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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이 밥 먹여주냐?”
팬심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맞는 말이다.
팬 활동이 밥을 먹여주거나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도움이 되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밥을 먹여주지 않아서’ 지치지 않고
오래가는 에너지를 갖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른다.
- ‘덕후가 브랜드에게’ 187p
팬(Fan).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다. 편은지 PD는 ‘연예인이 밥 먹여주냐’는 질타를 한 번쯤 들어봤을 이들의 극성스런 호기심을 수면 위로 올렸다. 예능 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에 이은 신간 ‘덕후가 브랜드에게’는 수치로 설명하기 어려운 팬덤 경제를 파헤친다.
취향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시대. “특정 관심사에 깊이 빠져 사회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한다”며 무시당하던 빠순이‧빠돌이들은 이제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로 존중받고, 강한 소비력으로 시장 트렌드를 주도한다. 관심 분야에 돈이나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관련 정보와 후기를 활발하게 공유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입문시킨다.
그러나 합리적인 기준을 벗어나면 불매 운동을 감행해 기업의 대형 프로젝트를 뒤집기도 한다. 팬들은 브랜드의 제품 개발과 홍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팬덤의 가치가 곧 기업의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은 유수의 기업들은 소비자가 주력 제품의 팬이 되길 바라며, 직원 역시 단순한 직원을 넘어 팬으로 만들기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덕후가 브랜드에게’는 주변 산업이나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는 팬덤 문화를 생생한 사례와 함께 분석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팬심을 겨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담은 책이다. 가수 겸 방송인 은지원의 팬클럽 회장 출신이자,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덕질로 행복한 삶을 지속하는 ‘주접단’ 집중 조명 예능 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을 제작한 PD로서 얻은 통찰력과 내공을 한데 풀어냈다. 장기적인 불경기와 취향의 다각화라는 어려움을 뚫고 충성 고객을 확보하고픈 기획자나 경영인, ‘덕질’에 빠진 자녀·부모와의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가족이 참고할 만하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피곤하다
‘덕후가 브랜드에게’ 저자이자, 현재 KBS2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 메인 연출을 맡은 편은지 PD는 오래전부터 팬이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올 거라 짐작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언젠가 통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접이 풍년’ 편성 직전에는 ‘그냥 팬도 보기 싫은데, 나이 많은 팬들이 주접떠는 걸 왜 봐야 하나. 당장 중단해라’는 말을 들었지만 굽히지 않았다. 결국 2022년 선보인 신규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파일럿*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의 ‘극성팬’이었어요. 가족끼리 외식하러 가선 갈비 굽는 아빠 맞은편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오빠들이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한 적도 있죠. 아빠가 ‘벌써 저러면 커서 뭐가 되겠냐’고 혀를 끌끌 차셨으니, 완전 ‘불량 초딩’이었네요. 덕질에 진심이라 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팬이라는 존재 자체를 좋아해요. 팬의 팬이랄까요?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책까지 출간하게 돼 너무 뿌듯합니다.”
편은지 PD는 ‘주접이 풍년’을 통해 가수 남진, 송가인, 임영웅, 박서진뿐 아니라 아이돌 그룹 신화, 하이라이트, 강사 김미경, 축구선수 손흥민 등 다양한 스타의 팬들을 마주했다. 각자 특성과 문화가 조금씩 다르나, 모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지녔다. 팬들은 ‘최애(가장 아끼는 대상)가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을 먹을 힘을 준다’고 말한다고.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이고도 합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스타와 팬의 관계는 특별해요. 송가인 팬클럽 ‘어게인’은 공연 전 서로 모여 응원법과 군무를 연습해요. 큰 가마솥에 족발을 삶거나 어묵탕을 끓여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가수를 홍보하고요. 누가 지시하거나 보상을 주지 않는데도 말이에요. 스타를 위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아버지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죠. 팬 카페 내 악성 댓글 관련 법적 조치, 운영진 자문을 하는 변호사 팬은 수임료를 전혀 받지 않는대요.”
빠르면 50대, 늦어도 60대에는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달려왔던 모든 목표에 대한 결실을 본다.
자식들이 출가하고, 회사에서도 퇴직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나의 모든 역할과 직급이 하루아침에 종료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성취감이 있어야 하지만 심리적인 공허함이 들 수 밖에 없는 시기다.
이럴 때 매주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축제의 장에 주인공으로 참여한다면 어떨까.
- ‘덕후가 브랜드에게’ 236p
으른(어른) 팬덤의 원동력
‘엄마는 왜 임영웅 편의점 알바했던 거 짠해하냐, 나도 했었잖아.’
‘나 3년 했잖아.’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였던 게시글의 제목과 내용이다. 억울한 자녀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전국의 어머니들은 아들을 외면(?)하면서 ‘우리 영웅이’에게 심취하게 된 걸까? 편은지 PD는 ‘스토리가 가진 힘’이 그 원천이라고 말한다.
임영웅은 포천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세상의 영웅이 돼라’며 비범한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는 사고로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는 긴 무명 시절로 경제 상황이 어려워져도 군고구마를 팔며 꿈을 이어왔다. 노래를 향한 열정과 부모님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무대로 풀어냈고, 이에 마음이 동한 팬들은 TV조선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 내 모바일 투표에 참여해 임영웅이 최종 1위가 될 수 있게 도왔다.
“유통기한이 지난 시판 고추장은 큰 죄책감 없이 버릴 수 있지만, 대대손손 내려온 비법으로 외할머니가 직접 만든 고추장은 골마지가 껴도 아까워하죠. 겉 부분만 살짝 걷어내고 먹으면 맛은 변함이 없다고 느끼면서요. 감정과 정서를 서로 나눈 팬과 스타는 오죽할까요.”
사실 ‘엄마 팬’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남진, 나훈아 등의 오빠 부대가 있었고,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나 ‘영웅시대’의 임영웅은 좀 더 특별하다. ‘그땐 그랬었지’ 추억하게 하는 과거의 스타와 달리, 당장이라도 20대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게 한단다.
“KBS2 ‘불후의 명곡’ 녹화장에서 MC 신동엽 씨가 객석을 찾은 어머니 팬들에게 자주 하는 농담이 있어요. ‘아들로서 좋아한다는 거 다 거짓말이죠? 지금 눈빛들이 아주 음흉해요. 전 딱 보면 압니다’라고요. 그러면 다들 자지러지듯 웃죠. 임영웅 씨도 마찬가지로 중장년 팬들을 순간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화법으로 친근함을 더하고, ‘젊게 살고 싶은 분은 저한테 오빠라고 하셔라’라며 너스레를 떠는 매력 덕이 아닐까요.”
