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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지 않은 40년 열정… 댄스 전설 박남정 ‘새 삶 그리며’
- 1983년 개봉한 영화 ‘플래시댄스’에는 거리의 비보이들이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모습이 나온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본 이 장면이 인생을 바꿨다는 박남정. 이후 무수한 히트곡을 선보였고,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어느덧 60대를 바라보는 그의 세계에는 빠른 비트와 화려한 조명 외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가요계를 흔들던 그 가수 ‘원조 아이돌’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화보 촬영을 꽤나 했을 것 같아요. 거의 일상이었어요. 오랜만에 예전 추억이 떠올랐네요. 온갖 멋진 수식어가 따라붙고 상장이나 트로피, 골든컵 등을 손에 쥐던 때요. 공연을 가면 너무 큰 함성에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하지만 순식간에 많은 일이 벌어져서인지 소중함을 잘 몰랐어요. 밤낮없이 이어지는 일정이 버거웠고요. 식당에서 편하게 밥 한 숟갈 뜨기 힘들었고, 친구들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어요. 방송국에서 녹화를 끝내고 나오면 사람들이 몰려 유리창이 깨지고, 타고 있던 차가 옆으로 기우뚱 넘어갈 뻔한 적도 있어요. 연예계를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데뷔 전까지는 꿈을 위해 노력했지만, 후에는 큰 고생 없이 바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니 더 철이 없었나 봐요. ‘나 정말 대단했다’며 그리워하기도 하나요? 글쎄, 다 한때예요. 길거리를 걷기조차 어려웠던 적이 있었네, 정도로 여겨요. 당시엔 댄스 가수 자체가 희소했어요. 경쟁 상대가 없었죠. 그래서인지 ‘나 박남정이 앨범만 내면 사람들이 환호해주겠지’라면서 안일하게 세월을 보냈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서 계속 갈고닦고, 더 발전해야 했는데 참 아쉬워요. 지금은 아이돌이나 솔로 가수가 정말 많으니 한시라도 소홀하면 바로 뒤처지는 세상이잖아요. 당장 견디기 힘들어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뭔가 얻으면 지킬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뒤늦게나마 합니다. 여전히 대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에요. 최근 KBS에서 방영된 청룡시리즈어워즈 축하 무대에 올라 큰 관심을 끌기도 했고요. 예상보다 약하긴 했는데요.(웃음) 활동한 지 40년 가까이 됐는데 기억하고 호응해주시니 놀라워요. 솔직히 목소리나 춤 선이 과거와 달라지긴 했거든요. 그대로다, 여전하다 하시지만 저는 알아요. 좋은 무대를 선보이고자 늘 노력하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네요. 수상한 춤 선 가진 아빠 딸 시은 양*과 함께한 댄스 영상 역시 주목받았어요. 왕년의 톱 댄스 가수 아빠와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 딸의 컬래버랄까요. 처음에는 찍을지 말지 고민했는데, 조회수가 잘 나와서 다행이에요. 이제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시버지’(시은이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요. 스테이씨 신곡이 나오면 가급적 함께 춤추는 영상을 촬영하죠. ‘저 아저씨는 누군데 저렇게 춤을 잘 추냐’는 댓글도 봤어요. 케이팝을 좋아하는 해외 팬들이 특히 어리둥절해하더라고요. *아이돌 그룹 STAYC(스테이씨) 멤버이자 메인 보컬로 활동 중이다. 덧붙이자면, 박남정은 인터뷰 중 두 딸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이 가장 밝았다. 딸의 활동을 지켜보면 힘들었던 현역 시절이 떠오르진 않나요? 내심 시은이가 아이돌 준비하는 걸 반대했어요. 너무 힘든 길 같아서요. 저는 노래든 춤이든 전부 다 땅 파서 배웠어요. 물론 지금은 아티스트를 육성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자체가 과거와 눈에 띄게 다르다는 걸 알아요. 훨씬 발전했고 환경이 개선됐지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걱정이 앞섰지만 딸의 꿈을 응원할 수밖에요. 데뷔 무대를 보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쇼케이스 끝나고 대기실에서 아이를 만났는데 뭉클했습니다. 가요계 선배로서, 부모로서 애정 어린 조언을 자주 하나요? 일단 딸이 숙소 생활을 하고 있고, 바빠서 얼굴을 자주 못 봐요. 가족 단체 채팅방에 촬영이 있거나 하면 관련 사진이나 영상을 올려주는데, 그렇게나마 가끔 대화하죠. 의상이나 무대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해요. 굉장히 열정적이고 연구를 끊임없이 하는 편이더라고요. 제가 가끔 조언(?)하는데, 잘 먹히진 않아요.(웃음) 그저 시은이가 주어진 상황을 즐기고, 노래와 춤에 푹 빠져서 활동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될 때도 있지만 불만을 표출하기보다 내면을 다스리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딸을 응원하는 아빠도 좋지만, 앞으로 앨범 발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해요. 팬들이 박남정의 음악을 손꼽아 기다릴지도 모르잖아요. 몇 년째 음반을 준비하고 있지만 언제 발표할지 확신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기다려주는 팬들이 진심으로 고마울 따름이죠. 시간이 꽤 지났으니 팬들도 각자 가정을 이루고 현실을 살아가기 바쁘잖아요. 그들에게 박남정이라는 존재가 흐려졌겠다 싶었는데 아니더라고요. 자녀들이 성인이 되고는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지 저를 다시 찾는 경우가 있어요. 행사하러 다니거나 방송 촬영을 할 때마다, 어떤 지역을 가도 항상 응원하러 와줘요. 꼭 손에 건강식품이나 에너지 음료, 농산물 등을 들고요. 젊을 땐 서로 거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자주 볼 기회가 늘어서인지 각자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그만큼 유대가 깊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서로 친구처럼 지냅니다. 세월 속을 유영하다 꾸준히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춤추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언제까지 활동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최대한 다양한 지역에서, 작은 소극장이라도 괜찮으니 꾸준히 공연하고 싶어요. 힘닿는 데까지 해봐야죠. 아내와 딸들, 나를 바라보는 팬들이 있으니까요. 항상 긴장하고, 관리하려고 해요. 라면, 짜장면, 얼큰한 김치찌개 같은 음식 먹는 건 좀 자제하고. 유산소 운동도 꾸준히 합니다. 20대와 50대 박남정은 무엇이 다른가요? 20대 때는 솔직히 대책 없이 살았어요. 가만히 있어도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고 여겼고요. 정신없이 지내느라 자기 계발에 소홀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 대중의 관심사에 함께 얽혀 있어야겠더라고요. BTS나 트와이스, 세븐틴 등 아이돌 후배들 노래 또한 자주 들어요. 스테이씨 노래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그저 꽂혀서 춤을 췄지, 체계적으로 배우진 않았어요. 당시 한국은 문화예술의 불모지였거든요. 참고 자료나 뮤직비디오는 당연히 없었고,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서로 머리 맞대고 연구한 게 다예요. 하지만 요즘은 음악 장르가 적잖이 세분화돼 있고, 관중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만한 기획과 마케팅이 뒷받침되니 또 새롭게 공부가 돼요. 음악 활동 이외에 추가로 관심 있는 분야가 있나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속상할 때 우리 딸들의 어릴 적 모습을 담아둔 영상을 보면 기분이 완전히 풀려요. 인생의 원동력이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해보고픈 마음이 생겼어요. ‘프리미어’나 ‘애프터 이펙트’ 등 편집 프로그램을 독학 중이에요. 아직 능수능란하게 다루진 못하지만요. 차라리 학원을 다녀볼까 고민했는데, 젊은 친구들이 과하게 경로 우대할까 봐 걱정이에요. 유튜브와 틱톡 채널은 이미 개설해뒀으니 활발하게 올릴 일만 남았죠. 아직 ‘나이 들어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망설여지긴 하는데, 언젠간 극복할 거라 믿어요. 나이가 들면 걱정이 많아지나 봐요. 하지만 그만큼 행복한 일도 많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럼요. 예전보다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거든요. 제 행복의 기준은 ‘소중한 존재가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어요. 부와 명예, 인기도 좋지만 모든 걸 다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심이 단단하게 잡히는 느낌이에요. 가족, 직업, 팬, 취미 등 나를 둘러싼 몇몇 요소들. 덕분에 끝이 없는 터널을 헤매던 인생에 볕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Bravo Question -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긍정적인 마음이요. 괜히 이리저리 재고 따지고, 불만을 표출하면서 부정적인 면을 곱씹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바꿀 수 있거나 없는 것을 잘 구별하고, 주어진 상황과 조건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빠르게 판단하는 편이 낫더라고요. 예전부터 그렇게 지내려고 늘 노력해왔습니다.
