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멀지도 않다. 알고 보면 생각난 김에 떠나볼 수 있는 곳이다.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DMZ가 인접해 있고,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폭포가 지금도 쏟아져 내린다. 아득한 옛날 후고구려의 궁예 이야기와 임꺽정의 무대였던 지역임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먼 곳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다. 다가갈수록 북녘을 눈앞에 둔 철원평야는 황금 들녘이다. 절벽에 매달린 한탄강 협곡의 주상절리길은 스릴 넘치게 아찔하다. 전쟁을 대비하고 군부대 포사격 훈련장이었던 땅엔 백만 송이가 넘는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이 땅의 최북단 철원의 풍성한 가을이 마냥 아름답다.
마음을 두드리는 평원의 가을
가을을 마음에 담기에 이 땅의 드넓은 평야만 한 곳이 있을까. 누렇게 물든 대자연과 넓은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철원 소이산은 다른 지역보다 가을이 먼저 시작된다. 새벽부터 분주히 달려서 도착한 소이산 주변으로 운무가 가득하다.
소이산은 해발 362m의 야트막한 산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금방 오를 것 같은 높이지만 제법 가파르다. 20여 분 숨차게 오른 소이산 전망대는 본래 군부대 주둔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오르막 길목의 평화마루공원에서 공원과 지질 명소를 안내한다. 오래전의 미군 막사와 초소는 녹슨 채 허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처의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인 봉수대오름길로 이어지는 코스도 보인다.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펼쳐지는 경이로운 광경에 비로소 가을을 흠뻑 맞는다. 황금빛 너른 들녘의 놀라운 풍광이 전망대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산야는 거대하다. 무한한 대지와 하늘, 철원 북쪽의 평강고원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도록 막힘없이 탁 트였다.
철원평야에 오름처럼 우뚝 솟은 소이산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는 봉수대가 위치했던 곳이다. 철원의 역사와 함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이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 너머엔 비무장지대가 있다. 맑은 날에는 북한 주민들의 움직임도 보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DMZ 건너편 철의 삼각지대를 미묘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분단이란 현실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최북단 철원은 가을이 일찍 찾아와 추수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9월 초부터 시작해 10월이 되면 조생종 벼들은 일찌감치 수확을 끝낸다. 이미 추수를 한 논과 벼가 익은 상태에 따라 논마다 채도 대비가 다양하다. 끝없이 넓은 패턴의 선과 면의 들판은 한 편의 작품 같다.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오대쌀은 우리에게 유명하다. 무엇보다 용암 대지와 현무암의 풍화로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청정환경에서 생산되는 쌀의 질과 밥맛을 결정하는 천혜의 기후 조건 또한 으뜸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에서 패하고 철원평야를 빼앗겨 김일성이 슬퍼했다는 게 괜한 얘기가 아닌 듯하다. 철원오대쌀은 지역 특산물로 국내 최초로 브랜드화한 이름이다.
소이산을 내려오는 길 양쪽으로 아침 이슬을 매달고 있는 가을 들꽃들이 예쁘다. 깊은 산속에서 피어나 유난히 색감이 선명하고 맑다. 쾌청한 숲길에서 절로 힐링된다. 소이산을 내려오니 막 운행이 시작된 모노레일이 지나가고 있다.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편치 않은 교통 약자라면 소이산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철원역사문화공원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을 탑승하면 왕복 1.8km 거리다.
주변에 노동당사가 있어 가볼 만하다.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였으나 이후 전쟁의 크나큰 상흔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평화의 꽃을 피워 올리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이 이슬뿐일까. 소이산 전망대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철원 고석정 꽃밭에선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강원도 북단에 이토록 넓은 꽃밭이 조성되어 있다니, 꽃 따라 봄가을로 여행 올 만하다. 입구에서부터 짙은 빨강과 다홍, 노랑으로 화려한 융단처럼 펼쳐진다. 꽃 이름이 촛불맨드라미다. 바로 옆으로 고향 마을에서 본 듯한 백일홍이 제각각의 색깔로 꽃밭 가득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마음껏 즐기는 꽃마당이다.
꽃밭 넓이가 자그마치 23만 1000㎡라고 한다. 축구장 서른 개가 넘는 규모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한참 걸린다. 맨드라미를 시작으로 백일홍, 천일홍, 메밀꽃, 해바라기, 장미, 코스모스, 가우라, 버베나, 핑크뮬리, 댑싸리, 억새 등 종류별로 가을꽃이 활짝 피어 눈부시다. 봄 시즌에는 노란 유채꽃이나 수레국화, 안개초 등이 피어난다. 꽃길을 걷다 보면 때론 연못이 나타나고 넓은 잔디광장이 나온다. 어린 왕자 조형물이 있는 전망대와 풍차가 볼거리를 더하는데, 일몰 풍경과 꽃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편안하게 꽃구경을 하고 싶다면 꽃밭을 한 바퀴 도는 깡통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고석정 꽃밭은 애초에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었다. 과거 Y진지라 불리던 곳이 철원 지역의 새로운 관광 트렌드로 변신했다. 포성이 울리던 허허벌판에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철원이 안보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무한히 넓은 꽃밭에서 계절별로 꽃의 물결을 볼 수 있다.
수직 벼랑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주상절리
철원의 주상절리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위치한다. 화산이 폭발하고 분출한 마그마가 서서히 식으면서 현무암이 되었고, 강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바위들이 수직의 벼랑을 이룬 비경을 그동안은 배를 타고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찔한 절벽에 선반처럼 매단 3.6km의 잔도(棧道)가 마련되었다. 일명 한탄강 하늘길로 불리는 잔도 덕분에 빼어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까이에서 생생히 만날 수 있다.
트레킹의 출발점은 두 군데다. 순담 게이트와 드르니마을 게이트가 있는데 대부분 순담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참고로 드르니는 애초에 양지바른 마을에서 유래되었는데, 궁예가 고려 왕건으로부터 피신할 때 ‘들른’ 마을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 철원 여행을 하다 보면 유난히 궁예와 연관된 명칭을 자주 본다. ‘말등소’라는 소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길 때 빠졌던 소(沼)로, 말이 너무 힘들어 똥을 쌌다 하여 말똥소라고도 한다. 트레킹을 마치고 시작점으로 다시 갈 경우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현재는 주말에만 운행한다.
잔도는 걷기에 따라 다르지만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우리나라에 잔도가 몇 군데 있지만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 잔도는 그 절정이다. 한탄강 협곡 절벽 20~30m 높이 벼랑길에 매달린 잔도를 걸으면서 깎아지른 수직 절벽의 위용에 놀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반원형 전망대는 아찔함의 최고점이다.
틈틈이 쉼터가 나타나니 잠깐씩 쉬면서 절경에 잠겨봐도 좋다. 쪽빛소쉼터, 맷돌랑쉼터, 돌단풍쉼터, 드르니쉼터 등 이름도 예쁘다. 자주 나타나는 13개의 출렁다리마다 지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생김새와 위치 등에 따라 돌개구멍교, 한여울교, 선돌교, 수평절리교, 단층교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잔도 위를 걷다 보면 신나고 짜릿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간이 허공을 걷듯 공포감이 드는 구간도 지나야 하고, 가파른 계단을 몇 번씩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기진맥진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체력 조절이 필요하다. 감동과 스릴, 억겁이 빚어낸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철원 주상절리길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력, 청력, 근육의 운동능력 등 신체 기능의 저하로 식사, 옷 입기, 침구 정돈과 같은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따른다. 여생을 보낼 공간을 신체적 특성에 맞게 고치고, 가꿔야 하는 이유다. 공간 개조 시 신경 써야 할 요소가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조명’을 잘 활용하면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복지시설 유니버설디자인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적절한 조명 선택은 공간, 색채, 재질의 인지, 사인과 안내문 확인 등 시각적 소통에 도움을 준다. 조도가 균일하지 못할 경우 공간의 특성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길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눈부심과 반사, 강한 그림자 등이 생기면 혼란과 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시각에 의한 피로감이나 불쾌감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명의 양과 질을 배려해 적정 조도 수준, 조명 방법, 기구 선택이나 배치를 결정해야 한다.
