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갓 잡은 멸치를 맛볼 수 있는 최적의 시기다. 멸치는 ‘자산어보’에도 나오듯 멸할 멸(滅) 자를 쓸 정도로 성격이 급한 생선이다. 하지만 이 시기엔 쉽게 생멸치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 어울리는 쏨뱅이구이를 함께 소개한다.
멸치시래기조림(2인 기준)
재료 뼈 발라낸 생멸치 250g, 무청 시래기 400g, 대파 1줄, 홍고추·청양고추 1개씩, 다진 마늘·된장·소주 1큰술씩, 고춧가루 2큰술, 설탕 1/2큰술, 막걸리 100ml, 멸치육수 500ml
1 뼈 발라낸 생멸치를 막걸리와 소주, 설탕과 함께 5분간 재워 잡내를 없앤다. 이후 물기를 완전히 짜낸다.
2 무청을 물에 불렸다가 물기를 완전히 짜낸다.
3 시래기에 된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을 넣어 버무린다.
4 냄비에 양념된 시래기와 생멸치, 대파, 홍고추, 청양고추, 남은 고춧가루를 넣고 멸치육수를 부은 다음 뚜껑을 닫고 끓인다.
5 6분 정도 끓이다가 뚜껑을 열고 자작하게 졸아들 때까지 끓이면 된다.
쏨뱅이구이(2인 기준)
재료 쏨뱅이 2마리, 표고버섯 1개, 식용유 2큰술, 소금 1큰술
1 쏨뱅이가 잘 익도록 칼집을 내고, 그 사이에 소금을 뿌려 간을 한다.
2 잘 달군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쏨뱅이와 절반으로 자른 표고버섯을 노릇하게 굽는다.
멸치시래기조림·쏨뱅이구이와 어울리는 반찬 방풍나물된장무침과 달걀찜
5월은 갓 잡은 멸치를 맛볼 수 있는 최적의 시기다. 멸치는 ‘자산어보’에도 나오듯 멸할 멸(滅) 자를 쓸 정도로 성격이 급한 생선이다. 하지만 이 시기엔 쉽게 생멸치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 어울리는 쏨뱅이구이를 함께 소개한다.
멸치시래기조림(2인 기준)
재료 뼈 발라낸 생멸치 250g, 무청 시래기 400g, 대파 1줄, 홍고추·청양고추 1개씩, 다진 마늘·된장·소주 1큰술씩, 고춧가루 2큰술, 설탕 1/2큰술, 막걸리 100ml, 멸치육수 500ml
1 뼈 발라낸 생멸치를 막걸리와 소주, 설탕과 함께 5분간 재워 잡내를 없앤다. 이후 물기를 완전히 짜낸다.
2 무청을 물에 불렸다가 물기를 완전히 짜낸다.
3 시래기에 된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을 넣어 버무린다.
4 냄비에 양념된 시래기와 생멸치, 대파, 홍고추, 청양고추, 남은 고춧가루를 넣고 멸치육수를 부은 다음 뚜껑을 닫고 끓인다.
5 6분 정도 끓이다가 뚜껑을 열고 자작하게 졸아들 때까지 끓이면 된다.
쏨뱅이구이(2인 기준)
재료 쏨뱅이 2마리, 표고버섯 1개, 식용유 2큰술, 소금 1큰술
1 쏨뱅이가 잘 익도록 칼집을 내고, 그 사이에 소금을 뿌려 간을 한다.
2 잘 달군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쏨뱅이와 절반으로 자른 표고버섯을 노릇하게 굽는다.
멸치시래기조림·쏨뱅이구이와 어울리는 반찬
방풍나물된장무침과 달걀찜
O₂, 산소, 원자 번호 8, 화학 산소족에 속하는 비금속 원소, 공기의 주성분이면서 맛과 빛깔과 냄새가 없는 물질. 호흡과 동식물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체라는 사전적 의미의 산소. 강원도 홍천에 산소길이 있다. O₂길. 마스크 때문에 마음껏 숨 쉴 수 없어 미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수타사 산소길이 떠올랐다.‘그래 이번에는 산소길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홍천의 수타사 산소길은 1~4코스로 총 4개 코스가 있다. 수타사 산소길을 걷는다고 하면 대부분 1코스를 말하는데, 수타사 주차장에 주차하면서부터 걷기가 시작된다. 인근에 오토캠핑장까지 있어 주말 여행지로도 손색없다. 공작산 생태숲 산소길 코스는 3.8km로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수타사-공작산 생태숲-귀소(출렁다리)-용담-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이다. 걷기에 따라 1~2시간 정도 걸리지만, 수타사 경내를 천천히 돌아보고 숲길을 걷다가 쉬다가 느긋하게 숲멍도 한다면 3시간도 금방이다. 참 여유롭게 돌아보는 산소길 트레킹이다.
눈을 들어보니 해발 887m의 공작산이 날개를 펼친 듯 에워쌌다. 깊은 골짜기 위로 봉우리들이 겹겹이 솟은 모습이 공작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공작산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하나다. 그 산 아래 수타사 가는 길이 반기듯 쭉 뻗어 있다. 산소길 초입에 천년 고찰 수타사의 품격을 거친다는 것, 시작부터 차분히 숨 고르기를 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우적산 일월사(日月寺)였다가 공작산으로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로, 다시 새 한자인 수타사(壽陀寺)로 바뀌었다. 수타사 옆의 용담에 매년 승려들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잦아 목숨 ‘수’(壽)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스러움이 물씬 전해지는 절의 분위기가 꾸밈없이 단아하다. 옛 모습을 품고 있는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에서도 위엄을 보여준다. 한나절 푹 퍼질러 앉아 목탁 소리 들으며 쉬면 좋을 깊은 산속 절이다.
수타사를 나오면 바로 공작산 생태숲이다. 생태숲 자리는 예전 수타사에서 경작하던 논이었는데, 이제는 동식물의 서식 환경을 보호하고 다양한 생태체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태연못 탐방로로 온통 연잎으로 뒤덮인 연밭이다. 그 사이로 놓인 부드러운 곡선의 데크 위를 걷는 이들의 풍경이 그림 같다.
산소길은 대부분 흙길이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깊은 숲속이다. 오래된 홍우당 부도가 숲길 옆으로 자연스럽게 나란하다. 부도는 부처나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탑이다. 그 길을 지나면 정말 빽빽한 숲속이다. 폭도 좁아서 나란히 걷기보다는 홀로 걷기 좋으니 숲을 자연스럽게 즐기면 된다. 막상 숲에 들어서면 마치 밀림에 온 듯 오래된 숲속 풍경에 놀란다. 얼기설기 나무줄기가 양쪽으로 서로 얽혀 고개를 숙여 지나가야 하고, 빼곡한 나무 사이로 하늘이 빼꼼히 보이는 것 또한 깊은 산중에 파묻혔음이 느껴진다. 걷기 좋은 완만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새와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자연 속에 내가 있다. 짙은 풀 냄새가 나를 둘러싸고, 비로소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초록이 가장 초록다운 숲이다. 싱그러움이 가슴속 가득 찬다. 역시 산소길이다.
