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천(69, 영동자연호두농원)이 아내와 함께 영동군 산골로 귀농해 호두나무 농원을 경영한 지 올해로 15년째. 농사 기술도, 안목도 푹 익었을 연륜이다. 성취한 것의 수효가 드물지 않을 경력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소득은 여전히 신통치 않다. 하품 한 번 늘어지게 해볼 겨를 없이 부지런히 뛰었지만 손에 들어오는 게 별로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구겨진 기색이 없다. 웃음이 흔하게 터져 나온다. 난처한 현실을, 남모를 애환을 얼버무리는 웃음이라기보다, 불운과 부진을 통째 이의 없이 받아들여 차라리 긍정하는 심리의 소산일 테다. ‘뭔가 미묘한 간계가 침투해 나를 고생길로 데려간 건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김제천은 귀농으로 치르는 홍역의 책임이 일면 섣불리 일을 저지른 자신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김제천의 농원은 완전히 외진 산중에 있다. 마을은 저 너머 멀리에 있어 고독을 벗 삼기에 적격인 곳이다. 숲속의 공인된 가수들인 산새들만 이따금 지지재재 노래할 뿐 별반 들려오는 게 없다. 산세가 기차게 수려한 것도 아니라 경관에 넋 놓고 종일 해찰하는 폐단이 생길 리도 만무하다. 즉 잡념 없이 일에 홀린 듯, 종일 농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리기에 딱 좋은 입지다. 게다가 김제천은 ‘뭐든 자청해 덤벼든 일에는 갈 데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의 소유자다. ‘멍 때리기’나 게으름 피우기는 당최 적성에 맞지 않다. 해서 늘 일에 묻혀 살아왔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몸을 쓰겠다는 투로 부단히, 부지런히, 농사 하나에 전념하며 15년 세월을 살았다.
그는 대전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귀농했다. KT에 근무하다 뜻한 바 있어 명퇴를 하고 이 후미진 산골짝에 들어왔다. 애초 농사에 입문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물 좋고 산 좋은 시골에서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며 한가하게 살고 싶었던 거다. 유유히 노닐기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서 인생의 가을을 참신하게 누리고자 했다.
“귀농보다 귀촌하는 기분으로 이곳에 자리 잡았다. 농사를 지어 소득을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내려온 게 아니었다.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지장 없을 정도의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굳이 농업 소득을 바랄 이유가 없었다.”
터는 어떻게 마련했나?
“귀농 전에 3만 평 규모의 임야를 사들였다. 마음을 내려놓고 한적하게 살기에 좋은 곳이라서. 그저 소소하게 텃밭 일구고, 가족이 따먹을 수 있을 정도의 몇몇 과일나무를 기르며 살기에 적당한 땅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땅을 살 때엔 신중하게 고민부터 하라는 충고는 고대 로마의 ‘농업론’에도 나오더라. 당신의 얘기는 널따란 임야의 활용 방안을 구상하지 않은 채 덜커덕 사들였다는 걸로 들린다.
“별 생각 없이 매입했다. 면적이 넓은 데다 가격도 싼 편이라 일단 사들였으니까. 그렇게 시골 생활을 시작하고서 감나무, 포도나무, 다래 등을 몇 그루씩 심었다. 도시에 사는 손자들을 가끔 불러들여 자연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별 할 일 없이 지낸다는 게 예상보다 따분했다. 성격상 마냥 놀면서 지내지 못하겠더라고. 도시에서와 달리 일에서 해방돼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 있었지만, 딱히 몰두할 일이 사라지자 갑갑증이 몰려들었다. 그래 시작한 게 호두 농사다.”
호두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작목 선정을 위해 임업진흥청 같은 곳에서 농업교육을 받았는데 호두 농사를 권했다. 임야를 이용한 과수 농사 가운데 호두가 유망하다는 얘기였다. 여느 과수와 달라 나무를 소독해주지 않아도 되는 등 관리와 수확에 용이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한결 쉽고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작목이라는 거였다. 이러한 홍보에 이끌려 호두 농사를 시작한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어떻게 다르던가?
“재배부터 생산까지 일반 과수 농사에 필요한 공정보다 수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퇴치가 어려운 외래 해충의 발생에 따른 피해와 어려움이 컸다. 호두나무가 1000그루로 늘어나면서는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힘겨웠다. 다른 과수들은 관련 기관에서 생산물을 수매해주지만, 호두 유통엔 그런 시스템조차 없다는 것도 뒤늦게 안 약점이다. 이래저래 작목 선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착오가 있었던 셈이다.”
귀농 교육장 강사들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충고가 흔하던데.
“강사들은 교과서적인 이론에는 밝다. 그러나 실제 상황엔 둔감하다. 농업의 현장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는 거. 나는 이러한 정황을 미처 몰랐다.”
김제천은 귀농의 목적을 또렷하게 정하지 않은 채로 호두 농사에 뛰어들었다. 물샐 틈 없는 사전 준비와 구상을 하고도 일이 이상하게 풀려나갈 수 있는 게 귀농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그는 예상하지 못한 곤란을 수시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성실한 근로와 기민한 머리로 상황을 돌파하길 거듭했지만, 어쩌면 그의 내부에 풍성하게 서려 있을 강인하고 낙천적인 기질에 힘입어 주저앉는 시늉조차 해본 적이 없지만, 15년간 흘린 비지땀과 남모를 고뇌의 총량은 아마도 드럼통에 담고도 넘칠 정도일지도.
귀농 자체를 만류하고 싶다
고달픈 노역은 임야의 토질을 보강하는 데에서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땅 거죽 하부엔 온통 돌투성이더란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던 것. 해서 그는 땅을 파 돌들을 끄집어냈다. 큰 돌은 정으로 깨부숴 파냈다. 그러곤 퇴비를 듬뿍 묻어주는 작업까지 손수 다 했다. 지하에 일일이 배관을 하는 관수 시설도 필수였다. 허리 휘어질 고생이 자심했을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야생 짐승들의 훼방도 그를 괴롭혔다지.
“멧돼지들이 수시로 들이닥쳐 열매를 먹기 위해 호두나무 줄기를 마구 찢어놓더라. 청설모, 삵, 담비, 때까치 등도 방어하기 어려운 애들이다. 특히 무리 지어 날아와 호두 열매를 노련하게 파먹는 때까치의 실력엔 당할 재간이 없다.”
감전 효과를 발휘하는 전선을 설치하고, 심지어 대포 쏘는 소리를 내는 장비까지 동원해 방어하는 농가를 보자면 농사라는 게 실로 만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 옛날 전통사회의 농부들은 짐승들과 사이좋게 반반씩 나눠 먹는 걸 관습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게 차라리 현명한 걸까?
“딱히 방비책이 없다. 그런데 짐승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야야! 애들아! 적당히 먹고 가라. 너희들이 먹고 남은 걸 우리가 거두면 된다!’ 이렇게 체념하고 그냥 놔두는 거다. 그게 상책이라 생각해서다. 고만한 일로 속 끓일 게 뭐 있겠나?(웃음)”
호두 농사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은 어떤 것일까?
“호두가 훼손되지 않게 열매를 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 이건 기계 작업이 불가능하다. 대나무 장대로 조심스럽게 털어야만 한다. 호두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일일이 끄집어내는 작업도 쉽지 않다. 펜치를 들고 하나하나 껍질을 까 형태가 손상되지 않도록 분리한다. 세심한 손놀림이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겨울철엔 주로 아내와 함께 이 작업을 한다. 농한기가 없는 게 호두 농사다."
연간 순수익을 말해줄 수 있나?
“800만 원쯤 된다.”
저런! 너무 적다.
“호두 농사의 수익성이 이렇게 열악하다. 그러니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나?(웃음) 잘나가는 포도 농가나 복숭아 농가의 수익에 비하면 10%도 안 되는 수준이니까 말이다. 다행히 연금이 있어 의식주 생활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귀농하려는 이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농사로 돈 벌기 어렵다는 거! 연금이라거나 믿을 만한 게 없다면 아예 시골에 오지 말라는 거!”
원점으로 돌아가 귀농을 다시 한다면 어떤 작물을 재배하고 싶지?
“복숭아 농사 정도가 좋겠지. 복숭아가 이 지역 특산물이기 때문이다. 귀농하려거든 부디 지역 특산물에 관심을 가지는 게 좋겠다. 생산 여건과 유통 구조가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농 자체를 만류하고 싶다. 형편이 된다면 귀농보다 귀촌을 해 농사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게 현명하다.”
성장하는 나무들의 신비로움
시골에서 느긋하게 살기. 족쇄 없는 영일(寧日)을 보내기. 그는 그런 걸 원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원했던 삶과 현재의 삶이 상당히 불일치한다. 그렇다고 낙심으로 찡그리고 살면 우습다. 별처럼 마냥 빛나는 삶이 어디에 있겠나. 그는 15년간 정당하게 일하고 호두나무들을 공정하게 대했다. 따라서 여전히 당당하다. 내가 기죽을 일 있나 봐라, 하듯 부진한 행진을 해온 호두 농사에 새삼 발동을 건다. 으슬으슬 진저리칠 만한 현실이지만 이왕 내친걸음 끝까지 가보겠다 한다. 농사 기술이야 이미 일취월장했다. 크고 알맹이가 꽉 찬 고품질 호두를 생산한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덕분에 배우고 깨달은 게 많다. 궁리 끝에 늘 도달하는 건 반성이더라. 삶도 농사도 반성으로 돌아보면 얻을 게 많다.”
