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다. 막연하게 이 시절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투명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다. 팍팍한 일상에 느낌이 있는 시간이 언제였나. 마음을 채우고 자신을 살펴주는 일을 잠깐 잊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지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교육의 도시 청주, 수도권은 물론이고 전국 어디서든 교통과 지리적 접근성이 좋아 하루쯤 후딱 달려가 볼 수 있는 예쁘고 단아한 도시, 무심한 듯 알찬 쉼과 여유로움이 가능하다.
도시지만 시끌벅적하지 않아서 좋다. 한가한 한낮이라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귀하게 시간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 과천, 덕수궁, 청주 이렇게 네 곳에 있다. 한때 연초제조창이었던 넓은 부지를 2018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오픈했다. 예전의 담배공장이 그 모습을 뒤로하고 이렇게나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하다니 놀라울 수밖에. 국내 최초의 수장형 미술관이다.
총 5개 층으로 구성된 전시관을 보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주말엔 현장에서 수시 입장도 가능하지만 인원 제한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선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움이다. 모던한 미술관 앞의 넓은 잔디광장을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 바람과 햇살의 평온함을 누리는 것도 이곳에서는 특별하다.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미술관은 재미있는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 옆으로 이어진 건물에 핫한 초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있어서 잔디광장을 내다보며 느긋하게 맛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소통하는 수장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미술관은 5층 기획전시실, 4층 특별 수장고(미술은행 소장품), 3층 개방 수장고 및 라키비움, 보존처리실, 2층 보이는 수장고 및 관람객 쉼터, 1층 로비 및 수장고, 프로젝트 영상, 아트존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미술관의 소장품을 보관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수장고, 그곳에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하여 ‘개방’과 ‘소통’을 위한 ‘열린’ 미술관을 지향한다. 덕분에 백남준, 이중섭, 배병우, 김세중, 니키 드 생팔 등 뛰어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엄청난 예술 작품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처음에는 마구 흥분된다. 미술관을 충분히 둘러보고 나면 상상력을 자극받고 알 수 없는 위로와 풍성함으로 뿌듯해진다. 평일 한낮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도심에 이렇듯 품격 있는 미술관을 품고 있는 청주 시민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입장료가 무려 무료다.)
미술관 바로 옆으로 나가면 1960~70년대 한국 산업화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옛 청주 연초제조창의 담뱃잎 보관 창고였던 7개 동이 시민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 동부창고다. 그 시절 청주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청주의 대표적 산업체였다. 이제는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문화 공간이다. 그 뒤편의 미로처럼 경사진 골목으로 올라가면 드라마 촬영지로 SNS에서 유명세를 치렀던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 벽화마을 수암골이다.
그들과 함께한 역사, 무심천과 상당산성
청주를 감싸고 있는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에 도심을 동서로 구분하는 예쁜 물길 무심천에서 문득 브레이크를 밟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뜻의 무심천은 봄이면 벚꽃이 눈부시고, 시민들의 산책로이자 휴식처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곳 출신인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에서 청주 무심천을 건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청주를 품고 있는 상당산성 앞에 서면 길게 이어지는 성벽과 함께 계절의 푸르름에 가슴이 뻥 뚫린다. 백제 시대 방어 시설로 처음 축성되어 조선 시대에 개축된 상당산성은 면적 12.6ha, 둘레 4,400m, 높이 4.7m, 사적 제212호다.
산성마다 나름의 역사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이 길은 과거 영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역시 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자연스러웠던 풍경이다. 그 견고한 성벽길을 걸어보자. 완만한 4km 순환형 둘레길이어서 아이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도 좋고, 가벼운 트레킹 코스로도 더할 나위 없다. 이 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이 청주를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분명 도심 속의 산길인데도 확실히 도심을 벗어났다는 기분이 든다. 걷기에 따라 1~2시간 정도 길이다. 지난 4월엔 이달의 추천길로 선정되었다.
자연 속으로, 운보의 집
이제 나들이하듯 가까운 근교로 잠깐 나가본다. 청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운보의 집’이 있다.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은 어릴 적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화가로서의 역량을 나타냈다. 특히 아내 박래현 화가와의 러브스토리는 전설적이다.
운보의 집이 위치한 청원구 내수읍은 김기창 화백 어머님의 고향이다. 마음의 고향 같은 이곳에 정착하여 노후를 보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곳이다. 전통 한옥으로 안채와 행랑채, 비단잉어가 노니는 연못에 정자와 돌담이 운치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미국 대사관 건물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내 우향 박래현 화가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 산 아래 운보미술관은 규모가 제법 크다. 미술관을 둘러싼 야외 정원의 조각 작품이나 수석은 자연 속에서 품격을 더한다. 멋스러운 문화예술 공간이다. 부부인 듯 점잖은 커플이 뒷짐 지고 작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본다. 두 분의 뒷모습이 여유롭고 아름답다. 그들을 앞지르기 조심스러워 그림 앞에서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했다. 비로소 주변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작품에서 따뜻한 위로를 선물받는 기분이다.
100년 전의 옛 청주역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청주에 청주역이 있었다. 청주시청 부근의 옛 청주역이 ‘옛 청주역사공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도심 속의 일반적인 공원이 아닌 철도공원이다. 기차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설렘이 생긴다. 교육도시 청주답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기차역으로 달려오는 풍경이 와락 연상된다.
아담한 역사(驛舍)가 자그마한 옛날 국민학교를 연상케 한다. 민트 색감의 창틀이 옛 느낌을 더한다. 주변 풍경마저 옛 건물들로 즐비하다. 문이 닫힌 시간에 들렀기에 청주의 역사와 과거의 모습이 전시된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옛 청주역의 바깥 풍경만으로도 시간여행을 한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역 광장에 서니 추억의 흑백 필름이 휙휙 지나간다. 어쩐지 가슴 뭉클하는 순간이다.
고품격의 전시, 청주고인쇄박물관
문화도시 청주다. 예향(藝鄕)이라 할 만큼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많다. 또한 20년 넘도록 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 숲으로 둘러싸인 고인쇄박물관을 빠뜨릴 수 없다. 1377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간행한 고장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섰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할 긍지다.
청주고인쇄박물관, 흥덕사지,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을 순서대로 돌아보면 된다. 본관의 1, 2, 3관과 쉼터, 홍보영상실. 귀중한 소장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느껴볼 수 있다. 금속활자부터 목활자까지 변천사와 ‘직지심체요절’이 지니는 깊은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고려 공민왕 시절에 세워진 직지의 요람인 흥덕사, 인쇄 문화의 이해를 높이는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이 함께 있어서 차례대로 둘러보며 직지의 위상을 비로소 깨닫는 시간은 소중하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아직도 둘러볼 곳이 많은 청주다. 미호천변의 성곽 정북동 토성은 요즘 일몰 때 멋진 실루엣을 찍기 위해 사진가들이 찾아든다. 템플스테이와 석가모니 진신사리로 유명한 사찰 용화사, 역대 대통령들의 여름 휴가지이자 대청호반의 산책로 청남대, 로하스 해피로드 대청호 오백리길,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마무리와 안질 치료를 위해 머물렀다는 초정행궁(椒井行宮), 청주 역사의 산증인 성안길, 청주만의 맛집 삼겹살거리, 사람 냄새 물씬한 전통시장 육거리시장, 점점 핫해지는 감성 가득한 운리단길… 곳곳이 감성 넘치는 핫 스폿이다.
