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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 따라 흐른 선연한 역사, 진주성과 촉석루, 진주검무
- 경남 진주시는 예로부터 인재 배출이 잦았던 고장이다. ‘영남 인물의 절반이 진주에서 나왔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충신이 많았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화신이라 일컬을 만한 이들의 비범한 행장이 이 고장에 잇따랐다. 그래 ‘충절의 고장’이다. 오늘날 충의(忠義)의 얼로 빛나는 진주의 각별한 역사성을 웅변하는 명소를 꼽자면? 단연 진주성이 아이콘이다. 임진왜란 때의 전사(戰史)와 의용의 서사를 고이 간직한 진주성을 둘러보지 않고 진주를 얘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시내 강변에 있다. 성의 남벽 아래로 남강이 굽이쳐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 강물과 벼랑이 지닌 전략적 가치에 착안해 성을 구축했다. 본래 내성과 외성으로 짜인 이중구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내성보다 규모가 컸던 외성은 스러지고 내성만 남았다. 성곽의 길이는 1790m, 높이는 5~8m에 달한다. 삼국시대 때 토성(土城)으로 축조됐던 진주성이 석성(石城)으로 거듭난 건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따라서 축성의 변천사와 기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공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하고 훤칠한 성내 공간 곳곳마다 잘 단장돼 생경한 기분을 자아낸다. 천년 고성이되 마치 신축한 것처럼 매우 미끈한 게 아닌가. 근래의 복원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걸 알 만하다. 한때는 고즈넉한 폐허와 잔해 사이에 간신히 존재했겠지만 고칠 것 고치고, 다듬을 것 다듬고, 보탤 것 보태어 회생했다. 복원사업 이전의 성내엔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걸 다 철거해야 했다. 그러니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필연이었겠다. 작업자들은 진주성의 본연과 본질에 부합하는 복원을 완수하기 위해 실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성내의 지형은 리듬이 있다. 평지와 경사지, 야트막한 언덕과 구릉지,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며 거대한 타원을 그리는 성곽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너른 잔디밭과 다양한 수목들이 초록을 뿜어 소풍과 산책을 즐길 만한 공원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진주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곳집이다. 일쑤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곳이다. 수성(守城)과 승전을 꾀하기 위한 갖가지 구조물이 즐비한 곳이다. 전투 지휘소로 쓰인 서장대와 북장대, 포를 쏘았던 포루, 전공을 새긴 사적비와 순절의 넋을 기리는 사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까지 성내에 있어 답사객들의 호감을 산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겼다. 당시 장수는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 1592년 10월 김시민은 전라도와 이어지는 전략 요충이었던 진주를 삼키기 위해 쳐들어온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김시민이 거느린 병력은 관군과 의병을 합쳐 3800여 명에 불과했다지. 중과부적 상황이었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김시민의 명민한 지략이 작동해서였다. 이를테면 그는 성 밖에 주둔한 의병들에게 왜군을 교란할 수 있는 교묘한 작전을 전개하게 했다. 성내의 부녀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했다. 야간엔 악공들의 피리 소리로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지략뿐인가, 김시민은 개혁적 성향의 무장이라서 휘하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관행을 타파했으니 매사 솔선수범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 신식 병기 동원에도 신경을 썼다. 이래저래 승전은 애당초 떼어놓은 당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하지만 김시민은 전투 막판에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순절했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성내 백성들의 곡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던가. 비단 김시민을 애도하는 호곡뿐이었으랴. 대첩이 끝난 자리에선 죽은 자들을 끌어안은 산 자들의 오열이 터져 나왔으리라.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적치여산(積置如山), 즉 ‘시체가 쌓인 모습이 산과 같다’고 기록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사방 30리 안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진주성은 일종의 성지(聖地)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선인들의 역사가 선연한 게 아닌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지옥의 묵시록을 술회하는 성이라는 점에서는 반전(反戰) 메타포가 응축된 곳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전쟁이란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시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슬픈 숙명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극찬한 ‘진주검무’ 진주성 남쪽 기슭, 성곽에 인접한 곳엔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크고 당당하고 수려한 누각이다. 한때 국보로 지정됐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정을 해제했다. 지금의 모습은 1960년의 보수작업을 통해 얻었다. 진주성 아래로 굽이치는 남강과, 저 멀리 산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진주성 최고의 전망대다. 조선 선비들이 풍류와 사색을 즐겼던 영남 제일의 정자다. 전투 지휘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촉석루 역시 전쟁이라는 부조리극이 낳은 상처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촉석루 아래 강변에선 진주성대첩 즈음 한 여인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자결, 영원히 남을 충절의 화신이 됐다. 