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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항공, 농촌 일손 돕기 및 의료 지원 나서
- 대한항공이 6월 9일 1사 1촌 자매결연을 맺은 강원도 홍천군 명동리 농촌 마을을 방문해 일손 돕기와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했다고 12일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대한항공 직원 및 가족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해 대한항공 항공의료센터 의료봉사단 의사·간호사 등 30여 명이 참여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논밭 잡초제거 및 옥수수 가지치기 등을 도왔으며, 의료봉사단은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맥박, 혈압 등을 측정하고 전문 의사의 문진과 건강 상담을 통한 약 처방 등 의료 봉사를 펼쳤다. 마을 환경 정리와 함께 간단한 의약품, 마을 경로당 냉온 정수기 등 후원 물품도 전달했다. 대한항공은 지난 2004년 농촌과 상생의 의미를 다지기 위해 농번기 때 일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명동리와 자매 결연을 맺은 후 매년 2회씩 꾸준히 찾아 농촌 일손 돕기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올해 방문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단된 2019년 이후 4년 만이다. 지난 2021년에는 명동리에서 생산된 고추장, 된장 등의 농산품을 구매해 강서구 취약 계층에 기증한 바 있다. 대한항공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다양한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기업’으로 거듭나 지역사회와의 상생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023-06-1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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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크 벗고 수타사 산소길 따라 숲캉스
- O₂, 산소, 원자 번호 8, 화학 산소족에 속하는 비금속 원소, 공기의 주성분이면서 맛과 빛깔과 냄새가 없는 물질. 호흡과 동식물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체라는 사전적 의미의 산소. 강원도 홍천에 산소길이 있다. O₂길. 마스크 때문에 마음껏 숨 쉴 수 없어 미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수타사 산소길이 떠올랐다.‘그래 이번에는 산소길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홍천의 수타사 산소길은 1~4코스로 총 4개 코스가 있다. 수타사 산소길을 걷는다고 하면 대부분 1코스를 말하는데, 수타사 주차장에 주차하면서부터 걷기가 시작된다. 인근에 오토캠핑장까지 있어 주말 여행지로도 손색없다. 공작산 생태숲 산소길 코스는 3.8km로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수타사-공작산 생태숲-귀소(출렁다리)-용담-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이다. 걷기에 따라 1~2시간 정도 걸리지만, 수타사 경내를 천천히 돌아보고 숲길을 걷다가 쉬다가 느긋하게 숲멍도 한다면 3시간도 금방이다. 참 여유롭게 돌아보는 산소길 트레킹이다. 눈을 들어보니 해발 887m의 공작산이 날개를 펼친 듯 에워쌌다. 깊은 골짜기 위로 봉우리들이 겹겹이 솟은 모습이 공작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공작산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하나다. 그 산 아래 수타사 가는 길이 반기듯 쭉 뻗어 있다. 산소길 초입에 천년 고찰 수타사의 품격을 거친다는 것, 시작부터 차분히 숨 고르기를 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우적산 일월사(日月寺)였다가 공작산으로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로, 다시 새 한자인 수타사(壽陀寺)로 바뀌었다. 수타사 옆의 용담에 매년 승려들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잦아 목숨 ‘수’(壽)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스러움이 물씬 전해지는 절의 분위기가 꾸밈없이 단아하다. 옛 모습을 품고 있는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에서도 위엄을 보여준다. 한나절 푹 퍼질러 앉아 목탁 소리 들으며 쉬면 좋을 깊은 산속 절이다. 수타사를 나오면 바로 공작산 생태숲이다. 생태숲 자리는 예전 수타사에서 경작하던 논이었는데, 이제는 동식물의 서식 환경을 보호하고 다양한 생태체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태연못 탐방로로 온통 연잎으로 뒤덮인 연밭이다. 그 사이로 놓인 부드러운 곡선의 데크 위를 걷는 이들의 풍경이 그림 같다. 산소길은 대부분 흙길이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깊은 숲속이다. 오래된 홍우당 부도가 숲길 옆으로 자연스럽게 나란하다. 부도는 부처나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탑이다. 그 길을 지나면 정말 빽빽한 숲속이다. 폭도 좁아서 나란히 걷기보다는 홀로 걷기 좋으니 숲을 자연스럽게 즐기면 된다. 막상 숲에 들어서면 마치 밀림에 온 듯 오래된 숲속 풍경에 놀란다. 얼기설기 나무줄기가 양쪽으로 서로 얽혀 고개를 숙여 지나가야 하고, 빼곡한 나무 사이로 하늘이 빼꼼히 보이는 것 또한 깊은 산중에 파묻혔음이 느껴진다. 걷기 좋은 완만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새와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자연 속에 내가 있다. 짙은 풀 냄새가 나를 둘러싸고, 비로소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초록이 가장 초록다운 숲이다. 싱그러움이 가슴속 가득 찬다. 역시 산소길이다. 수타사의 산소길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홍천 읍내로 장 보러 가던 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가 쉬어 가라고 쉼터가 있지만 힘들 것 없으니 그냥 계속 천천히 걷게 된다. 신봉마을을 반환점 삼아 돌며 시골 마을의 평온함도 얻는다. 수타사 계곡이 흐르는 출렁다리 소 구간에서 물소리 들으며 멍하니 쉬면 된다. ‘’은 소나 말 등의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여물통인 구유를 뜻하는 강원도 방언이다. 계곡이 마치 구유처럼 생겼다 해서 소라 불린다. 나무가 바람에 사사삭 흔들리는 나즈막한 소리,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숲 내음, 흙 내음, 초록의 색감만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한참을 걸었어도 가뿐하다. 후텁지근하고 끈적이던 더위도 잊었다. 숲이 깊어 햇빛도 저만치에 있다. 산소길에선 다만 마음껏 숨 쉬고 청량한 산속의 운치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초록을 실컷 눈에 담았다. 천천히 한숨 돌리며 용담에 다다르니 계곡 쪽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줄을 이어놓았다. 바위와 물의 깊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예부터 용이 승천했다는 용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메워져 평범한 소(沼)의 모습이다. 운동화를 툭툭 털며 산소길을 내려가다 옆길로 고개를 돌려보니 산림치유쉼터의 숲속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그야말로 신선놀음 중이시다.