- 2024-10-0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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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일국, 무대 위 슈퍼맨 도약… 대선배들과의 공연 ‘영광’
- 어느 순간부터 TV에서 배우 송일국을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2016년 방영된 KBS 드라마 ‘장영실’이 마지막이었으니.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연기 활동에는 공백기가 없었다. 묵묵히 무대 위에 오르며 공연계에서 입지를 다져갔다. 2011년 연극 ‘나는 너다’를 통해 무대에 진출한 그는 이후 연극 ‘대학살의 신’,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맘마미아’에 출연했다. 올해는 연극 ‘맥베스’로 무대에 올랐으며, 오는 10월에는 뮤지컬 ‘애니’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스스로 중고신인, 끼 없는 배우라고 말하지만, 무대 위 배우 송일국은 누구보다 빛난다. 혹독한 관리와 성장 연극 ‘맥베스’로 뜨거운 여름을 보내셨는데요. 어떤 의미가 남은 작품인가요? 제가 극 중 맡은 뱅코우는 극 초반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로 분량이 매우 적어요. 그런데 존재감도 뛰어나고, 중요한 역할이죠. 저는 역할의 비중이나 분량을 생각하지 않아요. 작품이 좋으면 출연하죠. ‘맥베스’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작품이어서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공연하면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연습할 때부터 황정민 씨(맥배스 역)를 보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저는 제 거 하기 급급한데 정민 씨는 전체를 아우르는 힘을 보여주더라고요. 양정웅 연출가님을 통해서도 많이 배웠어요. 작품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트렌드를 녹인 멋진 극을 만드셨죠. 그러고 보니 제작발표회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아요. 그때가 5월이었는데, 현재 7~8kg 정도 빠졌어요. 고백하자면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정장이 안 맞을 정도로 살이 쪘어요. 애가 셋이다 보니 집에 맛있는 음식도 많고, 나이도 들면서 살이 잘 안 빠지더라고요. 보다 못한 아내가 ‘날 사랑하는 만큼 살을 빼달라’고 미션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혹독하게 다이어트했고, 체중을 감량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어요. 총 15kg은 빼야 할 것 같아요. 다이어트 방법이 궁금해지네요. 다이어트에는 왕도가 없는 것 같아요. 많이 안 먹고, 많이 움직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죠. 요즘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한강에서 러닝을 해요. 오늘도 5km를 뛰고 촬영장에 왔고요. 요즘 저의 유일한 낙은 저녁에 아내와 술 한잔 기울이면서 소소하게 얘기 나누는 거예요. 관리를 하고 있어 양심상 안주는 안 먹고, 제로 칼로리 맥주만 마시고 있습니다. 그 행복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낮에는 또 열심히 달리는 거죠. 하하. 10월부터 뮤지컬 ‘애니’ 공연을 하는데, 어떤 작품인가요? ‘애니’는 대공황 시기 미국의 한 보육원에 사는 소녀 애니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에요. 저는 ‘키다리 아저씨’ 올리버 워벅스 역을 맡았죠. 성인 연기자 중에 비중이 가장 높고 극을 이끌어가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노력했던 것들이 쌓여서 일종의 보상처럼 이 작품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뮤지컬 1세대’ 남경주 배우와 더블 캐스팅된 소감이 궁금합니다. 남경주 선배님과 더블 캐스팅 소식을 전하자, 아내의 첫 마디가 ‘당신 성공했네’였어요. 정말 딱 맞는 말이에요. 제가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남경주 선배님께서 오래 연기한 줄리안 마쉬 역을 맡아 연기했죠. 초연할 때 선배님 공연 영상을 교재 삼아 보고 또 보고, 손동작 하나하나 다 따라 했어요. 그런 선배님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다니 얼마나 영광이겠어요. 10년 만의 안착 첫 공연 작품은 연극 ‘나는 너다’인데요. 그 작품이 있어서 지금이 있겠죠? ‘나는 너다’는 처음 공연하는 사람이 소화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작품이었어요. 안중근과 안중근 아들 1인 2역을 소화하고, 무대도 사면이 보이는 원형극장이거든요. 연출을 맡은 윤석화 선배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죠. 이 작품을 하고 나서 내 이름 앞에 ‘배우’를 붙여도 더 이상 쑥스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어요.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저한테 큰 선물을 준 작품입니다. 당시 결혼 4년 차였는데, 거짓말처럼 아내가 삼둥이(대한·민국·만세)를 임신한 거죠. 정말 신기하고 감격적이었습니다. 무대에 선 지 10여 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어느 날 아내가 ‘당신은 하늘에서 누가 커리큘럼 짜주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대로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나는 너다’를 통해 연극에 대해 알게 된 후, 소극장 공연 ‘대학살의 신’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죠. 그리고 뮤지컬은 제게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애국가와 독립군가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맘마미아’를 하면서 많이 성장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아직 뮤지컬계에서 신인이라고 생각하고, 오디션도 계속해서 보고 있죠. 공연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계속하게 되는 걸까요? 공연이야말로 진정한 배우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연출의 디렉션 안에서 움직이는 게 맞지만, 막상 무대에 서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너무나도 많이 생기거든요. 순간순간 대처는 배우가 해야 합니다. 관객이 어떤 부분을 집중해 볼지 시선을 정하는 것은 온전히 배우의 몫이라는 거죠. 그 부분에서 희열을 많이 느껴요. 그 감정을 잊지 못해서 계속 공연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NG라는 개념이 없으니 처음에는 낯설고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맞아요. 처음에는 무대 위에서 실수하면 많이 당황했어요. 시간이 쌓이면서 방법을 터득했죠. 첫 연극 작품을 할 때, 한 선배가 ‘무대에서 두 발로 디디고 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10년이 지나니 무대 위에 두 발을 디디고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전에는 손과 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정말 무대 위에서 손이 막 날아다녔다니까요.(웃음) 겸손함과 책임감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예능 프로라 출연 고민이 있으셨나요. 모든 배우가 고민하는 지점일 거예요. 배우가 예능 출연을 하면 시청자나 관객의 작품 몰입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그럼에도 출연한 이유는 저는 일보다 가족이 우선인 사람이고, 삼둥이 육아 기록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결국 출연하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종종 삼둥이의 가장 예쁘고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을 찾아봐요. 그리고 제가 ‘육아의 신’으로 칭송받을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렇게 훌륭하고 좋은 아빠가 아닌데 부끄러워요. 매일매일 시행착오를 겪는 아빠랍니다. 대한이가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우리 때문에 아버지가 작품을 더 많이 못 했다’고 했는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저런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고 고마웠어요. 짠하기도 했죠. 대한이가 아무래도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있는 것 같아요. 삼둥이 셋이 얼굴도, 성격도 다 다른 게 신기해요. 저는 ‘슈퍼맨이 돌아왔다’ 출연을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출연할 것 같아요. 해야죠! ‘육아의 신’으로 불리기 전에는 ‘주몽’ 이미지가 강했죠. 배우가 주인공을 맡는다는 것은 굉장한 영광이에요. 더군다나 그 작품이 대박 난다면 매우 큰 축복이죠. 저는 ‘주몽’이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2001년부터 10년 넘게 중국 동북 3성 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는 ‘청산리 역사대장정’ 프로그램을 대학생들과 함께 진행했어요. 그 사이 제가 출연한 MBC 드라마 ‘주몽’이 인기를 끌면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죠. 이러한 부분이 운명 같다고 느껴져요.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통해서는 아빠도 육아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육아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해요. 타이밍과 운이 잘 맞아 너무도 큰 사랑을 받았어요. 연기대상도 받은 배우인데, 너무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배우로서 장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장점을 꼽자면 건강한 체격, 그리고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끼와 관심은 미술 쪽에 있었어요. 벌써 데뷔한 지 26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연기력은 100점 만점에 15점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남들과 비슷해지려면 열심히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는 거죠. 부단한 노력으로 삶을 가꾸셨네요. 앞으로의 삶이 궁금해집니다. 아내한테 좋은 남편, 자식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저의 변함없는 목표입니다. 국가의 가장 기본은 가정이라잖아요. 가정을 행복하게 꾸리고 사는 게 내가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요. 어느덧 50대에 진입했는데, 앞으로도 지금처럼 후회 없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Bravo Question -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식탐인 것 같아요.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을 통틀어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같아요. 원래 배우는 뼈에 살가죽만 붙어 있어야 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먹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늘 딜레마에 빠져요. 배우로서 ‘관리’는 기본이죠. 기본을 갖춘 배우가 되고 싶기에 나와의 싸움을 지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 2024-09-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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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에 홀로 된 나, 유연하게 나이 드는 방법은?
