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던 인사, 특히 고령 유명인의 이름이 인터넷에 회자되면 ‘혹시 돌아가셨나?’ 생각한다. 몇 년 사이에 생긴 달갑지 않은 버릇이다. 지난 일요일 밤, 그렇게 김금화 만신의 부고를 접했다. 23일 새벽에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많은 매체가 실시간으로 그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지만 그저 됐다 싶었다. 88년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으니 고인은 참으로 편하겠다. 만신의 지인에 따르면 22일 점심식사 뒤 호흡 곤란으로 119 구급대에 실려 인근 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콩팥 기능은 이미 망가진 후였고 혈액 투석으로 고비를 넘기는 듯했으나 다음날 새벽에 운명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인 김금화 만신.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큰 무당이라지만 신앙적 의미를 떠나 우리 무속을 문화예술의 경지로 이끈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굿판은 곧 무대였고, 세상과 소통하는 신명 나는 오페라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수차례 외국 공연을 하면서 한국의 미와 전통예술을 전파해온 '한류의 초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김금화 만신과 마지막 인터뷰를 한 기자가 바로 나인 듯싶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018년 2월호에 게재한 ‘만신 김금화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다’란 제목의 기사가 최근 인터뷰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뜨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와의 인터뷰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연세가 많으시고 몸도 쇠약했다. 혹여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하면 도리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설 참이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김금화 만신의 무릎은 말을 안 들었고, 입 속 상황도 좋지 않았다. 특히 얘기하거나 먹을 때 고생이 심했다. 오전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손님들을 만나 점을 쳤으니 힘들게 뻔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재를 고사하면 물러나야지 싶었다. 다행히 인터뷰에 응했고 사진작가와 함께 자택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너무 시간을 뺏지 말아달라”는 김금화 만신의 말로 시작한 인터뷰. 지금까지 많은 기자를 만나와서일까? 취재 왔다는 말에 늘 했던 옛 얘기를 꺼냈다. 일반적으로 아는 김금화 만신의 이야기. 무병을 앓고 외할머니에게 신을 받고 큰무당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인생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선생님 그런 거 말고요. 다른 얘기 해주세요. 요즘 사는 얘기요.”
막상 요즘 얘기하라고 하니까 말문이 막혔나 보다. 그렇게 첫 만남은 20여분만에 끝이났다. 두 번째에 만나 어릴 적 꿈에 대한 이야기와 소소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과 함께 하는 만신 말고 여자로서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인터뷰의 의도 자체가 ‘신 말고 김금화’였으니 나름 신선했던 인터뷰가 됐다. 그가 나온 잡지가 발간 됐을 때 또다시 찾아가 만났다. 달콤한 케이크도 사 들고 말이다. 같이 밥도 먹고, 떡도 나눠 먹었다. 김금화 만신을 3번 이상을 만났으니 복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입이 참 아플 텐데 기운이 어디서 나는지 많은 조언을 해준 기억이 난다.
김금화 만신의 근황을 접한 것은 돌아가시기 딱 한 달 전인 1월 23일. 회사 이메일로 누군가 간곡하게 김금화 만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잊지 말고 연락을 해보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아 이메일을 받은 상황을 전할 겸 김금화 만신의 일을 돌보는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장은 “현재 선생님께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병원 입원을 두 번씩이나 한 상황에 몸이 안 좋다”고 했다. 나라도 가서 만나겠다고 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조만간 슬픈 소식을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부고를 접하고 침착할 수 있었던 건 그때 걸었던 전화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무장 말에 의하면 곱고 예쁜 모습만 남기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나 또한 눈물 보다는 미소가 지어진다. 류머티즘으로 다 굽은 손가락이 펴지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던 무릎도 곧게 펴진 김금화 만신을 상상하니 말이다. 부디 꽃신 신고 사뿐사뿐 세상 소풍가시길 바란다.
예닐곱 어렸을 때부터 아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열두 살부터 무병을 앓고 열일곱에 만신(萬神)이 됐다. 내림굿을 해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金錦花·87) 선생의 무당 인생 첫 장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무당이 된 이후 세상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만사형통합니까? 크고 작은 인간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을 모신 지 올해로 71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질문을 받게 될 만신. 그녀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신의 목소리를 전해 듣는 거 말고 인간 김금화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18년 대한민국에 대한 축원은 덤이었다.