바로 논개다. 진주 관기(官妓)였던 그의 재능은 미색으로 향기를 뿜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음인가. 시대를 읽는 냉철한 눈까지 겸비했나? 그는 기꺼이 한 몸 바쳐 한 시대의 참화에 빛을 흩뿌렸다. 촉석루 아래 강변엔 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한 바위 ‘의암’(義庵)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어느 날 촉석루에 유람을 왔다가 ‘일개 작은 여인이 왜적의 우두머리를 섬멸하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로 시작되는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썼다. 논개의 거룩한 행장을 기리는 글이다. 다산이 진주에 와서 탄복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주에 전승돼 오늘날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는 ‘진주검무’를 보고 찬탄했던 것. 검무는 여성 무용수들이 무사 복장을 하고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이다. 촉석루에 앉아 이 춤을 감상한 다산은 참을 수 없는 흥에 겨웠나? 그는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검무를 추는 여인의 매력적인 자태와 춤사위의 삼엄한 격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명편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석학이었던 다산은 음악과 춤에도 조예가 깊었다. 음악과 악기를 연구해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다산이 진주검무를 시로 써서 극찬했다.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대 예능보유자는 ‘진주권번 출신의 마지막 예인’ 고(故) 김수악이다. 김수악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 목석도 들썩였단다. 춤으로 도가 튼 달인이었다. 진주검무의 맥은 오늘날 예능보유자 유영희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는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예인다운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춤사위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김길수 진주문화원장 “일제강점기 때 기생 단체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진주의 자연지리 가운데 빼어나기론 단연 남강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굽이치는 남강의 폭은 넓고 물살은 유유해 아름답다. 예로부터 진주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온 생명의 젖줄이다. 진주의 보배에 해당하는 진주성이 남강가에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의 역사와 문화는 남강과 함께 흘러왔다. 그렇다면 진주의 문화답사 1번지는? 김길수 문화원장은 진주성과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를 꼽는다. “진주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실로 많다. 그러나 진주성을 찬찬하게 답사하는 이는 드물어 아쉽다. 대체로 촉석루와 논개 유적인 의암만 훑어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진주성을 한 바퀴 도는 온전한 답사 방식을 채택하면 좋겠다. 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과 남강변에 조성된 성 밖 산책로를 통해서도 역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다.” ‘의기 논개’ 역시 진주의 대표 캐릭터다. 논개의 행장이 지역 정서에 미친 영향엔 어떤 게 있을까? “일개 기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세계 역사상으로도 논개가 유일무이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다는 걸 실천한 인물이 논개이자 논개 정신이다. 따라서 지역 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3.1만세 운동 때 진주에선 기생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돼 국권 회복에 앞장섰다.” ‘진주검무’는 물론 가무악(歌舞樂)의 대가였던 고 김수악 선생의 예술은 현재 어떤 식으로 전수되고 있는지? “김수악 선생이 양성한 제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진주에서 교방예술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는 셈이다. 우리 문화원은 선생의 제자들을 문화학교 강사로 영입해 강의를 맡기고 있다. 향후 ‘김수악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전통 민속이 흔히 현대의 풍속에 밀려 퇴색하고 있다. 반면 진주에선 ‘진주 소싸움’의 명맥이 이어져 흥미롭다. “농업이 번성했던 과거부터 진주 사람들은 농한기에 소싸움을 즐겼다. 일설엔 진주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라 신라와 백제 편으로 나눠 소싸움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소싸움 무대로 적격인 남강 백사장이 있어 명맥 유지가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주요 문화원 사업을 소개해달라. “외람된 얘기지만 진주문화원은 전국 문화원 중 으뜸이라 자부한다. 지역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식견과 애착을 토대로 인화단결을 꾀해온 결과라고 본다. 중점 사업은 진주의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콘텐츠 개발이다. 지속적으로 순절 의병들을 발굴, 연구해왔다.” 타지의 문화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업을 추진한다지? 이는 매우 인상적이다. “순절 의병들을 찾아내고 조명하기 위해 의병 활동이 많았던 전라도의 여러 문화원들과 손잡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어떻게든 의병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문화원은 전국 각지의 문화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하고 있다. 이건 앞으로 더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 2023-10-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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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남강 바위절벽의 오뚝이, 진주바위솔!