우선 자연채광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부족한 곳은 다양한 종류의 조명을 사용한다. 상황에 따라 개인이 밝기나 빛의 종류를 조절할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천장 조명은 누웠을 때 눈부심이 없도록 램프가 노출되지 않는 것을 고른다. 침실 내 화장실이 있다면 출입 시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침대 옆 손이 닿기 쉬운 곳에 조명스위치를 설치하는 것도 방법이다. 찬장 또는 벽장, 서랍, 선반은 장애물 없이 직접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에 배치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모서리가 날카롭지 않은 것을 고르거나, 보완재를 덧댄다. 콘센트, 스위치 등은 즉각적으로 인지되고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어야 하며 작동이 단순한 것이 좋다.
‘색채’도 개조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 중 하나다. 실내 공간에서 색채는 그 공간을 개성 있게 표현하거나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정된 공간을 지각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책 ‘노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주거환경 디자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색, 밝은 초록 계열, 파랑 계열은 건강을 보존하는 환경에서 많이 사용된다. 파랑은 고요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순수한 흰색은 심한 눈부심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색채학자 로튼과 비렌은 빨강과 같은 난색은 흥분을 유발하고, 녹색이나 파랑과 같은 한색은 침착하고 편안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색의 대비를 사용하면 감각을 풍요롭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건강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다만 색에 대한 반응은 각자의 감정과 경험한 배경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개인의 요구와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서울특별시 복지시설 유니버설디자인 가이드라인’에서는 “특정한 공간의 이미지는 색채와 재료, 조명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되기 때문에 각각의 요소를 별개로 고려하기보다는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파리에서의 1박 2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애초에 생미쎌의 소르본느 주변에서 어슬렁 놀다가 미술관 한 군데 돌아보는 걸로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기에 쫓기는 기분 없이 잘 보낸 1박 2일이었다. 틈새 여행으로 아쉬움 없다.
오를리 공항에서 탄 작은 비행기는 새하얀 구름 속 푸르디푸른 하늘 구경에 잠깐 정신 팔린 사이에 금방 니스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밖의 하늘과 구름은 어찌나 푸르고 새하얗던지 반짝거리는 니스의 푸른 바다와 콤비를 이룬다. 온통 코발트블루의 세상을 보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니스만의 블루다. 지중해의 니스 블루라고.
지중해의 니스 블루
사실 니스는 여행지로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때로는 이렇게 예상치도 않은 여행지를 다녀볼 수도 있다는 게 기분을 달뜨게도 한다. 공항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는 칸느와 모나코행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다. 또 한쪽엔 니스 역 방향의 98번 버스가 서 있다. 우리는 니스 해변 쪽으로 가는 99번 버스로 지중해가 펼쳐지는 숙소 앞에서 내렸다. 환한 햇살이 맞이할 것 같았던 니스는 비가 내린 후의 한기가 엄습했지만 다음 날부터는 니스의 햇빛 좋은 날씨가 날마다 이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코발트블루의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해변가의 전망 좋은 방. 호텔 방에 앉아 광활한 지중해의 풍경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위치 좋은 곳의 전망 값을 더 지급했다. 발코니에 앉아 새벽을 바라보고 찬란한 햇빛을 눈부시게 볼 수 있었다. 아름답게 휘어진 니스의 해안선에 내리는 노을을 향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며 짜릿했다.
니스에서는 모든 것을 털어내고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맨발로 몽돌을 밟으며 걷는 해변엔 여행객들의 거리낌 없는 일광욕 자세가 민망할 것도 없이 금방 적응된다. 느릿한 트램을 타고 거리를 지나거나 메세나 광장에 나가보아도 무표정하거나 심각한 얼굴은 보기 어렵다. 경직된 근육 없이 자유를 가득 품은 몸짓이었고 더없이 편안한 표정들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친절했다. 적대감 따윈 하나 없이 무장 해제된 표정들. 구시가지의 고풍스러운 골목을 걷다가 나와서 길 가던 노신사에게 지도를 들고 길을 물었더니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아예 다리 사이에 내려놓고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그리고 내 지도에 동서남북을 그리며 상세히 설명을 한다. 그냥 "조~오기로 돌아서 가면~"이라고만 해주어도 좋으련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기분이 든다.
노천카페마다 의자에 팔걸이를 하고 느긋하게 앉아 지중해를 즐기고 니스를 즐기는 모습들이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거나 와인과 지중해의 해산물 샐러드를 앞에 놓고 그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 모습이 여행자에게 전해지고 덩달아 행복감 충전이다. 하루쯤 지나면서 긴장감이라곤 일 그램도 없는 나를 발견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니스(Nice)는 나이스(Nice)다.
가끔 가십 기사로 프랑스 배우나 허리우드 스타들이 니스에서 휴양 중인 파파라치 사진들을 기억한다. 따스한 햇살로 반기는 곳 니스는 누구라도 마음 놓고 쉴 수 있게 하는 도시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알프스 산맥을 모두 품은 세계적인 휴양도시답게 여유와 풍요함이 흘러넘친다.
니스가 좋은 이유
니스는 프랑스 남부의 항만 도시로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모나코와 칸느가 옆동네이고 이태리 국경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당일코스로 하루씩 칸과 모나코를 다녀올 수 있다. 현재 니스는 프랑스령이지만 역사적으로 이태리와 영토분쟁이 있었고 한때는 이태리 령이기도 했다. 그래서 니스지방 사람들의 이름 중엔 이태리식 이름이 많고 풍습이나 음식도 이태리풍이 많다. 무엇보다도 신선한 지중해의 식재료로 요리한 해산물 요리가 풍성하면서도 가격도 부담 없는 편이다. 숙소 또한 비싸진 않지만 찾는 이들이 많아 성수기엔 예약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곳은 평균 기온이 15℃이고 연중 고르게 온난한 날씨다. 여름엔 덥고 건조한 편이긴 하지만 대체로 전형적인 지중해 도시로 시기와 상관없이 사계절 니스를 즐길 수있는 기후다. 내가 갔을 때는 시월인데도 해변가엔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풍경이 일상처럼 자연스럽다.
야자수 나무 사이로 다정히 손잡은 연인이 서 있고 바다를 향한 벤치에 어깨를 감싼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자전거를 탄 젊음이 쌩쌩 지나가고 잘 생긴 개를 끌고 걸어가는 모습이 여유롭다. 이처럼 여유자적한 풍경 속에 내가 있다.
지끈지끈한 일상의 피로나 두통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가벼워지는 듯했다. 마음껏 늦잠을 잘 수도 있고 거리를 지나가다 아무데나 들어가서 홍합이 가득 뒤덮인 지중해의 해산물 파스타를 먹는다. 골목길이든 대로든 해변가든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긴다. 몇 걸음 걷다가 야자수 가로수길 어드메쯤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아 지중해의 반짝거림을 언제까지나 멍하니 바라볼 수 있다니. 며칠 후면 다시 별스럽지 않은 내 일상으로 돌아간다 해도 괜찮다. 얼마든지 괜찮다.
