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지방호족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화합책으로 혼인정책을 펼쳐 모두 29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중 첫째 정부인 신혜왕후 유씨와 둘째 장화왕후 오씨는 왕건이 즉위하기 이전에 결혼한 부인들인데 그중 장화왕후 오씨가 나주 사람이다.
태조 왕건이 궁예 휘하의 장수 시절, 견훤의 후백제와 자웅을 겨루면서 후백제의 후방 깊숙이 있는 나주를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수차례 들고 나면서 나주를 차지한 왕건은 913년 철원으로 돌아와 백관의 우두머리인 광치나에 오르게 된다.
왕건과 장화왕후 사이에 태어난 무(武, 2대 혜종)가 912년생이니 910년을 전후해서 나주에서 오씨 처녀를 만난 것으로 추측되는데 전남 나주의 완사천(浣紗泉)은 그들이 만난 곳이다.
완사천은 전남 나주 시청 앞 300m 지점, 국도 13호선 주변에 있는데 원래 작은 옹달샘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만남을 기념하는 조형물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전라남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와서 목포(지금의 나주역 일원)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가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서려 있어 신기하게 여겨 가보니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하여 천천히 마시도록 한 것이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에 끌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이분이 곧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무(武)가 후에 고려 2대 왕에 오른 혜종(惠宗)이다.
그런데 고려역사를 조금 더 살펴보면 태조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는 미미한 가문 출신으로 왕비가 되었으며 정비 신혜왕후가 후사가 없어 자신의 소생이 2대 왕 혜종이 되었지만 극렬한 권력투쟁에 시달리다가 즉위 2년 4개월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혜종의 별명이 ‘주름살 임금’이었는데 그의 반대파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이야기로 추정된다. 유난히 주름살이 많았던 것을 장화왕후의 출신이 미천한 것과 연결 지어 험담하는 것으로 그의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는 주장과 함께 권력에서 밀어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혜종은 재위 내내 위협에 시달리며 수모를 감수하고 있었으니, 혜종에 대한 험담 수준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도 기록될 정도로 위태로운 자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에 왕건이 오씨 처녀와 동침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그녀를 불러 동침하였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 이에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가 그것을 즉시 흡수하였으므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가 곧 혜종이다.
이에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아무리 실권이 없었다 해도 일국의 국왕에 대해 이렇듯 기록하고 공공연히 불러댈 만큼 무시할 수 있는 것인지는 믿기 어렵다.
결국 혜종의 후사는 왕건이 즉위하여 맞이한 세 번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 정종과 광종으로 이어져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주는 태조 왕건이 젊은 장수 시절 장화왕후를 만나 인연을 맺은 곳이며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이 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니, 나주는 고려왕조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후에 혜종이 태어난 지역을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고 전설 속의 샘을 완사천이라 하였다. 그 부근에 흥룡사(興龍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흥룡사에는 혜종의 소상(塑像)을 모신 혜종사(惠宗祠)가 있었으나 1429년(세종11) 이안관 장득수가 혜종의 소상과 진영을 옥교자에 모시고 서울로 떠났다는 기록(錦城日記)으로 보아 이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성종 2년(983)에는 전국 12목(牧) 중 하나로서 나주목이 되어 5개 군과 11개 현을 다스렸다. 현종 9년(1018) 8목으로 개편되면서 오늘날 전남 지방에서는 나주만이 유일하게 목으로 남아 중심지역이 되었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피난을 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의 고향이자 2대 왕 혜종의 탄생지 나주와 고려는 역사적으로 깊은 인연을 가진 곳이다.
이렇게 전라도 도명(道名) 제정 1000년을 맞아 그 첫 순서로 전라도의 큰 고을 나주(羅州)에 대한 문화유산 답사를 간략하나마 마무리한다.
장승(長丞)은 오래전부터 마을의 입구나 경계에 세워져 수호신으로 모시던 민간신앙 조형물이었다. 그러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와는 무관하던 장승이 사찰의 경계표시나 지킴이로 변모하여 사찰장승이라는 특이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사찰장승은 절 입구에 세워 이곳부터 절집이라는 성역 표시와 함께 절을 지키는 수호신이나 호법신 역할을 했다. 경북 상주 남장사, 경남 창녕 관룡사, 전북 남원 실상사, 전남 나주 불회사 등에서 만날 수 있다.
