아야지 하다가는 나이 들어서 은퇴 설계 전문가로부터 “노후 설계·은퇴 설계가 안 나오는데요”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유능한 의사도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은퇴 중환자(重患者)’가 되지 않으려면 1년이라도 빨리,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게 노후 준비와 은퇴 설계의 핵심이다.
‘D’는 ‘더블 인컴(Double income·맞벌이)’으로 부부가 맞벌이 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외벌이로는 은퇴 설계가 불가능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대수명이 70세였던 시절에는 남편 혼자 30년 벌어 부부의 여생 20년(남편의 60세 은퇴 후 부부가 평균 10년씩 더 산다고 가정)을 설계하면 그만이었다. 30년으로 20년을 설계하는 것이므로 산술적으로도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30년 벌어서 적어도 60년(부부 두 사람이 각각 30년)을 먹고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맞벌이 비율은 43%로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낮다. 미국이 65%, 독일이 61%, 프랑스가 60% 등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 57%에 달한다. 가부장적 관습, 육아 및 교육, 가사 분담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맞벌이 비율이 급속하게 높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 기업과 개인들도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과제다.
L·E·D는 결국 “인생 이모작을 미리 준비하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한 집에 두 마리는 있어야 한다”는 지침이다. 사실 이 3가지 중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어렵다고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현실을 피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닌가.
이렇게 LED를 설명하면 30~40대의 직장인과 자영업자들은 크게 공감을 하면서 어떻게든 헤쳐 나갈 궁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현재 50대 이상, 특히 60~70대에게는 LED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챙겨보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 나이에 나도 일할 자리가 없는데 배우자까지 일을 찾으라고? 거 돼도 않는 말, 실상과 맞지도 않는 말 하지도 마쇼!”
필자도 50대 이상 나이 드신 분들에게 LED를 권장할 마음은 없다. LED는 오히려 그분들의 자녀 세대들에게 적용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새로운 LED를 소개하고자 한다. 두 번째 LED의 ‘L’은 ‘배우자(Learn)’,‘E’는 ‘연습하자(Exercise)’, ‘D’는 ‘하자(Do)’를 의미한다. ‘배우자’라는 말은 얼마 전 기고에서도 주장한 것처럼 나이 들수록 필요한 두 배우자 중 하나다. 다른 한 배우자는 남편과 아내를 뜻한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셨을 것이다. 은퇴한 후 30~40년을 별달리 하는 일 없이 보낼 수는 없다. 은퇴 후의 배움은 소득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뭔가 할 일(Field)’을 찾기 위해서 하는 행위에 가깝다. 취미활동도 배워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또 실내에서 온라인 등을 통해 배우는 것도 좋지만 밖에 나가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배우는 것이 신체적·정신적 건강에도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댄스, 악기 등과 같이 서로 만나 함께 배우고 취미생활을 하면 덤으로 다양한 친구들까지 사귈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다. 배운 뒤에는 부지런히 익히고 연습(Exercise)해야 한다. 피아노 또는 사진 촬영, 커피 만드는 법을 배운다고 예를 들어보자. 무엇에 빠지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다. 그러다가 자신감이 생기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배운 것을 실행해보기도 하고 동호회는 물론 봉사활동 등에도 적극 나설 수 있다. 배우고 익힌 다음 실제 활동(Do)에 나서는 것이다. 좀 서툴다고 탓하는 사람은 없다. 공자님께서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好)’, 즉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우고 익힌 것을 실행한다면 더 기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學習而時行之 不易說好’, 즉 ‘배우고 익혀서 때때로 행하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로 바꿔 말하고 있다.
한 선배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할까 말까 고민이 되면 하고, 갈까 말까 고민이 되면 가야 한다. 나이 들면 무엇이든 하는 게 좋다. 다만 더 먹을까 말까 고민이 될 때는 그만 먹는 게 좋다.” 은퇴학자로 유명한 미국의 칼 필레머 교수가 쓴 책 에는 “비가 올 때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우산”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막연한 걱정이 아니라 전략과 준비, 학습과 실행, 즉 ‘L·E·D(Long work, Early start, Double income)’와 ‘L·E·D(Learn, Exercise, Do)’ 같은 여러 개의 꼭 있어야 할 우산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