남프랑스 맛의 기억
물론 남프랑스의 맛이란 제목으론 당치도 않다. 여행 중에 그곳의 맛을 골고루 맛본 것도 아니고 좋은 것을 찾아다니며 먹은 것도 아니다. 그나마 먹는데 정신 팔려 사진으로 남길 생각을 못해서 찍히지 못하곤 했다. 어쩌다 먹고 어쩌다 찍힌 별스럽지 않은 사진 몇 컷 일뿐이다.
니스의 메인스트릿을 지나 골목길 포장마차처럼 생긴 레스토랑 Temple Bar. 가족단위의 손님이거나 연인들이 가득 차서 바글바글했던 저녁시간. 파스타도, 홍합요리도, 감자튀김도 푸짐 푸짐했다. 이런 인심 대환영이다. 맛있다. 그런데 국물이 간이 좀 세다. 조금만 덜 짰으면 좋으련만, 하긴 괜한 트집이다. 그 분위기 속에선 이렇게 잊지 못할 또 다른 맛을 낸다는 사실이다.
니스의 호텔 조식은 메뉴가 다양했다. 그 중에서 자그마하고 대충 만든 듯하지만 부드러운 크레페가 따끈따끈 금방 구워져 나와 그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크레페(Cr^epes)의 생김새는 동그란 금빛 형태로 밝은 날 떠오른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춥고 어두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하고 밝은 봄을 맞을 때 먹는 빵이었다는데 이제는 우리의 호떡처럼 길거리 어디서든 사 먹을 수 있으니 그 의미를 떠올릴 틈이 없다.
그리고 어딜 가나 빨강과 보라, 그리고 노랑과 초록으로 선명한 색감이 빛나는 지중해의 채소와 과일들이 가게마다 넘쳐났다. 사진 한 장만으로도 그 시간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온다. 맛의 기억이 여행의 기억이기도 하다.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앞다투어 봄꽃 개화 시기를 전하고 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철쭉, 산수유, 수선화, 튤립... 그리고 벚꽃엔딩까지 친절한 안내가 줄을 잇는다. 그야말로 꽃철이다. 멀리 남녘 지방까지 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의 기운을 맞을 수 있는 곳, 날마다 꽃이 피어나고 있는 수도권 부천의 꽃 이야기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사정에 따른 변동으로 꽃 축제와 입장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필수다.)
부천 원미산 진달래 꽃동산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런 시 한 소절이 아니어도 봄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진달래꽃이다. 부천 원미산(富川 遠美山)은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하다. 봄이 되면 원미산을 뒤덮는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만개한 꽃물결 속에 파묻혀 봄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초입에 세워진 김소월 님의 진달래꽃 시비(詩碑)를 지나 능선을 조금 오르다 보면 발아래로 저 멀리 부천 FC 스타디움이 보인다. 원미산 167m에 올라 정상의 원미정에서 내려다보는 부천 시가지와 종합운동장, 역동적인 축구장을 진달래 동산이 에워싸는 포인트에 서면 봄을 만끽하는 순간이 된다. 3월 중순경부터 약 한 달 남짓 만발한 진달래를 볼 수 있다.
♤가는 길: 지하철 7호선 부천 종합운동장 2번 출구로 나와서 500m 정도 거리에 있다. 참고로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우측 놀이동산을 끼고 부천 순환 둘레길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둘레길 걷기의 시작이 된다. 특히 1구간의 향토 유적 숲길은 운치 있다.
부천 자연생태공원 튤립 정원
사월과 오월 중순쯤까지 가장 화려한 색감으로 온 누리를 빛내주는 튤립을 볼 수 있는 곳, 부천 자연생태공원이다. 이곳은 부천식물원,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 농경유물전시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무엇보다도 테마 정원과 유아 숲 체험관, 힐링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아이 어른 상관없이 다양한 볼거리가 가능한 문화휴식 공간이다. 코로나로 훌쩍 떠나지 못하는 수도권 시민들이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의 튤립은 고결하고 우아한 자태로 봄 햇살을 받으며 가장 강렬한 색감으로 최상의 멋을 보여준다.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다. 튤립 꽃길을 걸으며 선명한 빨강, 노랑과 보라, 하양, 핑크 등의 화사한 꽃들을 들여다보는 행복은 오직 이때뿐이다. 이 무렵 담장 너머 목련은 이미 지는 중이고, 춘덕산에서는 부천을 상징하는 복사꽃 피는 마을답게 춘덕산 복사꽃 축제가 이어졌었다.
튤립 정원을 지나 나타나는 수목원은 편백 군락지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힐링의 숲이다. 천천히 걷거나 곳곳의 벤치에 앉아 봄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폭포, 생태연못 쪽으로 가면 수생식물들과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의 물바람을 맛볼 수 있다. 나비정원, 풍차, 귀여운 토끼나 공작새의 미니 동물원은 튤립을 보러 왔다가 자연 속의 풍경에 푹 빠지는 시간이 된다. 출구로 나가면 주변에 맛집도 즐비하다.
♤경기도 부천시 길주로 660(춘의동)
7호선 까치울역 1번 출구에서 3분 정도 직진
내비게이션 명칭 검색 : 부천식물원 또는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자연생태공원 공원 조성과(032-625-3502)로 연락
백만 송이 장미원의 화려한 봄날
해마다 오월이면 장미가 온 천지에 가득했던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 올해도 여전히 피어나겠지만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혹시라도 아쉬움에 찾아가 장미원 둘레 담장 너머로 먼발치의 장미꽃들을 바라볼 만도 하다. 돌아보면서 군데군데 나타나는 장미 터널과 예쁜 포토존이 행복감을 주는 장미원이다.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은 부천시에서 1998년 150000여 그루의 장미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장미 한 그루에서 7~10송이의 꽃이 피어나기에 백만 송이의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주변의 도당산이 에워싸고 장미를 비롯한 야생화 단지와 분수대, 체력장 등의 시설들이 갖추어진 장미꽃 테마공원이다. 오월과 칠월 사이에 절정을 이루는 백만 송이 장미를 풍성하게 볼 수 있다.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산 34
지하철 역곡역이나 까치울역에 내려 마을버스 013-3번
☏부천시청 공원관리과 공원관리 2팀(032-625-4854)
부천 상동호수공원의 꽃양귀비
계절별 꽃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상동호수공원. 그중에서 5~6월이면 붉은 꽃양귀비가 피어나 짙은 아름다움 속에서 힐링의 시간을 준다. 부천시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공원으로 호수 근처로 나무 데크 길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서 바람 쐬며 걷는 맛이 최고다. 또한 체육 시설과 놀이시설, 휴식 공간이 두루 잘 갖추어져 있어서 산책길에 한나절쯤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원이다.
꽃양귀비 정원에 들면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의 붉은 양귀비와 함께 청보리가 자라나고 있다. 두 가지의 어울림을 조화롭게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혹시 코로나의 여파로 꽃밭 가까이 갈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촬영하려면 망원렌즈를 지참해야 한다. 멀리 꽃구경 가기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부천 상동호수공원은 수도권에서 쉽게 나설만한 곳이다.
♤지하철 7호선 삼산체육관역 1번, 5번 출구 역
경기 부천시 길주로 16 복사
부천 중앙공원 능소화 터널
한때는 능소화를 찾아서 저 아랫녘까지 가기도 했다. 이제는 길거리나 동네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그 옛날 구중궁궐 속에서 다시 찾지 않는 임금이 하도 그리워 궁녀 소화는 날마다 임금의 발자국 소리에 오매불망 귀를 기울였다. 죽으면서도 담장 아래에 묻혀 님을 기다리겠다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궁녀 소화, 님의 발소리를 들으려 귀를 활짝 열어놓은 듯 피어난다. 기다림의 세월이 능소화로 곱게 다시 피어났다는 전설의 꽃이다.
