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년 전, 50대 중반의 대기업 임원 출신들이 모였다. 그들은 앞으로 계속 퇴직하는 이들이 늘어날 텐데, 함께 의미 있는 활동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40명이 뜻을 같이하기로 했고, 이름을 ‘엔슬(ENSL)’이라고 지었다. ‘Executive Network for Second Life’의 약자다. 그리고 법적 실체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협동조합으로 등록했다. 엔슬협동조합의 탄생이었다. 공덕동 서울 허브센터에 있는 엔슬협동조합의 배영효 이사장, 송덕호 이사를 만나 고수들의 고민과 이념과 가치, 미래 비전을 들어봤다.
“엔슬의 활동은 인생을 향유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배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지난 4년 동안 엔슬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배영효 이사장은 엔슬은 하나의 실험이라고 밝혔다. 수십 년 동안 한 분야에 몸담고 있다가 퇴직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는 우리 시대의 커다란 과제임이 분명하다. 엔슬은 엔슬의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슬이 성공을 거둔다면 다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선례가 되고 우리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것이 되겠지요. 또한 우리의 시행착오와 경험도 앞으로 같은 길을 걸어갈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행, 지식 나눔, 재취업, 스타트업 투자까지 경험
인생을 즐기고, 봉사하고, 배운다는 차원에서 지난 4년 동안 엔슬은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했다. 여행과 답사, 지식 나눔, 재취업, 창업 멘토링과 스타트업 투자까지, 엔슬협동조합 회원들은 퇴직자들의 도전과 실수와 보람 등을 모두 겪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엔슬협동조합의 유의미한 데이터로 쌓여 있다. 예를 들어 serving, 즉 봉사활동을 봐도 그렇다. 그들의 봉사활동은 이웃돕기 같은 차원의 활동이 아니다.
“기업 경력이 30년 넘는 임원이 많다 보니 그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활동을 벌여왔지요. 최근 창업이 붐이잖아요. 대부분의 창업자가 젊은 친구들이고요. 아이디어와 패기를 가진 창업자라 해도 네트워크나 사업 전개 방식 등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죠. 그래서 우리 멤버들과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겁니다. 엔슬은 숙련된 전문가들이 멘토링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 규모는 작아 실험적 단계입니다만, 회원들이 일정 금액을 모아 스타트업 투자도 하고 있고요. 창업 멤버들 중 일부는 투자 전문 기업을 창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루라고 해도 끝까지 성장하고 싶어 한다
내부적으로는 투자 기업 형태의 실험도 진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엔슬은 회사가 아니다. 따라서 엔슬 조직은 위계도 없고, 멤버들이 보상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조직이 유지되느냐?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조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해야만 하고, 그 일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요. 기업이라면 계층 구조 아래 급여를 주면서 일을 시키지만, 엔슬은 그런 조직하고는 다릅니다. 멤버들끼리 품앗이를 하면서 일을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서로의 기대도 다르고, 상대에게 강요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 40명의 멤버가 4년간 활동해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엔슬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일을 하자’이다. 송덕호 이사는 ‘사람과 함께 활동하고자 하는 이들이 오는 곳’이 엔슬이라고 했다.
“퇴임 후 시간 보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죠. 집에서 쉬고 싶고, 돈이 많으니 골프나 치면서 살겠다는 사람은 엔슬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공부라든지, 성장하길 원하는 사람이 오면 됩니다. 공부와 성장은 혼자만으론 힘듭니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니까요. 그 니즈를 아는 사람이면 되는 것입니다.”
엔슬은 녹슬지 않는다
2019년의 엔슬은 큰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는 사람끼리 활동을 해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계획을 갖고 있다.
“2019년의 가장 큰 변화는 신입회원 모집입니다. 지난 4년간은 초창기 멤버들만 활동을 해왔는데 엔슬도 하나의 조직으로서 신진대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신입회원을 모집하기로 했습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상호 작용으로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품앗이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새해부터는 모든 회원이 하나 이상의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무임승차(free riding)를 줄이는 것이 이런 성격의 조직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엔슬의 변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 의미는 엔슬의 가치가 학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성장과 배움을 이루려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든지 해야죠.”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과거의 관계들로 이뤄져 있다. 과거에 어디서 태어났느냐, 학교가 어디냐, 어떤 직장을 다녔냐 등등. 특히 시니어 세대를 이루는 50~60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 모임, 직장 선후배 모임, 종교 모임, 기타 취미활동 동호회 등이 인간관계의 주된 축이다.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지향적 관계들인 것이다.
“내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야 발전할 수 있죠. 예를 들어 평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문학, 물리학, 블록체인 등의 내용을 처음 접하면서 사유를 넓혀가듯 말이죠.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계급장을 떼고 진짜 새로운 사람과 일을 해보자.’ 엔슬은 그렇게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물론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가 무조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좋은 일도 있겠지만 리스크도 있을 것이다. 기업에서 수십 년간 일하며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났던 베테랑 엔슬 멤버들이 그런 문제들을 인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평적 관계로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얻는 게 더 많으리라는 답을 내린 것이다.
