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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모델 열정에 밴쿠버 런웨이도 좁아”
- 세계 5대 패션위크 중 하나로 꼽히는 밴쿠버 패션위크. 지난 10월 ‘2023 S/S(Spring/Summer) 패션위크’가 성대하게 열린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른 한국인 시니어 모델 두 명이 이목을 사로잡았다. 시니어 모델이 입은 의상을 만들고 쇼를 기획한 사람은 젊은 디자이너 이성빈(29)이다. 신구 조화를 이룬 무대가 완성되기까지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남성 의류 브랜드 와이쏘씨리얼즈(Why socerealz!)를 운영하는 이성빈 디자이너는 지난 7월 시니어 모델 오디션 ‘올드 보이’(Old Boy) 모집 공고를 냈다. 올드 보이는 밴쿠버 패션위크 무대에 설 최후의 2인, TOP 2를 선발하는 오디션이다. ‘나이 많은’(Old)과 ‘소년’(Boy)이 합쳐진 오디션 이름처럼, 이 디자이너는 순수함을 지닌 시니어 모델을 원했다. 1차 오디션에서는 8명이 뽑혔다. 이들은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1박 2일간 합숙하며 서바이벌 경쟁을 펼쳤다. 뜨거운 경쟁 속에 살아남은 최후의 2인은 김진환과 이충희다. 두 사람은 밴쿠버에서 시니어 모델로 정식 데뷔하며 꿈의 나래를 펼쳤다. “사실 최후의 2인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은 제가 처음 생각했던 우승자는 아니었어요. 시니어 모델로서의 헌신과 열정, 노력이 빛났기 때문에 뽑혔다고 생각합니다. 초반에 탈락할 줄 알았던 분들이 점점 성장하며 최후의 2인까지 되는 과정을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모든 참가자분이 오디션에 진심으로 임해주시니까 저도 어느 순간 엄청나게 몰입한 거죠. 또 두 분이 밴쿠버에서 멋진 무대를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 시니어 모델 오디션 탄생기 “사실 저도 시니어 모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어르신들이니 제가 만드는 옷이 괜히 올드한 이미지를 얻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죠.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시니어 모델들 덕분에 더욱 많은 도전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자신의 무대에 젊고 멋있는 모델이 서길 바라는 마음은 어느 디자이너나 똑같을 터. 젊은 디자이너인 이성빈도 시니어 모델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있었다. 시니어 모델과 작업을 해본 뒤 그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해 12월, 이성빈 디자이너는 올 4월 밴쿠버 패션위크 무대를 준비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시니어 모델 전문 아카데미 ‘EMA’(엘리트 모델 에이전시)에서 패션쇼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디자이너는 “밴쿠버 무대는 와이쏘씨리얼즈의 첫 번째 패션쇼로 매우 중요했다. 그 전에 경험을 쌓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EMA 패션쇼에 참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시니어 모델들은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가진 분들이지 않나.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셨다”면서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하면서 시야도 넓어졌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봤다”고 소감을 밝혔다. 무엇보다 그는 ‘그냥 무엇이든 해도 되는구나’를 경험을 통해 배웠다. 정식 패션쇼를 앞두고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쇼에 앞서 시니어 모델들의 사진을 보고 착장을 정했죠. 그런데 피팅할 때 뭔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모델들께 입고 싶은 옷을 골라서 입으라고 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으니 모델들의 포즈도 자연스러워지고 자신감도 넘치시더라고요.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하면서 배운 게 많아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덕분에 밴쿠버에서 좀 더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이성빈 디자이너는 첫 번째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독특한 무대를 펼친 그는 ‘이런 패션쇼는 처음’이라는 해외 언론의 호평도 받았다. 출발선을 잘 끊었으니 본격적인 다음 무대를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10월 밴쿠버 패션위크에 초청받아 다시 무대에 서게 됐다. 이때 EMA의 알렉스 강 대표가 밴쿠버 무대에 설 시니어 모델을 뽑는 선발대회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득이 될까, 독이 될까.’ 이성빈 디자이너는 고민이 많았다. 최종적으로 득이라고 생각해 도전을 강행했다. 4월 패션위크 당시 현지 모델만 기용한 이성빈 디자이너는 소통의 한계를 느껴, 자신이 원하는 연기력과 에너지를 완벽하게 채우지 못했다. 한국인이면서 열정 넘치는 시니어 모델이라면 당시의 아쉬움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왕 할 거면 선발대회를 재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올드 보이’ 오디션을 생각해냈다. 그는 “‘선발대회’라고 하면 보수적이고 재미없는 느낌이 든다. ‘슈퍼스타K’를 즐겨 본 터라 서바이벌 오디션을 기획하게 됐다. 영상도 찍어서 유튜브에 순차적으로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상에는 TOP 2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시니어 모델 참가자들과 함께 심사위원인 이성빈 디자이너와 알렉스 강 EMA 대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두 사람의 심사가 인상적이다. “키 크고 잘생긴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심사 기준은 얼마나 미션을 잘 이해하고 수행하느냐, 얼마나 담대하고 재밌게 연기를 펼치느냐가 중요했죠.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이 뽑히신 이유예요.” 이성빈 디자이너가 시니어 모델을 이번 패션쇼에 기용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와이쏘씨리얼즈의 2023 S/S 콘셉트와 시니어 모델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와이쏘씨리얼즈는 영화 ‘다크 나이트’ 속 조커의 명대사 ‘Why So Serious?’(왜 이렇게 심각해?)라는 물음에 위트 있게 대답하는 브랜드다. 재치 있고 독특한 옷을 통해 심각하고 완벽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2023 S/S 콘셉트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장 3~5절)라는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성품이 생기고, 그 성품이 생겨서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시니어분들이 연단의 대명사잖아요. 시니어 모델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한계가 없는 인생과 패션 밴쿠버 패션쇼에서 시니어 모델 두 사람은 외국인 모델들이 지나간 뒤 마지막에 등장했다. 이충희는 조커를 연상케 하는 분장을 하고 범상치 않게 나타났다. 소리를 지르며 모델을 끌고 나와 공포감을 형성했다. 이어 등장한 김진환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비둘기 분장을 한 것도 모자라 손에 비둘기 모형을 들고 있었다. “이충희 모델님은 고통을, 김진환 모델님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충희 님은 소리도 지르고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고요. 김진환 님의 의상은 희망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콘셉트로 잡은 거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줄다리기하는 것은 고통과 희망 중 누가 더 센가를 표현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희망이 이겼죠. 관객분들의 반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다가 마지막에는 많이 웃으시더라고요.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이 아이디어도 많이 내주시고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더욱 완성도 있는 무대가 나왔습니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이성빈 디자이너.