부천 중앙공원에 가면 능소화가 터널을 이루어 피어난다. 6월 말부터 7월 중하순까지 흐드러지게 만개했다가 툭툭 떨어지며 진다. 꽃이 지는 모습도 볼만해서 능소화 터널 아래 낙화가 뿌려져 있을 때 다시 가기도 한다. 더위와 비바람에도 흐트러진 남루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꽃잎 하나씩 날리며 지는 게 아니고 미련 없이 꽃 한 송이 통째로 떨어뜨리는 게 능소화의 마지막 모습이다.
♤경기 부천시 중동 1177(부천 시청 뒤편)
산수미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강원도 영월군이다. 서린 역사와 보유한 유적은 또 어떻고? 그저 심심풀이로 여행을 갔다가도 오감 만족으로 기억에 새겨지는 곳이다. 박물관, 문화 공간, 전시장의 합이 자그마치 20여 개이니 말 다 했다. 2019년에 개관한 미술관 ‘젊은달 와이파크’는 개중 등등한 기세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주말이면 수백 명의 관람객으로 북적인다. 한적한 시골 동네에 벌어진 이변이다. 영월 변방 주천면 언덕배기에 있다.
‘젊은달 와이파크’에서 맨 먼저 만나는 건 입구를 이룬 설치작품 ‘붉은 대나무’다. 빨간 페인트를 입힌 수백 개의 기다란 강철 파이프로 작은 대나무 숲을 연출했다. 말이 대나무 숲이지 저만치서 보면 길길이 치솟는 불길을 연상시킨다. 빨강은 열정과 절정의 상징색이다. 욕망과 유혹과 혁명의 표식이기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엄습해 교감신경을 일깨우며 심리적 침체를 털어내게 한다. 그렇다면 ‘붉은 대나무’ 입구를 들어서며 가슴을 빨강으로 물들여 기분을 기차게 돋우라는 권유? 미술관에 차려진 성찬을 포식하기 전에 입맛을 다시라는 애피타이저? 담긴 뜻이 한둘이 아닐 테다.
‘붉은 대나무’를 만든 이는 대지미술을 추구하는 조각가 최옥영이다. 강릉 정동진에 대형 미술관 ‘하슬라아트월드’를 세워 명소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는 내친김에 ‘젊은달 와이파크’를 2차로 설립해 다시 한번 실력을 입증했다. 빨간색은 최옥영의 시그니처 컬러다. ‘붉은 대나무’만이 아니라 미술관의 거대한 파빌리온(가설 건축물)에도 통째 빨강 물감을 쏟아부었다. 파란 하늘, 초록 산야, 그리고 빨강의 선명한 색채 대비가 주는 감흥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라는 뜻에서다.
미술관 본관으로 향하는 야외 동선을 따라 걷는다. 미지근한 일상에서 벗어난 쾌감이 오롯하다. 불면증과 우울증이 서식하는 도시의 권태를 잠시나마 멀리에 뒀으니 이게 어딘가? 미술관 외벽을 이룬 산과 하늘의 표정은 잡티 없이 해맑아 순수하다. 완벽한 회화가 아닐 수 없다. 자연이 그리는 미술을 사람의 예술과 아울러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이 미술관이 지닌 미덕이다. 외부의 자연과 수시로 조우할 수 있도록 건축과 공간을 개방적으로 구성했다.
본관 로비로 들어서자 커피 향이 그윽하다. 매표소를 겸한 카페 공간이다. 미술관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길모퉁이 작은 찻집에서처럼 농밀한 운치를 즐긴다. 시스템 전환이랄까? 요즘 미술관들은 필수 부속처럼 카페를 운영한다. 미술과 커피의 조합이 거두는 효율이 커서다. 미술관은 커피를 팔고 관람객은 한 줌의 낭만을 산다. 커피 한잔과 내 인생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마는, 커피를 혀로 굴리며 예술을 생각해보는 잠깐의 휴식은 비루한 삶을 잊게 한다. 일러 ‘소확행’이다.
상상력을 돋우는 ‘목성’
카페에서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거대한 돔 안으로 들어선다. 철골빔 뼈대에 일정한 크기로 빠갠 소나무들을 굴비 두름처럼 촘촘히 엮어 쌓은 돔이다. 이 미술관의 설치작품 대부분은 최옥영의 생산물. 대형 나무 돔 역시 그렇다. 타이틀은 ‘목성’(木星)이다. 작가는 우주에 사는 목성이 별똥별처럼 떨어져 내린 이벤트를 상정했나? 그는 나무 무더기를 무수히 쌓아 동굴을 닮은 설치를 하고서 목성을 보라 한다. 광폭의 감성 사이즈로 우주를 느끼라 한다. 그렇다면 ‘목성’은 우주의 축약이며, 신과 우주를 향한 외경을 표출한 고대 로마의 판테온처럼 신성하다. 최옥영의 창작 변을 간추리면 이렇다.
‘무한의 영역인 우주를, 상상의 우주를 조각적 형태로 만들었다. 이는 생명의 분화구를 상징한다. 원초적인 힘과 사랑, 그리고 우주적 활력을 돔 안에 쏟아냈다.’
‘목성’은 대작이다. 높이 15m, 지름 12m에 달하는 원형 구조물이다. 꼭대기엔 휑하게 구멍을 내 하늘을 보게 했다. 늘 거기에 있는 일상의 하늘과 돔의 구멍을 통해 올려다보는 하늘은 달라 상상력을 돋운다. 내가 하늘 아래 존재하는, 또는 하늘과 공존하는 썩 의미 있는 생명체임을 자각하게 한다. 구멍으로 쏟아지는 빛과 나뭇더미 틈새로 들이치는 빛살 역시 일상의 빛을 바라볼 때와 달라 유심히 반추하게 한다. 작가의 의도를 따라 읽자면, 저 빛들의 산란은 우주적 쇼다. 우리가 늘 눈에 달고 사는 빛의 출처가 무한 우주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우는. 급기야 나 역시 우주에 동참한 하나의 소우주임을 느끼게 한다.
‘목성’을 뒤로하고 이제 오만 가지 조화(造花)를 오브제로 삼은 설치작품 ‘시간의 거울-신사임당이 걷던 길’과 만난다. 박신정(그레이스 박)의 작품이다. 여성을 사회적 타자로 방기한 시대를 살았던 신사임당의 삶과 내면을 칡넝쿨과 꽃, 그리고 거울을 설치해 조형했다. 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은 꽃들의 퍼포먼스에 기뻐 팔짝팔짝 뛰며 인증샷을 찍는다.
박신정은 최옥영의 부인으로 ‘젊은달 와이파크’의 관장이다. 화가 부부의 협연으로 미술관을 구축, 공간 곳곳에 선율과 리듬을 부여한 셈이다. 이곳엔 원래 ‘술샘박물관’이 있었다. 주천면의 유별한 술 문화와 양조 역사를 홍보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운영이 신통치 않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버려지다시피 한 걸 박신정 부부가 미술관으로 살려냈다. 술 박물관이 시들고 미술관이 꽃 핀 것. 미술관이 생동하면서 숨이 넘어가던 술 박물관도 회생했다. 다시 말해 미술관이 술 박물관을 옆구리에 끼고 동행한다.
‘젊은달 와이파크’의 주조음을 탄주하는 건 어디까지나 최옥영의 작품들이다. 재생타이어 수백 개로 만든 ‘블랙 드래건’, 쓸모를 잃은 널빤지들을 조형해 별의 원초적 에너지를 은유한 ‘우주정원’, 금속 재료로 회오리치는 바람기둥을 만들어 승천하는 용을 상징한 ‘실버 드래건’ 등 다수의 설치작품이 스케일과 볼륨을 과시한다. 그렇다고 난해하지 않다. 뭐가 뭔지 모를 관념의 카오스로 애먼 관람객의 기를 죽이는 현대미술의 경향과 달라 감정이입이 쉽다. 최옥영이 구현하는 대지미술이 자연주의의 계보라는 걸 고려하면 작품 이해가 더 쉽다.
