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사이 부쩍 가까워진 나라가 있다면 곧장 베트남을 떠올리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팀을 아시아 최고 팀으로 환골탈퇴시킨 박항서 감독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박 감독의 베트남 입성 훨씬 이전부터 ‘브랜드 코리아’를 알리며 실질적인 협력과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힘써온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 정부 파견 봉사단 월드프렌즈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이다. 무역투자 부문 NIPA자문단원으로서 지난 3년간 베트남에서 동분서주했던 정동식 씨를 만났다. 그는 NIPA자문단원 활동을 통해 국위선양의 기회는 물론 나이 들어서도 일하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작년 말 베트남에서의 NIPA자문단원 활동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정동식 씨는 현재 굴삭기 부품을 제조하는 ㈜티엠시에서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NIPA자문단원으로 베트남에 있을 때 이 회사 대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설명을 해줬던 것이 인상에 남았는지 제가 귀국한 것을 알고는 베트남 수출 관련 자문위원 자리를 제안하더군요. 올해 2월부터 비상근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베트남에서 저는 정말 일만 하다가 왔습니다.(웃음) 취미도 일하는 것이라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2014년 11월, 상장사였던 우진플라임의 상임감사 겸 중국 법인 대표로 일하던 정동식 씨는 사임을 표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친구를 통해 NIPA자문단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됐다.
“2015년 7월경 마침 코트라에 다니던 친구가 베트남 다낭에 코이카자문단원으로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너도 무역회사에서 오래 일했으니 지원할 분야가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코이카는 당시 모집이 끝났고 NIPA자문단도 있다면서 알려주더군요.”
그는 젊은 시절 삼성중공업과 동부산업을 거쳐 수출 제조업을 하는 중견기업 임원과 대표직을 30여 년 맡아왔다. 무역에 대한 전문지식과 실무경험, 폴란드와 중국 등지의 주재 경력이 있었기에 외국 파견 업무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정년퇴직하고 나서 다른 회사의 고문으로 가는 건 솔직히 싫었습니다. 기업체에서 현역으로 좀 더 일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것 같고 현역처럼 더 일할 곳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마침 베트남에 NIPA자문단원을 파견하더군요. 국가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베트남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트남에서 NIPA자문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은퇴 후의 인생을 펼쳐보자는 기대감과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일단 100%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에 만전을 기했다. 해외 주재 경험이 있어도 인터뷰는 또 달랐기에 일주일 동안 도서관에서 베트남에 관한 자료를 찾고 영어가 입에 익을 때까지 읽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합격해서 들어간 곳은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에 있는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SMEDEC2)였다.
“3년 동안 제가 했던 것 중에 가장 잘한 일은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를 호치민에 오는 한국 기업과 공공기관들이 1순위로 찾는 몇 안 되는 베트남의 정부기관 중 하나로 만든 것이에요. 한국과 베트남 기업체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이었죠. NIPA자문단원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공직 신분에 준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업체 매칭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다 이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한걸음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현지에서 ‘꿈의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던 500만 달러 투자 건이었는데 코이카 쪽에서 무상원조 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 사업과 함께 대형 서버룸을 호치민에 유치하려고 했어요. 당시 우리 정부는 인프라 구축을 돕는 사업에서 IT로 지원 분야를 옮긴 상태였어요. 서버룸도 IT 분야 중에서도 인프라 구축 차원이다 보니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4개월 만에 접었어요. 말 그대로 꿈의 프로젝트였죠.(웃음) 베트남이 또 농산물을 많이 수출하는 농업 국가잖아요. 1년 차 때 용과 수출을 추진했습니다. 그때는 잘 안됐는데 지금은 한국에 수입되더군요. 베트남산 블랙타이거 쉬림프, 주꾸미 등을 가공 포장해서 한국에 수출했습니다. 추진했던 일도 많고 상황이 안되어서 접었던 일도 많고요, 3년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베트남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NIPA자문단원으로서 역할을 다했습니다.”