산중에서 반성을 일삼아 뭔가 환해지는 게 있다면 그게 도인(道人)인데?(웃음)
“어! 내가 도통하려나? 하하하. 여하튼 시골의 삶을 로망으로 삼은 이들이 많지만 돈 욕심을 다 내려놓지 않고선 어렵다. 귀농이 곧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의식주 걱정 없고, 몸 안 아프고, 게다가 괜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입에 매달고 산다면 그보다 나은 게 있을까.
“내가 감성적인 인간은 아닌데 산골에 살다 보니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 자식처럼 아끼며 기르는 호두나무들이 우렁차게 성장하는 걸 바라보면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이건 깊은 감동을 준다. 이러한 재미에 내가 농사를 짓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호두 농사에 헌납한 15년 세월. 말 못 할 고통이 왜 없었으랴.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고통스러워야 살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통도 지옥도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김제천이 주는 귀농 Tip
•시골 생활에 낭만적인 로망을 품은 이들이 많지만, 현실의 시골은 낭만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를 하자.
•무턱대고 집이나 땅부터 사는 건 위험하다. 사전에 1, 2년 정도 농촌 빈집을 빌려 살아본 뒤 적응 가능성부터 판단하라.
•부부가 뜻이 맞지 않은 채 귀농하거나 단신 귀농은 금물이다. 정착에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임야에 농사를 지으려 할 경우엔 인허가 사항부터 꼼꼼히 점검하고 진행하라. 지자체의 농촌활력센터를 찾아 문의하면 원스톱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농산물 유통을 위한 공부와 고민을 많이 하라. 좋은 농산품을 생산해도 유통의 벽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숱하다.
전북 정읍시 산자락으로 귀농한 송정섭(67, ‘꽃담원’ 대표)은 자칭 ‘꽃미남’이다. 아내 역시 ‘꽃미녀’로 쌍벽을 이룬단다. 외모를 내세우는 ‘자뻑’이 아니다. ‘꽃에 미친 남자’와 ‘꽃에 미친 여자’가 함께 사는 걸 빗댄 얘기니까. 못 말릴 강태공은 낚싯대 하나로 만족한다. 다인은 끽다로 세상을 건넌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사는 것보다 나은 게 있던가. 송정섭은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매양 꽃과 동행한다. 귀농을 한 것도 꽃에 제대로 미치기 위해서였다. 그게 인생의 쓸쓸한 황혼을 북돋울 가장 유력한 방안이라 보았다.
송정섭의 거처는 온통 녹음이다. 600평에 이르는 너른 터에 자라는 온갖 식물이 초록을 내뿜는다. 하늘을 반쯤 가린 저 앞의 푸른 준령은 내장산이다. 범람하는 산기(山氣)로 한여름의 무더위는 물론 속기마저 씻어낸다. 산 위로 흐르는 구름은 또 어떻고? 꽁무니에 바람을 매달고 유유히 흘러 번잡한 세상사를 잊게 한다. 어디를 보더라도 진부한 게 하나 없는 산골 풍경이다. 개중에 흐벅진 건 송정섭이 귀농 8년간 꾸민 정원 경관이다.
이 정원에선 나무들의 제전, 꽃들의 향연이 한창이다. 원래 감나무 세 그루뿐이었다. 외갓집 묵정밭이었다고 한다. 쓸모를 잃은 땅에 정원을 꾸려 쓸모는 물론 미감까지 고스란히 살려냈다. 애쓴 흔적, 공들인 자취가 완연하다. 식물에 관한 단순한 애호를 넘어선 빙의? 화초류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350여 종이라지. 게다가 본때 있는 솜씨로 적재적소에 배치해 조화롭다. 이곳에서 철 따라 도도한 자연의 순환과 드라마가 펼쳐질 걸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송정섭은 일쑤 무아지경을 느끼나? 그러고 싶어 꽃에 미쳤나?
“농촌진흥청 화훼 분야 연구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직장 생활 30여 년간 꽃을 전공으로 삼았던 것인데, 은퇴 이후 노년의 30여 년 역시 고향으로 내려가 꽃과 더불어 살고 싶었다. 꽃을 비롯한 식물이 지닌 매력과 선한 영향력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 후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귀농하지 못했다는 점일 뿐이다.”
귀농이 만족스럽다는 뜻인가?
“조직 안에서 의무감으로 움직여야 하는 직장 생활에 비할 수 없는 만족을 느끼며 산다. 난 정년 2년 남긴 시점에 명퇴했다. 더 일찍 물러나 정원 가꾸는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면 좋았을 텐데, 한결 나은 생활을 괜히 유보했던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목적과 지향이 분명할 경우 귀농은 빠를수록 좋다.”
십중팔구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의 귀농 제안에 일단 반기를 든다. 고생살이가 빤히 보여서. 이 대목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우리 부부는 주로 수원시에서 살았다. 10여 년은 단독주택에 살며 정원 가꾸는 재미를 충분히 맛봤다. 아내 역시 꽃에 관한 경험과 조예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꽃을 중심에 둔 귀농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웠다.”
정착하기까지 초기의 갖은 애환을 면제받기 어려운 게 귀농이라지?
“퇴직하자마자 혼자 곧바로 이곳에 내려와 텐트를 치고 살았다. 오랫동안 홀로 종일 일하고 밤이면 막걸리 한잔하고 잠을 잤지. 기반을 닦는 과정이었다. 몸이야 고달팠지만 좋아하는 일, 원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가령 어떤 점이 어려웠나?
“이 터가 원래 맹지였다. 길을 내는 게 무엇보다 화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쉽지 않더라. 경계면에 있는 남의 땅을 사들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지주가 팔지 않았다. 시세의 두 배를 주겠다고 해도 통하지 않더군. 실로 어렵사리 길을 만들어내는 데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 때문에 귀농 2년여가 지나서야 살림집을 지을 수 있었다.”
향후 목표는 치유정원
집을 짓고 아내가 합류할 즈음 정원 역시 어엿한 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뿌리고 심고 가꾼 것들이 생육을 거듭했던 것. 비와 바람과 햇볕만 식물의 성장을 도왔으랴. 송정섭은 원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식물의 성장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경륜과 기술로 정원 만들기에 가속을 붙였다. 말하자면 그는 식물 재배에 도가 텄다.
“사실 ‘화류계’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도움을 준 이들도 많았다. 시골에 내려와 정원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보내온 나무들만 해도 자동차 14대 분량이었다. 덕분에 정원 조성 작업이 순탄했다.”
시골 정원을 열심히 가꾸다 몸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더라. 강철처럼 일어서는 풀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나동그라질 수 있으니 가급적 작은 정원을 즐기는 게 현명하다는 충고도 흔하다.
“프로에겐 얘기가 다르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몸을 쓰면 꽃 관리, 잡초 처리 등은 충분하다. 전지는 1년에 한 차례로 마무리한다. 나는 단순히 꽃을 가꾸고 즐기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나만의 특별한 생태정원을 구축하는 한편, 꽃을 보급하고 정원 만들기 지원 활동을 하며 시민정원사를 양성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과 꽃 아카데미를 운영해 식물의 인문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부문이 다행스럽게 잘 돌아간다. 거의 날마다 체험자들과 수강생들이 찾아드니까.”
결국 공직 은퇴 이후 꽃과 정원으로 새 직업을 발굴한 셈인가?
“이곳에 귀농해 열심히 정원을 가꾸는 나를 주민들은 의아해했다.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토록 꽃을 잔뜩 가꾸지?’ 그런 궁금증으로. 꽃 가꾸기가 소득과 연결될 수 있다는 걸 그들은 미처 몰랐던 것이지.”
그는 민박업도 병행한다. 귀농 초기에 사용했던 농막을 다듬어 에어비앤비(Airbnb, 국제적인 홈스테이 네트워크)에 가맹, 투숙객을 받는다. 이 역시 순항한단다. 자신이 보유한 물적 자산을 최대치로 활용하고 있으니 그의 두뇌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걸 알 만하다.
“민박 수요는 넘친다.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 자제한다.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주된 목적인 정원과의 동행에 전념해야 하니까. 향후 치유정원으로 확장할 작정이다.”
치유정원? 그게 뭐지?
“의사들의 데이터를 보면 꽃이 치매까지 개선한다고 한다. 이렇게 원예로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데 착안한 게 치유정원이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선 오래전부터 치유정원이 활성화돼 있다. 환자를 무조건 병원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치유정원으로도 보내는 것이지. 국내에도 치유정원을 표방하는 원예농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전공과 경륜을 고스란히 살려 인생 2막을 열어젖힌 뚝심이 인상적이다.
“귀농에 대한 로망은 아파트에 살던 시절에 이미 움텄다. 옆집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르고, 좋아하는 꽃을 기껏해야 베란다에서 기를 수밖에 없는 답답함에 질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일찌감치 생태정원을 구상했다. 개인이 가진 기능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은 삶이라는 인식은 뿌리 깊은 것이었고.”