당장의 욕구는 인생의 지향점이 될 수 없다
배영효 이사장에게 엔슬의 회원이 될 수도 있는 이들, 바로 곧 퇴임할 베테랑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에 대해 묻자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무얼 어찌하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다만 ‘시간을 잘 쓰자’ 정도의 말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시간을 잘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요. ‘Happiness is not a destination. It is a way of life(행복은 목적지가 아니고 삶의 한 방법이다)’ 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은 아무 문제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마다의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지향점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보통 정년이 되어 퇴직할 때가 되면 온갖 욕망들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배 이사장은 그런 욕망이 지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보통은 옷을 벗고 나올 때 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욕구가 목적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생기는 욕구이지요. 억압이 풀리면 그 욕구 역시 의미가 사라져요.”
구루가 되기 위한 출발선에 선 사람들
엔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가 있다. 바로 구루(guru)다. 자신들을 구루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직장에서 오래 생활했다는 것만으로 구루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엔슬은 구루 모임이 아니라 구루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오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엔슬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그 반대로, 구루로서의 첫걸음을 지향한다.
“구루가 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지식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혜가 중요하죠. 지혜로운 사람은 향후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그걸 품을 수 있습니다. 자세히 아는 게 아니라 변화를 마음에 품고 사물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배 이사장이 인생의 고수야말로 진정한 구루라고 말하자, 송 이사가 받아서 좀 더 구체적으로설명했다.
“구루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봐요. 첫째는 살면서 성장하겠다는 욕구죠. 모든 사람이 성장하려 하지는 않거든요. 둘째는 분야를 정해야 합니다. 분야가 너무 많으니까요. 셋째는 과거와 무관치 않다는 것. 과거를 무시하고 구루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걸 경험해보겠다면 즐길 수는 있지만 구루가 되기란 어렵죠. 넷째는 십 년은 더 활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4년을 걸어온 엔슬의 새로운 도전은 2019년부터 전개된다. 신입회원은 최근 1~2년 내에 퇴임한 대기업 임원들을 중심으로, 2019년 1~2월에 걸쳐 모집 선발하고, 3월에는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그들이 바라는 구루의 길이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찾는 고수들에게 어떤 모델로 제시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지구상에서 세계화와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곳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오직 한 나라,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희귀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부탄이다. 전 세계가 GNP(국민총생산)만을 부르짖으며, 효율과 편리라는 기치 아래 경제성장에 목을 맬 때도, GNH(국민총행복지수)를 최고 정책으로 삼고 있는 나라. 지구상에서 환경보호에 가장 민감하며, 영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늦은 1999년에 텔레비전이 도입되었고, 유일한 금연 국가로 담배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새들의 목에 줄이 걸릴까 염려되어 전깃줄을 잇지 않는 나라. 지극한 불심에서 우러나온 윤회사상으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을 부모처럼 섬기고 아끼는 나라. 나무 한 그루를 벨 때도 국가의 허가증이 필요한 나라가 부탄이다. 이 나라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늘고 있지만 부탄은 환경과 전통 보호 차원에서 일일 관광객 숫자를 제한하고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한 나라에서 살아온 나는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도도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지 궁금했고 그 비밀을 찾아 부탄으로 날아갔다.
국민 행복이 국가 정책인 나라
히말라야 동쪽에 위치한 불교 왕국. 북으로는 티베트, 남쪽과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인도 시킴 주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 전체가 산악 지형(해발 150m에서 7000m)이고, 자신들의 고유 언어인 종카어를 쓰는 나라. 수백 년 동안 외부 세계에 문을 닫고 폐쇄적으로 살아왔으며, 한 번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거나 식민지였던 적이 없는 독립심 강한 나라.
부탄이 결정적으로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 척박해 보이는 나라가 선진국들을 다 제치고 국민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랭크되면서부터다.
이상적인 지도자를 국왕으로 둔 행복한 국민들
“세상에 그런 지도자가 어딨어?” 정치가들에게 실망할 때마다 우리가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지도자’를 국왕으로 둔 행복한 국민들의 나라가 있으니 바로 부탄이다. 부탄의 집집마다, 거리마다 국왕과 왕비의 사진이 넘쳐난다.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진 잔뜩 의심스러웠다. ‘행복 국가라더니 여기가 북한도 아니고 국왕 사진이 너무 많잖아!’ 마치 충성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여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부탄 국민들의 국왕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실로 대단했다. 그들은 1대 국왕부터 5대 국왕까지 모두 다 존경하지만 특히 3대, 4대, 5대 국왕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다. 3대 국왕이었던 지그메 도르지 왕축은 현명하고 빠른 판단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부탄의 독립을 지켜냈다. 그러나 3대 국왕은 일찍 사망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4대 국왕은 고작 17세였지만 국민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의 초석을 다졌다.