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 숲속에 쉼터와 명상 공간이 마련되어 시원하고 건강하게 여름을 나는 모습이다. 어딜 보아도 산소 뿜뿜. 보는 사람 마음도 시원하다. 홍천의 자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홍천을 다녀보면 무궁화 꽃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마을길에서도 볼 수 있지만 무궁화공원, 무궁화테마파크, 무궁화수목원, 체험관 등 온통 무궁화 꽃 도시다. 이는 홍천군이 우리나라 무궁화 메카로 선정되어 무궁화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자 조성됐기 때문이다. 무궁화 명소인 홍천의 무궁화수목원을 찾았을 때는 꽃이 한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궁화수목원은 국내 최초로 무궁화를 테마로 조성한 공립수목원으로,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각 테마별로 남궁억 광장, 무궁화 조형물, 품종원, 미로원과 16개의 주재원을 비롯한 숲속 산책로, 숲속 도서관 등 즐길거리가 마련돼 있다. 특히 무궁화가 한창 피어나는 8월에는 ‘나라꽃 무궁화 홍천 축제’가 열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수목원 입구에 길게 이어지는 280m 산책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무궁화(Rose of Sharon)의 집이 연출하는 풍경이 시선을 끈다. Rose of Sharon. 서양 사람들은 무궁화를 이렇게 부른다. 샤론의 장미는 성스럽고 선택받은 곳에서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나라꽃이 우리 민족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희망의 빛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설명이다. 무궁화의 집을 둘러싼 푸른 들판엔 코스모스가 자라고 있었다. 무궁화와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난 들판의 풍경은 홍천의 핫플레이스 예약이다. 현재 야간 경관 조명으로 은하수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연출되어, 데이트 커플들이 찾아오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르는 곳이다. 홍총떡과 올챙이국수 홍천의 맛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저렴하면서 맛도 좋은 서민 음식 홍천메밀총떡(홍총떡)은 시장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홍천의 메밀로 만든 반죽을 얇게 부쳐서 준비한 소를 넣고 드르르 만 홍총떡은 홍천의 대표 향토음식이다. 구수하고 개운한 김치나 무채 양념의 순한맛과 매운맛, 강원도 제철 나물이나 시래기를 넣은 나물맛으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홍천중앙시장에 가면 총대를 닮아 총떡이라는 홍총떡과 메밀전, 올챙이국수 등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또 한 군데, 전직 청와대 셰프가 운영한다는 음식점에서 명태회막국수와 낙지만두도 먹어볼 만하다. 홍천 여행 수타사 산소길 :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덕치리 5-3 교통 : 수도권 기준 자동차로 약 두 시간. 대중교통-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홍천종합버스터미널까지 약 한 시간 반 소요 홍총떡 : 홍천중앙시장 및 홍천 각 관광단지에서 판매. 홍천 오일장 1, 6일. 장날 아니어도 홍총떡은 영업 중
- 2022-09-3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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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은 청춘’ 예비 귀산촌인, 선배를 만나다
- 임업후계자 교육은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증에서 출발해 미래산림연구소의 ‘귀산촌·임업후계자 과정’ 수업에 동행했다. 미래산림연구소는 산림청 지정 전문 교육기관이다. ‘귀산촌·임업후계자 과정’은 5일간 40시간 수업이 진행된다. 3일간은 귀산촌에 대해 비대면 강의를 진행하고, 2일간은 현장 교육을 한다. 귀산촌 현장을 찾아 선배로부터 임산물 재배와 귀산촌 경험을 공유받는다. 조경진 미래산림연구소 대표는 국립산림과학원, 국립산림품종관리센터 등에서 일한 전문가다. 그가 이끄는 이번 6기 수업은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됐다. 13일에는 강원도 평창과 홍천에서, 14일에는 충청북도 충주에서 현장 교육을 했다. 본지는 충주 현장 교육에 함께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16명 수강생의 열정은 시들지 않았다. 조경진 대표는 “보통 50대 중반이 수업을 많이 듣는다”고 전했다. 이날 교육에는 부녀가 다정한 모습으로 동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전원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수업을 듣게 됐단다. 조 대표는 “꼭 귀산촌이 아니더라도 귀농·귀촌을 꿈꾸는 이들이 다양한 이유로 수업을 듣는다”라면서 “은퇴 후 귀산촌을 생각한다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라고 조언했다. 이날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충주 수안보면에 위치한 순수자연주의 농장 ‘슬로우파머’다. 정성훈 대표는 건설회사에 다니다 퇴사하고 귀산촌했다. 정 대표는 슬로우파머를 친환경 임산물 체험과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농촌 체험지로 발전시켰다. 지난해에는 치유농업 프로그램으로 ‘제17회 생활원예 중앙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정성훈 대표는 처음 귀산촌을 했을 때부터 자리를 잡기까지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특히 이웃 주민들과 소통하고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또한 정 대표는 직접 농장을 돌면서 곰취, 산마늘, 능개승마 등의 임산물 재배 방법에 대해 소개했다. 이어진 점심 식사에는 수육과 슬로우파머에서 재배한 나물들이 나와 건강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충주시 소태면의 ‘보늬숲밤농장’이다. 이곳의 김의충 대표는 열아홉 살부터 밤농사를 짓기 시작해 42년 차에 접어들었다. 현재 김 대표는 아들과 함께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닭도 함께 키우는데, 밤을 먹고 자란 닭과 달걀은 건강하고 맛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3만 5000평의 농장에는 김의충 대표가 사랑으로 키운 밤나무가 가득하다. 김 대표는 친환경 농법으로 밤을 재배한다면서 농사꾼의 마음가짐과 열정에 대해 강조했다. “농사짓는 사람은 나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밤나무에 대한 지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 2022-08-1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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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일에 농촌 나들이 어때요?” 농촌관광상품, 최대 50% 할인