너무 시간 많이 빼앗으면 안 돼
만신 김금화 선생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대충 낮 12시 이후다. 공연이 있거나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오후 12시쯤까지 한나절. 김금화 선생은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이나 금화당(강화에 있는 김금화 선생의 굿당)에서 점(占)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만신이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이른 아침부터 점 보러 온 손님이 집 안에 앉아 있다. 예약 문의전화도 꾸준히 걸려온다. 무복(巫服)에 다양한 무구(巫具, 굿에 사용되는 도구)를 들고 춤을 추거나 작두를 타는 모습만 머리에 그려왔다. 무복은 특별한 날만 입고 평소 편하게 입고 지낸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무복 대신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었다. 인사를 나누고 잡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대뜸 김금화 선생이 물어본다.
“그런데 누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거야?”
“저요.”
오전 내내 손님을 받아서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힘드니 시간 많이 빼앗지 말아 달라 기자에게 당부했다.
“자, 갑시다!(웃음)”
만수대탁굿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10월 말, 김금화 선생은 생애 일곱 번째로 만수대탁굿을 성황리에 마쳤다. 황해도 지방의 재수굿(집굿)인 만수대탁굿은 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굿 중 가장 크다. 집안의 번창과 가족의 건강, 불로장생 등을 빌며 노인의 만수무강과 죽은 뒤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
“만수대탁굿은 굉장히 큰 굿이에요. 소 잡고 돼지도 두어 마리 올리고 말이지…. 첫째 날은 상산부군맞이하고 칠성, 제석굿을 해요. 다음 날은 일월성신을 맞이해서 솔문(소나무를 휘어서 만든 문) 앞에서 대화가 이뤄져요. 세태를 풍자한 사또놀이를 하고, 소 바치고, 도령돌기를 해요. 도령을 돌면서 칠성님한테 아들 낳게 해달라고도 하고, 명공(名公) 많이 달라고도 빕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동참해서 돌지 뭐. 그리고 나중에 굿이 끝날 때쯤 작두 타고, 대감놀이도 하고. 굿거리(극에서 장의 개념)도 마흔 거리는 되나봐.”
만수대탁굿은 무당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굿은 아니다. 큰무당 중에서도 일정 수준과 경지에 이른 무당에게 허락된 굿이다. 마흔 거리가 넘기 때문에 하루에 다 할 수 없고 최소 3일에서 5일 정도 기간이 걸린다. 특히 10년에 한 번, 무당 평생 세 번만 해도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데 김금화 선생은 일곱 번의 만수대탁굿을 치러냈다. 10년에 한 번이란 말에 못 가 뵈어 죄송하다는 말이 기자 입에서 절로 나왔다.
“왔으면 좋았을걸. 소 한마리 잡고, 막걸리도 많이 남았었는데. 굿을 크게 했어요. 소 잡는 것도 내가 삼지창으로 찍고 다 했어요. 제자들이 받쳐줘서 작두에도 올라가고.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는 거잖아.”
작년 치러진 만수대탁굿은 이제 마지마기라고 김금화 선생은 내내 얘기했다. 10년 후에도 꼭 다시 하셨으면 한다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흔든다.
“만수대탁굿을 할 때는 젊어지는가 싶었는데 요즘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못하니까 영 좋지가 않아요.(웃음)”
세상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운명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건넨 질문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일까?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4세 어린 나이에 시집간 이야기부터 호되게 시집살이하다 도망친 얘기, 장티푸스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일, 열일곱 살 신내림 받던 순간과 병에 걸린 한 사내를 낫게 해준 일화,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의 용호도라는 섬에서 했던 첫 대동굿의 감격에 대해서는 또렷이 들려줬다. 그 연세에 생생하게 당시 기분을 기억해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들은 차창 너머 풍경처럼 넘기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김금화 선생의 이야기다.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 혹은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녀의 일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만신 김금화가 아닌 자신의 걱정과 시름, 그리고 그것을 깨쳐내는 일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20여 분 지나자 김금화 선생이 시계를 봤다.
