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한 섬이었다. 세상의 변화로 이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뭍이 되어 자동차로 이어진다. 전북 부안의 계화도를 향해 달리는 새벽길에 정적만 가득하다. 도로 양옆의 들판은 어둠 속에서 박하 향기보다 짙은 기운을 뿜어내고, 새해의 쨍한 새벽 공기는 차창에 서릿발을 만들어낸다. 어스레한 불빛 저편으로 광활한 농경지와 갈대숲이 함께하고 물 빠진 갯벌도 드러난다.
광복 이후 최대의 간척 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는 계화도(界火島). 한때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식량 자급을 위한 1호 간척공사로 인접한 부안군 동진면과 방조제로 연결되었다. 바닷가에 둑을 쌓고 고인 물을 빼내니 섬은 곡창지대로 변했다. 농경지 조성이 활기를 띠고 쌀이 생산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의 계화미(米)를 브랜드화하기도 했다. 계화마을은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으로 각종 조류가 서식하고, 겨울철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겨울을 지내기도 한다. 여전히 계화도라 불리는 섬마을에서 이제는 빼어난 운치의 새해 해맞이를 한다.
계화마을은 여느 시골과 다름없이 소박하다. 들어서자마자 바다를 막은 둑을 따라 길게 늘어선 소나무 행렬이 잔잔한 반영을 이루며 맞는다. 간척지와 마을 사이의 좁고 긴 물길의 계화조류지는 1km에 이르는 방풍림 소나무를 품었다. 언제나 온갖 철새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검푸른 새벽하늘의 구름과 수면 위로는 물결의 잔상이 신비롭다. 마을을 마주 보는 방죽의 고요함으로 차분해진다.
차츰 주변의 어둠이 옅어지고 이윽고 하늘 저편으로 불그스레한 기운이 번진다. 해 뜨기 직전의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살짝 바람이 불면서 잔잔하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다. 숨죽이며 정지된 시선은 생동감 있는 자연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짧은 순간 고요한 세상을 뒤덮은 매직이다. 단조로운 듯 반듯한 제방 위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세상을 일깨우는 아침 해의 운치는 계화리 작은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바다 수평선 위에서 솟아오르는 동해의 일출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장엄한 해맞이를 하고 새로운 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왔다.
눈부신 겨울 서정, 변산해수욕장
해돋이의 위엄으로 얻은 에너지를 장착하고 아침 햇살 반짝이는 해안길을 달린다. 조금 전 일출의 여운을 지닌 채 만난 변산해수욕장은 온 누리가 환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는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밖에 없네’라고 했건만,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출의 장엄함을 이미 보여주었고, 밀물과 썰물의 변산해수욕장 앞에선 희고 고운 모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하늘을 실컷 볼 수 있는 철 지난 바닷가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두 눈에 꾹꾹 담는다. 송림으로 둘러싸인 백사장과 조화를 이루며 평온하게 휴식의 시간을 안겨주는 여름과는 다른 매력을 풍기는 겨울 바다다.
아득한 전설 속으로, 채석강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물속에 잠겨서 지금에 이르렀다. 파도에 씻기고 기온과 압력의 변화에 따라 형성된 비경을 변산 격포리에 가면 마주 보게 된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채석강’이다.
자연이 만들어온 억겁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공룡을 떠올린다. 지질학적으로 공룡 시대보다는 비교적 짧은 약 7000만 년 전부터 형성되어온 채석강의 퇴적암이다. 지금도 암석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자연 속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켜켜이 쌓이고 겹겹이 맞물린 퇴적암 앞에 서면 그동안 자연이 이끌어온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변화무쌍한 파도의 침식을 받으며 쌓아 올린 퇴적암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문득 아득한 전설 속의 인물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물이 가득 차오른 채석강은 층층의 아찔한 해안 절벽과 먼 바다의 풍경으로 아련하다. 이윽고 물이 빠져나가고 드러난 바닥의 넓은 암반 위로 간간이 파도가 훑다 가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그 위로 온전히 드러낸 채석강의 비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과 분주히 해식동굴로 향하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오간다. 외변산을 대표하는 명승지다. 참고로 격포항 물때를 확인하고 간조 시간 1~2시간 전후로 방문하는 게 좋다.
마음이 새롭게 태어나는 절집, 내소사
능가산내소사(楞伽山來蘇寺) 현판의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약 600m에 이르는 사철 푸른 전나무 숲길이 사랑받는 내소사. 마치 절 마당에 닿을 때까지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마련된 듯한 전나무 숲길이다. 명품 치유의 숲길로도 알려져 있다. 침엽수 특유의 맑고 그윽한 향이 경건함과 마음의 안정을 주는 통과의례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소사는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기세 좋게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과, 일주문 앞과 천왕문 뒤의 당산나무인 천년의 느티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 목적이 되기도 한다. 전나무 숲이 끝나면 벚나무길과 요사채 옆의 보리수와 산수유, 그리고 피안교부터 천왕문 가는 길의 단풍터널이 또한 그렇다. 계절마다 은은하게 자연 속에 푹 잠긴 내소사는 특히 눈 내린 설경 속에 자연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으뜸이다.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우리가 보아야 할 곳 중에 내소사를 꼽았다. 자연을 닮은 모습이 조화를 잘 이룬 사찰이라고 했다. 특히 대웅보전의 솟을연꽃살문은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수백 년을 견뎌낸 나뭇결이 자연 그대로의 색감을 보여주어 눈여겨볼 만하다.
내소사 안에서는 무엇이든 자연스럽다. 절 마당에서 둘러보는 능가산의 산세가 낯선 느낌 없이 편안하다. 무채색의 사찰 색감이 고고하고 정갈하다. 도회인들에게 주는 한적함으로 유달리 힐링을 얻는다. 복잡한 세상에서 수습되지 못한 마음이 새로워지는 기분이다. ‘이곳에 오면 새롭게 태어난다’는 절 이름(來蘇) 때문인지 새해 들어 찾아가 보기에 걸맞은 절집이다.
곰소염전의 겨울
염전의 소금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봄부터 가을까지다. 변산반도를 돌아보면서 철이 지났다고 곰소염전을 안 보고 갈 수는 없다. 요즘 후쿠시마 원전 방류 문제로 소금 이야기가 분분한데, 천혜의 땅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곰소염전은 겨울이 되어 쉬는 중이다. 한때 전통 소금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궁(宮)에 진상까지 했다는 곰소염전이다. 지금은 퇴락하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품질은 최상으로 평가받는다. 군데군데 염부들이 염전을 손질하고 정리하는 모습이 보이고, 건너편 산이 염전 속으로 들어와 반영을 이룬다. 부근의 곰소항으로 가면 곰소젓갈단지에서 질 좋은 젓갈을 구입하고, 감칠맛 나는 젓갈정식을 맛볼 수 있다.
자연의 집,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에서 머물다
채석강에서 자동차로 5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은 국립공원공단의 체류형 생태관광 시설이다. 숙소 창밖으로 서해의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호젓한 자연 속 숙소에서 파도치는 바다가 보이고, 노을이나 별을 볼 수도 있다. 2023년 7월에 개원해서 내부 시설이나 집기 등이 깔끔하고, 저렴한 이용료까지 금상첨화다. 숙소를 보유한 본관 건물과 언덕 위 자연의 집이라는 독채 객실의 풍광이나 환경 또한 수준급이다. ‘숲나들e’에서 예약하는 전국 자연휴양림과는 달리 이곳은 국립공원 생태탐방원 홈페이지에서 매월 1일 예약이 시작된다. 생태 프로그램을 필수로 예약해야만 객실 예약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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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 자락에 있는 옛날 마을이다. 일부러 꾸며 만든 눈요기용 민속 마을이 아니다. 단장이야 좀 했지만 겉치레에 흐르지 않았다. 이곳은 500년간 이어진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일부 후손들이 산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즐비해 이색적이며, 하나같이 묵은 시간의 잔영이 더께로 쌓여 고색창연한 마을이다.
마을 길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일 없이 거듭 휘어져 나직한 선율처럼 포근하다. 느린 걸음으로 걷기에 좋은 골목길이다. 발길이 느려지면 풍경이 한결 세밀해져 살갑게 다가온다. 첫눈에 정겨운 건 돌담길이다. 집과 집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마을 사이사이로 흘러가는 돌담길 길이는 자그마치 5.3km에 이른다. 외암마을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라 할 만하다. 예로부터 외암은 ‘삼다(三多) 마을’로 통했다. 양반이 많고, 양반들의 글 읽는 소리가 흔하며, 돌이 유독 많다는 건데, 땅을 파면 온통 돌투성이 지질이란다. 따라서 돌담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등장했다. 이는 어쩌면 주민들이 집단으로 창작한 환경미술에 가깝다. 그 이미지는 수더분하나 아름다우며, 기법은 소박하지만 능란한 것이니까. 돌담길은 미로처럼 얽혀 퍼져나간다. 길 끝이란 없다. 끊길 듯하다가도 다시 이어진다. 마치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떠돌이 인생의 상징처럼.