-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 관광 활성화를 위해 농촌관광상품 할인, 농촌 방문 인증 이벤트, 주제별 우수 농촌여행지 추천 등 ‘2022 여행가는 달’ 캠페인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2022 여행 가는 달’은 국내여행을 통해 일상을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은 “여행으로 재생(再生) 하기”를 주제로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여행가는 달’과 연계해 주제별 우수 농촌관광지를 추천하고 다양한 농촌관광 홍보 행사를 진행한다. 더불어 6월 2일부터 농촌체험휴양마을과 지역의 관광지를 연계한 체류형 농촌관광상품을 30~50% 할인된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경기도 연천군, 강원도 홍천군, 경상북도 상주시 등 7개 시군에서는 낙농체험, 글램핑, 시골밥상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농촌여행지 방문 인증 행사(농촌, 어디까지 가봤니? 6월 2일~7월 31일), 농촌관광 누리집 웰촌 캐릭터 작명 대회(웰촌 캐릭터, 이름을 지어주세요 6월 7~17일), 여름농촌여행 밸런스게임(밸런스게임, 당신의 선택은? 6월 20일~7월 1일) 등이 열릴 예정이다. 추첨을 통해 농촌체험꾸러미, 편의점 상품권 등 다양한 경품도 제공된다. ‘여행가는 달’ 농촌관광상품 할인 내용과 주제별 농촌여행지, 홍보행사 등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한국농어촌공사 농촌관광 누리집 웰촌과 한국관광공사 누리집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2022-05-3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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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한 아버지는 왜 하루 ‘십 리’씩 달리게 됐을까?
- 언제나 아빠가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달리기를 시작하고부터. 기억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봄, 저는 고향인 강원도 홍천에서 열린 ‘힐링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홍천군국민체육센터를 기점으로 산악 임도를 왕복하는 코스였는데, 그때 출발지에 계셨던 아빠는 제가 임도를 빠져나와 도로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반대편에서 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나자 다시 방향을 바꿔 저와 함께 골인 지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셨습니다. 그 기억이 참 강렬했는지 아빠가 달리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후로 아빠의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머릿속의 아빠는 거의 양복 차림을 하고 계셨고, 그 모습으로 앉아 계시거나 서 계실 뿐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빠는 무려 40여 년을 우체국에서 일하셨거든요. 취미로 이따금 특이한 나무나 돌을 방 한구석에 모으시기도 했지만, 그럴 때조차 아빠는 양복 차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아빠가 양복이 아닌 추리닝을 입고 계신 모습을 자주 보기 시작한 건 아빠가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였습니다.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하루 9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냈던 아빠는 갈 곳을 잃고부터 휴대폰에 만보기 앱을 깔고 집 근처 강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걷고 걸었습니다. 그래봤자 하루 만 보였지만, 이전의 아빠를 아는 저로서 이러한 변화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아빠는 며칠 뒤 담배도 끊으셨습니다. 출퇴근을 하기 위해 단순히 이동하는 것이 운동, 아니 활동의 전부였던 아빠가 하루 만 보씩 걷기 시작한 것은 공허함을 달래고 채우기 위해서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걷느냐’는 물음에 아빠는 ‘하루 만 보씩 걷지 않으면 내 인생이 망할 것 같다’고 농담 섞인 대답을 돌려주셨습니다. 한때 모든 것이었던 세계에서 자신만 쏙 빠져나온 느낌이었을 겁니다.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아빠는 몸을 움직이는 일의 뿌듯함을 아는 사람이 됐습니다. 최소 ‘걷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됐습니다. ‘하루 만 보씩 걷지 않으면 내 인생이 망할 것 같다’고 생각하시던 아빠. 아빠가 만 보씩 걷는 것을 넘어 저처럼 달리길 바라는 마음에 평소 아빠 앞에서 건강, 무병장수, 힐링, 다이어트, 상쾌한 컨디션, 삶의 질 등 달리기가 주는 좋은 점에 대해 거듭해서 떠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그때까지도 절대 달리지 않았습니다. 하루 만 보씩 걷는 것만으로 아빠는 인생의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거리를 더 걸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달릴 필요성은 더더욱 느끼지 못하셨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달리는 것이 걷는 것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중대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 하루아침에 달리는 것 또한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위성을 부여하는 수밖에! 다급했던 저는 아빠에게 어느 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회사에서 가족과 함께 달리고 인증을 해야 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는데, 같이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집에는 아빠밖에 없으니 저와 같이 딱 3km만 달리자고. 일종의 책임감,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안겨드린 셈이죠. ‘하얀 거짓말’이랄까요? 어찌됐든 더 늦기 전에 아빠가 하루빨리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일단 딱 한 번만 달리면 계속해서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저의 제안에 아빠는 한참을 침묵하셨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부정하지 않음’이 곧 ‘긍정’이라는 것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약속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ABC마트에서 미리 구입한 255m의 아식스 러닝화를 아빠에게 건네드렸습니다. ‘딸을 위해서 무조건 뛰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아빠는 저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함께 달렸습니다. 만보기 앱을 켜고 집 앞 강변을. 미리 앞서 달려가 사진을 찍는 저를 의식하셨는지 아빠는 처음부터 무척 빠르게 달렸습니다. 그 모습이 조금은 ‘러너’ 같아서 저도 모르게 ‘아빠 러너 같다!’ 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 소리가 싫지 않으셨는지 아빠는 더 빠르게 무리하며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쌕쌕거리더니 멈춰버리셨습니다. 800m 지점이었습니다. 초보 러너를 3km 연속해 달리게 하려 했다니. 아빠의 표정을 보는 순간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습니다. 800m까지 뛰었으니 800m는 걷고, 다시 800m를 뛰자고. 1.6km, ‘1mile 달리기’로. 