‘팬덤=극성’ 공식은 틀렸다
팬들은 스타에게 애끓는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한다. 그러나 무분별하고 일방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으며, 진정한 응원과 지지로 아티스트의 가치가 성장하길 바란다. ‘주접이 풍년’에서 가수 박서진과 그의 팬클럽 ‘닻별’을 녹화할 때 일이다. 팬들은 박서진이 어린 시절 상처로 상대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며 사진 찍기를 한사코 사양했다. 전국 각지에서 노란 단체복을 입고 달려왔으나 정작 현장에서는 가수가 불편해할까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채 그를 보낸 뒤 쓰레기를 줍고, 제작진에게 ‘우리 가수의 고생을 알아주고 주인공으로 불러줘 고맙다’며 간식까지 건넸다고. 이렇듯 팬들은 저마다 성향이 있어 ‘무조건 열광할 거야’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선 안 된다. 즉각적인 만족을 최우선 가치로 두지 않고, 고차원의 감성적인 배려를 일삼기도 해서다.
“스타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면서 팬들 또한 함께 성장하는 것 같아요. 노년 우울증을 겪는 어머니를 둔 한 스태프가 ‘우리 엄마도 덕질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처음엔 연예인 다 부질없다며 팬 활동에 부정적이었는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행복해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본인 어머니 또래를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고요. 취미를 공유하고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또래 집단과의 만남은 여생의 원동력이 돼요. 팬 카페 가입은 계기일 뿐이죠. 팬이라는 건 그만큼 엄청난 일입니다. 제가 기획하는 콘텐츠로 팬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졌으면 해요.”
고흥 가는 길은 무척 멀지만, 국토를 인체에 비할 때 오장육부 저 밑에 달린 맹장이 고흥이다. 고흥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가는 길이 즐겁다. 고흥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거의 산 절반, 바다 절반이다. 게다가 오염되지 않아 쌩쌩하다. 유독 순정한 땅이다. 과욕과 과속의 레이스에서 벗어나 순한 삶을 꾸릴 만한 산수가 여기에 흔전만전하다. 자연생태와 함께하는 삶을, 또는 디지털 문명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삶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이주를 꿈꿀 만한 곳이다. 이런 생각을 잠꼬대로 간주하는 이도 많겠지만. 아무려나 모처럼 고흥을 찾은 오늘도 눈길과 발길은 번번이 산과 바다로 흘러간다. 이곳의 역사에도 관심이 쏠린다. 고흥의 옛일을 알면 고흥이 더 잘 보이리라.
대서면에 있는 재동서원으로 들어선다. 야트막한 산 아래 아늑한 터에 위치한다. 초록을 토하는 숲과 수목의 가지에 지펴진 꽃들로 서원 일대가 환하다. 홍살문을 들어서자 재동서원의 본질을 웅변하는 충효비가 보인다. 이어 외삼문을 지나자 동재와 서재가 나오고, 내삼문을 통과하자 서재 송간, 매월당 김시습, 송대립, 송희립 등 충신들을 배향한 서동사가 보인다. 그 밖에 창효사, 경호재, 양호문, 강당, 유물관, 그리고 충신들의 행장을 기린 비석들이 경내에 산재한다. 다양한 구조물마다 완결성을 갖추었다. 하나하나 나누어 봐도 개성이 느껴진다.
이채로운 건 사당 서동사의 주벽(主壁, 사당에서 여러 위패 가운데 주장이 되는 위패)이 두 개라는 점이다. 왼편에 충강공 송간, 오른편에 청간공 김시습의 위패가 나란히 봉안되었다. 재동서원은 여산 송씨네 문중 사당을 연원으로 해 개설되었다. 즉 여산 송씨의 고흥 입향조이자 충신인 송간이 사당의 주인인 셈이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객(客)에 불과한 김시습의 위패가 주벽의 자리에 올라가 있을까. 남의 집 사랑방이 아닌 안방을 공유한 형국이니 파격이다. 송간과 김시습. 둘 다 우뚝한 충렬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흡사했다. 드라마틱한 일생도 비슷했다. 그러나 삶의 양상은 서로 달랐다.
나이 겨우 3세 때 해학적인 시를 읊조린 꼬맹이가 있다. 맷돌에 보리 가는 모습을 보고 읊은 게 이랬다. ‘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김시습의 작품이다. 그는 오나가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장차 거목으로 쓰일 걸 의심할 바 없는 ‘국민신동’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세상이 요동쳤다. 난세가 들이닥쳤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탈취하는 반역을 일으킨 것. 김시습 나이 19세 때의 일이다. 김시습이 보기에 그건 역성혁명보다 난잡한 패도(覇道)였다. 멀쩡하던 총신들마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세조의 하수인으로 쓰여 좁쌀만 한 희망조차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봤다.
이렇게 눈 뜨고는 못 볼 시대의 타락에 휩쓸릴 수 없었던 김시습은 과시 공부를 때려치우고 삭발한 채 끝없는 방랑길에 나섰다. 그의 길벗은 항상 고독과 시였다. 평생을 통해 체제에 안티를 걸었다. 타락한 권력의 건너편에서 시대를 조롱한 방외지사였으며, 곡학아세의 선수들을 대차게 깐 아웃사이더였다. 가렴주구를 특기로 삼은 벼슬아치들은 그에겐 고작 벼룩에 불과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 법. 김시습은 벼룩 소굴을 벗어나고자 늘 어디론가 떠나는 방랑 시객이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뒤 계룡산 동학사에선 단종 초혼제가 펼쳐졌다. 김시습이 제주를 맡았다. 그가 손수 쓴 초혼제문을 낭송하며 소낙비처럼 통곡했다던가. 조상치, 조여, 정지산 등 7인이 초혼제에 동참했다. 이들을 ‘단조초혼칠현신’이라 일컫는데, 여기에 송간도 포함된다. 즉 김시습과 송간이 초혼제에서 함께 단종을 애도했다. 조정이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시국에 감히 초혼제를? 필시 7인 모두 목숨을 걸다시피 한 위령제였을 테다. 이 초혼제는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동학사를 복원할 때 대들보에 감춘 기록물이 비로소 발견되었던 거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김시습과 송간의 인연을 헤아릴 수 있다. 재동서원 사당에 김시습의 위패를 주벽으로 모신 연유도 이해할 수 있고.
그렇다면 송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단종 사후 세조가 형조판서 벼슬을 내렸으나 물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세사를 오물 덩어리로 간주한 채 철저하게 외면, 고흥 산야에 광석처럼 묻혀 여생을 조용히 은거했다. 천하를 바람 따라 방랑하며 시로써 불의한 정치를 삿대질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한편, 광기에 가까운 좌충우돌을 했던 별난 자유인 김시습과 양상이 사뭇 달랐다. 김시습은 평생 수만 편의 시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시만 해도 무려 2000여 수. 반면 송간이 남긴 문장은 ‘일체 나의 시문을 남기지 말라’고 문중에 당부한 간찰 한 점이 있을 뿐이다. 이를 비교해 김시습에게서 한결 심층적인 정신을 느낄 수 있지만, 송간의 삶에 비치는 허무 아우라와 염세의 기미 역시 가슴을 친다. 시대의 탁류에 눈감거나 은근슬쩍 편승하는 대신, 의기(義氣)로 간절하게 밀어붙인 삶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둘 다 명민한 교사다.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열혈 영혼이다.