신창댁에서 객을 싣고 시동을 건 돌담길은 온 마을을 감고 휘돌며 덩실한 양반 고택들과 조촐한 초가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주요 반가(班家)들은 대체로 마을 안길 북쪽에 있다. 이곳은 일반 민가들이 들어앉은 남쪽보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다. 그래 마을을 보듬은 설화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의 범람을 피할 수 있다. 즉 주거 여건이 좋은 심층부다. 종가, 사당, 송화댁, 참판댁 등 상류층 가옥들이 주로 여기에 산재한다. 개중 핵심은 건재(建齋) 이상익(1848~1897)이 1869년에 지은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우람하면서도 정교한 구조를 지닌 집이다. 떡 벌어진 행랑채 중앙에 자리한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마당과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정갈하고 수려한 구색으로 돋보이는 안채가 있다. 건재고택이 유명한 건 사랑채 앞마당에 조성한 정원 때문이다. 조선의 옛집들을 보면 크거나 작거나 사랑채 마당을 거의 여백으로 남겨둔 걸 알 수 있다. 조경이라야 그저 소나무나 배롱나무 두어 그루 심거나 자그만 화단을 만든 게 고작이다. 옛사람들은 마당에 굳이 나무를 잔뜩 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집으로 들이치는 산야의 경관을 만끽하며 내면에 자연을 들여놓는 걸 즐겼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전통 미학을 차경(借景, ‘풍경을 빌려온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건재고택의 사랑채 마당엔 수목이 빼곡하다. 용트림처럼 절묘하게 비틀린 채 생동하는 노송을 비롯해 갖가지 정원수를 보라. 화려한 정원이다. 괴석과 석조 장식물에 정자까지 다양한 조경 요소를 조밀하게 배치하기도 했다. 당최 여백이 없어 답답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허공으로 펼쳐진 나무들의 가지로 인해 한낮에도 어둑하다. 전통 범례를 초월한 이 정원의 이질성은 오히려 묘한 미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미태의 레이스를 펼치는 나무들의 모습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뭔가 웅숭깊은 맛을 자아내는 이곳에서 신령스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정원을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본식 조경 방법을 따른 것으로 본다. 조선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공간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집 마당 가운데 나무를 심은 것은 방에 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며 평가절하하는 견해도 있다. 사랑채와 대문이 일직선상에 놓인 바람에 집안의 기(氣)가 빠져나갈 수 있어 비보(裨補) 용도로 나무들을 심었다는 얘기도 있다.
건재고택에선 추사 김정희를 살짝 만날 수 있어 매력을 더한다. 추사체로 쓴 현판과 주련 다수가 걸려 있어 문기(文氣)가 풍긴다. 이 집은 추사의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의 친정이다. 이런 인연으로 추사가 글씨를 남겼다. 낙관이 박힌 추사의 친필은 5점 정도로 파악된다. 건재고택엔 오랫동안 빗장이 걸려 있었다. 개인 소유였던 데다 소유권 소송 문제 등이 겹쳐 문을 닫아뒀던 것. 그러다가 2019년 아산시가 인수한 이후 요즘은 하루 두 차례 일정한 시간에 개방한다.
맹사성 고택은 최고(最古) 민간 주택
건재고택 뒤편 저만치엔 참판댁이 있다. 건재고택과 함께 외암리를 대표하는 집이다. 현재 종손 일가가 산다. 여느 빈집과 달리 사람의 온기로 숨을 쉬는 집이다. 규모로나 구조로나 완연한 대갓집이다. 참판 벼슬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8~1950)의 고택으로 고종이 하사한 집이다. 고종이 왜? 이정렬은 똑 부러지는 기개로 할 말 다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야욕 저지를 탄원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하나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이정렬은 말 등에 거꾸로 올라타고 대궐에 들어가는 진기한 시위를 했다. 조회를 주관하던 고종이 경악할 수밖에. 이 통렬한 장면에 대해 황성신문은 이렇게 썼다. ‘아침 햇살에 봉황이 울었다.’ 이정렬은 종단엔 ‘나라 망하는 꼴은 차마 못 보겠다’며 벼슬을 던지고 낙향했다. 이후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다지. 그걸 안 고종이 먹고살 만한 재산을 보냈으나 세 차례나 사양하며 돌려보냈고, 이번엔 고종이 낙선재의 축소판쯤 되는 집을 지어줬는데 그게 지금의 참판댁이다. 이 집의 처마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퇴호는 고종이 이정렬에게 내린 별호다. 현판은 고종의 아들 영왕이 9세 때 썼다. 이정렬의 못 말릴 결기와 고종의 대범한 풍모가 겹으로 환히 비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발길은 이제 설화산 너머 배방읍 중리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에 닿는다. 조선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인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고택이 있는 곳이다. 이 집의 주인은 본래 고려 말의 무신 최영 장군이었다. 한편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연고로 최영이 맹사성에게 집을 물려줬다. 집의 형상은 그지없이 조촐하다. 물질에 무심한 청백리의 살림집답게 단출하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으스러진 게 많은 집이기도 하다. 덩달아 보수와 변형도 잦았다. 엄밀한 분석을 할 경우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복화반 정도가 이 옛집에 남은 원 구조물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고려 말에 지어진 집이라는 사실엔 하자가 없다. 우리나라에 남은 최고(最古)의 민간 주택으로 간주되는 집이다.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조의 황금기를 쌍두마차처럼 이끌었던 주역이다. 정치인다운 기량은 물론 청렴결백으로 당대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그의 말년 생활은 소박해, 이를테면 집에서 기르던 소를 타고 돌아다니는 정도에서 자족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해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허름한 이가 방문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맞이했다. 매사 목에 힘을 주는 법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고결한 인품이 흔하던가? 저마다 꿍꿍이와 내숭을 장착하고 각축을 일삼는 게 속세다. 맹사성의 성정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고 한다. 그의 온유한 정신은 세상의 어둠을 감쌀 수 있는 치마폭 같은 것이었다.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
“락페스티벌 펼쳐 성황 이뤄”
아산시는 1995년 1월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면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근래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형 산업체들이 입주하면서 지역사회에 역동성을 불어넣고 있다. 지역문화를 향유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문화원이 해야 할 역할이 많아졌다. 책임감도 느낀다.” 이는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아산시 인구가 38만여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유입이 많았다. 아산에서 출생한 2세대도 많은데, 그들은 아산의 미래를 짊어질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 문화원은 아동이나 청소년은 물론 젊은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반응은 매우 좋다. ‘전통놀이와 내 고장 알기’ 같은 프로그램에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의 위력에 눌려 퇴색하기 쉬운 게 전통문화다. 옛것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보나?
“현대적인 문화를 즐기는 경향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지역의 옛것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한 문화재 탐사 프로그램을 적극 가동하고 있다. 이 역시 참여도가 높다.”
아산은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요즘도 온천에 사람들이 몰려드나?
“아산시 온양지구의 온천은 백제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실 온천 역할을 할 만큼 유명했다. 1980년대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이후 생활상의 변화에 따라 한동안 온천의 인기가 저하됐지만 서울-아산 간 전철이 개통되면서 상황이 개선됐다. 전국의 어느 온천 지역보다 양질의 수질을 공급한다는 점도 이 지역 온천의 강점이다.”
요즘 아산시에서 부각된 문화 이슈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온천 문화의 보고인 ‘온양행궁’의 복원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아산 시민의 숙원이자 지역 발전을 위한 핵심 사업이다. 그러나 재원 문제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온양문화원이 추진한 중점 사업과 성과엔 어떤 게 있나?
“신정호수공원을 신정호 아트밸리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 최고의 명품 공원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미 문화예술과 생태가 어우러진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온양문화원은 ‘락페스티벌 달그락’을 주관하기도 한다. 지난 8월에 열린 행사엔 노브레인, 육중완밴드, 크라잉넛 등 21개 팀이 참가해 열띤 공연을 펼치며 성황을 이루었다. 전국 최고의 페스티벌로 키워나갈 참이다.”
요즘은 문화원마다 전통문화 보존 활동에서 나아가 한결 트렌디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문화원이라 하면 흔히 옛날 문화를 축으로 삼아 활동하는 걸로 오해한다. 사실 문화원은 이미 변화했으며, 변신에 더욱 가속을 붙이고 있다. 현대 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온양문화원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프로그램을 다수 개발했다. 타 문화원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잦다.”
철원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멀지도 않다. 알고 보면 생각난 김에 떠나볼 수 있는 곳이다.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DMZ가 인접해 있고,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폭포가 지금도 쏟아져 내린다. 아득한 옛날 후고구려의 궁예 이야기와 임꺽정의 무대였던 지역임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먼 곳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다. 다가갈수록 북녘을 눈앞에 둔 철원평야는 황금 들녘이다. 절벽에 매달린 한탄강 협곡의 주상절리길은 스릴 넘치게 아찔하다. 전쟁을 대비하고 군부대 포사격 훈련장이었던 땅엔 백만 송이가 넘는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이 땅의 최북단 철원의 풍성한 가을이 마냥 아름답다.
마음을 두드리는 평원의 가을
가을을 마음에 담기에 이 땅의 드넓은 평야만 한 곳이 있을까. 누렇게 물든 대자연과 넓은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철원 소이산은 다른 지역보다 가을이 먼저 시작된다. 새벽부터 분주히 달려서 도착한 소이산 주변으로 운무가 가득하다.
소이산은 해발 362m의 야트막한 산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금방 오를 것 같은 높이지만 제법 가파르다. 20여 분 숨차게 오른 소이산 전망대는 본래 군부대 주둔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오르막 길목의 평화마루공원에서 공원과 지질 명소를 안내한다. 오래전의 미군 막사와 초소는 녹슨 채 허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처의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인 봉수대오름길로 이어지는 코스도 보인다.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펼쳐지는 경이로운 광경에 비로소 가을을 흠뻑 맞는다. 황금빛 너른 들녘의 놀라운 풍광이 전망대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산야는 거대하다. 무한한 대지와 하늘, 철원 북쪽의 평강고원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도록 막힘없이 탁 트였다.
철원평야에 오름처럼 우뚝 솟은 소이산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는 봉수대가 위치했던 곳이다. 철원의 역사와 함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이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 너머엔 비무장지대가 있다. 맑은 날에는 북한 주민들의 움직임도 보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DMZ 건너편 철의 삼각지대를 미묘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분단이란 현실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최북단 철원은 가을이 일찍 찾아와 추수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9월 초부터 시작해 10월이 되면 조생종 벼들은 일찌감치 수확을 끝낸다. 이미 추수를 한 논과 벼가 익은 상태에 따라 논마다 채도 대비가 다양하다. 끝없이 넓은 패턴의 선과 면의 들판은 한 편의 작품 같다.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오대쌀은 우리에게 유명하다. 무엇보다 용암 대지와 현무암의 풍화로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청정환경에서 생산되는 쌀의 질과 밥맛을 결정하는 천혜의 기후 조건 또한 으뜸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에서 패하고 철원평야를 빼앗겨 김일성이 슬퍼했다는 게 괜한 얘기가 아닌 듯하다. 철원오대쌀은 지역 특산물로 국내 최초로 브랜드화한 이름이다.
