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감정평가사 시험에서 최고령 합격자가 탄생했다. 최기성 감정평가사(67)로, 합격 당시 나이는 65세였다. 그는 그해 11월 삼일감정평가법인에 입사했다. 실무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국가정보원 고위 공무원으로 오래 일했던 그. 직무상 대통령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고 미소조차 잘 짓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감정평가사로서 현장에 나가 감정평가를 하고, 영업을 하고, 연신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인다. 2년 차에 접어든 새내기 감정평가사를 만났다.
최기성 감정평가사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7시였다. 그때도 삼일감정평가법인 사무실에는 여전히 일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여러 감정평가사들의 책상 사이로 그의 자리와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한창 업무 중이었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기자를 만나러 오는 와중에도 동료 평가사와 업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바빠 보였다. 주변의 다른 직원들은 언뜻 보아도 그보다 한참은 어린 듯했다. 그 속에서도 그는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었다. 사무실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에게서 나이에 따른 이질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새내기가 되다
그는 감정평가사 실무를 시작한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수습 생활을 갓 마치고 인터뷰 날부터 사인 권한이 생겼다. 그날 처음으로 평가서에 자신의 사인을 했다. 보람이 남다른 하루였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 일을 마저 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자정께에 퇴근했단다. 요즘 일이 많아졌다고. 의뢰받은 일을 기한에 맞추어 끝내야 하기 때문에 일이 많을 때는 이처럼 야근을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정시에 퇴근한다. 한 달에 야근하는 횟수는 절반 정도. 인터뷰 날에는 강북구 우이동과 수유동에 있는 현장 두 곳에 다녀왔단다. 그야말로 한창 현역이자 전성기를 살고 있는 이의 모습, 갓 수습 딱지를 뗀 새내기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고희를 목전에 둔 터라 체력에 무리는 없을까 싶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받쳐주는 편이라,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부진 그의 체격을 보니 마음은 물론 몸에도 견고하게 쌓인 내공이 보였다.
오히려 그는 감정평가사로 일하며 ‘워라밸’이 더 좋아졌다고 했다. 공직에 있을 때는 주말도 없이 일했다.
“대통령이 오더를 내리면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서 원장님한테 보고하고, 원장님은 대통령한테 보고하고. 계속 그런 식으로 일했죠. 남북 행사 있으면 통일부랑 같이 책임지고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고요. 유일한 틈이 토요일 오전 일찍 골프 한 번 치는 거예요. 그렇게 스트레스 풀고 들어와서 일하고, 일요일도 일하고. 오로지 일에만 매진하고 휴가나 여가는 생각도 못 했죠. 지금은 일이 있으면 며칠 밤을 새서라도 기한에 맞춰 납품해야 하지만, 일 없으면 정시에 퇴근하고 굉장히 자유로워요. 주말에도 쉬고.”
그는 성공적인 공직 생활을 했다. 1984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가정보원에서 20년 이상 근무했다. 1급 관리관에 해당하는 실장까지 오르고 남북적십자회담에 대표로 참여하는 등 요직을 거쳤다. 퇴직 후에는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인 한국중부발전주식회사, 국가 안보 관련 싱크탱크인 국가안보전략원의 이사직을 역임했다.
전 직장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게 된 그에게 고충을 물으니, 첫째로 꼽은 게 오피스 프로그램이었다.
“엑셀이나 워드를 전에는 다루지 않았어요. 여기는 그런 프로그램으로 평가서를 만드는 게 기본이고, 회사에서 사용하는 고유 프로그램들이 있으니까 익히는 데 되게 힘들었어요. 공직 시절에는 만들어진 보고서를 검토하고 사인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제가 직접 다 작성하죠. 모르면 선배들한테 물어가며 했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워드 엄청 잘해요. 회사 결정되고 나서 유튜브 보면서 연습하긴 했는데, 실무는 또 다르더라고요. 직접 부딪히고 시행착오 거치면서 하나씩 발전해나갔죠. 거기서 오는 성취욕도 있었고요. 지금은 웬만한 건 다 합니다.”
오랜 공직 경험이 주는 장점도 있다. 온갖 일을 다 겪었으니 웬만한 일엔 떨지도 않고 담담하다. 사회 초년생보다는 사람 대하는 기술도 노련하고, 평생 일하면서 보고서와 씨름했기 때문에 평가서를 보는 눈도 깊다. 단지 워드 프로그램 같은 고유한 틀에 익숙해지기까지 노력이 필요할 따름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장점은 사람 관계다. 젊은 직원들과는 다르게 탄탄한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회사에서도 그런 인맥을 활용하길 기대한다. 그렇기에 그의 경력을 감안해 고문 직함을 주었다.
“우리처럼 나이 들어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인맥이 제일 큰 장점이에요. 회사에서 장년층 직원을 뽑는 것은 일도 일이지만 영업적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가서 일을 따오기도 하면서 제 역할을 해내는 거죠. 그래도 쉽지는 않습니다. 옛날하고 다른 측면이 있어요. 부탁하기도 쉽지 않고요. 불공평한 레이스라고 할까, 그런 걸 요즘은 다들 싫어하니까요. 저 자신도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하죠. 사회 친구들이 은행 같은 곳들 소개해줘서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 상태예요.”
그는 공직에 있을 때 오직 국가를 위해서 일했다. 국가 안보와 국익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지금 있는 곳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다. 그럼에도 그는 두 조직의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부동산을 비롯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 물건에 대해 평가하기 때문에 객관성과 공정성이 있어야 해요.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준 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국가 경제하고도 연관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담보 평가만 해도 이해관계인이 대출을 받고자 하는 사람과 금융기관이죠. 우리가 평가를 잘못해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으면 그 영향이 개인뿐 아니라 은행에도 미치고, 그게 국가 경제에까지 영향을 줘요. 과대평가를 하면 경제 질서를 흔들 수 있거든요. 그만큼 공공성이 가미된 일이에요.”
그가 몸담고 있는 삼일감정평가법인 역시 공정성을 지키며 신뢰받는 곳이다. 철저하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부실한 감정평가를 미연에 방지한다. 국토교통부가 지정한 15개 공시전문평가법인 중 하나로, 부동산 감정평가뿐만 아니라 부동산 컨설팅, 기업 가치평가, 무형자산 평가, 공적 평가 등에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종합 부동산 서비스 회사다.
나를 바꾸는 시간
그는 ‘슈퍼 갑’으로 수십 년을 살다 이제는 ‘슈퍼 을’이 되었다고 했다.
“공직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머리 숙여본 적 없어요. 대통령이 와도 고개만 까딱하는 문화였어요. 아쉬운 게 없었어요. 남한테 부탁할 이유도 없었고요. 그런데 여기는 수주를 해야 되잖아요. 젊은 사람들한테 고개 숙이고 들어가서 영업도 해야 하고. 완전히 을이에요.”
어깨 힘을 빼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내도 항상 “당신은 슈퍼 을이니 그런 자세로 대처해라”고 조언한단다.
“그 물을 빼는 게 되게 힘들었어요. 상처받기도 하고. 저도 나이가 있는데, 제가 존대를 했는데 상대가 얕보면 기분이 나빴죠. 마음 삭여가면서 일해서 지금은 많이 순화됐어요.”
체질과 습관을 바꾸고, 냉대에 마음 아프던 시간을 감내하면서 사는 그를 보며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는 지난 공직 생활만으로도 경제적인 노후 대책은 이미 완비했다. 이 일을 생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고충까지 참아가면서 하는 이유는 뭘까?
“제가 퇴직할 땐 골프 치고, 등산 가고, 그런 생활을 생각하고 그만뒀어요. 그런데 아내가 이 일에 도전해보라고 권했어요.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남은 인생이 수십 년인데 아무 일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게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옛날보다 평균 수명이 늘었잖아요. 건강에 이상이 없으면 80~90세는 거뜬하니까요.”
그래서 그는 단언한다. 일하면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사회생활인데 내 위치에 맞게 스스로 행동을 조절해야죠. 제가 고위직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주면 밖에서 누가 알아주나요? 내가 숙여줘야 저쪽도 마음을 열죠. 그래서 지금은 아내 말 잘 들었다 싶어요. 아침에 가방 들고 출근하는 행복이 말도 못 해요. 남들은 다 오늘 뭐하지 하는데, 저는 맡겨진 일 하면서 활기차게 살잖아요. 사회적인 고충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병아리가 어미닭이 되기까지의 과정 중 하나니까 전혀 개의치 않아요. 감정평가사는 변호사나 변리사와 맞먹는 전문직이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정년 없이 계속 일할 수 있고, 지금이라도 내 사무소를 개업할 수 있어요. 최고의 직업이죠.”
그는 인생을 통틀어 고시에 두 번 합격했다. 행정고시와 감정평가사 시험. 두 시험 공부할 때를 비교해보면 가장 큰 차이가 기억력이다.
“행시 준비할 때는 젊은 시절이라 머리가 좋았죠. 한데 지금은 기억력이 안 따라줘요. 공부하고 돌아서면 기억이 안 나서 답을 못 쓰겠더라고요. 애 많이 먹었죠.”
행정고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고시촌에서 명운을 건 심정으로 전력투구하며 공부했다. 반면 감정평가사 준비는 달랐다.