식물의 능력은 사람보다 뛰어나다
그는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우선은 ‘나’를 즐겁게 하고 싶었던 거다. 즐겁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오욕칠정으로 탁류처럼 흐르는 인생일망정 내 길을 내가 가는 한 뒤에 남을 미련한 미련이 적어진다. 그는 귀농으로 삶이 부과하는 갈등과 갈증을 해소했다. 귀농하며 가슴에 새긴 건 세 가지였단다. 변화한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자연을 소중하게 대하기. 죽을 때까지 공부하기. 개중 결연한 건 공부 욕심이 아닐까. 그런데 그가 가르침을 청하는 선생은 꽃이며 식물이다. 풀꽃 하나에서 생명의 신비한 노래를 듣고, 바람에 떠는 나뭇잎 하나에서 우주의 율동을 보는 영혼이 드물지 않은데, 송정섭의 사유 역시 비슷한 계보에 속하는 것 같다.
“호기심을 가지고 식물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얻을 것이 많다. 이를테면 꽃들은 무엇으로 대화를 할까, 그걸 공부하다 보면 향기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심지어 식물은 사람의 말뜻까지 알아듣기도 한다. 사실 식물의 능력은 인간의 재능을 뛰어넘는다.”
좁쌀보다 작은 상추씨가 흙을 들어 올려 싹을 틔우는 기적을 바라보면 천하장사는 저리 가라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얘기는 재고되어야 할지도.
“강의를 할 때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꽃처럼 살자’는 거다. 꽃에서 배우자는 뜻이다. 그럼 무엇을 배우나? 한 가지 예를 볼까? 지구상의 꽃은 25만여 종에 이른다. 이 모든 꽃이 다 다르다. 저만의 개성으로 존재한다. 이는 개성을 살리기보다 욕망을 따라 달려가는 인간의 양상과는 사뭇 다른 게 아닌가.”
꽃인들 속 터질 일이 없을까마는 사람보단 덜 아등바등한 것 같다.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게 있다. 식물이 내뿜는 산소를 마시며 숨 쉰다는 걸. 인간의 생존에 이모저모 절대적인 기여를 하는 식물의 헌신을 기억하기만 해도 삶이 한결 나아질 거라는 얘기다.”
식물 예찬이 길게 이어진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얘기지만 새삼스럽게 들리는 건 외면하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귀농으로 일군 꽃 농장은 송정섭에게 세상의 중심이다. 세상의 한 귀퉁이를 꽃으로 채워 향기를 흩뿌리는 삶이란 얼마나 떳떳한가. 게다가 안정적인 소득 기반까지 다졌다. 그는 바야흐로 썩 괜찮은 인생의 열매를 거두는 시절로 접어든 셈이다. 귀농을 통해 마침내 얻고 싶은 걸 얻었고, 하고 싶던 걸 하게 됐다. 그렇다면 그가 으뜸으로 치는 귀농 수칙은 어떤 것일까.
“가장 중요한 건 주민들과 화학적 결합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을의 문화와 풍토를 존중해야 하는데, ‘3척’만큼은 피해야 한다. 시골에서 아는 척, 잘난 척, 가진 척을 하다가는 거의 죽음과도 같은 고난에 빠질 수 있다.”
허튼 우월감은 버려라?
“자세를 낮추는 게 좋다. 시골 사람들이 무슨 법 같은 것엔 무심할망정,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 외엔 함부로 말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직접 겪은 불화 경험은 없었나?
“불화라기보다 귀농 초기에 다소 서툰 처신을 해 미운털이 박힐 뻔한 경험이 있다. 마을회의 같은 곳에서 박사랍시고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라. 아하, 내가 팽당했구나! 뒤늦게 깨닫고 태도를 바꾸었다.”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없이 코너에 몰릴 수 있는 게 귀농 생활이라는 얘기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타자의 얘기에 먼저 귀 기울이자는 조언이고. 세상의 도처가 교실인 셈이다.
송정섭이 주는 귀농 Tip
꽃 농원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뜻을 이루기 힘들다. 우선 식물에 관한 공부를 미리 충실하게 해둬야 한다. 재배 기술 숙지는 기본이고, 식물심리학과 식물의 인문학까지 섭렵하는 게 필요하다. 농원의 공간 디자인도 핵심 요소다. 개성과 미감을 살려 구조를 설정해야 한다. 효율적인 동선 조성 역시 중요하다. 입지로는 들판보다 숲속이나 산자락이 이상적이다. 주변에 축사나 고압선 철탑이 있는 곳은 피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근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난히 텃세가 심한 곳은 피해야 하는데, 단기간이나마 미리 살아보고 풍토를 판단하는 게 좋다.
은퇴를 앞둔 86세대는 걱정이 많다. 우선 고정적인 수입이 끊긴다는 점이 공포스럽다.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신체적 변화도 두렵다. 일만 열심히 했던지라 은퇴 후 닥쳐올 방대한 시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막막하다. 이런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은퇴자 컨설턴트가 있다. 같은 고민을 공유하기에 그의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인생 2막 설계 서비스는 호응도가 높다. 동년배 친구와 강사, 컨설턴트를 넘나들며 고객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돕는 86세대 이관석 신한은행 은퇴솔루션 컨설턴트를 만났다.
이관석 컨설턴트는 명예퇴직한 회사에 재취직한 케이스다.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실제로 은퇴해본 자산관리 경력자가 필요하다는 은행장과 퇴직연금사업그룹장의 판단으로 이뤄진 일이다. 명퇴 전 자산 규모 50억 이상 초고액 자산가들의 자산관리 업무를 맡았던 경험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전에 비해 보수도 적고 업무량도 소일거리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일은 만족스럽다. 그간 해왔던 업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일할 수 있어서 현재 맡고 있는 ‘은퇴 자산관리 컨설팅’은 앞으로 발전할 유망 분야를 개척한다는 자부심도 있다.
무엇보다 은퇴를 앞둔 동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보람차다. 일대일 은퇴 컨설팅을 진행할 때면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을 우선시한다. 솔루션 제공은 그 다음 일이다. “본인은 은퇴 후 일터를 떠나 여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데 백세 시대이니 무조건 일하라고 한다거나, 계속 일하고 싶은데 경제적으로 준비가 잘 되어 있으니 일터를 떠나 여행하고 놀러 다니라고 조언한다면 듣는 사람 마음이 편할까요?”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이미 은퇴를 경험해본 데다 숱한 컨설팅 경험으로 다져진 그다. 이관석 컨설턴트는 1년째 하고 있는 컨설팅과 강의가 마냥 즐겁다.
“86세대, 수혜자이자 낀 세대”
그가 평가하는 86세대는 고도성장의 수혜자이자 자식 부양을 받지 못하는 낀 세대다. 어릴 적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경제·사회적 신분 상승이 가능했고, 집도 한 채씩은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을 누렸다는 것. 하지만 정호승 시인이 말했듯 누구나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는 비슷하다. 86세대는 부모를 부양해야 하지만 자식에게는 부양받지 못하는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그런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단연 건강이다. “나이 50이 넘어가면 몸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것을 느낍니다.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난 자리의 대화 주제는 거의 대부분 건강입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아졌는지, 그래서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무엇이 효과가 좋았는지 등을 얘기해요. 서로 가진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죠.”
건강 다음은 전혀 달라질 인생 2막에 대한 걱정이다. 장수는 축복이라는 것도 점차 옛말이 되어가는 시대, 요즘 86세대는 ‘오래 사는 위험’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은퇴 후 40~45년을 살아가야 할 이들의 고민거리를 한 가지씩 추려내니 무려 다섯 가지나 된다. 첫째 유병(有病)장수, 둘째 무전(無錢)장수, 셋째 무업(無業)장수, 넷째 독거(獨居)장수, 마지막으로 투쟁(鬪爭)장수다. “돈 걱정 없고 건강하고 화목하게 오래 살 수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으니 걱정하는 것이지요.”
고객들의 고민 대부분은 그도 공감하는 바이나, 무전장수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건강만큼이나 노후생활비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도한, 어찌 보면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매달 받던 월급은 끊기고, 다달이 지급되는 국민연금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우니 걱정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도한 걱정이에요.”
2018년 통계청이 발표한 은퇴한 노부부 월 적정생활비는 283만 원, 최저생활비는 197만 원이다. 그간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는 국민연금에 더해 퇴직금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퇴직연금제도를 이용하면 충분한 노후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퇴직연금을 준비하지 못한 채 은퇴했더라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므로 전문가 상담을 받는 것도 좋다.