“나 지금 계속 말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질 거 같은데…. 힘들다. 어제 맞은 영양제 오늘 이러고 다 쓰겠다.”
다음에 만나 좀 더 편한 얘기를 했으면 하는 바람에 이만 자리를 무르기로 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자택을 찾았다. 밥도 함께 먹고 편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또다시 약속은 낮 12시 이후. 오전 점사(占辭) 보는 일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두꺼운 바지 차림이 예전보다 편해 보였다. 목소리도 밝았다. 그런데 최근 부쩍 입안이 개운치 않고 입맛이 없다고 했다.
“배가 고픈데 뭐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원래는 잘 먹었는데 요즘 입맛이 없어. 밥도 먹기 싫고, 식빵이나 구워 먹을까? 아침도 억지로 먹었어.”
이렇게 말해놓고 재차 방문한 기자가 맘에 걸리는지 숙성시켜놓은 감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며 손에 쥐어준다. 날씨가 좋지 않아 통 못 나갔던 새벽 운동도 이날만큼은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이라니. 운동하기도 쉽지가 않다고 했다.
“아침에 마스크하고 밖에 다녀왔는데 더는 못 나가겠다, 그럼. 좀 나가면 좋겠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어떻게 걸어.”
김금화 선생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이 굽은 지 5년이 됐단다. 당시 속 썩을 일이 있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결국 류머티즘으로 왔다. 안마라도 해드릴 생각으로 손을 만지니 얼음장같이 차다.
“손에 염증이 있어서 계속 좀 부어 있어. 어떨 때는 얼얼해, 이게. 류머티즘이 자가면역질환이잖아. 자기가 자기를 친다는 거 아니야. 자기 살이. 손이 못생겼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병원이 또 2층이라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못 가. 물리치료 받으면 조금 나아지지.”
그 사이 사무장이 식빵에 블루베리 잼을 잔뜩 발라 김금화 선생 앞에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단 것을 좋아했다지만 입속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입안이 되게 아프다. 너무 달아서. 단거 먹어도 아프고, 뜨거운 거 먹어도 아프고.”
사무장이 계란을 권했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식사시간이 돼 음식이 한 상 차려졌는데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러 가지 짧게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자신에 대한 소소한 질문이 어색한지 대답 이어나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신은 은퇴가 없나요. 드라마 ‘왕꽃녀님’처럼요?
은퇴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아니고.
외국에서도 점을 보러 오나요?
꽤 와요. 지난번엔 중국에서 사람이 왔어요. 한국 신이 몸에 들어왔다면서요.
오전에만 점사를 보시는 건가요?
네. 하루에 세 명도 보고 많으면 일곱 명도 보고 그래.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뭐… 그런 거 없어.
어렸을 때 꿈이 있었어요?
꿈 그런 거 몰라.
귀도 한번 안 뚫으셨네요.
그거 왜 뚫어 아픈데.(웃음)
젊은 여성들이 가끔은 부럽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짧게 대답했던 이전의 질문과는 달리 곰곰이 생각하다 기운을 내며 답했다.
“으이, 부럽지 않아.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뭐. 돈 한 푼 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을 오갔잖아. 그것도 비즈니스석에 타고, 대우받고, 돈도 많이 받아오고 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문화재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세월이 좋으니까 중요무형문화재지.”
집 안 벽면에 붙여놓은 사진을 찬찬히 보다 김금화 선생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한복 차림의 모습만 보다 양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35년 전인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야. 쉰세 살? 하와이대학교 초청을 받아 공연 갔을 때 찍은 사진이거든. 아무튼 사진들을 다 훔쳐가. 인터뷰하러 와서 가지고 갔다가 안 가지고 오기도 하고. 우리도 또 있다 보면 잊고.”
무당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 것 같은지도 물었다. 넘세(어린 시절의 김금화 선생의 이름)는 꽤 총명하던 아이였다.
“무당이 안 되고 공부 많이 했으면. 의사 아니면 검사나… 그런 거 했을 거야. 공부했으면.”