과거의 미덕을 돌아보게 하는 백미러 같은 곳
행복에 관한 연구들은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삶이 가져다주는 강한 정체성이 행복감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의상에서부터 가옥, 노인 공양에 이르기까지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탄 왕국의 모습은 세계 어디를 가든 똑같은 패션과 풍경을 보게 되는 여행자에겐 신기하고도 이색적인 풍경이 된다. 부탄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언제나 전통 의상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남자들의 의상은 ‘고(goh)’, 여자들의 의상은 ‘키라(kira)’라고 하는데 학교에 갈 때는 물론 농사를 짓거나 일상생활을 할 때도 늘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부탄인 가이드도 더운 날씨임에도 전통 복장인 ‘고’를 갖춰 입었다. 법으로 정해져 있어 지켜야 한다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부탄 국적을 가진 사람은 전통 복장을 입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하니 이 나라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지 알 만했다.
도출라 고개에서 맛보는 장엄한 대서사시, 히말라야 파노라마
팀푸에서 17세기에 부탄의 겨울 수도였던 푸나카(Punaka)로 가는 길, 해발 3140m의 도출라(Dochu-la) 고개에서는 히말라야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등반을 하지 않고도 눈 덮인 히말라야의 장관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은 부탄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여름 수도였던 파로(Paro)에는 부탄의 상징과도 같은 절벽사원 탁상 곰파가 있다. 차를 타고 2600m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3140m 탁상 곰파까지는 무조건 걸어서 가야 한다.
영화 ‘리틀 부다’의 촬영지였던 파로종에서는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이 마치 지상의 것이 아닌 양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자줏빛의 승복을 입은 꼬마 승려들과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은 경통)를 들고 코라(탑 주변을 시계 방향으로 도는) 의식을 하는 순박한 사람들도 만났다.
파로종 옆에 있는 오래된 나무다리에서는 학교에 가는 순수한 얼굴을 만났다. “쿠주장폴라(Ku-Zu Zangpo-la,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부탄어)”라고 인사하니, 수줍은 듯 “쿠주장폴라” 하고 답한다. 사진기를 들이대니 바쁜 걸음을 멈추고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다. 여러 컷을 찍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는 소년에게 이제 충분하니 가도 좋다고 신호를 보내니 그제야 발걸음을 옮긴다. 순간 부탄의 속담 한 구절이 떠올랐다.
“당신이 친절하다면 가난해도 상관없다. 당신이 관대하다면 게을러도 상관없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거만함이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룽다 깃발과 초르텐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라 한다. 부탄에서는 매일 다섯 번 죽음을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삶과 함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당장 눈앞의 일에 급급해하며 살아가는 것을 막아준다. 산악지대의 왕국 부탄을 여행하면서 특이하게 느낀 점은 묘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불교적 태도 때문인데, 부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약 90%는 화장해 강에 뿌린다. 일부는 작은 탑 안에 재를 넣어두기도 한다. 주변엔 108개의 흰색 룽다(lungta) 또는 다르초(darchor)를 건다. 룽다는 티베트어로 ‘바람의 말[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바람 부는 곳에 룽다를 걸어놓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 널리 전해지기를 염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2세 미만의 아기가 죽었을 땐 조장(鳥葬)을 하기도 한다. 유명인이나 부자의 경우는 초르텐(chorten, 塔)을 세운다. 우리나라처럼 매년 제사를 지내지는 않고 2~3년에 한 번씩 간단한 추모식을 갖는다. 부탄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극락세계로 가는 과정이자 윤회의 한 고리일 뿐 슬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 첩첩산중에 있는 은둔의 왕국 부탄을 찾는 이유는, 척박한 환경임에도 전 세계적으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가 궁금해서일 것이다. 부탄의 지도자는 국민들의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위해서는 적어도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부탄을 여행하면서 그 현명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나라는 아니었다. 텔레비전이 도입되면서 젊은이들은 변화를 겪고 있고 부탄에 와 있는 인도, 네팔인들과의 마찰도 왕왕 일어난다. 세상에 완벽한 국가는 없다. 그러나 부탄 여행은 국민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이 ‘경쟁’과 ‘돈’이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들을 재발견하도록 해준다.
부탄의 한 사원에는 제2의 부처로 추앙받는 구루 린포체가 한 말이 새겨져 있다.
“변하는 것은 시대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자신이 살아온 나쁜 업은 생각하지 않은 채, 평화도 없고 우주 만물의 조화도 깨진 시대 탓만 하는구나.”
100세 시대의 행복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 인생을 살아낼 새로운 설계와 순서는 어떻게 세워야 할까. 유필화(63)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마케팅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경영학계의 구루다. 뿐만 아니라 를 비롯해 , 그리고 최근작 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고전을 경영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100세 시대, 고전에서 배우는 인생 경영 지혜’를 듣고 싶은 생각에 인터뷰를 청했다.
대방동에 위치한 유 교수 서재의 섬돌엔 검정고무신 두 켤레가 정겹게 놓여 있었다. 유 교수는 부인(이기향 한성대 의류학과 교수)이 아침에 인터뷰 복장 코디는 물론 간식을 손수 준비해놓고 갔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혼 때부터 지금껏 수십 년간 변함없이 싸준 부인의 도시락 내조력을 들려주는 그의 얼굴에 일순 사랑과 감사가 환하게 번졌다.
