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하고 안락한 태안(泰安)이다. 지명이 이번 여정의 테마를 말해준다. 수국이 활짝 피어났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부드러우면서도 쨍하게 다채로운 색감을 머금었다. 여름꽃과 모래 사구,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과 해변이 오감을 깨운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름은 뜨겁다. 오랜 시간 파도에 침식되어 켜켜이 쌓인 해안 절벽 아래의 동굴 안에서 태평하게 바라보는 파도는 더위를 잊게 한다.
길 위에서 만난 보랏빛 버베나 물결
태안으로 가는 들판에서 얼핏 보랏빛 꽃물결을 발견한다. 더러는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지만, 도로 옆 들판의 버베나 군락지를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 아직 입소문이 덜 난 따끈따끈한 신상 여행지다. 이럴 땐 길 위에서 기분 좋은 득템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버베나 판타지라고 불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태안기업도시 가든스퀘어가 이 지역을 개발하면서 첫 번째로 만든 약 1만 평 규모의 정원이다.
버베나는 여름에 가장 예쁜 꽃이다. 잎과 줄기에 까칠까칠한 털이 덮여 있어서 옷에 잘 붙는다. 버베나 꽃밭을 다녀오면 옷자락 어딘가엔 버베나의 흔적이 남는데 이 또한 혼자만의 즐거움이다. 흔히 한 철 꽃을 보는 것과는 달리 버베나는 여름에서 가을까지 피어나는 다년초 식물이다. 버베나 꽃물결 속을 걷다 보면 산책로를 따라 야자나무도 식재되어 이국적인 평원의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도 맛본다. 단아한 동산에 들어앉은 파고라에서 내려다보는 버베나 들판은 잘 꾸며진 수목들과는 비길 수 없는 힐링을 안긴다.
날씨나 빛이 뿌려지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도 신비롭지만 보랏빛 버베나는 푸른 하늘 아래서 더 잘 어울린다.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드넓은 보랏빛 들판이 더없이 몽환적이다. 태안을 향해 달리는 여행자들에게 선물하듯 너른 들판 위에서 우아하게 넘실대는 보랏빛 세상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입장료 무료.
수국이 피었다, 팜카밀레의 수국수국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수국이 소담하게 피었다. 어딜 가나 수국의 탐스러움을 보여주느라 바쁜 계절이다. 태안군 남면에 위치한 팜카밀레는 약 1만 2000평의 부지에 다양한 종류의 허브와 수국이 피어나는 허브 정원이다. 땅을 일구어 무더운 계절에 피워낸 수국 정원에 파묻히고, 은은한 허브 향에 심신 안정을 얻는 공간이다. 수국은 쌍떡잎식물로 6~7월경에 피어나 8월까지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여름꽃이다. 혹시 수국 철을 놓쳤다 해도 사철 끊임없이 피고 지는 갖가지 허브가 정원을 채우며 매력을 발산한다.
수국 정원의 모든 색감은 선명하다. 초록의 싱그러움이 물씬한 여름 색감 그 자체다. 푸르름 속에서 잉크빛 수국이 눈에 들어온다. 울긋불긋한 꽃과 달리 서늘하게 푸르거나 보랏빛을 띤 수국의 느낌이 신비롭다. 수국은 처음 피어날 때는 흰빛을 띠다가 푸르거나 자줏빛으로 변하고 핑크나 붉은색으로 변한다. 이는 토양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는데, 토양이 산성이면 푸른빛 수국이 피어나고 알칼리성이면 붉은빛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팜카밀레는 대체로 푸른빛을 띠는 수국이 많은 편이다.
정원 가득 푸르름을 뿜어내는 청량함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허브 가든은 수국 정원과 라벤더 정원을 비롯해 어린 왕자 정원, 워터 가든 등 10여 개의 테마로 조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메타세쿼이아 수국길은 나무와 꽃의 어우러짐이 아름다워 누구나 한 번쯤 걷게 된다. 바로 옆의 풍차 전망대에 오르면 정원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향을 바꾸어 서면 서해안 몽산포 해변도 아스라이 보인다.
꽃길을 호젓하게 거닐고 싶다면 별수국이 피어난 길이 있다. 담벼락 아래 뾰족한 별 모양 겹꽃의 별수국 무리가 꽃길을 이룬 조붓한 산책길이 예쁘다. 정원을 꽉 채운 탐스러운 수국이 키만큼 차올라 숲인 듯싶다가도, 호숫가를 빙 둘러서 나지막이 피어나기도 했다. 수변에 앉아 수국을 바라보며 고요함 속에 빠져보는 평안함이 얼마 만인지. 풍성한 꽃무리를 보며 마음속 깊이 자신을 어루만진다. 자연과 공감하며 꽃과 함께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아름답고 순수한 시간이다.
몽글몽글 아늑한 시골 감성에 푹 파묻혀 온 마음이 정화된 기분이라면, 이젠 실내 정원에서 쉬어볼 차례다. 다양한 허브차와 아로마오일 족욕도 이곳에서 즐길 만하다. 입구의 애견 동반 가능한 명인 제빵소를 지나, 허브 향 속에서 일상을 벗어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펜션도 정원 중앙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태안 해변길 따라 파도리 해식동굴
한여름에 서늘한 동굴 속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일, 태안에 가면 가능하다.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한 태안 바다엔 파도에 침식되어 거칠고 기기묘묘한 형태로 생겨난 동굴이 있다. 최근 SNS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한 태안 소원면의 파도리 해식동굴이다. 파도리(波濤里)라는 지명은 고려 문종 때 ‘거친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나서면 되돌아올 수도 있다. 파도리 해식동굴에 가려면 물때를 꼭 알아보고 가야 한다.
먼저 파도리 해변을 지나 울퉁불퉁한 갯바위와 뾰족한 암석 위를 걸어가야 한다. 바다를 옆에 두고 지나다 보면 서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푸른 바다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만난다. 발밑으로 동글동글한 몽돌이 구르고, 몽돌에 부딪히는 물빛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짭조름함을 동반한 바람까지 한여름의 멋과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해변 길이다. 10여 분 걷다 보면 숨겨진 듯 나타나는 두 개의 동굴이 보인다.
동굴을 떠받치듯 내려앉은 암석 기둥이 신비롭기만 하다. 문득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구엘 공원 광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떠오른다. 아득히 오랜 세월을 거친 파도리 해식동굴의 기둥이 가우디 건축의 일부와 비슷하다면 생뚱맞은가. 자연미와 예술성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영겁의 세월을 견디어온 동굴 앞에서 현대인들은 찰나의 사진을 담느라 분주하게 셔터를 누른다.
국내 최대 규모의 모래언덕, 신두리 해안사구
수만 년의 바람과 모래가 만들어낸 자연 그대로의 풍광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신두리 해안사구 모래언덕은 국제슬로시티 태안의 독특한 생태 명소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었다. 다양한 지형이 섞인 모래밭을 거닐기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A, B, C로 나뉜 산책 코스에 모래 구릉을 걷기 편하게 길이 나 있거나 편리한 나무 데크가 준비되어 있다.
유려한 모래언덕을 오르다 보면 군데군데 선명하게 붉은 해당화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모래밭 길은 ‘해당화 동산’, ‘억새골’, ‘순비기 동산’, ‘곰솔 생태숲’ 등으로 각각의 코스가 이어진다. 바람과 햇빛이 강한 곳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의 터전이 해안사구다. 사구 습지와 모래밭을 뒤덮은 풀과 억새 동산을 걸으며 이국적이다 못해 먼 나라의 사막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바람이 불어대는 언덕 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서해가 거칠 것 없이 탁 트여 고요하다. 신두리 해변은 해무가 짙게 피어오르는 아침 바다의 아련함이 꽤 분위기 있다.
서해가 빨라진다, 태안-보령 간 해저터널과 운여해변
2022년 충남 보령과 태안을 잇는 보령 해저터널이 개통되었다. 여행 귀갓길에 태안 방면의 해저터널 홍보관 전시를 보고, 직접 해저터널을 주행해보는 마무리 코스다. 터널 길이 6.9km 국내 최장, 세계에서 5번째로 긴 해저터널 덕분에 여행길 단축은 물론이고, 바다 밑을 달리는 두근거림을 맛본다. 특히 터널을 달리며 경관조명으로 바닷속 수족관이나 서해안 낙조 등의 감각적인 빛의 표현을 즐길 수 있다. 노을 무렵의 시간이 가능하다면 운여해변 솔숲 방파제의 반영도 챙겨보는 건 덤이다.