대개 사찰장승은 전형적인 마을 장승과 불교풍의 인왕상이나 사천왕상 이미지가 결합된 경우가 많지만 나주 불회사 석장승은 사찰장승이면서 마을장승을 그대로 옮겨온 경우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의 친근하면서도 인자한 모습이다.
이 불회사 앞 석장승(石長丞)은 사찰장승이면서도 전형적인 마을장승의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인데, 남장승은 얼굴 조각선이 깊고 뚜렷하며 입 좌우에 치아가 각 1개씩 나와 있고 커다란 주먹코와 길게 꼰 수염이 특징이다. 여장승은 웃음기 띤 온화한 표정으로 절집을 지키는 수호신이 아닌 친숙한 할머니 표정 그대로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즈음하여 북인사동 안국동 로터리 부근에 불회사 석장승을 본뜬 큼직한 돌장승을 세워 한국의 미를 강조하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소리 소문 없이 철거 되었다. 불회사가 위치한 반대편에는 운흥사가 있었다. 신라 효공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조선시대 차(茶)로 유명한 초의선사가 출가한 곳이기도 한데 6·25전쟁 때 전소(全燒)되어 폐사지가 되었으나 최근 절집을 새로 지어 다시 시작하는 듯하다.
그곳 입구에도 석장승(石長丞) 2기가 서 있으니 운흥사터 돌장승(중요민속자료 제12호)이다. 역시 사찰장승으로 분류되며 과거 운흥사가 꽤나 번창했었는지 진입로 밖 멀찍이 2개를 세웠는데 절집이라기보다 동네 중간에 서있는 느낌이다.
여장승은 온화한 면이 없고 웃는 모습이지만 강해 보이며 남장승은 큼직하게 위엄이 있지만 인자한 모습의 노인상이다. 역시 좌우로 치아가 2개 나와 있으며 수염은 턱밑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불회사 석장승과 전체적인 모습이나 조각수법이 비슷하다.
우리나라 돌장승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 이곳 운흥사터 석장승은 제작연대가 뚜렷하여 돌장승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불회사 석장승도 같은 시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장승의 당(唐)은 사당가는 길을 뜻하며 주(周)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중국의 당나라와 주나라 장군들을 뜻하는 사대주의 사상이라며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근래 들어서는 지나치게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세우거나, 미신이다 우상숭배다 하며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파괴하는 행위도 벌어지고 한국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생각보다 많은 것도 현실인바, 장승에 대한 문화재로서의 평가와 올바른 자리매김이 절실한 실정이다.
국내 각지 사찰을 찾아 가보면 절집 밖 멀리, 또는 가까이 일주문 근처, 그러니까 절집으로 들어서기 전쯤에 이제 이곳부터 사찰 영역이다 싶은 곳에서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저 2개의 석재 돌기둥이 서 있을 뿐이라 지나치기에 십상이다.
막상 당간지주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설명하는 게 쉽지 않다. 아마도 온전하게 '당(幢)을 붙들어 맨 간(杆)을 세운 지주(支柱)'의 완성체를 본 적이 없고, 늘 지주 2개만 보아서가 아닐까?
‘당간지주’는 '불화를 그린 깃발 당(幢)을 붙들어 맨' '간(杆)'을 세우기 위한 '지주(支柱)'이다.
즉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벽사적인 목적으로 만든 당이라는 깃발'을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들머리 어딘가에 높이 매달아야겠는데, 그러려니 높다란 장대 같은 깃대가 필요한바 이 깃대가 곧 ‘간’이다.
이 장대처럼 긴 간을 높이 세워 단단하게 고정할 것이 필요한데 바로 그 받침대이자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 ‘당간지주’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당이나 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 있으니 우리가 흔히 만나는 돌기둥 2개가 그것이다.