재미있는 미술관이란? 어디서 도무지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는 미술관? 그렇다면 이 미술관이다. 공간 구성의 핵을 이룬 작품 ‘레드 파빌리온’을 보라. 철제빔과 철판, 쇠 파이프만으로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온통 빨강을 칠해 야릇한 미감을 구현했다. 미술관의 랜드마크다. 이 흥미로운 구조물은 전시장이자 통로다. 공중에 걸쳐진 통로 바닥은 숭숭 구멍 뚫린 철판이라 마치 허공을 걷는 듯 묘한 느낌을 준다. 붉은 창살 밖으로는 푸른 자연이 환히 보여 작가의 의도가 비친다. 그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하늘, 산, 들판, 마을, 허공에 부유하는 미세먼지, 그리고 사람까지 모두 우주를 이루는 미립자라는 걸.
완연한 가을 날씨와 함께 본격적인 단풍철이 시작됐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단풍은 도심 외곽 지역인 북한산 일대에서 28일께, 도심 지역은 이보다 조금 늦은 11월 초순에 들 전망이다.
도심 주변 단풍 관광지에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목전에 둔 현재, 거동이 불편해 단풍을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시니어 수도 적지 않다. 이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지난 2015년부터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고령자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열린관광지’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열린관광지란 비장애인을 비롯해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등 신체적 부자유층까지 모든 관광객이 이동의 불편 및 관광 활동의 제약 없이 이용 가능한 관광지를 말한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조성 완료된 열린관광지는 전국에 총 49개소가 있고, 43개소가 추가적으로 조성 진행 중이다.
주차장, 화장실, 휴게공간, 주요 관광 동선의 경사로 등을 노약자와 같은 관광 취약계층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보수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관광의 접근성과 모든 다양성을 포용하는 포용적 관광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열린관광지의 핵심이다.
고령층도 편하게 관광할 수 있는 이들 열린관광지 중 서울 근교의 단풍 명소를 소개한다.
용인 한국민속촌
용인 한국민속촌은 우리의 옛 모습을 재현해 둔 전통문화 테마파크다. 사계절에 따른 전통 생활문화의 변화를 고이 간직한 한국민속촌의 가을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형형색색 물든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는 기본이고, 전통가옥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구절초, 메밀꽃 등 야생화가 한 데 모여 있는 한국민속촌은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야생화의 보고라 불리며 가을철 단골 출사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시흥 갯골생태공원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에 위치한 갯골생태공원은 국내 유일의 내만(內灣) 갯벌을 만날 수 있는 공원이다. 바닷가의 넓은 갯벌과 달리 깊고 좁은 곡선 형태의 갯골과 함께 옛 염전의 정취를 고스란히 만끽할 수 있다. 단풍 구경을 생각하면 흔히 산을 떠올리기 쉽지만, 갯벌에도 단풍이 든다. 칠면초, 퉁퉁마디, 나문재 등 소금기 많은 곳에 서식하는 염생식물은 가을이 되면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붉게 물든 염생식물과 함께 우거진 갈대와 억새, 핑크뮬리는 무르익는 가을 분위기를 더한다.
춘천 남이섬
남이섬은 북한강에 있는 14만 평의 넓은 섬으로, 가을이면 단풍나무, 은행나무 등 가을꽃이 어우러져 단풍 명소로 손에 꼽히는 관광지다. 이르면 10월 초순부터 계수나무, 단풍나무가 황금빛 자태를 드러내고 벚나무, 자작나무, 메타세쿼이아나무도 각자의 개성이 담긴 색채로 조화를 이루며, 남이섬의 풍경을 풍성하게 자아낸다. 특히 남이섬 초입부에서 만날 수 있는 ‘손잡고 단풍길’은 노랑과 빨강이 한데 모여 더 큰 빛을 발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백풍밀원(百楓密苑)’을 만날 수 있는데, 100그루의 단풍이 심겨 있다 하여 붙어진 이름처럼 장관을 이룬다.
2021년 비대면이 당연해진 뉴노멀 시대에 이모지(emoji)는 새로운 ‘교감’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적 관계를 원활하게 해 주고, 직장 내 소통이나 마케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뉴노멀 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가 이모지와 친해져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이모지가 사적 관계와 직장 내 소통, 마케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조사 결과도 최근 발표됐다. 지난 17일 어도비는 한국과 미국·영국·독일·일본 등 7개국 7000명의 이모지 사용 경험을 조사해 ‘글로벌 이모지 트렌드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의 93%가 이모지를 사용할 때 대화 상대에 공감할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이는 전체 평균치인 88%보다 높은 수치다.
디지털 메시지에 센스 불어넣는 이모지, 알고 쓸수록 좋아
같은 내용을 전달해도 단어보다 이모지 사용을 선호한다고 답한 한국인은 76%로 세계 평균치 68%보다 많았다. 특히 25~39세 밀레니얼 세대의 3분의 2 정도가 글만 있는 것보다 이모지를 포함한 문자 소통에 더 익숙하다고 답했다.
조사에 참여한 한국인 응답자의 79%가 이모지를 사용하는 동료에게 더 호감을 느끼고, 75%는 팀 내에서 아이디어를 공유할 때에도 이모지가 도움을 준다고 답했다. 본인의 성향과 맞는 이모지를 사용하는 브랜드에 호감을 느끼는 이들은 69%에 달했다.
사람들이 디지털 환경에서 비언어적 신호를 교환하기 위해 이모지를 활용한다는 국내 연구 결과도 있다. 모바일 메신저를 활용할 때는 대화할 때처럼 눈빛이나 얼굴 표정 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미영 어도비코리아 대표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 대세가 된 지금 이모지는 정서적 교감을 이끄는 중요한 매개체”라며 “이모지는 앞으로도 세대를 불문하고 디지털 소통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단순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이모지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그림 ‘문자’인 만큼, 의미를 알아야 디지털 세상에서 센스 있게 소통할 수 있다. 자주 쓰지만 예상 밖 의미를 지닌 이모지 몇 가지를 소개한다.
기도와 합장 사이 어딘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이 이모지는 온라인에서 감사하거나 기도할 일이 있을 때 주로 쓴다. 무언가 부탁할 때는 공손함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이모지가 손뼉을 마주치는 ‘하이파이브’를 형상화한 이미지라는 사실이 미국 필라델피아 ABC6 뉴스 보도로 밝혀졌다. 미국에서도 기도를 의미로 쓰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미국 블로그 사이트 GAWKER의 한 사용자는 ABC 방송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그림에는 두 엄지가 서로 맞붙어 있는데, 서로 다른 사람이 하이파이브를 하려면 엄지가 어긋나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도를 하기 위해 두 손을 모은 모습과 비슷하므로 이 이모지는 하이파이브가 아니라 ‘기도’ 이모지다. 두 손을 맞댄 이모지를 두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눈막 귀막 입막' 원숭이를 귀엽게만 보면 안 되는 이유
눈과 귀, 입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는 어쩐지 수줍어 보인다. 덕분인지 애교스러운 메시지에 단골로 출연하는 원숭이에게도 숨겨진 사연이 있다. “악을 보지도, 듣지도 말고 악한 말을 하지 마라” 라는 유명한 격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것.