마침 다리 아래였습니다. 집에서 목적한 곳까지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 첫 번째 다리인 이 다리까지 달렸으니 두 번째 다리까지는 걷고, 그 다리에서 되돌아 다시 첫 번째 다리까지 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집까지 걸어가자고. 800m의 여유를 얻은 아빠는 그사이 바쁘게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800m에 다다르자 방향을 바꿔 다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속도는 처음보다 훨씬 느려졌고 자세도 엉성해졌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저는 왠지 아빠가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을 벗어나 800m를 달리고, 800m를 걷고, 되돌아 800m를 달리고, 800m를 걸어 휘청휘청 집으로 되돌아오는 이 짧고 고된 여정이 앞으로 아빠에게 좀 더 나은 인생을 사는 듯한 기분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날의 달리기가 어땠는지 궁금했지만 바로 여쭙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아빠에게 ‘뭐하시냐’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1시간 뒤 도착한 답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빠 달리고 왔어!’ 이것이 지난 1월의 일입니다. 그리고 어느 해보다 무덥게만 여겨지는 여름의 한복판을 건너고 있는데도 아빠는 멈추지 않고 매일 새벽 5시가 되면 해와 함께 일어나 여전히 달립니다. 1.6km에서 시작해 2km, 3km, 이제는 하루 4km 넘게 달립니다. 물론 한 번에 모든 거리를 달리지는 않아요. 이를테면 2km 뛰고, 조금 걸으며 숨을 돌리고, 다시 2km 뛰는 식으로 나눠 달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리가 아니니까요. 일단 이불 밖을 나와, 러닝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하루 4km 가까이 늘어난 자신의 달리기에 대해 아빠는 ‘십 리 달리기’라고 명명해 부르십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달리냐’는 물음에 아빠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루 십 리씩 달리지 않으면 내 인생이 망할 것 같다’고. 구체적으로는 달리고 나면 몸도 기분도 개운하고, 그리고 어쩌면 ‘총각 시절 몸무게’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코로나19 시대가 과거의 기억이 되고, 내년 봄에는 꼭 아빠와 ‘힐링 마라톤’ 대회에 출전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제가 이 지면을 통해 아빠의 ‘십 리 달리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일평생 달린 적 없는 누구라도, 마음만 있다면 달릴 수 있다는 증언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일단 나가서 800m, 아니 100m만 뛰어보세요, 그럼 알게 되실 거예요.
- 2021-08-0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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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보라 속에서 빛나는 샛노란 열매, 꼬리겨우살이!
- 희망찬 새해 새날이 밝았건만, 들뜨는 마음과 달리 몸은 온기를 찾아 문에서 멀어집니다. 창밖은 여전히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이든 눈보라가 휘몰아칠 수 있는 겨울의 한복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계절에 ‘꽃 타령’이라니, 제정신이냐고 힐난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런 시기에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야생의 식물이 있습니다. 겨울 눈보라 속에서 야생화 동호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발길을 사로잡는 신비의 나무가 있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찬란하게 빛나는 자연의 선물이 물론 꽃은 아닙니다. 꽃 못지않게, 아니 꽃보다 더 예쁜, ‘꽃의 결실’ 열매입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 “제 삶의 이유였던 것/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가장 아름답게 불타는 단풍으로 물들여 아낌없이 버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의 황금빛 열매가 찬란하게 빛나는 독야청청한 모습을 세상 밖으로 드러냅니다. 바로 꼬리겨우살이의 샛노란 열매입니다. 설악산과 소백산 등 심산유곡에서 드물게 자라는 희귀종 꼬리겨우살이가 강원도 영월의 산 정상부에 풍성하게 달렸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가지 끝에 치렁치렁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이 동물의 꼬리 같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은 꼬리겨우살이. 주렁주렁 늘어진 열매가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익어가는 멋진 광경을 기대하며 산 초입에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비포장 임도에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였습니다. 이왕 나선 길,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걸어서 올라가기로 합니다. 한 시간여쯤 오르니 이번엔 눈이 내립니다. 영하의 날씨에 사위는 적막한데, 바로 그런 겨울의 거친 날씨가 참으로 근사한 ‘설중화’(雪中花)를 선사합니다. 눈발이 거칠게 휘날리고 꼬리겨우살이의 열매가 파스텔 톤의 노란색 수를 놓는, 멋진 수묵담채화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겨울에도 잎이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 있다고 해서 ‘겨울+살이>겨우살이’라 불린다지요? 다른 나무에 기생해 겨우겨우 살아간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국내에는 겨우살이 외에도 붉은겨우살이, 동백겨우살이, 참나무겨우살이, 꼬리겨우살이 등 다섯 형제가 자생합니다. 그런데 다른 종과 달리 꼬리겨우살이는 낙엽 활엽 관목으로, 잎이 있을 때는 자신도 광합성을 하는 반기생식물이지만 잎이 지는 겨울에는 전기생식물로 변합니다. 주로 밤나무나 참나무류의 가지에 기생하고요. 마주 나는 잎은 주걱 모양의 긴 타원형으로 길이 2~3.5cm, 너비 1~1.5cm. 꽃은 6월에 길이 3~4cm의 이삭 모양 꽃차례에 자잘한 녹색으로 드문드문 핍니다. 9월 옅은 노란색으로 맺는 열매는 겨우내 황금색으로 익어갑니다. Where is it?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설악산과 지리산, 제주도 등지에 분포한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최근 야생화 동호인들이 꼬리겨우살이를 보기 위해 찾는 곳은 조금 다르다. 꼬리겨우살이를 무단으로 채취해 약재 등으로 판매하면서, 알려진 자생지가 상당수 파괴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갈수록 희귀해지는 꼬리겨우살이를 아직도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는 홍천과 양양을 잇는 구룡령 옛길, 그리고 태백과 삼척을 오가는 문의재 터널 주변 등 강원도 내륙의 백두대간 줄기가 첫손에 꼽힌다. 그 바로 밑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소백산 일대에서도 한겨울 꼬리겨우살이를 관찰할 수 있다.
