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가장 가까운 철길이 강원도 강릉 정동진이라고 했다. 달맞이고개에서 동해남부선 열차를 봤을 때 이 철길은 바다와 두 번째로 가까울 거라로 생각했다. 빨간 무궁화열차가 바다에 닿을락 말락 실랑이하듯 달렸다. 그 낭만적인 풍경을 다시 보고 싶어 다음 열차를 한참 기다렸던 적이 있다. 이제 그 철길에 새 해변열차가 달린다.
동해남부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옛 동해남부선의 역사가 파란만장하다. 부산~포항을 오갔던 동해남부선 열차는 1935년 일제가 개통했다. 자원을 수탈하고, 일본인이 해운대를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무궁화호가 부산~울산~경주~포항을 오가며 오랫동안 서민의 발이 돼주었다. 2013년 동해남부선을 이설해 복선 전철화했다. 기존 철로를 복선화하려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설된 동해남부선은 2016년부터 영덕까지 가는 동해선으로 편입됐다. 동해남부선은 그렇게 영영 사라졌다.
동해남부선 노선 중 해운대 미포~청사포~송정 구간은 바다와 가까워 아름다운 철길로 꼽혔던 곳이다. 이 구간을 재활용할 방안을 두고 관련 기관과 전문가들이 고심했다. 레일바이크, 산책로, 자전거길, 노면전차 등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최종적으로 해변열차, 스카이캡슐, 산책로, 쉼터가 어우러진 철길 공원 ‘블루라인파크’를 조성하기로 했다.
2015년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드디어 올해 10월 해변열차를 개통했다. 철로 옆에는 덱 보행로인 그린레일웨이를 놓았다. 미포~청사포 구간에는 공중 레일을 설치해 스카이캡슐을 운행한다. 11월 말 개통할 예정이다.
영화 ‘해운대’와 미포의 추억
약 6년 동안 열차가 다니지 않던 철길에 다시 열차가 다닌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미포로 향했다. 미포는 해운대해수욕장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포구다. 미포의 ‘미’는 꼬리 ‘尾’ 자를 쓴다. 아름다울 ‘美’ 자를 써도 억지스럽지 않은 바닷가다. 미포에서 초승달처럼 해안선이 고운 해운대해수욕장과 동백섬, 광안대교,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포가 유명해진 계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해운대’(2009) 덕이 크다. 피서객 수백만 명이 모인 해운대해수욕장에 초대형 쓰나미가 시속 800km로 밀려와, 미포 횟집 거리와 미포 건널목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뛰어난 CG 기술로 참혹한 재해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한 장면이 생생하다.
미포 건널목의 실제 풍경은 고요했다. 건널목이 있는 언덕길의 끝은 바다였고, 바다 한가운데 오륙도가 떠 있었다. ‘땡땡땡’ 다급한 종소리가 언덕에 울려 퍼지면 차와 오토바이들이 건널목 앞에 섰다. 차단봉이 내려오고, 잠시 뒤 무궁화열차가 쌩하니 지나갔다. 열차 너머로 미포 앞바다가 반짝였다.