- 예로부터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 제일’이라던 진주. 의기 논개의 충절이 전해져오는 역사 도시 진주로, 해마다 늦가을이면 한 해 꽃 농사를 마감하려는 ‘꽃쟁이’들이 전국에서 몰려옵니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진양호로 흘러들었다가 진주시를 서에서 동으로 감싸 도는 남강(南江)변 바위 절벽에 곧추선 야생화를 보기 위해서지요. 이름하여 진주바위솔이 숱한 야생화 동호인들이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와 만나고자 애태우는 주인공입니다. 국내에 자생하는 10여 종의 바위솔속 식물의 하나로, 솔잎을 닮은 뾰족한 잎이 원을 그리며 촘촘히 나고 그 가운데 촛대에 꽂힌 초 모양의 꽃차례가 불룩 솟는 등 외형은 다른 바위솔류들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 뚜렷한 차이로 각별한 주목을 받습니다. 우선 개화 시기입니다. ‘진주라 천 리 길’이란 대중가요가 말하듯, 서울에서 천 리나 남쪽으로 내려왔기 때문인지 꽃 피는 시기가 한 달가량 늦습니다. 경기·강원 등지의 바위솔이나 좀바위솔, 포천바위솔, 정선바위솔 등의 꽃차례가 이미 말라비틀어진 10월 하순 막 피기 시작해 11월 중순에나 만개하니, 11월 이후 이렇다 할 야생화가 없어 아쉬워하는 꽃쟁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게 당연하겠지요. 예쁘고 독특한 형태의 잎 또한 상아색 꽃 못지않은 진주바위솔의 매력입니다. 바위에 납작 붙은 잎은 꽃차례가 쑥 솟은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둥글게 층층이 돌려난 모양이 켜켜이 쌓은 제사 음식처럼 정갈하고 단정합니다. 잎 하나하나는 길이 1~3.5cm, 너비 0.5~1.5cm의 주걱 모양인데, 가운데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왔습니다. 색은 기본적으로 녹색이지만, 가장자리와 뾰족한 끝부분은 짙은 자주색입니다. 가지를 치지 않아 하나의 개체에 하나의 꽃차례가 달립니다. 각종 도감은 그 길이가 5㎝ 정도라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10㎝ 이상의 것이 상당수 눈에 띕니다. 하나의 꽃차례에 100여 개의 자잘한 꽃이 다닥다닥 달리는데, 1㎝ 미만인 개개의 꽃마다 5장의 꽃잎과 5개의 암술, 그리고 자주색 꽃밥이 달리는 10개의 수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라 뭐라 해도 진주바위솔의 최대 매력은 바로 자생지의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진주 남강을 굽어보는 바위 절벽에 붙어서 사는 오뚝이 같은 모습에서 작지만 당당한 진주바위솔을 엿본다고 할까요. 다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강물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서식 환경 때문에, 진주바위솔을 찾아가도 선뜻 만나지 못해 애태우는 상황이 벌어지곤 합니다. 바위라고는 하지만 조금만 힘을 가하면 부스러지는 석회암인 데다 그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여서, 아차 하는 순간 바위 벼랑에서 물속으로 직행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Where is it? “분포: 한국(경남 진주, 지리산)”.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 나오는 짤막한 설명이다. 정선바위솔의 정선이나 포천바위솔의 포천 등과 마찬가지로 국명에 진주라는 지명이 들었으니 진주가 주요 자생지다. 남강을 막아서 만든 진양호(晉陽湖) 일대 바위 절벽 곳곳에 자라는데, 동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은 진양호공원 내 호숫가다. 명승지인 촉석루 아래 남강변 절벽에서도 만날 수 있다.
- 2020-11-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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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규환의 남원·황석산 전투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 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에 썼다. 조경남의 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은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
- 2017-06-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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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명소가 된 선진리 왜성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선진리(船津里) 왜성을 다시 찾은 것은 꼭 13년 만이었다. 남해안 꽃마중 길에 벚꽃 명소라는 소문에 이끌려 찾아간 것이 2004년 4월이었다. 경남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사천만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 한적한 어촌 마을 야산을 뒤덮은 벚꽃이 제철이었다. 그곳이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자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에 잠시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땅인 사쓰마(薩摩) 영주였다. 그 벚나무들이 일제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세월의 나이테를 헤아려보았다. 성의 주인이었던 시마즈 후손들 입김으로 조선총독부는 그곳에 공원을 꾸미고 벚나무를 심었다 한다. 더러는 그때 심은 것으로 보이는 고목도 있었다. 벚나무들은 봄마다 무심한 꽃잎을 쏟아낸다. 올 4월에도 벚꽃 축제가 또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첫 방문 이후 13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부터 시작된 성터 발굴사업에서 의미 있는 출토품이 나왔다는 사실은 몰랐다. 고려시대의 자기류 같은 출토품은 왜성이 생기기 이전부터 왜구의 분탕질에 대비해 고려수군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옛 모습의 편린을 짐작케 하는 성터가 복원된 사실도 알 턱이 없었다. 첫 버스로 진주에 도착해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선진리 정류장에서 내려 3km를 걸어서 갔다. 1598년 가을 사천벌을 붉은 피로 물들인 치욕적인 패전의 흔적은 남았을 리 없겠지만 분위기만은 느껴보고 싶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들판 여기저기서 봄 기지개가 한창이었다. 농수로마다 물이 흘러넘치고, 농사 준비에 바쁜 농부들 모습이 정겨웠다. 논두렁, 밭두렁 너머 울타리마다 피어나는 매화도 반가웠다. 420년 전 초토에도 봄은 왔다. 싸움에 패해 달아나다가 왜군의 소총에 맞아 죽고, 칼과 창에 찔려 죽은 수많은 조·명 연합군 병사들의 비참한 최후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일 뿐이다. 지금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 턱이 없는 시대다.