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옷 역시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그의 컬렉션을 보면 천사와 악마, 조커 등에서 영감을 받은 옷이 많다. 2021 S/S 콘셉트는 ‘Fruits & Veggies’(과일과 야채)였는데, 이 디자이너는 상추·가지·키위 등을 활용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와이쏘씨리얼즈는 당시 ‘프로젝트 라스베이거스 국제 패션박람회’에 참가해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든 옷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고 한계가 없다. 스무 살까지만 해도 그는 부모님이 정해준 삶을 산 착실한 아들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진짜 자신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계속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이후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2년간 해외를 돌아다녔다.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로웠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행복했다. 그때의 여행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여행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의 아들’, ‘어디 사는 누구’, ‘무슨 일을 하는 누구’가 아닌, 그냥 온전한 자신을 마주하게 되죠. 여행을 하면서 제가 옷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나라를 가든 옷 쇼핑이 가장 즐거웠죠. 이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해보자 생각해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성빈 디자이너는 패션 디자인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패션 디자인 학원과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다. 열정 넘치는 학생이었던 그는 선생님들에게 개인 레슨도 따로 받으며 실력을 연마했다. 동시에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태원에서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 직수입 편집숍을 운영했다. 디자이너로서 실력을 갖춘 후에는 편집숍에서 자체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 브랜드가 바로 와이쏘씨리얼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옷에 자신이 투영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에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다. 이 고통 뒤에 좀 더 강해진 내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고통과 희망이 주제가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디자이너는 앞으로도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옷을 통해 성경의 좋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시니어 모델과의 작업 또한 지속하고 싶단다. 시니어에 대한 젊은 세대의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갓 서른 살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제가 시니어 모델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 고통받으면서도 인내하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시니어분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제가 상상하지 못할 강함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2022-12-1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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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감성 채워주는” 11월 문화소식
- ●Exhibition ◇바티망 일정 12월 28일까지 장소 노들섬 노들서가 건물 외벽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듯한 착각을 안겨주는 설치 예술 ‘바티망’(Ba^timent)이 국내에 착륙했다. ‘바티망’은 프랑스어로 ‘건물’을 뜻하며, 현대 미술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1973)의 대표작이다. ‘바티망’의 구조는 실제 건물 모양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와 거울로 이뤄졌다. 이에 관람객이 작품에 올라서면 마치 건물 외벽에 매달린 듯한 모습이 거울에 반영된다. 더불어 관람객은 바티망 위에서 창의적인 포즈를 취하며 작품을 즐길 수 있고, 그 자체가 작품이 되는 예술적인 경험에 빠져든다. ‘바티망’은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개된 이후 18년간 런던, 베를린, 도쿄, 상하이 등 전 세계 대도시를 투어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17년 도쿄와 2019년 베이징에서 진행된 투어에는 하루 평균 4500명 이상 방문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올해는 한·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바티망’뿐 아니라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2009), ‘교실’(Classroom, 2017), ‘세계의 지하철’(Global Express, 2011). ‘비행기’(El Avio′n, 2011), ‘야간 비행’(Night Flight, 2015) 등 일상적 소재를 매개로 신선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가의 다양한 설치·영상·사진 작품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에바 알머슨, Andando 일정 12월 4일까지 장소 전쟁기념관 ‘행복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는 스페인 출신 에바 알머슨(Eva Armisen)의 국내 세 번째 전시다. 3년 만에 내한한 에바 알머슨은 “한국은 항상 두 팔 벌려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특별한 나라”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전시의 테마인 ‘Andando’(안단도)는 스페인어로 ‘계속 걷다’라는 뜻으로, 전시는 에바 알머슨의 일생을 회고한다. △삶을 그리다 △가족 사전, 일상의 특별함 △사랑 △자가격리자들의 초상화 △광장 △애니메이션 △자연 △삶 △연약함과 강인함 △축하 △영감 등 총 11개 공간으로 구성됐다. 드로잉, 유화, 대형 조형물, 조각 등 150여 점이 전시됐으며, 최초로 공개된 다수의 최신작을 만날 수 있다. ●Book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플뢰르 펠르랭·김영사)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느낍니까, 프랑스인이라고 느낍니까?” 이 질문은 2013년 한국을 찾은 프랑스 장관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이 들은 말이다. 당시 플뢰르 펠르랭의 답은 ‘프랑스인’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그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답이었다. 플뢰르 펠르랭은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에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으로 발탁된 후 통상·관광·재외교민 담당 국무장관,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지내고 퇴임했다. 이후 2016년 파리에서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운 그는 벤처 투자자로 변신, 유럽 스타트 업계의 큰손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 출간되는 그의 첫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는 그가 프랑스에 ‘도착’한 날부터 정치인과 사업가로서의 최근 활동까지 담았다. 동시에 2013년 자신을 마치 ‘딸처럼’ 환영했던 한국인에게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성별, 배경, 경계를 이탈해 눈부신 성취를 이어가는 펠르랭의 서사는 소통과 공감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면서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추천했다. ◇조선의 대기자, 연암(강석훈·니케북스)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연암을 기자의 원조라고 생각했다. ‘열하일기’에는 조선의 정치와 학문 풍토, 선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질타가 포함돼 있다. 연암의 기자 정신은 현재의 기자들에게도 본보기가 된다. ◇전 세계 최초로, 향기를 마신다(김용식·모아북스) ‘마시는 향기’란 천연 재료에서 나온 천연 향기를 포집한 것으로, 우리 몸에 바르거나 마실 수 있는 물질이다. 