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서늘해지자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인가보다. 지인들과 서울 곰탕 맛집 정보를 공유하다 멀리 나주곰탕 이야기로 흘렀다. 꿀꺽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주곰탕, 돼지국밥처럼 향토색 강한 음식은 타지역에서 먹으면 왠지 그 맛이 안 난다. 곰탕 먹으러 나주에 갈 거라는 내 말에 지인들이 숟가락을 얹었다. “나주곰탕 포장 부탁해.” 말은 이래도 그들도 안다. 나주곰탕은 나주에서 먹어야 제맛인 것을.
3味로는 부족한 맛의 고장
나주가 호남 물류 중심지였던 호시절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나주평야와 뱃길 교통이 편리한 영산강을 품은 지리적 여건 덕이었다. 100여 년 전 영산강 나루터에는 특산물과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그 문화가 ‘나주 3味’라 불리는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로 이어졌다.
나주곰탕은 우시장에서 나오는 머리 고기와 뼈, 내장 등을 푹 고아낸 장터국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부터 조선시대 관아인 금성관 앞에 큰 장이 섰다는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구경꾼들이 밥에 고깃국을 말아 후루룩 먹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나온 소 부산물로 국을 끓인 것이 나주곰탕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시초가 무엇이든 맛있는 곰탕을 지금 시대에도 맛볼 수 있으니, 식탐 많은 나 같은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나주 사는 지인이 “나주에 오면 곰탕보다 홍어를 먹어야죠” 하며 홍어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이다. 나주 3味에 연탄돼지불고기까지 야무지게 맛볼 생각이었다.
나주 여행의 시작은 곰탕으로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주행 KTX를 타면 아침 식사로 곰탕을 먹을 수 있다. 나주역에서 구도심의 나주곰탕거리까지는 차로 약 5분 거리다. 많은 곰탕집 중에서 주로 가는 곳이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이다. 하얀집은 개업한 지 110년이나 되었고, 노안집과 남평할매집은 60년 정도 되었다. 동네 주민에게 최고 맛집을 물어도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렵다. “어느 집에서 먹어도 맛있어요. 다만, 식당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요. 서울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고, 나주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요” 한다. 결국 직접 맛을 보고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나주곰탕은 설렁탕과 달리 국물 색이 맑다. 나주곰탕과 설렁탕 모두 소뼈와 고기를 푹 고아내는 방식은 같지만, 나주곰탕은 소뼈를 적게 넣고 양지나 사태로 육수를 내기 때문이다. 밥은 말아져 나온다. 밥이 담긴 뚝배기에 가마솥에서 펄펄 끓은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몇 차례 토렴한다. 밥알에 짭조름한 간이 배고, 뚝배기가 뜨끈해지면 살코기, 달걀지단, 대파를 올려 손님상에 낸다.
곰탕 맛은 국물 빛깔처럼 맑고 개운하다. 다진 양념을 풀면 칼칼해진다. 숭덩숭덩 썰어 넣은 고기는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곰탕 맛을 북돋는 김치도 중요하다. 숟가락 위에 밥, 고기, 잘 익은 배추김치 또는 깍두기를 올려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노안집의 배추김치는 감칠맛과 시원한 뒷맛이 일품이다. 사장에게 비결을 물었다. “김치 담글 때 여러 가지를 섞은 잡젓을 넣어요. 봄배추를 싹둑싹둑 썰어서 잘 익힌 김치가 최고 맛있지요. 봄에 또 오세요.”
곰탕 먹고 나주읍성 산책
곰탕거리 일대에는 고려시대 초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목’의 사적지들이 모여 있다. 조선시대 객사이자 나주목의 중심 관청이었던 금성관, 나주 관아의 정문 정수루, 나주목을 다스렸던 목사들의 살림집 목사내아, 고려시대 때 세운 나주향교 등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한 고려시대 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문과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1993년부터 나주읍성 사대문 복원 사업을 추진, 2018년 완공해 나주읍성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최근 나주향교 옆에 ‘39-17마중’이 들어서 구도심에 활기를 더한다. 39-17마중은 카페&와인바, 게스트하우스,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원래 나주 의병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지은 난파 고택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집을 한 젊은 부부가 매입해 ‘1939년의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라는 뜻을 지닌 39-17마중을 조성한 것이다. 부부의 눈에는 한·일·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한 근대 건축물과 마당의 아름드리 금목서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영화 세트장 같은 난파 고택은 게스트하우스로, 마당의 큰 창고는 벽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로 탈바꿈해 손님을 맞는다. 향교 담장이 카페 창가에 앉아 나주산 농산물로 만든 음료를 마시노라면 진짜 나주 여행하는 것 같다.
홍어 튀김 먹을 줄 알아야 홍어 고수
“홍어앳국 드셨나봐요.” 택시기사가 딱 알아본다. 홍어앳국 첫 경험을 이야기하자 “제대로 만든 홍어앳국을 드셨네요. 홍어 숙성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손님이 드신 앳국이 가장 많이 삭힌 등급 같아요. 나주 사람들은 그 정도 삭힌 걸 좋아해요. 앳국에는 4~5월에 나는 여린 보리 순을 넣어야 제맛이 나죠”라며 거든다.
