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전통 ‘경기떡집’
최근 ‘망리단길’이라 불리며 망원동 일대에 젊은이와 해외 관광객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새로운 감성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생겨나는 이 골목에서 오랜 명맥을 이어온 가게가 있다. 바로 ‘경기떡집’이다.
1958년 흥인제분소를 설립한 김장섭 선생의 제자였던 최길선(66) 명장이 전통을 이어받아 경기떡집이 탄생했고, 다시 그 손길을 네 아들이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렀다. 이들 가족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에서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현대인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건강한 디저트로 떡을 연구하고 있다. 2대를 넘어서 3대, 4대까지 이어갈 떡집을 만들고 싶다는 장남 최대로(37) 씨는 장수비결로 ‘신뢰’를 꼽았다.
“고객이 믿고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쓰는 걸 최우선으로 합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원산지를 다니시며 그때그때 좋은 쌀이나 곡물 등을 선별하셔요. 맛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재료는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셈이죠. 가령 99% 맛을 내는 재료가 100원이고, 100% 맛을 내는 재료가 200원이라면, 저희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절대 오래되고 모난 재료는 쓰지 않아요. 또 떡은 좋은 날을 기념하려고 예약 주문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시간 엄수가 철칙입니다. 전에 아버지께서 동생이 아픈데도 가지 못하고 엉엉 울며 떡을 만드시는 걸 봤어요. 누군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할지 몰라도, 전통을 이으려면 그러한 사명감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명장의 손에서 탄생한 최장수 떡은 ‘흑임자인절미’이지만, 가장 인기 있는 건 ‘이티떡’이다. 이 떡을 내놓은 지도 벌서 20여 년이 흘렀다. 오래된 메뉴이기에 간혹 “한자로 어떤 의미냐”라고 묻는 이들도 있지만, 고전 영화 속 주인공인 ‘이티(ET)’에서 따온 이름이다. 엄지손가락만 한 찰떡 양옆에 비슷한 크기로 거피 팥소를 빚어 붙이는데, 그 모양이 이티 얼굴을 닮아 그리 부르게 됐단다. 주력하는 또 다른 메뉴 중에는 ‘꿀떡’도 있다. 남녀노소는 물론 외국인들도 ‘허니볼’이라 부르며 즐겨 찾는다.
떡은 아무래도 먹다 보면 목이 막히기 때문에 식혜와 수정과 등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최대로 씨 형제는 차후 떡과 미숫가루 음료 등을 곁들일 수 있는 디저트 카페도 선보일 계획이다.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떡에 대한 관심도 늘었어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티라미수 떡, 크림치즈 떡 같은 퓨전 디저트가 등장했는데, 우리 떡의 미래를 그런 방향으로 풀어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형제들끼리 힘을 모아 우리다운 것을 지키면서 현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메뉴를 연구 중입니다.”
지하철 6호선 망원역 2번 출구 도보 2분 거리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9길 24
영업시간 월~토 08:00~18:00
대표메뉴 이티떡, 꿀떡, 흑임자인절미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어쩌다 인연
근무가 끝나면 아무도 없는 숙소로 돌아가기를 싫어한 일본인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줄 애완동물을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외로움만 있던 방에 새 식구가 생겼다. 업무 특성상 출장이 잦아 개나 고양이는 기를 수 없었던 그녀는 작은 플라스틱 박스에 관상용 열대어인 거피를 길렀다.
작은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거피가 싱크로나이즈 선수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아가씨는 우리 아들과 국제결혼을 했다. 며느리는 한국에서 의무 복무기간이 끝났고 아들은 도쿄 나리타공항에 취업해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삿짐을 컨테이너에 다 싣고 문을 닫는데 며느리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거피가 담긴 어항을 컨테이너에 실을 수도 없고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항은 아버지가 기르시든지 다른 사람 주세요.”
아무리 말 못하는 미물이라지만 뜻하지 않는 이별이었다. 아들의 마지막 말에 어려운 시절을 거피와 함께했던 며느리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염려하지 마라. 내가 잘 돌볼게.”
내 말에 며느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항의 물을 최소한만 남기고 승용차 뒷좌석에 실었다. 거피는 이제 나와 인연이 되어 우리 집으로 왔다. 거피가 게으른 주인을 만나 굶주리며 더러운 물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 안 들으려고 깔끔하게 손질해 놨다.
얼마 후 아들 내외가 전화를 했다. 이사를 무사히 잘했다는 안부 전화였다. 그런데 한참을 통화했는데도 며느리는 전화를 안 끊었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거피의 안부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깨끗이 손질된 어항에서 거피들이 잘 놀고 있는 모습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줬다. 정이 많고 심성이 착한 며느리는 거피가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을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특별한 아침
“철퍼덕 철퍼덕.”
‘이게 무슨 소리지? 어항이 깨졌나?’
거피가 이사 온 첫날, 자다 말고 일어나서 어항을 살펴봤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창문 밖은 여명으로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거피들이 아침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였다. “그래 알았어, 이 녀석들아. 밥 줄게.”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꼬끼오~” 하며 닭 울음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나는 요즘 거피들이 지느러미로 수면을 노크하는 소리에 잠을 깬다. 오늘 아침도 거피가 지느러미로 노크한 수면에는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그 동그라미 속으로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아들 얼굴, 며느리 얼굴, 그리고 예쁜 손녀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