기후위기 대응 방법 중 하나로 도시농업이 떠오르고 있다. 도시농업이란 도시 지역에 있는 생활공간에서 농작물을 경작하거나 재배하는 것을 말한다. 옥상이나 베란다에서 상자 텃밭 가꾸기, 주말농장 운영 모두 해당한다. 2020년 기준 도시농업 참여자가 185만 명에 이를 정도인데, 특히 중장년에게 인기가 많다.
“남편이 퇴직 후 귀농을 하겠대요. 그런데 농사를 하나도 몰라요. 제가 배워서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번 아웃이 와서 퇴사한 후 텃밭을 가꾸고 싶었어요.”
4월 16일 서울 은평구 향림도시농업체험원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도시농업전문가 양성 과정’ 교육 첫날이었다. 도시농업에 관심을 가진 30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대부분 중년의 나이로 보였다. 텃밭은 마련했지만 어떻게 가꿔야 좋을지 몰라서, 교육 쪽에 몸담고 있어 도움이 될까 싶어서 등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자연환경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도시농업지원센터 알기
도시농업에 대해 알고 싶다면 도시농업지원센터를 방문해보는 것이 좋다. 도시농업인에게 필요한 지원과 교육·훈련을 하는 기관이다. 전국에 분포돼 있는데, 서울시 내에는 종로구·관악구·도봉구·강동구·금천구·양천구·서초구·은평구에 있다. 은평구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인데, 2022년 향림도시농업체험원이 은평구 도시농업지원센터로 지정됐다.
도시농업지원센터에서 하는 일을 알아보자. 먼저 기관마다 자체적으로 교육을 진행한다. 앞서 얘기한 ‘도시농업전문가 양성 과정’은 이론 40시간, 실습 40시간으로 총 80시간 교육이다. 도시농업 관련 법률 및 정책, 텃밭 조성 및 관리, 정원 과수, 작물 재배 등에 대해 배운다. 향림도시농업체험원에서는 조별로 텃밭을 제공해 실습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도시농업전문가 양성 과정을 수료하면 국가자격증인 도시농업관리사 자격증 취득 조건이 된다. 그 이후 도시농업 관련 국가기술자격증 9종(농화학, 시설원예, 원예, 유기농업, 종자, 화훼장식, 식물보호, 조경, 자연생태 복원) 중 기능사 이상 자격을 1종 이상 취득하면 도시농업관리사 자격증을 가질 수 있다. 도시농업관리사가 되면 주말농장, 도시농업공원 등의 관리 인력, 관련 교육 강사 등으로 활동이 가능하다.
또한 도시농업지원센터에서는 주민들을 위해 텃밭을 분양해주는 경우가 많다. 향림도시농업체험원에서는 3평짜리 텃밭을 210명에게 제공한다. 매년 4월에 분양받아 11월까지 이용할 수 있다. 경쟁률이 매우 치열하다. 동네에 나만의 텃밭이 생기는 셈이니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텃밭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꾸기 나름이다. 채소만 심어도 되고, 꽃씨만 뿌려도 된다. 배추, 무, 고추 등을 심어 텃밭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단다.
중장년에게 추천하는 이유
도시농업을 전문으로 하는 도시농부가 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자연 속에서 마음을 치유받으면서 도시 생태계를 보전하고, 사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서주봉 향림도시농업체험원 대표는 “100세 시대에 50~60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해야 하는데, 농업은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한다”면서 “일을 즐겁고 건강하게,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할 수 있다. 식물은 나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식물을 보살피다 보면 그게 또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향림도시농업체험원에는 도시농업관리사들이 활동가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텃밭 관리 멘토 역할을 하고, 가끔 강의도 한다. 농협에서 퇴직 후 도시농업관리사가 된 지 10년이 넘었다는 오영기 씨는 “원래 이곳에서 교육을 듣는 분들의 연령대가 높았는데 점점 젊어지고 있다. 그만큼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면서 “도시농업을 통해 단순히 먹거리 재배 이상으로 가치 실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스마트 팜 운영도 가능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전했다.
최효자 활동가는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전문가까지 됐다. 은평구에 거주하는 그는 상자 텃밭을 받으려고 처음 방문한 이후 현재에 이르렀다. 그는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과 땅을 같이 사서 농사를 짓고 있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워가고 있는데, 모든 과정이 재밌다. 친구도 생겨서 좋다.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더 편하고 얘기가 잘 통한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아무래도 관심사가 맞아서 그런 것 같고, 좋은 사람들인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Interview
서울 강남에 사는 ‘이세계농부’, “도시를 시골로… 나는 청개구리”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는 신기한 건물이 있다. 여름이 되면 초록 지붕이 생기는데, 자세히 보면 나무와 풀이 우거진 것이다. 옥상에 작지만 꽉 찬 정원을 조성한 사람은 유튜브 채널에서 활동 중인 ‘이세계농부’다. 그의 본명은 양달샘(50)으로 배우 출신이다.
옥상 정원은 최근 보수 공사를 마쳤고, 꽃과 열매가 개화하길 기다리고 있다. 사과나무, 포도나무, 호두나무 등. 이세계농부는 정원 곳곳에 심은 나무를 신이 난 모습으로 소개했다. 생태계의 원리까지 척척 말하는 그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나 다름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옥상 정원을 운영한 지도 어언 15년. 2009년부터 정성을 다해 가꿔온 곳이다.
현재는 경기도 고양 북한산 자락에 300평대의 텃밭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곳은 주말농장이라고 부른다. 도심 한복판에서 키우던 닭들도 그곳에서 자라고 있으며, 이세계농부는 더 넓은 땅에서 토양과 농사 기법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실험하고 있다. 여름이면 옥상 정원과 텃밭에서 결실을 맺는 열매들을 따 먹으며 한 해 농사의 행복을 만끽한다.
이세계농부는 자신의 농사 방법을 ‘이세계농법’이라고 부른다. 생태계가 공존하는 탄소순환농법에 자신만의 색을 덧입혔다. 이산화탄소는 식물의 성장에 꼭 필요한 존재지만, 대기 중으로 날아가면 미세먼지가 되고 산성비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탄소를 토양 속에 잡아두는 것이 핵심이다. 보통 낙엽 또는 풀을 활용한다.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탄소가 가득한 토양이다. 이세계농부는 자신이 개발한 ‘휴머스(Humus) 토양’ 만들기를 추천한다. 휴머스 지수란 토양의 비옥한 정도를 나타낸다. 휴머스 지수가 높으면, 농약 없이도 식물이 잘 자란다. 그는 “낙엽을 들춰서 부엽토를 보면 검은색 흙이 나온다. 유기물이 분해돼 생성된다”면서 “휴머스에는 지렁이, 공벌레, 톡톡이벌레가 필요하다. 이 미생물만 있으면 토양은 알아서 만들어진다”고 비법을 공개했다.
반면 친환경농업, 유기농 등에 대해 이세계농부는 “너무 그린워싱(친환경 위장술)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친환경농업이나 유기농에서는 농약을 안 쓰는 줄 아는데, 알고 보면 관행농법과 방식이 똑같다”면서 “아름다운 녹지를 위한다면서 도시에서 살충제를 많이 뿌린다. 그래서 꿀벌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벌레를 죽이는데 친환경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힐링’을 위해 도시농업을 하고자 하는 중장년들에게 그는 조사를 철저히 하고 농사를 시작할 것을 당부했다.
결론적으로 이세계농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생물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이다. 비옥한 토양을 마련하고 꽃과 나무를 심고 물을 잘 줬더니, 어느샌가 해충을 잡아먹는 익충 사마귀와 나비가 찾아왔더란다. 그리고 농약은 아예 필요치 않게 됐다. 자연에게 맡기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것을 자연을 벗 삼아 살다 보니 깨우친 셈이다.
“남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에 갈 때 나는 도시에 시골을 만들고 싶었다”는 이세계농부는 자신을 ‘청개구리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꿈은 도심 속 시골을 더 키워나가는 것이다.