한의학 박사인 저자는 상세한 연구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마시는 향기’가 건강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 마을에 저녁이 내리는 소리(한창수·페이퍼로드) 소년 모모의 친근한 이웃들은 사실 인류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 위대한 철학자들이다. 모모는 일상 속에서 이웃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렵게만 느꼈던 철학 사상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Stage ◇브로드웨이 42번가 일정 11월 5일 ~ 2023년 1월 15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오루피나 출연 송일국, 이종혁, 정영주, 배해선, 신영숙, 전수경, 홍지민, 오소연, 유낙원, 김동호 등 브로드웨이 쇼 뮤지컬의 대명사로 불리는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3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지망생 페기와 연출가 줄리안, 한물간 프리마돈나 도로시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1996년 한국 최초 정식 라이선스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 시즌은 한국 초연 26주년을 기념한 공연으로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을 자랑한다. 브로드웨이 최고 연출가 줄리안 마쉬 역은 2016년 ‘브로드웨이 42번가’로 뮤지컬에 데뷔한 송일국, 다섯 시즌 연속 캐스팅된 이종혁이 연기한다. 한때 최고의 뮤지컬 스타였지만 지금은 그 명성을 잃어버린 프리마돈나 도로시 브록 역에는 정영주, 배해선이 캐스팅됐고 새로운 캐스트로 신영숙이 합류한다. 제작자 메기 존스 역은 ‘브로드웨이 42번가’ 초연 멤버이자 역대 최다 출연 타이틀을 기록하고 있는 전수경, 그리고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홍지민이 더블 캐스팅됐다. ◇드라큘라 일정 11월 15일 ~ 2023년 1월 15일 장소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 연출 노우성 출연 신성우, 안재욱, 정동하, 테이, 김진환, 유승우, 이병찬, 종형, 김법래, 이건명 등 3년 만에 돌아오는 ‘드라큘라’는 1995년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에서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유럽 뮤지컬의 대표작이다. 1998년 국내에서 초연된 이후, 드라큘라의 매혹적인 스토리에 몰입감을 높이는 무대 연출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번 ‘드라큘라’에서는 신성우, 안재욱, 정동하, 테이가 드라큘라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특히 초연부터 지금까지 드라큘라 역을 연기한 신성우는 관록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또한 아이콘 김진환, ‘슈퍼스타K’ 출신 유승우, ‘내일은 국민가수’ 이병찬, DMZ의 종형 등도 출연하며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에쿠우스 일정 11월 8일 ~ 2023년 1월 29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연출 이한승 출연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김시유, 강은일, 백동현 등 1975년 국내 초연 이후 매 공연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극 ‘에쿠우스’가 3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올해는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 62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로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김시유, 강은일, 백동현 등 공연계 중견 배우부터 신예 배우까지 색다른 조합의 라인업을 자랑한다. 에쿠우스(Equus)는 라틴어로 말(馬)을 뜻한다.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소년 알런 스트랑과 그의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정상·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근원적 고찰을 담아낸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2-11-2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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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시니어가 주인공, 유튜브에 빠지다
- 시니어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젊은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때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처럼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며 젊은이들과 소통하기도 하고 새로운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솔직한 느낌을 털어놓는다. 최근 화제가 된 시니어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소개한다. ‘시니어 유튜버’ 대표주자, 박막례(73) 씨 채널명: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구독자: 약 80만 명 박막례 씨 채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다채로움에 있다. ‘트러플오일 쏟아부은 감자튀김 먹어보기’, ‘지옥의 냄새 과일 두리안 먹어보기’ 등 먹방(먹는 방송)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른 메이크업, 여행, 드라마 리뷰 등 다양한 영상을 올린다. 여기에 그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채널 개설 2년여 만에 8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엔 한국 시니어 유튜버 대표로 미국의 IT 기업 구글 본사에 초청되기도 했다.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인기 동영상 3 1 막 대충 만드는 비빔국수 레시피 2 욕했던 연예인을 눈 앞에서 만났을 때 3 치과 들렸다 시장 갈 때 메이크업 야무진 먹방이 일품! 김영원(82) 씨 채널명: 영원씨01seeTV 구독자: 약 18만 명 한국의 최고령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꼽으라면 올해 82세가 된 김영원 씨가 있다. 그가 주로 선보이는 콘텐츠는 바로 먹방. 비록 젊은이들처럼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지구젤리’, ‘눈알젤리’ 등 최근 이슈가 된 음식은 물론 얼굴 크기만 한 닭다리, 랍스터 등을 두 손으로 잡고 야무지게 먹는다. 신 음식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찌푸려지는 표정과 맛있게 먹는 모습에 미소가 번진다. ‘영원씨01seeTV’ 인기 동영상 3 1 영원씨의 자메이카 통다리 먹방 2 영원씨의 불량식품 먹방 3 영원씨의 신전떡볶이 먹방 이젠 유튜브에 미치다, ‘할담비’ 지병수(77) 씨 채널명: 할담비 지병수 Korean Grandpa's crazy k-pop 구독자: 약 1만 명 KBS1 ‘전국노래자랑’이 낳은 화제의 스타 ‘할담비(할아버지와 손담비의 합성어)’ 지병수 씨도 인기의 기세를 몰아 시니어 유튜버로 변신했다. 그는 영상을 통해 박진영의 ‘허니’,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등 노래에 맞춘 안무를 선보였다. 지 씨는 채널을 통해 “다음에는 집 말고 노래방으로 가서 제대로 춤을 보여주겠다”라고 전했다. 그의 영상을 본 구독자의 반응도 뜨겁다. 개설한 지 3일 만에 구독자 수 1만 명을 돌파했다. 앞으로 ‘할담비’ 지병수 씨의 활약이 기대된다. ‘할담비 지병수 Korean Grandpa's crazy k-pop’ 인기 동영상 3 1 세로직캠 '허니''인디언 인형처럼''미쳤어' 2 지병수할아버지의 채널오픈 미공개 춤 공개 3 손담비와 춤을, 연예가중계 후기 그리고 최초 집공개 재단사 간접 체험, 여용기(67) 씨 채널명: 꽃할배TV 구독자: 약 1000명 ‘부산의 닉 우스터’, ‘남포동 꽃할배’라고 불리는 재단사 여용기 씨도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만큼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는 패턴 뜨기, 재단 등 그의 직업과 관련된 영상을 주로 올린다. 이외에도 ‘유튜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먹방, 체험 등의 영상도 있다. ‘꽃할배TV’ 인기 동영상 3 1 '슈퍼셀피 찍고 마산곱창 먹고' 2 About EREDITO 3 남포동 꾸르맛 50년 전통 JMT #백화양곱창
- 2019-04-0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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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2017년 정유년 대중문화 트렌드와 스러진 별들
-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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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하면 떠오르는 스포츠는?