- 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둘이 살다가도 혼자가 되고, 해로해도 두 사람이 같은 날 죽지 않는다. 배우자 중 한 사람이 병으로 먼저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은 혼자 남겨지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나탈리 말대로 삶이 끝난 게 아니다. 결혼 생활이 끝났을 뿐이고,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뿐이다. 즉 혼자 살 시간이 다시 주어졌다. - ‘혼자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 30p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혼자 산다. 비혼, 이혼, 사별, 자녀의 독립, 경제활동 등 이유는 제각각이다. 1인 가구가 늘고 있으나 몇몇은 여전히 하나보다 둘이 안정적이고 행복하다 믿는다. 혼자 사는 노인은 ‘빈곤하고 외로운 상태’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김남금 작가는 혼자 나이 드는 삶이 불완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더 면밀히 만날 소중한 기회라 말한다. ‘혼자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은 서른 편의 영화를 통해 혼자 사는 삶을 깊이 있게 탐구한 책이다. 여러 사정으로 홀로 서게 된 이들이 맞닥뜨리는 풍경과 극복 과정을 영화 속 사건과 인물로 보여준다. 외로움, 생계와 주거 문제, 관계의 어려움, 불확실한 노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밀려올 때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비슷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정서적 지원을 어디서 찾을지, 사회 변화와 과제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나이 듦과 죽음에 어떻게 대비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 주인공 나탈리는 어느 날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남편의 고백 이후 아무런 준비 없이 ‘혼자 살기’에 내던져진다. 그저럭 보람찬 시간을 보냈고, 잘 굴러가는 인생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두 발 동동거리며 기름칠하고 조였던 일상의 톱니바퀴 하나를 남편이 빼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엎어지고, 잘 따르던 제자마저 그의 사상이 죽은 것이라 비판한다. 한밤중 전화로 귀찮게 하던 엄마는 요양원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나탈리에게는 온전한 자유만 남아 마음을 들쑤신다. 하지만 그는 “현실 부정은 어디에도 도움이 안 돼. 고정관념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을 뿐. 별일 아니야. 삶이 끝난 것도 아니야.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잖아”라며 털어내려 한다. 이런 일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래도 나탈리의 말처럼 가구 형태가 어떠하든 일상을 지탱하는 요소는 없어지지 않는다. 가족, 일, 사회 활동에서 맺은 인연은 여전히 우리의 위성이다. 은퇴해도 고유한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자녀가 품을 떠나도 가족이다. 혼자라는 사실이 매 순간 무섭고 아프기만 하진 않을 테다. 궁극적 문제는 ‘혼자 산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다. 두려움의 포로가 될지, 두 팔 벌려 자유를 품에 안을지는 나의 선택이다. 환영하기로 마음먹으면 다른 세계가 기다릴지 모른다. 슬기로운 홀로 라이프 “제 정체성이 아무래도 ‘혼자’이다 보니 이 단어를 둘러싼 사회적인 구조나 시선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비혼이라서 그래’, ‘이혼해서 그래’, ‘혼자 살아서 그래’라는 말이 익숙한 세상이라고 느껴요. 1인 가구라고 꼭 외롭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건 아니거든요. 고민의 주제나 행복을 느끼는 지점이 다를 뿐이죠. 다름을 규정하고 분류하기보다 서로를 그저 받아들이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같은 50대여도 가사 노동에 힘쓰는 사람, 은퇴 후 다시 자신을 탐구하는 사람, 1인분의 몫을 오래 살아서 이미 본인을 파악한 사람이 있는 거니까요.” ‘혼자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은 ‘혼자 살면 정말 외로울까?’라는 김 작가의 사소한 의심에서부터 시작됐다.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즐겁게 꾸려왔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가족을 기준으로 재단하는 말을 종종 들었다. 평생 네 편은 한 명쯤 있어야 한다든가, 가족과 함께여야 일상이 심심하지 않고 다채롭다든가. 혼자는 외롭다는 선입견과 둘은 완전하다는 환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김 작가는 ‘혼자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 속 영화들을 통해 그 가치관을 깰 만한 다양한 혼삶 방식을 제안하고, 같은 상황을 겪고 있거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들의 나이 듦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한다. 혼자 늙어가는 것에 왜 부정적 이미지가 따라다닐까? 혼자 독립적으로 나이 들어가는 다양한 노인을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본 적이 없으니 상상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혼인과 혈연 바깥에서 이루어진 가족 모델이 턱없이 부족하다.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97p 지속 가능한 혼삶에 필요한 요소 1인 가구로서 잘 나이 들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나를 잘 부양하고 책임져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일’은 삶의 습관과 방식을 만들어가는 채널이자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는 통로다. 이 채널을 통해 내 모습을 찾아내고 다듬을 수 있다. 생계 해결만큼 정서적 돌봄 역시 중요하다. 경제활동에 쏟은 노력은 공식적으로 응원과 보상을 받아도, 감정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행위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고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진짜 위기는 감정을 잘 몰라서 자신을 돌보지 못할 때 겪는다. 영화 ‘오베라는 남자’의 오베는 주거도 생계도 안정된 노년에 접어든 남성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를 잃은 듯 혼자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 바깥세상과 통로 역할을 하던 배우자가 없어지니 스스로가 쓸모없어진 녹슨 고철 덩어리라 여긴다. 성격은 변해버려 깐깐함을 넘어 까칠하기 이를 데 없다. 옆집 남자가 자기 차보다 좋은 차를 새로 살 때마다 자랑해서 말을 안 섞은 지 수년째다. 다정하기는커녕 냉소적이고, 이웃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오베라는 인물은 오랫동안 일과 관련한 언어를 사용하는 데만 익숙해서 사적인 관계 맺기와 소통에 서툴다. 주변에서 흔히 있는 경우다. 사이좋은 부부였더라도 어느 날 혼자 남겨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을 가꾸는 기술을 갈고닦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오베처럼 외로움에 사무치고, 무쓸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일부러 다른 사람과 섞일 기회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관계 맺을 기회가 적어요. 온라인으로 편하게 쇼핑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눈인사나 느슨한 치댐이 사라졌죠. 나이 들수록 낯선 자리를 꺼리고 친구를 찾는 데 수고로운 기분이 들겠지만, 혼삶을 지속하려면 오히려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끈끈했던 단 한 사람이나 가족을 잃을 경우 생의 의미를 함께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더불어 살기 1인분의 일상에서는 다른 사람 의견을 구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되는 상황이 많아진다. 하지만 내 마음의 소리에만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면 타인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할 수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다. 영화 ‘멋진 하루’의 희수는 자기가 그린 일상 그림이 있다. 그 선 밖으로 물감이 번지지 않게 하려고 미간을 잔뜩 찡그린다. 만들어둔 원칙을 고수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피해라고 여기는 편이다. 김 작가는 희수처럼 폐쇄적인 생활이 길어지면 ‘정신적 노화’를 막기 힘들다고 말한다. “저는 신체적 노화보다 정신적 노화가 더 두려워요. 자칫하면 꼰대로 가는 특급 열차를 타게 되겠죠. 본인의 가치관과 신념이 곧 법이 되면 말 안 통하는 고집 센 노인이 되는 거예요. 내 몫을 살뜰하게 챙기되 필요하다면 상대방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해요. 더불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유연함,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호기심, 배움에 대한 욕구, 남을 배려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요. 다림질한 것처럼 주름 하나 없는 피부에 최신 유행하는 코트를 걸쳤다고 무조건 젊은 건 아니니까요. 새로운 가치와 악수할 줄 아는 사람이 젊음을 유지하면서 혼자 잘 나이 들 거라 생각해요.”
- 2024-08-2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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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택 감독 “테니스 열풍, 지속되려면 또 다른 전설 필요”
- 지금의 대한민국 테니스 열풍 뒤에는 이형택이 있다. 묵묵히 불모지를 개척해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운 인물이다. 올림픽 4회 출전, 아시안게임 2회 연속 금메달, 한국인 최초 ATP 투어 대회 우승, US오픈 16강 진출, 세계 랭킹 36위 등. 테니스 선수로 그가 이룬 기록은 기적에 가깝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그는 현재 주니어 선수 감독으로 테니스와 함께하고 있다. 아홉 살 때 테니스를 시작하던 마음을 기억하며, 명맥을 이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테니스 열풍 뒤 고민 테니스 코트를 배경으로 화보 촬영한 소감이 어떠셨나요? 코트 색감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괜히 아이돌 된 기분도 들고, 좋았습니다. 하하. 요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지난해 12월 무릎 수술을 해서 재활 훈련을 하면서 주니어 선수 육성에 매진하고 있죠. 그런데 이렇게 테니스 외적으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어 기분도 환기되고 재밌었습니다. 요즘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상당한데 실감하시나요? 동호인, 그러니까 생활체육 쪽에서 테니스가 인기를 끌고 있죠. SNS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쁘고 멋진 옷을 입고 테니스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SNS에 사진을 게재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건강에 좋은 스포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시니어분들에게도 테니스 운동을 추천합니다. 전신 운동, 유산소 운동이 되고 테니스를 하면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체력이 안 따라준다거나 부상당할까 봐 너무 겁내지 마시고 한번 배워보세요. 이 인기는 앞으로도 이어질까요? 지금이 참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기를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다음 스텝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저는 테니스라는 스포츠가 더욱 발전하려면 결국 엘리트 선수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포츠 업계에서는 테니스가 10년 전 골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얘기해요. 박세리 선수 이후 좋은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세계대회에서 이름을 알렸기에 발전할 수 있었죠. 지금 국내에서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이 100만 명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300만 명 이상으로 커지려면 정현, 권순우 같은 선수가 4~5명 정도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현, 권순우 선수에 대한 애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 두 선수 모두 본인의 의지로 해외 경기에 도전했고 멋진 성적을 냈죠. 정현 선수는 그랜드슬램 4강을 달성했어요. 지금은 부상으로 인해 공백기가 길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권순우 선수는 최근 메이저 대회(프랑스오픈)에서 승리하며 활약을 보여줬죠. 선배로서 두 선수 모두 몸 관리 잘하고, 부상 없이 투어 생활을 오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너무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제가 그러지 못했기에 선수 생활이 끝나고 좀 아쉽더라고요. 해외에 가서 맛집도 못 가보고 주변 관광도 못 즐기고 그랬죠. 빛나던 영광의 순간들 테니스 불모지에서 어떻게 선수가 되셨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강원도 횡성군 오천면에서 자랐어요. 어느 날 저희 초등학교로 발령받아 오신 선생님이 테니스부를 창단하신 거예요.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 축구 테스트를 하셨어요. 