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 선진리 왜성도 순천과 울산처럼 바다와 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순천과 울산 육전(陸戰)에서는 명군이 적장의 뇌물을 받거나 몸을 사려 비겁하게 물러난 데 비해, 선진리 전투는 어이없는 패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병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던 조·명 연합군의 선진리 패퇴는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됐다. 오죽하면 일본이 전과를 크게 부풀려 3대첩의 하나로 자랑했으랴! 서전은 연합군의 승승장구였다. 중로(中路)군 장수였던 명군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명군 3만7000명과 정기룡(鄭起龍) 장군 휘하의 조선군 3000명은 1598년 9월 20일 진주성을 차지했던 왜군을 쉽게 물리쳤다. 이어 남강 변 망진산 왜성까지 함락시켜 왜군을 바닷가로 내몰았다. 진주성과 망진산을 거점으로 연합군에 저항하던 왜군은 압도적인 병력에 위축되어 사천 읍성과 선진리 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사천읍도 쉽게 탈환됐다. 정기룡이 읍성을 포위하고 야간 기습공격을 가해 가볍게 수복한 것이다. 시마즈군은 7km 서남쪽 선진리 성으로 철수하면서, 수백 명의 병력을 남겨 수성하도록 했다. 그 병력으로 4만 대병을 막으라는 것은 연합군 남진의 속도를 늦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선진리 전투는 10월 1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0월 30일이었으니 4만 연합군과 1만 안팎의 시마즈군이 가을 들판에서 벌인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누가 봐도 싸움이 되지 않을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역사적인 치욕을 당했다. 사천만 바닷가 고지대에 견고한 성을 쌓고 농성하던 시마즈군은 독 안에 든 쥐 형국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그 쥐에게 급소를 물린 꼴이 됐다. 성내를 향해 포화를 집중하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돌격대를 투입했다. 성문만 열리면 전투는 끝이었다. 왜군은 유리한 지형을 등에 지고 결사항전으로 나왔다. 주변에 미리 지뢰를 매설하고 조총을 총동원해 연합군의 행동반경을 묶었다. 전투 중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가 연합군 식량 창고를 불화살로 공격해 군량미가 소실됐다. 군량이 사라진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합군의 공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까지 일어났다. 사고였는지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군 화약고가 폭발해 큰 혼란이 일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왜군의 불화살로 일어난 일이라 하고, 어떤 기록에는 명군의 실수로 돼 있다. 아비규환의 사천벌 연합군 진영이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왜군은 일제공격으로 돌변했다. 불끄기에 동원된 병사들이 미처 무기를 챙겨 들 사이도 없이 밀려든 왜적의 공격에 연합군 전선은 허무하게 와해됐다. 진중은 너나없이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도리 없이 동일원은 남은 군사를 진주성으로 철수시켰다. 왜군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둘렀다. 사천벌은 순식간에 단말마 비명으로 아비규환이 됐다. 논두렁과 밭두렁은 피로 물들었다. 연합군이 철수해 달아난 진주까지 핏자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는 제각각이다. 뜻하지 않은 전과를 크게 자랑하고 싶었던 일본 측 기록에는 2만~3만으로 나오는 데 비해, 에는 7000~8000명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크게 늘리고 조선이 크게 줄였다고 가정한다면, 1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그 후의 일이다. 시마즈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해 전사자 시체에서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냈다. 전공을 증명할 수급 대신 잘라 보낸 코와 귀는 지금 교토의 유명한 사적지 미미즈카(耳塚, 귀무덤)에 묻혀 있다. 그곳에 묻힌 원혼은 이 전투의 희생자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 코도 베어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12만 명이 넘었다. 그 한을 풀기 위해 1992년 박삼중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이 원혼이 깃든 교토 이총의 흙을 떠다가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선진리 전투 패전 보고를 받은 명나라 만력 황제는 크게 노하면서 즉시 진군해 성을 빼앗고 왜장을 징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겁에 질린 동일원이 남은 병력을 추슬러 11월 17일 다시 왜성 공격에 나섰으나, 시마즈는 이미 성을 버리고 귀국한 뒤였다. 그 치욕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왜군이 만행을 저지르고 쫓겨 간 뒤 현지 백성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조명군총이다. 여기저기서 썩어가는 악취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코와 귀가 잘린 수급을 모아 성 옆에 묻었다. 명군 수가 훨씬 많아 ‘당병무덤’ 또는 ‘뎅강무데기’라 불렸다. 뎅강무데기란 말이 섬뜩했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던 무덤은 원형대로 보전되다가 1983년 사천문화원과 민간이 협력해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3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혼들에게 한 가닥 위안이라도 하려는 건지 왕릉 규모 못지않은 거대한 무덤 주위에 올해도 매화와 동백이 피었다. 선진리 왜성은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쑥하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2005년 발굴사업에 이어 복원 공사와 공원화 공사가 끝난 탓이다. 동쪽에 있던 성문 터에는 육중한 문루도 복원됐다. 전형적인 일본 성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천수대 자리에 우뚝 선 6·25 전몰 공군 장병 위령탑은 엉뚱해보였지만, 허물어졌던 성곽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해줬다. 성 마루에서 바라본 사천만 바다는 드넓은 호수 같았다. 잔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가 옛날 그 자리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임진년 해전에 처음 출전한 거북선 용머리가 포효하며 왜선들을 수장시켰던 성난 바다의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치욕적인 육전과는 반대로 7년 전의 임진년 해전은 통쾌한 승첩이었다. 