바다와 해송과 사람을 만나는 해변열차
지금 미포 건널목은 흔적만 남았다. 옛 건널목에서 청사포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해변열차 출도착역인 미포정거장이 나온다. 이국적인 모양의 해변열차가 기다린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 넉 대의 열차가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해변열차의 객차는 2량이며, 좌석이 창을 향해 두 줄로 배열돼 있다. 객차 앞뒤에는 독립된 4인 좌석이 있다. 줄을 빨리 서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해변열차는 미포정거장을 출발해 달맞이터널,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구덕포를 지나 송정정거장까지 약 5.4km 구간을 달린다. 시속 20km 내외로 천천히 달리므로 풍경을 여유롭게 즐긴다. 철로 옆 보행로를 걷는 사람들이 열차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든다. 열차 탑승객도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열차 안에서 바다, 솔숲, 어촌마을 구경하는 것 못지않게 사람 구경도 흥미롭다. ‘도심 속 해변열차’ 콘셉트가 해변열차의 매력 포인트인 것 같다. 보행로와 철로 사이에는 펜스가 설치돼 있고, 건널목 구간에는 안전요원이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
열차가 달맞이터널을 지나자 안내방송이 나온다. “해운대 달맞이고개 해월정 앞바다는 동해와 남해의 경계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11시 방향으로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부산 앞바다는 동해일까, 남해일까 묻는 퀴즈에 이제는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
등대가 아름다운 청사포와 다릿돌전망대
해변열차 자유이용권을 사면 맘에 드는 정거장마다 내려 관광하고 다시 탈 수 있다. 청사포정거장에 내려 청사포를 천천히 둘러본다. 청사포는 일출과 초저녁 달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포구 너머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연인처럼 서 있는 풍경도 그림 같다. 바닷가에는 오래된 조개구이집이 늘어서 있다. 이곳의 조개구이는 양념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가리비, 키조개 같은 큰 조개에 모차렐라와 양파를 듬뿍 넣은 고추장 양념을 얹어 굽는다.
청사포정거장에서 다릿돌전망대정거장까지는 가까워 걸어갈 만하다. 다릿돌전망대는 청사포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푸른 용을 형상화해 유선형으로 만들었다. 높이가 20m, 길이는 72.5m에 달한다. 전망대를 상공에서 보면 용이 꿈틀대며 바다로 들어가는 것 같다. 전망대 끝자락에는 반달 모양의 강화유리를 설치해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다릿돌이란 이름은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암초들이 징검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
다릿돌전망대를 지나면 기암괴석이 많기로 소문난 구덕포가 나온다. 철길가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카페, 숙박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도착점인 송정은 부산의 3대 해수욕장이라 불린다.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해 서핑 성지로 인기 있다. 추운 겨울에도 서퍼들을 볼 수 있다. 바닷가 주변이 해운대보다 한적해 송정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바다에서 보는 부산 야경
송정에서 다시 미포로 돌아오니 해 질 녘이다. 부산은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이므로 야경 유람선을 타보기로 했다. 6시 10분 배가 첫 야경 유람선이다. 겨울에는 오후 6시 전에 해가 지므로 야경 보기에 좋은 시간이다. 승객이 혼자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손님이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해운대 바닷가에 늘어선 고층 빌딩과 호텔, 동백섬의 누리마루 Apec 하우스, 신도시 마린시티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그 빛이 수면에 비쳐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야경에 방점을 찍은 것은 광안대교다. 해상에 건설된 국내 최대 규모의 2층 현수교로 높이 비상하는 갈매기를 형상화했다. 국내 기술진이 만든 다리여서 의미가 크다. 밤이 되면 10만 가지 이상의 색상을 표현하는 조명이 광안리 바다를 보랏빛으로 수놓는다.
뒤에 앉은 청년들이 “와 광안대교 야경 진짜 쩐다. 유람선 탄 건 신의 한 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런 멋진 야경은 처음 본다는 뜻이리라. 젊은 나이에 유람선에서 부산 야경을 봤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유람선이 광안대교 밑을 통과해 다시 미포로 돌아온다. 승선 시간 5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단종이 마지막을 보냈던 영월로 여행을 떠난다. 겨울날, 더욱 가슴이 시리도록 다가오는 청령포와 관풍헌, 장릉으로 이어진 단종의 자취를 따라가는 영월여행은 단순히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지, 채 피어나지 못한 젊음과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은 백성을 만나는 여정에 마음은 더욱 단단해진다.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을 모르겠다. 특히 다 자란 어른의 권력욕은 치명적이다. 12세에 왕위에 올라 17세에 숨을 거둔 단종(端宗 1441~1457)의 짧은 생애,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은 지 1년 반 만에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그를 모시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으로 내몰렸다. 어린 소년 왕은 스스로 왕위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456년(세조 2) 수백 명이 죽어 나갔던 사육신 사건이 후 얼마 후에 어린 소년은 제 삼촌인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는다. 1457년 10월의 일이다.