덥고, 습했지만 파견 1년 동안은 에어컨이 없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현지 적응을 했다. 그나마 우기에는 낮시간 때 스콜(열대지방에서 오후 한때 내리는 국지성 호우)이 내려 더위를 식혀줬기 때문에 나름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2년 차부터 에어컨 달린 마을버스로 바뀌었어요. 베트남이 성장 길목에 있다는 걸 새삼 느꼈죠. 베트남에 가기 전에 저 자신과 한 약속이 있습니다. ‘눈높이를 낮추자, 무시하지 말자, 일 더 해주자’ 이 세 가지였습니다. 3년 동안 나름대로 약속을 잘 지키고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찾아서 알리고 하나라도 더 사업을 성사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베트남 내 도시란 도시는 다 다녔다. 작년 말 베트남에서 자문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또다시 해외파견 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싶었으나, 자문단 최대 파견기간 3년을 채워 재지원이 불가하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베트남에 있는 동안 많은 곳을 다녔고 현지인들과 만나 교류도 했습니다. 전문지식이 쌓이다 보니 베트남 전문가로 통하게 됐고요. 현재 자문위원으로 있는 회사가 베트남 쪽과 교역을 하고 싶어 해서 지난 3월 MOU 체결에 힘을 보탰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지금은 솔직히 가깝다고 느끼지만 공산주의 국가로 긴 세월을 보냈기에 폐쇄적인 면이 있어요. 중간 역할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끝으로 자문단원으로서 최고의 덕목과 지원하고자 하는 미래 NIPA자문단원에게 조언할 내용이 있는지 질문했다.
“개발도상국은 말 그대로 개발하고 도약해서 잘살려고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NIPA자문단원에게 듣고, 얻고 싶어 하는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따라서 그들이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결과가 좋든 안 좋든 최선을 다해 알아봐주고 함께 노력해줘야 합니다. 자상한 선생님이어야 하고 업무 추진체여야 하고 최대한 마무리가 있는 일처리 능력 또한 전수해줘야죠.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만의 노하우를 정리해보고 난 뒤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에 지원하세요. 한국에서는 은퇴 후의 인생이지만, 개발도상국에서 NIPA자문단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정동식 자문단원
활동 국가 베트남
활동 기관 활동기관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SMEDEC2)
자문 분야 무역투자 부문
자문 내용 한국과 베트남 간 교역 및 공적 원조 자문
파견 기간 2015년 12월 8일~ 2018년 12월 7일(3년)
필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바둑의 기초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좋은 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승부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50대 중반이 넘어서자 승부욕이 현저히 줄어들어 두기보다는 구경하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다 바둑을 두어도 전과 같이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자연히 승률도 많이 나빠졌다.
이럴 때쯤인 1999년에 필자의 고교 총동창회가 기별 대항 바둑대회를 시작하였다. 필자는 5명으로 구성되는 단체전 대표보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예비선수로서 주로 개인전에 거의 매년 출전했는데, 우리 동기들은 다른 기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승을 많이 했다.
2002년 3월에 기우회장을 맡게 된 필자는 김인 국수를 초청하여 지도대국을 가지도록 하고 저녁 후에는 2차까지 같이 가기도 했다. 유명한 애주가이자 필자보다 생일이 몇 달 빠른 김인 국수와는 대학 다닐 때 관철동의 한국기원 부근에서 한두 차례 술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못 만나다가 바둑학과 관련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종종 술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또 2007년 11월의 제 1회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바둑대회 때는 친구들과 더불어 전남 강진까지 가서 대회에 참여하고 같이 술을 들며 축하해 주기도 했다.
2002년 가을쯤인가 정동식 한국기원 사무국장이 남치형 초단과 식사자리를 마련하였다. 남 초단은 16세 때인 1990년에 입단한 후 서울대 영문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여류기사이자 재원이다. 예상대로 남 초단은 바둑학과 교수직에 관심을 보였고, 그를 적임자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한 필자는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남 초단은 명지대학교에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교무위원회에서 정한 교수채용 우선순위는 바둑학과가 최하위여서 교수를 뽑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사위원회의 면담에서 남 초단이 얼마나 답변을 잘 했는지 만장일치로 채용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2003년은 또 앞에서 썼던 것처럼 한국바둑학회가 설립된 해이기도 하다. 학회는 정수현 교수가 총무이사를 맡았고, 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는 또 한명의 프로기사 한철균 6단(당시)이 감사를 맡았다. 회장인 필자와 학회 임원들과는 정기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회의를 전후하여 정 교수나 한 6단에게도 지도를 받을 기회가 자주 있었다.
필자는 또 1년 여 연상이자 매우 서글서글한 윤기현 국수와도 별 허물없는 사이였다. 필자 생각에 윤 국수는 거짓말 같은 것을 할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바둑판 소송에 말려들고 또 패소까지 하여 바둑계에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되었는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창호 국수는 좋아하는 테니스를 치러 명지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여러 번 왔으나 돌부처라는 별명답게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워낙 과묵하여 별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못했다. 이에 비해 필자가 왕 팬인 유창혁 국수는 전에도 좀 알고 지냈지만 최근 자주 만날 일이 생기면서 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필자를 무척이나 즐겁게 하고 있다.