잠깐 두리번거리면 보물찾기처럼 다가갈 곳이 나타났다. 시종일관 흥미롭고 은근히 끌렸다. 마음도 말랑해지고 행복지수도 높아진다. 기댈 곳 없어 혼자 우두커니 서성일 때 어쩌다 하루쯤 떠났다가 결핍을 채우고 흐뭇하게 돌아올 수 있다. 이곳 청주 출신 도종환 시인이 그의 시 ‘동행’에서 말했듯 ‘먼 길 가다 만난 나무처럼 / 지친 몸 기대게 해줄 푸른 그늘 있다면’ 그럴 때 떠올려보는 곳, 맑은 고을 청주.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망막이 있는 신체적 눈이요, 하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눈이다. 신체의 눈은 좌우 대칭으로 놓여 있어 목표물에 초점을 맞추고 입체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형상이 보인다. 갖가지 색깔도 그대로 인지된다. 봄날 화려한 꽃들의 잔치를 보게 하고 가을날 오색찬란한 단풍의 풍경을 전해준다. 비가 내린 대지 위로 둥그런 아치를 그리는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 모습 등 있는 그대로의 자연 환경을 보고 느끼게 해준다.
또 하나, 마음의 눈은 보이지는 않아도 느끼게 해준다. 그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 크기와 깊이도 다르다. 마음의 눈은 보이는 물체들의 현상을 특별한 느낌으로 다시 보여준다.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의 크기와 깊이가 달라 같은 사물과 현상이라도 다르게 다가온다. 마음의 눈은 신체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신만의 가치로 창조해내기도 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을 그리고 쓰는 화가, 소설가, 시인이 그렇다. 소설가는 범인들이 생각지 못한 추리소설을 쓰거나 공상과학 등 다른 세계들을 그려낸다. 시인은 꽃잎 하나에도 멈추어 서곤 꽃이 지나가는 자신을 짙은 향기로 불렀다며 시를 한 편 써내려간다.
‘담쟁이’ 시를 쓴 도종환 시인은 마치 담쟁이가 사람처럼 절망의 벽을 기어오른다고 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 함께 올라 푸르름으로 다 덮는다고 했다. 손광성 수필가는 ‘달팽이’라는 글에서 달팽이를 보면 험한 세상 어떻게 갈까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개미처럼 힘센 턱도 없고, 벌처럼 무서운 독침도 없고, 메뚜기나 방아깨비처럼 힘센 다리도 없고, 뼈도 이빨도 없기 때문이란다. 집이라고 해봐야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투명한 껍데기일 뿐이어서 걱정스럽다고 했다.
화가나 소설가나 시인은 남다른 마음의 눈을 가진 게 틀림없다.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더 섬세하게 확대해서 본다. 마치 무속인들처럼 보이지 않는 무엇과 대화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꽃과 이야기하고 길가의 돌멩이와도 대화를 나눈다. 세상 만물과 마치 친구처럼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만물과 소통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대화하고 소통하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는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별과는 다른 모습의 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 같지도 않은 그 그림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값으로 평가받는다. 마음의 눈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신체의 눈과 마음의 눈은 느낌의 산출물이 다르다. 하지만 어떻게 보든 본질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모두 관심과 사랑의 눈인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때 우리는 더 깊게 하나가 될 수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수필가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한 시간이나 숲속을 걷고서도 특별히 관심 가질 것을 찾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보지 못하는 나는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것을 수백 가지나 찾을 수 있는데.”
든든한 아내, 듬직한 세 자녀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채워가는 가수 최성수(60). 고등학생 늦둥이 아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이며, 아내에게는 집안일도 기꺼이 도와주는 평범한 남편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어떤 일을 겪든지 다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가 나이가 들수록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 의미가 있나보다.
‘남남’, ‘동행’, ‘해후’, ‘풀잎사랑’, ‘기쁜 우리 사랑은’ 등등의 메가 히트곡들로 1980년대를 휘어잡았던 대표적인 미남 가수 최성수. 얼마 전에 그는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하림, 카더가든, 혁오 등 수십 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까마득한 후배들이지만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가수들의 노래를 과감히 선곡해 특유의 미성으로 완벽하게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왕에 오르지 못한 것은 고작 5표 차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1983년에 데뷔한 이 베테랑 가수의 감각과 에너지가 지금 세대에게도 여전히 통한다는 의미였다. 감성을 채우면서 60세의 나이에도 변치 않는 젊음과 소통의 아이콘으로 청춘을 노래하고 있는 그다.
“요즘 노래들은 굉장히 세련됐어요. 예전에는 우리 가요를 우습게 생각하고 팝만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팝을 안 듣고 가요를 듣죠. 케이팝이 그만큼 세계인의 공통된 노래가 됐고 우리 것이 세계 것이 될 정도로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죠.”
최신 트렌드에도 자연스러운 최성수의 모습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는 얼마 전 디지털 싱글 ‘린도마니’를 발표한 데뷔 37년 차의 여전한 현역이자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말하자면 최근의 트렌드에 더없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바도 있다.
열등의식이 나를 키웠다
“제 첫 번째 직업은 가수죠. 사업가, 교수 등 여러 가지 일도 할 수 있지만 업(業)으로서는 끝까지 뮤지션이에요. 노래 부를 때 가장 행복하고 감사해요. 힘들 때도 노래만 부르면 시간이 지나갔거든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성수는 자신의 히트곡 대부분을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다. 그런 그에게 가수로서의 깊이를 더해준 터닝 포인트가 1990년대 중반에 있었다. 서른다섯 살에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가 향한 곳은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버클리 음대였다.
“서른다섯에 미국에 가서 프로페셔널 뮤직 전공으로 마흔에 학사를 받았죠. 그리고 돌아왔다가 다시 UCLA에 들어가 뮤직비즈니스 마스터를 하려고 했지만 익스텐션을 받는 걸로 정리했어요. 미국은 뮤직비즈니스를 노동법에 기초해 배우도록 되어 있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귀국했고, 중앙대학교에서 예술 경영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죠.”
최성수는 서른다섯 살 이후 계속 공부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 그는 미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제 삶의 터닝 포인트는 열등의식이에요. 못살아서 잘살려고 했고, 잘살기 위해 노래를 했고…. 계속 노래를 하다가 보니 어느 순간 상처를 받았고 공부해야겠다는 터닝 포인트가 생겼죠. 노래를 하고 히트를 해도 공부에 대한 미련이 끊임없이 남아 있었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교수법도 깊이 알아야겠더라고요. 지식에 대한 욕구 그리고 열등의식이 저를 이만큼 만들어줬어요.”
때때로 열등의식은 자신을 바라보는 토대가 된다. 과거보다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 최성수는 그 표본이었다.
노래 안에 시를 담은 가수
그는 가수로서의 본분을 절대 잊지 않으려 한다. 특히 노래를 잘하려면 많은 책을 읽고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노래에도 깊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대의 최성수와 60대의 최성수가 부르는 노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때는 히트하는 게 꿈인 가수였죠. 지금은 다르죠. 요즘은 노래를 부르면서 두렵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좋아해줄까?’ 하면서 저 혼자의 노래라기보다는 노래를 듣는 사람을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의 정규 10집 앨범은 2007년, 그리고 11집은 2017년에야 나왔으니 무려 10년 만에 나온 셈이다. 노래 발표 주기가 점점 길어지는 것은 노래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보다 숙고하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1번째 정규 앨범 ‘시가풍류방’(詩歌風流房)의 콘셉트는 시의 멋과 풍류다. 타이틀곡 제목은 김현 시인의 시 ‘고맙다 사랑, 그립다 그대’에서 따왔다. 젊은 남녀에게 진실한 사랑과 일상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외 도종환 시인의 작품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안도현 시인의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가 가요로 거듭 태어났다. 시를 좋아했던 그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가사로 쓰며 다양한 곡을 만들어 왔다.