홍어앳국은 홍어 뼈 육수에 된장을 풀고, 삭힌 홍어 내장과 보리 순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 홍어 애는 홍어 간이다. 생 홍어 애는 연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해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삭힌 홍어 애를 넣은 홍어앳국은 암모니아 향이 매우 강하다. 알싸한 냄새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린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지만 후각이 조금 마비되면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삭힌 홍어가 나주의 별미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시대 말 공민왕 때 왜구 침략을 피하고자 흑산도 사람들을 나주 영산포로 이주시킨 적이 있다. 흑산도 사람들이 생선을 잡아 배에 싣고 며칠 동안 나주로 건너오는 사이 생선들이 상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한 생선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맛있는 생선은 홍어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영산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홍어를 삭혀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산포는 곰탕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영산포 선창가에 40여 개의 홍어 식당과 홍어 판매장이 자리해 있다. 거리에서부터 홍어 삭히는 냄새가 풍긴다. 홍어요리 전문점에서 홍어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삼합, 홍어튀김, 홍어무침, 홍어찜, 홍어전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강해지므로 차가운 음식부터 나온다.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전, 홍어찜, 홍어앳국, 홍어튀김 순으로 먹어야 삭힌 홍어 맛에 차차 적응할 수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홍어튀김은 홍어 고수라고 자부했던 내게 굴욕감을 안겼다. 한입 먹었을 뿐인데 입천장이 까져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심 가득한 나주 4味 연탄돼지불고기
영산포 선창가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구진포 장어거리가 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던 곳이라 민물장어가 흔했다. 당시에는 장어 식당 열댓 채가 성업했다. 지금은 다섯 채 정도만 남아 장어거리의 명맥을 유지한다. 구진포 장어 원조집으로 알려진 신흥장어도 이제는 타지역 장어를 사용하지만, 오랜 내력의 깊은 손맛은 여전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나주 3味에 별미 하나를 추가한다면 송현불고기집의 연탄돼지불고기를 손꼽는다. 외지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맛집이다. 8년 전 송현불고기집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길가 허름한 식당 안에 손님이 많아 놀랐고, 주인이 연탄불 앞에 앉아 석쇠 위 삼겹살을 쉴 새 없이 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고기 맛이 바뀌었을까봐 걱정했는데, 고기 표면에 기름이 번드르르하고, 달고 짭조름한 맛은 그대로다. 가위로 고기를 직접 잘라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맛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 싼값에 배불리 한 끼 먹었으니 가성비와 가심비를 다 잡았다.
◇ 이색 명소 & 맛집 ◇
나주목사내아(금학헌) 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 최고 수장인 목사의 살림집이다. 건물 이름이 금학헌이다. 1825년에 건립된 ‘ㄷ’자형 전통한옥으로서 내아 1동과 행랑채 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 의복 무료체험과 한옥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성정을 베푼 목사들의 이름을 딴 온돌방에는 옛집에 걸맞은 전통가구와 침구가 갖춰져 있다. 나주시에서 운영해 숙박료가 저렴한 편이다. 나주시 금성관길 13-8, 09:00~18:00 관람료 무료, 061-332-6565
영산강 황포돛배와 영산포등대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농수산물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가 사라졌다가 30여 년 만에 관광용으로 부활했다. 영산포 선착장을 출발해 다시면 회진리 천연염색문화관 앞 풍호나루터까지 약 5km 구간을 왕복 운항한다. 영산포등대는 내륙 하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등대다. 지금은 등대 기능을 상실했지만, 밤마다 불을 밝혀 옛 추억을 되살려준다. 나주시 등대길 80, 10:00~17:00 월요일 휴무, 영산포 선착장 매표소 061-332-1755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와 도래한옥마을 산포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는 명품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있다. 수목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풍산 홍 씨 집성촌인 도래한옥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 한국 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유산 제4호로 선정된 도래마을옛집 등 조선시대 양반집이 많다.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산23-7, 09:00~17:00 입장료 무료, 061-336-6300
미국 메이저 방송사에서 우리나라 프로야구 경기를 중계하는 시대가 됐다. 코로나19가 변화시킨 세계의 모습이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이자 선수에서 감독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김성한(62) 선수를 만난 것은 지금 한국 프로야구의 시대에 다시 발견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4년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직을 마지막으로 프로야구계를 떠난 그는 여전히 피 끓는 선수로서의 열정을 지닌 채 나주에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언 40여 년이 되어가는 프로야구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을 모색 중인 그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야구에 대한 미련이 아직 있죠. 여전히 야구 해설을 하면 엔도르핀이 돌고 삶의 활력을 느낍니다. 언제든지 현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죠. 그러나 현실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현장을 떠난다는 게 처음엔 적응이 안 돼서 엄청 힘들었어요. 야구만 하다 보니 세상 사는 법을 몰랐죠.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다른 세상을 사는 기분이에요.”
나주에서 만난 영원한 타이거즈이자 프로야구 레전드 김성한은 마치 선수 때처럼 에너지가 넘쳤다. 그는 현재 나주 혁신도시의 명물 맛집으로 소문난 중식당 ‘The하이난’의 오너이자 CMB광주방송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전남 선거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인연으로 얼마 전 총선에서는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였던 정태호 의원의 유세를 돕기도 했다. 이런 그의 제2인생을 돌아보기 위해선, 삶의 결정적 순간이었던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을 때로 돌아가는 게 맞을 것이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주로 산을 다녔어요. 제가 중간에 잘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감독까지는 탄탄대로로 가다가 기아로 바뀌고 나서 경질되었죠. 해태 타이거즈의 문화와 기아의 문화는 달랐어요. 거기에 잘 안 맞은 거예요.”