2004년에는 필자가 졸업한 대학교에서도 바둑대회를 시작하였으나 필자는 이 대회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회 개최 얼마 전, 아마추어 고수로서 이 대회 개최에 관여하고 있던 후배 S씨가 바둑학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대회가 열리는 일요일은 마침 등산이나 다른 일정이 없어 개막식 시간에 맞춰 대회 장소에 나갔으나 개막식이 시작될 때까지 S씨는 오지 않았고 필자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필자가 스스로 걸어 나가 바둑학회 회장이라고 VIP석에 앉기도 곤란하였고 그냥 돌아오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기왕 온 김에 바둑이나 몇 판 두고 갈 생각으로 개인전 A조에 출전신청을 하였다. 바둑은 5판중에서 2~3판 이긴 것으로 기억된다.
본래 사람을 잘 사귀는 편인 필자는 그 과정에서 고교까지 후배인 C씨, EBS에 근무하던 H씨 등 몇 사람을 새로 사귀게 되었다. 대회 후에는 자연스럽게 대여섯 명이 술도 한 잔씩 나누며 다음해를 기약하였다. 다음해부터는 이들과의 약속 때문에 죽 대회에 참석해 벌써 10년이 되었다. 모이는 사람도 열 명 가까이로 늘어 이들 중 C씨나 H씨는 평소에도 종종 만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2008년경부터 필자는 바둑 벤처기업을 하는 S사장의 제안으로 한국기원 사무국장을 지낸 유건재 8단, 바둑기고가 이광구 선생 등과 함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인터넷망을 기반으로 우리나라를 세계 바둑의 중심국가로 만들기 위한 세계 바둑표준화사업을 추진해 왔다. 필자는 사정상 이 모임에서 한동안 빠졌으나 그 후 다시 만나 얼마 전까지도 양재동에 있는 가백기원에 모여 원장인 김일환 9단에게 바둑도 배우고 어울려 식사나 약주도 같이 했다.
바둑이 늘려면 바둑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가장 먼저 읽은 바둑책은 조남철 국수의 ‘위기개론(圍碁槪論)’이었다. 지금도 이 책은 참 잘 짜여진 바둑계의 명저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 칭위엔(吳淸源) 9단의 ‘신포석법’ 등과 같은 저서를 읽고 있으면 새로운 진리를 찾아가는 도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우 칭위엔 9단의 스승이기도 한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9단의 ‘모양과 급소’ 등과 같은 저서를 읽으면 바둑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 느끼게 한다.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9단의 저서는 마치 일본무협소설 같고 린 하이펑(林海峯) 9단의 저서는 중국무협소설 같다.
필자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반드시 ‘월간바둑’을 휴대한다.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부피에 비해 가장 오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을 배워서 좋은 점은 지인들과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바둑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의 고교 동기동창들이 동창회를 창립한 것은 졸업한 지 13년째 되는 1975년 3월이다. 당시 L동문이 사장으로 있던 시내 S호텔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동창회는 첫 번째 행사로 바로 다음 달인 1975년 4월에 역시 같은 S호텔에서 제1회 동창회 바둑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때 후배인 프로기사 홍종현 4단(당시)에게 지도를 부탁하였으나 선약을 이유로 김동명 4단(당시)이 대신 왔다. 당시 기력이 4급(현 아마 2단) 정도였던 L사장은 바둑에 한창 심취하여 동문 강자 중의 한 명인 인하대 L교수와 4점을 놓고 자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4점을 놓고도 쩔쩔매는 그 L교수가 김 사범에게 오히려 2점을 놓고도 지는 것을 보자, 프로바둑계를 잘 모르던 L사장은 김 사범을 한국바둑계의 대단한 고수라고 생각했는지 즉시 S호텔의 지도사범으로 위촉하고 호텔의 과장급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급하도록 했다. 과장급이라고는 하나 그 액수가 프로기사들 중 최고였던 조훈현 국수의 수입에 버금갈 정도여서 많은 기사들이 부러워하였다고 하니 당시 프로기사들의 수입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덕택에 필자를 비롯한 동문 바둑애호가들은 틈만 나면 S호텔에 들러 김 사범의 지도를 받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1974년에 시작된 한국기원 기사파동이 계속되던 때라 갈 곳이 마땅치 않던 다른 프로기사들도 S호텔에 자주 들렀다. L사장은 이들에게도 다과를 제공하고 밥을 자주 사는 등 대접을 잘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지도를 받을 수가 있어 필자의 경우 양상국 4단(당시), 장두진 2단(당시) 등에게도 종종 지도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 L사장이 언제부터인가 바둑 두기를 꺼려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기사파동이 끝나고 한국기원으로 복귀한 기사들이 고맙다고 L사장에게 실제 실력보다 몇 단 높은 아마단증을 증정한 것이었다. 그 단증을 벽에 걸어놓고 옛날 치수대로 두자니 단증을 볼 낯이 없고 단증대로 두자니 판이 짜이질 않아 그랬던 것이다.