“친구들과의 골프, 자전거 라이딩, 저녁 약속을 다 마다하기엔 삶이 너무 황폐해지는 듯했어요. 먹고살 게 없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틈틈이 공부하다 보니 준비 시간이 길어졌죠.”
6년이라는 긴 수험 생활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패혈증에 걸려 8개월을 투병하기도 했다.
“아내가 후회를 많이 하더라고요. 가만있던 사람 괜히 들쑤셔서 고생시켰다고요. 공부 좀 잘할 줄 알고 해보라 그랬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던 거죠. 게다가 패혈증까지 걸렸으니까요. 치사율이 50%인 질병이에요. 낫고 나니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생각은 한 적 없었다.
“만약 내가 죽거든 공부하던 책 같이 넣어서 태워달라고 했어요. 중간에 포기하면 죽을 때까지 한이 돼요. 또 포기한다고 달리 할 것도 없었고요. 끝까지 가기로 맘먹었지요. 그러니까 결국 결실을 맺었죠. 포기를 안 하면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게 제 철학이에요.”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법
함께 일하는 평가사들은 모두 그보다 한참 연배가 낮다. 나이가 많아도 40~50대. 함께 입사한 동기는 36세다.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는 노하우가 있을까?
“마음을 열어놓아야 돼요. 나이 들수록 아집이 생겨요. 몸에 밴 습관이 있어서요. 항상 오픈 마인드로, 낮은 자세로. 그래야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다가와요. 내가 나이 들었다고, 왕년에 어땠다고 하면서 어깨에 힘주고 있으면 아무도 접근 안 하죠. 그럼 저만 손해예요. 외롭고. 그래서 항상 젊은 사람들 말을 많이 경청해요. 또 저는 말 안 놓고 깍듯이 대해요. 그리고 선배들한테 많이 의존해요. 모르는 게 있어서 물어보면 다들 친절하게 잘 알려주세요. 이따금 실수하면 대신 잡아내서 고칠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얼마나 고마운지. 항상 저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러죠.”
그는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다. 딸은 20대, 아들은 30대로 한창 직장 생활 중이다. 자신들과 다름없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버지를 보며 무척 좋아한단다.
“공부할 땐 둘이 의견이 달랐어요. 아들은 제가 혹시 공부하다 잘못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만하길 바랐고요, 딸은 ‘아빠, 공부 안 하면 뭐하실 거예요. 계속하세요’ 했어요. 요즘은 둘 다 너무 좋아해요. 대화도 잘 통하고요. 저도 젊은 친구들이랑 어울리며 사니까 딸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요. 딸이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 얘기해주니까 도움 많이 받죠.”
그에게 자극받아 함께 도전한 친구도 있다. 그보다 여덟 살 어린 행시 동기가 자신도 도전해도 되겠느냐고 조언을 구했다. 그는 흔쾌히 하라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저는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어요. 이 친구한테는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도록 도와줬죠. 친구는 작년에 합격해서 지금 법인에 다니고 있어요.”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새 삶을 찾아 나선 이가 많다. 그에게 도전을 꿈꾸는 시니어들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앞으로는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더 길어질 거예요. 3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는데, 퇴직하고 나면 앞으로 그만큼이 또 남는 거예요. 그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는 거죠.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든, 취미를 발전시키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야죠. 적극적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도전해야 해요. 그래서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마친 그는 기자를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는 매너가 좋았다. 연신 미소를 띠며 일상적인 대화와 소소한 칭찬을 건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가 이러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어떤 노고가 있었을지 가늠되어 새삼 특별하게 와 닿았다. 우여곡절도 겪었고 고충도 있지만 새 직업을 갖게 된 기쁨, 아침에 출근해 일할 곳이 있다는 행복이 훨씬 크다는 그. 2년 차 새내기 최기성 감정평가사의 앞날을 응원한다.
55세, 뜻을 세운 지 28년 만에 ‘변호사’의 꿈을 이룬 권진성 씨. 그는 행정고등고시, 사법시험, 로스쿨, 변호사 시험 과정을 모두 거치며 고시의 역사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시를 준비하던 청년은 어느새 중년이 되어 당당히 변호사 배지를 받았다. 부산 모처에서 현재 수습 변호사로 활동 중인 그를 만나 그간의 여정을 들으며 꿈에 도전하는 삶의 가치에 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한 말이다. 이상적인 꿈을 갖되, 현실적인 자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린 이상이 현실을 갉아먹거나, 현실이 이상을 짓눌러버리는 경우를 때때로 목격한다. 어릴 때의 꿈은 그저 호시절의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 쓰는 말이라는 썰렁한 유머도 있지만, 우리에게 포기는 너무나 쉽다. 그렇다면 근 30년간 꿈 하나를 위해 달린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하나의 꿈을 향해 정진한 권진성 변호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올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변화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바빴어요. 합격 발표가 날 때까지 경비원 일을 했어요. 합격하면 6개월짜리 수습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경비원 신분으론 할 수 없었죠. 얼른 인수인계하고 지난 6월부터 수습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그사이 인터뷰 제의도 받았고요. 다만 제가 합격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들이 합격하는 걸 꼭 보고 가시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의 생활이 꿈꾸셨던 변호사의 모습과 비슷한가요?
모든 직업이 다 그렇지만 밖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과 안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저도 사회 정의 실현을 꿈꾸며 변호사란 꿈을 품었죠. 물론 현실의 변호사도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지만, 성직자랑 비슷한 면이 있어요. 사수가 알려준 말인데 참 공감해요. 변호사로서 법리적 검토를 잘해서 소송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뢰인의 고민을 이해하고 마음을 보듬는 것도 변호사의 역할 중 하나예요. 분명 의미 있는 일은 맞지만, 그만큼 정신적인 에너지도 많이 쏟아야 하는 일이라 고단할 때가 있죠.
수험생활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으로 어머니를 꼽으셨는데,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끝까지 믿어준 가족들이 다 고맙지만, 그중에서 어머니가 제일 큰 힘이 됐어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궂은일을 다 하셨어요. 저한테 이렇게 책임감이 생긴 건 일정 부분 어머니의 영향도 있어요. 살가운 아들이 아니라 애교 있게 다가가지 못했는데,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저를 믿어주셨어요. 연거푸 낙방해도 일절 그만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말로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저의 또 다른 자아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제 마음을 잘 아시고, 늘 말씀을 아끼셨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항상 감사했죠. 최고의 원동력이라고 할 만큼.
변호사 합격소식을 전했을 때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어머니께 제일 먼저 소식을 알렸어요. 소식을 들으시고는 딱 한마디만 하셨어요. “그래, 내가 너는 할 줄 알았다!” 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먹먹했어요. 눈물이 앞을 가리기보다는 그동안 불효만 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밖에 없었어요. 그 후 두 달 뒤에 어머니가 소천하셨어요.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 정신을 놓으시기 전까지 약 20일 동안 어머니와 함께 그간의 여정을 곱씹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지나고 나니 정말 꿈처럼 느껴져요. 제 인생의 명장면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그 20일의 매 순간이 될 것 같아요.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이후 주위 반응이 어떤가요?
이전보다 인지도는 좀 올라갔어요. 종종 저를 알아보는 분이 있어요.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모르는 분을 우연히 마주쳤는데, “파이팅!” 하시며 가시더라고요. 확실히 방송이 다르구나 싶었죠.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소식도 끊고 살았는데, 방송이 나간 후 연락이 많이 왔어요.
수험생활 중 언제가 가장 힘드셨나요?
법원행정고등고시랑 사법시험 둘 다 1차 시험에 합격한 해가 있었어요. 그간 공부도 많이 했고 자신도 있었어요. 속으로 ‘이번에 2관왕이다!’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나친 자만이었어요. 2차 시험에서 모두 낙방한 후 체력도 고갈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치더라고요. 일종의 번아웃이 왔죠. 그때는 사람도 만나기가 싫어서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애들은 크는데 아빠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주위의 시선은 싸늘하고,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잠도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밖에 못 잤어요. 티를 낼 수는 없어서, 속으로 진짜 많이 울었어요. 낙방 소식보다 떨어진 이후가 더 무서웠어요. 가장 괴로웠던 건 나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였어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대학교 다니면서 쿵푸를 배운 덕분에 체력은 자신 있었어요. 하지만 정신이 한 번 무너지니까 체력도 따라주지 않더군요. 육체를 단련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매일같이 2시간씩 학교 뒷산에 올랐죠. 비가 와도 눈이 쏟아져도 늘 뛰어올라갔어요. 이 싸움에서 지면 끝난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확실히 체력이 좋아지니까 정신도 건강해지더라고요. 그 힘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의 경험으로 배운 건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하지 말자’였어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 매달리면 잡념이 늘고, 잡념이 늘면 저만 괴로울 뿐이에요. 그 후로는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골몰했어요. 나름 도가 튼 거죠.(웃음)
어릴 때부터 법조인을 꿈꾸셨나요?
아뇨. 사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이사를 자주 다녀 초등학교를 6번이나 옮겼죠. 그래서 무리에 잘 속하지 못하고 겉돌았어요. 그때마다 신경을 써주셨던 분들이 선생님들이었어요. 제 마음을 보듬어주셨던 분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를 아껴주셨던 선생님들처럼 교사가 되고 싶었죠. 하지만 원서를 내려고 했던 교대는 성적이 너무 높았고, 갈 만한 교대는 너무 멀어서 포기했어요. 그때 우연히 고시 합격 수기 책을 읽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꿈을 이룬 사람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마침 성적도 맞아서 법대에 진학했는데, 그때까지도 이렇게 오랫동안 고시생활을 할 줄 몰랐어요.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하신 건 언제인가요?