축구를 잘하면 모든 스포츠를 잘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당시 선생님이 제 축구 실력을 좋게 봐주셔서 테니스부에 들어갔고, 그게 시작이 된 거죠. 그때는 정말 테니스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아홉 살짜리 아이였어요. 선수 생활 기록 중 어떤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많은 분들이 ‘타이브레이크의 기적’이라면서 2005년 국제남자챌린저테니스 경기를 얘기하시죠. 6대0에서 역전승을 거둔 스토리가 포인트 같아요. 당시 저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마음이 통했던 걸까요? 그리고 19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수상은 저에게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회사가 IMF로 많이 힘들었거든요. 제가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선수 생활이 그때 끝났을 수도 있어요. 금메달을 따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시작했고 2000년 US 16강 진출도 가능했죠. 경기 때 특별한 징크스가 있었나요? 징크스는 아니지만 저는 식당에 가면 항상 앉았던 자리에 앉으려고 했어요. 경기하는 날이 아닐 때도요.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 앉지 못하면 괜히 아쉬운 기분이 들곤 해요. 생각해보니 징크스가 하나 있었네요. 어머니께서 관람하러 오시는 날에는 한 번도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오시지 말라고 했는데, 아마 서운하셨을 거예요. 그 징크스를 깨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끝날 때까지 깨지 못했죠. 테니스 경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건 결국 무엇일까요? 테니스는 매 순간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스포츠예요. 그렇기 때문에 멘털 관리가 중요하죠. 경기하면서 조급해지는 순간이 와도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덤덤해지려고 노력해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최선을 다하자, 긴장하지 말자고 계속 저 자신과 대화를 하죠. 지금도 테니스 황제 선수 시절과 비교해 체력이 떨어진다고 느끼시나요? 아무래도 근력의 질이 많이 다르죠. 힘도 떨어지고요. 그래서 평소에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하려 하고 러닝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죠. 테니스장에 있다고 운동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선수가 아니고 지도자잖아요. 여러 명의 학생을 신경 쓰느라 바쁘죠. 요즘에도 축구를 즐기시나요? 축구는 체력 훈련 삼아 하고 있어요. 전에는 축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 ‘뭉쳐야 찬다’(JTBC 예능)를 하면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고 기술을 익혔죠. 축구장을 뛰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또 요즘은 골프를 취미로 즐기고 있어요. 사실 골프 프로 투어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여러 여건상 안 되겠더라고요. 이제 무릎이 좋아지면 야구, 마라톤 등 새로운 운동에 도전해보려고요.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니까요. 유튜브 채널 ‘머드Lee-이형택TV’에 대한 관심이 높아요. ‘머드Lee’는 제 별명이고, 한마디로 말하면 테니스를 주제로 하는 채널이에요. 정보영 선수와 대결을 펼치는 영상(조회 수 200만 회 돌파)이 가장 인기가 많아요. 시청자들이 제가 경기하는 영상을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테니스 치는 분들한테만 재밌는 영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다른 스포츠 즐기는 모습, 먹방, 일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다루려고 합니다. 테니스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테니스는 제게 동반자예요. 죽을 때까지 계속 같이 가야죠. 끝이라는 게 없는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고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제가 올림픽을 4회, 16년 동안 출전했어요. 그런데 메달이라는 성적을 내지 못해 아쉽다고 할 수도 있고, 그래도 잘 견뎠다고 위로받을 수도 있겠죠. 지금 저는 주니어 선수 육성에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후배들이 좋은 길로 가는 것을 보면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죠. Bravo Question -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테니스에 대한 열정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테니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내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테니스라는 스포츠 자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야 좋은 선수들도 많아지고 선순환 발전이 이뤄지는 거죠.
- 2024-07-0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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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상흔과 평화 느끼는 하루, 관광명소로 거듭난 김포
- 그토록 노래하던 벚꽃도, 진달래도 바람에 날려갔다. 푸릇푸릇하게 숲을 이루기 시작한 초여름을 걷는다. 그 길을 따라 높은 산 전망대 망원경을 통해 애타는 그리움을 보았다. 산과 강과 철책이 어우러진 이 땅의 아름다운 길 위엔 평화를 염원하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분단의 현장을 고스란히 밟으며 가슴 시린 역사를 살피는 유월의 사뭇 다른 마음을 기억하려 한다. 자연 그대로의 애기봉평화생태공원 구불구불 비탈진 산길을 거쳐 당도한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은 최북단인데도 말 그대로 평화롭다. 한반도 유일의 남북 공동이용수역에 위치한 평화와 화합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남북 접경지역의 154m 쑥갓머리산이라 불리던 애기봉은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건축물과 자연생태가 잘 어우러진다. 얼핏 갓난아기를 떠올릴 수 있는 애기봉이라는 이름은 평안감사와 기녀 애기의 애틋한 설화에서 온 말이다. 피난길에 오랑캐에게 붙잡혀간 감사를 그리워하던 애기가 ‘님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며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애기의 한이 마치 실향민의 한과 같다 하여 이곳에 애기봉(愛妓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전망대에 오르기 전 먼저 평화생태전시관을 둘러보자. 전시관을 둘러싼 생태 조성과 조각 전시는 작품마다 평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보여준다. 실내 전시 공간의 조강 생태 디오라마와 조형물들 역시 볼 만하다. 상주하는 해설사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사전 지식을 얻고 오른다면 강 건너 북녘을 바라보는 마음이 한결 다르다. 평화, 생태, 미래를 주제로 한 3개의 평화생태전시관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전망도 시원하다. 물길 저편의 남쪽과 북쪽의 경계가 모호하다. 38선을 중심으로 한 DMZ는 분단 70년이 지나면서 정확한 구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창밖으로 흐르는 조강과 전시관 바닥 및 벽에 그려진 위치도를 가리키며 전하는 해설이 생생하다. 한강 하류 끝의 물줄기와 김포와 강화, 북쪽의 개풍군이 뒤엉킨 모습을 눈앞에서 본다. 전시 미디어아트와 VR 체험을 통해 개성으로 떠나는 가상현실도 이곳에서는 유난히 실감 난다. 평화생태공원의 두 번째 건물인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흔들다리를 건넌다. 산골짜기에 길게 이어져서 고개를 돌리면 온통 울창한 숲이다. 흔들다리 끄트머리쯤부터 지그재그형 탐방로가 완만하게 이어진다. 빙글빙글 돌아 걸으면서 초여름의 풍성한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다. 1953년 휴전 이후 아무도 오갈 수 없는 고립 지역이 자연스럽게 생태의 보고가 되었으니 천혜의 생태공원인 셈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북한은 그저 건넛마을이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린 날이었는데도 고배율 망원경을 통해 북녘땅이 선명히 보인다. 수도권에서 북한의 최전방을 볼 수 있다니. 1.4km 거리에 그들이 살고 있었다. 빌라 같은 공동주택이 새것 같은 느낌으로 마을을 이룬 북한 땅이 거기 있다. 주민들의 사는 모습이 마냥 친근하다. 돛배를 젓거나 수영을 해서라도 단숨에 건널 수 있는 코앞인데도 구경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물길을 가운데 두고 김포와 강화도, 파주시가 개풍군을 마주한 채로 사는 중이다. 남북의 가운데로 흐르는 조강은 임진강,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흐른다. 그 물줄기를 조강이라고 하는데 큰 강, 할아버지 강이라는 뜻이 담겼다. 물길 사이로 마주 보는 북쪽 건넛마을과 우리의 분단 현실을 청정의 생태공원에서 평화롭게 둘러볼 수 있으니 최고의 안보 여행지가 아닌가 싶다.(방문 시 신분증 지참과 인터넷 예약 필수) 숲속 문화예술 여행, 김포 국제조각공원을 걷다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을 내려오면서 들를 수 있는 김포 국제조각공원은 문수산 숲속이 작품 전시장이다. 통일을 테마로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자연 속 전시장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 3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산속에 풍덩 빠져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전시된 예술작품 한 점씩 찾아보는 숲속 문화예술 여행을 한다. 미로 같은 숲길을 걸으면서 전시 작품을 관람할 수 있어서 산책과 힐링을 동시에 맛본다. 솔향기 번지는 군하숲길 주변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롭게 작품들을 둘러본다면 온전히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 전시는 연중무휴다. 덕포진의 손돌목 산책길과 짭조름한 대명포구 사적 제292호 덕포진은 강화해협을 마주하는 김포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쳐 한양으로 진입하는 길목의 바닷길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미국과 프랑스 함대와 맞서 싸웠던 격전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서 발굴 출토된 포와 포탄, 조선시대 상평통보와 주춧돌 등은 오르기 전 덕포진 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현재 덕포진은 3개의 포대와 그 끄트머리에서 파수청터가 발굴되었다. 이어서 강화해협이 건너다보이는 마지막 지점에 손돌묘가 보인다. 강화해협 중에서 가장 폭이 좁고 물살이 거센 지형을 이용한 천혜의 요새 손돌목이다. 바다가 보이는 수려한 풍광 사이로 수백 년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당시 포격전이 펼쳐졌던 포대 중 첫 번째 포대가 가장 길고 언덕의 곡선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방풍림 소나무 아래에서는 수백 년 역사를 더듬듯 바다를 내다보며 걷다가 쉬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덕포진은 평화둘레길 1코스와 염하강 철책길 순환 코스로 연결된다. 이윽고 포대를 지나고 손돌묘에 이르면 눈앞에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도로 피난 갈 때 물길을 안내하던 중 세찬 물살에 겁이 난 왕의 오해로 죽임을 당한 뱃사공이다. 죽기 전 손돌은 바가지를 물에 띄우며 ‘이 바가지를 따라가면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죽었다. 바다를 무사히 건넌 임금은 자신의 성급한 오해로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성대히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후에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쯤이면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 사람들은 손돌바람이라 했고, 이 무렵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불렀다. 지금은 손돌의 배가 지나던 물길에 고깃배가 유유히 흘러간다. 바다 건너편으로 강화의 광성보와 용두돈대가 보인다. 손돌묘 옆으로는 덕포진 둘레길을 만난다. 평화누리길 1코스를 알리는 대명포구의 조형물을 지나 시작되는 염하강 철책길 순환 코스가 손돌묘까지 와서 부래도, 덕포마을, 덕포진, 대명항 코스의 6.5km를 걸으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 철책길과 절반 이상 겹치는 순환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으면 철책 너머 보이는 김포 들녘과 바다 풍광에 가슴이 탁 트인다. 우리의 역사가 담긴 문화유산이 휴식을 주고 둘레길 코스가 되어 사람들이 오간다. 더불어 마음 가득 평화를 염원하게 된다. 오래된 숲의 위로, 장릉 벚꽃과 진달래꽃의 반영이 예쁘던 김포 장릉 연못에 이제 오래된 나무들이 연둣빛으로 비친다. 김포 장릉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부모인 추존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 씨의 능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입장 시간이 오전 7시부터여서 이른 아침부터 관람이 가능하다. 역사 속 장소지만 일상에서 찾아가 차분히 힐링을 얻는 공간으로도 더할 나위 없다. 봄이면 목련과 벚꽃이 눈부시다. 초록으로 울창한 여름을 지나 가을엔 오래된 숲의 위로가 마음을 토닥인다. 긴 세월을 담은 수목들 사이를 아무리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단청 없이 소박한 재실 앞의 연지는 묘역과 함께 이루어진 긴 세월을 담고 있다. 새롭게 단장된 장릉 역사문화관에서는 정조 임금이 직접 지은 시도 감상할 수 있어서 뜻깊다. 복잡하고 소란한 세상을 뒤로하고 하루쯤 깊이 잠겨보아도 좋은 곳. 무해한 시간이다.