“저는 물욕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땅에 대한 욕심은 있죠. 1만 평 이상의 땅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지금처럼 농사를 하면서 앞으로는 토끼, 양, 소 등도 키우고 싶습니다. 저의 최종 목표는 도심 속에 알프스 같은 초원을 만드는 겁니다.”
숲속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볼 수 있는 곳, 완주 경천면 싱그랭이 요동마을로 떠난다. 자연이 일상의 휴식 공간이 되어주는 싱그랭이 마을, 산속 가득 서늘한 바람이 쉬어가는 고적한 절집 화암사와 자연 생태 환경의 싱그랭이 에코 정원, 그리고 마을 주변으로 너른 콩밭이 펼쳐진 완주 싱그랭이 요동마을에서 순한 힐링의 시간을 맞이한다.
마을 입구에 들자마자 오래된 노거수가 대뜸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듯하다. 500년 넘도록 마을의 수호신으로 든든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다. 나무 그늘 아래엔 마을 어르신들이 한낮 일손을 멈추고 휴식 중이다. 마침 마을에서 만난 홍성태 싱그랭이 영농조합 이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싱그랭이 요동(堯洞)마을은 그 옛날 전라도 지역에서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 때 잠시 쉬어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장승길 옆으로 서 있는 커다란 시무나무는 표시목으로 20리마다 심었는데 완주 고산현이라는 지점에서 딱 8km 지점입니다. 여기에 돌 하나 던져놓고 ‘발병 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면서 나그네가 잠시 쉬었다 떠나는 곳으로,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헤진 짚신 하나 고을 어귀 나무에 걸어놓고 가는 풍습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신거(新巨)렁이 마을이란 이름으로 불렸죠. 그런데 신거마을을 지역 방언 등의 이유로 편안하게 부르는 대로 쓸까 어쩔까 투표를 했어요. 15년 전이죠. 그때 마을 주민들이 정감 있고 부드러운 어감의 싱그랭이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싱그랭이 마을은 사방으로 콩밭이다. 홍성태 이사가 설명을 덧붙인다.
“저기 콩밭에서 새를 지키는 아주머니가 보이네요. 주변의 모든 밭이 콩밭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곳이 산골이잖아요. 천수답이나 관개시설이 안 되어 있어요. 옛날부터 콩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수매가 줄고 콩값이 반 토막이 되기도 했고 판로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작게나마 두부 공장을 해보자 의견을 모아 매일 두부 만들어내기에 이른 겁니다. 완주는 로컬 푸드가 유명한데 우리 영농조합의 두부를 많이 좋아하십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콩밭식당은 환경부 인증을 받은 친환경 제조법으로 재배한 두부 요리 전문점이다. 천연 간수를 사용해 조금 거친 듯 고소한 두부로 만든 들깨순두부와 두부전골 등의 두부 요리가 일품이다. 노포 맛집 느낌의 깊은 맛이 난다. 소박한 밥상인 듯하지만 반찬 하나하나까지 모두 손끝 여문 솜씨로 정갈하고 맛깔나다.
싱그랭이 에코 정원의 자연 생태
마을의 느티나무와 콩밭길을 지나 화암사로 가는 길의 ‘싱그랭이 에코 정원’에서 잠깐 멈췄다. 완주의 생태 활동은 이곳 요동마을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아늑한 산 아래 야생화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싱그랭이 에코 정원 앞마당엔 제철 맞은 꽃들이 지천이다.
마을의 자연 생태와 역사 문화 보존을 위해 마련된 곳, 또한 관광자원으로도 활용되는 싱그랭이 에코 정원은 지속 발전이 가능한 자연을 가꾸어나가기 위한 공간이다. 150여 종의 야생화와 복수초, 댑싸리 등이 자라고 있다. 요동마을이 있는 경천면은 완주의 북쪽 지역인데 복수초 군락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전문성을 지닌 에코 매니저의 친절한 설명과 안내에 따라 식물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자연과 생태에 관심 있다면 자연 소재를 이용한 석부작(石附作) 만들기 등의 생태 체험도 가능하다.
싱그랭이 에코 정원은 주변 들판과 언덕에서 자라는 야생화가 자연스럽다. 정원 양옆으로 자리 잡은 두 개의 온실은 천장까지 온통 유리로 둘러싸였다. 자그마한 다육이와 꽃을 피운 화분들, 그리고 풀인 듯 자연스러운 식물들과 다양한 모양의 석부작들이 가득하다. 다른 쪽 공간은 씨를 파종하여 키워내는 육묘장이다. 도심에서 자라는 식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마을 사랑을 실천하는 주민들과 싱그랭이 요동마을 생태활동가의 땀과 노력이 엿보인다. 산골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생명의 신비로움과 자연 사랑을 이곳에서 느껴본다.
“초반엔 여러 가지 종을 키웠는데 이제는 몇 가지로 압축해가려고 합니다. 지금은 다알리아가 꽃을 피웠는데, 서리 내릴 때까지 이어지는 데다 번식력도 좋아 구근을 키워서 심었어요. 또 허브는 수입 희귀종이 많은데, 사실 저쪽 산모퉁이만 돌아가도 많거든요. 하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재배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채취 가공하고 방향제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죠. 5년 전부터 시작해서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차츰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잘 늙은 절집, 느린 발걸음으로 화암사
완주의 싱그랭이 마을에 간다면 가장 먼저 화암사 절집을 갈 생각에 설렌다. 싱그랭이 요동마을이 화암사가 있는 불명산 아래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마을을 거쳐야만 갈 수 있다. 화암사는 산속에 숨어 있다고 할 만큼 유난스러움 하나 없이 숲속 깊이 파묻혀 있다. 규모도 소박하다. 단청의 화려함 같은 것도 없다. 수수함에 먼저 마음이 당기는 절집이다.
불명산 화암사에는 신라 왕의 꿈속에서 부처님이 던져준 연꽃으로 딸 연화 공주의 병을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 연꽃이 한겨울 완주 깊은 산봉우리에 피어 있었다고 한다. 불심이 깊어진 왕이 연꽃이 있던 자리에 화암사(花岩寺)라는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절이다.
싱그랭이 에코 정원에서 마을길을 지나 산을 오르다 보면 가벼운 등산 코스처럼 이어진다. 주차장에서 입구의 연화 공주 정원 숲길은 1km 남짓으로 완만하다. 여기선 느린 발걸음이 어울린다. 산책하듯이 천천히 걷다 보면 불명산 숲길의 운치에 반하고 만다. 좁다란 숲길이 온통 풀섶이거나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해서 밀림인 듯 착각하게 하는 포인트가 간간이 나타난다. 물론 급경사의 험한 코스와 너덜길도 있지만 이럴 땐 수행하듯 조심히 걸으면 된다. 골짜기의 물소리와 절로 생겨난 작은 폭포를 지나 숲 사이로 화암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끼가 덮인 바위 절벽에 절집이 앉혀 있어서 우선 놀랄 수밖에. 그러나 천천히 돌아보니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잘 늙은 절’이란 말이 떠오른다. 불명산 화암사라는 현판이 걸린 보물 제662호 누각 우화루 누마루에 걸린 목어의 나무 질이 한참 나이 먹어 잘 늙은 절과 제대로 어우러진다. 절 마당을 중심으로 자리한 극락전, 적묵당, 우화루가 기품 있다. 고적하기만 한 누마루 너머 틈으로 푸르른 신록을 내다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바랄 게 무언가 싶은 순간이다. 우리나라 단 하나뿐인 아앙식 구조 건물 극락전 뜰에 털썩 걸터앉아 숲에 파묻힌 화암사를 내다보니 “아, 좋다”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온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화암사, 내 사랑’이란 시에서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행 정보
싱그랭이 요동마을 전북 완주군 경천면 경가천길 377/ 지번 가천리 892
싱그랭이 에코 정원 전북 완주군 경천면 경가천길 474
불명산 화암사 전북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 지번 가천리 1078
지리산 둘레길을 걷거나 수려한 산세에 파묻혀 보았다면 한나절쯤 호젓하게 고즈넉해보는 시간도 가져볼 만하다. 더구나 깊어가는 계절에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울창한 숲은 가슴속 깊이 풍성함을 준다. 지리산은 전남과 전북, 경남의 5개 시군에 걸쳐진 거대하게 넓은 면적의 웅장한 산이다. 이번에는 그중에서 전북 남원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있는 고을 남원. 남원에는 오래된 마을마다 아름드리 당산나무는 물론이고 곳곳에서 아름다운 숲을 본다. 여행길에 한나절 쉬어가기, 계절 따라 쉬어갈 이유가 달리 있겠지만 지리산 아래 남원골의 숲은 마을과 함께 있어서 따뜻한 정취를 전한다. 숲을 찾아가는 테마 여행이라고나 할까.