2019년 싱글 ‘린도마니’가 나오는 데도 2년여가 걸렸다.
‘최성수 독창회’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준비하고 있다. 3월 19일 인천 청라 엘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도 콘서트보다는 약간 클래식한 분위기로 그냥 목소리 하나랑 피아노, 성악가들이 함께한다.
“3월에 열리는 제 콘서트 이름을 ‘독창’이라고 지은 건 제 오랜 꿈이에요. 교회 성가대를 하면서 클래식에 대한 꿈이 남아 있었던거죠. 사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불러봤으면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콘서트가 아니라 독창회라 이름 붙였죠.”
최성수의 미려한 목소리와 바리톤 성악곡에 있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의 결합. 상상만 해도 흥미가 생기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노래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자 하는 듯했다. 어쩌면 우리가 최성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또 다른 터닝 포인트로서의 영역이 미래에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자기관리도 철저하다. 담배는 아예 안 하고, 술을 먹으면 다음 날 노래가 잘 안 되는 걸 몇 차례 느껴 아예 술을 끊었단다.
그는 노래를 위해 술과 담배 등을 멀리하는 절제된 생활을 해왔기에 열심히 사는 게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아티스트 요건도 슈베르트의 삶처럼 절박하고 절실한 사람이다.
하루 통화의 절반은 아내와
1990년대 중반에 떠난 미국은 최성수에게 또 다른 선물을 안겼다. 한참 힘들게 지내던 시절, 지금의 아내와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죠. 돈이 없어서 햄버거를 반으로 나눠 먹고 딸에게 1달러짜리 멜론도 못 사주고 했지만…. IMF 때 한국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될 때 저를 버티게 해준 건 아내와 하나님이었어요.”
애처가로 소문이 난 그는 요즘도 하루 통화의 절반을 아내와 한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물었더니 주된 화제는 아이들이라고 대답한다.
최성수의 아내는 전 남편과 사별한 후 그와 재결합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둔 상태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서른다섯 살, 딸은 서른한 살이 됐다. 현재 아내와의 사이에는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제가 자식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아빠이긴 해요. 엄마를 무서워하거든.(웃음) 아내는 악역을 자처한 거고, 저는 아이들 편에 서기로 한 거죠. 이제 열심히 일해서 막내아들 대학만 보내면 되겠죠.(웃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요즘 삶에 대해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고 말하는 최성수는 자신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요. 제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고.(웃음) 그러니 하루하루 소소하게 행복해하고 감사해야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는 얼마 전 있었던, 가수 인순이 씨와 아내가 법정까지 갔던 갈등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됐다. 그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났던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좋은 끝이든 나쁜 끝이든 끝은 반드시 있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사건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다.
“억울하죠. 하지만 지나가고 있는 일이에요. 그것도 감내해야 할 제 일이죠. 그런데 제가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사람은 매번 순간순간, 어떤 때는 행복하지만 어떤 때는 힘들다.
“그런 매순간 자기 판단의 기준에 의해서 이겨내는 힘의 원천을 따져보면, 희망과 가족 덕이죠. 무조건 버텨야 해요.(웃음)”
그는 힘들 때마다 종종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단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이걸 못할까’ 하는 마음이 훅 들면서 뜨거운 물에 샤워할 수 있는 것만도 너무 감사하게 된다고 한다.
편협한 생각 버려야 현재와 어울릴 수 있어
다소 가벼운 얘기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최성수에게 지금까지 나온 앨범들 중 가장 아끼는 게 있냐고 물어봤다.
“2집이 저를 만든 앨범이었죠. 1집의 ‘남남’이 저를 바꾼 터닝 포인트였다면 2집의 히트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사라지게 해줬어요. 수록곡이 다 히트를 쳤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앨범이죠. 1집이 씨앗이었다면 2집은 주렁주렁 열린 열매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자신이 가수가 안 되었다면 기술을 배워 공장에 다니고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기타를 부숴버릴 정도로 음악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제게 바란 건 오로지 기술을 익히는 거였어요. 오죽하면 제가 직업훈련소에 가서 자동차 정비를 배웠을까요. 그런데 결국 그만뒀어요. 그 무렵 사람들이 사우디엘 많이 갔는데, 기술을 계속 배웠다면 사우디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됐겠죠?”
그가 자동차 정비공이 안 된 덕분에 한국 가요계는 선물을 얻은 셈이다. 그는 자신이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음악으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가 공부를 계속하고 책을 보고 시를 쓰고 여행을 가는 건 모두 깊이 있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 생각이 그로 하여금 계속 현 시대와 어울려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듯했다. 그래서 그에게 시니어가 젊은 세대와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년 남자들이 자격지심에 가끔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편협한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봐요. 꼰대가 되는 상황은 전적으로 자격지심 발로와 연관된 경우가 많거든요. 서로 존중하면 된다고 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에서, 자기 위치를 스스로 확인하려고 동물의 왕국에서 영역 표시하는 것 같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어떤 때는 제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놀랄 때가 있어요.”
가족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최성수는 태도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또한 같다.
“요즘 아이들은 지식이 너무 많아서 지식을 가르치기엔 제가 부족할 정도죠. 그것보다는 근본적인 걸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음악하는 친구들에게는 인사 잘하고 시간 약속 잘 지키면 인생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말해요. 첫인상에서 뭘 알겠어요? 인사 잘하고 시간 잘 맞추는 게 기본이죠. 그리고 리더라는 위치에 서려면 팔로워가 많아야 하는데 팔로워에게서 존경의 눈빛이 있어야 해요. 그 눈빛의 가치가 바로 성공의 척도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모습, 공감과 진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새해 들어 가장 중시하는 건 뭘까?
“집안일 잘하자.(웃음) 어제도 일 끝나고 와서 미뤄뒀던 설거지를 했고요. 하루하루 열심히 감사히 사니까 편해요.”
가족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관심은 온통 가족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나이를 잘 먹어가는 비결처럼 보였다.
“인생에서 진짜 잘한 일이요? 하나님을 만나고, 마누라를 만나고, 우리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마지막으로 노래를 한 거예요.”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로 글을 시작한다. 널리 알려진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부모님과 가족, 주변 친지, 친구 등 한 사람을 키우는 건 많다. 미당의 경우, 그런 요소는 2할이다. 나머지 8할은? ‘바람’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시래기였다”. 1960년대. 필자가 자란 곳은 내륙의 작은 시골 마을. 하루에 대처(大處)에서 버스가 네댓 번 정도 왔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아주 넓었던 신작로였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먼지가 겨우 가라앉으면 집마다 담과 벽에 걸어둔 시래기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렇게 말라갔다.
시래깃국에 시래기무침. 배추김치와 큼직한 무김치. 나를 키운 8할은 시래기였고, 2할은 김장이었다. 겨울이면 어느 집이나 시래깃국과 시래기 무침으로 버텼다. 가난한 이나, 밥술이나 뜰 만한 집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거지는 날것, 시래기는 말린 것
사람들은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하며 물어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늘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거지는 날것, 생것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가 혼란스러워한다. 다음 내용은 도종환 시인의 작품 ‘시래기’ 중 일부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중략)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중략)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상당 부분 우거지에 대한 내용이다. 우거지는 채소의 윗부분 혹은 바깥 부분이다. 웃자란 부분이 우거지다. 땅속에서 가장 먼저 나와 싹을 틔우는 배추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위로 자란다. 윗부분, 위, 웃걷이, 우거지다. 바깥바람을 가장 오랫동안 견딘 것도 바로 우거지다.