영월 첫 여행지는 이른 아침의 청령포다. 눈은 오지 않으나 스산한 겨울바람이 부는 청령포를 따라 회색빛 옅은 안개가 외진 땅을 감싸고 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어린 단종이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그의 마음을 그대로 전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600년 된 관음송(觀音松)만이 그때를 기억하는 듯 처연하다. 어린 노산군이 이 소나무에 앉아 한을 토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한다. 그것을 보고 듣고 하였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관음송과 소나무, 참나무가 어우러진 숲은 흘러간 세월의 풍상에 아픔을 차곡차곡 갈무리한 듯 무게감이 느껴진다. 뒤로는 넘을 수 없는 절벽 산이, 양옆과 앞으로는 시퍼런 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이곳에서 눈물지었을 어린 임금의 심정은 얼마나 막막하였을까.
단종이 죽음을 맞이한 곳은 영월의 관아인 관풍헌이다. 홍수가 나 청룡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긴 뒤 두 달여 만에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한다. 관풍헌 앞에 있는 누각 자규루에 그가 읊었던 시가 그의 피눈물 나는 애통함을 대변하고 있다.
...자규새 소리 멎고 조각달이 밝은데
피눈물 흐르고 꽃송이 떨어져 붉었구나...
자규새는 신하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한 두우가 죽어 새가 되어 촉나라 땅을 돌아다니며 피를 토하며 울었다는 전설 속 소쩍새를 말한다. 단종의 원혼이 이 땅 어딘가를 날며 울고 있지나 않은지.
현재 관풍헌과 자구류는 공사 중이다. 왕방언이 가져온 사약을 마셔야 했을 소년 왕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의 시신이 묻힌 장릉으로 향한다.
단종은 죽음 뒤에도 편치 않았다.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을 내렸고 후환이 두려운 사람들은 시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의 죽음을 배웅해준 단 한 사람은 엄흥도였다. 향리의 우두머리였던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들쳐 메고 산으로 올라가서 그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한때나마 왕이었던 이의 죽음이 이리도 초라할 수 있을까. 80여 년 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던 그의 묘는 중종 33년(1538) 영월 부사로 부임한 박충헌이 꿈에서 단종을 만난 뒤 노산 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묘호가 단종으로, 능호가 장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숙종 24년(1698)에 이르러서다.
능은 보통의 왕릉과 달리 가파른 능선 위에 있다. 단종의 시신을 몰래 산중에 묻어야만 했던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능하다. 능으로 가는 길에 서있는 소나무는 능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듯하다. 무인석, 병풍석, 난간석은 없고 문인석만 있는 단출한 느낌에 생을 다하지 못한 왕의 모습을 보는 듯 쓸쓸함이 감돈다. 능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홍살문을 지나 90도로 완전히 꺾인 우측 끝에 정자각이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 바로 옆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종친․시종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가 보이고 그 곁으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이 그나마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제사 때 썼던 우물인 ‘영천’을 지나 정자각에 서면 겨우 봉분 위만 슬쩍 보이는 능이 애달프다. 능 주변의 드넓게 자리한 소나무 숲은 호젓하여 걸을 만하다. 장릉을 돌아 나오는 길에 단종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던 엄흥도를 기린 엄홍도정려각을 유심히 바라본다. 싸라기눈이 가볍게 뿌리는 길을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에 새로운 미래를 펼쳐갈 아이를 꼭 잡아주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른을 그려본다.