제가 84학번인데,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던 탓에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어요. 저도 공부 안 하고 맨날 시위 현장에 있었죠. 책보다 화염병을 더 많이 들던 시대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시 3관왕 선배가 학교에 와서 강연하는 걸 들었어요. 고시 하나 붙는 것도 어려운데, 무려 3개나 붙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그분이 살아온 과정과 역경을 극복하는 의지에 크게 감응했어요. 강연장을 나와서 집에 가는데, 이상하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드는 거예요. 곧장 어머니께 달려가서 “저 고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일종의 객기였죠.(웃음) 아들로서 어머니께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취직할 생각은 없었나요?
취직할 마음은 없었고 당시에 고민은 많았어요. 현실과 타협을 할까? 아니면 현실의 불의에 계속해서 맞서 싸워야 하나? 이런 고민을 스스로 많이 했어요. 어느 순간에는 회의감이 심하게 왔어요.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서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절에 들어가서 스님이 되려고도 했어요. 그때 주지 스님이 절 보고 딱 한 말씀만 하셨어요. “돌아가거라.” 스님의 눈에 제가 설익어 보였던 거죠. 돌아와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고시였어요. 어머니께 철없이 부린 객기는 이미 일종의 맹세가 됐죠. 이후 본격적인 고시생활을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스님과 다르게 반대를 안 하셨어요. 반대하셨으면 제 인생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몰라요.
고시 공부가 분량이 방대하고 어려운 시험이잖아요. 처음 공부할 때 어떠셨나요?
공부를 즐겼어요. 형사 사건이 재미있었어요. 형사 사건은 증거를 수집하고 범인을 찾아내야 하잖아요. 이렇게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나가는 작업이 흥미로웠어요. 어려워도 그 재미 하나로 버텼던 것 같아요. 남들은 어떻게 견뎠느냐며 궁금해했지만, 기질적으로 골방에 앉아서 책을 보는 것이 저랑 잘 맞았어요. 또 검찰 수사관이 정말 되고 싶었어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저항심을 직업적으로 잘 풀 수 있는 직업으로 보였거든요. 수사관이 되어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나 부정부패를 없애고 싶었습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공부를 시작할 때는 동아대 고시반에서 생활했던 터라 생계 걱정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어요. 심지어 치약이나 칫솔도 살 필요가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아내와 결혼하면서부터는 달랐어요. 딸린 식구가 있는 가장이었으니 무엇이든 해야 했죠. 공부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요. 막노동부터 시작해서, 아파트나 학교 경비원도 하고, 심지어 치킨집도 운영한 적이 있어요. 치킨집을 2년만 더 했으면 아파트 한 채는 샀을 거예요. 당시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 있어 마음이 늘 허전했어요. 그래서 치킨집을 접고 다시 도전했어요.
주위에서 만류하는 분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그만두라고 한 분들이 많았죠. 하지만 절 믿어주는 가족이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늘 행동으로 보여줬어요. 말은 신뢰하기가 어려워요.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말보다 정확한 행동이 필요하죠. 행동은 행동으로 끝나면 안 돼요. 결과를 만들어야죠. 생계를 위해 궂은일을 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어요. 가장으로서 무책임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어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 요행을 좋아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봐요. 최선을 다하는 순간만큼 값진 시간은 없어요.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과정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결과를 떠나서 의미가 없어요.
변호사님께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요?
늘 고맙고 한편으론 미안하죠. 합격하고 나서 딸이 여름방학 때 번 알바비로 구두를 사줬어요. 일종의 합격 선물이죠. 시장에서 산 저렴한 구두를 신다가 처음으로 백화점 가서 구두를 골랐어요. 너무 비싸서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났어요. 좀 싼 곳에서 사자 하고 갔는데, 백화점에서 처음 본 그 구두가 계속 아른거려서 결국 덜컥 사서 돌아왔죠. 딸에게는 늘 미안해요. 못 해준 것이 많아서 마음의 빚이 있어요. 살면서 계속 갚아나가야 할 것 같아요. 한편으론 일찍 철이 든 딸이 대견하고 고마워요. 딸의 바람처럼 이제는 이 구두를 신고 꽃길만 걷고 싶어요.
못 이룬 꿈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 분들에게 한말씀해주세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절망은 대체로 구체적인데, 행복은 피상적일 때가 많아요. 행복을 좇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많고요. 중요한 건 결국 하루를 살아내는 자신에게 있어요. 목표를 정하고, 하루를 계획하고, 실제 행동으로 조금씩 옮겨보면서 자신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해요. 삶은 늘 변수에 흔들리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저도 그랬어요.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포기에 가까워요. 그렇다고 저처럼 끝까지 해보라는 말은 못하겠어요. 다만 삶의 행복을 포기하는 방향이 아니길 바라요. 꿈이 있다는 건 일종의 축복이잖아요.
사람들은 본인보다 일찍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다. 난 무궁화호처럼 더디고 느린데, 남들은 KTX처럼 빠르게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바심이 앞서고, 조바심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KTX에서는 무궁화호처럼 오래된 간이역 풍경이 주는 낭만을 즐길 수 없다. 과정이 더디고 느려도 방향이 맞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설령 결과가 좋지 못해도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권진성 변호사는 남들과 비교해서 많이 늦었다. 하지만 비관하지 않았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우직하게 달렸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종착역에 내렸다. 그의 여정은 무궁화호처럼 더디고 순탄치 않았지만, 간이역의 낭만을 즐기듯 계속해서 의미를 찾으며 달렸다. 오랜 시련 끝에 결과를 이룬 그는 꽃으로 비유하면 추운 겨울에 화려한 꽃잎을 보여주는 동백이다. 딸이 사준 구두를 신고, 오랫동안 그가 동백꽃 같은 길을 가기를 바라며 그와 어울리는 시 한 구절을 공유하며 마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봄길’ 中 >
10여년 전 여름, 한 사내가 한과 공장의 사무실 안에서 비닐 봉투에 든 상추 잎사귀 수십 개를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공장 인부들은 기이한 그의 행동이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내가 사장인 탓에 모두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의 열정은 남들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왔고, 그래서 그는 한과에 미친 한과광인(韓菓狂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그런 그를 명인(名人)으로 부르기도 했고, 한과명장(韓菓名匠)이란 칭호도 부여했다.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金圭欣·60) 관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자취방 집주인의 강권에 나간 맞선자리. 찻집에서 만난 상대는 체구가 자그마한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신문지에 싼 무엇을 그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약과였다. 서울 월곡동에서 한과 공장을 하던 부모 몰래 싸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타오른 사랑은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내미는 약과 뭉치는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하는 용매 역할을 했다.
경상북도 영덕의, 한과가 귀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의 청년 김규흔에게 약과는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 매달 나오는 월급을 아끼려고 크림빵 하나에도 큰맘 먹어야 했던 그에게 그 약과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김규흔 관장은 어릴적 한과와의 추억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릴 적 한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명절 때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시장통에서 산 약과나 넓적한 한과, 빨간 옥춘 사탕이 전부였죠. 때때로 배가 아플때 할머니께서 약이라며 과자를 물려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과가 발효식품이라서 그 장점을 체득해서 아셨던 것 같아요.”
한과공장을 하던 처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운명 속에 한과가 등장하게 만들었다.
“공장을 맡아 운영하던 처남이 군대를 가게 되자, 처가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래서 다니던 제약 유통회사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해 보니, 한과가 사업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친 듯이 다른 분야에서 일을 했던 제 눈에 한과 만드는 사람들은 너무 대충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 계산으로는 검은깨를 하루에 2~3가마는 볶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걸리 마시랴, 담배 태우느라 겨우 1가마만 볶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대목을 지나면 다들 목돈을 만지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한과 시장에 눈을 떠가던 즈음, 처남이 제대해 그의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3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셈이 밝았던 그에겐 충분한 준비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직원 한 명만을 데리고 월곡동에서 조금 떨어진 월계동에 공장을 차렸다. 성공한 회사를 보니 모두 궁(宮)이나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에 회사 이름은 ‘신궁(新宮)’으로 지었다. 1981년의 일이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다들 큰 공장 눈밖에 날까봐 소규모 업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오랫동안 어렵게 안면을 익히고, 신용을 쌓은 후에야 좌판 아래에 한 두 박스를 숨겨두고 몰래 팔아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중부시장 같은 큰 시장 대신 월계동, 이문동, 장위동, 석관동을 돌면서 구멍가게에 외상 거래를 했죠.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직접 돌았습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에는 이런 성실함과 함께 남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 팔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시장을 휘어잡던 큰 회사들은 늘 만들던 대로 만들어도 쉽게 팔아치울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보통은 국화 모양으로 만들던 것을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로 바꾸어 만들었습니다. 약과판(藥果板)의 도안부터 제작까지 제 손으로 직접 했습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년사업가였지만, 그에게는 사방 천지가 교실이고 교과서였다. 외화와 함께 외국 문물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 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낮에는 배달하는 자전거에서, 늦은 밤 귀가길 버스 차창 너머로 만나는 세상은 한과 생각으로 가득찬 그에게 다양한 도형과 화려한 색상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노력이라도 알아본 것일까. 하늘이 도와줬다. 1984년 한과시장의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물난리가 났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한강물에 쓸려 내려가 버리자, 시장에 물량이 동이 났다. 덕분에 한과 시장 큰손들에게 외면받던 신궁전통한과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상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신경썼던 것은 신용이었습니다. 매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일종의 신용이었죠. 상인들이 신제품을 기대하도록 만들고, 거래처들이 다른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무기를 쥐어주려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흔적은 그가 2008년 건립한 한과문화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무로 직접 만들던 약과틀을 주조방식을 활용해 금속으로 대체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원형 틀을 만들었던 기록들은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한과문화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것들은 한과의 역사이자 그의 역사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상추 실험’도 답습을 거부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성향을 잘 나타내는 일화 중 하나다.