불행히도, 우거지는 가장 먼저 버려진다. 배추를 뽑을 때 버리기도 하고, 다듬을 때 먼저 들어낸다. 가난한 이들은 버려진 우거지를 주워서 죽을 끓였다. 우거지 죽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우거지를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배추 우거지를 말리면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배추 시래기다. 시에서는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라고 설명한다. 우거지를 벽에 혹은 담장에 걸면 시래기가 된다.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시래기는 소중하지만 귀한 건 아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바깥에 걸려 긴 겨울을 난다. 눈도 맞고, 바람도 겪는다. 가장 먼저 땅을 뚫고 나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다음, 마지막에는 버림받는다. 우거지의 슬픈 일생이다.
시래기는 맛있다. 어린 시절, 거의 매 끼니 시래기를 먹으며 “또 시래깃국이야?” 하고 투정했다. 먹어본 게 별로 없으니 ‘시래깃국 대체품’을 주워섬길 수도 없었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사실, 시래기는 전 국민을 키웠다.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는다
음식 공부를 하면서 문득 “외국 사람들은 시래기를 먹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은 드넓다.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음식, 식재료를 먹는지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먹긴 하지만, 우리처럼 일상적이지 않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중국 여행을 다녀온 이가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더라” 해서 ‘음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시래기는 아니고 우거지와 시래기 중간 정도의 식재료였다. 위치는 동북삼성(東北三省) 부근이었다. 조선족들의 풍습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간도 지역, 중국 동북삼성의 조선족들은 여전히 우거지, 시래기를 먹는다. 그뿐이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시작되었다. 배추 이파리의 줄기 부분은 흰색이다. 그래서 백채다. 지금도 배추의 한자 표기는 백채다. 배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중국 배추가 우리 것보다 크고 맛있었다. 숱한 기록들이 “중국 배추가 크고 맛있다”고 말한다. 중국에 갔던 사신단은 “중국 간 김에 좋은 배추 씨앗을 사오려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미처 사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무는 오랫동안 ‘무우’라고 불렀다. 무는 ‘무후’(武侯)에서 비롯되었다. 무후는 높은 벼슬아치의 이름이다. 무후 제갈량이 좋아했던 채소라서 무후, 무우, 무로 변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배추와 무 모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 원산지가 어디든, 우리는 중국을 통해 무와 배추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는 우거지와 시래기가 없다? 그렇지는 않다. 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다. ‘지축’(旨蓄)이다. 지금도 중국 사전에는 지축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에도 ‘旨蓄’이 버젓이 나와 있다. 지축은 ‘채소, 푸성귀[菜]’를 말린 것이다. 우리도 ‘지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날짜는 성종 18년(1487년) 9월 11일. 제목은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 “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다른 도와 달라서 서쪽으로는 대령(大嶺)에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서 그쳤으며,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상수리 수십 석(碩)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농부를 먹이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충족할 길이 없고, 백성이 이것을 줍는 것은 다만 9월·10월 사이일 뿐인데, 이제 순행(巡幸)이 마침 그때를 당하였으므로 (후략).”
양양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이다. 강무는 국가의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왕이 현장에서 직접 훈련을 감독하고 사냥을 한다. 문제는 인근 주민이다. 강무가 있으면 길을 닦고, 훈련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한다. 현지 주민들이 말먹이부터 행사 참가자의 식사까지 챙겨야 한다. 중앙에서 곡식을 가져간다 해도 현지에서 챙겨야 할 게 많다. 사냥과 현장 막사를 만드는 일에도 현지 주민들이 참가한다. 원래 곡식이 많지 않은 곳이다. 겨울에는 ‘지축’을 챙겨야 한다. 지축은 목숨을 잇게 해주는 귀한 먹거리다. 겨울에 임금의 순행이 있으면 굶어 죽을 판이다. 현지 관리인 유자한의 상소는 “강원도 백성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니, 강무를 늦추자”는 내용이다.
500여 년 전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챙겨 먹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그때도 마찬가지. 시래기는 주요 식량이자 반찬거리였다. 시래기가 단순히 ‘배추 시래기’, ‘무청 시래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아래 내용은 여말 선초를 살았던 문신 권근(1352~1409년)의 시 ‘축채’(畜菜)의 일부분이다.
시월이라 바람 높고, 새벽 서리 내리니/울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지축(旨蓄)을 마련하여 겨울에 대비하니/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후략)
권근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뼈대를 세운 높은 벼슬아치였다. 그도 10월(음력)이면 채소 갈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지축, 시래기가 반드시 가난한 이들의 먹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축은 단순히 배추 우거지 시래기, 무청 시래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밭에서 수확한 대부분의 채소류로 준비한 겨우살이 준비 채소를 뜻한다.
중국도 우리도 모두 먹었지만, 중국은 버렸고 우리는 지금도 소중하게 여기고, 먹는다. 우거지, 시래기는 한식의 특별한 음식 중 하나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 자락 덮여도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 도종환의 ‘홍매화’에서
정초가 지나면서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접어들지만, ‘꽃쟁이’들의 마음은 벌써 춘삼월이 코앞에 다가온 듯 들뜨기 시작합니다. 지구온난화 등의 여파로 시절을 착각한 복수초나 노루귀 등의 야생화들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한 달여나 이르게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그중 엄동설한에 피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꽃이 있습니다. 바로 매화(梅花)입니다. 눈 속에 피는 꽃, 즉 설중매(雪中梅)의 그림에 익숙하고, ‘매화는 일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등의 찬사에 너무 길들어서 매화란 으레 한겨울에 피는 꽃이란 선입견이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실제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에선 1월이면 팝콘 터지듯 가볍게 터진 하얀 매화꽃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뭍에서도 최근 수년간 이상 난동으로 경남 양산 통도사의 유명한 홍매(紅梅)인 자장매(慈藏梅)가 1월부터 홍색 꽃을 피워 많은 인파를 불러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남 순천에는 아예 음력 12월이면 피기 시작해, 음력 섣달의 한자 말인 납월(臘月)을 붙여 ‘납월홍매화’란 이름으로 불리는 매실나무가 있습니다. 금전산 금둔사 경내에 있는 홍매화 6그루가 그 주인공으로, 해마다 양력 1월 말부터 3월까지 개화해 남녘의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30여 년 전 인근 낙안읍성에 있는 600년 된 홍매화의 씨를 받아다 키운 것인데, 지금은 어미 납월매가 고사해 이 6그루가 마지막 남은 토종 납월매일 것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납월매가 됐든, 수령 360여 년의 자장매, 또는 뜻밖에 핀 동네 매화이건 정월은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들수록 그 향이 코를 찌를 듯 짙어진다는 매화꽃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이른바 ‘탐매(探梅)’가 시작되는 달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길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쉬 끝나는 게 아니라, 봄철 내내 이어집니다.
Where is it?