이순신의 대인 클래스
이제 쌍충사를 볼까? 도양읍 녹동항 인근 언덕배기에 있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남다른 행적을 남긴 장수 이대원과 정운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녹도 만호(萬戶, 종4품 무관) 이대원은 용맹했으나 불운한 장수였다. 그는 왜구와 수차례 해전을 치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겨우 22세 나이에 전사했다. 부조리한 죽음이었다. 승전을 거두고 적장을 포로로 잡아온 그의 전공을 가로채려다 실패한 상관 심암이 앙심을 품고 일부러 사지에 몰아넣은 게 아닌가. 수군 100여 명으로 왜선 18척을 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강요했으니 말이다. 이대원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그는 지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다 속적삼에 피로 쓴 절명시를 남겼다. 결국 적선의 돛대에 묶인 채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처절한 곡절이 아닐 수 없다. 저열한 갑질로 약자를 죽음으로까지 유도하는 비극이 일쑤 벌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난세는 이렇게 이어진다. 종지부를 찍을 길이 없다.
만호 정운은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종횡무진 전장을 누볐다. 그는 강직하기가 대꼬챙이와 같았다. 이런 성정이 오히려 출세의 발목을 잡아 49세가 되어서야 만호 벼슬을 얻었다. 그는 진취적인 머리로 주어진 책무 이상의 군무를 노련하게 해치웠다. 군기와 병선을 치밀하게 점검하고서야 전투 준비를 완료하는 식으로.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를 믿어 최측근으로 삼고 조력을 받았으며, 정운은 잦은 승전고로 보답했다. 그는 부산포 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순신은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제문을 쓰면서도 울었다. ‘슬프다, 슬프다’를 연발한 제문이 현존한다. 수하를 진심으로 아낄 줄 알았던 이순신. 대인의 클래스가 역시 다르다.
송시종 고흥문화원 원장
‘임란 극복 기념관’ 건립 필요해
‘전라도 고흥 땅엔 장사가 많다.’ 이는 ‘영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고흥에서 힘자랑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린다. ‘박치기 왕’으로 불린 레슬러 김일, 복서 유제두와 박종팔 모두 고흥 출신 스포츠맨이다. 장사가 많이 나온 고장이라는 실록의 전언이 현대에도 유효한 셈인가? 그런데 고흥의 매력은 어쩌면 생동하는 자연생태에 있다. 때 묻지 않은 산수를 근거로 고흥을 ‘살 만한 곳’으로 여기는 이들이 흔하다. 이에 대한 송시종 고흥문화원 원장의 생각은 어떨까?
“고흥은 한마디로 ‘신이 아껴놓은 땅’이라 할 만하다. 예로부터 영주(瀛州,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골로 불렸다. 그 정도로 산자수명한 고장이다. 너른 옥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청정 해역에서 나오는 어패류도 풍부해 먹고살기에 족했다. 전통처럼 이어진 순후한 인심 역시 고흥의 자랑거리다.”
고흥 역사의 특별한 대목을 소개한다면?
“고대 고분이 다수 산재해 고흥 땅에 일찍이 독자적 고대문명이 존재한 걸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엔 분청자기 주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이곳의 운대 도요지에서 생산된 분청자기가 해외로 수출되기도 했으니까. 현재 전국 유일의 ‘분청문화박물관’이 고흥에 있다. 전란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구국 활동에 나선 선조들의 행장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고흥은 전쟁의 한 중심지였다. 고흥 사람들이 대거 수군으로 참전해 구국의 전투를 치렀다.”
그간 고흥문화원을 이끌며 거둔 주요 성과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중심에 두고 관련 사업과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했다. 성과도 컸다. 가령 한자 수업 수강생들과 함께 제16회 ‘전국서당문화한마당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선조들이 불렀던 ‘흥타령’을 직접 편곡해 ‘효행가’를 만들기도 했다. 이 노래 역시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고흥우주항공축제’ 때 서당 문화를 주제로 한 이벤트를 펼쳤더라.
“과학과 전통의 만남을 의도한 이벤트였다. 과학의 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전통문화의 가치다. 이를테면 서당 문화를 통해 함양된 선비정신을 현대에 계승하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한문 역시 마찬가지다. 한자 공부를 통해 인격 수양을 할 수 있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송 원장은 소싯적에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제도권 교육 대신 서당 공부를 했다. 일찍이 한자에 달통한 실력으로 향토의 한문 고적 다수를 번역한 바 있다. 그는 재동서원에 배향된 충신 송간 선생의 29대 손.
고흥은 고 천경자 화백의 고향이다. 생가도 남아 있다. 기념미술관 설립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끄러운 대목이다. 진작 천경자기념관이 만들어져야 했다. 만시지탄이지만 현 군수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머잖아 성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지역사회에 부각된 문화 이슈는?
“고흥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의 전사(戰史)가 서린 곳이다. 고흥인들도 대거 참전해서 싸웠다. 고흥 녹동 앞바다에서 벌어진 ‘절이도 전투’의 승전은 온전히 고흥 출신 수군의 전투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현창사업은 미미하다. ‘임란 극복 기념관’ 건립 요구 여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쿠팡플레이와 티빙에서 가수 임영웅의 열연이 담긴 단편영화 ‘In October’가 오는 6일 베일을 벗는다. ‘In October’는 바이러스로 황폐해진 사회를 배경으로 주인공 영웅이 자신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감정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주인공 임영웅 외에도 배우 안은진과 현봉식이 출연해 완성도를 높였고, 권오준 감독이 연출해 쓸쓸하면서도 감성적인 느낌을 살리고자 했다.
익산과 충주 등에서 촬영된 이번 단편영화는 작사 김이나, 작곡은 '모래 알갱이' 작사·작곡에 참여했던 김수형과 황선호가 맡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임영웅의 ‘온기’ 뮤직비디오로 먼저 소개된 바 있다.
지난 5월, 약 10만 명의 영웅시대와 상암벌을 하늘빛으로 물들였던 임영웅의 2024 콘서트 ‘IM HERO - THE STADIUM’(아임 히어로 - 더 스타디움)에서도 짧게 공개됐다.
임영웅은 ‘In October’로 가수가 아닌 배우로 변신, 자연스러우면서도 복잡 미묘한 감정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며,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울림까지 선물할 계획이다.
또 다른 임영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In October’는 6일 정오(12시) 쿠팡플레이와 티빙에서 공개되며, 임영웅과 영웅시대가 함께한 첫 스타디움 입성기를 담은 영화 ‘IM HERO - THE STADIUM’ THE MOVIE도 8월 28일 CGV에서 된다.
25일, 26일 양일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가수 임영웅 콘서트 ‘IM HERO - THE STADIUM’(아임 히어로-더 스타디움)이 개최됐다. 이틀 동안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몰린 관객은 총 10만여 명.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관객의 대부분인 중장년층을 위한 배려심이 돋보였다.