세계 해전 역사에 그 명성을 떨친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처음으로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다는 점에서도 사천만 해전은 유명하다. 사천해전은 1592년 5월 하순에 일어났던 전투다. 첫 승첩인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 직후 전라좌수영(여수)으로 돌아간 이순신이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었던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서 다급한 지원 요청이 왔다. “왜군 전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바다를 침범해 노량에 대피했으니 빨리 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곧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경상도 바다로 달려갔다. 거북선의 첫 승리 삼천포 해안에서 멀리 내륙으로 파고 들어간 사천 바다로 가니 선진포구에 왜선들이 오색 깃발을 날리며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순신은 처음 거느리고 온 거북선 성능을 실험해볼 겸 적선을 너른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적은 그 계책에 넘어가 따라나섰다. 두려운 척 물러가던 이순신 함대는 수심이 깊은 바다에 이르러, 돌연 뱃머리를 돌려 거북선을 앞세우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거북선 용구(龍口)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화포들이 불을 뿜고, 여러 판옥선들이 일제히 불화살과 총통공격을 퍼붓자 적선들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엎어지고 깨지고 가라앉았다. 불이 난 선상의 왜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에 뛰어들고, 천신만고 끝에 뭍에 오른 병사들은 산으로 도망치며 통곡을 쏟아냈다. 삽시간에 왜선 10여 척을 분멸시키고 당파한 쾌거였다. 이 해전의 의미는 단연코 거북선의 성능에 귀일한다. 무시무시한 용머리를 앞에 달고 무서울 것 없다는 듯 달려드는 괴물 같은 전함에 왜적은 크게 당황했다. 선재도 두꺼운 적송으로 돼 있어 가볍고 날렵하기만 한 왜선들은 부딪히는 대로 깨졌다. 이순신은 뒤이은 당포해전이 끝난 뒤 임금에게 전투보고서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을 올렸는데 전투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산 위와 배를 지키는 곳에서 왜적들이 빗발치듯 철환을 쏘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 있어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배를 두들겼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한 번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자, 지자 대포들과 장편전, 화전 등을 쏘아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엎어지는 자, 부축해서 끌고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언덕으로 물러가서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선들은 처음에는 거북선의 무서운 외양에 겁을 먹었으나 판옥선보다 크지 않은 몸집에 자신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일단의 왜병들은 2층 층루에서 사다리를 걸고 거북선 위로 뛰어내렸다. 육박전에 도가 튼 그들은 단병전에 승부를 걸 요량이었겠지만, 뛰어내린 적병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거북선 등을 덮은 가마니 거적 속에 촘촘히 박힌 철추에 팔다리와 배가 찔린 것이다. 사천해전 승전의 중요한 의미 첫 해전이 끝난 뒤 이순신은 신병기 거북선 보안을 위해 삼천포 대방진 굴항에 깊숙이 정박시켰다. 이순신 선단은 현장에서 멀지 않은 모자랑포에서 밤을 보내면서도 거북선만은 안전하게 멀리 숨겨둔 것이다. 이 굴항(窟港)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군선을 안전하게 정박시키려고 만든 시설이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그 뒤로도 이 굴항은 조선수군의 주요 시설로 보전돼왔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큰 전상을 입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하 장수의 상처를 돌봐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에 따르면, 이순신은 신변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줄곧 대장선 꼭대기에 선 채 전투를 지휘하다가 어깨에 적탄을 맞았다. 피가 발등까지 흘러내렸는데도 활을 놓지 않고 지휘를 마쳤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상처를 내보인 그는 생살을 두 치(6cm)나 째고 철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태연하게 웃으며 부하들과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1년이 넘도록 낫지 않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해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상처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뽕나무 잿물로도 바닷물로도 씻어보지만 차도가 없어 민망할 따름”이라며 고통을 실토했다. 이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왜군의 호남 진출 거점인 선진리를 잃어 임진왜란 초기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사천해전 직후 당포해전에서도 승리한 이순신의 장계에는 “사천선창에서 바라보니 험준한 산 위에 400여 명의 왜적들이 긴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의 진[長蛇結陣]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난잡하게 꽂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왜성을 쌓는 모습이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해석된다. 사천해전에 패했다면 그 축성 공사는 바로 완공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순신의 본거지인 전라좌수영과 뒷날 한산도 통제영까지 감제하는 요지가 그들에게 제공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사천해전 승첩은 전쟁 초기 제해권 향방을 가른 중요한 전기였다. 선진리 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10월 왜군 장수 모리 요시시로(毛利吉城)에 의해 축성됐다. 공사가 불과 2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곡창 호남을 도모하려는 작전 계획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런 곳에 갇혔던 왜장을 징치하지 못한 선진리 전투 현장을 답사하면서, 나의 전쟁과 남의 전쟁, 나의 염원과 남의 인식 간의 상관관계를 골똘히 천착하게 됐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로 , , , 등이 있다.