매실나무가 국내에 들어온 건 약 2000년 전. ‘정원수로 심기 위해서’라는 게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의 설명이다. 당연히 오래된 매실나무가 많고, 이른바 유명한 고매(古梅)를 찾아다니며 즐기는 탐매 순례도 오래됐다. 수령 600년을 넘었다는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 등이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매실나무다. 통도사엔 자장매 외에도 이름난 매실나무가 2그루 있는데, 일주문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만첩홍매와 분홍매가 그것이다. 유서 깊은 고불매와 선암매는 담양 계당매(溪堂梅)와 전남대 대명매(大明梅), 고흥 수양매(水楊梅)와 더불어 ‘호남 5매’란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김해의 와룡백매(臥龍白梅)와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栗谷梅), 산청의 남명매(南冥梅) 등 수령 100년 이상 된 고매가 전국에 200여 그루 넘게 산재해 탐매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최근에는 열매인 매실 수확 등을 목적으로 심은 대규모 매실나무들의 연륜이 쌓여 봄마다 농원 일대가 거대한 매화동산으로 변모하면서 수많은 인파가 찾는 매화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전남 광양과 경남 양산의 매화 축제가 대표적이다.
'살아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필자를 얼마나 자주 울렸던 시구였던가! 쉽게 읽히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는 시를 쓰는 도종환은 필자가 좋아하는 시인이다. 여러 권의 시집을 냈기에 수많은 시가 있는데도 필자가 유독 이 시에 필이 꽂힌 것은 옷을 유독 사랑하는 성향 때문일까?
오늘 아침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도종환 시인을 만났다. 위의 시는 그의 시집 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무심한 시인 남편을 만난 착하고도 맑은, 천사의 영혼을 가진 아내를 기리며 쓴 그의 시들은 가슴을 파고들었다. 젊은 아내가 병이 깊어지도록 무심했던 남편의 회한이 문장마다 젖어 있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시다. 1980년대 중반에 나온 시집이었고 그 후 도 시인을 참 좋아했는데 오늘 아침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야호! 신난다! 악수도 하고 포옹도 했다.
, 등의 소설을 읽은 후 존경하고 좋아했던 박완서 소설가, 을 읽은 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던 신영복 교수님은 생전에 만나지 못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데 필자가 좋아하던 도종환 시인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국회방송 라는 프로그램 녹화가 있던 날 필자는 질문을 하는 방청객으로 참석을 했다. 국회방송 작가가 초청을 한 것이다. , 등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작을 탄생시킨 조정래 소설가가 신작 라는 책을 들고 나타났다. 교육 문제를 다룬 소설이기에 조정래 작가와 교사 출신 도종환 시인이 교육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부인 김초혜 시인을 "날마다 새로 피어나는 꽃이다"라고 표현해 필자를 감동시켰던 조정래 소설가는 어딘지 날카롭고 까칠해 보였고 도종환 시인은 부드럽고 따스해 보였다.
을 출판한 후 도종환 시인이 재혼을 하자, 먼저 간 아내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절절하게 써놓고 어떻게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냐며 많은 사람이 비난했다. 그때 필자는 전적으로 도 시인의 편을 들었다. 현실적으로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젊은 남자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 버거운 현실이었으리라 생각했다. 독자들이 그런 점들은 이해하고 감싸 안아주기를 원했다. “제가 접시꽃 당신을 읽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요” 하자 도 시인은 무언가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그 당시의 일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일까?
(쉿! 염려 놓으세요! 저는 당신 편이거든요!)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도종환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도종환(都鍾煥·62)의 는 그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깊은 산 속 황토 집에 머물며 쓴 산문집이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그는 가슴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인으로 불렸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그동안 세상도 참 많이 변했고, 그를 향한 몇몇 대중의 눈길도 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들국화를 좋아하고, 연민의 눈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0여 년 전, ‘자율신경 실조증’이라는 희귀병을 앓던 그는 깊은 산골의 한 외딴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거북처럼 오래 그리고 느리게 살고 싶어 ‘구구(龜龜)산방’이라 이름 지은 그곳에서의 성찰을 담은 책이 바로 이다.
“그곳은 나에게 ‘영혼이 성숙하는 집’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은 비싸고 넓은 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는 동안 영혼이 성숙해질 수 있는 집이죠. 거기서는 몸도 아팠고, 아주 쓸쓸하고 외로웠어요. 그러나 쓸쓸하지만 평화롭고, 외롭지만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죠. 내 생에 가장 깊어질 수 있었던 시절에 쓴 책인데, 당시 출판사가 단행본 사업을 중단하면서 책이 절판됐어요. 찾는 독자도 많고 나도 이 책을 그렇게 죽게 두긴 너무 아까워서 다시 내게 됐죠.”
그는 책 제목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고 했다. ‘깨달음이란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라는 이현주 목사의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장미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봐요. 하지만 사람마다 끌리는 꽃이 다르죠. 누군가는 목련, 또 누군가는 라일락, 코스모스 등. 자기 내면에 그 꽃과 같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끌리게 되는 거예요. 백합에 끌리는 사람은 백합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게 중요한데 ‘왜 나는 장미가 되지 못했을까’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거죠. 장미처럼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국화처럼 우아한 사람도 있고 저마다 자신이 본래 지닌 빛깔과 향기를 알고 아름답게 사는 게 중요해요.”
그런 그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일까? 그는 오래전부터 들국화를 좋아했고, 들국화 같은 인생을 살고 있노라고 답했다.
“벚꽃은 진달래를 보고 질투하지 않아요. 개나리가 산수유 꽃을 보고 뒤에서 험담하지 않을 거고요. 그게 자연의 이치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다른 이와 비교하고, 미워하거나 선망하기도 하죠. 들국화는 봄꽃이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를 받을 때 그 주변에 눈에 띄지 않고 머물러 있에요. 그러다 먼저 핀 꽃들이 지고 황량하고 쓸쓸해진 들에 피어나잖아요. 나는 그런 들국화 같은 존재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낼 때 흔적도 없었지만, 언제고 피어날 것을 알기에 초조하거나 애타지 않았어요. 언제 피느냐보다 자신이 언제 핀다는 것을 믿고 사랑하면서 사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어요.”
다시 고요한 강물이 되어 만나리
스스로는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지만, 그의 모습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달라진 점은 많지만,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1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죠. 구구산방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은 실천으로 옮기고 행동해야 하는 자리에 와있어요. 물론 권력에 눈이 멀었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죠. 고요했던 강물이 돌길을 지나면 격류가 생기기도 하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거세지기도 하잖아요. 그러나 강물은 그대로 강물이죠. 저 역시 그래요. 내가 산속에 있는지, 정치 한복판에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거예요. ‘너는 원래 고요한 물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거세질 수가 있느냐’며 말이죠. 그러나 그 외형만 변했을 뿐, 내가 강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돌길을 지나고, 낭떠러지를 만나며 폭포처럼 거친 모습을 지닐 때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강물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시를 쓸 때도, 그리고 정치를 하는 현재에도 변함없는 마음속 연결고리는 ‘연민’이다.
“길에 핀 꽃 한 송이에도 걸음을 멈추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시를 만나는 거거든요. 교육도 그래요. 어렵고 힘든 아이를 보면 연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되죠.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제대로 된 정치는 연민의 눈으로 국민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해온 일들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바로 ‘연민’이라 할 수 있어요. 연민으로 바라보다가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다가 연민이 생기기도 하죠. 때론 상처도 받아요. 시가 잘 안 써져 고통스럽기도 하고, 아이들 때문에 마음 아플 때도 있고, 국민의 혐오를 감당해야 하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다시 또 사랑하게 되는 것, 그런 일을 하는 게 내 운명이라 생각해요.”
결국 가슴속 사랑이 남는다
상처 입고 고단한 삶에도 그가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존재 이유와도 같았다.
