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니며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 86세대인 그들이 학생운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별난 학생들이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그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을 녹여 그래픽 노블(만화책) ‘비밀 독서 동아리’를 펴낸 김현숙(58)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김현숙 작가는 1964년생이고, 1983년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어머니는 대학교를 굳이 가야 하냐는 입장이었고, 김 작가는 집에서 가까운 창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진학했다. 입학 첫날부터 김현숙 작가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학생운동이 펼쳐지는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김 작가는 겁 많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우연히 비밀 독서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면서 민주화운동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더불어 당시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진압, 고문 등의 고초를 겪은 친구들의 모습을 옆에서 생생하게 봤다. 이 모든 이야기를 책 ‘비밀 독서 동아리’에 담았다.
김현숙 작가는 스스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편은 아니라고 평했다. 김 작가는 그때 학생들의 외침이 현재 대한민국 민주주의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며,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더 적극적으로, 더 당당하게 학생운동에 참여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금서 읽는 비밀 독서 동아리
‘비밀 독서 동아리’의 주인공 이름도 현숙이다. 김 작가는 현숙의 캐릭터와 이야기는 실제 자신과 거의 흡사하다고 밝혔다. 책에서는 창원대학교가 ‘안전대학교’로 나온다. 당시 안전하지 않은 시대를 반영해 반어적인 의미로 ‘안전대학교’라고 했다.
1980년대의 대학교는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전두환은 물러나라”고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학생들과 경찰의 대치로 혼잡스러웠다. 그 속에서 현숙은 “나는 공부하러 대학교에 왔다”며 시위 동참을 원치 않았다. 김현숙 작가는 “당시 학교에서 ‘데모하면 안 되고 공부만 해라’라고 일종의 세뇌를 했다. 앞장서서 학생운동을 하면 빨갱이로 낙인찍힌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괜히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것이 무서웠던 현숙은 ‘학생운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탈춤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러나 탈춤 동아리마저 과거 양반을 풍자하던 탈춤을 추며 현 정권을 꼬집었다. 현숙은 실체를 알고 도망가려고 하지만, 독서 동아리 가입을 제안받는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현숙은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그 동아리는 ‘금서(禁書) 동아리’였다. 금서란 국가나 종교상의 최고 권력자에 의해 출판 또는 판매가 금지된 책을 말한다. 만화 속 캐릭터들은 ‘임꺽정’,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영혼의 죽음’ 등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경찰에 잡혀갈 수 있었던 시대, 현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마음이 바뀌었다. 현숙은 동아리 친구들을 통해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이유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언론 탄압이 자행된 사실을 알게 된다. 친구들이 왜 목숨 걸고 싸우는지도 깨달았다. 이에 각성한 현숙은 보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며 친구들과 뜻을 함께했다.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이라고 하죠.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정책을 펼쳤죠. 책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서 깨우치고 자기한테 저항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것이 싫어서 책 자체를 못 읽게 한 거죠.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북 클럽을 통해서 조금씩 눈을 떴어요. 나중에는 직접 책을 찾아서 보고, 더 나아가서 학생회 참여도 하고. 광주, 서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가보고 공부도 했죠.”
‘비밀 독서 동아리’에는 중앙정보부의 눈총 아래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외침을 포기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온다. 김현숙 작가는 검열을 해야만 하는 대학 신문(학보), 이유도 없이 끌려가 고문당한 학우들, 장학금 때문에 밀고자가 된 학생의 모습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김현숙 작가 역시 정보부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책에 나온 대로 정보부는 김 작가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스테이크 가게로 전화를 했다. 김 작가는 실제로도 정보부의 전화를 친구의 전화인 척 받고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만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현숙이는 화려한 말솜씨로 정보부 옥 형사를 당황케 하죠. 실제로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정보부를 만나기 전에 고압적이고 강압적으로 나를 몰아세울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사복을 입고 와서 그런지 의외로 평범해 보였고 질문도 조곤조곤 하시더라고요. 정보를 하나라도 더 캐보려는 느낌은 받았죠. 그런데 그분도 어쨌거나 그게 직업이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생각도 들더라고요. 양면성이 있는 거죠.”
촛불집회, 미국인 남편의 출판 제의
‘비밀 독서 동아리’는 학생운동을 함께한 친구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촛불집회(2016년 9월~2017년 5월)에서 다시 모여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라고.
김 작가는 “촛불집회 동창회 신을 넣은 이유는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려는 의도가 컸다. 1980년대에는 학생, 지식인 위주로 운동을 했지만, 그때는 모든 시민이 참여했으니까. 그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동창회는 허구지만 촛불집회는 ‘비밀 독서 동아리’와 연관성이 깊다. 촛불집회는 책이 세상 밖에 나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현숙 작가는 부산 서면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했고, 미국인 남편 라이언 씨는 한국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돼 ‘멘붕’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남편은 트럼프, 저는 박근혜. 그때 미국과 한국의 상황에 대해 서로 얘기를 많이 했어요. 남편이 촛불집회를 보면서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이 지도자로 아니다 싶으니까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리는 촛불집회를 펼친 것이 놀랍고 대단하대요. 폭력적이지도 않고, 남녀노소 모두 목소리를 냈으니까요. 미국은 불평 불만은 많지만 정작 그렇게 못 해서 더 대단하게 보였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김현숙 작가는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한 이야기도 남편에게 하게 됐다. 라이언 씨는 아내의 과거를 매우 흥미 있게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 자료를 찾아본 그는 자신의 아내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다는 사실에 존경심을 느낀 것 같다. 라이언 씨는 ‘대한민국 대단하다,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트위터에 아내의 이야기를 썼다. 이를 본 미국 출판사 아이언 서커스 코믹스에서 정식 출판 제의를 해왔다.
