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장소라는 표현이 있다. 집(제1의 장소)과 직장(제2의 장소)이 아닌 마음 편한 어떤 곳을 뜻한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없이 푹 쉬고 싶은 장소다. 모두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마음 편하게 교류를 촉진하는 제3의 장소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말은 집과 직장이 불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에 있으나 직장에 있으나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집과 직장이 있어야 제3의 장소도 의미가 있다. 집과 직장에서 뭔가 어떤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 시간 후에 비로소 쉬고 싶다는 의미도 된다. 집도 절도 없는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운 표현이기도 하다.
비슷한 말로 ‘워라밸’이 있다. 일(Work)과 라이프(Life)의 균형(Balance)이 필요하다는 말에 대해 어떤 CEO들은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균형 타령이냐’라고 말한다. 그러나 워라밸은 제3의 장소처럼 일과 삶에서 모두 행복하고 싶은 마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CEO들은 과연 행복한 근무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워라밸 역시 일과 삶이 다 잘되어야만 의미를 갖는 말이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일은 나의 삶이 아니라고 은연중에 선 긋는 의미가 포함된 것 같아 왠지 씁쓸한 말이기도 하다.
다시 제3의 장소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말은 미국 사회학자 올덴버그(Oldenburg)가 1989년에 쓴 책 ‘The Great Good Place’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영국의 선술집(Pub)이나 프랑스의 카페처럼 마음 편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제3의 장소라고 표현했다. 제3의 장소는 중립적이고, 누구나 평등하고, 대화 중심이고, 찾기 편하고, 단골이 있으며, 본인이 눈에 띄지 않고, 즐길 마음으로 찾는 공간이자, 또 하나의 우리 집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라는 8개 특징이 있다고 분석했다. 즉 가볍게 모여 교류하며 쉬고 즐길 수 있으며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사회적 위치나 입장을 신경 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더 확장하면 1971년에 창업한 스타벅스도 제3의 장소가 된다. 자기 방이 있는데 굳이 카페에 가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을 누군가는 ‘커피값으로 잠시 나의 공간(부동산)을 임시로 사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어떻게 분석하든 카페에서 온전히 내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 가서 작업을 한다. 그러나 올덴버그가 제시한 개념을 카페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해보면, 대화나 교류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완벽한 제3의 장소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로컬의 제3의 장소
제3의 장소를 로컬과 연결시켜 연구하는 이시야마 노부타카(石山恒貴) 교수는 올덴버그가 말한 제3의 장소의 8개 특징이 유연하게 사람이 지역과 관계 맺을 때 나타나는 특징과 같다고 말한다. 지역의 공간과 장소 가운데 비영리단체의 공간, 독서회, 커뮤니티 모임 장소, 학습회 등이 제3의 장소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며, 대화와 교류를 더해 지역 활성화에 기여하는 목적 교류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즉 지역이 도시 생활의 대안도 될 수 있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몇 년간 지역에서 청년 창업이 많이 일어났을 때, 초기에는 카페, 게스트하우스, 독립서점 등을 많이 보았다. 지역에는 소비자도 많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간은 한꺼번에 카페, 게스트하우스, 독립서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에 이런 공간들이 만들어졌으니 새롭고 예쁘고 좋다며 모두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주민들은 공간이 너무 예쁘고 환해서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가도 되나’ 하는 이질감만 들어서 모두의 공간은 아닌 것 같다며 투덜거렸다. 갤러리 같은 곳에서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임을 느끼는 것처럼,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간이 의외로 삶에 녹아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초기의 청년 창업 공간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제3의 장소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들만의 공간’인 상태였다.
어느덧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의 모습도 조금 더 본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제3의 장소 만들기에 대한 수요도 더욱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에서는 수도권이나 인근 대도시에서 끊임없이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서 누구나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혹은 U·J·I턴해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장소를 확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지역에서 한달살기를 하든 워케이션을 하든 귀농・귀촌을 하든 우리가 원하는 제1의 장소는 일단 안정된 주거 공간, 즉 집이다. 그러나 여전히 집과 직장 외에도 어울려 지낼 수 있고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 제3의 장소도 필요하다.
진짜 필요한 것은 제3의 장소나 워라밸이 아니라 집, 직장, 제3의 장소 간의 ‘균형’이다.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에 대응한다며 전개하는 정부의 지역소멸대응기금이나 수많은 지원사업에서 그런 본질을 얼마나 고려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이하 취업지원센터)가 예비 사회적기업 코액터스와 ‘워라벨 시니어 드라이버’ 일자리 창출 협약을 맺었다. 본 협약을 통해 취업지원센터와 코엑터스는 시니어 일자리에 걸맞은 직무 설계 및 일자리 연계를 진행할 예정이다.