“국회에서 정치하는 거 사실 굉장히 힘들거든요. 나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도 이런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면, 결국 내가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준 게 남는 거라 생각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바로 사랑 아닐까요? 내가 죽고 나면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만, 내가 준 사랑이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동안 나는 살아 있는 셈이죠. 내가 진정 연민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사랑을 주고, 그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펜을 놓지 않는 그다. 자신을 강물에 비유했던 것처럼 글을 쓰는 본질은 같지만, 평지의 고요함에서 느껴지는 성찰보다는 돌밭의 거친 돌들이나 진흙탕을 지나며 느끼는 아비규환, 낭떠러지에서의 분노와 환멸 등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시 고요했던 강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지 궁금했다.
“폭포로만 이어진 강물은 없죠. 언젠가는 저절로 다시 잔잔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강물이 흐르면 본래보다 더 깊고 넓어지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끝으로, 그는 결국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좋은 시를 쓰던 사람’ 그리고 ‘정의롭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으로 남길 바랍니다.”
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945년 8월 15일, 한 사상가의 표현대로 ‘도적처럼’ 찾아온 해방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과 맞닥뜨리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준 이날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박탈당했던 모국어의 근원적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는 일제 강점기에는 간행되지 못했던 이육사, 윤동주, 심훈 등의 유고시집이 간행되었고, 여러 종의 사화집도 잇달아 출간됨으로써 역동적인 문학 출판 시대를 열게 된다.
해방 직후 출간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청록집』과 서정주의 『귀촉도』는 우리 나라의 정상 시편으로 손색이 없는 위상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청록집』은 자연을 근대시의 주요한 시적 대상으로 아름답게 재현해내면서 우리 말의 가락과 이미지를 높은 예술적 형상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이 시대의 가장 화려한 사화집으로 등극되었다. 더불어 김영랑, 김광균, 유치환, 김광섭, 김현승, 신석정, 김상옥, 이호우 등이 우리 서정시의 미적 경지를 우뚝하게 올리는 가편들을 쏟아냈다.
소설 쪽에서는 해방 전후의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염상섭, 이태준, 채만식, 김동리, 계용묵, 허준, 황순원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당대적 상황 인식으로서의 소설은 8·15가 외세에 의한 불완전한 해방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을 낳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사적 출발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증언하였다. 그 불충분한 해방이 분단과 전쟁을 곧 야기한 것은 우리가 두루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다
1950년대 벽두에 터진 6·25전쟁은 우리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바꾸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물리적 충격을 주었던 이 전쟁은 이후 우리 문학의 가장 강력한 존재 근거이자 동시에 한계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가난, 반공과 서구 추수라는 공통된 체험을 통해 이 시기의 문학적 주체들은 문학적 아비를 상실한 채 폐허 속을 거닐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 시의 주류 미학은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특별히 서정주는 독자적인 상상력과 탁월한 시적 의장(意匠)으로 한국 시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공동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9)을 펴낸 ‘신시론’ 동인들은 모더니즘 시운동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이 시기의 소설은 전쟁을 직접 겪은 작가들의 경험적 증언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작품 세계는 방향 상실과 불안 의식 등에서부터 생활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한 심리적,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게 되는데 김동리, 김성한, 이범선, 오유권 등이 그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 의식의 치유 과정을 그린 손창섭, 서기원, 반전 이념을 담아낸 박영준, 황순원, 선우휘, 오상원 등도 기억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장용학, 이호철, 임옥인, 박경리, 강신재, 박연희, 오영수 등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작가들이 절대 가난과 싸우면서 소중한 기록을 남긴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흐름에 불을 지피다
1960년대에 일어난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경험과 가치를 인식시키는, 호환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시문학은 대개 세 가지의 흐름을 형성한다.
하나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저류로서 김수영과 신동엽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을 통해 우리 시는 4·19혁명이 가져다준 이념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 민족주의의 상보적 형상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다음 하나는 인간 내면과 형식 탐구의 흐름으로서 김춘수가 대표적이다. 김춘수의 시는 관념의 배제를 노리면서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천착하는 일관성을 보였다. 마지막 하나는 전봉건, 김종삼, 천상병처럼 전 시대로부터 창작을 꾸준히 이어온 시인들에 의해 구축된 현대적 감각의 세계였다. 김남조, 박재삼, 박용래, 김관식 같은 서정의 흐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설 쪽의 대표적 사례는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이 작품은 남과 북의 이념적 대립과 주인공 이명준의 자살로 상징되는 절망,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하였다. 그런가 하면 분단과 외세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남정현의 『분지』는 이 시기 최대 문제작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분단 문제는 박경리, 이호철 등의 작품에서 심화된 형상을 얻는다. 특유의 감각적 문체로 도시적 삶의 위선을 그린 김승옥의 서사는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1960년대 문단을 강타하였다. 그만큼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다양화가 비로소 이루어진 때라고 할 수 있다.
민중적 서정시와 노동현실 소설화
1970년대의 문학적 감각과 상상력은 ‘유신’이라는 정치 체제와 전태일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그 형식과 내용이 시작되었다. 이 두 가지 축은 당시의 작가나 시인들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문학적 관심의 본격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시에서는 민중적 서정시가 경제 발전의 불균형과 그에 따른 민중의 피해 과정을 가장 본격적으로 그려냈는데 신경림, 고은, 김지하, 조태일, 정희성, 문병란 등의 시가 주목되었다.
그런가 하면 황동규, 정현종, 마종기, 김광규, 김명인 등이 보여준 음역은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주는 소외와 내적 파탄을 증언, 가시화함으로써 한국 시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주었다.
이 시기의 소설은 현실적 삶에 초점을 맞추는 양상이 본격화하였다. 그 대표적 형태가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근대화에 대한 비판이었고 이문구가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노동 현실의 소설화는 황석영, 윤흥길, 조세희 등이 주도하였다.
또 이 시기에 비로소 씌어지는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 권력을 비판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분단 문제를 다룬 윤흥길의 『장마』 등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소설이 호응을 얻었다는 점인데, 이는 4·19로 비롯된 역사의식의 성장과 급격한 시대 변동에 따른 역사적 단절감의 회복 욕구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또한 1970년대는 대중소설이 폭넓게 출현하였다. 한수산, 최인호, 조선작, 조해일, 박범신 등이 그 구체적 목록이다.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사회적 상상력이 깊어진 시기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창작과비평’ 그리고 ‘문학과지성’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안에 구비된 강한 기억과 저항의 힘은,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정치적 상상력의 만개를 가져왔다.
시 부문의 대표적 흐름은 노동시라고 불린 일군의 경향으로서 박노해와 백무산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또한 김남주는 줄기찬 저항성으로 한 시대의 가장 뜨거운 전사 시인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일정한 대타적 영역을 형성한 해체시는 기존의 시문법에 대해 강렬한 도전을 보냈으며, 정치적 전위가 아니라 미학적 전위로 나섰다. 특히 황지우는 언어 실험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탁월성으로 문학적 성가를 누렸다. 이어 박남철, 김영승, 장정일 등이 더욱 급진적인 실험적 해체시를 양산했다. 또한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개인사의 굴곡을 통한 사회 반영 혹은 인간의 존재 탐구에 매진해온 시인들로는 이성복, 최승자, 최승호, 기형도 등이 있었다.