김현숙 작가는 학생운동은 이미 많이 나와 있는 얘기이고, 자신은 작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민이 깊었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영어 번역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러자 남편이 “같이 써보자”면서 힘을 줬다. 자신이 느낀 것처럼 미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나 보다.
이에 본격적인 책 작업이 진행됐다. 김현숙 작가는 오랜만에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부분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정치인이 된 이도 있다. 책에 ‘유니’로 등장하는 김경영 경남도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김 작가는 “졸업하고 공장에 위장 취업해서 노조 활동을 오래 했고, 여성운동도 하다가 현재는 의회에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는 여러 캐릭터로 파생돼 녹아 있다. 동창들은 자신이 모델이 된 것에 대해 뿌듯해했다고.
책의 스토리는 아내가 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라이언 씨가 썼다. 김현숙 작가는 자문과 검토를 맡고 이야기를 보충했다. 그림은 라이언 씨가 직접 그릴 수 있었지만 한국적 색채를 살리기 위해 고형주 만화가가 맡았다. 이색적인 것은 영어 책이 먼저 쓰였고, 그 다음에 한국판이 나왔다. 한국판이 번역본이 된 셈이다.
책은 2020년 5월 18일 세상 밖에 나왔다.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출판됐다. 미국에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아마존 청소년 부문 베스트셀러(Bestseller on Amazon - YA History Comics)를 차지했고, 청소년도서관협회 올해의 최우수 그래픽 노블(YALSA Great Graphic Novels 2021)로 뽑혔다. 이밖에 미국 학교 도서관 저널, 스미스소니언, 북리스트, 미국 잡지 Publishers Weekly 등에서 최우수 리뷰를 받았다.
“트럼프가 인종차별 발언으로 대통령이 됐잖아요. 미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국민들은 후퇴해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아직도 책을 검수하고, 성 평등, 인종차별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책이 호응을 얻은 것은 영감을 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청소년 권장도서로 많이 읽힌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저항을 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가는지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가만히 있으면 변화되는 것은 없잖아요.”
김현숙 작가와 라이언 씨는 다음 책으로 ‘노 룰스 투나잇’(No Rules Tonight)을 준비하고 있다. 1980년대 통금 제도를 다룰 예정이다. 책의 ‘투나잇’은 크리스마스로, 커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비밀 독서 동아리’의 캐릭터들과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명 출판사 펭귄북스에서 출판되며, 202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나올 예정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중심
1980년대에는 학생운동을, 2010년대에는 촛불집회를. 86세대는 분명 민주주의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왜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것일까. 김현숙 작가는 “이전 세대인 베이비부머(1955 ~ 1963년)는 전쟁도 겪었고 많이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터전을 잡고 발전해야 하니 독재가 용인됐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 작가는 자신과 같은 86세대는 민주주의를 이룬 세대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짚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권위주의적인 사람, 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같은 소용돌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는 86세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들이 자유를 외치고 권위주의 독재에 맞서 투쟁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저도 물론이겠지만 그들에게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있더라고요. 술도 마시라면 마셨고, 군사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체화된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린 사람들이 보기엔 ‘학생운동 했으면 다야?’, ‘리더면 다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너무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고칠 점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19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변화는 젊은 세대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김현숙 작가는 “젊은 세대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도 투쟁을 할 때 윗세대가 목소리를 잘 들어주기를 바랐다. 젊은 세대의 마음을 듣고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세상에 책이 있고, 그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한 사람들의 인연도 사라지지 않는다. 윤성근(48)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는 책방을 꾸리는 것은 물론 절판된 책을 찾는 손님들을 돕는다. 수수료 대신 책과 사람에 얽힌 신비하고 특별한 사연을 수집하면서 말이다. 신간 ‘헌책방 기담 수집가’에는 소설보다 더 기묘한 진실들이 담겼다.
서울 은평구의 붉은 벽돌 건물.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 있다. 책장을 빼곡히 메운 헌책 때문인지 오래된 종이와 잉크가 어우러진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곳의 주인장 윤성근 씨는 원래 안정적이고 돈도 꽤 받는 대기업의 IT 부서에서 일했다. 그가 잘 다니던 직장을 불현듯 박차고 나와 헌책방을 차린 이유는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책방지기가 꿈이었다. 우연히 대학로에서 김광석의 공연을 봤는데, 이러다 나도 ‘서른 즈음에’ 노래 가사처럼 하루씩 꿈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멀어지는 게 아닐까 번뜩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빨리 시작해야 망했을 때 다시 다른 걸 해볼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까.”
모두가 월드컵 열기에 휩싸였던 2002년, 종로서적의 폐업도 그가 사표를 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기차게 다녔던 곳이다. 정릉에 살던 시절 주머니에 돈이 조금밖에 없으면 두 시간 넘는 길을 걸어서 종로서적에 갔다. 버스를 타면 책 살 돈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층별로 도서를 분류해 운영하는 데에 마음이 이끌려 여러 층을 오가며 책을 실컷 봤다. 유년기의 추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문을 닫다니. 망한 데 나도 일조를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갈 때마다 책을 샀던 것은 아니니까. 물론 나 하나 때문에 서점이 망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책과 사람은 연결돼 있다
개업을 위해 우선 금호동의 헌책방에서 일하며 운영 노하우를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책방에 들른 한 노신사가 일본 작가 구라다 하쿠조의 책을 찾는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제목인 데다 1963년에 출판된 책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었기에 책을 찾으면 연락하겠다며 연락처를 받아뒀다.
“반 년 정도 지나고 신기하게도 그 책이 우리 책방에 입고됐다. 그날 트럭에 실려 가게로 쏟아져 들어온 수천 권의 책들 속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 내 눈에 보일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연락을 받은 어르신이 다시 책방에 오셨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부산에 살고 계셨다. 책값보다 교통비를 몇 배나 더 쓴 거다. 이상하게 여겨 그 책에 얽힌 사연을 물어본 게 사연 수집의 시작이었다. 2007년에 가게를 열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손님들에게 책 찾는 사연을 듣고 기록했다.”