이 격언은 인도와 일본, 바다 건너 미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 마리 원숭이 조각은 20세기를 살았던 마하트마 간디의 유품이었고, 17세기에 지어진 일본 신큐사 정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21세기 미국에 세 원숭이 조각만 종류별로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 사이트가 있을 정도다. 지역과 시대는 달라도 원숭이 세 마리가 각각 눈과 귀, 입을 가리고 있는 모습은 동일하다. 눈과 입, 귀를 가린 원숭이 이모지를 귀여운 원숭이 그림으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다.
빨주노초파남보, 색 따라 달라지는 하트 이모지
집단 지성으로 기능하는 미국판 네이버 지식인 ‘Quora’에는 색상별 하트의 의미와 쓰임이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가장 대중적인 빨강 하트는 진정한 사랑을 의미한다. 부부나 연인의 메신저 대화에 적합하다. 반면 파랑 하트는 파란 색상이 주는 차가운 이미지 탓에 절제된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인보다는 친구와의 대화에 쓰는 것이 적절하다.
노랑 하트는 사랑보다 행복과 우정을 담은 표현에 가깝다. 친한 친구나 자식, 손주 등 자주 메시지를 보내는 친밀한 상대에게 사용함을 추천한다. 반면 초록 하트는 질투와 부러움을 의미하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평온함과 평정, 편안함을 나타내는 주황 하트는 한가한 주말 오후에 주고 받는 메시지에 어울린다. 열정과 존경의 의미가 담긴 보라 하트는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순수한 사랑과 신뢰를 나타내는 흰 하트는 나이 들어도 사랑스러운 자식들에게 사용한다. 단 검정 하트는 쓰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픔이나 슬픔, 아이러니를 의미해 블랙 유머와 함께 쓰기 때문이다.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은 딸은 어느덧 엄마가 됐다. 세월이 흘러 그의 딸 또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손맛을 이어간다.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전하는 특별한 레시피. 하숙정, 이종임, 박보경 3대를 거쳐온 요리 명가의 건강 요리법을 소개한다.
단백질이 풍부한 닭고기와 각종 약재가 어우러진 ‘국민 보양식’ 삼계탕. 이대로 즐겨도 좋지만, 녹두를 넣으면 더 풍부한 효능을 얻을 수 있다. 녹두는 체내 독성 물질을 배출하고 신진대사를 촉진해 ‘천연 해독제’라고 불린다. 매년 먹는 삼계탕이 지겨울 땐, 닭안심을 노릇하게 구워 스테이크로 즐겨도 좋다. 자양강장과 면역력 증진 효과가 뛰어난 전복도 보양식에서 빠질 수 없다. 찜, 죽, 탕 등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굴소스를 활용하면 이국적인 중화요리로도 완성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 각양각색의 화끈한 보양식으로 기력을 보충해보는 건 어떨까?
수삼녹두삼계탕
재료 및 분량 영계 1마리, 불린 찹쌀 4큰술, 불린 녹두 2큰술, 마늘 5알, 물 2.8L, 황기·수삼 1뿌리씩, 대추 2개, 밤 1개, 대파 1/2대, 생강·소금·후추 약간씩
1 찹쌀과 녹두는 씻어 8시간 정도 불린다.
2 영계는 손질한 후 뱃속에 불린 찹쌀, 녹두, 마늘, 생강편을 넣고 고정시킨다.
3 냄비에 물과 황기를 넣고 한소끔 끓인 후 2의 닭과 수삼, 대추, 밤, 마늘, 생강편을 넣고 센 불에서 50분 정도 끓인다.
4 기름은 걷어내고 황기는 건져낸 다음 그릇에 담고 송송 썬 대파, 소금, 후추를 곁들여 낸다.
삼계스테이크
재료 및 분량 닭안심 6조각, 소금·후추·청주·식용유·베이비채소 약간씩
찹쌀리소토 양파 20g, 수삼 1뿌리, 대추·밤 1개씩, 올리브오일·다진 마늘 1큰술씩, 닭육수·우유 1/2컵씩, 찹쌀밥 1컵, 파르메산치즈 약간
1 손질한 닭안심을 소금, 후추, 청주로 밑간하고 달군 팬에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2 양파와 수삼, 대추와 밤은 잘게 썬다.
3 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양파와 마늘을 넣어 볶다가
수삼과 대추, 밤, 닭육수를 넣고 한소끔 끓인다.
4 3에 찹쌀밥을 넣고 우유를 넣어 끓인 후 치즈, 소금, 후추를 넣는다.
5 그릇에 찹쌀리소토를 담고 그 위에 구운 닭안심을 올린 뒤 베이비채소를 곁들인다.
전복수삼찜
재료 및 분량(1인분 ) 전복 6개, 수삼 2뿌리, 청양고추·대추 1개씩, 물 1컵, 다시마 5×5cm 2장, 은행 6알, 잣소금 약간
양념장 양조간장·청주·쌀조청 2큰술씩, 다진 대파 1큰술, 다진 마늘 1/2큰술, 깨소금·생강즙·참기름 1작은술씩, 후추 1꼬집
1 전복은 솔로 비벼 손질하고 끓는 물에 1분 정도 데친 뒤
스푼으로 떠서 껍질을 떼고 내장을 제거한다.
2 전복 앞면에 칼집을 넣는다.
3 수삼은 뇌두를 떼고 솔로 비벼 씻어놓고, 청양고추는 3등분한다.
4 냄비에 분량대로 섞은 양념장과 물을 붓고 다시마, 전복, 수삼,
청양고추를 넣어 한소끔 끓인 후 중불로 줄여 뚜껑을 덮고 10분간 익힌다.
5 전복 껍데기에 전복을 담고 수삼을 곁들인 후 은행, 대추, 잣소금을 고명으로 얹는다.
6 그릇에 전복찜과 수삼을 곁들여 담는다.
중화풍 전복인삼볶음
재료 및 분량 전복 3마리, 대파 10cm 1토막, 빨강·노랑파프리카·양파 1/4개씩, 청경채 1개, 새송이버섯 1/2개, 마늘 3알, 인삼 1뿌리, 베트남고추 2개, 청주·소금ㅁ·후추·식용유·참기름 약간씩
소스 멸치육수 3큰술, 맛간장 1과1/2큰술, 청주 1큰술, 쌀조청 1/2큰술, 녹말가루 1작은술, 후추 약간
1 전복은 손질한 후 끓는 물에 1분 정도 데친다. 껍질과 내장을
제거한 다음 씻어 편으로 썰고 청주, 소금, 후추로 밑간한다.
2 대파는 송송, 파프리카는 마름모꼴로, 양파는 1.5cm 길이로 썬다. 청경채와 버섯은 한입 크기로 어슷하게 썬다. 마늘은 편으로 썰고,
인삼은 어슷하게 썬다.
3 분량의 재료를 섞어 소스를 만든다. 맛간장 대신 굴소스를 사용해도 좋다.
4 팬에 기름을 두르고 대파와 마늘편, 베트남고추를 넣고 볶다가
채소와 버섯, 전복을 넣어 볶는다.
5 4에 소스를 넣고 볶은 다음 참기름을 두른다.
요리 및 레시피 제공 이종임(Scook청담 요리학원 원장), 박보경(아이미각연구소 소장) 푸드스타일리스트 박정윤 콘셉터 픽푸 곽영신 장소 Scook청담 요리학원
미술 작품 감상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곰곰 뜯어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추상화 앞에선 머리에 쥐난다. 이게 관람객의 둔감 탓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작가 자신도 무슨 짓을 했는지 알 바 없이 휘갈긴 작품도 ‘천지삐까리’다. 작품이 난해하니 미술관에 가봐야 재미가 없다. 미술관들의 따분한 콘셉트에도 식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꽤나 재미있는 미술관이 있다.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가나아트파크다.