- 2020-01-0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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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쓴맛 안엔 보약도 들어 있다
- 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11-1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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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트 안은 인생과 철학을 품은 우주다”, 캠핑 선구자 박상설
- 그는 자유 해방의 흰색 날개를 몸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하늘로 날아올라 들국화 만발한 넓은 들판을 밝은 눈으로 보게 되리라. 매년 가을 러시아의 거장 톨스토이와 차이콥스키,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쯤은 만나봤을지 모를 기러기들을 보러 철원으로 떠난다는 90대 청년. 캠핑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고 우주를 품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진정한 캠핑 선구자 박상설(朴相卨·91) 씨를 만났다. 지하철 1호선 양주역에서 내려 또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리니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캠핑과 함께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직접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박상설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서가에는 캠핑과 관련한 각종 서적들과 심리학 책 등이 보였다. 방 안에는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때 입을 등산복들이 걸려 있었고, 강의할 때 사용하는 프로젝터와 각종 캠핑 도구들이 곳곳에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는 세월을 가늠케 하는 책처럼 90년 넘게 살아온 이 남자의 이력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칼럼니스트, 자연과 삶의 전문기자, 기계기술사 등 명함에는 다양한 직업이 적혀 있었다. 사색하는 아버지와 자연 속으로 여행하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캠핑 장소는 소양강변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박상설 씨는 법무사였던 아버지 덕에 불편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법원을 드나들다 보니 일본인 판검사들과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그들은 통역이 가능한 아버지를 자주 찾았어요. 그들과 관계를 하면서 일본의 캠핑 문화를 접하게 된 거죠.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섯 살 무렵에도 아버지와 함께 캠핑을 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쓰는 큰 타프 있잖아요? 해 가리개요. 그걸 강가에 친 뒤 그 아래 평상을 놓고 모기장을 쳤어요. 아버지는 낚시도 하고 책도 읽으시고요. 텐트 치고 여름을 즐기는 집은 당시 우리 집밖에 없었을 거예요. 캠핑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습관이 생기잖아요.” 인문학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책이 즐비한 도서관이 아닌 대자연 속이었다. 그 뒤 시간이 흐르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출신인 박상설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육군 공병으로 입대했다. “미군에서 지원해준 불도저나 글라이더 같은 중장비를 다루는 유일한 공병 중대였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총 들고 싸울 때 저는 대한민국의 길을 닦았어요. 텐트생활을 하면서 계속 이동해 다녔고, 중대장이 된 뒤에는 미군용 CP텐트를 썼는데 꽤 컸어요. 난로와 침대도 있었고요. 다른 사람들은 천막생활을 모를 때였죠. 군대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텐트생활이 가장 좋았다고 말합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다. 집은 그에게 있어서 어두컴컴한 박쥐 둥지였다. 박쥐가 사는 곳은 아무리 좋아도 답답한 동굴 속이다. “박쥐 둥지를 떠나게 해준 것이 텐트였죠. 그리고 책도 있었어요. 셰익스피어, 하이네, 루소의 책을 읽다 보니 캠핑의 의미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캠핑을 해서 그런지 집에서 사는 게 제일 싫었어요. 특히 기와집이요. 그래서 노마드 보헤미안이 되고 말았죠.(웃음) 풀벌레 소리와 빗소리가 저는 정말 좋습니다.” 인문학과 정서가 스며야 진정한 캠핑이다 캠핑 인구가 100명도 안 됐던 시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듯 조금씩 캠핑 문화를 만들어갔다. 한국에 오토캠프의 씨를 뿌린 사람도 박상설 씨였다. 하지만 캠핑이 이뤄지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의 깨달음에도 집중한다고 했다. “남이 하니까 부러워서 좇아다니는 것은 캠핑이 아니에요. 텐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주를 품은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 안에서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저는 텐트를 친다고 표현하지 않고 품는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의 스캔들이나 세상 떠도는 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우리는 그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의해 사는 거죠.” 박상설 씨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호텔에서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친척집이나 지인의 집에서 자는 일이 생겨도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잔다.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하지만 고사한다. 그는 건물 속에서 자는 사람이 오히려 불쌍해 보인다고 했다. “사막에는 꼭 가봐야 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수많은 별이 쏟아집니다. 알래스카 자작나무 밑에서도 자봐야 해요. 호수가 참 많은데 아침에 일어나서 모닥불 피우고 커피 한잔하고 있으면 사슴이 다가와 5분이고 10분이고 서서 먼 산을 쳐다봅니다. 그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캠핑 문화는 알프스 사람들의 목가적 생활에서 시작됐습니다. 알파인 문화라고 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캠핑은 알파인 문화를 알고 정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따라 하면서 장비 자랑하러 다니는 것 같아요. 목가적인 여유를 즐겨야 하는데… 캠핑장도 너무 갑갑해 보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캠핑장 안 텐트의 간격이 너무 좁아요. 오토캠핑을 제가 소개했지만 이렇게 변형되어 참 안타깝습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한 캠핑 군 생활 10년 동안 한 가정의 가장이 됐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종전 후 밥벌이를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누나와 여동생까지 공부시키고 시집보내야 했다. “그때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군대 월급이 1만5000원밖에 안 될 때였습니다. 제가 벌어먹여야 하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열세 명이나 됐어요. 부업으로 학원 선생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 10만 원 받을 때 저는 50만 원 받는 실력 있는 강사였습니다.” 아무리 벌고 또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동안은 죽을 생각에 호주머니에 늘 나일론 끈을 넣고 다녔다. “그때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고 자연에 대해 알게 됐어요. 죽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끈을 버렸어요.” 1963년 육군 공병 대위로 제대한 후에는 신흥건설종합설계회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부업으로 용산구 보광동 지역 토지를 외상으로 구입해 건설자재 후불 조건으로 15평짜리 집 10채를 지어 큰 수입이 생겼다. “뭘 할까 고민하다 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평당 5원 하는 가평의 임야 30만 평을 매입했는데, 캠핑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동안 주말농장 운영과 함께 인문학 강의도 하면서 지냈어요. 