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며칠 전 글 수업 시간에 우연히 나온 40년 전 내 친구 이야기, 그 사연을 풀어보려 한다. 나는 2018년 경영하던 사업체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 회사에 묶여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어 3년 전부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일대일 나눔이라 나와 지도 선생 둘 다 내밀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어서 글과 함께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유용한 시간이 되고 있다.
글 선생의 지론은 글은 발가벗고 써야 한다는 것이고, 혼자 벗기 민망할 거라며 본인도 가차없이 벗어 보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날, 부모 등 윗대가 아닌 나와 동년배, 구체적으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일이 있냐고 글 선생이 물었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떠올렸다. 그 친구의 서글프고 황망한 죽음에 대해, 아니 죽음보다 더 아리고 허망한 두 번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년 전의 친구를 떠올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상념 속 일이지만, 여리고 섬세한 성정을 가졌던 친구의 내면만큼은 사실로 기억된다. 철인(哲人)처럼 고뇌했고 시인처럼 노래했던 친구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보다 진실했으며, 거기에 더해 유약한 운명의 냄새를 풍겼다. 결과적인 소리지만 성격 속에 이미 예고된 불행을 배태하고 있었다고 할지…. 그렇게 그 친구를 추억하며 기억의 묵은 빗장을 열자 형체 없이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40년 전의 상념이 뒤엉켜 떠올랐다.
40년 전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
그 친구와 나는 서울대 철학과 동창. 지금도 그렇지만 75세인 내가, 그리고 그 친구가, 우리 과 동기들 모두가 철학과를 택했을 당시는 세상살이에 어눌하고 현실 감각이 둔하고 무엇보다 부모를 실망시키기로 작정한 불효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철학과를 나와 무슨 밥벌이를 어떻게 할 것이며, 부모 봉양은 고사하고 처자식이나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지가 세상 사람들의 우려이자 반대의 이유였던 때였다.
그러한 우려 속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전공을 살려 살지 못했다. 졸업 후 변리사 자격시험 공부에 바로 돌입했던 것이다. 그렇게 ‘철학과 출신 변리사’란 꼬리표를 달고 우여곡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영역에서 삶의 기반을 닦았고, 순탄하게 장래가 풀려 지금까지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그 친구는 전공을 살려 서양 철학의 본산지인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는 국제 통화도 여의치 않았고 기반을 닦느라 서로 정신없이 달리던 때라, 가족이 아닌 한 외국으로 간 친구와는 자연히 연락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처럼 그 길로 소식이 안 왔으면 차라리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서로 잊고 지낸다 한들 그 또한 감사한 일이었겠지만….
그로부터 약 10년 후 나는 친구의 관을 메고 친구의 고향인 충청도 어느 산자락을 오르게 된다. 친구를 지상에서 영원히 작별하기 위해. 학창 시절 모습만을 기억할 뿐인 내겐 30대 중반에 주검으로 돌아온 친구와의 만남은 당혹스러웠다. 또한 가혹했다. 땅에 묻은 후엔 시신을 담고 있던 관을 제거한 후 깨서(파관) 불에 태우든가 없애버리던 그 지역 풍습으로 인해 친구의 관은 얇고도 위태로웠다. 관을 걸머쥔 손에 시신의 차가움이 닿는 듯했고, 관을 뚫고 친구의 손이 불쑥 나와 그간 격조했다며 내게 악수라도 청할 것처럼 차가움 더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졸업과 동시에 바로 외국으로 갔기 때문에 동기생 중 ‘내가 아무개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운구 대열에 낄 줄이야. 살아 있을 때의 인연보다 죽은 후의 인연이 더 깊게 다가왔다.
친구는 밤에 자다 죽었다고 했다. 옆에는 한 여인이 함께 자고 있었고. 친구의 죽음이 그 여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30대 중반의 신체 건강하고 정신 멀쩡한 남자라면 아내든 애인이든 이성과 동침한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고. 다만 35년 남짓 살다 간 친구의 짧은 생에서 두 여인과 인연이 있었고, 친구는 두 번째 여인 곁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다.
아이 딸린 이혼녀와 결혼 그리고 이혼
친구는 독일 유학 시절 같은 한국 유학생과 결혼했다. 유학생끼리의 만남이란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이국에서는 가장 무난한 인연이었으리라. 아내가 된 여자의 전공은 독문학이었다고 들었다. 철학도와 독문학도의 결합이란 이지적 커플 탄생에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도 같고. 둘은 대화가 잘 통했을 것이며, 샤프하면서도 여성에 버금갈 감수성과 섬세함을 갖춘 내 친구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나 선뜻 내릴 수 없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 테고. 상대 여성은 아이 딸린 이혼녀였으니까. 몇 살인지는 들은 바 없지만 이혼 후 딸 하나를 데리고 독일로 유학 갈 정도면 그 시대로선 당찬 부류에 속한 여성이었을 테지. 독립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거리낌 없이 앞날을 열어가는 페미니스트. 문학 전공자이긴 해도 그 여자는 외향적이며 진취적 성향이지 않았을까?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해도 두 번은 허용하지 않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여성에게 두 번의 실수는 실패와 다름없을 테니까. 원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이혼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갔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내 친구는? 내 친구는 스마트한 엘리트지만 내향적 성격을 가진 사색가.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묵묵히 수용하고 들어주는 타입이다. 친구도 그 사이 변했을 수 있지만, 친구의 아내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도 친구에 대해서는 절반쯤 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둘이 상반된 성격으로(순전히 나의 추측이라 할지라도) 마치 보색관계처럼 튀면서도 개성 있는 조화를 이뤄 잘살았다면야 성격 다른 남녀가 오히려 잘산다는 경험치를 보여줬을 테지만, 둘은 7년 정도를 함께 살다 헤어지고 말았다. 친구의 아내로서는 두 번째 이혼이었고, 내 친구는 첫 이혼이었다. 그렇게 각자 이혼 경력만 쌓은 짧은 인연 속에서 이혼 사유는 알 수 없었다.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혼 후 친구의 아내보다 친구가 더 좌절하고 헤맸을 것 같다. 친구로서는 이혼 경험이 처음이니까. 갈라선 이후 각자는 공부를 마쳤고, 친구의 전처는 학위를 딴 후 한국의 어느 지방 대학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세 번째 결혼을 했는지는 들은 바 없고.
아이 딸린 여인 곁에서 영원히 잠들다
내 친구는 어찌 되었을까. 친구의 옆에서 함께 잔 여자는 누구였을까. 이혼녀였다던가, 사별녀였다던가, 그 여자 또한 아이가 딸려 있었다. 함께 공부하거나 일로 만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그야말로 오가다 만난 사이라는 것을 장례 때 들었다. 둘은 동거를 했던 것 같다. 결혼으로 상처를 받았으니 내 친구 쪽에서 선뜻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 이목이나 형식이 중요했다면 또다시 그런 만남은 갖지 않았을 테니까.
