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는 끝이 아니다. 스포츠가 남긴 땀과 기록은 이제 시니어 체육의 길을 밝힌다. ‘탁구 여제’로 불렸던 이에리사 휴먼스포츠 대표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장 한복판에 서 있다. 달라진 건 단 하나, 유니폼 대신 책임과 비전으로 무장했다는 점이다. 그는 오늘도 탁구채를 들고 시니어들의 손을 붙잡는다. “움직이는 몸에는 꿈이 있고, 그 꿈은 삶을 바꾼다”는 말을 실천 중이다.
낡은 탁구대가 만든 세계 챔피언
1970년대 한국 여자 탁구의 간판스타, 구기종목 사상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인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 대표팀 감독으로 양영자·현정화 선수의 금메달을 이끈 인물. 이름 앞에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에리사 휴먼스포츠 대표다.
탁구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이에리사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 마당 한켠에 탁구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아버지가 충남 대전 대덕군수(현 대전시 대덕구)였던 터라 대전 관사에 살았어요. 관사 마당에 낡은 탁구대가 있었죠. 언니와 오빠가 학교 내 방과후 활동으로 탁구 치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시작했어요. 계획된 일이 전혀 아니었죠.”
어려서부터 지는 게 싫었던 이 대표는 용돈으로 문방구에서 라켓을 사 벽을 상대로 혼자 연습했다고 이야기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목포에서 열린 전국 종별탁구대회에 참가해 1위, 이듬해 전주에서 개최된 동일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대표는 “서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엄청 많았다. 처음엔 서울로 가는 것이 고향을 버리는 느낌이어서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면서도 결국 서울로 진학했다고 고백했다.
“아버지께서 ‘선수를 계속할 생각이 있냐, 있다면 서울로 가야 경쟁력 있다. 여기서 아무리 잘 해봤자 우물 안 개구리밖에 안 된다’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이 말 덕분에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 문영여중으로 전학 했고, 그때가 선수 생활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어요. 전학 후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전승, 중학교 3학년 때는 국가대표 언니들을 모두 이기면서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중학교 3년간 거의 모든 대회를 석권했어요. 그때 탁구가 제 운명이라는 걸 알았죠.(웃음)”


이후 1973년 사라예보(보스니아 수도)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으로 세계 무대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고,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국내 대회에서 진 적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최정상에 우뚝 섰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여자 탁구 대표팀 감독으로 양영자·현정화의 금메달을 이끌면서 그야말로 한국 여자 탁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 대표는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50주년을 기념해, 2023년 중·고탁구연맹에 선수들을 위해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탁구의 전성기는 대략 15~19세에 찾아온다는 점에서 중·고등학생 때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가 나올 수 있어요. 결과를 내려면 지원이 있어야죠. 탁구가 다시 우뚝 서는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체육은 내 삶의 중심
선수로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이후에도 이 대표는 끊임없이 변화에 도전했고,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지도자, 용인대학교 교수, 선수촌장, 제19대 국회의원까지. 언제나 체육이 삶의 중심에 있었다. 스스로를 ‘뼛속까지 체육인’이라고 하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교수 시절엔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수업을 만들었고, 선수촌장 시절엔 예산과 시설 관리, 음식과 환경 개선까지 직접 챙겼으며, 국회의원일 때도 정치보다 체육에 집중했다. 전국 학교에 여학생 탈의실을 설치하고, 체육 수업 후 샤워·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등의 정책을 현실화했다. 쉼 없이 달리면서 부침이 왜 없었으랴. 하지만 그는 일을 하면서 즐거웠다고 한다.
“재미있었어요.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재미있게 일할까?’ 생각해보면, 결과물을 만들고 목표를 달성하는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나한테는 재미였던 것 같아요. 선수 때는 최정상에 서는 목표, 지도자나 행정가 시절엔 선수들의 서포터스가 되어 이들이 결과를 내도록 돕는 목표….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실현해냄으로써 제가 더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정치인일 때도 체육계 대표 일만 했더니 ‘정치인이 맞냐’며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도 많더라고요.”