만약 그랬다면 시대를 선도한 검사 김금화로, 의사 김금화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곱고 당당한 얼굴이 꽤 어울렸을 것도 같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은 평생을 다른 이의 복을 대신 빌어주는 만신으로 살게 했다.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한 적 있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10여 년 전 연안부두에서 기자와 만나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나랑 같이 사진 찍고 우리 김금화 신어머니라고 안 했어?(웃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금화 선생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김금화 선생이 자신의 신어머니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요즘 꽤 된다는 설명.
“무속인들이 나하고 사진 찍고서는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침에도 어떤 여자가 왔는데 어떤 무속인이 김금화 만신이 자기 선생인데 무슨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많은 돈을 보태라고 했답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져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잘 안 한다고 했다. 자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란다면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괜찮지 그럼 어드래?”
끝으로 우리나라가 올해 잘될 수 있도록 축원의 메시지를 부탁했다. 김금화 선생은 매일 나라를 위해 축원한다고 했다. 나라가 편안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 기도드린다고 했다.
“2018년에는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밤늦도록 술 먹고 길에 넘어지고 싸우고 막 그렇게 하지 말고 착실하고 정말 아름답게 모두 하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서로 아끼고. 음식도 아끼고요. 너무 많이 해서 내버리지 말아요. 하늘이 내려다봅니다. 아이도 많이 낳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정에 3명, 4명 낳아서 나라에 좋은 일 하고, 아이 안 낳고 자기들 혼자서만 살면 어떻게 해. 늙어서도 외로울 거 아냐? 가정과 사회에서도 좋은 일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상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가 드리는 축원입니다.”
올해 우리나라가 어떤지 물었다.
“괜찮지 그럼, 어드래? 안정도 되고….”
나라 만신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안정된다는 말에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 가녀린 노구가 지탱하고 섰다. 평소 조용히 행동하다가도 무대 위에 서면, 작두 위에 오르면 신빨(?) 날리는 젊은 만신으로 되살아난다.
올해도 7월이면 어김없이 서해안 배연신굿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공연과 굿판이 만신 김금화 선생의 몸짓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김금화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기자는 간절한 마음이다. 10년 후 그녀의 여덟 번째 만수대탁굿을 꼭 볼 수 있기를 말이다.
신라의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이곳에서 맞는 새벽은 늘 벅차다. 문무대왕의 산골(散骨)이 뿌려진 동녘 끝 감포바다로부터 잘생긴 신라 화랑의 자태를 연상케 하는 감은사지 탑, 너른 황룡사지, 계림의 신비로운 숲과 왕릉들. 어디든 지그시 눈감고 앉아 있으면 그윽한 고도의 기운이 감지되는 곳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이 ‘과연 어디서 새벽을 맞을 것인가?’ 이다. 어디서 또 신라의 새벽향취를 맡아볼 것인가?
글·사진 남정우 사진가 njkor@naver.com
잠들지 않는 바다 - 감포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
감포의 새벽은 경건하다. 동이 트기 전, 대부분의 동해안처럼 일출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어느 누구도 들뜨지 않는다. 해안 곳곳에 켜놓은 촛불과 새벽기도를 나선 만신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예사롭지 않은 이 풍경은 해안에서 200m 떨어진 검고 긴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적 158호로 지정된 이 바위의 이름은 대왕암이다.
668년, 부왕 무열왕시대의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마저 정벌한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국토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왜구의 침범까지 빈번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었다. 유언대로 유해는 대왕암 바위에 뿌려졌다.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은 대왕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견대 주변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이곳에서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대왕암이 있는 해안을 뒤로하고 929번 도로를 따라 500m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잘생긴 두개의 탑이 모습을 나타낸다. 감은사지다. 문무왕은 대왕암에 자신의 산골처를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지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절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이듬해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 마침내 절은 완공되었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신문왕은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지에서는 두 가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너른 양북면 들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다. 두 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국보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는 금당의 바닥구조이다. 특이하게도 불전 밑으로 빈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공간이다.