책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정보만 가져온다. 제목과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윤 대표는 손님에게 “해봐야죠. 수수료 대신 그 책을 왜 찾으시는지, 책과 얽힌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답한다. 흐려진 사랑의 추억, 아버지의 유품, 옛 친구와의 약속 등 하나씩 단서를 추가하며 책을 찾는 행위는 얽힌 실타래를 푸는 과정과 같다. 그렇게 ‘앙데스마 씨의 오후’(1968), ‘바보들의 나라, 켈름’(1979) 등 여러 책이 간절히 기다리는 주인을 찾아갔다.
“책을 찾는 사람들은 책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사랑, 가족, 기담, 인생 등 여러 종류의 사연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책은 사람의 삶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헌책은 더 그렇다. 누군가에게 한 번 이상 선택을 받았던 이력이 있고, 또 그런 책을 찾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의, 식, 주 그리고 책
윤 대표는 생각이 많을 때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펼쳐 본다. 그는 이 책이 ‘많이 배운 데 대해 우월의식을 가진 이가 있지만 사실 인간은 다 비슷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메시지를 준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몰라서 어려움을 겪기보다 뭔가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혹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지식은 숨을 쉬거나 시간이 지나듯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제 내가 책이나 경험을 통해 뭔가를 알게 됐다 하더라도 어제까지의 일일 뿐이다.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라며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살아가려 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런 생각이 소위 말하는 ‘꼰대’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어차피 과거에 해본 것으로 오늘을 완벽히 살 수 없다.”
그럼에도 아는 것을 늘리는 데 목적을 두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윤 대표는 독서를 ‘리듬을 타는 것’이라 정의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리듬에 예민할 수밖에 없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많지 않다. 독서를 통해 남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본인에게 집중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는 거다. 언제까지 남들과 같은 리듬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독서가 생활이 된다면, 나중에 교과서에서 ‘사람의 4대 필수 요소는 의, 식, 주, 책’ 이렇게 배우는 날도 오지 않을까.”
코로나19의 여파로 그동안 위축됐던 전시 업계가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 시행과 함께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각 지역에서는 사진전, 특별전, 소장품전 등 다양한 전시가 속속 열리는 추세다. 이 가운데 부모는 추억하고, 자녀는 경험할 수 있는 ‘뉴트로’ 전시회 3개를 꼽았다.
인천도시역사관 특별전
그때 그 시절엔 농촌 사람들이 한참 도시로 몰려들었고, 빨리 아침을 먹고 출근해야 했으며 학생들은 저마다 도시락을 메고 등교했다. 그래서 사회는 가볍고, 잘 끓고, 잘 늘어나고, 깨지지 않는 그릇을 요구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등장한 ‘서양에서 온 은’, 양은은 순식간에 식기의 판도를 뒤바꿨다.
그렇게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생활용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양은은 돌잔치 기념 밥상, 회사 선물 등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중금속 검출 등 안전 문제로 대두하자 플라스틱으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 인천도시역사관에서 열리는 ‘양은, 반짝이는 은이 아니라 죄송합니다만’에서는 양은 냄비, 양은 찬합을 포함해 과거 일상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제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넷플릭스 인기 상영작 오징어 게임에 등장했던 양은으로 만든 달고나 기구는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 만하다.
양은 도시락을 사용했던 세대와 양은이 낯선 세대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해당 전시회는 오는 12월 12일까지 이어진다.
한강, 낙동강, 금강의 옛 모습은?
‘우리 강 추억 사진전’은 과거 1960~70년대 한강·낙동강·금강과 해당 지역 주민들의 모습을 12월 4일까지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사진은 나라기록관과 국립공주대 공주학연구원, 부산어촌민속관으로부터 협조를 받았으며 지역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터미널 등 소규모 여유 공간을 활용해 전시를 마련했다.
이번 사진전은 우리 강의 옛 모습과 함께해 온 지역 주민의 삶을 느낄 수 있으며 사진과 함께 노래 가사, 시 등 지역 정서를 담은 문화를 소개한다. 한강 사진전은 ‘흐르는 시간 속, 한강의 추억’을 주제로 옛 한강 다리의 모습, 꽁꽁 언 한강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 가족 행사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 등 역사와 재미를 담은 사진들이 이천종합터미널에 전시된다.
낙동강 사진전은 ‘삶을 나르던 나룻배와 낙동강’을 주제로 낙동강 옛 나루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포다리와 을숙도 외나무다리 등을 고령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 볼 수 있다. 공주역에서는 ‘금강교를 건너 옛 금강의 기억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다양한 금강교 모습, 겨울철 강에서 얼음을 캐는 사람들, 금강교를 배경으로 촬영한 졸업 앨범 사진 등이 전시된다.
유럽 빈티지 장난감展
어릴 적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 곧 제일 친한 친구였던 유년 시절. 소중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할 주인공들이 현실로 찾아왔다. ‘유럽 빈티지 장난감전: 신비한 장난감 가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브뤼셀 장난감박물관과 런던 폴록스 장난감박물관과 함께한다. 세계적인 장난감 마스터들의 철학을 바탕으로 구성된 빈티지 장난감의 세계를 1월 2일까지 서울웨이브 아트센터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 유럽 각지에서 수집된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빈티지 장난감 약 50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된 장난감들을 통해 유럽의 사회, 문화, 역사를 재미있게 만날 수 있다. 오래된 것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빈티지 장난감은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이고, 청년층에게는 새로움이다. 전시 공간 역시 유럽의 오래된 도시 어딘가에 있는 장난감 컬렉터의 저택을 훔쳐보듯 구성되어 있어 장난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관련된 스토리를 따라 더욱 풍성한 전시를 즐길 수 있다.