은퇴자 자산관리 컨설팅에 나설 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찾지 말고 연금으로 수령하라는 것. 세금 절세는 물론 금융소득종합과세, 건강보험료 등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연금으로 수령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은퇴자가 빠지면 안 될 4대 크레바스
크레바스(Crevasse)란 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이다. 한번 빠지면 구조되기 어려워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지형으로, ‘소득 크레바스’나 ‘연금 크레바스’ 등 경제·사회적 위험 요소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이관석 컨설턴트는 컨설팅, 은퇴자 대상 강의에서 4대 크레바스에 대한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배우자 크레바스’는 은퇴한 남성들에게 특히 위험한 크레바스다. 은퇴 후 집에서 배우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칫하다 크레바스에 빠져 이혼하게 되면 앞으로의 노후가 암담해지는 것은 물론, 살아온 인생 자체가 허망해지기 쉽다.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를 보세요. 최근 배우자 크레바스에 빠져 그가 모은 재산이 반토막 나고, 그간의 명성에도 먹칠을 하지 않았습니까?”
두 번째는 자식 크레바스다. 자신의 노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에도 자식의 유학, 결혼, 사업 자금을 대다 노후가 불행해지는 경우를 의미한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잘해주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지원해주라고 말한다. 과도하게 지원하다 노후 자금이 축나서 훗날 부양 부담을 지우는 것보단,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두 아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다. “법적으로 성인인 자녀에게 비과세로 증여할 수 있는 한도는 5000만 원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미리 말했지요, ‘너희 결혼할 때 5000만 원씩 주겠다. 단, 어떠한 부양도 받지 않겠다’고요.”
세 번째 크레바스는 사업이다. 은퇴하는 사람 중 다수가 재취업이나 창업을 꿈꾼다. 현금 흐름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건 재취업이지만, 퇴직금이라는 목돈을 갖고 있는 이들은 창업의 유혹에 곧잘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그는 창업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에 하던 일이 있는데 고작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기업 직원이나 은행원, 군인, 공무원, 교사처럼 세상사에 비교적 적게 노출된 이들이라면 더더욱 피해야 해요. 생각보다 손실이 나기 쉽고, 그 손실을 메우기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크레바스는 투자다. 은퇴 자금으로 주식, 부동산 외에도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말하며 우려를 표했다. 제대로 된 지식 없이 공격적인 투자를 하다 큰 손실을 입고 그 충격에 건강까지 해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가 추천하는 보편적인 투자 방법은 ‘100-나이 투자법’이다. 숫자 100에서 현재 나이를 뺀 숫자의 비율만큼만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예금이나 TDF를 활용해 안정적인 운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나이가 60세라면, 100에서 60을 뺀 40%만큼만 투자하고 나머지 60%는 예금에 넣어두는 식이다. 사람마다 투자 성향이 다르므로 각자에게 맞는 투자법이란 가지각색이기 마련이나, 그는 변동성이 커 원금 손실 가능성이 높을수록 소액만 투자할 것을 권한다.
자산관리 컨설팅 외에 비재무 은퇴 컨설팅도 맡고 있는 그는 고민하는 86세대에게 다양한 조언을 건넨다. 세 가지 이상의 취미를 만들어둬라, 동호회나 도서관 등 일정하게 외출할 장소를 만들어둬라 등등.
그럼에도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을 꼽으라면 역시나 건강이다. 여태껏 현업에 매진하느라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86세대가 인생 2막을 힘차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돈이든 취미든,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시기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건강이 우선이고, 그 다음 노후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세요. 노후에 월급처럼 받을 수 있는 퇴직연금을 마련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예능과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다재다능한 종합예술인 홍서범이 오랜만에 본업인 음악으로 돌아왔다. 지난 3월에 그가 발표한 신곡은 ‘월든에 놀러간 니체’라는 다소 프로그래시브한 제목이다. 노래 내용도 제목 그대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연 속 삶을 통해 물질주의를 비판한 명저 ‘월든’을 쓴 월든 호수에 ‘신의 죽음’과 실존의 중요성을 외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찾아간다는 내용의 노래.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이 생각할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홍서범에게 평범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신곡을 통해 다시금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그를 만나 독특한 인생관을 들어봤다.
“대중음악은 다양해야 하고 본인 생각이 담겨야죠. 인기만 쫓는 건 창작자로서 할 일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아이돌처럼 대 히트를 할 것도 아니고…. 가요계에 데뷔한 지 40년이 넘었는데 예전 록 스피릿으로 돌아가서 음악도 옥슨답게 하자 싶었죠. 가사도 나이 들어서 사랑 타령 하기도, 이별 노래 하기도 그렇고…. 대신 내가 삶에서 느꼈던 거, 내 생각의 중심이 뭔지 정리해서 발표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월든에 놀러간 니체’예요.”
홍서범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과 니체의 철학이 자신의 중심을 잡아줬다고 말한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삶의 본질에 대해 묻고자 출세를 접고 스스로 자연으로 들어갔다. 니체 또한 스위스 질스마리아의 호숫가에서 요양을 하며 저 유명한 영원회귀 사상을 정리했다. 두 사람의 우연한 공통점은 호수에서 자신의 대표적인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것. 홍서범은 그 두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니체가 월든 호수에 갔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됐다. 그리고 그 상상을 오롯이 노래로 만든 것이다.
홍서범을 통해 월든 호수를 만난 니체
노래의 비하인드를 들으니 과연 홍서범다웠다.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딱 두 가지로 나뉘었다고 한다.
“‘넌 왜 이렇게 안 되는 음악만 하냐’와 ‘이런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는 게 반갑다’였죠. SBS PD 했던 분은 ‘서범아 넌 이제 대중성 있는 것 좀 해라, 실험적인 음악 그만하고’라고 하시고, 저를 아는 분들은 ‘뭐 어차피 네가 할 음악 하는구나’라고 말하더군요.(웃음)”
자신의 음악을 누가 뭐라고 하든 관철한다는 게 그의 완고함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요즘 아이돌은 어떨까? 혹시 그의 기준에 벗어나는 거슬림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예상외로 그는 요즘 아이돌에 대해 무한한 긍정을 표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고 미국 팝 음악이 들어오면서 미8군 출신 가수들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거든요. 일본은 처음에는 영미 팝을 따라가다가 자기들 특유의 제이팝을 만들었어요. 물론 일본은 워낙 인구도 많고 다양해서 수준이 있어요. 반면 우리나라는 혼란기가 있었던 게,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제이팝을 많이 베꼈어요. 일본 음악이 금지였을 때 양심 없는 작곡가들이 많이 표절했죠. 그러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면서 그쪽으론 못 간 거지. 그래서 다시 미국 팝을 추구한 거죠. 그런데 거기에 우리 민족 특유의 음악성, 표현력, 특유의 한이 블랙 뮤직 이상인데, 그게 더해져서 성공했다고 봐요. 이 짧은 시간에 빌보드를 점령할 정도니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우수성은 저도 감탄하고 있어요.”
그는 주변을 봐도 노래와 악기 연주를 너무 잘하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감탄했다. 더구나 디지털 문화가 보급되면서 과거보다 쉽게 원하는 걸 접하고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우리 때는 소위 음반을 구해도 ‘빽판’이었고 악보도 없이 귀로 들어서 코드를 땄어요. 그러다 보니 이 팀 저 팀 코드가 다 다르고.(웃음) 지금은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죠.”
가장 싫은 것은 주변에 민폐 끼치는 것
최근 음악 트렌드에 대한 홍서범의 평가를 들으니 자연스레 후배 양성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사래를 쳤다.
“게을러서 사업 쪽으론 관심이 없어요. 주변에선 그 정도 노하우 있으면 해도 되지 않느냐 하는데, 사업 재능이 없어요. 유혹은 많았죠. 하지만 그런 거에 혹해서 나도 해볼까 했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줄까봐, 스스로 판단해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나도 할 일이 많고, 아직도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수만이 형 대단하고 박진영도 대단해요. 음악도 잘하지만 사업도 잘하니까요.”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민폐 끼치는 일이다. 지금 시대에 아이돌 같은 후배를 대중가요 시장에 맞게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면 기본 자산이 천문학적으로 든다. 그렇다면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혹시 사업이 잘 안 되면 투자자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그가 사업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기준과는 너무나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통해 7080 문화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
그럼에도 홍서범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자유롭게 살길 바라는 그가 그리는 미래는 무엇일까?
“예전에는 7080 문화로 전국 투어 하고 해외 투어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게 막혔죠. 이제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아요. 7080 문화의 새 콘텐츠로 뮤지컬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작가도 있어야 하고 투자자도 있어야 해서 보통 일은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공연할 때 나열식으로 차례대로 노래 부르고 내려오는 건 이제 끝났고, 그때 음악과 그때 사건으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그 단계예요.”
7080을 위한 장기 공연 문화이면서 기존과는 다른, 뮤지션도 좋고 관객도 즐거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판단은 비슷한 시대를 산 가수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조용필조차 자신의 노래들을 바탕으로 뮤지컬을 만들려고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는 현재 7080 뮤지션들의 공연 문화가 너무 일방적이라 답답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맞아요. 제가 시놉시스를 짠 후 작가를 불러서 이런 내용으로 써보라고 한 적 있어요. 그랬더니 ‘형, 이거 하려면 투자 많이 받아야 하고 언제 코로나가 끝날지도 모르는데’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일단 써놔야지!’(웃음)라고 타박했죠. 앞으로 7080이 가야 할 길은 그쪽이에요. 새로운 문화를 자꾸 만들어서 방향을 바꿔야죠.”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의 고충 이해돼
홍서범이 활동했던 7080으로부터 세월이 흐르면서 가요계도 가수들도 바뀌었다. 완제품으로 시장에 나와야 하는 요즘 세대 가수들과 달리 그의 세대 가수들은 데뷔 후에 연습도 겸하면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그는 노래에 대한 관점이 다른 가수들과 달랐다.
