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골프클럽은 해발 2800m 고도에 위치해, 골퍼들에게 독특하고 매력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CNN에서는 이 골프클럽을 ‘당신의 골프 버킷리스트를 위한 10개의 독특한 코스’ 중 하나로 선정했을 정도로, 전 세계 골프 애호가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명소다.
에티오피아 인구는 약 1억 2900만 명에 달하고 세계적으로 인구 규모 10위를 차지한다. 면적은 대한민국의 약 11배에 달하는 110만 ㎢로 면적 기준 세계 26위에 랭크되어 있다. 주 사용 언어는 암하라어와 영어이며, 국민 한 사람당 GDP는 1000달러로 세계 168위를 기록하고 있다. 고원지대의 온화한 기후는 골프를 즐기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준다.
아디스아바바는 ‘새로운 꽃’이라는 뜻을 가진 에티오피아의 수도이자 최대 규모 도시다. 해발 2500m에 위치한 이 고원 도시는 지리적으로 에티오피아를 두 개로 나누는 역할을 하며, 인구는 약 340만 명이다. 아디스아바바 볼레 국제공항은 여행객들에게 편리한 레이오버 서비스를 제공하며, 공항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수의 호텔들이 무료 셔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24시간 넘는 스톱오버 서비스도 제공해, 여행 중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거나 짧은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으며, ‘커피’라는 단어는 에티오피아 북부의 ‘카파’(Kaffa) 지역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커피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아랍어 ‘카와’(Quhwah, Kahwa)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기운을 북돋우는 것, 술’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호텔에서 마셔본 커피 맛은 기대 이하였지만, 아마도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커피 맛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디스아바바에는 18홀을 자랑하는 아디스아바바 골프클럽과 6홀 코스인 브리티시 앰버시 골프코스 등 단 두 개의 골프코스만 있다. 아디스아바바 골프클럽은 1955년에 문을 열었으며, 당시 황제가 직접 참여한 개장식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9홀로 운영되다가 2016년 18홀로 확장되었으며, 현재는 국방부가 소유하고 있다. 골프클럽의 평점은 5점 만점에 4.3점으로, 제공하는 서비스에 방문객들이 매우 만족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골프클럽은 해발 2800m에 자리해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날씨를 자랑한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미세먼지 없는 자연환경은 골프를 즐기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공항에서 단 10km 거리에 위치해 접근성 또한 매우 뛰어나다. 또 다른 6홀 코스인 브리티시 앰버시 골프코스는 공항에서 7km 이내 위치하며, 두 골프장은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아디스아바바 골프클럽은 100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과 연회 및 결혼식 등이 열리는 크고 멋진 레스토랑을 보유하고 있다. 호텔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데, 필자가 도착한 날에는 결혼식이 있어 많은 방문객들로 붐볐다. 캐디는 35명이며, 여성이 20명, 남성이 15명이다. 나이대는 18세에서 35세 사이로 다양하다.
화폐 단위는 비르(Birr)이며, 1달러는 약 52비르에 해당한다. 라운드 비용은 외국인의 경우 35달러, 현지인은 13달러로 설정되어 있으며, 손카트 이용료는 3달러다. 캐디 사용은 필수이며, 캐디피는 10달러로 최근 인상되었다. 골프클럽에서는 현재 드라이빙 레인지가 수리 중이며, 전반 9홀 일부가 보수 중이어서 후반 9홀만 두 번 라운드할 수 있다. 1억이 넘는 인구 중에 골퍼는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이다.
라운딩 당시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코스 일부에 물기가 남아 있었으며, 주의가 필요했다. 코스는 전형적인 파크랜드 타입으로, 러프가 많고 깊어 볼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특히 10번 홀(파4, 274m)은 좌우에 워터 해저드가 있어 티 샷에 유의해야 한다. 12번 홀(파3, 321m)은 왼쪽으로 워터 해저드가 있고, 오른쪽은 매우 넓어 선택의 여지를 준다. 13번 홀(파5, 461m)은 강한 바람으로 인해 페어웨이에 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있는 등 자연스러운 장애물이 존재한다. 18번 홀(파4, 275m)은 그린 앞 100야드 지점부터 큰 호수가 멋진 뷰를 제공하며, 티 샷이 200m 이상이면 볼이 호수 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전반 9홀을 라운드하지 못한 아쉬움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아프리카에서의 라운드는 매우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다다.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이야말로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가장 큰 동기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처음 타보는 국적기. 처음 보는 ‘그을린 피부’의 여 승무원. 영상과 인쇄 자료를 살피며 상상해보는 시뮬레이션의 시간들…. 에티오피아까지 가는 15시간의 비행시간이 지겹기는커녕 설렘으로 가득한 이유다. 많은 이에게 이름조차 낯선 에티오피아는 수백만 년 전 유인원 루시(lucy)가 직립보행을 시작했던 나라이며, 모세가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십계명 돌판이 보관돼 있는 나라다. 시바 여왕에서 시작된 고대 왕국의 찬란한 영화를 이어받았으며, 어떤 나라보다 앞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식민지였던 적이 없는 나라이자 고유 문자를 가진 나라, 에티오피아로 떠나보자.