69년 전통 ‘성일집’
옛 부산시청 뒷골목, 현존하는 곰장어 가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일집은 2대 주인장 최영순 씨와 그의 아들인 김성용 씨가 함께한다. 올해 68세인 최 씨는 여전히 하루 꼬박 4시간씩 곰장어 손질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 흔히 안주로 먹는 손가락 굵기의 곰장어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먹으로 한껏 움켜쥐어야 할 정도로 두툼한 데다 길이로 치면 주인장의 팔보다 길쭉하다. 품질 좋은 국산 곰장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인장 역시 식재료만큼은 따라갈 곳이 없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다른 집에서 곰장어를 먹던 손님들이 여기서 음식 나온 거 보면 놀라요. 대부분 가게는 저렴한 수입산이나 그보다 더 값이 떨어지는 냉동 곰장어를 쓰니까요. 수익만 보면 그편이 나을 수도 있죠. 그러나 이제는 돈보다 성일집의 전통과 내 명예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이제 아들까지 이어가면 100년 역사인데, 그 정도 자신감은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돈을 좇지 않는다는 그녀이지만, 처음 시어머니에게 성일집을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생계가 녹록지 않았다. 6·25 전쟁 이후 어려운 살림에 8남매를 먹이기 위해 곰장어를 굽기 시작해 식당까지 차렸지만, 당시만 해도 그리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 성일집을 일으켜 세운 데는 며느리 최영순 씨의 강인한 의지가 한몫했다.
“스무 살에 시집왔는데, 빚이 있어서 결혼식을 못 올렸어요. 시어머니께 ‘내가 열심히 일해서 10년 뒤에 식을 올리겠다’고 했죠. 정말 독하게 곰장어에 매진했어요. 덕분에 10년 만에 빚도 갚고 가게도 왕성해져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곰장어로 자식들 잘 키우고 예쁜 손주들까지 봤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죠. 그뿐인가요. 이제는 남에게 안 빌리고, 내 것으로 남 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성일집의 자부심 또 하나.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23가지 한약재로 만든 육수가 양념의 감칠맛을 더한다. 이미 품질 좋은 곰장어에 한약재까지 고루 넣었으니, 그야말로 보양식이 따로 없다. 이만큼 정성을 다한 데에는 손주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됐다.
“곰장어가 영양가도 많고 고단백 식품이라 아이들 성장기에 참 좋거든요. 그런데 애들은 잘 안 먹더라고요. 손주에게 먹일 심산으로 최신 휴대폰을 사줄 테니 곰장어 20번만 먹자고 했죠. 그렇게 약속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맛을 낼까 밤새 고민했어요. 한약재며 해초며 야채며 이것저것 넣어보다가 지금의 양념장이 완성됐습니다. 앞으로도 조미료는 넣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직 손주에게 네 번 더 먹여야 하고요.(웃음)”
부산1호선 남포역 10번 출구 도보 3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대교로 103
영업시간 매일 11:00~23:00
대표메뉴 곰장어 소금구이, 곰장어 양념구이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52년 전통 ‘양산집’
부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돼지국밥’. 그중에서도 양산집은 깡통시장 거리에서 처음으로 돼지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래된 돼지국밥집을 생각하면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연상되지만, 이곳 주인장은 갓 서른을 넘긴 청년 노치권(31) 씨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인 만큼,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은 덕을 보리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노 씨의 사정은 좀 달랐다. 군 제대 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준비하던 무렵,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병마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속에서 남은 것은 양산집, 그리고 20대 청년의 열정뿐이었다. 주인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장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직장생활보다는 가게의 맥을 잇는 게 좋겠더라고요. 보통 가업을 이으려면 이전 세대에게 음식 만드는 법부터 가게 운영까지 노하우를 전수받게 마련인데, 저는 그럴 겨를이 없었죠. 어린 시절 어깨너머로 보던 것에 친척이나 주변 지인들 조언을 더해 나름 맛을 구현했는데, 처음엔 정말 형편없었어요. ‘아들이 하더니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죠. 그땐 차마 ‘3대째’라는 타이틀을 걸 수가 없더라고요.”
칼질도 배우지 못한 채 뛰어든 장사였다. 얼마간은 가게 일을 마치고 인근 일식집에서 일손을 도우며 칼질을 익혔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쓰던 재료 안에서 국밥을 연구해가며 차츰 본래의 맛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주변 상인들과 단골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2014년 드디어 ‘3대째’라는 타이틀을 자신 있게 내걸었다.
“손맛을 살리는 데도 노력했지만, 더불어 염두에 뒀던 건 ‘가게의 정신을 잇자’는 거였어요. 두 분께서는 고된 장사를 하시면서도 늘 주변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 하셨죠. 3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물질만 물려받는 게 아닌, 이전 세대의 이념까지 이어가면 좋겠더라고요. 원래는 지역명을 딴 가게 이름인데, ‘기를 양(養)’, ‘물 흐를 산(汕)’이라는 한자를 써서 ‘끊임없이 베풀겠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실제 양산집은 오래전부터 수익금 일부를 어려운 이웃과 기관에 기부해왔다. “모두를 배부르게 하라”던 할머니의 말씀처럼, 그는 윗세대에게 물려받은 ‘큰 그릇’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언 몸과 마음을 녹이는 것처럼, 국밥을 통해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싶어요. 내가 열심히 장사해서 번 돈으로 다른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긍심도 생기죠. 국밥처럼 따뜻한 세상을 위해 베풀 줄 아는 ‘큰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부산1호선 자갈치역 3번 출구 도보 9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중구로47번길 30
영업시간 매일 10:00~20: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
대표메뉴 돼지국밥, 수육·편육, 수육백반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60년 전통 ‘백구당’
‘흰 갈매기’를 뜻하는 백구당(白鷗堂)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 제과점이다. 60년 동안, 3대를 이어오며 잠시 ‘뉴 파리 양과’로 이름이 바뀐 적도 있고, 매장 규모가 달라지기도 했지만, 빵맛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3대 주인장인 조재붕(54) 씨는 “정직한 재료로 옛 방식을 고수하되, 연구를 통해 늘 새로운 맛을 선보인 것이 장수비결”이라 말했다. 초창기부터 만들어온 앙금빵이나 양과자를 비롯해 2대 주인장이 45년 전 탄생시킨 ‘크로이즌’, 그리고 현 주인장이 개발한 ‘쑥쌀식빵’까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조재붕 씨는 제철 국산 식재료를 빵에 접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계절마다 지역 토산품을 이용한 빵을 개발하려고 노력합니다. 봄에는 쑥 카스텔라를, 가을에는 홍시 롤케이크를 만들기도 했죠. 산지에 직접 가서 좋은 재료를 골라 옵니다. 자연발효는 물론이고, 첨가제나 방부제도 전혀 넣지 않아요. 정직한 재료에 자부심을 느끼고, 고객에게 거짓이 없으니 더 뿌듯합니다.”
