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폐교였다. 마을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초등학교였으나, 시간의 물살이 굽이쳐 교사(校舍)와 운동장만 남기고 다 쓸어갔다. 적막과 먼지 속에서 낡아가다가 철거되는 게 폐교의 운명. 그러나 다행스레 회생했다. 미술관으로. 시골 외진 곳에 자리한 미술관이지만 1000명 이상이 관람하는 날도 많다 하니 이게 웬일? 이곳에서 관람할 게 미술 작품만은 아니다. 오래된 건물 안팎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 사계의 문양을 저마다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하는 정원수들의 동향. 야트막한 뒷산 위에 얹힌 하늘의 표정. 보란 듯이 있는 볼 것들이 많다. 충남 당진시 순성면에 있는 아미미술관이다.
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남편 박기호(65, 회화)가 관장으로, 아내 구현숙(58, 설치미술)이 큐레이터로 손발을 맞춘다. 애초 미술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단다. 지난 1995년, 그저 작업 하나만 마음껏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폐교를 빌려(나중엔 아예 사들였다) 둥지를 틀었다. 폐교의 환경은 이상적이었다. 공간은 헐겁도록 널찍하고, 어지러운 잡사는 침범 못할 시골 산자락이니 창작을 능사로 삼을 만한 환경이지 않은가.
이후 부부는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미술만 작업은 아니었다. 퇴락한 교사를 단장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원형을 살려둔 채, 가필처럼 조심스레 부분적인 보수만을 한 건, 학교 건물에 서린 유서(由緖)를 존중해서였다. 시간이 머물다 간 흔적을, 시간 속에서 쌓여 이제는 숨결로만 남은 수많은 옛이야기들을, 그 애틋한 가치들을 또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폐교
외부 조경에도 정성을 쏟았다. 바지런히 수백 종의 나무와 화초를 심어 가꾼 건 식물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건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폐교 공간에 미감을 부여하려는 뜻도 컸다. 교장 관사로 쓰였던 한옥의 보일러 시설을 뜯어내고 구들장을 들이는 작업도 부부가 손수 해치웠다. 먼 데서 주워온 돌들로 쌓은 담장엔 한 드럼 이상의 땀방울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단장에 몸이 닳도록 힘을 쓰고 시간을 썼다.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모롱이도 부부의 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도록.
그렇게 보낸 15년. 어느덧 알아주는 눈들이 많아지고, 멀리까지 소문이 나면서 일부러 찾아드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신역(身役)을 마다않고 공간을 꾸민 건 오직 부부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공유공간으로 개방할 경우엔 더 가치 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 역량 있는 청년작가들을 밀어줘야겠다는 포부도 옹골찼다.
그렇게 아미미술관이 태동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당진과 충남 지역을 넘어 전국적 명소로 부상했다. 부침이 없는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한 결과로. 근래 5년여 사이에 다녀간 유료 관람객 누적 인원은 자그마치 30여 만 명. 지역 미술관이, 그것도 시골의 폐교 미술관이 거둔 성과가 놀랍다. 자본력을 펀치로 약자를 링에 눕히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미술관들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재력으로 무장한 전문화랑, 공적자금이 투입된 공공미술관, 대기업 문화재단이 설립한 대형 미술관이 결국은 독주한다. 화가 부부가 맨몸을 우직하게 던져 가꾼 아미미술관이 그 틈새에서 기세를 돋우고 있으니 이 무슨 야무진 진격인가.
청춘들에겐 ‘취향 저격 핫플’
아미미술관이 지닌 힘과 매력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은 산기슭 자연 속에 자리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꼽아야 한다. 부부가 공들여 가꾼 정원마저 아름다워 한결 순수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도시의 화려하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미술관에서 맛보기 어려운 자연미. 그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자연 속에서 얻는 담백한 쾌감보다 개운한 게 다시 있던가.
원형을 해치지 않은 지성적인 개량으로 근대 건축의 고태(古態)를 고스란히 유지한 교사, 즉 전시관의 멋과 맛은 아마도 이 미술관이 보유한 최대 자산이다. 쓸모를 잃고 폐기될 운명에 처한 사물이 인간의 혜안을 만나 부활, 다시금 쓸모를 되찾은 특유의 사례에 속할 건물이지 아니한가. 이 명물에 우련히 뒤엉긴 건 시간이다. 죽어라 내빼기만 하는 게 시간이지만(시간은 허무주의자?), 여기에선 아쉬워 차마 다 훌쩍 떠나지 못했나. 잔영으로 남은 시간의 형적인가, 무늬인가. 노랑 병아리처럼 동동거리며 복도 마루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룽거린다. 그립고 애잔하다, 아, 옛날이여!
