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진안으로 이어지는 소태정 고개 국도변에 아담한 카페가 있다. 외벽에 진분홍색을 입혀 로맨틱한 멋을 풍기는 가게다. 과하지 않게 잔잔한 인테리어로 개성을 돋운 내부는 봄 햇살 내려앉은 듯 상쾌하다. 통유리창 너머에선 연둣빛 숲이 서성거린다. 이 카페는 귀촌인 임진이(48, 카페 ‘비꽃’ 대표)가 폐허처럼 방치됐던 건물을 임대받아 재생했다. 셀프 리모델링으로 되살렸다. 미술을 전공한 그에겐 결혼 전 미술학원을 운영한 이력이 있다. 카페 한쪽 벽면에 흑백 모노톤으로 그린 벽화가 있는데 그의 작품이다. 카페를 차린 건 4년 전이었다.
전주시에서 살았던 임진이는 2014년 이곳 산 많은 고원지구 진안군으로 귀촌했다. 그에겐 세 자녀가 있는데 초등학생이던 딸 둘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시골 생활에 입문했다. 아토피는 겪어본 사람만이 그 고통과 불편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난치성 질환이다. 그러니 엄마로서 심정이 오죽했으랴. 해볼 건 다 해본 것 같다. 그러다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르는 게 유력한 대안이라고 여겨 시골에 들어왔다. 남편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내세워 귀촌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이는 밀어붙여 뜻을 이루었다. 남편은 전주에 머물러 하던 사업을 차질 없이 계속하고, 나머지 가족은 귀촌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은 것.
이렇게 주말부부가 됐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설고 고즈넉한 시골로 삶을 이동한다는 게, 시간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시골살이에 쏟아붓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만큼 딸들의 아토피 치유에 대한 바람이 간절했다. 그래서인가, 지성이면 감천인가, 마침내 아이들이 피부 건강을 회복했다.
“시골의 좋은 자연환경과 깨끗한 먹거리가 가져다준 성과였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아이들은 바람직하게 성장했다. 매우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자랐으니까.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의젓하게 성숙한 셈이다. 과외를 받지 않고도 학교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했으나 그마저 기우에 불과했다. 딸들이 자랑스럽다.”
아이들의 건강 회복을 계기로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
“우리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며 잘 정착했다. 초기 한때 힘에 부쳐 돌아갈 궁리도 했지만 아이들을 고려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오히려 나 자신이 한결 단단해지는 걸 느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귀농·귀촌인 대상으로 멘토 역할도 한다지?
“그렇다. 서서히 일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성과가 주어졌고, 자연스럽게 시골살이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처음엔 어려운 게 많았다. 전주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할 정도였다. ‘그것 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난 시골에 가지 않는 거야!’ 그랬던 친구들의 말이 언제부턴가 바뀌었다. ‘어! 나도 촌에서 살아볼까?’로.”(웃음)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나?
“귀촌 직후 집을 지으려다 실패한 경험을 꼽아야겠다. 주민과 진입로를 놓고 분쟁이 빚어져 결국 건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곤 주택을 임대해 사는 것으로 귀촌 생활을 시작했다. 집의 상태가 허술해 여름엔 몹시 더웠고,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렇게 초기 4년을 이모저모 불편하게 살다 마을과 좀 떨어진 산 아래에 비로소 집을 지어 이사했다.”
진입로를 둘러싼 외지인과 원주민 사이의 마찰은 하나의 풍속처럼 흔해졌다. 역귀농의 주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해법은 무엇이라 보나?
“희한하게도 현재 살고 있는 두 번째 집 역시 진입로 문제가 있어 아직까지 고충을 겪고 있다. 사전에 법적인 문제를 충분히 점검했지만, 저 멀찍이 있는 진입로 일부의 소유권을 가진 주민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진입로가 폭우에 망가져도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귀농·귀촌을 하려는 분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시골의 토지를 살 때 법적인 문제를 점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마을에 믿을 만한 지인 하나쯤 미리 만들어 해당 토지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함으로써 불운을 예방하라는 걸.”
원주민의 텃세가 두려워 귀농·귀촌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일까?
“텃세로 곤욕을 치른 사례가 있을망정 그걸로 마을 인심 전체를 측정할 일은 아니다. 한두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불상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난 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을 실감하며 살았다. 서로 돕고 나누는 관계를 추구할 때 정착이 수월해진다.”
임진이는 아침 일찍 카페로 출근해 문을 연다. 카페 앞 국도를 통해 전주로 출근하는 직장인 중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 같은 아침 간편식이나 차를 주문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서다. 운영은 순조로울까?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들이닥쳐 전반적으로 여의치 않았다. 주변 일대에 카페들이 급속히 늘어 경쟁도 심화됐다. 진안에서 생산되는 청정 농산물로 만든 음료와 간편식을 팔았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다. 식재료의 원가 대비 마진도 기대치 이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나?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아 다시 뛰고 있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해 공간의 구색을 바꾸었다. 진안 홍삼이나 벨기에 와플이 들어가는 브런치 메뉴도 개발했다. 국도를 오가는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메뉴도 만들었다. 으쌰으쌰, 이제 새로 출발한다!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 거다.(웃음) 좋은 반향이 있을 거라 예상한다.”
뜻밖에 얻은 벽화 그리기 직업
삶이 원래 그렇듯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질주를 했으나 돌아보면 우습게도 원래 자리 그대로다. 그렇다고 무슨 악마의 계략이 거기에 개입됐을 리 있으랴.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시련도 강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다. 임진이는 부진했던 카페의 상황을 그렇게 긍정의 눈으로 읽어낸다. 사실 귀촌의 날들 속에서 그에게 닥쳐온 고통과 불편의 가짓수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단다. 그러나 그걸 위기가 아닌 충전의 기회로 간주해 허들을 넘어서길 거듭한 것 같다. 고생이 오히려 정신을 단련시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해준다는 걸 깨달으며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래 결과적으로 그의 귀촌 생활은 순항을 위주로 펼쳐졌다. 바야흐로 이젠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존재로 부상했다. 그럴 수 있게끔 부지런히 뛰었다.
“카페 일만 본업은 아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일감을 갖는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가장 보람차고 즐거운 일은 마을 벽화 그리기다. 이건 재능기부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일이 커졌다.”
마을 벽화를 그려 수익을 얻는가?
“그렇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그려준 마을 벽화가 맘에 든다며 행정 쪽에서 아예 사업을 위탁해주더라. 그래 주민들과 협업해 본격적으로 벽화 작업에 나섰다. 지금까지 진안군 관내 20여 개 마을에 100여 점의 벽화를 그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발휘해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신선한 얘기다.
“내가 미술을 전공했지만 누가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할 경우엔 뜯어말렸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 시골에 살면서 미술 관련 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발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직업적으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주어졌다. 보수는 많지 않지만 돈보다 값진 보람이 크다. 마을 벽화 역시 일종의 창작 행위이기 때문에 작품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다. 벽화를 완성한 뒤 밝고 깨끗하게 변한 마을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지역주민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시골에서 잘 살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가 있다.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대접받기보다 먼저 대접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이웃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가령 고령층이 다수인 시골에선 꼭 필요한 민원조차 넣지 않는 걸 알고 내가 나섰다. 가로등이나 과속방지턱 설치에 관한 민원 신청을 해 해결하는 식으로.”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임진이에겐 동네 주민들이 붙여준 별명이 하나 있다. ‘민다리’라 불리는데 ‘민원의 다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관심 갖고 찾아보면 나에겐 물론 남에게도 좋은 일은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많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진안군 정책자문위원을 맡아 주민 편익에 관련한 의견 제시도 한다. 이렇게 생활상의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그러자 도시에 살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열리지 않던 안목이 열리더란다. 아울러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능동적으로 변했고.
“내가 참여하는 공공활동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소소한 일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익에 관심 갖고 움직이다 보면 얻는 게 많다. 우선 인적 자산이 형성된다. 나 자신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선한 사람이 아니건만 남들이 선한 사람이라고 할 때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땐 정말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곤 한다. 이런 감정은 도시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시골도 자본주의의 흐름을 타고 돌아간다. 경제적인 면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귀촌 이후 남편의 사업 부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부를 누린 적도 있지만 졸지에 정반대 상황과 직면한 셈이다. 하지만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 아닌가? 낙심하진 않았다. 다만 귀촌 10년 중 절반 이상은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시골이라는 한정된 조건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 경제적인 면의 성공? 글쎄, 돈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선한 삶에 더 큰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귀촌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진정성 있는 방향을 잡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산다는 건 복잡한 퍼즐 맞추기와 닮았지만 희로애락을 거쳐 마침내 완성으로 가는 드라마인가? 솔깃한 이야기에 즐거웠다.
임진이가 주는 귀촌·귀농 Tip
•땅을 사거나 집을 짓는 일을 서두르지 말자. 적어도 2년 정도 집을 임대해 살면서 마을의 물정을 익히고 풍토를 파악, 과연 나의 성향과 어울리는 동네인지 판단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땅을 구입할 때는 진입로에 따른 원주민과의 분쟁 소지가 없는지 사전에 철저하게 확인하자.
•시골에 가면 관의 많은 지원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산이다. 자립 의지를 가지고 뛰어들어야 한다.
•시골의 제도권 교육 환경은 오히려 도시보다 나은 측면이 있다. 승마, 골프, 사격까지 거의 무료로 배울 수 있다. 자녀 교육에 차질이 생길까봐 우려해 시골 생활을 꺼려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한결 듬직하게 성숙한다.
•재력에 의지한 과시적 처신은 금물이다. 원주민과 갈등을 빚고 외로운 처지에 몰리기 십상이니까.
과거에는 나이가 곧 경험이고 지혜여서 ‘나이 든 사람’이 ‘어른’이었다. 5060세대가 ‘동네 어른’을 추억하는 이유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2024년 우리가 생각하는 어른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떨 때 어른이 되었다 느낄까? 좋은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세 명의 전문가와 함께 이 시대의 어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대담 참여자 강용수 작가·백종화 리더십 코치·최영희 메타연구소 소장 진행 이연지·문혜진 기자
◇강용수 작가(56세,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교수)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다. 최근 낸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백종화 리더십 코치(45세, 그로플 대표)
18년 직장생활 후 회사 그로플을 설립, 리더십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대기업 CEO·임원·팀장 등의 리더십 코칭을 한다.
◇최영희 메타연구소 소장(67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전문가다. 약물 치료를 선호하지 않아 인지행동·스키마·마음챙김 치료 등을 하고 있다.
진행자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조사’(2024)에 따르면 ‘어른 하면 떠오르는 단어’로 ‘책임감 있는’이 꼽혔어요. 2014년 조사에서는 ‘윤리’가 중요한 키워드였는데, 2024년에는 ‘책임감’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이유가 뭘까요?