- 2017-03-3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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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거 땜에 친구와 의상한다] 은총과 의를 가르쳐준 은인
- 필자에게 신의 은총과 의를 가르쳐준 두 친구가 있다. A는 원수처럼 좋지 않은 관계에서 필자에게 용서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고 B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의를 가르쳐준 은인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직장 친구이다. A는 앙숙이었다. 필자와 그는 회사에서 업무 시간이면 사사건건 논쟁을 벌여 상종을 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미웠다. 그런 그가 정년퇴직하고나서 헤어진 지도 10년이 넘은 나의 아들 혼사에 축의금을 보내고는 이제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그와의 문제는 신의 은총으로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천주교 신자로서 영세받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를 기념으로 용서해 주기로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필자가 그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원망과 원한은 필자의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B는 입사 동기였는데 간 쓸개 다 빼주는 친한 친구였다. 우리는 바둑을 좋아해 더욱 돈독해진 것 같다. 나이는 필자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그가 경력입사였던 통에 직위는 필자보다 한 직급 위였다. 둘은 성격도 정 반대였지만 장단이 잘 맞았다. 그는 필자와 달리 온화한 성격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 다 깔끔하게 처리하는 그 기술이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두 사람만의 은어를 만들어 큰 소리로 허심탄회하게 상사나 동료들 욕도 하면서 함께 가끔 스트레스도 풀기도 하였다. 조직이 바뀌어 그는 타 부서로 전출을 가게 되었으나 우리는 서로 만나 식사도 함께하고 예전처럼 즐겁게 지내는 관계였다. 그가 인도 뭄바이지점으로 발령나서 해외근무를 할 때는 가끔 그의 개인적인 협조 요청을 포함하여 본사의 지원 사항 같은 것을 그가 원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한 번은 그가 중역으로 진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존경하던 상사였던 부사장에게 그의 진급 품의서를 필자가 받아 결재올려 그가 진급하도록 내조하였던 적도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다. 당시 필자의 총괄중역이었던 전무가 당시 부서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그 친구가 중역으로 진급하면 자리가 없어 진급이 어려운데 만일 필자의 부서 담당 중역으로 오게 하면 어떨지를 물어왔다. 만일 원하지 않는다면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도 비추었다. 그러나 친구가 잘되면 서로 윈윈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동의하여 그가 진급하여 우리 부서의 담당 중역으로 오게 되었다. 문제는 그가 상사로 오는 순간부터 그의 말과 행동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마치 부서장으로 일해온 필자의 업적과 실적을 비방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지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참고 지낼 수 있었다. 더욱 필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당시 필자의 총괄중역이었던 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연이 있었던 본부장과 서로 말을 맞추어 20년간을 한 우물을 파온 필자를 부서장 직에서 해임하고 전혀 문외한 이었던 인물을 스카우트하여 부서장에 보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화나 연극에서 일어날 수만 있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아, 역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더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무작정 하기휴가를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났는데 경남 진주시 남강 근처에서 래프팅을 하기 전에 시간이 나서 인근 명소를 찾다보니 고 성철스님의 생가가 있었다. 그가 생전에 남긴 유물과 글들을 스치듯이 보고 지나치는 동안 유독 이상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못된 짓을 한 악인은 나의 은인이다.”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 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보았는데 역시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곱씹어 되새겨 보니 과연 그랬다. 필자가 그 친구로 인하여 세상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대로 옳게 한 수 배우게 되었던 것이니 그가 바로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 섭섭한 행위보다 그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생각을 해보았다. 본부장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었을 터인데 그도 직장생활하다 보니 불가피 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단점이 있고 일하면서 많은 하자가 있었을 터이니 보기에 따라 부정적인 측면을 보면 그렇게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친구를 이해하고 나니 그가 세상 일이 이렇게 돌아갈 수도 있음을 깨우쳐 준 은인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절대 깨우칠 수 없는 세상살이의 법칙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었다.