소이산을 내려오는 길 양쪽으로 아침 이슬을 매달고 있는 가을 들꽃들이 예쁘다. 깊은 산속에서 피어나 유난히 색감이 선명하고 맑다. 쾌청한 숲길에서 절로 힐링된다. 소이산을 내려오니 막 운행이 시작된 모노레일이 지나가고 있다.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편치 않은 교통 약자라면 소이산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철원역사문화공원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을 탑승하면 왕복 1.8km 거리다.
주변에 노동당사가 있어 가볼 만하다.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였으나 이후 전쟁의 크나큰 상흔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평화의 꽃을 피워 올리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이 이슬뿐일까. 소이산 전망대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철원 고석정 꽃밭에선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강원도 북단에 이토록 넓은 꽃밭이 조성되어 있다니, 꽃 따라 봄가을로 여행 올 만하다. 입구에서부터 짙은 빨강과 다홍, 노랑으로 화려한 융단처럼 펼쳐진다. 꽃 이름이 촛불맨드라미다. 바로 옆으로 고향 마을에서 본 듯한 백일홍이 제각각의 색깔로 꽃밭 가득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마음껏 즐기는 꽃마당이다.
꽃밭 넓이가 자그마치 23만 1000㎡라고 한다. 축구장 서른 개가 넘는 규모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한참 걸린다. 맨드라미를 시작으로 백일홍, 천일홍, 메밀꽃, 해바라기, 장미, 코스모스, 가우라, 버베나, 핑크뮬리, 댑싸리, 억새 등 종류별로 가을꽃이 활짝 피어 눈부시다. 봄 시즌에는 노란 유채꽃이나 수레국화, 안개초 등이 피어난다. 꽃길을 걷다 보면 때론 연못이 나타나고 넓은 잔디광장이 나온다. 어린 왕자 조형물이 있는 전망대와 풍차가 볼거리를 더하는데, 일몰 풍경과 꽃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편안하게 꽃구경을 하고 싶다면 꽃밭을 한 바퀴 도는 깡통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고석정 꽃밭은 애초에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었다. 과거 Y진지라 불리던 곳이 철원 지역의 새로운 관광 트렌드로 변신했다. 포성이 울리던 허허벌판에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철원이 안보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무한히 넓은 꽃밭에서 계절별로 꽃의 물결을 볼 수 있다.
수직 벼랑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주상절리
철원의 주상절리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위치한다. 화산이 폭발하고 분출한 마그마가 서서히 식으면서 현무암이 되었고, 강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바위들이 수직의 벼랑을 이룬 비경을 그동안은 배를 타고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찔한 절벽에 선반처럼 매단 3.6km의 잔도(棧道)가 마련되었다. 일명 한탄강 하늘길로 불리는 잔도 덕분에 빼어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까이에서 생생히 만날 수 있다.
트레킹의 출발점은 두 군데다. 순담 게이트와 드르니마을 게이트가 있는데 대부분 순담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참고로 드르니는 애초에 양지바른 마을에서 유래되었는데, 궁예가 고려 왕건으로부터 피신할 때 ‘들른’ 마을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 철원 여행을 하다 보면 유난히 궁예와 연관된 명칭을 자주 본다. ‘말등소’라는 소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길 때 빠졌던 소(沼)로, 말이 너무 힘들어 똥을 쌌다 하여 말똥소라고도 한다. 트레킹을 마치고 시작점으로 다시 갈 경우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현재는 주말에만 운행한다.
잔도는 걷기에 따라 다르지만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우리나라에 잔도가 몇 군데 있지만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 잔도는 그 절정이다. 한탄강 협곡 절벽 20~30m 높이 벼랑길에 매달린 잔도를 걸으면서 깎아지른 수직 절벽의 위용에 놀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반원형 전망대는 아찔함의 최고점이다.
틈틈이 쉼터가 나타나니 잠깐씩 쉬면서 절경에 잠겨봐도 좋다. 쪽빛소쉼터, 맷돌랑쉼터, 돌단풍쉼터, 드르니쉼터 등 이름도 예쁘다. 자주 나타나는 13개의 출렁다리마다 지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생김새와 위치 등에 따라 돌개구멍교, 한여울교, 선돌교, 수평절리교, 단층교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잔도 위를 걷다 보면 신나고 짜릿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간이 허공을 걷듯 공포감이 드는 구간도 지나야 하고, 가파른 계단을 몇 번씩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기진맥진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체력 조절이 필요하다. 감동과 스릴, 억겁이 빚어낸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철원 주상절리길이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당신이 파리를 다녀간 이후 내 마음이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착잡하군. 당신이 날 만나기 위해 파리에 머문 두 달 동안 내게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던 것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심란스럽고. 당신이 어떤 노력을 했든 간에 난 당신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당신이 내 집을 어찌어찌 알고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해도 난 안 열어주었을 거니까.
이봐요, 우린 이미 헤어진 사람들이라고. 깨진 접시를 붙인다고 붙여지나? 우리가 헤어진 지 올해로 꼭 10년째인데, 전해 듣기엔 일부러 그 시기에 맞춰서 나를 찾아왔다고? 당신은 나보다 에너지가 많고 집요하고 집착도 강한 성격이라 나와의 만남도 이벤트성으로 하고 싶었던 걸까? ‘이혼 10주년 기념 재회’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말이지. 그러면 내가 감동할 거라 여긴 건가? 아, 오해 마. 빈정대는 투로 들렸다면 그건 오해야. 당신이 갑자기 파리에 나타난 것이 그 정도로 뜬금없었다는 뜻이니까.
당신이 날 보러 오겠다고 미리 말했다간 내가 인근의 독일이나 스위스로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나? 그래서 그 어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건가? 이봐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 집으로 찾아왔다 해도 난 안 만났을 거야. 그러니 알리고 왔다 해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어. 내가 어디로 도망갈 일은 절대 없었을 거란 말이지.
물론 놀라긴 했어. 아침에 출근해서 막 하루 업무를 시작하려는 순간,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뜨길래 무심코 받았는데 당신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으니. 너무 놀라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순식간에 끊고 나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지. 여하간 10년 만에 듣는 목소리니까. 게다가 지척에서 걸려왔으니. 난 서둘러 당신의 전화번호를 차단했어. 전부터 끊어뒀던 메일이나 SNS 잠금장치도 다시 점검하고. 당신의 한 점 목소리, 한 줄 문장이라도 새어 들어올세라….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참 적극적인 여자야. 나 같으면 절대 그렇게는 못 했을 것 같은데.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전혀 생소한 곳임에도 내가 다니는 회사와 아주 가까운 장소에 숙소를 정하고, 또 바뀐 전화번호는 어찌 알고 당돌하게 연락을 취해왔으니. 물론 당신도 내 전화번호를 누르기 전 적잖이 긴장을 했겠지만…. 여하간 당신은 원하는 것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야. 인정!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그래, 한국은 잘 돌아갔는지? 벌써 두 달 전 일이네. 날 못 만났다 해도 당신 성격에 시간을 헛되이, 멍하니 흘려보냈을 리는 없고, 알뜰살뜰 요모조모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구경했겠지. 옛날 프랑스에서 맛있게 먹던 음식도 먹고, 아마도 한국 지인들 선물까지 꼼꼼히 챙겼을걸. 원래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았으니 지난 10년간 대인관계는 또 얼마나 넓혔을지. 선물할 사람이 많을 테니 비싸지 않으면서도 요긴한 것을 찾기 위해 파리 기념품 숍을 최소 두세 번은 둘러보았을 거야. 명단을 작성하여 체크해가며. 어떤 상황에서도 할 일을 놓치지 않는 당신이니까. 20년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나는 당신의 그런 면을 따라갈 수 없었지. 난 원체 에너지가 부족하고 뒷심이 달리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당신 없이 그 고생스러운 시간을 헤쳐 나온 게 스스로도 놀라워.
그런데 나를 버리고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꽁꽁 단속하던 마음과는 별개로 만나서 당신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보고도 싶었지만, 솔직히 난 당신을 만날 자신이 없었어. 당신은 어떤 각오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난 막상 당신을 대면했을 때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두려웠어. 그래서 한사코 피했던 거야. 물론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당신은 능숙하게 대화를 리드해나갔을 테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아. 두려움보다 노여움이 더 컸으니까. 당신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을 이번 당신의 파리 출현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는 억울함도. 맞아, 난 억울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 인생이 이렇게 무너져야 했냐고!
모든 것을 잃은 마당에
당신이 떠난 후 내 인생은 순차적으로 무너져 내렸지. 우선 퇴직 후 당신과 함께 차린 프랑스 식당이 망했고, 그 스트레스와 과로로 건강이 상했고, 가까스로 몸과 마음을 추스려 새로 시작한 숙박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고, 당신과 이혼 후 내가 걱정되어 한사코 한국을 떠나 파리로 오셔서 고생만 하시다 95세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을 고스란히 혼자 지켜야 했고, 그 와중에 먹고는 살아야 하니 청소일을 한 3년 했고…. 내 60 평생에 겪을 암흑과 폭풍을 이혼 후 10년 사이에 다 겪은 것 같아.
장모님은 우리 어머니보다 2년 앞서 돌아가셨으니 의지할 곳 없이 당신도 나름 고생을 했겠지만, 우리가 헤어진 후 쓰나미는 내게만 닥친 것 같은 느낌이야. 쓰나미는 말 그대로 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지. 난 완전히, 쫄딱, 돌이킬 수 없이 망했어. 그나마 3년 전부터 직장을 다니게 된 지금이 가장 안정된 상태야. 서서히 건강도 되찾아가고 있고.
아, 이참에 짚고 넘어가지. 이혼하면서 나중에 주기로 했던 재산 분할금을 한 푼도 못 준 건 사업이 망했기 때문이지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야. 그 점에선 당신도 날 원망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의 무능으로 전 재산을 날린 것에 대해. 당신은 전업주부였지만 부부의 재산은 공동이니까. 그때 당신 명의의 카페라도 그냥 뒀더라면 이렇게 돈이 하나도 없진 않았을 텐데. 당신만이라도 좀 편히 살았을 테니까. 그때는 날 버린 당신이 너무 미워서 어떻게든 그 카페를 빼앗고 싶었어. 그런데 당신은 또 왜 그렇게 순순히 내어줬는지. 나로선 주면 받고 안 주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그냥 꺼내본 말이었는데, 당신 이름으로 된 가게를 왜 선뜻 내게 줬어? 내가 아무리 전체 사업체의 디렉터라 해도, 그래서 법적 처분권이 내게 있었다 해도, 당신이 기어코 안 내놓겠다면 내가 강제로야 했겠어? 내 추측이지만 나를 버리고 가는 마당에 날 배려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어. 내게서 돈이라도 축내지 않으려고. 당신은 원래 돈 욕심은 없는 사람이잖아.