강용수 책임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니체는 타인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기대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주권적 개인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어떤 공동체를 아우르는 책임이라기보다,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백종화 사람마다 책임감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 같아요. 저는 신뢰와 실력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을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데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점점 어려운 일을 맡게 될 때 잘해내기 위해 전문성을 끊임없이 확보하는 게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영희 그러니까 책임이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결과를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과거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가 부모가 되어 내 자식에게 결핍을 물려주려 하지 않다 보니, 젊은 친구들은 의사결정할 일이 별로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부모가 깨워주고 옷 입혀주고 밥 먹여서 정해준 학원에 보내고, 집에 오면 이 닦고 잠자리에 드는 식이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언젠가 스스로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좋든 싫든 올 텐데, 해본 적이 없다 보니 굉장히 불안해하죠.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렵고 두려울 수밖에요.
백종화 조직에서도 의사결정 경험이 중요해요. 리더들이 결정해왔기 때문에 결정하지 않은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데에 구성원들은 의문을 가지고, 반대로 리더는 구성원 자신의 일인데 왜 책임지지 않느냐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거든요.
진행자 일상에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경험을 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의미네요. 그래서인지 설문조사에서도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때,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책임질 수 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보는 듯한 결과가 나왔어요.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느낄 것 같은 순간’을 물었을 때 2030은 ‘경제적으로 자립했을 때’를, 5060은 ‘일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때’를 꼽았거든요.
최영희 나 혼자도 벅찬데 누구를 돌보겠어요. 하버드대학교에서 사회적 관계를 70년 넘게 연구한 것이 있는데요.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가 좋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사람이 고통받는다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고,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나누는 관계를 의미하는데요. 개인주의와는 반대라고 볼 수 있죠. 시대에 따라 우리가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기본적인 기준, 뭐랄까 도덕의 의미가 변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백종화 우리라는 개념이 희미해진 것도 있어요. 5060세대는 ‘우리’가 익숙해서 ‘우리 안에서 내가 이 정도는 해야 돼’라는 생각이 있거든요. 그런데 2030세대는 우리 가족, 우리 회사가 아니라 나의 가족, 나의 회사라는 개념이라 충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진행자 요즘에는 많은 분들이 책·강연·영상 등으로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고민에 대한 답도 찾고 위로도 받는 것 같아요. 비대면으로 어른을 찾는 셈이랄까요?
강용수 사실 제 나이쯤 되면 주변에서 어른을 찾는 것도, 어른이 되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듣는 사람이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어른이라면 쓴소리도 좀 해야 하죠. 다만 남을 가르치려 하고 “내가 겪어봤는데 말이야”라며 나서는 게 아니라, 타인이 어른으로서 인정해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종화 요즘 세대는 유튜브로 모든 걸 배우잖아요. 어른한테 고민을 공유할 필요가 없어져버린 거예요. 지식과 경험이 온라인에 다 있으니까요. 세대 이슈가 아니라 이제는 시대 이슈라고 봐야 해요. 모두가 똑똑해진 시대라 오히려 젊은 꼰대가 훨씬 많아요. “내가 아는 게 많으니까 내가 맞는데 왜 엉뚱한 소리 하세요?”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른 건데 말이죠. 그런데 SNS에서 보는 것들은 다 결과거든요. 성공한 모습만 보는 거잖아요.
최영희 옛날에는 사회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우리가 어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세히 보면 뭐 단점도 있고 그래요. 요즘은 인터넷으로 개인의 사생활이 실시간으로 비치잖아요. 그러니 소위 신화적인 존재가 나오기 어렵죠. 이걸 다시 말한다면,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는 거예요. 어른을 정의할 때 아주 완벽한 기준을 들이대는 접근 방법은 옳지 않은 것 같아요.
강용수 공감합니다. 완벽한 어른은 없어요. 고통과 실패를 보여주는 게 어른인 것 같아요. 무언가를 성취하려는데 잘 안 되잖아요? 그런 경험이 오히려 성숙해지는 기회 같거든요. 쇼펜하우어 역시 40대에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데요. 외부에서 깨져보면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를 벗어나 온전한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패를 거쳐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과정을 보는 게 중요한데, 요즘은 결과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최영희 멀리서 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 따르려고 할 게 아니라, 매일 만나서 부딪히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는 게 좋죠. 모방할 수 있는 모델이 가까이 있으면 학습이 쉬워요. 누군가를 흉내 내겠다는 게 내가 변화하겠다는 강력한 동기가 되거든요. 거창하진 않아도 나름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 인간다움이 있는 사람을 어른으로 삼아야 하는 거죠. 삶은 고통이잖아요. 예상치 못한 좌절들이 올 때 넘어졌다가도 잘 일어나는 것, 즉 회복 탄력성이 좋을수록 건강한 어른이라고 봅니다.
진행자 결과 중심적인 사회이다 보니 주변에 있는 어른들을 미처 보지 못하는 것 같네요. 그럼에도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는 어른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설문조사에서도 ‘가까이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83.8%가 그렇다고 했거든요.
백종화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다만 과정이 중요해요. 어려움도, 고난도, 극복하는 것도 볼 수 있거든요. 어른이라면 그런 걸 보여주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의 과정을 도와주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어른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에게 배울 점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좋은 어른, 나쁜 어른이 아니라 나와 맞는 어른을 찾아야 하는 거죠.
최영희 그리스 신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해요. 세대 차이는 계속됐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예요. 요즘에는 20대도 10대를 이해 못 해요. 그러니 내가 옳고 내가 항상 중심이라는 생각을 깨야 합니다. 그냥 다른 거거든요.
백종화 맞아요.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려면 먼저 나를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나다움이 먼저인 거죠. 리더십의 핵심 역시 ‘자기 인식’(Self Awareness)입니다.
강용수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차이를 알고 인정하는 과정인데요.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개성이라고 봅니다. 부·명예와 같은 외부의 나다움이 있고, 건강·성격 같은 내부의 나다움이 있다고 하는데요. 자기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게 필요하죠. 그걸 알아가는 노력이 어른이 되는 과정 아닐까 싶습니다.
진행자 어른이 되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네요. 다음으로는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거고요. 그렇다면 어른이 되는 걸 훈련할 수 있을까요?
백종화 조직에서의 어른을 리더라고 본다면 리더는 태어나는 걸까요, 만들어지는 걸까요? 과거에는 태어났습니다.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 리더로 성장하는 거라, 그 말이 맞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부모, 팀장, 매니저, 선배 어떤 역할이든 리더에 포함됩니다. 태어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더 다양한 영향력을 키울 필요가 있죠.
강용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면 남과의 차이도 알게 되죠.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우주에서 가장 개성이 도드라진 존재라고 해요. 내가 개성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의욕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나와 타인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가 고독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죠. 쇼펜하우어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한 경험과 학습으로 새롭게 획득되는 성격이 있다고 봐요. 물론 유전적인 성격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에, 새로운 성격은 아주 어렵게 얻어진다고 합니다.(웃음)그래서 글쓰기, 책읽기 등을 좋은 습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죠.
최영희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의 모든 선택이나 행동의 결정이 무의식 안에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무의식의 영역을 찾아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죠. 그런데 깨달았다고 쉽게 변하지는 않아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릅니다. 매일 다니는 산책길을 생각해볼까요. 기존에 있는 길을 걸어요. 그런데 지름길을 내려면 풀숲을 헤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요즘 효율적인 방법이 많이 개발되어 있으니 얼마든지 훈련할 수 있습니다.
백종화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건 결국 행동이거든요. 행동의 시작은 성격이라고 봅니다.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기질과 후천적으로 받은 영향으로 생긴 성격인데요.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행동이 있고, 그것에 익숙해져요. 이를테면 평생 오른손으로 젓가락질하는 것과 같아요. 왼손으로 젓가락질하려면 어색하죠. 그런데 평생 하던 행동과 반대되는 어색한 행동을 훈련할 때부터 영향력이 달라집니다.
최영희 정신과 진단에 ‘성격장애’라는 게 있어요. 20여 년 전에는 치료가 안 된다고 했어요. 오늘날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지금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많습니다. 스키마 치료도 그런 맥락인데요. 스키마는 자극과 반응 세트의 총합입니다. 백 코치님이 말한 익숙한 행동이라는 게 스키마 이론으로 보면 자극이 왔을 때 내가 하는 반응이 자동화된 거예요. 그대로 살아도 되는데, 그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나를 위해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명상 등으로 내 안에 있는 걸 끌어내는 훈련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훈련할 수 있어요. 내 성격은 나 외엔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백종화 어른이 된다는 것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정답을 고민하는 사이에 시대도 상황도 바뀔 거예요. 결국 기존에 하던 익숙한 행동을 그대로 하게 됩니다.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해야 변화가 있잖아요. 어색하고 불편하고 실패하겠지만, 그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훈련하다 보면 어른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소맥이 진리로 통하는 한국 주류 시장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뛰어든 이대로 댄싱사이더 컴퍼니 대표를 만났다. 그는 양조장에서 사이더라는 술을 만들지만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를 전파하고자 창업의 길에 뛰어들었다.
이대로 대표는 유년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그의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에서 창업을 했다. 크래프트(수제) 사이더 브랜드 ‘다운이스트 사이더’다. 사이더는 사과즙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사과의 달콤함, 탄산의 상쾌함, 높지 않은 알코올로 가볍게 즐길 수 있다. 미국에서는 2010년 이후 전역에서 크래프트 사이더 붐이 일었고, 사이더 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돼 지금은 많은 이들이 즐기는 주류가 됐다. 친구들의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는 걸 보며 이 대표는 사이더 시장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사이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한국에서는 아무도 만들지 않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국내에는 ‘사이더’라는 주류 카테고리조차 없었죠. 사과와인을 만드는 분들은 있었지만, 사과 맛이 진하면서 청량감도 좋은 대중적인 사이더를 만드는 곳은 없었어요.”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금융권에서 일하면서도 이 대표는 사이더 시장에 계속 관심을 가졌다. 열정만 가지고 창업을 한 게 아니라 5년이라는 시간을 공들여 고민하고 시장을 조사했다. 2013년 즈음만 하더라도 다양한 주류 규제와 주세법 때문에 국내에서는 크래프트 주류 시장이 성장하기 어려웠다. 2016년 이후 수제 맥주에 대한 규제가 개선되면서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늘기 시작했다. 사이더가 우리나라에서도 통할 거라고 생각한 이 대표는 공동창업자 구성모 이사와 함께 2018년 충주에서 댄싱사이더를 창업했다.
사과 혁명을 꿈꾸다
이대로 대표는 소맥 위주의 우리나라 주류 시장에 애플사이더로 일으킬 ‘사과 혁명’을 꿈꿨다.
댄싱사이더 컴퍼니 직원들은 직함 대신 서로를 ‘선수’라고 부른다. 소비자는 ‘댄서’다. 이 대표는 선수가 만든 사이더의 매력에 댄서가 자신의 방식대로 춤추며 즐긴다는 의미를 ‘댄싱사이더’라는 회사 이름에 담았다. 그의 말처럼 사이더를 즐기는 데 정답은 없다. ‘Drink Different’라는 댄싱사이더의 슬로건처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게 춤추며 즐기면 된다.