장인정신이 느껴질 정도로 빵에 대한 철학과 자긍심을 지닌 그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백구당을 물려받을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본래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사 대기업을 안정적으로 다니던 터였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며, 백구당에도 위기가 닥쳤다. 백구당의 명맥을 잇는 문제로 가족들의 고뇌는 깊어졌고, 결국 장남 조재붕 씨가 나서게 된 것이다.
“대를 잇기 위해 한국제과학교를 다니면서 자격증도 땄고, 대학원에서 경영 공부도 했어요. 2000년 8월에 내려왔는데, 처음 6개월간은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꼬박 가게 일에 매달렸죠. 다행히 아버지가 기력이 좀 있으실 때라 빵 만드는 기술도 전수받았어요.”
조재붕 씨 역시 대를 물려줄 계획을 갖고 있을까? 그는 ‘대를 잇는다’는 표현 대신 “잠시 맡는다”라며 운을 뗐다.
“백구당은 계속될 거고, 그 과정에서 제가 잠시 맡았다고 생각해요. 그다음으로는 둘째 아들이 맡았으면 하는데, 장담할 수는 없어요. 아버지도 원래는 제 동생에게 물려주려 했으니까요. 결국 백구당의 다음 주인장은 사람이 아닌 백구당이 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웃음)”
부산1호선 중앙역 15번 출구 도보 1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중앙대로81번길 3
영업시간 월~토요일 8:00~22:00, 일요일 9:00~17:00, 공휴일 9:00~18:00
대표메뉴 크로이즌, 쑥쌀식빵, 파이만주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남원’ 하면 춘향, ‘춘향’ 하면 광한루원만 생각났다. 남원에는 진정 광한루원 말곤 갈 데가 없을까 궁리하던 때에 마침 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 미술관이 좋아 남원에 들락거렸더니 식상했던 광한루원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동네 빵집과 걷기 좋은 덕음산 솔바람길도 발견했다. 이 산책로가 미술관과 연결되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던지. 남원을 여행하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종종 생각났다.
걷기 코스
남원역(남원시외버스터미널)▶차량 이동▶광한루원 북문▶남문▶요천 섶다리▶덕음산 솔바람길 입구▶전망대 레스토랑▶남원국립국악원▶그네매점(또는 약수터매점) 뒤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남원항공우주천문대▶춘향테마파크(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
상상 속 달나라를 구현한 광한루원
광한루원에는 남문(정문)과 서문, 북문이 있다. 오늘 걷는 코스는 북문으로 입장해 남문으로 나가는 것이 동선상 편하다. 북문 앞에는 고품격 한옥 호텔인 남원예촌과 규모 있는 한정식 전문점들이 자리했다. 이 일대는 남원 제일의 관광단지라서 거리가 깔끔하고 작은 쉼터도 조성돼 있다.
주중 낮 동안 일반인 관람이 허용되는 남원예촌을 잠시 둘러본 뒤 광한루원 북문으로 입장한다.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춘향사당이 코앞이다. 조선 중기 사람들은 달나라에 옥황상제와 선녀가 산다고 생각했다. 이 상상을 지상에 구현한 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는 옥황상제가 머무는 달나라 궁전이며, 광한루 앞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에 섬처럼 떠 있는 세 개의 섬은 지상낙원, 즉 영주산(한라산),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을 뜻한다. 중국 ‘사기’에 등장하는 전설 속 세 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본떠 일컬은 것이다. 나무다리로 연결된 세 섬을 차례로 들러본다. 팽나무가 우거진 영주산 영주각에 올랐다가 봉래산의 대숲을 지나고, 방장산 숲에 숨은 작은 방장정에선 잠시 쉬어간다.
방장정 옆으로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오작교가 보인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널 때 걸었던 오작교를 본떠 만들었다. 다리 길이가 57m에 달하는 국내 최장 연지교다. 조선 후기 소설 ‘춘향전’에서 성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났던 장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오작교를 건너며 연못을 굽어보니 잉어 떼와 천연기념물인 원앙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노닌다. 광한루원은 원앙과 잉어에게도 지상낙원인 듯하다. 연못가 버드나무와 짝꿍처럼 잘 어울리는 수중 누각 완월정에 올랐다가 남문으로 나선다.
솔숲이 우거진 덕음산 솔바람길
광한루원 남문으로 나오면 바로 요천변이다. 요천 제방에 올라 벚나무 가로수길을 걷는다. 가로수가 우거져 그늘이 짙다. 덕음산 솔바람길로 가려면 승월교나 섶다리를 이용해 요천을 건너야 한다. 흔한 시멘트다리 대신 섶다리를 선택해 건넌다. 이 섶다리는 옛날부터 요천에 섶다리 두 개가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근래에 만든 쌍섶다리다. 섶다리를 건너면 춘향테마파크와 식당, 놀이공원, 국립국악원 등이 있는 춘향촌 입구가 보인다. 춘향촌 입구 왼쪽에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가 있다. 나무계단을 조금 오르면 솔숲길이 이어진다. 잔잔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었을까. 숲길이 전망대레스토랑 앞 전망대로 인도한다. 이곳에 서서 남원 시내를 굽어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같고, 도심 가운데로 요천이 흐른다. 남원의 젖줄 요천은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 남해까지 간다.