우수 절반, 향수 절반으로 짜인 그리움이 가슴을 친다. 학동 시절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거로 돌아가는 의식이란 허망한 것이지만 그 옛날의 교실에 왔거들랑, 그대여 맘껏 추억에 잠기라! 교실이 두런거리는 소리의 뜻이 그렇다. 중장년 관람객의 거의 대부분은 어쩌면 추억을 움켜쥐기 위해 아미미술관을 찾아올 게다. 젊은 관람객에겐 근사한 빈티지 컬렉션처럼 느껴질지도. 근대와 모던이 결합된 이채를 오래 남기기 위해 그들은 인증샷을 찍는다. 자랑할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누른다. 다음에 만나 아미! 그러고선 다시 오기도 한다.
화가 부부에 따르면, 아미미술관이 단박에 부상한 건 순전히 젊은 디지털 유목민들 덕분이다. 그들은 미술관의 거의 모든 공간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건물의 내·외벽은 물론, 외부 정원 공간의 다양한 사물들에, 하다못해 나뭇가지에조차 모빌이나 조각 소품, 에스키스 등으로 데커레이션을 해둔 효과가 그렇게 크다. 어디건 포토 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청춘 군상들이 환호하며 사진을 찍어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 올렸고, 이게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단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홍보대사들이 대거 출현한 셈이다. 고즈넉한 운치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좀 과한 데커레이션으로 느껴질 테다. 청춘들에겐 ‘취향저격 핫플’로 많이 알려졌지만.
기획전시전이 열렸다. 부부는 어떤 작가를 선정하느냐에 따라 미술관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신중을 다해 매번 참여 작가를 엄선한다. 아내가 큐레이터이지만 또 한 명의 큐레이터를 고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첨단 트렌드의 작품을 하는 유망한 젊은 작가를 주로 고른다. 현재 진행되는 4인전의 타이틀은 ‘Selfie시대의 자화상展’이다. 셀피족(스스로 자신의 사진을 찍길 즐기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이 넘쳐나는 이 사회를 작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걸 보여주는 전시회다.
작가 김태헌의 가벼운 소품 한 점이 재미있다. 꽃 속에 들어간 행복한 사내를 그려놓고, ‘나는 거짓말쟁이 화가’라 화폭 안에 써넣었다. “알고 보면, 나 나쁜 놈이야! 근데 넌?” 작가는 그리 묻고 있다. “나? 나라고 별수 있음?” 관람객은 그리 답하기 십상이지 않을까.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보신책이라 여기는 내 안의 위선, 가식, 내로남불! 작가는 그걸 까발리고, 관람자는 뭔가 켕기면서 ‘나’를 모처럼 들여다본다. 속된, 너무도 속된 외부로만 편재된 눈을, 두뇌를, 욕망을 내부로 돌린다. 잠시 잠깐이나마. 미술관 그림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을 환기시킨다. 족쇄를 풀고 자유롭게 살 생각을 해보게 한다. 너무 가르치려 드는 그림은 따분하지만.
아미미술관장 박기호
바닷가 소금창고, 통째 예술로 바꾸겠다
지난 1983년, 박기호 관장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부상으로는 프랑스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게 계기가 돼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아내 구현숙 역시 영국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파리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사귀다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과 동시에 귀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여기 당진으로 내려온 것이다. 당진은 박 관장의 고향이다.
널찍하고 천장 높고. 그는 그런 작업 공간을 찾다 폐교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는 공간을 얻었으니 작업에의 몰두가 깊었을 게다. 폐교를 다듬는 데에도 비지땀을 쏟았다. 4600평 부지 안에서 폐허의 표정을 짓고 있었을 교사와 부속건물, 그리고 운동장. 이 모든 걸 쓸 만하게 바꿔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보냐. 청소를 하는 데만 반년이 걸렸단다. 방독면을 쓰고 천장을 털어냈을 때 쏟아진 쓰레기가 트럭으로 열 대 분량이었다. 쥐들의 낙원이기도 했다. 교실 한 칸에 꾸민 침실의 커튼을 타고 부산히 오르내리는 쥐들로 잠을 설친 밤도 많았다. 쥐보다 더 바삐 움직인 건 박 관장이었다. 다듬고 고치고 칠하느라고. 그러니까 청소부이자 수리공, 목수이자 페인트공으로도 살았던 셈이다. 어디서 이런 뚝심과 요령이 나왔을까.