“춤이라는 장르는 정답이 없잖아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요. 경직된 회식 자리에서 소맥만 마시는 우리 술 문화를 외국의 파티 문화처럼 편하게 바꿔보고 싶었어요. 강압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시고 싶은 술을 내가 원하는 만큼 마시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죠.”
댄싱사이더의 양조장은 충북 충주에 있다. 충주는 사과가 맛있기로 유명하지만 물이 좋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원물의 퀄리티가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충주에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사과 품종의 70%는 ‘부사’다. 해외에서는 디저트로 사용하는 사과로 그만큼 당도가 좋아 설탕이나 인공 재료를 넣지 않고도 사과 본연의 단맛을 구현할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나라 주세법상 사이더는 ‘과실주’에 속한다. 이 대표는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 사과를 아끼지 않았다. 제일 처음 선보인 ‘스윗마마’와 ‘댄싱파파’는 330ml 한 병에 사과가 2개나 들어간다. 최근 새로 개발한 사과 증류주 ‘댄싱22’는 375ml인데 여기에는 7개의 사과가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농산물을 제품에 녹여내면서도 어떻게 하면 사이더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까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런 제품을 만들었다. 그는 댄싱사이더 제품이 해외의 사이더와는 다른 ‘한국적인’ 사이더라고 말한다.
“해외 사례를 많이 공부했고 탐방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나는 사과와 농산물을 원물로 사용하는 우리만의 강점은 무엇일지 고민했죠. 해외의 맛을 그대로 낸다면 과연 한국의 맛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리면서 국산 농산물 특징을 살리는 맛에 더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댄싱사이더의 8개 제품은 뉴욕, 미시간, 영국, 일본, 한국 등 5개 국제 사이더 품평회의 총 22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맛과 품질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한국적인 사이더의 맛을 구현하고자 했기에 더 값진 결과다.
‘사업이 아니라 운동을 시작하라’
‘창업의 시대, 브루독 이야기’라는 책의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사업을 시작하는 주된 목적이 돈이 아니라 회사를 대표하는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의미다. 이대로 대표는 “회사의 바이블 같은 책”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댄싱컴퍼니에 합류하는 모든 직원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재미있는 비즈니스 책이지만, 성공할 수 있는 기본적인 철학이 다 나와 있어요. 크래프트 주류 회사로서 이 책에서 말하는 기본과 반대로 간다면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직원들에게 책을 선물한 이유는 우리 회사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니 참고해달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그 점을 지적해달라는 마음이에요.”
브루독은 2010년 스코틀랜드에서 탄생한 수제 맥주 회사다. 2명이 설립한 회사지만, 크래프트 맥주계의 이단아로 불리며 580명의 직원을 이끄는 회사로 성장했다. 전 세계에 바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 브루독의 사명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맥주 산업에 혁명을 일으키고 맥주 문화를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대로 대표는 이런 브루독의 철학이 말하는 ‘본질’과 ‘가치’에 공감한다. ‘한국적인 맛과 멋에 집중한 유일무이한 애플사이더 브랜드로서 대한민국 애플사이더 혁명을 일으키는 데 앞장선다’는 가치를 세우고 국내 사이더 시장을 개척해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한국에 없던 것이면서도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회사이기에 살아남기 위해 이익을 내야 하지만, 이익이 회사의 목적, 즉 존재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미션은 대한민국에서 사이더 고객을 계속 유치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주류를 생산하는 제조회사이기에 제품의 품질을 최고로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저희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댄싱사이더의 브랜드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게 목표입니다.”
이대로 대표는 댄싱사이더의 양조팀이 발효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창업 후 3년은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재미있게 일했다. 창업 5년 차인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외형적으로 꾸준히 성장해왔지만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할 때라고 판단한다. 코로나19 이후 어려워진 경제 상황은 댄싱사이더도 피해가지 못했다. 자생하는 힘을 키우고 싶어 투자를 받기보다 스스로 시장을 헤쳐온 그다. 매년 성장하다 창업 후 첫 고비를 겪고 있다. 이 대표는 “돌아보니 그동안 운과 타이밍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댄싱사이더는 소주나 맥주처럼 대중적인 주류를 만드는 회사가 아님에도 5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동안 외형적으로 성장해왔다면 앞으로는 밀도를 높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댄싱사이더를 시작할 때 가진 목표, 꿈, 비전이 있는데,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결정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직원이 늘어나고 회사도 커지면서 무게감을 더욱 느끼고 있어요. 최근에는 처음으로 외부 투자도 받았습니다. 다음 단계로 올라서려면 질적인 성장 없이는 힘든 것 같아요.”
이 대표는 댄싱사이더의 가치를 실행하기 위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잘 다져둔 땅에 집짓기를 잘하려면 기초를 잘 올려야 하는데, 지금이 그 시기라고 생각한다. 국내 사이더 시장의 개척자로서 때로는 누군가 함께 경쟁하며 시장을 넓혀갔으면 싶을 때도 있지만, 그는 더 먼 미래를 보고 있다. 이 대표에게 금융권에서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는 없냐고 묻자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와닿는 시기”라는 답을 내놨다.
“지금 편하면 나중에 힘들고, 지금 힘들면 나중에 편하더라고요. 언제 힘들고 언제 편할 거냐의 문제 같아요. 국내외 성공 사례들을 보면 최소 10년은 걸리는 것 같아요. 지금 잘하고 있는 회사들은 그 이상의 시간이 걸렸죠. 처음부터 장기전이라 생각하고 뛰어들었어요. 단지 가만히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린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미래 도약을 위해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웰다잉(Well-dying)을 직역하면 ‘좋은 죽음’이다. 저마다 삶의 양식과 가치관이 다르기에 좋은 죽음에 정답은 없지만, 대체로 ‘삶의 마무리 단계에서 자기결정권을 실현할 수 있는 죽음’을 의미한다. 국내에선 자기결정권의 일환으로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다만 이에 따른 실천은 미미한 편이다. 문제는 개인이 실천했음에도 웰다잉 실현은 어려울 수 있다는 점. 무엇이 그들의 존엄한 마무리를 가로막는 것일까?
웰다잉 수요 변화를 충족할 사전적 정책 대응 마련해야
2025년 한국은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상된다. 베이비붐 세대가 후기고령자(75세 이후)로 대거 편입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후기고령자는 치매, 중증 질환 등으로 인해 자기결정권 행사에 제약이 있는 노인이 많다. 이에 대비한 생애 말기 지원 정책의 확대가 요구되는 가운데, 웰다잉 지원 정책의 필요성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정부는 2020년 12월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내 세부 항목에 ‘존엄한 삶의 마무리 지원’을 포함했다. 당시 ‘생애 말기·죽음 관련 자기결정권이 구현되는 사회문화적 기반 조성’을 목표로 내세우며 해당 정책의 내실화를 강조한 바 있다. 그보다 앞선 2018년에는 연명의료결정법, 2019년에는 호스피스·연명의료 종합계획(2019∼2023)을 발표해 시행 중이다. 그밖에 존엄사법, 성년후견지원제도, 장사제도, 유족연금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생애 말기 케어, 고독사·죽음준비 평생교육과 상담, 유류품 지원 서비스 등 다양한 관련 법과 지원책이 마련되기도 했다.
해외 선진국에 비하면 국내 웰다잉 정책의 역사는 짧지만, 최근의 시도 덕분에 죽음에 대한 인식과 관심은 꽤 높아진 편이다. 그러나 앞으로 늘어날 웰다잉 정책 수요를 충족하는 제도적·물리적 여건이 현실적으로 마련될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존엄한 삶 마무리 지원 정책 모니터링 및 과제’(이하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서는 “현시점 이후부터는 웰다잉 정책 수요의 급증이 예상된다”며 “수요 변화를 충족할 수 있는 사전적 정책 대응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혼란 또는 논란이 대두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내다봤다.
[이슈 1] 고령화·1인 가구 증가, 웰다잉 품앗이해야 할 판
웰다잉의 직접적 정책 대상자는 사망자다.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사망자 수는 초고령사회 진입 시점인 2025년 이후 급증해 그 흐름이 2060년까지 지속될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65세 이상 노년층 중 1인 가구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구 구조 변화로 사회에서 웰다잉을 지원해줄 청장년층의 부담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장차 1인 가구 장례 품앗이 등을 고민해야 하는 지경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상황이다.
가장 안타까운 건 저소득 독거노인의 죽음이다.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는 “독거노인의 경우 무연고 사망자가 많은데, 사실 90% 이상은 연고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대부분 경제적 이유로 시신 인수를 포기한다. 생전에 돈이 없어서 소외됐던 이들이, 결국 또 돈이 없어 장례도 못 치르는 설움을 겪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민간에서 해결하긴 어렵다. 결국 정부에서 고민하고 나서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허울만 있는 웰다잉 정책은 ‘공염불’
웰다잉 정책 수급 불균형의 대표적 사례로 ‘화장(火葬)장 부족’을 꼽을 수 있다. 통상적인 화장로 1기당 1일 적정 가동 횟수(3.5회) 및 가동 일수(300일)를 고려할 때 해마다 늘어나는 사망자 수를 감당하기엔 버거운 실정이다. 실제 코로나19 사태 당시 일시적 수요 증가에 따른 화장장 부족으로 인해 4~5일 장으로 장례를 치른 상황만 봐도 실감할 수 있다.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고령화에 따라 연간 1만 명 이상 사망자 수가 늘어날 전망이다. 이를 감안할 때 화장로는 매년 약 10기 이상씩 확충돼야 한다. 그러나 최근 5년간 한 해 평균 확충된 화장로는 7.8기에 불과하다. 더구나 화장장은 님비현상이 적용되는 대표적 시설로, 증설에만 약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대응책 마련을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존엄한 죽음을 뒷받침할 시설과 제도 확충이 시급하다. 웰다잉 수요를 고려할 때 화장장, 영안실, 호스피스 병동 등이 훨씬 더 늘어나야 한다”라며 “법적인 부분도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유언장을 썼더라도 법적 효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니 죽음 이후 남은 가족끼리 갈등을 겪거나 소송까지 하게 된다. 독거노인의 경우 사망 후 시신 인수나 장례 등을 제3자가 진행하기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스스로 정해놓은 죽음의 방식이 있더라도 이를 실현하기 어려워, 결국 웰다잉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책적으로 웰다잉을 언급하지만, 실질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이나 다름없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준다.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분야인데도 정책적 논의에서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잊힌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슈 2] 벼락치기 연명의료중단, 진정한 웰다잉일까?
현행법상 연명의료중단의 경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혹은 연명의료계획서를 통해 환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거나, 가족 2인의 진술을 통한 환자 의사 추정 혹은 가족 전원 합의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올해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영석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연명의료결정제도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3년 7월 말 기준 연명의료중단 이행 건수는 29만 7313건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본인의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중단이 이행된 건수는 39.2%였다. 즉 가족의 진술 또는 합의를 통한 연명의료중단이 과반수인 셈이다.