서른일곱 살 때부터 했으니 벌써 54년이 됐네요.” ‘캠프나비’라고 이름 지은 그의 농장은 현재 강원도 홍천에 있다. 2000평이나 되는 농장에는 들국화도 피고 각종 채소와 과일들이 자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워크숍이 열린다. 인문학 세미나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잘 지은 건물은 없다. 비닐하우스가 있을 뿐이다. 아이와 어른이 만나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잘 때는 농장 곳곳에 텐트를 친다. 틀에 짜인 도시형 캠핑은 거부한다. 참된 자유를 알고, 본성 찾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죽기로 했다 그는 지금도 가끔씩 캠핑을 즐긴다. 생각나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 미루지 않는다. 91세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면 사람들은 그의 자식들에게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세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아갑니다. 혼자 산 지 33년 됐어요. 이제는 식구하고도 같이 못살죠. 제 자식들과 손주들도 캠핑을 좋아합니다. 대기업 다니는 손주는 결혼 비용을 아껴 주말농장을 샀어요. 우린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요. 아흔 살, 백 살이 되면 이렇게 살아야지요. 왜 내가 아들네 집, 딸네 집에 가서 살아야 하나요.” 박상설 씨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넘어갔다 왔다. 환갑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그의 건강을 다시 찾아준 것은 의술이 아닌 캠핑이었다.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자 움직이지 않던 몸이 서서히 좋아지면서 펴졌다. 자신감이 되살아났고, 길 위에서 삶의 방향을 잡고 살아왔다. “나이가 아흔하나면 세상 떠나는 날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모레가 될 수도 있어요. 언젠가는 죽죠. 지금 내가 이렇게 떠들지만 오래 살아봐야 백 살이겠죠. 9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는 82세에 집을 나간 뒤 길을 걷다가 빈촌의 기차역장 집에서 폐렴으로 열흘 만에 생을 마감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해줬다. “얼마나 멋진 죽음이야. 물론 톨스토이를 흉내 내려는 건 아니에요. 아들딸들도 내가 걷다가 죽기를 원할 거야. 충분히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여행할 때마다 시신기증등록증과 약간의 돈을 목에 걸고 다닙니다. 죽으면 제 몸은 대학병원 해부학 교실로 들어가요. 그럼 영안실이 필요 없겠죠.” 주변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알리지 말고, 조의금도 받지 말고, 제사상도 차리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딸이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하고 물었단다. “제가 가을에 핀 들국화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길을 걷다가 야생 국화를 보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스쳐가듯 가끔씩 생각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캠핑은 인생에서 우러나와야만 제대로 발현되는 정서 운동입니다. 일평생 하고도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캠핑입니다.”
- 2019-11-0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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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의 해악과 계영배
- 한밤중에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큰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했다. 아들이 술이 취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집에 왔는데 아버님이 야단 좀 쳐달라는 내용이었다. 길거리에서 비틀거리는 아들을 보고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며느리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 밤중에 시아버지인 내게 고자질하려고 전화를 했을까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경찰의 도움으로 퍽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귀가했다니 다행이다 싶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아들을 호출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술이 센 직장 상사가 강권하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다가 취하게 되었는데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직장 상사가 술을 권하기도 했겠지만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승부욕이 있어 술자리에서는 술로 이겨보려 한다. 나도 젊은 시절 누가 더 센지 한번 붙어보자며 독기를 품으며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한때의 오기였다. 술을 너무 마시면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삼킨다는 말이 있다. 아들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의미로 계영배(戒盈杯)의 이야기를 해줬다. 계영배는 강원도 홍천 사람 우명옥이 만들었는데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다. 과음을 막기 위해 술이 일정 이상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절주배(節酒杯)를 그가 만들게 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며 술의 해악을 깨닫도록 했다. 우명옥은 뛰어난 도공 실력으로 궁궐의 자기를 만드는 광주분원에 발탁되어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면서 명성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기술을 시기한 동료들이 술집으로 끌고 다니며 그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도공에게 생명인 손이 떨리는 수전증까지 앓게 된다. 스승도 그를 내치자 자신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면서 술을 끊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계영배를 만들었다. 이 술잔은 조선시대 후기의 거상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의 손에 들어갔다. 임상옥은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인간의 과욕을 경계하면서 조선시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상으로 거듭났다. 이 술잔이 깨졌을 때 우명옥의 목숨도 끊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술을 경계하기 위해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 소설가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라는 작품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아내가 누가 술을 권했냐고 묻자 남편은 “부조리한 사회가 술을 권한다”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은 말 상대가 되지 않는 아내를 뿌리치며 비틀거리며 또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버린다. 사회가 술을 권한다 해도 술 마신 사람의 건강만 나빠진다. 술은 간에도 치명타를 입히지만 관절도 병들게 한다. 술을 이기는 천하장사는 없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장수하는 걸 나는 못 봤다. 술은 적당히 마셔야 삶의 윤활유가 된다. 인간관계에서 적당히 오가는 술잔은 뇌를 기분 좋게 해 대화도 풍성하게 하고 친밀도도 높여준다. 문제는 적당한 기준을 늘 넘어선다는 데 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분위기에 들떠 과음을 하는 것이다. 또 술에 취하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도 하게 된다. 참을성이 약해져 갑자기 욱하면서 사고를 치기도 한다. 술에서 깬 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두가 술의 해악이다. 직장에서 평소 얌전하고 일도 착실히 하던 사람이 술자리에서 상사에게 대들어 그동안 쌓아온 점수를 다 까먹는 것을 보기도 한다.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다. 그러니 술을 마실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계영배를 품자.