“보통 한과 공장들은 여름에 문을 닫았어요. 1년 매출의 90퍼센트 정도는 설과 추석에 모두 팔려나가기도 하고, 매출이 적은 여름에 한과를 만들어봤자 상해서 돌아오는 것들을 반품받기 바빴으니 아예 생산 자체를 거절한 것이죠. 거래처용으로 돌리는 스티커에 여름에는 만들지 않는다는 문구를 박아 넣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여름에도 한과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싶어, 포장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포장지를 놓고 가장 빨리 시드는 상추로 실험을 했던 것이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핵심은 ‘산소투과율’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 모든 공장들이 사용하는 포장재질은 한과를 쉽게 상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유통기간 6개월이라는 혁신적인 한과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에는 한국식품연구원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쌀겨에서 추출한 ‘감마오리자놀’을 한과에 첨가해 기름의 산화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을 특허로 인정받기도 했다.
신궁전통한과가 궤도에 오르면서 그가 찾은 곳은 대학이었다. 1995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시작으로 11개 대학원을 쉬지 않고 다녔다.
“대학원서 유통의 변화와 혁신을 미리 체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통시장이 쇠락하고, 편의점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중심의 유통체계가 도입될 것이라는 것을 배워 대비할 수 있었죠. 늘 우리 것을 따라한 미투상품(모방한 유사제품)으로 괴롭히던 한과공장 사장이 자기네 제품을 유통시켜 달라고 제게 사정할 때 통쾌하기도 하면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대학 학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흥대학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해 작년 2월 졸업했다. 아들보다도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웬만한 교수보다도 많은 나이에 사회적으로 알려진 터라 손가락질이 무서워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한과의 세계화를 위한 과학적 지식과 계량화 등의 바탕이 됐다.
김규흔 관장의 한과에 대한 사랑의 집약체는 역시 한과문화박물관이다. 포천 산정호수 인근에 지어진 이 박물관을 한 번 둘러보면 그의 한과에 대한 철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체험을 위한 공간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라 하니 반색하며 설명한다.
“맞습니다.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한과를 체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릴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박물관을 바탕으로 한과 전문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인력 배출에도 앞장섰다. 한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시장이 커지고,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다.
“태권도가 세계적 스포츠가 된 것도 결국 태권도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보급했기 때문이죠. 한과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과 전문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 300명의 전문가를 배출했습니다. 또 박물관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간부 가족을 대상으로 한과 교육을 진행했는데, 한미연합사령부로 전출 간 장교를 통해 미군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까지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그가 한과를 만들어 오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도 2000년 서울에서 열린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에게 그의 한과를 맛보게 한 것이다. 이런 세계화의 끝에는 한과의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있다. 한과를 단순한 음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한과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차례와 제사, 명절 때마다, 우리네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늘 함께하면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습니다. 그중 지금 저희가 재현하는 것이 160가지 정도 되고요. 이런 풍성한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작년 한과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김 관장의 말을 듣다보니 멋진 외국 호텔의 디저트로, 세계 과자들이 모여든다는 일본의 답례품(미야게, みやげ) 시장에서 우리의 한과가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하게 된다.
30년 회사생활 후 찾아온 은퇴는 원호남(元鎬男·54) 팀장에게 ‘추락’의 기억이었다. “삶에서 튕겨져 나온 심정이었다”고 했다. 보험설계사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할 곳’이 필요했다. 현재 원 팀장은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50대 남성 보험설계사 조직) 간판 컨설턴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설계사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에 감사하게 된 점이 가장 보람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교보생명의 시니어클래스 사무실을 찾았다. 빌딩이며 책상이며 회의실과 커피머신까지, 도시의 흔한 사무실 풍경이었다. 다른 점은 업무를 보는 남성들이 모두 여느 회사의 임원급도 넘어 보이는 50~60대라는 점이다. 이곳에서 원 팀장을 만났다. 머리모양과 옷차림이 단정했다. 말투와 몸가짐에서 오랜 기간 회사생활의 내공이 느껴졌다.
“30년간, 뭐, 나쁘지 않은 직장생활 했죠.” 다소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라마 의 무대였던 ㈜대우(현재의 대우인터내셔널)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1985년부터 10년간 일했다. 이후 내셔널호주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서 20년간 근무했고 통합 SC제일은행에서 본부장을 지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번듯한 직장이었다.
30년 회사원에게 은퇴란…“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
은행을 나온 것은 2013년 3월, 교보생명에서 설계사를 시작한 것은 같은 해 12월이었다. 7개월간 ‘자연인 원호남’으로 지냈다. 당시 심경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문제를 하나 냈다. “가장의 실직을 가족 외에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세탁소 아저씨입니다. 양복을 맡기지 않으니까요.” 은퇴 남성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시선이 먼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대낮에 밖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오는 동년배 남성들을 관찰자로서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아! 이제 보니 내가 저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그룹에 속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명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낯설었다”거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더라” 등으로 돌려 말했다.
어둡지 않은 말투였지만 대화 중간에 “은퇴는 추락이잖아요”라든지 “반복적인 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인 거죠” 등의 표현을 섞었다. 30년 동안 잘 나가던 회사원으로 갖고 있던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가장으로서, 남성으로서 그가 느꼈던 상실감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보내준 ‘노란 화살표’…새 길 앞에서 짐을 비우다
교보생명에서 직장경력 20년 이상인 50대 은퇴자를 보험설계사로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은퇴 전의 그였다면 눈길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보험세일즈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고정관념때문에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은퇴시점과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출범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현업에서의 지식과 경험을 살리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마음을 담금질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담아뒀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도보여행이었다. 원 팀장은 짐을 줄이기 위해 생필품인 비누조차도 반으로 자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필요한 생필품만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그걸 또 줄이고 있더군요. 인생도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비우는 게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현업시절’의 기억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려놓을 용기를 갖게 됐다.
여행의 백미는 유명한 ‘노란 화살표’였다. 갈림길마다 순례객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산티아고의 명물이다. 그는 “화살표를 보면서 우리 인생에도 이런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도보순례가 힘든 여정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에 비하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라고 말했다.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보험설계사 위촉식 전 날 딸 다은(26)씨가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나 (회사에) 합격했어’. 원씨는 ‘이게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아내의 문자도 그의 결심에 큰 응원이 됐다. ‘다은이 아빠가 생각하는 대로 하세요. 뜻대로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지난 삶 건방졌다는 반성…인간관계에 감사하는 법 배워”
종합상사와 은행에서의 경험이 상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됐다. 하지만 판이한 업무방식은 바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힘든 점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인을 만나서 보험의 ‘ㅂ’자도 꺼내지 못하고 헤어진 적이 많았죠. 실제로 교보생명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얼굴표정이 확 달라지는 지인도 있었고요.”
그 후 2년간 원 팀장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니어클래스 내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설계사 중 한 명이다. 올해의 경우 여러 실적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설계사로서 안정적인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보험설계사들의 명예의 전당 격인 MDRT(백만달러 원탁회의) 자격을 얻게 된다.
초창기 느꼈던 두려움은 극복한 걸까. 원 팀장은 “목적을 가진 마음이야 변함없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대답했다. “지난 삶이 굉장히 건방졌던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제한된 만남에만 머물렀던 거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고 그의 걱정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보험계약이 이뤄진다면 감사한 일인 거죠.”
덧붙여 원 팀장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금전적인 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등 지인의 어려움을 적은 메모는 그날 그날의 기도문이 된다. 그에게 지금의 일을 시작한 뒤 가장 보람있는 부분을 물었다. 원 팀장은 “인간관계에 감사할 줄 알게 된 점이 보람있습니다. 저 스스로 많이 겸손해졌고, 그런 변화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 원호남 시니어클래스 팀장
1961년생, 광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 MBA, 1985~1995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1990~1994 대우 홍콩법인, 1995~2002 내쇼날 호주은행(NAB) , 2000~2002 NAB 뉴욕지점 근무, 2002~3013 스탠다드차타드(SG) 은행, 2013~현재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팀장
문숙(文淑·61)이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를 향한 놀라움은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젊은 세대들로부터 먼저 왔다. 그녀의 모습에는 분명 세월을 증명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나이가 예순에 달했다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단순히 ‘동안’이라고 표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종의 생명력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출연하며 무려 38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인간’ 문숙이 밝히는 남다른 젊음의 비결과 삶의 철학.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우리는 문숙을 흔히 ‘배우’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배우 문숙’이라는 명칭에 손사래를 친다.