탁 트인 남원 풍광을 감상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국립민속국악원 방면으로 내려간다. 국립민속국악원은 판소리의 성지인 남원의 국악 수준을 잘 보여주는 공연장이다. 주말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전통 공연을 선보인다. 주말에 이 길을 걷는다면, 공연시간을 미리 알아두는 게 좋다. 국립민속국악원 뒤쪽으로 이동해 덕음산 솔바람길의 또 다른 입구를 찾는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김병종미술관까지 이어지는 데크 산책로로 연결된다. 길 곳곳에 전시돼 있는 시, 그림, 캘리그래피 작품을 감상하고, 솔숲 향기를 맡으며 느리게 걷는다. 데크에서 내려오면 바로 김병종미술관이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에서 미술관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남원의 뜨는 명소 김병종미술관과 화첩기행 북카페
2018년 3월 개관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남원 출신 한국화의 거장 김병종이 자신의 작품을 남원시에 기증하면서 건립이 기획됐다. 덕음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실내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푸른 숲이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은 1층 상설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김병종 화가의 초기작이자 그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바보예수’ 시리즈를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동심이 느껴져 절로 미소 지어진다. 김병종 화가는 여행 에세이 ‘화첩기행’을 저술해 문학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줬다.
상설전시장 옆에는 화첩기행 북카페 ‘미안’도 자리해 있다. 남원에서 나고 자란 청년 카페지기가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라는 뜻을 담아 ‘미안’이라 이름 지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카페 한쪽 벽면에는 김병종 화가의 작품과 그가 기증한 미술, 인문학, 문학 관련 도서 등 약 2000여 권이 진열돼 있다. 나머지 벽면은 통창을 설치해 물이 가득한 정원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오랜만에 맘에 쏙 드는 미술관과 카페를 만나 걷는 즐거움이 커진다.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맛있는 커피와 빵을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어간다.
춘향테마파크 걸을까, 오감만족숲을 걸을까
미술관에서 걷기를 마치고 광한루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더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항공우주천문대를 거쳐 춘향테마파크 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으로 내려가도 좋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광한루원이 멀지 않다.
항공우주천문대는 미술관 뒤쪽으로 난 길 끝에 있다. 미술관에서 약 300m 거리다. 오르막을 살짝 오르면 돔 형태의 지붕을 얹은 천문대를 만난다. 여러 대의 천체망원경을 통해 낮에는 태양의 흑점을, 밤에는 달과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다. 기상이 좋지 않으면 관측을 할 수 없으니 날씨를 봐가며 입장해야 한다.
천문대 뒤쪽, 솔바람길 이정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춘향테마파크 뒷문이 나온다. 이 문은 춘향테마파크의 가장 위쪽 구역에 있으니 아래로 내려가면서 관람하면 된다. 춘향테마파크는 춘향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공원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촬영세트장이 남아 있다. 뒷문 근처에는 월매집, 춘향과 이몽룡이 첫날밤을 보냈던 월매집 부용정, 춘향이 변 사또에게 고초를 당했던 관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춘향테마파크에 입장하지 않고, 뒷문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오감만족숲/광한루 방면 숲길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오감만족숲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오감만족숲은 2017년에 덕음산 기슭에 조성한 공원으로 걷기 좋도록 지그재그형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승월교로 바로 연결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전통시장의 정취가 물씬 남원공설시장
광한루 서문 앞에 있는 상설시장이다. 오일장날에는 아침부터 붐빈다. 남원에는 산과 강이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다. 특산물을 구경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남원산 미꾸라지가 흔하다. 시골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오래된 뻥튀기 가게도 있다. 온갖 곡식은 물론 무까지 튀겨준다. 남원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즐겨 사 먹는 또 다른 인기 메뉴는 닭발 튀김. 뼈를 발라낸 닭발에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다. 맥주 안주로 제격이다. 남원시 의총로 51, 4와 9로 끝나는 날이 오일장.
맛의 고장 남원 맛집
남원에서는 남원산 미꾸라지와 된장을 넣고 푹 끓인 추어탕이 유명하다. 광한루원 서문 쪽 요천변에 추어탕 거리가 형성돼 있다. ‘새집’, ‘현식당’, ‘부산집’이 입소문 났다. 광한루원 북문 앞에 있는 남원 한정식 전문점 ‘종가’도 추천할 만하다. 보리굴비 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찜, 육회, 전복구이 등 맛깔난 전라도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돌솥비빔밥 전문점인 ‘반야식당’도 광한루 인근에서 오래 장사한 소문난 집이다. 최근 뜨고 있는 ‘집밥, 담다’는 ‘따뜻한 가정식 한 끼’를 표방하는 젊은 감각의 음식점이다. 정갈한 식단으로 호평받고 있다. 예약은 필수.
남원 사람은 다 안다는 명문제과
남원에서 오래 장사한 동네 빵집이다. 가게는 작고 허름하다. 다른 빵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빵을 개발해 인기를 얻었다. 남원에서는 이미 유명한 곳인데 ‘백종원의 3대천왕’에 출연한 뒤로 손님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평일에도 줄을 서며, 오후 늦게 가면 인기 빵은 동나 살 수 없다. 3대 인기 빵은 생크림소보로, 꿀아몬드, 수제햄빵이다. 광한루원 북문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남원시 용성로 56.
걷기 Tip
❶ 5월 8일부터 12일까지 광한루원과 요천 일대에서 제89회 춘향제가 열린다. 광한루원은 야간 조명을 밝히는 밤에 산책해도 좋다.