- 2016-07-0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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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기획... 내가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곽재우
-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이 전쟁에 패한 가장 큰 요인으로 곽재우 장군의 민병으로 꼽았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생각도 않던 의병이 나타나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곽재우 장군이 휘두르는 게릴라전술은 어느 병법이나 전술에도 없는 신출귀몰한 전술을 구사하므로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곽재우는 의병대장으로, 무인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문과시험에 뽑히고도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무효가 되어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에서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다. 곽재우 장군이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며 재산을 모은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는 데 비해 그는 같은 달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이 군량미를 얻기 위하여 전라도 곡창지대로 향하던 길목인 기강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모은 재산을 의병들의 가솔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참여를 독려하여 가능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10여 명에 불과한 의병은 5월 4일 기강 전투에서 첫 승리를 한 이후는 2000명이 넘었는데 전란 동안 그 많은 민간의병을 먹이고 입혀 본인의 재산은 물론 친척과 처가의 재산까지 거덜 냈다고 한다. 물론 가족이나 친척들은 힘든 면이 있었겠지만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부패한 조정의 관료들에 의해 그 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기에 지금까지도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바다에 성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 성웅 곽재우 장군이 있었음을 상기하는 영화나 드라마들이 만들어져 곽재우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뤄지기를 소망한다. 무엇보다 글쓴이의 남편이 곽가이다. 본인과 주변에서 분명히 조상 중에 크게 나라를 구한이 가 있어 아내와 자식 복을 타고났다고 본인과 주변에서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어서 조사해보았다. 곽재우 장군이 나라를 구해주신 것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면서 이글을 마친다(감사한 마음도 있으면서 왜 좀 이렇게 불편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 2016-06-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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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맛] 남산의 풍류를 비비다
- 봄이 물씬 오른 4월이면 봄바람도 쐬고 꽃구경도 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등산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발길로 인근 식당이 북적북적해진다. 여러 음식이 있겠지만, 간단하면서도 든든한 산채비빔밥을 빼놓을 수 없다. 벚꽃놀이를 즐기기 좋은 남산 둘레길의 비빔밥 맛집 ‘목멱산방’을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남산 둘레길 관광객을 위한 아늑한 밥집 목멱산(木覓山)은 남산의 옛 이름이다. 그 이름을 딴 ‘목멱산방’은 남산 케이블카 정류장 맞은편 돌계단을 오르면 찾을 수 있다. 서울시가 15억원을 들여 지은 한옥으로, 아름다운 남산자락이 어우러져 멋을 더한다. 시에서 위탁관리를 하고 있지만, 음식의 맛은 운영자 장경순씨의 아내 강현영씨의 부모(강광전·조효숙씨) 역할이 컸다. 고품질·저가격, 무(無)화학 조미료, 족보 있는 먹거리를 지향하는 목멱산방, 이곳의 주재료인 장맛을 강씨 노부부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 메뉴인 비빔밥에는 ‘비빔 매실 고추장’이 빠지지 않는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노부부가 재배한 매실로 만든 매실청(청과 과육을 갈아 넣음)에 고춧가루와 비법이 담긴 육수를 더해 맛을 낸다. 이외에도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메주를 쑤어 만든 간장·된장 역시 나물과 음식에 들어가는 핵심 조미료다. 부모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장 덕분에 목멱산방의 음식은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산 둘레길을 끼고 있어 산책을 나온 시민이나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잦다. 또, 서울의 명소인 N서울타워를 보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한국미가 물씬 나는 외관에 이끌려 방문하곤 한다. 특히 남산 둘레길에 벚꽃이 개화하는 4월이면 손님이 늘어나 줄을 서기도 한다. 목멱산방에서 맛볼 수 있는 산방 비빔밥(7000원), 불고기 비빔밥(9000원), 육회 비빔밥(1만1000원)은 골고루 인기 있다. 나물과 밥, 고추장이 따로 나와 입맛에 맞게 비벼 먹을 수 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봄 향기 가득한 취나물부터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깻잎나물, 겨울 눈 속에서 자라는 부지깽이나물, 유채나물 등이다. 지리산 언저리에서 수십 명의 할머니·할아버지가 직접 채취한 나물을 사용한다. 나물에는 순도 99.9%의 들기름을 넣어 깊은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순도 99.9% 참기름은 밥에 들어간다) 목멱산방에는 정이오(鄭以吾)의 ‘남산팔영(南山八詠)’이라는 시에서 따온 여덟 개의 방(운횡북궐(雲橫北闕), 수창남강(水漲南江), 암저유화(岩底幽花), 영상장송(嶺上長松), 삼춘답청(三春踏靑), 구일등고(九日登高), 척헌관등(陟巘觀燈), 연계탁영(沿溪濯纓))이 있다. 방마다 있는 창문을 통해 남산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주기적으로 오가는 케이블카도 흔한 풍경이 된다. 뒤뜰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은 남산을 병풍 삼아 한적하게 식사와 전통차를 즐기기에 좋다. 한쪽에는 작은 인공폭포도 있어 상쾌한 분위기를 더한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경치를 보러 가는 것도 묘미다. 