경주 시내유적 답사 - 대릉원, 첨성대, 반월성, 계림
서기 65년 어느 봄밤, 왕은 궁궐 서편의 숲에서 울리는 닭울음 소리를 들었다. 늦은 밤 닭이 우는 까닭이 궁금했으나 밤이 깊었다. 다음 날 아침, 왕은 신하를 시켜 숲으로 가보게 했다.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흰 닭 한 마리가 그 밑에 앉아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왕은 아이를 거두었고, 알지(閼智)라 이름을 붙였다. 금궤짝에서 태어났다 하여 김(金)씨 성을 붙였으니,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이후 이 숲을 신성히 여겼고, 닭계 자를 붙여 계림(鷄林)이라 불렀다.
경주 시내 유적의 중심은 첨성대를 중심으로 반월성, 계림, 인왕동 고분군, 대릉원으로 이어진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안압지와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쉬엄쉬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경주의 풍경 중 독특하고 인상적인 것이 왕릉이다. 거대한 고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대릉원과 인왕동 고분군이다. 대릉원은 23기가 모여 능원을 이루는 곳으로 황남대총과 미추왕릉, 천마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된 천마총에서 신라 왕릉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인왕동고분군은 계림 서편 너른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내물왕릉을 비롯해 5기의 고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13기 가량이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첨성대와 계림 사이의 공간에서 바라보면 멀리 선도산 자락과 어우러져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산과 능이 마치 한 무리처럼 보인다. 반달처럼 생겨서 반월성이라고 불렀던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자리했던 곳이다.
동양 최대 사찰 황룡사지와 분황사
경주시내 동쪽에 자리한 황룡사지는 총 면적이 2만 여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선덕여왕 12년(643)에 완공되었으니 공사 기간만 무려 90년이 걸린 국가의 명운을 건 대공사였다. 애석하게도 1238년 몽고 침략 때 전각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주춧돌과 초석 등이 남아 절의 규모와 전각의 자리를 유추해볼 수 있다. 황룡사에는 지금 시대로 말하자면 경주의 ‘랜드마크’가 있었다. 높이가 무려 80m에 달했다는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경주박물관이나 경주타워에 가보면 옛 경주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디오라마를 볼 수 있는데, 황룡사 구층목탑의 위용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해볼 수 있다. 황룡사터 초입에는 분황사가 있다.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분황사는 황룡사지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라 중심의 평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이곳을 거쳐 갔고, 독특한 양식의 분황사 석탑이 남겨져 있다. 분황사 석탑은 보기 드문 모전석탑인데, 모전석탑은 중국의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탑을 말한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탑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국립경주박물관과 안압지
천년고도 경주의 명성에 걸맞게 경주국립박물관은 중앙국립박물관에 이어 최고의 규모와 전시품을 자랑한다. 모두 3개의 전시관에 2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8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그야말로 신라의 모든 문화가 압축되어 있다. 전시실의 외부에는 경주 인근에서 옮겨온 국보 38호 고선사지 석탑을 비롯 석조유물들이 경내 곳곳에 가득하며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도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시주로 바쳐진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에밀레 에밀레하고 들린다 하여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이 종은 경덕왕 시절 부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 모습만으로도 유려하며 장중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비천상과 연꽃 등의 조각이 섬세하다. 경주박물관에서 길을 건너 조금만 북쪽으로 가면 안압지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 674년에 못을 파고 679년에 궁궐을 만들어 동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신라의 인공 정원이라 불릴 만한데, 삼국사기 문무왕시대를 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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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먹거리 시내 쪽에서 많이 찾는 것이 쌈밥으로, 대릉원과 첨성대 인근에 쌈밥집이 즐비하다. 보통 1인당 1만원 정도로 푸짐하고 먹을 만하다. 보문호 가는 길 북군동의 맷돌순두부도 많이 찾는 경주 먹거리다.
>>남정우(南晶祐) 사진가·여행작가. 스튜디오 COREE 대표
광고사진을 시작으로 출판, 잡지 등의 분야에서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19번 국도 도보여행이후 백두대간 종주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를 집필했다.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아 관련 모임을 운영했으며, 문화재청과 수자원공사 등 사보에 기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