제2회 대회는 다음해인 1976년 2월, 제3회 대회는 같은 해 9월에 열렸다. 1977년에는 S동문이 초동극장 옆에 초동기원을 개원하여 제4회 대회는 그해 7월 자연스럽게 초동기원에서 열렸다.
그때 그 기원에는 김좌기 3단(당시)이 지도사범으로 있어서 필자는 틈만 나면 기원에 들러 처음에는 4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3점으로 지도를 받았다. 그 덕분인지 한 해를 건너뛰고 1979년 5월에 열린 제5회 대회 때는 필자가 A조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 후 3년을 건너뛴 1982년에 명동에서 C백화점을 운영하던 K동문이 백화점 내에 동창회사무실을 제공하면서 그 기념으로 제6회 대회가 열렸으나 그 후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2년 11월에 기우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매월 둘째 토요일 오후에 모이기로 했는데, 이 전통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모이는 장소는 처음에는 선릉역 부근의 H 바둑살롱이었으나 1993년 10월, Y동문이 신사동(新沙洞) 부근에 회돌이라는 기원을 개원하면서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기원이 2001년 문을 닫자 진양상가에서 화원을 하던 P동문이 2002년 초 화원 인근에 진양기원을 개원하였으나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후에는 지하철 서초역 부근에 있던 한일기원에서 모였다. 당시 한일기원에 지도사범으로 나오던 김수영 7단은 인사를 하면서 필자가 한국바둑학회 회장이라고 밝히자 한국바둑계를 강력히 비판하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국기원을 개혁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열변을 토하곤 하였다.
필자와는 동갑내기인 그가 암으로 너무 일찍 타계한 것은 한국바둑계로서도 상당한 손실이라고 생각된다. 그 후 2008년 11월, 전에 초동기원을 하던 S동문이 다시 양재역 부근에 청석기원을 열어 우리 기우회는 지금까지 이 기원에서 모이고 있다.
필자는 딸 없이 아들만 넷으로, 바둑을 가르칠 기회를 찾다가 1982년경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동시장 부근에 한국기원 영동지원이 개원되어 김좌기 사범이 지원장으로 왔기에 아들들을 데리고 그곳에 다녔다. 그러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큰아들만은 약간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이나마 지속적으로 바둑을 두어 현재 기원 7~8급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 아들(필자의 손자)에게도 꾸준히 바둑을 가르치더니 최근에는 바둑학원까지 보내 중학교에 들어간 올해 중에는 제 애비를 추월하여 아마 유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필자가 바둑학과 설립을 추진 중이던 1996년 추석 때는 한국기원 사무국장 정동식 5단과 TV에서 3점으로 기념 순장바둑을 두어 비겼는데, 해설을 맡았던 권경언 6단이 명절 때 화국(和局)은 길조(吉兆)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바둑학과 교수로 내정된 정수현 8단(당시)과 함께 신라호텔에 가서 필자가 왕 팬인 유창혁 9단의 제1회 삼성화재배 최종 결승국을 관전하였다. 이 바둑은 중반까지 흑을 잡은 유창혁 9단이 필승의 국세였으나 후반에 터무니없는 실착이 나와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에게 1집 반 역전패를 당한 것을 필자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해했다.
그래서 해설을 맡았던 조훈현 국수, 중앙일보 박치문 바둑전문위원, 그리고 필자보다 더한 애기가중 한 명인 S대의 K교수 등과 함께 신라호텔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포커를 하며 화풀이 겸 뒤풀이를 했던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조 국수는 그 후 명지학원 바둑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초빙하여 필자가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고건 전 총리께서 명지대 총장을 맡고 계시던 1996년 5월 어느 날 총장실에서 당시 공과대학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다음 날 12시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가보니 Y사범 등 바둑계 인사 몇 분과 처음 보는 정부 고위관료 몇 분 등이 모여 대학에 바둑학과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나온 분들은 바둑계 인사 외에도 거의 다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이어서 이야기는 대개 긍정적으로 흘러갔지만 특별한 결론 없이 끝났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대학에서 나온 사람은 총장과 필자뿐 아닌가? 그래서 총장께 “앞으로 어떻게 해야죠?”라고 여쭈었더니 “임 학장이 알아서 해”라는 한 말씀뿐이었다.