- 2024-06-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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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혜의 관광지로 둘러싸인 말레이시아 골프의 정점
- 말레이시아 북서쪽에 위치한 랑카위는 아름다운 섬으로, 세 개의 독특한 골프 코스를 보유하고 있다. 필자는 조호르바루에서 비행기로 약 1시간 20분 이동해 이곳에 도착했다. 랑카위의 대표적인 골프 코스로 엘스클럽, 구능라야 골프리조트, 99 이스트(East)골프클럽 등이 있다. 구능라야 골프장(파72, 6377m/ 5879m)은 미국의 저명한 골프 건축가 맥스 웩슬러가 설계했다. 1998년에 9홀이 먼저 완공되었고, 2001년에 18홀로 확장되었다. 웩슬러는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유라시아 대회를 개최했던 말레이시아의 글렌마리GC와 조호르바루의 풀라이스프링스(Pulai Springs)CC, 코타키나발루의 다타이베이CC 등을 디자인한 바 있다. 구능라야의 ‘Gunung’은 산을, ‘Raya’는 축제를 의미하며, 이름 그대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코스는 다양한 나무와 깊은 러프로 이루어져 있으며, 넓은 페어웨이와 최근 비로 인해 다소 느려진 그린 스피드를 자랑한다. 그린은 티프드워프 잔디, 페어웨이는 조이시아 잔디를 사용하고 있다. 퍼블릭 코스로 운영되며, 250m 길이의 연습장은 현재 운영되지 않고 있다. 외국인은 1년 회원권을 1820링깃(약 55만 원)에 구입할 수 있다. 회원이 되면 카트비와 소액의 보험료만 지불하고 무료로 라운드를 즐길 수 있다. 현지 주민들은 월간 회원권도 가능하지만, 외국인은 1년 단위로만 가능하다. 캐디 서비스는 사전 예약이 필요하며, 카트는 페어웨이로 직접 이동할 수 있어 편리하다. 구능라야 골프장의 대표적인 홀은 2번 홀(파5, 499m/471m)로, 내리막 티 샷과 S자형 페어웨이로 인해 정확한 샷이 요구된다. 필자가 이곳에서 여러 번 볼을 잃어버렸을 정도로 도전적인 코스였다. 10번 홀(파5, 500m/478m)은 멋진 호수와 커다란 산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경관을 제공하며, 11번 홀(파3, 158m/154m)은 시그니처 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2번 홀이나 10번 홀이 시그니처 홀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36홀 라운드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라운드 중에는 날씨가 좋았다. 이후 필자는 골프장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다따란 랑(독수리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곳은 랑카위의 상징인 독수리 동상이 있는 곳으로,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찾는 명소다. 랑카위섬 주변에는 총 99개의 섬이 있으며, 그중 랑카위섬과 풀라우투바(Pulau Tuba)섬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나머지 97개의 섬은 무인도로 남아 있다. 이곳은 한국에서도 신혼여행지로 유명하다. 필자는 주로 골프에 집중했지만, 다따란 랑에서의 잠깐의 관광은 기억에 오래 남을 멋진 경험이었다. 랑카위는 골프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특히 면세 지역으로, 쇼핑을 즐기는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이다. 쿠아타운(Kuah Town)에는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곳에서 면세 쇼핑을 즐길 수 있다. 랑카위 케이블카는 또 다른 인기 명소로, 마친창산(Machincang Mountain) 정상에 올라가면 랑카위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스카이브리지(Sky Bridge)는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다리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또한 랑카위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이 있다. 판타이 체낭(Pantai Cenang) 해변은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맹그로브 숲 투어도 추천할 만하다. 보트를 타고 맹그로브 숲을 탐험하며 다양한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다양한 관광 명소를 자랑하는 랑카위는 골프 여행은 물론 휴양지로도 최적의 장소다. 구능라야 골프리조트에서의 라운드와 더불어 랑카위의 매력을 만끽해보길 권한다.
- 2024-06-2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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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 침범한 AI 시대... 삶의 이유 질문하는 소설가 된 변호사
- 인공지능(AI)이 음악도 만들고, 그림도 그린다. 인간 고유의 재능으로 여겨졌던 ‘창작’이라는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AI가 더욱 고도화될 거라는 건 정해진 미래다. 사람들이 ‘어떻게 AI를 활용할 것인가’ 고민할 때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변호사가 있다. 아니, 그는 소설가다.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는 “AI와 공동 집필에 몰두했던 소설가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한 작가는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상징적 죽음’이라는 평을 내놨다. AI의 발달로 인간 고유의 영역을 빼앗기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위태로운 저자의 지위’와 ‘왜 창작하는가’ 같은 뿌리에 가까운 질문이 담겨 있다. 저자 조광희 변호사는 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됐을까? 영화에서 소설까지 ‘올라운더’ 법무법인 원에서 근무하는 조광희 변호사는 ‘올라운더’라 불린다. 올라운더는 스포츠 등에서 모든 역할을 골고루 하는 선수를 가리키는 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이 별명이 이해가 된다. 1990년 제3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영화사 봄의 대표이사를 지내며 ‘밤과 낮’, ‘해변의 여인’, ‘멋진 하루’ 등을 제작했다. 그리고 선거캠프에서 세 차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씨네21’, ‘한겨레’, ‘경향신문’의 칼럼니스트로 글을 썼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2003년에는 영화인들의 필독서로 유명한 ‘영화인들을 위한 법률가이드’를 펴냈다. 이후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 산문집 한 권과 ‘리셋’, ‘인간의 법정’, ‘밤의, 소설가’까지 세 권의 소설을 냈다. 이뿐인가. 소설 ‘인간의 법정’은 뮤지컬로도 제작됐는데, 조 변호사는 이 뮤지컬의 각본까지 맡아 각본가로도 데뷔했다. “변호사 일은 30년째 하고 있어요. 문화예술, 엔터테인먼트 관련 업무를 주로 합니다. ‘평판 관리’라고 하는 대중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분야도 담당하고요.” 이 정도 이력이면 작가로 전업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조 변호사는 변호사로 오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전업 작가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유죠.(웃음) 두 번째로 변호사는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일이 결국 소설의 토양이 됩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거든요.” 버스에서 설계하는 소설 조광희 변호사는 뮤지컬 각본 작업도 소설 집필도 변호사 일을 하며 병행했다. 무척 바쁜 일상이었을 텐데 어떻게 일의 균형을 잡았을까? 작품들이 그의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은 소설을 쓰는 그의 방식과도 관련 있었다. 조 변호사는 ‘필 꽂히는’ 대로 써 내려가면서 수정을 거듭하기보다, 처음부터 구조를 짜임새 있게 구성한 뒤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소설을 설계하는 셈이다. “처음에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아이디어와 콘셉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밤의, 소설가’는 ‘10여 년 전 알았던 여성이 소설가가 돼 법률사무소에 나타나 일을 맡긴다’는 내용으로 시작했어요. 아이디어는 버스 타고 출퇴근할 때, 산책할 때,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실 때 등 일상에서 떠올리는 편입니다.” 다음으로 시놉시스를 쓰고 트리트먼트를 만든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 변호사는 영화에서 쓰는 개념을 가져와 설명했다.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역시 산책하다가 휴대폰에 메모하거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작성하는 방식으로 채워나간다. “시놉시스는 한 페이지 정도의 줄거리를 쓰는 일이에요. 인물과 사건을 그럴듯한 구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한 페이지지만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시놉시스가 완성되면 이를 바탕으로 20~30장짜리 트리트먼트를 씁니다. 좀 더 자세한 줄거리죠. 인물이나 사건 설명이 더 상세하게 나와야 합니다. 저는 트리트먼트 작업을 할 때 챕터를 나누어서 써요. 트리트먼트가 일종의 설계도 역할을 하는 셈이에요. 여기까지 완성되면 이제 조금은 기계적인 작업이 됩니다. 살을 붙이는 과정이죠. 이때는 책상에 딱 붙어 앉아 쓰는데요. 주로 집에서 하지만 자주 가는 카페도 있고, 어떤 때는 2~3일 정도 여행을 떠나 작업하기도 합니다.” 소설을 처음부터 설계한다는 건 꽤나 논리적인 작업이다. 변호사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이 소설 쓰기에도 반영된 듯한 방식이다. 하지만 ‘밤의, 소설가’는 기존과는 좀 다르게 완성됐다. 처음에는 한 문예지에서 작품 요청을 받아 쓰게 됐는데, AI는 비서 역할로만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완성한 후 문우들과 대화하다가 생각이 확장됐다. “발상의 전환이 되면서 ‘소설 쓰기에 관한 소설’이라는 주제까지 다루게 됐어요. 소설 속에 소설 집필 과정 자체를 노출시키는 일종의 메타 소설이 된 셈인데요. AI에게 창작의 영토를 빼앗기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러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이 꼬리를 물더라고요.” ‘왜 사는가’에 대한 고찰 AI ‘레비’와 함께 소설을 써 내려가던 소설가 건우의 고민을 따라가다 보면 조광희 변호사가 작품을 통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을 만나게 된다. ‘저자의 위태로움’이다.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지만, 동시에 ‘대중과 시장이 요구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요즘 사람들은 고전문학을 잘 안 읽잖아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쓰면 달콤한 글만 쓰게 되죠. 저자라는 지위 자체가 위태롭다고 보는 지점이에요. 그걸 AI가 가속화하는 거죠. 심지어 AI와 소설 쓰기를 경쟁합니다. 나보다 더 글을 잘 쓰는 AI라니, 그렇다면 저자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에 빠지게 되겠죠. 차라리 AI에 기대는 노예가 될까 고민도 하게 되고요.” 벌써 AI는 단순노동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고 있다. 변호사 업무에도 쓰이니 말이다. 조광희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가 됐을 때만 해도 판례가 전산화되지 않아 법원도서관에서 종이 파일을 뒤져야 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모든 판례를 검색할 수 있고 AI에게 말하면 대신 검색해줄 수 있는 지경에 가까워지고 있다. 