결국 당간지주는 깃대 역할을 하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구조물인데 쇠[鐵]로 된 철당간(鐵幢竿), 돌[石]로 된 석당간(石幢竿), 나무[木]로 된 목당간(木幢竿) 등이 있다.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으나 드물게 쇠나 돌로 만든 당간이 남아 있는데, 나주에 돌로 만든 보물 석당간이 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우는 것인데 이곳에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풍수지리상 나주가 떠나가는 배 모양(行舟型)이라 배를 붙들어 매고 나주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거대한 돛대를 세운 의미라고 하니 또한 특이한 경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나주목 고적조(羅州牧 古跡條)에 ‘동문 밖에는 석장(石墻)을, 안에는 목장(木墻)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1872년의 나주목 지도에도 석장과 목장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보는 석당간(석장)외에도 목당간(목장)도 있었다는 것인데 목장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는 돌당간(석장)만 남아 있다.
그런데 나주에서 내비게이션으로 동점문 석당간을 검색하면 웬일인지 남문 쪽으로 안내하여 제대로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물어물어 찾아가게 된다. 나주시 발행 관광지도 역시 위치 표기가 정확하지 않아 근처에서 맴돌며 고생하고 있으니 조속한 시정이 요구된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이다.
지방에 세운 향교는 국가가 유교 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켰다. 교육의 기능 외에도 지방 단위 유교적 행사를 치르는 문화기능을 담당했다. 또,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 시험을 통과하여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하는 정치기능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나주 향교(사적 제483호)는 나주읍성의 서쪽 성문 밖에 자리 잡고 있다. 향교가 있어 동네 이름이 교동(校洞)인데 전국에 향교가 있는 많은 곳 또한 교동(校洞)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교육시설을 크기로 따지면 나주 향교가 성균관 다음으로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다.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대성전(大聖殿)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 건축을 대표할 만큼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나주 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년) 처음 지어져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와 달리 나주 향교는 앞에 사당을 두고 뒤에 강당을 둔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이제는 교육의 기능을 하지 않으나 정기적인 제향을 올리거나 방문객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문성왕(文聖王)으로 부르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사성(四聖)과 안연, 자공, 자로 등 10명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 주돈이, 정이, 장재 등 송조육현(宋朝六賢)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등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를 함께 모셔 정기적인 향사(享祀)를 올린다.
나주 향교의 주춧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는데, 이는 검박한 유교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꾸밈이다. 특히 연꽃이 불교적인 무늬임을 감안하면 이곳이 전에는 사찰이었거나 근처의 절집 주춧돌을 가져와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향교 돌담 밖으로는 여러 개의 비석을 모아 놓았다. 관아에 있는 비석들은 대부분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공덕비이다. 이곳 향교에는 학문을 펼치는데 애써주심에 감사한다는 흥학불망비(興學不忘碑)들이다.
전국 군(郡) 단위로 대부분 향교를 보유하고 있으나 나주 향교 대성전은 서울의 문묘와 전북 장수향교, 강원도 강릉향교 등과 함께 웅장한 규모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대성전 벽에 바른 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왔다고 할 만큼 자부심을 갖는 곳이다.
그밖에도 근처에는 나주읍성 4대 성문중 서쪽 문인 서성문(사적 제337호)이 있다. 관아는 남아 있지 않으나 목사(牧師)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琴鶴軒)과 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 등이 있어 시간을 내어 둘러볼 만하다.
올해는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이 정해진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1018년, 즉 고려 현종 9년에 중앙관제와 함께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했었다. 당시 전국을 5도 양계(서해도·교주도·양광도·전라도·경상도, 북계·동계)로 편제하면서 강남도(금강이남의 전북)와 해양도(전남, 광주)를 합쳐 전라도라 명했다. 해당 지역의 큰 고을이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할 때 나주목(牧)이 된 이래 조선 말까지 900년 남짓한 기간 전남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광주도 그때까지는 나주에 딸린 군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주둔하고 있을 때 만난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 씨의 고향이니 고려 2대 임금 혜종의 외가인 셈이다.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군의 2차 침입 때는 왕이 나주로 피난을 가며 열흘 남짓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그런 '천년 목사 고을'이기에 나주를 첫 답사지로 정하고 나주읍성(사적 제337호)을 가장 먼저 찾아봤다. 아쉽게도 성벽 대부분이 훼철되어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동·서·남·북 4개소에 있던 성문은 북문을 제외하고 모두 복원된 상태다. 읍성의 중심인 목사가 집무하던 관아는 아직 복원되지 못한 채 관아문 정수루(正綏樓)만 남아 있었다. 그 옆으로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錦城館)과 목사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金鶴軒)이 오롯하다.