“영화배우요? 40년 동안 안 했는데, 갑자기 영화배우 노릇을 하려니까 힘들어 죽겠어요(웃음). 하긴 내가 한 게 배우밖에 없으니까 한국에 오면 배우라고 하는데, 배우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웃음) 갑자기 ‘선배님’, 이러면 내가 뭐 어색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웃음).”
인터뷰 내내 문숙과 같은 자유인을 만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든 훌훌 털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거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름 붙일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지금 이 순간을 체험으로 사는 것밖에 없기에 잡을 만하고 걸릴 만한 게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 중의 강박은 바로 아름다움일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혹은 더 아름답게 되기 위하여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마인드 컨트롤을 매일 하며 살고 있다. 이에 관하여 문숙은 철저하게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라고 조언했다.
“사람들이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데 문제가 있어요. 그걸 확 놔버리면, 그만큼 나이에 맞게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괜히 그 에너지를 젊어지려고 애쓰는 데 쓴다는 거죠. 그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늙어 보이면 어때요. 주름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주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주름은 내가 제일 많을 걸? 대한민국 여자들 중에서.(웃음) 나이가 들면 지혜가 생기는데, 시간이 나에게 마련해준 것에 대해 반항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노송이 젊은 소나무에 비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는 눈이 없는 거죠.”
그녀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은 문숙 본인이 가진 아름다움과도 일치한다. 혹시 그렇게 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아직 일반적인 삶의 입장에 서서 물어봤다.
“오히려 노력을 덜해야 할지 않을까요? 난 한국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피부에 쏟는 노력을 다른 데로 돌리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걸요. 그건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고 있다는 거죠.”
문숙은 해외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으며, 그만큼 아름답게 보였다고 말했다. 그 생명력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에 비해 스스로에 대해 자신 없어 하는 게 안쓰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원래 우아해요. 왜냐하면 우주의 기운이 우아하고, 우리는 그 기운의 소산물이기 때문이에요. 스스로를 우아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 건, 디스커넥트(단절)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과 분리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의 본질을 찾아서 접속시켜야 해요. 그러면 우아해질 수밖에 없어요. 꽃도 새도 우아한데 하물며 인간이야, 우아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돼요.”
목적 없는 생활의 기쁨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아픔과 익숙한 사이가 된다. 오랜 기간 수행한 요가 수련자로서 문숙은 아픔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요가는 자신과 함께 하는 수행이며 그동안 쌓여 있던 침체된 기운들을 정리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아프면 행운이에요. 왜 아픈지 그 원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까. 그래서 아픈 건 운이 좋은 거죠. 요가를 하면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어서 아픔 속으로 들어가게 해 줘요. 그 전에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모든 게 밖을 향했어요. 목적의식, 욕구 등등. 그러다보니 제 몸은 혼자 살아남아야 했죠.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다른 데로 가 있으니까 몸이 혼자 움직여야 하니 아프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프면, 내가 아픔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아요.”
자신에게서 어긋난 것을 고치고 나다움을 찾는 것. 문숙의 철학은 그렇게 간명하면서도 강직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성공을 위해 설정해야 하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목적’이란 진정한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목적을 갖고 사시잖아요? 그런데 목적을 갖고 살면 꼭 사고가 생겨요. 이루면 ‘이게 아니야, 허전해’ 하는 생각이 들어 또 찾게 되고. 그래서 저는 목적 자체를 버리고 체험 그 자체로만 살아요. 그렇다 보니 기대가 없기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죠. 그때그때 살기 때문에 현재에 더 충실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커질 수 있어요. 오히려 순조롭게 살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은 ‘편안하다’는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으면 괴로워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지 상황은 변하지 않아요.”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는데 왜 기대를 해요?”
문숙은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지금 다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 자체에 대해서, 체험자로선 적극적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이진 않다는 그녀의 말을 충족시키는 확신이었다. 그토록 확신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부러웠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졌다.
“불행도 우리가 만들어낸 거예요. 불행과 행복은 중요한 게 아녜요. 그건 그 사람들 자신이 만들어낸 거죠. 컵에 물이 반 컵 차 있을 때, 그걸 반 컵밖에 없다고 보느냐 반 컵이나 있다고 좋아하느냐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행복에 너무 집중하면 불행도 커져요. 그래서 쉬이 행복하다고 떠드는 사람은 그만큼 그림자가 큰 거죠.”
행복도 애쓰면 불행이 된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자연 그대로의 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때,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직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 삶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기대를 하느냐고 반문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지금은 애써서 하는 일이 없어요. 그리고 애써서 하면 잘 안 돼요. 자신이 잘될 일은 애쓰지 않아야 나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반면 자신이 잘하는 일은 오히려 에너지가 생겨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확연해져요.”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해져요
문숙은 이시형 박사의 힐리언스 선마을에서 요가와 요리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라는 책도 낸 자연식 전문가로서의 그녀만큼 지금까지 접한 그녀와 어울리는 일도 없을 듯했다.
“안 먹고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남의 생명을 섭취하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시금치가 나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났겠어요? 그러니 먹어야 할 게 있고 안 먹어야 할 게 있는 거죠. 이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고 저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죠. 자연식이라고 좋다고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하면 그게 또 스트레스가 돼요. 내가 진짜 필요한 게 뭔가가 중요해요. 우리는 오관(五官)의 노예가 되어 있잖아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더 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 기도하는 마음이 자연히 생겨요. 그리고 몸이 먼저 알게 돼요.”
문숙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를 물어봤다. 그녀답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와 지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애해야지, 남자 보면 두근거리지, 아이 낳아야지, 아이 먹여줘야지…. 복잡했어요. 인류 종족을 위한 역할을 하느라고 나도 모르게 아주 힘들었어요(웃음). 이젠 나만 행복하면 돼요. 내가 우울하면, 내 옆에서 우울해할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내가 행복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어요. 누군가를 행복하게끔 해주는 게 아니라. 이젠 그게 가능하잖아요?”
그녀는 그동안 남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걸 남을 위해 살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이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복잡한 삶이 내 몸을 떠난 거예요. 그때 기억나시죠? 모든 게 아름다웠잖아요. 모든 게 가능했고.”
“난 지금 덤으로 사는 거예요.”
살아있으니 하루하루가 괜찮다고 말하는 문숙의 맑은 눈은 흡사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삶의 막바지에 도달했음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사람의 눈이 저토록 맑고 생명력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역설적인 느낌이었다.
“60살 넘었잖아. 난 덤으로 사는 거예요. 오행에서 육십이면 다 산 거니까.”
‘다 살았으니 덤으로 살고 있는 중’이라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에너지를 보면 던질 수밖에 없는 다소 짓궂은, 아직도 이만희 감독의 얼굴이 기억나냐는 질문이었다.
“이만희 감독님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해요. 60평생 그 분 처럼 멋진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웃음).”
SHE IS…
영화배우 문숙씨는 고교 재학 중 연기자로 데뷔해, 스무 살에 영화 ‘삼포 가는 길’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대종상 신인상을 받은 그는 23세 연상인 고 이만희 감독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결혼 1년 만에 병으로 숨졌고, 그는 미국으로 갔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고, 병원에서는 치료할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으로 묵언명상 수련을 떠났다.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산속에서 매일 열네 시간씩 요가와 명상 수련을 했다. 수행을 하며 건강을 되찾은 그는 음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연치유식 요리연구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2015년 자연식 치유가로 검정색 고무신, 탐스러운 은회색 머리카락, 짙고 바른 눈썹, 자연 색깔의 쇼울을 걸치고 우리 곁으로 왔다.”
1990년대 중반 CF 스타였던 CEO가 있었다. 바로 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CMG) 고문이 그 사람이다. 당시 LG패션 사장이었던 신 고문은 멜빵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20여 년 동안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경력,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이자 전문 공연 기획자, 미술 컬렉터, 패션 경영 교육자, 전 예술의전당 사장 등등 신 고문의 삶은 문화와 예술로 채워진 드문 경영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신홍순(申弘淳) CMG 고문은 1941년생, 올해로 74세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 그 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직업인 동시에 유희의 영역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까. 그는 음악과 미술은 기업에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가고자 했던 분야라고 말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끄셨던 고(故) 임원식의 친구였던 선친께서 미술과 음악을 좋아해서 컬렉션도 갖고 계셨지. 선친께서 나이 6~7세부터 연주회나 전시회 등을 자주 데리고 다니셨고, 이후 대학에 와 재즈와 팝 등으로 영역을 넓혔어요. 아내를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 얻게 된 것도 그렇고.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게 좋아서 전시회를 많이 다녀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돼요.”
신 고문의 선친은 동일방직의 중역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을 기업에서 구매하여 청와대로 보내곤 했다. 그의 선친도 그런 일을 했었고, 그 덕분에 화단에서도 그의 선친이 꽤 알려진 이름이어서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 환경이 신 고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LG패션 대표이사 시절 갤러리 운영, 미술작품 전시, 재즈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이미지를 높이는 ‘패션마케팅’을 펼쳐왔다. “패션 자체가 색상과 디자인 등 예술적인 감각과 마인드가 필요한 분야인 데다 크게 보면 같은 문화산업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패션과 예술은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감성’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창작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죠.”