남원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멀리 들판 속에 섬처럼 숲이 자리 잡은 게 보인다. 100여 그루의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 서어나무숲은 그렇게 산과 들과 마을에 깃들듯 존재감을 보여준다.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 조화가 아름답다. 아름답기로는 올해의 아름다운 숲으로 산림청이 실시하는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기도 했다. (산림청이 (사) 생명의 숲 국민운동 • 유한킴벌리(주)와 공동으로 2000년부터 우리 생활 주변의 아름다운 숲을 찾아내어 알리기 위한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는 숲이 가진 경제, 환경, 문화 자원적 가치를 깨닫고, 숲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한 목적이다)
지리산 운봉 자락의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들판을 달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가 마을 골목쯤에서 멈췄다. 마을 속 논과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에 쭈뼛거리며 이곳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그럼 걸어가 보지 뭐 하고 조금 걸었다. 골목을 걷다가 보니 주민이신 할머니께서 마당에 앉아 혼자서 콩 타작을 하고 계셨다. 곁에 가서 나도 쪼그리고 앉아 서어나무숲을 물어보니 "아이고, 길을 잘 못 들었네, 저 짝으로 람천 둑길로 차를 몰고 가면 서어나무숲 쪽 가는 길이 있는데 기왕 여기로 왔으니 걸어서 요기로 넘어가 봐요"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대로 뒷문과도 같은 곳으로 넘어가니 계절의 청취가 가득 고여 있는 숲이 거기 있다.
빼곡한 서어나무숲의 세상이다. 숲에 바람이 불어 쏟아지듯 낙엽이 우수수 날린다. 발아래로는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나무의 뿌리발육이 드러나 있다. 숲속에 들어 친구들과 숲 놀이를 하는 사람들, 두 손 꼭 잡은 다정한 부부의 모습, 그 숲의 풍경이 된다. 나무의 줄기가 튼튼하여 근육질과 같다는 의미로 근육질 나무라고도 불리는 서어나무. 여름엔 숲 그늘이 15℃ 안팎으로 주민들과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제공하는 남원의 핫플이다. 숲에서 멀리 바라보면 지리산의 서북 능선이 흐른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에 속하는 마을이고 바래봉 둘레길의 출발지이다.
이백면 닭뫼마을 숲
서어나무숲을 나와 20분쯤 달리면 닭뫼마을이 나온다. 알을 품고 있는 닭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닭뫼마을은 1455년 단종 왕위찬탈 반대로 낙향한 순흥 안씨 조상이 이 마을을 이루며 만든 숲이다. 한적함과 고즈넉함이 최고다. 들판의 강한 북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그리고 마을을 지나는 섬진강 지류의 범람으로 인한 재난예방의 기능도 겸하는데 이런 숲을 비보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이 숲에서 떨어지는 낙엽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신성시한다고 전한다. 조상들의 지혜가 스민 마을 오솔길의 고즈넉함이 힐링을 불러온다. 느릅나무와 팽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70여 그루의 수목들이 주변 들판과 마을을 바라보는 듯한 정경이 느긋하고 푸근하다. 둑길 위로 거대한 나무들의 행렬이 아름다운 닭뫼마을 숲이다. 남원시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허브밸리로 가는 방향으로 있다. 남원시 이백면 닭뫼마을 숲이 우수상인 공존상에 선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남원 용성고등학교 숲
찾아가기 쉬운 남원 시내의 용성고등학교에도 아름다운 숲이 있다. 숲이 있는 학교로 매일 다니는 학생들은 그 아름다움이 그저 당연한 듯하다. 숲이 어느 쪽인가 물어보니, 숲요? 하더니 아, 저거요? 한다. 새롭게 조성되었거나 인공적 멋이 아닌 오랜 세월을 견뎌온 천혜의 자연과 사람의 보존 노력으로 나이 많은 나무들이 입구 한쪽에 숲을 이루고 있다. 푸른 노송과 삼나무, 메타세쿼이아... 봄이면 벚나무가 눈부시다고 한다. 숲이 있는 학교로 근처의 주생초등학교도 있다. 생명력 넘치는 나무와 숲이 있는 학교에서 여유와 창의성을 배우며 숲과 더불어 성장하는 아이들의 인성은 훗날 나무를 닮아가지 않을까 싶다. (2006년 아름다운 숲 제7회 우수상 용성고등학교 숲, 장려상 주생초등학교 숲)
자연과 공존하는 지리산 기슭 평지 사찰 실상사(實相寺)
가을의 지리산을 생각하며 실상사도 떠올리게 된다. 흔히들 사찰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거나 산 위로 올라가는 위치에 자리 잡는 게 흔한 예이다. 실상사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지리산 기슭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일단 절에 찾아들기 쉽다. 돌장승이 버티고 있는 입구를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곧장 사찰 내부에 들어선다. 이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경내로 입장하는 경험도 특별하다.
실상사는 통일신라의 승려 홍척이 창건한 사찰이며 사적이다. 전북 남원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실상사는 지리산 평화연대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인드라망 공동체. 모든 실상이 연결된 유기적 공동체라는 걸 가치로 창립되어 실상사를 중심으로 대안적 살림 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이기도 하다.
또한 국보와 보물이 많은 사찰이면서 생태화장실로도 유명하다. 요즈음의 좋은 화장지나 비데와는 사뭇 다른 생태뒷간이라니 무슨 말일까 할 것이다. 휴지나 물 대신 톱밥 뒤처리로 청결을 유지하고 배설물 발효 후 퇴비로 사용하는 생태적 순환 원리의 구현을 실천하는 일이다.
넓은 평지에 펼쳐진 오랜 건축의 멋을 일단 한눈에 둘러본다. 띄엄띄엄 아담한 전각들과 석등 사이로 웅장한 삼층석탑과 보광전의 고즈넉함에 차분해진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와 경내의 나뭇잎을 날리는 걸 보니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 실상사는 남원의 황금들판 한가운데 나지막한 담장으로 두르고 묵직하고 자비로운 기운을 퍼뜨리는 듯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승방 문고리에는 밭으로 나간 스님의 적삼 위로 실상사에서만 받아볼 수 있는 햇볕을 들이붓는다.
계절이 끝나가는 오래된 나무들이 절 마당을 내려다보고 지리산이 사찰을 에워싼 모습이 든든하다. 뒤편 텃밭 주변으로 노래처럼 국화꽃 저버린 겨울 뜨락에 /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미량만 골프장(美浪湾, 파72, 7208야드)은 2012년 12월 12일 정식 개장했으며, 하이난 강락원 골프장의 상수림 코스(파72, 7154야드)를 설계한 말레이시아 골프 설계의 대가 C. J. TAN(陈川源)이 디자인했다. 나무가 많지만 우거질 정도는 아니며,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실제 거리가 잘 느껴진다.
페어웨이가 기복이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코스다. 그린 기복은 많지는 않으며 55% 정도다. 그린 스피드도 최근 잦은 비로 8피트 정도였다. 본격적인 겨울 성수기가 되면 스피드는 9로 맞춰진다고 한다.
하이커우 신흥 명문으로 떠올라
2015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클럽하우스도 완전하지 않았으며 호텔도 건설 중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또한 홀의 배치가 조금 달라졌다. 당시에는 B코스와 C코스로 불렸는데 이제는 A코스와 B코스로 바뀌었으며, 홀의 위치도 모두 바뀌었다. 완전히 다른 골프장을 보는 듯하다. 이곳은 하이커우 메이란국제공항에서 40분 거리에 있으며, 하이커우시 중심에서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 접근성이 매우 뛰어난 골프장이다.