35년이란 짧은 생애에 두 여자가 있었지만 세상 떠나는 날에 두 여자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나의 추측, 나의 상상력으로는 그 친구의 허망한 죽음에 두 여자의 관여와 영향이 가장 컸을 것 같음에도. 섬세한 내면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친구인 만큼 이혼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며, 그 여파로 뒤이어 만난 인연이 안정적이고 안온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두 여자 모두 지난 결혼이나 과거의 인연으로 자녀가 있었고, 결혼 상대자의 그런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인 친구의 모질지 못한 성정이(모질지 못하다는 말을 이런 상황에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자 져야 할 삶의 고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 기준에서 다소 빗겨난 관계가 지속적인 부담이나 족쇄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럴수록 그 친구 쪽으로 하중이 쏠렸을 것이다. 불균형하게 출발한 결혼과 관계가 자신을 먼저 챙기거나 이기적이지 못한 내 친구의 삶에서 에너지를 빼앗고 삶의 의욕을 갉아먹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이 돌아보게 하지만, 이 모든 것 또한 부질없는 상념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학창 시절 이후 그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어쩌다 내가 운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친구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거나 다른 누구보다 친구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굴 이유도 없다.
75세가 된 지금, 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에 부모도 형제도선배도 아닌 동년배로서 가장 먼저 떠나보낸 이가 그 친구라는 사실이 그저 각별하게 다가올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전화 주실 줄 알고 기다리다 다시 해요.”
“응… 손님 만나는 중이어서….”
“그랬어요? 그럼 그렇다고 문자라도 주시지… 나는 함께 점심하려고 전화했던 건데.”
“손님과 점심 약속을 했던 터라… 미리 말하지 그랬어?”
“미리 말한다고 약속 잡아주실 것도 아니면서.”
“뭐 어쨌든. 그나저나 잘 지내고?”
“네, 저는 잘 지내요. 조만간 점심 사드리고 싶네요.”
“점심은 무슨. 됐고.”
“그럴 줄 알았어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예의 그 ‘손님’이 화장실을 가는 척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는 바람에 통화가 오히려 길어졌다. 점심 식사 중에 그 여자의 전화가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 손님과의 자리가 대단히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핑계 삼아 그 여자의 전화를 따돌리고 싶었을 뿐. 손님이라야 등산을 함께 다니는 동네 지인으로 별 용건 없이 그냥 점심이나 함께하자는 게 다였으니까.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전화했어?”
“보고 싶으니까 했죠. 얼굴 본 지도 오래됐고.”
“우리가 얼굴 보고 싶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만날 사인가? 아무튼 난 지금 바빠. 그만 끊자고.”
얼굴 보고 싶다며 자유로이 만날 수 없는 사이, 만나면 부담스러운 사이, 껄끄러운 사이. 그렇다, 그녀와 나는 옛 연인 사이다. 눈 씻고 찾으려 들면야 한 자락 추억이야 없지는 않겠지만 그딴 건 찾고 싶지도 않고, 생각할수록 씁쓰레함만 남은 관계.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건가.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는 걸 보면 아직도 내게 미련이 있다는 거겠지만, 나는 한마디로 노 생큐!다. 안 그러면 또 뭘 어쩔 건데? 지금 와서 내가 뭘 해줄 수 있다고. 헤어진 지 벌써 3년인데.
사업 실패와 연이은 가정 붕괴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100억 정도 가진 재산가다. 굳이 돈을 강조하는 이유는 돈밖에 가진 것이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적다.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그런 조건 좋은 여자가 내게 안달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얼마나 조건이 좋은 남자길래 그런 잘난 여자가 죽자고 매달리는 거냐고?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그렇다고 백수건달이나 제비족은 아닌, 어쨌거나 그녀에게 만만하게 보인 50대 중반 독신남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세 번째 남편감이냐고? 천만에 말씀! 누구 맘대로!
10년 전 나는 사업에 실패했다. 40대 중반이었다. 그 여파로 아내가 당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이던 남매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버리자 가족들로부터 보기 좋게 버림을 받았다. 물론 내 잘못이 컸다. 외국 유명 브랜드 의류 수입상을 했던 나는 불황을 맞아 기울어가는 사업체를 정리할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어떻게든 살려보리라 무모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나를 설득하며 마음 졸이다 못해 인내심이 바닥 난 아내는 반은 홧김에, 반은 살 길을 찾아 미국 친정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가정과 사업체가 박살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물론 생이별한 자식들의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
실낱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자살할 궁리만 모색하던 처참한 나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고통 많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으로 가득 찼다. 1년 후 이혼 서류를 보내온 아내의 요구에 이렇다 할 대꾸나 변명 한마디 없이 응했던 것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탓이었다.
그럼에도 늘그막에 외손주 둘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해주시는 장인 장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처가의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어쨌거나 두 아이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보다 장래가 밝아진 게 아닌가. 그 와중에 아내는 나에 대한 원망과 일말의 복수심으로 나와 아이들의 관계를 차단한 것이리라. 나는 나대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그때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내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일거리도 없고 재기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간간이 들어오는 경영 계통 강연 수입으로 그때그때 생활비를 벌며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등산과 마음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망한 나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아, 그녀는 사업상 나의 고객이었다. 내가 쫄딱 망한 것을 알고 호감을 표해온 것이었다. 쫄딱 망한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게다가 한 미모하는 이혼녀. 로또 대박과 맞먹는 행운이 아니냐고? 게다가 아내까지 미국으로 내뺀 상황이었으니. 글쎄, 계속 들어보시라.
나도 처음엔 그녀라는 동아줄을 붙잡고 재기를 꿈꿨다. 그녀를, 아니 그녀의 돈을 통해 회생할 가능성을 탐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불쌍한 여자다. 그녀의 인간관계, 특히 남자관계는 늘 돈이 중심이었다. 첫 결혼도 두 집안이 서로 돈을 보고 딸과 아들을 교환했던 것이니 애정 없는 혼인 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고, 결국 남편의 외도로 3년 만에 파탄이 났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그녀 측에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탐냄으로써 이뤄졌다. 20년 연상의 재벌급 홀아비, 그녀로서는 재력적 지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기쁨도 하늘을 찔렀다. 재물에 마음이 꽂힌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권력을 탐하는 부류들은 더 높은 자리를, 인기몰이에 집착하는 자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무한 인기를 갈구하는 법이니. 사람은 저마다 우상을 모시고 살며, 우상 숭배란 맹목적인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미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돈에 집착하고 돈에 갈증이 든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게 아닌가.
그녀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에너지를 쏟을 곳이라곤 오직 돈에 관계된 것이었기에, 앞뒤 재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업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돈을 잃고 그만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 이혼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만난 것이다. 비록 이혼을 했어도 받은 위자료와 본인 재산 등으로 내게 대줄 수 있는 사업자금은 충분했다.