수타사의 산소길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홍천 읍내로 장 보러 가던 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가 쉬어 가라고 쉼터가 있지만 힘들 것 없으니 그냥 계속 천천히 걷게 된다. 신봉마을을 반환점 삼아 돌며 시골 마을의 평온함도 얻는다. 수타사 계곡이 흐르는 출렁다리 소 구간에서 물소리 들으며 멍하니 쉬면 된다. ‘’은 소나 말 등의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여물통인 구유를 뜻하는 강원도 방언이다. 계곡이 마치 구유처럼 생겼다 해서 소라 불린다.
나무가 바람에 사사삭 흔들리는 나즈막한 소리,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숲 내음, 흙 내음, 초록의 색감만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한참을 걸었어도 가뿐하다. 후텁지근하고 끈적이던 더위도 잊었다. 숲이 깊어 햇빛도 저만치에 있다. 산소길에선 다만 마음껏 숨 쉬고 청량한 산속의 운치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초록을 실컷 눈에 담았다. 천천히 한숨 돌리며 용담에 다다르니 계곡 쪽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줄을 이어놓았다. 바위와 물의 깊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예부터 용이 승천했다는 용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메워져 평범한 소(沼)의 모습이다.
운동화를 툭툭 털며 산소길을 내려가다 옆길로 고개를 돌려보니 산림치유쉼터의 숲속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그야말로 신선놀음 중이시다.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 숲속에 쉼터와 명상 공간이 마련되어 시원하고 건강하게 여름을 나는 모습이다. 어딜 보아도 산소 뿜뿜. 보는 사람 마음도 시원하다.
홍천의 자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홍천을 다녀보면 무궁화 꽃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마을길에서도 볼 수 있지만 무궁화공원, 무궁화테마파크, 무궁화수목원, 체험관 등 온통 무궁화 꽃 도시다. 이는 홍천군이 우리나라 무궁화 메카로 선정되어 무궁화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자 조성됐기 때문이다. 무궁화 명소인 홍천의 무궁화수목원을 찾았을 때는 꽃이 한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궁화수목원은 국내 최초로 무궁화를 테마로 조성한 공립수목원으로,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각 테마별로 남궁억 광장, 무궁화 조형물, 품종원, 미로원과 16개의 주재원을 비롯한 숲속 산책로, 숲속 도서관 등 즐길거리가 마련돼 있다. 특히 무궁화가 한창 피어나는 8월에는 ‘나라꽃 무궁화 홍천 축제’가 열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수목원 입구에 길게 이어지는 280m 산책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무궁화(Rose of Sharon)의 집이 연출하는 풍경이 시선을 끈다. Rose of Sharon. 서양 사람들은 무궁화를 이렇게 부른다. 샤론의 장미는 성스럽고 선택받은 곳에서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나라꽃이 우리 민족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희망의 빛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설명이다.
무궁화의 집을 둘러싼 푸른 들판엔 코스모스가 자라고 있었다. 무궁화와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난 들판의 풍경은 홍천의 핫플레이스 예약이다. 현재 야간 경관 조명으로 은하수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연출되어, 데이트 커플들이 찾아오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르는 곳이다.
홍총떡과 올챙이국수
홍천의 맛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저렴하면서 맛도 좋은 서민 음식 홍천메밀총떡(홍총떡)은 시장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홍천의 메밀로 만든 반죽을 얇게 부쳐서 준비한 소를 넣고 드르르 만 홍총떡은 홍천의 대표 향토음식이다. 구수하고 개운한 김치나 무채 양념의 순한맛과 매운맛, 강원도 제철 나물이나 시래기를 넣은 나물맛으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홍천중앙시장에 가면 총대를 닮아 총떡이라는 홍총떡과 메밀전, 올챙이국수 등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또 한 군데, 전직 청와대 셰프가 운영한다는 음식점에서 명태회막국수와 낙지만두도 먹어볼 만하다.
홍천 여행
수타사 산소길 :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덕치리 5-3
교통 : 수도권 기준 자동차로 약 두 시간. 대중교통-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홍천종합버스터미널까지 약 한 시간 반 소요
홍총떡 : 홍천중앙시장 및 홍천 각 관광단지에서 판매. 홍천 오일장 1, 6일. 장날 아니어도 홍총떡은 영업 중
햇볕마저 좋다. 다음 주쯤 강화도에 한번 다녀올 참이었다. 고려산의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일 때다. 어느 곳이든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이지만, 불현듯 그 산하에 다가가고 싶을 땐 어쩔 수 없다. 강화도는 섬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땅이다.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남아 있을 만큼 오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곳. 뿐만 아니라 이제는 곳곳에 새롭게 생겨나는 공간의 매력까지 더해지는 중이다.
물이 빠져나간 진득한 갯벌 위로 갈매기 떼가 날갯짓하는 외포항은 한적하다. 바람을 맞으며 포구 앞에서 갯골의 물길을 따라 바라보는 외포리의 생업 현장은 담담한 듯 조용하다. 수산물 직판장은 한가로웠지만 짭조름한 젓갈 냄새가 자연스럽게 풍겨난다. 한가로운 섬에 드니 이렇듯 편안하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앞자리엔 바람 쐬러 나온 듯한 부부의 나란한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섬에서 얻는 휴식과 평온함의 풍경이다.
강화의 들길을 천천히 달리다 보면 진지나 요새를 만나고, 크고 작은 돈대가 나타난다. 외포항에서 5분쯤 달리면 나타나는 삼암돈대는 석모도를 마주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건너편으로 석모대교가 가로질러 있는 모습이 봄꽃 나무 사이로 보인다.
개화기 역사의 소용돌이가 스며 있는 강화 54돈대 중 하나다. 지금은 그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지만 4구의 포좌가 해안을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진지해진다. 인적 없는 자그마한 돈대 안은 적막하기까지 하다. 원형으로 축조된 돈대의 발아래로 바다가 유유하다.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봄꽃이 눈부시다. 무기를 보관하던 작은 창고인 듯한 입구엔 냉이꽃이 가득 피어났다.
여유롭게 바다를 내려다보고 석모대교 위로 오가는 자동차들의 꼬리를 따라가는 시선 끝에 또 다른 장소를 떠올렸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해보니 멀지 않다. 정보를 통해 진작에 알고 있던 동네 책방이다. 다음 주에 가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참에 가면 어떨지 잠깐 생각했다. 미리 연락도 해놓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찾아간다. 가끔은 사람의 만남도, 무심코 맞닥뜨린 여행지의 순간도 이럴 때 오히려 더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던가.