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건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내가 이렇게까지 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당신에게 나쁜 짓을 했나? 당신 어떻게 생각해? 정말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이야? 이번에 당신을 만났다면 그걸 따져보고는 싶었어. 내가 당신을 때린 게 이렇게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를 일인가 말이야. 당신과 20년을 같이 살면서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때린 건 사실이지만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이야? 사람들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사람이 화나면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에 안 맞고 사는 여자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아, 됐고, 다 지난 이야기 또 꺼내면 뭘 하겠어? 그러게 왜 찾아와서 날 다시 화나게 하냔 말이야.
당신, 내가 얼마나 자존심 상한 줄 알아? 내가 왜 이렇게 도피하다시피 살고 있는 줄 알아? 솔직히 내가 지금 사는 게 사는 건 줄 알아? 파리 교민 사회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우리가 왜 이혼했는지 소문이 다 나서 말이야. 차라리 대놓고 묻기라도 했다면 나도 뭐라고 해명,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당신의 행방조차 묻지 않으니. 생각해봐, 늘 붙어 다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어디 갔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안부도 안 묻는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지금까지 그런 맹탕 같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도 화가 나. 물론 지인들로선 묻는 자체가 민망했겠지. 자기들끼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날 배려하느라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그럼에도 나는 주변의 시선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어.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나는 숨이 막혀갔어. 불쾌했어. 모두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향해 한사코 침묵하는 그 무거운 압력이 두렵기도 했어. 모두 나를 왕따시키는 것 같았고, 경멸하는 것도 같았고, 동정하는 것도 같았고, 한심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어. 당신이 떠난 후 난 그렇게 기가 죽기 시작했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 당신이 원망스러운데도 하늘을 향해 그 원망을 퍼부을 수 없는 내 자신이 초라했어. 솔직히 겁이 났어.
어머니 돌아가신 후 교민 사회를 떠나 프랑스 본류 사회로 스며들었어. 지금은 프랑스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한국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는 곳이지. 아예 한국말을 잊어버릴 지경이라니까. 지금 나는 결코 행복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냥 편해. 나와 당신을 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당신 날 왜 만나려고 한 거야? 나와 다시 합치고 싶어서? 아님 날 용서해주려고 온 거야? 두 가지 모두 사양하겠어.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난 당신에게 용서받아야 할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고 애매한지 모르겠어. 차라리 당신이 날 마구 때려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아. 개운하게 뚫릴 것 같아.
어쩌면 머지않아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찾아갈지도 모르겠어.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찬란한 내 인생
좋은 꿈 꾸셨습니까? 마음 반창고 새해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 혹은 내가 제일 잘나갔던 순간, 그도 아니면 내가 가장 찬란해질 그 순간을 떠올리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을 춘하추동(春夏秋冬) 네 계절에 피는 꽃으로 비유해볼까요. 아직은 한참 먼 봄소식을 가장 빨리 알려주는 산수유를 시작으로 봄철에는 매화, 목련,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복사꽃, 벚꽃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햇살이 더욱 눈부신 여름이 되면 무궁화부터 찔레꽃, 작약, 패랭이꽃, 장미가 형형색색 산천을 장식합니다. 코스모스, 국화, 과꽃, 나팔꽃, 도라지꽃은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동백꽃은 단연코 외로운 겨울을 홀로 지킵니다.
이처럼 꽃도 피우는 시기가 다 다릅니다. 차례대로 자기 순서에 맞춰 꽃을 피웁니다. 식물은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고 낮의 길이와 온도 같은 최적의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꽃을 피우는 정교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다른 시간에 찾아옵니다. 저마다 꽃 피우는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나다라 배우며 글꽃을 찾은 마음
오십 해가 넘도록 시장통에서 생선 비린내 맡으며 자식 키우고 살아낸 정백안(79세), 서경임(74세) 부부는 영암에서 목포까지 칠흑같이 깜깜한 새벽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갑니다. 오가는 데 무려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오일장 서는 날을 빼고는 거르지 않습니다. 지난 11월에는 전남인재평생교육원에서 주최한 평생교육수기 공모에서 경임 씨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열여섯에 처음 만난 내 이름, 일흔 넘어 활짝 핀 글자꽃’이란 제목으로 상도 받고, 이름 없이 사느라 아팠던 마음도 아름다운 글꽃으로 승화시킵니다. 세 살에 부모를 여의고 제때 배우지 못한 아픔을 늦깎이 학생이 되어 글로 녹여내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멍들었던 마음도 구석구석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온통 눈물과 서러움뿐이었던 삶이 배움을 통해 재밌는 살판으로 바뀌었다는 부부. 학교에 다니면서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당당하다는 경임 씨는 쓰는 글마다 큰 상을 받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둥지 속에 갇힌 새처럼 세상 밖 외면하고 일만 하던’ 경임 씨에게 배움의 기쁨은 기적처럼 찾아온 행운입니다. 호미자루 연필 삼고 밭고랑 공책 삼아 마음을 써내려가는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 아닐까 미소 짓습니다.
쏜살같은 세월에 지지 않고, 해마다 먹는 나이에 꺾이지 않고 자기 때와 자기 사람을 기다린 이가 있습니다. 무려 72년을 기다린 주인공은 바로 강태공입니다. 3000년 전의 인물로 알려진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선조가 여(呂)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하여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립니다.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서백(西伯)이 강태공을 초빙하며 선왕 태공이 간절히 바라던(望)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강태공이 버린 낚시 3600개
위수(渭水)에서 낚시 3600개를 버려가며 문왕을 기다렸던 강태공은 일흔두 살이 될 때까지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극진(棘津)이라는 나루터에서 지내며 하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낚시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잘 잡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드리운 낚시에는 바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늘이 있었지만 곧게 펴져 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물고기를 잡으려고 낚싯대를 드리운 것이 아니니까요. 강태공이 낚시터에서 기다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바로 그 사람을 만나,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강태공은 ‘그 때’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72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문왕을 만나기 전까지 강태공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한 강태공은 천문, 지리, 병학(兵學) 등 온갖 학문에 능통한 희대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통찰력 그리고 큰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책만 읽으며 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러다 보니 집안 살림에 도통 관심이 없는 강태공 대신 그 책임을 아내 마 씨(馬氏)가 모두 떠맡게 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지친 아내는 날마다 남편을 닦달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은 여느 때처럼 책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강피(곡식의 한 종류)를 꼭 거두라고 신신당부한 아내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소나기에 그만 강피를 모두 쓸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진절머리가 난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강태공은 떠나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나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혼자서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던 강태공은 오십이 넘도록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그 뒤로는 백정 일을 했는데 도마 위에 놓은 고기가 썩을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위수가로 옮겨 낚시를 시작했고 오랜 세월 끝에 문왕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의 치마폭에 싸여 폭정을 일삼아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때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덕망이 있었던 문왕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다스릴 인재를 찾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전 사관 편(編)에게 점을 치게 했습니다. “위수에서 사냥을 하면 장차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장차 패왕을 보필할 스승이며 그 공이 3대(代)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위수로 사냥을 떠났고, 강태공과 극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비록 낡은 옷의 초라한 늙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지만 문왕은 한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강태공 역시 자신의 뜻을 알아줄 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과 수양에 매진하며 그 긴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강태공은 자신의 성공과 명예, 부귀영화보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부국강병의 술법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10년 동안 3600개의 낚시를 버리면서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강태공이 지쳐 포기했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자신의 때’를 끝내 기다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자신이 쓰일 때를 기다리고 준비했기에 ‘강태공’, ‘태공망’이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지요.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반면에 필자는 조급함, 성급함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외롭게 하고, 또 때로는 절망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지 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2018년 12월 말에 첫 책 ‘혼자 술 마시는 여자’를 나이 오십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도망가다 만들어진 책인 데다 제 생애 모든 것 사랑, 열정, 가족까지 다 녹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청 기대가 컸습니다. 욕심도 너무 많았습니다. 책이 딱 나오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습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 작가가 되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초대되고, ‘인간극장’에 출연하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상상과 현실은 참 달랐습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될 수 없는 건데,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책을 내고 보니 그건 다 잊어버린 채 금방 유명해질 줄 알고 커다란 꿈과 야망, 욕심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겁니다.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한테 더 실망하게 되고요.
‘나를 조금 더 챙겨주지.’
‘왜 책을 안 사줄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왜 책을 안 알려줄까, 다른 사람 책은 홍보해주면서.’
마음에 별의별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고요. 마치 고구마 줄기 걷어 올릴 때 한 넝쿨에 끝도 없이 흙 속에서 끌려나오는 것처럼요. 책을 구매하고 SNS에 소개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잠시뿐이고, 관심도 없고 구매도 홍보도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운해하면서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어느 하루. 필자 대학원 논문 심사위원이었던 주철환 교수님께 책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답장으로 주신 세 마디가 다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고, 대단한 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 차근차근 가야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인데 한 발짝 한 발짝 떼어야지. 차곡차곡 쌓아야지, 돌담을 쌓듯이. 크고 작은 자갈, 큰 돌, 작은 돌이 사이사이에 다 채워져야 탄탄한 울타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 교수님의 말은 필자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줍니다. 나만의 때와 사람을 기다리며 차츰차츰 나아갈 용기가 생깁니다.
시유기시 인유기인
아, 왜 이렇게 삶이 힘들까?
아,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
아,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꼬일까?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基時 人有基人), ‘때에도 그 때가 있고, 사람도 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거나 앞으로 일을 펼칠 때 길잡이가 되고 안내가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타이밍이 안 맞아서 실패하거나 어긋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일이 거의 다 만들어지고 프로젝트가 왕성하게 되어 있는데, 꼭 ‘그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강태공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린 것처럼, 경임 씨가 글꽃을 피우며 만학도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처럼 필자도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다음 책을 준비하며 새로운 사람들, 시절인연 만날 설렘을 안고 강의실로 들어갑니다. 자기 걸음에 집중하면서 말입니다.