김성한은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삶의 전부였고, 노력한 만큼 엄청난 성과도 거뒀다. 그렇기에 야구를 시작한 후 처음 맛본 엄청난 좌절에 너무 공허해서 사람들 만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겁나고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보이는 산으로 갔어요. 가서 생각 많이 했죠. 그리고 동병상련하듯 좌절 앞에 선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내 일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이런 정도 일에 공허함을 느껴야 하나 싶었어요. 그때 깨달은 게 좀 있었죠. ‘높은 자리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지내느라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제2인생 나주에서 열다
김성한은 과거부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살았으니 그걸 갚을 수 있는 사회공헌활동을 꼭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가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끝낸 후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을 맡은 건 그런 봉사를 행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먹고사는 일부터 해결해야 했기에 광주에 식당을 차렸다. 그렇게 5년을 운영하다가 한화 이글스로 간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수석코치로 1년여 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코치를 끝내고 나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나주에 야구팀이 있는 학교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다들 야구 열정은 넘치는데 해소할 방법은 없고, 야구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자체를 찾아갔죠. 야구팀과 야구장을 만드는 조건으로 KBO의 전국 유소년 야구대회 유치를 제안했고 나주시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이 과정에서 그는 나주 혁신도시의 존재도 알게 됐다. 야구팀이 만들어지면 노후에 여생은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는 건물을 분양받아서 중식당 ‘The하이난’을 차리게 됐다. 요식업은 절대 호락호락한 분야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The하이난이 체인점인 줄 알 정도로 성공한 상태. 그러나 김성한은 체인점을 만들 생각이 절대 없다고 한다.
“물론 제안은 있었는데 제 철학이 ‘절대 동업은 해선 안 된다’예요. 망해도 혼자 망해야지.”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인연
김성한은 사업을 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갖게 된 중요한 인연 중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이다. 그 일은 그가 우연히 나주 지역 주민자치위원장이 되면서 맺어진 만남으로 비롯됐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주민자치위원장을 해보시라, 동네를 위해 유명하신 분이 일 좀 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안 한다고 했더니 억지로 주민자치위원에 넣었어요.”
그 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어쩌다 위원장 선거 자리에 나갔더니 김성한을 알아본 사람들이 ‘위원장을 하려면 저 정도의 네임 밸류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치면서 그에게 위원장직을 맡겨버렸다.
“주어진 일인 만큼 적극적으로 활동했죠. 저는 정치에 관심이 정말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나주에 온다는 거야. 간담회가 열렸는데, 저는 식당 일이 바빠서 못 간다고 했어요. 난리가 났죠. 부위원장이 혁신도시에 건의할 게 있으니 빨리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건의는 부위원장이 하쇼. 모두 다 아는 내용일 테니까’라고 말했죠.”
그러나 하도 뭐라고 해서 결국 가긴 갔다. 일하다 말고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대충 빨간 점퍼를 걸치고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은 다들 정장을 입어 혼자만 후줄근해 보였다. 그래도 조용히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간담회가 끝나고 문재인 후보가 와서 악수를 하는데 저를 알아보곤 깜짝 놀라면서 ‘아니, 여기 사시냐? 주민자치위원장이시냐?’라고 묻더군요. ‘그렇게 됐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어쨌든 많이 좀 도와주십쇼’ 하더군요. 그때 그분을 처음 봤는데, 며칠 지나 전화가 왔어요. 도와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참 그걸 어떻게 냉정하게 못 도와준다고 그러겠어요. ‘잘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했죠.”
광주 금남로에서 홈런을 치다
그러나 그때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호남 민심이 안 좋을 때였다.
“김정숙 여사가 먼저 와서 터를 닦기로 했어요. 그리고 내게 ‘여사님을 모시고 다니는 일을 좀 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당시 김정숙 여사가 호남 구석구석 안 다닌 데가 없어요. 그렇게 인연이 됐죠.”
그가 호남 민심을 잡은 결정적 순간도 있었다.
“호남 민심을 얻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제가 옛날에 입었던 유니폼이 생각났어요. 빨간색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 그래서 문재인 후보가 광주 유세를 첫 번째로 오게 됐을 때, 일단 김응용 감독님께 SOS를 쳐서 자리에 함께 모셨고, 문재인 후보에게 제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고 모자도 쓰게 하고 방망이까지 쥐어줬죠. 금남로에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는데, 그 모습을 보더니 난리가 났어요.(웃음)”
문재인 후보의 연설이 끝난 뒤 마이크가 그에게 넘겨졌다. 그런데 당시 김성한은 정치 연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만큼 부담감이 밀려왔다.
“정치 연설을 들어보면 정치적인 시그니처 단어가 있어요. 저는 그런 말에 익숙하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누구를 비방하거나 타 후보 얘기는 안 하고, 문재인 후보가 너무 순수하고 사람이 좋더라, 이 정도면 대통령 자질이 충분하다, 그래서 좋아서 지지한다는 식으로 대본 없이 제 소신껏 말했어요. 그 후 기왕이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열심히 하게 됐고 유세차에서 지원 유세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 말하는 게 괜찮거든? 그래서 막바지 선거방송에도 출연해 22분간 혼자서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죠.”
NG 없이 한 번에 끝낸 TV 찬조연설은 문재인 후보도 보고 극찬할 정도로 공감이 가는 연설이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대통령 선거 돕다가 자신도 몰랐던 달변가 기질을 발견하게 됐다. 덕분에 감칠맛 나는, 그리고 사이다처럼 톡 쏘는 스피치 재능을 살려 한동안 강연 활동도 했다. 이후에는 CMB광주방송 해설위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야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고민 중
정치 얘기를 잠깐 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김성한은 철저한 야구인이다. 그가 요즘 생각하는 것도 우리나라 야구의 미래에 대한 일이다.
“이승엽, 양준혁, 이순철, 이만수 같은 멤버들이 뭔가 상징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한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부담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시급해요.”