△가볼 만한 식당
*장릉 보리밥집
장릉 주변 맛집으로 말린 옥수수와 소품을 아기자기하게 놓아두었고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이 갖는 정겨움이 있다. 방에 앉아 보리밥을 주문하면 얄팍하게 부친 메밀부침이 먼저 나오는데 함께 나오는 열무김치와 잘 어울린다. 큼지막한 감자가 들어간 감자밥과 짜지 않은 갖가지 반찬의 조화가 꽤 많은 양의 밥을 싹싹 비우게 한다. 반은 비벼먹고, 반은 반찬을 맛보며 깔끔하게 먹는 것도 좋다. 보리밥 8000원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01-1
*메밀전병과 배추전
메밀전병은 메밀가루를 아주 묽게 반죽해 얇게 펴서 무, 배추, 고기 등을 넣고 말아서 지진 음식이다. 예전에는 좁은 골목길에 이곳저곳 자리했던 전병 집이 영월 중앙시장 건물 안에 쪼르르 모여 있다. 메밀전병이라도 강원도 지역마다 그 맛이 조금씩 다른데 영월은 매콤한 맛이 강하다. 그중에서 미소네맛집을 추천한다. 주인 할머니께서 인터넷을 못해 인터넷 주문은 불가하고 전화 주문 시에는 한 개에 1500원, 직접 가서 사면 한 개에 1000원이다. 살짝 절여 지진 배추전과 함께 먹으면 매콤과 심심함이 어우러져 별미다.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제방안길 16-1
흔히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멀뚱멀뚱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려보지만 세상은 아직 단잠에 코골이 중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일찍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다. “안녕하세요. 박영주입니다.” KBS 1라디오 의 박영주(朴英珠·57) KBS 아나운서가 그 주인공이다. 매일 아침 97.3MHz의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들려오는 그녀의 모닝콜은 전국 방방곡곡 시니어 애청자들에게 비타민주스처럼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새벽 4시, 평범한 사람이라면 침대에 누워 여전히 어제의 꼬리를 붙잡고 있을 법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토록 이른 시각에도 활기찬 하루의 포문을 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의 애청자들이다. 상냥하고 은은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덩그러니 놓인 새벽의 허전함을 사뿐히 채운다. 이미 애청자들과 끈끈한 교감을 이루고 있지만, 방송을 놓치고 있을 이들을 위해 박 아나운서에게 직접 소개를 부탁했다.
“새벽 4시부터 4시 40분까지, 시니어를 위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입니다. 새벽잠은 없고 그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 이 프로그램을 듣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라는 이름으로 방송했어요. 청취자 층을 50대까지 확장하려는데, 그들을 실버라 부르긴 어울리지 않아 ‘시니어’를 사용하면서 가 됐죠. 이름이 바뀌고 얼마 뒤에 제가 진행을 맡아 3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건강, 추억의 음악, 영화 그리고 한시까지
새벽 프로그램인지라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다가 코너 편성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9988 치매완전정복’, ‘행복밥상’, ‘낭독으로 읽는 고전소설’, ‘유성기로 듣는 우리 음악’, ‘그 시절 그 노래’, ‘추억의 영화’, ‘꿈꾸는 책방’ 등 건강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대한 14가지의 콘텐츠가 한 주를 가득 채운다. 그녀가 소개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이라는 문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일 리포트와 더불어 두 가지의 주제를 40분 동안 꾹꾹 눌러 담아 들려주니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거기에 친근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빈틈이 없다. 그중 청취자들의 반응이 가장 좋은 코너는 무엇일까?
“치매에 관한 정보 제공과 상담까지 해드리는 ‘9988 치매완전정복’이 반응이 좋아요. 또 ‘한시 산책’을 선호하는 분들도 많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를 잘 모르지만, 시니어 세대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자를 다 배웠잖아요. 다들 그런 향수가 있는데, 일반 방송에서는 잘 안 다루죠. 그런 주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각양각색 코너를 마련하는 데 제작진을 비롯한 진행자의 노고도 상당할 터. 여느 교양 프로그램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은 시니어 청취자를 향한 그들의 깊은 고민에서 비롯됐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과 함께 논의해요. 우리 작가는 20여 년 문화 쪽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는데, 나와 또래도 비슷하고 취향도 잘 맞아요. 그래서 문화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다 다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책, 음악, 영화, 시, 소설 등 미술이 빠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라디오라서 미술이 지닌 시각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평소 일주일에 두 번은 영화를 보고, 한 달에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 음악회, 발레, 오페라 등을 즐긴다는 박 아나운서다. 그녀의 폭넓은 문화적 소양과 더불어 어린 시절 추억은 다채로운 코너 구성에 힘을 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급 배정을 받아 교실에 가보니 담임선생님께서 커다란 전지에 윤동주의 ‘서시’를 써서 붙여놓으셨어요. 매일 조회, 종례시간이면 ‘차렷, 경례’를 하고 그 시를 다 함께 낭송하곤 했죠. 한 달 동안 매일 하나의 시를 외우다시피 읊다가, 다음 달이 되면 또 다른 시를 그렇게 써놓으셨어요. 그 순간이 굉장히 좋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죠.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에 시가 넘쳐나면 보다 더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 코너를 넣게 됐어요. 그건 제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코너라 남다른 애착이 있죠.”