주변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속도와 방향에만 신경 쓰며 새해 새 사람, 새 때를 기다려볼까요. 당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어느 새 12월, 당신의 생일과 기일이 함께 있는 달이 돌아왔군요. 가는 해와 오는 해가 조우하는 달 12월. 당신은 그렇게 12월 중에 세상을 오고 갔네요. 당신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때도 12월이었다는 걸. 물론 기억하실 테지요. 만난 지 꼭 1년 되던 해, 그날에 결혼했으니까요. 우린 평범하게 만났지만 애틋한 사랑의 씨줄과 날줄을 엮기 위해 로맨틱한 무언가를 연출하고 만들어내곤 했지요. 처음 만난 날짜에 맞춰 결혼하기로 한 것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러고는 처음 만난 날에 헤어진 것도…. 하지만 그건 로맨틱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리고 쓰리네요.
남편의 폭력, 어이없는 감금 불러
“내 동생한테 감히 손찌검을 해요? 당장 헤어지세요. 폭력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생각 말라고요.”
“처형, 집사람에게 손을 댄 건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지금 처형댁 문 앞에 있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제가 무릎 꿇고 빌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용서를 구한 후 다시 잘살아보겠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이 집에까지 찾아온 것도 몰랐어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방에서 훌쩍이느라 문 앞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몰랐던 거죠. 하긴 문자로 주고받았으니 큰 소리는 고사하고 작은 소리도 들렸을 리가 없지요. 난 지금도 그 점이 의아해요. 언니처럼 성질 급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이 문 앞에 당사자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차분히 문자 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 하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됐지만.
당신한테 한 대 맞고는 속이 상해서 언니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후 사실상 나는 언니네에 감금당한 꼴이 되었지요. 언니가 집으로 돌려보내 주질 않았으니까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가 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철없는 나보다 더 나를 염려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했어요. 왜 안 그랬겠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여의고 중 3, 중 1이던 언니와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둘이 생활하게 되었지요.
친척들의 도움도 언니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였으니, 졸업 후 바로 취업이 되지 않아 전세금을 빼서 보증금을 얼마간 넣고 월세를 살면서 그 돈을 야금야금 생활비로 썼지요. 둘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텨나갔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언니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열의를 잃고 그렇다고 마음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말하자면 방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생활에 대한 부담은 내가 다 져야 할 형편이었지요. 하지만 운 좋게도 그런 와중에 나는 대학에 가게 됐고, 졸업하고 취업하던 무렵 당신을 만났던 거예요.
내가 만남 100일 기념 이벤트다 뭐다 하면서 애들마냥 유치하게 굴었던 것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모님 사랑에 대한 굶주림 탓이었다고 봐요. 그걸 당신한테 받으려 했으니 당신도 피곤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은 날 기쁘게 해주려고, 내 기대에 맞춰주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어요. 인정합니다.
다만 그날 결혼 후 처음으로 부부 싸움이 격렬했던 날, 당신이 나를 때린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날 때릴 수 있는지…. 무엇 때문에 싸웠죠, 우리?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사소한 일이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길로 헤어지게 되었지요.
언니의 시기 동생 부부 갈라놔
“언니, 나 이만 집에 돌아갈래. 그 사람이 걱정돼. 보고 싶기도 하고.”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한 번 때린 사람은 또 때리게 되어 있어. 계속 맞고 살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 사람이 사과했어. 여기 있는 동안 문자도 오고, 전화도 오고.”
“뭐라고? 이리 내놔 봐.”
그래요, 언니는 분명 과잉, 과민반응을 했던 거예요. 처음에는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점차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부부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아무리 동생이고, 다른 집과는 다른 각별한 자매라 해도.
언니는 결국 대학에 가지 못했어요. 학비 부담 때문이라고 본인은 포기의 이유를 댔지만 그건 핑계고 실은 성적이 안 됐던 탓이었죠. 대학생의 꿈도 멀어지고 다시 취업하기에도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졌던 언니는 그때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부모님을 하루아침에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아, 당시엔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얼마나 컸겠어요. 대학에라도 합격했다면 그나마 우울증은 피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부턴 내가 언니의 보호자로 실질적 가장이 되었지요. 언니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조차 곧 그만두더라고요. 치료비 부담보다 정신과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언니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고요? 언니가 내게 주는 영향은 보통 이상이었기 때문이에요. 정상이 아니었죠. 언니는 내게 시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무의식적으로요. 비록 전문대지만 대학도 나왔고, 취업도 바로 되었고, 곧 결혼도 할 나에 비해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여긴 것 같아요. 더구나 당신과 난 간호사로 같은 병원에서 만났고, 함께 장래의 꿈을 키워가는 걸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언니가 나의 불행을 바랐다는 뜻은 아니에요.
남편의 교통사고, 생일이 기일 되다
“처형이 당신 걱정을 하는 건 당연히 이해하지만 당신이 미성년자도 아니고 너무 간섭이 심한 거 아니야? 도가 지나치잖아. 사과를 하려면 당신을 만날 기회를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했고 당신도 이미 나를 용서한 마당에 처형이 왜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냐고?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당신이 전화로 했던 말 기억나죠? 결국 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한 당신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의 심정으로, 일단 언니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2년 기한의 외국 병원 근무를 택했지요. 그리고 3개월 만에 현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마침 당신 생일에. 그래서 생일이 기일이 되고 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운명의 남자.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군요.
청천벽력이란 그럴 때 쓰는 말이더군요. 나도 그땐 언니하고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지낼 때였지요. 고집을 피울 걸 피워야지, 당신이 그렇게 떠나니 괜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막무가내인 언니가 꼴도 보기 싫더라고요.
물론 우리는 그때 얼마든지 다시 만났어도 되는 거였어요. 언니가 우리를 미행할 것도 아니고, 내 다리를 묶어 한쪽 끈을 붙잡고 있을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 언니의 우울증이 심해져서 혼자 둘 수 없어 당분간 같이 지내게 되었고, 그 점이 당신을 답답하고 화나게 했던 것 같아요. 나까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거죠. 그 무렵 우리 사이가 서먹해진 것도 사실이었고요.
이래저래 심란하던 차에 바람도 쐴 겸 보수도 더 나은 곳에서 한 2년 일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도 어차피 나는 언니 옆에 있어야 해서 였어요. 당신의 손찌검이 빌미가 되어 별거를 원한다는 오해를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아 당신의 결정을 존중했던 거지요. 그것이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뜨자 언니는 뒤늦게 자신 탓이라며 자살을 시도했고, 반복되는 자살 시도로 지금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중이랍니다.
남편 떠난 빈자리 채우는 유복녀
당신 그렇게 가고 나는 어떻게 살았냐고요? 나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당신이 외국으로 떠났을 때 나는 임신한 상태였어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말하려고 했지요. 근데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전에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언니 때문이었어요. 가뜩이나 내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질투와 시기심에 더 상태가 나빠질까봐 조심스러웠어요. 당신한테만 살짝 말하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당신은 몰랐지만 언니는 그때 나와 당신의 통화 내용, 주고받은 문자를 다 체크하고 있었어요.
언니는 그때 당신이 나와 아주 헤어져서 떠났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임신 사실을 바로 말할 수 있었겠어요. 물론 방법을 찾고 있었지요. 언니 몰래 알릴 수 있는 길을.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도저도 소용이 없었던 거지요.
이름은 혜원이에요. 당신과 나를 반반 닮았어요. 당신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똑똑하고 예쁜 딸이에요. 혜원이는 이담에 커서 아빠,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대요. 아, 그리고 나는 공부를 더해 정식 간호사가 되었어요.
이제 또 한 해가 저무네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당신과 결혼하고, 또 당신을 떠나보낸 12월이 이렇게 막을 내리려나 봅니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배롱나무꽃이 많이 떨어졌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꽃을 보기란 참 애매하다고는 하나 배롱나무는 가을의 문턱을 넘었어도 붉은 꽃을 보여준다. 요즘 하는 말로 핫핑크 색감이다.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기 시작해서 가을까지 피고 지는 식물, 강한 생명력으로 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화려한 꽃 호강을 선사한다. 배롱나무꽃을 보려거든 서천이다. 서천의 해안도로를 달리면 배롱나무꽃 길이 우리를 맞아주고 전통 건축과 어우러진 꽃 무리가 운치를 더한다.
빗소리는 주룩주룩 빈 당에 가득한데 / 낮 꿈을 막 깨고 나서 붓을 바삐 찾노니 / 마음이 맑아 절로 사사로운 뜻 없는지라 / 더위 한 번 식혀준 은혜 하늘에 감사하네.
고려 삼은 중 한 분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시를 찾아보았다.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은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은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창건 연대는 1594년이고 당시 이름은 효정사였다. 그 후 정유재란으로 소진되었으나 이전하여 광해군 때 문헌(文獻)이라 사액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고종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으나 뜻있는 유림들이 복설하였고, 문헌서원 역사마을 조성사업에 따라 현재에 이르렀다.
배롱나무꽃과 함께하는 서원의 품격
서천 솔바람길을 따라 이색 선생 동상이 보이는 정원이 평온하다. 서원의 홍살문을 넘으면 연지 위 경현루의 반영이 잔잔히 흔들린다. 예스러움이 은은한 연못은 배우 박보검이나 유아인이 드라마와 영화를 촬영하던 곳이기도 하다.
널찍한 잔디밭을 걸어 외삼문인 진수문과 정면의 진수당에 들면 양쪽으로 유생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이라는 현판은 진수당 마루 안쪽으로 걸려 있어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뒤편 돌계단으로 오르면 떡하니 장판각이 중심 잡듯 위치한다.