소설 쪽에서는 1980년대를 휩쓴 진보의 열기에서 비켜선 자리에서 문학을 했던 작가들도 있는데 그 대표 격이 이문열이다. 소설 기법의 새로움을 추구한 작가군으로는 이인성, 최수철이 있다. 그리고 기법 실험의 극점을 보여준 서정인의 『달궁』, 역사소설의 기법으로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등도 소재 확대를 가져온 예에 속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었다. 문순태, 임철우, 윤정모, 최윤 등은 그러한 유에 속하였다. 해방 직후의 삶을 통해 역사적 비극의 원천을 형상화한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와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쓴 소설이나 언어 자체를 탐색하는 소설들도 다수 나왔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등이 그 실례일 것이다. 이 시기는 매체와 작가군이 폭증한 시대로서 대중이라는 개념이 본격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작가들의 대활약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적 감각에 뿌리를 둔 시쓰기 방식이 크게 대두하였다. 그 주자로 우리는 유안진, 천양희, 신달자, 노향림, 김승희, 최문자, 김혜순, 황인숙, 허수경, 정끝별, 나희덕, 박라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생태적 상상력의 시편들이 쏟아진 것도 괄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시영, 이하석, 고형렬, 고진하 등의 시나 『녹색평론』 같은 근대적 기획에 대해 의혹과 도전을 보내는 패러다임이 이에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러한 지향은 ‘정신주의’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일군의 시적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조정권, 최동호 등이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시적 발언은 김정환, 도종환, 박영근, 최두석, 이재무, 안도현 등에 의해 이어졌다. 이른바 ‘몸’의 시학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경향은 정진규, 김기택, 채호기, 박주택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는 주체, 권력, 이성, 중심의 언어에서 타자, 탈권력, 감성, 주변의 언어가 목소리를 얻어가고 있는 것을 실증하였다.
소설 부문에서는 여성성의 잠재적이고 대안적인 가능성을 문학적 감수성과 결합시켜 풍요로운 형상화가 이루어졌다. 공지영, 오정희, 신경숙, 은희경, 이혜경, 김향숙, 공선옥 등이 주도한 이러한 패러다임은 관용과 너그러움, 희생, 포용성으로 그 정서적 지향을 움직여갔으며, 어떤 것도 절대 구심이 될 수 없다는 융통성 있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지나간 시대의 오래된 기억들을 독자 앞에 되불러주었으며, 구효서, 정찬, 성석제, 김영하, 김연수, 한강, 전성태 등도 자기 몫을 충분히 하며 새로운 언어들을 갈무리하였다.
이러한 복합적 흐름을 20세기에 형성했던 우리 문학은 21세기에 들어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그 외연과 실질을 확장하고 심화해가고 있다.
시에서는 이른바 ‘미래파’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적 경향이 중요한 비평적 대상이 되었고, 소설 쪽에서도 다양한 작가군이 들어와 새로운 창작 지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해방 후 70년 동안 우리 문학이 일구어온 역사는, 이렇게 가파른 역사와 삶을 비추어온 별자리처럼 한편으로는 선연하고 한편으로는 흐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여기 거명된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득하지 않은가?
광복 이후 출판시장은 1950년의 6·25,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1972년의 10월 유신,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9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1997년의 IMF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많이 읽히는 책의 유형이 달라진다. 광복 이전이 암흑기였다면 광복 이후 6·25가 터지지 직전까지는 민족문화 재건기로 볼 수 있다. 이후 1950년대는 전후 허무주의, 1960년대는 이데올로기, 1970년대는 산업화, 1980년대는 역사성, 1990년대는 대중출판, 2000년대는 글로벌 출판, 2010년대는 디지로그 출판 시대로 정리할 수 있다.
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사진
◇ 광복~1949년 민족문화 재건
“아버지가 들고 온 『조선역사』란 책에 빨려들어 밤새도록 읽고 모자라 수업시간에까지 읽다가 들켰다. 그 바람에 전교생 앞에서 10여분이나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대군을 무찌르는 대목을 소리 높여 읽는 수모를 겪었다. 그 바람에 학생들은 그 책이 동이 나도록 모두 구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 보고 겪은 6·25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담은 『역사 앞에서』(창비)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추천사에 나오는 글이다. 신 시인은 한 칼럼에서 『조선역사』가 “한글을 깨치고서 처음 읽은 책”이라고 말했는데 이 책이 광복 이후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해방 공간 시기에는 우리 역사와 글, 문학을 펴내고자 하는 욕구와 읽고자 하는 욕구가 넘쳤다. 이런 욕구 때문에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1947), 『조선어표준말모음』(조선어학회, 1946) 등의 사전과 학술교과서가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해방 전후』(이태준), 『내가 넘은 삼팔선』(후지와라 데이, 1949),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크리미센코, 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1948), 『목넘이 마을의 개』(황순원), 『렌의 애가』(모윤숙), 『청록집』(조지훈 외) 등이 있다.
◇ 1950년대 전후 허무주의
195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정비석의 『자유부인』이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의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을 때에 대학교수 부인의 파탄적 행동을 그린 소설이 1년 만에 10만 부가 팔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이 소설이 “문화의 파괴자로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군”(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이라는 공격이 나왔고, 작가는 열띤 논쟁을 벌여야 했다. 『우리말 큰사전』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가운에 젊은 세대에게 유머감각을 크게 심어준 『얄개전』(조흔파)이 등장했다.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에는 『슬픔은 강물처럼』(최희숙), 『마음의 샘터』(최요안), 『청춘극장』(김래성),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조병화) 등이 있다.
◇ 1960년대 이데올로기
196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최인훈의 『광장』이다. 소설 속 철학도 이명준은 북에 올라가 북한의 정치체제에 가담해보지만 남의 ‘밀실’과 북의 ‘광장’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다 제3국행을 택한 끝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4·19의 성과를 5·16세력에게 빼앗긴 경험을 지닌 지식인에게 깊은 허무감을 안겼다. 이 시기의 베스트셀러에는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박계형), 『저 하늘에도 슬픔이』(이윤복), 『석녀』(정연희), 『조선총독부』(유주현), 『거대한 뿌리』(김수영), 『금강』(신동엽) , 『빙점』(미우라 아야코) 등이 있다.
◇ 1970년대 산업화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한 1970년대는 『별들의 고향』(최인호),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겨울 여자』(조해일) 등의 이른바 ‘호스티스 소설’들이 한 흐름을 이뤘다. 산업사회로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여성의 상품화 현상을 ‘호스티스’라는 사회적 존재에 초점을 맞춰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고도성장의 이면에 숨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늘은 또 있었다. 부랑노동자의 삶을 그린 황석영의 『객지』와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이 시대의 주목할 베스트셀러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박완서),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 『데미안』(헤르만 헤세) 등이 있다.
◇ 1980년대 역사성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이자 불의 시대였다. 대학과 신문사에서 쫓겨난 지식인들이 출판계에 유입되어 변혁이론의 창출과 보급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성과로 강만길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관련 서적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는 대하소설의 시대이자 시의 시대이기도 했다.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등은 모두 대중에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만든 ‘역사교과서’였다. 1980년대 내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이념시나 민중시가 거대한 트렌드였지만 정작 불로 뜨거워진 대중의 몸을 식혀준 것은 쉽게 읽히는 서정시였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해인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시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이밖에 이 시기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마광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바스콘셀로스), 『숲속의 방』(강석경), 『인간시장』(김홍신) 등이 있다.
◇ 1990년대 대중출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직후 시작된 1990년대가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은 ‘개인’이었다. 1990년대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세계는 넓고 (내가) 할 일은 많다』(김우중)에서부터 1990년대 말의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까지 책 제목에 ‘나’는 넘쳤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컴퓨터 길라잡이』(임채성 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호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등 개인의 성공 욕망을 자극하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가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의 출판시장을 휩쓴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의 역사인물소설 트로이카들도 사실상 자기계발서 역할을 했다.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던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일본은 없다』(전여옥),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등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물 위를 걷는 여자(신달자)』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양귀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등 사랑(결혼)과 일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퇴마록』(이우혁), 『드래곤 라자』(이영도),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석용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등이 있다.