120개 객실을 갖춘 5성급 호텔이 온천과 함께 있어 휴식과 힐링의 골프에 매우 적합하다. 페어웨이와 그린이 모두 벤트 그래스로 4계절 남쪽 지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상급 잔디를 식재했다. 그야말로 골프를 아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호수와 벙커가 많고 홀의 낙차가 큰 곳이 많아 도전성과 재미를 더해준다. 2014년에 ‘중국 10대 우수골프장’(全国十佳非凡球场) 상을 수상했으며, A코스 9홀, B코스 9홀로 이루어져 있다.
아름다운 호수와 벙커로 어우러져
A2번 홀(파5, 527야드) 내리막 홀로 티잉 그라운드에서 페어웨이까지 낙차가 30m 이상이다. 페어웨이 왼쪽은 180야드 지점부터 벙커가 길게 이어진다. 260야드 이상이면 워터 해저드를 만난다. 오른쪽 역시 큰 호수가 있어 슬라이스가 난다면 여지없이 물에 빠진다. 물 뒤로 바로 이어지는 벙커들로 티잉 그라운드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이 그만이다. 260야드 뒤 왼쪽에 있는 큰 호수는 그린 왼쪽을 지나며 3번 홀과 공유하면서 멋진 뷰를 보여준다. 그린 60야드 앞에 있는 커다란 기름야자나무(油棕树)가 멋지다. 그린 공략 시 장애가 될 수도 있다.
A5번 홀(파4, 420야드) 티잉 그라운드 앞에 물이 있으며, 페어웨이 양쪽으로 벙커들이 있다. 오르막이어서 실제 거리는 450야드로 보아야 한다. 그린 주변도 벙커들로 둘러싸여 있어 파 세이브가 거의 불가능한 난도가 가장 큰 홀이다.
B2번 홀(파4, 385야드) 왼쪽으로 멋진 노란색, 주황색 옷을 입은 건물들이 이채롭다. 페어웨이 중간 왼쪽에 자리 잡은 기름야자나무와 그린 왼쪽에 있는 10여 그루의 종려나무(棕榈树)들이 홀을 더욱 멋지게 장식한다.
B8번 홀(파5, 516야드) 티잉 그라운드에서 140야드까지 멋진 물이 가로놓여 있으며,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벙커들이 놓여 있다. 오르막이 계속되며, 2번 홀에서 보았던 서양동화책에 나올 법한 이탈리아 양식 건물들이 멋지다.
곳곳의 벙커와 워터 해저드, 오르막과 내리막이 조화를 이루는 레이아웃을 보여준다. 이국적인 노란색 위주의 상가와 건물들이 이색적이며, 온천과 호텔이 함께 있어 라운드를 마치고 힐링과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한 코스다. 하이난성 하이커우에 온다면 절대 빠뜨리지 않아야 할 코스로 강추한다.
산림청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가 코로나19로 장기간 야외 활동에 제약이 있었던 고령자를 대상으로 숲속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번 숲속 힐링 프로그램은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와 주택관리공단 협업으로 진행되며, 주택관리공단에서 관리 중인 임대주택 고령자 약 300명을 대상으로 5~6월에 걸쳐 운영된다.
주요 내용으로는 ‘숲속 체조’(유명산), ‘오감을 느끼며 걷기’(산음), ‘휴양림 내 계곡 탐방’(대야산), 편백나무 숲 걷기(남해편백) 등의 프로그램이 15개 국립자연휴양림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이영록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장은 “이번 숲속 힐링 프로그램이 고령자분들에게 심신의 안정과 우울감 해소 등에 많은 도움이 되면 좋겠다”라며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는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회적 가치 구현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기관에서 고령자 대상으로 마음 치유를 위한 산림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해오고 있다. 경기주택도시공사(GH)는 지난 19일 가평군 경기도잣향기푸른숲에서 공공임대주택 고령자 입주민을 대상으로 ‘산림치유 힐링캠프’ 체험을 진행했다. 하남풍산 국민임대주택 고령자 입주민 20명이 경기도에서 운영하는 잣향기푸른숲에서 숲길 걷기, 나무와 함께하는 스트레칭, 명상 등을 체험했다.
합천군 농업기술센터는 교통약자가 전동 카트를 타고 황매산군립공원을 관람할 수 있는 ‘나눔카트 투어 프로그램’을 철쭉 개화기간 동안 운영한 바 있다. 70세 이상 고령자 동반 가족 등이 신청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한 담당자는 “철쭉 개화기간에 노모를 모시고 오는 가족들이 차량이 올라갈 수 있는 높이까지만 관람하고 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전통카트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의재미술관은 광주광역시 무등산 자락에 있다. 광주 사람들의 무등산 애호는 유난하다.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후덕한 산으로 친다. 흔히 대찬 줏대와 넘치는 예술적 풍정을 광주의 개성으로 꼽는다. 이는 무등산을 산소처럼 숨 쉬며 살아가는 지역민들에게 은연중 형성된 토착 정서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등산 하면 한국화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그는 무등산 산방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화가로, 다인(茶人)으로, 농업 교육가로, 실천적 도인으로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의재미술관은 의재의 웅장한 정신과 실천을 톺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초가을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춤춘다. 머잖아 조락할 신세지만 아직은 산목숨이라 기쁘다는 투로. 나무들의 초록 물결 사이로 난 등산로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나무와 등산객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었다. 간혹 의재미술관으로 입장하는 이가 있을 성싶지만 도통 기척이 없다. 미술관에서 노니는 재미가 등산에 못 미칠 게 있나? 그러나 어딜 가나 썰렁하기 십상인 게 미술관이다. 게다가 의재미술관은 없는 듯이 있다. 티 내어 모습을 드러내길 애써 삼갔다. 숨은 듯이 있는 숲속의 미술관이다.
다시 말해 이 미술관은 자연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무등산의 가족이 되기 위해 몸을 낮췄다. 애초 설계가 그랬다. 산보다 돋보이거나, 산색보다 튀거나, 산허리를 갉아먹는 식의 무례를 범하지 않을 설계를 했다. 덕분에 무등산과 좋은 사이로 지낸다. 이런 미술관이 어디 흔하던가? 중견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를 주도했다. 그는 도드라지거나 요란한 건축에 질색한다. 사람의 욕망과 기술이 자연을 타고앉아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미술관은 일직선으로 늘어선 3개의 건물로 구성했다. 전시실이 있는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었다. 건물의 생김새는 극히 모던하다. 노출 콘크리트와 강화유리, 목재를 조합해 세련미와 기능성을 구현했다. 기발한 디자인과 미학을 주조로 삼은 건물은 아니다. 언뜻 보면 차라리 요즘에 흔한 건축 유형이다. 그러나 뜯어보면 참신하다. 자연환경에 녹아들어간 조화로움과 생동감을 불어넣은 섬세한 디테일로 품격과 미를 동시에 잡았다. 이런 미덕을 평가받아 개관한 해인 2001년에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의재미술관은 의재를 기리기 위해 문을 연 사립미술관이다. 의재의 종손 허달재 화백이 재단을 만들어 설립을 주도했다. 흥미로운 건 광주시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점이다.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하고 막대한 건립 재원까지 협찬했다. 사립미술관 건립에 시가 물심양면으로 거들었다? 드문 경우다. 의재의 삶에 서린 오라가 사후까지 여론을 움직여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그림은 물론 덕망과 신망으로 본을 보이고 떠난 이가 의재다. 광주의 ‘큰 어른’으로 똑떨어지는 행장을 남겼다. 다재(多才)와 이타(利他)로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 광주 사람치고 의재의 됨됨이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의재는 남종화의 대가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동양화가 북종화라면, 느끼는 대로 그리는 동양화는 남종화다. 이른바 ‘사의’(寫意)를 표출하는 남종화풍이 성행한 건 18세기 조선 화단의 거두 윤두서, 정선, 조영석 등에 의해서였다. 이후 강세황과 추사에게로 그 맥이 이어졌고, 소치 허련에 이르러 남종화의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소치의 화풍은 그의 후손인 미산 허형과 남농 허건, 그리고 의재 허백련에게 상속돼 화려한 꽃을 피웠다. 20세기 이후 주로 소치의 혈육들에 의해 남종화의 전통이 계승된 셈이다.
“나는 차 한 모금만큼 향기로웠나?”