자, 이런 상황이다. 처음에야 나도 횡재한 기분이었다. 속물이라 욕해도 상관없다. 사실이니까. 거처가 마땅찮았던 나는 바로 강남에 있는 그녀의 80평대 아파트로 들어갔고,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됐다. 1년이 지났을 무렵, 한마디로 나는 그녀에게서 환멸을 느꼈다. 그녀는 오직 돈, 돈, 돈만 알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돈 타령에, 아마 꿈조차 돈에 대한 것을 꿨으리라.
그녀에게서는 어떤 내면의 향기도, 내적 감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사는 동안 책은 고사하고 글 한 줄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사색에 잠긴다거나 주변이나 일상에서 감동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자연에 대해서도 교감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아마도 푸른 여름은 만 원권 지폐로, 노란 가을은 오만 원권 지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1년 만에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들어갈 때도 맨몸, 나올 때도 맨몸. 여전히 집도 절도 없었던 나는 TV 프로그램 속 자연인처럼 어느 산자락 빈집에서 한 달가량 몸을 의지해 있었다. 그 후 낯선 소도시로 흘러들어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작은 강연, 독서 모임 등을 이끌면서 내 입을 먹이며 살고 있다.
나와 그녀의 관계에는 환멸만 남고
혹자는 배부른 투정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내면이니 감수성이니 그딴 게 밥 먹여주냐고. 봉을 잡았으니 빌붙어서 몸이라도 편할 수 있지 않았냐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단 한번 살아보시라. 입만 열면 돈타령에 무식이 하늘을 찌르는 여자, 나는 열을 준대도 덧정 없다.
만약 그 여자가 그나마 머리에 든 것이 있는 나를 흠모하여 자신에게는 없는 지성이나 교양을 취해보리라는 갸륵함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환멸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애초에 그런 코드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서 무엇을 보고, 내가 가진 어떤 점이 그녀를 끌어당겼을까.
돌이켜보면 그녀는 나를 자기 재산 증식시켜주고 관리해주는 머슴 정도로 취급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어디 가서 재산을 불릴지, 하나보다는 둘이 힘이 되니 속된 말로 만만한 나를 ‘꼬붕’으로 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 애초 애정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녀에게 애정 같은 감정과 정서가 있기나 할까. 내가 아는 한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신뢰나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했으니. 설혹 내게 사업자금을 대주었다 해도 내가 원하는 일을 자유로이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녀의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것에 한해서 허용하는 게 고작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그녀가 지금도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불쾌할 수밖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여자는 지성, 외모, 상식과 자존감을 갖춘 사람이기가 어려울까? 솔직히 그럴 것 같다. 그런 여자들은 남자 또한 엇비슷한 수준에서 만나고 싶어 할 텐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능력 면에서 현저히 기울어져 있으니 두루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여자들만 꼬인다고 할지. 겨우 한 여자 만난 것을 두고 성급한 일반화를 하냐고? 내가 설마 한 여자만 두고 그러겠나. 그 사이에 두 여자가 더 내게 호감을 표해왔는데 역시 비슷한 여자들이었다. 돈밖에 없고 천박한. 돈 많고 무식한 여자, 돈밖에 모르는 여자들이 꼬이는 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브라보 마이 러브]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30년 만에 그를 만났다. 나는 새내기, 그는 대학 3학년이었으니. 이렇다 할 로맨스는 없었다. 손 정도는 잡았을 테지만 입맞춤을 해본 기억은 없다. 하기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고, 헤어지기 전 어느 가을 춘천에 한 번 같이 간 게 전부다. 이 말도 우습다. 만난 적이 있어야 헤어질 거 아닌가. 끌어모아 봤댔자 주머니 속 동전 몇 푼처럼 그와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궁색하기만 할 뿐.
그럼에도 나는 그를 대상으로 ‘만약에’ 게임을 해볼 때가 있다. 만약에 그와 사귐을 이어갔더라면, 그래서 만약에 둘이 맺어졌더라면, 만약에 그와 함께 황혼을 맞았더라면…. 밋밋하나마 평범한 결혼생활을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지금 나는 이혼녀가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근거 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섬세한 꽃봉오리를 터치할 때처럼 여린 여심을 건드릴 줄 아는 남자는 아니었기에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엔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소위 ‘나쁜 남자’와 대칭점에 서 있는 전형적인 ‘착한 남자’였다. 착한 여자, 착한 남자의 치명적인 결함은 조미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영양식처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니. 더구나 그는 대화거리 없는 공대생이었으니.
2013년, 이른바 황혼이혼과 함께 호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 나이는 딱 50세. 그는 52세가 되었을 테지. 그해 11월 말경, 대학 후배로부터 크리스마스와 송구영신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전공이 달라 잘 아는 후배는 아니었지만, 어느 모임이든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소위 총대를 메게 마련인지라 그 후배의 역할도 그랬던 것이다. 게다가 본인 소유의 장소까지 있다니 날짜만 정해지면 되는 일이라 모두들 ‘알았다, 가겠다’란 응답을 했으리라.
우리 모임은 서울의 같은 지역, 같은 이름의 Y고교와 Y여고를 나온 사람 중에서 남자는 S대, 여자는 E여대 출신으로 구성된 모임이다. 그래서 이름도 ‘Y써클’이었다. 듣기에 따라 자발적이며 노골적인 짝짓기 모임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아닌 게 아니라 몇 쌍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고 지금까지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 그건 지금 시각이고 시국 논쟁과 독서 토론 등 설익으면 설익은 대로 우리는 나름 진지했고 또한 그 나이 그대로 풋풋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 따라, 인연 따라 만남은 지지부진해졌고, 그날 연말 모임에 나온 멤버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기수라 할 수 있겠다.
오랜만의 해후라 서먹하기는 다들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이혼을 한 데다 외국 생활의 이물감까지 겹쳐 어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와 호기심에 마음이 들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어둑한 실내에 적응이 되어 잠시 후 입구로 들어서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키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몸피, 머리도 벗어지지 않았고, 배도 나오지 않은 그, 젊었을 때 그대로 웃는 인상의 그는 30년이 아닌, 3년도 아닌, 3개월 만에, 아니 고작 3일 만에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한두 번밖에 입지 않고 옷장에 걸어둔 옷처럼 시간의 고운 먼지만 앉은 사람 같아 보였다. 순한 성품대로, 좋은 머리대로, 얽힘 없는 폭신한 실뭉치처럼 인생이 순탄하게 풀려나가면 저런 모습일까.