◇ 2000년대 글로벌 출판의 시대
2000년대는 절대 고독의 개인이 발견되는 여정이었다. 고학력 사회가 되었지만 고학력자일수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는 바람에 성공욕구만 넘쳐났다. 덕분에 베스트셀러의 산실은 자기계발서였다.『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 줘잉),『화』(틱낫한),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배려』(한상복),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켄 플래차드 외),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시크릿』(론다 번) 『이기는 습관』(전옥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대중은‘성공’을 버리고 ‘행복’으로 말을 바꿔 탔다. 2000년대의 베스트셀러로는‘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과 같은 블록버스터 소설, MBC 방영도서,‘Why’를 비롯한 스토리만화 등이 있다. 이 밖에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국화꽃 향기』(김하인), 『가시고기』(조창인) 등과 같은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를 다룬 소설들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도 있다.
◇ 2010년대 디지로그 출판의 시대
1998년의 국지적인 IMF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차원이 달랐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광풍 앞에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적인 사람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셀프힐링’의 책들만이 인기를 끌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등 멘토가 던져주는 ‘위로와 공감’의 어록집,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등 사회적 어젠다를 담은 책, 대안의 삶, 성찰, 관계나 소통 등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해를 품은 달』(정은궐), 『미생』(윤태호) 등의 미디어셀러와 『서울 시』(하상욱)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다.
이 시대에 인기를 끄는 것은 위로와 공감의 어록, 관계와 소통을 다룬 책들이다. 이제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한기호(韓淇皓)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학 학사, 2000년 제41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기획부문 출판상, 학교도서관 저널 대표이사.
이 봄에 교보생명이 운영하는 광화문글판에 새로 게시된 시는 함민복 시인의 ‘마흔 번째 봄’입니다. ‘꽃 피기 전 봄 산처럼/꽃 핀 봄 산처럼/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이런 시입니다. 3월부터 5월 말까지 석 달 동안 봄과 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광화문글판은 언제나 시의 전문을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함민복의 시도 이게 다가 아닙니다. 전문은 이렇습니다. ‘꽃 피기 전 봄 산처럼/꽃 핀 봄 산처럼/꽃 지는 봄 산처럼/꽃 진 봄 산처럼/나도 누군가의 가슴/한번 울렁여 보았으면.’
광화문글판은 원문에서 두 행을 줄이고 ‘나도’와 ‘한번’도 뺀 것입니다. 봄철에 맞는 글을 올리다 보니 부득이 꽃이 지는 대목을 뺀 것이지만, 시의 전체 의미는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함민복의 시가 말하는 것은 꽃은 피기 전과 피었을 때는 물론, 질 때와 완전히 졌을 때 등 사계절 내내 사람을 울렁이게 한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이미 마흔의 나이입니다! 울렁이는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기다림과 설렘, 꽃이 피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울렁이지만 꽃이 지기 시작하면 애달픔과 안타까움, 꽃이 지고 나면 슬픔과 아쉬움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니까 꽃은 피어 있든 이미 져버려 내 마음속에 있든 언제나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하고 설레게 하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봄이 오는 즈음에 나태주 시인은 ‘3월’이라는 시에서 ‘어차피 어차피/3월은 오는구나/오고야 마는구나//2월을 이기고/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돌아와 우리 앞에/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하략)라고 했습니다. 이성부 시인의 표현처럼 봄은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봄은 꽃의 계절입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꽃’이라는 글자는 그야말로 꽃 같습니다. 우리말에서 중요한 것은 산 달 별 물 해 글 술 말 길 밥 돈 책 눈 귀 손 낮 밤, 이렇게 다 한 글자로 돼 있는데 꽃은 그 모양까지도 꽃을 닮았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저마다 하나의 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광화문글판의 문구로 함민복의 시를 고른 교보생명 관계자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사람인지 스스로를 성찰해 보고, 서로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관계를 만들어 보자는 뜻에서 선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시에 나오는 대로 사람을 분류하면 피기 전의 꽃인지, 핀 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꽃인지, 이미 져버린 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보다도 나는 누구에게 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꽃 이야기를 하면서 김춘수를 빼놓을 수 없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김춘수의 꽃을 넘어서는 노래가 없을 만큼 이 시는 꽃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고 지배하고 흡수하고 거의 통일했습니다.
꽃이라면 김춘수입니다. 진달래꽃이라면 김소월, 국화라면 도연명과 서정주, 매화라면 이퇴계, 모란이라면 김영랑, 접시꽃이라면 도종환, 새라면 박남수, 해라면 박두진, 달이라면 이태백, 별이라면 윤동주, 청포도라면 이육사, 바위라면 유치환, 사슴이라면 노천명, 연탄재라면 안도현, 이렇게 빼어난 시인들은 저마다 하나의 사물과 자연을 시를 통해 오로지함으로써 우리의 감성과 인식을 풍부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인이 아니지만, 인간은 누구나 시인일 수 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소논문 ‘작가와 몽상’(1908년)에 나오는 말처럼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시인이 숨어 있고 마지막 인간이 사라질 때 마지막 시인도 사라집니다. 칠레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하는 시를 썼습니다. 꽃이 피는 봄에는 이런 생각을 더 할 법합니다.
그러니 꽃이든 새든 별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나의 감성과 나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명한 시구를 암송하고 적절한 시·공간에 이를 활용하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체험과 언어로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팔순이 넘어서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백세의 나이로 시집을 내는 것은 모두가 자신의 체험과 언어로 세상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나이로 죽은 시인을 깨워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함민복의 시에 나온 것처럼 어떤 일과 사물의 이면과 양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생과 사가 있듯이 꽃이 피면 지는 때가 있고, 해가 뜨면 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같은 비인 것 같아도 만물을 소생케 하는 봄철의 다스하고 부드러운 비가 있는가 하면 다 된 농작물을 망치는 차갑고 심술궂은 비도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를 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의 사이와 그 경계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몰연도가 불분명한 조선 중기의 문인 송한필(宋翰弼)의 ‘우음(偶吟)’이라는 시를 읽어 봅니다. 花開昨夜雨(화개작야우) 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 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 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젯밤 내린 비에 꽃이 피더니/오늘 아침 바람에 떨어지네./가련하구나, 봄날의 일이여/비바람 속에 왔다가 가는구나.’
비와 바람 사이에서 꽃의 한 생명이 끝났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이를 표현한 앞의 두 행은 덧없는 인생을 비유한 명구로 꼽힙니다.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송한필은 아버지의 신사무옥(辛巳誣獄) 고변이 무고로 드러남에 따라 가족들이 모두 노비가 되었고 그의 행적도 묘연해진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쓴 건지, 일종의 조짐으로 저도 모르게 이런 노래를 지은 건지 알 수 없지만 개화도 낙화도 알고 보면 모두 한순간의 일입니다. 김영랑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말한 ‘찬란한 슬픔의 봄’인 것일까요.
이 꽃피는 계절에 조지훈의 낙화를 함께 읽습니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어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볼 것, 모든 사물과 일의 양면을 볼 것. 피어난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지게 됩니다. 낙화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개화를 볼 수 있어야만 꽃의 아름다움과 중요함이 더 커지고, 모든 것들이 나에게로 와서 새로 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