일영리는 산 좋고 물 좋은 전원이다. 예전부터 교외선을 타고 장흥역(현재는 폐역)에 내려 일영 일대의 산수와 찻집을 즐기는 데이트족들이 넘실거리던 곳이다. 유흥주점과 러브호텔로 불야성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2008년 ‘장흥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면서 슬쩍 변신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알록달록 치장한 업소들이 난립해 어지럽지만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등 문화 공간 다수가 이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좀 색깔 있는 동네로 부상했다. 처음 문화예술의 공기를 주입한 건 토탈미술관이었다. 토탈미술관을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가 인수하고 개조해 2006년에 문을 연 게 가나아트파크다.
가나아트파크는 ‘쉬운 미술관’을 표방한다. 설립자는 가나아트센터의 리더 이호재 씨. 화랑계의 ‘큰손’이자 진취적인 기획자다. 그는 문턱과 눈높이를 낮추고 재미를 부여해 누구나 쉽게 찾아와 미술 체험을 할 수 있는 미술관을 궁리하다 가나아트파크를 열었다. 그의 지향과 방책은 선명했다. 어린이들을 주 타깃으로 삼은 거다. 아이들에게 미술과 미술관도 사이버 게임처럼 아주 신날 수 있다는 걸 경험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울러 아이들의 삶에 좁쌀만큼의 작은 크기로라도 미술이라는 소우주가 달라붙을 수 있길 바랐을 테고. 그게 결국은 미술 인구의 확대와 저변의 풍토를 다지는 지름길이라 보았을 테고.
이호재 씨의 이와 같은 궁리와 실천은 평범한 게 아니었다. 머리 잘 돌아가는 미술 사업가들이 많지만 아무도 ‘어린이 중심의 미술관’을 착상하지 못했던 시절에 기염처럼 토해낸 발상이었으니까. 요즘이야 어린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은 사립미술관이 꽤 있지만 예전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어린이 미술관으로서 가나아트파크가 지닌 위상이 우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나? 연간 관람객 수가 10만 명 이상이라 하니 순항이다. 하지만 적자를 면치 못한다더라. 이건 사립미술관의 숙명에 가깝다. 무료입장 제도를 운용하는 국공립미술관의 관람객 유인력을 당할 재간이 없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사실 비싸지도 않지만) 사립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무려나, 가나아트파크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뜀박질로 흥겹다. 그러라고 놀이터처럼 꾸며놓은 공간과 시설이 많다. 아이들은 다들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온다. 그러기에 아이들 못지않게 어른들도 많다. 젊거나 늙숙한 부부와 연인들도 전시실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너른 정원에서 짧은 피크닉을 즐긴다. 자유로이 마음 보따리를 풀어놓고 쉬기 좋은 미술관이다. 즉 남녀노소가 어울려 체면 차릴 것 없이 일락(逸樂)할 수 있는 곳이다.
정원을 가로질러 본관 건물로 들어간다. 지상 2층과 지하 1층으로 지은 이 건물엔 각각 층고가 다른 6개의 전시실이 있다. ‘카페 오월’과 아트숍도 있다. 1층 전시실 옆댕이엔 아이들의 놀이장인 ‘볼풀 아일랜드’가 있다. 그림 관람을 하는 어른들과 잠시 헤어진 아이들은 이곳에서 맘껏 논다. 아이와 어른을 동시에 배려했다. 이런 기발하고도 친절한 미술관을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을 위한 전시실도 따로 구획해 ‘교과서 속 그림여행’이라는 이름의 상설전을 펼친다.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교과서에 나오는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인기를 끄는 백남준 전시실
2층 5전시실에선 기획전이 펼쳐진다. 젊은 서양화가 허보리의 ‘Love My Hero’전이다.(4월 30일까지) 허보리는 만화가 허영만의 딸이란다. 전시실로 들어서자 탱크 한 대가 눈에 쑥 들어온다. 허보리의 설치 작품이다. 그녀는 은퇴한 가장들의 양복과 넥타이를 잔뜩 수집해 오브제로 삼았다. 천을 잘라 감거나 둘둘 뭉쳐 캐터필러를 비롯한 동체와 포신을 만들었다. 이 괴상한 헝겊 탱크로 어떤 메타포를 전하는가? 쉽다. 삶이라는 전장에서 먹이를 물어오기 위해 탱크처럼 진격하는 생활의 전사(戰士)를 오마주했다. 포신은 맥없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탱크처럼 밀어붙여도 어찌할 수 없이 돌아오는 생의 피로와 패배를, 무기력과 발기부전을 보여준다. 정육 쇼케이스 안에 총알과 수류탄 따위를 만들어 고깃덩어리처럼 진열한 작품 ‘무장가장’(武裝家長)도 노골적이긴 마찬가지다. 인생의 희로애락 중에서 작가는 ‘애’(哀)를 끄잡아냈다. 삶이 기쁘고 아름답다고? 잉? 그럴 리가! 허보리는 그리 따진다. 혹은 가혹한 삶을 위무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들을 모은 전시실도 있다. 가장 인기를 끄는 공간이란다. 새와 나무, 꽃을 그린 크레파스화들에서 드러나는 백남준은 어린애다. 세 살짜리 천진이 끼적인 낙서처럼 알량하나 생기롭다. 백남준의 나이 67세에 이 유치한 그림들이 나왔다. 도통하면 애로 돌아간다. 달통하면 쉬워진다. 그에겐 닫힌 게 없어 막힐 것도 없었다. 관조의 눈으로 세사를 넓게 읽었다. 자전거를 탄 모니터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라. 골치 아플 거 없이 쉽고 재미있다. 거기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나. 백남준은 남들이 안 하거나 못 하는 걸 찾아 해치우는 재주를 창작의 견인차로 삼았을 뿐이다. 백남준이 괴로워한 유일한 문제는 어쩌면 경제였다. 당신은 왜 TV 모니터로 작품을 일삼는가, 이런 질문에 돌아온 답이 이랬다. “돈이 있어야 예술도 되거든. 집에서 보내주는 돈도 끊겼고, 뭘 해야 돈이 되나 궁리를 하다 하다 TV에 착안한 거라고.”
본동 외에도 가나아트파크엔 다수의 건축물이 있다. 동쪽 끝자락에 있는 아틀리에 두 개는 모텔을 사들여 개조한 건물로 많은 작가들이 입주해 창작활동을 한다. 루브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 내부 설계를 맡았던 장 미셸 빌모트가 개조 설계를 했다. 도드라지기로는 미술관 중심부에 나란히 선 박스형 건물 세 채. 각기 통째로 파랑과 노랑, 빨강을 입어 매우 강렬하다. 이 미술관은 피카소 작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반가워라, 피카소! 파란색 건물에선 피카소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피카소의 일상을 담은 사진도 여러 점 내걸려 흥미롭다. 담배를 물고 싱긋 웃고 있으나 뭔가 길들지 않은 포악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표정의 피카소. 살기등등한 송골매의 눈으로 작업을 하는 피카소. 그는 도발적인 화풍으로 타성에 갇히기를 거부했다. 피카소의 작품은 이제 고전이 됐지만, 치열했던 자유의지는 시대를 관통하는 패션으로 남아 세상의 모든 ‘우물 안 개구리’들을 일깨운다.
노랑 건물엔 섬유작가 토시코 맥아담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그물놀이터 ‘에어 포켓’(Air Pocket)이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초대형 뜨개질 작품이다. 이 기이한 구조물엔 구멍이 숭숭 뚫려 아이들이 기어 들어가 놀도록 했다. 거미줄에 매달려 곡예를 하는 거미처럼. 미지의 차원으로 넘어간 듯, 아이들은 신비감으로 도취될 수밖에 없겠다.