-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9-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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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 뉴컬처 키워드] 가수들의 콜라보
-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제가 어린데 (노래가)좋네요. 저도 나이 곧 들겠지요.”(박혜인) “올해 29세인데 이 노래가 심금을 울려요.”(lemon77) “나이 들어 들으니 정말 와 닿는 가사네요.”(강경숙) “중학교 때 눈물 흘리며 듣던 곡인데 50 가까운 지금 들어도 눈물이 나요.”(원석정)… 한 노래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이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올해 초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에 OST로 삽입된 출신 가수 김필과 김창완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을 통해 재탄생한 ‘청춘’이다. 신세대 가수 김필과 중견 가수 김창완의 콜라보레이션곡 ‘청춘’은 원곡이 발표된 지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되살리는 음악으로, 신세대에게 요즘 대중음악에서 접할 수 없는 정서와 의미가 담보된 노래로 다가간다. 최백호와 후배 가수 린이 5월 14일 방송된 KBS 에서 1982년 발표해 대중의 폭발적 사랑을 받은 김수희의 ‘멍에’를 새로운 감각으로 편곡해 신선한 콜라보 무대를 선보여 관객과 시청자의 큰 박수를 받았다. 요즘 대중음악의 가장 큰 트렌드이자 키워드는 콜라보다. 콜라보레이션은 마케팅에서 각기 다른 분야에서 지명도가 높은 둘 이상의 브랜드가 손잡고 새로운 브랜드나 소비자를 공략하는 기법으로, 주로 패션계에서 디자이너 간의 공동 작업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됐다. 최근 들어 콜라보는 대중음악에서 가수와 가수 등 음악가끼리, 혹은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 등과 일시적으로 팀을 이뤄 작업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2014년 남자 가수 정기고와 걸그룹 씨스타 멤버 소유의 콜라보곡 ‘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가수들의 콜라보가 하나의 인기 트렌드로 강력하게 부상했다.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미쓰에이 수지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엑소 백현을 비롯한 소속사가 다른 가수들, 록그룹 국카스텐의 하현우와 트로트 가수 주현미 등 장르가 다른 가수 등 다양한 형태의 가수들의 콜라보를 통해 탄생한 노래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김창환-아이유의 ‘너의 의미’, 비와 태진아의 ‘라송’등 세대가 다른 가수들의 콜라보는 큰 관심을 끌고 있다. 1980~1990년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독특한 음색의 이광조와 인디 가수 요조의 ‘케이팝 클래식(K-POP CLASSIC)’을 비롯해 아이유와 양희은, 이문세와 슈퍼주니어의 규현 등 40~60대 가수와 10~20대 가수 및 아이돌 그룹의 콜라보 음반에서부터 공연까지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 작업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음반 기획자들은 “대중음악계에서 요즘 전개되는 가수들의 콜라보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돼 앞으로 더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아이돌 가수의 경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 가수와 호흡을 맞출 수 있고, 중견 가수의 경우 젊고 역량 있는 후배와 신선한 조합으로 색다른 감성을 전달할 수 있다”며 대중음악계에서의 가수들의 콜라보 전망을 긍정적으로 진단했다. 이처럼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를 비롯한 가수들의 콜라보가 성행하는 이유는 뭘까. 성격이 다른 가수들의 콜라보는 기존 활동했던 모습이나 음악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전달할 수 있고, 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양희은, 김창완, 이문세 등 선배 가수들과 콜라보를 자주한 아이유는 “선배들과의 콜라보는 또래 뮤지션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음악적 정서와 감성, 스타일을 배울 소중한 기회다. 선배 가수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내 음악의 스펙트럼도 확장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음원과 디지털 싱글 등 대중음악 시장이 디지털 온라인 중심으로 전환한 것도 가수들의 콜라보가 급증한 이유의 하나로 꼽힌다. 디지털 중심의 대중음악 환경에서는 적은 제작비로 쉽게 디지털 싱글을 제작할 수 있어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KBS , SBS , MBC , JTBC 등 음악 예능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난 것도 다양한 가수들의 콜라보 등장을 낳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음악과 게임, 경연 등 다양한 예능 장치를 음악과 혼합한 음악 예능이 늘어나면서 가수들의 콜라보 무대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 드라마와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서 1970~1990년대 복고 바람이 강타한 것도 가수들의 콜라보를 대중음악의 인기 트렌드로 부상시킨 원동력이다. 최근 드라마 , 예능 프로그램 등 대중문화 전반에 복고 바람이 불며 1970~1990년대를 소환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의 복고 신드롬은 자연스럽게 1970~1990년대의 노래와 가수들의 소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과거 전성기를 누린 가수들의 원곡 그대로가 아닌 원곡 가수와 신세대 가수들의 콜라보를 통해 새롭게 재탄생한 노래들이 큰 사랑을 받았다. 이 때문에 대중문화 전반에 복고 코드 득세와 함께 가수들의 콜라보 특히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가 성행하게 됐다. 대중음악에 강력한 트렌드이자 키워드로 떠오른 콜라보는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다른 장르 간, 신구 세대 간, 다른 소속사 간 가수들의 콜라보를 통해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하면서 대중음악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고 가수들 역시 자신들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대할 수 있다. 록밴드 국카스텐과 콜라보 무대를 가졌던 트로트 가수 주현미는 “국카스텐과 콜라보하면서 내 노래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국카스텐과의 콜라보를 통해 내가 하는 트로트도 얼마든지 젊은 감각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한, 콜라보를 통해 대중음악 수용자를 확장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가수들의 다양한 형태의 콜라보가 진행되면서 작업에 참여한 가수들의 팬덤이 합쳐지며 시너지를 내고 이것이 팬층의 확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특히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의 경우, 선배 가수들이 인기가 높은 신세대 가수와의 콜라보를 통해 신선한 감각과 신곡에 민감한 젊은 층을 공략할 수 있고 신세대 가수들은 전설적인 선배 가수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음악 완성도를 높이고 기성세대에게도 존재감을 알리는 효과가 크다.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는 음악 시장의 주요 소비층인 10∼20대에게 부모 세대의 음악을 이해하게 하고, 기성세대에게는 젊은 스타의 최신 음악에 관심을 끌게 해 10~20대 젊은 층 위주의 국내 음악 시장 한계를 극복하는 돌파구 역할도 한다. 회사원 장동수(48) 씨는 “의 OST ‘청춘’을 통해 김창완과 콜라보한 김필이라는 가수를 처음으로 알게 됐고 그의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됐다. 고교생 딸은 반대로 ‘청춘’을 통해 김창완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고 음반까지 구입했다”고 말했다. 가수들의 다양한 형태의 콜라보는 무엇보다 취향 간, 세대 간, 스타 팬덤 간의 벽과 단절을 허물고 이해와 교류, 소통의 접점을 확장하는 의미 있는 결과도 낳고 있다. 아이돌과 7080 가수와의 콜라보는 신세대는 부모 세대의 문화를, 부모 세대는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아이유, 장기하와 얼굴들, 김필 등 젊은 가수들과의 왕성한 콜라보를 진행하고 있는 김창완은 “가수들의 콜라보는 상이한 연령, 취미 등을 가진 사람들 상호 간의 이해의 장을 마련해줘 대중음악 소비층의 확장뿐만 아니라 세대 갈등 등 사회적 문제 해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 2016-07-0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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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광복 70년을 빛낸 가수와 노래들 - 임진모 음악평론가
- 광복 70년의 역사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분야보다도 일반 대중의 정서와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반영하면서 문화의 선두에 서왔다. 한국 사회의 발전상을 축약하면서 우리의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알고 기억하는 가장 많은 스타들을 내놓은 곳이 대중가요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글 임진모 음악평론가 광복과 함께 대중음악은 산업적 덩치를 키운 것은 물론 서구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갖가지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예술적 성장과 성숙을 거듭했다. 대중음악은 광복 이후 70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꽃을 피운 것이다. 광복 이전에도 대중이 사랑한 음악은 있었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고복수 등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가수들은 애초 세련된 음악이었으나 갈수록 서민대중의 호흡과 동행한 음악으로 남은 것은 이후 성인가요로 불린 트로트였다. 조금은 저학력과 가난 혹은 단순한 재미로 연결되는 음악이지만 트로트는 꾸준하게 서민대중의 희로애락을 반영하면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광복 이후에 트로트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출현하면서 다시금 힘찬 날갯짓을 했다. 1964년 발표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역사상 최초로 100만장에 준하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미자는 특히 1960-70년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한과 설움을 삼킨 여인들을 대변한 비가(悲歌)를 많이 부르면서 한국 최고의 여가수, 세기의 가수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우리 대중문화 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을 전개한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의 별이었다. 