그럼 나는? 대학 졸업 후 미팅으로 만난 남편과 1년을 사귀는 동안 고양이 발톱처럼 얌전히 감추고 있던 폭력성이 결혼 일주일 만에 정체를 드러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사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아이가 들어섰고, 결혼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이민길에 올랐다. 홍수에 떠밀리듯 주변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는 와중에 남편의 폭력은 일상이 되어갔다. 그렇게 내가 롤러코스터에 올라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그는 유유자적 회전목마를 타고 있었던가 싶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모임의 남녀 선후배들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썸 정도를 탄 것인데, 둘이 뜨거운 사이였고 그와 헤어진 후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해괴한 소문까지 났었다. 그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렸을 때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사실이 아닐 땐 따따부따 따지기보다 그저 웃어넘기는 버릇 그대로.
물론 그런 입방아에 오를 만한 ‘혐의’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 나는 20대 특유의 실존적 번민에 휩싸여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지 등 근원적 물음의 답을 찾아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간이역처럼 나타났고, 지독한 정체성 상실의 시절을 통과하며 그와의 만남이 그렇게 와전되었던 것이다.
돌아가며 간단히 각자의 근황을 말한 뒤엔 얕은 물웅덩이처럼 이리 움푹, 저리 움푹 대화의 웅덩이를 만들며 20여 명이 앉은 자리의 연을 따라 시간을 보냈고, 분위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자정 무렵까지 이어졌다. 귀갓길에 나섰을 땐 얼음 박힌 것 같진 않았지만 12월 중순의 찬 공기가 오싹 끼쳐오며 와인 한잔의 취기마저 몰아냈다. 집 방향에 따라 그 자리에서, 혹은 길을 건너서, 아예 한두 블록 멀찍이 떨어져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택시를 잡아 타고 꼬리등을 인사처럼 깜박이며 제각기 사라져갔다.
공교롭게도 그와 나의 방향은 같았기에 그가 함께 택시를 타자고 했고, 어쩌다 보니 그와 나, 둘만 끝까지 택시를 잡지 못한 채 덩그러니 길 한가운데 남게 되었다. 묘한 느낌이 든 것은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가는 시추에이션이라니!
마침내 빈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섰고, 그가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내가 나중에 탔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남짓 남겨두고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남녀가 30년 만에 해후를 한 후, 조붓한 공간에서 그것도 몸이 닿을락 말락 서로가 서로를 옆에 두고 앉아 있다. 지나친 상투성만 뺀다면 로맨틱한 설정이 아닌가. 더구나 택시 운전사는 오늘 만남의 의미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우리 시대의 발라드로 분위기를 잡아주고 있으니.
그런데 정작 그와 나는 어쩌다 우연히 합석한 사람들처럼, “그간 잘 지냈니?” “네… 잘 지내셨어요?” “응, 나야 뭐. 고생 많았겠구나. 잘 살아야 한다. 내가 도울 일이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럼 잘 가라.” 우리 동네 큰길가에 나를 내려놓기 전 20여 분간 이런 의례적인 말만 나누었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그게 다가 아니면? 가정을 가진 그와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와 나는 두 번 더 만났다. 역시 같은 모임을 통해서였다. 이후 모임의 발동이 꺼져 버렸고 더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8년 전 그날의 모임이 떠오른다. 롤러코스터에 오르지 않고 그와 회전목마를 탔더라면 스릴과 재미는 없었겠지만 이따금 마주 웃으며 생의 무난한 동반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내 사람이 될 이유가 딱히 없었듯이 되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 그 따분하고 ‘안전빵’인 회전목마에 기꺼이 올랐을까. 그때의 나는 회전목마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지 않았나. 평생을 함께 돌고 있을 그의 ‘회전목마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영화표를 받아든 김 씨는 빠른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표를 사려는 오십대 여자 셋이 보였다. 카드를 꺼내고 지갑을 뒤적이며 네가 사네, 내가 내네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웬 젊은이들이’ 김 씨는 여자들을 보자 이 공간의 냄새가 달라지고 자신의 연령대가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고 혹여 영감들 가슴에 바람이 들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요건 몰랐지 하는 기분으로 중년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당 삼천 원이고, 쿠폰에 도장을 다 받으면 나중에 공짜로 한 편 더 볼 수 있다우.”
김 씨는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쿠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호호, 이제 뭐…… 오 년 전이면 모를까.”
김 씨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모르며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르신’이란 호칭 대신에 ‘할머니’라고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왜 호칭에 민감한지. ‘할머니, 할아버지’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인데 사람의 심리가 요상하여 ‘나이가 들어’ 라는 앞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는 ‘늙은 사람’이란 뒤의 말에 민감해진다. 앞에 붙여진 ‘나이가 들어’라는 다섯 글자에는 사람들 제각각의 얼마나 많은 의미와 사연이 담겨 있던가? 김 씨는 아등바등하지 않고 탐욕스럽거나 심술궂지 않게 나이 들기를 원하면서도 할머니란 호칭이 꺼려지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뜨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요의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간 김에 거울 한 번 들여다보고 하나뿐인 꽃분홍 립스틱으로 입술도 덧칠하고 나왔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좀 전에 만난 여자들이 상영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공책만 한 인쇄물은 멀리서 보기엔 힘들었다.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된 영화관이다 보니 상영작 포스터도 없고 상영관은 하나뿐이고 테이블이 세 개 놓인 대기실 한쪽엔 천 원짜리 믹스 커피를 파는 간이매점이 고작이었다. 그 중 한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용지에 코가 닿도록 얼굴을 내밀었고 김 씨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노안 수술을 한 김 씨 눈엔 웬만한 글씨는 잘 보이고 고가의 보청기 덕분에 청력도 좋지만, 좋아서 오히려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것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고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는 것이라지만,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는 이유로 젊은이들로부터 괄시받고 싶진 않았다. 오메가 쓰리와 은행잎 제제를 매일 챙겨 먹고 영어 공부도 30분씩 했다. 휴대폰을 켜면 바로 영어 단어 앱이 떴고, 건강 보조 식품 챙겨 먹는 시간도 휴대폰의 알람이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한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땐 신인류의 일원이 된 것처럼 기뻤다. 설레는 김 씨를 위해 처음에는 휴대폰 사용법을 부드러운 말씨로 설명해 주던 아들이 반복적으로 물었더니 나중엔 짜증을 냈다. 아들의 구박을 감수한 덕분에 이젠 인터넷을 통한 물건 구입과 영화 예매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 한때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동영상이며 좋은 글귀를 친구들한테 퍼 나르기도 했으나 글대로 실천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강요하듯 보내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그만두었다. 망측한 사진을 받고 놀라서 휴대폰을 던져버린 적은 있지만, 적어도 김 씨가 자식한테 잘못 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노인들 사이에 떠다니는 가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고 흥분하기도 했다. 태극기 부대에 참석한 경험도 있는데 정치적 신념이 확실해서라기보다는 군중 심리와 함께 이 나이에도 정치에 관심이 있는 깨인 노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상영할 건 이거예요.”