같은 자료에서 주목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연명의료중단을 위한 서식 작성과 이행이 같은 날 이뤄진 건수가 전체의 80%가 넘는다는 것. 이에 서영석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것이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취지임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시행되고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펴보면 나의 선택보다 가족의 선택으로 더 많이 이뤄지고, 준비하기보다 벼락치기가 더 많은 현실”이라며 “많은 국민이 제도에 참여하며 관심을 보이는 만큼 전체적으로 제도를 돌아보고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반드시 지켜낼 수 있도록 개선 및 보완해야 한다”고 밝혔다.
관습적 문제, 가족 눈치 보지 말아야
근래 웰다잉 관련 선행 연구들에서 언급됐던 좋은 죽음에 대한 공통된 개념 중 하나는 ‘자녀(혈연)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이다. 웰다잉은 개인의 처지와 시대적 상황, 문화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 노인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전통적 가족주의 문화가 반영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남은 가족에게 심리적 부담은 물론 돌봄이나 장례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 떠나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웰다잉의 일부이겠으나, 심할 경우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죽음 교육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유경 사회복지사는 “웰다잉 실천을 어려워하거나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로 ‘지나친 가족 중심 문화’를 들 수 있다”며 “가령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핵심인데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보호자(가족) 쪽으로 결정권이 넘어가는 편이다. 환자의 치료 경과나 예후에 대해서도 당사자보다는 보호자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뤄진다.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몰라 시의적절하게 마지막을 준비하지 못하는 이도 있다. 제도나 인식이 무르익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는 환자가 미리 연명의료중단 의사를 밝혔더라도 의료진으로선 추후 분쟁을 대비해 가족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남은 가족의 부양이나 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다는 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자신의 마지막을 선택하기보다는 오롯이 ‘자기결정권’으로 주체적인 고민을 해보시길 바란다”며 “그 이후 가족들을 위해 할 일은 자신의 결정을 알려두는 것이다. 그래야만 갑자기 이별이 찾아오더라도 가족들이 우왕좌왕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고인의 생전 뜻대로 마지막을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슈 3] 노인 중심 웰다잉 교육, 중장년도 외면 말길
웰다잉 분야 전문가들은 ‘죽음 교육’에 대한 수요 증가 및 활성화는 뚜렷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기고령자 중심으로 정책 집행(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따른 생애 말기 준비·설계 교육 등)이 이뤄져 다소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장소의 특성상 중장년은 교육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평생교육과의 연계 또한 어려운 실정이다.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서도 “부모의 장례를 준비하는 40~60대를 핵심 정책 대상층으로 선정해놓고 있음에도 (이에 따른 교육 등이) 소극적이라는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유경 사회복지사는 “중장년은 죽음을 먼 이야기로 여겨,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도 막상 실천으로 이어가지 못한다. 노년기에 죽음을 생각하면 주로 삶에 대한 회고지만, 중장년기에는 회고와 더불어 다가올 노년기를 계획해볼 수 있다. 즉 중간점검 기회인 셈이다. 다가오는 연말에는 나의 죽음을 떠올려보고, ‘웰다잉’을 내년 버킷리스트로 삼아보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도움말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 유경 사회복지사(죽음 준비교육 전문강사)
참고 존엄한 삶 마무리 지원 정책 모니터링 및 과제(한국보건사회연구원)
“손에 돈을 쥐고 있으면 병원에서 문전박대 당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어요.”
어머니는 딸 앞으로 암보험, 실비보험 등 보험만 4개를 들었다고 했다. 40대 초반의 딸은 유방암으로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항암치료를 했지만 결국 말기 환자가 됐다. 주치의는 집 근처 호스피스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모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편과 이혼 후 홀로 키운 딸이고, 모녀가 함께 살 집 장만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태껏 죽도록 일만 한 딸이었다. 그리고 딸은 오래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암이 발견됐다.
집 근처 병원을 마다하고 서울의 유명한 대형병원을 찾아가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날부터 담당 교수는 신이었고, 병원은 신전이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녀는 살아남기 위한 갖은 고생 외엔 딱히 행복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삶이었기에 딸의 암진단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건강보험이 되지 않는 새로운 항암치료를 대비해 여러 가지 보험을 들었다. 그 어떤 가능성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암의 진행은 멈추지 않았고, 임상시험 치료까지 참여했지만, 야속하게도 암세포가 척추까지 퍼져 딸은 하반신 마비가 진행됐다. 그러자 주치의는 치료 중단과 함께 퇴원을 요구했다. 대신 집 근처 호스피스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모녀는 떠밀리다시피 퇴원을 했다. 딸은 평생 일해 장만한 그 오래된 아파트에서 눈을 감는 게 소원이었다. 그래서 호스피스는 가지 않고 집에서 지냈다. 일어나 걸을 수도 없는 딸을 보며 어머니는 매일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은 고열과 함께 오한으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의식도 흐려지는 것 같아 놀란 어머니는 119를 불렀고 근처 병원으로 이송하려 하자 딸은 서울의 대형병원 환자라며 당장 그곳으로 가달라고 졸랐다. 응급실에는 4일을 머물렀다. 각종 검사가 다시 진행됐고, 요로감염이라며 항생제 처방과 함께 퇴원이 결정됐다. 하지만 너무 놀란 어머니는 입원을 원했다. 그러나 병실이 없다며 거절당했고 담당 교수는 끝내 얼굴조차 볼 수 없었고 대신 젊은 전공의는 왜 호스피스를 가지 않냐 재촉했다. 단 한 번도 거부나 주저함 없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이제와서 버려진다고 생각하니 배신감이 밀려왔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택시를 타고 그 병원을 떠나면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모녀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한강변을 달리던 택시 차창 밖으로 다른 병원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도저히 다시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안 나 입원을 부탁할 요량으로 택시를 돌려 무작정 그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다행히 그곳에는 호스피스 병동이 있었고 때마침 병실도 하나 비어 있어서 바로 입원을 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된 그 날의 상황을 나중에 모녀는 신의 인도라고 말했다.
마치 길을 잃은 나그네가 안식처를 만난 것처럼 그들은 그곳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일일이 그곳의 간호사와 자원봉사자 이름을 거론하며 그곳에서의 추억을 내게 풀어냈다. 그곳에서 2주가량을 쉰 후 딸은 다시 그 오래된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불안해하는 어머니에게 그곳 호스피스에서는 가정형 호스피스를 제안했다. 호스피스를 운영하는 집 근처 병원의 가정형 호스피스를 신청하면 집에서도 통증 조절과 영양수액 등 의료적 처치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고, 그렇게 이 모녀는 내게 연결됐다.
우리 병원 호스피스팀은 딸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정기적으로 딸이 평생을 바쳐 장만한 그 아파트를 방문했다.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는 어김없이 딸이 우수사원이 되어 받은 상패를 꺼내 어루만지면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왜 억척스럽게 살아온 자신들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눈물을 쏟아냈다. 그 다음은 어김없이 자신들을 버린 서울의 대형병원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차라리 용기 있게 의미 있는 마지막 시간을 갖도록 일찍 안내했으면 증오가 덜 했을 텐데, 계속해서 새로운 치료를 제안하며 희망을 주었던 것들조차 이제 모두 원망스럽다고 했다. 여전히 상심과 원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녀를 보며 우리는 안타까웠다. 우리 호스피스팀은 후원회의 도움으로 두 모녀에게 바다가 보이는 멋진 호텔에서의 추억 여행을 선물했다. 그리고 얼마 후 딸은 그 오래된 허름한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친척들 가운데 눈을 감았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어머니는 그 집이 너무 싫어 팔고 이사를 갔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돈을 쥐고 있으면 병원에서 문전박대 당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대형병원과 담당 교수로부터 버림받았다며 ‘배신자’라는 말을 입에서 놓지 않던 딸의 목소리도 귓가에 맴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지방에서 서울로 몰려드는 암환자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병실이 없어 대형병원 옆에는 지방 환자들이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위해 수일에서 수주 간 머물다 가는 고시원 같은 환자방이란 게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대형병원은 전국에서 몰려오는 암환자로 호황을 누리며 수도권에 큰 규모의 분원들을 건립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로 서울로 몰려드는 환자 중에 완치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셀 수 없는 말기환자들도 함께 발생하고 있다. 대형병원들은 암센터를 키우고 분원도 새로 건립하면서 그 말기환자에게 일말의 따뜻함을 건넬 수 있는 작은 호스피스 병동을 만드는 것에는 왜 그리 야박한 것일까? 지금도 암환우 카페에 들어가면 말기진단 후 쫓겨나듯 퇴원하는 환자와 가족들의 서러움 담긴 글들이 끝없이 올라온다.
갑자기 다큐멘터리 일본영화 ‘엔딩 노트(Ending Note)’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69세의 말기위암환자다. 그는 선거에서 평생 지지했던 여당 대신 처음으로 야당에게 표를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암 환자에게 따뜻하길”
병원과 의사들은 수술도 함암치료도 하지 않는 말기암환자들에게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고령화 시대의 자산관리 방법으로 최근 신탁이 관심을 받고 있다. 유럽, 미국, 일본 등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신탁이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신탁은 고령자가 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영역이지만,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은 곧 트러스트2.0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하나은행에 재직 중이던 배정식 본부장은 2010년 금융권 최초로 ‘리빙트러스트’를 론칭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유언대용신탁, 치매대비신탁, 유산정리신탁, 증여신탁, 기업승계신탁, 상조신탁, 봉안신탁 등을 선보이며 신탁 시장을 만들어왔다. 금융권에서는 그를 신탁 분야의 ‘선구자’라 부를 정도다. 배 본부장은 이제 국내 신탁 시장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협업하며 상속뿐 아니라 생애 전반을 신탁으로 관리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 왜 고령화 시대에 자산관리 방법으로 신탁이 주목받는지, 배 본부장을 만나 궁금증을 풀어봤다.
나의 자산관리 법인 ‘신탁’
신탁은 생전쪾사후에 필요한 다양한 영역을 관리한다. 50대가 넘어가면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발생한다. 부모님 의료비, 자녀 교육비, 상속, 황혼이혼 등의 문제가 생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완화하는 계약이 신탁이다. 배정식 본부장은 “가상의 자산관리 법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라며 “같은 금액을 상속받더라도 세금 문제가 형제마다 다르기도 하고 공통으로 마련해야 하는 비용도 있는데,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중립적인 시스템으로서 하나의 도구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은 2006년에 신탁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유언대용신탁이 먼저 도입됐고, 신탁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사후에 자녀를 위해 자산이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아픈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부모가 부재할 경우 사후에 자녀에게 정해진 목적으로 자산이 쓰이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고령화 시대가 오면서 노인성 질환이 증가했다. 대표적으로 치매와 같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질환이 늘면서, 고령자의 자산을 두고 가족끼리 다툼이 벌어지거나 치매 환자의 자산을 가로채는 일 등이 생겼다. 이때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신탁이다.