전국을 삼킨 두 가수의 인기대결은 국민 전체가 둘로 나뉘어 설전을 벌일 만큼 살벌했다. ‘님과 함께’를 비롯한 조금은 밝은 톤의 노래를 한 남진이 경제성장 시기의 빛이었다면 ‘물레방아 도는데’와 같은 구슬픈 노래로 이농(離農)의 고통을 표현한 나훈아는 경제성장 시기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단은 그러나 남진과 나훈아가 겨뤘던 때를 트로트의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그때까지 어떤 장르들보다도 드높은 위용을 자랑했으나 이후에는 시장의 헤게모니를 다른 스타일에 넘겨주게 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하춘화, 1980년대 주현미와 현철, 1990년대 태진아와 송대관, 그리고 2000년대 ‘어머나’의 장윤정으로 트로트계보는 쉼 없이 이어졌지만 위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1960년대 중반까지 독점적 위력을 행사한 트로트는 광복 후 전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문화가 물밀듯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외국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용산 동두천 부평 대구 등 이른바 미8군 지역의 영내와 영외에는 우리 음악가들의 미군을 위한 공연활동이 러시를 이뤘고 이후 그들은 국내 무대에 진출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꿨다. 트로트 일색이었던 음악계에 그들이 들여놓은 음악은 미국의 재즈와 팝에 기초한 소위 ‘스탠더드 팝’이란 것이었다. 아직도 용어가 불분명한 이 스타일의 음악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진 해에 히트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현미,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패티김, 정훈희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발라드를 잘 소화한 스탠더드 팝가수들은 미8군 출신답게 팝송도 자주 불렀으며 노래에 영어를 자주 썼다. 이 가운데 ‘하숙생’의 최희준과 ‘서울의 찬가’의 패티김이 특급스타였다. 서구음악인 스탠더드 팝은 기조와 성격에 있어서 트로트와 대치되는 음악이었지만 국내 방송의 ‘10대 가수가요제’와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트로트와 병치되면서 같은 ‘어덜트(adult)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의 전쟁세대라고 할 1930-40년대 생 인구의 음악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할까. ‘록’ 신중현과 ‘포크’ 김민기 미8군을 통해 국내 소개된 음악 중 1950년대 생 이후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는 청춘의 뜨거운 피를 담은 로큰롤, 즉 록으로(그때 말로는 ‘그룹사운드’) 궁합을 맞췄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청춘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키보이스’를 위시한 그룹사운드가 판을 쳤다. 하지만 역사는 국내 최초의 록밴드 ‘애드포’를 결성한 신중현을 ‘한국 록의 대부’로, ‘한국 대중음악의 총설계자’로 상찬하며 고평을 집중한다. 블루스와 싸이키델릭 등 서구의 음악문법을 창조적으로 가공해 우리식 록의 프레임을 주조해냈다는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스스로 ‘아름다운 강산’, ‘미인’과 같은 명곡을 부른 가수인 한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김정미 등에게 ‘커피 한 잔’, ‘임은 먼 곳에’, ‘미련’, ‘봄비’, ‘봄’ 등 요즘 기준에서도 빼어난 수준의 음악을 잇달아 써준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스타가수들을 언론은 ‘신중현사단’으로 일컬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시대의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에 활동이 급정지된 그와 함께 한국의 록은 침체기로 접어든다. 록만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사운드트랙인 포크도 독재통치의 철퇴를 맞는다. ‘청통맥’ 즉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표현된 베이비붐 세대들의 꿈과 도약, 아픔과 좌절을 창의적으로 그려낸 많은 포크송 가수들이 활동금지를 당하거나 은둔의 처지에 몰렸다.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김정호 등이 한국 포크의 기수들이었다. 이들 음악은 전쟁세대보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어필했다. 포크 가수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곡을 만들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이전의 악단과 전문 작곡가가 지배한 풍토에서 탈피, 소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시대를 개척했다. 대부분 자기가 쓴 곡을 담은 LP를 최초로 출반한 김민기에 자극받아 동시대의 많은 가수들이 자작곡을 내놓은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김민기는 록의 신중현과 같은 인물이다. ‘아침이슬’ ‘백구’ 등 그가 작곡해준 곡을 불러 유명해진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음악의 자가발전을 이뤘다는 점에서 포크를 ‘한국 음악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정의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하지만 포크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서라 할 청춘스피릿이 당시 군사정부와 충돌하면서 대마초 파동이라는 암흑기를 초래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네 범주 가운데 어덜트 음악인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1980년대에 들어 정체상태를 맞은 반면 시련을 맞은 영(Young) 음악인 록은 1977년 대학가요제와 밴드 ‘산울림’의 등장으로 힘차게 재도약한다. 참신하고 재기에 넘치는 가사와 실험적인 곡 전개를 특징으로 한 산울림은 흑인음악인 펑크(funk)를 실험한 ‘사랑과 평화’와 함께 록의 기운을 되살렸다. 포크는 1970년대 중·후반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을 거친 뒤 시대를 고발하는 민중가요를 낳았고, 1990년대에는 김광석이 활약했지만 장르의 파괴력은 2000년대 들어서 현저히 후퇴했다. ‘가왕’ 조용필, ‘10대 대통령’ 서태지 1980년대의 특급 스타들인 조용필, 윤수일, 김수철, 구창모 등은 대부분 록의 세례를 받은 가수들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밴드를 거느리며 대중적 록의 위용을 뽐냈다. 밴드 송골매와 벗님들은 TV에서도 맹활약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훗날 ‘가왕’으로 통한 조용필의 것이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발랄한 록으로 10대 오빠부대를 이끄는 동시에 ‘허공’ 등 트로트 성향의 노래도 불러 다세대를 망라한 국민가수의 면모를 과시했다. 또한 앨범마다 혁신을 불어넣어 단일 곡이 아닌 앨범 전체의 미학과 음악적 완성도가 중요해진 흐름을 견인했다. 아마도 베이비붐 세대와 1960년대 중반 생 이후의 포스트 베이비붐을 함께 묶는 유일한 가수가 조용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활약하던 1980년대는 가요계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때라서 이전 음악계에는 없던 갖가지 장르의 음악이 용암이 분출하듯 솟아올랐다. 김현식, 한영애, 들국화와 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젊은이들이 찾았고 ‘봄여름가을겨울’과 김현철은 재즈를 실험했으며 ‘신촌블루스’처럼 블루스를 시도한 음악가도 나왔다. 이문세에 곡을 준 이영훈과 비운의 천재 유재하는 뽕짝 즉 트로트 느낌을 완전 배제한 팝 발라드의 꽃을 피웠다. 이 음악과 함께 고학력 여성들도 시장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됐지만 음악의 주도권은 하이틴으로 넘어가 나미, 김완선, 소방차 등 10대가 좋아하는 댄스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중심이 ‘10대’와 ‘댄스음악’이라는 트렌드를 정확히 간파해 시대를 가른 인물은 1992년 광풍을 야기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점프한 케이팝 새로운 음악인 랩을 가요에 접목한 서태지는 신세대인 X세대의 공격성을 노골화한 음악을 구사해 10대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으로 불렸다. 그가 랩을 끌어들이고 잠시 후 김건모가 ‘레게’를 유행시키고 듀엣 ‘듀스’가 ‘힙합’을 퍼뜨리면서 1990년대 국내음악 판은 과거에는 홀대된 흑인음악으로 쏠려갔다. 한 사회학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흑인음악에 열광하는 것은 백인음악에 압도적으로 경도된 기성세대에 대한 은근한 반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태지가 은퇴를 선언한 1996년부터 음악계는 댄스와 비주얼을 내건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가수들이 판세를 장악했다. 동아시아에 한류 붐을 터뜨린 ‘에쵸티’(H.O.T.)를 시작으로 2세대라고 할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투애니원’ 등 아이돌 댄스음악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대세를 몰이하며 장수하고 있다. ‘애들 음악은 5년을 못 간다!’는 속설을 깼을 뿐 아니라 ‘텔 미’의 걸 그룹 원더걸스가 등장한 2007년부터는 케이팝(K-Pop)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간 우리의 아이돌음악은 세계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문화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이돌 댄스의 주류음악에 반발해 독립을 외친 인디음악이 소생하기도 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IMF 시절 넥타이부대의 찬가로 등장, 인디의 가능성을 알렸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요원했던 빌보드 차트에서 5주간 2위를 차지, 케이팝의 지평을 크게 올려놓았다.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알았다”는 세계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각 세대와 계층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대중의식을 이끌어온 대중음악이 광복 70년 역사의 내공을 발휘하며 이제 내수시장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 찬란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케이팝이란 깃발 아래 우리 역사의 사운드트랙은 시제를 미래로 맞추고 있다. △ 임진모 음악 평론가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후 경향신문과 내외경제신문기자를 거쳐 1991년부터 음악평론. 라디오 출연 등 전파. 인쇄매체에서 폭넓게 활동중이다.