인생은 60부터란 말도 있는데요. 교수님께선 예순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지요.
“나눔과 베풂의 봉사활동이 내 삶의 비중에서 늘어났습니다. 60이 넘고부터는 경력과 일에 관련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 에너지, 시간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두 여인의 영향 덕분입니다. 어머님도 생전에 ‘늘 베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내도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덕분에 전혀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을 알게 되고, 접하지 않았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기업과 경영 문제에만 쏟던 관심을 기업 바깥의 세계로 돌리게 돼 좀 더 크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을 알게 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이 키워지는 부수효과도 있더군요.”
사회봉사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개인의 단순한 느낌이나 추정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근거가 있다. 코넬대학의 행복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간에는 정신이 노쇠해가는 속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봉사활동은 더욱 건강한 정신자세를 지니게 하고, 이는 다시 건강과 삶의 만족을 증진시키는 ‘행복의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게 연구의 골자다. 봉사는 이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이기적 행동이기도 하다.
인생 2막에선 성공보다는 행복이란 단어가 한결 실감 있게 다가온다고 다들 말씀하시더군요. 교수님께서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행복이란 마음이 편한 것, 마음의 평정과 평온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기업인을 만나보면 ‘성공하면 뭐해’ 하며 자조하는 경우도 많고요. 어쩌면 남이 부러워하는 정상에 오르는 것은 울 일이 많다는 것과 동의어라고나 할까요. ‘살아 있는 게 축복이고 숨 쉴 수 있는 게 기적’이라는 마음을 갖고, 일상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건의 충족이 아니라 그 수행 과정에 행복이 존재하지요.”
매일 참선과 명상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재에 명상실까지 두고 있으시지요.
“마음의 평화를 위한 제 수행 방법은 참선과 300배입니다. 1997년부터 해왔으니, 20년 가까이 해온 셈이네요. 가끔 40~50분씩 참선하고 300번 절하고 나면 마음과 몸이 깨끗해집니다. 현재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잡념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명상을 하면 집중력, 몰입력이 높아져요. 건강한 긴장력이 생산된다고나 할까요. 삶을 객관적으로 제3자화, 관찰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면 자기에 대한 지독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지도 않고요. 참선을 하다 보면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수많은 중생 중 하나로 담담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불만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으려고 하는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 교수에게 이순(耳順)(공자가 60을 가리켜 한 말)의 나이에 문자 그대로 이순(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칭찬, 아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비난, 싫은 말에는 그리 편하지 않고 신경이 쓰인다. 아직 이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고백한다.
교수님은 위기의 시대를 이기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꼽으신 바 있지요. 인생 경영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만심입니다. ‘왕년에’와 ‘내가 누군데’가 자만심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장군은 은퇴 후 모임에도 군복 입고 훈장 달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달라는 의미이지요. 그래봤자 남들은 ‘그래서(so what)?’예요. 버려야 채울 수 있고, 낮춰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요. 우리 세대는 산업혁명, 민주화를 달성한 세대 아닙니까. 열심히 살아온 것이지, 결코 헛산 것이 아니지요.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이에는 부족한 경륜이나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고 늠름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만심과 자부심,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유 교수는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시원치 않다고 깔아뭉개는 마음이 자만심이라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상대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은 자부심”이라고 구분했다. 자만심은 남을 무시하지만 자부심은 남을 포용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서양통이신데 동양고전에 심취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동양이 서양보다 한결 깊고 차원이 높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병법서를 예로 들어볼까요. 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을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고, 어떻게 이기느냐 거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반면 동양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무력으로 싸우지 않고 지략으로 이길 방법을 모색하지요. 서양에선 지략이나 책략보다 전략, 전술에 관심을 두고요. 서양의 병서가 단지 전략서인 데 반해 동양의 병서를 정치사상서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를 이끈 리더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공부력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평생 학습의 끈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독서이든, 대화를 통해서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배우려고 하는 학습력이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이는 동서양의 리더가 다르지 않습니다.”
리더들의 경쟁력이 공부력이란 사실은 인생 경영 지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저서 에서 공부력을 변형자산이라 명명해 강조한다. 변형자산이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튼 교수는 “돈 등 유형자산 못지않게 필요한 무형자산이 공부력”이라며 “학교 졸업, 취업, 은퇴라는 3단계 벽이 무너진 오늘날, 100년 인생의 풍요로움은 평생공부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미분의 인생관에서 적분의 인생관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생 전반기의 실력과 경력에 얹혀 후반전을 영위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전반전에 종언을 고하고 유연성과 개방성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라, 그렇게 공부력을 쌓는 것이 100세 시대의 생존비결이라는 진단과 처방이었다.
역사는 리더십의 스승이란 말을 강조하십니다. 역사적 인물 중 평생학습의 롤 모델로 누구를 꼽으시는지요.
“중국의 황제 당태종을 꼽고 싶습니다. 평생학습은 자기경영이 바탕인데요. 당태종은 죽는 날까지도 겸허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요. 그의 자기경영원칙은 경청, 자기경계, 자기절제, 긴장감 지속,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 구사 등 다섯 가지로 정리됩니다. 다만 집권 말년에 고구려 원정 등 쓸데없는 전쟁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이 결정적 실수였지요.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최초의 긴장감을 20년 이상 지속시키기는 어려웠다고나 할까요.”