필자는 바둑을 무척 좋아했고 기력도 아마 5단 정도로서 학교 내에서는 최상위권이었지만 과연 바둑학과를 만드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날 모임 이후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물어 보았으나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전 세계에 보급을 시작하여 명실상부한 종주국으로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이 된 태권도 생각이 났다. 사실 바둑은 중국에서는 이미 두뇌스포츠로 체육부에서 관리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스포츠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언젠가는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도록 해야겠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바둑은 일본을 완전히 제압했고 중국은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해 우리가 최강국이었으므로 앞으로 유능한 바둑지도자를 많이 양성하여 전 세계에 파견함으로써 바둑도 우리나라가 종주국이 될 수 있도록 하려면 바둑학과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기획실장과 협의하여 대학 정원조정 신청 때 바둑학과 신설을 요청하고 여러 가지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그러나 막상 교육부에서 온 공문에는 무슨 과 몇 명이 아니라 정원 증원 야간 40명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이것을 논의하던 교무위원회에서는 바둑학과는 어차피 예체능대학이 있는 용인캠퍼스에 두어야 하는데 야간으로 하면 누가 지원이나 하겠느냐며 물 건너간 분위기였다.
그런데 정원조정 신청에는 경기지도학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라면 야간도 관계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예체능대학장에게 바둑학과가 설립되면 어차피 예체능대학 소속일 수밖에 없으니 야간정원 40명을 전부 예체능대학에서 가져가고 주간정원 20명만 양보해서 바둑학과를 설립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대부분의 교무위원들은 적극 찬동했으나 예체능대학장은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교무위원회에서 예체능대학장이 동의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가 설립될 수 있었다.
그러자 총장께서 학사학위 이상의 프로기사 중에서 교수요원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필자는 바둑학과 설립 추진과정에서 당시 한국기원 사무국장을 맡고 계셨던 정동식 사범을 여러 번 만났다.
정 사범은 학사학위 소지자이고 수학교사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1975년부터 동아일보 관전기를 맡아 20여 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필해 왔으며 수년간을 한국기원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바둑계 전반에 걸쳐 폭 넓은 기반을 가지고 있어 필자는 정 사범이야말로 바둑학과 교수요원으로 적임자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정 사범에게 교수로 올 것을 제안했으나 정 사범은 교수자리가 탐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기원 사무국장도 매우 중요한 자리라면서 발령권자가 자기를 내보내지 않는데 먼저 떠날 수는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기전(棋戰) 성적도 비교적 양호하고 학사학위도 있으며 이론에도 매우 밝아 교수라는 별명을 가진 정수현 8단(당시)을 추천하였다.
한국기원에 교수요원을 추천해 주도록 공문을 보냈으나 막상 회신에는 정 8단은 빠진 채 다른 학사 프로기사인 S 사범과 H 사범을 추천해왔다. 그래서 정 국장에게 문의해 보니 정 8단에게 연락을 했지만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의 이력서를 총장께 보여 드렸으나 영 마음에 안 드셨는지 “임 학장, 더 나은 사람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정수현 8단이 적임자로 생각되나 본인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또다시 필자보고 알아서 해 보라셨다. 그래서 정 8단을 만나, 교수란 하고 싶다고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몇 년씩 고생해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교수가 되지 못해 줄 서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서, 기전만 해도 그렇지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성적을 좀 내고 있는 것은 알지만 아직도 이창호 9단이 굳건히 버티고 있고 이세돌 초단(당시) 같은 소년강자도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 벽을 얼마나 넘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현실적인 문제도 지적했다.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가 생겼고 당신은 프로기사 중에서 교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니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당신은 기전에서 성적을 내기보다는 바둑학과를 잘 키우는 것이 당신을 위해서도 바둑계를 위해서도 더욱 큰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느냐고 집요하게 설득을 했다.
그리고 이 제안을 수락한다 해도 대학도 당신의 자질을 검증하기 위해서 적어도 한두 학기는 겸임교수로 발령을 내고 조율해볼 시간을 가져야 할 터이니 그동안 충분히 겪어보고 생각을 해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 8단은 시간을 좀 달라고 하더니 해 보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이렇게 해서 교수라는 별명을 가졌던 정수현 9단(1997년 승단)이 진짜 교수가 되어 학과장을 맡게 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가 순조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