그는 선동열 같은 대스타가 국정감사에 나가 수모를 당한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 분노를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일은) 총재가 안고 가야지. 총재가 ‘현장에 있는 대표팀 감독이 무슨 죄가 있소’ 했어야지. 사실 리더십이 그런 곳에서 필요하잖아요. 그때 현장 감독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에 너무나 실망했어요.”
사실 우리나라는 정치권과의 교류가 없으면 제도권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혹시 그에게도 공천에 대한 유혹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건 절대 싫어요.(웃음) 제안을 받긴 했는데, 잘못하면 내 인생이 파괴될 수 있으니까.”
그는 정치인은 사양이지만 야구와 관련된 일이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얼마 전 프로야구 초창기 멤버 몇몇과 만나 야구와 관련된 생각들을 나누기도 했다.
“좋은 의견을 많이 들었어요. 팀과 고향을 떠나서 야구 얘기를 하면 다들 공감하니까요. 대한민국 야구 역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거니까요. 지금까지는 다들 개개인의 삶이 바빴지만 이제 시작할 때가 된 거죠.”
너무 많은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김성한이 은퇴 후 학교에 야구팀을 만든 것도 야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와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그렇게 학교에 야구팀을 만들어주고 대회도 유치해줬지만 그는 바로 빠져나왔다. 자신이 운영하면 오해가 생긴다는 이유였다. 사람들이 으레 색안경을 끼고 보기에 그는 아예 발을 안 들였다고 했다. 그의 말에는 야구인으로서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건 그가 여전히 뜨거운 야구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야구할 때가 유독 암울한 시대였잖아요? 야구장의 응원 소리도 즐겁다기보다는 좀 우울했죠. 사회와 정치가 그랬으니까…. 응원이 아니라 울분을 토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야 하나? 그때는 이기고도 ‘목포의 눈물’을 불렀어요. 가사를 보면 엄청 슬픈 노랜데 그게 응원가였어요. 이겨도 져도 오로지 ‘목포의 눈물’만 불러댔죠.”
요즘은 ‘목포의 눈물’을 안 부른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야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받는 스포츠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 ‘지금 저 환호하는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팬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항상 말한다.
“지금 그 많은 팬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는 선수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저는 은퇴하고 많이 느꼈어요. 막상 유니폼을 벗고 나니 그제야 못 봤던 것도 보이고 사람들이 엄청 많이 응원을 해줬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제가 정말 사랑받으며 야구를 했구나 싶었죠. 그래서 요즘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거워요.”
인연의 소중함을 믿는 영원한 타이거즈맨, 김성한은 요즘의 삶이 행복하다고 인터뷰 내내 말했다. 그가 심은 인연들이 이어져서 머무르는 모습이 그에게만은 닿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김성한이라는 레전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영산강을 끼고 도는 도시 나주의 대표 음식은 두말할 필요 없이 곰탕과 홍어다. 나주 곰탕은 담백하고 영산포 홍어는 입맛을 톡 쏘는 자극적인 맛이다.
나주곰탕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20여 년 전 오일장에서 상인과 서민이 즐겨 찾던 곰탕에서 유래됐다는 것과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온 조선, 임진왜란으로 농토가 망가진 후 생활이 궁핍해진 백성들은 집에 있는 세간살이를 가지고 나와 팔기 시작하면서 장시(오일장)가 시작되었다. 장시가 최초로 열린 곳이 나주다.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에 전국 각지에서 나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소의 머리고기, 내장 등을 푹 우려낸 나주곰탕 한 그릇이면 속이 꽉 차기도 하거니와 장날의 북새통 속에서 국밥을 후루룩 들이켜면 먹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었다. 전통식 나주곰탕이 토렴한 이유를 알만하다. 토렴 과정을 거치면 보통 75℃로 맞춰진다. 허기에 갑자기 들이키는 국물에 입천장을 델 염려가 없는 음식 온도다. 장터 풍경에 국밥을 먹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져 나주곰탕에 담긴 지혜를 깨닫는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곰탕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다소 의외다. 먹을거리가 없어 배를 곯았을 그 당시에 나주곰탕이라니? 나주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내장 등, 소의 부산물을 몽땅 넣고 푹 끓여낸 것이 나주곰탕이라는 얘기다. 곰국을 끓이면 국물 위로 노랗게 기름기가 뜬다. 기름기를 일일이 걷어내고, 식혀서 하얗게 굳어지면 다시 또 걷어낸다.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재료를 넣고 끓였으니 누린내와 기름기가 심하여 그 과정은 배의 시간이 필요 했다. 결과적으로 말간 나주곰탕이 만들어졌다.
나주 곰탕집 거리에서 만나는 나주곰탕은 소의 살코기를 넣어 6시간 이상 푹 끓여 국물이 말갛다. 주로 사태, 목심, 양지를 사용한다. 고기는 건져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두었다 밥을 말아 뜨거운 국물로 수차례 토렴한 위에 얹어 손님에게 나간다.