실제로 AI가 영문 계약서를 번역해주는 일은 제법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소설 속 소설가는 AI와 소설 쓰기에 관해 경쟁하지만 현실에서는 변호사가 AI와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소송 기록을 주면 논점이 뭔지 분석해내는 것까지 AI가 해낼 거예요. 그렇다면 변호사의 주요 업무는 재판에서 어떻게 전략적인 접근을 할 것인가, 법정에서 증인의 말을 신뢰할 것인가 아닌가 등의 인간적이고 섬세한 일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뀔 거라 봅니다. ‘일’이라는 영역에 AI가 계속 침식해 들어오니까요. 결국 인간은 어떤 일을 도대체 ‘왜’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예술, 문학, 바둑, 체스 등 많은 분야에서 AI는 인간의 창조성과 지적 능력을 대체하고 있다. 조광희 변호사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목표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AI라는 존재가 단 몇 초 만에 허물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을 왜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돼요. 그걸 고민하다 보면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까지 이어지겠죠.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단순히 책을 팔고자 하는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로 토로해내는 일종의 쾌감과도 연관된 일이거든요. 자신의 미학적인 정열 때문에 글을 쓰는 건데, AI가 소설을 더 잘 써내는 시대가 온다면 미학적인 쾌감을 빼앗기는 거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위협받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으로 녹아드는 삶 조광희 변호사의 이런 고찰과 경험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첫 소설 ‘리셋’은 주인공인 변호사 강동호가 현직 서울시장의 의뢰를 받아 미스터리한 정치적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돈과 권력, 그것을 쫓는 정치 세력 간의 블랙 커넥션을 파헤치는 내용인데, 아무래도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을 테다. 두 번째 소설 ‘인간의 법정’은 주인을 살해한 AI ‘아오’가 재판을 받는 이야기다. AI와 인간의 관계, 생명과 소수자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제시한다. 이 책이 뮤지컬로 탄생한 것은 뮤지컬 ‘그날들’을 작업했던 장소영 음악감독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무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화 각본처럼 썼고, 장 감독의 도움으로 극에 맞춰 수정을 거듭해 완성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시를 습작했던 경험이 아리아 가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됐고, 영화사 대표로 일하며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를 본 것이 체득되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도 반영됐다. 세 번째 소설 ‘밤의, 소설가’는 두 번째 소설을 쓰면서 AI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봤던 것이 도움이 됐다. 어느 정도 AI에 대해 학습되어 있었기에 이야기를 확대해갈 수 있었다.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소설 ‘도시의 은자’는 대중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이야기다.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자신은 정작 숨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계획이다.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도 준비하고 있다. 영화감독인 동료 변호사와 함께 드라마 기획을 완성하고 대본을 쓰고 있다. ‘올라운더’의 면모가 돋보이는 행보다. 분야가 무엇이든 그가 만드는 작품에는 그의 삶이 녹아 있다. 아니, 작품으로 녹아드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기작들에도 역시 변호사가 나올 것 같다. 그는 “꼭 변호사를 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경험과 인생관을 녹인 캐릭터를 고민한다면 “변호사가 자주 등장할 가능성이 높겠다”며 웃었다. 어쩌면 ‘변호사’라는 등장인물이 그의 상징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소설 쓰는 변호사 조광희가 있고, 그 소설 속에서 변호사이면서 뮤지컬을 만드는 인물이 있고, 소설 속에서 만들어지는 뮤지컬에서 변호사를 연기하는 배우가 있을 것만 같다. 마치 ‘밤의, 소설가’ 작가의 말에 그가 남긴 말처럼. 여기 ‘밤의, 소설가’를 쓰는 조광희가 있다. 소설 ‘밤의, 소설가’에도 소설을 쓰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쓰는 소설 속에서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이다’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여자도 있다. 소설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이다’에서도 주인공인 여자가 소설을 쓰고 있을 것이다. -‘밤의, 소설가’ 中
- 2024-06-1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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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서 평생 지낸 에쓰코 씨의 새출발… 일본 은퇴자의 노후 도전기
-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하고 65세에 은퇴한 뒤 일본어 학교 교사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나가시마 에쓰코(永嶋悦子, 71세)씨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나가시마 씨는 일주일에 네 번 유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친다. 결혼 후 출산을 망설일 정도로 일이 너무 좋았던 나가시마 씨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42년간 금융업계 누빈 커리어우먼 나가시마 씨는 1975년 산와은행(三和銀行, 현 미쓰비시도쿄UFJ은행)에 입사했다. 산와은행에서 17년간 일하면서 긴자지점 지점장대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계열 회사인 에스에이서비스(エスエサービス, 현 미쓰비시UFJ웰스어드바이저스 주식회사)로 자리를 옮겨 6년 동안 재무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전근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금융업계라고 볼 수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연구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산와종합연구소(三和総合研究所, 현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에서 19년 근무하고, 2017년 42년간 몸담았던 금융계를 퇴직했다. 나가시마 씨에게 과거 금융업계에서 일했을 때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을 묻자 연구소에서의 일화를 꼽았다. “산와종합연구소에서 일했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기업의 경영 상담도 하고, 관공서에서 수탁받은 조사 업무도 했죠. 가끔 금융 세미나 강사로 초청되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리포트 작성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45세, 출산을 선택하다 나가시마 씨의 이력을 보면 선구적인 여성으로 정년퇴직까지 걸어온 커리어우먼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과거에는 금융기관 합병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상사와 부하로 만나 다른 기업 문화와 성향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단다. 또 같은 수준의 보고서를 내도 여자라는 이유로 질책받는 상황도 있었다.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은행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남녀고용기회균등법(1986년 시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출산 후에도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다 나가시마 씨는 44세에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고, 45세에 첫 출산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일이 너무 좋았던 그녀는 출산할 때까지 직장을 쉬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와 사별 후 혼자 지내던 어머니가 나가시마 씨의 육아를 도왔기에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1986~1991년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였다. 당시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투자 과잉으로 주택과 주식 가격이 나날이 높아졌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가시마 씨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했는데, 이후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큰 손해를 보았다.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도 1억 엔 이상의 대출이 남아 있었어요.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죠. 경제 파산이 얼마나 큰일인지 경험했어요. 하지만 남편이 ‘그 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옆에서 설득했죠. 이후 7년 동안 월급과 보너스를 모두 은행 대출 갚는 데 썼어요. 두 번의 전직으로 받은 퇴직금도 고스란히 대출 상환에 썼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투자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다시 시작한 커리어, 일본어 교사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한 그녀는 어떻게 일본어 학교 교사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 걸까. 나가시마 씨는 연구소에서 퇴직 직전 정부 수탁조사 업무를 하다가 ‘일본어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흥미를 느껴 퇴직 후 바로 자격 시험에 도전했다고 한다. 일본어 교사 자격증은 문화청에서 추천하는 420시간의 강좌를 수강하면 취득할 수 있다. 2022년 11월 기준 전국 일본어 교사는 4만 1755명에 이른다. 독립행정법인 일본학생지원기구에 따르면 외국인 유학생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일본어 학교는 약 600개가 있으며, 학생 수는 약 6만 명에 이른다. 나가시마 씨는 퇴직 후 6개월 정도 일본어 학교에 다니며 일본어 교육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800명 정도의 외국인 유학생이 다니는 도쿄 기타구의 JCLI 일본어 학교에 취직했다. 나가시마 씨는 대학교나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유학생반을 담당하고 있다. 비상근 강사로 일주일에 네 번 근문한다. 