재즈파크, 한국 재즈 역사에 한 획을 긋다
재즈마니아인 신 고문은 제 162회를 맞은 ‘재즈파크’ 콘서트를 1세대 정통재즈에서부터 라틴, 퓨전 재즈 등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신구를 아우르며 매회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유명공연으로 만들어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는 2002년 3월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입장료 1000원의 재즈파크 콘서트를 꾸준히 열어온 ‘공연기획자’다. 또한 ‘재즈파크빅밴드’라는 18인조 재즈 빅밴드를 구성, 활동하고 있는 예술단체 매니저이기도 하다. 유열의 재즈파크빅밴드 활동으로 재즈파크빅밴드가 국내 최고의 재즈빅밴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재즈공연을 후원해준 신 고문의 감회는 남다르다.
“재즈 불모지였던 한국에 재즈의 토대를 마련한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재즈 1세대들이 설 변변찮은 무대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무대다운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듣고 재즈 1세대들에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척박한 한국 재즈 환경 속에서 재즈의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이끌어온 ‘재즈파크’가 13살이 됐다. 이는 재즈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재즈 공연을 진행해온 신 고문의 재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이다.
“수익을 남기는 공연이 아니라 재즈파크를 통해 재즈인들은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생겼고, 대중에게는 재즈와 소통할 수 있는 가교가 마련됐다는 것이 의미였죠. 또한 재즈파크를 통해 선·후배 재즈 아티스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팀이 결성되기도 하는 등 침체된 재즈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즐거움이었어요.”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얻은 삶의 즐거움
신 고문이 최근에 공들이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그의 조상, 그의 가계에 대한 연구였다.
“선친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셔서, 그 나머지 일의 뒷정리를 하는 게 있어요. 아마 한국처럼 족벌이라는 걸 각 성씨들이 갖고 있는 나라가 없을 거예요. 바로 그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죠.”
신 고문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라는 문인을 꼽았다. 영·정조 시절을 살았던 신광수(1712~1775)는 ‘동방의 백낙천’이라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신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을 쓴 춘원 이광수의 본명은 이보경으로, 그가 필명을 이광수로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신광수의 작품들을 알게 되면서라고 할 정도로 대가의 경지에 도달했던 문인이었다.
“얼마 전에 평양에서 온 극단이 하는 악극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석북 선생의 한시 창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조상을 연구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다
신광수라는 걸출한 조상의 발견은 조상의 활동을 시대별로 자료를 취합하여 평전을 만들고 번역을 싣는 작업의 결과였다. 신 고문은 조상의 업적을 정리하는 그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애착을 굉장히 많이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분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작품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르게 다가오죠. 그리고 자기 조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그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모여서 일 년에 세 번 정도 서로 집안 행사 때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고. 어느 집에서 자료를 가져 와서 ‘1450년대 자료를 보라. 너희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모여서 회의하고 시도 읊고 쌀도 나누고 했다. 1500년대 이후의 교류는 이미 나왔는데 그 이전 건 처음이다’ 하는 내용이 나오면 그쪽과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새로운 게 창조되는 기분을 느끼니 자꾸 빠지게 되더군요.”
그런 인연과 인연들이 모여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이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석북 신광수 선생의 시로 공연을 열다
“조상의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한문을 배우긴 배웠지만 깊이 있게 배운 적은 없어 한학자들이 부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한학자가 250여 명 되는데 그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술대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신광수 선생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하자고.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공연은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 알거든? 어? 그거 얘기가 되네. 돈만 있으면 그 다음 방법은 내가 갈 길을 아니까.”
신광수는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다. 고향에서 한양에 오긴 했지만 집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그게 하필 노론이 주로 거주하던 계동이었다.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살다 보니 심심하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을 넘어서 명동, 당시에는 저동이라고 불렸던 곳을 다니곤 했다. 지금의 평화방송 빌딩에서부터 한옥마을 쪽으로 하여 회현동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조상의 기록들을 신 고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누비고 다녔던 동네가 그쪽이니, 공연 장소는 한국의 집 전통예술극장에서 하자고 했죠. 거기가 국악 공연을 하는 곳인데 200여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인 가곡 예능보유자 김영기 선생을 만났어요. 이런 것 좀 하려는데, 당신이 제일 적임자니 해주십사 부탁을 했죠. ‘당연히 해야죠’라며 얘기가 척척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하게 됐지.”
자신의 조상의 업적을 발굴하여 그걸 현대에 살아 있는 현상으로 만들어낸다. 신 고문이 말한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는 말을 납득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야말로 시니어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가 젊었을 시절이라면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 아니던가.
“나도 젊었을 때는 조상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니 그 윗대에서 알아봐야 할 분들이 새로 생기고, 다른 집안과의 연관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집안의 기록들도 연구하게 됐어요.”
고향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시간
신 고문은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에 활기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향과 가까워지더라는 것이다. 그의 고향은 모시와 소곡주로 유명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이다.
“우리 자식들은 고향에 관하여 기억하는 게 없어요. 가서는 수세식 변소가 없다고 난리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선 다신 안 가더군(웃음).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고향 현지의 문화원과 교류하게 되고, 마침 문화원장 중에서 우리 집안에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화원에서 책을 발간하는 데 도움도 주시고 날 초청도 하고. 그렇게 가까워지니 군수도 알게 됐어요. 2013년이 서천군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였죠. 그래서 600주년 기념행사를 하려는데 제게 총 준비위원장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회의 진행하면서 아이디어를 넣고 그랬죠. 그중 금난새씨와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게 있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전국에서 300명의 청소년이 모이다 보니 행사하던 날 그 300명의 부모들이 모두 서천에 오더군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신 고문은 사람들이 두루 도우며 더불어 사는 그런 모습을 좀 보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점점 심해지는 개인주의에 대한 경계를 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고향과 더욱 가까워진 신 고문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하는 사업 중에서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라고, 발레나 연극 같은 공연을 영상화하여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 클로스업해서 테크닉까지 보여주고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걸 문화적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거죠. 알아보니까 큰돈이 안 들어도 되겠더라고. 그래서 고향 문화원장에게 가서 내가 후원할 테니 해보고자 했어요. 회관 사용 허가가 떨어졌고 ‘호두까기 인형’을 가져갔죠. 군부대 사병들, 학생, 일반인들이 일과 끝나고 구경하도록 했습니다. 문화원장이 사람이 올까 해서 걱정했는데. 그 영상이 한 시간 반 동안 하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더군요. 다들 집중해서 보는 거지. 그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 보람이 깊었고.”
인생 후반전의 밝은 본보기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멋지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신 고문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자신이 꾸준히 쌓아왔던 커리어에서부터 비롯된 것 외의 다른 이유에서 시작되는 부분도 있어 보였다.
“우선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자신이 일을 좀 만들려고 할 때 일을 찾는 기본은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열정이죠. 그런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으니까 그 열정을 원하는 대로 행사하려면 같이 일할 사람을 찾아서 유도해야 해요. 제 친구 중에 대학을 안 다녔는데 한문을 배운 친구가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도 서예를 잘했고. 그 친구가 한문학에 자질이 있다는 걸 알았죠. 성격도 괜찮아서, 나하고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씩 목표가 주어지면서 달라지더군요. 요즘은 그리 말해요. ‘형 아니었으면 내가 요즘 뭔 보람으로 살았을까.’”
신 고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 세상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능력과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신 고문은 그들을 알아보고 모아서 도화선으로서, 불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득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람을 느껴야 일이 돼요. 나이를 먹으니 그런 쪽으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게 좋더라고요(웃음).”
호기심, 열정 그리고 친구 많은 것이 그가 웰에이징 하며 사는 비결이었다.
김창렬(金昌烈·66) 한국자생식물원장은 식물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유명인이다. 토종 야생식물을 재배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업화했고 토종식물만을 소재로 식물원을 설립해 강원도 평창군의 명소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물원이 3년째 문을 닫고 있다. 김 원장은 갑자기 전국일주 마라톤을 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 봤다.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참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식물원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국립공원 입구 산자락에 위치한 한국자생식물원이다. 1999년 6월 국내 1호 사립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와 들풀 약 수천 종이 테마, 계절별로 심겨 있다. 약 5만 평에 달하는 식물원 산책로에서 갖가지 한국 자생식물을 관람하다 보면 우리 식물에 대한 열정이 도처에 묻어난다. 이곳을 만든 김창렬 원장이 일궈온 삶도 식물원처럼 독특한 구석이 있다. 독재에 맞섰던 정치학도 청년은 문득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풀 농사를 지었다. 달리기도 시작했다. 화재로 식물원을 휴관해야 했던 2010년에는 마라톤으로 전국을 일주하기도 했다. 가을이 내리는 평창에서 그를 만나 그의 삶에 대해 들었다. 66세 김 원장의 ‘인생 마라톤’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뜨거웠던 운동권 청년, 옥살이 후 농사를 택하다
한때는 그도 누구 못지않게 가슴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 197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그는 소위 ‘운동권’이었다. 어수선한 시국 속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당해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를 몇 군데 두드려봤지만 꼬리표가 늘 발목을 잡았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풀 농사를 짓겠다”며 강원도행을 결심했다. 그는 충청도 출신이지만 고향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떠밀리거나 도망치듯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결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할아버지도 농부였고 아버지도 농부였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자식은 농사꾼이 되지 않길 바라셨다. 내가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사회에 나왔다면 전혀 다른 길을 갔겠지. 하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결국 농사꾼이 되기로 했고, 이왕 농사를 한다면 배추, 무 같은 평범한 작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농사를 그분들과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김 원장의 고민은 ‘돈 되는’ 농사였다. 마침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 분위기로 국토공원화 사업이 한창이던 때였다. 외래종 일색의 원예종 보급에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외국 꽃을 들여와서 꾸며 두면 뭐하나. 한국에 오면 한국의 모습을 보러 오는 것 아니냐. 차제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꽃과 나무 중에서 예쁘고 관광가치가 있는 식물을 대량으로 재배해보면 돈으로 좀 바꿔볼 수 있겠다 싶더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결심을 밀어붙였다.