내륙으로 둘러싸인 나주에 홍어라니? 나주는 분명히 육지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홍어가 유명하다. 홍어는 흑산도가 본산지인데 영산포까지 오게 된 유래를 따라가 본다.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탈을 보다 못한 조정에서 섬 사람들을 육지로 이주시켰다. 흑산도 사람들이 이주한 곳이 나주다. 흑산도는 섬이라는 특성에 맞게 어업이 발달하였고 홍어가 많이 잡혔다. 나주에 이주하였으나 어장인 흑산도로 가서 생선을 잡아서 나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데는 보름이 걸렸고 이 과정에서 다른 생선들은 썩어서 버려야 했는데 홍어는 썩은 듯하나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았다. 암모니아에 의한 발효로 삭힌 홍어가 음식이 되는 순간이다. 삭힌 홍어는 흑산도 뱃사람들이 별미로 먹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에는 나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전이 쓴 에는 ‘나주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홍어를 제대로 삭히려면 4단계 공정이 필요하다. 실온 숙성, 냉장 숙성, 냉동 숙성 다시 냉장 숙성 과정을 거쳐야 홍어 특유의 맛과 육질이 살아난다. 영산포 홍어의 대부분은 해외 원정 산이다. 칠레나 알래스카산 홍어다. 가끔 흑산도 홍어가 공수되는데 한 마리에 50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가격이 높다. 홍어는 보통 돼지고기, 김치와 함께 삼합으로 즐긴다. 홍어 정식을 주문하면 삭힌 홍어 외에도 찜과 튀김요리, 애 등을 함께 맛볼 수 있다. 처음 접하면 코끝을 콱 찌르는 냄새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다가 한 번 두 번 먹다가 푹 빠져드는 음식이 홍어다.
영산포 홍어(나주시 영산3길 6번지)
홍어 초보자부터 즐겨 먹는 이들까지 두루 만족하게 할만한 맛집이다. 1인 2만 원(칠레산)이라는 착한 가격에 홍어삼함, 애, 찜, 튀김, 전, 탕까지 다양한 홍어음식을 맛볼 수 있다. 흑산도산 홍어정식은 4만 원이다.
나주곰탕
국밥의 형태가 전통식이지만 최근에는 밥과 탕을 따로 내는 곳도 많아졌다. 고기 맛과 육질은 집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얀 집과 노안이 널리 알려져 있고 사매기나주곰탕, 탯자리나주곰탕도 추천한다. 곰탕은 9천 원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한식은 탕반(湯飯) 음식이다. ‘반’은 밥이다. ‘탕’은 국물을 뜻한다. 우리는 국물 없는 밥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 밥상에는 밥과 국이 있고, 반찬을 더한다. 밥과 국은 우리 밥상의 기본이다.
“일본에서도 밥과 국을 같이 먹더라”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 등에서도 밥과 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을 내놓는다. 종류가 한정적이다. 아침 밥상의 ‘미소시루(일본 된장국)’ 정도다. 낮이나 밤의 밥, 술자리에서는 흔하지 않다. 아침에 먹는 국 한 종지 정도다.
한식 밥상은 국의 향연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늘 “오늘 저녁은 무슨 국을 끓일까?” 고민했다.
우리 밥상은 밥과 국을 빼고는 성립하기 힘들다. 웬만한 밥상에는 늘 국이 등장한다. 국, 밥, 김치만 있는 밥상도 즐겁다. 탕반 음식은 우리의 핏속에 녹아 있는 음식문화다. 국도 여러 종류다. 고깃국, 생선국, 각종 채소국, 이도 저도 아닌 된장국까지 국물 없는 밥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한여름철에는 근대국과 아욱국을 따로 끓인다. 얼핏 보면 비슷한 아욱과 근대. 그러나 국으로 끓이면 그 맛이 각별하다. 콩나물, 미나리, 무, 시금치, 각종 시래기와 우거지까지. 한반도의 국물은 끝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탕, 국물이 없는 밥상은 ‘국물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관계를 끝낼 때도 “국물도 없다”고 말했다. 밥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이 국물이다. “넌 앞으로 국물도 없다”는 말은 인간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것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국이 없는 밥을 먹으면 목이 메었다. “국물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매정한 표현이다.
국물의 기본
국물의 기본은 ‘대갱(大羹)’이다. 대갱은 고기 곤 국물, 고깃국물이다. ‘대’는 크다는 뜻과 더불어 으뜸, 시작, 바탕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무런 양념이나 부재료인 채소 없이 국을 끓이면 대갱이다.
‘대갱’은 중국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오래전에는 매실과 소금으로 기본적인 양념을 대신했다. 대갱은 ‘매실이나 소금 양념’도 하지 않는, 고기를 곤 국물이다. 맛을 따질 일은 아니다. 맛이 있으면 양념한 화갱을 찾을 일이다. 국물에 채소나 양념을 넣으면 ‘화갱(和羹)’이다. 중국에는 화갱이나 대갱 모두 사라졌다. 화갱은 그나마 중식 코스 요리 중, 각종 채소를 넣고 생선이나 고기를 더한 국물 음식이 남아 있다. 한식에는 아직도 대갱이 살아 있다. 곰탕이 대갱이고, 제사상의 곰국, 곰탕이 바로 대갱의 변형이다.
우리 밥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화갱이다. 채소에 고기를 넣고 끓여도, 채소만으로 끓여도 화갱이다. 고깃국, 채소, 생선이나 여러 가지 양념을 더한 것이 모두 화갱이다.
한국 사람들의 밥상에는 화갱이 늘 자리한다. 시래깃국, 김칫국, 배춧국, 뭇국, 시금칫국, 토란국, 아욱국, 근대국 그리고 해조류를 넣은 미역국, 톳을 넣은 국, 몸국(모자반국)과 해산물을 이용한 북엇국 등 숱한 국물 음식들이 그것이다.
곰탕과 설렁탕
곰탕과 설렁탕은 비슷한 음식이다. 약 100년 이상 곰탕과 설렁탕은 경쟁하고, 상대의 장점을 서로 더했다. 두 국물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곰탕은 ‘고기를 곤 국물’이다. 쇠고기 양지 부위를 중심으로 푹 곤 국물은 반가의 음식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나주 등에서 곰탕이 유행한 이유도 간단하다. 서울, 한양은 궁궐이 있었던 도시다. 각종 관청도 많았다. 궁중의 제사를 모시는 종묘가 있고 공자의 제사를 모시는 성균관, 대성전이 있다. 제사에는 귀한 쇠고기를 사용한다. 공식적으로 쇠고기 도축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곰탕을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서울, 한양의 곰탕집들은 이런 쇠고기 소비문화를 뒤따른 것이다.
