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쨍쨍 쪼이는 날 어느 날이고 제주도 성산포에 가거든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집을 가지고 가라 한다.
‘아침 여섯 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
‘이 시집의 고향은 성산포랍니다.’ 이생진 시인의 시집을 들고 볼가를 스치듯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을 벗 삼아 마음의 고향을 찾듯 성산포로 간다.
성산포는 제주를 수 십 차례 오고 가면서 끝없이 찾아드는 해안가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드라마틱한 자연의 변화를 펼쳐 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가면 마음에 위안을 얻는 때문이다. 유난히 현실이 버겁다 싶으면 해안가에 앉아서 몇 시간을 머물다 오기도 하고 바쁜 일정에 짧은 시간밖에 낼 수 없어도 기어코 들러보아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바닷가 화산 폭발에 의해 생성된 수성화산인 성산일출봉은 일출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99개의 거대한 기암을 호위병처럼 거느린 동쪽 끝 태양이 떠오르는 자연이 만든 성의 모습은 정상에 올라야 보인다. 한 번쯤은 새벽잠을 깨워 해맞이를 해보기를 추천한다. 기기묘묘한 거석들과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 빙 둘러 천연 요새를 구축하고 있는 성산일출봉에 오르면 자연의 경이로움 아래 태양과 바다 그리고 제주의 모체인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절이나 시각에 따라 오르는 맛이 확연히 다르다.
성산포를 온전히 느끼길 원하고, 위안을 얻고자 한다면 해안을 따라 느릿하게 걸으며 발자국을 남겨보자. 걷기의 시작은 이생진 시비거리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다 보이는 ‘시의 바다’에 멈춰 이생진 님의 시를 읽는다. 성산포를 유난히 사랑하는 시인, 이생진은 1978년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펴냈다. 성산포와 해, 바다 그리고 제주 사람들을 사랑하였던 시인이 그려놓은 시의 길을 따라 봄날을 걷는다. 가을에는 갯쑥부쟁이와 해국이 해안절벽을 따라 피어 장관을 이룬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이는 잔디밭 길은 15년 전에는 참 한적한 곳이었다. 지금은 올레를 걷는 이나 성산일출봉의 새로운 모습을 보려는 이들로 꽤 북적거린다.
성산일출봉에 가까이 다가갔다 수마포해안 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치기해안으로 방향을 잡는다. 광치기해안은 원래 터진목이었다. 파도가 실어 나른 모래가 쌓이고 쌓여 육지와 가까워졌고 거기에 인간의 힘을 더하여 이어지게 되었다. 해안에서 바라보면 성산일출봉의 자태가 유난히 미끈하다.
마음이 유난히 울적할 때면 파도가 거센 해안가에 서보라. 광치기해안은 물때를 잘 맞춰서 썰물일 때 가는 것이 좋다. 물이 빠져 바다가 숨겨놓은 푸르른 암반지대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다. 숲 속 바위에 내려앉은 초록 이끼와 닮은 바다이끼가 돌빌레를 빼곡하게 덮고 있다. 바닥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물빛과 어우러져 가슴에 푸른 동심원을 그리듯 희망을 전한다. 살랑살랑 불어대는 봄바람은 파도를 어루만지고...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는 여행자의 상념은 파도를 따라 밀려오고 밀려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수 천 년이 켜켜이 쌓인 해안에 서면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 선 듯 신비롭다.
광치기해안이 끝나면 섭지코지가 시작된다. 섭지코지는 좁은 땅 이란 뜻을 지닌 ‘섭지’와 바닷가에 불쑥 튀어나온 땅(곶)을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인 ‘코지’가 합쳐진 지역명이다. 낮은 풀로 뒤덮인 나지막한 오름 자락에서 풀을 뜯는 말들이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출렁이는 파도를 이불 삼아 성산일출봉이 누워있다. 길은 두 개로 갈리는데 왼쪽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초입에 있는 지역 해녀들이 운영하는 섭지해녀의 집은 겡이죽, 전복죽, 성게칼국수 등을 파는 음식점이다. 작은 게를 갈아 넣어 끓인 겡이죽이 별미다. 해녀의집에서 나와 해안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불턱이 보인다. 제주의 해녀들은 겨울 영하의 날씨에도 물에 들어가야 했고 이곳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서로를 다독였다. 불턱은 해녀들의 쉼 자리다.