당태종의 자기경영 비결 중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구사가 눈에 띄는군요. 이는 오늘날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나서고자 하는 마음, 참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본인은 경륜이지만, 상대에겐 편견이고, 본인은 조언이지만 상대에겐 잔소리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 기준을 돌아봅니다. 먼저 내 의도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인가, 내 능력 자랑을 위해서인가 성찰해봅니다. 즉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능력을 드러내 잘난 척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검토해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보는 상황이어서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느끼지는 않을지를 살핍니다. 끝으로 내가 말하는 방식이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인지를 고려해봅니다.”
그는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할 뿐인데 연장자라고 말을 다짜고짜 낮추며 하대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며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겸양의 태도를 평생친구인 헤르만 지몬 교수를 통해 체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헤르만 지몬 교수는 ‘유럽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독일의 경영학자다. “일국의 대통령에서부터 차 나르는 직원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존중하고, 즐겁게 대화를 하는 지몬 교수에게서 학문적 열정뿐 아니라 리더의 소양까지 배울 수 있었다”는 술회다.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한 교수님의 ‘인생 경영 비법’을 듣고 싶습니다.
“가족, 친구,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지요. 가족, 친구와 잘 지내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게 필요해요. 또 나이 들수록 중요한 게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인데요. 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독서를 꼽고 싶습니다. 인생에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의 호기심, 혼자서 경험할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내용을 알게 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러기 위해선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건강이 필수이지요.”
그에게는 독특한 독서 버릇이 있다. 책 앞날개에 독서를 시작한 날짜, 독서를 마친 날짜, 책 구입 장소 등을 메모해놓는 일이다. 나중에 이 메모를 보면 책 내용은 물론 책을 읽게 된 동기, 시공간의 배경에 대한 추억까지 함께 떠올라 즐겁다고 한다. 또 세 종류의 책을 동시다발로 읽어나가는 독서 습관도 있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있으신지요.
“없습니다(답변의 속도는 30초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평소에 열심히 살고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게 제 신조라고나 할까요. 안 되면 그만이지요. 무엇인가를 바라고, 해야 된다고 마음먹는 순간 괴로워요.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족쇄가 되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 교수와 인터뷰를 하며 ‘인생 경영의 최고 비법은 공부력’이고 “궁극적 공부력은 마음 경영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인생 시대, 무한성장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자기성찰력이 최고의 인생 덕목이자 경쟁력이 아닐까.
‘유필화’란 이름 석 자의 문패가 달린 파란 대문 집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시집 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는 ‘나의 묘비명’이라는 시에서 ‘인간 유필화’를 이렇게 관조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주 수행을 얘기했고 꾸준히 좌선도 하였지만, 생각만큼 행동이 안 따르는 자신의 한계를 늘 절감했다. 그는 물욕과 애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만심도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장년 이후 눈에 띄게 화를 내는 일이 적어진 것에 대해서는 은근히 흐뭇해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숱한 약점,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수시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태도였다. 그의 이름은 유필화였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고등학교를 남보다 두 해 늦게, 고향 김천에 있는 농고(農高)로 들어갔지요. 그 무렵 구루병을 앓고 있는 사촌 누이동생과 문학을 교류하며 지냈는데, 그 누이가 이듬해 시름시름 앓다 사망했어요. 그 시절의 누이 모습이 잊히지 않아 ‘소녀’의 그림을 그려왔지요.”
창문이 열린 화실 밖, 밤나무에서 매미가 울었다. 박항률(朴沆律, 1950~ ) 화가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읊조리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화상 같은 소년의 모습들은 누이의 눈동자에 비쳤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그렸고요.”