책방과 공방의 조화
호수처럼 너른 저수지 옆을 지나고 시골길이 깊어진다. 몇 개의 굽은 고갯길을 거치고 한적한 들판을 달린다. 이렇게 산골마을이지만 사실 강화읍에서는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다. 길 건너편으로 산 아래 조용히 앉혀진 연꽃마을의 우공책방이 보인다.
금속공예와 목공예 작가인 ‘공방장님’과 시인이신 ‘책방장님’이 그곳에 있었다. 차분하고 담백한 인상의 작가 부부. 색감이 고운 차 한잔 내어주신 책방장님은 일정이 있어서 곧바로 외출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의 결례로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친절한 배려를 보여주신 공방장 김찬욱 작가님께 고마울 따름이다.
“원래 글을 쓰니까, 그리고 책이 많으니까 그 책을 누구라도 보는 데 쓰고, 사람이 안 와도 책 갖다놓고 책방이라는 타이틀을 놓으면 재미있겠다 싶었죠. 사실 책을 사기 위해 오는 동네 사람은 드물죠. 대부분 어르신들이고, 요즘은 농번기라 논에 물 대기 바쁜 농사철이기도 하고요. 강화의 지인들이 오고, 지나가다 신기하다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가끔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책꽂이에는 아주 오래된 귀한 책들도 제법 많다. 절판된 책이나 오래전 책을 꼭 사겠다는 분도 있다고 한다. 8000권 넘는 책이 아래층과 위층으로 보기 좋게 가득가득 꽂혀 있다. 알음알음 동네 책방을 아끼는 분들이 책 주문을 하고, 우공책방의 독특함을 찾아서 먼 길을 오는 이들이 있어서 공감과 소통이 이어진다.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것을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실천하는 것,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독자와 호흡하며 산골 책방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담백하다. 각자의 커리어대로 하던 일도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현재는 멈추었지만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입구에 나무와 환경에 관한 책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엔 공방이 있으니까 나무도 있고 식물에 관한 책이 많죠. 책방장도 나무나 자연에 관한 책을 많이 선택하고 또 다양한 시집도 북큐레이션을 하죠. 자연에 관한 책, 시집은 특별히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책을 가지러 와서 얼굴도 보고 차도 마시고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판을 깔고 의미 있게 보내는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스치듯 말한다. 어쩐지 울림을 준다. 바이러스가 사라질 날이 언제일지.
고요한 힐링, 북스테이
또 하나, 이 책방의 멋과 맛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북스테이가 있다. 전망 좋은 책방 2층에 책 여행자들이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는 정갈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무엇보다도 조식과 석식이 제공되는데 어느 셰프의 상차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손맛 깊은 맛깔스런 밥상이다.
“음식 만드는 것은… 제가 자취를 오래 했거든요. 그러기도 하고 음식을 제대로 맛나게 만들어 먹고 싶은 생각이 항상 있었죠. 그래서 궁금하면 어머니께 여쭤보곤 했어요. 식당을 40년 하셨고 못 만드시는 음식이 없었지요. 같은 재료인데도 내가 만들어 먹을 때는 왜 엄마의 그 맛이 안 나는지 늘 궁금했어요. 북엇국은 왜 엄마처럼 뽀얗게 안 올라올까 전화로 물어보면 기름에 한 번 볶아서 끓여야 한다. 또 순서가 어찌되었느냐, 시래깃국도 양념 넣고 잘 주물러서 넣어야 맛있다 말씀해주셨지요.”
우공책방의 북스테이에서는 엄마의 손맛을 그대로 이어받은 밥상을 받을 수 있다. 산골 동네엔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 없어서 제공한 식사였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우공책방 북스테이의 푸짐한 고등어시래기찜이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힐링의 북스테이뿐만 아니라 우공책방에서는 목공예 작품을 만들어내는 체험도 가능하다. 작가의 예술적 감성이 스며든 작품을 배워볼 기회다. 책방과 공방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에서 따뜻한 나무의 질감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순하게 아날로그 정서가 발동되고 마음이 풍성해지는 여행 감성을 일깨운다.
자연, 나무, 목공예, 예술, 우공이산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주문받은 작품을 계속 다듬고 있었다. 깊은 손맛처럼 진심이 느껴지는 공방장님의 묵묵한 인상이 책방 이름 우공이라는 글자와 일치하는 느낌이다. 그런 내적 진중함이 만들어내는 목공 작품들이 책방 코너에 진열되어 있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산 아래 책방 마당, 데크를 지나 한편에 자리 잡은 공방장님의 작업장은 와우~ 신세계다. 나무와 금속을 다루는 갖가지 기계 장비들과 공구들이 빼곡하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 잘 갖추어진 작업장은 뿌듯함이다. 우와~ 하며 놀랄 수밖에. 참죽나무로 만들어낸 책갈피부터 우리에게 친근한 빵도마도 만들어내는 곳, 절로 목공 작업이 확 당긴다.
책방지기의 묵직한 내공으로 배려받은 잠깐의 시간, 그 진중함으로 산과 바다라도 옮길 수 있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모습이 그려진다. 더디 가더라도 내가 주체가 되어 하고 싶은 일 속에 있는 것,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쓰려는 것이 또렷이 보일 때 부럽다.
일어서는데 김찬욱 작가님이 한마디 던진다.
“적석사도 들러야죠? 3분입니다.”
고려산 기슭의 가파른 언덕 위 사찰 적석사에서 내려다본 청정한 연꽃마을, 그곳에 우공책방이 있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 77-10(고천리 217-10) / 고려산 낙조대 적석사 가는 길목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로 글을 시작한다. 널리 알려진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부모님과 가족, 주변 친지, 친구 등 한 사람을 키우는 건 많다. 미당의 경우, 그런 요소는 2할이다. 나머지 8할은? ‘바람’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시래기였다”. 1960년대. 필자가 자란 곳은 내륙의 작은 시골 마을. 하루에 대처(大處)에서 버스가 네댓 번 정도 왔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아주 넓었던 신작로였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먼지가 겨우 가라앉으면 집마다 담과 벽에 걸어둔 시래기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렇게 말라갔다.
시래깃국에 시래기무침. 배추김치와 큼직한 무김치. 나를 키운 8할은 시래기였고, 2할은 김장이었다. 겨울이면 어느 집이나 시래깃국과 시래기 무침으로 버텼다. 가난한 이나, 밥술이나 뜰 만한 집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거지는 날것, 시래기는 말린 것
사람들은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하며 물어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늘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거지는 날것, 생것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가 혼란스러워한다. 다음 내용은 도종환 시인의 작품 ‘시래기’ 중 일부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중략)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중략)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상당 부분 우거지에 대한 내용이다. 우거지는 채소의 윗부분 혹은 바깥 부분이다. 웃자란 부분이 우거지다. 땅속에서 가장 먼저 나와 싹을 틔우는 배추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위로 자란다. 윗부분, 위, 웃걷이, 우거지다. 바깥바람을 가장 오랫동안 견딘 것도 바로 우거지다.