- 2015-08-0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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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80 타임머신①] 5060세대들의 청춘시절, 연애의 재발견
- 70~80년대 나눴던 연애방식을 추억 따라 가보자. 데이트장소, 사랑의 징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 등에서 묻어난 추억속의 아련한 커뮤니케이션이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 # 1981 명동... M.net ‘슈퍼스타K 시즌 5’에서 화제를 일으킨 바 있는 김대성 스테파노(60)씨. 그는 아내와의 이야기로 유명해졌다. 방송에서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20년 전 사별한 아내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결혼 이야기보다 결혼 이전의 이야기가 더 극적이다. 때는 1981년. 그 해는 김씨가 힘들었던 군대를 전역한 해였다. 이 땅의 모든 청춘이 그렇듯 김씨도 전역이라는 해방감을 친구들과 함께 누리고 있었다. 장소는 서울 명동의 조선호텔 건너편 ‘포시즌’이라는 술집. 늘 그렇듯 전역 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다. 회포는 거하게 풀었지만 고민에 대한 답은 시원치 않았다. 이윽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김씨의 앞에 눈부신 아가씨가 지나갔다. 대뜸 그 빨간 원피스의 여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지금 세대였다면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끝날 일이었지만, 그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락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흉흉한 요즘이라면 자칫 치한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첫눈에 반한 그녀를 놓치기 싫었던 김씨는 버스 안에서 용기 내 운을 뗀다. 정말 ‘대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만납시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말에 그녀가 진저리를 치며 얘기한다. “당신 미쳤어요?” 그야말로 미친 놈 취급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리는 정류장에 따라 내린 것.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집 전화번호를 건넸다. 연락을 달라고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간절하게 부탁했다. “3월 1일 1시, 명동에 있는 서울 다방에서 기다릴게요.” 떨리는 한마디를 꺼낸 뒤 그는 유유히 사라졌다. 약속된 날짜가 다가오면서 설렘은 커져갔다. 근데 정말 공교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약속된 날짜를 이틀 남겨놓고 김씨가 급성 맹장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3월 1일 1시 서울다방’ 뿐.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친구에게 부탁해 혹시 그녀가 오면 내 상황을 설명해 주라고 한 것. 그러나 그것도 헛수고였다. 그녀는 서울 다방에 나오지 않았다. 김씨에게 ‘3월 1일 1시 서울다방’ 은 메아리 없는 설렘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친구에게 한 가지 더 부탁했다. 여기에 왔다 갔다는 쪽지를 다방에 남겨달라고 말이다. 메모와 쪽지는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휴대폰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로맨스, 인스턴트 로맨스가 아닌 아날로그 로맨스, 기다림의 로맨스였던 것이다. 김씨에게 그녀는 옷깃만 스친 인연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잊히지 않았다. 퇴원 후,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태였지만 무작정 망원동 홀트아동복지회로 향했다. 첫 만남 당시 알고 있던 정보인 ‘망원동의 조씨’라는 것만 믿고 말이다. 당시 망원동 교통의 요지는 ‘홀트아동복지회’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기다리면 그녀와 마주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그곳으로 출퇴근한 지 하루, 이틀, 사흘을 지나 열흘이 흘렀다. 그러나 마주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아니 끝인 듯 했다. 그렇게 잊혀가는 듯했다. 금세 일상으로 돌아왔다. 계절이 두 번 바뀌어 어느새 가을이 됐다. 선배가 명동에서 운영하는 구둣가게를 찾았다. 선배와 일상적인 대화의 꽃이 무르익을 무렵 김씨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됐다. 눈을 찡그리며 실눈을 뜨고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망원동 그녀였다. 이야기를 끊고, 선배에게 물었다. “저기 일하는 사람 망원동 살아요? 혹시 성이 조씨예요?” 선배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씨는 확신했다. ‘이게 인연이라는 거구나.’ 이후 상황은 급진전됐다. 자연스럽게 말할 기회도 생겼고, 만남도 가졌다. 그리고 3월 1일 서울 다방에 왜 나오지 않았는지, 망원동에서는 왜 보이지 않았는지 모두 들을 수 있게 됐다. 다소 불량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만남에 응하지 않았던 것. 망원동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은 공교롭게도 3월 1일 즈음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음악에 미쳐 베짱이 같은 놈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결국 만남과 만남이 이어져 애정에 싹이 텄다. 남한강 데이트, 일터 데이트 등을 통해 애정을 키워나간 끝에 그들은 결혼에 골인했다.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애틋한 사랑. 7080을 살았던 세대들의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에는 순수함이 있다. 요즘 세대들은 편지를 전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편지지를 몇 번이고 찢고 찢은 이야기를 믿기나 할까. 편지와 메모 그 필체에서 전해지는 진한 감성은 점차 사라져 간다. 7080을 살아온 세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길.