김 씨가 손가락으로 용지를 짚으며 말하기가 무섭게 일행 중 한 명이 톡 튀어들었다.
“아닌데…… 요거네요.”
김 씨 얼굴이 붉어졌다.
“나 좀 봐, 참.”
계면쩍은 김 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람들이 들고나느라 문 주변이 번잡했다. 상영관 입구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김 씨는 오지랖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간 김 씨는 실내 전체를 훑어보다가 특정 위치에 잠시 시선을 던지곤 미소를 지었다. 등받이를 손으로 잡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G7 자리를 향해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뉴스에서 G7이란 단어를 가끔 들어서 익숙한 탓도 있고 근사해 보이기도 해서 그 자리를 고집하는 김 씨를 위해 카운터에서는 표를 따로 빼서 보관해두곤 했다.
전에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른 영감이 있었다. 김 씨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들도 내가 넘어지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민망해하겠지.’
G7 바로 앞자리엔 박 씨가 앉아 있었다. 김 씨는 박 씨를 실버 영화 카페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소위 M.C커플이다. 산행을 같이 다니는 연인들도 M.C커플이라고 부르고 콜라텍에서 만난 인연들은 C.C커플로, 복지관에서 만난 연인들은 B.C커플로 불린다. 박 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영화 얘기만 나오면 술술 말을 잘 이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웬만한 영화 제목과 주인공 이름들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김 씨는 영화 얘기를 들을수록 박 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젊어서부터 영화는 혼자 본다는 말 때문에 그가 더욱 근사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김 씨는 알은 체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부러 큰 소리로 음, 음 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박 씨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김 씨는 답례를 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박 씨가 야속했다. ‘어서 오시게, 라고 한마디 하면 입술이 부르트나.’ 김 씨는 입을 샐쭉거렸다.
아직 영화 상영 전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김 씨가 고개를 돌렸다. 통로 건너편에서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 있는 여자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노인은 굳이 빈자리도 많은데 여기에 앉아야겠냐며 버텼다. ‘저러니까 젊은이들이 질색하지.’ 김 씨는 중얼댔고 주변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뒷자리로 갔고, 카운터에 말해서 쫓아내세요, 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소란을 잠재우듯 실내가 어두워지자마자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제목과 함께 1936년 작품이란 숫자가 떴다.
“어머, 이상하다. 2008년에 만든 줄 알았는데.”
“게다가 흑백이야. 웬 구닥다리?”
“86년 전 영화네. 우리 아버지가 저 때 태어나셨거든.”
“말도 안 돼. 같은 제목의 영화가 또 있었나? 그냥 갈까? 냄새도 퀴퀴하고……”
김 씨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자 여자들의 수다가 잦아들었다. 좀 전에 보았던 일행들이 막 들어와 앉은 참이다. 오래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했을 김 씨였다. ‘니들도 실수할 때가 있지.’ 김 씨는 미소를 지었다.
화면이 바뀌었고, 여자들은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래. 그냥 보자.”
“그래, 감독도 유명한 사람이네.”
“쉬, 쉬.”
영화의 첫 장면은 미국의 어느 대저택의 거실이었다. 보석으로 치장한 젊어 보이는 여자가 등장했다. 김 씨 눈에는 여주인공의 나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얼굴 구분도 힘들지만, 나이 추측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나이는 김 씨가 추측한 숫자에 10 정도를 더해야 했다. 여주인공은 파티장도 아닌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김 씨 평생에 입어본 적은 고사하고 사진에서만 보았던 옷이다. 부러우면서도 이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뒤이어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이어졌다. 남자는 거실로 들어와서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종일 남편을 기다리느라 수고했다고.
김 씨는 정해진 팔자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씨 남편은 며칠씩 집을 비우다 돌아와도 첫마디가 개밥 줬어? 였다. 김 씨는 아내가 아니라 밥솥이었고 세탁기였고 청소기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 김 씨는 긴장이 되었다. 자막이 서 너 줄일 땐 마지막 문장의 꼬리를 놓치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읽는 중에 화면이 넘어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왜 그리 이름이 길고 호칭 방법도 가지가지인지.
여주인공은 남자의 뺨에 입술을 비벼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김 씨의 눈에 남자는 아버지뻘로 보였지만 여자의 행동이나 자막으로 미루어보아서는 남편 같았다.
‘아니, 저런 도둑놈이 있나, 곱빼기 띠동갑도 넘겠네.’ 예나 지금이나 지팡이 토막을 가운데 달고 다니는 인간들이 젊은이를 밝히는 건 변함없지만, 김 씨가 보기에도 못생기고 잘생긴 걸 떠나서 싱싱하다는 점만으로도 모두 예뻐 보였다. 심지어 다섯 살 아래인 여자도 김 씨 눈엔 젊어 보였다. 흥분했던 김 씨는 이내 인정 모드로 태도를 바꾸었다.
변덕을 부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면서 김 씨는 혀를 찼다. ‘젊고 얼굴 반반하면 저렇다니까.’ 김 씨는 며느리를 떠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인데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 해도 콕 박힌 미운털이 빠지지 않는 애였다. 좀 산다는 집에서 자란 며느리는 액세서리 수집이 취미였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시댁에 올 때마다 몸에 치장하고 있는 액세서리가 바뀌었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볼 정도로 색상이며 디자인이 확확 달라졌다. 며느리를 떠보느라 나도 네가 한 것 좀 차 보자, 고 했더니 어머, 사람들이 웃어요, 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며느리가 미워 보이는 이유가 말을 얄밉게 하는 탓도 있지만 자신의 삐딱한 시선도 섞여 있다는 걸 김 씨는 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자기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사는 행위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주인공과 비교해 보니 며느리가 그다지 변덕 부리는 애도 아니고, 딱히 지 남편이건 시댁에 못 하는 편도 아니었다. 김 씨는 며느리의 미운털이 다름 아닌 질투라는 생각에 새삼 부끄러웠다. 그것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며느리는 여자의 촉으로 벌써 눈치 챘을 게다. ‘앞으로 며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크린의 영상이 유럽을 항해하는 크루즈 내부로 바뀌었다. 은퇴한 남편이 아내와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한국 여자들은 보리죽 한 숟갈도 자식 입에 넣어주느라 배곯고 쪼그라져 있을 때 서양 여자들은 양장을 빼입고 삐딱 구두 신고 파티에 가거나 세계 일주를 했다니.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날에도 김 씨는 고작 빌려 입은 단색의 한복에 면사포만 쓰고 혼례를 치렀다. 김 씨는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서양 여자들에 비해 고루하게 살았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면서 장기 여행을 하는 사이에 여주인공은 서 너 명의 남자들과 사랑 행각에 빠졌다. 여자는 쉽게 남자를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길 반복했다. ‘지 멋대로군, 착한 남편이 딱하네, 결혼 전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지.’ 흥분지수가 높아진 김 씨는 자세를 바꾸다가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하긴, 선봐서 한 달 만에 식을 올린 나는 어떻고.’ 그러고 보니 그런 도박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어이없는 일들이 다반사였는데 죄다 그러려니로 통했다. 어쩜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몇 십 년 후엔 또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김 씨가 젊어서 여주인공처럼 했다면 돌팔매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김 씨가 영화에 집중할 만하면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뒷좌석의 한 여자가 또 말을 꺼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가자.”