불행히도, 우거지는 가장 먼저 버려진다. 배추를 뽑을 때 버리기도 하고, 다듬을 때 먼저 들어낸다. 가난한 이들은 버려진 우거지를 주워서 죽을 끓였다. 우거지 죽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우거지를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배추 우거지를 말리면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배추 시래기다. 시에서는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라고 설명한다. 우거지를 벽에 혹은 담장에 걸면 시래기가 된다.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시래기는 소중하지만 귀한 건 아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바깥에 걸려 긴 겨울을 난다. 눈도 맞고, 바람도 겪는다. 가장 먼저 땅을 뚫고 나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다음, 마지막에는 버림받는다. 우거지의 슬픈 일생이다.
시래기는 맛있다. 어린 시절, 거의 매 끼니 시래기를 먹으며 “또 시래깃국이야?” 하고 투정했다. 먹어본 게 별로 없으니 ‘시래깃국 대체품’을 주워섬길 수도 없었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사실, 시래기는 전 국민을 키웠다.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는다
음식 공부를 하면서 문득 “외국 사람들은 시래기를 먹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은 드넓다.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음식, 식재료를 먹는지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먹긴 하지만, 우리처럼 일상적이지 않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중국 여행을 다녀온 이가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더라” 해서 ‘음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시래기는 아니고 우거지와 시래기 중간 정도의 식재료였다. 위치는 동북삼성(東北三省) 부근이었다. 조선족들의 풍습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간도 지역, 중국 동북삼성의 조선족들은 여전히 우거지, 시래기를 먹는다. 그뿐이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시작되었다. 배추 이파리의 줄기 부분은 흰색이다. 그래서 백채다. 지금도 배추의 한자 표기는 백채다. 배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중국 배추가 우리 것보다 크고 맛있었다. 숱한 기록들이 “중국 배추가 크고 맛있다”고 말한다. 중국에 갔던 사신단은 “중국 간 김에 좋은 배추 씨앗을 사오려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미처 사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무는 오랫동안 ‘무우’라고 불렀다. 무는 ‘무후’(武侯)에서 비롯되었다. 무후는 높은 벼슬아치의 이름이다. 무후 제갈량이 좋아했던 채소라서 무후, 무우, 무로 변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배추와 무 모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 원산지가 어디든, 우리는 중국을 통해 무와 배추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는 우거지와 시래기가 없다? 그렇지는 않다. 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다. ‘지축’(旨蓄)이다. 지금도 중국 사전에는 지축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에도 ‘旨蓄’이 버젓이 나와 있다. 지축은 ‘채소, 푸성귀[菜]’를 말린 것이다. 우리도 ‘지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날짜는 성종 18년(1487년) 9월 11일. 제목은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 “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다른 도와 달라서 서쪽으로는 대령(大嶺)에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서 그쳤으며,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상수리 수십 석(碩)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농부를 먹이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충족할 길이 없고, 백성이 이것을 줍는 것은 다만 9월·10월 사이일 뿐인데, 이제 순행(巡幸)이 마침 그때를 당하였으므로 (후략).”
양양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이다. 강무는 국가의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왕이 현장에서 직접 훈련을 감독하고 사냥을 한다. 문제는 인근 주민이다. 강무가 있으면 길을 닦고, 훈련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한다. 현지 주민들이 말먹이부터 행사 참가자의 식사까지 챙겨야 한다. 중앙에서 곡식을 가져간다 해도 현지에서 챙겨야 할 게 많다. 사냥과 현장 막사를 만드는 일에도 현지 주민들이 참가한다. 원래 곡식이 많지 않은 곳이다. 겨울에는 ‘지축’을 챙겨야 한다. 지축은 목숨을 잇게 해주는 귀한 먹거리다. 겨울에 임금의 순행이 있으면 굶어 죽을 판이다. 현지 관리인 유자한의 상소는 “강원도 백성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니, 강무를 늦추자”는 내용이다.
500여 년 전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챙겨 먹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그때도 마찬가지. 시래기는 주요 식량이자 반찬거리였다. 시래기가 단순히 ‘배추 시래기’, ‘무청 시래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아래 내용은 여말 선초를 살았던 문신 권근(1352~1409년)의 시 ‘축채’(畜菜)의 일부분이다.
시월이라 바람 높고, 새벽 서리 내리니/울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지축(旨蓄)을 마련하여 겨울에 대비하니/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후략)
권근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뼈대를 세운 높은 벼슬아치였다. 그도 10월(음력)이면 채소 갈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지축, 시래기가 반드시 가난한 이들의 먹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축은 단순히 배추 우거지 시래기, 무청 시래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밭에서 수확한 대부분의 채소류로 준비한 겨우살이 준비 채소를 뜻한다.
중국도 우리도 모두 먹었지만, 중국은 버렸고 우리는 지금도 소중하게 여기고, 먹는다. 우거지, 시래기는 한식의 특별한 음식 중 하나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나른한 퇴근길,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그를 보고는 자동으로 인사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참 오랜 친구였다. 뽀뽀뽀 체조로 아침잠을 깨면 항상 볼 수 있던 뽀병이었고, 주말 밤에는 두루마기나 정장을 입고 앵커석에 앉아 “지구를 떠나거라~” 혹은 “나가 놀아라~” 같은 유행어를 쉴 새 없이 제조하던 웃긴 아저씨였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특이하고, 특별하고, 독보적인 캐릭터가 존재했었나 싶다. 지금은 그때의 기운 센 스타 말고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신사가 되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시사풍자 개그의 효시이자, 명심보감 전도사, 조선대학교의 김병조(金炳朝·69) 특임교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역사에서 김병조 교수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에서 묵례만 하고 헤어졌던 짧은 만남을 이야기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본다고 기뻐하거나 알아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아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이면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개그맨에서 교수로 직업의 영역은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그리고 명심보감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옛 기억에도 그는 어렵고 긴 한문 구절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읊곤 했다.
“방송하던 시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제 뜻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피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방송도 공익을 위한 것이니 교육 기능을 강조해야 한다던 분이셨죠. 고전에서 취득하자고 해서 명심보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제 평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얄개
선비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는 어려서부터 벗삼던 명심보감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작가가 써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아이디어를 발굴해 글을 쓰고, 시사 개그의 앵커 멘트를 고쳤다. 짧고 간결하지만,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야기에 많은 시청자가 귀 기울였다. 그가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7년 동안 평균 70%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사 풍자 프로그램이었다.