사연 속 사연이 담긴 ‘부모님 전 상서’
요일별 달라지는 코너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토요일 방송분인 ‘부모님 전 상서’다. 청취자가 부모님께 띄우는 편지를 성우가 낭송하는 시간인데, 매주 애잔하고 감동 어린 이야기로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신다.
“부러웠던 사연이 있어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동네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않아 아버지께서 홀로 수습하시다가 결국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셨대요. 비록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자녀들의 우애가 대단했죠. ‘의좋은 삼 형제’라고 불렀는데, 큰형이 나무를 하면 꼭 두 동생의 집에 몇 단씩 놓고 가고, 작은 형이 시장에서 뭘 사면 그것을 셋으로 나눠 형과 아우의 집에 주고…. 결혼해서도 윗집 아랫집 다 같이 살았죠. 그러고도 아쉬워서 나란히 묻힐 곳을 마련하고 묘비명도 미리 써두었다는 거예요. ‘우리 삼 형제는 한평생 함께 살면서 우애를 나눴는데 그 정을 두고 가기 아쉬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여기 나란히 묻힌다. 후세들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며 잘 지내라.’ 그런 이야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신다면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참 부러운 마음으로 사연을 소개했어요.”
이 코너는 편지의 내용에서 오는 감동뿐만 아니라, 편지 그 자체에서도 특별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휴대폰 문자로도 라디오 사연을 받는 요즘, 의 청취자들은 젊은 시절 라디오 사연을 보냈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정성 어린 손편지를 보내온다. 한평생 일하던 회사에서 쓰던 누런 갱지, 신문지 사이에 들어 있는 광고지 뒷면, 아들의 회사 로고가 찍힌 기안용지 등 빳빳하고 깨끗한 종이가 아닌 저마다의 알뜰함이 묻어나는 편지지가 인상적이다. 또 한글을 잘 몰라 구술을 해서 아들이 대신 적어 보낸 편지부터, 할아버지가 늘 하는 이야기를 타이핑해서 사연으로 보낸 손주, 손에 힘이 풀려 삐뚤빼뚤 쓰인 필체 등 그들이 보낸 사연에는 또 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청취자를 위하여, 그리고 청취자로부터
온기 어린 사연들만 보아도 어딘가 모르게 시니어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듯, 청취자의 특징이 드러나는 몇 가지 귀여운(?) 오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가볍게 넘기기보다는 청취자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는 박 아나운서다.
“우리 방송 이름이 ‘행복한 시니어’인데, 어떤 청취자께서 사연을 보내면서 ‘행복한 신녀’라고 써서 보내셨더라고요. 아마 ‘선녀’처럼, ‘신나는 여(女)’ 이런 식으로 의미를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우리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려 해요. 또 제 이름을 ‘백영주’라고도 하고, ‘박영희’라고도 하고, 청력이 약해지셔서 그런 건데 더 또박또박 말씀드리려고 신경 쓰고 있죠. 가끔 리포터가 현장에 나가 청취자를 만나면 (코너가 많다 보니) ‘박영주 아나운서가 참 똑똑하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아느냐’고 칭찬하신대요(웃음). 그러면 작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드리곤 하죠.”