“신탁의 본질은 계약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자산운용을 맡기는 자산관리 시스템인데요. 스스로 자산관리를 하기 어려울 때를 대비해 여러 방법을 계약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 나를 위해 자산이 쓰이다가, 사망하면 남은 재산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상속을 명시할 수도 있고, 사망 후 자산이 어디에 쓰일지도 정해둘 수 있습니다. 고령자가 많아지면서 생전쪾사후 자산관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신탁이 활성화된 해외 사례를 보면서 신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생애주기 따른 맞춤형 서비스
미국에는 생명보험신탁, 연금양도신탁, 기부와 상속을 설정할 수 있는 신탁 CRT, CLT 등의 신탁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신탁은 아직까지 유언대용신탁과 증여신탁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 서비스가 파생되고 있다. 우리나라 법 체계로는 증여신탁의 경우 실질적인 신탁 기능을 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증여신탁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언대용신탁에서 가지처럼 뻗어나온 서비스들이다. 2010년 신탁법 개정 논의가 이뤄지면서 사후에 자산의 쓰임을 설정하고자 하는 수요가 늘었다. 배정식 본부장은 신탁법 개정이 시행되기 전 법무부의 유권해석을 받아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수탁업자(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에게 맡겨 관리하고 운영하다가 사후에 ‘누구에게 주라’고 하면 유언대용신탁입니다. 치매대비신탁은 자산관리 과정에서 ‘만약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자산관리 목적을 정합니다. 이때 두 가지 수요가 있었어요. 첫째, 치매에 걸리더라도 자산이 나를 위해 쓰이면 좋겠고 둘째, 사후에 원하는 이에게 상속하고 싶다는 거예요.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더라도 자녀에게 자산을 뺏기지 않고 병원비나 생활비 등에 사용하는 거죠. 신탁에는 이렇게 자산을 사용할 때, 물려줄 때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요소들을 계약을 통해 완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유언대용신탁과 치매대비신탁이 신탁 시장에 물꼬를 터줬다. 고객들의 신탁에 대한 요구는 더 다양해졌다. 상조신탁과 봉안신탁도 그런 맥락에서 출발했다. 과거에는 상조회사에 일정 금액을 적립하다가 사후에 장례를 맡겼는데, 갑자기 여러 상조회사가 문을 닫는 상황이 벌어졌다. 적립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신탁으로 금융사에 자산을 맡겨두고 사망 시 상조회사에 자산이 쓰이도록 지정하기 시작한 게 상조신탁이다. 생전 자산관리부터 사후 자산관리까지 모두 맡기고 싶은 수요가 늘어난 셈이다. 사람마다 겪는 생애 이벤트가 다르지만, 개인 맞춤형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게 신탁의 가장 큰 장점이다.
“초기에는 요양원에 있는 분들의 수요가 많았다면, 이제는 경도인지장애가 왔거나 몸이 안 좋은 분들이 미리 계획을 세우고자 신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신탁은 한 사람의 삶 전반을 관리하는 것이더라고요.”
분야별 협업이 만든 ‘원스톱 서비스’
상조신탁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걸 보면서 배정식 본부장은 생전 자산관리부터 마지막 장지까지 원스톱으로 신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봉안신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55만 평 규모로 신뢰성 높은 용인공원과 협업해 봉안신탁 고객에게 할인된 금액으로 봉안당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한 4자 협업 신탁 원스톱 서비스도 출시했다. 연세대학교 의료원, 법무법인 가온, 용인공원, 하나은행과 함께 의료원에 기부하는 고객의 생애주기에 맞춰 의료, 자산관리, 장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 것. 이를 통해 기부자의 건강한 생활, 자산관리, 상속, 증여, 후견, 상조, 장지 등의 절차를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배정식 본부장은 이런 분야별 협업이야말로 트러스트2.0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더 많은 협업을 통해 신탁 시장이 확장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시작이 모여 각 영역이 결합하면 하나의 원스톱 서비스 체계를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될 겁니다. 신탁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 높고 안전한 영역별 전문가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죠. 앞으로 전문가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는 계기와 동력이 생길 거라고 기대합니다.”
2022년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신탁업 혁신 방안 중에는 전문기관과 금융기관이 위·수탁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법무법인, 시니어타운, 요양법인 등이 신탁 업무를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분이 편하게 신탁 상담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신탁이 더욱 대중화될 수 있도록 길을 닦기 시작했다. 배 본부장은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신탁을 찾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렇다면 신탁은 어느 시점에 맡겨야 가장 좋을까? 사실 정해진 답은 없다. 어떤 목적으로 신탁을 활용하고자 하는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탁에 관심 있다면 ‘의사결정이 가능할 때’ 계약을 설정해두는 것이 유리하다.
“현재는 부모에게 상속받은 경험이 있는 40~50대가 신탁에 관심이 높습니다. 상속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탁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60대 중후반이 넘어서면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건강이 염려되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신탁을 고려해보시면 좋을 겁니다. 또 미국처럼 예비부부도 신탁에 관심 가져볼 만합니다. 결혼할 때 모아뒀던 각자의 자산을 자녀에게 쓰겠다, 혹은 부모님에게 쓰겠다는 목적을 설정해 신탁으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추후 이혼에 따른 재산 분할 갈등을 줄여줄 수 있겠죠.”
꼭 자산이 많아야만 신탁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만 원으로도 신탁을 시작할 수 있고, 1억 원이 모이면 자녀에게 증여하는 방식의 신탁을 설정할 수도 있다. 신탁의 핵심은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면서 원하는 목적에 맞게 자산이 쓰이도록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자산관리 방법이기도 하다.
배 본부장은 마지막으로 “고령화 시대에 신탁은 원스톱 서비스로서 하나의 자산관리 도구로 활용될 것”이라면서 “각자의 생애 이벤트에 따라 누구나 신탁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면 좋겠다”고 전했다.
고령화 시대의 자산 관리 방법으로 최근 신탁이 관심을 받고 있다. 유럽, 미국, 일본 등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신탁이 활용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영역이다.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은 은행 재직 당시, 2010년 금융권 최초로 ‘리빙트러스트’를 런칭하고, 국내에서 ‘최초’인 다양한 신탁 상품을 제시하면서 시장의 범위를 넓혀왔다. 금융권에서는 그를 신탁 분야의 ‘선구자’라 부를 정도다. 그는 곧 트러스트2.0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협업하며 상속뿐 아니라 생애 전반을 신탁으로 관리하는 시대다. 배 본부장을 만나 신탁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봤다.
Q 신탁이라는 개념이 조금 생소합니다. 신탁이란 무엇인가요?
신탁은 생전, 사후에 필요한 다양한 영역을 관리합니다. 가상의 자산 관리 법인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50대가 되면 각자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벤트가 다양합니다. 부모님의 의료비나 자녀의 교육비를 고민해야 하거나, 나의 건강관리를 위해 자산이 필요하기도 하죠. 투자로 자산을 늘리고 싶기도 할 테고요. 또 상속 이슈도 있습니다. 같은 금액을 상속 받더라도 세금 문제가 형제마다 다르기도 하고 공통으로 마련해야 하는 비용도 있거든요. 이렇게 부모님, 자신, 형제, 자녀 등의 문제가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갈등 구조를 완화하는 계약이 신탁입니다. 중립적인 시스템으로서 하나의 도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Q 고령화 시대에 노후자산 관리의 한 방법으로 신탁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은 2006년에 신탁법 개정이 이뤄져서 유언대용 신탁이 도입됐는데요. 우리나라에서도 고객들이 사후에 자녀를 위해 자산이 쓰이도록 관리하는 방법이 없는지 문의하기 시작했어요.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아픈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부모가 부재할 경우, 사후에 아이들에게 정해진 목적으로 자산이 쓰이도록 관리하고 싶은 수요가 있었던 거죠.
신탁은 계약에 기반을 둔 자산 관리 시스템입니다. 본질은 계약이죠. 믿을만한 사람에게 나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지 맡기는 것인데요. 스스로 온전하게 자산관리를 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운영과 관리 방법들을 계약 안에 녹일 수 있습니다. 생전에 나를 위해 자산이 쓰이도록 관리할 수도 있고, 혹시 내가 사망했을 경우 누구에게 남은 자산을 줄 것인지 상속까지 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고령 사회가 되어가면서 사전, 사후의 자산 관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우리나라와 사정이 좀 다르긴 하지만 해외의 사례들을 보면서 신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죠.
Q 하나은행 재직 당시 은행권 최초로 ‘리빙트러스트 센터’를 설립하셨어요. 유언 대용 신탁, 치매 대비 신탁, 증여 신탁, 기업 승계 신탁, 상조 신탁, 봉안 신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최초로 신탁 상품을 제안하시면서 국내 신탁 시장의 범위를 넓혀 오신 건데요. 구체적으로 이 신탁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증여 신탁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언 대용 신탁에서 가지처럼 뻗어 나온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수탁업자(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에게 맡겨 관리하고 운영하다가 사후에 ‘누구에게 주라’고 하면 유언 대용 신탁입니다. 우리나라에 신탁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인가된 기관이 60개가 있는데요. 어떤 곳은 부동산만 취급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금전만 하기도 합니다. 각자의 영역이 다른데요, 대표적으로는 은행, 증권, 보험사가 신탁을 주도하고 있었죠. 2010년 우리나라에서 신탁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어요. 이 시기에 앞서 말한 것처럼 원하는 방식으로 사후에 자산이 쓰일 것을 설정하는 자산 관리 방법을 찾는 고객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탁법 개정이 실제로 이뤄지기 전에 법무부의 유권 해석을 받아 유언 대용 신탁 상품을 출시할 수 있었어요.
치매 대비 신탁은 자산 관리 과정에서 ‘만약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자산 관리 목적을 정하는 거죠. 제가 이 신탁을 만들었을 때는 두 가지 수요가 있었어요. 첫째, 내가 치매에 걸리더라도 자산이 나를 위해 쓰이면 좋겠고, 둘째, 사후에는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상속하고 싶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치매에 걸렸을 때 자녀들에게 자산을 뺏기지 않고 병원비나 생활비 등에 지출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더라도요. 처음 이런 내용의 신탁을 만들 때는 저에게도 상당한 도전이었습니다.
유언 대용과 치매 대비 신탁이라는 물꼬가 트이니 신탁의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꼭 상속이나 유언을 대신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관리하는 것이더라고요. 고객들의 요구도 점차 다양해지기 시작했고요. 상조 신탁과 봉안 신탁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전 관리부터 사후 관리까지 모두 맡기고 싶은 것이죠. 초기에는 요양원에 있는 분들이 급하게 이런 방법을 고민했다면, 이후에는 경도 인지 장애가 왔거나, 현재 몸이 안 좋으신 분들이 미리 계획을 세우고 원하는 방식으로 상속하고 싶어 하는 식으로 확장된 거예요.