26일 현장에는 수많은 스태프가 자리해 안전사고를 막는 데 힘썼다. 장대비가 내린 까닭에 우비도 대량 배포했다. 스태프들은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히 걸어주세요’, ‘계단에서 사진 찍다 넘어질 수 있으니 끝까지 올라가 주세요’라며 관객들을 안내했다.
경기장 주변에는 길을 잃지 않도록 ‘소지하신 티켓 색상을 따라 걸어가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이 설치됐다. 동측, 서측, 남측 구역에 따라 티켓의 색깔을 달리했고, 그에 맞춰 바닥에 화살표 표시를 해둔 것이다. 에어컨이 나오는 쉼터와 의무실, 대규모 간이 화장실 등도 마련됐다. 휴대전화 조작이 어려운 고령층을 위해 포토존에는 전담 스태프가 배치됐다.
본 공연 역시 세심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잔디 위까지 의자를 설치해 객석으로 사용하는 공연들과 달리 이번 임영웅의 콘서트는 그라운드에 관객이 입장하지 않았다. 잔디 훼손을 우려한 조치다. 대신 잔디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4면을 모두 돌출무대로 둘렀다. 북측에는 대형 전광판을 세 방향으로 설치해 어느 쪽에서나 임영웅의 모습이 잘 보이도록 했다. 다소 거리가 있는 2층 팬들과 소통하고자 헬륨 기구 전문팀과 협업을 통해 열기구도 띄웠다.
공연 중 임영웅은 “혹시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다 싶으면 근처 진행요원에게 바로 말해야 한다”며 “춥지 않게 나눠드린 우비까지 꼭꼭 챙겨 입으시라”고 틈틈이 관객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또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고, 건강해야 다음 공연에 올 수 있다”며 “옆자리 사람이 당이 떨어져 보이면 초콜릿도 나눠주고 서로서로 챙겨주셨으면 한다”는 말로 팬들을 웃음 짓게 했다.
공연 말미 임영웅은 “평생에 한 번 설 수 있을까 말까 한 무대를 이틀이나 서다니 분에 넘치는 시간이었다.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영웅시대) 모두의 힘이 모여 이번 공연이 탄생했다”며 시그니처 인사인 ‘건행(건강하고 행복하세요)’으로 상암 콘서트의 막을 내렸다.
한편, ‘IM HERO - THE STADIUM’은 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열기를 잇는다. 영웅시대와 함께한 임영웅의 첫 스타디움 입성기, ‘IM HERO - THE STADIUM’ THE MOVIE 티저가 대형 전광판에 펼쳐지며 1년여 기록과 무대 위의 순간을 오는 8월 28일 영화로 만나게 됐다는 사실을 예고했다. 공식 캐릭터인 ‘영웅이’는 추후 피규어와 인형으로도 공개될 계획이다.
●Exhibition
◇누구의 숲, 누구의 세계
일정 6월 2일까지 장소 대구미술관
전시는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주제인 환경과 생태계 위기에 대해 살펴본다. 작가 13명의 작품 70여 점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는 누구의 숲이며, 누구의 세계인지 질문한다. 첫 번째 섹션 ‘봄이 왔는데도 꽃이 피지 않고 새가 울지 않는…’에서는 미래 환경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정주영 작가의 변화하는 기후·구름·우주, 김옥선 작가의 외래종 나무, 장한나 작가의 새로운 형태의 돌(New Rock 프로젝트) 작품을 소개한다. 두 번째 섹션 주제는 ‘잊혀진 얼굴, 봉합된 세계’로 문명의 발전 이면에 발생한 인간의 욕망과 자연에 관한 태도에 주목했다. 강홍구, 김유정, 백정기, 송상희, 이샛별, 이해민선의 작품이 소개된다. 마지막 섹션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세계에 함께 존재하는’에서는 권혜원, 정혜정, 아니카 이, 토마스 사라세노의 작품을 통해 자연에 대한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시선을 엿본다. 박보람 학예연구사는 “도시 문명, 환경, 생태계 문제에 대해 다채로운 관점을 담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반성적 감각을 회복하고 인류세 시대, 그 이후에 관한 공생, 생태적 감각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화첩으로 보는 나의 프로필
일정 5월 31일까지 장소 영인문학관
영인문학관에서 10년 만에 열리는 서화첩(글씨와 그림을 모아 만든 책)전이다. 문인, 화가, 서예가, 섬유예술가, 패션디자이너 등 60여 명의 정상급 예술가들이 서화첩 한 권에 프로필을 채웠다. 자화상, 좌우명, 애송시, 자전적 글 등 담긴 내용은 다양하다. 소설가 김채원은 언니 김지원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는 시기에 그린 우는 자화상을 서화첩에 넣었고, 부친을 여읜 서예가 김병기는 ‘아버지가 애송하던 한시를 통해 슬픔을 달랜다’는 발문과 함께 58쪽의 글을 썼다. 한편 작가의 방은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김상옥의 방을 재현했다. 특별 전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서재를 재공개한다. 예약을 통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에 관람 가능하다.
●Book
◇느리게 나이 드는 기억력의 비밀(김희진·앵글북스)
동년배보다 보통 20~30년 젊은 뇌를 가진 사람을 슈퍼에이저(Super-ager)라고 부른다. 그들은 젊은 사람만큼 뛰어난 기억력과 인지 능력을 가졌다. 저명한 치매 전문의 김희진 한양대학교 신경과 교수는 인간의 노화란 예정된 것이 아니라 소모에 의해 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신체를 어떻게, 얼마나 잘 관리하면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뇌가 나이 드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습관이 기억력과 뇌 건강을 좌우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1부는 ‘이해하기’ 파트로 뇌의 구성과 각 부분의 기능을 설명한다. 여러 실험과 사례를 통해 풀어내고 있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따라 하기’ 파트인 2부에서는 일상 점검을 비롯해 식단과 운동, 감정과 스트레스 관리, 수면과 약 복용법 등 올바른 생활 습관을 총 7가지로 나누어 소개한다. 부록에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효과를 본 다양한 방법과 저자도 실천하고 있는 작은 습관들을 상세히 담았다.
그러나 슈퍼에이저의 습관을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뇌에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하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희진 교수는 “실제로 자신에게 맞고 큰 효과를 가져오는 행동 지침들을 선별해 30일 두뇌 관리 루틴을 세워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문재인의 독서노트(문재인·평산책방)
문재인 전 대통령이 쓴 102권의 독후감을 ‘취임 이전’, ‘재임 시기’, ‘퇴임 이후’로 나누어 담았다. 일상을 포착한 40여 장의 사진도 함께 수록됐다.
◇밥묵자(꼰대희·21세기북스)
개그맨 김대희의 부캐인 ‘꼰대희’는 50대 후반 꼰대 아저씨를 콘셉트로 한다. 책은 인·의·예·지 네 파트로 나뉘어 있고, 세대 간 화합을 이끈다.