그 외에 대표적으로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새벽 4시 생방송 진행으로 안다는 것이다. 대체로 라디오는 생방송이지만, 새벽 시간대 방송의 경우 사전 녹화로 만들어진다. 박 아나운서가 실제 방송을 녹음하는 시각은 오전 9시 출근시간 이후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벌써 33년째 KBS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몇 년 후면 은퇴를 맞이하게 될 박 아나운서에게 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1985년에 입사해서 초창기에는 TV 프로그램을 많이 했죠. 15~20년쯤 지나면 TV 프로그램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시니어 아나운서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주력하게 돼요. 이제 퇴직이 4년이 채 안 남았는데, 선배들도 그랬고 아마 이 프로그램을 하다가 떠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젊어서 한참 아이 키우고 할 때는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죠. 이제는 상당 부분이 온전히 나의 시간이거든요. 일상의 성찰도 있지만, 지난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참 많아요. 아주 느린 호흡으로 참되게 나를 위해 집중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복되게 가꿔나가 보려고요.”
현재도 시간을 내서 사단법인 ‘공감인’에서 진행하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의 집단 치유 프로그램 치유활동가로 활약하는 그녀는 은퇴 이후에도 이를 유지하며 시각장애인 녹음 봉사자 교육 등에도 힘쓰고 싶다고 했다. 또 한 가지, 곁에 계시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이러한 다짐에는 ‘부모님 전 상서’ 코너가 교훈이 됐다.
“부모님은 늘 거기 계시고, 당연히 뒷바라지해주는 분들로 여겨왔는데, 이 코너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러 사연 속 공통 메시지는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뵀더라면, 식사 한 끼 함께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거예요. 저는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그걸 할 수 있는 처지거든요. 원래는 냉랭한 딸이었는데, 가능하면 더 자주 찾아뵙고, 더 살갑게 하려고 노력하죠.”
행복한 시니어, Just Do it!
는 청취자들의 노후뿐만 아니라 다가올 박 아나운서의 노후까지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한 시니어’는 어떤 모습일까?
“글쎄요, 사람들은 행복을 어떤 특별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여행할 때, 친구와 대화할 때,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행복을 느끼죠.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춤출 때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가 춤을 출 때는 단지 춤추고 있고, 춤에 몰입해 있을 뿐이에요. 그럼 정확하게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춤을 추고 나서 아닐까요? 그건 이미 춤을 추는 행복에서 벗어난 상태죠. 궤변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요.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고,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에는 ‘아! 그래도 행복했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살아 있다면’ 행복한 시니어가 아닐까 해요.”
끝으로, 의 청취자와 독자를 위한 응원의 한마디를 부탁했다. 영화 마니아답게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영화 의 대사를 언급했다.
“영화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네가 신에게 이 난국을 헤쳐갈 용기를 달라,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신이 과연 어떤 형태로 용기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용기? 사랑? 그게 뭔데? 네가 행동을 하면 거기에 용기가 얹어진다. 또 네가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거기에 사랑이 얹어지는 거다.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언가를 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용기이고 사랑이다.’ 나이 들면 뭔가를 하려다가도 못할 이유와 핑계를 찾거든요. 그럴 땐 그냥 무엇이든 일단 해보셨으면 해요. 무언가를 했을 때 거기 길이 있고 답이 얹어질 거예요. 자신을 믿고 저질러보세요. 저스트 두 잇(Just do it)!”
>박영주 아나운서
KBS 11기 아나운서로 입사이후, KBS 제3라디오 , , KBS 1TV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현재는 를 진행하며 KBS 편성본부 KBS한국어팀 팀장을 맡고 있다.
아침 출근길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정말 모처럼의 단비다. 제발 대지를 흠뻑 적셔주면 좋겠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농심이 얼마나 고대한 비인가. 그러나 좀 내리나 하던 빗줄기는 야박하게도 금세 그쳐버린다. 또 태양이 쨍쨍한 햇볕을 내리비추며 심술궂게 혀를 내밀고 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뭐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피하기보단 오히려 태양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생각하는 곳이다. 벚꽃이며 목련이며 봄꽃 소식에서부터 부고장이며 청첩장까지 줄줄이 달리는 SNS 댓글들 속에서 말이다.
지난 6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개장한 부산은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해운대로 찾아든 사람들로 벅적일 것이다. 필자도 이참에 올여름 휴가지로 부산여행이나 추천해볼까?