“저는 노래를 어떻게 해야 잘할까가 아니라 전체적인 음악의 완성도를 중요시했어요. 솔직히 노래를 만든 후에 녹음할 때가 되어서야 처음 불러본 노래도 있었죠. 노래는 신경 안 썼던 거지. 그래서 초창기에는 노래를 불렀다기보다는 샤우트를 했어요. 감성 표현 같은 게 약했죠.”
음악을 종합적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가창자로서의 가수보다는 프로듀서와 흡사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에 대한 비판에도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떨 때는 나보다 노래 잘하는데 어떻게 평가를 하지?(웃음) 이런 경우도 생길 테고. 그렇다고 ‘정말 잘하시네요’라고만 말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방송이라 뭔가를 해야 하니까. 어려워요, 남을 평가한다는 건. 해본 사람만 알지. 저는 못 할 거 같아요. 그리고 프로들이 무대에 올라도 스트레스가 큰데 아마추어면 더 심하겠죠. 오래 준비했는데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도 있으니 평소의 70%만 해도 성공이라고 봐요. 그것도 멘탈 싸움인 거 같아요. 웬만하면 칭찬도 많이 해줘야 좋은 결과가 나오겠죠.”
잘 노는 게 잘 사는 것
홍서범은 한국식 나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강조하는 자신의 나이는 만 62세다. 환갑을 넘긴 그에게는 잘 노는 게 잘 사는 거라는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잘 먹고 잘 놀고 유쾌하게 살다 가자, 나에게 주어진 대로 즐길 수 있는 최대한 즐기자는 생각이에요. 물론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민한다고 풀리지도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아니면 내 능력 밖인가’ 판단하는 게 중요해요. 능력 밖인 고민은 접는 거예요. 그런데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럼 해보는 거죠.”
한마디로 그는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 아니다. 그 덕분인지 유독 피부가 좋아 보였고, 살도 안 찌는 듯했다.
“체질도 그렇지만 가만히 한자리에 있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운동도 많이 하고. 옛날에는 축구를 많이 했고 지금은 배드민턴을 일주일에 한 번 쳐요. 틈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거나 산에 가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살이 찔 수가 없지. 피부도 땀을 많이 흘리니까 좋은 거 같네요. 등산처럼 혼자 하는 게 가장 운동이 많이 돼요. 즐겨 찾는 산은 북한산입니다. 코스도 많고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거죠.”
무한긍정과 힘찬 에너지, 자유로움
홍서범의 성격을 지금까지 들여다봤으면, 그가 소위 관계 정리에 대해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정리한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만날 사람은 만나고 안 만날 사람은 안 만나게 되는 거죠.”
그가 참여하고 있는 연예인 모임이 꽤 많다. 공놀이야(축구), 콕놀이야(배드민턴), 산놀이야(등산), 큐놀이야(당구), 휠놀이야(자전거), 술놀이야(음주)까지 총 6개. 그중 공놀이야에만 쉰 명 이상 가입되어 있다. 그런데 활동할 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안 나오는 사람도 있기 마련. 그래서 관리를 맡고 있는 후배가 안 나오는 회원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홍서범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참여할 상황이 못 되니까 못 하는 거지. 만약 걔네를 내치면 내쳐지는 사람 기분이 어떻겠냐. 놔두면 적당한 때 돌아온다. 언제든지 문을 열어놔야 들어올 게 아니냐. 한번 인연 맺었는데. 그리고 참여 안 한다고 우리한테 해 되는 거 있어?”
그 말을 들은 후배는 할 말이 없었다. 홍서범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는 사례였다.
뭐든지 푹 빠져 사는 남자
홍서범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한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어떤 사람은 평생 갖지 못할 후회 없는 자유에 대한 확신이 이미 있었다.
“니체 형님이 하신 말씀 중에 정말 좋은 말씀이 ‘다시 살고 싶도록 그렇게 살아라’예요. 그럴 정도로 살아야죠. 어제도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북한산에 갔어요. 다들 대기업 사장 하다 명퇴했는데 삶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우리가 건강하게 잘 살 날이 70대 중반까지면 이제 10년밖에 안 남았어요. 원 없이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고 보면 시간이 너무 짧더라고요. 그러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노는 게 남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니 걔네들이 ‘야, 난 매일 놀아’라고 대꾸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야, 그렇게 놀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빈둥빈둥 노는 건 진짜 무료해’라고 답해줬죠. 무료함이 인생 최대의 적이에요.”
그가 심심하고 지루해하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다. 아마 10년 후에도 그는 니체를 월든 호수로 불러들인 것처럼, 또 다른 독보적이고 독특한 노래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유쾌한 종합예술인 홍서범의 인생이 보여줄 무료하지 않은 미래를 기대해본다.
1. 게임
명예퇴직을 하고
오십 넘어 항해사가 된
내 첫 항차의 항해는
갑작스런 출항 통보부터 심상찮았다
출항 후 이내 접어든 좁은 수로에서 세찬 조류에 밀려
세 시간 넘게 좌초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와 만난 오후 한 시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검은 구름 떼가 오래 잠들었던 신전의 주술이 깨어나듯
항로의 앞 쪽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라
사방을 암회색 절벽처럼 막아 놓고
뒤늦게 피어오르는 또 다른 구름은
통곡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염원의 메모지처럼 보였다
초속 30미터의 바람은 연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고
물결은 수 미터의 깊고 가파른 협곡을 이루어
낄낄거리며 온 몸으로 부딪혀 왔다
뿌리가 없는 것은 죄다 흔들거렸다
배도 사람도 뿌리가 없기는 마찬가지
옆으로 기울며 높이 솟구쳤다가 급강하하듯 떨어지는 배 안에서
거친 사내들도 두려웠던 것일까
선실에 널브러진 사내도
브릿지에서 키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사내도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흔들리며 떠밀리며 기우뚱거리는 시간 위에서
그저 방향만 잡을 수 있는 생존속력을 겨우겨우 맞추어 가는
선령 34년의 낡은 엔진이 꺼질세라 노심초사 하며 가는 길을
포세이돈의 분노를 닮은 태풍은
나흘하고도 하루 반나절을 더 따라 다녔고
우리는 그 놈을 악마라 불렀다
엿새 째 되던 날
비로소 악마는 슬그머니 우리의 목숨 줄을 풀어 주었다
우리의 항로를 따라오던 악마의 발걸음은 한낱 유희였는지
일곱 째 날의 고단한 항해에서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바다에서도 악마는 게임을 하는가 보다
2. 친구
북위 01도 22분, 동경 172도 56분
태평양 한복판 적도 부근 타라와섬 근처에서
전재작업 한다고 조업선과 배를 붙이다가
조업선 선장으로 있는 친구를 만났다
이거 몇 년 만이고? 묻는
뭐하다가 바다에 나왔노? 묻는
친구 놈은 폭삭 늙어 있었다
나이 오십 넘어 명퇴하고 배 타러 나왔다는 대답 앞에
하긴 우리 나이에 이 짓 아니면 할 게 별로 없지
증권사 댕기던 놈도 배 타러 오고
방송사 댕기던 놈도 배 타러 오는
요지경 세상이네 하며 껄껄 웃는다
친구의 삼십 년 뱃놈 생활은
치통과 통풍과 관절염과 허리디스크로 찾아와
불편한 몸짓 속에 눅눅하게 녹아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포도주를 머그잔에 담아 마시며
건너 온 세월의 흔적을 더듬는 녀석의 눈빛이 몽롱했다
외국 놈들 속에서 저 혼자 한국인이라고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중에 밥 챙겨 먹는 일이 제일 힘들다고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립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자식놈들은 다 키웠냐고 묻는다
큰 놈은 출가 시켰고 작은 놈은 대학 졸업 앞두고 있다는 말에
지 놈은 자식이 셋이라고
아직도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줄줄이 사탕이라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배를 타야 허리가 펴지겠다고
하지만 고기씨가 말라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저 침묵으로 안주를 삼을 뿐
그래도 어딘가에 희망이 있겠지 뭐
혼잣말처럼 건네는 어색한 위로
오십 고개 넘어서도 여전히 희망이라 허허 웃는
친구의 웃음소리가 칼날처럼 가슴에 박혀 드는 것은
누군가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여전히 살아 내야 할 시간들이 아득하기 때문이었을까?