- 2014-11-2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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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스케5’ 김대성 스테파노(60), 아내와의 강렬한 첫 만남에서 사별까지…
- 지난해 M.net ‘슈퍼스타K 시즌 5’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가 있었다. 김대성 스테파노(60)다. 당시 20년 전 아내와 사별한 그의 삶과 그가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노랫말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많은 시청자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아내와 사별하고 어느덧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 ‘슈퍼스타K 시즌5’ 출연 당시 털어놓지 못했던 그와 아내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사별의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당초 무거운 분위기의 인터뷰가 될 것 같다는 예상과는 달리 매우 담담한 어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Q. 첫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A. 군대 전역 후였어요. 당시 친구들과 조선 호텔 건너편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어요. 아마 술집이름이 4시즌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가 81년이었죠. 친구들과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유난히 눈에 띄는 거예요. 첫눈에 반한거죠. 무작정 같은 버스에 올라타서 대뜸 말했죠. “만납시다”라고요. 그러더니 아내가 저를 “당신 미쳤어요?”라며 미친놈 취급을 하더라고요. Q. 그러면 거기에서 만남이 끝난 거예요? A. 아니요. 끈질기게 집 앞까지 쫒아갔어요.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으니 저희 집 전화번호를 주었죠. 왠지 전화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3월 1일 1시에 명동에 있는 서울 다방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나와 달라고 부탁했었어요. Q. 결국 다방에서 만남이 성사 됐나요? A. 아니요. 공교롭게도 2월 27일에 급성 맹장수술로 다방에 나가지 못하게 됐어요. 맹장 수술을 하고 나서도 계속 다방 생각만 나더라고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친구를 보냈어요. 아내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확인하라고 말이죠. 조마조마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2시쯤 전화가 오더라고요.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전화를 받았죠. 안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래서 친구에게 왔다 갔다는 쪽지나 남겨놓고 돌아오라고 부탁했어요. Q. 어떻게 보면 첫눈에 반해 강렬하게 대시했는데, 실패로 돌아간 거네요? A. 그렇죠. 그런데 이상하게 잠깐 스쳤을 뿐인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첫 만남 당시 ‘망원동에 사는 조씨’라는 정보를 알게 됐는데, 그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망원동으로 갔어요. 당시 망원동에서 모든 버스가 지나다니던 정류장이 ‘홀트아동복지회’였는데 그녀가 그곳에 올 것 같아서 열흘간 무작정 기다렸어요. 근데 보이지 않더라고요. Q. 대단한 열정이네요. 그렇게 기다렸는데도 보이지 않았다면, 그냥 한번 보고 지나친 인연 아니었을까요? A. 그렇죠. 그렇게 잊혀져갔죠. 오랜 기간 본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금방 잊혀져갔어요. 그런데 그해 가을 선배가 운영하던 명동 구둣가게에 갔는데 우연히 ‘망원동 조씨’와 비슷한 여자를 마주쳤어요. 구둣방에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던 거에요. 긴가민가해서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죠. 혹시 “‘조씨’냐”고 하니까 맞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망원동’ 사느냐”고 물어보니까 맞다고 하길래 확신이 들었죠. ‘아! 이게 인연인가보다’라고요. 그 이후 아내에게 많은 것을 물어봤었죠. Q. 그러면 첫 만남 당시 왜 다방에 안 나왔다고 하던가요? A. 당시에 불량해 보여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맹장 수술이후 망원동에서 기다렸던 열흘 있잖아요? 그 때 망원동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하하 Q. 그 이후 연인 단계로 발전한 건가요? A. 그렇게 만난 이후에 제가 엄청나게 대시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저를 믿지 못하더라고요. 저를 집안의 재력만 믿고 ‘놀고먹는 놈’처럼 생각돼서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던 거죠. 당시에는 정말 그랬어요. 음악에 미쳤었죠. 음악도 지금과는 달리 메탈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불량해 보였을 거예요. 아내는 포크음악을 좋아했거든요. 아내가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놀기만 좋아하는 ‘베짱이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그런데 이후 만남이 지속되면서 연인단계로 발전하는데 성공했어요. Q. 연애를 하면서 데이트는 주로 어디서 했나요? A. 사실 데이트는 별 것 없었어요. 당시 제가 하던 출판사에 아내가 많이 놀러 와서 출판사에서 데이트를 많이 했어요. 아내의 고향이 경기도 여주인데 여주 남한강에서 데이트를 즐겼던 것도 많이 기억에 남네요. Q. 그렇군요. 그렇다면 결혼까지 순조롭게 진행된 건가요? A. 사귀면서까지 아내는 절 많이 믿지 못했어요. 음악이라는 것이 사실 소득이 불안정적이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부터 제 모습까지 믿기지가 않았나봐요. Q. 그런데 결혼은 성공했잖아요. 결혼을 설득하는데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었나요? A. 아내의 친구들을 포섭했어요. 아내의 친구들에게 최대한 괜찮은 남자로 보이려고 노력했죠. 그렇게 하니 아내의 친구들이 도와주더라고요. 아내를 설득도 해주고 말이죠. 괜찮은 남자인 것 같으니 결혼하라고 말이에요. 그렇게 아내의 친구들이 도와준 결과 그 이듬해 결혼에 골인하게 됐어요. Q. 결혼 생활은 어땠나요? A. 결혼 후에 지적인 수준 차이를 많이 느꼈어요. 문학소녀였던 아내와 나 사이에 많은 갭(차이)가 존재했죠. 아내는 결혼을 할 때도 혼수대신 제가 생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책 1000권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문학적으로 많은 공부를 했던 집사람이었기 때문에 제가 작곡이나 작사하는 데에도 많은 영감을 줬어요. Q. 음악적으로 어떤 영감을 받았나요? A. 사실 젊은 시절에는 딥퍼플(Deep Purple)과 레드제플린(Led Zeppelin)이 하는 하드락 장르를 좋아했어요. 록커의 길을 걸으려 했던 제 삶을 180도로 바꿔준거죠. 아내가 알려준 레오나르도 코헨(Leonard Cohen)의 ‘버드 온 더 와이어(Bird On The Wire)’를 듣고 충격에 빠졌어요. 정말 새로운 음악에 눈을 뜬 계기였습니다. 이후 포크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Q. 그런데 젊은 시절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입사했습니다. 아내가 음악하기를 반대한 것인가요? A. 아니에요. 아내는 제가 음악 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응원을 해줬지요. 그런데 아내가 항상 이야기한 것이 음악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으로서 집안은 먹여살려야한다고 말이죠. 당시 수입이 변변치 않았거든요. 그래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입사하게 된 겁니다. Q. 무난한 결혼생활을 하시다가 아내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때 심정을 말해주실 수 있나요? A. 아내가 30대 초반이던 그 당시 위암 선고를 받았었죠.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어요. 저도 함께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요. 정말 힘들어하고 있을 때 아내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 말을 듣고 더 담담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이곳에서 멋있게 죽을 준비를 하고, 당신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잘 살 준비를 합시다.” Q. 아내를 떠나보내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외로움이 엄습할 때 새출발을 생각해 본 적도 있나요? A. 사실 다른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년에 서너번 저를 찾아와요. 꿈속에서 말이죠. 잊혀질만하면 찾아옵니다. 꿈에 한번 나타나면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 여파가 남아있어요. 서너달에 한번씩 그러니 못 잊는거죠 뭐. 어느 날은 미니쿠퍼를 끌고 와서는 “드라이브 가자”고 하더라고요. 정말 생생했어요. 제 모습은 이제 60대 아저씨가 됐지만, 꿈속에 아내의 모습은 아직도 20년전 그대로에요. 그런데 그렇게 한번 나타나면 힘이 되더라고요. 꼭 어렵거나 힘든 시기에 나타나서 힘을 불어 넣어주고 가요. Q. 하늘에 있는 아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A. 한마디로요? 한마디로는 안되죠. 할 수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다 붙여주고 싶어요. 글도 많이 쓰고 문학적 조예도 깊어 제 삶을 바꿔놓았으니 말이죠. 또 이제는 저에게 빼놓을 수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새로움을 알려주었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여자입니다. 한마디로는 힘들어요. Q.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할 말이 있다면? A. 결혼기간동안 잘 못해준 것이 너무 후회돼요. 아내의 정신 세계를 못 따라 갔던 것 같아요. 사실 30대, 40대 때보다 요즘이 더 보고싶어요. 살아 생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못했던 것 같아요. 이제야 말해주고 싶어요. “사랑해 여보!”