◇하이 애나, 나는 한국 할머니란다!(류관순·미다스북스)
워킹맘으로 살던 저자는 외동딸과 미국인 사위 사이에서 태어난 손녀 덕분에 초보 할머니가 됐다. 손녀와 함께 성장하며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
●Stage
◇영웅
일정 5월 29일 ~ 8월 1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김민영
출연 정성화, 양준모, 민우혁, 김도형, 서영주, 최민철 등
‘영웅’은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뮤지컬이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재현하며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극은 애국심과 감동을 자아낸다. 2009년 초연 이래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며, 국내 창작 뮤지컬 중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을 세웠다. 이번 시즌은 15주년 기념 공연으로 안중근 역에 정성화, 양준모, 민우혁이 캐스팅됐다. 특히 정성화는 초연부터 이번 시즌까지 출연하며 ‘영웅’과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간다. 제작사 에이콤의 윤홍선 대표는 “관객 여러분 덕분에 어느덧 15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시즌을 맞이할 수 있었다”라며 “한층 더 완성도 높은 공연을 선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봄
일정 5월 8일 ~ 6월 7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연출 이기쁨
출연 왕은숙, 문희경, 오성림, 예지원, 황석정, 유보영 등
중년 여성들의 인생 2막을 그린 뮤지컬 ‘다시, 봄’이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꿈, 갱년기, 폐경, 은퇴 등에 대해 왁자지껄한 수다를 펼친다. 31회 공연이 더블 캐스트로 운영된다. 서울시뮤지컬단 단원들이 주축인 ‘다시 팀’과 내로라하는 여배우들로 구성된 ‘봄 팀’이다. 황석정은 ‘다시 팀’에, 뮤지컬에 첫 도전한 예지원은 ‘봄 팀’에 각각 합류했다.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장은 “‘다시, 봄’을 통해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50대 여배우들을 비추고, 객석은 중장년층 관객들이 차지했다. 뮤지컬 관객 저변이 더욱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벤자민 버튼
일정 5월 11일 ~ 6월 30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조광화
출연 김재범, 심창민, 김성식, 김소향, 박은미, 이아름솔 등
뮤지컬 제작사 EMK가 새롭게 선보이는 창작 뮤지컬 ‘벤자민 버튼’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의 원작으로도 유명한 단편 소설을 원안으로 한다. 극 중 타이틀 롤인 벤자민 버튼은 김재범, 심창민, 김성식이 연기한다.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인물로 재즈 가수 블루와의 사랑을 쫓는다. 특히 2003년 그룹 동방신기로 데뷔한 심창민은 21년 만에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다. 그는 “뮤지컬을 연습하며 가수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1536~1593)의 생애는 극적이었다. 삶 전체가 한 편의 파란만장한 인간극장이자, 장면에 따라서는 야유가 쏟아지는 별점 5개짜리 장편영화였다. 생존 당시는 물론 사후까지 부정적이거나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는 송강의 캐릭터는 정말이지 독특하다. 그의 문학은 빼어나 찬사가 쏟아졌지만, 정치 측면에선 잔혹해 지탄을 받았던 게 아닌가. 선조의 입에서 “송강이 조선 선비를 다 죽였다”는 한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송강이 태어난 곳은 한양이며, 학문을 닦고 시심을 기른 정신적 고향은 전남 담양이다. 5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곳은 강화도다. 그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환희산 기슭에 있다. 원래 경기도 고양에 묻혔으나 1665년 성리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의 권유에 따라 현재 자리로 이장하고 사당을 세웠다. 이후 세월 속에서 퇴락한 사당을 현대에 이르러 크게 중건한 게 지금의 정송강사(鄭松江祠)다. 이곳엔 송강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정송강사는 송강의 넋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 분위기는 여느 딱딱한 사당과 달라 포근한 맛을 풍긴다. 산자락을 움켜쥔 입지라 배후 풍치가 밝다.
송강의 묘소는 정송강사 옆으로 난 비탈길 끝자락에 있다. 묏자리는 문외한의 눈에도 명당으로 보일 만큼 아늑하고 훤칠하다. 우암이 잡았다는 터이니 어련하랴. 우암이 송강의 묘지 이장을 주도한 건 송강의 묘소에 물이 차 고민이라는 후손의 하소연을 접하고서였다. 그런데 우암이 하필 진천을 택해 이장 작업을 한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여기에는 일련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우암은 영남계 서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충북 지역에 서원 다수를 건립했는데, 서인의 영수 송강의 묘소를 진천으로 이장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정송강사 남쪽엔 ‘송강정철신도비’가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m에 달해 웅장하다. 비문을 쓴 이는 우암이다.
송강은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행이 잦은 질주였다. 당쟁의 이전투구를 조성하거나 휘말려 사실상 안심을 가지고 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정치적 참사로 평가되는 ‘기축옥사’ 때는 송강이 위관(委官, 재판장)을 맡아 동인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는 의도로 참혹한 피바람을 일으켰다. 1000여 명에 달하는 동인 쪽 사람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던 것. 송강 자신 역시 당쟁에 치받혀 부침을 거듭했으며, 수차례 유배지로 쫓겨나기도 했다. 말년의 송강은 강화도에서 가난을 끼고 고독하게 살았다. 친구에게 편지를 써 ‘아무리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다’고, ‘부디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목에서 송강이 청빈을 버릇으로 삼았던 인물임이 드러난다고 보는 눈도 있다. 아무려나 송강은 강화의 누옥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고.
송강의 성품에 대해 동시대 학자 기대승은 ‘청결한 수석’에 견주었다. 율곡은 ‘강직하지만 속이 좁아 병통’이라 했다. 선조는 송강을 총애했지만 그가 죽자 ‘독기로 사람을 해친 자’라고 깎아내렸다. 무능한 군주답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은 셈이었다. 한편 가사문학으로 조선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송강을 두고서는 찬사가 쏟아졌다. 흔히 조선의 최고 시인으로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송강을 꼽는데, 서포 김만중은 송강의 ‘사미인곡’을 중국 굴원의 명시 ‘이소’(離騷)에 빗대어 ‘동방의 이소’라 극찬했다. 송강의 남다른 개성은 당시 문인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글로 시를 썼다는 데에서도 두드러진다.
송강의 시적 절창은 주로 유배지에서 나왔다. 신세가 궁색해질 때마다 송강은 복잡한 심정을 시에 묻어 다독였던 거다. 그가 매달린 것이 시만은 아니었다. 술이 또한 송강을 삼매경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는 음주벽으로도 한가락 했다. 대낮 근무시간에 거나하게 취해 사모를 삐뚜름히 걸치고 임금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지. 이런 송강에게 선조는 작은 은배(銀杯)를 하사했다. “이 잔으로 하루 한 잔만 마시라”고 당부하며. 이에 송강은 은배를 망치로 두들겨 사발만 하게 만들어 술을 마셨다던가? 이럴 때의 송강은 익살스런 꾀보다. 정송강사 경내에 있는 송강기념관엔 송강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선조가 내린 은배 한 점도 보인다. 진품은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직접 쳐볼 수 있는 대종도 있다
이제 발길은 진천종박물관에 닿는다. 한국 범종(梵鍾, 절에서 쓰이는 큰 종)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2005년 개관한 국내 유일의 종 전문 박물관이다. 진천엔 고대의 제철 유적인 ‘진천 석장리 유적’이 있다. 따라서 진천에선 일찌감치 금속공예의 싹이 텄을 걸 알 만하다. 이 특유한 역사를 배경 삼아 금속예술의 정수인 범종의 모든 걸 보여주는 종박물관이 건립됐다. 직접적인 설립 계기는 범종 제작의 명인 주철장(鑄鐵匠) 원광식(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이 만들거나 모은 종 150여 점을 기증한 것이었다.