이제 본관으로 들어선다. 얼마 전 새 단장을 마친 건물 내부는 외부처럼 말끔하다. 벽면과 천장과 기둥은 흰 칠을 입어 환하다. 게다가 병풍처럼 가로로 널따랗게 펼쳐지는 전면 유리창으로 외부의 빛이 물살처럼 솰솰 들이쳐 한층 밝다. 밝기만 하면 무슨 재미? 운치는 무엇으로 돋우나? 유리창을 즐비하게 배치한 이유가 다 있다. 채광은 기본이고 덤으로 차경(借景 : 외부 풍경 끌어들이기) 효과를 거두고 있는 거다. 창 너머 나무들이 토하는 초록과 씽씽한 기세는 그저 본연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일 경우엔 맛깔이 다르다. 그림에 맞먹을 흥취를 야기한다.
전시실에서는 ‘문향(聞香); 인연의 향기를 듣다’전이 진행되고 있다.(11월 28일까지) 산수화, 사군자, 화조도, 서예 등 의재의 작품 34점이 걸렸다. 모두 쌍낙관(雙落款 : 그린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이 함께 들어간 낙관)이 찍힌 작품들이다. 의재가 지인들에게 그려준 그림들을 모은 전시회라는 얘기다.
현대의 서양화는 전위적이고 도발적인 작풍으로 사람의 굳은 상식을 전복한다. 기상천외한 발상과 쇼로 갈채를 유발한다. 이에 비해 오나가나 산수를 소재로 삼는 동양화는 저만치 홀로 핀 들꽃처럼 얌전하다. 고답적이라 따분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가, 푸대접이 다반사다. 요즘은 아예 찬밥 신세다. 전통 수묵화를 그리는 이 자체가 드물어도 너무 드물다. 이 점에서 국내 유일의 남종화 전문 미술관인 의재미술관은 전통 회화의 마지막 보루일지도. 의재의 그림에 관해선 토를 달 게 없다. 필치는 능란하며 드러나는 세계는 따뜻해서 아름답다. 별유천지다. 개결하며 유현하다. 나 같은 석두조차 설레게 하는 화풍이다.
의재는 그림에만 정신을 쏟진 않았다. 그를 지배한 이상과 상상은 광활했다. 심중에 ‘삼애’(三愛)를 품고 살았다. 애천(愛天)·애토(愛土)·애가(愛家)를 푯대로 삼았다. 춘설차를 보급, 대중으로 하여금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진실을 체험하게 했다. 그 무엇보다 그의 생각과 실천은 항상 일치했다. 농업학교를 세워 농사꾼을 양성하기도 했는데, 그를 찾아온 화가 지망생들은 반드시 농사일을 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을 의재미술관 지척에 있는 자그만 산방 춘설헌에서 도모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의재는 “나는 실패한 화가”라 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과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마 향기로웠던가? 얼굴이 붉어진다.” 말년까지 자신을 거울처럼 들여다봤던 것이다. 도란 대체로 자성(自省)으로 무르익는다. 자성엔 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를 도인이라 하고.
햇볕마저 좋다. 다음 주쯤 강화도에 한번 다녀올 참이었다. 고려산의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일 때다. 어느 곳이든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이지만, 불현듯 그 산하에 다가가고 싶을 땐 어쩔 수 없다. 강화도는 섬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땅이다.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남아 있을 만큼 오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곳. 뿐만 아니라 이제는 곳곳에 새롭게 생겨나는 공간의 매력까지 더해지는 중이다.
물이 빠져나간 진득한 갯벌 위로 갈매기 떼가 날갯짓하는 외포항은 한적하다. 바람을 맞으며 포구 앞에서 갯골의 물길을 따라 바라보는 외포리의 생업 현장은 담담한 듯 조용하다. 수산물 직판장은 한가로웠지만 짭조름한 젓갈 냄새가 자연스럽게 풍겨난다. 한가로운 섬에 드니 이렇듯 편안하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앞자리엔 바람 쐬러 나온 듯한 부부의 나란한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섬에서 얻는 휴식과 평온함의 풍경이다.
강화의 들길을 천천히 달리다 보면 진지나 요새를 만나고, 크고 작은 돈대가 나타난다. 외포항에서 5분쯤 달리면 나타나는 삼암돈대는 석모도를 마주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건너편으로 석모대교가 가로질러 있는 모습이 봄꽃 나무 사이로 보인다.
개화기 역사의 소용돌이가 스며 있는 강화 54돈대 중 하나다. 지금은 그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지만 4구의 포좌가 해안을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진지해진다. 인적 없는 자그마한 돈대 안은 적막하기까지 하다. 원형으로 축조된 돈대의 발아래로 바다가 유유하다.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봄꽃이 눈부시다. 무기를 보관하던 작은 창고인 듯한 입구엔 냉이꽃이 가득 피어났다.
여유롭게 바다를 내려다보고 석모대교 위로 오가는 자동차들의 꼬리를 따라가는 시선 끝에 또 다른 장소를 떠올렸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해보니 멀지 않다. 정보를 통해 진작에 알고 있던 동네 책방이다. 다음 주에 가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참에 가면 어떨지 잠깐 생각했다. 미리 연락도 해놓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찾아간다. 가끔은 사람의 만남도, 무심코 맞닥뜨린 여행지의 순간도 이럴 때 오히려 더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던가.
책방과 공방의 조화
호수처럼 너른 저수지 옆을 지나고 시골길이 깊어진다. 몇 개의 굽은 고갯길을 거치고 한적한 들판을 달린다. 이렇게 산골마을이지만 사실 강화읍에서는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다. 길 건너편으로 산 아래 조용히 앉혀진 연꽃마을의 우공책방이 보인다.
금속공예와 목공예 작가인 ‘공방장님’과 시인이신 ‘책방장님’이 그곳에 있었다. 차분하고 담백한 인상의 작가 부부. 색감이 고운 차 한잔 내어주신 책방장님은 일정이 있어서 곧바로 외출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의 결례로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친절한 배려를 보여주신 공방장 김찬욱 작가님께 고마울 따름이다.
“원래 글을 쓰니까, 그리고 책이 많으니까 그 책을 누구라도 보는 데 쓰고, 사람이 안 와도 책 갖다놓고 책방이라는 타이틀을 놓으면 재미있겠다 싶었죠. 사실 책을 사기 위해 오는 동네 사람은 드물죠. 대부분 어르신들이고, 요즘은 농번기라 논에 물 대기 바쁜 농사철이기도 하고요. 강화의 지인들이 오고, 지나가다 신기하다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가끔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책꽂이에는 아주 오래된 귀한 책들도 제법 많다. 절판된 책이나 오래전 책을 꼭 사겠다는 분도 있다고 한다. 8000권 넘는 책이 아래층과 위층으로 보기 좋게 가득가득 꽂혀 있다. 알음알음 동네 책방을 아끼는 분들이 책 주문을 하고, 우공책방의 독특함을 찾아서 먼 길을 오는 이들이 있어서 공감과 소통이 이어진다.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것을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실천하는 것,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독자와 호흡하며 산골 책방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담백하다. 각자의 커리어대로 하던 일도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현재는 멈추었지만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입구에 나무와 환경에 관한 책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엔 공방이 있으니까 나무도 있고 식물에 관한 책이 많죠. 책방장도 나무나 자연에 관한 책을 많이 선택하고 또 다양한 시집도 북큐레이션을 하죠. 자연에 관한 책, 시집은 특별히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책을 가지러 와서 얼굴도 보고 차도 마시고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판을 깔고 의미 있게 보내는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스치듯 말한다. 어쩐지 울림을 준다. 바이러스가 사라질 날이 언제일지.
고요한 힐링, 북스테이
또 하나, 이 책방의 멋과 맛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북스테이가 있다. 전망 좋은 책방 2층에 책 여행자들이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는 정갈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무엇보다도 조식과 석식이 제공되는데 어느 셰프의 상차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손맛 깊은 맛깔스런 밥상이다.
“음식 만드는 것은… 제가 자취를 오래 했거든요. 그러기도 하고 음식을 제대로 맛나게 만들어 먹고 싶은 생각이 항상 있었죠. 그래서 궁금하면 어머니께 여쭤보곤 했어요. 식당을 40년 하셨고 못 만드시는 음식이 없었지요. 같은 재료인데도 내가 만들어 먹을 때는 왜 엄마의 그 맛이 안 나는지 늘 궁금했어요. 북엇국은 왜 엄마처럼 뽀얗게 안 올라올까 전화로 물어보면 기름에 한 번 볶아서 끓여야 한다. 또 순서가 어찌되었느냐, 시래깃국도 양념 넣고 잘 주물러서 넣어야 맛있다 말씀해주셨지요.”