“파리로 유학을 갈 때 1원 한 장 지닌 게 없었다.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고암 이응로 화백께서 쓰던 작업실을 한동안 얻어 쓰는 행운이 있었지만, 숙식 문제부터 늘 곤란했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리고, 알바 삼아 집 고치는 업자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때 공사판에서 익힌 기술을 폐교 수리에 활용했다.”
“당신은 화가다. 폐교 단장에, 그리고 미술관 운영에 힘을 너무 소모하는 건 아닌가? 그림밖엔 난 몰라! 화가들은 흔히 그런 말을 하는데.”
“캔버스 안의 그림만 예술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긴 세월 동안 실로 많은 작업을 해왔다. 공간 곳곳을 디자인하고, 손수 가구를 만들고, 돌담을 쌓고, 심혈을 기울여 조경을 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단순한 인테리어라 규정할지 모르지만, 최상의 디자인이 가미된 작품으로 보길 바란다. 관점을 넓히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상에 이미 예술이 들어가 있는 걸 알 수 있다.”
소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았던 마르셀 뒤샹. 그는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도 예술일 수 있다고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예술이라 했다. 박 관장이 뒤샹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관점을 확장하고 틀을 깨는 거. 그게 자유로운 삶이자 예술이라는 얘기이겠지. 그는 요즘 오브제로 사들인 해변 마을의 소금창고를 통째 작품화하기 위해 구상 중이다. 폐어선 한 척도 같은 용도로 이미 접수해뒀다.
벽에 그림 하나 걸어두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추상화를 가르쳐준 스승은 더는 알려줄 게 없으니 스스로 헤매며 길을 찾아보라 했다.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가끔 붓질이 그리웠지만 자신이 없었다. 더러는 행복해서, 더러는 안간힘을 쓰며 사느라 그림과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걸까. 오영희(吳英姬·67) 씨는 붓과의 오랜 별거를 끝내고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평온했던 시절도, 고통으로 발버둥쳤던 마음도, 거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도 모두 ‘내 삶의 무늬’임을 지극하게 받아들이며.
오영희 작가는 자주 까르르 웃었다. 웃음소리가 쨍한 가을햇살처럼 환했다. “고우시다”고 하자 나이 들어 누가 그런 말 해주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 예쁘다는 소리로 들어야 한다며 슬쩍 귀띔을 한다. 성실하게 방황을 끝낸 자의 말씀이 저러할까. 군더더기가 없다. 한낮의 햇볕은 거실로 한바탕 쏟아졌고, 캔버스 아래 플라스틱 바가지와 붓과 물감들은 내내 그리워하던 무엇처럼 품에 안겨왔다. 그녀는 커피를 내려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작은방 문을 열었다.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다작(多作)하는 편인데, 꽤 많죠? 붓을 들면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종종 있답니다. 40대 초반에 친구와 함께 추상화를 배웠어요. 그때 선생님이 스스로 헤매면서 방향을 찾으라 하셨는데 그 뒤로 작업이 잘 안 되더라고요. 재능이 없나보다 했죠. 그 시간을 잘 이겨내고 유명 화가가 된 친구가 작년에 서양화가 조국현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덕분에 제 세계를 빨리 찾은 것 같아요.”
20여 년 만에 다시 든 붓
젊은 시절, 그녀는 무작정 그림이 좋았다. 화가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집 벽에 그림 한 점 사서 걸어놓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우고 갤러리 전시회를 다니며 갈증을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작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추상화였다.
“친구랑 거의 조르다시피 해서 그분께 비구상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10분 안에 100호를 다 채워보라는 거예요. 당황스러웠죠. 그때까지만 해도 고지식하게 그림은 붓으로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져버린 날이었죠. 그리고 마치 붓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때부터 수세미, 막대기, 삼각자, 약병 등 온갖 것을 도구로 활용했어요. 요즘은 손주들 장난감을 많이 활용하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물감이 묻은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심지어 싸리비와 커피 알갱이까지 도구로 활용한다니, 문득 “새로운 도구는 작가의 창의력을 확장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작품은 점, 선, 면이 반복되면서 마치 끊임없는 대화를 하듯 리듬감 있게 화면을 어우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재료와 도구의 경계를 허물어 색의 질감을 높이면서 풍부한 스토리를 만들어내 관객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리듬감과 스피드와 경쾌함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내는 하나의 키워드다. 지난여름에는 제9회 대한민국청춘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조국현 화가의 권유로 출품했는데, 큰 상을 받은 것이다.