나주 곰탕도 마찬가지다. 나주는 큰 도시였고 큰 관청, 관사가 있었다. 역시 향교가 있고 외부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한양 도성에도 외국에서 온 사신과 외부 관리들의 방문이 잦았다. 역시 쇠고기 소비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나주 곰탕, 진주냉면이 발달한 까닭이다.
설렁탕은 출발부터 다르다. 곰탕이 고기 곤 국물이라면 설렁탕은 뼈와 내장 곤 국물이다. 때로는 소머리를 곤 국물도 더했다. 오늘날 서울 인근 경기도 몇몇 곳에 소머리 국밥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설렁탕을 만들 때 소머리도 이용했다. 그 방식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바로 소머리 국밥이다.
오늘날의 설렁탕에는 쇠고기도 더한다. 양지나 우둔살의 일부, 업진살 등을 넣는 설렁탕 전문점도 많다. 곰탕의 장점을 받아들인 결과다. 출발은 곰탕과 다르다. 내장, 소 머릿고기 등을 사골, 잡뼈 곤 국물에 더했다. 이른바 ‘부산물’들이다. 부산물은 정육의 대칭어다. 곰탕은 정육에서, 설렁탕은 부산물에서 출발했다.
육개장과 닭개장
닭은 개체가 너무 작다. 가정에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닭은 귀한 달걀을 낳는 존재. 그나마 풀과 벌레가 흔한 여름철과 달리 추운 겨울에는 먹이가 마땅치 않았다. 봄에 병아리에서 시작, 늦가을 대부분 닭을 ‘정리’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 급격히 발달한 주막에서 개장국을 끓인 것은, 그나마 개가 개체가 크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개장국은 주막의 주요 메뉴였다.
개장국은 ‘개고기+장(醬)+국[羹, 갱]’이다. 개고기는 일상으로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명의록(明義錄)’은 정조대왕 즉위 원년(1776년)에 작업을 시작해 이듬해 완성한 책이다.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한 과정 등을 기록했다.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했던 세손, 정조대왕이 즉위한 직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반대하고 궁궐에 자객을 침투시킨 반대파를 엄벌한 것이 정당했음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드라마 ‘이산’과 영화 ‘역린(逆鱗)’의 소재가 되었다. ‘이산’과 ‘역린’에 공히 정조 암살을 위해서 자객이 궁궐에 침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반대파에 의한 정조 시해 시도는 있었다. ‘명의록’의 공초(供招) 기록에 의하면 전병문, 강용휘 등 범인들은 궁궐에 침투하기 전 ‘궁궐 밖 개 잡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거사 실패 후 남대문 언저리로 도주, 다시 ‘개 잡는 집’에서 만난다. 사건 수사기록인 공초에 아무렇지도 않게 ‘궁궐 밖 개 잡는 집’, ‘남대문 언저리 개 잡는 집’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18세기 후반에는 한양 도성 곳곳에 개 잡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장국은 저잣거리 주막의 평범한 음식임을 알 수 있다. 167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안동 장 씨 할머니의 ‘음식디미방’에도 나온다. 개장국은 반가, 저잣거리를 따지지 않고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육개장과 설렁탕 등으로 바뀐다.
육개장은 ‘육[肉=쇠고기]+개장국’이다. 즉, 쇠고기로 마치 개장국같이 끓인 음식이 육개장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닭개장은 ‘닭고기+개장국’ 형태의 음식이다. ‘닭계장’으로 쓴 것은 틀렸다. 닭개장이 맞다.
개장국이 사라진 것은 청나라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청나라는 유목, 기마민족이다. 개의 존재가 농경민족인 우리와는 다르다. 개는 동반자 때로는 생명의 은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도 청나라 문화를 받아들인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저잣거리에서도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조선시대 말기 소의 생산량도 늘어나고 국가의 금육 정책도 힘을 잃는다. 나라가 망한 일제강점기, 금육은 허물어진다. 쇠고기를 더한 육개장과 쇠고기로 끓인 곰탕, 소의 부산물을 중심으로 끓여낸 설렁탕이 널리 퍼진다.
한반도의 국물 음식 중 으뜸은 곰탕, 설렁탕, 육개장 그리고 육개장을 중심으로 변형된 해장국들이다. 선지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이 있다. 선지에 각종 채소를 더한 것도 등장하고 장터에서 간단히 만들어 내놓았던 장터해장국도 선보인다.
한반도만의 국물 문화
전 세계 모든 문명국에는 라면이 있다. 동남아, 중동, 유럽, 미국,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라면을 먹지 않는 나라는 드물지만, 라면 국물을 알뜰하게 먹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에서 라면을 먹었던 이들은 “듣기와는 달리 일본 라면이 짜더라” 말한다. 당연하다. 일본인들은 라면 국물을 우리처럼 알뜰하게 먹지 않는다. 일본은 면 중심으로, 우리는 국물 중심으로 라면을 먹는다. 면을 먹는 이들은 면에 국물이 배어든 맛을 즐긴다. 우리는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는다. “나트륨이 많은 국물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은 허망하다. 우리는 ‘국물도 없는’ 음식을 싫어한다. 면보다는 국물에 만 밥에 김치를 얹어 먹어야 속이 후련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수반(水飯)도 마찬가지다. 물에 만 밥. 입맛이 없거나 간단한 상으로 손님을 접대할 때 정식으로 수반을 내놓았다. 왕(성종)도 즐겨 먹었고, 아버지 묘소에서 간단하게 수반을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 왕도(정조) 있다.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후 일상적으로 먹는 나물국, 생선, 고깃국, 개장국과 설렁탕, 곰탕, 육개장 그리고 라면과 수반까지.