굽이치는 해안선을 따라 파도가 부딪치는 길을 걸어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니 기암괴석과 등대가 있는 섭지코지의 진짜 코지가 나타난다. 등대에 올라 섭지코지의 매력을 한눈에 담은 후에 내쳐 드라마와 영화 촬영 장소였던 올인하우스까지 걸어간다. 현대적인 건물이 있어 분위기를 방해하는 느낌도 있지만 시커먼 바위 절벽 위의 데크를 따라 걷는 길은 충분히 이국적이다. 성산일출봉이 시야에 사라질 듯한 지점에서 걷기를 마무리한다.
이생진시비거리에서 시작한 성산포 걷기가 섭지코지 언덕에서 끝을 맺는다.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성산일출봉은 그동안 습관적으로 떠올렸던 성산일출봉의 모습과는 다르다. 언덕과 모래사장을 걸으며 바다에 취했고 이생진 시인의 시구를 떠올렸다. 잠깐 다녀가는 여행자가 아닌 성산일출봉과 동행이 되어 걷는 길에서 답답한 봄날에 위안을 얻는다.
‘따듯한 남쪽 나라’라고 하지만 겨울은 그 어느 곳에서나 역시 겨울입니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몸은 자연스레 움츠러듭니다. 거센 바닷바람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불더니, 어느 순간 다시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종잡을 수 없게 춤을 춥니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렸다던 말이 생각납니다. 검푸른 바다와 거무튀튀한 현무암 갯바위, 모래밭 뒤로 펼쳐진 풀밭이 깡마른 갈색으로 바뀐 지 오래. 모래밭에 촘촘히 뿌리를 내린 채 가늘고 긴 이파리를 무성하게 올렸던 통보리사초 더미도, 좌로 우로 비스듬히 줄기를 뻗은 순비기나무도 푸른빛을 잃었습니다. 푸르던 하늘에도 어느새 시커먼 구름이 들어와 반쯤 자리를 차지하니, 겨울 제주의 바닷가 풍경이 일순 을씨년스럽습니다.
황량한 바닷가 풍경에 모처럼 제주를 찾은 길손이 여수(旅愁)에 빠져들려는 순간 달덩이처럼 둥근 꽃송이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미국에 ‘상하(常夏)의 낙원’ 하와이가 있듯 한국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제주도가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주도 바닷가에는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겨울에도 많지는 않지만 찾아보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여전히 꽃잎을 활짝 열고 있는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황금색 국화인 갯국을 비롯해 철 지난 해국과 감국, 수선화,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갯쑥부쟁이 등등. 물론 각종 도감은 갯국 등의 개화 시기를 11월까지로 소개하고 있어, 실제와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12월. 산방산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바닷가에서 갯쑥부쟁이의 환한 꽃 무더기를 만난 것은 각별했습니다. 모든 것이 사위어가는 한겨울 세찬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꽃 피운 모습이 ‘이 땅의 장한 여인’들을 똑 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진 시집살이와 가난, 굴곡진 근현대사의 풍파를 이겨낸 며느리와 아내, 어머니의 모습이 갯쑥부쟁이 둥근 꽃다발에 투영된 걸 보았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고 훗날을 기약하는 모습이 정말 비슷합니다. 흔히 들국화라 부르는 가을꽃 가운데 하나인 갯쑥부쟁이. 쑥부쟁이와 개쑥부쟁이, 단양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눈개쑥부쟁이, 가는쑥부쟁이 등과 마찬가지로 국화과 식물의 하나인데, 주로 바닷가에서 자라는 쑥부쟁이라는 뜻에서 갯쑥부쟁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높이는 30~100㎝로 자라며, 8월부터 11월 사이 원줄기와 가지 끝에 지름 3~5㎝의 동그란 꽃이 하나씩 달립니다. 꽃은 가운데 노란색의 대롱꽃과 대롱꽃을 둘러싼 혀 모양의 자주색 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는 물론 남해안과 동해안 등 전국 바닷가에서 자란다. 일본·대만·만주·중국 등에도 널리 분포한다. 제주도에서는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빙 둘러 바닷가에 자생하는데, 일부 도감은 키가 다소 작고 바닥에 기듯이 자라는 것을 섬갯쑥부쟁이로 구분한다. 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제주도 남부에서 자라며 붉은색을 띤, 줄기가 가지를 많이 치고 억세고 나무처럼 딱딱해지는 것을 왕갯쑥부쟁이로 분류한다. 여러해살이풀로 꽃도 지름 5~7㎝로 다소 크다. 제주도 바닷가에 자생하는 쑥부쟁이의 경우 갯쑥부쟁이로 부르고 있다. 야생화 동호인들이 제주도에서 많이 찾는 갯쑥부쟁이 자생지는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섭지코지와 광치기 해변, 산방산 앞 사계포구 해변, 그리고 마라도 등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