미술관의 너른 정원엔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흔전만전하다. 류인, 문신, 강대철, 최종태, 앙투안 부르델, 조지 시걸, 세자르 발다치니 등의 작품들이 경연을 펼친다. 조각보다 보기에 좋은 풍경은 풀밭에 앉아 소풍의 한때를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정원을 희희낙락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이다. 이 미술관은 풀밭 위의 도시락 식사도, 야유회도, 낮잠 때리기도 허용한다. 분노도 많고 긴장도 많아 남몰래 아픈 그대여, 여기서 쉬어가라! 미술관은 그리 권하고 싶은가 보다. 이렇게 확 열린 미술관, 본 적 있나?
바다와 가장 가까운 철길이 강원도 강릉 정동진이라고 했다. 달맞이고개에서 동해남부선 열차를 봤을 때 이 철길은 바다와 두 번째로 가까울 거라로 생각했다. 빨간 무궁화열차가 바다에 닿을락 말락 실랑이하듯 달렸다. 그 낭만적인 풍경을 다시 보고 싶어 다음 열차를 한참 기다렸던 적이 있다. 이제 그 철길에 새 해변열차가 달린다.
동해남부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옛 동해남부선의 역사가 파란만장하다. 부산~포항을 오갔던 동해남부선 열차는 1935년 일제가 개통했다. 자원을 수탈하고, 일본인이 해운대를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무궁화호가 부산~울산~경주~포항을 오가며 오랫동안 서민의 발이 돼주었다. 2013년 동해남부선을 이설해 복선 전철화했다. 기존 철로를 복선화하려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설된 동해남부선은 2016년부터 영덕까지 가는 동해선으로 편입됐다. 동해남부선은 그렇게 영영 사라졌다.
동해남부선 노선 중 해운대 미포~청사포~송정 구간은 바다와 가까워 아름다운 철길로 꼽혔던 곳이다. 이 구간을 재활용할 방안을 두고 관련 기관과 전문가들이 고심했다. 레일바이크, 산책로, 자전거길, 노면전차 등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최종적으로 해변열차, 스카이캡슐, 산책로, 쉼터가 어우러진 철길 공원 ‘블루라인파크’를 조성하기로 했다.
2015년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드디어 올해 10월 해변열차를 개통했다. 철로 옆에는 덱 보행로인 그린레일웨이를 놓았다. 미포~청사포 구간에는 공중 레일을 설치해 스카이캡슐을 운행한다. 11월 말 개통할 예정이다.
영화 ‘해운대’와 미포의 추억
약 6년 동안 열차가 다니지 않던 철길에 다시 열차가 다닌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미포로 향했다. 미포는 해운대해수욕장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포구다. 미포의 ‘미’는 꼬리 ‘尾’ 자를 쓴다. 아름다울 ‘美’ 자를 써도 억지스럽지 않은 바닷가다. 미포에서 초승달처럼 해안선이 고운 해운대해수욕장과 동백섬, 광안대교,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포가 유명해진 계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해운대’(2009) 덕이 크다. 피서객 수백만 명이 모인 해운대해수욕장에 초대형 쓰나미가 시속 800km로 밀려와, 미포 횟집 거리와 미포 건널목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뛰어난 CG 기술로 참혹한 재해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한 장면이 생생하다.
미포 건널목의 실제 풍경은 고요했다. 건널목이 있는 언덕길의 끝은 바다였고, 바다 한가운데 오륙도가 떠 있었다. ‘땡땡땡’ 다급한 종소리가 언덕에 울려 퍼지면 차와 오토바이들이 건널목 앞에 섰다. 차단봉이 내려오고, 잠시 뒤 무궁화열차가 쌩하니 지나갔다. 열차 너머로 미포 앞바다가 반짝였다.
바다와 해송과 사람을 만나는 해변열차
지금 미포 건널목은 흔적만 남았다. 옛 건널목에서 청사포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해변열차 출도착역인 미포정거장이 나온다. 이국적인 모양의 해변열차가 기다린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 넉 대의 열차가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해변열차의 객차는 2량이며, 좌석이 창을 향해 두 줄로 배열돼 있다. 객차 앞뒤에는 독립된 4인 좌석이 있다. 줄을 빨리 서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해변열차는 미포정거장을 출발해 달맞이터널,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구덕포를 지나 송정정거장까지 약 5.4km 구간을 달린다. 시속 20km 내외로 천천히 달리므로 풍경을 여유롭게 즐긴다. 철로 옆 보행로를 걷는 사람들이 열차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든다. 열차 탑승객도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열차 안에서 바다, 솔숲, 어촌마을 구경하는 것 못지않게 사람 구경도 흥미롭다. ‘도심 속 해변열차’ 콘셉트가 해변열차의 매력 포인트인 것 같다. 보행로와 철로 사이에는 펜스가 설치돼 있고, 건널목 구간에는 안전요원이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
열차가 달맞이터널을 지나자 안내방송이 나온다. “해운대 달맞이고개 해월정 앞바다는 동해와 남해의 경계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11시 방향으로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부산 앞바다는 동해일까, 남해일까 묻는 퀴즈에 이제는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
등대가 아름다운 청사포와 다릿돌전망대
해변열차 자유이용권을 사면 맘에 드는 정거장마다 내려 관광하고 다시 탈 수 있다. 청사포정거장에 내려 청사포를 천천히 둘러본다. 청사포는 일출과 초저녁 달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포구 너머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연인처럼 서 있는 풍경도 그림 같다. 바닷가에는 오래된 조개구이집이 늘어서 있다. 이곳의 조개구이는 양념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가리비, 키조개 같은 큰 조개에 모차렐라와 양파를 듬뿍 넣은 고추장 양념을 얹어 굽는다.
청사포정거장에서 다릿돌전망대정거장까지는 가까워 걸어갈 만하다. 다릿돌전망대는 청사포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푸른 용을 형상화해 유선형으로 만들었다. 높이가 20m, 길이는 72.5m에 달한다. 전망대를 상공에서 보면 용이 꿈틀대며 바다로 들어가는 것 같다. 전망대 끝자락에는 반달 모양의 강화유리를 설치해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다릿돌이란 이름은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암초들이 징검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
다릿돌전망대를 지나면 기암괴석이 많기로 소문난 구덕포가 나온다. 철길가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카페, 숙박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도착점인 송정은 부산의 3대 해수욕장이라 불린다.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해 서핑 성지로 인기 있다. 추운 겨울에도 서퍼들을 볼 수 있다. 바닷가 주변이 해운대보다 한적해 송정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바다에서 보는 부산 야경
송정에서 다시 미포로 돌아오니 해 질 녘이다. 부산은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이므로 야경 유람선을 타보기로 했다. 6시 10분 배가 첫 야경 유람선이다. 겨울에는 오후 6시 전에 해가 지므로 야경 보기에 좋은 시간이다. 승객이 혼자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손님이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해운대 바닷가에 늘어선 고층 빌딩과 호텔, 동백섬의 누리마루 Apec 하우스, 신도시 마린시티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그 빛이 수면에 비쳐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야경에 방점을 찍은 것은 광안대교다. 해상에 건설된 국내 최대 규모의 2층 현수교로 높이 비상하는 갈매기를 형상화했다. 국내 기술진이 만든 다리여서 의미가 크다. 밤이 되면 10만 가지 이상의 색상을 표현하는 조명이 광안리 바다를 보랏빛으로 수놓는다.
뒤에 앉은 청년들이 “와 광안대교 야경 진짜 쩐다. 유람선 탄 건 신의 한 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런 멋진 야경은 처음 본다는 뜻이리라. 젊은 나이에 유람선에서 부산 야경을 봤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유람선이 광안대교 밑을 통과해 다시 미포로 돌아온다. 승선 시간 5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