화실 바닥에는 최근에 완성했다는 이 있었다. 1995년 전시 때 그의 그림을 눈여겨봐왔던 잔잔한 감동이 드디어 이태 뒤 그의 청담동 화실까지 찾게 한 것이다. 인물화만 그리지 말고 풍경화도 그려달라 부탁하려다 그만두었다. 동갑의 우리는 40대 후반의 가장으로서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뿐만 아니라 시대의 서글픈 사회상을 공유하고 있어서 서너 시간 더 대화할 수 있었다. 그땐 머리 위에 삼층탑을 이고 있는 과 물고기를 안고 있는 의 두 그림을 갖고 있던 터라 한결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탁자 위에서 소리 없이 타오르는 침향(沈香)의 그윽한 향내가 화실을 맴돌다 옅은 보라의 연기 띠를 이루며 창가로 흩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같은 미술학도인 아내와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낳고 전업작가를 선언하며 그림그리기에 용맹 정진할 무렵이었다. 그가 건네준 자작 시집 과 드로잉 한 점을 받고 돌아선 첫 만남은 한 화가의 진솔한 심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단발의 소녀, 까까머리의 소년, 한 일사(逸士)의 인물 그림이지만 주변의 치밀한 장치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새벽의 안개, 고요히 타오르는 등잔불 등은 보는 이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禪)과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어떨 때는 신화(神話)와 현실이 혼재되면서 끝없는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후 두 번의 화실 방문과 전시회장에서 여러 번의 만남이 이어졌다. 그의 화풍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침묵의 적막함, 고요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탈속(脫俗)한 사색인의 경지를 리듬감 있게 그리고 있다. 1~2호 크기의 소품에서도 그의 면밀한 구도와 아크릴 물감의 잔 붓질이 높은 밀도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몽환적인 이상향 같은 새벽 풍경
서너 해 전, 잘 아는 인사동 화랑 주인이 이른 봄 섬진강으로의 탐매(探梅) 여행을 계획하면서 박항률 화가도 동행한다며 동행을 권유했으나, 가정사로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일이 있었다. 남도의 강안(江岸)에 작은 배를 띄우고 강 건너 안개 낀 새벽 풍경을 특유의 스케치로 그려오더니, 드디어 채색이 완성되었다며 초청하기에 즉시 달려갔다. 그의 풍경화는 본 일이 없었으므로 설레는 마음이 더 가득했다. 30호(90.8cm×72.7cm) 크기의 대작이었다. 짙은 안개의 강둑 너머 고목이 즐비한 작은 마을에 소담한 집 몇 채의 안온한 정경이 새벽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몽환적인 이상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네 권의 시집을 출간했는데 시인의 짙은 감성이 그대로 배어 나왔다. 절제되고 아껴왔던 시정(詩情)이 수묵담채처럼 새벽 강을 따라 질펀히 흘러 눈길을 비끄러매었다.
그는 늘 생각의 두께가 그림의 색칠로 침윤되기를 기원하는 구도자의 붓질로 화폭을 채운다. 은 목련꽃 아래 한 소년이 팔에 얼굴을 괴고 사색에 잠기는 찰나를 그린 아주 작은 작품이다[그림 1]. 이 소년이 곧 화가의 자화상이 되고, 보는 이의 감성에 이입되어 일체를 이룬다. 나른한 봄날의 한때가 침묵 속에 머물러 있다.
깨끗함과 따뜻함 보여주는 화가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제일 큰 갈등이 일어날 때는 작품을 고르는 순간이다. 작가의 이력이나 다른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없을 때는 더 곤혹스럽다. 눈과 가슴을 일렁거리게 하는 작품들이 안 보일 때 그 답답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늦겨울 인사동을 거닐다가 한 화랑 전시대에 걸린
을 만났다[그림 2]. 인도 위에는 잔설이 아직 희끗희끗한데,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진 곳에서 하얀 어미 닭과 노란 병아리 세 마리가 한낮의 햇빛을 즐기는 이 그림은 무한한 희열과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사실 이 그림을 만나기 전까지 권사극(權師極, 1959~ )이란 화가를 알지 못했다. 한참을 서서 그림에 빠져 있는데 화랑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 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우중충한 겨울이 싫어서 빠른 봄맞이를 해봤다”는 주인과 함께 을 찬찬히 감상했다. 무성한 개나리꽃이 농염한 가지에, 파릇한 잎도 슬며시 내밀고 어미 닭의 흰색과 옅게 찍어놓은 붉은 벼슬, 병아리의 붉은 발목이 거슬리지 않게 조화를 이루었다.
인사동 화랑들은 우리나라 그림시장의 방향타 같아서 화력이 짧은 아마추어들의 작품을 내거는 일이 없다. 그만큼 전시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다. 주인이 내민 몇 권의 도록으로 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보았다. 대부분 꽃을 그린 그의 작품들에서 받는 공통된 느낌은 ‘따뜻함’과 ‘깨끗함’이었다.
마음에 든다면 주저 말고 수집
이 화가의 그림에서는 꽃들의 잔향이 뿜어져 나온다. 발로 열심히 다니며 찾다 보면 비록 화력(畵歷)이 짧고 값비싸지 않아도, 예술성 높은 작품을 찾아내고 수집하는 기회가 온다. 무명의 작가가 훗날 미술계에 우뚝 서는 작가로 성장해 작품 가격이 치솟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품을 만나면 주저 없이 수집해야 한다’는 수집가들의 격언이 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
나의 경우, 미술품 수집의 우선순위는 오랜 시간의 깊은 관찰이다.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보면 볼수록 괜찮은 그림을 보면 작가의 이력과 다른 작품도 보게 되고, 화랑 주인이나 다른 수집가의 조언도 참조한다. 작가를 직접 찾아가 그의 예술관도 경청해본다. 작가가 교만하거나 작품이 기교에 차 있으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모두 한 번 쯤 꿈꾸는 것 중 하나가 전원생활이다. 아침이면 지저귀는 새 소리에 눈 뜨고, 지나는 바람이 건네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말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계절이 그린 그림에 취하고 ….
그래서 필자도 경치가 좋은 양평에 깨 밭을 사서 깨가 쏟아지게 농가주택을 지었다. 집을 설계하며 어디에 무엇을 둘까, 신바람 나는 고민으로 행복했다. 무슨 나무를 심을까, 화단은 어떻게 가꿀까, 채마밭엔 무엇을 심을까?