- 2014-04-02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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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 ‘어느 60대 신인가수 이야기’ - ‘슈퍼스타K’ 김대성 스테파노(60)
-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 머리가 늘어가네.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커다란 공연장이 기타 하나와 담담한 목소리에 숙연해졌다. 두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관객,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심사위원. 지난 해 M.net ‘슈퍼스타K 시즌5’(이하 슈스케5)의 한 참가자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른 주인공은 김대성 스테파노(60)다. 슈스케5 출연 당시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는 당찬 포부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비록 ‘톱 10’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감동의 무대는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이제는 오디션에 참가자가 아닌 아티스트로서 말이다. 기타 하나로 관객들을 사로잡던 방송에서의 모습은 여전했다. 한 회사의 행사장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기타와 목소리 하나로 관객들을 홀렸다. 사실 슈스케5 오디션 당시만 해도 이렇게 까지 화제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패기로 가득한 젊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음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전했다. 그의 모습이 전파를 탄 후 많은 이들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슈스케5가 끝난 이후 약 두어달 정도 우울증에 시달렸다. 음악이 있어도 외롭고 쓸쓸한 시기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현실에서의 무기력함이 그 원인이었다. “아마 남성 갱년기와 같이 왔던 것 같아요. ‘노래를 얼만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음악이다. 이제는 우울증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는 그다. “생각을 가다듬었어요. 돈에 연연하지 말기로. ‘모든 이들에게 힘을 주는 싱어송 라이터가 되자’라고 생각하고 활동을 시작하자 점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몸이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끊임없는 공부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한다. 슈스케5를 통해 부족하다고 느꼈던 발성과 기타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이다. # 음악에 미쳤던 젊은 날 트로트 가수 출신의 어머니. 스테파노의 어머니도 그가 아티스트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스테파노가 중학생 시절 그의 어머니는 기타 강사를 데려와 기타를 가르칠 정도로 그가 음악가가 되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정말 그렇게 음악을 가르치는 어머니들이 흔치 않았는데 어머니도 정말 대단하시죠. 지금은 그런 어머니가 정말 감사합니다.” 중학교는 기타와 함께 고등학교는 밴드에서 그리고 심지어 군대는 군악대에서 음악을 했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음악에 미쳤던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고 표현했다. 그가 입이 닳도록 말하며 하고 싶어 하는 ‘힘이 되는 음악, 힐링이 되는 음악’은 젊은 시절 길거리 버스킹(길거리공연)을 하면서 느낀 보람 때문이었다. 1984년부터 1999년까지 15년 동안 종로와 영등포 등지를 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했다. 공연을 통해 백혈병 어린이 돕기, 농아인 보청기 달아주기 운동을 하는 등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음악을 지향해왔다. 그는 음악의 매력을 치유라고 얘기한다.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과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음악의 매력이죠. 저도 아침에 일어나서 노래 연습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니까요. 듣는 사람도 똑같겠죠. 그래서 힐링이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 김광석의 선물 김대성 스테파노가 슈스케5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한 젊은 가수 때문이었다. 그가 도전의 불씨에 부채질을 한 가수는 바로 ‘슈퍼스타K 시즌 4’의 우승자 로이킴(22)이다. 포크 음악으로 음악프로그램을 석권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 구석에서 남아있던 젊은 날이 꿈이 꿈틀거렸다고 한다. 막상 오디션 신청을 하고 오디션 장소에 다가서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스펙 좋은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백발이 성성한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내 그런 불안함은 사라졌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입을 떼자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 사이에 나이 많은 사람은 저 뿐이더라고요. 그냥 돌아가려던 찰나에 제 차례가 와서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1차 통과하고 2차와 3차에서 피디와 작가들 그리고 관객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나만의 스토리가 통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심사위원 이하늘과 관객들을 울렸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사실 오디션 과정에서 비중을 크게 둔 노래는 아니었다. 2차 오디션이 끝나고 3차 무대 오디션 직전, 3차에서 부를 노래를 선정하기 위해 피디들과 작가들 앞에 섰다. 총 다섯 곡의 노래를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이 때 피디와 작가들이 숨죽인 때가 있었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를 때였다. 스테파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외에 5곡 정도를 준비했어요. 그 곡들 중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는데 피디와 작가들이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그 때 ‘3차 오디션에서 이 곡을 불러야겠구나’라고 결심했습니다.” 당시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곡이 이제는 그의 이야기를 만들어 준 대표곡이 됐다. 이제는 아침 노래 연습을 할 때 이 노래를 부르며 회상에 잠긴다는 그. 어찌 보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김광석이 그에게 주는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 예순, 그 전성기의 시작점에서 젊은 시절 딥퍼플(Deep Purple)과 레드제플린(Led Zeppelin)과 같은 헤비메탈 락에 빠져있었던 스테파노. 그를 포크의 세계로 빠지게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 (사별한 아내와의 이야기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남녀로맨스’ 카테고리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딥퍼플과 레드제플린에 미쳤었던 청년은 밥 말리, 레오나르드 코헨, 로이킴에 빠져있는 중년으로 변했다. 자유로운 현재의 삶이 지난 30년간의 회사 생활보다 훨씬 좋다는 그다. 아침이면 노래연습을 하고, 기타를 들고 작곡을 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영락없는 아티스트다. 한 달에 1곡정도 온라인에 선보일 예정이라는 스테파노는 지금부터 전성기가 시작됐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음악에서 나이 개념을 없애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덧붙이면서. 예순의 나이에 가수에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도전을 통해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용기를 낸 도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퇴직한 후 용기를 냈어요. 음악에 다시 도전하기로. 그리고 꿈을 높게 잡았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주눅 들지 말자. 그리고 도전하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삶의 새로운 원동력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부터가 제 전성기입니다. 음악이 하고 싶은데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운 친구들을 위한 센터를 짓는다는 제 목표가 이뤄질 때 까지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 2014-03-21 1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