상조 신탁은 자산 관리를 맡긴 금액 중 일부를 사망했을 때 상조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지정하는 계약입니다. 과거에 여러 상조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는 시기가 있었어요. 상조 회사에 적립식으로 돈을 넣어두었던 사람들은 그 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산을 만약 신탁으로 맡긴다면, 상조 회사가 없어지더라도 나의 자산은 남게 되죠. 이후에 다른 상조회사와 계약을 다시 하면 되니까 신뢰성과 안정성이 확보되는 셈입니다.
또 자산 관리부터 마지막 장지까지 원스톱으로 신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제안했던 것이 봉안 신탁이에요. 용인 공원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55만 평 규모로 신뢰성이 높은 곳이어서, 고객에게 할인된 금액으로 봉안당을 제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본 것입니다.
Q 사람마다 생애 주기가 다르고 삶의 이벤트가 다른데, 이를 개인에 맞춰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신탁의 장점이네요. 그렇다면 자산을 관리하는 수탁자가 다양한 영역에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셈인데요. 금융, 부동산, 법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가족과의 갈등 완화까지 할 수 있는 소통 능력도 있어야 하겠어요.
그래서 신탁이 무척 어려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신탁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업무 협약을 맺은 곳들도 신뢰성이 높고 안전한 곳으로 선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영역별 전문가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는 계기와 동력이 생길 거예요.
이번에 논의 중인 신탁업 혁신 방안 중에서는 전문기관과 금융기관이 위·수탁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무법인, 시니어타운, 요양 법인 등이 신탁 업무를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분이 편하게 신탁 상담을 받을 수 있겠죠. 물론 신탁의 업무 범위는 구체적으로 논의 되어야 하지만요.
Q 우리나라와 해외의 신탁이 많이 다른가요?
우리나라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진 것은 아니어서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법체계로는 증여 신탁의 경우 실질적인 신탁의 기능을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미국에는 생명 보험 신탁, 연금 양도 신탁과 같은 상품들이 있어요. 기부와 상속을 설정할 수 있는 신탁 CRT, CLT도 대표적인 신탁이죠. 이런 신탁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뤄지려면 세금과 관련해서 제도가 완전히 바뀌어야 가능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6월에 연세의료원, 용인공원, 하나은행, 법무법인 가온 네 곳이 업무 협약을 맺고 신탁을 출시했어요. 연세의료원에 위탁자가 기부하면, 연세의료원에서 기부자를 돌보다가 돌아가셨을 때 기부한 돈 일부를 상조·장례·봉안당 비용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기부도 하고 사후에 필요한 부분을 서비스로도 받아볼 수 있는 것인데요. 이런 시작이 모여 각 영역이 결합하면 하나의 원스톱 서비스 체계를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트러스트 2.0이 시작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신탁을 맡기려면 자산이 얼마나 있어야 가능할까요?
꼭 자산이 많아야만 신탁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49재 신탁을 만들었을 때 최소 가입비용을 1만 원으로 제안했어요. 적금과 다름없는 구조지만 굳이 신탁이라는 계약을 거치는 건 제3자의 개입 없이 내가 원하는 목적으로 명확하게 자산이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죠.
매달 일정 금액을 적립해 1억 만들기 등의 목적을 달성하면 자녀에게 증여한다는 설정을 할 수도 있어요.
Q 신탁은 언제부터 맡기는 게 좋을까요?
60대보다 4~50대가 오히려 신탁에 관심이 높습니다. 부모님에게 상속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상속이 꽤 복잡하다는 걸 느끼고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건데요.
물리적으로 생각하자면 건강을 고려해야 합니다. 60대 중후반이 넘어서면 건강에 대비해 자산 관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건강이 염려되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신탁을 고려해보시면 좋을 겁니다.
건강 이외에 시점을 생각해보자면 결혼을 막 하려고 하는 예비부부도 신탁에 관심을 가져볼 만 합니다. 미국에는 이런 신탁 문화가 잘 되어있어요. 결혼할 때 각자의 신탁으로 자산을 설정하고 관리하는 것인데요. 내 자산의 얼마를 결혼 후 자녀의 대학 자금으로 쓰고 싶다거나, 혼자 계신 부모님에게 사용하고 싶다는 자산 사용 목적을 설정해둘 수 있습니다.
Q 앞으로 신탁에 관심을 가질 독자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고령화 시대에 신탁은 원스톱 서비스로서 하나의 자산 관리 도구로 활용될 텐데요. 꼭 고령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에 이벤트에 따라 이제는 다양한 신탁 서비스가 갖춰져 있다는, 누구나 신탁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없다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고 세상이 무채색이 되었다가 누군가 날 알아주면, 단 한 명이라도, 갑자기 숨이 쉬어지고 세상이 색깔을 입게 돼. 그제야 살아볼까 하지.”
가정의 달을 맞아 5월호 주제를 일찌감치 ‘날 알아주는 한 사람의 힘’으로 잡고 여유를 부리던 필자는 마감이 점점 다가오면서 여러 목소리와 이야기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가 시댁 형님들과 나눈 대화방에서 글머리를 찾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큰형님!
‘하늘꽃’ 지고 ‘땅꽃’ 피는 계절
모진 서너 해, 역병 맞은 세상 꿋꿋하게 견디더니 긴 세월 품었던 설움 한꺼번에 폭발한 올봄. 산수유, 벚꽃이 천지사방 만발했습니다. 그동안 자기 순서 지키며 차례로 피던 봄꽃이 너나 할 것 없이 꽃망울 펑 펑 펑 터트렸으니까요. 긴 겨울 메마른 가지 애써 외면하면서 덩달아 하늘 볼 일 마다했는데, 마을마다 거리마다 천변(川邊) 따라 펼쳐진 꽃 대궐 덕분에 하늘 한껏 올려다보며 봄을 만끽했습니다. 필 때도 갑자기, 질 때도 후두둑 하더니 행여 아쉬울세라 영산홍, 철쭉, 민들레, 오랑캐꽃, 할미꽃까지 땅꽃이 뒤를 이었습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시샘이나 하듯 노랑, 보라, 진분홍, 연분홍 색색 향연을 펼치지 뭡니까. 독자분들이 이 글을 읽을 5월엔 아마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담쟁이덩굴, 등나무 잎겨드랑이에서 주렁주렁 앙증맞은 꽃을 피우겠지요.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을 연결해 가득 충전해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 아닐까요. 이름 모를 혹은 이름 없던 꽃에 일일이 이름 붙여 불러주면 내게 다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에 낳아 이름 지어 명자야, 경희야, 향순아, 옥임아, 종섭아 부르고 또 부르던 부모.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부모.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어버이날, 스물넷 어린 새댁이던 필자는 같이 살던 시부모님 몰래 친정에 다니러 갔습니다. ‘힘들다, 시어른과 같이 지내기 참 무섭다, 엄마 아버지 너무 보고 싶다’ 입 밖으로 하소연이 시작되려던 찰나 한 말씀 하셨습니다. “얼른 집에 가거라. 어른들 걱정하실라.”
아버지는 딸내미 옷차림새만으로도 허락 없이 왔다는 게 보이는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참 서운하고 서러웠는데 철이 조금 든 지금 생각해보니 시어른들 눈 밖에 날까 봐 애틋한 마음 숨기고 서둘러 시댁으로 보내셨다는 걸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내 편’ 응원이 필요할 때면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좋아하는 배추전 잔뜩 부쳐주시면 손으로 주욱 찢어 양념장 콕 찍어 맛나게 먹습니다. 사랑 한가득 충전해 배부르면 그제야 웃음 찾아 돌아오곤 합니다.
아름다운 신부, 두봉 주교
올해 93세를 맞은 두봉(杜峰, 본명 르네 뒤퐁) 주교는 1969년부터 1990년 정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지냈습니다.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그의 한국식 이름 두봉(杜峰)을 풀면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라는군요. 극빈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였던 한국에 파견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어려운 나라로 가는 것만큼 기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는 그는 마음 그릇 크기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꼬박 두 달 반 배를 타고 도착한 한국에서 스물여섯부터 구순이 넘은 지금까지 헌신하고 봉사한 두봉 주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당시 한국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 시절 한국 사람은 좋았다며, 그렇게 참담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참 떳떳하고 친절하고 인간다운 인간이랄까 한국 사람이 풍기는 인상이 좋았다고 회고합니다. 불우한 청소년과 농민을 돌보고 교육하고 인권을 신장하는 일에 한평생 헌신해온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기쁘고 떳떳한 삶의 원동력
한국으로 선교 온 32년간 신부가 된 아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온 아버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자식을 한국에 바치는 입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며 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두봉 주교 품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습니다.
“일어나서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나의 작은 르네야. 나는 어둡고 흔들리는 외로움 속에 서서 편지를 쓰고 있단다. 여긴 비가 너무 많고, 한국에는 비가 너무 적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늘에서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니.”
어머니도 떠난 텅 빈 집, 병상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들에게 삐뚤빼뚤 써 내려간 편지를 생전 아버지 대하듯 귀하게 여기는 두봉 주교. 특히 1986년 5월 9일 아흔이 되신 아버지가 부친 마지막 편지를 자주 꺼내봅니다. 보름에 한 번 프랑스로 답장을 보내던, 이제는 구십 훌쩍 넘긴 아들이 1986년 구십 아버지한테 시간여행하듯 답장을 합니다.
“아빠, 고마워요. 내가 아빠 엄마로부터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이 편지 30년 동안 계속 보내주신 것 고마워요. 난 아빠 엄마 너무 좋아. 하늘나라에서 기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 나도 언젠가 따라갈 거예요. 따라갈 때까지는 돌봐주시고, 그 다음에도 함께 기뻐할 거예요. 고마워요, 고마워.”
누군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두봉 주교는 생전이나 돌아가신 뒤나 아버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 힘이 70년 가까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나누고 헌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누군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느끼나요. 곁에 가족이 있어도 고립과 단절로 외로워하는 게 요즘 우리 모습입니다. 각자 방문 쾅 닫고 마음도 굳게 닫아걸고 말입니다. 열려고 있는 문인지, 닫으려고 있는 문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두드립니다. 문도 두드리고 맘도 두드려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통 트이고 휴, 살 만해지니까요.
진정 난 몰랐었네
다리가 불편한 아들에게 곁을 주지도,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은 엄마. 학교에서 직장에서 불구라고 차별받으며 서러움만 켜켜이 쌓여가던 아들. 남편마저 일찍 여읜 엄마는 아들이 약해질까 하는 노파심에 되레 강하게 키우려 했지만, 평생 아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아파합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에 등장하는 엄마와 아들 이야기입니다. 그런 엄마가 덜컥 치매에 걸리면서 가족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고통은 증폭됩니다. 치매로 기억을 잃은 엄마가 어느 날 요양원에서 사라집니다. 불편한 다리로 주변을 찾던 아들은 저만치 요양원 마당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치우는 엄마를 발견합니다. 자식 고생시키는 엄마에게 버럭 화가 났다가 불현듯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릅니다.