전재작업을 끝내고
배를 떼고 다시 수평선 쪽으로 멀어져 가며 흔들던 친구의 손이
고향언덕 늙은 나무의 옹이가 박힌 마른가지를 닮아 있음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3. 모천회귀
비릿한 바람이 오래전 기억 속 저편과 이편의 경계를 훑는다
생활은
마젤란해협 동쪽 어디쯤 지친 항해의 고달픔에 대하여, 혹은
누구나 가슴 깊숙이 벼려놓고 있을 날카로운 송곳니 같은 것에 대하여
자욱한 비안개 속에서 속내를 토해내는 열대우림의 나무들 몸짓처럼
사소한 변명들을 더듬고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언제 풀릴지 모를 고르디우스의 매듭
쉰에서 예순으로 가는 세월의 길목마다
수구초심의 갈망은
봉인된 첫사랑의 흔적처럼
불 꺼진 가로등처럼 숨죽이고 서 있고
한때 애태웠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낯선 얼굴들로 가득하였다
한 오라기 추억의 실타래도 풀어내지 못하는 지상의 불빛들은
굳은 관절처럼 뻣뻣한 가슴으로
물길을 더듬어 돌아가는 자의 내밀한 기쁨을 알지 못하리
이젠 좀 더 유연해야 하리
탁한 해류의 거친 숨결도 맨몸으로 받아내고
심해의 침묵도 은빛 비늘 속에 감출 줄 알아야 하리
옆줄을 따라 몸 깊이 각인된 오래전 산천의 지형도 위엔
지금도 나무들 온몸을 불태우며 만산홍엽의 꽃을 피우고 있을까
언제나 순응하던 해류의 손을 떨치며
푸른 역린(逆鱗)을 꼿꼿이 세울 때
수천 길 해저의 뜨거운 온기를 퍼올려
혈관마다 힘찬 맥박으로 뛰놀게 하는 아름다운 결별
고단했던 한 시절을 향하여 손을 흔들게 하는
내 풍성한 영혼의 자양분이여
낯선 새 길을 열며 가는 이 길은
날마다 소스라쳐 깨는 얕은 잠 위에서 저물고
고단한 지느러미의 궤적을 따라
천산 협곡을 넘어가는
내 아버지 걸어가신 천년 유형의 붉은 길.
* 전재 작업 : 어선과 운반선이 접선하여 어선의 어창에서 운반선 어창으로 어획물을 옮기는 작업.
•수상소감 - 우수상 시 이석재
“늘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 있는 글 쓰고파”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이라 얼떨떨하네요.
50대 초반에 명퇴를 하고난 후 새로운 인생설계를 하고 도전하는 일에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항해사로서의 새출발, 청각장애로 인한 좌절,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과 시행착오, 현재의 직업에 이르기까지 도전과 실패. 그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에는 나이가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 낙심될 때도 있었고,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하고 싶었습니다.
글은 별다른 취미를 가질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낙서를 하는 버릇에서 시작하여 여러 작가분들의 책을 읽고 습작하고 하는 노력을 10년쯤 했던 것 같습니다.
내 삶의 흔적을 언젠가는 책 한 권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이 꾸준히 글을 쓰는데 동기부여가 되었네요.
늘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있는 글을 쓰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늘 힘을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합니다.
농부가 땅에 비지땀을 쏟아 필수 식량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농업은 신성한 직업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천하의 뿌리’에 관여된 일이 농업이다. 반면 믿기 어려운 직업이 농사다. 땀 흘린 만큼의 공정한 대가가 주어지는 경우가 흔하던가?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에 따라 좌우되는 작황, 널뛰기하는 가격, 불안정한 판로 등 리스크 요인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악조건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귀농을 하는 이들이 많다. 나만큼은 성취할 수 있다는 뜨거운 신념을 가지고 농사에 뛰어든다. 경북 상주시의 산골로 귀농한 임원식(61, 상주갑장산굼벵이농장) 씨도 그랬다.
“경치 좋은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며 마음 편하게 사는 삶. 이건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진 로망이 아닐까? 내게도 막연하나마 오래전부터 그런 꿈이 있었다.”
귀농은 임원식 씨에게 오래 묵은 꿈이었던 거다. 비록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다시 말해 언젠가 기회가 오면 시골에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언젠가’가 오지 않아도 무방할 몽상 차원의 꿈이었다. 그런데 그 ‘언젠가’가 별안간 도래했다. 회사에 감원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그는 경남 거제시에 있는 삼성중공업 직원이었다. 이름난 대기업이고 연봉도 높은 수준이라 자청해서 그만둘 이유가 없었으나,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서는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선배 직원들부터 차례로 무자비하게 잘리는 걸 본 그는 곰곰 궁리하다가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명퇴를 신청했다.
명퇴 뒤 그의 고민은 본격적으로 깊어졌다. 이제 어떡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체인점? 창업? 그가 생각한 건 장사였으나 가만히 따져보니 그건 당최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간이라도 빼줄 듯이, 심지어 영혼까지 팔 듯이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상업인데 그건 참 싫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오래된 꿈인 귀농을 카드로 뽑아들었다. 그리고 숙고에 들어갔으며, 결국은 귀농만이 믿을 만한 대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머리를 감싸 쥐고 더 고민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내 박선숙(56) 씨의 동의를 얻는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 남편들이 마치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투로 열렬히 귀농을 선창해도 아내들은 십중팔구 앵돌아앉기 십상이다. 그의 아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합리성 있는 이유를 내세워 ‘강력한’ 반대를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귀농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설득에 나섰다. 그 과정이 길고 힘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동의를 얻어내 귀농을 한 건 2016년 8월. 부부는 손잡고 나란히 경북 상주시 낙동면 갑장산 기슭의 산골로 들어갔다.
귀농 한 달 만에 시작한 굼벵이 농사
“터는 미리 사두었다. 인터넷을 통해 전국의 농지 매물을 검색해 곳곳을 답사한 끝에 이곳의 땅을 사들였다. 적은 자금으로 마음에 드는 터를 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터는 좋아도 너무 외지거나 길이 없는 땅이 많더라. 헛걸음이 잦았지.”
Q 작물 선정도 미리 해두었나?
A “아니다. 일단 시골로 빨리 내려가고 싶어 작물에 대한 모색 없이 그냥 내려왔다. 산자락에 사둔 땅 인근에 있는 빈집을 임시로 빌려 살며 작물 구상을 시작했다. 처음엔 사슴농장이나 옻나무 재배에 관심을 가졌으나 실상을 좀 파악해보니 만만치 않겠더군. 생산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수 농사나 자금이 많이 드는 시설 하우스 농사도 그렇고. 그러던 차 TV 방송에 나온 굼벵이(흰점박이꽃무지의 유충) 사육 농가의 성공 스토리를 보고 굼벵이 사업이 유망하겠다고 판단했지. 그게 굼벵이 농사에 뛰어든 계기였다.”
Q 귀농하자마자 곧바로 굼벵이 사육을 시작했나?
A “지체 없이 일을 착수했다. 경기도 연천에 있는 굼벵이 농가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교육을 받고, 굼벵이 종자(종충)를 분양받아 사육에 나섰던 거지. 셋집에 있던 창고를 사육사로 썼고.”
Q 보통은 미리 작물 선정과 공부를 하고 귀농을 한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지. 당신은 일사천리로 진도를 냈네?
A “사실 굼벵이 사육과 가공 생산이 별로 어렵지 않다. 여느 농사에 비해 한결 수월하거든. 물론 굼벵이 공부는 사육 착수 이후 충실하게 했다. 경북농민사관학교를 통해 2년에 걸쳐 천적곤충과정과 유용곤충과정 교육을 이수했으니까. 여하튼 귀농 한 달 만에 굼벵이 농사를 시작했으니 엄청 속도를 낸 셈이다. 내 땅에 내 집도 신속하게 지어 이사도 했다. 불과 서너 달 만에 이 두 가지 일을 해치웠지.”
Q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A “지금 와서 돌아보면 너무 조급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월급이라는 게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만 했던 거다. 매사 추진력을 가지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좋은 거라는 생각과 그렇게 살아온 습성도 작용했지만.”
땔나무를 베겠다면서 종일 낫만 가는 건 바보짓이다. 저 굴 속에 호랑이가 있는지 고양이가 사는지 궁금하면 굴로 들어가 봐야 한다. 그는 성격 자체가 느긋하기는커녕 박력이 넘쳐 뭐든 영감이 떠오르면 즉시 판단해서 즉시 해치우는 사람인 거다.
알아주는 굼벵이 농가로 부상했으나
허준의 ‘동의보감’에선 굼벵이를 아주 좋은 약용곤충으로 적시했다. 굼벵이 섭취를 혐오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지만, 예부터 약용은 물론 식용으로 민간에서 흔히 쓰인 곤충이었다. 굼벵이 사육이 농업의 한 장르로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효능이 탁월하지만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가 2016년에야 식약처에 의해 식품 원료로 승인됐으니까. 그즈음 곤충산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굼벵이 농사가 블루오션으로 부각되면서 사육 농가가 급증했다. 1000개 이상으로까지.
상품화되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산란한 굼벵이 알을 리빙박스 안에서 3개월 정도 길러 살을 찌운 뒤 환, 분말, 엑기스 등 식용상품으로 가공하면 되니까. 질병이 거의 없고, 투자 비용도 적게 들고, 게다가 온·습도만 잘 맞춰주면 크게 손이 가지 않아서 매력적인 고소득 특화작물로 각광을 받았다. 민첩한 머리와 바지런한 손발을 가진 임원식 씨는 이 기특한 애벌레를 야무지게 잘 길러 고품질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상주에서 알아주는 농가로 급부상했다.