“나갈까?”
“그래, 질 떨어진다.”
“아냐, 노벨상 받은 작품이라잖아, 뭔가 있을 거야.”
한 여자가 일행을 달랬다. 김 씨 뒤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카톡 소리, 사부작사부작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 따위가 영화 중반이 넘어가도록 줄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벨 소리도 울렸다. 늴리리아 늴리리…… 맨 앞줄에 있던,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쥔 휴대폰을 끊거나 벨소리를 줄일 생각은 안 하고 느그적 느그적 걸어 나갔다. 남자를 따라서 사람들 고개도 돌아갔다. “걷지 말고 좀 뛰요.” 영화 시작 전에 큰 소리로 면박을 주었던 동일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속이 후련해진 김 씨는 중얼거렸다. ‘어여 가야 해, 어여.’
김 씨는 다시 영화에 몰두하면서 좀 전과는 다른 생각도 했다. ‘하기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뭘 따져, 몸뚱이 아꼈다 뭐 하게, 못 노는 것들이 바보지.’ 여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어느새 주인공 편이 되어있었다. 뭐랄까, 김 씨는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양가적 감정이 늘어났다. 어떤 상황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 애매할 때가 있다. 편 가르는 행위가 불편해지면서 교집합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기억력은 물론 얼굴도, 몸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서운한 감정과 소외감도 자주 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긋해졌다고 할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하겠지만, 신체 중에서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부위가 신성한 부분이자 최고의 성감대인 인간 자체가 모순덩어리 아닌가.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외도한 상대는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상대를 이혼녀이고 연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둘을 강제로 갈라놓는 장면이었다. ‘딱, 나구먼.’ 김 씨는 아들이 자신보다 연상인 여자를 데려왔던 적을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것도 없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져도 연애 상대는 어릴수록 좋다는 영감들이 김 씨 눈에는 철없어 보였다. 박 씨 속을 떠보기 위해 왜 두 살 연상인 자신을 만나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거기서 거기라고, 나이만 적다고 젊은 거고, 나이가 많다고 늙은 거냐고 반문하던 박 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이들이 상대를 고를 때 이혼, 사별, 동거, 비혼 따위를 따지는 일이 별 의미가 없어보였고, 잘 생긴 사람보다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이는 박 씨가 끌린 이유이기도 한데 김 씨 눈엔 박 씨의 딱딱한 말투마저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역사물을 주로 보던 김 씨에게 로맨스 영화는 피로를 씻어주는 꿀물 같았다. 일부러 로맨스물을 외면해오던 김 씨의 마음을 열게 한 계기는 박 씨다.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 내용을 들려줄 때 소도둑처럼 생긴 박 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아는 듯 보였다.
김 씨는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새로 만난 애인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탄 보트가 애인이 사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다가올 장면을 앞질러 상상하면서 잘했다, 잘했어, 란 말을 연발했다. 한 사람과 애정도 없이 의무적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남편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명령하고 김 씨는 복종하고 따르는 식이었다. 김 씨는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재떨이를 남편의 턱밑에 갖다 대고, 남편이 밥을 먹는 내내 생선 가시만 발라야 했다. 남편은 다리에 깁스를 한 김 씨에게 2충에 올라가서 부채를 가져오라고 호통 친 적도 있었다.
혼자면 외롭기나 하지, 둘이면 외로우면서도 괴롭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채워가고 싶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서 안겼다. 남편과 사는 동안 포옹은 언감생심이었다. 지 기분 내키면 아무 때나 김 씨를 자빠뜨렸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손끝조차 스치지 않고도 20년을 더 살아냈다. 김 씨는 남편이 매일 만지는 문고리나 수저만도 못했다.
김 씨는 남자의 품이 얼마나 따뜻할지에 대해 상상했다. 어릴 적 포근한 엄마의 품이나 듬직한 아들의 품과는 다른 느낌일 게다. 박 씨의 품에 안겨 지난날을 위로받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기 위해 이성을 만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같이 사그라들기 위해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반찬이 김치 하나일망정 마주 앉아 식사하고, 약 먹을 때 물이라도 떠다 주고, 피곤한 발을 얹고 잠들 수 있는 사이를 원했다. 노년의 로맨스를 망측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죽어야만 성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박 씨가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상상을 했다. 저…… 순자 씨, 김 씨는 맘 가는 대로 달려가는 자신의 생각이 주책이라고 느꼈다. 거의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는 박 씨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가 고개를 홱 돌릴 것만 같았다. 머리숱이 인제의 자작나무숲처럼 듬성하지만 박 씨의 뒤태는 늘 정갈했다. ‘저 영감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나.’ 김 씨는 그뿐 아니라 영화관 내의 모든 노인들 감상평이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뒷좌석의 여자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내용이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김 씨는 영화를 보면서 주변 사람을 떠올리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연애 감정의 불씨를 키우는 계기도 되었건만 중년 여자들은 빤하다고 했다. 김 씨의 귀에는 이 영화를 끝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들 수준이 빤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게,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얼른 가자.”
“예의 지키다가는 어느 세월에 나갈지 몰라.”
중년 여성 셋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김 씨가 영화의 여운을 즐길 겨를도 없이 불이 켜졌고 사람들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면은 일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거의 가려졌다. ‘모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와서 서둘러 가는 게지.’ 김 씨는 중얼거리며 박 씨가 일어날 때까지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다. 박 씨가 일어나더니 김 씨를 보며 말했다.
“안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러죠.”
김 씨는 순순히 박 씨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나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둘은 데면데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김 씨는 박 씨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요?”
박 씨가 타박하듯 답했다.
“뭘, 어색하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정류장이 있었지만 김 씨는 길이 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멀게 느껴졌다. 박 씨를 만날 때만 신는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김 씨가 가지고 있는 두 켤레의 구두 중 동절기용이었다. 평소엔 운동화를 주로 신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박 씨는 김 씨를 재촉하지 않고 보조를 맞춰 걸었다. 김 씨가 영화 본 소감을 물었더니 박 씨는 그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겠다고,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답했다. 주인공에 관한 얘기 끝에 ‘나이 듦’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김 씨가 박 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두려워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않겠소. 늙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추하게 늙는 걸 경계해야지.”
김 씨는 늘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박 씨가 야속하면서도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럼 아름답게 늙는 게 뭔데요?”