아디스아바바에서 시작되는 여행 루트
여행은 크게 북부 유적지 여행과 남부 커피농장 여행으로 나눠진다.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시작해 고대의 ‘악숨’, 중세의 ‘랄리벨라’, 근세의 ‘곤다르’로의 여행은 국내선으로 이동하면서 볼 수 있도록 잘 짜여 있다. 악숨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400km 가면 있는 랄리벨라에는 불교의 아잔타나 엘로라 석굴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대한 암굴 교회군이 있다.
주변이 온통 이슬람인 환경 속에서 에티오피아가 기독교를 지켜내기엔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슬람이 위세를 떨치던 12세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온 랄리벨라 왕은 이곳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무슬림의 눈에 띄지 않는, 위험을 최소화한 11개의 암굴 교회를 지었다. 23년에 걸쳐 지어졌다는 이들 교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인간의 힘과 기술로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만큼 불가사의해서 ‘천사가 함께 만든 교회’로 불린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전국에서 랄리벨라의 암굴 교회로 순례자들이 찾아드는데, 이들이 일제히 초를 켜고 기도하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라 한다.
이르가체페로 가는 커피 로드
이르가체페로 가는 길은 시원하게 쭉 뻗은 도로여서 가슴이 탁 트인다. 시다모주 이르가체페에 도착해 질퍽한 황톳길을 따라 2km쯤 걸어 들어가니 커피농장이 나왔다. 커피 수확은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라 볼 수 없었지만 농장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밝은 미소만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커피 빛깔의 향기를 지닌 천사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이르가체페였다. 비가 내려 질퍽대는 황톳길을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바나나와 열매를 등에 진 소녀들이 맨발로 걸어간다. 다 떨어진 옷이 조금도 남루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어디서도 만나지 못할 햇살 같은 웃음 때문이었다.
‘분나 마프라트’라고 불리는 독특한 커피 의식
에티오피아 여행이 지닌 최고의 매력은 ‘분나 마프라트(Bunna Maffrate)’라 불리는 독특한 커피 세리머니다. ‘커피(coffee)’라는 말부터가 에티오피아의 지역명인 ‘카파(kaffa)’에서 왔으며, 에티오피아말로 커피를 뜻하는 ‘분나(bunna)’라는 말에서 ‘원두(bean)’가 나왔다 할 정도이니 이곳을 왜 커피의 기원이라 부르는가에 대해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커피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생존을 위한 귀한 식량인 동시에 신께 올리는 신성한 경배의 수단인 것이다. 이 의식을 제대로 하려면 한 시간 넘게 걸리는데 먼저 향을 피워 몸을 정결히 한 후 원두를 프라이팬에 볶는다. 그런 다음 절구에 넣고 찧어서 낸 가루를 ‘제베나(jebena)’라는 목이 긴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시니(cini’)라 불리는 작은 잔에 따라 마신다. 보통 세 잔을 마시는 것이 기본이며 팝콘이 같이 제공되기도 한다. 누군가 에티오피아에서 맛보는 커피 맛을 ‘천국의 맛’이라 했는데, 어딜 가든 맛있고 다양한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피 마니아에게 에티오피아는 천국 같은 여행지임이 틀림없다.