한반도만의 독특한 국물 문화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올해는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이 정해진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1018년, 즉 고려 현종 9년에 중앙관제와 함께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했었다. 당시 전국을 5도 양계(서해도·교주도·양광도·전라도·경상도, 북계·동계)로 편제하면서 강남도(금강이남의 전북)와 해양도(전남, 광주)를 합쳐 전라도라 명했다. 해당 지역의 큰 고을이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할 때 나주목(牧)이 된 이래 조선 말까지 900년 남짓한 기간 전남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광주도 그때까지는 나주에 딸린 군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주둔하고 있을 때 만난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 씨의 고향이니 고려 2대 임금 혜종의 외가인 셈이다.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군의 2차 침입 때는 왕이 나주로 피난을 가며 열흘 남짓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그런 '천년 목사 고을'이기에 나주를 첫 답사지로 정하고 나주읍성(사적 제337호)을 가장 먼저 찾아봤다. 아쉽게도 성벽 대부분이 훼철되어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동·서·남·북 4개소에 있던 성문은 북문을 제외하고 모두 복원된 상태다. 읍성의 중심인 목사가 집무하던 관아는 아직 복원되지 못한 채 관아문 정수루(正綏樓)만 남아 있었다. 그 옆으로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錦城館)과 목사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金鶴軒)이 오롯하다.
나주목 객사와 금성관
객사(客舍)란 고려~조선시대 때 매월 초하루와 보름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궁실로써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신 공간이기도 하다.
나주 객사의 정청은 금성관(錦城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정문에서부터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의 3개 문을 거쳐 들어간다. 현재는 금성관 좌우로 날개처럼 이어진 건물인 동익헌과 서익헌 그리고 중삼문과 정문인 망화루가 복원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금성관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나주목사 이 유인이 정문 망화루와 함께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목사 김개에 의하여 중수되었고 이후 고종 때 다시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군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파괴됐는데, 1963년과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익헌과 서익헌은 2004~2008년에 복원하였는데 동익헌은 서익헌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다. 전라도 관찰사 이행(1403~1404년 재임)이 벽오헌(碧梧軒)이라 이름지어 정청과는 별도의 현판을 달았다. 동익헌에서는 요즘 각종 공연이나 발표회 등을 진행하고 있다.
공덕비와 비석군
나주 객사 담장 안쪽 한편으로는 수십 기의 비석들이 모여 있다. 역대 목사(牧使)나 관찰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들이다.
방방곡곡 면(面) 단위에만 가도 공덕비 한두 개는 서 있으니 천년 목사 고을 나주에 세운 비석들이 만만치는 않을 터.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석이나 귀부의 생김생김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칭송받는 사람의 이름이 낯익어 반가운(?) 비석도 제법 보인다.
나주 금성관은 아직 부분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며, 추가적인 복원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료입장이며, 30분 남짓이면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다. 수시로 전통공연이나 음악회 등이 열리니 나주 탐방 시 가장 먼저 들려 볼 것을 권한다. 금성관 앞으로는 그 유명한 나주 곰탕거리로 서울까지 알려진 맛집들이 즐비하다.
날씨가 쌀쌀할수록 국밥의 풍미는 더해간다. 몸이 차면 뜨끈한 국물이 더욱 반가울 테니 말이다. 칼바람이 불더라도 국밥만큼은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이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큼지막한 솥에 갖은 재료들을 팍팍 넣어 오래 푹푹 끓여야 제맛이 우러나는데, 집에 있는 작은 냄비 정도로는 그 농염한 맛을 따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뜨거운 국물에 더운밥을 말면 뜨끈함이 배가된다. 이렇게 내놓는 것이 국밥의 정석이라 하겠다. 요즘은 따로국밥이라 하여 국과 밥을 따로 먹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후후 불어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을 때의 시원함은 그 육수보다 매력적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해장술을 부르는 ‘시골집’
술을 마신 다음 날 식사로 해장을 하며 곁들이는 술을 흔히들 ‘해장술’이라고 한다. 사실상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주당들에겐 그만한 해장이 또 없다. 그렇다고 커피 마시듯 술만 들이켜는 것이 아니니 그에 맞는 식사도 중요하겠다. 해장술의 맛을 아는 이들에게 속도 든든하게 채워주고 안주로도 손색없는 ‘시골집’의 ‘시골장터국밥’을 추천한다.