주 2회는 오전 11시 5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본어 지도를 하고 주 2회는 대학원 진학 희망자를 대상으로 오전 8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개별 수업을 진행한다. 연구계획서 작성법, 면접 연습, 소논문 지도를 담당한다. 이후 오후 2시까지는 추가 개별 지도를 한다. “제가 담당하는 반은 진학이 목표여서 대부분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아요. 초급반에는 네팔,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유학생이 많고요.” 과거에는 한국 유학생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중국, 베트남, 네팔 유학생이 많다고 한다. “요즘 일본으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을 보면 얼마나 상냥하고 착한지 몰라요. 중산층 자녀들이 일본으로 유학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할 때 태어난 아이들이라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가시마 씨를 만나러 JCLI 일본어 학교를 방문한 날, 학교 측에서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필자도 교단에 섰다. 나가시마 씨의 말처럼 중국 유학생들의 순수하고 해맑은 눈빛이 보였다. 특강 후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장래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열정이 엿보이는 시간이었다. 퇴직 후 얻은 보람 나가시마 씨에게 퇴직 후 일본어 교사 커리어를 선택해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었다. “제가 열심히 지도한 학생이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 저를 찾아와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껴요. 금융기관에서 40년 이상 일했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일한 경험, 인생 경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미래가 유망한 젊은 유학생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그동안 가르쳐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교사로서 무척 뿌듯한 일일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과 연구 테마를 같이 고민하고 방향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최고로 즐거워요. 학생의 연구 테마를 보며 새로운 지식이나 관점을 얻게 되는 순간도 아주 설레고 신나죠. 그렇게 힘을 합쳐 대학원에 합격하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많아요.” 학생들과 교류하며 보람을 느낀다는 점에서 나가시마 씨에게 교사는 무척 매력적인 직업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긴 휴가가 있다는 점이다. “3개월의 수업 기간이 끝나면 일주일의 쉬는 시간이 있어요. 그 시간에는 국내나 해외로 가고 싶었던 여행을 떠나요. 저에게는 너무 큰 즐거움이에요.” 노년에 잡은 행복의 파랑새 “지난달 은행 직원들 모임이 있었어요. 30여 명이 모였는데 여자는 저 혼자뿐이에요. 다들 70대가 됐으니 지금 뭐하는지 물었더니 절반 정도는 회사의 사외이사나 감사 일을 하고 있대요. 어떤 기업에 감사 관련한 일이 생기면 과거 금융기관에서 알고 지낸 동료나 선후배에게 소개한다더군요. 일종의 네트워크인데, 여자인 저에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나가시마 씨가 말했다. “저는 금융과 전혀 관계 없는 일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재미있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정년까지 했던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즐거워요. 이 일은 취미를 살리는 일과 같아요. 한 달 평균 10만~15만 엔 전후로 큰 수입은 아니지만, 연금 외에 충분한 용돈 벌이도 돼요. 일본어 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감각도 얻을 수 있고, 전철 타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요.” 나가시마 씨처럼 42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하며 어느 정도 저축도 해두었고 퇴직금도 있으면서 연금도 매달 받는 경우라면, 무리하게 일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이 노후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시마 씨는 특히 여성 시니어에게 일본어 교사를 추천했다. “여성에게는 일본어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정년 후에 큰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좋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많지 않고요.” 현재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나가시마 씨에게 앞으로의 꿈이 있는지 물었다. “일본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이제는 세계의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혼자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어요.” 자립한 여성이라면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아닐까 싶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묻자 “지금! 지금이에요!”라며 주저 없이 말하는 나가시마 씨. 활짝 웃던 그녀의 목소리가 취재를 마친 뒤에도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일본의 버블 경제라는 파도에 휩쓸려 암흑과 절망의 시기를 지나온 그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노년기에 이르러 젊은 유학생들의 꿈을 함께 실현하는 교사라는 행복의 파랑새를 잡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 아닐까!
- 2024-05-3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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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소음을 벗어난 아득한 천년 절터, 원주
- 문득 일상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계절이 바뀌면서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때로 막연할 때가 있다면, 사찰을 찾는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가만히 품어주고 차분히 가라앉혀준다. 거기엔 세월의 풍진이 켜켜이 쌓인 느티나무가 버텨왔고, 깊은 역사도 스며 있다. 오래된 큰 나무들이 만들어낸 그윽한 숲이 있고, 산사의 자연 풍광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예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다. 마음을 간질이는 봄이다. 초파일 즈음 맑고 깊은 기운 가득한 너른 절터로 떠나는 마음 여행이다. 부론, 얼핏 우리말인가 싶었다. 부드러운 외국어 같기도 한 부론은 강원도 원주 서남단에 위치한 지명이다. 원주시 부론면(富論面) 골짜기 부롯골의 보를 막아 논농사를 지을 때 보논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했던가. 원주 서쪽 경계의 호젓한 섬강과 충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 합류 지점의 비옥한 평야 덕분에 고려시대에는 나라의 세곡 운송을 위한 흥원창이 있었고 경제활동의 요지였다. 각 지역의 사람들과 물자가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말이 많이 오가는 언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말 그대로 ‘말이 많이 오가는 곳’, 부론(富論)이었다고 전한다. 당연히 국가 지도 이념이던 불교의 번창으로 이어졌다. 부론면, 여기에 두 곳의 대형 폐사지 터가 남아 있다. 맑은 산천과 강물이 펼쳐지는 아침나절에 원주에 닿았다. 지역이 크고 넓은 들판이라 하여 불리는 원주(原州)다. 들녘 풍경이 유독 눈부신 것은 봄 햇살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이른 아침 윤슬이 반짝이는 남한강과 느릿한 물길이 산천에 고이 깃든 세월을 헤아리며 기분 좋게 떠밀려가듯 원주 땅에 들었다. 원주에는 3대 폐사지가 있는데 남한강과 섬강을 따라 천년의 흔적을 지닌 법천사지(法泉寺址), 거돈사지(居頓寺址), 흥법사지(興法寺址)가 자리 잡고 있다. 3대 폐사지를 둘러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원주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싶다. 그중 부론면에 위치한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천년사지길을 따라 숲과 들을 지나는 트레킹 코스다. 남한강 주변 천년 고찰의 흔적을 따라 걷는 17.5km의 원주굽이길 10코스 천년사지길은 도보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테마 여행길이다. 그 길에서 화려하고 융성했던 시절의 영화로움과 무너져가는 역사를 지켜보며 세월을 견뎠을 노거수를 만나고 들꽃을 만난다. 웅장했을 규모의 전각은 사라지고 폐사지는 드넓다.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뜻을 지닌 부론면 법천리의 법천사(法泉寺)는 사적 제466호다. 지금은 너른 터만 남아 휑하니 썰렁하다. 법천사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다. 고려 문종 때 당대 제일가는 고승 지광국사가 승려의 길로 접어든 곳이며, 말년에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법천사지는 입구에서 건너편 끝까지 보이는 마을 전체가 절터라 하니 당시의 규모를 짐작해볼 만하다. 현재는 잘 정비되어 초석을 볼 수 있고, 흙을 걷어낸 석재들이 널리 분포된 모습이다. 이 지역은 예부터 담배 농사가 활발하던 곳이다. 지금은 주민들의 이주로 담배건조장 건물이 철거되었지만, 법천사지 내 건조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드넓은 절터에 서면 상상력이 발동된다. 당시 대사찰 안에서 오가던 수백 명의 승려와 백성들이 오버랩된다. 사찰 건축물이 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전에는 당시 내로라하는 승려는 물론이고 서거정, 한명회, 권람 등 학자들이 시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규모의 사찰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당대 논객들의 이야기가 허공에서 맴도는 듯하다. 폐사지터가 주는 공간의 매력이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명봉산 자락 아래 남겨진 절터는 권역별로 구분해놓았다. 걷다가 잠깐씩 멈추어 당시 이미지를 상상해볼 만큼 넓다. 군데군데 석재들이 흩어져 있고, 절터를 둘러싼 산기슭에 탑비가 보인다. 지광국사가 입적하자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과 공적비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수난이 시작된다. 지광국사탑은 한국의 석탑 중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일본의 수탈로 밀반출되었다. 그 후 반환되어 경복궁과 대전 등으로 100년 넘는 세월 동안 유랑생활을 해왔다. 최근에 본토인 원주로 돌아왔다. 2023년 법천사지 터 옆에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지상 2층 규모의 전시관 앞쪽으로는 옛 법천사 입구임을 알리는 당간지주가 보인다. 내부로 들어가면 1층에 기획전시홀이 있고, 로비에 ‘무단 반출 그 후, 112년의 기다림’이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온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해체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머잖아 완성된 모습을 기대해본다. 