우공책방의 북스테이에서는 엄마의 손맛을 그대로 이어받은 밥상을 받을 수 있다. 산골 동네엔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 없어서 제공한 식사였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우공책방 북스테이의 푸짐한 고등어시래기찜이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힐링의 북스테이뿐만 아니라 우공책방에서는 목공예 작품을 만들어내는 체험도 가능하다. 작가의 예술적 감성이 스며든 작품을 배워볼 기회다. 책방과 공방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에서 따뜻한 나무의 질감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순하게 아날로그 정서가 발동되고 마음이 풍성해지는 여행 감성을 일깨운다.
자연, 나무, 목공예, 예술, 우공이산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주문받은 작품을 계속 다듬고 있었다. 깊은 손맛처럼 진심이 느껴지는 공방장님의 묵묵한 인상이 책방 이름 우공이라는 글자와 일치하는 느낌이다. 그런 내적 진중함이 만들어내는 목공 작품들이 책방 코너에 진열되어 있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산 아래 책방 마당, 데크를 지나 한편에 자리 잡은 공방장님의 작업장은 와우~ 신세계다. 나무와 금속을 다루는 갖가지 기계 장비들과 공구들이 빼곡하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 잘 갖추어진 작업장은 뿌듯함이다. 우와~ 하며 놀랄 수밖에. 참죽나무로 만들어낸 책갈피부터 우리에게 친근한 빵도마도 만들어내는 곳, 절로 목공 작업이 확 당긴다.
책방지기의 묵직한 내공으로 배려받은 잠깐의 시간, 그 진중함으로 산과 바다라도 옮길 수 있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모습이 그려진다. 더디 가더라도 내가 주체가 되어 하고 싶은 일 속에 있는 것,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쓰려는 것이 또렷이 보일 때 부럽다.
일어서는데 김찬욱 작가님이 한마디 던진다.
“적석사도 들러야죠? 3분입니다.”
고려산 기슭의 가파른 언덕 위 사찰 적석사에서 내려다본 청정한 연꽃마을, 그곳에 우공책방이 있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 77-10(고천리 217-10) / 고려산 낙조대 적석사 가는 길목
최근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전 세계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19가 장기간 이어지리라는 진단이 의료계에서 거듭 나오고 있는 지금, 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이루려면 기존과는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한 상황. 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한국형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지역에 안착해 주민들이 좋은 일자리를 체감하는 게 정부의 목표이자 지역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는 양천구를 책임지고 있는 김수영 양천구청장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직접 일자리와 양천구 개발의 미래상을 들어봤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지난해 7월 대통령 직속 일자리 위원회에서 지방정부를 대표하는 지역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목소리를 대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는 각 지방정부에서 시행되고 있는 우수한 일자리 정책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중앙-지방정부 간, 지방-지방정부 간 협업을 강화하는 소통의 창구 역할이다. 양천구는 2019년 119개 사업에 7231개 일자리 창출 목표를 수립해 119개 사업, 68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과를 이뤘다.
“일자리는 더 이상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닌,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핵심적인 복지 영역입니다. ‘일자리가 곧 복지’인 거죠. 질 좋은 일자리 창출에 힘써 다양한 계층이 체감하는 내실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는 모두의 바람이자 희망입니다.”
중장년층 일자리 확보를 위한 다양한 노력
김 구청장은 50대 이후의 중장년층을 위한 양천구만의 일자리 지원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양천구의 어르신복지과 ‘인생 이모작 팀’이 중장년층을 위한 여러 솔루션들을 기획 중이다. 그리고 50대 독거남들이 사회에 다시 진출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는 ‘나비남 프로젝트’,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의사, 간호사, 영양사 등 전담 팀이 직접 방문해 건강관리를 해주는 ‘백세건강 돌봄 사업’ 등 세대별 맞춤형 복지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외 양천시니어클럽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장년층이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게끔 다양한 정보 제공 및 취·창업 지원을 위한 양천50플러스센터를 2021년 7월 개관할 예정이다. 또한 ICT 기술을 독거노인 및 취약 계층에 도입해 디지털 취약 계층과의 정보 격차를 줄이고 고독사를 예방하는 신중년 일자리 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예를 들어 ‘ICT 기반 돌봄 서비스’는 신중년 ICT 케어 매니저들이 AI 스피커를 활용해 독거 어르신의 고독사 예방 및 신속한 위기 대응 등의 돌봄 서비스를 수행하는 일이다. 더불어 조리사 자격을 갖춘 신중년들이 어린이집의 대체조리사로 활동해 급식 공백을 최소화하는 서비스인 ‘대체조리사 지원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 지정
양천구가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됐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양천구가 선정된 배경에는 먼저 ‘연의목공방’이 서울시 자치구 목공방 중 규모가 제일 크며, 목재 관련 박사학위가 있는 외부 강사를 인력풀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지자체에서 목공지도사를 직원으로 채용해 직접 운영하는 것도 높이 평가받았다.
“양천구는 주거 지역이 전체 면적의 약 72%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베드타운으로 흔히 목동을 얘기하면 대입 전문학원이나 목동 아파트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입시학원 중심의 목동에서 평생학습 중심의 양천구를 만들기 위해 오목공원 내 창고로 방치돼 있던 공간을 목공예 체험장으로 조성한 것이 연의목공방의 시작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7월 산림청에서 전국적으로 공모한 ‘목재교육 전문가 양성기관’에 지원하였으며, 지정을 받았습니다. 전국 총 44개 기관에서 신청했는데 6개 기관만 선정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양천구죠. 앞으로 목재교육 분야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국가자격증반도 운영할 계획입니다. 개강은 곧 할 예정입니다.”
12월부터 개강할 목재교육전문가는 산림청에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한 기관만이 배출할 수 있다. 6개월 과정으로 운영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목재교육 분야의 전문지식·기술습득 및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면 목재문화체험장, 강사 활동, 학교 방과후 교사 및 마을 학교 강사, 소창업 등이 가능해진다. 양천구에 목공방 마을 1호가 머지않아 탄생될 것으로 기대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마음 치유는 공원에서
일자리를 못 구하는 일도 사람의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가혹한 생존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코로나19다. 김 구청장은 자칫 몸과 마음이 삭막해질 수 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삶의 질’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 따라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여가를 보내는 대신, 쾌적하고 안전하게 ‘쉼’을 누릴 수 있는 공원을 추천했다. 양천구는 이러한 방향성에 맞춘 다수의 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양천구 면적은 17.4k㎡로 이 중 주거 지역이 71.8%인 12.5㎢입니다. 녹지는 23%인 4㎢로 그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며 전역에 크고 작은 공원 104개소가 조성되어 있어 힐링하기에 좋은 환경이죠. 특히 연의목공방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양천도시농업공원을 작년 4월에 개장했는데, 7000평 규모에 농업체험학습장, 친환경텃밭, 야생초화원, 생태연못 등이 마련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삭막한 도시 환경을 개선함은 물론 마을공동체 사업과도 연계해 건강, 교육, 공동체 개선 등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이끌고 있는 중입니다.”
양천도시농업공원에서 수확한 채소는 각 동의 취약 계층과 어르신 사랑방에 기부하거나 양천푸드마켓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된다. 작년 한 해 동안 기부된 채소들은 300kg이 넘는다. 공원을 가꾸는 재미가 정서적 위안과 함께 공동체 정신을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2022년까지 연의목공방 맞은편에 제2의 도시농업공원을 하나 더 개장해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균형 발전을 위한 대규모 사업들
“양천구는 강남권과 비강남권을 말하는 서울시의 축소판처럼 목동과 비목동 간의 지역 격차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균형 발전에 대한 밑그림을 구상했고 민선 7기를 열면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이 균형 발전을 위해 구상한 ‘H-Plan’은, 양천구의 큰 개발 계획을 통해 동쪽(목동)과 서쪽(비목동)이 균형 발전을 이루고 상생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정책 사업이다. 미래 양천의 30년 발전을 위해 주민들과 약속한 내용이기도 하다. 우선 동쪽에는 중소기업 혁신 성장 밸리를 조성하고 서쪽에는 서부트럭터미널을 개발해 도시 첨단 물류단지를 추진할 계획이다. 남쪽은 신정차량기지를 이전 및 개발해 문화 상업 복합 시설을 유치하며 북쪽으로는 국회대로와 차도를 지하화해 지상에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신정3동의 서부트럭터미널 개발은 운영사인 서부T&D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해 그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경전철 목동선도 서울시와 정부에서 재정사업으로 추진하기로 발표한 이후, 국토교통부 국가교통위원회의 심의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의 승인이 끝나면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 다음 절차가 진행될 것입니다. 워낙 큰 사업들이라 임기 내에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의 먹거리 사업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추진해나가려고 합니다.”