부산이 처음이라면 동백섬 한 바퀴 돌고 해운대 백사장 거닐다 달맞이고개에서 야경에 취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도 있고, 줄서서 먹는다는 대연동 쌍둥이 돼지국밥에서 민락동 회센터로 이어지는 식도락 코스도 좋고,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누비는 지름신 쇼핑 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가면 좋겠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와서 대학 졸업 때까지 약 18년간을 살았으니 그야말로 청춘의 황금기를 오롯이 보낸 곳이 바로 부산이다. 몇 년 전엔 졸업 후 약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던 문방구가 아직까지도 있는 걸 보고선 너무 놀랍고도 반가워 한참을 쳐다보며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간절함이 통했는지 이젠 칠순이 훌쩍 지난 그 옛날의 문방구 아저씨와도 짧게나마 재회의 기쁨도 누렸다. 추억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오륙도의 윤슬!
남구 용호동 끝자락을 밟으면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장관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오륙도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 같은 날 햇빛에 아롱질 그 눈부신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정말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좌측으론 광안대교를 굽어보며 우측으론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조망할 수 있는, 해안절경을 따라 이어진 길도 너무 매력적이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몇 년 전에 개장된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 그 넘실대는 파도에 부서지는 바위섬은 아찔한 스릴과 폐부를 찌르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때다 하고 ‘부산 아지매’들이 권하는 회 한 접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주가 없다. 흥정 연습이라도 미리 해둬야지 싶다.
철썩이는 밤바다에 풍경소리, 해동 용궁사!
해운대를 돌아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면 금방 닿는 곳이 있는데 최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용궁사다. 바닷가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덕분에 용궁사라는 이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절이다. 낮 시간대의 비경도 일품이지만 필자는 밤 시간대의 관람을 권하고 싶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철썩철썩 귓가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풍경소리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그 밤바다의 ‘콜라보레이션‘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Kiss in the dark’은 바로 이런 곳에서 해야 한다. 애독자들이시여, 부디 ’낮 뜨거운‘ 시간을 피해 어둠을 틈 타 살짝궁 다녀가시길 권한다. 참고로 인근의 송정해수욕장 바다 산책로도 추천한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고 서울에 둘레길이 있다면, 부산엔 갈맷길
와우~ 여긴 또 어디일까? 부산 앞바다 남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동으로 이어진 해안절경 길인 송도 갈맷길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케이블카까지 재가동 했다고 하니 올 여름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빨리들 다녀가시라.
어떤 투어이든 일단 여행길엔 입이 심심해선 안 된다. 돼지국밥이나 곰장어 구이, 밀면, 물회도 있으니 입맛 따라 고르면 된다. 부평시장 야시장(일명 깡통시장) 구경하며 거인통닭 시식도 권할 만하다. 인근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단팥죽 한 그릇 하는 것도 이열치열엔 그만이겠다.
아~ 부산, 그곳에 가고 싶다.
좁고 불편한 비행기 좌석에 앉아 비몽사몽간에 몇 시간을 버티었을까? 몸도 뒤틀리고 다리도 저리고….그렇게 고통의 몇 시간이 흐르고 나니 창문틈으로 말간 빛이 흘러들어왔다. 비행기 안에서 쪽창문을 열고 내다본 바깥세상은 어렴풋 켜켜이 쌓인 만년설 위를 지나가는 듯 한 신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구름이라는 것을 인지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름 바다 위를 비행기는 평화롭게 날고 있었다.
2015년 12월. 필자와 아내는 지금 콜로라도에 살고 있는 외손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외손자 녀석은 지금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한번도 그 녀석과의 대면한 적은 없었다. 물론 화상통화로 얼굴도 보고 얘기도 나누었으나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직장 생활 중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았기에 정년퇴직을 기다리다가 보니 이제야 손자 녀석을 보러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 녀석과의 대면이 설레고 기다려지게 되었다. 드디어 열여섯 시간 만에 미국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를 거쳐 콜로라도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오후 6시가 가까운 시간에 도착한 공항에는 딸 내외와 손자, 그리고 아들 녀석까지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손자 녀석과 첫 대면하는 시간이다. 어느덧 훌쩍 커버린 손자는 고개를 90도로 숙여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아마도 딸 내외가 단단히 교육시키고 예행연습까지 시켰나보다.