❷ 4월 24일부터 5월 19일까지 바래봉 철쭉제도 열린다.
접하는 순간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최백호(崔白虎·68) 가 부르는 노래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 소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수만 가지 감각들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예술품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흔치 않은 예술가의 자리를 갖게 된 그가 이제 영화감독이라는 오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종합적인 예술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해가고 있는 최백호를 만나 미래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해봤다.
청년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라이브 카페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에 첫 앨범을 낸 이후 어언 40년,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두터운 세월의 결이 느껴진다. 그러나 1950년에 태어나서 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살아오면서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는 지금 ‘은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가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적, 아이유, 박주원 등 젊은 실력파 후배들과의 협업과 월드 뮤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도전 등 최백호는 새로운 피로 자신의 감수성을 뜨겁게 채우고 있는 중이다.
계획하며 살지 않는 사람
그뿐만이 아니다. 최백호의 예술적 취향은 일찌감치 화가 쪽으로도 뻗어서 다수의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8년 4월에 열릴 다섯 번째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스무 점 정도 올릴 예정이에요. 테마는 나무고요. 제가 나무밖에 못 그리기도 하고.(웃음)”
그는 자신이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의 ‘그때그때 대충대충 살아왔다’는 말은 ‘먼 계획을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그때그때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주변 사람만 피곤하죠.(웃음) 41주년이 되는 올해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영화감독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갑작스런 일이 아니고 사실 오래 준비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썼고 홍보 계획도 세웠고.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없어서 못 만들고 있었죠.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영화 제목은 ‘미사리’. 그는 남자 주인공으로 가수를 생각하고 있다 했다. 영상과 음악 위주의 영화가 될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선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의 새로운 도전
기왕 미사리 얘기가 나왔으니 미사리와 음악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시니어에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미사리에서는 4~5년 정도 공연을 한 적 있어요. 지금은 미사리 카페가 두세 군데 남았나.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조금 있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뭐든 잘된다고 하면 다 달려들어서 하려다가 힘이 더 드는 지경이 되고 말아요.”
미사리가 쇠퇴한 이유는 가수 출연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기를 끌자 라이브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출연 가수들 출연료가 치솟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가수 출연료가 오르면 음식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음식 맛이 없으면 누가 찾겠는가.
“그래서 가수들이 모여서 출연료를 올리지 말자고 얘기했어요. 출연료 기준은 송창식 선배에게 두자고 했죠. 그런데 그게 안 지켜지더군요. 그래서 시장이 흐려졌고…. 우리나라는 참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밀려가요.”
혹시 미사리 같은 음악의 대안공간을 다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러한 궁금증에 선유도가 좋은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선유도 안에 공연장이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고, 코너마다 버스킹을 할 수 있게 한 다음 입장료는 3000~5000원 정도 받으면 좋은 이벤트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홍대와도 연결돼서 다리에서 버스킹도 가능할 테고, 좋은 관광코스로도 활용할 수 있죠.”
과거에는 자연주의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요즘은 도로가 나고 식당이 난립해서 이제 변해버린 미사리의 운명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배어나왔다. 그러한 느낌이 그가 만들 영화에도 담기게 될까 궁금했다.
“영화감독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어요. 원래는 미대를 가고 싶어 그림 공부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갔죠. 그런데 군대에서 몸이 안 좋아서 나오게 됐고, 생활 때문에 노래를 시작했죠. 영화는 머릿속에 계속 갖고 있던 생각인데, 아마 이번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웃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요.”
최백호의 고민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 대표, 그리고 문화관광부와 마포구가 협약해 만든 음악 창작공간인 뮤지스땅스 대장으로도 일하고 있는 최백호는 어찌 생각하면 가수 일 이상으로 행정적인 영역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는 현장에서 부딪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현실감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한국음악발전소는 무소속 프로젝트라 하여 소속사 없는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서 경연대회를 하고 있다. 413개 팀들 중 8팀을 뽑아서 앨범을 만들었고 지난 연말 12월 15일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공연을 했다. 연령, 장르 제한은 없다. 덕분에 힙합부터 국악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독립음악가들을 발굴하는 콘테스트로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올해가 4회째인데, 예산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단다. 지원해주던 단체에서 지원을 끊은 것이다. 다행히 3회는 CJ에서 지원해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에게 행정가로서 겪어야 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음악창작소 프로젝트가 있는데 정부에서 전체 운영자금으로 10억 원 규모를 책정했어요. 원래 시작은 전국 세 군데에서 했어요. 그래서 세 곳으로 자금이 나뉘어 지원됐죠. 그런데 지방에서도 참여하기 시작해서 지원해야 할 곳이 여덟 군데로 늘어난 거예요. 문제는 인디밴드가 없을 것 같은 지역에도 지원금이 들어간다는 거죠. 인디밴드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 서울로 오는 게 현실인데, 여덟 곳으로 늘어났어도 세 군데일 때의 예산으로 계속 쓰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15억 원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죠.”
뮤지스땅스 대장으로서 속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자체 운영이 잘되고 있으며 후배들이 좋아한다는 게 보람이다.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무효가 되는 세상
단체의 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만나는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악 작업 차원에서도 인디밴드부터 아이돌 등 10대부터 노년까지 남녀노소를 다 만나며 사는 것이 최백호의 요즘 삶이다. 그렇게 많이 만나다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특별히 사람을 평가해서 만나는 건 아니에요. 거리를 어떻게 두느냐의 차이죠. 그런데 오랜 경험으로 처음 보고 대화를 한 번 해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더 멋있어 보인다고 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날렸다.