내 앞의 눈을 쓸어준 사람
가난했던 그때 달동네 꼭대기에 살던 모자는 한겨울 내리는 눈 때문에 엄청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등교할 때마다 누군가 깨끗하게 쓸어놓은 덕에 눈길을 넘어지지 않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랫집 아저씨가 눈 쓰는 모습을 본 아들은 ‘아, 저분이 그동안 눈을 쓸어주셨구나’ 합니다.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은 엄마가 습관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빗자루로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내가 비탈길에서 넘어질까 봐 엄마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눈을 쓸었던 거구나.’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엄마는 또 눈을 쓸러 나갔던 것입니다. 그제야 얼어붙은 아들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엄마를 향한 원망과 서러움과 미움이 한순간에 눈물로 녹아내립니다.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 돋도록
자녀의 경제적 독립과 출세, 아니 취업과 결혼이 힘겨운 최근엔 사람 노릇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비는 게 부모 심정입니다. 내 자식 걱정에만 우리가 안달할 때, 사회 한편에서는 부모 학대와 유기로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시설 보호를 마치고 해마다 2000~3000명씩 ‘자립준비청년’(예전에 ‘보호종료아동’으로 불렸던)이란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보육원 졸업할 때 지급되는 정착금(1000만 원)과 자립수당(5년간 월 40만 원)이 조금씩 올라서 경제적으로 힘이 된다지만,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 불안과 무력감이 삶을 포기하도록 몰고 가는 경우도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슷하게 힘든 상황에서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한 청년의 경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고 합니다. 소통하고 의논하고 연락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고 없고가 생사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사례가 참 많다네요. 보육원 원장님이나, 시설 프로그램에서 만난 멘토나, 그 누구든 고민을 들어주고 모르는 것 물어보면 가르쳐줄 수 있는 어른 한 명만 있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나를 지켜줘야 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도록 저부터 움직여야겠습니다.
내가 당신 받침이 될게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귀 기울이고, 가슴으로 안아줄 때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갓난아기 업을 때 포대기 두르고 아기 엉덩이를 손으로 받쳐주면 한결 가볍습니다. 책이며 서류며 물건이며 온갖 것 가득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멜 때도 한 손으로 아래를 살짝만 받쳐줘도 아프던 어깨가 훨씬 가볍습니다. 공책에 교과서에 연필로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면 뒷장에 우툴두툴 글자가 튀어나오고 물듭니다. 그럴 때 플라스틱 책받침 하나 끼우면 뒤탈이 없어 속상하지 않습니다. 살짝만 받쳐주어도 우리 짐은 가벼워지고 삶의 무게는 덜어지고 아팠던 어깨는 견딜 만해집니다. 서로 받쳐주며 손 잡고 맘 잡고 살아볼까요?
전북 장수군의 깊고 외진 산골에 찻집 하나 있다. 산은 첩첩, 적막은 겹겹. 강원도 오지를 닮은 곳이다. 주인장 유성국(58, 긴물찻집 사장)은 부산에서 살았던 20년 전, 그러니까 30대 후반 나이에 이 산골로 귀농했다. 소소한 농사와 더불어 한세상 물처럼 그저 그렇게 흐르고 싶어서였다. 어쩌다 보니 지금으로부터 5년여 전엔 찻집을 차리게 됐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농사나 돈보다 마음에 여유를 집어넣을 수 있는 방법의 강구에 있다. 그가 가진 이상은 평범치 않다. 가급적 게으르게 사는 데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게 아닌가. 게으르게 살지 않고 어떻게 삶을 견딜 수 있겠어? 아마도 이게 유성국의 푯대다.
미리 말해둘 게 있다. 유성국의 부인 박혜정(50) 역시 동류라는 것. 이들은 불교 관련 사회봉사단체에서 만나 부부 연을 맺었다. 혼인 이후 오랫동안 절밥을 먹고 살기도 했다. 둘 사이엔 자식이 없어 홀가분하다. 따라서 부부간의 유대와 공감의 폭이 한결 넓다. 어떻게 하면 게으르게 살 수 있을까, 더 게으르게 살기 위해 어떤 창의력을 발동해야 할까,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게 주로 그 문제였다. 산골짝으로의 귀농은 하나의 대안으로 고안됐다. 귀농지 물색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지.
“귀농할 곳의 조건 몇 가지를 전제하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자연이 살아 있는 곳, 식수원이 풍부한 곳, 축사나 농원이 전혀 없는 곳, 땅값이 오를 가능성이 제로인 곳 등을 염두에 두고서. 차후 너덧 가구가 어울려 생태농업을 할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다 좋은 전제 조건인데, 땅값 안 오를 곳을 찾은 이유는 뭘까?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고 싶었던 건 번다함을 피해 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만약 귀농지에 개발 바람이 불어 관광지가 된다거나 하면 낭패일 수밖에. 별안간 땅값이 오르고 동네가 시끄러워지면 우리는 팔고 나가야 한다. 굳이 그런 소동에 휘말릴 일은 아니다. 고즈넉한 곳에서 풍파 없이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던 거다.”
여긴 상당히 깊고 은밀하고 푸근한 산골이다. 전제 조건들을 충족한 곳인가?
“용케 잘 찾아낸 터다. 산 많은 장수군 안에서도 외진 곳이다. 과거엔 천주교도들이 피난해 살았던 마을이다. 우리가 들어왔을 땐 사람 하나 살지 않았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몇 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용히 지낼 만한 환경이었지. 문제는 가진 게 없다는 거였다. 거의 빈손으로 들어왔으니까.”
몸을 눕힐 변변한 집이 없었고, 새로 지을 여건도 아니었다?
“원래 있었던 폐가를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 형체만 남다시피 한 본채와 행랑채, 그리고 창고 하나가 있었는데 우리가 대충 수리해 입주했다.”
생계 문제 구상은 어떻게 했나?
“애초 특별한 구상 없이 귀농했다. 빗나가기 십상인 이론적 구상보다 뭐든 현실에 부닥쳐 처리해나가는 게 내 스타일이다. 물론 큰 그림은 있었지. 농사로 자급자족하자는 거. 그게 쉬울까, 어려울까, 아내나 나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둘 다 30대 시절이었으니까 뭘 하든 굶주릴 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감 같은 게 있었던 셈이지.”
자급자족이 되던가?
“그게 생각처럼 쉽진 않더라.(웃음) 농사 경험 없지, 농기계 없지, 외딴 곳이라 주변에 물어볼 농가도 없지, 멧돼지들이 털어가지, 4년여간 시행착오가 많았다. 오미자 농사도 지어봤고, 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시장에 냈지만 돈 만들기가 어려웠다.”
야생차로 활로 찾아
유성국의 거처는 해발 540m 고지에 있다. 보이는 것의 절반은 산이요,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다. 그러니 순수한 자연의 도가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방에서 숲의 에테르가 다가와 가슴의 잡티를 몽글몽글 녹인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창으로 달빛이 밀려들 것이다. 이렇게 참신한 곳에서 일락(逸樂)을 누린다면 그게 낙원이겠다. 그러나 문제는 밥이다. 인간이 풀만 뜯어먹고도 끄떡없는 초식동물이 아닌 건 얼마나 불운한가. 농사를 통한 자급자족으로 소박한 생활을 지속하고자 했던 유성국의 실험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뭔가 방책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차 만들어 팔기였다.
“우리가 절 생활을 꽤 했다. 날마다 녹차를 마시는 절에서 제다 방법을 배워둔 게 있었다. 그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차로 상황을 개선하기로 했지. 산에 올라가 갖가지 잎을 채취해 야생차를 만들어 ‘한살림’에 납품했다.”
차로 활로를 찾았다?
“비로소 먹고살 만했다. 전에 비하자면 여유로울 정도로.”
경제 문제 외에도 온갖 난제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게 산중 생활이다. 애환이 많았겠지?
“자급자족을 위해 나름 노력했지만 괴로울 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현실은 물론 미래에 대해서도 별 근심 걱정 없이 지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게으르게 살 수 있을까? 늘 연구한 게 그랬다.(웃음)”
너무 바쁘게 살면 무슨 재미? 그러나 나무늘보도 아니면서 늘 게으르면 그 역시 싱거워질 것 같다. 게을러서 좋은 건 뭐지?
“게으르게 사는 것 자체가 좋은 거지, 뭐 있겠나?
게으르지 않게 살아도 좋은 거 아니고?
“그야 그렇다. 세상은 부지런한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그들은 나처럼 살기 어려울 테지만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겠나? 각자의 방식을 존중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아마도 대부분 아내들은 게으른 남편을 견디기 힘들어할 거다. 방출하고 싶겠지.(웃음) 당신의 부인은 어떤가?
“아내나 나나 게으름을, 한량 기를 타고났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더 게으르다는 점이다. 아내는 일면 부지런한 천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내 역시 게으름을 지향한다. 게으름의 가치를 공유하며 살아온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뭘 해도 제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웃음)”
가령 어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
“우리가 고쳐 지은 집을 두고 남들은 운치 있다고 하지만 사실 부실공사에 불과하다. 게으르게 짓다 보니 그리됐다.”
뭐든 반드시 제대로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너무 쥐어짜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자족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제대로 된 셈이겠지.
“그렇지. 그런데 알고 보면 사실 인생사에서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다. 중도(中道)를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만 품고 살아도 가상하겠지.”
나는 오늘 심상치 않은 종족을 만났다. 부부가 공히 게으름을 옹호하고 구현하는 경우가 어디 흔하던가.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며 귀농한 사람이 드물진 않다. 그러나 다들 새벽부터 깨어나 지지구재재구 노래하는 참새처럼 바지런하다. 근면을 중심에 놓지 않고 귀농 생활을 지속하긴 불가능하다. 그런데 부지런히 농사를 짓다 보면 몸에 관절염이 방문한다. 마음자리엔 긴장과 불안이 서성인다. 손에 쥐면 쥘수록 허기가 커지듯이,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이 많아지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다.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한 생은 어차피 유한한 시간의 강물을 흘러가다 시든다. 인생의 즐거운 열매를 맛보는 데 어느 쪽이 더 유리한 걸까.
수해로 집이 떠내려가다
유성국의 게으름엔 딴 목적이 없다. 게으름 자체가 목적이다. 생긴 천성대로 살아 만족하기. 자신을 방목해 모든 억압의 횡포를 수포로 돌려놓기. 그가 보유한 생태 경관엔 안으로 맺힌 게 없을지도. 그 무엇에 허둥대거나 시달릴 일이 없을지도. 게으른 처신엔 의외로 리스크가 적다. 게으름의 대가에겐 급박한 일도 급박할 게 없다. 그러나 먹고 자는 집이 어느 순간 홀라당 날아간다면? 이땐 도리 없다. 부리나케 재건해야 한다. 유성국이 그랬다. 귀농 5년 차에 들이닥친 수해로 집이 떠내려가 다시 지어야만 했던 것.