유적전시관 안에서는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전시관 안의 법천사지실과 열린 수장고, 기획전시실에서 영상자료와 수천 점의 귀한 불교 미술품을 비롯해 다양한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천년 고찰의 살아 숨 쉬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법천사지의 매력을 생생히 확인할 기회다. 법천사지를 나와 자동차로 10분쯤 완만한 언덕길을 달리면 느티나무가 보이고, 거기서부터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 터가 펼쳐진다. 고려시대 국사였던 원공스님이 기거하던 곳으로 의미가 있는 거돈사지(居頓寺址)다. 축대 끄트머리의 느티나무가 절터를 호위하듯 서 있는 옆으로 돌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750호 거돈사지 중앙의 삼층석탑이 눈앞에서 자태를 보인다. 단순하면서도 멋스럽다. 탑에 그려진 연꽃무늬 조각이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자연스럽다. 탑 뒤편으로 금당 터가 반듯하게 잘 보존되었다. 이 자리에 큰 법당이 있었을까 혼자 추정해본다. 절터 저편 산자락 입구에 있는 원공국사탑이 숲과 어우러진다. 그 옆길로 내려오면 길가에 원공국사의 생애와 공적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 원공국사탑비가 모셔졌다. 부론면에서 조금 떨어진 흥법사지는 원주시 지정면에 자리 잡고 있다. 좁은 마을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밭일을 하던 동네 어르신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바라보신다. 민가와 밭으로 둘러싸인 진공대사탑비와 삼층석탑이 덩그러니 고적하기만 하다. 한때 왕사가 머물던 대찰이었던 흥법사는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사찰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를 돌아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역사 속을 거닐듯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또는 드넓은 옛터에서 도심의 소음을 벗어나 힐링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기도 하다. 요즘의 핫한 볼거리나 복잡한 세상에서 누리는 도시 문화의 즐거움과는 확연히 다른 시간을 맛보는 공간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숨 돌릴 수 있다.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 쓸쓸함이 연상되는 폐사지라는 이름과는 달리 본래의 공간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고 가슴이 뛴다. 깊고도 멋진 시간이다. 깊은 산속 절집과 고판화의 만남 기왕 예까지 왔으니 한 군데 더 가보자. 원주 남쪽 끄트머리 깊숙이 앉혀 있는 절집 명주사에 가면 산사와 박물관의 만남을 경험한다. 명주사는 창건 주지인 선학스님이 운영하는 고판화박물관으로 더 알려져 있다. 절집으로 오르는 길에 전통 판화학교가 있는데 이곳에서 판화 수업이나 고인쇄 문화 템플스테이와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 명주사에 이르니 깊은 숲속의 좁은 절마당이 편안하다. 절집 옆으로 고판화도서관과 고판화박물관이 나란하다. 불교미술을 전공한 주지스님의 판화 열정이 박물관 안에 빼곡하다. 한국은 물론 인도나 중국, 티베트 등의 판화 작품이 2500점이 넘는다. 박물관에서 고판화 예술을 접하고 나면 직접 판화 인출 체험도 할 수 있다. 치악산 깊은 산속의 고판화 명상숲길 따라 여유롭게 머무는 봄날이다.
- 2024-05-1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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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놀이 말고 공연·전시 보자… 4월 문화소식
- ●Exhibition ◇유람일지: 유(儒)를 여행하다 일정 4월 21일까지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에서 만나는 충청 유교 문화유산’을 주제로 하는 전시는 조선시대 선비의 삶을 ‘고택’, ‘서원’, ‘구곡’(九曲)으로 나눠 소개한다. 집, 학교, 자연이라는 공간을 통해 나고 자란 선비의 삶의 궤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닮았다. 1부 ‘고택유람’은 충청도 명문가인 파평 윤씨 가문의 명재고택을 중심으로 한다. 윤증의 초상 초본, 문중의 교육 공간인 종학당의 디오라마(실물 축소 모형) 등을 볼 수 있다. 2부 ‘서원유람’에서는 충청도 유일의 유네스코 등재 서원인 돈암서원을 통해 배움과 실천을 지향한 선비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예학을 정립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그리고 송준길, 송시열은 서원의 대표 선비로 꼽힌다. 3부 ‘구곡유람’에서는 율곡 이이의 정신적 이상향이자 선비들이 자연에 은둔하며 학문을 수양했던 공간인 ‘구곡’을 디지털 화폭에 담아낸 수묵 미디어아트 영상을 전시한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선비들이 이야기하는 시대정신, 일상의 가치, 타인을 대하는 태도, 자연을 품은 풍류 등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힐링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전했다. ◇우제길 : 빛 사이 색 일정 5월 12일까지 장소 전남도립미술관 평생 ‘빛’을 쫓으며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우제길(1942~) 작가의 회고전.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1부 ‘기하학적 추상의 시작’은 ‘빛’을 주제로 하기 전인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그의 과도기적 작품을 살펴본다. 2부 ‘어둠에서 찾은 빛’에서는 절단된 면의 틈 사이로 솟아나는 빛 작품들과 어두운 배경에 작가 특유의 직선이 강조된 대작들을 소개한다. 3부 ‘새로운 조형의 빛으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구도가 다양해지고 밝은 색채가 등장하며 확장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4부 ‘색채의 빛’은 원색의 빛을 다양한 실험적 방식으로 구현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5부 ‘지지 않는 빛’에서는 신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Book ◇어른의 말습관(김진이·다른상상) 같은 말이라도 어떤 사람은 반감을 사고, 어떤 사람은 호감을 얻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하기’의 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경인방송 아나운서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김진이는 책 ‘어른의 말습관’을 통해 성숙하게 말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어른답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히 말할 줄 알고, 그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또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고 관계의 중심을 단단하게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단순히 말투만 바꾼다고, 기술만 답습한다고 되지 않는다. 내 말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과 패턴, 즉 말하는 습관을 돌아보고 바꿔야 한다. 노력만이 말습관을 기르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책에서는 서투른 언어를 다듬어 말하는 법, 각각의 상황과 내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말과 태도를 장착하는 법, 사람들과 주파수를 맞춰나가며 내 세계를 확장하는 법, 부정적 말의 패턴을 소거하는 법, 감정을 차분히 다스려 담백한 말로 갈무리하는 법 등 여러 가지 말하기 방법을 소개한다. 자기 말의 주인이 되어 일, 관계, 인생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 보자. ◇멋진 인생을 위해 오십부터 해야 할 것들(김옥림·미래문화사) ‘가슴이 뛰는 한 영원한 청춘’이라는 시인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나답게 사는 것이 인생 후반기를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제로 이야기(찰스 세이프·DKJS) 제로(0)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자 철학, 종교, 수학, 물리학의 근간이다. 저자는 0의 출현, 억압, 성장 등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시니어를 위한 슬기로운 디지털 생활(조진화·임지윤·포레스트북스) 디지털 전문 강사인 모녀가 합심해 만들었다. 스마트폰·키오스크 사용법 등 부모님이 알았으면 하는 디지털 정보 10가지를 안내한다. ●Stage ◇러브레터 일정 4월 4일 ~ 4월 27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김민정 출연 정보석, 박혁권, 하희라, 유선 연극 ‘러브레터’는 30개 언어로 공연된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작품이다. 밀도 높은 2인극이 특징으로, 무대에는 50년 동안 편지를 매개로 서로의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앤디와 멜리사만 존재한다. 글을 사랑하는 모범생 앤디 역은 정보석과 박혁권이 맡아 연기한다. 그림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멜리사 역에는 초연 당시 몰입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 하희라와 함께 유선이 캐스팅됐다. 제작사 측은 “깊은 내공으로 다져진 베테랑 배우들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사랑과 이별, 그 무수한 사연들도 디지털 기기의 버튼 하나로 정리되는 요즘,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순수성을 깨워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친정엄마 일정 4월 20일 ~ 5월 26일 장소 서울 한전아트센터 연출 김재성 출연 김수미, 이효춘, 신이현, 선예, 김도현, 박장현 등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친정엄마’는 2004년 원작소설 출간 이후 연극,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뮤지컬은 주크박스 뮤지컬의 진수로 통하며, 실력파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이번 시즌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딸을 걱정하는 친정엄마 봉란 역에 김수미와 이효춘이 캐스팅됐다. 김수미는 초연부터 봉란 역을 연기하고 있으며, 이효춘은 뮤지컬에 첫 도전한다. 엄마와 티격태격하다 이내 사랑을 깨닫게 되는 딸 미영 역은 신이현이 지난 시즌에 이어 연기하며,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새롭게 합류했다. ◇클로저 일정 4월 23일 ~ 7월 14일 장소 플러스씨어터 연출 김지호 출연 이상윤, 진서연, 김다흰, 이진희, 최석진, 유현석, 안소희, 김주연 연극 ‘클로저’는 1997년 초연 이후 50개국 10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됐으며, 2004년에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극은 현대 런던을 배경으로 앨리스, 댄, 안나, 래리라는 네 명의 남녀가 만나 서로의 삶에 얽혀드는 과정을 그린다. 국내 공연은 8년 만인 가운데, 원더걸스 출신 안소희가 연극에 첫 도전해 눈길을 끈다. 앨리스 역을 맡은 그는 “연극이라는 무대와 관객들과의 교감에 긴장과 더불어 설레는 마음이 있다”며 좋은 연기를 보여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4-04-05 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