“젊었을 적에 워낙 별로여서 나이 드니 조금 나아진 거지.(웃음) 나이 들수록 조심해야 될 게 많아요. 사람을 사귈 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래요. 가장 중요한 게 말이죠.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말이 거칠고 극단적이어서 잘 써야 하거든요. 아주 품위 있는 말도 가능하고 정말 천박한 말도 가능하고. 외국어에 비해 그 폭이 훨씬 크니 상처를 주게 되는 게 우리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는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 진행을 맡고 있다. 대중과 소통하는 중심에 있으니 당연히 말에 대해 더욱 민감한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 10년이 되죠. 라디오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리셋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말을 조심하려면 되도록 사람 만나는 걸 줄여야 해요.(웃음)”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처럼, 그도 사람들이 SNS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연예인들이 SNS에서 서로 모여 왜 자기 생각을 그리 밝혀야 하는가 싶죠. 책임을 지려면 사회적 활동을 하든지…. 저는 모르겠어요. 자기 일만 열심히 해도 될 텐데.”
최백호의 희로애락
최백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고 회고했다.
“재수할 때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노래를 한다고 3~4년 고생했죠. 결핵을 앓았어요. 생활은 안 되고. 그 시절 너무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어지간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아버지는 고 최원봉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이었으며 스물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당선됐지만 최백호가 태어난 지 5개월 되던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무한한 존경심이 있어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 존재는 계속 제 곁에 있었고,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딸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그녀가 시집갔을 때를 꼽았다.
“딸아이는 사정 때문에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갔어요. 처가가 미국에 있거든요. 그때부터 딸을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면서 살았죠. 딸이 사춘기를 겪었을 때 아내는 옆에 있었지만 나는 없었어요. 그 아이가 스무 살에 한국으로 잠시 왔는데, 그때만 해도 저와 거리가 있었고 자주 싸웠죠.”
그 시기 이후 딸은 다시 공부를 하러 외국을 가게 됐고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그렇게 멀리했나를 이해하면서 굉장히 친해졌어요. 이젠 뭐 친구처럼 모든 걸 알고 지내요. 결혼식도 예식장에서 하지 말고 바닷가에서 하라고 했더니 정말 바닷가에서 했고. 저도 딸을 이해하게 됐죠. 딸아이도 저에 대해선 이제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구나 싶어요. 정말 큰 행복이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능력에 비해 많이 성공했다 싶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림도, 음악도 따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어요.”
시간은 그를 성장시켰고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는 옛날에는 곡을 써도 남을 안 줬다고 한다. 자신이 불러야 하는 노래다 싶어서 욕심이 나서 계속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탐이 나는 곡이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준다. 히트곡을 더 만들고 싶은 욕심은 없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 그는 좀 더 세심해졌다. 그가 현재 부산에서 진행하고 있는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도 과거 같으면 벌써 끝났어야 할 일이다.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는 과거 조선소가 있었던 마을을 문화마을로 키우려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다. 이 작업에 그는 두 달간 매달려 있는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져도 그만큼 결과물이 좋아지니까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을 때 성격이 급했고 지금도 급한 편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변화된 모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있다.
“새해 소망은 올가을부터 만들기 시작할 영화를 잘 완성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큰일이 되겠죠.”
원로임에도 고고하지 않고 일가를 이뤘음에도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가 가진 그러한 소탈함이 단단한 철학으로 다듬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는 영원히 예술가이며 계속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안정감을 주는 것 아닐까. 최백호의 새로운 도전인 영화가 어떤 미학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이유다.
대중 드라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뒤따라야 하지만, 그중에서 주인공의 역할이 중요하다.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남다른 노력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 편의 드라마라 이르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 순발력 있는 연기를 위해서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미래의 세상일은 점치기가 쉽지 않다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부가 함께 살다 어느 한쪽이 혼자가 된다면 생활은 어떻게 될까? 은퇴를 한 사람들은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주변에서 그런 상황을 겪는 사람들을 종종 보고 있어서다.
필자의 한 친구는 얼마 전에 38세 치과의사인 사위를 하룻밤 사이에 잃었다. 심장에 갑작스러운 이상이 생겨서 잠든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어제저녁에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이웃 아저씨가 저세상으로 떠났다. 술과 담배는 오래전부터 멀리하고 시골에서 정성 들여 가꾼 먹거리만 챙겨 먹던 부산에 사는 친구도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났다. 같은 업종의 관련자들과 모임을 마치고 혼자서 승용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친구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심근경색으로 밤하늘의 잔별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롭게 떠났다. 미혼의 두 아들과 60 초반의 고운 부인을 두고서 말이다.
영원히 살 것 같았던 건강한 남편이 세상을 하직하여 홀로 된 부인들이 주변에 많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부부가 살아오면서 남편은 부인에게, 부인은 남편에게 의지하며 산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과 집안 살림살이는 부인의 몫이다. 바깥의 일들은 대부분 남편의 일이다. "안사람, 바깥양반"이라는 말의 어원이지 싶다. 그런 생활을 유지하다가 남편이나 안사람 중 어느 한쪽이 사고나 질병 등으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상대는 한동안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되었을 때를 상상하여 보아야 한다.
내가 이 세상을 안사람보다 먼저 가게 될 경우에 여생을 잘 보낼 수 있도록 그 환경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 경제적 여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경제적 측면에서의 여건 조성이 더 중요하다. 아내 또는 남편을 위하여 스스로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것도 결국은 좋은 일만은 아니다.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자생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미리미리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놓아야 하지 않을까? 훈련을 시켜 놓아야 한다. 부인의 경우도 같다. 여자는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딸네에서 외손주를 보아 주기도 하고 간단한 집안 살림을 도와주며 무료하지 않게 소일한다. 남자들은 그런 점에서 무디다. 혼자서 끼니를 챙겨 먹는 일은 버릇되어 있지 않아 더욱 서툴다. 그렇기에 은퇴 남편 증후군이 생겨난 가장 큰 요인이다. 간단한 식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조리법이나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세탁기 사용하는 방법과 다림질하는 방법 등을 부인이 남편에게 시간이 날 때 미리미리 훈련을 시켜주거나 남편 스스로 해두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