설악산 에델바이스로 시작한 소중한 추억
에델바이스(솜다리)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김 원장에게 에델바이스는 특별히 더 소중한 추억이다. 1980년대 설악산에 가면 관광기념품으로 설악산에서 채취한 에델바이스를 액자에 넣어 팔았다. 마침 영화와 대중가요 등에 에델바이스가 소재로 쓰이면서 많은 사랑을 받던 때였다. 장사하는 이들은 설악산의 에델바이스를 캐서 팔고, 당국은 멸종위기종 식물의 훼손을 막으려 하는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김 원장은 “에델바이스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산에서 캐오지 말고 대량으로 재배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면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설악산 상인들에게 수요조사를 해봤더니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가져오면 다 사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델바이스 씨앗을 채취하느라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연 20여만 개를 생산해 한 송이에 120원씩 팔았다. 이후 백리향, 구절초 등 다른 야생화까지 재배품종을 넓혔고 현재의 식물원도 일구게 됐다. 꽃말처럼 김 원장에게도 에델바이스가 ‘소중한 추억’이 된 셈이다.
“가장 뿌듯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돈하고 풀하고 바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풀 농사도 하나의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증명한 것이니까. 거창하게 말하면 고부가가치 농업분야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리고 전국적으로 자생식물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게 했다는 것. 한 분야를 먼저 갔다는 것. 이런 부분에서 지난 삶에 보람을 느낀다.”
불타버린 식물원, 문득 떠난 마라톤 전국일주
식물원이 화마를 입었던 2010년 한글날은 김 원장에게 떠올리기 싫은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식물원 전시장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다. 목조로 만든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했다. 바로 화재신고를 했지만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겨울을 앞두고 있어 공사도 어려웠다. 식물원을 복원하고 보수하려면 긴 시간 문을 닫아야 했다.
망연자실하며 멍해진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것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전국일주 마라톤이었다. 머릿속에 뭔가 새로운 생각을 채워 넣으려면 일단 머릿속을 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 마라톤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강원도에 터를 잡은 후 매일 오대산을 달리며 생각을 정리해 왔다. 식물원 운영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와 용기가 떠오를 것 같았다”고 말했다.
42.195km 풀코스를 정식으로 완주한 경험도 어느덧 100회를 넘긴 때였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됐다. 강원도를 향하던 날처럼 뒤돌아 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
장장 75일간 무려 1500km를 뛰었다. 식물원에서 출발해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중부와 임진각을 거쳐 다시 영동지역의 출발점까지 매일 평균 20km 이상을 달렸다. 한겨울의 추위, 눈보라와 싸우는 고단한 길이었다. 점점 피로가 누적됐다. 왜 뛰는 걸까. 그는 “오직 그만두지 않기 위해 뛰었다.” 당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새 도전, ‘식물원+숙박시설’ 복합 휴양시설 구상
마라톤 애호가들에게는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라는 지명이 꽤 유명하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 구간의 결승점 전 10km지점에 있는 언덕코스를 일컫는 말이다. 현재 김 원장의 인생도 바로 이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생식물원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휴관에 들어간 상태다. 김 원장은 “최근 몇 년간이 강원도를 처음 찾았던 때보다 어렵다”라고 했다.
자생식물원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원’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뒤부터다. 식물원이 가족들의 가벼운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자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여기저기서 많은 예산을 투입해 대형 식물원을 만들었다. 자생식물원의 관람객도 눈에 띄게 줄었다. 김 원장은 “인구에 비해 식물원이 너무 많아졌다. 몇 곳 없던 식물원이 지금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다. 적자운영을 하느니 새로운 변화를 구상해보자는 생각으로 식물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아직 뾰족한 답은 얻지 못했다. “전국일주 마라톤을 하면 뭔가 멋진 구상이 틀림없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라”. 김 원장이 머쓱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깊은 고심이 묻어났다. 최근 그는 식물원 부지 일부에 숙박시설을 조성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기자가 식물원을 찾았던 날에도 그는 숙박용 건물에 쓰일 외장재를 까다롭게 선별하고 있었다.
요즘 취미가 있는지 물었다. 김 원장는 “오로지 식물원”이라고 답했다. “초창기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물원을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대 정치학도처럼 빛나는 눈빛은 어느덧 고희(古稀)를 앞둔 그가 또 하나의 ‘에델바이스’를 찾길 기대하게 만들었다.
HE IS…
1949년생으로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짧지 않은 기간 옥살이를 한 후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한국 고유 자생식물 재배를 시작했다. 국내 1호 사립식물원인 한국자생식물원을 만들었으며 사단법인 한국자생식물협회 회장, 계간 발행인, 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노환규(盧煥奎·53) 전 의협회장을 만날 땐 의료제도와 관련해 특종이 될 만한 거침없는 발언을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주문을 던졌다. 오해도 많고 굴곡도 많은 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고 싶다고 했다. 할 말은 다 하는 그이지만, 막상 본인의 속내를 꺼내 놓으려니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 근처에서 가볍게 소주 한잔을 걸치고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중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해 말다툼 한 번 없이 약 3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이 믿기십니까? 제가 바로 산 증인입니다.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요. 모든 걸 받아줬던 아내 덕분이죠.”
중학교 3학년생 노환규는 과외 그룹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원래는 친구가 좋아하던 여학생이어서 그 둘을 이어주려 했는데 결국 친구랑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느 순간 마음에 쏙 들게 됐다. 고 1때 결혼을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장기적인 구애에 들어갔다. 노환규는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고 그 여학생과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곤 1986년 졸업과 동시에 결혼에 골인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과외를 같이 하던 중학생들이 중년의 나이가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부 금실이 좋은 것은 온전히 아내의 포용력 덕분입니다. 전 젊은 시절에 모든 결정을 순식간에,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곤 했어요. 교만했던 시절이었죠. 자기중심적인 인간, 그게 저였다고 생각해요. 제 아내가 아니었다면 부부싸움을 해도 수백 번 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결혼 전 계획했던 미국 이민을 갑자기 포기했던 일, 2시간 고민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아주대병원으로 이직을 결정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가야했던 일, 교수직과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비즈니스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던 일.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상의 없이 결정 후 아내에게 통보하곤 했던 그였다. 그런 그를 묵묵히 응원하며 살아온 그녀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넓었다.
사망판정, 그래도 잘 자란 아들
아내의 임신소식에 깨가 쏟아지던 신혼 초기였는데 문제가 생겼다. 임신 5개월째, 아내의 배가 이상하게 오른쪽만 불러 왔다. 초음파 검사 결과, 자궁이 둘로 나뉜 ‘쌍각자궁’으로 판정됐다. 당시 흉부외과 인턴에 불과했던 노환규는 겁이 났다. 쌍각자궁은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질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부인과 교수를 찾아갔지만 안정을 취하라는 말만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화장실에서 양수가 터지고 몸 밖에 탯줄이 나와 있었다. 곧바로 응급실에 찾아갔지만, 결국 아이는 사망 판정을 받게 된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 말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인턴 신분이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죠. 응급수술이 지체돼 태아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교수는 뱃속에서 아이를 꺼내자마자 수술실을 떠났어요. 하지만 간호사가 사망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해 신생아 중환자실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뇌출혈도 판정받게 됐고 담당 교수는 포기를 권했습니다. 그때 인큐베이터의 산소 공급도 중단했습니다. 부모님은 장례까지 준비하고 계셨죠.”
그러나 사망 판정을 받았던 노환규의 아들은 걱정과는 달리 잘 컸다. 단지 걸음마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을 뿐 건강하게 자랐다. 행운이었다. 아들은 이제 29세, 멋진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의사가운 입은 채 의료사고를 말하다
아들이 사망 판정을 받았던 순간은 그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조금만 더 성실한 진료를 해줬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의료사고에 대한 생각이 다른 의사들과는 달랐다. 같은 의사라고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숨기기만 한다면, 그게 의료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테고 분명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무서움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의사총연합 대표로 일하던 2011년, 의사 가운을 입고 지방 모 대학병원 앞에서 의료사고 해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감행한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항암제를 바꾸어 주사하는 바람에 사망한 아홉살 백혈병 환아 종현이 사건 때문이었다. 대한의사협회장이었을 때도 이 사건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 “그것은 의료사고입니다”라고.
“의료사고는 지금도 그렇지만,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하는 부분이죠. 100%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양심을 저버린 대학병원 교수진의 조직적인 사실 은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찰이 6개 대학병원에 종현이와 관련된 소견서와 의무기록을 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한 상태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문제의 일부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죠. 제가 나서야만 했습니다. 의사 가운을 입고 말이죠. 그래서 지금도 저를 싫어하는 의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방법이 옳다고 믿습니다.”