“제 대본은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고서 인용만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청중 앞에 섰는데, 그 끼는 타고난 것 같아요. 면 단위 동네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사회도 보고, 응원 단장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말이죠. 아주 오랜 경험이 쌓여 있었으니 사람들을 웃길 자신이 있었어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수정할 경우 양해는 구했죠. ‘내가 고쳤는데 만약에 대사가 재밌고 유익하면 용서해달라’고요. 당연히 재밌지.(웃음) 작문에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개그맨은 작가적 소양을 지닌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던 우등생. 서울대학교를 바라봐도 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교에 가야만 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광주일고 대신 육사 진학률이 좋은 광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육사에서 장학금 받을 정도면 연극영화과 학교에 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1학기 때 과 수석을 제외하고 4년 내내 학년 수석을 했습니다. 장학제도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학년 전체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공부만 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뉴스 형식의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김병조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한학자 아버지와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에도 지나치지 않았다. 고희가 다 된 나이에도 가난했던 얘기를 굳이 또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병조는 가난했던 그 시절이 어두웠거나 피해가고 싶은 시간들이 결코 아니기에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스타가 될 사람이 아닌데 스타가 된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꼬장꼬장하고 성격도 강했죠. 타고난 재능과 끼가 있어서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망 쌓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하면 비관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수용했습니다.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복 받은 거죠. 집에 있는 가래떡이나 김만 봐도 너무 좋습니다. 제 행복의 비법은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사람들은 성공하면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배추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병조는 방송 활동 내내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였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시사 코미디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던 슈퍼스타였다. 광고모델로 억대 출연료를 받은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한학을 바탕으로 시청자를 배꼽 잡게 하는가 하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이. 말 그대로 김병조 전성시대였다.
그날 이후, 다른 삶을 살다
1987년 6월 10일.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김병조는 이날의 사건으로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 역사의 결정적 장면과 맞물려 제대로 된 소명 한 번 못해보고 시대의 막을 내려야 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었죠. 그날은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어요. 당원들이 모여 투표하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축제와 함께 진행을 한 거예요. 당대 최고가수도 불렀고 저도 개그맨으로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당 측에서 코미디를 잘 모르니까 저한테 한 3분 정도 웃길 내용을 적어오라고 하더군요. 대본을 써가지고 보여줬더니 거기다가 뭘 또 적어주더라고요. 그 내용을 보고 사실 대단히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폄하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단 몇 초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읽어야 할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김병조라는 게 문제였다.
“전당대회에서 대본을 읽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최종적으로는 제 잘못이죠. 과감하게 ‘못합니다’ 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됩니다. 선비 집안의 장손답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저는 정치투사도 아니고 한 집안 가장이었어요. 또 늘 그래왔듯 대본대로 읽어야 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당원들끼리 하는 내부 행사라서 방송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한 일간지에 그가 한 말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자숙의 기간이 필요해 방송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쉬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우리 집사람까지 나서서 ‘원하는 멘트를 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확대해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정쟁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그 당시 제가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스스로 관둔 게 맞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정치권의 제의도 있었습니다만 다 거절했습니다. 또 방송에도 복귀했지만 실의를 느꼈습니다.”
SBS가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긴 김병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미 방송에 대한 매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때 KBC 광주방송이 개국했습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 ‘열창 무대’ MC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잘됐다! 고향의 방송을 하자!’ 하고 갔습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요. 그리고 조선대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해왔고요.”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3년째다.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두루 다니며 강의를 해왔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모습이 시청자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 과정은 그러했다. 몇 해 지나고 개그맨이 아닌 대학교수가 되어 나타난 그는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 흑발의 보글보글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커트의 은발이 됐다. 푸짐해 보이던 몸은 마라톤으로 다져 보통의 건강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오른쪽 눈은 결국 실명됐다.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단다. 당시 정치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의 길을 택했을까?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어요. 방송에 몸담고 있을 때도 어머니 교실이나 어린이 교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지금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때 그 사건마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기사가 제 스승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시래기톡’
요즘 김병조가 강의 외에 집중하는 건 바로 작년 10월부터 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다. 카카오TV와 유튜브에 ‘시래기톡’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세대 공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왜 방송 이름이 ‘시래기톡’일까. 파릇파릇했던 배추 머리가 세월이 흘러 묵직하고 담백한 맛과 향을 내는 시래기로 탄생했다는 의미다. 지금의 김병조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살아생전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산소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엉엉 울었어요. 그 카세트테이프를 CD로 구워두었죠. 제가 올해 칠십인데 아버님이 일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가 서서히 되어가시네’ 하더라고요. 뭔가 남기고 싶었나봐요. 아들의 생각과 명심보감 구절을 포함해 젊은이들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제가 느낀 것들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상대의 눈으로 보고 다름을 인정하자’가 시래기톡에서 추구하는 의미란다. 아울러 유튜브 채널을 통한 한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 있고, 온고지신(溫故知新) 같은 방송도 있어야죠. 훌륭한 일을 하고도 대우받지 못하는 어른 세대와 희망과 꿈이 있음에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제 유언이기도 합니다. 남기 유(遺), 말을 남기는 것이죠. 먼 훗날 세상을 떴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고요.(웃음)”
아버님이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겨놓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가 제 철학입니다. 진분수 같은 삶을 살고 싶죠. 가식과 허황한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있어도 없는 듯 낮추고, 줏대 있는 가난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한식은 탕반(湯飯) 음식이다. ‘반’은 밥이다. ‘탕’은 국물을 뜻한다. 우리는 국물 없는 밥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 밥상에는 밥과 국이 있고, 반찬을 더한다. 밥과 국은 우리 밥상의 기본이다.
“일본에서도 밥과 국을 같이 먹더라”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 등에서도 밥과 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을 내놓는다. 종류가 한정적이다. 아침 밥상의 ‘미소시루(일본 된장국)’ 정도다. 낮이나 밤의 밥, 술자리에서는 흔하지 않다. 아침에 먹는 국 한 종지 정도다.
한식 밥상은 국의 향연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늘 “오늘 저녁은 무슨 국을 끓일까?” 고민했다.
우리 밥상은 밥과 국을 빼고는 성립하기 힘들다. 웬만한 밥상에는 늘 국이 등장한다. 국, 밥, 김치만 있는 밥상도 즐겁다. 탕반 음식은 우리의 핏속에 녹아 있는 음식문화다. 국도 여러 종류다. 고깃국, 생선국, 각종 채소국, 이도 저도 아닌 된장국까지 국물 없는 밥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한여름철에는 근대국과 아욱국을 따로 끓인다. 얼핏 보면 비슷한 아욱과 근대. 그러나 국으로 끓이면 그 맛이 각별하다. 콩나물, 미나리, 무, 시금치, 각종 시래기와 우거지까지. 한반도의 국물은 끝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탕, 국물이 없는 밥상은 ‘국물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관계를 끝낼 때도 “국물도 없다”고 말했다. 밥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이 국물이다. “넌 앞으로 국물도 없다”는 말은 인간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것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국이 없는 밥을 먹으면 목이 메었다. “국물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매정한 표현이다.