그는 새로운 역할을 맡을 때마다 철저히 준비했고, 그렇게 현장과 정책, 실기와 행정 등 모두 아우를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현재 국가 스포츠정책위원회 공동위원장까지 맡게 된 것이다. ‘운동으로 다진 근성, 끈기’가 밑바탕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수에서 지도자, 지도자에서 교수, 행정가, 대표로 어떤 자리를 맡을 때마다 ‘현장을 위한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했어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을 땐 되는 것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잖아요. 그걸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선수 시절 다진 근성 덕분이에요.”
시니어 체육은 인생 후반전의 열쇠
이제 그가 집중하는 분야는 시니어 체육이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자마자 비영리법인 ‘이에리사 휴먼스포츠’를 설립했다. 휴먼스포츠는 지인·제자들이 후원해주는 소중한 후원금으로 유소년 운동선수, 장애인 등 많은 어린이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일은 물론, 시니어 탁구 대회 개최, 시니어 탁구협회를 조직하며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일을 하고 있다.
“60~70대에도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해요. 요즘 시니어들은 과거와 달리 체력도 좋고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분한데, 그 장이 너무 없어요. 하물며 요즘은 시니어 전성시대잖아요. 건강하고 의지 넘치는 시니어들을 위해 그 길을 열고 싶어서 시니어 탁구 대회를 시작했죠.”
그가 주최하는 ‘에리사랑시니어탁구대회’는 선수 출신은 참가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순수 동호인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높은 등수로 입상한 선수들의 상품은 오히려 줄이고, 참가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푸짐한 기념품을 나눠주는 것도 ‘에리사랑시니어탁구대회’의 특징이다. 이는 대회 현장을 하나의 큰 커뮤니티처럼 교류와 소통의 장으로 만들고, 경쟁보다 만남, 잘하는 사람보다 탁구를 시작하는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이 대표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탁구는 반드시 파트너, 상대가 있어야 해요. 건강과 정서적 교감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스포츠죠. 나이 들수록 관계가 끊기기 쉬운데 탁구는 그럴 일이 없어요. 탁구는 돈도 적게 들고, 날씨와 무관하게 할 수 있고, 큰 부상 위험이 없으니 시니어들이 즐길 생활체육으로 탁구보다 좋은 운동은 없어요.”
그는 시니어 체육회를 별도로 창립해 전국 시니어 종목별 조직을 구성하고, 활성화를 위해 ‘시니어 올림픽’도 생각하고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진력이다.
“캐나다는 시니어 탁구협회를 주축으로 시니어 탁구 대회가 열리고, 미국에선 여러 시니어 종목을 모아 시니어 올림픽이 열리고 있어요. 우리도 할 수 있죠. 연령 기반 체육 시스템이 마련돼, 국가적 지원을 통해 탁구는 물론 다른 좋은 스포츠를 시니어들이 모여 함께 즐기는 장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시작하면 달라지는 인생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진짜 일단 시작하면 ‘고’예요. 안 해봤는데 어려울지, 쉬울지 어떻게 알아요?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에리사 대표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들며 나이와 은퇴는 핑계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테이프를 끊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아요. 꼭 탁구가 아니더라도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일단 등록하세요. 돈을 내면 수업에 빠지지 않게 돼요. 빠지지 않으니 습관이 되고, 결국 규칙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규칙적인 생활이 건강을 만들고, 활동이 삶의 생기를 불러옵니다. 나를 위한 시간이 생기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그가 말하는 진짜 핵심은 ‘규칙적인 삶’이다. 건강, 생기, 삶의 윤택함도 결국 일정한 루틴에서 나오고, 그것의 출발점이 운동이라는 이야기다.
이에리사 대표의 여정은 한 명의 선수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다는 것.
“저는 지금이 인생의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체육이라는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달려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달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정말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