담장 따라 효정사, 교육관, 영모재, 그 길 안으로 목은 선생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당(影堂)을 따로 앉혀 아늑하다. 이색의 선비 정신과 성리학, 그리고 풍류가 깃든 기린산 중턱의 묘소를 바라보며 세월을 거슬러 보는 시간이다. 산수 좋은 수려한 자연 속을 산책하다 보면 옛 어른의 멋과 정취, 정신과 자연관의 교감에 빠진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힐링 여행지다. 숲이 감싼 산줄기 뒤편으로 선비의 기개를 닮은 듯 쭉쭉 뻗어 울창한 소나무가 든든하다.
바로 영당 뒤편 노거수 두 그루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을 풍성하게 피워 올린다. 전통 건축의 지붕 위로 진분홍 배롱나무꽃 무리가 몽글몽글하다. 지난밤의 비바람으로 이미 많은 꽃이 떨어졌지만 배롱나무의 강한 생명력은 계속 이어진다. 아무리 꽃이 붉어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대단한 권력 또한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서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무려 석 달 열흘 동안 피어나니 비바람에 꽃을 좀 떨구었기로서니 그저 슬플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지대에 의지한 채 노구를 딛고 서서 해마다 꽃을 피워내는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를 본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하다.
문헌서원 옆 전통 한옥 숙소
이렇게 고즈넉한 곳에 짐을 풀고 하루나 이틀쯤 쉬며 돌아보는 소도시 여행은 휴식이 된다. 하룻밤 묵어갈 숙소로 문헌서원 전통호텔이 서원 입구에 있다. 정부와 서천군의 전통역사마을 조성사업계획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지은 우리나라 고유의 한옥마을 형태다. 나무를 이용한 서까래와 온돌, 돌을 이용한 기단, 문풍지가 정겨운 두 겹 곁문을 열면 친환경자연 속에 스미듯 지은 옛 가옥의 따스함이 다가온다. 안온하게 스며든 햇살을 받으며 툇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가만히 쉴 수 있는 시간은 가히 ‘득템’이다.
한옥 스테이를 할 경우 미리 예약하면 식사도 가능하다. 문헌 전통 밥상은 모두 지역 제철 농수산물을 사용해 만든 신토불이 건강식이다. 상쾌한 새벽 산책 후 한옥 마당을 내다보며 받는 소박하고 정갈한 아침 밥상은 추천할 만하다.
한산 모시와 소곡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산 모시 짜기. 전통의 맥을 잇고자 서천에서는 모시풀을 처음 발견한 건지산 기슭에 한산모시관을 개관했다. 모시관 담장 아래 푸릇하게 자라고 있는 모시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시관에서 모시의 모든 것을 관람한 후, 모시 체험과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직조기능 보유자의 시연 공방도 볼 수 있다. 모시 짜는 여인상이 있는 정원 아래 너른 마당에서는 여행자들이 투호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옛날 백제 유민이 나라를 잃고 한을 달래기 위해 빚어 마신 백제 궁중 술이라고 전하는 한산 소곡주. 보통 추수가 끝난 가을에 빚어서 100일 동안 땅에 묻는다. 술이 독해서 며느리가 젓가락으로 찍어 맛보면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서 엉금엉금 긴다는 일화는 물론, 조선 시대에 과거 보러 가던 선비가 한산에서 쉬다가 술맛에 눌러앉아 과거 시험장에 가지 못했다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전해 내려오는 소곡주다. 취해도 좋을 가을이다.
솔바람 숲 맥문동과 서해 갯벌
다시 꽃구경, 서천의 장항 쪽으로 달리다 보면 장항 송림 산림욕장이 나타난다. 방풍림만으로도 압도한다. 수령 50년 이상 된 해송이 하늘을 가려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해송 아래 온통 보랏빛 맥문동 물결이다. 이곳에 오토캠핑장이 있어서 공기 밀도 걱정 없이 휴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해솔밭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기벌포 장항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바다 위로 우뚝하다. 15m 높은 상공에서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상쾌한 시간 속에 서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이곳 이름이 기벌포 해전 전망대인데 백제의 마지막 해전지였다. 발아래로 해송림이 있고 눈앞에는 서천 바다 갯벌이 있다. 멀리 서해 근대산업의 중흥을 이끈 장항제련소도 보인다.
레트로 장항 골목 여행과 서천 맛집
옛날 기찻길을 지나 장항 골목 여행의 묘미도 쏠쏠하다. 편하게 레트로 흐름대로 놀거나 시대극처럼 양산 예쁘게 쓰고 느린 감성으로 즐기는 여행도 어울릴 듯한 곳이다.
장항에 맛집들이 즐비한 6080 음식 골목 맛나로(路). 특히 홍어탕과 아귀찜이나 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몇 군데 있으니 그중에서 끌리는 곳으로 들어가면 바로 맛집이다. 탕에 향긋한 미나리가 푸짐하다. 식사 후 맛나로 옆 골목을 걷노라면 레트로 분위기가 솔솔 난다. 라테 위에 달고나 듬뿍 얹은 달고나 라테를 먹을 수 있는 명물 카페도 빠뜨릴 수 없다. 때에 따라 체험도 가능하다. 지역의 젊은 청년들이 지역사회 살리기를 위한 건강한 일꾼 역할을 자처했다.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전통 횟집 또한 장항 부근에 많다. 매일 공급되는 제철 해산물을 이용해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소박한 물회 한 상으로도 바닷가 식사를 만끽할 수 있다. 이제 홍원항 전어가 제철이다.
섬에 들어가는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거렸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두 좋았다.”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가 아니어도 이런 날씨도 나름 괜찮다. 날이 안 좋아서 하늘 사진이 예쁘게 찍히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날들이 고마운 건 무조건 긍정 마인드이어서가 아니다. 아마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만들어준 것이 아닐지. 나이를 먹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날씨는 짓궂더라도 섬이 주는 위로가 있음을 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흐린 날의 강화 본섬은 안개 섬처럼 신비롭다. 하늘은 흐렸고 강화대교 아래 서해가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긴 교량. 강화도와 석모도를 연결하는 석모대교(席毛大橋)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섬이었는데, 2017년 석모대교 개통 덕분에 언제든지 쉽게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섬을 잇다, 석모대교
석모도 여행의 시작은 이제 석모대교다. 참고로 석모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돌면 바로 언덕 위로 미니공원과 함께 전망대가 있어서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다리와 서해의 출렁이는 바닷물을 상쾌하게 즐길 수 있다. 그 섬을 쉽게 건넜으니 마음껏 달리며 돌아볼 차례다. 강화도의 서편 바다 위에 길게 이어진 작은 섬 석모도. 긴 다리 하나가 주는 편리함으로 실컷 석모도를 놀아보면 된다. 자동차를 달려 알찬 하루 코스 강화섬 속의 섬 석모도다.
나룻부리항과 어류정항
먼저 가까운 나룻부리항을 들러본다. 강화나들길 11코스에 속한다. 한때 여객선이 드나들던 항구였지만 이젠 나룻부리항 시장으로 그 기능을 대신한다. 오가는 이 드문 어시장 뒤 오도카니 섬을 띄운 바다 위로 갈매기의 날갯짓이 한가롭다.
나룻부리항과 어류정항은 가까워서 간 김에 두 곳 다 돌아보는 것도 좋다.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찾는 곳으로 수산물직판장과 편의시설을 잘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한산하다. 텅 빈 항구에서 맞닥뜨린 세찬 바닷바람에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사람 없는 한적한 바닷가 바로 옆을 달리다 보면 섬의 길목마다 손맛 좋은 집과 전망 좋은 카페가 기다린다. 자동차로 섬을 달리다 풍경 좋은 구간에선 우선멈춤이다. 낯선 포구와 산길 어디든 걷기에도 좋다. 석모도 바람길이란 이름에 걸맞다. 다만 어쩌다 ‘유실지뢰 주의’나 ‘해안 출입금지’를 접하면 북쪽과 가까운 최전방임을 실감한다.
민머루해변과 언덕 너머 호젓한 장구너머항
어류정항에서 자동차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석모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며 생태관광지로 지정된 민머루해변이 있다. 민머루해변의 고운 모래밭을 걸을 때는 푹푹 빠지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모래밭 군데군데 텐트 속에선 캠핑족의 정담이 두런두런 들린다. 조용히 캠핑 의자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힐링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힐링이다. 물이 빠지면 드러난 갯벌 위로 생물들이 꼬물거리는 게 생생하다. 이럴 때 맨발로 갯벌의 감촉을 맛보아야 한다. 수십만 평의 드넓은 갯벌 위로 갈매기가 사람과 공존하는 바다. 특히 천연기념물 제205호로 지정된 저어새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건강한 생태의 보고다.
민머루에서 서쪽으로 언덕을 올라 넘어가면 자그마한 항구가 나온다. 산마루가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 장구너머항이다. 오르는 길에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민머루의 질박한 풍경이 운치 있다. 뒤엉킨 그물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갯벌 위엔 바닷새와 고깃배가 쉬고 있다. 방파제 부근의 횟집과 수산물 판매하는 가게 역시 한가롭다. 산과 바다와 갯마을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민머루에 가면 빠뜨리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다.
서해 풍광을 품은 사찰, 보문사
석모도 하면 천년 고찰 보문사를 누구나 떠올린다. 신라 선덕여왕 4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과 함께 이 땅의 3대 해상 관음기도도량이다. 문제는 오르막 입구부터 가파르다는 것. 대웅전 진입까지 10분 이내의 거리지만 숨이 턱까지 찬다. 정 힘들다면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승합차를 이용해도 된다.
사찰 마당에 들어서자 열반에 든 부처의 모습을 한 거대한 와불과 사리탑을 중심으로 오백나한이 맞는다. 옆으로 석굴암처럼 천연 동굴에 지은 석실은 보문사의 명물이다. 극락보전과 대웅전, 용왕전, 삼성각, 선방, 범종각 등의 문화재가 고색창연하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그 역사와 유적으로 가치를 내세운다지만, 오랜 고목 아래서 땀을 식히는 이들에겐 그 앞마당에서 수백 년 자리를 지킨 향나무의 그늘이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지 않고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해 풍광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보문사를 품은 낙가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 가파른 오르막은 또 있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 400여 개를 올라야 닿는 보문사 꼭대기의 마애관세음보살이다. 이곳에선 이른바 눈썹바위 아래 새겨진 마애석불을 마주하고 앉아 경건하게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을 늘 볼 수 있다. 기도발이 아주 좋은 곳이라 알려져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서해의 노천탕, 석모도 미네랄 온천욕
보문사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에 뜨거운 해양 심층 온천수가 솟아난다. 입구에 들어서니 가족과 함께 온 어린아이가 앞서 달려가며 말한다. “난 여기 오는 게 제일 좋아.” 아이들에겐 따끈한 물놀이일 수도 있겠다. 온 가족이 온천탕에 발 담그고 앉아 몸과 마음을 씻고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시간이다.