나주목 객사와 금성관
객사(客舍)란 고려~조선시대 때 매월 초하루와 보름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궁실로써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신 공간이기도 하다.
나주 객사의 정청은 금성관(錦城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정문에서부터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의 3개 문을 거쳐 들어간다. 현재는 금성관 좌우로 날개처럼 이어진 건물인 동익헌과 서익헌 그리고 중삼문과 정문인 망화루가 복원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금성관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나주목사 이 유인이 정문 망화루와 함께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목사 김개에 의하여 중수되었고 이후 고종 때 다시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군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파괴됐는데, 1963년과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익헌과 서익헌은 2004~2008년에 복원하였는데 동익헌은 서익헌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다. 전라도 관찰사 이행(1403~1404년 재임)이 벽오헌(碧梧軒)이라 이름지어 정청과는 별도의 현판을 달았다. 동익헌에서는 요즘 각종 공연이나 발표회 등을 진행하고 있다.
공덕비와 비석군
나주 객사 담장 안쪽 한편으로는 수십 기의 비석들이 모여 있다. 역대 목사(牧使)나 관찰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들이다.
방방곡곡 면(面) 단위에만 가도 공덕비 한두 개는 서 있으니 천년 목사 고을 나주에 세운 비석들이 만만치는 않을 터.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석이나 귀부의 생김생김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칭송받는 사람의 이름이 낯익어 반가운(?) 비석도 제법 보인다.
나주 금성관은 아직 부분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며, 추가적인 복원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료입장이며, 30분 남짓이면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다. 수시로 전통공연이나 음악회 등이 열리니 나주 탐방 시 가장 먼저 들려 볼 것을 권한다. 금성관 앞으로는 그 유명한 나주 곰탕거리로 서울까지 알려진 맛집들이 즐비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 편을 읽으면서 ‘비단결처럼 고운 초록빛 강물이 휘돌아가’는 영월의 청령포가 궁금했다. 언젠간 한번 꼭 가봐야지 했는데,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고 돌아보게 되었다.
어린 단종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청령포는, 시린 역사가 수려한 풍광 때문에 더 가슴 아픈 곳이다. 육지 속 섬이라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관광객이 어느 정도 모이면 나룻배가 출발했다. 배가 출발해서 배 엉덩이를 돌리자마자 도착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배를 타기 전 건너다본 청령포는 참 아름다웠다.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그러나, 청령포 하면 아름다운 모습 대신 어린 단종의 눈물이 먼저 떠오른다. 재위 2년 만에 갑자기 죽은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이곳으로 유배당해 슬픔과 통탄의 시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섬 안에는 단종이 살던 기와집 한 채가 복원돼 있었고 바로 앞엔 집이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때 조선의 왕이었던 단종이 한양에서 쫓겨와 살던 이곳은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드리운 진한 그림자와 커다란 소리로 울어대는 바람 소리가 차갑게 느껴졌다. 밖에서 보았을 때 따뜻하고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청령포의 어두운 기운이 살갗에 척척 달라붙어 서늘했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해 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았다는 노산대나 단종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쌓은 망향탑까지 둘러보았다. 노산대 위에서 본 멋진 절경이나 켜켜이 쌓은 돌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은 내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노산대를 내려오니 솔밭 한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키를 자랑하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단종의 거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단종이 유배 온 것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은 소나무라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 이름 붙었다.
그는 사실 날마다 통곡했을 것이다. 왕위를 빼앗긴 아픔보다는 섬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처절한 외로움과, 칠흑 같은 밤에 찾아오는 절벽 같은 공포 때문에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그 통한의 설움을 소나무가 다 들었다.
관음송이 600년 전에 보고 들은 어린 임금의 통곡과 슬픔을 알고 싶어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나무는 말이 없었고 바람이 자꾸 울었다. 붉은 꽃잎이 바람에 하나, 둘씩 떨어졌다. 관광객들은 관음송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관음송은 무심히 서서 관광객들의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시 육지로 돌아오는 나룻배에서,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영월 사람들과 염색일을 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내던 단종비가 통곡할 때 함께 가슴을 치며 울어준 사람들을 떠올렸다. 세상과 격리된 채 단절된 시간을 보내던 이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주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뒤돌아본 청령포는, 지는 해 아래서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