편안하고 아늑한 이미지이지만, 메뉴 주문과 서빙, 정리까지 셀프 서비스(self service)다. 조금 수고스럽긴 하지만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가 그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 있겠다. 봄과 가을에 추천하고 싶은 자리는 야외 테이블이 있는 뒤뜰이다. 봄이면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들이 비빔밥에 달달함을 더하고, 가을에 쌓인 알록달록 낙엽은 한옥과 어우러져 고아한 정취를 풍긴다. 비빔밥과 곁들이는 메뉴로는 해산물 부추전(1만2000원), 지리산 참도토리묵(1만원), 우리 콩 두부김치(1만원) 등이 있다. 그 외에 훈제오리와 참나물 무침·한우 육회 무침·묵은지 보쌈(각 2만5000원)도 푸짐한 저녁 식사를 원할 때 많이 찾는 메뉴다. 식사 후 차를 주문하면 1500원을 할인해준다. (모든 차 메뉴는 아이스로 주문 가능, 500원 추가) 목멱산방에 들어서면 한의원에서 맡을 수 있는 쌉싸름한 한약 향이 솔솔 난다. 십전대보탕·대추차(4500원), 오가피차·당귀차(5500원) 등 몸에 좋은 한약재로 만든 차를 매장에서 직접 끓여내기 때문이다. 유자차·모과차(4500원)는 시원하게 에이드(ade)처럼 즐겨도 좋다. 겨울이면 각종 청을 만드는 손길로 분주해진다. 전남 고흥의 유자, 전북 장수에서 재배한 생강과 경북 청도의 모과 등을 설탕에 재워둔다. 과일청이 들어간 전통차에 카운터에서 판매하는 모둠한과(4500원, 삼색유과·모둠강정·찹쌀약과)를 곁들이면 잘 어울린다. 주소 서울시 중구 남산공원길 627 영업시간 11:00~21:00 문의 02-318-4790
- 2016-04-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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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 ‘부잣길’ 걸으며 부자의 기운을 한 몸에…
- 부자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경남 의령군에는 ‘부잣길’이 있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 회장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부자의 기운을 받으며 걷는 건강한 길이라 이름을 '부잣길'로 지었다. 의령군을 지나는 남강에는 '솥바위'(鼎巖)가 있다. 솥은 옛날부터 곡식, 즉 재물을 뜻한다. 의령군에는 솥바위 사방 20리 안쪽에서 큰 부자가 날 것이란 전설이 있었다. 실제로 솥바위에서 8㎞ 떨어진 정곡면에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7㎞ 떨어진 진주시 지수면에서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5㎞ 떨어진 함안군 군북면에서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 태어났다. 의령군은 부자의 고향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려 지난해 3월 부잣길을 개통했다. 6.3㎞짜리 A코스와 12.8㎞짜리 B코스가 있다. 두 코스 모두 의령군 정곡면 이병철 회장 생가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한다. 부잣길을 널리 알리고 안내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부잣길을 걷는 사람들'은 부잣길 걷기 행사 참가자들에게 문화상품권을 준다고 21일 밝혔다. 이 모임은 매달 셋째주 일요일 오전 10시 부잣길 걷기행사를 열고 있다. 매월 정기행사에 5번 이상 참여한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이 참여한 사람에게 내년 1월 5만원권 문화상품권을 시상하고 순서대로 1만원~3만원권 문화상품권을 준다. 의령군청 관광·문화재 담당 공무원이면서 시인인 윤재환씨가 부잣길을 함께 걸으며 지역 소개와 문화재 해설을 한다.
- 2014-05-2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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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도시 서울] “명품 완도김, 서울장터에서 사세요”
- 문화·예술 도시를 표방하는 서울시의 정책적 온기가 지방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지방 고유의 축제와 연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서울시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윈윈하며 시너지를 공유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마다치 않고 있는 것. 과거 일부 지자체와의 갈등을 뒤로하고 새로운 문화·예술·축제 공연의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전남 완도군과 상생협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2014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 성공 개최 등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양측은 국제해조류박람회 성공 개최 지원, 관광지(축제) 집중 홍보 및 서울시민 할인, 농수산물(전복·다시마 등) 직거래장터 운영, 농어촌 체험 및 귀농·귀촌 희망자 지원 협력, 서울·완도 도서관 프로그램 상호 교류에 힘쓰기로 했다. 서울시는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 지원을 위해 서울시 홈페이지, 미디어보드, SNS 등 홍보매체를 활용해 적극 홍보하기로 했다. 또 단체 관람객 유치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에 따라 완도군은 다음달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광화문광장, 보라매공원, 북서울 꿈의 숲에서 열리는 ‘농부의 시장’과 서울광장, 청계광장 등 ‘나눔 가득 서울장터’에 전복·김·미역 등 완도 농수산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등축제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진주시와의 관계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립각은 온데간데없고, 상생협력의 기운이 싹트고 있는 것. 서울시와 진주시는 양 도시에서 열리는 등축제의 공동발전을 위해 협력관계 구축을 주요 내용으로 한 축제발전협력서를 작성했다. 특이한 점은 이 과정에서 서울시가 많은 양보를 했다는 것. 서울시는 우선 서울등축제의 명칭을 진주남강유등축제와 이미지가 겹치지 않도록 변경키로 했다. 또한 서울등축제의 주제와 내용 역시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구분되도록 했다. 아울러 그동안의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와 협력의 미래를 제시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서울시와 진주시는 협력서 발표를 계기로 각기 주최하는 등축제 발전을 위해 교류와 협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로 했다. 또 원활한 협력을 위해 실무협의체를 구성, 운영키로 했다. 서울시의 이 같은 통 큰 결단이 녹아든 협력서의 효력은 올해 열리는 축제부터 적용된다.
- 2014-03-27 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