“창고만 간신히 남고 다 떠내려갔다. 창고에도 진흙이 1m 두께로 쌓였더라. 흙을 걷어낸 뒤 합판을 깔고 잠을 자며 집을 복구했다.”
귀농 뒤 만난 최대의 고난이었겠다. 괴롭지 않았나?
“오히려 행복했다. 어차피 새로 지어야 할 집이었는데 게으른 우린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이 한 방 딱 쳐주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게 아닌가. 변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는데 수해가 길을 열어줬다. 이렇게 우린 자연에 업혀 간다.”
외진 이 산중에 찻집을 차렸다. 장사가 될 가망성이 있다 보았나?
“작정하고 차린 건 아니다. 원래 우리 집엔 친척이나 친구, 차를 즐기는 사람 등 놀러 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쌀이나 고기를 사왔고, 우리는 차와 자연환경을 그들에게 제공했다. 일종의 물물교환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웠던 한때 이게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많이 찾아와 서비스하기가 힘들어지더라. 그래 무인 찻집을 염두에 두고 창고를 다듬어 다실을 만들었다. 이게 본격적인 찻집의 출발점이었다.”
유성국 내외가 손수 짓거나 다듬은 작은 집과 더 작은 다실은 치레 없이 순박하다. 야트막한 지붕을 보면 산을 향해 꾸벅 절하는 것 같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기가 씻긴다. 자연 속에 자연스레 들어앉아 누추한 게 없다. 이게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나? 찻집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이곳의 자연경관은 그저 평범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찻집과 풍광을 즐기는 손님이 많다. 다녀간 이들이 SNS에 ‘리얼 시골에 있는 카페’라는 식의 리뷰를 쓰면서 시나브로 조금씩 알려지는 것 같다.”
사업을 키울 생각은 없나?
“우린 우리가 사는 터가 지닌 기운에 순응하며 살았다. 찻집 역시 터와 자연이 정해준 방향이라 생각한다. 확장 욕구는 전혀 없다. 게으르게, 고즈넉하게, 한적하게 살아온 페이스를 지속하고 싶다.”
차갑고 팽팽한 게 생활이다. 냅다 뛰어라 채근하는 게 삶이다. 그러나 게으름을 축으로 살아도 이렇게 무탈하다. 느린 생각과 느린 마음과 느린 동작은 어쩌면 생활의 견인차?
유성국이 주는 귀농 Tip
•귀농은 정서적 차원에서 보면 흙으로, 모태로 돌아가는 행위다. 얼마든지 권장할 만한 일이다.
•농사로 돈을 벌려면 가급적 젊을 때 하라. 너무 나이 들어서는 어렵다. 뭐 하나 만만치 않은 게 농업이기 때문이다.
•귀농지 물색을 위해 많은 곳을 답사하자. 현장을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점검할 수 있어서다.
•귀농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농사만 길이 아니다. 도시의 직업에서 쌓은 경륜을 활용,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사업을 창출하자.
•전 재산을 투입하는 귀농은 매우 위험하니, 이 점 유의하자.
•굳이 집을 새로 지을 필요 없다. 헌 집을 고쳐 쓰는 게 더 유익하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어느 새 12월, 당신의 생일과 기일이 함께 있는 달이 돌아왔군요. 가는 해와 오는 해가 조우하는 달 12월. 당신은 그렇게 12월 중에 세상을 오고 갔네요. 당신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때도 12월이었다는 걸. 물론 기억하실 테지요. 만난 지 꼭 1년 되던 해, 그날에 결혼했으니까요. 우린 평범하게 만났지만 애틋한 사랑의 씨줄과 날줄을 엮기 위해 로맨틱한 무언가를 연출하고 만들어내곤 했지요. 처음 만난 날짜에 맞춰 결혼하기로 한 것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러고는 처음 만난 날에 헤어진 것도…. 하지만 그건 로맨틱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리고 쓰리네요.
남편의 폭력, 어이없는 감금 불러
“내 동생한테 감히 손찌검을 해요? 당장 헤어지세요. 폭력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생각 말라고요.”
“처형, 집사람에게 손을 댄 건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지금 처형댁 문 앞에 있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제가 무릎 꿇고 빌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용서를 구한 후 다시 잘살아보겠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이 집에까지 찾아온 것도 몰랐어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방에서 훌쩍이느라 문 앞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몰랐던 거죠. 하긴 문자로 주고받았으니 큰 소리는 고사하고 작은 소리도 들렸을 리가 없지요. 난 지금도 그 점이 의아해요. 언니처럼 성질 급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이 문 앞에 당사자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차분히 문자 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 하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됐지만.
당신한테 한 대 맞고는 속이 상해서 언니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후 사실상 나는 언니네에 감금당한 꼴이 되었지요. 언니가 집으로 돌려보내 주질 않았으니까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가 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철없는 나보다 더 나를 염려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했어요. 왜 안 그랬겠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여의고 중 3, 중 1이던 언니와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둘이 생활하게 되었지요.
친척들의 도움도 언니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였으니, 졸업 후 바로 취업이 되지 않아 전세금을 빼서 보증금을 얼마간 넣고 월세를 살면서 그 돈을 야금야금 생활비로 썼지요. 둘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텨나갔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언니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열의를 잃고 그렇다고 마음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말하자면 방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생활에 대한 부담은 내가 다 져야 할 형편이었지요. 하지만 운 좋게도 그런 와중에 나는 대학에 가게 됐고, 졸업하고 취업하던 무렵 당신을 만났던 거예요.
내가 만남 100일 기념 이벤트다 뭐다 하면서 애들마냥 유치하게 굴었던 것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모님 사랑에 대한 굶주림 탓이었다고 봐요. 그걸 당신한테 받으려 했으니 당신도 피곤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은 날 기쁘게 해주려고, 내 기대에 맞춰주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어요. 인정합니다.
다만 그날 결혼 후 처음으로 부부 싸움이 격렬했던 날, 당신이 나를 때린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날 때릴 수 있는지…. 무엇 때문에 싸웠죠, 우리?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사소한 일이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길로 헤어지게 되었지요.
언니의 시기 동생 부부 갈라놔
“언니, 나 이만 집에 돌아갈래. 그 사람이 걱정돼. 보고 싶기도 하고.”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한 번 때린 사람은 또 때리게 되어 있어. 계속 맞고 살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 사람이 사과했어. 여기 있는 동안 문자도 오고, 전화도 오고.”
“뭐라고? 이리 내놔 봐.”
그래요, 언니는 분명 과잉, 과민반응을 했던 거예요. 처음에는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점차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부부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아무리 동생이고, 다른 집과는 다른 각별한 자매라 해도.
언니는 결국 대학에 가지 못했어요. 학비 부담 때문이라고 본인은 포기의 이유를 댔지만 그건 핑계고 실은 성적이 안 됐던 탓이었죠. 대학생의 꿈도 멀어지고 다시 취업하기에도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졌던 언니는 그때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부모님을 하루아침에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아, 당시엔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얼마나 컸겠어요. 대학에라도 합격했다면 그나마 우울증은 피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부턴 내가 언니의 보호자로 실질적 가장이 되었지요. 언니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조차 곧 그만두더라고요. 치료비 부담보다 정신과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언니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고요? 언니가 내게 주는 영향은 보통 이상이었기 때문이에요. 정상이 아니었죠. 언니는 내게 시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무의식적으로요. 비록 전문대지만 대학도 나왔고, 취업도 바로 되었고, 곧 결혼도 할 나에 비해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여긴 것 같아요. 더구나 당신과 난 간호사로 같은 병원에서 만났고, 함께 장래의 꿈을 키워가는 걸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언니가 나의 불행을 바랐다는 뜻은 아니에요.
남편의 교통사고, 생일이 기일 되다
“처형이 당신 걱정을 하는 건 당연히 이해하지만 당신이 미성년자도 아니고 너무 간섭이 심한 거 아니야? 도가 지나치잖아. 사과를 하려면 당신을 만날 기회를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했고 당신도 이미 나를 용서한 마당에 처형이 왜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냐고?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당신이 전화로 했던 말 기억나죠? 결국 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한 당신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의 심정으로, 일단 언니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2년 기한의 외국 병원 근무를 택했지요. 그리고 3개월 만에 현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마침 당신 생일에. 그래서 생일이 기일이 되고 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운명의 남자.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군요.
청천벽력이란 그럴 때 쓰는 말이더군요. 나도 그땐 언니하고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지낼 때였지요. 고집을 피울 걸 피워야지, 당신이 그렇게 떠나니 괜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막무가내인 언니가 꼴도 보기 싫더라고요.
물론 우리는 그때 얼마든지 다시 만났어도 되는 거였어요. 언니가 우리를 미행할 것도 아니고, 내 다리를 묶어 한쪽 끈을 붙잡고 있을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 언니의 우울증이 심해져서 혼자 둘 수 없어 당분간 같이 지내게 되었고, 그 점이 당신을 답답하고 화나게 했던 것 같아요. 나까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거죠. 그 무렵 우리 사이가 서먹해진 것도 사실이었고요.
이래저래 심란하던 차에 바람도 쐴 겸 보수도 더 나은 곳에서 한 2년 일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도 어차피 나는 언니 옆에 있어야 해서 였어요. 당신의 손찌검이 빌미가 되어 별거를 원한다는 오해를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아 당신의 결정을 존중했던 거지요. 그것이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뜨자 언니는 뒤늦게 자신 탓이라며 자살을 시도했고, 반복되는 자살 시도로 지금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중이랍니다.
남편 떠난 빈자리 채우는 유복녀
당신 그렇게 가고 나는 어떻게 살았냐고요? 나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당신이 외국으로 떠났을 때 나는 임신한 상태였어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말하려고 했지요. 근데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전에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언니 때문이었어요. 가뜩이나 내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질투와 시기심에 더 상태가 나빠질까봐 조심스러웠어요. 당신한테만 살짝 말하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당신은 몰랐지만 언니는 그때 나와 당신의 통화 내용, 주고받은 문자를 다 체크하고 있었어요.
언니는 그때 당신이 나와 아주 헤어져서 떠났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임신 사실을 바로 말할 수 있었겠어요. 물론 방법을 찾고 있었지요. 언니 몰래 알릴 수 있는 길을.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도저도 소용이 없었던 거지요.
이름은 혜원이에요. 당신과 나를 반반 닮았어요. 당신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똑똑하고 예쁜 딸이에요. 혜원이는 이담에 커서 아빠,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대요. 아, 그리고 나는 공부를 더해 정식 간호사가 되었어요.
이제 또 한 해가 저무네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당신과 결혼하고, 또 당신을 떠나보낸 12월이 이렇게 막을 내리려나 봅니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