지난해 말 종현이법으로 불리는 ‘환자안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의사가 의료적 오류를 범했을 때 병원에 마련된 전담인력인 환자안전위원회에 ‘자율’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의무보고와 이를 어길 경우 제재하는 내용은 빠진 상태다. 의료사고를 숨기기만 했던 분위기는 개선은 됐지만, 앞으로 갈 길은 멀다.
의료계의 ‘돈키호테’
의료계에서 노환규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선배 중심의 의료계에서, 그것도 의사회, 학회의 지지기반이 없는 인물이 2012년 5월 제37대 의사협회장이 된다. 한동안 의료계 메시아라고 칭해지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돈키호테가 됐다. 결국 그는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탄핵 당하고 만다. 106년 역사의 의사협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심경을 듣고 싶었다.
“불명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고 막을 수도 있었던 임시 대의원총회였습니다. 누구에게도 탄핵을 저지하기 위한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제가 탄핵됨으로 해서 협회의 대의원제도를 개혁하고 싶었습니다. 회원들이 뽑지 않은 250명의 대의원이 힘을 행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전략적으로 잘못된 부분(탄핵 후 소송을 통한 제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처럼 특이한 케이스가 나타나서 판을 흔들어야 협회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지났고, 그의 목적이었던 대의원제도가 일부 바뀌었다. 올해 최초로 대의원들이 직선제를 통해서 선출됐기 때문이다. 그가 의협을 떠났어도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할 말을 할 수 있는, 그 뜻
그의 발언은 세다. 쉬쉬하지 말고 아예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자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전문의 평균 연봉은 9200만원인데, 세후로 따지면 600만원이 안 된다. 국민들은 의사 연봉이 3000만원이길 바라지만, 3000만원 받는 의사에게서 심장수술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방식의 차이겠지만, 솔직한 발언을 쏟아내 호불호가 갈리는 그는 그래도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할 말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이유는 좋은 아내와 든든한 아들이 버팀목이 돼 주고 있고, 부모님도 여전히 건강하신 상태고, 종합적인 행복지수가 높아서일 수도 있어요. 전 웃지 않으면 화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감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남들이 모른 척할 때, 할 말을 해야 하는 게 제 삶의 임무겠죠.(웃음)”
기자가 알아본 바로는 노환규 전 의협회장은 정치권에서 수차례 러브콜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혹시 정치권으로 들어갈 의향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봤다. 답변은 간단했다. “가슴 뛰는 일, 따듯한 일을 하고 싶은데 정치는 그렇지 않잖아요.”
누구나 해보고 싶은 어렸을 적 장래희망을 다 해보고 있다.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을 거쳐 최근에는 한국줄넘기총연맹 총재로 변신한 전현희씨. 그녀는 다양한 직함이나 명함에서 나오는 딱딱한 자세보다 소신 있게 길을 걷고 싶다는 소박한 웃음으로 본인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의사 가운을 내려놓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고시원과 독서실로 향했던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어요. 힘들었지만 즐거웠다고 말할게요. 어린 시절, 동경하던 꿈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으니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컸죠. 전 아무래도 쉽지 않은 도전을 즐기는 타입인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사’ 자가 붙은 전문직은 그 자체로도 경쟁력이 있다. 의사가 변호사를 준비하는 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녀가 사법고시를 본다고 했을 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미 서른을 넘겼고 아이도 키우고 있었다. 남편 역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어서 집안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만류가 엄청났지만, 치과진료실보다 더 큰 세상에서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때마다 임제록(臨濟錄)의 글귀를 계속 되뇌기 시작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쉽게 풀이하면 ‘너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라’라는 뜻이다. 인생을 살면서 살아가는 건지, 아니면 살아지는 건지를 명확히 파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찾고자 노력했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본인이 절실하게 원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온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하는 것. 그 과정을 거치면 좋은 결과는 따라온다고 믿었어요.”
그녀의 도전은 1996년 38회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성과를 얻게 된다. 그래서 얻은 타이틀이 ‘국내 최초 의사 출신 변호사’. 이후에도 그녀의 도전은 계속된다.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들을 지켜라
2002년 가을, 연수원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변호사 전현희에게 울산의 모 의대교수가 상담을 하러 온다. 에이즈 환자의 혈액이 혈우병치료제 제조에 사용됐고, 이 치료제를 투여 받은 혈우병 환자들이 에이즈에 집단으로 감염된 사건이었다. 훗날 전현희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혈우병 환자 에이즈 감염 무료 소송’의 시작이 됐다.
“에이즈 감염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을 억울하게 당하고 사회에서 소외되어 눈물을 훔치고 있을 환자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이 어린아이였고, 부모들은 남들에게 소문이 날까 봐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죠. 눈물로 절규하는 10여 명의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사연은 중학생 형이 에이즈에 감염됐고, 감염되지 않은 초등학생 동생이 한방에서 지내는데 이 사실을 알릴 수가 없어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모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왜 이러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인지 끝까지 밝혀야겠다고 결심한다. 또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무료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다짐한다. 의학적 지식과 법률지식이 동시에 필요한 이 사건에 대한 사명감은 불타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에이즈는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질병이죠. 잘못된 상식과 오해들이 에이즈 환자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리곤 하니까요. 소송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환자들과 가족의 신상정보가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비밀을 최대한 지키고 재판에 임했죠.”
초짜 변호사 의료소송으로 거물들과 맞서다
상대방 제약회사는 장관 출신 변호사와 유명 전관 출신 변호사들을 선임해 소송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다. 당시 법조계 분위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를 이뤘다.
“연수원을 갓 졸업한 초짜 변호사였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내가 아니었죠. 오히려 투지가 생겼습니다. 환자와 가족들 총 63명의 원고들을 대리한 소송의 대장정이 시작됐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은 소송 도중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모든 소송과정은 전부 나 혼자의 일이었습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집단 에이즈 감염 사안에 대한 역학조사와 유전자 검사를 해준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질병관리본부를 대상으로 1인시위도 해봤습니다.”
약 3년에 걸친 지루한 법정소송 공방을 통해 2005년 1심 소송이 시작됐고, 2011년 대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이 치열한 싸움은 10년이나 계속됐다. 그 긴 시간을 버틴 그녀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승소 소식을 듣던 날, 지난 10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어요. 눈물로 지새운 날들, 감염된 아이의 말똥말똥한 눈망울, 치열한 공방이 진행된 법정에서의 시간들.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올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국회입성
“혈우병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불합리성에 울분을 갖게 됐고, 혼자 싸워나가다가 결국 내가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고쳐보고자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변호사 시절 제기한 소송이 국회의원이 되어서야 마무리 됐죠.”
10년에 걸친 기나긴 소송 중 그녀는 2008년 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상임위는 전공을 살린 보건복지위원회.
2011년, 소송에 승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처럼 적십자사에 대한 국정감사가 열렸다. 혈우병치료제로 인한 감염을 증명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위치에서 혈액 관리를 위한 제도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입장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때 복지위 전현희 의원은 혈액제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약사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위한 쓴소리를 내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회상해보면, 참 복잡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네요. 국감장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죠. 같은 사안을 두고, 너무도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제약회사와 싸우고, 정부와 부딪치던 제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국회의원의 입장에서 국정감사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정의감에 불타던 초심을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국정감사 우수 국회의원’으로 4년 연속 선정됐고, 18대 국회의원으로서의 임기를 마무리 짓는다.
또 다른 시작, 줄넘기
“인터뷰도 마무리되는 것 같은데, 이제 제가 얼마나 줄넘기를 잘하는지 보여드릴까요?” 사무실 서랍에서 줄넘기를 꺼내든 그녀는 선뜻 밖으로 나가 줄넘기를 해보겠다고 한다. 그녀의 또 다른 직함, 한국줄넘기총연맹 총재. 그녀가 줄넘기 전파에 나섰다. 운동을 못할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는 쌩쌩이(2단 뛰기) 솜씨로 답변을 대신했다.
2013~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저탄소친환경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때 줄넘기가 ‘탄소배출량’이 가장 적은 스포츠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녀는 줄넘기 예찬론자가 됐다. 그래서 전국에 퍼져 있는 줄넘기 지도자들과 단체를 통합한 한국줄넘기총연맹을 발족시켰다.
“알면 알수록 줄넘기는 정말 매력적인 운동이에요.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친환경 운동이기도 하죠. 줄넘기는 경기장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고,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죠. 줄 하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줄넘기의 매력에 빠져보시죠.”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이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녀는 줄넘기가 세대의 격차로 벌어지는 소통 부재의 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목표를 갖고 움직이고 있었다.
“신중년의 활발한 활동이 기대대는 요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운동이 하나쯤 필요한데 줄넘기가 그런 역할을 해줄 거라고 믿어요. 살도 빼고, 스트레스도 빼는데 이만한 운동은 없다고 봐요.”
다 해본 그녀의 당당한 도전이 아름답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2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그래서 눈물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를 위해서 그녀는 대학생 딸과 함께 바람을 가르는 줄넘기처럼 오늘을 뛰어넘는다. 내일은 그녀에게 어떤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 어떤 도전을 그녀가 찾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