강화 석모도 미네랄 온천탕은 바다와 인접한 노천탕으로 매일 천연 원수만 사용한다고 한다. 60℃가 넘는 특급 온천수다. 노천탕뿐 아니라 황토방, 족욕탕, 실내탕이 따로 있다. 관절염, 근육통, 아토피피부염 등에 효험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기며 피로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무엇보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노을이 질 무렵에는 노천탕에 몸을 담근 채 환상적인 풍광에 푹 빠질 수 있다.
숲은 이제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숲 기운을 받으며 산책하고 사랑스러운 장미터널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수목원은 석모리 일대 계곡을 따라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었다. 특히 숲 체험 프로그램으로 목공예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갖가지 테마식물원, 생태체험관, 전시온실 등 테마별 탐방을 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배우는 시간을 갖는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고 숲과 자연을 교감하는 기회다.
수목원 입장료는 무료다. 예까지 왔으니 자연휴양림 숲속의 집에서 하루나 이틀쯤 머물며 푹 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이제 초록초록한 색감 속으로 들어가는 초여름이다.
자동차로 석모도 당일 여행
서울 기준 자동차로 1시간 30분~2시간
주소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 산 154-1
여행 코스 석모대교→(2분)나룻부리항→(3분)어류정항→(10분)민머루해수욕장→(10분)보문사→(2분)
미네랄 온천→(10분)석모도수목원
변화무쌍한 일상은 아니다. ‘이동식 급식소’ 관리하던 시절에야 차에 사료 한가득 챙겨 몇 시간씩 순회를 돌았다. 운영을 그만둔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집 앞 식당에 빈 밥그릇 채워놓고, 피크타임 비껴갈 즈음 손님들 노는 모습을 뷰파인더에 담으면 그만이다. 미리 보정해둔 사진과 재치 있는 문구를 곁들여 SNS에 올려두고, 사진 정리를 하거나 원고 작업을 한다. 이용한 작가의 일상에 ‘대단한 변화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변화무쌍한 고양이를 제외한다면.
장소 협조 고양이책방 ‘책보냥’
이용한 작가는 16년 차 ‘캣대디’(고양이와 아빠의 합성어로,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자 명실상부한 고양이 작가다. 2009년에 낸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를 시작으로 ‘명랑하라 고양이’, ‘나쁜 고양이는 없다’ 시리즈와 지난해 출간한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까지 총 11권의 고양이 책을 냈다. ‘나쁜 고양이는 없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고양이 춤’의 제작과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사라져가는 오지 마을들을 찾아서’, ‘물고기 여인숙’, ‘사라져가는 풍경들’ 등 문화기행서를 내고 있다.
세 번째 고양이 책의 성공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국내 세 번째 고양이 책이다. 사진부터 글 내용까지 전부 고양이로 가득한 ‘고양이 책’은 당시 출판 시장에 거의 전무했다. 이제는 해외 번역본까지 포함해 한 해에만 고양이 책이 몇 백 권씩 쏟아지지만, 2009년 한국에 등장한 이용한 작가의 고양이 책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여태껏 낸 고양이 책에 고양이 다이어리, 고양이 일력 등을 합하면 이 작가가 책 형태로 엮어낸 고양이 이야기만 헤아려도 셀 수 없다. 특별히 아끼는 책을 꼽기도 힘들다. 다만 첫 고양이 책인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와 신간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많다.
“책을 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국내에서 출판된 세 번째 고양이 책이자, 최초의 성공 사례라고나 할까요. 고양이 책만 열 권 넘게 냈지만 아직도 첫 번째 책 판매 부수를 넘어선 책이 없어요. 책보다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으로 고양이 동영상을 보는 시대가 됐잖아요. 지금은 워낙 고양이 책이 많아지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실물 책을 낼 생각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도 100% 공존은 없다, 그러나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는 출간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책이다. ‘고양이 식당’ 운영 경력 16년 차, 그를 거쳐간 수많은 고양이 손님들의 이야기를 꾹꾹 모아 담았기 때문이다. 현재 운영하지 않는 이동식 급식소는 제외하고, 1호점 고양이 식당인 ‘구름이네 고양이 식당’, 꾸준히 사료 후원을 해오고 있는 2~3호점 단골손님들이 주인공이다.
책에는 그의 ‘반쯤’ 마당 고양이 ‘아쿠’와 ‘아톰’이 등장한다. 이 작가의 집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세 살배기 두 형제는 최근 그와 함께 거처를 옮겼다. 지난한 원고 작업 중에도 세 살배기 고양이와의 첫 만남부터 함께 살게 되기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할 때는 행복했단다. 다 커버린 아이들의 어릴 적을 추억하는,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면 쓰기 힘들었던 부분도 있다. 고양이 식당 2호점 ‘목련식당’의 할머니 이야기다. 만취한 채 ‘고양이를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윽박지르는 경찰, 고양이 키우지 말라고 협박하는 마을 이장. 늘그막에 길고양이를 돌보며 삶의 낙을 얻곤 했지만 이웃 등쌀에 못 이겨 결국 할머니와 목련식당은 산속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요즘도 사료 후원 겸 사진 촬영 겸 주기적으로 2호점을 찾고 있지만, 쫓겨나듯 이사하던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시골에서 고양이 밥 주며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굉장히 낭만적이라고 말해요. 현실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죠. 시골에서 고양이는 상추보다 못한 생명 취급을 받아요. 밭을 파놓고 농작물을 건드린다고 욕하고, 집 앞마당에 철마다 쥐약을 놓죠. 고양이 식당에 찾아오던 고양이들이 어느 때부턴가 자꾸 다치고 죽는 일이 있었어요. ‘나 때문에 고양이들이 피해를 입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2~3년 정도 밥 주는 일을 멈춘 적도 있었죠.”
해마다 이웃집 마당에 놓이는 쥐약을 보고도 모른 체해야 한다. 어제까지도 고양이 식당을 찾아오던 단골손님이 차갑게 굳어 쓰러진 모습을 마주하는 일도 종종 겪어야 한다. 시골 캣대디 생활은 그런 식이다. 개보다 고양이를 고깝게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한 데다, 시골에서 발생하는 고양이 학대는 도시와는 달리 주목조차 받지 못한 채 묻혀버린다. 고양이를 모함하는 이웃들에게 맞서보기도 했지만 ‘위아래도 없는 천하의 몹쓸 놈’ 소리만 들었단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면 밭을 망치는 고양이가 늘어난다. 고양이가 쓰레기봉투를 헤집어 길거리를 더럽힌다. 고양이에 대한 단단한 오해를 풀 의향이 없어 보이는 이웃들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대신 그는 회유책을 택했다. 뇌물에 가까운 선물을 가져다주며 대화를 시도하는 것.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고양이를 득달같이 쫓아내던 할머니네 텃밭에는 어느덧 촘촘한 그물이 쳐졌다. 언제 누가 낳은 것인지도 모르는 집 앞 도랑의 꾸물거리는 새끼 고양이 여섯 마리를 챙겨도 된다는 암묵적인 허락도 받아냈다. ‘고양이에 미친 놈’ 취급받은 지 6년 만에 찾아온 변화였다.
고양이 친화적이라 ‘고양이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터키나 모로코에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제 것을 나누며 공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길고양이 학대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요즘이지만, 그는 하던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그게 길고양이와 사람이 공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양이 아빠 노릇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수많은 작은 곳의 수많은 작은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작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어요. 수많은 캣맘과 캣대디, 애묘인들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는 동네 고양이를 포획해 TNR(길고양이 중성화) 사업 지정 병원에 데려다놓고, 누군가는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SNS에 올려서 고양이의 귀여움을 널리 알리고, 또 누군가는 감명받은 고양이 게시물을 주변에 공유하는 거죠. 이 모든 일이 계속되다 보면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고양이와의 공존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 믿음의 기저에는 그 스스로가 인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던 경험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열렬한 고양이 예찬론자지만, 고양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의 그는 고양이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옥외 식당에서 식사할 때 발치를 맴돌던 길고양이를 쫓아낸 적도 있다. 고양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몰라서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2007년의 늦가을 어느 저녁, 아내 덕분에 발견한 고양이 일가족에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버려진 소파 위에 누운 어미 고양이가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은 강렬한 충격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서 고장 난 필름처럼 무한 반복되던’ 장면을 곱씹던 그는 먹다 남은 음식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일 년 후에는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집 마당에 고양이 식당을 차리기 위해.
고양이 작가로 활동한 지 10년이 훌쩍 넘어가니 새삼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초등학생 때 작가님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벌써 어른이 되었다’는 독자들의 메시지를 받을 때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진을 통해 대단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첫 번째 책 서문에 썼듯, ‘고양이에게 신뢰받지 않고는 신뢰할 만한 고양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길고양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나누면 세상은 더 귀여워진다
운이 좋으면 카메라를 들이대자마자 재밌는 장면을 포착하지만, 대부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래도 사람처럼 턱을 쓸어내리는 듯한 재밌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에는 ‘포토샵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진짜 고양이가 맞느냐’며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진다. 그중에서도 유독 반응이 좋은 사진들이 있다. 예를 들면 눈이 내려 소복이 쌓인 길 위에서 총각무를 먹는 고양이 가족의 사진이 그렇다.
“12년 전 한겨울 오후였어요. 어미 턱시도 고양이(등이 검고 가슴이 흰 고양이)와 새끼 두 마리가 배가 고팠는지 누군가 먹다 버린 총각무를 나눠 먹고 있더라고요. 무도 작은 데다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새끼들은 어미를 밀어내고 그걸 다투듯 나눠 먹는 모습이 어찌나 짠하고 안쓰러웠는지 몰라요. 사진만 빠르게 촬영하고 차에 남은 사료를 챙겨줬죠.”