사진은 아마추어나 비전문가에게 일종의 ‘오락 부산물’ 같은 것이다.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즐거운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즐거움과 기억, 과시하고픈 욕망을 사진에 담는다. 하지만 사진작가에게 사진은 창작의 고통이고, 노력만큼의 보상이다. 경기도 일산의 작은 작업실에서 만난 사진작가 이병용(李秉用·57)에게 사진은 마땅히 해야 할 감사를 담은 각고의 산물이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1968년 춘천. 한 소년은 동네에서 낯선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든 군중을 발견하고, 무슨일인가 싶어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늘 보아왔던 파월장병 행렬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금 기다리자 훈장이 잔뜩 달린 군복 차림의 외국인이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소년에게 그 모습은 강렬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사람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자국 군인의 참전비 제막식에 참석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였다.
“나중에 일본에서 사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사진가로 활동하다 사고로 이전 작업물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맘을 추스리며 참전용사의 사진을 찍겠노라고 맘 먹은 것은 아마 그날 각인된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2006년 9월 참전용사 후손들의 한국 방문 행사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막연히 상상했던 용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죠. 생활에 찌든 그들에게 어떻게든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한국전쟁 참전국 중 에티오피아를 제일 먼저 선택한 것도 어릴 적 기억 때문일 겁니다.”
이 각오를 시작으로 이병용 작가는 2007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과 의료지원을 한 5개국 모두를 촬영할 계획을 세운다. 참전용사나 미망인, 유가족을 모두 찍겠노라고 맘먹는다. 그리고 2007년 에티오피아를 두 차례 촬영하고, 곧이어 2008년 터키를 방문해 5만장 분량의 작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이 결과물을 2008년과 2009년 에티오피아와 터키에서 발표하게 된다.
이 작가의 에티오피아 방문은 이전부터 에티오피아와 교류가 잦았던 동양일보 조철호(趙哲鎬) 회장을 만나 후원 약속을 얻어내면서,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2007년 2월 24일부터 10일간 방문했죠. 그 이후 4월 18일부터 6월 8일까지 다시 한 번 방문했고요.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해발 2400m가 넘는 고산지대라 고산병에 고생도 했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낙후된 지역이라 사진작업을 하기에는 최악의 장소였어요. 그래도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늘 촬영 전에는 그분들께 큰절을 올리고 작업을 시작했죠.”
터키는 프로젝트 준비 과정에서 한국을 방문한 참전용사와의 만남 덕분에 두 번째 국가로 결정됐다. 터키에서의 작업도 비슷했다. 열악하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따뜻한 환영 덕분에 6개월 동안 50개 도시를 돌았다.
“그곳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죠. 아이세 두주균 여사라고. 그의 남편은 결혼한 지 2주만에 덜컥 입대해 한국으로 떠나버렸죠. 그리고 6개월 만에 전사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이후 그는 평생을 혼자 살았죠. 자식에 대한 모성애와 같은 평범한 감정을 평생 못 느끼고 사신거예요.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공식 문서에서 남편의 사진을 찾아 전해드리고, 그분의 사진도 찍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에게 실컷 어리광을 부린 일이에요. 제가 자식이 된 것같이 말이죠.”
이후 작가는 부산 유엔공원묘지에서 남편의 묘비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 시계는 2008년에 멈춰버렸다.
“두 차례 대량의 작업을 하고 나면 그 이후의 작업을 위한 예산을 마련할 방법이 생길 줄 알았어요. 일본에서 유학하며 느꼈던 사진가나 사진 작품에 대한 대중이나 기관의 반응이 한국에서는 완전히 달랐어요. 어렵게 보훈처 관계자를 만났을 때는 ‘왜 개인이 이런 일을 하냐’라는 핀잔만 들었죠.”
그래도 다행히 터키에서의 작업을 정리한 책 를 지난 1월 발간할 수 있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후원 덕분인데, 진흥원이 사진집에 예산 지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책의 부제는 ‘한국전쟁 참전 UN 21개국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 Vol.2’이지만, Vol.1 그러니까 첫 번째 책은 아직 이 세상에 없다. 역시 예산 탓이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할 계획입니다. 애초 계획보다 10년 늦어져 2027년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가 됐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감사는 정말 제대로 이뤄졌는지 반문하고 싶어요. 정부대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행사 말고요. 한국전쟁과 관한 일로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며 되레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하신 그 어르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부에선 용병이라 비아냥거리지만, 그들이 받은 목숨 값은 정말 푼돈이었어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그분들에 대한 감사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찍는 사진은 그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부산물일지도 모르겠어요.”
한국전쟁 중 한반도에서 전사나 사망한 유엔 참전용사는 17만8569명이고, 부상은 55만5022명, 실종 2만8611명, 포로는 1만415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