밭 가운데 지하수가 나오게 해서 채마밭에서 자란 열무와 배추 오이를 따서 바로 씻어 넣고 김치를 담그면 그리 사근사근하고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풋고추와 깻잎 상추 그 외 자생하는 민들레로 쌈을 해 먹고 취나물 도라지 더덕까지 식탁에··· 산천이 숨 쉬고 있었다. 고추장, 된장 만 있으면 반찬거리는 지천이라 풍요로웠다.
밭에 자라는 토마토는 밭을 일구다 목이 마르면 따 먹고, 수박도 참외도 몇 구루 심고 단 호박은 울타리를 타고 오르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단감이 익고 호두나무에도 열매가 맺히고 계절마다 열매로 분주했다.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땡감을 쳐다만 보아도 행복했다. 두 마리 개와 같이 노는 재미도 있었다. 텃밭에 있으면 놀자고 와서 제 등을 비비곤 했는데 힘도 장사라 밭을 망가트리곤 벌을 서기도 했다.
그런데 힘이 부쳐갔다. 풀이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지, 벌레가 순식간에 나의 피부를 곰보빵처럼 만드는지 몰랐다. 비오면 주변을 살펴 흙을 보충하고, 낙엽 쓸어 담기가 전투작전을 방불케 하고, 눈 오면 치우는 일이 버겁고, 말벌을 조심해야 하고 가끔은 뱀이 현관에 들어와 있고 밤이면 산에서 뭔가 내려와 등불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곤 했다. 낮이나 밤이나 적막하기가 산 속 같았다. 전원에 살면 신선처럼 여유 있으며 느린 삶이 영혼을 살찌우리라 했지만 실상은 쓸쓸했다. 마음 맞는 친구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형제도 바빴다.
제주도는 따뜻해서 사계절 밭에 상추와 배추가 자란다. 생선 좋아하는 사람에겐 낙원같이 느껴질 것이다. 형제들이 함께 간다 해도 친구들까지 몰고 갈수는 없는 거리이다. 잠깐 머무르며 즐기는 곳으로는 좋겠지만 이주는 심한 외로움을 몰고 올 것 같다. 젊어서 힘도 좋고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다면 시도할 만도 하다. 도전하기엔 기력도 부치고 머리도 늦게 돌아가는 우리 시니어들에겐 모험이 될 것 같다.
2011년 초, 건설회사 임원을 끝으로 30여 년 간의 직장생활을 갈무리하고 시작한 제2의 인생. 협상의 ‘파워’에 매력을 느껴 건설회사 임원에서 협상전문가로 변신, 이참에 아예 협상전략연구소까지 차린 남자가 있다.
예순 넷의 나이에 분쟁 해결과 협상 전문가, 협상 관련 강사로 활약 중인 1인 기업가 최점수(64) 씨다. 탄탄한 경험과 지식, 기술로 협상의 무대를 휘어잡는 그의 힘은 현업에서 쌓은 풍부한 노하우가 바탕이 됐다.
◆10년간 쌓은 분쟁해결 경험이 ‘협상가’ 꿈 자양분
10년 전쯤이다. 최 씨가 협상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건설현장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많이 발생하는데 부도, 지분 다툼, 영업 등과 관련해 이익 다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임원이었던 그가 맡은 첫 ‘사건’은 산재사고가 난 유족과의 협상이었다. 안전사고로 직원이 죽었기 때문에 그 어느 협상보다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유족들로부터 욕도 많이 얻어먹었죠. 회사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보상밖에 없는데 사내 규정상 정한 금액과 업계 관례를 고려해 적절한 수준으로 보상금액을 책정하는 게 어렵거든요.”
그는 우선 회사에서 정한 수준보다 낮은 금액을 유족에게 제시했다. 다각도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철저히 준비해 제게 유리한 쪽으로 대화를 끌어갔다. 처음엔 이게 기술(스킬, skill)인지 몰랐는데,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고 대응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런 것들이 다 협상의 스킬이더란다.
그가 협상에 빠져든 건 그때부터였다. “처음 상대방을 대할 때는 약간의 두려움도 있긴 해요. 그러나 일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재미가 있고 결과가 좋으면 보람이 상당하더라고요. 제 성향과도 잘 맞았고요.”
산재사고로 인한 보상 협상, 기업간 콘소시엄 분쟁, 하도자 관련 분쟁, M&A 협상, 조사 관련 대처법, 구매 협상, 연봉 협상, 해고자 협상 등 최 씨는 재직 중 200건 이상의 각종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했다. M&A와 관련해 서원벨리골프클럽 인수, 한국도로공사 정보통신공단인수위와 같은 굵직한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다.
◆협상 콘텐츠의 비즈니스 상품화
최 씨는 10년간 해왔던 분쟁 해결, 이게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확신했다. 퇴직 후 본격적인 창업 준비에 돌입, ‘마이구루’라는 지식유통 업체에서 ‘지식창업’ 분야 교육프로그램을 한 달간 공부했다.