- 2019-02-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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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홍천 산골로 귀촌한 전직 변호사 정회철 씨
- 술을 즐기다 보니 술 만드는 기술이 궁금해졌더란다. 그래서 양조법을 배웠고, 조예를 키웠고, 마침내 술도가를 차렸다. 최고의 술을, 독보적인 전통주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이게 그의 귀촌 내력이다. 산골 숲속에 터를 잡았다. 된통 외진 골짝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도란거려 술을 익히나? 술 아니라 맹물이라도 향긋하게 무르익을 풍광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산골 술도가 사장 정회철(56) 씨의 전직은 변호사. 변호사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치우고 고시학원 강사로 뛰어 이름을 들날렸다. 충남대학교 로스쿨 헌법 교수로도 재직했다. 남들 눈에는 활보였겠으나 그는 도중에 멈췄다. 시골로 내려가기에 마땅한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건강에 탈이 났기에. 일밖엔 난 몰라!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열렬히 직업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몸에 적신호가 켜진 것. “머리 아픈 증상이 극심했어요. 오랜 세월 누적된 과로로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거죠. 온몸의 기(氣)가 머리로만 몰렸던 것 같아요. 단 5분도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어요.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죠.” “사법고시 준비생들에게 스타 강사로 널리 알려졌었다죠?” “근 10년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하루 너덧 시간을 내리 강의하는 식으로 열심히 했죠. 제가 고시생들을 위한 헌법 수험서 열 권을 펴냈는데, 날이면 날마다 글을 쓰는 일도 무리였어요. 명예도 좋고 부(富)도 좋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건강부터 되살리고 보자, 그런 생각으로 귀촌을 했습니다.” “귀촌 이후 건강은 좋아지셨고?” “강의하고 책 쓰고, 머리의 에너지를 모조리 써야만 하는 강행군에서 벗어나자 몸이 빠르게 회복되더군요. 요즘 다시 머리가 아파지려 하지만.(웃음)” “양조장 일의 과로로?” “양조사업 구상은 귀촌 이전부터 나름 충실하게 해왔어요. 양조 공부를 많이 해뒀죠. 덕분에 일의 진행이 빨랐어요. 그런데 전통주 사업, 이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일본 술 사케나 서양 와인은 1년에 한 번 빚으면 그만이지만, 저희 토속주는 1년 365일 계속 매달려야 하거든요. 게다가 양조장 개업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머리 아플 수밖에.” “적자 발생 원인이, 문제점이, 어디에 있죠?” “소비자들이 전통술을 잘 모릅니다. 변호사가 만든 술이라 호기심을 가질 법하지만, 별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전래의 청주 문화, 약주 문화는 이미 고사 직전이에요. 거대 기업들이 장악한 유통망을 저희 같은 작은 업체가 파고들기도 어렵고.” 정회철 씨의 양조장엔 ‘전통주조 예술’이라는 상호가 걸렸다. 그 옛날의 고귀한 양조 정통을 살려 예술에 맞먹을 술을 빚겠다는 의지를 실었다. 산중 유벽한 곳에, 수려한 숲속 5000평 부지에, 살림채를 비롯해 완벽한 수준의 양조 시설물들을 구축했다. 본때 있게, 맵시 있게.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개량 한복을 소탈하게 차려입은 정 씨. 안면에 자란 텁수룩한 수염이 입성과 오붓하게 어울린다. 숨어사는 사람처럼 표정은 고요하다. 넘치는 의욕으로, 신명에 찬 근면으로, 그는 오직 술 만들기에 전념해왔단다. 주조(酒造)만을 일삼진 않는다. 양조 기법과 술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게스트하우스도 겸한다. 하지만 아직은 불황! 세상의 그 어디에도 예외가 없다. 사업판이란 적자생존의 정글이라는 거.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지만, 전국 곳곳에 산재한 군소 전통주 업체들이 고전한다. 그는 그걸 몰랐을까? 몰랐단다.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상황을 알았다면 덤벼들지 않았겠지요. 몰랐기에 사업 착수가 가능했던 겁니다.” “그 무슨 신념이 있었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셨던 전통주를 제대로 복원해 보급하고 싶었어요. 진정한 민속주를, 장삿속만을 추구하지 않는 술다운 술을 빚는다는 거, 그건 사업 성패를 떠나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어요.” “전통주를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의 술이 최고라 자부해요. 장인정신을 표방하며. 당신이 만드는 술은 어떤 특장이 있나요?” “좋은 술은 일단 맛이 빼어납니다. 미각과 후각은 물론, 시각까지를 미묘하게 자극해 만족을 주죠. 또 숙취라는 게 없어요. 그럼 좋은 술을 만드는 관건은 무엇인가? 누룩입니다. 어떤 누룩을 썼느냐에 따라 술의 품질이 결정돼요. 대부분의 업체들은 첨가물이 들어간 인위적 누룩을 사용하는데, 이게 술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겁니다. 저는 직접 자연발효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요.” 정 씨가 술을 내놓는다. ‘무작53’이라는 이름이 붙은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53도. 조선의 명주 ‘적선(謫仙)소주’를 원본으로 해 빚었다는 정통 증류식 소주. 한 잔 털어넣자 감미롭게 혀를 굴러 뜨겁게 목으로 넘어간다. 그는 증류식 소주 외 약주와 막걸리도 만든다. 술마다 고가격을 매긴 건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자부심의 표출이겠지. 