“내가 정답도 아니고 뭘 묻소?”
“그래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뭐 별거 있소? 그냥 다 덜어내는 거지. 감정도 덜어내고 그런 거 아니겠소?”
“덜어낸다는 말은 줄인다는 말과 어감이 다르네요. 뭔가 내가 덜 쓴 만큼 남이 쓸 기회를 주는 느낌이 드네요. 여하튼 자신이 가진 것이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자는 거지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는 얘기죠, 태봉씨?”
김 씨가 슬쩍 박 씨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도 덜어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 있지.”
김 씨가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거요?”
박 씨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내와 아들이 죽기 전에 사랑한단 표현을 많이 해주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걸까.’ 겉으로는 담담해보이지만, 평온한 얼굴 아래 숨겨져 있을 부단한 노고에 대해 김 씨는 생각했다. 젊어서 한 성질 했다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버스는 금방 왔다. 박 씨가 손을 내밀어 김 씨 먼저 타라는 신호를 했다. 차에 오르는 김 씨는 뒤따라오는 박 씨에게 힘들어하는 동작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부지런히 발을 놀려서 계단을 다 올라왔으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에구, 소리로 허사가 되어버렸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나 질투의 감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여전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내부의 앞쪽 노약자 좌석은 젊은이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지만 김 씨는 못 들은 척하고 뒤로 갔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고 속력이 나면서 덜컹대기 시작했다. 운전까지 과격한 탓에 엉덩이가 공중으로 떴다가 내려앉았다. 김 씨는 워메, 하면서 박 씨의 손을 잡았다. 꼬리뼈에 충격이 느껴졌다. 박 씨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거 운전 좀 살살 하소.”
덕분에 둘은 착 달라붙게 되었고 김 씨가 손을 놓으려 하자 박 씨가 더 세게 쥐었다. 박 씨의 손이 야들야들하고 따뜻했다. 빼려던 손을 박 씨의 손에 맡긴 채 김 씨는 얼굴을 창으로 돌렸다.
박 씨가 물었다.
“뭐 볼 거 있소?”
“나뭇잎들이 제법 물들었네요.”
김 씨는 생각했다. 나뭇잎 색이 변하는 걸 앞으로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를.
“같이 좀 봅시다.”
박 씨가 고개를 돌리면서 김 씨의 머리카락에 뺨이 닿도록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김 씨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박 씨의 행동에 의도가 있기를 바랐다.
네댓 정류장을 지나서 내릴 때가 된 두 사람은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박 씨가 왼쪽 기계에, 김 씨는 오른쪽 기계에 카드를 태그 한 후 출입구를 막은 채 서 있었다. 여학생이 박 씨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 사이로 손목을 내밀어 태그를 시도했다. 연이어서 실패한 학생을 보고 김 씨는 카드를 가운데로 대요, 라고 말했지만 학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또 손목을 갖다 댔다. 기계음이 들렸고 그제야 김 씨는 학생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물건이 요즘 광고에 나오는 뭐시기란 걸 알았다. ‘또 오지랖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김 씨는 자신이 하루살이만도 못한 3초의 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영화관으로 오던 버스 안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 씨의 앞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시선이 갔다. 큼직한 흰색 라벨이 옷의 바깥쪽에 붙어있었다. 김 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옷을 뒤집어 입었네요, 라고 속삭이듯 말했고 청년은 아, 이거요, 요즘 유행이에요, 라며 목 뒤의 라벨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 앞을 지나쳐서 쏜살같이 내리는 여학생의 귀에 무선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두 사람도 손잡이를 잡고 발 앞을 살피면서 내렸다. 여학생이 내리는 속도의 다섯 배는 족히 걸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왠지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니들도 답답하지. 당사자는 오죽하겠냐.’ 김 씨는 버스 기사가 야속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한 줄기의 센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몇 점 떨어졌다. 김 씨가 옷깃을 여미자 박 씨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목에 걸어주려고 박 씨가 손을 뻗자 김 씨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맛에 데이트하는 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김 씨는 머플러를 목에 늘어뜨린 채 눈을 내리떴다.
“갑시다, 순자씨.”
박 씨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김 씨는 뒤따라가며 웃음이 나왔고, 목덜미가 자꾸 간지러웠다. 박 씨가 몇 미터도 안 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코너의 편의점을 끼고 꺾어 들어서자마자 생선구이집이 보였다. 김 씨는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박 씨에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구부터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홀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김 씨는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행복감에 폭 빠졌다. 빈자리는 입구 근처밖에 없었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안쪽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물도 따라주었다. 수저도 놓아주려고 하자 김 씨가 손을 저으며 막았다.
“아, 제가 하지요.”
“선심을 쓰면 좀 받으세요.”
박 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황송해서 그렇죠.”
대접받는 게 어색한 김 씨가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자는 주고 싶고 여자는 받고 싶은 게 연애의 재미 아닙니까?”
“그래도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래요.”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메뉴라고 해봐야 갈치구이와 갈치조림 두 가지였다. 정갈한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김 씨는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다 박 씨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봉씨, 여긴 자주 오셨던 곳인가요?”
“오긴 누가 와요.”
박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받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박 씨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막상 잘 안 되네요.”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기름이 차르르 흐르는 갈치구이가 나왔다. 박 씨는 왼손으로 갈치 토막을 잡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으로 잔가시가 있는 양쪽 끝을 바깥으로 당겼다. 가운데 뼈 위에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살을 들어 올렸다. 살덩어리가 부서지지 않고 네모로 분리되었다. 김 씨는 능숙한 손놀림을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박 씨가 발라 준 생선살을 수없이 먹었을 과거의 여인에 대해 생각했다.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손만 쳐다보고 있자 박 씨가 한마디 했다.
“가시 바르는 거 처음 봅니까? 밥 좀 떠보세요, 순자 씨.”
김 씨는 얼떨결에 수저로 밥을 떴다. 박 씨가 뽀얀 쌀밥 위에 생선살을 얹었다. 김 씨가 당황하여 수저를 빼려다가 주춤했다.
“또 그러시네.”
“남의 밥에 반찬을 얹어주기만 하고 받아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럽니다.”
말하는 도중에 삼십여 년 전 한정식 식당에서 며느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불쑥 떠오를 게 뭐람, 시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음식에 젓가락을 댈 엄두도 못 내는 며느리를 위해 아들이 갈비 한 점을 옮겨 주던 모습이 박 씨의 행동을 보자 떠올랐다. 그때의 섭섭함이 지금에서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박 씨가 김 씨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감동 먹은 거요?”
“네. 제대로 먹었지요.”
“밥도 많이 먹어요, 순자 씨.”
김 씨는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박 씨의 자상함과 배려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또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으로부터 흔들림이 적어 보였다. 팔십 가까이 살아온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남편은 김 씨를 백 번도 더 울렸다.