국물의 기본
국물의 기본은 ‘대갱(大羹)’이다. 대갱은 고기 곤 국물, 고깃국물이다. ‘대’는 크다는 뜻과 더불어 으뜸, 시작, 바탕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무런 양념이나 부재료인 채소 없이 국을 끓이면 대갱이다.
‘대갱’은 중국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오래전에는 매실과 소금으로 기본적인 양념을 대신했다. 대갱은 ‘매실이나 소금 양념’도 하지 않는, 고기를 곤 국물이다. 맛을 따질 일은 아니다. 맛이 있으면 양념한 화갱을 찾을 일이다. 국물에 채소나 양념을 넣으면 ‘화갱(和羹)’이다. 중국에는 화갱이나 대갱 모두 사라졌다. 화갱은 그나마 중식 코스 요리 중, 각종 채소를 넣고 생선이나 고기를 더한 국물 음식이 남아 있다. 한식에는 아직도 대갱이 살아 있다. 곰탕이 대갱이고, 제사상의 곰국, 곰탕이 바로 대갱의 변형이다.
우리 밥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화갱이다. 채소에 고기를 넣고 끓여도, 채소만으로 끓여도 화갱이다. 고깃국, 채소, 생선이나 여러 가지 양념을 더한 것이 모두 화갱이다.
한국 사람들의 밥상에는 화갱이 늘 자리한다. 시래깃국, 김칫국, 배춧국, 뭇국, 시금칫국, 토란국, 아욱국, 근대국 그리고 해조류를 넣은 미역국, 톳을 넣은 국, 몸국(모자반국)과 해산물을 이용한 북엇국 등 숱한 국물 음식들이 그것이다.
곰탕과 설렁탕
곰탕과 설렁탕은 비슷한 음식이다. 약 100년 이상 곰탕과 설렁탕은 경쟁하고, 상대의 장점을 서로 더했다. 두 국물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곰탕은 ‘고기를 곤 국물’이다. 쇠고기 양지 부위를 중심으로 푹 곤 국물은 반가의 음식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나주 등에서 곰탕이 유행한 이유도 간단하다. 서울, 한양은 궁궐이 있었던 도시다. 각종 관청도 많았다. 궁중의 제사를 모시는 종묘가 있고 공자의 제사를 모시는 성균관, 대성전이 있다. 제사에는 귀한 쇠고기를 사용한다. 공식적으로 쇠고기 도축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곰탕을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서울, 한양의 곰탕집들은 이런 쇠고기 소비문화를 뒤따른 것이다.
나주 곰탕도 마찬가지다. 나주는 큰 도시였고 큰 관청, 관사가 있었다. 역시 향교가 있고 외부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한양 도성에도 외국에서 온 사신과 외부 관리들의 방문이 잦았다. 역시 쇠고기 소비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나주 곰탕, 진주냉면이 발달한 까닭이다.
설렁탕은 출발부터 다르다. 곰탕이 고기 곤 국물이라면 설렁탕은 뼈와 내장 곤 국물이다. 때로는 소머리를 곤 국물도 더했다. 오늘날 서울 인근 경기도 몇몇 곳에 소머리 국밥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설렁탕을 만들 때 소머리도 이용했다. 그 방식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바로 소머리 국밥이다.
오늘날의 설렁탕에는 쇠고기도 더한다. 양지나 우둔살의 일부, 업진살 등을 넣는 설렁탕 전문점도 많다. 곰탕의 장점을 받아들인 결과다. 출발은 곰탕과 다르다. 내장, 소 머릿고기 등을 사골, 잡뼈 곤 국물에 더했다. 이른바 ‘부산물’들이다. 부산물은 정육의 대칭어다. 곰탕은 정육에서, 설렁탕은 부산물에서 출발했다.
육개장과 닭개장
닭은 개체가 너무 작다. 가정에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닭은 귀한 달걀을 낳는 존재. 그나마 풀과 벌레가 흔한 여름철과 달리 추운 겨울에는 먹이가 마땅치 않았다. 봄에 병아리에서 시작, 늦가을 대부분 닭을 ‘정리’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 급격히 발달한 주막에서 개장국을 끓인 것은, 그나마 개가 개체가 크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개장국은 주막의 주요 메뉴였다.
개장국은 ‘개고기+장(醬)+국[羹, 갱]’이다. 개고기는 일상으로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명의록(明義錄)’은 정조대왕 즉위 원년(1776년)에 작업을 시작해 이듬해 완성한 책이다.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한 과정 등을 기록했다.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했던 세손, 정조대왕이 즉위한 직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반대하고 궁궐에 자객을 침투시킨 반대파를 엄벌한 것이 정당했음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드라마 ‘이산’과 영화 ‘역린(逆鱗)’의 소재가 되었다. ‘이산’과 ‘역린’에 공히 정조 암살을 위해서 자객이 궁궐에 침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반대파에 의한 정조 시해 시도는 있었다. ‘명의록’의 공초(供招) 기록에 의하면 전병문, 강용휘 등 범인들은 궁궐에 침투하기 전 ‘궁궐 밖 개 잡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거사 실패 후 남대문 언저리로 도주, 다시 ‘개 잡는 집’에서 만난다. 사건 수사기록인 공초에 아무렇지도 않게 ‘궁궐 밖 개 잡는 집’, ‘남대문 언저리 개 잡는 집’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18세기 후반에는 한양 도성 곳곳에 개 잡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장국은 저잣거리 주막의 평범한 음식임을 알 수 있다. 167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안동 장 씨 할머니의 ‘음식디미방’에도 나온다. 개장국은 반가, 저잣거리를 따지지 않고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육개장과 설렁탕 등으로 바뀐다.
육개장은 ‘육[肉=쇠고기]+개장국’이다. 즉, 쇠고기로 마치 개장국같이 끓인 음식이 육개장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닭개장은 ‘닭고기+개장국’ 형태의 음식이다. ‘닭계장’으로 쓴 것은 틀렸다. 닭개장이 맞다.
개장국이 사라진 것은 청나라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청나라는 유목, 기마민족이다. 개의 존재가 농경민족인 우리와는 다르다. 개는 동반자 때로는 생명의 은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도 청나라 문화를 받아들인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저잣거리에서도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조선시대 말기 소의 생산량도 늘어나고 국가의 금육 정책도 힘을 잃는다. 나라가 망한 일제강점기, 금육은 허물어진다. 쇠고기를 더한 육개장과 쇠고기로 끓인 곰탕, 소의 부산물을 중심으로 끓여낸 설렁탕이 널리 퍼진다.