진천종박물관은 크기와 세세함이 조합돼 매우 알차고 흥미진진한 박물관이다. “어, 이런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었어?” 감탄이 절로 터진다. 범종의 전시는 물론 범종의 역사, 제작 기술과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섹션에서부터 세계의 종 전시관, 기획전시실, 타종 체험장 등을 갖추어 관람객을 충족시킨다. 나는 ‘충족’ 정도가 아니라 사로잡혔다. 이 박물관의 핵심 공간은 시대에 따라 변전한 한국 범종의 양상과 실체를 보여주는 1층 전시관이다. 여기에선 범종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 모형을 비롯해 상원사 동종, 낙산사 종 등 다수의 명품 범종을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종도 전시해 비교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이 모든 종이 원광식이라는 한 개인이 실물 그대로 재현한 복제품이라 하니 경이롭다.
이곳의 종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성덕대왕 신종 앞에서 눈을 뗄 방법이 없다. 예전 이 거대한 보물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길 때 경주시민 10만여 명이 몰려들어 운송 광경을 지켜봤다. 그토록 인기 있으며, 그토록 유서 깊으며, 그토록 빼어난 예술이다. 범종은 종소리의 깊음과 신비감으로 아름답다. 중생의 미망을 일깨우는 소리를 내는 신성한 법구다. 이른바 ‘맥놀이’라는 오묘한 과학을 무뚝뚝한 쇳덩어리에 주입해 부처의 음성, 천상의 소리를 뽑아내다니. 종의 피부에 새긴 조각은 또 어떻고? 사람을 압도하는 저 능란한 세공을 보라. 범종의 과학, 미학,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진천종박물관은 기분을 돋워주는 명소다. 야외 광장엔 직접 쳐보라고 만들어놓은 대종 2점이 있다. 종을 치자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다 그윽한 여음을 남기고 꿈처럼 사라진다. 그러자 가슴에 괸 먼지가 가셨나? 쾌감이 엄습한다.
장주식 진천문화원 원장
‘이상설 기념관’은 건축문화 성지
“올해 진천문화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보재 이상설 기념관’을 차질 없이 개관하는 데 있다. 계획대로 올해 상반기에 개관되면 곧바로 전국적인 명소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상설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갖가지 자료는 물론이고 건축의 미학까지 겸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진천문화원 장주식 원장의 얘기다. ‘보재 이상설 기념관’은 2023년 10월에 준공식을 마쳤다. 무려 8년여에 걸친 사업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천신만고로 일을 추진한 장 원장의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본 셈이다. 그는 ‘보재 이상설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이상설 선생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우뚝한 인물이다. 항일운동의 선구자이며, 인품과 학식도 빼어난 분이다. 그러나 충분히 조명되지는 않았다. 흔히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기억할 뿐이지 않은가.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선생의 업적과 뜻이 널리 선양되길 기대한다.”
건축에 구현된 기법이 특별하다지?
“전통적인 목 구조와 현대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융합해 지은 대형 건물이다. 고려 중기에 성행한 주심포 양식도 도입했는데, 이모저모 고도의 기술력이 들어간 건물이다. 이는 사례가 드문 것으로 향후 건축문화의 성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진천 하면 ‘생거진천’(生居鎭川)부터 떠오른다.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진 연유가 있겠지?
“주로 너른 구릉지로 이루어진 진천은 과거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지형 구조상 자연재해도 드물다. 따라서 농사가 순조롭고, 덩달아 인심도 좋을 수밖에. 진천엔 널리 이름난 효자도 많았다. 이 역시 지역에 만연한 후덕한 인정을 웅변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입주한 요즘 진천군은 활력이 넘친다. 문화원이 할 일도 많아졌을 것 같다.
“문화 향유 욕구가 강한 청년층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문화원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 나서고 있다. 기존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한편 현대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보완할 참이다.”
진천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장면을 소개한다면?
“신라의 영웅 김유신 장군이 진천에서 탄생했다. 장군은 삼국통일 위업을 완수했는데, 그의 화랑도 정신과 통일 열망이 진천 땅에 이어져 남북통일의 기운이 들끓어오를 경우, 마침내 통일 한국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
요즘 진천에 떠오른 문화 이슈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백원서원 복원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최고의 효자 김덕숭 선생을 비롯한 4인의 선현을 배향한 곳으로 ‘충효의 고장 진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현재 재원 마련을 위해 주민들도 성금을 모으고 있다.”
장 원장은 백원서원 복원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전통 서원을 현대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 중이다.
팬덤에 관한 한 세대 차이나 문화 격차 문제는 잠시 넣어둬도 좋다. 시니어 팬덤은 K팝 아이돌 팬덤 문화까지 섭렵하며 시장에 넓게 손을 뻗치고 있다. 높은 경제 수준과 여유로운 시간으로 무장한 그들의 소비는 뭔가 다르다.
“좋다고 하길래 하루에 2포씩 먹고 있어요.”
2021년 2월 27일 방탄소년단(BTS) 정국의 한마디에 콤부차(차를 발효한 음료) 품절 대란이 빚어졌다. 개인방송 도중에 소개한 중소기업 티젠의 분말 형태 콤부차 한 달치 물량은 3일 만에 바닥 났다. 매출, 수출 모두 급증했다. 3월 첫 주 매출은 전주 대비 500% 증가했고, 수출도 전월 대비 800% 폭증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미(BTS 팬덤)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아미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영웅시대’로 대표되는 시니어 팬덤의 화력도 못지않다.
자동차부터 죽까지 트롯맨 뜨면 동난다
“시니어 팬덤은 소비 단위가 달라요. 자동차 같은 고관여 상품도 구매하죠. 범위도 넓습니다. 우리 삶 전반에 관련된 제품 소비가 이뤄지고 있어요.” 이현지 유진투자증권 미디어·엔터 애널리스트의 말처럼 시니어 팬덤의 소비는 단위와 범위 모두 남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쌍용차(현 KG모빌리티)다. 2020년 존폐 위기에 선 쌍용차는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 1등 상품으로 ‘G4 렉스턴’을 제공하고 ‘진’(眞) 임영웅과 광고 계약을 맺으면서 기사회생했다.
‘임영웅 효과’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년간 임영웅을 모델로 기용한 청호나이스는 실적이 꾸준히 개선됐고, 죽 브랜드 본죽은 CF 영상이 2000만 뷰를 넘기고 쇼핑백이 중고 거래되는 등 전에 없는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임영웅이 시축과 공연에 나선 FC서울의 K리그1 6라운드 홈경기에는 올 시즌 최다 관중 4만 5007명이 들어서기도 했다.