김 씨는 밥을 먹는 중간에 국이나 물을 자주 마셨고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당황했다. 그리 맵지도 않은 도라지 초무침을 먹으면서 기침도 더러 했다. 박 씨가 김 씨에게 티슈를 내밀기도 하고 직원에게 따뜻한 물도 달라고 했다. 김 씨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따뜻한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태껏 먹어본 밥 중에 제일 달았다. 박 씨는 김 씨를 보며 흐뭇해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네 번째인 김 씨의 눈에 박 씨의 모든 점이 좋아 보였다. 김 씨는 나중에 콩깍지가 벗어지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이 들어서 이성을 만날 때는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어도 한 가지 맘에 드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박 씨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왔다. 김 씨는 박 씨가 자신의 어깨에 오도카니 앉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웃음이 났다. 옷도 벗지 않고 며느리에게 전화부터 했다.
“너 좋아하는 약식하고 식혜 해 놓을 테니 내일 와서 가져가거라.”
“꺄악.”
김 씨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괴성 때문에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김 씨는 자신이 얼마나 박한 시어머니인가를 생각하다가 바빠서 글피에 갈게요, 라고 이어진 며느리의 말 때문에 좋다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전화를 끊고 개운치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어머니 행세, 연장자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박 씨에게 되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 며느리도 나름의 스케줄이 있는 건데.
박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엔 상념에 잠기게 된다. 김 씨는 아무리 잘 살았어도 마무리가 부실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느낌이 들고 잘 못살아왔어도 끝이 좋으면 지나온 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리라. 인생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간절함의 가운데 박 씨가 있었다. 왜냐하면 김 씨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박 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긴 있었다. 내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간호사들이 불러 주는 이름은 달갑지 않았다.
* 영화 제목은 ‘공작부인’이며, 원제는 남자 주인공 이름인 ‘Dorthworth’다.
•수상소감 - 우수상 단편소설 박상희
“저의 허당끼가 소설을 쓰는 모티프가 되기도”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가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절에 대한 호기심과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자세를 고민하면서 써 놓았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이번 공모전의 주제와 어울리는 한 편을 골라서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저의 허당끼로 인해 소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꼼꼼하지 못해서 영화감독이나 제작년도를 확인하지 않고 영화관에 간 실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공작부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만 1936년에 제작된, 같은 타이틀의 다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수상까지 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의 허당끼는 소설을 쓰는데 모티프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저명한 작가들은 글 쓰는 작업을 습관처럼 매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따라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던 터에 선배가 제안을 해왔습니다. 하루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읽든가, 필사를 하든가, 소설 한 장 분량을 쓰든가, 써 놓은 소설을 수정하든가, 매일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내기로. 지키지 못할 경우는 밥을 사기로 했습니다. 올해 초부터 선배는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을 지켜왔는데 저는 밥 사러 몇 번을 선배 동네로 가야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사의 밑그림이나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쓰는데 만 급급했습니다. 부모님 댁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가면서도 노트북을 들고 갔습니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설의 중간 토막부터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구성을 해놓고 소설을 써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소설의 줄거리, 캐릭터, 작가의도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소설은 시작도 못 한 상태에서 두세 달이 그냥 가버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첫 문장을 쓰다가, 중간 중간에 몇 줄씩 쓰기도 하고 결론의 한 문장부터 쓰기도 하는 등 규칙 없이 쓰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은 듯해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설을 놓아버릴까 말까 고민을 반복할 때도 선배는 꾸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는 하루라도 소설과 관계된 읽기나 쓰기나 수정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배와의 다짐이 이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합니다. 목표를 거창하게 잡으면 얼마 가기도 전에 지쳐버리지만,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하니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가기는 합니다. 다이어트 할 때 일주일에 1킬로그램 또는 한 달에 4킬로그램 감량을 목표로 하지 않고, 매일 200그램씩 빼겠다는 덜 부담스러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같은 저만의 방식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글이 안 써지면 딴 짓을 합니다. 제 취향이 아닌 영화도 보고, 딸을 앞세워 젊은이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과 조카들까지 모아 놓고 마음 알아채기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막힌 골목이나 민예품이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펜션 주인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기절할 각오하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도 해봤습니다.
TV를 보거나 버스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폰에 단어 나열식으로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기록 당시에는 이해되었던 내용들을 한참 후에 찾아보면 어떤 의도로 저장해 두었는지 암호 해독 수준이 되기도 하고, 메모해 둔 제 글씨체를 읽을 수 없는 어이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는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태껏 보편타당하다고 여겼던 점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글이 쓸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으로 인해 격려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카는 어릴 때 성당에서 같이 봉사하던 남자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자신의 친구 소개팅을 부탁했다. 조카는 마침 미혼인 친구가 있어 소개하기로 했다. 둘 다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긴 나이들이라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4명이 함께 만나 서로 소개를 해주고 좀 거들다가 둘은 빠져나왔다.
둘은 몇 번 만나더니 뭔가 삐꺽거리는 것 같았다. 조카는 중매를 잘해야 밥을 얻어먹는다고 상대의 장점을 설명하며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고민에 빠졌다. 소개받은 남자도 고민에 빠졌다.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조카는 친구의 남편이 될 수도 있는 남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남의 부인을 탐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를 통해 조카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안도하며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조카는 응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남자가 안동 양반가의 장손이라는 사실과 그 집에서는 손자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카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둘은 사랑하지만, 양가 어른들을 설득해야 하는 숙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안동으로 처음 인사 가던 날 조카는 여린 참새처럼 떨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려움이 더 컸으리라. 안동에 도착하자 그의 부모님은 따스하고 정중하게 조카를 환영해주었다. 며칠 전 시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뒤에 남자아이가 함께 오더라는 말을 했다. 조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랬다. 그때까지도 시부모님께는 알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카에겐 전 남편과의 사이에 중학생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효자였고 집안에서는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그 무게로 부모를 설득하고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그의 부모님이 아직도 서당을 운영하는 깨어난 선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갈등으로 연결될 일들을 얼마나 멋지게 서로 존중하며 풀어가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예비 조카사위와 처음 만나는 날,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어떤 조건이라도 살아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이 아니던가. 더구나 결혼에 대한 상처를 이미 겪은 조카는 더 조심스러웠다. 총각과 애 딸린 이혼녀. 조카와 아들은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엔 상견례 날 중학생 아들은 그 자리에 있을 예정이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딸 상견례에 참석했다. 사돈 될 분과 나란히 앉아 아이를 소개했다. 모두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르신께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바깥사돈 될 분은 머리를 숙이더니 장래의 손자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어려운 결정은 네가 했구나. 잘 왔다.”
안사돈도 촉촉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비로소 조카는 찬란한 빛 속에 서 있는 천사처럼 보였다. 사랑과 존경이라는.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