한반도의 국물 음식 중 으뜸은 곰탕, 설렁탕, 육개장 그리고 육개장을 중심으로 변형된 해장국들이다. 선지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이 있다. 선지에 각종 채소를 더한 것도 등장하고 장터에서 간단히 만들어 내놓았던 장터해장국도 선보인다.
한반도만의 국물 문화
전 세계 모든 문명국에는 라면이 있다. 동남아, 중동, 유럽, 미국,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라면을 먹지 않는 나라는 드물지만, 라면 국물을 알뜰하게 먹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에서 라면을 먹었던 이들은 “듣기와는 달리 일본 라면이 짜더라” 말한다. 당연하다. 일본인들은 라면 국물을 우리처럼 알뜰하게 먹지 않는다. 일본은 면 중심으로, 우리는 국물 중심으로 라면을 먹는다. 면을 먹는 이들은 면에 국물이 배어든 맛을 즐긴다. 우리는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는다. “나트륨이 많은 국물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은 허망하다. 우리는 ‘국물도 없는’ 음식을 싫어한다. 면보다는 국물에 만 밥에 김치를 얹어 먹어야 속이 후련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수반(水飯)도 마찬가지다. 물에 만 밥. 입맛이 없거나 간단한 상으로 손님을 접대할 때 정식으로 수반을 내놓았다. 왕(성종)도 즐겨 먹었고, 아버지 묘소에서 간단하게 수반을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 왕도(정조) 있다.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후 일상적으로 먹는 나물국, 생선, 고깃국, 개장국과 설렁탕, 곰탕, 육개장 그리고 라면과 수반까지.
한반도만의 독특한 국물 문화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마늘·파·부추·달래·흥거 등 오신채를 넣지 않고 만든 요리를 ‘사찰음식’이라 한다. 자칫 맛이 덜하거나 심심할 것이라 오해하지만, 다양한 레시피와 플레이팅을 접목하면 얼마든지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특별한 메뉴에 건강 밸런스까지 생각한 제철 사찰음식 한 상을 소개한다.
레시피 및 도움말 디알앤코 R&D총괄 장대근 셰프(조계종 한국사찰음식전문교육기관 이수)
장소 협찬 키프레시(홍대점)
12월이면 저마다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물론 기독교의 기념일이지만, 사찰식으로도 즐거운 분위기를 더할 수 있다. 낭만적인 저녁식사를 염두에 뒀다면, 스테이크가 떠오를 것이다. 연말 모임, 회식 등으로 육류 섭취가 잦아지는 게 부담스럽다면 고기 대신 두부 스테이크를 즐겨보자. 팬에 노릇하게 구운 두부에 단호박으로 만든 퓌레를 소스로 곁들이면 담백함이 배가된다. 여기에 김장을 한 뒤 남겨둔 시래기가 있다면 된장으로 맛을 낸 사찰식 샐러드가 잘 어울린다. 시래기 위에 색감이 다양한 식재료를 얹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할 수도 있다. 디저트로 즐기기 좋은 오미자청에 절인 무화과는 소화와 배변 활동을 도와 속을 편안하게 마무리해준다.
두부 스테이크 단호박 퓌레 단호박 한 통을 2등분하고 숟가락으로 속을 파준다. 생크림(150㎖)에 파낸 호박 속을 넣고 완전히 익을 때까지 끓인 후 촘촘한 채에 걸러 고운 퓌레 상태로 만든다. 두부(1/2모)에 소금을 뿌려 수분을 뺀다. 준비한 두부와 아스파라거스 두 대를 반으로 잘라 가열한 팬에 올려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준비한 단호박 퓌레를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아스파라거스, 두부 스테이크 순으로 얹는다. 각종 허브와 가니시를 더해 플레이팅한다.
시래기 된장 샐러드 잘 말린 시래기(50g)를 물에 30분 정도 불려둔다. 불린 시래기에 설탕(5g)을 넣고 40분간 끓인다(시래기:설탕, 10:1 비율). 시래기는 충분히 물에 불린 뒤 끓여야 독소가 빠지고 조직이 부드러워진다. 잘 익은 시래기를 찬물에 깨끗이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준비한다. 아보카도(1/2개), 라임(1/2개), 샬롯(2개), 당근(1/3개), 방울토마토(1개)를 2등분해 토치로 앞면을 그을린다. 넉넉한 접시에 시래기와 그을린 재료들로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듯 예쁘게 담아낸다.
오미자청에 절인 무화과 잘 익은 무화과(3개)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오미자청(50g)에 2시간가량 절인다. 절인 무화과에 바질, 타임, 로즈메리 등 각종 허브를 첨가하면 향도 돋워주고 색감도 어우러져 꾸밈새가 좋아진다.
‘그리움’의 다른 말 ‘復古’ 이경숙 동년기자
조국을 떠난 지 한참 된 사람도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이 있다. 울적할 때,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어려서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구는 많고 양식은 빈약하던 시절, 밥상에서는 밥만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둥근 상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모자란 음식을 나눌 때 느꼈던 진한 가족애와 혈육의 뿌듯함이 DNA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마솥 누룽지, 지겹던 보리밥,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래기죽도 각자의 추억과 함께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어 ‘그것만 먹으면 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그리워지는 것 같다.
골목에 있는 만화방 주인은 청년이었다. 가끔 내게 만화방을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대신 보고 싶은 신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만화방 앞에는 약간의 학용품이 놓여 있어 그것도 팔아야 했다. 그날도 만화방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군인 아저씨가 물건을 들고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몰두할 만큼 만화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만화방엔 안데르센 동화책도 많았다. 울적할 때면, 나는 동물들과 숲속 방앗간 짚 덤불에서 자던 소녀를 떠올리곤 했다. 샘물을 마시고 동물들과 대화하던 맑고 밝은 소녀가 아직도 가슴속에 있다. 지칠 때면 그 소녀가 가만히 내 창을 두드린다.
나팔바지를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동네 다 쓸고 다닐 거니?” 어깨는 각이 지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딱 맞고 바지통은 아주 넓은 디자인이었다. 그 시절엔 사실 유행이 일률적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취향을 주장할 만큼 당당하지도, 식견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개성을 개인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좀 멋쟁이다 싶으면 일제히 미니스커트, 일제히 맥시스커트를 입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았다.
테이블마다 달랑대는 조명등이 달려 있거나, 촛불을 켜는 낭만적인 카페도 많았다. 종종 작은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술이 아니더라도 20대는 늘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쉽게 흥분하고 자주 슬펐던 우리들의 20대. 끝도 없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모든 게 다 진지하기만 했던 시절.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모두 정의의 순교자라도 되고 싶어 했다.