숙취 해소 효과가 있는 선지를 듬뿍 넣고 사태와 파, 무 등을 곁들여 얼큰하게 끓여낸 옛날식 소고기장터국밥이다. 국물이 약간 걸쭉하면서 간이 센 편이기 때문에 안주로 즐겨 찾는 손님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술국’이라는 메뉴를 따로 파는데, 실제로는 시골장터국밥과 똑같고 공깃밥만 없는 것이다. 가격도 딱 공깃밥만큼 1000원 차이다. (시골장터국밥 8000원, 술국 7000원)
저녁시간이 되면 시골집은 밥집보다는 술집에 가까워진다. 저녁 6시 이후에만 판매하는 전 메뉴를 비롯해 석쇠불고기, 육회, 안동사발문어, 홍어무침 등 다양한 안주에 술자리를 즐기러 오는 이들로 까딱하면 줄을 서야 한다. 이곳이 술을 부르는 이유는 맛좋은 음식에도 있지만 시골집이라는 이름처럼 구수하고 편안한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있는 한옥 구조가 정취를 더하고, 식당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국물이 침샘을 자극한다.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2가 12-1
영업시간 11:30~22:00 (일요일 21시까지)
문의 02-734-0525
◇삼삼한 손맛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날로 바뀌는 홍대의 맛집들 속에서도 10년째 같은 자리에서 며느리처럼 지조 있는 맛을 내는 곳이다. 대구에서 10여 년간 식당을 운영했던 주인장이 깊은 손맛으로 매일 변함없이 국밥을 끓이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동안 써온 뚝배기 그릇을 대신해 현대식 옹기그릇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맛만큼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팔기 위한 국밥이 아닌 내 자식을 먹일 밥상을 차린다는 마음이 그 비결이다. 국밥 사진을 찍으려 하자 주인장은 “그저 내 집에서 먹는다 생각하고 하기 때문에 예쁘게 담고 꾸밀 줄은 몰라요. 보기엔 투박해도 정성을 다했으니 한번 드셔 보세요”라며 새색시처럼 수줍게 국밥을 내밀었다. 모양새는 꾸밈없음 그 자체였다. 맛 역시 삼삼한 간에 평범한 재료들이 들어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먹는 내내 입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극적인 맛과 재료로 이목을 끄는 여느 맛집과는 다른 수수한 매력이 느껴지는 곳이다. 상상 그 이상의 맛은 아닐지라도 가장 이상적인 국밥 맛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국밥은 다섯 가지가 있다. 비슷해 보일지라도 소고기무국밥(맑은 국)에는 양지 육수를, 소고기국밥(얼큰한 국)과 소고기미역국밥에는 양지와 사태 육수를, 시래기국밥과 김치국밥에는 맑은 멸치 육수를 사용한다. 시래기국밥에는 들깻가루를 약간 넣어 구수한 맛을 더했다. 다른 네 종류의 국밥과는 다르게 김치국밥만은 국과 밥을 함께 끓여 내고 담는 그릇도 뚝배기를 사용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더 맛있으니까. 밥의 풀기가 더해져 살짝 걸쭉해진 국물이 허기진 속을 더욱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계란을 풀어먹는 손님들이 있어 날계란이 함께 나오지만 주인장은 그대로 먹는 것을 권한다.
주소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15길 38
영업시간 11:00~23:00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휴무)
문의 02-332-2479
가격 소고기무국밥 9000원, 소고기국밥·소고기미역국밥·김치국밥 7000원, 시래기국밥 6000원, 오늘의 밥상 3만2000원(2人)
◇쌈 싸먹는 나주국밥 ‘삼태기’
국밥을 먹을 때면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이 바삐 움직이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젓가락이 할 일이 더 많다. 바로 쌈을 싸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쌈이라 하면, 상추쌈 정도를 떠올리겠지만 이곳에서는 김이 주인공이다. 식당에서 소개하는 방법대로 하자면, 먼저 김 위에 무말랭이무침을 올리고 그 위에 콩나물파절이와 국밥에 들어 있는 고기를 차례로 얹은 뒤 김으로 잘 싸서 먹으면 된다.
지방이 적은 소 앞다리 부위를 사용해 고기 맛이 담백한데, 국물이 맑아 일반 국밥처럼 말아먹게 되면 조금 심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방법대로 쌈을 싸먹으면 다양한 식감을 느낄 수 있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개하는 방법에는 반찬으로 나오는 신김치를 쌈에 넣지는 않지만 취향에 따라 함께 즐겨보아도 색다른 맛을 경험할 수 있다. 간단하게 국밥 한 그릇 먹으러 가서 귀찮게 쌈을 싸먹겠나 싶을 수 있어도 먹다 보면 중독되는 그 묘미에 손놀림이 분주해질 것이다. 쉽게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국밥에 들어간 고기의 양이 꽤 푸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공깃밥을 반 정도만 채운다. 양이 부족하더라도 공깃밥 추가는 공짜라 부담 없다.
‘삼태기’ 1호점은 여의도역 인근에 있는데 올해 KBS별관 근처에 2호점을 열었다. 그 기념으로 올 한 해 동안 2호점에서는 1호점보다 2000원 더 저렴하게 나주국밥을 판매하고 있다(1호점 1만원, 2호점 8000원). 두 곳은 저녁메뉴에도 차이가 있다. 1호점은 삼겹살을, 2호점은 무쌈, 깻잎, 파채를 곁들여 쌈 싸먹는 냄비수육을 판매하고 있으니 취향에 따라 구분해 가보는 것이 좋겠다.
주소 (1호점)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08 아일렉스상가 2층 (2호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45-19 서린빌딩 2층
영업시간 (1호점) 11:00~22:30 (2호점) 10:00~22:00/ 일요일, 공휴일 휴무
문의 (1호점) 02-786-4579 (2호점) 02-761-5957
'맛있는TV' 전남 나주 밥상..."홍어 한 점에 3000원?" 창신동 매운족발
'맛있는TV'에서 전라남도 나주의 밥상이 소개됐다.
29일 방송된 맛있는 TV에서는 김호진과 김나영이 나주를 찾아 홍어를 맛봤다.
나주에서 유명한 홍어는 한 점에 무려 3000원이나 하는 고급 음식이었다.
이에 김호진은 홍어를 시식하며 "찹쌀떡을 먹은 것처럼 쫄깃하다"며 극찬했다.
반면 이날 홍어를 처음 먹은 김나영은 알싸한 홍어의 향에 홍어를 씹지도 못한 채 삼켰다. 그리고 "홍어가 찹쌀떡 같다고?"라며 질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날 맛있는TV에는 매운요리 최고의 맛집으로 창신동 매운족발이 소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