자발적인 착한 소비 운동에 감동
김 구청장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이후 양천구민들에게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 구청에서는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어려워지자 힘들어하는 소상공인을 응원하기 위해 ‘착한 소비’ 캠페인을 시작했다. 동네 단골집에 미리 ‘착한 선결제’를 한다거나 포장 주문을 하거나, 1+1 구매를 해서 주변 이웃과 나누자는 ‘착한 소비자’ 운동이 그 내용이다.
“현장에 나가 보면 손님이 너무 없어 힘들다는 사장님이 많은데 ‘주민들이 이렇게 착한 소비 운동을 해주시니 그래도 버틸 힘이 난다’고들 하셨습니다. 그중 한 식당 사장님은 주민들이 방문 포장도 하고 선결제도 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자신도 단골 미용실에서 선결제를 하는 착한 소비자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정부에서 재난지원금, 새희망자금, 소상공인 신용보증 융자 지원 등 여러 가지 정책들을 통해 소상공인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일시적인 지원보다 단골손님들의 응원과 소비가 더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사실 ‘착한 소비’ 캠페인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사업입니다. ‘나도 힘들지만 우리 이웃을 위해 함께 이겨내자, 힘내자’ 하면서 서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동참해주시는 주민들을 보면참 감사한 마음도 들고, 사회를 움직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주민들에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니어 구민을 위한 행정
최근 김 구청장이 관심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시니어 구민을 위한 디지털 격차 해소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국민 10명 중 8명이 유튜브를 이용하고, 한 달 평균 30시간이나 시청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뉴스가 가장 많은 채널을 묻는 질문에 50대와 60대의 절반 이상이 유튜브를 지목할 만큼 가짜 뉴스에 노출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거짓 정보에서 진짜를 가려낼 수 있도록, 중장년 어르신들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해줄 ‘디지털 문해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은 로봇과 시니어를 연결하는 일도 하고 있다. 관내 어르신들의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교육용 로봇 사업을 도입한 것이다.
“어르신 복지관 3개소에 얼굴과 음성 인식이 가능한 카카오톡 교육 로봇인 ‘리쿠’를 40대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손님들이 비대면 주문을 선호하고, 사업주의 인건비 부담도 적어 매장마다 늘어나고 있는 무인단말기 ‘키오스크’ 사용을 어려워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패스트푸드점 주문, 기차표 발매, 영화관 티켓 발매, 무인발급기 이용 방법 등을 알려주는 교육용 키오스크를 복지관에 설치하고 관련 강좌를 개설할 예정입니다.”
김 구청장은 또한 ‘스마트폰 사용 기초 과정’을 시작으로 유튜버로 활동할 수 있는 ‘1인 크리에이터 교육’, ‘시니어를 위한 빅데이터 교육’ 등을 실시해 다가오는 스마트 미래 시대에 신중년들이 당당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진행형의 인생 2막
“보통 정년이라고 해서 퇴직하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직업에서는 은퇴 후를 ‘인생 2막’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계속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더 일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김 구청장은 양천의 미래 30년을 위한 굵직한 사업을 많이 추진하고 있다. 그런 사업들을 꼼꼼히 챙기면서 양천구민들을 위해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밝혔다. 50대 중반의 신중년인 김 구청장이 생각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은 뭘까. 그녀는 나무와 같다는 말로 비유했다.
“울창한 산길을 걷다 보면 주위에 나무가 참 많은데, 이 나무들의 나이를 겉만 보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무는 우리처럼 나이를, 이마나 눈가에 주름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나무 속에 나이테로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봄이 되면 모든 나무가 푸른 잎을 꺼내는 것은 똑같죠.”
김 구청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성해지는 나무처럼 나이 들수록 더욱 울창하고 푸르른 나무가 되어, 누군가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런 포용력과 배려심을 키우는 게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큰 나무처럼 양천의 미래를 책임지며 자신의 나이테를 깊이 새기고자 하는 그녀의 소망이 어떤 봄을 맞이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얼마 전 박수근 그림 한 점을 강원도 양구군에서 사들였다는 기사가 났다.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 시리즈 6점 중 한 점이다. 구매 가격이 무려 약 8억 원이다. 시골 재정이 어려운데도 이러한 과감한 결정을 한 양구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해 방학이나 휴가철에 자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지구촌 사람들 삶의 모습이나 환경을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힐링도 하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경관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마다 찬란한 문화유산은 자랑거리다. 여행 중 어디를 가든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박물관이요 미술관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을 봐야 하고, 네덜란드에 가면 뭉크의 ‘절규’를 봐야 한다.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있는 곳에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렵다.
지난번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때 벨베데레 궁전을 들렸을 때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처음 그의 진품 ‘키스’작품이 공개된다는 거였다. 우리가 사진이나 서적을 통해서 많이 봐왔던 작품이다. 그런데 그의 진품이 100년 만에 전시되는 것이고 또다시 진품을 만나려면 100년을 기다려야 한단다. 이번에 못 보면 내 생애 진품은 구경도 못 하는 것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기념관에 도착하니 관람 인파로 가득하다. 요즘은 사진기술도 발달하고 복제품도 얼마든지 있는 시대다. 유튜브에는 클림트의 ‘키스’작품 제작 방법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들 따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쉽게 볼 수 있건만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품고 몇 시간을 기다려 진품 앞에 섰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과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작가의 고뇌와 영혼이 전이되어 오는 느낌이다.
또 한 번은 일본 다카마쓰 나오시마 지중미술관을 갔을 때이다. 모네의 ‘수련’시리즈 몇 점이 전시되어있다고 했다. 또 긴 줄을 서야 했다. 여긴 더 엄격하다. 한 번에 꼭 열다섯 명씩만 들어간다. 앞 조가 다 보고 나서야 다음 조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전시장은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로 빽빽이 붐비던 생각을 하면 천양지차이다. 모네의 진품 한 점이 지역경제에 큰 힘이 되는 셈이다. 유명 화가의 진품을 보는 것 자체만도 감동이었지만 그 쾌적한 공간에 그림 감상을 한 경험이야말로 특별히 대우를 받은 느낌이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라 사진 한 장 없지만, 눈과 마음으로 찍어온 감동이 지금도 짜릿하게 전해온다.
양구군이 박수근(1914~1965)의 대표작품 '나무와 두 여인' 을 7억 8750만 원을 들여 구매했다고 한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1년 치 작품구매 예산을 몽땅 투입해 27×19.5cm짜리 손바닥만 한 그림에 투입한 셈이다. 소장자도 박수근 미술관을 위해 1억 원의 통 큰 할인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특히 소설가 박완서 ‘나목(裸木)’의 영감이 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2년 당시 미군 기념품 판매점 내 초상화 부에서 박수근과 박완서가 있었다. 훗날 작가 박완서가 함께 일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박수근을 주인공으로 쓴 작품이 나목이다. 처음엔 잎도 없는 ‘고목’이라 생각했으나 그 그림이 시든 ‘고목(古木)’이 아니라 언젠가 싹을 틔울 봄날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었음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박수근의 이 그림은 당시 가난했던 서민의 삶의 모습을 연민의 시선을 담아 그린 그림이라 한다.
이러한 미술품이 장차 지역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문화 브랜드임을 믿는다. 그림 구매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설득한 미술관 관장과 이를 만장일치로 찬성한 양구 군청의 결정에 찬사를 보낸다. 이 작품은 오는 5월 6일부터 열리는 특별전 ‘나목: 박수근과 박완서’에서 선보인다고 하니 나도 꼭 찾아가서 관람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