미팅 땐 생맥줏집, 볼링장, 극장엘 갔다. 애프터 미팅은 카페에서 만나 주로 비원이나 경복궁, 덕수궁을 걸었다. 가난한 젊은 커플들은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추억들에 젖어보기 위해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복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니 심심하고 무미건조해 그리움이라도 불러와 옛 필름들을 다시 돌려보고, 식어버린 가슴을 조금이라도 데워보려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윤종국 동년기자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한다. 난 늘 나를 생각한다. 나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머리는 크다. 표준 사이즈로 옷을 고르면 거의 맞는 게 없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곳이 있다. 30여 년은 족히 된 듯하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알려준다. 바로 ‘벼룩시장’이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계6·7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묘(동대문구) 일대에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벼룩시장에서 레트로를 본다. 내게는 수만 가지 물건이 레트로 대상이다. 한 달에 두세 번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간다. 내 작은 체구를 잘 알기에 어울리는 옷도 찾아본다. 손에 주로 들리는 옷은 복고풍의 외투다. 벼룩시장에서 입수한 옷은 꼭 수선 집을 거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 없는 게 없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덤빌 곳은 또 아니다. 내게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다. 레트로를 사랑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레트로인이 된다. 예를 들면 맘에 드는 복고풍 옷을 하나 발견했다 치자. 구매의사가 있을 경우 먼저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면 초보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구매자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가격이 달라진다. 가격 매기기는 벼룩시장 주인들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흥정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설사 맘에 들더라도 그 맘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 그래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또 하나의 팁.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척하다가 진짜 맘에 드는 물건을 들고 슬쩍 “이건 얼마죠?” 하고 물으면 점포 주인은 대부분 낮은 가격을 부른다. 이것이 지혜롭게 레트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벼룩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나섰다. 그날 지나다 발견한 물건은 흙이 묻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신을 만해서 단돈 5000원에 손에 넣었다. 집에 와서 닦고 손질해보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신발이었다. 딸아이가 좋아라 했다. 내가 벼룩시장 마니아로 인정을 받은 건 사실 그날이었다.
한 달 전 큰손주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벼룩시장을 찾아 헤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찾기 위해서다. 신제품도 생각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녀석의 발 사이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선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전국, 특히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붐이 일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내에서 어린이 안전사고가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슬쩍 사라져버렸다.
벼룩시장을 갔던 날, 다행히 손주에게 맞을 것 같은 인라인스케이트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가격부터 묻고 사이즈를 확인한 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손주 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도 살폈다. 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눈 뒤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런 요령을 터득해야 비로소 벼룩시장의 프로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정비하니 새 물건보다 더 정감이 갔다.
손주 생일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건네주며 “지금은 키가 부쩍부쩍 크는 나이니까 일단 이것으로 먼저 타는 연습을 하자”라고 말했다.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그런지 손주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나는 손주바보 할아버지에서 멋진 할아버지로 거듭났다.
옛것들에서 한 수 배우며 사는 삶 육미승 동년기자
“넌 조금만 더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뭔가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심찮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친구들 말은, 내 패션이나 생각 그리고 사는 방법이 자기들과는 전연 다르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레트로가 내 생활이니….
특히 패션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옷을 살 때 겉옷은 지금 당장 유행을 타는 것들 중 나중에도 입을 수 있고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른다. 그리고 다른 옷들은 옷장 문을 열어 예전에 신나게 입고 즐겼던 옷들에서 선택한다. 그날의 모임 콘셉트에 맞고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짐이 없는 은은한 멋을 지닌 그런 의상을 즐기는 거다. 나는 옛것을 너무 좋아한다. 옛것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보고 “어머 얘, 너무 잘 어울린다아~’ 하고 해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회상하고 추억에 빠지는 시간은 천천히 꼼꼼하게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끝나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 감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는 옛것들은 대부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가끔은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또는 영화 속에서, 예를 들면 사마의 같은 중국의 책사들에게 한 수 배우길 희망한다. 그 놀라운 생각의 회로를 닮아보려고 혼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젊은이들. 그 두뇌를 못 따라가는 나는 느린 사고방식이 편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질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 모습이다. 져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일처리를 할 때도 나를 뺀 모든 관계자들이 편한 쪽으로 해답을 구한다.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를 길들이며 살아왔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불똥이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져도 “이게 뭐지?” 하며 그제야 슬쩍 뒤로 물러날 사람이라며 핀잔 섞인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린다. 특히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끝까지 기다린다.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물을 가만히 두면 침전물들이 여러 층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맨 위로 올라온다. 내 앞의 문제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마치 무위이화(無爲而化)하듯 저절로 아주 유효하고 명쾌한 답이 나온다. 그 신기함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레트로의 진가라고 믿는다. 새로운 기술과 기교도 좋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더 많은 답을 찾는다. 레트로는 내 단짝이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복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패션, 음악, 미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레트로는 ‘마음의 휴식’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1980년. 그 해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 중 건축설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 모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회원들은 매년 몇 달씩 동아리방에서 합숙을 하며 건축 작품전을 준비했다. 식사는 2학년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체 회원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설거지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만든 밥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식사로 몇 달 합숙을 하다 보니 대부분 건강이 나빠졌다. 1980년의 교정은 봄부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건축과 동아리 회원들은 밤낮으로 모여 작품전을 준비했다. 대체로 밤에 설계를 하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데모하러 나가는 회원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최고참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저녁에 가끔 학교 앞으로 나가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그날도 4학년 동기들은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4학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는 학교 교문 근처 문방구점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봤다. 당시 텔레비전은 다 흑백이었다. 그런데 선발대회 중에 화면 아래쪽으로 대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합숙 중이었던 우리는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이었다. 17일에는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5월 18일.
그 해 우리가 준비했던 5월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집회는 일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회원들 집에서 만나 작품전 준비를 했고 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준비해서 내 임기 중에 전시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또 왔고 어느 날 술친구들이 중국집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방송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 22일 이었다. 우리는 컬러로 텔레비전을 보면 중국 영화처럼 피가 난무하는 장면은 너무 살벌할 것 같다는 둥, 연예인들이 옷을 더 화려하게 입을 것 같다는 둥 이런저런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그날 그렇게 흑백텔레비전 시대가 종료되었고 내 학창 시절도 저물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로마의 휴일’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다. 오래전에 갔던 로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 화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흑백이라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오히려 로마의 유적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컬러 사진이 보편화하기 전의 흑백 사진들은 그 분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신비로움이 있다. 흑백 사진을 손에 들면 사진을 찍던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듯하다. 흑백이라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을 주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색과 형태 그리고 자극적인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정보의 홍수와 자극의 파도를 견디려니 모든 감각기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흑백은 잠시나마 여백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눈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는 새벽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두물머리의 새벽안개는 한 폭의 수묵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는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안개의 농담(濃淡)으로 그려놓은 수묵화는 화려한 가을날의 유화 같은 풍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그 여백은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요즘 펜화 스케치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려놓고 원본의 컬러와 비교하면 흑백이 가진 깊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흑백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흑백은 레트로다. 나는 레트로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