“굼벵이 농사는 신선놀음에 가깝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수월하다. 그러나 차별화된 고품질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선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는 역시 판로다. 기르기는 쉽지만 팔기는 쉽지 않은 거다.”
Q 어느 정도 수익을 올리는가? 사육 농가가 급증하면서 고전하는 농가들이 많다던데. 폐업도속출하고.
A “처음 3년간은 부진했다. 어떤 농사든 초기의 바닥 다지기에 3년은 걸린다. 시행착오도 겪으며 성장의 힘을 얻어가는 필수적인 수련기지. 아무튼 부진한 가운데에서도 서서히 매출이 올라 2019년엔 연매출 9000만 원을 기록했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노하우를 활용한 덕분이었다. 이젠 궤도에 올라섰구나! 그런 판단을 했지. 농장 이름이 알려지면서 견학을 오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다 코로나로 위기를 맞이했다.”
Q 매출이 급감했나? 코로나의 횡포로 곤경에 빠지지 않은 분야가 드물다.
A “2020년 매출이 반 토막 났다. 소비가 위축되고 주요 판로였던 지역 축제장에서의 가판이 불가능해지면서 벌어진 일이다. 사육 농가가 포화 상태이기도 했고. 올해는 더 상황이 나쁜 것 같다.”
불운이라 할 수밖에. 아무도 못 말릴 급한 성격대로 후다닥 일을 진행했음에도 궤도에 올라섰으나, 코로나의 기습으로 주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절체절명의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낙심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단 대차게 강물에 오른 사공은 멈추지 않는 법이다. 급물살에선 노를 묘하게 잘 저어 나가면 그만이다.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겠는가. 그는 방향을 선회하기로 했다. 굼벵이의 사육 규모를 왕창 줄여 코로나 종식 이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새 작물에 도전했다. 그 이름도 참신한 참두릅을 기르기로 하고, 올봄에 스마트 팜 타입의 시설 하우스를 지었다. 귀농 5년 차 이상의 귀농인에게 주는 연리 2%짜리 영농자금 3억 원을 지원받아서.
“내가 시작한 참두릅 농사는 기존 노지 재배 방식과 크게 다르다. 노지에서 기른 두릅나무의 마디마디를 잘라 하우스 안의 물병에 꺾꽂이처럼 꽂아 기르는 방식이거든, 이걸 ‘마디수침 재배법’이라 부른다. 이 재배법으로 연중생산이 가능해 최대 10배까지 수익 증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메리트가 큰 농법이라 성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이미 남들도 많이 하는 재배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들었지만 아직은 선도적 농법이란다. 이 분야의 고수를 만나 멘토로 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성공 보증서는 어디에서도 발부받을 수 없다. 인생이라는 미스터리가 늘 그렇듯, 농사에도 역시 복병과 변수가 음흉하게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들 대수로울 것 없다. 행복이라는 밥상에는 늘 고난이라는 양념이 동행하므로 복병은 복병대로 열나게 때려눕히면 되는 거다. 임원식 씨의 기본 태도가 그렇다. 그는 약 7억 원의 자금을 들고 귀농했다. 내 생각엔 그 돈이면 그냥 경치 좋은 산골에 오두막 하나 짓고 놀고먹겠다만 그는 생각이 영 다르다. 백수에 흥미 없다.
“그간 지니고 온 자금은 전부 사라졌다. 농토를 사고 집을 짓는 데 주로 사용됐지. 적자에 따른 손실금도 좀 있지만 그건 수업료가 아니고 뭐겠는가? 다 투자분이라 생각한다. 75세까지는 열심히 농사를 지을 작정이다. 월 350만 원 정도는 가져야 생활이 되던데, 그걸 벌기 위해서도 뛰어야 한다.”
Q 월 100만 원으로 희희낙락 사는 시골 부부도 많던데?
A “내가 단지 돈벌이만을 위해 뛰는 건 아니다. 도시와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열심히 하며 살고 싶다는 기본 이상을 좇아 달리는 거거든. 당신 행복해? 누가 그리 물어보면 답은 ‘그렇다!’다. 몸은 고달프고 고민도 많지만, 난 지금보다 더 좋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느낌이다.”
어떤 직업이든 유쾌하기만 하겠는가. 애환과 성취는 궁합이 잘 맞는다. 고로 그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거겠지. 그의 뇌에 세팅된 목적은 삶의 질을 높이는, 즉 자기 확장에 있는 것 같다.
임원식 씨가 주는 귀농 팁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는다고? 어림없다. 귀농은 절대 쉽지 않다. 단단한 각오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자.
•자칫하면 원주민들에게 왕따당한다. 절대적인 신임을 얻도록 노력하자. 인사부터 잘하고. 목에 힘주면 발붙이기 어렵다.
•관행 농사는 소득을 기대하기 어렵다. 똘똘한 작물 선정을 위해 미리 심각한 고민과 연구를 해두는 게 좋다.
•작목을 정했다면 확실한 멘토를 만나라. 그 사람의 실패담이 거울이다.
•교육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라. 새로운 지식도 얻고 멘토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다. 각종 지원사업도 교육을 이수해야 받을 수 있다.
•직거래만이 답이다. SNS 마케팅을 공부해 적극 활용하라.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튜브 방송이 있다. 바로 수어를 통해 금융 지식을 알려주는 ‘윤쌤의 쉬운 금융 수어’이다. 신한은행에서 27년 동안 일하고 퇴직한 윤현숙 씨가 제2의 인생을 열며 운영을 시작. 과연 이 독특한 콘텐츠는 어떤 연유로 출발하게 된 걸까? 이런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걸까? 목소리에서부터 훈훈한 온기가 전해지는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윤현숙 씨는 1972년생으로 1991년 3월에 조흥은행에 입사했다. 그 후 조흥은행은 신한은행과 통합해 상호를 신한은행으로 변경했고, 그녀는 27년 동안 신한은행 지점 VIP실에서 일하며 차장직까지 올랐다. 그리고 2018년에 희망퇴직을 했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썩 건강하지는 않았어요. 특히 두통이 심했죠. 그게 심해지더니 아무 증상 없이 갑자기 정신을 훅 잃어버리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엎드려 있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 일하는 날이 많았죠. ‘오늘은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때도 있었는데, 다행히 회사에서 명퇴 기회를 주셔서 선택하게 됐죠.”
VIP실이라고 하면 흔히 편한 업무를 하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그녀는 나름의 지독한 전쟁을 치렀던 셈이다.
“사직서는 컴퓨터로 작성해서 제출하면 됐어요. 다 쓰고 나니 ‘누르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내용의 팝업이 뜨더라고요. 바로 제출을 눌렀죠.(웃음)”
그녀는 퇴직하자마자 바로 수어 학원에 등록했다. 수어(手語)를 배워 청각·언어장애인들을 돕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2014년에 일했던 지점에는 장애인 고객이 많이 왔어요. 그들을 보다 보니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군요.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보고, 자신의 업무를 다 처리하지 못하고 가는 안타까운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죠. 그때마다 내가 수어를 할 줄 알면 해결해줄 수 있을 텐데 싶었죠.”
수어는 당연히 인사부터 배웠다. 처음이라 실수도 많고 아직 서투르다. 하지만 태어나서 경험하는 가장 즐거운 일이다. 그렇게 수어를 배우는 그녀가 유튜브와 만나게 된 것은 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 과정을 수강하면서부터였다.
“수어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방법으로 뭐가 있을까 싶었죠. 그러다가 나에겐 금융 지식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유튜브에 많은 금융 정보가 있지만 수어로 알려주는 동영상은 없었어요. 내가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죠.”
은행에서 27년 동안 VIP 고객을 상대한 만큼 그녀의 금융 지식은 프로페셔널하다. 은퇴설계전문가, AFPK, 부동산펀드투자상담사, 파생상품투자상담사, 변액보험·손해보험·제3보험·생명보험 대리점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일반인들도 보이스 피싱이나 금융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청각·언어장애인들은 금융 정보를 잘 알 수가 없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어서 금융 정보를 얻기 힘들고, 은행에서도 적극적으로 케어할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사실 일을 그만둔 다음에는 다시는 금융 일을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가진 지식이 도움이 된다면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금융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정보를 얻어 청각·언어장애인들이 사기를 안 당하면 좋겠어요.”
아름다운 손끝으로 나눌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2인생을 발견한 윤현숙 씨. 그녀는 알기 쉬운 금융 수어가 세상을 이롭게 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잘해서 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말에 용기 얻어
자신의 지식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마음으로 1인 크리에이터를 시작한 윤현숙 씨에게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죠. 그리고 퇴직한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여행 얘기만 하는데, 여행은 남편이 퇴직하면 같이 가기로 했어요. 그동안은 봉사할 수 있는 수어 실력을 탄탄하게 쌓을 생각이에요.”