콘서트는 말할 것도 없다. ‘임영웅 콘서트 IM HERO TOUR 2023 서울’은 대기자만 최다 60만 명에 달했고, 6일치 공연 티켓은 발매 즉시 매진됐다.
음반 판매량과 스트리밍 횟수는 오랜 K팝 팬인 이현지 애널리스트도 놀랄 정도다. “임영웅 씨는 정말 대단해요. 정규 1집이 100만 장 넘게 팔렸거든요. 100만 장을 판 아이돌이 있긴 하지만, 사실 글로벌을 포함한 거예요. 임영웅 씨는 100만 장을 국내에서만 판 셈인데, 이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스트리밍은 글로벌 K팝 팬들도 견제할 수준이고요.(웃음)”
이현지 애널리스트는 시니어 세대가 ‘몰입의 대상’을 제대로 찾았다고 분석했다. “시니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요. 시간도 비교적 많고요. 그동안 쓰고 싶지 않아서 안 쓴 게 아니에요. 몰입할 대상이 없어서 못 썼던 거죠. 그런데 임영웅이라는 사람이 등장한 겁니다.”
이 몰입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비즈니스 성장 전략가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은 말했다. “고객은 떠나도 팬은 떠나지 않는다.”
연예인 쫓아다니는 자녀의 등짝을 때려 말리던 여성들이 변했다.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시니어 팬덤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곳엔 반짝 유행도, 반짝 스타도 없었다. 거대한 흐름이 된 시니어 팬덤의 형성 과정과 심리학적 이유를 추적했다.
“최종 보스 컴백 확정.”
“우리는 살았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컴백하는 그룹 너무 안타깝네요.”
“아, 이런….”
한 틱톡(동영상 공유 플랫폼) 게시물 속 글로벌 K팝 아이돌 팬들의 대화다. 누군가의 컴백 소식에 한 팬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또 다른 팬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세계 속 K팝 팬들을 웃고 울리는 이는 가수 임영웅이다.
임영웅 컴백 소식은 하나의 밈(Meme, 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 자리 잡았다. 한 오랜 K팝 팬의 말이다. “임영웅이 컴백하면 ‘숨스밍’(숨 쉬듯 스트리밍)해야 한다는 말이 돌아요. 보통 오후 6시에 음원이 나오잖아요? 첫날에는 아이돌이 1위를 하기도 하는데, 유지는 힘들어요. 어머니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요. 임영웅 팬덤의 존재요? 글로벌 K팝 팬들 다 알 거예요. ‘우리 아이돌 그때 컴백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걸요.(웃음)”
‘영웅시대’(임영웅 팬덤)로 대표되는 시니어 팬덤의 입지는 상상 그 이상이다. 견제 또는 의식의 대상이 된 그들은 빠르게 대중 시장 지형을 바꿔나가고 있다.
은퇴하는 오팔 세대, 트롯맨을 만나다
광신자를 뜻하는 영어 Fanatic(퍼내틱)에서 따온 ‘Fan’과 영토를 뜻하는 접미사 ‘-dom’의 합성어인 팬덤(Fandom)은 한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돼왔다. 백과사전에도 ‘어떤 대중적인 특정 인물이나 분야에 지나치게 편향된 사람들을 하나의 큰 틀로 묶어 정의한 개념’이라 실릴 만큼 인식은 형편없었다. 1990년대 이른바 ‘빠순이’로 불리며 노골적으로 비하받았던 이들에게 오랜 시간 쌓인 편견은 성숙한 팬 문화가 자리 잡고 팬덤 소비가 위력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팬덤 문화에 시니어가 본격적으로 합류한 건 2020년 전후로 지목된다. 바로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과 ‘내일은 미스터트롯’ 시즌1이 방영된 시점이자 ‘오팔(OPAL) 세대’가 트렌드로 부각된 시기다.
오팔이란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노년층(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약자로,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처음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1차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하는 ‘58년 개띠’와 발음이 같아, 베이비붐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5060 액티브 시니어를 지칭한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오팔 세대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탄탄한 경제력과 안정적인 삶을 기반으로 은퇴 후에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여가생활을 즐기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대. 2010년 즈음 노동 시장에서 은퇴하기 시작한 이들은 2020년을 기점으로 생산가능인구(15~64세)에서 고령층(65세 이상)으로 접어들었다. 때마침 막이 오른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은 시니어 팬덤이라는 전에 없던 문화를 만들어낸 기폭제가 됐다.
중장년 여성이 팬덤이 된 진짜 이유
시니어 팬덤이 써낸 기록은 역대급이다. 그중에서도 2020년 방송된 ‘내일은 미스터트롯’ 시즌1은 독보적이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 출범 이후 아무도 넘지 못했던 ‘마의 시청률’ 30%를 깨며 최고 시청률 35.7%(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를 기록했다. 분당 최고 시청률은 38.5%에 달했다. 최종 결선 7인 중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문자 투표에는 773만 1781표가 쏟아졌다.
광풍은 식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 임영웅은 새 디지털 싱글 ‘Do or Die’ 발매와 동시에 국내 차트를 석권했고, 김호중은 영화 ‘바람 따라 만나리: 김호중의 계절’로 예매율 1위에 올랐다. 장민호는 ‘호시절(好時節): 민호랜드[MIN-HO LAND]’ 서울 공연 티켓을 예매 오픈과 동시에 매진시켰다.
심리학자 김은주 박사는 이를 “일대 특이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일본의 ‘욘사마 신드롬’(배우 배용준이 이끈 2000년대 초중반 한류 붐)과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평행이론처럼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김 박사는 그 기저에 중장년 여성들의 복합적인 심리가 깔려 있다고 말한다. “오팔 세대 여성들은 희생의 아이콘과 같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5000달러가 되기까지 그들 역시 엄청난 공을 세웠어요. 남성은 경제활동을 하고, 여성은 육아를 담당했지요. 아무리 뛰어난 여성이라도 대개는 가정에서 살림을 담당해야 했던 게 지금의 60대 여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아이도 키우고, 부모 봉양도 마치고 나니 ‘빈집 증후군’ 같은 게 생긴 겁니다. 뒤돌아보니 사회적 권리도, 힘도, 소속감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인생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치열하게 살아온 뒤 남은 주름진 얼굴과 아무도 몰라주는 헌신. 그 우울과 불안 그리고 헛헛함을 마주했을 때 등장한 것이 장르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음악을 하는 스타라고 김은주 박사는 분석한다. 중요한 건 ‘트로트’가 아니라 ‘스타’라는 것이다. 시니어 팬덤이란 사회적 통념에 맞춰 사느라 돌보지 못했던 욕구를 스타를 통해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 박사는 시니어 팬덤이 자체 미디어 교육을 통해 조직적으로 스타를 지원하고, 아예 팬덤 이름으로 기부와 봉사를 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고 했다. “시니어 팬덤은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길러냅니다. 1등을 만들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지요. 그렇게 생애 첫 소속감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동안 희생만 했다는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하는 거예요. 심리학적으로는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 중 3단계(애정과 소속의 욕구), 4단계(존중 욕구)가 함께 충족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김은주 박사는 시니어 팬덤 활동이 결국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 중 5단계(자아실현)로 이끈다고 설명했다. 임영웅 팬을 자처하는 그는 부친을 잃은 슬픔을 신간 ‘영웅앓이’를 집필하며 이겨냈다고 했다. 김 박사의 말이다. “사실은 다 스스로를 위해 하는 행동이에요.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의료 한류의 열풍이 있기까지, 나라를 잃은 환난 속에서도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한의학의 발전과 국가를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이 있다. 자생한방병원은 항일투쟁과 한의학 발전에 평생 헌신한 한의사이자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의 선친인 청파 신광렬 선생(이명 신호, 신현표)의 일대기를 다룬 ‘달이 즈믄 바람에’가 출간됐다고 4일 밝혔다.