‘워라벨 시니어 드라이버’는 영업 부담과 주말 근무 없이 주 4일제로 일하는 완전월급제 형태로, 동종 업계에서는 최초 사례다. 실 근무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여유 없이 고된 업무보다는 취미와 여가를 함께 즐기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work-life balance)을 선호하는 중장년에게는 안성맞춤인 일자리로 볼 수 있다.
취업지원센터 관계자는 “시니어 맞춤 근무 조건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면 이러한 시간제 일자리에 시도해보길 권한다”며 “업계에서는 비용과 효율성 측면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라 판단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더 중요시 여기는 시니어가 증가하는 만큼 시간제 일자리 역시 하나의 근무 조건으로 자리잡길 바란다”고 전했다.
아울러 취업지원센터와 코액터스는 7월 19일 시니어를 위한 채용설명회에서 해당 분야 취업에 관심 있는 중장년을 대상으로 직무조건 설명과 실제 근무지 및 차량 체험, 현직 드라이버와의 만남 등을 진행한다.
취업지원센터 희유 센터장은 “드라이버 직종을 신규 개발하려했으나 시니어에 적합한 직무 조건을 찾지 못했다”며 “이번 협약을 통해 주말과 저녁이 있는 워라벨 시니어 드라이버를 배출할 수 있어 기쁘다. 운전 경험 많은 시니어가 적극 지원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코액터스 송민표 대표는 “이번 협약을 통해 장애인을 비롯하여 어르신도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겠다” 밝혔다. 코엑터스는 앞서 2018년 청각장애인이 운전하는 ‘고요한택시’ 서비스를 출시한 바 있으며, 관련 플랫폼인 ‘고요한M’을 운영 중이다.
‘고요한 M’ 드라이버로 지원 시 서류 평가, 면접, 운전능력 평가를 거쳐 채용 심사 과정을 거치며, 운전이 가능한 서울시 거주 만 55세 이상 시니어라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해당 취업에 관심 있는 구직자는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워라벨’이라는 신조어가 뜨고 있다. 워라벨은 Work and Life Balance을 합성한 신조어이다. 개인의 일(Work)과 생활(Life)이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퇴근 후 그리고 주말에도 SNS로 여전히 일에 시달리는 현재 기업 풍토에 반발해서 나온 용어로 보인다.
어찌 보면 일과 개인 생활을 균형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말처럼 그게 쉽지 않다. 기업은 월급을 주고 있으니 되도록 회사 일을 많이 시키려 하고 갑의 입장이니 그렇게 용인되는 풍조였다. 그러나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삶이 중요하니 직장과 가정은 별개로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한창 젊었을 때는 중동 건설현장에 나가 있었다. 몸이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당연히 100% 회사 일만 했다. 귀국 후 국내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으나 잠만 집에 가서 잤지, 여전히 일에 치중된 삶이었다. ‘납기단축’, ‘돌관 작업’이라는 명분 하에 노는 날도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90% 일에 치중된 삶이었다.
스키장갑을 제조 수출하는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후, 자발적인 일 중독자가 되었다. 공장장의 직함이므로 납기를 맞추려면 야간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원들에게 일을 시켜 놓고 혼자만 퇴근 할 수 없으므로 성수기에는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많았다. 성취감에 보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불러 집이 너무 머니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라는 제언을 했다. 그에 필요한 전세 돈을 회사에서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옮기고 나니 출퇴근에 소비되는 시간이 줄었다. 그만큼 생활에 재미를 느꼈다.
또 자리를 옮겨 스포츠 의류 유통 사업 대표를 맡아 시내 중심가에 자리를 잡았다. 유통업은 일하는 시간을 늘린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서 정시 퇴근을 실시했다. 때 마침 직원들의 요구 조건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도 중요하지만, 생활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30년 전 일이다.
필자가 겪어온 시대에는 남자는 일이 우선이었다. 가정은 아내 몫이었다. 남자가 회사에서 일을 잘해서 월급이 올라가면 그것이 곧 가정의 행복이었던 시절이다. 필자가 치열하게 살아 온 직장 생활 20년은 화려했다. 그러나 가정적으로는 그만큼 희생이 뒤따랐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느 덧 훌쩍 자라 아빠와 말을 섞을 기회도 없었다. 그리고 출가하고 나니 아버지의 정을 요구하기에 이미 늦은 것이다.
‘옆집남자가 사는 법’이라는 책을 쓴 이경수라는 사람은 잘 나가던 직장과 아이들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세계 여행을 떠났다.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시기를 그렇게 용단을 내린 것이다. 일과 생활의 밸런스는 이렇듯 어렵다. 둘 중 하나는 희생해야 뭔가 얻어진다.
요즘은 맞벌이가 대세이니 워라벨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제조업처럼 일하는 시간이 곧 생산량이던 시대도 지났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처럼 출세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원하는 소확행(小確幸)과 인생은 한번 뿐이라는 욜로(YOLO)의 시대이다. 워라벨을 중시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