단순한 제스처 혹은 손짓이라는 의미가 강한 수화(手話)보다 언어적 역할에 더 큰 방점을 두고 있는 수어는 2016년 수화언어법이 통과되며 언어로 인정됐다. 이후 방송뿐만 아니라 관공서의 연수, 세미나 등은 물론 동네 주민센터에서 회의를 할 때도 수어 통역사 배치가 필요해졌다. 윤현숙 씨는 수어 통역을 할 때 단순히 기계적으로 언어만 번역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청각·언어장애인들의 문화는 독특해요. 그분들에게 좀 더 쉽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사회, 문화, 경제, 정치 등에 해박해야 해요. 이 모든 걸 꿰뚫고 있어야 그분들을 잘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그녀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신중하게 생각하고 정말 많이 고민해보라”고 조언했다. 수어 통역사가 애초의 바람이었다면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어찌 보면 과감한 도전이었다. 그녀는 유튜브 동영상 제작 방법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잘해서 하는 것은 없다, 계속 깨지면서 하는 거다”라고 한 말에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서툴러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앞으로는 금융을 비롯해 재무설계 상담도 하고 싶어요. 자산가들의 금융이 아니라 파산 직전에 처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드리면서 그분들의 마음까지 보듬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마, 잡상인은 저리 가이소!” 아무리 농이 섞였다 해도 지인의 한마디는 그를 슬프게 했다. 23년간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경상도 사내로서는 분을 삭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빙긋이 웃는다. 사소한 냉대쯤은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거절도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람상조에서 장례지도사 겸 상조상품 세일즈맨으로 활동 중인 김길후(金佶喣·48) 씨 이야기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칸 영화제를 휩쓴 영화 ‘기생충’의 대사 한 구절처럼 김길후 씨 역시 계획이 다 있었다. 23년간 근무하던 해운대구청을 떠날 때, 그는 당당했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명예퇴직 신청을 받을 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버티려고 했다면 정년퇴직 때까지 버틸 수도 있었죠. 퇴직 후 나름의 계획도 있었고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와 보니 예상과는 달라 당황했습니다. 그 후 제가 세운 원칙 중 하나는 ‘직접 눈으로 보고 결정하자’였습니다. 지금 입사한 회사도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해운대구청에서 23년 근무
그가 해운대구청에 입사한 것은 1996년 8월. 오랜 기간 구청에 근무하면서 안 해본 일이 없다. 주로 담당했던 업무는 재개발로 인한 토지수용 업무나 토지이동, 환경개선부담금 관련 일이었다. 당시 해운대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등으로 인한 재개발 수요가 많아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제가 입사할 때는 해운대에 수영비행장 자리가 남아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와 비교하면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죠. 재개발과 관련한 업무가 쉽지 않았던 건 다른 사람의 재산을 다루는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업무를 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죠.”
장례지도사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김 씨는 동부산대학교 장례지도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관련 업종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면서 웃는다. 그 후로도 그는 영산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고, 법무사와 공인중개사 공부도 병행했다.
“법에 대해 잘 알게 되니 많은 분을 도울 수 있게 되더라고요. 재개발로 집을 잃은 분들에게 임대주택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거나, 전세금을 날리게 된 가설건축물 임차인들이 최소한의 금액이라도 회수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죠. 그래서 구청 내에서도 절 찾는 사람이 많았죠. 공무원들이 업무상 송사에 휘말리는 경우가 간혹 있거든요.”
한때는 공무원 노조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정도로 조직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노조 지부 중 회계 내역을 홈페이지에 투명하게 공개한 곳은 그가 총무국장으로 있었던 해운대구청이 최초였다.
명퇴 후 삶, 계획대로 안 돼
그가 명예퇴직을 결심한 것은 2017년이다. 한때는 진급도 꿈꿨지만 공직사회에서의 한계를 느끼면서 두 번째 인생을 살아보고자 도전을 선택한 것.
“워낙 재개발 관련 업무 경험도 많고, 인맥도 넓어 일단은 그쪽 일을 시작했죠. 변호사 사무소의 사무장 역할이었어요. 처음엔 재미있었죠. 공직에서 나온 만큼 좀 더 자유롭게 일을 할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문제는 시장의 변화였어요. 로스쿨 제도 도입 등 이런저런 요인들로 인해 시장이 혼탁해져갔어요. 의뢰인에게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주고 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수임을 하기 위해 무조건 이긴다고 유혹하는 변호사 사무소가 늘기 시작한 거죠. 결국 1년을 못 버티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김 씨의 방황은 다시 시작됐다. 경매학원에 등록해 부동산 경매에 대해 알아보고, 개인회생 분야도 조사했다. 한국폴리텍대학에서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방황이 끝난 것은 지난해 7월. 지인 소개로 보람상조개발을 소개받으면서부터다. 공무원에서 세일즈맨, 즉 영업직으로의 변신이었다.
“처음엔 나를 내려놓고 세일즈맨이 된다는 게 쉽지 않았죠. 이 제복을 입는 데 한 달이 걸렸어요. 공직자에 사무장 출신인데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인생을 턴할 수 있는 기회이고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문해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 고심 끝에 내린 결심입니다.”
세일즈, 나를 내려놓는 일
세일즈맨이 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지인들에게 핀잔을 듣는 건 기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리하지 않고 고객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상품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노력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초창기에는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실감하게 됐어요. 최근에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노력해요. 일부러 제복도 입고 가죠. 약속 장소로 정해둔 식당이나 카페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고요, 고객이 있을 만한 교육 과정에도 참여해 인맥을 넓히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공직자 때는 상상도 못했던 정치 단체에서도 활동해요. 또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다양한 교육들이 큰 도움이 되죠.”
김 씨는 중장년에게 자신의 직종과 같은 세일즈 분야는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의지만 있다면 정년 없이 계속 일할 수 있고, 노력에 따른 경제적 보상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중장년들은 자신이 한창 잘나갈 때의 추억에 젖어 있잖아요. 그러니 나를 내려놓기 쉽지 않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중장년의 이력서를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아요. 저도 면접관이 되어 중장년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자존심 버리는 것을 가장 어려워해요. 면접에 통과해도1년 이상 롱런하는 분들은 20%가 안 돼요.”
그는 지금 일하는 직장의 장점으로 ‘수평이동이 가능한 문화’를 꼽았다. 조직 내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해내면 영업직이 아닌 관리직 등 다른 부서로의 이동도 가능하다는 것. 김 씨는 “최종 꿈은 직영 장례식장에서 일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정보를 직접 확인하고 판단할 것을 당부했다.
“많은 분이 인터넷에서 떠도는 불확실한 정보만 가지고 판단해요. 그 정보들 중 상당수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어떤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꼭 눈으로 확인하고 결정하면 좋겠어요. 중장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게 세일즈라 해도요. 직접 부딪쳐보는 게 중요합니다.”
은퇴(隱退)란 사전적 의미로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이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또 아름다운 말이다. 평생을 몸 바쳐 일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하고 애썼으니 이제 편히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사회적 배려가 담긴 말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은퇴한 분들을 보면 우러러 보이기까지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한가히 지냄’이란 말이 거슬린다. 과연 ‘은퇴 후 한가히 지낼 만한가?’라고 다시 묻게 된다.
직장마다 좀 다르긴 하지만 민간기업은 정년과 관계없이 명예퇴직을 요구한다. 정년을 못 넘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설령 정년을 넘긴다 해도 한가히 쉴 만큼 여유가 없다. ‘55세 퇴직 61세 회갑’은 평균수명이 70세 정도일 때 적합한 말이 아닌가 싶다. 요즘처럼 100세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퇴직 때까지 벌어놓은 돈으로 좀 아껴 써가며 70세까지 사는 데 큰 무리가 없었을 때는 은퇴라는 용어가 어울렸다. 그런데 백세시대에는 퇴직 후 50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러니 이 기간을 생각하면 한가히 지낼 수가 없다.
언론에서는 세 차례 퇴직 쓰나미를 이야기한다. 제1차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 전체 인구 중 14.3%)다. 710만 명의 퇴직이 시작된 지 몇 년 되었다. 제2차 베이비붐 세대(1968~74년생, 전체 인구 중 12.1%) 604만 명의 퇴직도 곧바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제3차 베이비붐 세대인 에코 세대(1979~85년생, 전체 인구의 10.8%) 540만 명이 그다음으로 퇴직한다. 에코 세대는 제1차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맞이할 이 시기에 1955년생부터 1985년생까지 약 30년에 걸쳐 엄청난 퇴직 인구가 쏟아져 나온다(중앙일보 2015.1.15.일자 기사).
퇴직 쓰나미라는 말이 실감난다. 정년도 못 채우고 명퇴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정년을 채우고 은퇴를 해도 문제다. 명퇴자나 은퇴자나 다를 게 없다. 모두가 제2인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자리는 이미 첨단 산업에 밀려 빼앗긴 지 오래다. 컴퓨터 한 대가 수십 명의 몫을 해낸다. 우리가 개발해놓은 첨단 산업에 쫓겨나는 형국이다. 19세기 영국의 수공업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섬유기계를 파괴하는 폭동을 일으킨 사건인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다.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고 비관만 할 일은 아니다. 없어지는 산업만큼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된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정책적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한다. 은퇴자들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자신을 낮추고 보람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퇴직 후 한가히 쉴 수 없다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면 즐겁지 않다. 작은 일이라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 경제적으로 아직 한가하게 쉴 입장이 아니라도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생각하기에 따라 행복의 깊이도 달라진다. 지혜를 발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