이곳에서 자신이 가진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아웃풋으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파워포인트도 마스터했다. 그리고는 2011년 5월, 6개월여 동안 창업 컨설팅과 홍보마케팅을 지원하는 서울시 장년창업센터에 입주했다.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받고 마케팅과 경영학 전문가에게 코칭을 받으면서 구체적으로 판매할 상품을 확정지었다. 그는 상품의 경쟁력을 확신했다. 협상은 일상에서 누구나 접하게 되며 비즈니스상에서는 숱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기업에서 인사, 영업, 구매, 분쟁, 산재보상, 인수합병 등 협상할 대상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개입하는 단계에 이르면 소송비용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여러모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요. 분쟁이 생겼을 때 변호사가 아닌, 회사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역할이 사내에 존재해야 합니다. 기업 담당자에게 분쟁 해결과 협상에 대한 기술을 교육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승부할 상품이었습니다.”
그 해 9월에 자료 수집과 독서, 파워포인트 및 스토리텔링 작성 등의 준비를 거쳐 10월에는 콘텐츠 개발을 최종 완료, 곧바로 한국협상전략연구소를 오픈했다. 지식창업이라 별다른 창업 자금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콘텐츠를 구성할 정보를 얻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공부에 투자했다.
한국협상전략연구소는 기업에 종사하는 해당 실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분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교육시키는, 일종의 양성기관의 역할을 한다. 주요 대상은 기업의 법무·총무·영업·기획 담당자들이다. 수익 모델은 강연 수익이 주가 된다. 갈등과 문제가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가 조정하는 코칭도 병행한다.
협상의 정의, 원칙에 의한 협상, 협상 경험 나누기, 협상 태도 테스트, 협상 실습 등의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협상전문가 양성 교육프로그램은 5시간 분량으로 구성된다. 최 씨의 강의를 들은 이들은 한결같이 입심도 좋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니 귀에 쏙쏙 들러붙는다는 반응이다.
최 씨는 “우선 일 자체를 즐길 수 있어 훨씬 행복하다”고 말했다. 생활비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건설회사를 다니면서 운 좋게 재건축 등에 대한 정보가 밝아 노후를 위한 재테크는 물론 연금 준비까지 다 마쳐놨단다.
그는 앞으로 기업에 협상 및 분쟁전문가가 상주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자문기구 조직을 구상 중이다. “국내는 협상전문가들이 많이 부족한 편이에요. 협상전략을 교육하는 기관도 대표적인 곳 1~2군데 정도이고요. 전문가를 키워 협상 분야를 하나의 직업군으로 만드는 초석을 다지고 싶습니다.”
“리더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다.”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그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세계적 리더의 공통점은 바로 추종자들이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추종자를 거느려야 진정한 리더라는 것이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를 만든 것은 과연 어떤 교육이었을까.
그의 아버지인 경제학자 아돌프 드러커는 법률가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국무역성 장관을 지낸 인물로, 1916년 6월 19일 당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머니 캐롤라인은 의학을 전공했는데 프로이트의 강의를 수강한 제자였고 음악도였다. 한마디로 대단한 부모인 셈이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자녀교육에 있다. 드러커의 부모에게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그의 부모는 특이하게도 누가 오든지 어린 드러커에게 악수를 하게 했다. 실제로 드러커는 9살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악수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피터야, 오늘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란다. 그분과 악수를 하거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제보다 중요한 분이에요?”
“그래, 황제보다도 중요한 분이란다.”
당대의 정신분석학자를 황제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아는 아버지의 통찰력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가 뿌리내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돌프 드러커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스승이자 후원자가 되어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산실 역할을 했다.
드러커의 부모는 바로 현대 인간관계에서 가장 요구되는 ‘관계지향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접할 수 있었다. 내게 그 경험은 실질적 교육이 되었다.” 관계지향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목표지향성을 지닌 사람(대부분 남자들이 여기에 해당)과 달리 다른 사람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끔 기꺼이 돕고 헌신하는 역할(여성이 여기에 해당)을 한다고 한다. 드러커는 어린 시절 부모의 관계지향성 덕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토마스 만, 조지프 슘페터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등 당대의 유명인들과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 이처럼 부모의 관계지향적 면모는 훗날 드러커가 인적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성향으로 이어져 그 역시 세계적 경영자들과의 폭넓게 교류하게 된다. 후일 그가 잭 웰치, 모리타 아키오(소니 창업자) 등 당대의 경영인뿐만 아니라 칼 폴라니(‘거대한 전환’의 저자), 마셜 맥루언(‘미디어의 이해’ 저자) 등 수많은 석학들과 교분을 나누는 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강점으로만 성과를 올릴 수 있다. 단점을 보완하려 하기보다 강점을 강화하라.” 피터 드러커의 이 말은 자기계발의 오래된 명문이다. 직장인이라면 이 말을 한두 번쯤 들어보았을 터다. 즉 아돌프 드러커의 관계지향성은 아들 피터가 ‘경영학의 아버지’가 되게 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