청파 신광렬 선생은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 만세운동 참여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뒤 만주에 광생의원을 개원하고 8년 동안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 치료에 힘썼다. 이후 숙부인 신홍균 선생(이명 신흘, 신굴)과 협력하며 항일연합군부대에 독립운동 군수품과 자금을 조달하는 등 구국 활동에 발 벗고 나섰다.
해방 후에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청파한의원을 개원해 낙후된 농어촌 지역의 의료 상황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민족 의학인 한의학을 되살리는 것에 사명감이 있었으며, 아픈 이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긍휼지심(矜恤之心)’ 정신과 의술이 아닌 인술을 펼쳐야 한다는 유지를 남기고 1980년 작고했다. 그리고 그간의 공헌과 업적이 인정돼 지난해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 서훈을 받았다.
이번 평전은 장남 신준식 박사가 신광렬 선생으로부터 들은 증언과 신광렬 선생이 집필한 ‘월남유서’, ‘청파험방요결’을 기초로 한 생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작성됐다. 또한 차남인 자생의료재단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잠실자생한방병원장)이 3년 동안 중국 연변자치주 정부 자료실에서 수집한 자료와 일본 육군성 특별도서관에서 찾은 문헌, 사진 등 다양한 자료도 활용돼 신광렬 선생의 일대기를 더욱 생동감 있게 스토리텔링 한다.
총 1부와 2부로 구성된 ‘달이 즈믄 바람에’는 신광렬 선생뿐만이 아닌 그의 독립운동 활동에 큰 영향을 준 신홍균 선생의 업적도 다룬다. 독립군 ‘대진단’의 단장이자 한의 군의관이었던 신홍균 선생은 3대 독립군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전투’에서 검은버섯(목이버섯)을 발견해 병사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사기를 올리는 등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2020년 11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신광렬 선생의 작고 후 신준식 박사는 1990년 자생한방병원의 전신인 자생한의원 개원부터 현재까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선대의 유지를 굳건히 이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국내 최대 공익한방의료재단인 재단법인 자생의료재단도 설립해 국가유공자와 후손들을 위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도움이 필요한 사회 곳곳에 따듯한 손길을 전하고 있다.
저자인 신상성 작가는 “신광렬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달이 즈믄 바람에’를 통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의사들의 독립운동 사실과 그 가족들이 겪은 고초를 파노라마 필름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자 했다”며 “시대가 변하며 점점 잊혀지는 우리의 아픈 역사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뜨거운 정신이 이번 평전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전달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문화 현상을 ‘팬덤’이라고 한다. ‘팬덤’은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에도 큰 힘을 발휘한다. ‘팬덤’의 영향으로 산업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팬더스트리’라고 부른다. 요즘 ‘팬더스트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
K-팝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팬덤 분야의 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K-팝 아이돌의 해외 콘서트 투어나 관련 상품 매출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것을 팬더스트리의 예시로 들 수 있다. 팬더스트리에는 팬이 좋아할 만한 상품, 팬덤 플랫폼, 공연이 주로 활성화 되어있다. 가수의 팬더스트리 상품으로는 응원봉, 앨범, 인형 등이 있고, 팬덤 플랫폼에서는 스타에 관해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을 마련한다. 즉 팬더스트리는 팬과 스타를 이어주는 산업이라고 볼 수 있다.
미디어‧엔터테인먼트 회사 ‘라인프렌즈’와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직접 만든 캐릭터 ‘BT21’은 팬더스트리의 성공적인 사례다. BT21의 여덟 개 캐릭터는 인형, 문구, 의류 등의 상품에 그려져서 판매된다. 또 단편 애니메이션 연재, 브랜드 컬래버레이션, 모바일 게임 등에도 활용된다. BT21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기업은 전망이 기대되는 아티스트와 협업하기를 원한다. 팬더스트리가 단순히 팬을 위한 서비스 같아 보여도, 글로벌 판매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제적인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중년층 팬덤 플랫폼
2019년부터 방영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의 열풍으로 중년 팬덤 문화도 두터워졌다. 팬덤 플랫폼 ‘FFAN’ 같은 사이트나 ‘트롯픽’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은 중년 팬덤을 고려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중년층 이용자의 영향력이 중요하다. 오공훈 대중문화평론가는 “팬덤 플랫폼이 발전함에 따라 중년층도 적극적으로 팬더스트리에 진입하고 있다”면서 “중년층이 스마트폰에 익숙해지면서 관련 플랫폼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아티스트의 소식이나 이벤트 등을 알 수 있는 ‘FFAN’의 경우, 팬의 소비 패턴을 파악하고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매출이 발생하는 온라인 실시간 팬미팅 및 티켓•상품 판매 등을 곳곳에 넣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트롯픽’은 투표수 1위 가수에게 서포트 기사 발행과 가수의 영상을 대형 옥외광고 전광판에 송출해준다. 앱에 매일 출석할수록 투표 포인트를 얻을 수 있어서 팬은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중년층 소비에 따른 팬더스트리
요즘에는 중년층 팬덤의 지갑을 열 만한 산업이 확장되고 있다. 경제력이 있는 중년층의 소비 패턴을 파악한 기업들은 주로 고가의 상품을 내놓는다. 쌍용자동차는 ‘임영웅 효과’로 G4 렉스턴 매출이 53% 증가하며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놀랍게도 임영웅은 이후에 고가의 상품 광고를 찍지 않겠다고 밝혔다. 팬은 스타를 보고 따라 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팬들의 경제적 부담을 우려한 것이다. 스타가 고가 상품 광고를 거절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특이 케이스다. 실제로 자동차 광고 이후에는 음식과 헬스·뷰티 제품 등의 모델을 주로 맡았다.
가수 김호중의 6박 7일 크루즈 여행 티켓도 완판된 적이 있는데, 중년층 팬더스트리 시장에서는 고가의 상품과 아티스트의 협업 사례가 점점 이어지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오공훈 문화평론가는 “중년층 팬덤 산업이 커지는 추세에 따라 중년층의 팬더스트리가 K-팝 팬더스트리와 쌍벽을 이룰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