콜로라도에 온지 며칠이 지난 뒤에는 손자 녀석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할아버지’를 부르고 따르는 바람에 이제는 완전한 ‘할아버지’가 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꼽도 안 떼고 우리방으로 달려와 침대로 파고 드는 그 녀석과 맞이하는 아침은 행복했다.
그후 어느 날은 파인글로브초등학교 3학년에 에 다니고 있는 손자 녀석이 “내일은 겨울방학을 하는데, 방학식과 동시에 발표회도 갖고 파티도 한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카메라를 메고 학교로 흔쾌히 달려갔다. 대부분 백인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손자 학급에는 아시아인 딱 2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중국 아이와 손자 녀석이 유일하다. 어찌 보면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위축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특유의 친화력과 당당한 성격으로 인해 오히려 반에서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할아버지의 눈에는 참으로 대견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교실에서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이러저러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특히 학부형 중에 한 아이 아빠가 아이들을 둘러앉히고 동화구연을 해주는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청바지에 털털하게 차려입은 덩치가 큰 그 백인 학부형은 갖은 의성어를 섞어가면서 멋지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하면, 한국.
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 수준이 아니던가! 왁자지껄 떠들고 한 쪽에서는 아무리 재미있게 동화구연을 해주어도 단청을 부리는 일이 벌어질 법도 한데, 제법 분위기가 정돈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귀를 쫑긋하고 동화구연에 빠져 들었다.
행사 말미에는 학부형들이 준비해온 다과파티가 열렸다. 아이들을 위해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캐릭터인형으로 방학 선물까지 준비했다. 아이들은 마냥 들떠 있었다. 특히 맛깔스러운 다과파티가 아이들에게는 압권이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손자 녀석의 담임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언어소통이 여의치 않으니 딸아이 옆에서 그저 눈인사정도 하고 대신 사진을 찍어주었다. 학교 밖으로 나오니 커다란 운동장에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이곳 콜로라도의 겨울은 유별나게 춥기도 하거니와 눈이 많이 왔다. 필자가 덴버에 첫발을 떼어놓은 날도 밤새도록 눈이 쏟아졌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은 등ㆍ하교시간에 반드시 픽업하게 되어 있었다. 손자 녀석이 졸라서 필자가 아침, 저녁으로 픽업하러 학교 앞으로 나갔다. 어느 날, 아이의 손잡고 학교 앞 신호등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학부모들이 도로 한가운데 서서 아이들을 건네주는 봉사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길을 건너면서 “하이”하고 인사했는데, 하루는 그 녀석이 “할아버지, 인사하지 마세요”하는 것이다. “왜그러냐?, 인사를 잘해야지”라고 반문했더니 “아니, 맞긴 한데요, 저 아줌마가 언젠가 너무 늦게 건네주는 바람에 학교에 지각을 했어요. 안 좋아요”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의 감정을 느낌으로 알고 표현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손자 녀석은 게임에 빠져 있었다. 딸 내외는 그게 걱정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예능 방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가 장차 미 공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너무 게임에 빠져 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들었다는 것이다. 지내다 보니 그들의 고민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어쩌랴! 시간을 가지고 이해시키면서 조금씩 바꾸어 나갈 것을 조언했다.
드디어 2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손자 녀석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필자도 섭섭했으나 아이들은 헤어짐이 더욱 서운했던 모양이다. 각자 밤새도록 편지를 써서 비행기에 오르는 필자 부부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러브 그랜드 파(grandpa)”로 시작한 손자 녀석의 편지를 보는 순간, 가슴 한켠이 먹먹해 왔다. 두어 달간 필자와 정이 많이 들었나보다. “그래 사랑하는 나의 손자 현서야, 건강하고 당당하게 자라서 네가 원하던 공사들어가 네 꿈을 맘껏 펼쳐보거라. 할아버지가 늘 뒤에서 기도로 응원할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