“조 선생님 화실에는 일주일에 한 번 갑니다. 미술계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제 그림도 보여드리면서 조언을 얻고 오죠. 선생님이 다른 사람한테 제 칭찬을 하셨대요. 혼자 막 터지듯 그리는 그림이라면서 아주 감각적이라고요. 이런 감각은 타고나는 거지, 노력하거나 연구해서 되는 게 아니라면서요. 저야 잘 봐주시니 감사하죠. 용기도 나고요.”
그녀는 최근 초대전도 하고 홍콩과 일본 등지에서 열리는 교류전에도 참여하면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한동안 몰아치는 폭풍 속에 서 있었다.
큰 고통 뒤에 받은 선물
2008년, 그녀는 남편에게 사고가 생겨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병원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 그 충격은 더 컸다. 그래도 남편 얼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맷돌같이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갔다. 나을 병이 아니라는 의사의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정성을 쏟는 만큼 남편 몸이 좋아지리라 생각했다. 결국 그 마음이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 포기가 됐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상태가 자유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내려놓고 나니 새털같이 가벼워지더군요. 불행한 것보다 행복한 게 더 많았는데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고통을 감수한 뒤에 깨닫게 된 거죠. 예전에는 다 가진 여자라서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요즘은 이리 봐도 감사하고 저리 봐도 감사한 일 천지예요.”
고통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한다. 선물도 하나씩 들고 온다. 그녀는 억울해하는 대신 ‘내게 맡겨진 숙제이니 기꺼이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혼돈의 시간이 사라지고 더 깊은 사랑이 찾아왔다.
“병원으로 남편 만나러 가는 날에는, 혹여 제 손에 무거운 게 들릴까봐 ‘오실 때 아무것도 사오지 마세요’ 합니다. 어느 날은 ‘당신이 보내주신 영양제가 도착했어요. 고마워요. 허리 통증은 좀 어때요?’ 하고 안부를 물어요. 손주들이 예쁜 짓을 할 때도 ‘우리 외손주 네 마리가 당신 닮아서 머리가 기가 막히게 뛰어난가봐요’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편한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았어요. 이제는 제가 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두 사람은 고려대학교 선후배 관계. 학교에 다닐 때는 모르고 지냈는데 졸업 후 인연이 돼 결혼까지 이어졌다. 남편 이발도 해주고 손발톱 깎아주며 소소한 얘기를 나눌 때면 ‘우리가 참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소풍 와서 놀듯 산다
다시 붓을 들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했다는 그녀는 색채가 맑고 밝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힘든 시간을 그림으로 잘 승화했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다.
“예술은 고통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그런 게 있다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겠죠. 저는 작업할 때 계획을 세우거나 그러지 않아요. 그때그때의 감정에 집중합니다. 추상화에도 질서는 있어요. 혼돈 속의 질서, 우리네 삶과 참 많이 닮았죠.”
사진 촬영을 할 때 햇빛이 만들어낸 무늬가 스크린에 비치자 그녀는 홀린 듯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마치 큰 보석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귀한 것들 앞에서 예민해지는 그녀의 더듬이는 아직 젊어 보였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잘 익어가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더러 실수를 해도 부족한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다른 사람의 허물도 너그럽게 볼 수 있어요.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질투하고 샘이나 내면서 사는 사람, 비교하면서 사는 사람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이제부터는 향기롭게 익어가야 해요.”
그러고 보니 벌써 칠십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녀다.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든단다. 그렇지만 절대 무겁지 않게, 소풍 와서 놀다 가는 기분으로 살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날이 앞으로도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누구든 이 무대를 떠날 날이 오지 않겠어요? 앞으로 제 맘대로 몸 움직이며 살 수 있는 시간이 10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 많이 만나서 웃고 지내려고요. 나이 들면 ‘감사, 봉사, 밥사’가 최고라는데, 저는 ‘밥사’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