술꾼들은 좋은 술에 대한 얘기만 나와도 엔도르핀이 솟는다. 이태백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풍진 세상 흥겨이 노닐었던가. 날이면 날마다 막걸리를 마시며 쓸쓸한 이승을 소풍처럼 살다 귀천(歸天)한 천상병 시인의 동류는 또 얼마나 많던가. 술로 구겨진 인생도 숱하지만, 술의 위무(慰撫)로 일어선 인생사도 즐비하다. 가장 복스러운 인생은 술 빚는 자의 것일지도. 향기로운 술로써 세상에 미만한 고독과 고통을 씻는 일에 일조하기에. “술을 만드는 일, 좋은 술을 빚는 일, 거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정말 즐거워요. 용케도 만족할 만한 술이 만들어졌을 땐 기뻐 날뛰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죠. 모두들 세상에서 최고는 돈이라고들 하지만, 제겐 술이 최고예요.” “‘최고의 술’을 만든다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는 중이군요. 불안은 없을까?” “귀촌 전, 진정 기꺼이 즐기며 남은 생 전체를 쏟을 일을 찾았어요. 그게 전통주 사업이었죠. 단순한 술도가가 아니라, 풍류를 중심에 두고, 모두 흥겹게 어울려 놀 수 있는 복합 술 문화공간으로 가꾸고 싶었어요. 그게 꿈이자 목표예요. 불안? 그런 건 없어요. 다만, 화증과 짜증은 많이 늘었죠. 화 폭발의 대상은 와이프이고.(웃음)” “부인이 무슨 죄? 신사는 여자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는 법이죠.” “아내가 하는 말, 서울에서 이토록 열심히 일했다면 빌딩을 벌써 사고도 남았을 거요! 저는 일벌레입니다. 부진한 수익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 그 하나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향후 전망은 밝으니까.” “활로를 찾았다는 얘긴가요?”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전통주에 관심과 호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제겐 고무적인 정황이죠. 어, 이거 맛있네! 기존 막걸리와는 다르잖아! 이게 뭐지? 전통주네! 그런 반응들.”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바람 잔 날에 바람개비를 쥔 사람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람이 일기를 기다리기. 다른 하나는 앞으로 바람처럼 달려 바람 일으키기. 정회철 씨는 냅다 질주 중이다. “선택과 집중. 돌아보면, 제 인생은 그걸 나름 잘 해왔어요. 뭐든 신중하게 선택하고 가차 없이 몰두해왔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바꿨어요. 이런 저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기분으로 조마조마 바라보는 건 와이프이고.” “어릴 적 꿈은?” “제가 대학 땐 운동권에서 뛰었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할까, 정치인이 되고 싶은 꿈이 좀 있었죠. 그러나 한계를 느꼈어요. 그건 나의 길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긴 해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판단을 했어요. 오늘날 이곳에서의 양조 일, 그건 인생 후반에 발견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 사업과 적성이 잘 부합하는 거예요? 비즈니스란 허울 좋은 요령과 처세가 무기일 텐데.” “흠, 얼마 전 너무도 힘들어 난생처음 점집에 가서 사주를 봤는데요, 절더러 한량 타입이라 합디다. 한량? 내가 정말 그런 거야? 반신반의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정히 그렇다면 잠든 ‘끼’를 살려 재미있게 살면 되겠지, 워낙 모범생으로 성장해 내향적인 성격이 굳었지만 술과 더불어 한평생 즐겁게 살자, 그런 다짐을 해보는 것이죠. 저희 부부에겐 슬로건이 하나 있어요. ‘재미있게 살자!’ 부제(副題)도 있어요.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떠밀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한 것과도 같은, 그런 절박한 굽이를 곧잘 마주치는 게 인생이지만, 웬일인지 파도는 흔히 절로 가라앉는다. 그걸 문득 느끼자면, 순항도 재미요, 난항도 재미다. 자신이 선택한 상황 안에서 자극과 감흥을 발견해 즐기는 데에서 삶의 풍미는 돋아난다. “귀촌을 해서 목가적인 낭만을 즐기겠다는 태도는 위험해요. 일 속에서 재미와 가치를 구해 행복의 실체를 찾아가는 게 옳다고 봐요. 귀촌을 환상으로 모색하는 건 실패의 첩경입니다. 시골 환경은 예상보다 더 단조롭고 답답할 수 있어요.” “원주민과 흐뭇하게 지내는 일에도 공을 쏟아야만 하죠.” “귀촌인들은 마을에서 백년을 살아도 외지인이에요. 애초 마을과 뚝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현명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도시보다 시골에 막대하게 많은 건 자연의 얼굴들이죠. 자연이 주는 안정감, 그건 귀촌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운이지 않을까?” “사계의 변화에 자주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철 맞춰 꽃이 피고, 향기가 번지고…. 아아, 그럴 때면 넋을 잃어요.” 생물과 무생물이 섞인 도시. 생물과 생명이 얼크러져 순환하는, 시골이라는 자연. 자연을 향해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마음이라면, 귀촌이란 자못 근사한 여행이겠지. 정회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돈을 줄여 쓸 수 있는 곳이다. 너무 열악한 경제 형편 하에서 귀촌하면 괴로워진다. ❷ 가급적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자. ❸ 시골의 문화 여건은 미비하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해서 귀촌하자. ❹ 도시에서 맺은 인적 관계를 꾸준히 관리, 지속하자. ❺ 사업을 할 게 아니라면 터를 넓게 잡을 필요 없다. 200평 정도면 텃밭까지 즐길 수 있으니.
- 2018-08-20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