촬영할 때 느끼는 감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기 때문일까. ‘작가님 덕분에 캣맘, 캣대디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뒤숭숭한 소식도 자주 들려오지만, 16년 전보다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유해졌음을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가장 많이 변화한 지역은 제주도다. 과거에는 어업 종사 인구가 많은 섬 특성상 ‘고양이가 생선을 훔쳐간다’는 이유로 인식이 좋지 못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가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최근 여행차 방문한 제주도는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최근에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웬만한 카페나 식당 앞에는 고양이 밥그릇 물그릇이 있고, 고양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우호적으로 바뀌었더라고요. 특히 제주도 남쪽에 있는 가파도는 섬 곳곳에 고양이 급식소를 지어두고 사료를 챙겨주고 있었어요. 일본의 고양이섬을 연상케 할 정도였는데, 작기는 해도 섬 하나가 통째로 바뀐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그는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모로코의 공원에서는 보잘것없는 빵이나마 고양이와 나누는 걸인의 모습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 먹는 음식을 고양이에게 준다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가 생각하는 가치는 제 것을 나눈다는 데에 있다. 어려운 시절에도 된장국에 남은 밥을 말아 길고양이들에게 내주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이용한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가졌으니 우리가 가진 걸 고양이에게 조금만 나눠줘도 이 세상은 훨씬 아름답고 귀여워질 것”이라고.
배우 이용녀(66)는 ‘유기견의 대모’로 통한다. 그녀가 유기견 보호소를 운영한 지도 벌써 19년. 수중에 돈이 없을 때도 있었고, 한 번에 200마리를 돌볼 때도 있었지만 유기견 보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용녀는 현재 전국동물활동가연대 대표로 활동하며 동물보호 법안 개정 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자신보다 동물을 더 생각하면서 사는 그녀에게 동물은 어떤 의미일까.
이용녀는 현재 경기도 포천에서 유기견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다. 유기견 40마리, 유기묘 7마리와 함께 산다. 지난해 화재로 인해 유기견 40마리 정도는 다른 곳에 있다.
이용녀의 하루 24시간은 유기견들과 함께 돌아간다. 10마리 이상 그녀의 집 안에서 동고동락한다. 이용녀는 이른 아침부터 연탄을 갈고, 견사에 가서 배설물을 치우고, 빨래하고, 밥 주고, 청소하고, 시멘트칠을 한다. 그러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면 집 안에 들어와 또다시 청소 시작이다. 저녁 식사도 한숨 돌릴 수 있는 늦은 밤에 먹는다.
특히 그녀의 든든한 보디가드인 유기견 윌리엄은 9년을 함께 살았다. 파양됐다가 다시 돌아온 윌리엄을 보면 이용녀는 “이제 입양을 못 보내겠다”고 말한다. 윌리엄 역시 그녀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다. 이용녀에게서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용녀는 장기간 영화 촬영 때 어쩔 수 없이 윌리엄을 데리고 갔는데, 감독이 윌리엄을 마음에 들어 해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용녀는 “윌리엄이 제일 연기를 잘했다”면서 웃었다.
포천에 자리 잡기까지
이용녀가 개를 좋아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그냥 생활이었다. 집 마당에 늘 개가 있었다. 열 마리 정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용녀의 아버지는 딸이 중학생이 되자, 하굣길에 시장에 들러 닭집에서 닭머리를, 야채 가게에서 배춧잎 버린 것을 담아오게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것들을 끓여 개들에게 밥을 주곤 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연극배우였던 그녀는 대학로 근처 금호동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키우던 개 4마리와 함께 살던 이용녀는 우연한 기회로 유기견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됐다.
“어느 날 연습실에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눈이 터져서 고름이 고인 시츄 한 마리가 길가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얘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수의사가 요즘 버려진 개들이 많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시 보호소에서는 얘들을 모아서 버리고 있었죠.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죽였는데, 지금은 열흘에 한 번 죽인다고 해요. 너무 놀라서 그 애를 보낼 수가 없었죠. 그 개를 시작으로 이 보호소에서 7마리, 저 보호소에서 15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러다 그 집에서 쫓겨났어요.”
이후 이용녀는 왕십리 재개발 동네로 이사 갔다. 철거하기 전까지 빈집에 살다가 경기도 하남시로 옮겨갔다. 그녀의 집에 살던 개가 당시 200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모아놓았던 돈도 다 써버려 “그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제가 생전 돈을 빌려본 적이 없는데 애들 사료 살 돈조차 없는 거예요. 후배들한테 2만 원 빌려서 사료를 사곤 했죠. 그러면서 이제 보호소에 가도 아픈 애들은 못 데리고 오기 시작한 거예요. 감당이 안 되니까… 돈 안 드는 애를 선택하는 비겁한 사람이 된 거죠. 그러고 집에 오면 애들이 눈에 밟혀서 사람하고도 얘기하기 싫고 우울증이 생겼어요.”
하남 집에서 월세를 점점 올리자, 이용녀는 ‘월세 없는 땅으로 간다’고 선언하고 현재의 포천으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산골짜기였다고. 그녀는 4년 동안 펜스를 세웠고, 수도 시설이 없어 지하수를 쓰고 있다. 이용녀는 “불편한 점이 많지만 애들이 마음껏 뛰고 짖을 수 있어서 마음은 편하다”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화재보다 무서운 화병
그렇게 포천에 터전을 잡았지만, 지난해 2월 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피해 추산액만 약 3000만 원이었고, 화재로 유기견 8마리를 잃었다. 안타까운 소식에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돕기에 나섰고, 후원도 이어졌다. 특히 방송인 유재석이 큰 성금을 기부해 화제를 모았다. 이용녀는 “방송에서 몇 번 본 게 전부인데 어떻게 알고 통장으로 큰돈을 보냈다”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화재 후 1년, 현재는 집도 재건하고 복구가 많이 된 상태다. 이용녀는 “한 9~10개월은 마당에서 살았다. 몸이 안 좋아졌다”면서도 “그건 고생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전국동물활동가연대 대표로서 동물들한테 좋은 정책을 마련해주고자 힘쓰고 있다. 시위를 하고 목소리를 높여도 반대에 부딪히거나 정책이 통과되지 않을 때 답답하고 화병이 난다고 했다.
이용녀는 지난 3월 대선을 앞두고 매우 바빴다. 당선이 유력한 이재명, 윤석열 후보에게 ‘개 식용 반대’ 공약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두 후보에게 공약을 받고 나서야 ‘살아났다’고 그녀는 말했다.
또 하나 이용녀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반려동물 등록칩 의무’다. 칩을 무료로 해주고 백신 주사를 1년에 두 번 의무적으로 맞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녀는 “반려견이 예쁘다고 데리고 와서 칩을 등록하고 한참을 키웠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다 애가 아파서 병원비가 엄청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슬쩍 내다 버리면 그다음에 주사 맞으러 오라는데 못 가게 되지 않나. 칩을 의무화하면 이때 300만 원 벌금을 물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유기견을 죽이는 데 돈이 100만 원씩은 들어가요. 유기견 포획해야지, 거기에 수의사, 관리인들 월급 줘야지, 소각해야지. 그렇게 쓰이는 세금이 1년에 1조가 넘는 거죠. 우리가 내는 세금이 애들 죽이는 데 쓰이는 거예요. 그 돈으로 애들 칩을 만들어주면 평생 쓰거든요. 제가 지난여름 포천시에서 칩을 무료로 제공하라고 1인 시위를 계속했어요. 그래서 올해 1월 1일부터 포천시는 칩이 무료예요. ”
어머니 치매 호전 기적 겪어
이용녀는 유기견 입양도 잘 보낸다. 아무한테나 보내지는 않는다. 입양해간 사람이 자기 형제, 아파트 단지 내의 사람, 직장 동료 등 믿을 만한 사람을 추천하면 유기견을 보내준다. 2018년 1500마리를 넘겼고, 현재는 약 2000마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기견의 대모’인 이용녀는 입양 자체보다 그 이후가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반려동물을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키우지 말라”고 강조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다 보면 해야 할 숙제가 많은데, 그것을 잘 해낼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직접 기적적인 일을 겪은 바 있다. 유기견들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병을 좋아지게 한 것이다.
“12년 전에 엄마가 치매에 걸리셨어요. 병원에서 두 달 안에 돌아가시니까 준비하라고 했어요. 그때 엄마는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손도 못 움직이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말도 못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하남 집으로 모시고 갔죠. 엄마가 평소에 개를 좋아하셔서 배 위에다 강아지들을 올려주곤 했어요. 그랬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서너 달 지나서는 애들하고 눈도 마주치셨고요. 그러다 8개월쯤에 제가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누가 오줌을 싼 거예요. 내가 ‘누가 그랬어’ 했는데 엄마가 한 마리를 가리키면서 ‘쟤가 쌌어’ 하고 말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엄마가 걔가 싼 걸 보고 기억을 하고 계셨던 거죠.”
어머니는 그 이후 말문이 트였고, 2년 반 정도 같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도 90세가 넘으셨지만 건강하시다고. 이용녀는 어머니와 유기견들 사이에 ‘교감’이 통했다고 짚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도 이 교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끼리 얘기하려면 말 속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머리를 굴려야 하니 어렵잖아요. 그런데 얘네들은 그런 게 없어요. 내가 얘들하고 얘기할 때는 굉장히 릴랙스되고 대화가 뚝딱 돼요. 서로 그런 것 없이 100%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거죠. 그러니 반려동물을 인형처럼 대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용녀는 ‘유기견의 대모’ 이전에 배우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뮤즈로 통한다.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아가씨’에 출연했다. 이용녀는 같이 작업한 감독들이 계속해서 찾아준 게 지금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배우, 연예인이라는 명예가 아닌 일을 계속해서 유기견들을 돌볼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제가 조금 더 힘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게 없는 것이 좀 아쉬워요. 저는 주변에 친한 이름 있는 연예인들에게 동물에 관해 말해달라 이런 부탁을 안 해요. 괜히 나 때문에 불이익당하는 것을 원치 않거든요. 저는 그저 오늘 ‘곁에 있는 동물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주면 결국 그대로 나한테 돌아온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